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권-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1) (36/112)

챕터 8. [10월. 수신제(修身祭)와 사랑의 행방] (1)

자랑스러운 키아나트리체 수도 아가타의 금빛 첨탑이 불탔다.

하늘은 무너진 것처럼 새까맣고 땅은 뜨거운 열기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터진 핏물처럼 타오르는 불길이 생명을 갉아먹으며 대지를 녹였다. 광활한 천공 위에서 미래를 향해 흘러가던 은하수는 메케한 연기에 가려졌다.

무너진다. 어떤 것도 남지 못한 지옥도가 여기 있었다. 죽어가는 땅에 고고하게 선 니냐롯트 혼자만이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살아있지만 무력하다.

그녀를 위해 몸을 던진 군인, 함께하던 동료, 그녀가 지켜야 했던 사람들. 죽어가는 그들을 누구도 구원해 주지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이 파멸되는 이 장면을 지켜볼 뿐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그녀보다 좌절한 누군가가 일출 전 밤하늘처럼 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울부짖었다. 그는 갈가리 찢어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목소리로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 세상을 짓이기면서까지 분노한 그가 안타까운 나머지 그녀도 사뭇 슬픔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가증맞게도 안구에서는 흔한 눈물 한 방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누군가가 속삭였다. 심장을 후벼 파는 목소리가 화살처럼 짐승의 울음소리를 뚫고 그녀의 귓가에 박혔다. 그녀가 뒤를 돌았다. 아아, 이건 본 적이 없는 꿈이다. 깊게 후드를 쓴 누군가가 그녀에게 증오를 으르렁거렸다.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상처투성이인 그가 상처받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좀먹지 않은 오른쪽 눈만이 슬픔으로 빛났다. 나른한 가을 해를 머금어 지푸라기처럼 살랑거려야 할 머리카락이 연기를 머금어 끔찍한 몰골이었다.

뒤엉킨 실타래가 만신창이인 로브와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 얼핏 보이는 일그러진 반쪽 얼굴에 낫지 못할 검은 골이 뚫렸다.

원망이 흐르는 눈동자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인류의 평화? 이게 네가 원했던 평화야? 다 너 때문이야. 내가 그렇게나 말했는데 결국 넌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어.]

그가 고통을 억누르며 소리쳤다.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야. 니냐롯트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고고하기 짝이 없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하니 그녀의 잘못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도 이렇게 되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만 잊고 말았다. 그녀가 차마 변명하기 전에 그가 쓰라린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저주했다.

그녀가 그를 향해 손을 뻗지도 못했는데 그의 몸이 부서져 내린다. 너 때문이야. 메아리처럼 그 말만이 그녀의 귓가에 되풀이되다 죄악감이 살을 파고든다.

그녀가 귀를 막았다. 울음소리가 괴롭다. 제발 울지 마. 울지 말아 줘. 류제 신리……!

그렇게 원했지만 울부짖던 검은 사내는 악마처럼 붉은 동공을 빛내며 날개를 펼쳤다.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은 끝내 재가 되어 바람에 사라졌다.

헉. 짧은 숨을 들이켠 그녀의 눈꺼풀이 열렸다.

진득한 식은땀이 그녀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은색 눈동자에 번쩍 새하얀 빛이 반사되었다.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밖을 쳐다보았다. 창문 밖에서는 참담한 천둥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내리쳤다. 저 뇌우가 자신의 탓임을 안 그녀는 다리를 모아 얼굴을 파묻었다. 방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미래에 키아나트리체를 통치할 자가 되어야 했다. 한 나라의 왕녀가 되는 자의 유약한 모습을 누구에게 보여주랴.

그러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오밤중, 기댈 사람 없는 채로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그녀를 지탄하는 목소리는 꿈에서 많이 들었지만 아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힐난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누구지? 아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떠올린다면 괴로워서 마음이 부서질 것 같다. 질끈 눈을 감은 그녀는 슬픔을 삼켰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데 마음은 울적하기만 하다.

그런 그녀 대신 울어주는 것처럼 소나기가 쏟아졌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악몽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 타들어 간 향초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이 새벽에 루이나가 걱정스레 C동 그녀의 방의 문을 두드릴 때까지 악몽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며 마음의 문을 닫았다. 적어도 해가 뜰 아침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이 비를 그쳐야 했다.

* * *

아가타에 가을의 발자국이 깊어졌다.

계절이 바뀐 증거라도 제시하듯 저지를 입지 않으면 추울 정도로 밤 기온이 선선해졌다. 지대가 높은 언덕의 나무는 벌써 단풍이 물들었다. 운동장과 산책로까지 날려 온 말라빠진 나뭇잎이 학생들 발에 자주 알짱거리다 밟혀 바스러졌다.

잎이 옷을 갈아입는 것에 맞춰 학생들의 교복도 하복에서 춘추복으로 바뀌었다. 1학년 남학생들은 진주황색 넥타이에 남색 조끼를 입었고, 여학생들은 버건디 리본에 같은 색의 조끼를 착용했다.

바야흐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지난달에 있었던 사고를 덮어씌우듯 신관의 보수공사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식육식물의 소문을 반복하는 데 질린 학생들은 그보다 다른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맘때가 되면 짝사랑을 하는 학생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사랑의 고목 밑에서 꺄르르 웃는 웃음소리가 심심찮게 조잘거렸다. 신관에서 벌어진 사건이 거짓말인 양 세상은 평화로웠다.

10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학생 축제, 수신제가 몇 주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학교는 그야말로 축제와 사랑을 위해서만 들썩거렸다.

“악을 물리치고 선을 북돋아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기를 기원하는 수신제(修身祭)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서 전통으로 내려오는 학생들만의 축제입니다. 수신제는 작년까지 당일 하루만 이루어졌으나 학생들과의 논의를 통해 올해부터는 이틀로 연장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제군들께 알려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이틀 축제가 세라의 입을 통해 사실로 시인되자 교실이 환호로 가득 찼다. 세라가 어떤 공고를 내렸을 때보다 우렁차다.

역시 어린 학생들에게는 공부나 체력 단련보다는 친구들과 마음껏 어울려 놀 수 있는 축제가 그 어떤 행사보다 즐거운 모양이었다.

세라가 모르는 학생들의 노림수는 더 있었다. 축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부탁하면 합법(?)적으로 선생님들이 수업을 빼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소식을 동아리 선배들에게 미리 전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축제가 끝나고 나면 보충수업이라는 후환이 있었지만 당장에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었다. 선생님들의 전략에 넘어간 학생들은 미래의 일 따위 미래의 자신이 어떻게 할 거라 믿으며 축젯날까지 실컷 놀 꿍꿍이를 꾸몄다.

세라는 그런 학생들을 보며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수신제가 되면 아무리 군인이 되기 위해 어른스러운 척 노력하는 학생들이라도 그 나이대로 돌아간 것처럼 귀엽게만 느껴졌다.

“하나 더 기쁜 소식입니다. 이번 축제에는 사관생도와의 교류를 위해 유례없이 학교를 외부에 개방할 예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제를 보고 즐거워할 수 있게끔 열심히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 초대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가족 친지는 물론 소중한 사람이라면 초대장을 쓸 수 있습니다.”

아가타 인근에 본가가 있는 학생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 비키도 유모더러 놀러 오라고 할까 고민했고, 유네도 부모님을 초대하면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켜 줄 수 있을 거라며 재경에게 속삭였다.

니냐롯트는 황제인 그녀의 아버지는 당연 오시지 못할 거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을 통해 전달해야겠다며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무관심한 류제야 그런 섬세함이 부족하고 또 한창 바쁠 고아원에 연락해서 굳이 아가타까지 축제를 보러 오라기도 애매해서 루나에게 학교 개방의 개 자도 꺼내지 않을 예정이다.

지난주에 보낸 편지에 학교에서 축제를 할 거라는 근황을 적어 보내긴 했지만 그런 날 가족이 없는 렌을 홀로 둘 수도 없으니 누군가가 오는 게 방해였다.

“반장은 이번 주 내로 학급 행사 주제를 정해서 제게 제출해 주세요. 문화 예술 공연 동아리 소속 학생들과 시간을 조율해서 선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나눠드린 유인물을 확인해 보시면 알겠지만 동아리 공연은 축제 이튿날 포크댄스 전까지 시행되며 공연이 시작되면 학급 행사 일정이 종료됩니다. 포크댄스 시간에는 사관생도와 교류의 장이 있을 예정이니 일정표 잘 숙지하시길 바랍니다.”

“기대돼서 미칠 거 같아. 사관생도랑 포크댄스라니. 어쩌면 좋지?”

“우리 반 학급 행사는 뭘 하게 될까?”

신이 난 학생들은 교탁에 서있는 세라의 존재도 잊고 뒤를 돌아보며 친구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세라의 영혼이 그 틈을 타 밖으로 후루룩 빠져나갔다. 외부인에게 학교를 개방하기 때문에 세라와 같은 선생님들은 학교 안전 문제 때문에 수신제 당일까지 영혼이 갈려 나갈 것이다. 반에 부상자라도 생기면 그것대로 책임이 생기기 때문이다.

거기에 괜히 학생들에게 집적거리는 사람들을 예의 주시해야 하는 데다가 수신제에 참가할 동아리 고문 역할도 해야 하고 기숙사 사감에 담임 역할에 정신이 없는데 그녀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백장미 부대 소속 네네 슈만까지 학교 경비로 온다고 하니 세라는 이번 달만 눈 딱 감고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녀는 오늘부터 축제가 끝날 때까지 없는 목숨이라고 여길 것이다. 세라의 눈가가 피로로 파르르 떨렸다.

그럼에도 학생들 대신 책임을 져야 할 어른인지라 세라는 선생님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가 교탁을 두들겨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어찌 되었건 제립학교 학생들이 학생처럼 놀 수 있는 기회는 얼마 없으니 그네들을 사랑하는 그녀가 힘내서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기운을 받은 세라가 심호흡 끝에 활기차게 말했다.

“제군들의, 제군들을 위한, 제군들에 의한 축제를 만들어 부디 재미있는 추억 쌓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제군들의 상상력을 기대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학창 시절에는 축제 때 어떤 거 하셨나요? 참고해도 되나요?”

“글쎄요.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민감한 질문에 세라가 말을 아꼈다.

그녀의 기억에 인상 깊게 남은 수신제는 9년 전, 그녀가 제립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도 매번 시시비비가 붙었던 네네 슈만과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툰 적이 부지기수였다.

그녀가 제립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시절 1학년 때는 학교에 마족이 쳐들어왔었고, 2학년 때는 5.22 마족 토벌로 나라가 시끄러워 지금처럼 축제가 활성화된 것도 아니라서 학생들이 상상하는 재미난 이야깃거리도 없었다.

학생들의 꿈을 깰 수야 없지. 세라는 세라의 비밀주의에 싫증을 내는 학생들의 아양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럼 비키 학생, 학급 회의를 부탁해도 될까요?”

“네, 선생님. 맡겨주세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선생님은 언제나 우리 반을 응원합니다.”

세라는 응급처치 동아리 부장에게 축제 부스 관련해 전달할 사항이 있어 비키에게 뒤를 맡기고 교실을 떠났다.

상냥한 웃음을 몰래 걷고 교실 문을 닫은 그녀의 어깨는 몹시도 피곤해 보였다. 세라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볼을 두어 번 두들기고 축 처졌던 몸을 바르게 세웠다. 이내 그녀는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걸어갔다.

선생님이 사라지자 교실 안은 금방 축제 이야기로 달아올랐다. 학급의 책임을 전가받은 비키는 주도권을 잃고 방향이 엇나가는 교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류제, 뭐 하는 거야. 판서해야 하니까 빨리 나와! 회의 시작할 테니 다들 집중해. 학급 행사에 의견 있는 사람 손들어 줘.”

“으, 귀찮아.”

호랑이 대신 왕이 된 여우처럼 구는 반장 비키가 교탁을 붙잡고 정열적으로 외쳤다. 분명히 무조건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상 비키는 올해 수신제에서 반별 매출 1위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관심 없는 일은 아무래도 좋은 류제가 마지못해 교탁으로 향했다. 부반장으로서 잔심부름에 서기 역할을 하러 가는 그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저요! 카페 어때? 미들 스쿨 때 상급 학교에 가서 봤는데 제일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야. 축제 끝나면 그 돈으로 체육대회처럼 뒤풀이하자!”

류제가 교탁에 서자마자 모였던 의견이 우르르 쏟아졌다. 미적미적 분필을 집어 든 그가 느리게 판서했다. 하얀 가루가 바스스 떨어지며 모범생 글씨가 칠판에 미끄러졌다.

1. 카페

“에이, 그냥 카페는 재미없잖아. 특별하게 춤을 출 카페를 만드는 건 어때? 스탠딩으로.”

“좋지만 시간과 공간이 너무 제약되지 않을까. 카페보다는 클럽 같고. 선생님들이 싫어할 것 같아.”

“그래도 버리기 아까운 생각인걸.”

1. 카페

2. 춤 카페

“난 유령의 집이 좋아. 사람이 바보같이 놀라는 거 보고 있으면 재미있지 않니?”

“하하, 그것도 괜찮겠다.”

“유령의 집은 다른 반에서 한다는 말이 있어. 왜 그 ‘환영’ 어빌리티를 가진 애네 반.”

“그러면 경쟁이 안 되겠네. 우리 반엔 그런 계열 어빌리터가 없으니까.”

1. 카페

2. 춤 카페

3. 유령의 집

참으로 무난한 의견들이었다. 그녀들 딴에는 미들 스쿨에서는 할 수 없었던 제립학교의 축제가 신선할지도 모르겠으나 이 게임 말고도 다른 미연시 게임을 여럿 공략해 본 바 있는 재경은 일뽕 미연시에서 벌어지는 학교 축제는 거푸집이라도 있나 의심하며 혀를 내둘렀다.

매번 카페, 유령의 집, 카페, 카페. 커피 못 먹어서 전생에 탈이라도 났나 왜 이렇게 카페에 안달 난 거야? 카페 아르바이트에 대단한 꿈이라도 꾸나. 자영업에 서비스직 노동이 얼마나 짜증 나는 줄 알아? 난 그래서 그런 알바 안 했지만.

“음~ 나는 뭘 해도 상관없지만 기왕이면 예쁜 옷이 입고 싶어.”

본가가 포목점을 하는 친구가 손을 들었다. 그 말에 일심동체로 반 여학생들이 솔깃하게 귀를 기울였다.

열일곱 사춘기. 한창 어른이 되고 싶은 나이다. 다른 평범한 학교 학생들은 최신 유행하는 옷을 입고 주말마다 어른처럼 꾸며 번화가로 놀러 다닌다는데 교칙이 깐깐해 그럴 기회가 좀처럼 없는 제립학교 학생들은 수신제를 기념으로 교복을 벗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떠올랐다.

게다가 화장! 군에 들어가면 얼굴에 칠하는 게 위장 크림밖에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전에 다른 학교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꾸며보고 싶었다.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기왕 학교를 개방하는 축제가 아닌가. 사관생도와 교류도 있다는데 다 같이 하면 용기도 난다. 그리고 사람이란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옷까지 사면 예산이 부족할지도 몰라.”

“만들면 되지. 우리 집 포목점 하잖아. 재료는 많아.”

“에이, 스물세 벌을 어느 세월에 다 만들고 있어. 그러다 축제 끝나겠다.”

“나 화장품은 있는데. 이번에 집에서 몰래 가지고 들어왔지롱.”

당당하게 교칙을 어겼다는 주장에 비키의 눈가가 움찔거렸지만 축제니까 이번만큼은 잠자코 넘어가 주기로 했다. 왕녀님께서도 반 학생들의 자유를 존중하시고 계신데 내가 태클을 걸 수야 없지.

비키는 얌전히 앉아서 학생들의 회의를 경청하고 있는 왕녀를 보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화장품은 너도 있지 않아?”

누군가가 떠보자 짧은 치마에 손톱을 꾸미고 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매일같이 교칙을 어기고 다니는 게 일상인 ‘무게’ 어빌리터와 그 친구들이 싫증 난 얼굴로 기대감을 외면했다.

화장품 가격이 얼마인데 이 인원이 돌려쓴단 말인가. 웃기지도 말라 해라.

“앗! 좋은 생각 났다. 최근에 번화가에서 유행하는 메이드 카페는 어때?”

“하필이면 메이드 카페야? 다른 카페도 많잖아.”

“들어봐. 유니폼처럼 검정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만 사면 비용도 절약되고 거기에 자기가 원하는 액세서리를 다는 거야. 기장을 줄여도 유니폼이라고 우기면 되니까 선생님들 잔소리도 덜할걸.”

“어서 오세요, 주인님~ 이런 말 하면서? 생각만 해도 소름 끼쳐. 난 접객은 못 하겠다.”

“후후후. 노림수는 하나 더 있지. 마지막엔 대망의 포크댄스에서 마음에 드는 사관생도에게 내 미모를 자랑하는 거야. 드레스 겸용인 거지.”

“얼씨구. 혼자서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있네. 그 자랑이 먹히긴 한다냐?”

“렌, 너는 요망한 주둥이 좀 다물어. 때린다?”

“돈도 많이 벌겠지? 메이드 카페가 매출이 꽤 좋다고 하던데. 거기 사람 정말 많더라고.”

돈 욕심 많은 학생이 손으로 종이돈을 만지는 시늉을 하며 침을 닦았다. 메이드복을 입고 장사를 한다라. 그녀들이 타깃이 될 고객과 자신들의 욕망을 적당히 저울질하며 수지타산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짧은 치마 입을 수 있으니 난 찬성!”

“카페라면 요리부인 유네도 있고, 할 일 없는 렌도 있으니 메뉴 개발도 쉬울 거 같은데?”

“뭐? 나? 날 왜 끼냐?”

일사천리로 흘러가던 중 귀찮은 것을 떠맡을 것 같은 불길함에 재경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삼류 악당 렌 지미는 가만히 구석에 찌그러져서 청춘을 즐기고 있는 히로인들과 주인공을 질투하며 껄렁껄렁 놀려대기만 하면 되는 거다. 메뉴 개발은 무슨. 잡일 그 이상 뭘 더 하란 말인가. 절대 싫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런 재경의 반박을 늘 그랬듯 괜한 투정으로 흘려들었다. 삐친 재경이 입술을 불쑥 내밀고 듣는 척도 안 한다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메이드면… 류제는 집사가 되는 건가?”

“와. 대박 좋은데?”

키 크고 잘생긴 훈남 집사라니. 그런 집사가 있는 저택에서 살고 싶다. 상상만 해도 군침이 넘어갔다.

남학생 극가뭄인 제립학교 여학생들에게 어필하기도 좋고 그를 핑계로 류제의 앞머리를 슬쩍 넘겨버리기까지 하면 이틀 내내 잘생긴 얼굴을 생으로 감상할 수도 있었다. 일석이조다.

반 여학생들이 칠판 앞에 멀뚱멀뚱 서있는 류제를 빠르게 스캔했다. 저번 체력 검사 때 본 류제의 몸과 대조해 각자 견적을 뽑은 그녀들은 꿍꿍이속 가득한 얼굴로 히죽거렸다.

“얼씨구.”

욕구가 아주 거리낌이 없다.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노림수가 다른 곳에 있었구만. 재경이 어이가 없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까지는 이번 챕터의 인트로로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메이드 카페를 하든 뭘 하든 류제는 주인공이니까 축제 내내 사람들에게 시달리게 되어있고 자신이야 삼류 악역이니 대충 어디선가에서 굴러먹겠지. 하지만 일러스트로 나오지 않은 집사 버전의 류제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니 새로웠다.

류제 자식, 이번 챕터에서도 고생깨나 하겠구만. 잘생긴 것도 피곤하다니까.

“메이드 카페는 다들 찬성인 거야? 다른 의견은?”

귀족인 비키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메이드의 환상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축제라는 특성상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노리기 때문에 반 학생들의 의견을 따랐다.

단연 회의를 주도하는 목소리 큰 학생들은 모두 찬성. 아무래도 류제나 재경의 의견은 통하지 않을 분위기다.

“그럼 접객하고 홍보, 요리 담당을 나누어야 하는데. 지망하는 파트 있어?”

“일단 류제는 무조건 홍보!”

눈빛이 달라진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8반의 자랑 류제가 집사복을 입고 메이드 카페를 홍보하면 안 벌릴 돈도 벌릴 거라는 게 그녀의 지론이자 욕심이었다.

“그리고 렌은 요리!”

“윽. 뭐야, 아까부터 내 의견은 그냥 무시하기냐?”

“기왕이면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안 그래?”

“카페면 제과를 해야 하잖아. 난 과자 만들 줄 몰라. 네 말대로 잘 못하니까 패스.”

재경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보기 좋게 빠져나가니 다른 학생들이 짜게 식은 얼굴로 흘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재경은 억울했다. 아니, 뭐 나는 요리라면 뭐든 할 줄 아는 줄 아나. 난 국, 탕, 반찬 아니면 만든 적 없다고. 그것도 순도 100퍼센트 할머니 취향으로! 제과랑 요리는 다른 영역 아니야? 제과가 얼마나 비싸고 더럽게 힘든데. 못하겠으면 마트에서 파는 뻥튀기라도 사서 팔든가. 흥이다.

“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렌도 홍보로 가야겠네. 렌한테 접객 맡겼다가는 손님이랑 싸움이나 할 테니까 조심해야겠지.”

“잘 아네.”

당연히 그럴 거라며 팔짱을 낀 재경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동아리도 안 들었으면서 학급 행사에 영 비협조적인 태도다. 회의를 주도하던 학생들이 괘씸한 재경을 대상으로 작당하듯 수군거렸다.

“메이드복도 좋지만 카페 인테리어는 어떻게 할 건데?”

“류제 집사복에 빠져서 제일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었네. 그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일단 교실을 두 부분으로 나누자. 비키 님이나 유네의 의견을 토대로 컨셉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차를 내올 잔은 어쩌고?”

“그것도 문제야. 도자기 찻잔은 비싸겠지? 예산보다 지출이 크면 어떻게 해? 갹출해야 하나?”

“난 돈 없어!”

“그건 내가 준비해 줄게.”

비키가 가장 어려운 희생을 흔쾌히 자처했다. 그녀도 덩달아 신나 보였다. 재경은 별일이라며 비키를 흘기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학교 축제라. 이런 날엔 학교를 안 나와서 분위기를 모르는데. 그도 괜스레 기분이 싱숭생숭해졌다. 뭐 어때. 나는 여기서 새로 태어나기로 했고, 옛날 일 따위 마음에 담아둬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여학생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나가는 메이드 카페를 기대하며 오밀조밀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다양한 생각이 모여 구성하는 공동 과제의 첫 작업은 말썽 없이 순조로웠다.

다만 일국의 고귀한 왕녀에게 대접이라는 천한 일을 맡길 수 없어 니냐롯트는 학급 행사의 준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녀가 있으면 친위대 일로 불편하고 축제 준비는 물론 당일에도 번거로워질 뿐이니 니냐롯트가 그렇게 하도록 일부러 자처했다.

반별로 내려온 예산 분배, 옷 수선, 액세서리 사기, 메뉴 개발 등은 조예가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시간을 들이기로 했고 동아리 활동이 겹친 친구들을 위해 시간별로 접객과 홍보와 요리도 로테이션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너희들을 보자니 걱정만 드는 게 내 잘못은 아니지?”

맞춤형 접객복(이라 하지만 결국 메이드복이다) 수선 담당이 된 수예부원 몇몇과 그 친구들을 확인한 재경이 눈가를 실룩거렸다.

한 놈은 손재주 더럽게 없는 걸로 유명한 전 체육대회 응원 담당이다. 간신히 구색만 갖췄던 그 조악한 응원 물품을 떠올리자면 재경은 이번 축제도 까마득했다.

무슨 자신감인지 그녀는 고자세로 턱을 빼더니 줄자를 쭉 빼 들었다.

“알아서 다 만들 거니까 걱정하지 마셔. 나중에 치수 재야 하니까 살이나 빼고 있어.”

“그러면서 나한테 수습해 달라 하지 마라. 이번엔 진짜 안 도와줄 거다.”

“렌 주제에 쪼잔하기는. 왜 축제에 비협조적이야? 이런 거 제일 좋아하게 생겼으면서.”

그녀가 찔려서 투덜거렸다. 수선하다가 정 답이 없으면 무적의 살림꾼 렌에게 도움을 요구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옷 담당인 그녀들은 누군가에게 뭘 들었는지 렌을 대상으로 히죽거리며 작당하는 낌새였다.

사람들 앞에서 재롱을 부릴 광대로 류제만 제물로 바칠 셈이었는데 그녀들의 표정을 보자니 등 뒤가 오싹했다. 누가 뭐래도 나는 평범한 삼류 악당 역할만 할 건데 왜 이렇게 불길하지?

“그래도 렌 군이 집사라니 진짜 멋있겠다! 기대돼.”

“흥, 멋있기는. 바보처럼 웃기겠지. 집사는 무슨. 집사가 얼마나 엘리트 교육을 받는지 몰라? 집사복 렌은 서커스 단장 아냐?”

대저택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있던 비키와 유네가 옷 담당 친구들 옆에 와서 거들었다.

재경은 이 나라 최고 수준의 재력을 가진 두 사람의 언동에 입을 비죽거렸다. 극단적인 평가가 어처구니없다.

유네 이 자식은 진짜 메이드들하고 진짜 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제에 멋있겠다는 말을 하다니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비키 저 비열한 악담가 자식. 아무리 그래도 서커스 단장은 너무하지 않나. 내가 하자고 했냐? 굳이 나한테 찾아와서 뭐야. 기만하는 거냐?

“가짜 집사 티 나게 행동하다가 셀로니아가에서 준비한 다기나 깨지 마.”

“훗, 집안 살림 거덜 나는 게 네 가문 부흥보다 빠를 거다. 히히히. 두고 봐라.”

“일부러 깨뜨릴 셈이구나?! 진짜 정강이 백 대는 찰 줄 알아. 내가 다 보고 있을 거니까 말야!”

재경이 유령 흉내를 내며 킬킬거리자 비키가 집에 곱게 모셔진 채 아무도 쓰지 않았던 어머니의 유산을 떠올리며 분개했다.

재경은 비키에게 한마디 더 해주려다가도 축제가 기대되는 듯 상기된 비키의 얼굴을 보자니 뭐라 더 놀리지 못했다.

“농담도 못 해.”

재경도 은근히 축제를 기대했지만 주제 파악만큼은 잘했다. 삼류 악역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렸다가 또 무슨 나비효과가 벌어질까 재경은 이번 스토리에 깊게 개입하지 않을 셈이었다.

이번 달부터 다시 시작되는 호감도 이벤트는 이틀간의 축제 기간을 걸쳐 세라, 비키, 미나 순으로 이루어졌다.

비키와 유네가 악몽을 극복한 증거를 확인하고 머릿속을 쥐어짜 낸 결과 재경은 세라 또한 이번 호감도 이벤트 어딘가에 악몽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증거를 남겨놓았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번 축제에서 네네 슈만과 세라가 직접적으로 부딪히게 되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추가로 이번 챕터에 중요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이번이 다섯 번째로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비록 한 개는 실패했지만 이번에 성공하면 비키의 호감도는 4로 괜찮게 마무리될 것이다. 확률의 안전상 비키 루트로 가긴 글러 먹었지만 실패하더라도 혹시 모를 왕녀의 진엔딩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미나는… 뭐, 미나 루트로 절대 안 갈 거고 이번 이벤트로 미나의 호감도가 3이 되면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되겠지. 내가 신경 써봤자 류제가 알아서 할 문제겠지만.

근데 미나의 악몽은 실패로 쳐야 하는 거야, 성공으로 쳐야 하는 거야? 흥, 그 사악한 마족은 분명 내가 없는 틈을 타 성공으로 만들었을 거다. 그러니까 류제랑 미나가 저리 친해진 거 아니겠어. 제기랄.

“나는 도서부 축제 부스 때문에 회의를 해야 해서 이만 갈게. 미나가 기다리고 있다 하네.”

“같이 나가자. 나도 농구하러 갈 거야.”

학급 회의가 끝나고 여학생들의 수다로 시간이 늦어지자 류제가 먼저 가방을 들었다. 왕녀를 포함해서 돌아갈 학생들은 이미 교실을 떠났고 어차피 남아봤자 잡일이나 시키거나 쓸데없는 말만 할 테니 재경도 가방을 챙기고 류제를 뒤따랐다.

진작 동아리에 가거나 하교해야 할 시간임에도 축제 준비로 학교 내가 시끌벅적했다. 복도 밖까지 여학생들 웃음소리로 정신이 없다.

도서부의 축제라. 재경은 안경잡이들밖에 없는 그 재미없는 동아리도 축제를 다 한다면서 킬킬거리다 확인차 물었다.

“너네 동아리는 뭐 하는데?”

“독후감 문집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데. 아니면 토론회?”

“윽, 끔찍하군. 듣기만 해도 재미없어 보여.”

“나도 그렇게 생각해.”

공감한 류제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책에 둘러싸여 고상한 말만 할 것 같은 동아리인지라 축제 때 재미난 걸 할 거라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했다. 차라리 집사 차림이 낫지, 도서부의 수신제는 모범생인 류제에게도 고역이었다.

게다가 토론회라고? 남들 앞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구구절절 내뱉는 취미 따위 없는 류제에게 더욱 싫은 목록이기도 했다.

“그러게 누가 그런 재미없는 데 들어가래? 뭐, 기왕 하기로 한 거 힘내라만은. 미나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고.”

“죄 없는 미나 그만 괴롭혀. 하아, 이따 저녁 먹을 때 보자.”

짧은 시간이나마 겨우 둘이서 대화를 하나 싶었는데 벌써 헤어질 시간이다. 축 처져서 작별 인사를 한 류제가 힘없이 도서부 임시 동아리방을 향했다.

류제가 사라지는 걸 멀리서 지켜본 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룰루랄라 뜀박질을 했다. 그는 기숙사에 돌아가기 전 자신처럼 축제 준비에 휘둘리기만 하는 다른 남학생들과 함께 내기 농구를 할 예정이었다.

“왔다. 잡아!”

“후냐앙!”

축제 분위기에 전염된 재경이 흥겹게 콧노래를 부르던 찰나 한 인영이 그를 덮쳤다. 매일같이 고양이 귀를 내놓고 다니는 여학생이 재경의 머리에 헝겊을 씌웠다.

“붙잡았냥!”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사태 파악이 되기도 전에 수상한 자들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던 재경은 자신의 사지를 단단히 붙든 네 명의 손길이 두려워 성급하게 버둥거렸다. 발이 지면에 닿지 않아 좀처럼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디서 납치 공작을 보고 배운 건지 머리에 헝겊이 씌워진 채 꼼짝없이 끌려간 재경은 낡은 창고 안 의자에 강제적으로 앉혀졌다.

재경의 머리에 둘러진 헝겊이 풀렸다. 푸하. 재경이 간신히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들지 않아 습하고 어두컴컴한 곳에 경찰 취조하는 곳처럼 머리 위 전등 하나만 빛이 났다.

화가 난 재경이 납치범들에게 외쳤다.

“이 짜식들이 뭐 하는 짓이야!”

“후후후, 이러면 더 이상 도망 못 가겠지.”

후냐앙 소리 들을 때부터 짐작한 것이지만 질리지도 않고 또 이놈들이다.

밴드부라고 자칭하는 네 명의 1학년 여학생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러브 콜을 받고 있는 재경은 이런 인기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너네 진짜 끈질기다. 내가 싫다고 몇 번을 말했냐?”

뭐 이런 끈질긴 애들이 다 있냐며 재경이 식은땀을 흘렸다.

물론 이능배틀 학원물에서는 학교 축제가 총집합 편 느낌이 있는 건 안다. 그러니까 류제를 상대로 겨뤄보았던 학생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딸려 나오는 것도 그러려니 한다.

근데 그 활동에 날 끼워 넣지는 말라고! 난 그냥 평범한 삼류 악당이란 말이야!

아, 근데 렌 지미는 축제 때 자세히 뭘 했더라? 매번 건들거리면서 시비 거는 장면밖에 생각이 안 나는데.

뭐든 밴드부는 안 했다. 그러니 더욱 확실하게 거절해야 했다.

“에―칫!”

재경의 고뇌에 산통을 깨며 고양이 소녀가 크게 재채기를 했다. 잠시 얼굴이 완전히 고양이가 되었던 그녀는 코가 아픈 듯 찡긋거리며 훌쩍거리는 코를 닦았다.

“야, 너 며칠 전부터 왜 자꾸 재채기를 그렇게 해? 설마 감기 걸린 건 아니지?”

“아니양……. 이상하냥. 요즘 들어 어빌리티 조절이 안 된다냥.”

재경은 다음 달에 있을 고양이녀의 하드 트롤링을 떠올리고 몸을 움찔거렸다. 여기서 조심하라는 말을 꺼냈다가는 다음 달 이벤트를 조질 수가 있으니 재경은 하고 싶은 말을 꿀떡 삼켰다.

“뭐든 기타 솔로 칠 때만 안 하면 돼. 삑사리 나면 꼬리를 밟을 거니까.”

“히잉, 너무하냥.”

“너는 한번 실수하기 시작하면 막 나가잖아.”

“그럼 니들끼리 잘해보셔. 난 간다.”

“가긴 어딜 가?”

기회를 틈타 재경이 의자에서 일어서려 하자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비’ 어빌리터가 살벌하게 웃었다. 재경은 의자와 자신의 손에 걸린 수갑을 보고 진짜 얘네들은 진짜배기 미친년들이구나 오싹해졌다.

‘마비’ 어빌리터가 손에 열쇠를 달랑달랑 들고 히죽거렸다.

“입부한다고 할 때까지 어림도 없어.”

“야…야! 이 또라이들아. 너네 이러다가 잡혀가!”

“걱정 마. 아침 점심 저녁은 우리가 잘 챙겨서 먹여줄게. 아아~”

‘가시’ 어빌리터가 재경에게 매점에서 사 온 요거트를 먹이려고 했다. 재경은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재경에게 억지로 하얀 요거트를 밀어 넣었다. 강제로 플레인 요거트를 입에 문 재경이 시기만 한 그것을 간신히 식도로 넘겼다. 무슨 고문이지 이건.

“화장실도 준비되어 있어.”

‘투시’ 어빌리터가 이번엔 빈 페트병을 꺼내 들었다.

그녀들의 진심이 느껴진 재경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 애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패배에 대한 복수라면 류제한테 직접 해!”

“복수? 에이, 우리가 그렇게 속 좁아 보이니? 류제한테 졌다고 아직도 꿍하게. 우리는 그냥 공연이 하고 싶을 뿐이야.”

“이 학교에 노래 부를 애가 나밖에 없냐? 다른 애 찾아!”

“남학생 중에는 재목이 너밖에 없어. 그리고 우리는 밴드부 홍보를 위해서 남학생이 필요하지.”

네 명의 여학생이 재경의 앞에 일렬로 서서 성큼 다가와 히죽히죽 웃었다. 단 하나뿐인 광원이 위에서 내려와 그녀들의 웃는 얼굴을 비췄다. 그야말로 B급 호러 영화 같았다.

재경은 자신의 팔에 잠긴 수갑과 그녀들이 들고 있는 것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열쇠, 요거트, 페트병. 이것들 진심이다. 진짜로 안 한다고 하면 여기에다 감금시켜서 한다고 할 때까지 괴롭힐 셈이다.

재경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재경은 결국 졌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 말하는데 임시 입부야. 수신제 때 말고는 절대 노래 안 불러.”

“오예! 거봐, 조곤조곤하게 설득하는 것보단 이런 전략이 잘 먹힌다고 내가 그랬지?”

이 계획을 주도한 것처럼 보이는 ‘마비’ 어빌리터가 사악하게 웃었다. 저번 체육대회 결승전에서 봤을 때에도 놀랐는데 새침하게 생긴 주제에 어빌리티에 걸맞게 성질머리가 대단하다.

그녀들은 일이 잘 풀렸다며 저들끼리 하이 파이브를 하며 좋아했다. 전교생 앞에서 망신당할 걱정에 재경이 죽을상으로 물었다.

“몇 곡을 하면 되는데?”

“다섯 곡!”

그녀들이 자랑스레 손바닥을 펼쳤다. 대충 한 곡만 부르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 다섯 배나 되는 양에 재경이 질색했다.

“다…다섯 곡이나 부르라고? 너무 많잖아!”

“고작 다섯 곡이야. 한 스테이지 공연하는데 적어도 다섯 곡은 돼야지. 그래야 30분을 채울 수 있거든.”

“으…….”

거절해도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으니 적당히 구슬려서 빠져나가려고 했던 재경을 원천 봉쇄하듯 그녀들이 재경을 완전히 둘러쌌다.

“우리도 다 조사했어. 어차피 너 입부한 동아리도 없지? 공연만 제대로 해주면 밴드부의 임시 부원의 자격으로 자작곡도 만들어줄게. 하고 싶은 노래 있으면 말만 해.”

“이거 우리가 완전 거저 먹여주는 거라고. 다른 데에선 돈 주고도 못 해.”

“네 팬클럽도 생길걸?”

“학교에서 제일가는 유명인이 될지도 몰냥.”

팬클럽. 유명인. 바로 재경이 원했던 인기 절정 고교 생활이 아닌가.

재경의 귀가 고양이처럼 솔깃솔깃 움직였다. 병 주고 약 주고. 채찍과 당근. 함정일 게 분명한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소리가 절로 들렸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삼류 악당… 으… 렌 지미인데.

“수락한 걸로 알고, 내일부터 연습할 거니까 방과 후에 여기서 기다려.”

“하아, 드디어 마음이 편해졌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

“거봐, 내 말 맞지?”

“으냐함… 합주 전에 크로매틱으로 손이나 풀어볼까냥.”

“오. 나도 할래. 같이 하자.”

“메트로놈이 어디 있더라~”

내일 있을 합주 연습을 위해 창고에서 나가려는 그녀들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을 구경하던 재경이 손에 그대로 차인 수갑을 보고 다급하게 외쳤다.

“야! 그냥 가지 말고 이거나 풀어!”

우여곡절 끝에 수갑에서 풀려난 재경은 뒤늦게 약속했던 농구 경기장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내기 농구는 파한 후였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기숙사로 돌아온 재경은 단숨에 김이 빠져 침대에 털썩 누웠다.

수신제 때 밴드 공연을 하는 장면은 잠시 지나가는 CG라서 스토리에 크게 개입하지는 않겠지만. 하아, 몰라.

그보다 하고 싶은 노래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재경은 문득 옛날 기억을 떠올렸다.

건물 청소하던 할머니가 아는 사람한테서 얻어왔다고 낡은 MP3를 재경에게 준 적이 있었다. TV에 나오는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는데 다른 평범한 집 자식처럼 편하게 노래를 듣지 못하는 재경을 위해 누가 버리려던 것을 할머니가 용케 구해서 온 것이다.

“그 아가 딴따라 노래를 좋아해 가지고 노래가 겁나게 많이 있다고 하드라만. 재경이 니 다른 건 형편없어도 노래는 기깔나잖어. 들어나 봐봐라.”

할머니가 넘겨주는 낡은 MP3 기계를 보자니 내심 기대했던 재경은 자존심이 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MP3 플레이어로 노래를 듣냔 말인가. 아무리 집이 가난하더라도 남이 버리는 걸 냉큼 주워서 가지고 오다니. 할머니는 배알도 뭐도 없는 것 같아서 재경이 짜증을 냈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스마트폰도 아니고 이게 뭐야! 내가 왜 남이 쓰던 걸 써야 하는데?”

“아이고, 시끄럽다! 어디 기차 화통 훔쳐다 보약 타 먹었나. 스마트나 엠피― 뭐나 필요 없으면 필요 없는 거지 뭐 그렇게 시끄럽게 땍땍거려?!”

목돈이 나가는 스마트폰을 사줄 형편이 되지 않는 할머니는 재경의 욕심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안 쓸 거면 내놓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춘기 소년의 알량한 자존심이란 그런 거다. 그녀도 그걸 모르는 척 이해했다.

처음엔 그냥 내버려 두던 MP3 플레이어. 고집을 부리다 다음 날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이어폰을 찾은 그는 할머니 몰래 보물 창고에 담긴 노래를 훔쳐 들었다.

충전해도 배터리는 금방 나갔지만 세상과 단절시키기엔 좋은 기계였다. 학교를 땡땡이칠 때, 수업을 듣기 싫을 때, 선생님한테 혼났을 때. 하염없이 길을 걸을 때.

그날 그때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달렸다. 그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어린아이였던지라 같은 반 애들에게 자신이 노래를 부르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 결국 중학생 때는 내내 쌈박질밖에 안 했다. 괜한 망상만 한 걸 떠올리면 부끄러워 접싯물에 코 박고 콱 죽고 싶었다.

근데 그거 어떻게 됐었더라. 부서졌었나. 재경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아른거리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 * *

제립학교 학생들은 본분인 기간트리카 훈련과 어빌리티 연구, 면학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1년에 한 번 있는 학교 축제 준비에 열을 올렸다.

1학년 8반처럼 전교의 다른 반들도 어빌리티를 활용한 유령의 집, 놀이 기구, 팔씨름 대회(재경은 이 부분을 읽다가 눈을 비볐다. 팔씨름 대회? 사람을 얼마큼 패대기치려고?), 페이스 페인팅, 어빌리티로 만든 액세서리 판매 등 밖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아이디어로 승부수를 걸었다.

순항하던 8반의 메이드 카페는 기획은 좋았지만 메뉴 개발에서 벽에 부딪혀 지지부진했다. 마땅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골머리를 앓던 비키가 마침내 강경수를 두었다.

그녀는 8반 학생들에게 한 사람당 음료와 디저트를 각각 하나씩 써서 제출하도록 반장의 권한으로 숙제를 내렸다. 정해진 기한까지 재경은 물론 류제를 포함한 모든 히로인들도 카페 메뉴를 고안해야 했다.

재경은 다른 친구들 의견이 궁금해서 이리저리 찌르고 다녔지만 그녀들은 오만방자한 재경에게 비웃음 받는 게 싫었는지 아무도 아이디어를 공개하지 않았다.

“하여튼 치사하기는.”

빈정 상한 재경이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방과 후 지금까지 모인 아이디어 중 좋은 메뉴를 선별하기로 한 날이었다. 재료를 구매해야 하니 언제까지고 뒤로 미룰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축제에 불참하는 동아리에 입부한 학생들이나 재경처럼 소속된 동아리가 없는 할 일 없는 학생들이 책상에 모여 앉았다.

기왕이면 잡일만 맡고 싶었던 재경은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을 피해 다녔지만 이리저리 찌르고 다닌 결과 결국 고문이라는 감투를 쓰고 사실상 메뉴 개발의 책임자가 되어버렸다.

음료 23개와 디저트 23개가 적힌 카드를 분리해 낸 재경은 채반이 되어서 괴상망측한 메뉴를 걸러냈다. 대충 1차 선별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오자 진이 다 빠진 재경이 의자에 추욱 늘어졌다.

“저것들은 분명 무인도에 내버리면 이틀 만에 굶어 죽을 거야. 먹는 건 돼지처럼 잘하면서 메뉴 개발은 왜 개차반이야? 이해할 수가 없네.”

원두커피에 얼큰하게 땡초를 올린다는 기상천외한 메뉴를 고안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정신머리인지 모르겠으나 재경은 분명 그 사람이 비키일 것이라 확신했다.

기가 차서 바로 메뉴를 걸러냈을 때 인테리어 때문에 줄자로 공간을 재고 있던 비키가 갑자기 끼어들어 반론했기 때문이다. 마셔보지 않으면 모를 거라나? 아니, 마셔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

“렌 군, 쉬는 시간이야? 목마르면 음료수 마실래?”

“오, 유네. 땡큐. 짜식이 센스 있네.”

땡초 커피로 정신이 피로해진 재경에게 유네가 시원한 오렌지 주스 팩을 건넸다.

그가 음료수에 빨대를 꽂고 순식간에 내용물을 빨아먹었다. 압력으로 구겨지는 종이 팩에서 더 이상 액체가 나오지 않자 재경이 팩을 쓰레기통에 던져 골인시켰다. 그걸 멀뚱히 보며 서있는 유네에게 재경이 간사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감사의 의미로 내가 신기한 걸 보여주지.”

“신기한 거? 그게 뭔데?”

유네가 냉큼 미끼를 물었다. 재경이 약 스무 장의 아이디어가 적혀있는 종이 위에서 점쟁이처럼 손을 움직였다. 어디선가 본 건 있어서 수리수리 마수리~ 라고 말하며 한껏 있어 보이는 척을 한 재경이 두 장의 종이를 집었다.

“이거랑 이게 네 거지?”

비키의 땡초 아메리카노 말고도 비싼 전문 오븐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오래 걸리는 디저트나 단가가 맞지 않는 고급 메뉴가 몇 개 있었다.

그건 아마도 세상 물정 잘 모르지만 안목이 있고 최근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유네일 것이다. 거기에 유네는 카페인을 잘 못 마시니까 달콤한 차를 생각했겠지.

“어…어떻게 알았어?”

렌이 자신이 생각한 메뉴를 바로 집어내자 유네가 두근두근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재경은 별것 있냐며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감이지. 우리가 뭐 하루 이틀 봤냐?”

실은 거짓말이다. 위에 추측은 다 뻥이고 히로인들이 아이디어를 낸 것을 훔쳐보는 것도 미연시 내용의 일부라서 재경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점쟁이 시늉을 한 재경의 사기였다.

“우와, 그런 것까지 알아내다니 렌 군은 대단하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쏟아준 게 기뻐서 홀라당 낚인 유네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입에 발린 칭찬을 듣자니 거짓말이 들통난 기분이라 재경은 찔끔했다.

자신이 적어 제출했던 메뉴 카드를 건네받은 유네가 볼을 긁적였다.

“너무 허황되지? 나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어제 요리부 선배에게 여쭤봤어.”

“오오, 짜식이 열의 넘치네. 그랬더니?”

재경이 흥미를 보이자 유네가 어흠, 헛기침을 하고 자랑스레 가슴을 펼쳤다. 이전에는 잘 몰랐던 요리를 주제로 렌과 이야기를 나누다니 설렜다.

“디저트는 비슷한 재료가 들어가는 네다섯 개 정도로 정하는 게 좋대. 배우기 쉽고, 미리미리 재료를 만들어놓을 수 있는 메뉴도 좋댔어. 카페니까 차는 커피랑 홍차, 에이드면 충분하고 만들기 어려운 음료는 피하래. 전문인이 아니니까 손님이 많아지면 감당이 안 될 거래.”

“역시 요리부 선배. 반박 불가 정론을 말해 주는구나. 짜식이 요리부 들어가더니 이것저것 많이 배우는걸. 이제 온실 속 화초라고 못 놀리겠네.”

“그래? 헤헤헤. 렌 군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 뭐.”

재경이 칭찬하자 유네가 쑥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온실 속 화초라니. 콩깍지가 쓰여서 그런가 온실 속에 모셔다 놓은 소중한 물건을 말하는 것 같아 유네는 입가가 근질거렸다.

그녀가 어떤 망상을 하며 꼼지락꼼지락거리는지 하늘이 무너져도 알 리 없는 재경은 류제가 적어냈을 적당한 메뉴를 뽑으며 투덜거렸다.

“그걸로 따지면 류제 이놈이 제일 간단하지. 티백 커피에 시중에서 파는 초코과자라니. 이놈이 차릴 카페에는 꿈과 희망이 없을 거야.”

“귀찮은 거 싫어하는 류제 군의 성격이 보여. 렌 군 정말 메뉴만으로도 누군지 잘 추측하는구나.”

“뭐, 보통이지.”

재경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류제 자식, 동아리 들어가기 전에는 정신적인 수양이니 뭐니 개소리를 하더니 요즘은 메뉴도 대충 적어놓고 도서부가 출판할 문집에 넣을 글 쓴다고 거기만 뻔질나게 드나든다.

나도 강제로 밴드부 보컬을 맡게 돼서 썩 한가하다고 할 처지는 안 되지만 류제가 바쁜 덕분에 사사건건 저녁마다 어디 갔다 왔냐고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류제는 교실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유네, 너네 동아리는 레스토랑을 운영한다고 했나?”

“응, 첫째 날에만 야외 부스에서 대규모로 운영해. 둘째 날에는 뭘 할까 아직 의논 중이야.”

“레스토랑이라니 그거 학생이 감당할 수 있어?”

“요리 동아리 부장님 본가가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나 봐. 어빌리티만 없었으면 가업을 잇고 싶었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남들이 요리를 먹어주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 어빌리티도 ‘토막’이래. 가끔씩 묘기라면서 보여주시는데 정말 재미있어.”

유네가 요리 동아리 부장이 어떤 식으로 재주를 부리는지를 열심히 행동으로 묘사했다.

이전번에는 검도부에 몰래 숨어들어 목검을 하나 훔쳐와서 카레용 당근을 공중에 던지더니 목검으로 샤샥 하는 흉내를 내면서 깍둑 썬 당근 비를 내렸다는 일화를 전해주는 유네의 표정이 신났다.

“흐음~”

“신기하지?”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선배는 낚시랑 캠핑 좋아하는 아저씨처럼 말하던데 의외다.

뭐, 요리 동아리 부장이 뭘 어쨌다는 게임 속 세세한 설정은 모르겠지만 요리 동아리가 레스토랑을 할 거라는 건 축제 준비로 학교가 달구어지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 챕터가 챕터인 만큼 학급 행사나 동아리 부스와 관련된 전개가 많았기 때문이다.

엘리트들만 뽑는 S_script 동아리는 학생용 슬렉터에 직접 만든 코드를 인스톨해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진들과 높으신 분들 앞에서 기간트리카의 기동력을 테스트할 테지만 S_script 동아리가 아닌 역사 연구 동아리에 들어간 비키는 커다란 부루마블 판을 만들어 주사위를 던져 퀴즈를 푸는 놀이를 계획할 것이다.

친위대장 루이나와 왕녀가 입부한 검도부는 기인 열전에나 나올 대나무 베기나 부원의 어빌리티를 참고한 다양한 검법을 시연한다고 했고 일반인에게 검도부 체험 활동을 개방한다고 했다.

그쪽 부장이 사람 하나 물리적으로 말려 죽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 학교를 찾아온 군 장교들이 좋게 볼지도 모르겠다.

세라가 고문을 맡고 있는 응급처치 동아리는 간단한 건강검진이라며 옆 나라 미노타에서 유행하는 손바닥 지압술을 보여줄 것이다.

거기에 세라와 함께 축제 때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관리할 천막도 운영한다고 한다. 세라를 고문으로 둔 동아리다웠다.

류제가 들어간 미나의 도서부는… 말했듯이 재미 하―나도 없는 바보 같은 독후 감상문이나 문집으로 내고 책 읽고 토론회를 펼치는 징글징글한 범생이들의 모임이 될 것이다.

게임에서도 학교에 놀러 온 비어빌리터들과 도서부가 찬반 대결 논쟁을 펼치는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 안 날 정도로 지루했다.

수신제 당일은 플레이어가 원하는 활동을 시간순으로 정렬해서 진행했다. 선택에 따라 더 많은 일러스트를 모을 수 있는데 초반에는 다 못 돌 수밖에 없어서 다 회차 플레이를 자극한다.

학급 행사와 주인공의 동아리가 차지하는 시간은 스케줄 표에 고정되어 버리니 플레이어가 도서부에 들지 않았다면 미나가 마족의 스파이라는 이유를 빼더라도 재미없는 도서부는 굳이 선택을 안 하게 되긴 했다.

하지만 뭐, 도서부에 들어간 건 류제의 선택이었으니까. 난 류제의 선택을 존중해 준 것일 뿐인걸. 말 안 해줬다고 날 비난하면 곤란해, 류제.

“렌! 네 차례야.”

“벌써?”

유네와 메뉴 이야기를 하면서 노닥거리던 재경을 수예부 학생들이 호출했다. 그녀들은 단체 주문한 접객복 수선을 위해 반 친구들의 기장을 재주고 있었다.

재경은 비키의 말대로 서커스 단장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걱정하며 더듬더듬 그들의 앞에 섰다. 옷 담당 학생이 줄자를 펼쳐 재경의 허리 사이즈를 쟀다.

“으악, 어딜 만지는 거야?”

“내가 안 만졌거든? 줄자가 만졌거든? 싫으면 네가 스스로 재든가.”

그녀가 초등학생처럼 반박했다. 재경은 꿍얼거리며 어떻게든 류제만큼 커 보이기 위해 가슴팍을 넓혔다.

“똑바로 좀 서. 헐렁헐렁하게 입기 싫으면.”

그녀들은 재경의 하찮은 몸부림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저들끼리 숙덕숙덕 정보를 공유하며 필요한 치수를 재서 종이에 적었다.

“어, 근데 왜 다리 길이는 안 재냐?”

바지를 수선하려면 총기장도 재야 할 텐데 어째 그런 게 없다. 집사복은 류제의 사이즈에 맞춰 주문한 거라 분명 수선해야 할 텐데.

재경이 의아해하자 치수를 재던 여학생이 뜨끔해했다. 그녀가 뒤늦게 기장을 다시 재는 척하며 친구에게 말을 돌려보라 눈짓 신호를 보냈다.

“렌, 너 심심하면 우리 일도 도와주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힘드네.”

“바보야! 그 말을 하면 반대로 들키―”

“흥, 내가 분명 안 도와준다고 말했지? 이제 와서 부탁해도 늦었어.”

그것도 재주라고 뒷말을 듣지 않은 재경이 친구의 말을 칼같이 끊었다. 부탁할 줄 알았다며 혀를 차는 모양새가 영 건방지다.

말 돌릴 구색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면 마지못해 수락해 줄 법도 한데 끝까지 철벽을 치니 그녀들은 렌이 세상 얄미웠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남아서 좀 도와주면 안 되냐? 다른 것도 아니고 학급 행사인데.”

“흥, 나도 축제 때문에 할 일이 많아. 이래 보여도 의외로 바쁘다고! 메뉴 고문도 맡고 있고.”

재경은 방과 후부터 늦은 밤까지 밴드부와 합주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바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축제 전까지 공연 준비를 절대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티는 낼 수 없지만 이미 하기로 한 거 지금 와서 시간을 빼기가 애매하다.

“그것밖에 없잖아.”

“아… 다…다른 것도 있어.”

“뭔데?”

연유를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답하지 못한 재경이 우물거렸다. 굳이 옷 수선뿐만 아니라 재경의 꼼꼼한 손재주를 탐냈던 의복 담당 학생들이 치사하다며 삐죽거렸다.

“하기 싫으니까 궁색하게 변명하기는.”

“두고 봐, 너. 우리끼리 끝내주게 만들어서 코를 납작하게 해줄 거다. 그때 가서 뭐라 하지 마.”

“켁, 니가? 아, 예. 그러세요. 열심히 하세요. 힘내서 많이 파세요.”

“죽을래?”

그래 봤자 저번처럼 돈 주고도 안 사갈 누더기로 탈바꿈하겠지. 치수 재기가 끝나자 재경이 마음대로 잡수라며 손사래를 치고 도망갔다. 그녀들은 달아나는 재경에게 꽥꽥 시끄럽게 분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경은 다른 친구들과 모여 2차 메뉴 선정을 했다. 요리 동아리 유네의 말을 참고해서 다섯 개의 디저트 메뉴와 만들기 쉬운 음료, 비싼 스페셜 메뉴를 하나 선정한 재경은 기가 빠져서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래가지고 방과 후에 연습할 수 있으려나. 바보 같은 놈들 상대로 말싸움한다고 목 아파 죽겠다.

메뉴 선정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진 재경은 책상에 앉아 멍때리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다른 친구들을 구경했다. 그러던 그는 문득 자작곡을 만들라고 신신당부를 하던 밴드부원들의 손가락질을 떠올렸다.

“한 사람당 노래 하나씩이야!”

“뭐든 좋으니까 반드시 한 곡 가지고 와!”

생각 안 했다가는 또 수갑 채워놓고 안 돌려보내 줄 분위기였지.

이 세계 사람들은 왜 사람을 멋대로 과대평가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노래는 무슨. 쓸데없이 어려운 요구나 해서 곤란하게 만드네.

작곡하는 능력은 쥐뿔도 없는 재경은 이 세계에 아는 노래가 없어 숙제를 베끼듯 그가 자주 듣던 노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가 가방에 있던 공책을 꺼내 가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으음… 이다음 가사가 뭐더라…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이거였나.”

같은 반 학생들과 카페 인테리어를 상의 중이었던 비키가 설문 조사 겸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고 다니다가 책상에 앉아 혼자서 끙끙거리고 있는 재경을 발견하고 옆에서 기웃거렸다.

“뭘 그렇게 적어?”

“와아악! 아, 아무것도 아냐! 진짜로.”

일기장을 들킨 초등학생처럼 재경이 허둥거리며 공책을 숨겼다. 비키는 수상쩍다는 얼굴로 재경을 흘겼다.

“할 일이 없으면 나나 좀 도와줘. 주방을 가릴 커튼을 달 건데 어떤 느낌이 좋아?”

비키가 카탈로그 중에서 가장 반응이 좋았던 세 개의 커튼을 보여주었다. 인테리어는 개뿔이. 그런 감각 키운 적이 없는 재경이 켁, 싫다며 코앞까지 온 카탈로그를 밀어냈다.

“이것들은 왜 여기저기서 날 부려먹지 못해서 안달이야? 이런 거 좋아하는 애들도 많잖아. 내가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런 거 진짜 하나도 모르니까.”

“좀생이처럼 굴지 마. 그럼 날 도와서 커튼 봉이나 설치해 줘.”

“윽, 너 애초부터 그걸 시켜먹을 속셈이었지?”

“그럼 뭐 어쩔 건데. 바보. 반장의 명령이야. 빨리 일어나. 하나, 두울…….”

샐쭉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비키의 카운트다운에 재경이 투덜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키는 그 모습이 당연하다는 듯 거만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벽 한편에 세워두었던 커튼 봉 한쪽을 넘겨주었다. 수예부원의 일은 도와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말을 엿들었던지라 렌이 그녀만 특별 취급을 해주자 괜히 우쭐해졌다.

비키의 잔소리를 들으며 땀을 뻘뻘 흘려 커튼 봉을 설치하니 벌써 하루가 지나고 방과 후 밴드부와 합주하기로 협의한 시간이 되었다. 재경이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서려고 하자 유네가 기웃거렸다.

“렌 군,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는 거야?”

“아… 뭐, 그렇지. 유네, 넌 동아리?”

“으응, 우리 반 카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열심히 선배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아 올게. 파이팅!”

“힘내라. 하아… 나는 도살장에 끌려간다…….”

뒤로 갈수록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재경이 유네의 어깨를 툭 쳐주고 힘없이 교실을 나섰다. 축제 때 공연한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 못 하겠고 반강제적으로 자작곡까지 만들어야 해서 재경은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렌 군. 요즘 혼자서 뭘 하는 걸까.”

재경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네는 그를 보면 볼수록 커져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이 마음을 거짓 없이 전하고 싶었다.

실은 렌 군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를 늘 챙겨주고 여자란 것을 밝혔어도 이전과 변함없이 대해주는 게 아닐까.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날 좋아하게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의식하기 시작하니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목욕탕에서 세 번이나 마주한 일, 등 뒤에서 느껴지던 숨, 반달 모양으로 나눠 먹은 쿠키.

정말 그래서 그런 건가 괜히 망상이 폭주한다.

“후우.”

주머니 속에 있는 하트 모양 비즈가 달린 팔찌 공예품을 만지작거린 유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수신제 때 사랑의 고목나무 아래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트를 전해주며 고백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다.

이 팔찌는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유네가 만들고 있는 물건이었다. 수학여행 이래로 슬렉터와 함께 차고 있는 소원 팔찌와 비슷한 색으로 만들어 수신제 마지막 날 고목나무 아래로 렌을 불러내 건네줄 선물이었다.

“할 수 있다. 유네야, 힘내자!”

스스로에게 파이팅을 넣고 교실로 돌아가려는 찰나 오싹한 기운에 유네는 가슴이 철렁했다.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기운이 그녀를 가로막은 기분이 들었다.

“어라, 유네. 렌은 벌써 간 거야?”

익숙한 목소리에 유네가 뒤를 돌아보니 최근 부쩍 얼굴 보기 힘든 류제가 서있었다. 우연찮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던 류제는 이미 사라져버린 렌의 뒷모습을 찾았다.

뭐야, 류제 군이었잖아. 렌과의 관계를 망상하고 있던 유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라도 마음을 들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렌에 대해 생각하느라 얼굴이 붉어진 유네가 덤덤하게 답했다.

“으응, 다른 볼일이 있는 것 같았어.”

“그래? 늦을 것 같아서 인사하고 가방 가지러 왔더니. 알았어. 유네, 너도 동아리? 열심히 해.”

“응. 잘 가, 류제 군. 내일 보자.”

임시로 만들어진 동아리실에 가야 하는 유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류제와 헤어졌다.

한 학기 전까지만 해도 기숙사로 돌아가면 셋이서 함께했었는데. 류제는 유네를 지금껏 사이좋은 친구로 지낸 것이 거짓말처럼 차갑게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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