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2)
축제 준비 기간에 한해서 밤 10시까지 학교에 잔류할 수 있는 새로운 교칙이 발표되었다. 덕분에 저녁 시간이 지났는데도 교실에 환한 형광등이 켜져있었다.
전교생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밤이 되면 전혀 다른 건물처럼 고요했던 학교가 대낮처럼 시끄러웠다. 수신제를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축제를 위해 부단히 노력을 쏟아낸 덕분이다.
덩달아 잔류 시간이 끝났음에도 교실에 몰래 남아있으려는 학생들과 그들을 찾아내서 기숙사로 돌려보내려는 선생님들의 불꽃 튀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잡힌 학생들은 꼼짝없이 기숙사로 돌아가서 벌을 받아야 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 누가 누가 더 선생님을 피해 잘 숨느냐도 일종의 내기 게임처럼 유행했다.
숨바꼭질을 하며 선생님을 피해 도망 다니던 학생들은 문득 새까만 어둠 속에서 묘한 불안감을 느끼곤 했다. 그게 실은 나무의 그림자였다 한들 불빛 하나 없는 복도 끝을 응시하노라면 조그마한 움직임도 귀신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인가 최근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의 7대 괴담이 새롭게 떠돌았다. 그중 하나는 학생들 몇몇이 수리 중인 신관 창고 근처에 미리 숨어있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기절을 한 것이 원인으로, 무려 세 번 들으면 죽는 노래라나 뭐라나.
“별일이 다 있다니까.”
오늘 밤 학교 순찰 당번인 세라가 슬렉터 빛으로 교실을 확인하며 학생들이 잘 있나 살폈다.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깔깔 웃으며 축제 준비를 하다가 세라를 보고 신나게 인사했다. 세라도 그런 학생들을 보며 상냥하게 인사를 받아주며 순찰을 이어나갔다.
학교가 닫히기까지 두 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지만 귀신 소리가 들려온다는 학생들의 신고를 받은 세라는 확인을 위해 신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세상에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시설의 최첨단을 달리는 제립학교에서 귀신이 나올 리가 만무하겠지만 세라는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 학생들을 호들갑 떨게 한 귀신의 정체도 궁금했다.
“학생들도 참 순진해라. 귀신… 후후.”
귀신 하니까 생각났는데 그녀의 첫 수신제 또한 귀신과 연관이 있었다.
그녀가 제립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일 무렵, 왕비의 서거 이후 몇 년 만에 부활한 수신제로 온 학교가 떠들썩했을 때였다.
5.22 토벌전이 일어나고 약 5개월 후의 일이니 마왕이 죽고 마지막까지 키아나트리체에서 활개 치던 마족들이 잠잠해진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점이다. 사람들은 기쁨이 담긴 축제를 열고 싶었던 것 같다.
1학년 때 마족의 침입이 잦았던 탓에 학교는 교련과 기간트리카 훈련 위주로 수업해서 지금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선생님들 입에서 너희 원하는 것을 해보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그녀를 포함한 반 친구들 모두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난다.
세라의 학창 시절은 잿빛밖에 없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자극받아 군인이 되면 남은 마족들을 죄다 없애버릴 거라며 학생들의 마음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속에 화를 품던 그들이 갑자기 들판에 내쫓긴 동물원 호랑이처럼 자유를 찾은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딴 짓거리에 시간을 낭비하다니 명색이 제립학교 선생이란 것들은 도대체가…….”
“너무 그러지 마, 네네. 너무 스스로를 옭매면 나중에 힘들어져. 잠시 신발 끈을 풀고 쉬어야 다음 발을 내디딜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행복하지 않을까?”
네네 슈만과 유일하게 같이 다녀주던 소꿉친구는 상냥하고 여린 친구였다. 기간트리카 컨트롤도 서툴고 남을 공격하지 못해서 대결 때마다 늘 적대 팀원들에게 이용당하곤 했다.
하지만 ‘빙결’ 어빌리티를 가진 네네 슈만과 어빌리티 조합이 잘 맞아서 네네는 애물단지 같은 소꿉친구를 마지못해 데리고 다녔다.
“공포체험? 흥, 우습기는.”
귀신의 집 안에 있는 조악한 전시물을 보며 평가절하했던 네네 슈만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직접 경험한 후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서 소꿉친구의 팔을 붙잡고 남몰래 떨었다.
“우습다더니 겁에 질린 것 같은데, 네네 슈만.”
“시끄러워. 날 모욕하지 마, 세라 밀로니.”
네네가 그렇게 비웃던 학급 행사를 세라가 주도했었다. 상극인 그들이 우연찮게 마주하자 네네가 혀를 차며 싫어했다.
그래도 그때의 세라와 네네의 관계는 같이 다니는 무리는 다르지만 자주 충돌하는 악우에 불과했다. 학급 회의가 열리면 의견 차이로 다퉜어도 당시 네네는 지금처럼 구질구질하게 과거에 집착하며 세라를 매도하지는 않았었다.
“어차피 군인이 될 건데 저딴 것들을 왜 해야 하는 거야? 이럴 시간에 기간트리카 대결을 한 번 더 하겠어.”
“나는 숨통이 틔는 기분인걸. 학교 분위기가 계속 날카로웠잖아. 좋지 뭐.”
“굳이 안일한 분위기를 형성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하여간 약해 빠진 세라 밀로니.”
“네가 항상 삐딱하게 말하니까 친구들이 싫어하는 거 알지?”
“흥, 그따위 유약한 것들은 내 친구가 아니야.”
“너 또 그런 식으로 말한다?”
“으아아. 싸우지 마, 네네, 세라.”
옆에서 둘의 언쟁이 과열된다 싶으면 세라와 네네 사이를 말려주던 그녀가 토라진 네네에게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언젠가 네네를 향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실은 네네, 나는…….”
그리고 뒷말은 늘 삼켰다. 그녀는 그녀의 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 거다.
실은 네네, 나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좀 더 여리고 강렬한 목소리를 내란 말이야.”
“너 모순이라는 말은 아냐? 여린데 강렬하게는 뭐야. 모던하면서 클래식한 기분이냐?”
익숙한 고함 소리에 세라가 정신을 차렸다. 옛날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신관 창고에 도착한 세라는 살짝 열린 철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고 어떤 귀신이 있을까 안쪽을 살폈다.
“아― 아아― 크흠. 아― …어때? 네가 원하는 느낌이 나냐?”
그녀의 반을 대표하는 말썽꾸러기가 생소한 노래의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발랄한 평소 목소리와 다르게 진지한 발성이 독특한 미성이다.
그의 노랫소리를 처음 들어본 세라가 숨죽여 경청했다. 이전에 우리 반 학생들이 그러길 라우라 축제 때 렌 학생이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했었지. 후후, 그 학생들의 기분이 이랬을까.
“음… 성에 안 차는데. 더 단단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
“아까는 공기를 반 넣으라고 했으면서.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거야?”
렌과 밴드부원들이 열심히 다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세라가 피식 웃었다.
신관에서 들려오는 귀신이 부르는 노래라니. 세 번 들으면 죽는다는 노래의 소문이란 세 번 부르고 렌 학생이 죽겠다며 투덜거린 걸까? 이번 괴담의 출처는 밴드부 합주 이야기였구나. 축제가 기대되는걸.
아무리 그녀가 학급 일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지만 렌이 밴드부에 들어갔다는 대사건은 여태까지 귀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수신제의 깜짝 이벤트를 위해서 세라가 조심스레 자리를 비켰다.
이 괴담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며 그녀는 다음 순찰 루트를 향했다.
창고 밖에 누가 왔다 갔는지 모르는 밴드부와 재경은 오늘도 선곡에 관해 대단한 트러블을 겪었다. 이유는 바보 고양이가 카피곡을 할 목적으로 얼이 빠지는 노래를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싸구려 포노그래프로 들어보는 헤비메탈은 기껏 공연하기로 결심했던 재경의 마음이 흔들리기 걸맞은 선곡이었다.
“어떠냥?”
“어떠냥? 미쳤냐? 내가 이딴 노래는 다 싫다고 했지? 저리 치워. 듣기 싫어.”
“왜 나만 그러냥. 차별하지 말아양. 뭐가 문제냥.”
“전부 다. 니가 가져온 노래 다 문제야. 다시 골라서 가져와.”
오늘 선곡은 다를까 하고 들어봤더니 여전히 『디트로이트 메탈 시티』에나 나올 것 같은 얼굴 하얗게 떡칠한 사람이 그로울링으로 꽥꽥거리는 노래를 질리지도 않고 들고 왔다.
축제에서 이딴 걸 부르라고 임시 부원으로 데리고 왔나 재경은 어이가 없었다. 이걸 전교생 앞에서 불렀다가는 학교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흑역사 확정일 것이다.
“취향 고약한 망할 고양아. 네 플레이리스트엔 잔잔한 노래 없어?”
“까탈스럽기냥. 시원하니 좋기만 하냥.”
“뭐가 좋아. 고양이 주제에 저딴 노래 듣고 다니지 말라고! 괴리감 느끼니까.”
“어때서냥. 멋지잖냥.”
시무룩해진 고양이녀가 왜 아무도 이런 멋진 노래를 알아주지 않냐며 꼬리를 내렸다.
다른 학생들도 그녀의 취향에 질렸다며 고개를 저었다. 밴드부에서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멤버는 이 고양이녀밖에 없는 듯하다.
“쟨 내버려 두고 아까 했던 거 계속하자. 다시 코드를 쳐줄 테니까 음을 맞춰봐.”
고양이녀의 선곡이 또 튕긴 듯싶으니 ‘가시’ 어빌리터가 만든 자작곡을 마저 연습하기로 했다.
‘투시’ 어빌리터가 키보드로 곡의 코드를 반복하며 재경에게 음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풀죽은 고양이녀가 기타 리프를 치고, 베이스 ‘마비’ 어빌리터와 드럼 ‘가시’ 어빌리터가 둥둥 박자를 맞췄다.
노래 부르는 재주가 좋은 재경은 그녀들이 조금만 다듬어주면 곧잘 불렀기에 즐기는 마음으로 합주를 끝냈다.
각각의 악기 파트별 피드백을 마친 재경이 ‘가시’ 어빌리터가 쓴 자작곡 가사를 외우다가 옆에 있던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말했다.
“너희도 참 독특하다.”
“왜?”
“밴드 같은 걸 할 생각을 다 했잖아. 상대적으로 평가 점수 후한 관악대도 있는데.”
밴드부는 그들 1학년으로만 구성된 새 동아리였다. 이전에는 아무도 밴드를 할 생각이 없었던 건가 아니면 있었는데 사라진 건가 모르겠지만 대가 끊겼다는 건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그녀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당연하듯이 답했다.
“관악대랑 밴드는 다르거든? 그리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맞아. 어차피 군에 들어가면 못 하는 거 학교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비키나 다른 애들은 전부 평가 점수니 기간트리카 대결이니 공부에 목매서 어지간히 바빠 보이는데 얘네들을 보고 있자면 마족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는 길거리 한량처럼 느껴졌다.
“난 동아리까지 그런 거에 목매고 싶지 않아. 한 번뿐인 인생, 실컷 즐길 거야.”
“나도.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꿈인 거 알아. 하지만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어.”
낮은 베이스 음을 둥둥거리던 ‘마비’ 어빌리터가 핑거링을 멈추고 씁쓸하게 말했다.
발현된 어빌리티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만 한 자신과 어빌리터라고 떠받들어 주는 타인의 불협화음이란 끔찍하게 듣기 싫어서 영영 재생 버튼 따위 누르고 싶지 않았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다.
“나한테 어빌리티가 없었으면 좋았을걸. 그럼 아무런 제약 없이 언더그라운드 밴드로 멋지게 데뷔할 수 있었을 텐데.”
“뭐, 울 엄마는 고양이가 되는 게 기타보다 더 먹고 살 걱정 없겠다고 했지냥.”
고양이녀가 냥냥거리며 이펙터를 밟고 기교 넘치는 기타 리프를 쳤다.
이전부터 계속 쳐왔던 것인지 줄을 오가는 빠른 피킹과 플랫을 거미처럼 자유롭게 희롱하는 왼손가락 움직임에서 노련한 티가 났다. 고양이 주제에 잘도 친다.
“렌, 너는 어빌리티가 발현되기 전에는 하고 싶은 거 없었어?”
“나? 하고 싶은 거? 음… 글쎄.”
하고 싶었던 거라. 재경은 원래 세계의 자신을 떠올렸다. 친구도 사귀고 성공적인 고교 데뷔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지.
지금도 이 세계의 해피 엔딩을 보고 싶다는 꿈이 있긴 하지만 빙의 전에는 뭐랄까, 막연히 어른이 되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하루하루 시간만 때우며 살았다. 하고 싶은 걸 하려고 해도 돈이 없었고 환경도 여의치 못했기 때문에 그런 꿈조차 사치였다.
“뭐든 제립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이런 건 못 치겠지. 들어봐. 나의 사랑의 멜로디야.”
키보드를 치던 ‘투시’ 어빌리터가 과장되게 몸을 흔들며 주르르 건반을 훑었다. 피아노 음이 아닌 브라스 소리로 쾅쾅 울리는 기묘한 건반 음은 오늘도 학교 괴담에 살을 붙였다.
“그래서 난 마족을 죄다 해치우고 나면 제대하고 프로 드러머가 될 거야. 그게 언제가 되든 상관없어.”
손을 풀기 위해 스트로크로 딱판을 치고 있던 ‘가시’ 어빌리터가 박자에 맞게 툴툴거렸다.
프로 드러머가 되기 위해 마족을 해치운다라. 재경은 그 동기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꿈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비웃을 수가 없었다.
전쟁 승리 엔딩인 왕녀의 트루 엔딩으로 끝난다면 마족들이 전부 사라지고 쟤네들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지.
안전하게 세라 선생님이나 유네 루트를 노리고 있는 재경은 노말 엔딩으로 끝난다면 마족들은 건재하지만 주인공들은 무사한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나랑 내 동기들은 졸업하고 군에 들어가게 되려나.
비키나 류제는 실력을 인정받고 백장미 부대에 들어갈 것 같고, 왕녀는 그 혈통의 힘으로 국가원수가 되겠지. 유네는 싸움이랑 연이 없으니 최대한 나르타 상단의 연줄을 이용해 왕실로 들어갈 거고, 세라 선생님은 여전히 제립학교의 선생님일 거다.
삼류 악당이라 엔딩쯤에는 소식이 감감한 렌 지미야 어디선가에서 잘 먹고 잘살겠지만, 만일 이 1년 끝에 노말한 채로 끝나버린다면 영영 인간들은 마족들과 대치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재경은 문득 내년, 후년, 내후년을 지나 막연한 미래를 추측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의 옆에는 그의 친구들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렌……! 왜 대답을 안 해? 자작곡 만들라는 거 제대로 하고 있어?”
“어? 아…….”
노말할지라도 행복하게 끝이 난다면 그가 바랐던 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왠지 싫은 기분에 붙잡혔던 재경이 밴드부원이 부르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분명 처음 빙의했을 때는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었는데 미래가 가까워지니 왜 점점 두려워지는 걸까.
“몰라. 이제 목 아파. 오늘은 그만할래.”
“가게?”
재경이 그렇다고 답하며 신을 똑바로 신었다.
오늘은 비키의 심부름을 하다가 갑자기 끌려온 바람에 교실에 가방을 두고 왔다. 어차피 가방 안에 별 게 들어있지는 않았지만 공책이 있으니까 들러서 가지고 가야지.
“자기 전에 목 풀고 자! 공연 전까지 네 목은 우리 모두의 목이니까.”
‘마비’ 어빌리터가 재경에게 매점에서 파는 목에 좋은 도라지 차를 던졌다.
그걸 재주 좋게 받은 재경이 알았다며 작별 인사하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공기와 함께 까만 하늘에 자수 박힌 별과 달이 그를 반겼다.
기숙사로 돌아가서 쓰고 있던 가사를 정리할 요량으로 어두운 복도를 지나 마지막으로 합주했던 노래를 흥얼거리던 재경이 1학년 8반 교실 문을 열었다.
교실이 어두운데 어째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 싶더니 류제가 교실에서 홀로 책상에 기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너 아직도 학교에 있었냐?”
“네 가방이 보여서 같이 갈까 하고 기다렸어.”
류제가 짧게 웃으며 답했다. 그도 도서부 일로 시간이 늦어서 서둘러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렌의 자리에 가방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마냥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밴드부 일로 뜨끔한 재경이 경계하며 물었다.
“내가 그냥 간 거였으면 어쩌려고 했냐? 지금 9시 50분이잖아. 시간도 아슬아슬한데.”
“하하, 나도 금방 온 거야. 혹시나 해서 기다렸는데 마주쳐서 다행이네.”
금방 오기는 무슨. 실은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
알았다간 부담스러워할 사실을 숨기며 류제가 모르는 척 렌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재경은 혹시라도 류제가 가방 안을 살폈을까 봐 불안한 듯 빼앗아 들었다.
“짜식이, 맨날 바쁘다 했으면서 할 일도 없네.”
“딱히 그런 건 아냐. 렌, 넌 뭐 하다가 늦게까지 남은 거야? 메뉴 개발이 그렇게 오래 걸리나?”
동아리에도 들지 않은 데다가 지금은 반 친구들도 다들 기숙사로 돌아갔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어차피 알려주지 않겠지만 류제가 캐내듯이 물었다.
“아, 뭐. 누가 도와달라고 해서. 아~ 피곤해라. 목마르다.”
“너무 무리하지 마.”
“나도 그러고 싶다, 인마.”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절친 류제라도 밴드부 공연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자랑하는 것 같아 쑥스러워 말을 못 하겠다.
재경이 도라지 차를 들이켜 마시며 교실 밖으로 향했다. 안 쓰던 목을 쓰니 칼칼하니 상태가 안 좋았다.
류제가 렌을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가 문을 잠갔다.
“나 대신 축제 도와주느라 힘들지? 자재가 무겁던데.”
“별로. 축제… 그래…….”
전교생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다니 기한이 다가올수록 부담스러워 죽겠다. 인기니 팬클럽이니 그런 것에 내가 속았지.
재경이 삐죽한 얼굴로 눈동자를 돌려 류제를 힐끗거렸다. 류제가 왜 그러냐며 갸웃거렸다. 재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래. 오늘 아세미랑 수녀 누나한테서 답장이 왔는데 들어볼래? 내용이 아주 가관이야.”
“왜? 설마 그 꼬맹이가 축제에 오기라도 하겠대?”
재경이 그 괴팍한 떼쟁이 꼬마를 떠올리고 눈가를 실룩거렸다. 정답에 가까운 말에 류제가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서 몰래 기차역까지 가서 가출하려는 걸 신부님이 찾았다나 봐.”
“허이고, 가당치도 않다.”
“수녀 누나가 아세미는 자기가 잘 데리고 있을 테니 안심하고 재미있게 놀라고 하셨어. 네 안부도 물으시더라.”
“고맙다고 전해줘.”
“그래, 하하.”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난 언덕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오랜만에 시답잖은 수다를 떨었다.
류제는 이따금 불안하게 웃는다. 이것도 스토리 전개의 흐름에 따라 류제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때문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식물이 나타난 그날 내가 정말 무슨 헛소리를 했나.
“류제, 너 무슨 고―”
이전처럼 류제의 속내를 떠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어보려던 재경이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려 했던 말을 삼켰다.
“왜?”
“아무것도 아냐.”
뭐든 류제 혼자만의 고민일 텐데 삼류 악역 주제에 괜한 개입인가 싶고. 류제가 걱정해 줬을 때 나도 내 고민을 못 털어놨는데 류제의 생각을 감히 물어보기가 힘들다.
류제가 이전보다 나와 거리를 두는 이유도 결국엔 나 때문일 거다. 관계의 저울이라. 재경은 언젠가 비키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유네와 세라 루트를 생각하고 있는 재경은 언젠가 학교를 졸업하고 훈련소에 들어가 각각 편입될 부대로 뿔뿔이 흩어지면 이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미래를 떠올렸다.
뭐든 배드 엔딩보다는 낫겠지만. 재경이 씁쓸한 눈동자를 넌지시 감았다.
* * *
수신제가 다가올수록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는 지금껏 보지 못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절제미가 돋보이는 획일적이며 딱딱한 교실 전경은 책상 배치가 바뀌고 커튼으로 공간이 나뉘었다. 학생들이 준비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배치된 공간은 축제에 걸맞은 분위기를 찾아갔다.
외부인을 위한 기념품도 순조롭게 제작되었다. 서툴지만 열정이 담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든 기념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모양은 당연 하트였다.
수신제 때 학교 뒤편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하트가 담긴 물건을 선물하며 고백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수신제 전통이기도 하고, 사랑을 하고 싶은 학생들의 로망이 담겼기 때문이다.
하트 모양 상품은 주인공을 포함해 히로인들이 소속된 동아리에서도 판매되었다.
문집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미나와 류제의 도서부는 하트 모양 책갈피를, 유네가 소속된 요리 동아리는 하트 모양 쿠키와 티스푼을, 부루마블에 사용할 커다란 주사위를 만들 때 재경에게 도와달라고 억지를 부린 비키의 역사 연구 동아리는 우승 상품으로 하트 모양 로켓을, 세라가 고문을 맡은 응급처치 동아리는 손 청결을 위한 하트 모양 종이비누를, 왕녀가 소속된 검도부는 곧 죽어도 그런 상스러운 물건 따위 안 팔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부원들의 요구로 하트 모양 장신구를 단 머리끈을 추가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도 고심 끝에 하트 모양 팬케이크를 스페셜 메뉴로 내놓았다. 그야말로 전교는 하트, 하트 삼매경이다.
“어때? 내 하트 팬케이크. 멋지지 않니?”
“다 탔잖아, 이 멍청아.”
자신 있는 얼굴로 새까만 결과물을 검토받던 여학생은 재경의 냉정한 평가에 툴툴거리며 맛만 좋으면 된다고 핀잔했다.
탄 팬케이크를 한 입 집어 먹고 퉤 뱉은 재경은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꿈과 현실은 다른 법이건만 저딴 실력으로 어떻게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근거 없는 자신감의 출처가 궁금하다.
“누가 학교 축제까지 와서 대단한 퀄리티를 요구하겠어. 일단 이 찻잔을 들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본전을 뽑을걸.”
비키가 두 개를 이어 붙여 테이블로 만든 책상 위에 곱게 포장된 상자를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축제 하루 전날인 오늘 드디어 비키의 유모가 보내준 다기 세트가 도착했다. 비키가 상자를 열자 서빙 담당 학생들이 후광이 보이는 찻잔의 위용에 눈을 질끈 감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깟 도자기가 뭐라고. 재경은 무늬만 요란한 찻잔 하나를 집어 들어서 손잡이만 달랑 붙잡고 위험천만하게 돌려보았다.
“어디 보자……. 야, 테두리에 있는 거 진짜 금이냐? 깨물어 봐도 돼? 어엇!”
“꺄악!”
재경이 실수로 찻잔을 놓치는 척했다. 저택에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만 어머니의 소중한 유품이었던지라 진짜로 깨트릴까 식겁한 비키가 단말마처럼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유약한 비명을 모두가 들은 사실에 부끄러워한 비키가 장난친 재경을 사정없이 흘겼다.
“그게 얼마나 귀한 줄 알아? 조심히 다루란 말이야!”
“거참, 장난도 못 쳐. 얼만데 그래? 그래 봤자 찻잔인데 깨지면 까짓것 물어주면 될 거 아냐.”
그릇이 사람 손을 거치면 얼마큼이나 비싸질 수 있는지 모르는 재경이 단돈 오천 원짜리 그릇 가지고 별 과민반응을 다 한다며 꿍얼거렸다.
키아나트리체가 공인한 도자기 명인이 만든 찻잔을 저런 취급을 하다니 비키가 보는 눈이 없다며 혀를 찼다.
“뭘 모르나 본데 네가 평생 일해도 못 살 정도로 비싸. 하나 깨질 때마다 네 앞으로 청구할 거니까 조심히 다뤄.”
“새겨들어, 렌. 이거 거짓말 안 하고 한 세트당 평범한 가정집 한 채 값일걸.”
“윽, 안 깨뜨렸잖아! 장난친 거 가지고 너무하는 거 아니냐?”
옆에서 친구가 거들자 재경이 들고 있던 찻잔에 금이라도 갈세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비키가 그걸 보고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뭐, 혹시라도 깨뜨리면 렌 네가 셀로니아가의 부흥을 위해 데…데…데리…ㄹ.”
농담으로도 나오지 않는 데릴사위라는 말에 비키가 설단 현상이 온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바리스타 담당 친구들의 요청으로 판매할 원두커피를 마셔보던 류제가 이어질 말을 짐작하고 내용물을 격하게 뿜어냈다. 재경은 말을 하다 마는 비키를 향해 뭘 어쩔 거냐며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류제, 너 더럽게 뭐 하는 거야. 깨뜨리면 어쩔 건데. 비키, 넌 왜 말을 하다 말아. 데리… 뭐?”
“저택에 데리고 가서 평생 메이드로 부려먹을 거라고!”
농담으로 던지려던 말이었는데 진심이 섞이니 일순 부끄러워진 비키가 꽥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다. 고함 테러에 귀가 아찔해진 재경이 몸을 부르르 떨며 뒤늦게 귀를 막았다. 누가 뭐래도 절대 안 깨뜨릴 거다.
“거참, 성질 더럽네. 야, 류제 넌 괜찮냐? 갑자기 왜 커피를 뿜고 그래?”
“사레가 들렸어.”
류제가 콜록거리면서 누군가가 빌려준 손수건으로 쏟아낸 커피를 닦았다. 그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렌이 둔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재경과 류제를 보며 수예부 학생들이 간사하게 웃었다. 드디어 수선을 마친 메이드복과 집사복이 내일 아침이면 새로운 주인을 반길 것이다.
다음 날 축제 당일이 되었다. 다행히도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는 다소 건조할 뿐 티 없이 맑았다.
학생들의 노력 끝에 1학년 8반 교실이 메이드 카페로 탈바꿈했다. 책걸상은 테이블보와 쿠션으로 교실 느낌을 가렸고, 커다란 커튼으로 주방과 테이블 영역을 나누었으며, 테이블 위에는 각각 손으로 직접 꾸민 메뉴판들이 준비되었다.
학교를 개방하기 전 아침 일찍부터 등교한 8반 여학생들은 메이드복을 자신의 스타일에 맞춰 꾸미느라 분주했다. 앞치마에 리본이나 브로치를 대롱대롱 매달거나 귀여운 니삭스로 포인트를 주는 등 같은 메이드복이지만 학생별로 개성이 천차만별이다.
“이야, 아침 댓바람부터 호박에 열심히 줄들 긋고 계시는구만.”
“뭐야?”
어차피 수업도 안 하겠다, 귀찮아서 체육복 차림으로 껄렁껄렁 하품하며 류제와 함께 교실 문을 연 재경이 아침부터 얼굴에 떡칠하는 친구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이때다 싶어 어른 흉내를 내는 그녀들을 비웃는 재경이 괘씸하게 손가락질했다.
“얼굴만 허옇게 떠가지고. 저 옆 반 귀신의 집에 들어가면 반응 좋겠다, 야.”
“시끄러워!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
손거울을 보며 장미처럼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던 학생이 수예부 친구들에게 바보 좀 데리고 가라고 손짓을 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은 수예부 학생들이 하하 웃는 낯으로 재경과 류제를 각각 붙잡았다.
“자자, 류제는 이쪽이야.”
“손 많이 가는 렌은 이쪽으로 오세요.”
“윽, 뭐야? 왜 나랑 류제가 따로 들어가?”
같은 남자끼리니 그냥 같이 갈아입으면 될 걸 류제와 다른 곳으로 끌려가니 왠지 불길하다.
“너만 특별히 준비할 게 많거든.”
그녀들은 유들유들 라우라 축제 가면처럼 웃는 낯을 유지하며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역시나 단순 무식해서 특별이라는 말에 낚인 재경은 깜짝 선물 같은 건 줄 착각하고 안심했다. 그는 두근두근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고 얌전히 그녀들을 따랐다.
여학생들과 함께 이동하는 렌을 흘기던 류제는 그녀들이 있는데 큰 탈은 없겠지 싶어서 묵묵히 수예부원이 주는 대로 옷을 갈아입으러 간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뭘 꾸미는 건지.”
이전부터 자신을 향한 음흉한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마수가 렌에게까지 미칠 줄은 몰랐다. 대충 옷을 갈아입은 그가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데 밖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질러대는 렌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류제가 커튼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렌이 있는 탈의실에 소동이 일어서 들쑥날쑥 커튼이 흔들렸다. 눈가를 실룩거린 그가 수예부원에게 물었다.
“너희들, 렌 가지고 뭐 하고 노는 거야?”
“이따가 보면 알아. 후후, 그나저나 류제는 역시 뭘 입혀도 멋이 나는구나.”
대답을 회피하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흘긴 류제가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류제더러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한 수예부원은 약속한 대로 류제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 무스로 고정시켰다.
정말이지 이 아까운 외모를 왜 앞머리로 가리고 다니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수신제에서만큼은 미남 집사 노릇을 톡톡히 해낼 류제를 보자니 절로 행복했다.
“좋았어. 완벽해!”
“손님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고로 홍보 담당 힘내, 류제.”
베스트까지만 입은 키아나트리체 정장 차림에 빨간 보타이를 맨 류제는 거울을 통해 광대같이 서있는 모습을 자기 흘기고 귀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앞머리를 넘겨 훤히 드러난 눈 코 입이 어색하다. 바로 그때 반대편 간의 탈의실에서 볼일을 끝낸 여학생들이 차례로 나왔다.
“됐으니까 가. 가서 그 꼴로 홍보나 하고 와!”
“싫어어어. 싫어! 싫어어! 절대 안 나가!”
간의 탈의실 철봉을 끈질기게 붙잡고 나가기를 꺼려하던 재경이 결국 질질 끌려 밖으로 나왔다. 다른 여학생들처럼 메이드복 차림이 된 재경은 수치심으로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왜 여자 복장인데?! 어?”
류제는 멀쩡한 집사 모습이자 재경이 더욱 질색하며 외쳤다. 물론 가짜 머리가 없어서 라우라 축제 때처럼 본격적으로 양 갈래 머리를 달지는 않았지만 그랬기에 더욱 남자인 티가 났다.
그 꼴로 치마를 입고 있는 렌 지미의 모습은 쳐다만 봐도 웃음이 터졌다. 하얀 분을 덕지덕지 발라 주근깨를 가린 화장도 어색해서 웃겼다.
“류제는 왜 멀쩡해?!”
“류제는 잘생겼잖아.”
“집사 복장도 어울리고.”
“그야 그렇지만!”
렌이 잘생겼다는 말을 인정하자 외모에 큰 관심이 없었던 류제가 우쭐해져서 다시 거울을 확인했다. 앞머리 넘기길 잘했다. 수예부원이 넘겨주는 하얀 장갑을 똑바로 낀 그가 그 기분을 만끽했다.
“내 말은 왜 나만 이런 꼴이냐는 거지!”
“뭘 모르는구나. 원래 축제에는 학급 마스코트로 개그 캐릭터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개그으으? 마스코트가 필요하면 차라리 유네를 시켜. 유네가 훨씬 귀여운걸.”
“그게 싫었으면 우리 수예부 일을 도와줬어야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은 그녀들이 재경의 불만을 일축했다.
류제를 밀치고 거울을 살핀 재경은 아무리 뜯어보아도 자기 모습이 끔찍해서 절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원래 렌 지미가 이런 짓까지 해야 했나? 이건 절대 아니야. 또다시 라우라 축제의 비극이 시작될 거라고! 불길해!
“나도 류제처럼 집사 할래. 류제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이 불합리한 사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란 말이야! 내가 지금 이 꼴로 동네방네 바보라고 소문이 나게 생겼는데 왜 아무런 말도 안 하냐?”
메이드복을 짤랑거린 재경이 류제의 집사복을 붙잡고 아양을 떨었다. 와, 귀엽다.
차마 훤히 드러나는 얼굴을 이전처럼 앞머리로 못 숨겼던 류제가 난감한 듯 외면했다.
“나쁘지 않은데 뭐.”
“하하하. 류제, 말 잘했다. 맞아. 나쁘지… 크크크… 않아.”
“이 거짓말쟁이들이!”
재경이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양 배신자 류제를 노려보았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렌의 시선이 매서워도 류제는 그것조차 사랑스러워서 참 미친놈 중증이구나 스스로를 격하시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제 집사복이 없어. 네 체육복은 축제 끝나기 전까지 우리가 맡아줄 테니까 걱정 마.”
“뭐라고? 이 자식들이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어. 어쩐지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더라니! 이 꼴로 어떻게 다녀. 망했어어… 망했다고, 류제!”
재경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상을 지었다. 치마를 입은 건 여장 대회 때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가 렌은 멋도 모르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런 그의 다리 사이로 속옷이 거리낌 없이 보여서 류제가 오므리라며 몸소 재경의 무릎을 붙여주었다.
“류제, 마스코트 렌 데리고 메이드 카페 홍보 부탁할게. 혹시라도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 잘해.”
그녀들이 류제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류제가 렌을 좋아한다는 생각은 망상 속에서나 하지 현실에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그녀들은 류제가 이 깜짝 선물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꿈에도 몰랐다. 류제가 그녀들을 향해 기분 좋게 웃었다.
“좋아, 렌은 나한테 맡겨.”
“류제에에! 너 반박하기도 귀찮고 완전 엄청 웃기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이 치사한 자시이익. 나쁜 놈! 이 악마!”
옷을 벗으려고 해도 갈아입을 옷이 없고, 꼼짝없이 이런 꼴로 메이드 카페 홍보 팻말을 들고 돌아다녀야 할 판인 재경은 옆에 멀끔하게 선 류제가 부러워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수예부원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류제의 화창한 미소에 완전 넋이 나갔다.
류제는 가만히만 있어도 교실로 돌아오는 친구들에게 잘생겼다, 어울린다 칭찬이란 칭찬은 다 받는데 자신은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리지 않나, 놀리지 않나 취급이 영 달라서 배가 아프다. 재경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떼를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오픈 시간이 되니 외부인들에게 학교가 개방되고 학교 내 유동 인구가 늘어났다. 슬슬 손님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홍보 팀 집사와 메이드가 짝이 되어 팻말을 들고 복도에 나섰다.
메이드복 차림의 재경은 류제 때문이라도 비교되는 빌어먹을 시선 때문에 쥐구멍에 들어가서 숨고 싶었다.
“이게 뭐야. 기분 나빠.”
“에이, 귀엽다는데도 그러네.”
재경이 눈을 세모지게 떴다. 귀엽기는 무슨. 끔찍하지. 아까부터 빈말로 칭찬하는 류제가 얄미워 죽겠다.
류제는 자신을 바라보는 렌의 눈길이 부끄러웠다. 렌의 귓불은 물론이고 초커를 하고 있는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정말 사람 마음을 가지고 농락하는 기분이다.
“으으, 나 이런 목걸이 진짜 못하는데.”
목이 예민해서 목도리는 물론이고 폴라도 잘 못 입었던 재경이 초커가 가려워서 박박 긁었다. 아랫도리에 바람이 들어와서 휑하고, 비키가 이 꼴을 보고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한 것도 분하다.
비키, 이 자식. 요리 더럽게 못하니까 서빙만 한다지? 잘난 대귀족 주제에 이 기회에 피고용인의 쓴맛이나 맛보시지. 흥!
“어, 렌하고 류제다. 와, 류제 멋지네. 옷이 날개인가 아님 얼굴이 이미 완성된 건가.”
“하하하하! 아까 친구들이 이야기해 주긴 했다만. 하하하. 렌, 너 그 꼴이… 하하하!”
“아이고, 배야. 수예부 자식들, 진짜로 그걸 해내다니 존경한다.”
“렌 군, 엄청 귀여워. 라우라 축제 때도 귀여웠는데 오늘도 귀여워.”
복도를 거닐다가 유네와 그 친구들과 우연히 마주친 재경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친구들이 열심히 꾸며줘서 앙증맞고 귀여운 메이드 복장인 유네가 자신더러 귀엽다고 말하니, 아이러니를 느낀 재경의 절망감도 배가 되었다.
“너한테서 귀엽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아! 네가 훨씬 귀엽잖아.”
“에… 그래? 고마워. 헤헤.”
레이스 잔뜩 달린 메이드복, 좋아하는 꾸물꾸물 베어 캐릭터들을 앞치마에 달아놓은 유네는 정말이지 둥글둥글 귀여움의 결정체였다.
쑥스러움을 어찌할 바 모르던 유네가 옆에 있는 류제를 보고 뒤늦게 인사했다.
“류제 군도 멋지다. 집사복 잘 어울려.”
“나쁘지 않게 보인다니 다행이네.”
류제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도 광대 꼴을 자처하긴 싫었다. 자신을 보고 수군대는 사람들의 시선에 벌써부터 정신력이 바닥나려는 걸 렌이 한 잘생겼다는 한마디만 듣고 버티는 중이었다.
게다가 저런 모습의 렌을 옆에서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이런 광대 짓 따위 별것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럼 렌 군도 류제 군도 홍보 열심히 해. 나도 서빙 열심히 할게. 홍보하다 심심하면 요리 동아리에도 놀러 와. 내가 있는 시간 알지?”
“알지. 너도 열심히 해. 잘 가라.”
“깔깔깔.”
재경의 모습에 빵 터진 그녀들이 끝까지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사이좋게 헤어졌다. 재경은 이딴 노출 심한 메이드복을 입은 남정네를 가지고 과연 홍보가 될까 고개를 흔들었다. 흉흉한 소문이 났으면 났지 절대 안 될 것 같다.
등 뒤로 멀어지는 그녀들의 말소리를 들은 류제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언뜻 들린 고백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괜찮아. 렌은 바보잖아. 그냥 해버리면 돼.”
“유네, 넌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사랑의 고목나무에서 고백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거 몰라?”
“으으… 그래도 떨려. 자꾸 불안해져서 마음이 진정이 안 돼.”
“무르구나, 유네. 사랑은 쟁취하는 거야. 물론 상대가 렌이라 유네가 좀 아깝긴 해도.”
“원래 고백은 분위기가 80퍼는 먹고 들어가잖아. 렌이라면 홀라당 넘어올걸?”
“너한테 귀엽다고 한 거 들었지? 분명 마음 있다니까?”
숙덕거리는 잡담은 소음과 더해져 이제 귀에 잡히지 않았다. 류제는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힘없이 걸어가는 렌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놓아줄 수 없다. 렌을 좋아하는 유네의 마음은 존중하지만 절대 그 마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아, 왜 이렇게 된 걸까. 메이드복이 뭐야 진짜.”
“덕분에 홍보 핑계로 수신제 구경하고 좋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뭐든 넌 잘생긴 집사라서 좋겠다.”
“하하.”
당연히 질투가 났다. 누구는 렌이 이 더러운 마음을 눈치채면 혹시라도 영영 멀어질까 전전긍긍한데 옆에서는 손쉽게 고백이니 뭐니 말을 늘어놓고 있으니 배알이 꼬여 미칠 지경이다.
수신제를 핑계 삼아 렌에게 고백하려는 유네의 속셈을 류제가 알아버렸다고 할지언정 사랑의 행방이 요동치는 수신제는 막을 열었다.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 설 누군가가 그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는 축제를 즐긴 마지막에야 비로소 결정 날 것이다.
* * *
“수신제를 위해 학교 경비로 백장미 부대원이 몇몇 파견되었다고 하더군.”
“세상도 참 평화로워졌습니다. 마족들도 두려워한다던 천하의 백장미 부대가 고작 제립학교의 개가 되다니. 할 일도 지지리도 없나 보지.”
“학생들은 키아나트리체의 최후의 검이다. 그만큼 아바마마께서 제립학교의 안전에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겠지 않느냐.”
“저는 싫습니다! 안전은 저나 원래 있던 학교의 경비병으로도 충분합니다.”
왕녀를 천대하는 황제는 물론이고 백장미 부대를 싫어하는 루이나가 그래도 납득하지 못하자 니냐롯트가 그녀의 투정을 달랬다.
“학교 인근에서 마족의 움직임이 포착된 게 몇 달 전이다. 나라카의 식물이 신관을 덮쳤던 사건도 있고 제립학교를 외부에 개방하는 것도 드무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겠지. 수신제를 취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리 생각하거라.”
“그런 쓸데없는 일 말고 마족들을 처치해서 저하의 걱정이나 덜어줄 생각은 못 할망정. 퍽이나 조심입니다. 분명 폐하의 명령을 받고 왕녀 저하를 감시하기 위해서겠죠. 제가 모를 줄 압니까?”
루이나가 자기도 다 알고 있다며 황제를 감싸려고만 하는 왕녀에게 투덜거렸다. 주변에 적들밖에 없는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의 주인이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학생들이 그렇게나 고대하던 수신제가 개막했는데도 니냐롯트는 평범한 학생처럼 들뜨지 못한 채 적막한 검도부 도장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혹시라도 악몽에 시달려 전처럼 뇌우를 퍼부어 수신제를 망치지 않을까 며칠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 니냐롯트의 눈가는 병든 사람처럼 어두웠다.
“부장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저하를 군중의 웃음거리로 만드실 생각을 하다니. 저하께서 얼마나 바쁘신지도 모르면서.”
“그저 검법 시범을 보이는 것이지 않느냐. 부원으로서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약속이라 수락한 것이다. 이것도 수양의 일종이라 생각하면 나는 기쁘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지금 몸 상태를 걱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만 아니라면 저도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괜찮다, 루이나. 나는 괜찮아.”
니냐롯트가 간신히 웃었다. 떨리는 입가에 핏기가 없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목검을 허리에 차고 정면을 응시했다.
폭 넓은 도복이 출렁거리다 평안을 찾았다. 몸 상태가 어떻든 맡은 바는 있다. 책임에서 회피하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루이나는 또다시 무리하려고 하는 니냐롯트를 만류했다.
“하오면 조금이라도 주무셔주세요. 뇌우가 치기 전에 제가 반드시 깨워드리겠습니다.”
“루이나, 나는 이제 자는 것이 두렵구나.”
건조한 말투로 중얼거린 그녀가 발도했다. 니냐롯트는 이 악몽의 이유가 마음의 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정신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건만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학생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준비한 축제가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여기가 정말 내가 알던 그 제립학교 맞아?
떠들썩한 복도에 멀뚱히 선 류제가 별세계 전경에 넋이 나갔다.
외부인들과 학생들이 유동하는 복도는 물론 외관까지 완벽하게 축제 분위기로 탈바꿈한 교실들, 사람을 유혹하는 호객 소리, 외부인들 앞에서 당당하게 어빌리티를 펼치는 학생들과 어빌리터가 되고 싶은 미들 스쿨 학생들까지 학교를 땡땡이치고 찾아와서 웅성거린다.
등교할 때까지만 해도 평범했는데 어느 틈에 바뀐 건지 그야말로 수신제의 한가운데였다. 류제는 자신이 이 공간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서만 동떨어진 것처럼 괴리감을 느끼는 것도 우스웠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넘기고 집사복을 입은 꼴이나 손글씨로 알록달록 꾸민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 홍보 피켓을 들고 있는 그는 제3자가 보기엔 이 난장판에 잘 어울리는 등장인물이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했던 렌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돌아오질 않고 수신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류제를 지나쳤다. 몇몇 어린 여자애들이 자신을 보고 꺄꺄 좋다고 비명을 지르다가 8반 메이드 카페를 홍보하면 알겠다고 답하며 대가를 바랐다.
프리 허그니 뭐니 관심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지친 류제가 벌써부터 피곤해서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건물 끝 계단 뒤에 몰래 가서 숨었다.
아가타는 사람이 너무 많다. 치근대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드디어 살 것 같아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귀찮아.”
한적한 시골 생활이 익숙한 데다 성미에 안 맞는 일을 하니 스트레스가 쌓인다. 광대 짓도 피켓만 들고 가만히 서있으면 끝일 줄 알았는데 홍보도 만만찮게 성가신 일이었다. 지친 류제는 기분이 회복되게 렌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이봐, 1학년 8반 소속 류제 신리. 심심하면 점 쳐보지 않을래? 싸게 해줄게.”
계단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흐릿했던 별자리 박힌 작은 텐트 안에서 점술사 흉내를 내는 선배가 기어 나왔다. 그녀는 예의상으로라도 거절하지 말라며 류제에게 손짓했다.
류제야 제립학교 내에선 워낙 유명해서 전교생 중에서도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이 반과 이름을 맞추니 이상하게 신빙성 높아 보였다. 어쩐지 저번에 봤던 수상한 점술가 할머니도 떠오른다.
“선배는 동아리 활동인가요? 이런 동아리가 있었다니 몰랐네요.”
“아니, 이건 내가 심심해서 만든 거. 난 이렇게 혼자서 하는 게 좋거든. 참고로 어빌리티는 점술하고 하나도 관련 없어.”
전교생이 함께 모여 노는 수신제 날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에 텐트를 치고 점집을 차리다니 대단한 정신력이다. 그런 신비로운 기운에 끌린 류제가 그녀를 따라 좁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내부에는 방석 뒤 적당히 사이비스러운 수정 구슬과 이상한 모양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그녀는 연애 운, 재산 운, 건강 운 등등을 봐줄 수 있다며 류제를 보며 수상쩍게 히죽거렸다. 과연 점쟁이 같은 포스라지만 신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 연애 운으로 부탁합니다.”
“흠, 그렇게 안 보이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널 좋아하는 사람은 참 많을 것 같은데.”
관상학은 모른다는 선배가 놀리듯이 말했다.
단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리다니 놀랍지만 그야 연애 운을 봐달라고 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런 걸 궁금해하니 알았겠지 싶다. 류제는 애써 변명하지 않으며 쑥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만있어 보라며 수제로 제작한 이상한 모양의 카드를 이리저리 들쑤시고 뒤섞었다. 카드가 서로 겹쳐지지 않게 펼친 그녀는 류제에게 몇 개 고르라고 내밀었다. 류제가 카드를 고르자 그녀가 별 모양으로 배열했다.
“이런 곳에서 연애 운을 보다니 필사적이네. 힘든 사랑을 하는구나. 짝사랑인가?”
“…여기 비밀 엄수되는 건 맞죠?”
“그야 당연하지. 난 친구 없거든.”
이런 데에서 혼자 있는 거 보면 모르겠냐고 그녀가 어깨를 추켜올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류제는 할 말을 잃었다.
친구가 없는 자신을 측은하게 보는 것 같자 그녀는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의심을 지우지 않던 류제가 포기한 듯 한숨 쉬었다.
“맞아요.”
“이야, 역시 나야. 잘 맞히네. 천하의 류제 신리가 짝사랑이라니 엄청난 특종감인데. 우리 반 애들이 알면 난리 나겠어.”
“친구 없다고 하셨으면서.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선배네 학년에는 제 소문이 어떻게 난 건데 그래요?”
“음~ 건방지고 오만한 앞날이 창창한 잘생긴 천재? 최고의 뜨거운 감자지. 네 팬들이 많아.”
세상에, 말도 안 되는 것들투성이다. 류제가 수많은 칭호가 마음에 안 들어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수식어가 많은데. 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래 보여. 잘생긴 건 사실인 것 같지만.”
그녀가 자신은 그런 소문 안 믿는다면서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무슨 카드인지는 몰라도 그걸 본 그녀가 혀를 내두르며 안쓰럽게 고개를 저은 것을 보면 썩 좋은 카드는 아닌 모양이다.
“너도 참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구나.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남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꿈도 희망도 없네요.”
“뭐, 내 적중률은 50%라서 사람들은 잘 안 믿더라.”
가망 없다는 말에 실망했던 류제는 적중률 이야기를 듣고 김이 빠졌다. 확률이 반반이란 말은 찍기 아냐? 그럴 거라면 차라리 절반의 확률로 잘 된다 말해주면 좀 좋잖아.
선배에게서 외면하고 있던 사기꾼의 모습이 보이다가도 괜히 점이랍시고 말을 하니 이상하게도 믿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점이란 게 다 그런 거지. 포기할지 말지는 네 안에 이미 정답이 내려져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좋은 걸 알려줄게. 연애 운을 올릴 수 있는 굉장한 방법이야.”
그녀가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듯 수상쩍은 손동작을 하며 말소리를 죽였다. 류제는 그게 뭔지 너무 궁금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줄어드는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누군가 오늘 키아나트리체의 황금 첨탑에 시한폭탄을 설치할 것이라는 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랑의 고목 아래에서 이걸 주면 분명 이루어질 거야.”
뭔가 했더니 수신제에 들어서면서 수면 위로 떠오른 고목나무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
현실적인 충고라도 해주는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류제가 맥이 빠졌다며 입을 비죽였다. 잘생긴 미간에 흠집이 나도 여전히 잘생겼다.
“그건 누구나 아는 미신이잖아요.”
“아냐 아냐. 똑같이 고백해도 내가 직접 주술을 건 이 클립이 중요하단 말이야. 이것만 있으면 고백에 성공할 확률이 무려 반이나 된다고!”
그녀가 류제의 집사 조끼에 하트가 붙은 클립을 달아주었다. 엉성하게 조립된 그것은 상품으로 치기에는 턱없이 품질이 낮아 보였다.
그녀가 말한 확률이 반이라는 건 성공이냐 실패냐로만 단순 무식하게 나눠서 계산하니까 그런 거겠지. 적중률이 50%라는 말이랑 하나도 다를 게 없다.
그녀는 질리지도 않고 종이에 얼렁뚱땅 봐준 연애 운세와 하트 클립의 가격을 써서 류제에게 청구했다.
“가격은 이렇게 되시겠습니다, 고객님! 이야, 잔뜩 만들었는데 영 손님이 안 와서 걱정했는데 류제 네가 사 갔다고 하면 잘 팔리겠지. 그런 마음으로 할인도 해줬으니 감사하게 생각해.”
그녀가 센스 넘치는 윙크를 했다.
이놈의 학교는 선배를 보더라도 정상인이 없다. 역시 날 가지고 장사하려는 목적이었나.
돈을 안 주면 저주를 퍼부을 기세에 류제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녀에게 청구된 금액만큼 돈을 지불했다.
“친구 데리고 오면 또 할인해 줄게. 잘 부탁해!”
“다시는 안 와요.”
사기당해서 마음 상한 류제가 바깥으로 나가자 류제의 점괘를 엿듣고 있던 여학생들이 꺄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류제가 문득 걱정했다. 친구가 없다는 말도 다 거짓말인가. 설마 소문나는 건 아니겠지. 하아, 수도 인심이란.
“이것 참.”
아까 텐트 옆에서 렌을 기다렸을 때도 한동안 손님이 없었으니 방금 그의 이야기를 엿듣던 사람들은 앞에 놓인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 홍보 피켓을 보고 찾아온 우연 같다.
뭐, 결국 그가 누군가를 짝사랑한다는 소문도 괴상하게 퍼져서 원본도 남지 않게 부풀어 오를 게 뻔하다. 그런 소문이 나더라도 옆에서 누구냐고 귀찮게 굴 렌만 얌전하게 만들면 상관없을 것이다.
“반반이라.”
류제가 그녀가 달아준 하트 모양 클립을 만지작거렸다. 본래라면 이런 하찮은 미신 따위 믿지 않았지만 진짜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몇 개라도 주고 싶었다.
확률이 반반짜리 클립을 두 개 사면 확률이 100으로 늘지 않으려나라는 아세미가 할 법한 유치한 생각도 해보았다. 어리석은 바람이다.
“류제!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렌, 너 돌아왔구나. 너야말로 어디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아까 선배들이 지나가다 너 여기 있다고 이야기하길래 냉큼 달려왔다, 짜샤. 정말 기다리라고 한 데에서 열심히 기다릴 것이지. 사람 찾아다니게 만드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류제가 잠시라고 치기엔 오랫동안 화장실 간다고 사라졌었던 렌을 위아래로 훑었다.
목이 손톱자국으로 새빨갰다. 또 초커가 간지러웠는지 그새를 못 참고 잔뜩 긁은 모양이었다.
“네가 너무 안 와서 찾을 겸 돌아다니고 있었어.”
“우이씨, 담부턴 나 버리고 가면 안 돼. 이 꼴로 혼자 다니려니까 쪽팔리단 말이야.”
재경이 메이드복을 입은 자신의 꼴을 보라며 투덜거렸다. 볼일 볼 때는 편했지만 뭐랄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너무 적나라해서 불쾌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재경이 피켓을 들고 있는 류제에게 그새 일러바쳤다.
“화장실에서 이상한 놈들이 포옹하자고 달려들어서 기분 나빠 죽는 줄 알았어. 다들 미쳤나 봐. 남자 어빌리터 처음 봤다고 하던데 그게 오줌 싸다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아?”
“……?! 그래서 늦은 거였어?”
렌이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다가 소름이 끼친 류제가 창백한 얼굴로 재경을 훑었다.
여장한 메이드 어빌리터가 보기 드문 건 알겠는데 그렇게 막 들이댈 건 없었잖아, 라고 말을 덧붙인 재경이 어딘가 정신이 빠져있는 이상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끔찍하다는 듯이 손을 닦았다.
류제는 눈치 없는 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 당한 게 아닐까 메이드복을 이리저리 들쳐보았다. 다행히 어디 다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왜 이래. 그럼 내가 뭐 때문에 늦었겠냐?”
“창피해서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아니거든? 날 뭘로 보는 거야. 사나이 신재… 렌 지미, 나만 메이드복인 건 불만이지만 그렇다고 맡은 바를 다하지 않고 도망가지는 않아. 그냥 찐득찐득하게 생긴 것들이 집적거리길래 두드려 패주느라 늦었을 뿐이야.”
쓸데없는 부분에서 사나이 타령하는 건 이제 그러려니 하는데 그가 없는 사이에 외부인과 다퉜다고 자랑스레 떠벌리니 류제는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언제나 그랬듯 렌은 걱정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데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또 그런 일 있으면 차라리 나한테 말해. 내가 해결해 줄게.”
“뭐? 미쳤다고 남정네끼리 손잡고 화장실을 같이 가냐? 걱정도 팔자긴. 그런 건 내가 다 알아서 해.”
재경은 류제의 걱정을 들을 가치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화장실에서 시비 붙는 거야 중학교 때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고 그때마다 어떻게든 빠져나왔으니 지금도 그러면 되겠지. 괜히 축제로 들떠있을 류제의 기분에 초 칠 일도 아니었다.
동상이몽으로 다시 뭉친 두 사람은 8반의 메이드 카페 홍보 피켓을 들고 학교를 활보했다. 평소에는 가지 못하는 3층 3학년 교실에도 올라가 선배들에게 예쁨을 잔뜩 받았다.
우쭈쭈 칭찬받다 보니 재경도 자신감이 생겨서 류제를 따라 외부인에게 간간이 ‘1학년 8반 메이드 카페에 놀러 오세요!’라는 식상한 멘트를 던질 수 있었다.
류제는 렌과 둘이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서 얼굴이 해이해졌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건 피곤했지만 렌과 단둘이 축제를 즐기는 건 행복했다.
시달리는 대신 선배들에게 서비스도 받고 렌과 공짜 게임도 즐길 수 있으니 이건 무조건 이득이다. 아가타 만세. 수신제 만세.
“렌, 저거 봐. 2반 팔씨름 대회래.”
홍보를 한답시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아 다시 1학년 건물로 돌아온 그들의 손에는 여러 기념품과 간식거리가 들려있었다.
다 먹은 간식 쓰레기를 통에 버린 류제는 주머니에서 방송부에서 제작한 수신제 팸플릿을 꺼내 2반 교실을 비교해 보았다. 1학년 2반은 체육대회 줄다리기 시합에서 거구의 남학생의 활약으로 8반이 패배했던 반이었다.
“어라, 손님인 줄 알았더니 류제 신리와 그 옆에 붙어 다니는 애잖아? 그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집사와 메이드 콤비가 바깥에서 알짱거리자 학교의 유명인을 알아본 2반 학생이 그들을 교실로 이끌었다.
“혹시 팔씨름에 흥미 있어? 우리 반 유일한 귀염둥이 남학생을 이기면 너희 반 메이드 카페 홍보하게 해줄게.”
바니 복장으로 호객 행위를 하던 그녀가 2반의 남학생을 이기겠다고 몰려든 수많은 외부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관객들은 대부분 힘이 센 사나이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 모두 분한 표정인 걸 보니 단 한 명도 2반의 남학생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과연 저런 곳에서 메이드 카페를 홍보하면 효과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류제가 머뭇거리자 바니걸이 특별 서비스라면서 조건을 내걸었다.
“어빌리티 써도 돼.”
“아…아니, 그건 쪼까 곤란한디…….”
류제와 인사하던 거구의 남학생이 구수한 사투리를 구사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바니걸들은 막무가내였다. 안 될 게 뭐 있냐며 그녀들이 집사복 차림의 류제를 도전자 자리에 앉혔다.
거구의 남학생에 비해 비실비실해 보이고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집사가 도전자 자리에 오르자 뭐 대단할 게 있을까 싶었던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새로운 도전자인가?”
“흠, 저놈은 얼마큼이나 버티려나.”
하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바니걸에게 휘둘리다가 빼도 박도 못하게 시합에 출전한 류제는 귀찮아졌다며 몸을 풀었다.
“조…좀 살살 부탁하드라고.”
지금까지 연전연승이었는데 류제에게 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남학생이 자리에 앉아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류제도 소매를 걷고 팔씨름 대결에 나섰다. 어쩐지 관객석까지 밀려난 재경은 다른 건 몰라도 류제가 지는 건 꼴 보기 싫었던지라 큰 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류제, 지면 일주일 치 간식은 내 거다!”
“앗, 그건 안 되지.”
다른 건 몰라도 렌이 응원해 주는데 질 수야 없다. 간식도 빼앗길 수 없고. 류제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저 거구 학생은 1학년 남학생들끼리 족구를 할 때 간간이 어울려 놀곤 했던 친구라 류제도 그도 서로의 어빌리티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놈은 분명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던가. 2반이 기획한 팔씨름에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손을 마주 잡은 류제가 자신의 배는 커 보이는 남학생과 첨예한 심리전을 펼쳤다.
군중 속에서 류제를 보기 위해 재경이 폴짝폴짝 메이드복을 짤랑거리며 파이팅을 외쳤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재경의 익숙한 목소리를 알아들은 누군가가 그에게 알은척을 했다.
“어머머, 어디서 봤다 했더니 그때 그 제립학교 소년들 아냐?”
“얘, 너 라우라 축제 때 봤던 여장 소년 맞지? 참 오랜만이다.”
허스키하고 낮은 소리를 억지로 고음으로 올리는 듯한 목소리에 소름이 끼친 재경이 냉큼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근육 빵빵한 상남자들이 오늘따라 멀쩡한 옷을 입고 그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어머나, 우리 덕분에 여장에 눈을 뜬 거니? 아직 서툴러 보이지만 귀엽구나, 소.년.”
“윽, 다…당신들은……!”
라우라 축제 때 봤던 여장 빌런들이잖아! 젠장, 저 사람들은 무슨 축제마다 오고 난리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그들을 제립학교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던 재경이 주춤거리면서 물러났다.
하필이면 재경의 차림이 메이드복이라 귀여운 소년이 여장한 모습을 좋아하는 그들은 사냥감을 노리는 멧돼지처럼 흥분했다.
“하지만 나라면 화장을 이렇게 하지 않겠어. 보석 같은 매력이 하나도 안 살잖아. 그리고 이 초커, 많이 간지러웠나 보구나. 이 누나가 안 간지럽게 해줄게.”
“윽… 벼…별로 괜찮은데요…….”
재경이 오랜만에 만난 숙녀들을 상대로 고역을 치르는 동안 호객하던 바니걸이 관객 사이를 돌아다니며 판돈을 걷었다.
“자자자! 누가 이길 것인가! 2반대 8반, 8반대 2반의 기다리고 기다리던 세기의 대결! 판돈은 이쪽으로 내주세요!”
심리전을 벌이던 류제는 과연 그런 것이구나 김이 빠져 고개를 숙였다. 그 기분을 아는 남학생이 류제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하구마이. 가시나들이 고집이 쎄가지고.”
“아냐. 그럴 수 있지. 축제니까. 하아.”
내가 팔씨름을 한다고 2반이 이득 볼 것도 없어 보였는데 왜 억지를 부리나 했더니 도박 좋아하는 아저씨들 내기용으로 써먹을 셈이었군.
류제는 참으로 속물적인 그녀들의 행태를 흘겼다. 얘네들은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이 뭔가 있어.”
“있기는 무슨. 딱 봐도 저 커다란 남학생이 이기겠구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저 힘은 절대 못 이겨.”
“댁이 몰라서 그래. 어빌리터들은 눈으로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니까.”
평소에 어빌리터들을 접해보지 못한 몇몇 관객들은 누가 이기니 저들끼리 티격태격하면서 경쟁하듯 돈을 걸었다.
그들 사이에서 원해서 한 것도 아닌 여장을 이리저리 지적받고 있는 재경은 한시라도 빨리 류제가 저놈을 이기고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래야 이 오지랖 넓은 숙녀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준비~ 시작!”
류제와 2반의 남학생은 어빌리티를 맞부딪혀 대결하는 것이 서로 처음이었다.
류제를 상대로 투쟁심이 불타오른 순박한 거구 학생은 소문이 무성한 류제의 ‘강화’ 어빌리티가 사용되기 전 선수를 쳐서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폭발적인 힘으로 손을 넘겼다. 엄청난 환호성이 그들의 귀에 얼씬거렸다.
이겼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류제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이 정도까지 나올 줄이야. 덩치에 걸맞게 무식하게 센 힘이군. 하지만 류제도 렌에게 기대를 받고 있는 이상 질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다시 힘의 균형을 찾았다. 남학생이 눈을 질끈 감고 버티는 걸 단숨에 반대편으로 넘겨 승리를 쟁취하려는 순간 어떤 걸 목격한 류제가 미간을 구겼다.
“아, 진짜. 괜찮다고요. 으으, 간지러워. 으히히.”
“헐렁해서 더 간지러운 거야. 제대로 묶어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어떤 무뢰배들이 렌의 초커를 벗겨주는 행위를 목격하고 렌이 화장실에서 마주쳤다던 변태가 다시금 치근덕거리는 줄 착각한 류제가 2반의 거구 학생을 그들에게 냅다 던져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목적지로 정확히 날아가는 사람을 따라 관객들이 미어캣처럼 고개를 움직였다. 2반 남학생이 큰 소리로 바닥에 나동그라질 때까지 그들은 얼이 빠져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팔씨름하다가 웬 날벼락이다.
배는 커 보이는 남학생을 화난 얼굴로 패대기친 집사복 류제를 본 관객들은 누가 뭘 잘못 했나 서로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인간 쿠션에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거구 남학생은 정신이 어질어질해서 좀처럼 일어서질 못했다. 죄 없는 그는 팔씨름을 하다 별안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어안이 벙벙했다.
날아오는 그를 피했다가 착지점을 둘러싼 관객들이 피해자의 상태를 살폈다. 막 관객들이 입을 떼려는 순간 먼저 그 침묵을 깬 사람은 판돈을 걷던 바니걸 학생이었다.
“한판승!”
그 말을 기점으로 이게 어빌리티끼리 자주 있는 모종의 시합 같은 거라고 착각한 관객들이 안심했다.
류제에게 판돈을 걸었던 아저씨들이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또한 저 거구의 학생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겪어봤던 도전자들도 그에 비견되는 류제의 실력에 놀라 축하 박수를 쳤다.
“거봐, 내가 생긴 거랑 다를 거라고 했지?”
“이야, 역시 어빌리터들은 뭐가 달라도 달라.”
“팔씨름 하나도 참 기깔나게 하는구만.”
암, 다르지. 재경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붙잡힌 바퀴벌레처럼 꼼짝없이 거구의 남학생의 아래 아래에 깔려있는 재경은 그의 위에 있는 덩치 큰 두 숙녀들도 그렇고 차곡차곡 쌓인 몸에 압박당해 숨이 막혔다.
순간 시야가 까매졌다 싶다가 정신이 나가 해롱해롱거리는 통에 별이 반짝거리는데 난데없이 무슨 일이냔 말인가.
제발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살려줬으면 좋겠는데 수염 난 숙녀의 대단한 흉부 근육에 막혀 입에서는 읍읍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또 거구의 남학생의 여자 친구로 보이는 2반의 다른 바니걸이 돌연 튀어나와 그를 붙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덕분에 거구의 남학생 밑에 깔린 존재들에 대해 완전히 잊은 관객들은 드라마틱한 상황에 손을 놓고 구경했다.
“나쁜 류제 신리,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자기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패대기치고 그래? 자기야, 괜찮아? 흑흑. 우리 자기가 얼마나 마음 약한데. 너무해.”
“아니, 그게…….”
소녀의 눈물에 류제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변태에게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렌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하기 껄끄러웠다.
류제가 삼류 로맨스 연극 대사를 말하는 그들 아래에 꼼짝없이 깔려있는 렌을 보며 초조해했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흘러간담. 저러다 렌이 또 기절하면 어쩌지.
4단 샌드위치가 된 그들 가장 아래에서 간신히 존재를 알리며 손만 뻗은 렌은 류제가 봐도 죽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우리 자기 좀 봐.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멀쩡한디 너무 그러지덜 말어. 나가 류제보다 약해부래서 그런 건께. 어쩔 수 없제. 멋진 모습 보여줄라고 했드만.”
머리를 휘둘러 아찔한 정신을 차린 2반 남학생이 의연한 척 조그마한 바니걸을 달래주었다. 바니걸 여학생은 그 말에 감동받았는지 세상 비극적인 것처럼 우는데 진짜 꼴값도 그런 꼴값이 없었다.
“무거워! 숙녀를 언제까지 깔고 앉을 셈이야!”
결국 그 꼴값을 참다못한 여장 빌런―수염 난 숙녀가 본연의 굵은 목소리로 외치며 자신을 쿠션처럼 깔고 앉은 남학생을 밀어냈다.
초커를 다시 달아주다가 봉변을 당한 그는 식식거리면서 풀리지 않는 분을 내뿜었다.
그때서야 류제를 제외한 관객들이 거구 아래에 누군가가 깔려있음을 알아차렸다. 수염 달린 숙녀가 숨이 막혀서 정신이 나가버린 재경을 일으켜 세워주며 쏘아붙였다.
“하마터면 우리 귀여운 소.년.이 위험할 뻔했잖아. 내가 몸을 던져 지켜주지 않았으면 아주 큰일 났을 거라고. 흥, 세심함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어!”
소년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그 날선 말투에 류제는 머리 한구석에 구겨서 처박아 두었던 장면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남은 렌의 여장한 모습과 흐릿한 유네의 모습만 기억할 뿐 나머지는 전부 기억 속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던 류제는 재활용이 안 돼서 툭 튀어나온 그들에 대한 정보에 무릎을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라우라 축제!”
“어머머, 기억해 주다니 영광이네. 오랜만이야, 잘생긴 소년. 머리를 넘기니 훤칠하구나.”
그녀가 집사복 차림의 류제의 모습에 눈에 하트를 그리며 행복해했다. 여장을 하지 않아 수염도 수북한 그대로인데 여장한 것처럼 잔뜩 애교를 부리는 징그러운 몸짓에 식겁한 류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류제가 볼링공처럼 사람을 던져버리는 바람에 수염 달린 숙녀에게 압착되어 반쯤 죽을 뻔했던 재경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숙녀들의 몸무게와 땀 냄새에 당해 엉망이 된 꼴인 그가 범인 류제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 하는 짓이야, 류제! 너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냐?! 간식 뺏어 먹는 게 그렇게 분해?”
“맞아, 아무리 네가 잘생겼어도 소년을 다치게 한 건 용서할 수 없어. 우리가 몸을 바쳐 구해주지 않았으면 이 소년의 연약한 몸뚱이가 부서졌을 거라고!”
“아저씨들 때문에 더 죽을 뻔한 거거든요? 그리고 안 연약하거든요? 완전 튼튼하거든?!”
재경이 아직도 코끝에서 아저씨들 땀 냄새가 난다며 도리질을 쳤다. 여장 메이드가 힘자랑을 하는 등 귀여운 짓거리를 하자 두 아저씨가 잘 되었다며 양옆에서 꼭 끌어안아 주었다.
벽에 낀 고양이 꼴이 된 재경은 저리 비키라고 버둥거렸지만 들은 척도 안 한 그들은 석상처럼 꼼작도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류제는 그를 구해줄 생각도 안 하고 그 앞에서 끄덕거리며 납득하느라 바빴다.
“그때 그분들이었구나. 나는 또.”
“또 뭐!”
“또 이상한 사람들에게 시비라도 걸린 줄 알았지. 보는 눈 많은 곳에서 외부인이랑 다툼 생기면 선생님한테 벌 받을걸.”
변태한테 당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간 더더욱 길길이 날뛸 렌의 반응을 염려한 류제가 적당히 거짓말 양념을 쳤다. 렌에게 아는 척한 사람이 화장실에서 치근덕거렸다던 변태가 아니라 저 아저씨들이라면 안심…인가?
푹신푹신한 수염을 비비며 렌에게 과한 애정 표현을 하는 그들을 보자니 다소 불안하기는 하다. 저 사람들이랑 변태랑 무슨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렌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다행이었다.
“소란이 있긴 했지만 8반 승리! 이야, 류제 신리. 우리 반 귀염둥이를 이렇게 이겨버리다니 역시 대단한걸.”
수상쩍은 종이들이 가득 든 바구니를 끼고 등장한 판돈 걷는 바니걸이 류제의 손을 들어 승리를 인정했다.
승자와 패자 간의 나름의 룰도 있는지 억지로 떠밀려 다시금 무대에 선 류제는 그가 패대기친 거구의 남학생과 여자 친구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화해의 악수를 했다.
류제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2반 학생들이 그들에게 메이드 카페 홍보 시간을 주었다. 부끄러운 차림으로 피켓을 들고 있는 메이드와 집사 콤비가 관객들 앞에 마지못해 섰다.
나서서 판을 깔아주니 왠지 이긴 보상이 아니라 벌칙 같았지만 그들은 관객들의(특히 두 명의 수염 난 숙녀 위주의) 유별난 호응을 받으며 성황리에 홍보를 마쳤다.
“아, 싫다고요!”
“어허, 잠깐만 시간 내달라는데도. 이 누나들 말 들으면 손해 볼 것 없다니까. 자다가도 떡이 떨어져요.”
볼일을 다 봤으니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숙녀들은 여장의 혼이 불타올랐는지 질리지도 않고 주접을 떨었다.
숙녀들은 재경의 서툰 화장을 고쳐주겠다고 설득했지만 라우라 축제의 악몽이 생각난 재경은 절대로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기껏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아쉽잖아. 그렇게 튕기지 말고. 어.서.♂”
“안 아쉬운데요. 진짜 안 아쉬워요. 윽, 저리 가……!”
재경이 그에게 들이대지는 리무버와 세안 도구를 저지하며 강력하게 주장했다. 개인 영역에 침범하는 숙녀들의 악행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저지한 재경은 류제에게 아련한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도망가자. 제발. 류제. 제바아알!
그 필사적인 눈빛을 읽은 류제는 렌의 질겁하는 얼굴이 귀여워서 모르는 척 감상하다가 여기서 정말로 내버려 두면 거짓말 안 하고 한 달 동안 이 일로 빈정거릴 것 같아 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이것 참. 좋은 제안이지만 우리 메이드가 싫다고 하네요.”
신사답게 인사한 류제가 시원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최면이라도 걸린 양 입이 헤 벌어졌다. 그 틈에 그들에게서 렌을 빼앗아 보쌈하듯 안은 류제는 숙녀들이 반박하기 전 냅다 반대편으로 뛰어 도망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에서 유연하게 군중들을 피한 류제는 뒤에서 들려오는 숙녀들의 아련한 외침과 그에 대한 렌의 답변을 못 들은 척했다.
“너희 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8반이랬지? 소.년.”
“싫어어!”
재경이 소름 끼쳐 하며 류제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쫓아올까 계단 층수를 가볍게 뛰어올라 건물에서 벗어난 류제는 신관을 덮친 촉수 일로 나라카의 물품이 유입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관리 감독하고 있는 네네 슈만과 그 옆에 있는 어떤 늑대 귀 군인, 백장미 부대를 대표해서 제립학교 교장에게 안부 인사를 하러 온 포르테 들라크루아, 세라가 있는 응급처치 동아리 부스를 차례대로 지나쳤다.
물론 도망가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녀들이 류제를 알아보고 고개를 돌린 것을 두 사람 다 눈치채지 못했다.
재경의 비명과 함께 구관과 신관을 연결하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고 숨을 고른 류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못 오겠지.”
“하, 진짜 위험할 뻔했다. 으으, 진짜 싫어.”
“해준다는데 그냥 하지 그랬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는데.”
저 숙녀들에게 안 어울려서 그렇지 그녀들의 화장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반 친구들의 서투른 화장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은데 그렇게 싫나.
콩깍지 씐 그의 생각에 답변하듯 재경이 큰 소리로 반박했다.
“미쳤냐?! 사나이 자존심이 있지 내가 왜 진지하게 여장을 해야 하는데? 메이드복 입어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하지 화장을 다시 하긴 개뿔.”
아무래도 화장까지 용납하기엔 렌의 자존심의 어딘가에 걸친 불문율과 대립되는 모양이다.
류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투덜거림에 동조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재경은 불만 터진 할머니처럼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면서 터덜터덜 앞장섰다.
“하여튼 사람들도 웃기다니까. 사람을 우스운 꼴로 만드는 게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진짜 축제만 아니었으면 절대 안 해. 도대체가 어쩌다가 내가…….”
중얼중얼.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재경은 이것도 일종의 삼류 악역 렌 지미가 당해야 하는 불행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짜증을 달랬다.
어차피 축제에서도 삼류 악역 렌 지미는 히로인들이나 주인공에게 시비를 걸다가 고통받는 역할이니까 이런 역할도 눈 질끈 감고 해주고 있는 거다. 근데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어머, 신리 군과 지미 군이지요? 오랜만입니다. 저 기억하시려나요?”
발을 굴리며 식식 투덜거리고 있는 재경이 어디선가 들어봄 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홀쭉하고 키가 큰 여성과 배가 나오고 키가 작은 남성이 두 사람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 유네의…….”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분명 여름방학 때 잠시 신세를 진 유네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건강한지 유네의 아빠는 배가 더 나왔고, 유네의 엄마도 집에서 봤을 때보다 더 우아한 인상이었다.
류제도 그들을 알아보고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류제를 본 유네의 엄마가 몹시 좋아했다.
“세상에, 저번에 제대로 못 봤는데 신리 군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네요. 둘 다 축제를 열심히 즐기시고 계신 것 같아 저도 절로 즐거워집니다.”
“아…하하하.”
메이드복에 집사복을 입은 이 부끄러운 상황 속에서 친구의 부모님과 마주하다니 껄끄럽기 짝이 없다.
류제가 렌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과 유네의 부모님이 유네의 친구들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건 다른 듯 비슷한 감정이겠지만 친구 부모님 앞에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재롱을 부리다니 류제는 되레 쑥스러웠다.
“저희는 축제 때 학교를 개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유네가 잘 지내고 있나 확인할 겸 찾아왔어요. 들었던 대로 학교가 넓고 좋네요.”
그녀가 다른 상급 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교육 환경에 만족스러워했다.
이전에 집에 초대했던 두 친구 덕분에 여자란 정체를 밝혔어도 반 친구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유네가 편지에 저 둘의 칭찬을 얼마나 적어놓던지. 그녀는 정말이지 유네를 외면하지 않은 그들에게 감사했다.
“어라, 늘 셋이서 다닌다고 들었는데 유네는 보이질 않네요.”
“유네라면 지금은 반에서 학급 행사를 도와주고 있을 거예요. 저희는 홍보 담당이라서요.”
“어머, 그런가요. 요리 동아리에도 들어갔다고 하던데. 요리하는 걸 구경하려고 했더니만 아직 교실에 있나 보네요. 호호. 혹시 교실까지 안내 부탁해도 될까요?”
유네의 엄마의 부탁에 유네의 아빠가 옆에서 동감하듯 헛기침을 했다.
식겁한 재경이 류제와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교실로 돌아갔다가는 그 숙녀들과 마주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재경이 어떻게든 해보라며 허리를 툭툭 찌르자 류제가 에둘러 거절했다.
“저희는 지금 카페 홍보하고 있어서 돌아가면 열심히 일 안 한다고 욕먹을지도 몰라요. 8반 교실은 1층 건물 오른쪽 끝에 있어서 찾기 쉬우실 거예요.”
“어머, 그렇군요. 바쁘시다니 어쩔 수 없죠.”
“괜히 바쁜 애들 붙잡지 말고 가지 그래요.”
옆에서 유네의 아빠가 어서 가자며 부인을 거들었다.
늘 마땅찮게 노려보고만 있어서 불편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눈치껏 자리를 비켜준다. 아마 몇 달간 보지 못한 딸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일 테지만 덕분에 교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재경이 안도했다.
마지못해 작별 인사를 한 유네의 엄마는 나중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색한 집사와 메이드가 차례로 인사를 하자 그녀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유네의 부모님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도 간간이 귀에 머물렀다.
동시에 한숨을 내쉰 류제와 재경은 서로 힐끗거리다 자기들도 웃긴지 웃음을 터뜨렸다.
“유네네 부모님도 축제를 보러 오셨구나.”
“너도 조심해라. 잘 찾아보면 아세미도 탈출해서 왔을지도 몰라.”
“하하, 그럴 리가 없어. 혼자서 올 만한 데가 아니거든.”
재경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류제가 마냥 마음 놓고 웃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세미의 뒤처리까지 하고 다녀야 하다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유네가 어지간히 걱정되셨나 보다.”
“하기야 유네는 사정이 있으니 교우 관계를 걱정할 만도 하시지. 유네네 아빠도 팔불출 엄청나잖아.”
재경이 쯧쯔 혀를 차며 근처 벤치에 털썩 앉았다.
수신제 1일 차에 플레이어가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유네를 찾아온 유네의 부모님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처음 주인공과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다음번에 유네의 요리 동아리에서 마주쳤을 때는 유네가 친구 사이를 완전히 극복했으면 좋아라, 못 했으면 안타까워하는 소소한 장면 변화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의외로 8월 악몽 관련해서는 다른 이벤트보다 장면 분기가 갈리는 여파가 많단 말이지.
재경이 당시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던 지난달 정황을 떠올렸다. 오늘 있을 세라 쌤의 호감도 이벤트도 그래야 할 텐데.
멋대로 스토리에 개입했다가 호되게 당했던지라 이번 달부터는 이벤트에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재경은 한편으로 불안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대부분 류제의 결정에 따르더라도 혹시 모른다. 재경이 몰래 준비했던 류제와 히로인들의 수신제 스케줄 표를 꺼내 살폈다. 현재 시각은 11시 45분 남짓.
<수신제 1일 차 류제 스케줄 표>
(시각)
10 ?
11 ?
12 ?
1 동아리(고정)
2 ?
3 ?
4 ?
5 카페(고정)
6 카페(고정)
이번 챕터는 주인공이 학급 행사 홍보를 위해 스케줄을 세워 학교를 돌아다니는 시스템이었다. 주인공이 반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스케줄에 맞춰 히로인들의 동아리에 들르면 히로인별 이벤트를 확인할 수 있다.
홍보를 끝내고 반으로 복귀하는 시간은 고정되어 있다. 반으로 돌아가면 주인공은 강제로 서빙을 맡는다. 주인공의 동아리 행사 참여 시간은 같은 동아리에 속한 히로인이 있는 시간대 중에서 고를 수 있다. 다음 날도 비슷한 흐름으로 간다.
아무래도 시스템상 축제 전날 히로인들의 시간표를 대조해서 플레이어가 미리 스케줄을 짠 다음 축젯날 그대로 움직였던지라 현재 수신제의 행동 패턴은 모두 류제에게 달려있었다.
즉, 류제의 입장에서 보면 머릿속에 든 렌과의 데이트 코스가 어떤 순서대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특정 이벤트를 보고 안 보고가 결정이 난다는 의미였다.
“하아, 류제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곧 있으면 고정 스케줄 시간이네. 류제가 이전에 말해준 동아리 행사 참여 시간을 떠올린 재경이 현재 시각과 스케줄 표를 비교했다. 류제가 도서부 부스에 가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다.
“뭘 그렇게 봐? 헉, 벌써 시간에 이렇게 됐네. 나 잠깐 동아리 들러야 하는데. 한 시간이면 되니까 잠깐 가서 구경할래? 애들한테는 미리 말해놨어.”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한 류제가 넌지시 물었다. 역시나. 재경은 스토리대로 행동해 주는 류제에게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