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4) (33/112)

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4)

다음에 방문할 동아리실로 향하던 류제는 유인물을 살피며 번호를 찾던 중 건물 기둥에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가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

제립학교는 이능력자들의 집합소라서 기물 파손을 비롯한 학생들의 기행들은 흔했지만 대리석이 이만큼 부서질 정도로 노는 건 나라의 검이 되어야 하는 학생으로서 다분히 철딱서니 없어 보였다. 아무리 나라에서 지원해 준다지만 이건 세금이라고. 괴팍하게도 논다니까.

가던 방향으로 조금 더 걸으니 이젠 하룻밤 만에 창문을 다 뒤덮은 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육덕 진 덩굴처럼 징그럽게 성장한 분홍색 식물은 그 내막을 몰라도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류제는 식물의 건너편에 있는 ‘식물 동아리’ 팻말을 보고 여기도 괴짜들만 모여있는 진절머리 나는 동아리일 것을 짐작하고 슬쩍 차례를 건너뛰었다.

식물 동아리실 다음에는 학문 목적의 이름을 가진 동아리가 줄지어 있었다. 차분한 곳을 원하던 류제가 후보로 점찍어 둔 동아리이기도 했다.

[키아나트리체 역사 연구 동아리]

마침 미나에게서 로라 하놋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었던 참이라 류제가 흥미를 보였다. 역사는 학교에서 교과목으로 배우고 있지만 심도 있게 다루지는 않았다. 여기서 학생들이 그 궁금증을 해결하는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도 로라 하놋에 대한 연구를 할까? 역사적 인물이니까.”

“글쎄다. 궁금하면 들어가 보지 그래?”

참견 안 한다고 했던 재경이 은근슬쩍 류제를 부추겼다.

여기는 타고시아 해변의 악몽에서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하면 비키가 입부했을 동아리였다. 실패했다면 비키는 S_script 동아리에 입부한다.

재경이 꽝과 당첨이 있는 제비를 뽑는 심정으로 목젖을 울렁거렸다. 이것만큼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알았어. 잠시만.”

들어가 보라니까 류제가 냉큼 문을 두드렸다. 딱딱한 나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기요?”

동아리실 안쪽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혹시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렌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혀있었다.

“다들 기숙사로 돌아갔나 보다.”

저녁 먹을 때까지 시간이 없으니 다음 동아리실로 찾아갈까 생각하던 류제는 안쪽에서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정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렌이 고양이처럼 귀를 바싹 세우며 고개를 돌려서 그도 얼결에 멈춘 것이다.

“누구시죠?”

도수 높은 안경에 머리를 세 단으로 딴 갈색 머리 문학소녀가 조용조용 문을 열었다. 교복을 보아하니 상급생이다. 류제가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잠시 동아리를 구경하고 싶은데요.”

“아아, 1학년이구나. 들어오렴. 턱에 발이 안 걸리게 조심하고.”

문을 활짝 연 그녀가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역사 연구 동아리는 도서부와는 다른 느낌으로 조용했다.

“차분하네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어요.”

“지금 우리 동아리에 새로 입부한 귀족 자제분께서 책을 읽고 계시거든. 원래는 그냥 다과를 먹으면서 자유자재로 토론하는 분위기야.”

“귀족 자제분이라니. 별일이네요.”

학교에 비키 말고 다른 귀족이 있었나? 별 관심이 없었던 류제가 동아리실 내를 훑었다. 부원들 모두 무슨 벌이라도 서고 있는 건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사 공부를 좋아하는 1학년도 있구나. 호기심 충족 겸 만든 소규모 동아리인데 무려 귀족분이 찾아와 주실 줄은 누가 알았겠니. 아, 서있게 해서 미안해. 차라도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아까 마셔서요.”

“그럼 과자라도 먹으렴. 자, 여기까지 와줬는데 분위기가 이래서 미안해서 그래. 사양하지 말고.”

문학소녀 선배가 오지랖 넓은 옆집 이모처럼 그들에게 주전부리를 강요했다.

주머니가 과자들로 볼록해지기 전 류제는 궁여지책으로 버터 비스킷을 씹어 먹었다. 그 바스락거리는 소리마저 시끄럽게 들릴 정도로 동아리실이 고요해서 류제는 이 방에 그녀와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부원들은 어쩌지도 못한 채 테이블에 둘러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리라도 내면 대역죄인이 되는 양 새파래진 얼굴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 그들은 왕녀라도 상대하는 것처럼 예의 발랐다.

류제는 차마 비스킷을 다 씹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삼킨 반죽이 채 식도를 내려가기 전에 그가 부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귀족이 부원이라고요? 귀족 어빌리터라니 드무네요.”

“그렇지? 그것도 소문으로만 듣던 대귀족 셀로니아가의 영애야. 우리는 귀족을 처음 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 있지. 평소대로 떠들면 왠지 안 될 거 같고. 으으, 그렇다고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골치가 아파 머리를 싸맨 그녀가 전전긍긍 말소리를 죽였다. 그녀의 눈빛이 닿은 곳에는 도서부처럼 책장이 놓인 곳이 있었는데 어렴풋이 누군가의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리본에 다람쥐 꼬랑지처럼 매달려 있는 붉은색 포니테일이 보였다.

식도에 걸린 비스킷이 숙 내려갈 정도로 류제는 김이 빠졌다. 에이, 뭐야. 귀족이래서 학교에 비키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비키였잖아.”

“허억……! 너…너… 귀족분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안 돼. 설마 저분과 아는 사이니? 아니면 너도 귀족?”

무슨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그녀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다른 사람이 비키를 대하는 태도가 우습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류제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전 평범해요. 비키는 같은 반 친구인데, 제가 한번 말을 걸어볼게요. 이렇게 긴장 안 해도 될 거예요.”

“그래도 괘…괜찮겠니?”

그녀가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어빌리티가 발현되기 전까지는 평민이었던 그녀의 반응이 정상적일 것이다. 귀족은 소수인 데다가 셀로니아가처럼 대대로 어빌리터를 배출하는 가문은 드물었다.

어빌리터끼리는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키아나트리체는 엄연한 신분제 사회이다. 그녀처럼 귀족에게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날 때부터 박혀있는 것이 당연했다.

나도 뭐, 렌이 초반부터 비키와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이 사람들처럼 비키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눈치 보고 다녔을지도 모르지.

입맛을 다신 류제가 렌과 함께 비키에게 향했다. 부원들은 류제가 감히 그녀가 마음 상할 일이라도 할까 걱정스러워했다.

류제는 평가 점수라면 목을 매는 비키가 왜 이런 미래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동아리에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역사 과목은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메리트가 없는데. 아니면 비키가 그런 걸 다 내팽개칠 정도로 역사에 관심이 있었나? 에이, 절대 아니다.

“비키 너 여기서 뭐 해?”

“우앗! 깜짝이야. 렌……? 하고 류제잖아.”

말을 건 것은 류제지만 렌의 천연덕스러운 주근깨 얼굴에 먼저 시선이 간 비키가 뒤늦게 류제를 흘겼다.

류제와 비키의 대화 이벤트 트리거가 발생했지만 찝찝함이 날아간 재경이 반가움을 참지 못하고 건들건들 인사했다.

“뭐 하냐, 여기서.”

“뭐… 내가 어디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렌 주제에.”

그녀가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대꾸했다. 유네에게만 비밀로 말했던지라 이 동아리에서 저들을 만날 거라 생각 못 했던 비키는 부끄러워서 괜히 볼을 부풀렸다.

힐끗 렌을 쳐다본 그녀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교양 없이 떠들지 마.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아야지. 교실에서처럼 큰 소리로 떠들었다가는 선배들한테 혼날걸.”

소곤소곤, 특유의 날 선 말투로 경고한 비키가 조용히도 비꼬았다. 류제는 어이가 없었다. 그 누구 때문에 분위기가 이렇게 된 건데.

“귀족이랍시고 으름장 놓을 땐 언제고. 원래 조용한 게 아니라 네가 불편해서 조용한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는 거지?”

“뭐?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기는 내가 올 때부터 계속 이런 분위기였어.”

“싸…싸우지 말고. 자… 친구끼리 과자나 먹어요.

어느새 온 문학소녀 선배가 비키와 류제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살필 겸, 그들이 진짜 친구인지 확인할 겸 접시에 주전부리를 한가득 들고 온 그녀는 앉아서 이야기하라며 부원들을 시켜 옆에 이야기할 수 있는 테이블을 만들어주었다.

“워…워…원래 우리는 수다… 토…토론을 하면서 의견을 교환하는 동아리거든요. 주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이야기하세요. 치…친구분하고! 마음껏!”

드디어 학기 초부터 시작된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탈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문학소녀가 호호 암살자처럼 스르르 뒤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었다.

난 비키랑 대화하려는 게 아니라 동아리 설명을 들으러 온 건데. 까딱하다가는 동아리 설명은커녕 비키와 수다나 떨 판이다.

사뭇 다른 태도를 목격한 비키는 자신이 잘못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KO 직전인 비키에게 류제가 촌철살인으로 마무리했다.

“거봐.”

“시끄러워!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너희들이 자꾸 날 만만하게 대하니까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평생을 남들에게 받들어 모셔지고 살아온 비키가 고작 몇 개월 재경에게 야야 소리를 들었다고 자기가 귀족인 것을 까먹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황당해진 류제가 뭐라 한마디 던지기 전에 재경이 잘난 척하며 끼어들었다.

“멍청아, 나니까 가능한 거야. 나니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는 의자를 밀어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내가 그런 거 다 씹어먹는 삼류 악당 렌 지미니까! 라는 의미였지만 특별하게 대해준다는 것으로 좋게 해석한 비키는 얼굴이 목 끝까지 새빨개지고 말았다.

“시끄러워! 바, 바…바보 같은 말 하지 마. 여기는 왜 온 거야. 유네한테 듣고 온 거야? 난 바쁘단 말이야. 너희랑 놀아줄 시간 없어!”

“누가 너 있는 줄 알고 온 줄 아나. 류제가 동아리 구경한다고 해서 따라온 거거든? 선배가 자리도 마련해 줬는데 무시하고 그냥 가리?”

“맞아, 그걸 탓하려면 너야말로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이런 동아리에 입부한 이유 먼저 설명해 줘야지.”

맞은편 자리에 앉은 류제도 테이블을 탁탁 내리치며 비키 또한 테이블에 앉기를 종용했다.

비키는 시끄러운 거 아닐까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동아리 부원들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특히 동아리 부장으로 보이는 문학소녀가) 어서 이야기를 나누라는 압력을 느끼고 죄책감에 자리에 앉았다.

“하아, 진짜 이게 뭐야. 좀 찾아보고 싶은 정보가 있었을 뿐이야.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학교에서 사료가 가장 많은 이곳에 입부한 거고. 이제 됐어?”

“찾고 싶은 게 있다고? 넌 귀족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시키면 되는 거 아냐?”

“놀리지 마. 무슨 말만 하면 귀족이래. 귀족의 귀자 취급도 안 하면서. 난 내가 스스로 찾고 싶은 거야!”

팔짱을 낀 비키가 고개를 팩 돌렸다.

이 대화로 비키는 악몽을 극복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재경이 턱을 괴고 실실 웃었다. 비키가 히죽거리는 재경을 보며 말을 더듬었다.

“왜…왜 날 보면서 실실 웃어?”

“뭐래. 황당해서 그런다, 왜.”

재경이 테이블에 있는 비스킷을 집어 이로 툭 부러뜨렸다.

비키는 평소처럼 렌이 괘씸하다는 태도지만 류제는 보고 말았다. 싫어도 무시할 수 없다. 옆에 앉은 렌도 알지 못할 감정이 비키에게 있었다. 류제의 불안함에 못을 박아버리듯 그건 막 사랑을 시작한 소녀 같은 얼굴이었다.

류제의 마음속에 불쾌함과 질투심이 일었다. 그런 추악한 마음에 반응하듯 식물 동아리 바깥 창가에 들러붙어 있던 촉수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물의 정욕과 마족의 마기가 한데 어우러졌다. 이제 조금만 더 먹으면 그것은 스스로 인간의 정기를 섭취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것이다.

폭풍 전야에 찾아오는 고요. 그 누구도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지 못한 채 그들은 감정을 숨기고 시답잖은 대화나 이어나갔다.

“그래서 뭘 찾는 건데? 천하의 네가 평가 점수도 포기하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 마음이지.”

“뭐 어때, 친.구.잖아. 혹시 필요하면 도와줄 수도 있지. 그렇지, 렌?”

그 친구라는 선을 지키기를 강요하듯이 류제가 끊어서 말했다. 호신술 강습을 보더라도 렌은 오지랖이 넓어서 비키가 곤란하면 멋도 모르고 도와줄 것 같아 류제가 미리 선수를 쳤다.

그리고 그 질투심이 본의 아니게 스토리대로의 흐름을 만들어냈으니 그야말로 이 세계의 논리와 재경의 존재가 우연찮게 톱니바퀴가 맞아 만들어낸 기적이다.

“도와준다고? 흥. 네가 남 일에 적극적인 적이 손에 꼽으니 류제 네 말은 영 믿음직스럽지 않아.”

“거참 미안하게 됐네.”

“농담이고 그냥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사실인지도 아닌지도 모르고.”

“그걸 이 역사 연구 동아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거야?”

“몰라. 단정할 수 없어.”

“그게 뭔데?”

“끈질기기는. 너희랑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우리 가문의 먼 선조의 이름에 관련된 거야.”

정말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에 류제가 버퍼링이 걸렸다. 아니, 기간트리카의 역사적 배경 이런 걸 찾는 줄 알았더니 셀로니아 가문의 선조? 왜 찾는 거지? 이런 생각들로 머리에 물음표가 뜬 류제를 보며 비키가 당치도 않다고 콧방귀를 뀌었다.

“흥, 표정만 봐도 알겠네. 별안간 그걸 왜 찾냐고 묻고 싶은 거지?”

“그야 놀랄 만도 하잖아. 네가 평가 점수를 포기하고 찾는다는 게… 고작해야… 뭐?”

“나도 내가 유난스러워 보이는 거 알아. 어렴풋이 옛날 기억이 떠오른 것뿐인데 여기저기 쑤시며 찾는 것도 내 스타일 아니고.”

질렸다며 한숨을 내쉰 비키가 늘어져 의자에 기대었다. 류제는 가만히 비키의 말을 곱씹었다. 비키의 옛날 기억이라. 그렇게 말한다면 떠오르는 장면은 하나밖에 없었다. 셀로니아 가문의 비극.

“마족과 관련된 일이야?”

“잘 아네. 실은, 너희들이니까 말하는 건데…….”

“뭔데 그래. 네가 이 정도까지 움직이다니 신기하네.”

“화마의 군주가 우리 가문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지나가듯이 툭 튀어나온 엄청난 발언에 이제는 버퍼링이 아니라 일시 정지가 된 류제가 입을 칠칠치 못하게 벌렸다.

화마의 군주, 그러니까 마족의 군주급 존재가 셀로니아 가문의 사람이라고? 그게 말이 되나? 아니, 애초부터 마족은 그러니까… 인간이 아니라 마족…….

“가서 목덜미를 물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려.”

마기에 짓눌려 이성이 나갔을 때 마족들이 속삭였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 류제가 입을 달싹거렸다.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정신이 나가는 것처럼 당시의 기억은 뚜렷하게 나지 않았지만 마족들은 그가 렌을 마족으로 만들 수 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마…마족에게 물리면 구울이 되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마족의 헛된 속삭임이라 치부했던 류제는 들은 것이 있기에 비키의 가정을 쉽사리 부정하지 못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마왕이 인간을 물어서 인간을 마족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말이 증명이 되어버린다. 말도 안 돼!

“나도 알아. 나도 내 기억을 못 믿겠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어.”

속으로 생각했던 마지막 문장이 결국 류제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는지 비키가 씁쓸하게 변명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책에 그 정보가 들어있는 양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축하해 줘야 할 일이지만 지레 겁에 질린 류제가 말을 더듬으며 부정적으로 나섰다.

“왜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데? 갑자기 그런 정보는 누구한테 들었어?”

“…말하기 싫지만… 하아, 여기까지 말했으니 말 안 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비키가 목소리를 낮추라며 검지를 입술에 대었다. 이런 이상한 이야기의 출처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혹여나 뒤를 확인한 류제가 비키의 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고개를 모았다. 범죄라도 모의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진지하게 속삭였다.

“문득 떠올랐어. 꿈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그 화마가 우리 가문을 엉망으로 만들 때 나는 비밀 창고에 숨어있었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거기서 초상화를 본 거 같아. 하얀 머리에 내 머리카락처럼 빨간 눈을 한 소년의 그림. 나를 찾아낸 화마의 군주가 그 모습과 너무 똑같았는데 양쪽에 있는 그들이 무서워서 나는 그 초상화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거야.”

어째서 그 기억을 잊고 있었는가 의아할 만큼 되짚어 떠올릴수록 기억이 선명해졌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뒤에 있는 화마의 그림과 앞에 있는 화마의 존재에 궁지에 몰려 까무러쳤던 것이다.

류제가 믿을 수 없다며 반박했다.

“그 그림이 네 선조인지는 어떻게 확신해? 벌써 몇 년도 전 일이잖아!”

“쓰여있었으니까.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라고.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어.”

“착각한 거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리가 없어. 흥, 바보 취급할 거 아니까 말하기 싫었는데.”

비키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기억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찾아서 확인하면 이 찝찝함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그때 저택의 거의 모든 것들이 타버려서 남은 서책이나 자료들이 없어. 그래서 여기에 온 거야.”

이 이름을 찾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났다. 허탈할 만큼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그녀는 벌써 지쳐갔다.

렌이 옆에서 기운을 북돋아 준답시고 쉽게도 응원했다.

“찾다 보면 나오겠지 뭐. 책이야 천지삐까리로 많구만. 벌써 저기 있는 책을 다 읽은 건 아닐 거 아냐.”

“그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너희가 이 동아리에 들어서 날 도와주면 되겠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그렇지?”

이때다 싶었는지 비키가 명령어조로 거만하게 굴었다.

자신이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가진(그게 슬슬 진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류제도 비키의 기억에 의구심이 품었다.

하지만 비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왕이 죽은 지금 마족들이 그에게 찾아와 마왕을 부활시키려고 하는지도, 마족들이 나라카로 물러난 이유도 설명이 될 것 같다.

미나가 있는 도서부의 메리트도 좋은데. 도서부와 역사 연구. 무엇이 나을까 고민이 된다.

“생각해 볼게.”

“뭐야, 네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친구라면서. 렌, 너는 할 일 없지? 도와주는 거다?”

“윽,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시간 나면 생각해 볼게.”

반쯤 그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하기를 상상하던 비키는 류제가 귀를 막고 모른 척하자 바싹 약이 올랐다. 전부 털어놔 줬더니 모르쇠를 잡다니. 비키가 테이블을 박차고 짜증을 부렸다.

“이 거짓말쟁이들. 사내자식들이 한 입으로 두말하기는!”

“누가 안 도와준대. 시간 나면 도와준다고 했지. 급한 것도 아니잖아.”

마족의 비밀이나 세계관의 웬만한 사실들은 다 꿰고 있는 재경은 비키의 엄청난 발언에도 놀라지 않았다. 칭찬도 없는 지루한 태도에 비키가 이번엔 죄 없는 렌에게 따졌다.

“렌 주제에 잔말 마! 난 이 찝찝함을 빨리 끝내고 싶어. 마족의 발생과 그 생태의 비밀이 풀릴지도 모른단 말이야. 마족이 실은 인간이었다니 대발견이잖아. 좀 더 놀라! 그리고 열의를 보여!”

“거참 귀찮게 굴기는. 괜찮아, 괜찮아. 다 잘될 거야.”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도 성공했었다는 걸 확인했고. 마음이 편해진 재경이 해탈한 얼굴로 비키의 어깨를 다독였다. 이 상태라면 류제가 다른 히로인들의 악몽도 극복하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재경이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암, 비키 네 일인데 잘되고말고.”

“아… 그…아니…….”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비키가 몸이 굳었다. 렌이 신경 쓰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도 빨리 뛰고, 싱숭생숭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꾸 생각나서 귀찮아 죽겠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거리감조차 숨이 막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다른 동아리도 들러야 해서 이제 가야겠다. 네 일은 나중에 또 이야기하자.”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류제가 하하 웃으며 렌의 손목을 끌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기숙사에 돌아가려고 했던 비키가 아쉬움을 표했다. 도와달라는 말이 그렇게 부담스러웠나.

“벌써 가게? 조금만 더 있다가 가. 안 도와줘도 되니까.”

“벌써는 무슨. 너 때문에 설명도 제대로 못 들었는데 아직 들러야 할 동아리가 있단 말이야. 자, 가자. 렌.”

“우앗!”

재경이 류제의 무자비한 힘에 끌려 거의 넘어질 뻔했다. 비키는 변덕을 부려 렌을 끌고 나가버리는 류제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이 이야기 아무한테도 이야기하면 안 돼!”

“알았어. 저녁에 보자.”

“약속한 거다?”

“류제, 아파! 알아서 걸을게. 왜 이렇게 서둘러?”

물론 시간이 널널하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류제는 의도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을 붙잡으려는 역사 연구 동아리 부장을 신문 권유하는 판매원 취급한 류제가 재경을 끌고 동아리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은 류제가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여긴 별로야!”

“왜?”

“아무튼 별로야.”

비키랑 같은 동아리는 안 된다.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류제는 렌 저 둔탱이를 보고 있자니 속이 다 끓었다.

유네도 그렇고 비키도 그렇고 왜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럴 거면 차리라 도서부가 낫다. 적어도 미나는 렌한테 관심 없으니까.

마음은 기울었지만 혹시 모르니 다음 동아리를 찾아가려는 류제는 주머니에서 유인물을 꺼내다가 역사 연구 동아리실 바깥 창문까지 영역을 침범한 기묘한 식물을 보고 움찔거렸다. 창문에 담쟁이덩굴처럼 나있는 분홍색 식물이 아까보다 더 자라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렌, 저 덩굴이 원래도 저랬었나?”

“어? 그러게. 잘 모르겠는데.”

이런 데에 예민한 렌도 어리둥절해하니 류제도 그런가 보다 넘어가기로 했다. 식물이 자란다 한들 자기 일 아니니 관심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저 식물 동아리가 어련히 하겠지. 류제의 무관심증이 오늘도 빛을 발하며 챕터는 점점 낯 뜨거운 이벤트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류제가 다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장소는 신관에 딸려있는 넓은 도장이었다.

학교에 여러 체육계 동아리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류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검도부였다. 동아리 설명을 읽어보면 정신적인 수련에 중점을 두었다.

정신적인 수련이라고 하니 사이비 종교 같은 설명이긴 했지만 단증 제도가 있어서 단증이 높으면 평가 점수도 나쁘지 않고 두 마리의 토끼를 전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점찍어 둔 동아리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도장 문 앞에 선 류제는 어쩐지 왕녀의 친위대원들이 눈에 거슬렸다. 그들은 동아리실 바깥에서 줄줄이 늘어서서는 유명 인사라도 온 것처럼 꺄꺄 소리를 질러댔다.

불길한 기분이 스쳤다. 정신적인 수련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저런 것도 다 계산된 정신적인 수련의 일부인가? 꺼림칙했지만 검도부는 체험해 보고 싶었기에 류제가 머뭇거리다 일면식 있는 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미안한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사람들 다 여기 부원들이야?”

“어? 류제 너야말로 뭐 해? 너 검도부 들어가게? 대애바악!”

“체험을 한번… 어, 으악, 잠깐! 레…렌!”

“류제가 검도부에 입부한대!”

“잠깐, 잠깐만. 렌을―”

그냥 물어봤던 것일 뿐인데 개미지옥에 빨려가듯 여학생들의 틈바구니로 끌려들어 갔다. 졸지에 뒤에 서있던 재경은 류제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류제! 뭐 하는 거야?”

“우아악! 나도 몰라!”

재경이 내미는 손을 놓친 류제는 무턱대고 어빌리티를 쓰자니 위험할 것 같아 하렘 미연시 주인공처럼 여학생 필터를 거치고 안쪽으로 쑥 던져졌다. 균형을 잡지 못한 그가 비틀거리며 바닥을 짚었다.

혹시 렌도 딸려왔나 주변을 살피던 류제는 틈바구니 안쪽에 고고하게 서있는 인물을 보고 이마를 쳤다.

“왕녀 너였구나. 어쩐지.”

“류제 신리여, 그대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도복을 입은 니냐롯트가 그의 앞에 섰다. 머쓱해진 류제가 무릎을 털고 일어서 엉망이 된 머리를 정돈했다. 왕녀 때문이라면 문밖에 난리가 난 상황이 설명이 되었다.

“검도부에 흥미가 있어서 와본 건데 네가 먼저 있을 줄은 몰랐네.”

“의외로군. 그대가 검도에 흥미를 보이다니.”

“딱히 검도라는 종목에 집착하는 건 아냐.”

“거기 너, 뭐 하고 있는 거냐. 너도 왕녀님을 향한 팬심에 홀린 불쌍한 어린 양이냐? 우리는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은 받지 않는다. 호된 훈련을 버티지 못한 패배자가 싫으면 좋은 말로 할 때 나가라!”

루이나인 줄 알고 봤더니 엄격해 보이는 3학년이 색이 다른 도복을 입고 류제를 죽도로 위협했다. 왕녀가 대신 그녀를 막아섰다.

“아니오, 부장이여. 그리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자는 나의 친위대가 아니오.”

“와…왕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루이나. 정말이냐?”

“어, 예…옙!”

그 버릇없고 자기 멋대로인 루이나가 검도부 부장의 말에 꿈쩍도 못 했다.

왕녀를 지키는 루이나의 주 무기는 검이었다. 친위대 일이 아니더라도 검도부에 루이나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루이나가 검도부에 들어가자고 왕녀를 꼬드겼나? 그럴 가능성이 높다.

“평범한 입부 희망자인가. 난장판 속에서도 잘도 들어왔구나. 그쪽은 조용히 해라. 수련에 방해된다!”

왕녀에 이어 류제까지 검도부에 오자 여학생들의 환호 가 커졌는데 부장의 카리스마에 기세가 일순 수그러들었다.

말썽이 잦은 친위대들이 검도부 부장의 말은 얌전히 듣는 것 같다. 왕녀가 입부했다고 철없이 따라 들어갔다가 부장의 지도로 시행된 가혹한 훈련을 못 버티고 도망간 자들이 저 중에 여럿 있어서일 것이다.

“미안하다. 비밀로 했는데 어느새 소문이 난 건지.”

이 말에 루이나가 눈에 띄게 뜨끔거렸다. 왕녀가 친히 말을 거는 류제에게 질리지도 않는 경고를 날리던 루이나는 오늘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전부 그녀가 발언을 실수해 이런 꼴이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 1학년 남학생. 입부 희망자면 입부 희망자답게 빠릿빠릿하게 옷 갈아입고 나와!”

죽도를 든 그녀가 탈의실을 가리켰다. 류제는 구경만 하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지금 그런 말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문은 친위대들이 콩나물 자루처럼 지키고 서있고, 1학년으로서 3학년 부장의 말을 거역하기 어렵다. 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쩌지.

수많은 시선들이 주는 압력에 굴복한 그는 어쩔 수 없이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렌이 감히 자기를 내팽개치고 혼자만 놀았다고 투덜거릴 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류제 신리여, 1학년은 이쪽이다.”

어색한 차림으로 탈의실에서 나온 류제에게 니냐롯트가 작게 손짓했다. 새로 입부한 흰 띠 학생들이 구석에서 앉아 무릎을 꿇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대도 검도부에 들 생각인가?”

류제가 옆에 앉자 니냐롯트가 진중하게 물었다.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학교에 국한해서는 그녀도 평범한 학생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하지만 저런 걸 보면 일국의 왕녀라는 신분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취미 활동으로 입부한 동아리마저도 이 난리니 니냐롯트는 갖은 걱정으로 머리가 무거웠다. 거기에 류제 신리까지 함께하면 이 동아리는 바람 잘 못 날 게 뻔했다.

“정신 수양에 좋다고 해서 솔깃했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네.”

“나도 같은 목적이었네만 의미가 없겠군. 정신 사나운 것이 두 배는 되었어.”

니냐롯트가 친위대를 비롯한 열성 팬들을 흘겼다. 루이나에게 그렇게나 입조심 하라고 했는데 소문을 내고 다니다니 이런 부분에서만 경솔하다.

더불어 류제 신리까지 함께하니 그를 못마땅해하는 친위대원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로 분란이 더 커졌다. 언제나처럼 무시하려고 해도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렌 지미와는 다른 동아리에 드는 건가?”

저 친위대들 사이에는 류제와 늘 붙어 다니는 그자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있으면 렌은 어디 있나 묻곤 하는 왕녀를 류제가 괜히 의식했다. 예의상 묻는 것이라 생각했던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저번 손등의 키스 건을 떠올리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렌은 동아리에 관심 없대.”

“그러한가.”

무슨 말을 꺼낼까 긴장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도복을 입고 정좌한 니냐롯트를 곁눈질로 쳐다본 류제는 그때 일을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거렸다. 흐르는 땀을 내버려 두며 무릎 위에 손을 정갈하게 올린 니냐롯트는 단아하게 중얼거렸다.

“덥군.”

그녀는 지쳐 보였다. 단이 높은 고학년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훈련은 호신술 수업이나 기숙사 아침 운동에 비하면 다분히 과격했다. 기합 소리가 왕녀 친위대들의 환호와 경쟁하듯 도장을 뒤덮었다.

“그때 왜 렌의 손등에 키스를 한 거야?”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입에서 멋대로 질문이 터져 나왔다. 몹쓸 질투심이 남들에게 전부 들통날 것 같았던 류제가 쑥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글쎄. 왜 그랬을까.”

왕녀가 오랫동안 그 질문을 곱씹었다. 검법 시범이 하나 끝나는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왕녀는 천천히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그와 화해하고 싶었다. 잘 안 되었지만.”

손등의 키스로 시작하는 화해. 화해라는 단어는 이전에 사건이 하나 더 있었음을 암시했다. 다툼. 그녀가 이전에 렌과 싸운 적이 있다는 의미다.

왕녀가 언제 렌과 싸웠더라. 류제는 아무리 기억을 뒤져보아도 그런 장면을 떠올릴 수 없었다.

묻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표정이 솔직해서 말 안 해도 빤히 보였다. 웃는 가면을 쓴 채 자신의 몰락을 바라는 이들 사이에서 17년을 살아왔던 니냐롯트는 그의 목적을 쉽게 파악했다.

절친한 친구의 일이니 거슬릴 만도 하겠지. 나는 대외적으로 렌 지미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대는 렌 지미의 비밀을 알고 있나?”

한참 입을 다물던 니냐롯트가 흘러가듯 조용하게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는 포기한 듯이 건조했다.

“렌의 비밀? 할머니 이야기라면 조금.”

“그의 가정사 말고 그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왕녀가 말을 정정했다. 렌이 알고 있는 것. 류제는 불명확했던 의심을 왕녀 또한 품고 있자 소름이 끼쳤다.

렌과 가까이 있던 그만 느끼고 있었던 이질감을 왕녀가 어떻게 알지? 둘은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

“내가 어째서 병마가 침입했던 그날 학교에 온 것인지 그대는 알고 있나?”

류제는 어렵지 않게 그날을 떠올렸다. 렌이 큰 상처를 입었던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왕녀와 그 친위대 군단이 간신히 병마의 군주를 토벌했다.

덕분에 왕녀에게 구원받았지만 류제는 한 번도 그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세라 선생님이 학교 밖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그걸 왕녀가 받은 것 아니었나?

“모르면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정황을 렌 지미는 니냐롯트에게만큼은 간접적으로 알려주었다.

렌 지미는 분명히 병마를 막을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터인데 왜 나에게만 부탁한 거지? 내가 아무리 나라의 왕녀라지만 학교에 남아있을 다른 이들에게 미리 알려줬더라면 대비하기 편했을 터인데.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건 류제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가 한 말과 렌이 상관이 있나? 왕녀의 사과와 병마족의 침입이 관련이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알고 있기에 나는 거절당한 것일까.”

니냐롯트의 목소리는 슬펐다. 안 그런 척했어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신의 편이라 믿어 성심성의를 다한 사과를 했는데도 매몰찬 태도로 거부하는 건 왕녀라도 상처받을 일이었다.

“꺄아아악. 니냐롯트 님!”

“류제 신리, 네 이놈. 왕녀 저하와 친밀하게 대화를… 윽. 밀지 마라, 이것들아!”

“류제~ 머리 한 번만 넘겨주면 안 될까? 응?”

루이나는 왕녀가 입부할 동아리를 떠벌리고 다닌 벌로 문을 막고 친위대를 제어했지만 혼자서 그들을 막기에는 버거워 보였다. 다행히 류제가 앉아있는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이전처럼 귀찮게 굴 수 없었겠지만 기합 소리가 줄어드니 문 쪽에 서있는 학생들이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1학년들, 나와라!”

카리스마 넘치는 부장이 죽도로 삿대질하며 명령했다. 이에 니냐롯트와 류제를 비롯한 흰 띠 학생들이 일어서서 열과 행을 맞춰 앞에 섰다. 류제도 목검을 건네받고 어색하게 허리띠에 찼다.

그 후 류제는 거짓말 아니고 삼십 분 동안 행주처럼 쥐어짜였다. 어빌리티는 죽어도 못 쓰게 하는 바람에 류제는 고되다는 말을 오랜만에 실감했다.

땀범벅에 김장 배추처럼 절여진 류제는 검도부는 육신을 피곤하게 해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들려는 것인가, 정신적 수양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니냐롯트의 말을 떠올릴 새도 없이 간신히 검도부 체험을 마친 류제는 옷을 갈아입고 도망치듯 도장을 빠져나왔다. 바쁘다던 왕녀가 무슨 정신으로 저런 곳에 들어간 건지 도통 모르겠다.

“…그런데 렌은 어디로 간 거지.”

학생들을 피해 검도부 도장 후문으로 나온 류제가 사라진 렌을 찾아 헤맸다. 기다리다 못해 그를 내버려 두고 기숙사로 돌아간 게 아닐까 하는 그럴싸한 추측이 들었다.

무슨 비밀을 아는 걸까 렌에게 물어보고 싶다. 렌과 왕녀는 왜 싸웠으며, 진중하고 고지식한 왕녀가 먼저 사과할 정도의 일은 뭐고, 그게 병마의 침입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궁금증 끝에 렌에게 물어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건 ‘몰라도 된다’는 말일 것이다.

“어머, 류제 학생. 여기서 만나다니 신기하군요. 입부할 동아리를 정하셨나요?”

보이지 않는 렌을 찾아 길게 난 복도를 거닐던 류제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키아나트리체식 정장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짙은 회색 긴 곱슬머리를 한쪽 귀로 넘겨 사랑스러운 눈 밑 점을 드러낸 그녀는 다름 아닌 그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세라 선생님? 선생님이야말로 이곳에 왜…….”

류제는 세라가 들고 나르는 물건들이 혼자 들고 걷기에는 버거운 양임을 깨닫고 달려가 양해를 구했다.

손에 응급처치 관련 물건들을 가득 품었던 세라는 미안하다며 심폐 소생술 연습용 인형을 류제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우리 믿음직스러운 부반장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데 늘 같이 다니던 말썽꾸러기가 보이지 않네요.”

“저도 렌을 찾고 있는데 잠깐 동아리 체험 하는 사이에 보이질 않네요. 기숙사에 돌아갔나도 싶고.”

류제가 한숨을 팩 내쉬었다. 둘이서 알콩달콩 동아리 체험을 즐길 셈이었는데 어째 들어가는 족족 바보 같은 일이 벌어져 생각한 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요리 동아리도, 역사 연구 동아리도, 검도부도 모두 보류다. 검도부에선 조금만 구슬려보면 왕녀에게 비밀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친위대들로 정신 사나워서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였다.

“눈에 보이는 곳에 없으니 불안하네요, 후후. 렌 학생은 2학기 수업에 잘 적응하는 것 같나요?”

“S_script 수업만 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그건 정말 어렵죠. 힘내세요, 류제 학생도.”

류제는 상냥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세라를 넌지시 힐끗거렸다. 응급 도구하며 이상한 인형까지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라 선생님도 분명 무슨 동아리를 맡고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이런 건 다 어디서 쓰는 건가요?”

“제가 고문을 맡은 동아리 부원들이 요구한 물품이랍니다. 긴급 상황에 응급처치를 배울 수 있는 동아리거든요. 학기 초라 필요한 것이 참 많네요.”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마침 잘되었다며 눈을 반짝였다.

“류제 학생, 동아리 체험 하고 있다고 했죠? 이 기회에 구경해 볼래요?”

“어…….”

렌을 아직 못 찾았는데. 그래도 담임 선생님의 제안인지라 곧바로 거절하지 못한 류제가 머뭇거리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류제! 진짜 왜 나만 내버려 두고 가?”

어디를 갔나 했던 렌이 헉헉 류제를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너야말로 어디 갔던 거야? 안 보여서 기숙사에 돌아간 줄 알았잖아.”

왕녀 친위대들의 기세에 밀려 도장 근처도 밟아보지 못한 재경은 눈을 뗀 사이 사라져버린 류제를 찾아 돌아다니다가 전속력으로 뛰어와 숨을 골랐다.

“폐부 위기라는 이상한 동아리한테 붙잡혔어. 빠져나온다고 죽는 줄 알았네. 세라 쌤은 여기서 뭐 해요?”

“렌 학생은 오늘도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바쁘시군요. 저는 제 담당 동아리에 물건을 전해주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류제 학생을 만났어요.”

세라가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재경이 아아,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가 없는 동안에도 류제는 왕녀에 이어 마지막 세라의 동아리까지 완료해 낸 것이다. 정말 류제의 옆에서 길잡이를 자처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재경은 조금 안타까웠다.

“검도 동아리는 어떻게 된 거야? 거긴 입부 안 해?”

“거기는 너무 유난이라서 싫어.”

류제가 30분 동안 이어진 고문을 떠올리고 질색했다.

“뭐든 두 분 모두 마음에 드는 동아리에 들어가시길 빌게요.”

언제나처럼 사이좋은 두 사람을 보는 세라는 그들의 삶에 이런 평범한 행복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제가 담당하는 동아리의 동아리실은 여기랍니다.”

어느 동아리실에 도착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학년이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응급 치료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세라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고학년들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그녀가 주문해 준 물품들을 건네받았다.

“수고하시네요. 이 학생들은 우리 반 학생들입니다. 잠시 구경만 하다 간대요.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세라 선생님 부탁인데요. 물품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쟤가 류제구나.”

세라의 반의 유명 인사인 류제를 구경한 동아리 부원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그와는 반대로 인지도가 적은 1학년 대표 말썽꾸러기는 류제의 유명세에 스펀지처럼 눌려 존재감이 사라졌다.

하기야 누가 봐도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에 주근깨만 가득한 그저 그런 얼굴보다 잘생기고 훤칠한 미연시 주인공이 더 눈에 들어오겠지. 심통 나서 헹, 고개를 돌린 재경이 혀를 베 내밀었다.

“응급처치라니. 선생님과 잘 어울리는 동아리네요.”

“이 동아리는 제가 만들었거든요. 군에 있던 경험을 토대로 응급처치를 심도 있게 가르쳐주고 싶어서요.”

그녀가 언짢게 웃었다. ‘힐링’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누구보다 안타까운 죽음과 가까웠다. 초반 처치만 좋았으면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린 그녀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응급처치법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 동아리를 창설했다. 다행히 학생들도 열정적이라 폐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병마족 등의 마법 인자에서 발생하는 중독 물질에 대한 응급처치에는 일반적으로 방독면이 있겠지만 이미 감염된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가 시급합니다. 방치하면 검게 변한 피부가 괴사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발견 즉시 해독약을 주입하거나 몸 주변에 붙은 인자를 흐르는 물로 씻어내야 합니다. 특히나 피부를 통하여 흡수되는 독일 경우 응급처치자의 몸에도 독이 묻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그녀들이 1학년 학생들에게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세라가 뒤에서 학생들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류제가 보다 적극적으로 상급생의 설명을 들으려는 바로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아악! 저게 뭐야?”

“다들 도망쳐! 선생님, 선생님! 큰일 났어요!”

꺄르르 장난치다 터뜨리는 웃음과 다른 비명. 선생님인 세라가 가장 먼저 문밖을 확인했다.

언제 신관이 이렇게 변한 건지 복도가 별세계 수라장이었다. 분홍색 기괴한 덩굴식물이 건물 내부를 침식하는 사태에 미처 놀라기도 전에 학교 전체에 비상벨이 울렸다. 세라의 슬렉터에 반짝반짝 빛이 발했다.

―비상 상황입니다. 현재 사태 파악 중입니다. 모든 학생은 신속하게 신관에서 나와 기숙사로 대피하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모든 학생은 신속하게 신관에서 나와 기숙사로 대피하세요. 선생님들은 즉시 학생들을 인솔하여 신관 밖으로 나가주세요. 현재 정체를 모르는 식물이 신관을……. 지직

병마족 침입 때의 기억이 있던 학생들은 그때와 같은 비상 알람 소리를 듣고 두려움 섞인 눈으로 상황을 살폈다.

상황 판단을 위해 재경도 세라를 제치고 문밖을 확인했다. 타고시아 해변의 악몽에서 비키와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 성공을 확인하고 히로인들이 속한 동아리도 알아냈으니 이번 챕터는 무사히 끝이라고 안도하던 재경은 스토리가 또 틀어졌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분홍색 식물이 정체불명의 끈적끈적한 액체를 내뿜으며 복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분명 이번 챕터는 마족의 공격 없이 끝날 터인데 왜 막판에 뒤통수를 친단 말인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미간을 구기던 재경은 머릿속이 번뜩했다. 깊은 수렁 속에 묵혀졌던 기억이 시각적 정보에 의하여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아! 아차 그거! 그 식물……!”

이 초유의 변태 이벤트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재경의 안색이 못 먹을 것을 먹은 것처럼 새파래졌다.

그가 이 이벤트를 떠올리지 못한 바보 같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계속 애들이 류제 근처에서 식물 동아리가 어쩌고저쩌고했던 것도 다 복선이었던 거다.

식물 동아리 앞에 자라났던 이상한 분홍색 덩굴식물! 그거 나라카에서만 난다는 괴물 식물이잖아! 와…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재경이 왜 이 중요한 이벤트를 망각했는지 변명하자면, 그는 현실 세계에서 멀티 엔딩을 보기 위해 다회차 플레이를 하기는 했다. 이 게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첫 회 플레이 때, 재경은 게임에서 수위 아슬아슬한 서비스 신이 등장하자 이걸 할머니한테 들켰다가는 컴퓨터도 자신도 할머니 손에 요단강을 건널 것이라 직감했다.

그러다 이번 일곱 번째 챕터에서 저 식물을 목격했을 때 처음엔 이게 무슨 괴물인가 싶다가 곧바로 등장한 비정상적이고 변태스러운 에로씬이 등장하자 소스라치게 놀라서 모니터를 엎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할머니가 들어오는 바람에 재경은 질색을 하며 컴퓨터를 강제 종료해 버렸던 것이다.

홀로 재경을 키워야 했던 할머니의 보수적인 성교육으로 인해 재경의 머릿속에는 ‘어른이 되면 어련히 다 안다’, ‘미성년자가 여자 알몸을 보는 것 = 쌈박질하는 것과 비교도 안 되는 무서운 범죄’라는 기막힌 사고방식이 한 톨의 의심도 없이 자리 잡혀있었다.

컴맹인 재경은 다시 게임을 켜자니 누가 컴퓨터를 해킹해 자신을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접을까 했지만 게임이 재미있던지라 뒤 내용이 궁금해 게임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죄책감에 벌벌 떨며 클리어한 첫 회차에는 게임사에서 친절하게 만들어놓은 스킵 버튼을 눌러 고비를 넘겼다.

다음 회차 플레이 때 위키를 확인한 재경은 촉수 이벤트가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일정 수준 이상 도달하였을 때 볼 수 있는 서비스 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이후로 재경은 이번 챕터 자체를 가입할 동아리를 정하는 것 말고는 스킵 버튼을 연타하며 진행했다.

임팩트가 대단했어도 엔딩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이벤트다 보니 스토리를 대부분 스킵하는 다 회차를 진행할수록 신경을 쓰지 않았던 데다가 현재는 재경이 빙의한 지 무려 7개월이나 흐른 시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렸던 재경은 사건의 발단이 되는 식물 동아리를 떠올리지도 못한 채 지금에 도달하고 말았다.

“큰일 났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건 히로인들은 물론이고 학교에 있는 사람들까지 큰일이 나는 완전 급박한 상황 아닌가. 이대로라면 저 변태 촉수는 이벤트가 끝날 때까지 학교를 뒤덮고 여학생들이 교복을 녹이는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될 거다.

“우왁! 이게 뭐야. 징그럽게 생겼네. ‘만생’ 어빌리터가 사고라도 친 거야?”

이 상황에 주체적으로 나서야 하는 류제는 그런 사실은 까마득하게 모른 채 식물에 대해 끔찍한 혐오감만 내뱉었다.

“제군들, 침착하게 대피합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류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세라가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학생들을 통솔했다.

저번에 있었던 병마족 침입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세라를 따라 동아리실을 빠져나왔다. 촉수의 침입이 덜한 다른 동아리방에서도 학생들이 줄지어 대피했다.

“렌 학생! 뭐 하는 건가요?”

다들 신속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재경만이 가만히 서서 반대편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처하게 될 기가 막힌 해프닝을 알고 있는 재경은 도저히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었다.

재경은 이 짧은 찰나에 ‘남은 사람들을 구한다 vs 무시한다’의 기로에 섰다. 삼류 악역처럼 나만 살고자 모른 척하면 될 것을 재경은 저 성질머리에 그러지 못했다. 개입해서 이야기가 엉망이 될지언정 눈앞에 닥친 나쁜 사건을 빤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렌,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류제의 뒤늦은 만류에도 재경은 달렸다. 그는 질타를 받을지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렸다. 학생들을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세라는 이탈하는 렌을 보며 쫓아가지 못하고 난감해했다.

“류제 학생!”

세라의 함축적인 부탁을 알아들은 류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도 류제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다니. 그녀도 몸이 두 개이길 바랐다.

“제가 갈 테니까 선생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는 듯 류제가 곧바로 렌을 뒤따랐다.

렌이 아무리 기고 날아도 류제의 육체적 능력에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빌리티를 써서 머지않아 렌을 따라잡은 류제가 그를 멈춰 세웠다.

“어디 가는 거야? 여긴 선생님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기숙사로 대피하자.”

지금은 병마의 침입 때와는 다르게 그들 말고도 괴물에 맞서 줄 사람들도 많으니 렌을 좋아하는 류제로서는 그가 안전한 곳에 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류제가 말린다고 마음을 바꾸어 그대로 따라간다면 재경이 아니었다.

“도망가자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마침 잘됐다. 너도 도와!”

“도우라니. 설마 남아서 다른 학생들 대피를 도와줄 셈이야?”

“그럼 넌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윽, 너―”

자기 몸도 챙기기 벅차면서 왜 매번 다른 사람만 생각하는 거야. 류제는 왜 이런 애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애니까 더 좋아지는 것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건 싫었다.

“그럼 내가 할게. 렌, 너는 세라 선생님을 따라 도망가!”

“됐고, 오른쪽으로 가! 나는 왼쪽으로 갈 테니까. 동아리실에 사람이 남았나 확인해 봐. 난 식물 동아리를 확인해야겠어.”

“잠깐, 렌……!”

류제가 반박하기 전에 재경은 왼쪽 복도로 뛰쳐나갔다.

이 식물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데 뭘 저리 자신하며 달려간단 말인가. 이게 마족처럼 위험한 괴물이면 어쩌려고.

“으아악. 진짜!”

이미 반대편으로 뛰어가 버린 렌의 뒷모습을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는 식물이 가려버렸다.

류제가 신경질적으로 촉수를 주먹으로 내갈겼다. 과연 나라카산 식물인지 굉장히 단단한 데다 미끌미끌하고 대단한 회복력을 보인 식물은 류제의 강력한 한 방에도 끊임없이 성장하며 진로를 방해했다.

“제길.”

이런 상황에서 다른 애들 따위 렌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류제는 어떻게든 렌이 향한 장소로 향해야만 했다.

그 시각, 책을 읽다가 난데없는 습격을 받은 미나는 촉수에 발목이 잡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이게 무슨 상황인가 가만히 생각했다.

체육대회 때 붙었던 ‘만생’ 어빌리티도 아니고 인간 세계에 이런 식물 괴물이 존재한다는 건 그녀조차 듣도 보도 못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거…….”

비뚤어진 안경 안쪽 분홍 눈동자의 가운데가 붉게 빛났다.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욕이 이 기괴한 식물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 정욕을 먹고 성장하는 분홍빛 식물은 그녀가 어제 힘내라고 친히 응원해 준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었다.

“망할.”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미나는 아직도 채 뒤져보지 못한 도서부의 책들이 손상되면 어쩌나 짜증이 치밀었다.

여기서 도망치기야 식은 죽 먹기지만 남들이 다 자고 있는 밤도 아니고 꿈속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마족의 몸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 흡수하고 있는 정욕은 미나의 주식이기도 한데 아까부터 그 정욕을 강제적으로 흡수하는 중이라 미나는 배가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비상벨과 인간들의 비명을 듣는 그녀는 이 엘레강스한 상황에 원하지 않는 식고문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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