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5)
건물 바깥을 경유해서 복도를 통과할 아이디어를 떠올린 류제가 창문을 깨고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감도 안 잡히는 촉수 더미가 건물 전체를 휘감고 내외부에서 꿈틀거렸다. 렌을 찾기 위해 건물 안쪽을 살피던 류제를 촉수가 무작위로 움직여 방해했다. 유연하게 피한 그는 바깥쪽 창문을 따라 이동했다.
촉수를 피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그 말고도 많았다. 선생님들을 비롯해 노란색 완장을 찬 선도부 학생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 보였다.
선도부가 학생들의 대피를 도와도 단단하고 미끌거리며 성장이 빠른 촉수가 창문과 복도 문을 막고 있는 동아리실은 여전히 신관에 고립되어있는 채다.
혀를 찬 류제는 렌이 있는 곳도 그렇게 되기 전에 억지로라도 밖으로 내보낼 것이라며 복도를 샅샅이 살폈다.
렌이 향했을 곳을 짐작해 본 류제는 창문 전체가 전부 촉수로 막히기 전에 틈을 뚫고 창문을 깨뜨려 복도에 굴렀다.
아무래도 건물 내부에서 기간트리카를 움직이면 세세한 컨트롤이 어려운 만큼 곧바로 장갑을 해제한 류제는 머뭇거림 없이 그의 소중한 친구를 불렀다.
“렌……. 렌! 내 말 들려? 무사한 거 맞지?!”
류제가 촉수로 엉망진창 뒤덮여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복도를 둘러보았다. 비상 알람 소리까지 막아버리는 촉수의 위력으로 복도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동아리 부원들로 들썩이던 곳이었을 텐데 지금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거짓말 같다.
“거기 누구 있어? …나… 좀 꺼내줘……!”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도부 도장에서 쓰는 목검 한 자루가 부러져 굴러다니는 것을 발견한 류제가 ‘강화’를 해서 식물을 찢어 나아갔다.
간신히 식물 벽 하나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온 류제는 금세 회복하는 식물을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이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나가야 하는 거지 막막하다.
“하아…하…으… 류제?”
“…비키?!”
다리가 풀린 비키가 숨을 헐떡거리며 무너진 천장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놀란 류제가 뛰어가 비키를 도와주었다. 식물에게 한바탕 공격을 당했던 건지 비키의 옷이 끈적끈적하게 젖어 녹아내렸다.
“어떻게 된 거야?”
“레…렌이 날 빼내주다가 안쪽에 갇혔어. 아무리 태워도 이 이상한 점액 때문에 타지를 않아. 그러다가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서…….”
쿨타임이 돌아서 발현되지 않는 어빌리티를 어떻게든 발현해 보려던 비키가 짜증스럽게 벽에 기대어 앉았다. 뒤집어쓴 이상한 점액 때문인가 눈앞이 어지럽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심정도 모르고 류제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저 이상한 식물은 도대체 뭐야?”
“내가 어떻게 알아!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건 누군들 마찬가지라고. ‘만생’ 그 애 거 아냐?”
“달라. 분명히 식물 동아리 앞에 있던 그거랑 같은 색인 거 같은데… 렌은 이 안쪽에 있는 거지?”
비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류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점점 귀가 웅웅거렸다. 이거 위험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비상 알람이 울렸어도 유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늦어서 홀로 갇혀버렸던 비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은 렌이었다. 덕분에 그녀 또한 여기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이제 복도는 물론이고 창문까지 막힌 데다가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걸을 수가 없다.
“이게 뭐냐고……!”
비키가 나약한 자신을 향해 불평했다. 또 류제와 렌에게 도움받다니. 거기에 탈출로도 없다. 이런 끔찍한 식물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 비키는 눈앞이 깜깜했다.
아주 미세하게 난 창밖 틈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계산을 해보던 비키는 창문 밖에서 누군가와 눈이 맞았다.
그자가 장갑하고 있는 것은 보통의 학생용 기간트리카가 아니었다. 곧이어 주변 촉수가 얼어붙더니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등장했다.
“어서 여기서 나와요!”
“서…선도부 선배.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저 이상한 식물은 뭐죠? 학교에 또 마족이 쳐들어온 건가요?”
선생님과 함께 학생들의 대피를 도와주던 선도부 학생이었다. 선도부들은 빠른 시간 내에 정보 분석하고 공유하며 괴이한 식물을 쓰러뜨릴 파훼법을 찾고 있었다. 선도부원이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답했다.
“저건 나라카의 자생 식물입니다. 식물 동아리에서 재배를 시도하던 것이라고 하더군요. 목격자의 말로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더니 학생들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서 당신이 나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일어설 수 있습니까? 비키 셀로니아 양.”
“으… 몸에 힘이 안 들어가요.”
참을 수 없이 더워진 비키의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벽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이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붙잡으세요. 빠져나가겠습니다.”
선도부원이 비키를 부축했다. 병마의 침입 후로 긴급 상황 시 제한적으로 군용 기간트리카에 버금가는 비상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선도부는 그 힘으로 사람들을 구출해 내야 했다.
“당신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전 괜찮으니까 비키나 데려다주세요.”
렌이 있을지도 모르는 깊은 안쪽으로 가기 위해 류제가 목검을 찔러 비틀었다.
“뭐 하는 겁니까! 그 식물에 손을 대지 말아요. 지금 그 점액에 닿은 학생들이 묘한 환각과 열병 증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선도부가 위험한 식물을 파헤치고 있는 류제에게 외쳤다. 류제는 듣는 척도 하지 않으며 기어코 식물 벽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류제를 억지로 붙잡으려 했지만 식물은 잘리지도 않고 자라나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았다.
그녀는 열병 증세를 보이는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와 제 말을 무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 남학생 둘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어 괴로운 선택을 했다. 결국 그녀는 비키만을 든 채 건물을 빠져나갔다.
살아있는 육벽처럼 복도를 조여오는 촉수를 물리치면서 나아가던 류제는 점액에 닿지 말라는 충고를 충실히 수행하며 실종된 렌을 찾았다.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기절이라도 시켰어야 했는데.
“어디에 있는 거야. 렌! 렌!!”
그가 감각을 청각에 집중했다. 어떠한 움직임이 있으면 그의 귀에 포착이 될 것이다. 멀리서 들리는 다른 이들의 높은 비명 소리는 무시한 그는 식물이 끈적끈적한 점액을 문지르며 자라나는 소리도 무시했다.
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지. 무사히 탈출한 것이면 차라리 낫겠다.
바람과는 반대로 끝내 근처에서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류제는 박살 난 동아리실 문 안으로 들어갔다. 촉수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히 움직이던 류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와악! 렌?!”
상반신이 촉수의 벽에 단단히 끼어 삐죽 튀어나온 사람의 다리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교복이 바지인 것을 보면 렌일 확률이 컸다. 류제가 들고 있던 부러진 목검으로 틈을 벌려서 억지로 그를 빼냈다.
막혔던 구멍이 해방되자 그곳에서 이상한 점액이 출렁거리며 흘러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칼이 달라붙어서 얼굴을 가렸지만 류제는 확인하지 않아도 그가 렌임을 알 수 있었다.
“괜찮아?!”
갑자기 빛을 받은 렌의 눈이 빙글빙글 해롱거렸다. 비키를 구하다가 촉수의 공격에 맞아 동아리실 문을 부수고 처박힌 것 같다.
콜록거리던 그가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루제? 하하하하. 갠차나, 갠차나. 하하하!”
즐거움이 묻어나오는 고조된 목소리가 답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괴물 식물에게 몸이 반쯤 처박혔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상한 태도였다.
전신의 감각이 오락가락하는지 렌은 몸을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도 멀쩡한 척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으하하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조심해!”
몸이 붕 떠있는 감각에 자지러지게 웃으며 힉힉거리던 재경이 결국 균형을 잃고 넘어져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동아리실 바닥이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으로 어지러웠던지라 류제는 혹여 상처라도 났을까 걱정이었다.
“그러게 내가 그냥 기숙사로 가라고 했잖아!”
“갠찬타니까. 하하. 으하하!”
류제가 넘어진 재경을 일으켜 세웠다. 재경은 괜찮다는 말만 연거푸 되풀이하며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다. 평소와는 다르게 매가리가 하나 없었다.
하도 버둥거려서 류제가 마지못해 손을 놓자 재경은 어딘가 무턱대고 나아갔다. 그러다 다시 넘어졌다. 안 되겠다 싶었던 류제는 재경을 단단히 붙잡고 동아리 안에 있던 박살 난 수도 시설로 향했다.
술에 취한 것 같은 얼굴로 흐느적거리는 재경이 류제에게 힘없이 끌려갔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거 놔아… 으히히히! 느저써. 가야 하는데……!”
싫다는 재경을 붙잡고 셔츠를 억지로 벗긴 류제는 제멋대로 불쑥거리는 흑심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다. 별수 있나. 응급처치 동아리에서는 이렇게 하라고 했다. 괴물의 정체불명의 점액을 뒤집어쓴 채로 둘 수도 없잖아.
“차가!”
“조금만 참아.”
기분을 강제로 좋게 만들어주는 촉수의 점액을 잔뜩 마셔버린 재경은 혀가 풀려 질질 발음이 샜다. 본인은 라우라 축제 때처럼 한껏 들뜬 기분이었던지라 엄마 손을 피해 목욕탕에서 도망가는 아이처럼 굴었다.
“시러. 실타고오!”
온갖 불만과 속상함으로 속이 끓었던 류제가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점액을 씻었다. 아무래도 이 점액에 알코올처럼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성분이 있는 것 같다.
“됐어.”
겉에 뭍은 점액질을 닦아내자 아까보다 얌전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씻다가 나사라도 빠뜨렸나 눈빛이 멍청해진 재경에게 류제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하아… 여기가 어디야… 아하하. 나 왜 옷 벗고 이찌?”
할머니가 머리를 감겨주던 어린 시절 때처럼 차가운 물을 맞고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재경이 숨을 헐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분이 들뜨고 몸이 더운 것은 여전해서 축축하게 젖은 그는 류제를 보며 씰룩씰룩 입꼬리를 올렸다.
류제는 미치겠다며 머리를 쥐어뜯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고 있던 체육복 저지를 벗은 류제가 반나체인 재경에게 입혀주었다. 응급처치가 효과가 있나 모르겠다.
“세라 선생님한테 가면 괜찮아질 거야. 빨리 여기서 나가자.”
“아냐아냐, 아하하. 내가 깜바캐서 그래는데. 하하.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하하하. 너는 가마니 이써도 대.”
헬렐레 풀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은 재경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벤트가 끝나기 위해서는 식물의 핵을 파괴해야 한다는 걸 기억하는지 촉수가 득실거리는 복도로 나가려고 했다.
진정했나 싶더니 또 시작이다. 어린아이 같은 발음 때문에 렌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던 류제는 점액의 독성 물질에 노출되어 저런 줄로만 알고 안 된다며 재경을 붙들었다.
“뭘 알아서 해. 어디 가려고. 안 된다니까. 이제 됐잖아! 세라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가자. 여긴 위험해.”
“갠차나. 내가 다 아라서 할 거야. 하하하.”
“안 괜찮아! 알아서 못 해!”
강박적인 태도를 보이는 렌에게 류제가 기어코 역정을 냈지만 재경은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걱정할 필요 없다며 비틀비틀 벽을 짚어 걸었다. 이 상황에서 노래가 나오는지 기숙사에서나 간간이 부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류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웃는가 했는데 이게 뭐야.
“도대체 어딜 가려고 하는 건데? 아직 안에 누가 있는 거야? 그래서 그래?”
저렇게 완강하게 구니까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는 데다 목소리가 더 커지면 저 기괴한 식물이 눈치채고 공격을 개시할지도 몰랐다.
류제가 그것만이라도 대답해 달라며 성급히 뒤따랐다. 재경은 혼잣말인지 대답인지 헷갈릴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깜바캐서 그래… 하하하. 헤헤헤. 다 갠찮다니까… 이제 다 기어기 나써… 걱정 안 해도…….”
“뭘 깜박했는데? 걱정을 안 해도 되긴. 네가 이러고 있으니까 걱정인 거야.”
“…빠리… 그걸 업새야… 그러면…….”
대화가 이어지지가 않는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류제는 렌이 뭘 근거로 저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까먹었다는 말은 뭔가. 설마 렌은 이 식물이 뭔지 아는 건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그래서 까먹었다고 말한 건가?
“혹시 너 이 식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재경이 우뚝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본 그는 여전히 약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어서 심정을 읽기 힘들었다.
“아냐, 까머거써……. …였는데 …해서……. 으하하하.”
새는 발음과 중간중간 터지는 웃음소리 때문에 문맥이 없다. 다그치려고 한 게 아니었겠지만 예언의 비틀림에 죄책감을 가졌던 재경은 류제의 의심을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아내… 내가 까머거서… 내가 다 원래대로 해주께… 미안…미안해……. 미안…….”
“정말로 알고 있었어?”
“화내지 마. 화내지 마… 다 내 잘모시야… 미아내… 미안…….”
자학하듯이 머리를 쥐어뜯는데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말인가. 뭘 잘못했다고.
약에 취해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이나 환각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왕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착각이 들 뿐.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류제가 그러지 말라며 재경을 뜯어말렸다.
“하지 마. 왜 네가 미안해? 이렇게 된 게 네 탓이 아니야.”
“하아…하……. 히히히… 으하하하하!”
류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지 마는 건지 다시 기분이 좋아진 재경이 벌떡 일어나 박장대소했다. 류제가 소스라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입꼬리가 이상하게 올라가서 눈에 하트가 그려진 듯 정신 나간 얼굴을 한 재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잘도 걸었다.
류제는 이 식물의 점액이 사람에게 무슨 작용을 하는 건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저런 바보가 되는 건 아니겠지? 세라 선생님한테 빨리 가서 치료해 달라고 해야 할 텐데.
자리를 털고 일어선 류제가 어렵지 않게 재경을 따라잡았다. 비틀거리는 친구가 넘어지기 전 허리를 감싸 안고 부축한 그가 좋은 말로 타일렀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그것만이라도 알려줘. 내가 도와줄게.”
“싱무…시…식… 히히히. 식물 동아리… 거기에, 거기로… 가면.”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불안했다가 히죽 웃으면서 걷는 것이 정말 마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기괴했다.
이전에 친구들이 식물 동아리에서 나라카의 자생 식물을 몰래 연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아까 비키를 데리고 간 선배도 그렇게 말했다.
류제는 그 말을 듣고 직감했다. 렌은 기어코 이 식물을 처치할 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돼. 다른 사람에게 맡겨!”
왜 매번 자기 힘을 벗어난 일을 해결하려고 하는 거야?! 굳이 네가 아니라도 되잖아. 이번에는 선생님들도 있고, 사건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왜 네가 하려고 하는 건데! 까지의 말을 삼킨 류제는 렌의 이 이상한 희생정신이 내키지 않았다.
“안 대… 안 대.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위험하다니까! 나랑 한 약속 또 어길 거야?”
매번 경고하는데도 고쳐질 기미가 안 보인다. 지금까지 보면 이건 천성이다.
어쩐지 예전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말했던 인류의 영웅 로라 하놋의 위대한 희생정신이 떠올랐다. 영웅의 마음은 타고나는 거라고 했지. 하지만 그것도 능력 나름이지 이 상태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이런 걸 보고 무모하다고 하는 거라고!
“아냐… 하하하! …냐면… 내가 해야… 히히. 나는 …고 이쓰니까…….”
“하아, 미안한데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막 말을 배운 아기처럼 옹알이하듯 어눌하게 뭉개진 발음으로 변명하는데 류제가 아무리 귀가 좋아도 웃음 반 중얼거리는 소리 반인 문장을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어찌 되었건 렌은 저 식물을 파괴할 생각이 확실했다. 물론 식물 동아리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니 피해도 적어지고 효율적이긴 하겠지. 렌이 원했던 게 바로 그거고.
어쩌다 보니 렌에게 익숙하게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류제는 체념했다. 이런 괴물과 상대하는 건 렌보다는 그가 더 유리할 거다. 아무래도 체육대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전에서 결승전에서 붙었던 ‘만생’ 어빌리터가 쓰던 덩굴들과 비슷하니까 말이다. 색은 좀 다르지만.
“내가 너 때문에 진짜 못 산다.”
그는 렌이 아니었다면 절대 나서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는 렌은 길을 막은 촉수를 뚫어본답시고 부서진 자재를 주우며 해맑게 웃었다. 위험하니 재경을 뒤로 물린 류제는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촉수를 파괴했다.
“여기가 비키가 있던 역사 연구 동아리니까 다음 동아리실이 식물 동아리야.”
류제가 떨어진 체액을 닦으며 부러진 목검으로 촉수를 비집는 사이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던 재경은 육벽에 기대어있다가 쑥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새 덩굴에 붙잡혀 버린 재경이 활기차게 꺄르르 웃었다.
“으하하. 하하! 신난다!”
“우아아악!”
경악한 류제가 재경을 휘감고 잡아먹으려는 덩굴을 잘라내 극적으로 구출했다. 까딱했다간 위험한 플레이를 당할 뻔한 걸 알 리 없는 재경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제발 부탁이니까 정신 차려!”
대책 없는 얼굴을 보자니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제발 가만히 있으라며 류제가 잔소리하든가 말든가 다리에 힘이 풀린 재경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갠차나. 난 갠차나!”
슬슬 약효가 들고 있는지 재경이 시뻘게진 얼굴로 강렬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몸이 묵직하게 뜨겁고 배 속이 찌릿찌릿했지만 이게 무슨 감각인지를 모르니 재경은 괜찮다고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지금 그에게 몸의 이상 현상은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재경의 이마에 손을 대 열을 재보던 류제가 속상해서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괜찮으니 돌아가자. 응? 우리들이 아니더라도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거야.”
“싫어… 난 갈 거야… 하…하아……. 으… 더워…….”
이제는 들은 척도 안 한다. 류제가 안 간다니 재경이 앞서 나갔다. 류제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이곳에 렌을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끝내 설득하기를 포기한 류제가 다음 촉수 벽을 꿰뚫었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류제는 촉수와 렌을 동시에 신경 쓰느라 식은땀이 절로 났다.
식물 동아리가 있던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일자로 나있는 복도만 지나면 되는 거라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다만 간간이 사람을 공격하려 드는 촉수가 굉장히 짜증이 났다. 거기에 걸려드는 렌도 문제다.
우여곡절 끝에 식물 동아리에 도착한 류제가 심장처럼 요동치는 핵을 보고 눈가를 실룩거렸다.
“저거군.”
저걸 파괴하면 식물도 죽고 렌도 치료할 수 있다. 그런 믿음으로 류제가 핵에게 다가갔다. 징그럽게 부풀어 오른 핵이 두근두근 맥박쳤다.
류제가 핵을 향해 손을 뻗는 찰나 위험을 감지한 촉수가 주변에 있는 덩굴로 방어했다.
“윽.”
“우악!”
성인 남성 팔뚝보다 굵은 촉수 수십 개로 이 좁은 공간에서 채찍질을 하는데 미처 피하지 못한 재경이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나라카의 식물 주제에……!”
재경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류제의 눈이 돈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감히 미물 주제에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용서할 수 없다.
류제가 손에 어빌리티를 집중시켰다. 주제도 모르는 촉수가 마기의 근원을 흡수하려고 했다. 그 틈을 주지 않는 류제는 핵을 단번에 찢어발겨 박살 냈다.
핵을 파괴당하면서도 류제의 분노와 함께 표출되는 마기를 흡수하려고 했던 식물은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 죽고 마는 이카루스처럼 들리지 않는 비명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말라서 바스러졌다.
촉수의 마지막 버둥거림이 신관을 뒤흔들었다. 지진이 가시는가 싶더니 숨 막히게 복도를 조여왔던 육벽 촉수들이 힘없이 추락했다.
“렌……! 렌!!”
류제가 일어나질 못하는 재경에게 황급히 뛰어갔다.
문제가 겨우 해결되었지만 점점 강해지는 미칠 것 같은 감각이 몸을 지배해 재경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몸이 아프다. 몸의 내부가 팽창해서 그대로 뻥 터져버릴 것 같았다. 기분이 상승되어 입꼬리는 자꾸 올라가는데 열이 차서 고통스러웠다. 재경이 자신의 팔을 감싸 안고 벌벌 떨었다.
“개…개…갠차나… 갠찮다고…….”
“안 괜찮은 거 아니까 괜찮다고 그만 말해. 젠장! 이럴 줄 알았다. 걸을 수 있겠어?”
어떻게 아픈 건지 모르겠으니 뭘 해줄 수도 없고 돌아버릴 것 같다. 팽창한 식물이 짓눌렀던 천장이 무너질 것 같자 류제가 재경을 부축해 벗어났다. 그 잠깐의 접촉에 재경의 입에서 사잇소리가 흘러나왔다.
의도치 않은 야한 울음에 심장이 덜컥거린다. 아파서 비명을 지른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류제는 일일이 반응하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하아…하…하아……. 으… 손대지 마……!”
류제가 만지면 몸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고 애달아서 재경이 참다못해 손을 뿌리쳤다.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못했다.
“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응?”
재경이 도리질을 쳤다.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이 엄습할 만큼 온몸의 감각이 정신 나간 것 같았다.
“세라 선생님께 데려다줄게. 조금만 참아.”
류제는 거친 숨을 내뱉는 재경의 떨림을 꼬옥 붙들었다. 눈을 질끈 감은 재경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류제의 살 내음을 맡고 고개를 처박았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열병 증세가 심해지고 있었다.
“무슨 독인 거야.”
그 점액이 대체 뭐기에 뒤집어쓴 사람이 이렇게 야하게 보이나. 심장 소리를 따라 류제도 절로 숨소리가 격해졌다. 환자를 상대로 품어선 안 되는 생각을 외면한 류제가 자제심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런 상태를 누구한테 보여줘야 한단 말인가. 야한 생각이 드는 건 렌을 좋아해서 그런 건가? 세라 선생님은 지금 렌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안 하시겠지?
“꽉 붙잡아. 이대로 밖으로 나갈게.”
“시…싫어! 으하하… 흐윽……!”
류제는 창문 밖으로 바로 뛰어내리려다가도 렌의 안전을 생각해서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혹시 몰라 렌의 슬렉터를 수동으로 조절하려고 하자 재경이 안 된다며 버둥거렸다.
“싫어! 하하… 노픈 데 실타고! 싫다고 해자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은 알지만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하지만 재경은 여기서 뛰어내리면 사달이 나는 것처럼 질겁하며 온 힘을 끌어모아 몸부림쳤다.
그런 재경을 들고 도저히 균형을 잡기 힘들었던 류제가 결국 포기하고 재경을 내려놓았다. 이러다 렌이 다치기라도 하면 본말전도다. 애가 타 죽겠는데 그의 친구는 장난을 치는 것처럼 웃으니 류제가 그만 화풀이를 하고 말았다.
“조금만 참아. 널 위해서 그런 거잖아!”
“멍청이! 매번 실타고 하는데 하지 마!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하하하!”
화를 내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파 죽을 것 같던 재경은 높은 곳이라는 끔찍하게 싫은 것까지 감당 못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나왔다.
“시러. 실타고! 실타고!!”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렌.”
가끔 류제가 말도 없이 안고 높이 뛰는 불만도 함께 터진 모양이다. 이것도 다 자기 업보라서 류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잘 걷지도 못하면서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손대지 말라고 뿌리치는 재경을 억지로 붙잡아 부축하는 류제는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기로 했다.
“하아…하… 허억… 흐흐흐…….”
촉수가 갑자기 사라지고 육벽으로 막혔던 길목들이 뚫려서 그런 건지 밖은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렌이 내는 것처럼 실없는 웃음소리와 ‘강당으로 데리고 가!’, ‘침대가 모자라요.’ 등의 큰 목소리가 들렸지만 건물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귓가에 스치는 거센 숨소리를 류제는 애써 무시했다.
그때 복도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경을 끌어안은 류제가 근처 벽 뒤에 숨었다. 혹시 그 괴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나 경계한 것이다.
그 정체는 식물이 아니었다. 군복을 입고 건물 안을 정찰하는 자도 인기척을 느끼고 외쳤다.
“누구 있나?! 나는 인근 기간트리카 부대 대원이다. 도움을 주러 왔다.”
식물이 갑자기 말라비틀어지자 그 틈을 타서 외부에서 도움을 주러 제립학교로 파견 나온 기간트리카 부대 군인이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돌입한 것이다.
알라마니 기술관이 소유한 나라카의 식물 자료를 바탕으로 이 점액에 대해 알아낸 학교 측은 빠르게 해독제를 생산하여 점액에 닿은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군인 또한 옆구리에 수많은 해독제가 든 해독 키트를 가지고 있었다.
식물이 완전히 잠잠해졌는지 확인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긴장하던 군인은 건물 자재에 깔려있던 여학생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류제가 모습을 드러내려다가 잠시 멈춰 섰다.
“설 수 있니?”
자재를 들어 올려주며 혹시나 물었지만 그 학생 역시 촉수의 점액에 중독된 상태였다. 학생은 숨을 헐떡거리면서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부대원의 팔을 붙잡았다.
“하아… 하… 으…….”
땅에서 기는 것처럼 엎드린 그녀는 도저히 일어설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점액의 양에 따라 다르지만 닿은 지 시간이 오래 지날수록 효력이 강해진다. 이 소녀는 꽤나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재경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애달아서 몸을 벌벌 떨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해독제를 주마.”
“도…도와줘… 흐윽……!”
참을 수가 없어 신음을 흘린 학생은 강한 힘으로 발버둥 쳤다. 그 학생은 결국 군인이 가지고 있던 해독제 키트를 후려쳐 쓰러뜨리고 말았다. 군인은 일단 학생에게 억지로 입을 열게 해서 해독제를 먹이더니 명치를 쳐서 기절시켰다.
“여기도인가. 미치겠군.”
학생을 둘러멘 군인이 흩어진 해독제 키트를 주워 담았다. 탄식하던 그녀는 슬렉터 통신으로 어딘가에 보고했다.
“통신 보안. 여기는 스라소니. 안은 안전합니다. 실종 보고된 학생 한 명 구출 완료. 골치 아프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미약이 뭡니까. 하여튼 나라카의 괴물들이란…….”
“저기, 잠시―”
류제가 그녀를 부르기 전 군인은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깨진 창문 밖으로 날아가 사라졌다. 뻗었던 손이 민망해질 여력도 없이 류제는 그가 들은 내용을 되짚었다.
미약? 그 단어에 모든 것이 납득되었다.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몸이며, 거친 숨.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고 바보처럼 웃는 것이 미약 성분 때문이라면 렌의 이상 행동도 설명이 가능했다.
“…류제, 숨 마켜… 히히히… 허억…헉…….”
히죽거리는 재경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짓누르고 있던 류제가 그 간질간질한 목소리에 지레 놀라 손을 떼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거칠어진 숨소리가 위태롭다. 온몸은 붉게 타오르며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그윽하다. 물기에 들러붙은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과 사랑스러운 고양이 같은 눈동자가 류제를 자극했다.
미약? 미약이라고?
“놓쳤다. 미안. 우리도 빨리 가자.”
미약이라는 단어와 렌의 상태를 번갈아 떠올리다가 헛된 생각을 물리친 류제가 무너진 잔해들을 피해 앞으로 나아갔다.
아까 그 군인이 있던 자리에 도달하니 유리병 하나가 발에 채었다. 흩어졌던 해독제가 하나 유실된 것이다. 고민하던 류제는 혹시 몰라 허리를 숙여 그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재경의 호흡이 점점 과해졌다. 그는 걸을 수조차 없어지고 있었다. 발이 꿈적도 안 하는 데다가 힘이 계속 풀려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거기에 참을 수 없는 이상한 격통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성적인 쾌감을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참은 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루제에… 으…으으… 잠깐. 잠깐만… 이제… 도저히 모 참…모 참게써…….”
“조금만 기다려. 다 왔어.”
누가 고집을 부려서 이렇게 된 건데. 류제도 재경이 안타까웠지만 의연하게 굴었다.
재경은 이제 한계점에 도달했다. 머리는 어지럽고 온몸이 저릿저릿해서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다. 계속 같은 곳을 걷고 있는 것 같은데 류제는 다 왔다는 말만 한다. 목이 마르고 몸이 떨려 어쩌지를 못하겠다.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서있을 힘도 없어 고꾸라진 재경이 바닥에 고개를 처박기 전 류제가 안전하게 붙잡았다. 이제는 피부가 예민해서 만지지 말라고 뿌리치지도 못하고 울먹거렸다.
무엇인가에게서 몸을 지키려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그는 스스로 몸을 감싸 부들부들 떨었다.
“모…모 참게서어… 어…어떠케…어떠케 해조… 으… 이제 못…못… 차…….”
“조금만 더 가면 돼. 응? 조금만 참아.”
참 쉽게도 말한다. 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재경은 제발 도와달라며 류제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신음. 맛이 간 눈동자와 뜨거운 몸.
바들바들 떨어대는 재경을 난처한 눈으로 보던 류제가 참지 못하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온몸이 압박되는 감각에 재경이 도리질을 쳤다.
이상했지만 류제가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가 원했던 감각을 알 것도 같았다. 이를 도화선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진 재경이 무리한 것을 갈구했다.
“더…더 세게…….”
연인에게 하는 애원 같다. 류제는 당황해서 재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레…렌, 잠깐. 진짜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참아. 응? 제발……!”
“모, 모…모 차마… 루제에… 제…제발… 히익―”
재경이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워 류제의 살갗을 긁었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몸이 자기 마음대로 감각을 뒤바꾸었다.
서툰 발음으로 자신을 찾는 그 목소리와 시선을 못 참겠는 것은 류제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이런 모습을 상상하며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던가.
이건 그토록 인내하던 그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인가. 아니면 관계를 박살 내버릴 위험한 함정인가. 류제는 선택해야만 했다.
“류…루…류…류제… 윽…으윽…….”
애원하는 친구를 보며 류제가 탐욕스럽게 침을 삼켰다. 바로 저 렌이 내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렌에게 그는 약했다.
“빨리… 빠…빨리… 끄으윽…….”
류제는 일순 모든 곳의 불이 꺼지고 오로지 그와 렌만이 이곳에 서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 꽃이 있다. 처음 봤을 때는 잡초와도 같아 그게 꽃인 줄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건 맛깔나고 사랑스러운 꽃이란 걸 알았다.
달콤한 향기로 사람을 홀리는 감미로운 호박색 자태가 그를 유혹했다.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먹고 싶어. 차지하고 소유하고 싶어. 그 바닥까지 전부 핥아서 내 위장 속에 처넣기를 바라.
곁을 서성이며 기다리지만 허락이 떨어질 리가 없다. 언제까지 나는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지? 조급하다 못해 절망감이 들 무렵 꽃이 그를 승낙했다. 손을 조금이라도 내밀면 그는 그렇게나 원했던 꽃을 차지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누가 가만히 있어?
악마가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꺾어. 네 것으로 만들어버려. 수마의 속삭임과 자신 안에 있는 악마의 속삭임이 겹쳐졌다.
류제는 어질어질한 눈을 질끈 감았다. 보채는 듯 어떻게든 해달라며 울먹거리는 그의 시선에서 도망가기 위해서다.
“루제에… 빠, 빠…빠리… 도…도, 와…….”
이런 목소리로, 저런 시선으로 렌이 도와달라고 말하는데 무시하고 세라에게 데려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약에 이걸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하지? 나 말고 누군가가 렌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버리면?
류제가 재경을 근처에 보이는 남자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은 몸을 숨기기 적당한 데다 촉수의 공격에도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류제…에… 으윽…흑… 빨리… 모…못 차…못 차마…….”
“하아… 기다려.”
미약의 효과가 그에게도 찾아온 것처럼 다급하게 화장실 맨 안쪽 칸에 몸을 구겨 넣은 류제는 숨을 헐떡거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을 정리한 그는 손가락을 강제로 입에 집어넣어 렌을 억지로 토하게 했다.
“욱, 우엑, 콜록, 콜록!”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류제가 다리에 힘이 풀린 재경이 넘어지지 않도록 뒤에서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 상황 속에서도 무서워하는 렌에게 안심시켜 주듯 낮고 진득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 류제가 등을 두드렸다. 무서웠던 재경이 용서 없는 류제의 팔목을 붙잡고 버둥거렸다.
“콜록, 켁. 못해. 모…못하게써…….”
“다 뱉어내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도와주는 거다. 다른 마음 없이 그저 렌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주는 것일 뿐이야. 그러면서 그는 뱉어내지 않으려는 렌의 목젖을 강제로 찔러 식도를 자극했다.
“켁…그엑… 욱…….”
놓으면 죽을 듯이 류제를 붙잡고 벌벌 떠는 재경의 모습에 류제는 늘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그 오감을 만끽했다. 저도 모르게 이런 상황을 만끽하는 배덕감은 버린 지 오래다.
“욱, 콜록, 그만 류제… 제…제발!”
“속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내보내. 나아질 거야.”
몇 번 토하던 재경은 계속되는 자극에 헛구역질을 하다 결국 위장을 박박 긁어 남은 체액을 모조리 내뱉었다. 입에서 터진 액체가 변기에 튀었다. 류제의 손이 끈적하게 더럽혀졌다. 아니, 더럽혀졌다기보다는 그가 더럽힌 거겠지.
미친 듯이 몸을 괴롭혔던 감각이 잠시 물러나자 재경이 거친 숨을 내쉬면서 진정하는 듯했다.
“하, 하아, 히……. 으으.”
식도에서 역류하는 고통이 힘들어서 눈물이 줄줄 흐른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조금은 정신을 차리려나 했지만 이미 흡수된 독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렌, 입 벌려.”
또 토하게 할까 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류제는 엄지손가락을 넣어 렌의 입을 강제로 벌렸다.
그래도 미약 성분이 위에 가득 들어찬 상태로 마시게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아까 주운 해독제를 입에 머금은 류제의 입술이 재경의 입과 맞닿았다.
재경이 흘린 눈물을 닦아낸 그가 그를 거부하려고 다무는 입술 안에 강제로 해독제를 쏟아냈다.
그들은 어느새 마주 보고 있었다.
재경은 입술이 닿는 감촉에 정신이 나간 듯이 달라붙었다. 재경을 끌어안은 류제는 재경의 머리를 꽉 눌러 보다 깊게 밀착시켰다.
이건 그냥 도와주려고 하는 거다. 나는 렌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까. 렌을 좋아하면서부터 구체적인 상상으로 변했던 망상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흐…콜록, 하윽…헉.”
뭐든 좋으니 빨리 이 안달 나고 미칠 것 같은 감각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재경은 식도로 들어오는 칼칼한 액체를 삼켰다.
“하, 하아, 하…으…….”
텅 빈 위에 즉효성 해독제를 먹이니 약 기운이 곧바로 도는 듯했다. 터질 듯이 흥분했던 재경의 눈이 점점 감겼다. 벌렁거리는 심장도 점점 소리가 줄어들었다.
류제는 점점 추락하기 시작하는 렌의 몸을 붙잡았다.
“렌.”
갑자기 몸에 큰 부담이 와서인지 기절해 대답이 없었다. 지쳐서 나가떨어진 재경을 류제가 꽉 껴안았다. 창백하게 꺾인 목이 류제를 유혹했다.
“윽, 으…….”
필사적으로 인내하는 류제는 탐스러운 목덜미를 잔인하게 물어뜯고 싶은 욕구를 자신의 팔뚝에 대신 풀어냈다. 아픔도 모르고 입마개를 문 그는 이 욕망이 모두 사라져버리길 바랐다.
진정된 후 앞머리에 표정을 숨겨 입을 다문 류제는 재경을 등에 업었다. 더러워진 위액을 씻어내기 위해 세면대로 향한 그는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이 짓는 표정을 보고 주먹으로 거울을 깨뜨렸다.
“시끄러워.”
누구에게 말하는 건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이 뭐라고 속삭였는가 그는 떠올리지 않을 거다.
이건 그냥 사고다. 류제는 오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는 않았다.
* * *
째깍째깍.
끊임없이 돌아가는 초침 소리가 방 안을 차곡차곡 메웠다. 어두운 방 안에 복도에 난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백열등 빛만이 그늘을 만들었다.
나라카 자생 식물이 내뿜었던 점액에 노출된 남학생들을 위한 격리실에 렌을 포함해 서너 명 정도의 학생들이 해독제를 마시고 잠이 들어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하얀 침대 위에 자신의 저지를 입고 눈을 감은 렌을 응시하던 류제가 무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여섯 시간이 흘렀다. 해는 이미 져서 밤이 어둑어둑하고 신관 건물은 복구를 위해 아직도 사람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때의 일에 매달려 있었다.
빠른 조치로 인해 학생들은 전원 무사했지만 몇몇 점액에 노출된 학생들이 있어 내일은 휴교령이 떨어질 예정이다.
점액에 노출된 학생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기억이 끊겨 일상생활에 약간의 지장이 있었지만 유행병 감기처럼 제조된 약을 먹으면 가라앉는 미약을 흡수한 것이라 건강상 문제는 없었다. 휴교령은 혹시 모를 학생들의 정신적인 충격을 고려한 예방 차원이었다.
그 시간에 신관에 없던 학생에게는 자다가 웬 떡이 떨어진 격이겠지만 렌처럼 분별없이 당해버린 친구를 보고 있으면 좋게도 생각 못 하겠다.
감긴 렌의 눈이 꿈틀거렸다. 렌이 눈을 뜨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류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으…….”
드디어 정신이 들려는지 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침대에서 뒤척거렸다.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손으로 이불을 긁어모아 필사적으로 쥐는가 싶더니 그가 눈을 떴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은 병적으로 새하얗게 질려 거짓말처럼 핏기 하나 없었다.
“어……!”
지금 어디에 있는지 헷갈렸던 재경이 무리해서 몸을 일으키다가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탈진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잠을 자야 하는 것같이 방 안이 어둑어둑한데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그는 홀로 앉아있는 류제를 보고 화들짝 놀라 주춤거렸다.
“깜짝이야!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일어났어?”
류제가 유령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애가 뭔 귀신같이 있어서 식겁했네. 가슴을 쓸어내린 재경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류제 말고 멀쩡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여기에 있지? 다른 사람들은? 아, 비키는 무사해?”
재경은 어디서부턴가 날아간 기억을 거꾸로 되짚으며 버릇처럼 관자놀이를 쿡쿡 찔렀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게 남 걱정이라니, 참 그다운 일이다. 류제가 의자에 고쳐 앉으며 궁금증에 답했다.
“전원 무사해. 나라카의 식물이었대, 그거.”
“아, 그래. 그거! 어떻게 됐어? 해치웠어?”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류제가 떠보자 재경이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경은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남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류제도 침착하고 밖도 조용한 걸 보니 큰일 나기 전에 어떻게든 해결이 된 거 같은데.
너털웃음을 지은 류제가 여간 감을 못 잡는 재경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핵은 내가 파괴했잖아. 네가 그래야 한다고 해서.”
“내가 그랬다고? 식물의 핵을?”
“어.”
“그래?”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아까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전혀 기억 안 난다. 해가 지평선에 떠 있을 때 변태 이벤트가 일어났으니 빠르게 마무리하려고 식물 동아리로 향했던 것까지는 알겠다.
거기서 비키를 만나 구출을 도와주다가 촉수에게 한 방 먹고 그 이후로부터 뒤죽박죽이었다. 암전이 찾아온 것처럼 희끗희끗 무엇인가 기억날 듯 말 듯 하는데 몸이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으… 몰라. 뭐, 잘 풀렸다니 다행…이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진다. 다행은 개뿔 또 앞뒤 생각도 안 하고 멋대로 달려갔다고 류제가 화를 낼까 재경이 지레 뒷말을 줄였다.
대충 반성한 재경이 안쓰럽게 눈치를 보았지만 류제는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어쨌든 다친 사람 없이 식물은 처치했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덕분에 내일은 휴교래.”
“그래? 아싸, 엄청 좋은데? 비키는 불만이 많겠네.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은 어디에 있어?”
이 방에는 왜인지 자고 있는 남학생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짧게 웃으며 그에 대해서도 답해주었다.
“지금 여학생하고 남학생들이 격리되었거든. 아마 내일까지 계속 그럴 거야.”
“흐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전원 무사하다니 그런가 보다 넘어가기로 했다.
재경은 그보다 류제의 태도가 더 거슬렸다. 분명히 지금은 류제가 잔소리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한 소리 크게 들을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온순하게 나오지? 아냐. 언제 변화구로 치고 들어올지 몰라.
경계하며 잔소리를 기다리지만 류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뻘쭘해진 재경이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괴물의 공격으로 많이 다쳤나 보구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남학생들을 보고 재경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답이었다.
변태 이벤트로 신관에 있는 학생들의 옷이 점액에 젖어 찢어지고 촉수에 붙들리는 건 어느 정도 막은 것 같다. 예전에 보고 혼비백산한 CG를 떠올린 재경이 안도했다. 진짜 이런 걸 까먹어서 어쩌자는 거야. 진짜로 큰일 날 뻔했네.
류제가 침묵하자 재경이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잘못한 건 아는지 힐끗힐끗 흘기는 걸 류제가 모를 리가 없었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 류제가 착해빠진 친구처럼 걱정스레 물었다.
“너는 괜찮아? 어디 아픈 데 없고?”
“엄청 나른한 거 말고는 괜찮은 거 같은데. 그리고… 배가 엄청 고파.”
그걸 증명하듯 때마침 재경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저녁을 못 먹었던 데다가 그런 일까지 있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류제가 하하 웃으면서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했다.
“선생님께 확인받으면 기숙사로 돌아가도 된대. 내일 점심에 한 번 더 검진할 거니까 그때까지 오면 되고.”
“나 참, 별로 다친 곳도 없는데 유별나네.”
“뭐… 점액에 몸에 안 좋은 성분이 있었나 봐.”
“흐음. 나라카의 식물이니까 뭐.”
입고 있는 류제의 저지를 달랑거리던 재경이 단순하게 납득하자 류제도 모르쇠 넘어갔다. 정말로 기억에 없는지 무슨 성분인지 묻지도 않는다.
“물 좀 마셔.”
“어? 어어.”
아까부터 류제가 이상하게 상냥하다. 재경이 움찔 떨었다. 어라, 왜 아직도 화를 안 내지? 이쯤 되면 왜 뛰쳐나갔냐고 엄청 뭐라고 해야 하는데? 불안하게 왜 이렇게 조용해?
혹시 기억을 잃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재경이 입을 열려는 순간 격리실 문이 먼저 열렸다. 눈부신 역광 속에 하얀 가운을 입은 세라가 학생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차트를 들고 들어왔다.
“어머, 렌 학생. 깨어나셨군요. 몸 상태는 어떠신가요?”
“세라 쌤~ 저 완전 괜찮아요.”
재경이 보라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재경의 곁에 다가온 세라는 다행이라며 그의 상태를 살피다가 문득 류제를 쳐다보았다.
류제가 점액에 취한 렌을 데리고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류제가 미리 해독약을 먹여서 다행이었지만 복도의 반대편으로 향했던 렌이 식물의 핵을 파괴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음을 이 아이는 모를 거다. 병마의 때도 그렇고 언제나 무모하다.
“이 말썽꾸러기.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요? 몸에 열이 나거나 환청, 환각, 환시도 없죠?”
“헤헤. 넵, 없어요.”
재경이 자신 있게 답했다.
세라가 들고 있던 플래시로 재경의 눈을 비춰보았다. 동공반사도 정상이고, 맥박도 정상, 체온도 정상이다. 그녀가 처음 검사했을 때 보였던 강한 양성반응에서 정상의 범주까지 내려왔다.
세라가 수고했다며 재경의 어깨를 두들겼다.
“데리고 기숙사로 돌아가도 되나요?”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과 몇 가지 확인 절차만 끝내면 됩니다.”
류제가 독촉하자 세라가 어른스럽게 달랬다. 지긋지긋할 만도 하다. 어찌나 친구 걱정이 대단한지 렌이 깨어날 때까지 무려 여섯 시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라가 눈짓으로 몰래 류제의 팔뚝을 살폈다.
나라카의 식물과 함께 실종되었던 류제가 렌을 등에 업고 돌아왔을 때 그녀가 얼마큼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들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가 보니 온몸이 엉망이었다. 손끝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데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류제가 이상해서 상태를 물어봐도 류제는 괜찮다는 말로 일갈했다.
그러면서 화창하게 선한 웃음을 짓는데 세라는 그 미소가 섬뜩하다고 느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보았던 괴물 같은 모습보다 더 소름이 끼친 건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류제 학생도 아픈 곳 없고요?”
“네, 괜찮아요.”
그는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 대신 깨물었던 팔뚝을 가렸다. 이빨로 문 상처만은 보여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없어야 하니까. 이 상처를 보여주면 세라는 캐물을 것이고, 굳이 그런 상황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당사자 중 한 명이 기억을 잃은 이상 그만 입을 다물고 있다면 없던 일이 된다.
“쌤, 배고파요~”
괴리감을 느낀 세라가 뭐라 묻기 전 재경이 칭얼거렸다. 그녀는 류제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려 마저 차트를 정리했다.
“기숙사로 돌아가면 배식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류제 학생도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드셨죠?”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요. 고생하셨으니 분명 몸은 영양분을 원할 거랍니다.”
세라가 류제의 눈을 보고 말했다. 류제는 죄책감에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했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류제 학생은 이사장님의 이름으로 감사패를 받을 겁니다. 키아나트리체가 류제 학생을 주목하고 있어요.”
“아뇨, 저는 그냥 렌이…….”
그때 일을 기억 못 하는 렌에게 말해봐도 쓸데없는 것만 떠올릴세라 류제가 말을 아꼈다.
감사패라. 도망가려고 했지만 렌이 원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대신 나선 것일 뿐이다. 감사패는 무슨. 그건 렌의 몫일 텐데.
“나? 난 암것도 안 했는데.”
거짓말. 병마의 때처럼 공로를 가로채는 기분이다. 류제가 잠시 입을 달싹거렸다. 문득 걱정스러워하는 세라를 보자니 류제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마왕일지도 모르는 그. 어떤 어빌리터보다 척도가 높은 그. 등급1의 병마를 무찌른 그. 그리고 오늘도 활약을 해낸 그.
감사패란 그가 무슨 심정일지언정 세상은 그를 다르게 볼 거라는 세라의 무언의 충고였다.
“…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짜식이 잘난 척하기는~”
재경이 히죽 웃으면서 되레 뿌듯해했다. 공적을 빼앗는 건데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하다. 류제가 머쓱하게 따라 웃었지만 진짜 웃음이 아니었다.
“그럼 렌 학생, 간단한 검사만 마저 끝내고 기숙사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세요.”
“네!”
진짜로 이번 챕터도 무사히 마쳤다는 마음에 재경이 활기차게 답하며 침대를 내려왔다. 그러다 약 기운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이 왜 이러는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재경은 다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갓 낳은 망아지 새끼처럼 비틀거렸다.
“어어?”
“해독제 부작용이 있는 모양이군요. 아직도 몸이 피곤하지요?”
“네에. 와. 이런 적 완전 처음인데. 개쩐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쉬면 괜찮아지겠지만 제가 제대로 봐드릴게요. 류제 학생, 렌 학생 좀 도와주시겠어요?”
“네. 자, 렌. 업혀.”
어쩔 수 없이 류제의 등에 업힌 재경이 축 늘어져 턱을 류제의 어깨에 괴었다.
류제가 재경을 한번 들썩거리더니 세라를 따라 격리실 바깥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으나 복도는 아직도 불이 켜져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담당의로 문전성시였다.
류제가 무엇을 숨기는지 모르는 재경은 그저 이번 챕터가 아무런 이상 없이 끝났다는 것에 만족하며 싱글벙글 어린애처럼 발을 휘저었다.
류제 이 자식은 걱정된다 싶다가도 가만 보면 알아서 잘한단 말이지.
“이야, 승차감 좋다.”
“하하, 그거 고맙네.”
평소와 같은 대화에 류제가 씁쓸한 마음을 숨겼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이제는 그를 업을 때조차 예전 같지 않았다.
없는 일이라고 치부했지만 그를 품에 안았을 때의 모든 것을 류제는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조르는지, 어떤 얼굴로 쾌감에 젖는지, 어떤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지 상상이 아닌 기억이 되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는 뻔한 거짓말도 못 한다. 실은 렌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면서.
제립학교의 역사에 길이길이 두고 남을 해프닝이 있었지만 새로운 학기는 무사히 시작되고 더불어 생활에 변화가 일어났다. 류제는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이전이 나았다고 자조했다.
렌이 잠든 동안 적었던 동아리 입부 지원서가 류제의 호주머니에서 부스럭거렸다. 곱게 접힌 종이는 며칠 후에 히로인의 손을 통해 동아리 부장에게 전달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그는 진실로 걸어가야만 했다. 그의 앞날에 있을 까마득한 미래를 위해. 그것이 그의 숙명이다.
학년 : 1학년 8반
성별 : 남
이름 : 류제 신리
지원 : 도서부
류제는 자신이 지독한 욕심꾸러기라는 것을 몇 번이고 상기했다. 깨진 거울 속에서 자조하는 자신의 모습이 섬뜩했다.
* * *
류제가 걷고 있는 복도의 반대편 건물. 촉수의 핵과 밀접한 장소에 있던 여학생들이 해독제를 맞고 회복하는 방.
빼곡하게 들어선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다른 의미로 꼼짝을 못 하고 있는 자가 단 한 명이 있었다.
“으… 배불러.”
미나가 헛구역질을 했다. 이렇게 많은 정기를 섭취해 본 날이 언제쯤인가. 여기저기서 흩뿌려지는 진한 정기를 엄청나게 빨아들이다 보니 미처 소화를 다 못 시켰다.
그녀는 여전히 이 방에서 둥둥 떠다니는 정기를 감지하며 흡수되지 못한 남은 것들을 새로운 구슬에 넣었다. 당장 먹기는 싫지만 그냥 버리자니 아깝다.
빙글빙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진한 정기가 작은 구슬 안에 응축되어 돌아갔다.
나라카의 미물이 그런 역할을 할 줄 몰랐지만 콩고물 떨어진 것처럼 졸지에 에너지원을 잔뜩 얻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정도 양이면 겨울 때까지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흐음~ 그렇게 내버려 두기엔 아깝단 말이지.”
재미난 생각이 난 미나가 악마처럼 웃었다. 감히 미물 주제에 방해하는가 싶더니 그 식물도 인간계에서 본 마족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나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동공이 붉게 빛난다.
평소와 다름없는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반대편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는 류제와 등에 업힌 방해꾼 사이에 흐르는 정욕은 그녀가 동아리실에서 봤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 되어있었다. 분명 이 사건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미나가 아주 오랜만에 웃을 일이 생겼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병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소녀들 사이에서 구슬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녀는 그것을 꿀꺽 삼키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의사에게 그녀가 작게 인사했다. 그녀를 본 의사의 눈이 풀리더니 깊게 가라앉았다.
학교를 둘러싼 대마족용 결계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서큐버스인 그녀의 능력임과 동시에 강력한 에너지원을 소유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나 지금 나가고 싶거든.”
“네, 플로냐 님.”
그녀가 홀린 듯이 웃는 의사를 따라 나갔다. 학교에 콧노래가 울려 퍼진다. 전혀 다른 관계로 시작하는 새로운 학기가 진정한 의미로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