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9.5월 체력 검사!] (35/112)

외전 [9.5월 체력 검사!]

나라카의 자생 식물을 몰래 키운 식물 동아리와 그 싹에 거름을 준 미나, 그걸 성장시킨 류제의 기가 막힌 삼박자로 만들어진 해프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홀로 덤터기를 쓰게 된 식물 동아리는 제립학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학교에 보고도 없이 나라카의 식물을 키운다는 위험한 짓을 주도한 식물부 소속 3학년 선배 세 명은 한 달의 봉사 활동과 평가 점수 30점 감점, 특수부대 지원 불가라는 어마어마한 징계가 내려졌다.

신관 건물이 반쯤 무너지고 무고한 어린 학생들이 나라카산 미약에 당했는데 정학도 안 당하고 그 정도로 끝난 게 셋 다 유능한 어빌리터라 교장이 봐주는 것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식물 동아리 부원들은 미나와 류제 콤비의 피해자에 속했지만 범인들조차 모르는 진실은 영영 어둠 속에 묻혔다.

그저 나라카의 식물을 연구하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징벌을 받은 식물 동아리 선배 중 누군가가 억울함을 호소하다 못해 식물의 점액을 빼돌려서 어둠의 루트를 통해 학생들에게 높은 값으로 판다는 그럴싸한 괴담도 생겼다.

학생의 삼 분의 일 이상이 피해자인 식물의 점액은 미약이라는 단어 대신 열병 증세와 환각 증세 등으로 에둘러 포장되었다.

제립학교의 학생 관리 실책이 사회에 퍼져봤자 좋을 게 하나 없는 학교 측은 쉬쉬거리며 학생들에게 극구 입단속을 시켰지만 피해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친구들끼리 이랬니 저랬니 속삭이는 정도였지만 이 정도면 공공연한 비밀이라 치부할 수준이다.

물론 이조차도 학생 인원의 태반을 차지하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반에 한두 명 정도밖에 없는 남학생들은 재경처럼 아예 모르거나 류제처럼 완전히 꿰뚫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당연히 그들도 눈치가 있어서 괜히 나섰다가 이상한 눈초리를 받을 이유가 없으니 그 음란한 약에 대해서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리지 않았다.

해프닝이 마무리되고 정상적으로 등교를 시행하는 학교 전반에서는 나라카의 것으로 추측되는 모든 것들을 키워서는 안 된다는 지령이 내려왔다. 혹시라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즉시 학교로 신고할 것을 선생님들은 거듭 강조했다.

촉수로 인해 부서진 신관은 한 달간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안 그래도 다음 달 학교 축제가 있어 그 준비로 바쁜데, 학생들 입장에서는 동아리 활동을 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동아리 활동은 신관이 아닌 구관 특별실에서 잠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체육계 동아리들은 강당에서 진행하는 걸로 합의했다.

몇 주가 흐르자 단순한 학생들은 학년별로 진행되는 체력 검사와 학교 축제에 대한 이야기들로 들떠서 미약 건이나 점액의 괴담도 입에서 오르내리는 게 점차 수그러들었다.

교사들에게도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도록 권고안이 내려와서 이번 축제는 본의 아니게 마을 사람들에게 개방될 예정이다.

잎사귀들의 푸른 색소가 노랗게 우러나올 시기, 날이 적당히 건조하고 더운 오늘은 수업을 쉬고 항목별로 체력을 측정하는 체력 검사 날이었다.

기간트리카 대결장을 비롯해서 운동장 전체는 전날 저녁부터 체력 측정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가을에 체육대회라도 하는 것처럼 학교 운동장에 전교생이 나와 시끌벅적했다.

학생들이 1년간 자신의 체력이 얼마큼 늘었나 뽐내고 있을 무렵 하라는 체력 측정은 안 하고 수돗가 근처 풀숲이 웅성거렸다.

류제가 검도부에 끌려들어 가 고난을 겪고 있을 때 혼자 남은 재경을 강제로 끌고 갔던 범인들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쫑긋쫑긋 움직이는 고양이 귀와 은밀하게 속삭이는 말들은 꿍꿍이속이 다분했다.

“네가 가서 다시 한번 설득해 봐!”

“왜 맨날 이런 건 내가 하냥?!”

“남자애들은 고양이 귀에 껌뻑 죽는다고! 고양이 귀 달고 냥냥 한번 해줘!”

“뭐래냥.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양. 에췻!”

고양이 귀를 달고 말끝마다 냐냐 어미를 붙이는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 소녀가 꼬리를 바싹 세우며 불평했다.

‘가시’ 어빌리터, ‘투시’ 어빌리터, ‘마비’ 어빌리터가 불평하는 고양이녀의 머리를 꽉 누르며 조용히 하라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녀들의 시선 끝에는 체육복 저지를 허리에 묶은 채 세수를 하는 중인 8반의 렌 지미가 있었다. 혼자 있는 이때가 타이밍이다. 그녀들은 작당을 하듯 풀숲에 숨어 숙덕거렸다.

“난 아직도 못 믿겠어. 진짜 쟤가 노래를 그렇게 잘해?”

“그렇다니까! 내가 라우라 축제 때 봤대도. 재능 있었어!”

“하지만 저번에 물어봤을 땐 보컬에 관심 없다고 했잖아.”

“관심 없어도 있게 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밴드부가 망하게 생겼는데 뭘 못 해!”

이번 연도 1학년들이 모여 새롭게 창설한 제립학교 밴드 동아리 부원은 그녀들 딱 네 명으로 이루어져서 다섯 명 이상이 모여야 한다는 학교 동아리의 규칙을 위반하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이번 달 내로 다섯 명으로 만들겠다고 사정하고 사정해서 신관 창고도 간신히 빌렸는데 보컬도 없는 밴드부가 무슨 밴드부란 말인가.

울며 겨자 먹기로 연주곡만 했다가는 없는 인기가 더 떨어져서 입부하는 사람들도 없을 거다.

“게다가 선생님이 문화 예술 공연부 동아리로 등록할 거면 축제 때 공연해야 한다고 하셨단 말이야. 부원을 모집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어떻게든 밴드 뽕을 맞게 해주겠어.”

여러 사정이 있는 그녀들은 어떻게든 사람을 끌어모아 밴드부 동아리의 존재감을 보여주어야 했다. 학교 축제는 밴드부를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파릇파릇 사춘기 여학생들이 태반인 제립학교에서 남학생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 이건 잘될 요소들로만 이루어진 절대 불변 흥행 조건이었다. 우리들의 목표가 그 바보 렌 지미라도!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못생긴 건 무슨 상관이야!

“좋았어. 다시 가보자!”

한번 설득에 실패한 그녀들은 반드시 보컬에 렌 지미를 꽂겠다며 파이팅을 나누었다.

기회를 노리던 그녀들이 혼자 있는 재경에게 나서려는 바로 그때 류제가 갑자기 튀어나와 재경을 불러 세웠다. 최대 방해꾼인 류제가 끼어들자 그녀들이 급브레이크를 밟고 주르르 미끄러졌다. 산처럼 쌓인 야채 튀김처럼 얽힌 그녀들이 곡소리를 하며 불평했다.

“이 바보양! 아프잖양! 똑바로 보지 못하냥?”

“너야말로 발톱 세우지 마! 네가 발을 걸어서 그런 거거든?”

“빨리 일어서기나 해. 무거워 이 돼지야!”

“돼지 아냥! 고양이양!”

우당탕퉁탕 쓰러진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 류제와 재경은 이내 관심을 떨치고 제 갈 길을 갔다. 어쨌거나 이 학교는 괴짜들 천지였으니 하나하나 신경 썼다가는 제명에 못 살았다.

“다음은 철봉 매달리기래.”

“응.”

턱에 흐르는 물방울을 대충 닦은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체력 검사 종이를 꺼내 든 그는 자신의 기록을 보며 불만족스럽게 입을 비죽거렸다.

재경은 1분간 윗몸일으키기를 도합 40개를 함으로써 10점 만점 중 애매한 중간 점수를 차지했다. 자신 있는 100미터 달리기는 당연 10점 만점이었고, 팔굽혀펴기는 37개로 윗몸일으키기와 비슷한 자리를 차지했다.

“짜증 나. 점수가 이게 뭐야.”

“뭐 어때. 평균이잖아. 충분히 잘했어.”

“너한테만큼은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았어.”

재경이 류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때에는 키가 고만고만했었는데 방심한 사이 류제는 혼자서만 머리 하나는 더 자란 데다 몸도 배로 분 것 같다.

왜 나는 안 크고 쟤만 크는 거야. 아무리 삼류 악역이라지만 키 정도는 크게 해줘도 되잖아. 나는 매번 비키랑 비교당하고. 짜증 나게.

재경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모르는 류제는 위로한답시고 속 터지는 소리나 해댔다.

“비키는 몰라도 유네보다는 점수 높지 않아?”

“말 다 했냐? 유네랑 비교하지 마라. 자존심 상하니까.”

점수 체계가 다르니 여학생들은 재경과 비슷한 숫자를 하더라도 평균 1~2점 정도는 높았다. 그럼에도 재경은 유네보다 근지구력이 높았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고 재경은 기왕이면 같은 남자인 류제를 이기고 싶었다. 어림도 없는데 주인공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삼류 악역 같은 마인드지만 현실은 비키도 못 이기는 실정이다.

“안 보는 사이에 언제 트레이닝한 거야? 수업에서 근력 운동은 안 하잖아.”

“안 보는 사이라니. 매일 보지 않았어? 기숙사에서.”

류제가 불끈거리는 감정을 죽이기 위해 기숙사에서 턱걸이와 맨손 운동을 했던 것을 지적했다. 그때마다 재경은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핀잔하며 침대에서 뒹굴거리기 바빴다.

그제야 류제가 쉴 틈 없이 운동하던 장면을 떠올린 재경이 못마땅하게 꿍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주인공이라 몸이 타고난 거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다.

매달리기 측정을 위해 철봉이 있는 곳으로 가니 먼저 와있던 8반 여학생들이 모여있었다. 다른 반에 남학생 수가 부족해서 도와주느라 한발 늦은 두 사람은 철봉 매달리기를 측정하는 여학생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으잇… 흐윽……! 끄으으응……!”

얼굴이 새빨개진 유네가 발버둥을 치며 철봉에서 간신히 버텼다. 한계인 게 눈에 보였지만 최선을 다하는 게 갸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체력으로는 반 꼴찌를 도맡는 유네는 여자로 돌아가도 점수 변화 없이 똑같은 것 같다. 류제 이 자식은 아무리 그래도 날 유네랑 비교를 했다 이거지.

“유네 나르타, 14초! 1점!”

“으하아…….”

손에 힘이 다 풀린 유네가 비틀거리며 철봉에서 내려왔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던지 표정만 보면 기립 박수가 절로 나오는 금메달급이었다.

타이머를 들고 있는 선생님에게 쪼르르 달려간 유네는 자신의 신기록을 알고 기뻐하다가 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자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렌 군! 어땠어? 나 엄청 늘었지?”

“장난 아니네.”

“그지? 친구들하고 매일 연습했거든!”

아예 철봉에서 버티지도 못했는데 며칠 사이 저 정도로 버틴 거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대단한 노력을 했다는 증거였다.

유네는 0점에서 벗어났다는 게 엄청난 점수를 얻은 것처럼 가슴을 디밀었다. 그러다가도 기특한 자기 자랑만 한 것 같아 겸손하게 비키의 칭찬을 했다.

“비키 양 것도 봤어? 정자세로 3분 동안 버텼어. 만점이야!”

“오호, 예상과 다르지 않네. 왜냐하면 걔는 뇌가 근육으로… 끄악!”

“뭐라고?!”

낮말도 밤말도 다 듣는 비키가 뒤에서 재경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동아리에 들지도 않았으면서 기숙사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으른 재경과는 다르게 류제처럼 틈틈이 운동을 하고 있는 비키는 누가 뭐래도 어느 방면에서든 엘리트였다.

그녀는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상식이면 상식 모든 것에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완벽을 추구했다. 그것이 비키의 이름처럼 모든 것을 이기고 싶다는 끈질긴 노력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그녀가 넘어야 하는 다른 산인 니냐롯트 왕녀는 날 때부터 완벽한 인물처럼 보인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3분 완료. 10점 만점.”

완벽한 포즈로 착지한 니냐롯트는 그게 뭐 대수라는 듯 무뚝뚝한 얼굴로 지나쳤다. 옆에 있는 추종자들은 니냐롯트에게 수고했다며 수건이나 물을 가져다주느라 북적거렸다.

남들이 보기엔 비슷한 우등생이겠지만 비키는 니냐롯트처럼 되지 않는 자신이 성에 안 차 속으로 풀이 죽었다.

니냐롯트는 틈틈이 왕실로 불려가 국정의 일도 맡고 있는데 학교에 남아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쥐어짜고 있는 비키를 상대로 비등했다. 열등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8반 남학생 차례. 렌 지미!”

“10분은 거뜬히 넘겨주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재경이 남학생용 검사표를 움켜쥐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씩씩하게 걸어갔지만 결과적으로 참패. 삼류 악역 렌 지미처럼 어중이떠중이 같은 점수가 되고 말았다. 그걸 보고 비키가 피식 비웃었다.

“10분은 거뜬히 넘긴다며?”

“10분을 넘기다니 무슨 괴물이냐? 류제 저놈이 이상한 거야. 그리고 난 너보다 무겁잖아! 히…힘들다고. 버티기가!”

비키의 비아냥을 재경이 늘 써먹는 변명거리로 둘러댔다. 그와 동시에 남학생 만점인 5분을 무난하게 해낸 류제가 벌써 끝났냐며 풀썩 내려왔다.

왕녀가 저놈의 메인 히로인인 건 둘이 똑같아서 그런 걸 거다. 재경이 부러워서 구시렁거렸다.

“1학년 8반 턱걸이 테스트가 끝났으니 유연성 테스트로 이동합니다. 강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이 우르르 강당으로 몰려갔다. 유연성 테스트는 재경이 달리기 다음으로 자신하는 종목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수월하게 허리를 숙인 재경은 딱 만점 점수를 찍고 뿌듯하게 허리를 폈다. 옆에서 동시에 측정한 결과 간신히 9점대를 기록한 비키가 그걸 보고 분해서 초를 쳤다.

“다리가 짧으면 유리하다던데.”

“아냐, 내가 너보다 유연한 거야. 쯧쯧, 이 정도도 못하냐?”

“아냐, 네 다리가 짧아서 그래.”

“함 재봐!”

물론 진짜 대보니 재경의 다리가 근소하게(재경의 의견이다) 짧긴 했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건 비키와 키가 고만고만한 재경은 달리기와 유연성으로는 비키를 이겼다.

“으하하, 그 누구도 날 이기지 못하는구만! 렌 지미를 이길 자, 정녕 아무도 없는 것인가!”

“다른 건 다 두고 유연성 가지고 잘난 척하는 것도 대단하다.”

자기보다 유연성이 못한 같은 반 여학생들을 놀리는 데에 맛 들인 재경이 다른 학생들과 시시덕거렸다. 그새를 못 참고 잘난 척하는 기질이 발휘된 재경이 콧대를 높이며 거들먹거렸다. 질리지도 않는다.

눈썹을 까딱거리던 비키는 그 틈을 타 류제에게 물었다.

“류제, 너 미나와 같은 동아리 들어갔다며? 도와준다고 했던 나랑 한 약속은 어디에다 내빼고. 짜식이~”

미나에게 관심이 있는 거냐며 비키가 류제의 허리를 쑤시며 히죽거렸다. 렌 특유의 말투를 따라 하며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예전의 비키라면 절대 이런 모습을 안 보여주었을 것이다.

류제는 그런 게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따로 조사하고 싶은 게 있어. 그리고 도서부에도 역사 연구 동아리만큼 많은 책이 있잖아. 너는 거기서 찾아봐. 나도 도서부에서 발견하게 되면 알려줄게. 이름이 뭐라고? 무슨 셀로니아?”

“율라그라이프. 저번에 봤던 등급1의 화마족의 얼굴과 똑같아. 그런데 렌은 동아리에 같이 안 들어갔댔나?”

“관심 없다고 하더라.”

“그래?”

유네도 렌이 요리 동아리에 안 들어갔다고 했는데. 비키의 시무룩함은 목소리에서 티가 났다. 티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는 실망감에 류제는 속이 뒤틀렸다. 왜 다들 나한테 렌이 입부한 동아리를 물어보는 건데. 렌이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으면 내가 도서부에 안 들어갔지.

울컥한 류제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들리는 렌의 웃음소리가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으하하, 그것도 못하냐? 이거 봐라. 여기까지는 닿아야지.”

“윽. 방해되니까 저리 가, 렌!”

자기보다 유연성이 덜한 여자애들을 놀리며 스스로 몰매를 맞을 짓을 하는 재경 때문에 강당이 시끄러웠다. 유네도 유연성만큼은 렌과 맞붙을 수 있다며 옆에 달라붙어서 좋아했다.

“왕녀님, 수분을 보충하시겠습니까?”

“아니, 괜찮다.”

자신의 차례를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는 니냐롯트는 다시 쾌활해진 렌 지미를 몰래 흘겼다. 그때 보여주었던 두려움 담긴 표정이 사라졌다는 건 좋지만 그녀는 여전히 거절당한 이유를 모르는 채다. 나는 그에게 그렇게나 싫은 존재인 건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8반의 문제아 렌 지미는 변함없이 소란을 몰고 다닌다. 나라카의 자생 식물로 신관이 소란스러웠을 때도 늦게까지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류제 신리가 식물의 핵을 파괴해서 학생들이 전원 무사할 수 있었던 정황을 떠올리면 그녀는 등급1의 병마가 학교에 쳐들어왔던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야 친위대들의 도움으로 촉수가 검도부에 도달하기 전에 탈출할 수 있었지만 비키 셀로니아는 렌 지미가 구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들었다.

그 류제 신리가 자신의 의지로 식물의 핵을 찾아 파괴했을 리는 없고, 렌 지미는 류제 신리를 데리고 무언가를 하려고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살펴보니 류제 신리가 렌 지미를 다루는 모습이 어딘가 달랐다. 저번처럼 그 문제로 다투었나 걱정이 되지만 그녀는 렌과 이 이상의 거리를 좁히지 못할 것이다. 참견했다가 또다시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그녀를 호명했다. 그녀는 잡다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어서 순발력 테스트를 한 재경은 그럭저럭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강당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근지구력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는 재경은 검사표를 보며 자신도 이제부터 류제처럼 자기 전에 운동을 할 거라며 작심삼일이 될 게 뻔한 결심을 했다.

“이거 지친다. 이제 남은 건 심폐지구력 측정… 5,000미터 장거리인가?”

“장거리야 매일 하는 거잖아.”

류제가 옆에 따라 앉으며 말했다. 5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달려본 적은 없지만 기숙사 아침 운동으로 늘 운동장을 도니까 이 학교에서 심폐지구력이 자신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난 미들 스쿨 때는 체력에 자신이 없었는데 제립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달라진 것 같아. 렌, 너는 어때? 미들 스쿨 때도 달리기가 빨랐댔나?”

“…몰라. 기억 안 나.”

과거를 물으면 꼭꼭 입을 다무는 재경은 습관처럼 부정했다.

중학생 때 체력 검사 하는 날에는 학교 분위기가 체육대회라도 하듯 바보처럼 웅성거려서 시끄럽고 학생들은 친구들끼리 떼거리로 몰려있었다.

비뚤어졌던 재경은 다른 사람들이 들떠 하는 게 보기 싫어 땡땡이를 쳤다. 당연 체력 검사 다음 날 선생님한테 혼났다.

결국 포기한 선생님이 대충 기록을 적어서 올려줬었다.

그러니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

오랜만에 떠오른 옛날 기억에 불쾌해진 재경이 기지개를 켜며 말을 돌렸다.

“그보다 너 치사하게 달리다가 나 버리고 먼저 가면 안 된다?”

“달리기는 네가 더 잘하잖아.”

“빨리 뛰는 거랑 오래 뛰는 건 다른 거거든? 바보야. 반드시 내 뒤에 오도록 해.”

재경이 입을 삐죽거리자 류제가 알았다며 어깨를 두드려 격려했다.

이상하다. 원래라면 저렇게 대답하는 게 아니라 체력 측정이니까 그럴 수 없다고 원리 원칙주의에 융통성 없는 대답이 돌아올 텐데.

재경은 식물 동아리 사건 이후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은 류제가 이상했다. 혹시 그날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뭔가 다른 게 있었나?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나?

“왜?”

“아… 어, 아냐.”

착각이겠지. 류제가 우리 할머니도 아니고 매번 잔소리만 하겠냐만.

재경이 저도 모르게 류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가 털어내었다. 경멸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류제의 얼굴이 겹쳐진다. 그가 류제에게 거리를 두는 만큼 류제도 그와 거리를 두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가 바랐던 것이지만 재경은 사라 하놋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1학년 장거리 측정하겠습니다. 모두 운동장으로 모이세요!”

선생님이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스피커를 들고 외쳤다. 신관에 있는 방송실이 촉수 때문에 고장 나는 바람에 오늘은 세라를 비롯해 선생님들이 내내 돌아다니며 공지를 했다.

“출발선 안쪽에 서주세요!”

운동장에 수다를 떨러 나온 건지 체력 측정하러 나온 건지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주목이 단숨에 끌렸다.

1학년 총 180여 명의 학생들이 운동장 한편에 있는 출발선에 모여들었다.

해가 벌써 서쪽으로 기울었다. 이것이 마지막 체력 측정이다. 기록 제출이 끝나면 이대로 기숙사에 돌아가서 쉴 수 있을 것이다.

형평성을 위해 트랙에 마족이 두고 간 안티 어빌리티를 토대로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최근에 개발된 어빌리티 감지 센서가 달렸다.

다른 히로인들도 좋은 결과를 노리기 위해 선생님이 들어 올린 총에 집중했다. 다른 목적을 위해 재경을 노리는 밴드부원들도 렌이 도망가지 못하게 달리는 도중 말을 붙여보겠다며 서로 눈에 불을 켰다.

“준비……. 출발!”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오와 열을 맞춰서 뛰던 학생들은 점점 각자의 페이스로 흩어졌다.

이때가 기회였다. 밴드 동아리 부원들이 냅다 재경에게 뛰어가는데 승부욕에 불탄 재경은 페이스 조절이고 나발이고 무턱대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밴드부 일동은 재경을 보기 좋게 놓치고 말았다.

초반에 무리하지 않고 뛰던 비키는 반드시 1등을 쟁취하겠다고 무식하게 달려오는 재경을 보고 그에 질세라 덩달아 전심전력으로 뛰었다.

천천히 페이스 조절을 하던 류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뒤에서 보면 바보 콤비가 따로 없었다.

“이 바보! 페이스 조절 안 해?!”

“누가 질 줄 알아?! 내가 1등이다! 우하하!”

버리고 가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자기가 날 버리고 가네. 류제가 승부욕에 찬 그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뒤에서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저럴 줄 알았다. 천천히 뜀박질을 하던 류제가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참 생기발랄해.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

“그런가?”

어느새 류제의 옆에서 페이스를 맞춘 미나가 그들을 보고 싱긋 웃었다.

렌이 1등으로 달려 나가는 걸 본 유네가 자신도 뒤따라가겠다고 속력을 높이는 걸 친구들이 말렸다. 류제처럼 적당히 페이스 조절을 하고 있는 왕녀는 곁에 있는 친위대들이 더 난리였다.

류제는 여러모로 정상적인 미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초록색 단발머리를 들썩거리며 류제와 페이스를 맞추던 미나가 흘러내리는 동그란 안경을 다시 썼다. 그녀는 마침 류제와 가지고 있던 공통의 화젯거리를 꺼내 들었다.

“도서부 신청해 줘서 고마워. 신청서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그래? 내가 관심 있다고 말했지 않았나?”

“렌이 날 탐탁지 않게 생각하니까. 그것 때문에라도 안 들어올 줄 알았지.”

“아… 뭐, 내가 렌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도 웃기지.”

류제가 쓰게 웃었다. 매번 렌이 하라는 대로 했었으니 미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렌이 들어가는 동아리가 따로 있으면 모를까 혼자서 고민해 본 결과 그는 미나가 있는 도서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미나라면 렌에게 관심 없고, 렌도 미나에게 관심 없잖아. 내가 찾고 싶은 정보도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조용히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동아리보다 훨씬 나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달에 한 번 추천 도서를 고를 때만 좀 바쁠 거야.”

“그래. 그런데 미나 너 의외로 체력이 좋구나.”

슬슬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 그를 따라오는 미나를 보며 류제가 눈을 끔벅거렸다. 어빌리티를 쓰지 않으면 류제도 그렇게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키와 체격이 있는데 조그마하고 실내파인 미나가 그의 페이스를 무리 없이 따라오니 의외였다.

“아…하하하, 좀 지치네……! 하하하하! 아하하!”

“엇, 미나?”

류제가 같은 동아리에 들어와서 기쁜 나머지 너무 나댔다는 것을 깨달은 미나가 자신이 잡은 인간 캐릭터 특징을 떠올리며 속도를 줄였다.

류제는 점점 뒤처지다가 학생들 틈에 섞인 미나를 찾으려 뒤를 돌아보다가 그녀가 완전히 사라져버리자 다시 정면을 보았다. 나쁘진 않은데 미나도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다니까.

렌과 비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다가 중반쯤 되니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서 지쳐 나가떨어졌다. 숨이 턱까지 차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간신히 달리고 있는 그들을 여유롭게 제친 류제는 적당히 7위를 차지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으어어어…….”

“으아아…….”

초반에 무리를 하다가 결국 30위권 밖으로 밀려난 재경과 비키가 바닥에 엎드려 죽는다고 숨을 몰아쉬었다.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라가 완주에 성공한 학생들에게 얼음물을 나눠주었다.

어떻게든 기어가서 물통을 받은 비키가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아 곧바로 뚜껑을 끌러 뒤집었으나 물은 천천히 방울방울 떨어졌다. 알고 봤더니 비키의 것만 너무 꽝꽝 얼어서 녹지 못한 물병이었다.

반면 반쯤 녹아 딱 마시기 좋은 물병을 받은 재경이 얼음을 깨고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칼칼한 목을 축이자 살맛 난 재경은 절망한 비키를 힐끗 보더니 자신이 마시던 물병을 건넸다.

“마실래?”

“마…말 안 해도 마실 거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제가 주인인 양 재경의 물병을 낚아챈 비키가 간접 키스라는 생각을 지우고 물을 들이켰다. 물 한 방울 남김없이 죄다 들이켠 비키가 꼴좋다며 흘러내린 물을 닦았다.

“야, 야! 다 마시면 어떻게 해!”

“쌤통이다. 흥!”

재경에게 다 마신 물통을 건네준 비키가 꽁지머리를 휘날리며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 비키와 스쳐 지나간 류제는 그녀의 얼굴이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불타는 걸 힐끗 보았다.

“렌, 괜찮아?”

“나야 뭐. 비키 엄청 화난 거 같던데. 장거리 점수 구릴 것 같다고 저러는 거지? 후우, 힘들어. 이렇게 오래 달리는 거 엄청 지치는구나.”

“그야…….”

그렇지. 라고 류제는 비웃지 못했다. 그의 무지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베일에 싸여있는 그의 과거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차있으니 말할 수 없는 비밀인 것이겠지.

“…레―”

“빨리 가봐!”

“아…알았어……. 으으, 자꾸 그러니까 괜히 부끄러운데.”

류제가 재경을 붙잡으려는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네의 친구들이 어서 가보라며 유네의 등을 떠밀었다.

수건을 들고 있는 유네는 그런 그녀들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핑계를 만들어주는 게 좋아 쑥스럽게 다가왔다.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서 봐주기를 원한다는 목적이 다분한 몸짓이었다.

“렌 군! 나도 100등으로 완주했어. 헤헤. 자, 여기 수건.”

“오오, 제법인데? 방심하단 나도 따라잡히겠는걸.”

“에헤헤, 아직 멀었지 뭐.”

재경이 빈말로 칭찬해도 유네가 좋다고 웃었다. 재경이 유네가 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마음속 깊이 아닐 거라고 부정하려고 해도 비키와 유네가 재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류제는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분했다. 지켜야만 하는 선을 홀로 넘어버린 그는 다른 이들이 간사하고 이기적으로만 보였다.

좋겠다. 너희들은 렌을 좋아해도 죄책감이 없어서. 그를 향해 욕정해도 자랑스레 떠벌릴 수 있어서.

류제는 깨진 거울 속 자신이 거보라며 비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싫다. 렌이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인내할 수 없었다. 그의 영혼에 자리 잡은 마왕의 혼 때문인가. 아니면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사악한 욕심꾸러기라서 그런 건가.

나는 혹시라도 이 마음을 들키면 멀어져 버릴까 두려운데 너희들은 겁도 없이 내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구나.

그렇겐 두지 않아.

류제는 미칠 듯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짓눌렀다. 비키도 그렇고 유네도 그렇고 가만히 있어주면 좋을 걸 왜 이렇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까.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아직은 렌이 내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것일 뿐이다. 내가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

렌이 상처받을지언정 지금은 렌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방해 없이 둘이서 있었으면 좋겠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내 평화를 깨지 말아 줘.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렌을 뒤따라가며 류제는 그렇게 들끓는 이기심을 짓눌렀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9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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