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3)
하루 종일 동아리 홍보로 온 학교가 활기로 넘쳐흘렀다. 평가 점수가 적으니 재미로라도 꾀어내겠다는 심보인지 어떤 동아리 선배들이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학교 축제 때 차릴 부스 활동 홍보. 독특하고 재미있는 활동은 고민하고 있던 1학년을 순탄하게 꼬드겼다.
새로운 실습실에서 시행되는 1년 8반 S_script 수업 시간. 학생들은 영문 모를 기계들을 앞에 두고 단순한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언어로 아무것도 뜨지 않는 검은색 화면에 ‘Hello World!’를 깨작깨작 출력하고 있었다.
세상에, 선생님은 이걸 보고 고급 언어라고 하는데 그녀들의 시선에는 이게 왜 고급 언어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갔다.
“자, 디버그 앤 빌드가 안 되시는 분 손 들어주세요.”
실습 위주의 수업이라서 그나마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것만이 이점인 S_script 수업 중에도 동아리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재경이 까맣게 잊어버린 식물 동아리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야, 진짜 식물 동아리 어때? 생각보다 괜찮대.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으로 간대도 괜찮고. 나라카의 식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한 줄 아니?”
“연구원으로 안 갈 거니까 그렇지. 그랬으면 내가 이 수업을 열심히 들었을 거야.”
초장부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 문법을 늘어놓고 화면에 의미 없는 문장을 써내야 하는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재미없는 안경잡이 늙은 선생이 의욕 있는 학생에게 관심이 쏠린 사이 그녀들이 몰래 속닥거렸다.
“이야기 들어보면 흥미로울걸. 내가 식물 동아리 소속 선배를 통해서 알아봤는데 거기에 키아나트리체에서는 구하기 힘든 식물들도 엄청 많대. 그것도 불법이라 몰래 키우고 있는 게 대다수인가 봐. ‘힐링 팩터’의 주성분이 되는 성분을 추출할 수 있는 식물이 있다는 걸로도 대박 아냐? 게다가 또 있어.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처에서 발견된다는 나라카 자생 식물이 드디어 싹을 틔웠다나!”
“그건 대박인데. 나라카의 식물은 어떤 생김새일까? 보고 싶다.”
“그렇지? 그 식물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데 지나가는 동물을 붙잡아서 잡아먹기도 한대. 식충이 아니라 이름하여 식육 식물!”
“윽,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카더라야, 카더라.”
“거기 조용히 하거라!”
늙은 선생이 귀는 좋아서 수업 중에 쓸데없는 이야기로 산만하게 하는 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선생님이 호통치자 찔끔 놀란 그녀들이 열심히 코딩하는 척을 했다. 책을 봐도 S_script 언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절대 연구원만큼은 안 될 거라며 지레 겁을 먹었다.
다른 책상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유네와 그 친구들이 선생님에게 주의를 들은 친구들을 흘기며 작게 속삭였다.
“너희는 어떤 동아리 갈지 다 정했어?”
“대충.”
“유네, 너는 요리 동아리 들어갈 거지?”
“에헤헤, 렌 군한테는 비밀로 해줘.”
유네는 요리를 잘하고 싶어서 그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렌에게 비밀이라고 한 걸 보면 진짜 이유는 렌이 요리를 잘하니까 그를 동경해서일 것이다.
“있지, 아무래도…….”
“진짜 맞는 거 같은데.”
그녀들은 정말 그런 것 같다며 확신했다. 왜 유네같이 좋은 애가 잘생기고 만능인 류제 말고 하찮은 렌 지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별일이었지만 분명 유네는 렌을 그런 의미로 좋아했다.
상대방이 미덥지 못해도 유네를 응원해 줄 의향은 만만하다. 그녀들은 학교 축제의 오래된 전통을 떠올렸다. 만일 유네가 렌에게 고백하고 싶다면 무조건 그녀들은 유네에게 협조할 셈이었다.
수업 종료 종이 치자 실습실 바깥으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 수업부터 지금까지 줄곧 개념 설명만 하다가 처음 실시된 S_script 실습수업은 ‘우리가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거야?’라는 총평이 절대다수였다.
재경도 그 말에 한 치의 고민 없이 동의할 수 있었다. 저 언어가 기간트리카라는 외골격 슈트와 연동하는 펌웨어를 만드는 데 사용된 언어라는데, 도대체가 ‘Hello world!’ 정도나 화면에 출력하는 이상한 글자들로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것인지 요술 같다.
컴퓨터는 그냥 동영상 보고 인터넷 검색하는 용 아니야? 무슨 원리인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이딴 걸 배우게 한 교육과정이 밉기만 하다.
재경이 제 왼쪽 손목에 찬 슬렉터를 짜증스럽게 흘겼다.
“그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이란 사람은 분명 미쳤을 거야. 세상에 저딴 걸 만들 생각을 하다니. 돌아도 한참은 돌았어.”
“뭐, 첫인상도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
S_script는 근 오십여 년간 부스터 급발진과 이유 모를 기동 이상으로 불안정했던 기간트리카를 안정시켜 기능 향상에 일조한 고급 언어였다.
그 S_script의 개발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헤이하치 머리 할아범을 떠올린 류제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기가 개발한 이상한 기계를 가지고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실험체로 쓰려고 했던 것부터 정상은 아니었다.
“이 과목도 망했다. 분명 학년 꼴찌일 거야.”
“아직 학기 초잖아. 너무 빨리 포기하지 마.”
“아냐. 난 알 수 있어.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제3의 눈으로 보여……!”
재경이 천진반처럼 이마에 새로운 눈을 뜰 것처럼 집중했다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게임에서는 도형이 나오는 미니 게임 정도로 넘어가서 공략 보고 그대로 따라서만 하면 됐었는데.
머리가 터질지도 몰라. 진이 빠져 힘없이 걷는 재경의 머리에서 푸쉬쉬 연기가 나는 환영이 보일 것도 같다. 그런 재경을 류제가 등을 두드려 위로해 주었다.
류제도 차마 저 말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 이번 수업에서 화면에 글자를 출력하지 못한 사람은 렌밖에 없었다. 그것도 뒤에 세미콜론(;)이 아닌 콜론(:)을 찍어서 한 시간 동안 헤맸으면 말 다 했다. 논리적인 사고가 필요할 단계도 아닌데 이 정도면 나중은 어찌할까 그도 눈앞이 캄캄했다.
“걱정 마.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중간고사 전까지는 어떻게든 되게 해줄게.”
“그 말이 제일 무서워, 짜식아. 젠장, 보충만 아니면 진작 던졌다. 진짜 싫지만 잘 부탁해, 류제…….”
방학 내내 관리에 들어가 추가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만든 류제의 끔찍한 스파르타식 공부법을 떠올린 재경은 그걸 견디기만 하면 겨울방학 때는 보충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실낱같으면서 고통스러운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저번에 류제와 비키가 옆에 붙어 양쪽에서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재경이 수학 보충을 들은 걸 보면 이 과목도 같은 운명을 따를 것 같아 불길했다.
“우리 먼저 갈게, 미나!”
당번이라 맨 마지막에 실습실 문을 잠그고 나온 미나를 끝으로 8반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돌아갔다. 복도 끝에서 학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의미 없는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잠근 열쇠를 주머니 안에 넣었다.
도서위원답게 늘 손에 책이 들려있는 그녀는 틈틈이 흥미로운 책을 빌려 읽는 중이다. 어제 빌렸던 책은 반절 읽어서 책갈피가 중간쯤에 꽂혔다.
“♬♬”
홀로 남은 그녀가 느릿느릿 복도를 걸었다. 정말이지 냄새나는 인간들 사이에 끼어 그들의 습성에 맞춰가며 살아야 하다니 끔찍도 해라. 방학 동안 학교에 안 나올 때가 좋았다.
물론 류제 신리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학교만큼 좋은 장소도 없지만 생리적으로 인간이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 어떤 마족보다 내가 제일 불행할 거야.
“♪”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기억이 있어 마족이 되기 좋은 소재를 갖춘 유네 나르타는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시시하게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 버렸다.
소재가 될 법한 다른 이들에게도 미래를 위해 싹을 심어놓으려 했는데 렌 지미 때문에 여름내 준비했던 악몽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른 인간들도 유네 나르타와 마찬가지일 거라 미루어본다. 다들 방해만 하고 되는 게 없다.
“♩♬”
미나가 옆에 있는 벽을 내려쳤다. 커다란 소리가 울리며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기둥에 금이 갔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녀는 동그란 안경 아래로 일그러진 눈빛을 흘렸다. 그녀의 동공이 새빨갛게 변했다.
계획했던 대로 진전이 안 된다. 비장의 카드는 숨겨놓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율폰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까 짜증이 난다.
기둥에 무시무시한 거미줄 자국을 낸 미나는 이내 평범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뒤따르는 햇빛으로 풍성한 단발머리와 동그란 안경이 시리게 빛났다.
텅 빈 복도를 묵묵히 걷던 그녀가 무표정하게 창문을 흘겼다. 그녀를 비웃듯 지독히도 따가운 태양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미나가 주시한 것은 자신을 조롱하는 그 뜨거운 구가 아니었다. 창가에 놓여있는 재배용 화분이었다. 식물이 엽록소로 광합성 하는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진분홍빛 새싹. 미나는 익숙한 기분이 스쳤다.
“잘못 봤나 했더니 이건…….”
분명 나라카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잡초였다. 미나는 듣지 못했지만 이전에 학생들이 말했던 바로 그 식물이었다.
어디서 온 것이든 자유의지도 없는 미천한 식물 따위 그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이 독특한 색이 눈에 밟혔다.
나라카에서 자라야 하는 식물과 마족인 자신. 동질감이 든 그녀가 식물이 놓인 창문에 다가갔다. 그녀의 등 뒤로 동아리실 문패가 보였다.
[식물 동아리]
실습실이 있는 신관 건물에는 동아리실도 함께 있었다. 저 식물을 기르는 동아리가 바로 소문의 그 동아리다.
간신히 싹을 틔운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 물을 아무리 줘도 시들시들해 새싹을 살려보기 위해 식물 동아리도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나라카에 가득한 마기에 영향을 받아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계와 다르게 진화한 식물의 생태를 모르는 부원들은 물을 주고 햇빛만 많이 쐬면 살아날 거라며 화분을 복도 창가 양지바른 곳에 올려놓았고, 오늘 마족인 미나가 우연히 발견했다.
미나는 간신히 고개를 내민 분홍색 새싹을 보며 향수를 느꼈다. 인간으로 따지면 돼지우리에 끼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문득 그리운 민들레꽃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너도 이 먼 타지에서 고생이 많구나.”
화분 옆에 기댄 그녀가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마왕을 부활시키겠다는 임무를 가지고 나라카를 떠난 지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주변은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들뿐이고 하찮은 것들과 똑같은 옷에 먹이를 제공받아 생활하니 마족의 긍지도 없고 알량한 자존심도 구걸 못 해 치욕스럽다.
“하아, 나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왜 다들 방해만 하는지.”
류제 신리 안에 있는 마왕의 영혼을 전생의 기억째로 각성시키는 계획을 진행 중이던 그녀는 렌 지미에 이어 믿었던 나콜렙시까지 자기 마음대로 류제 신리를 도발해 마기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가장 오랫동안 마왕과 함께한 만큼 나콜렙시는 마왕에 대한 독점욕이 강했다. 마왕님이 죽고 난 후 줄곧 마왕성에 틀어박혀 있었던 주제에 류제 신리에게 흥미를 보인 이유가 뭐야. 마왕이 아닌 마왕님은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그 꼬맹이를 핵으로 삼지 못한 것이 그렇게 짜증이 난 일인가.
어떻게든 뒤처리를 하려던 그녀는 류제 신리가 마왕의 힘을 쓰려고 한 정황이나 ‘악몽 마법’의 흔적 때문에 수마 말고도 다른 마족이 있을 거라고 확신한 백장미 부대가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주도로 새벽부터 타고시아 주변 일대를 샅샅이 뒤지는 바람에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나왔어야 했었다.
율폰은 날더러 기대도 안 했다고 조소했지, 나콜렙시는 러다이트를 들고 나 몰라라 성으로 돌아가 버렸지. 나콜렙시가 없는 틈을 타 성에서 나온 마가릿 그년이 폭소하며 날 조롱한 것만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인계에서 가장 고생하고 있는 건 난데. 두고 봐. 마왕님만 부활시키면 다들 찍소리도 못 하게 해줄 테다.
“그러니 너도 이 먼 타지에서 힘내봐.”
그녀가 여리디여린 식물의 잎사귀를 쓰다듬었다. 그런다고 해서 미물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마왕이 부활해서 인계를 모두 정복한다면 이 이 식물도 언젠가 이곳에서 장성할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인심을 쓰듯 그 식물을 축복해 주었다.
신세 한탄에 질린 그녀가 다시 걸음을 옮겨 교실로 향했다.
그녀가 점이 되어 사라졌을 무렵, 여린 분홍색 새싹에서 수상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작은 새싹은 비상식적인 영양제라도 맞은 듯 줄기가 두꺼워졌고 그 줄기를 타고 잎사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식물은 바람을 타고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건넜던 마계 식물의 종자였다. 마계의 식물은 태어날 때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받은 마기에 따라 에너지원이 달라졌다.
우연을 계기로 이곳에 오게 된 씨앗은 우여곡절 끝에 발아했지만 한 번도 마기와 접촉하지 못해 영양분을 얻는 기관이 발달하지 않은 이른바 입이 없는 기아 상태였다.
어떻게든 인간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식물은 기아 상태에서 서큐버스의 마기를 흡수하고 서큐버스처럼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도록 근원을 바꿔나갔다.
미미하게 흘러나온 미나의 마기를 전부 흡수하기 위해 식물이 꿈틀꿈틀 촉수처럼 성장해 나갔다. 마기를 맛본 식물은 인간의 육욕이 필요했다. 부족하다. 인간의 육욕을 섭취할 수 있게끔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기가 필요했다.
여기서 성장에 필요한 약간의 마기가 더 더해진다면 이 엉큼한 마계 식물은 에로 이벤트의 정수 같은 존재로 성장하고 말 것이다. 그 계기가 된 미나조차도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 *
기숙사로 돌아온 재경이 문을 열자마자 가방을 던져 그대로 침대로 골인했다.
오늘도 히로인들과 거리를 두지 못했다는 자책 반, 학교 수업으로 지친 마음 반으로 재경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던 류제가 그 꼴을 못 보고 잔소리했다.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적어도 옷을 먼저 갈아입어야지. 그러다 교복 차림 그대로 자버리면 어쩌려고.”
“귀찮아. 류제 네가 깨워주면 되잖아.”
저번 학기에는 방을 혼자 썼으니까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짓 해도 옆에서 귀찮게 구는 사람이 없었는데 류제랑 같은 방을 쓰면서부터 류제가 사사건건 끼어들어 꼭 한마디를 더했다.
류제는 고아원에서 살아서인가 단체 생활에 필요한 규칙, 해서는 안 될 것, 해야만 하는 것들에 깐깐했다. 대표적으로 주말에도 늦잠 금지. 오자마자 침대에 눕는 것 금지. 양말은 벗어서 빨래 통에 넣을 것. 책상에 필요 없는 책 올리지 않기. 밥 먹기 전에 간식 먹기 금지. 숙제는 자기 전 미리 끝내놓을 것. 화장실 청소는 틈틈이 할 것.
부잣집 딸내미 유네랑은 어떻게 살았나 몰라.
“완전히 할머니 같은 자식이야.”
재경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꿍얼거렸다.
“뭐?”
“오늘 저녁 뭐 나오냐고.”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난 그가 아무것이나 말했다. 가방을 정리하던 류제가 오늘 기숙사 급식이 뭐였더라 손가락을 꼽았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경은 류제가 기어코 떠올린 저녁 메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이후로는 항상 이런 느낌이다. 방에서 노닐던 사람이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비교적 조용한 데다 게으르게 뒹굴거려도 옆에서 편들어 주는 사람이 부재하다는 건 생각보다 귀찮았다. 류제가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재경은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원래 같은 방을 쓰던 유네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깔끔하게 생활했으니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렌은 같은 소리를 두 번 정도는 해야 말을 들었기 때문에 가방 정리를 끝낸 류제가 다시금 렌을 닦달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한숨을 내쉬며 잔소리를 시작하려고 몸을 돌린 찰나 재경의 벗은 상체를 본 류제가 놀라 주춤거렸다. 예고도 없이 교복을 훌렁 벗어 던지고 있을 줄이야.
“뭐야. 옷 갈아입으라며?”
“아, 뭐, 응. 그래, 자…잘했어.”
류제가 시선을 둘 곳을 몰라 다시 뒤를 돌았다. 방해할 사람 없이 같이 생활하게 된 건 꿈과도 같은 일이건만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성욕 왕성한 사춘기인데 좋아하는 사람의 알몸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 방심했다가는 큰코다친다.
“너는 안 갈아입어?”
“갈아입을 거야. 어, 응.”
변명할 말이 없어서 류제도 얼결에 교복을 벗었다. 자꾸만 렌의 몸으로 시선이 가는 눈동자를 간신히 돌린 그가 얼굴을 붉혔다.
최근에 머리를 자르려고 마음먹었었는데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앞머리가 길어서 다행이었다. 안 하려고 해도 의식이 되는데 앞머리라도 짧았다가는 눈동자가 향하는 사람이 누군지 죄다 들통날 거다.
절대로 저 몸을 탐할 기회 따윈 찾아오지 않겠지만 류제는 탐욕을 부렸다. 친구의 몸을 더듬는 괘씸한 상상. 오밤중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나 샤워를 하고 나온 반나체의 몸, 지금처럼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는 모습.
이를 지켜보자면 그의 사랑이 이루어질 일말의 가능성도 박살 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지만 은밀하면서도 쓸데없는 욕구는 매일 주제도 모르고 폭주했다.
그럴수록 그는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해 버린 제 처지가 실감 났다. 비참했다.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은 커진다.
호기심에서, 호감에서, 좋아함에서, 사랑으로. 욕심이 커져도 절대로 제 친구는 자신을 그런 감정으로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 친구로라도 남고 싶으면 네 마음을 최대한 억누르라며 그의 이성이 말했다.
“렌, 넌 무슨 동아리 들어갈지 정했어?”
어떻게든 신경을 돌리고 싶었던 류제가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해 떨떠름하게 물었다. 교복을 옷걸이에 걸어놓던 재경이 잠시 멈칫하더니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난 동아리 안 들어갈 거야.”
“왜?”
“그야 내 마음이지.”
동아리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에도 렌은 동아리에 영 관심이 없었다. 기숙사 내에서 입는 활동복 상의로 갈아입은 류제가 끈질기게 굴었다.
“같이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다음 달에 축제도 있잖아. 할 거 없으면 나랑 같은 동아리 들어가자.”
“…싫어!”
“왜?”
“첫째. 너랑 붙어서 활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괜히 날 너와 비교하잖아. 둘째.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데 동아리 활동도 같이하면 질리지도 않냐? 나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다고. 셋째. 말했지만 난 축제고 동아리 활동이고 관심 없어!”
이유가 무려 세 가지나 된다. 마지막 이유를 제외하면 모두 류제에게 상처를 줬다. 그럼 나도 딱히 동아리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싫어하겠지.
“알았어. 하아, 네 마음대로 해.”
“너는 어디 들어가려고 했는데?”
“관심 없다면서 왜 물어봐?”
“띠껍기는. 혹시 삐쳤냐? 말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재경이 한쪽 입꼬리를 짜게 올렸다.
류제는 렌이 두 번째 시도 만에 거리를 두었음을 눈치챘다. 타고시아 해변에 다녀오고 나서 렌과 심리적 거리감이 생겼다. 진심을 숨기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이 이제는 그에 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는 두려움에 류제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렌의 머릿속을 들여다봐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괜히 저렇게 대답했나. 후회해도 다시 말을 꺼내기가 미련스럽다.
류제의 뒷모습을 흘겨본 재경은 옷자락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손을 내민다면 넌 내 처지를 넌 이해해 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이 이야기가 정상적으로 끝나기 전까지는 바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류제의 이야기를 망치고 있는 건 나니까.
나약하게 굴지 마. 한 학기만 참아. 해피 엔딩을 위해서잖아. 그러면 이런 속박에서 해방이다. 유일한 희망을 재경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 식당에 내려가 유네와 비키를 비롯한 다른 동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다시 방으로 복귀했다.
“정신 사납게 뭐 하냐?”
샤워를 하고 나온 재경이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말리고 있을 때 류제는 침대 위 찬장에 나있는 작은 틀을 붙잡고 턱걸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아, 벌써 씻었어?”
가볍게 뛰어내린 류제가 땀을 닦았다. 비키 앞에서 렌이 기술을 건다고 꼴사납게 넘어지기 싫고, 아무래도 같이 지내다 보면 아까처럼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많으니까 일부러 기운을 빼놓으려고 하는 운동이었다.
“웬 턱걸이?”
“조금 있으면 체력 검사 하잖아. 연습하는 거지 뭐.”
“쓸데없이 성실한 자식.”
재경이 쯧쯔 혀를 차며 머리를 다 말리기도 전에 수건을 빨래 통에 휙 던졌다.
류제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남자란 체력이 좋아질수록 성욕도 커진다는 것이다. 목선을 따라 흐르는 물방울을 흘겨본 류제가 재경이 빨래 통에 던진 수건을 다시 집어서 아세미 머리 말려주듯 다시 말려주었다.
“으악, 악, 익! 아파! 천천히 해!”
“너는 왜 매번 머리를 대충 말리는 건데? 환절기라서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귀 치지 마! 아야, 아파, 아파! 알았어. 내가 할게!”
이대로 가다 연약한 머리카락이 전부 뽑히면 어쩌나 재경이 수건을 빼앗아 마지못해 꼼꼼하게 말렸다. 어쩜 할머니랑 레퍼토리가 똑같을까. 머리카락 같은 건 내버려 두면 알아서 마르는데. 사람 대머리로 만들 일 있나.
“됐냐?”
“어디 봐.”
만족할 만큼 물기가 마르자 검사를 마친 류제가 수건을 건네받고 빨래 통에 넣었다. 이제 그가 씻을 차례다.
렌이 막 씻고 나온 샤워 칸을 흘기던 류제가 백 걸음은 양보해 제안했다.
“렌, 그럼 내일 할 일 없으면 나랑 어울려주라.”
“맨날 어울리고 있잖아. 어디를 또 어울려?”
“입부할 동아리를 고민하고 있거든. 둘러보고 싶은데 혼자 가려니까 부끄러워서. 같이 돌아다녀 줄 수 있어? 그 정도는 되지?”
“뭐? 내가 너랑?”
재경이 자신과 류제를 차례로 가리켰다. 내일이 주인공 류제가 입부할 동아리를 살피는 날인가 보다. 거기서 선택지를 잘 고르면 다섯 명의 히로인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플레이할 때는 당연 류제 혼자서 구경하였으니 그의 곁에 친하지도 않은 자칭 라이벌 렌 지미가 있을 리가 없다.
이제는 류제에게 선택지를 강요하지 않기로 한 재경은 결심이 흔들릴세라 거절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동아리도 싫다, 매몰차게 거절했는데 이마저도 거절하면 류제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래. 알았어. 그 정도야 뭐.”
“정말?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는 말은 달콤한 독약이었다. 재경은 죄책감에 입을 다물었다. 옛날 그와는 달리 유네가 친구들에게 용기를 내서 다가간 게 들떠서 그런가. 아니면 비키가 그를 신뢰하고 기대는 걸 알아서 그런가. 누군가의 도움이 된다는 게 기뻤다. 자꾸만 간섭하고 싶어진다.
“그럼 내일 방과 후에 시간 비워둬.”
“어.”
재경이 손을 내저으며 책상에 앉았다. 얕은 숨을 내쉰 류제가 멋쩍게 웃으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내일이 이벤트 날임을 안 재경은 뭔가를 하나 잊고 있다는 감각에 공략이 적힌 공책을 뒤졌다. 역시 아무리 찾아도 별다른 이벤트는 없었다.
“착각인가?”
재경이 반절 온 전체 스토리의 뒷부분을 대강 훑었다.
10월 축제, 11월 고양이, 12월 성탄제 납치, 1월 왕녀와 미나 둘 중 한 사람을 고르는 마지막 호감도 이벤트. 그리고 2월 밸런타인데이 고백.
생각난 것들은 틈틈이 적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각들이 맞춰져 있는데 호감도 이벤트가 없는 이번 챕터만 뭔가 빠진 기분이었다.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되짚어 볼까.
“♬♬”
샤워기를 끈 류제는 머리를 감다가 언뜻 누군가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렌이 또 생소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에서 렌이 노래를 부를 줄 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이 바보 같을 정도로 렌은 자주 노래를 불렀다. 기숙사 생활이 절묘하게 겹쳐져 있어 동거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몰랐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앞머리를 들어 올려 확연히 드러난 류제의 얼굴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긴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짙은 푸른 눈동자에도 열기가 어렸다.
자신이 정상이 아님을 류제는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건 렌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이성은 어긋나는 윤리를 경계하지만 쌓인 욕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을 때 훔쳐보곤 하는 살갗. 막 머리를 감고 나온 목덜미.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배덕감. 이 벽 바로 바깥에는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미지근해진 샤워기 물을 맞으며 류제는 허탈한 욕정을 탐했다.
옆에서 욕구를 경계하게 만들어준 유네도 없고, 둘뿐인 방 화장실에서 류제는 일탈을 즐겼다.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아무한테도 피해가 안 가는걸.
“하아… 머저리처럼 이게 뭐 하는 건지.”
류제가 스스로에게 험한 말을 내뱉었다. 그 이상 지금의 자신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처음으로 내뱉은 욕이 자신에게 향하다니 그것 또한 류제다운 일이다. 더러운 욕정을 씻어 내린 류제는 침울해진 마음을 애써 달랬다.
“…렌?”
모르는 척 류제가 머리를 말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콧노래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가 렌이 앉아있던 책상을 살폈지만 책상은 스탠드만 켜진 채 비어있었다. 침대로 눈을 돌리자 렌은 그 잠시를 못 참고 쿨쿨 잠들어있었다.
“계속 잠을 설치는 것 같더니.”
덕분에 같이 뜬잠을 잔 류제가 시간을 살폈지만 시침은 아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모르고 자는 렌은 좋아하는 고양이 잠옷도 안 갈아입고 배를 내놓았다.
그의 이마께에는 처음 보는 공책이 놓여있었다. 류제가 무방비하게 자고 있는 렌을 흘겼다.
“…….”
이건 그냥 렌의 머리맡에 놓인 공책이 거슬려서 그러는 거다. 자고 있는 렌을 훔쳐보려는 흑심은 없어. 능숙하게 죄책감을 던 류제가 렌의 이마를 덮은 공책을 책상 위에 두었다.
스탠드에서 새는 불빛에 반사되어 아른아른 빛나는 렌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워서 만지기 두려웠다. 렌을 바라보던 그는 한 가닥 흘러나온 머리칼을 피부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심정을 형용할 수 없다. 그토록 좋아하고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잔다.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무엇이 네 마음을 힘들게 하는 거니. 언젠가 내게도 털어놓을까. 네 비밀의 장막을 훔쳐보면 너는 싫어하겠지.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서 뭐든지 하고 싶어. 너를 더 알고 싶어. 너는 이런 내 마음을 평생을 가도 모르겠지.
그럴수록 자신만 비참해진다는 걸 깨달은 류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인기척을 느낀 건지 재경이 잠결에 류제의 손목을 붙잡았다.
지켜보고 있는 걸 들켰을까 소스라치게 놀란 류제가 경직되었다. 변명할 말을 떠올리느라 긴장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깬 건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귀가 먹힌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닫힌 눈은 여전히 잠에 빠져있었지만 손아귀엔 힘이 들어갔다. 잠꼬대인가.
“레…렌?”
꿈속에서 대답하라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만으로 착각의 늪에 빠졌다.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망상이야 얼마든지 해도 되는 것 아닌가. 꿈속에서도 나를 원하고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붙잡혀 줄 수 있었다.
“…왜 그래?”
이 순간이 소중했다. 계속 둘이서만 있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류제는 문득 저번 타고시아 해변에서 수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교에 쳐들어왔던 병마가 했던 말도 떠올렸다. 이 고요한 밤에 곱씹기에는 너무나도 달콤하고 유혹적인 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려.”
아냐, 나는 그런 렌을 바라는 게 아니야. 그저 있는 그대로. 지금의 렌을 좋아하는 거야.
어차피 렌은 좋아하는 사람도 없잖아. 그럼 내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괜찮겠지. 그거면 돼. 크게 바라지 않으니까 옆에만 있게 해줘. 끝까지 숨길 수 있어. 네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도록 절대로 이 더러운 마음을 들키지 않을게.
류제가 붙잡힌 손목을 어쩌지도 못한 채 침대 아래에 주저앉았다.
렌이 좋다. 너무 좋다. 이런 괴물인 자신을 무엇도 묻지 않고 받아준 렌도, 솔직하지 못해 마음을 숨기는 렌도, 상처투성이일 것이 뻔한 그의 어린 시절도 전부. 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시각, 멀리 떨어진 신관.
모든 마기의 근간이 되는 기운을 감지한 식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왕의 혼을 가진 류제의 욕구에 반응해서 나라카의 자생 식물이 빠르게 성장했다.
내일, 재경이 잊어버린 터무니없는 이벤트가 벌어지기 앞으로 약 18시간 전이다.
* * *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던 재경은 웬일로 기상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출근한 태양 빛이 커튼을 뚫고 방을 밝혔다. 기절한 것처럼 어느 틈에 잠들어 버린 건지 기억도 안 났다. 잠결에 눈을 비비적거린 재경이 건조한 눈을 끔벅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류제의 침대가 비었다. 오늘은 자신이 더 일찍 일어났으니 평소와 반대로 류제를 깨워볼까 싶었던 재경은 눈앞에 잘 개인 이불밖에 없자 잠이 덜 깼나 어리둥절했다.
이불을 박찬 그가 침대에 벌떡 앉았다. 책상에도 없다. 류제가 안 보였다.
“류제… 으악!”
“억!”
시야가 좁아 바로 아래에 앉아있던 류제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못 본 재경이 물컹하게 밟히는 감촉에 놀라 후다닥 발을 뗐다. 멋모르고 류제의 허벅다리를 강하게 짓눌러버리고 말았다.
졸다가 때아닌 봉변을 당한 류제가 허벅지를 붙잡고 죽겠다며 바닥을 굴렀다. 재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으… 뭐긴. 아침 인사 한번 폭력적이네.”
류제는 여전히 자신을 붙잡고 있는 재경의 손을 들어보며 흔들거렸다.
계속 힘을 주고 있어서인가 다른 것을 잡고 있다는 감각이 없던 재경이 놀라 손을 놓았다. 얼얼해진 손에 드디어 피가 돌았다. 밤새 붙잡혔던 손에 새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뭐…무… 아니, 나는 왜… 넌 바보야? 왜 지금까지 그러고 있어?”
“네가 깰까 봐 그랬지. 으하아암, 나 조금만 더 잘래.”
거의 밤을 새운 류제가 비틀거리더니 재경의 침대에 풀썩 누웠다.
고약한 잠버릇이 생겨버린 재경은 제 손을 곤란하게 쳐다보았다. 순진한 자식이 무시하면 될 것을 곧이곧대로 붙잡혀 준 게 미안했다. 재경은 녹초가 된 류제의 엉덩이에 발을 올려 도닥거렸다.
피곤한 류제는 학교 수업 내내 하마처럼 하품을 해댔다. 범생이라 보통 1교시부터 조는 일은 없는 류제가 웬일로 선생님에게 졸지 말라는 꾸지람을 들었다. 거기에 더해 점심시간 종이 치자 견딜 수 없다며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낮잠을 잤다.
그 모습이 재경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분명 저 치사한 자식은 ‘강화’ 어빌리티를 쓰면 될 것을 괜히 심술을 부리는 거다. 혹부리 영감처럼 혹이 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저 심술은 어디서 나는 걸까.
어젯밤에 뭘 한 거냐 물어보는 여학생들에게 얼버무리는 류제를 흘기던 재경이 못마땅한 입을 비죽거렸다.
“미안하다고 했는데 생색을 낼 필요는 없잖아.”
“생색 안 냈어. 진짜로 피곤해서 그래.”
신관 복도를 걷던 류제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직 방과 후인데 잠이 들 것처럼 눈이 비몽사몽이다. 기껏 함께 동아리를 둘러보기로 했는데 류제가 의욕이 없어진 것 같아 재경은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기분이었다.
“이 렌 지미 님께서 귀중한 시간을 내준 거니까 정신 차려라. 어엉?”
“예, 예. 참으로 송구합니다.”
2학기 첫 챕터에는 히로인들이 있는 다섯 개의 동아리 중 한 곳을 선택해서 들어가는 이벤트가 있었다.
플레이어의 다회차 플레이를 노린 이 이벤트는 호감도 이벤트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학교 축제 챕터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달라졌다.
그건 다음 챕터 일이고 오늘은 동아리를 둘러보는 게 주된 이야기다. 부디 스토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기를. 재경이 눈을 질끈 감고 빌었다. 근데 왜 자꾸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어, 여긴 요리 동아리잖아. 유네가 있는 곳 아냐?”
재경이 속으로 온갖 삼라만상의 신을 찾고 있을 때 나른하게 걷던 류제는 제법 규모가 큰 교실을 차지한 요리 동아리에 관심을 보였다. 재경이 한쪽 눈을 떠서 문패를 살폈다.
다행이다. 첫 시작은 무조건 유네의 동아리부터 시작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스토리대로 흘러가는군.
학교에는 수많은 동아리들이 있는데 타이밍 좋게 유네가 들어간 동아리에 멈춰 서는 것도 기구하다. 그것보다 난 한시라도 빨리 비키의 동아리를 확인하고 싶은데 거긴 언제쯤 가려나.
“들어가 볼래?”
류제가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들어갈 동아리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근데 너 요리에 관심이 있었냐?”
“없지도 있지도 않지만… 제립학교에서 요리를 배울 수 있다니 신기해서.”
아무래도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대부분은 싫으나 좋으나 군에 소속되기 때문에 평범한 가정집 부엌에서 칼질을 하게 될 경우는 극미하다.
필요 없는 요리는 왜 배우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고아원 동생들을 위해 강제적으로 칼질을 배운 탓에 류제는 요리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유네도 그렇고. 부잣집 애들의 이해 못 할 취미 같은 건가.”
동아리 분위기가 궁금해진 류제가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빼꼼 고개를 넣어 안을 살피니 그곳에선 류제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음식! 맛! 탐미의 욕구!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그 어떤 장소에서도, 어떤 험난하고 힘든 곳에서도 우리는 미식가여야 한다. 홀로 조난을 당했다? 고립되어 언제까지 버텨야 할지 모른다? 우리 요리 동아리에서 3년간 수련한다면 그런 걱정은 불필요하다. 그러니 입부하라, 1학년들아. 입부한다면 장소 불문 맛있는 음식을 건강하고 영양가 있게 섭취하는 법을 주도면밀하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치마 아래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식탁 위에 올라가 칼과 국자를 들어 이상한 말을 설파하는 동아리 부장을 본 류제가 슬며시 문을 닫았다.
그 앞에 숨길 수 없는 파란색 머리칼이 얼핏 보이긴 한 것 같은데 류제는 일단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뭐야. 왜 그래?”
“음, 아냐. 내 생각하고 많이 다르네.”
잠에서 덜 깬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소소하게 바라본다. 유네가 들어간 요리 동아리니까 클래식 음악 틀어놓고 앞치마를 둘러 두런두런 조용하게 요리하는 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전투적일 줄이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거 완전 취사병 조기 훈련시키는 거 맞지? 그렇지?
“무엇이? 손님이 왔었다고? 누구냐! 누가 우리 요리 동아리에 들어오고 싶은가!”
“크헉!”
미식의 무적의 논리를 외치던 동아리장이 문을 벌컥 열었다. 원하던 곳이 아님을 깨닫고 다른 곳으로 가려던 류제는 동아리장이 연 문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녀의 손에 붙들리고 말았다. 치한을 만난 것처럼 질겁한 류제가 그녀를 뿌리쳤다.
“싫어요! 이…이거 놓으세요.!”
“이거이거, 누군고 했더니 1학년의 유명 인사가 아닌가! …옆엔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려워하지 말고 들어오라. 마침 귀여운 병아리들에게 우리 동아리의 위대한 포부를 펼치는 중이었다!”
“아니, 저는―”
“하하하. 그래. 우리 동아리에 관심이 있다고? 학교의 자랑이 들어와 준다면야 두 팔 벌리고 환호할 일이지. 남학생이 두 명이라니. 하하하. 이런 쾌거가!”
동아리 부장이라는 입장에 심취해 중년 아저씨 같은 이상한 말투를 구사하는 그녀는 류제와 죄 없는 재경을 끌고 동아리실로 들어갔다. 손길에서 음습한 목적이 느껴져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강렬한 첫인상과는 반대로 요리 동아리는 의외로 구색이 갖춰져 있었다. 일반 학교의 가정실처럼 조별로 요리를 할 수 있게 테이블마다 기구들이 딸려있었고 각 테이블에는 앞치마를 두른 부원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부장이란 사람이 제일 조화롭지 못했다.
동아리만큼은 부담 없고 조용한 곳을 원했던 류제는 식칼과 국자를 양손에 들고 맛을 신봉하는 이상한 단체에 들고 싶은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적당히 간 보다가 나가야겠다. 류제가 피곤한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럼 그냥 구경만…….”
“구경이 관심이 되고, 관심이 입부 신청서로 이어지는 법! 요리란 삶의 질을 올려주는 중요한 사항이다. 그걸 알게 되면 자네들은 반드시 내게 입부 신청서를 내놓겠지.”
그들이 반드시 요리 동아리에 입부할 거라 기정사실화한 그녀는 아저씨처럼 웃으며 류제와 재경을 빈 테이블에 세워놓았다. 그 옆에는 며칠 전에 입부한 유네도 있었다. 기대감을 품은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그들을 반겼다.
“렌 군, 류제 군! 요리 동아리 들어오려고? 대환영이야!”
“아…아니, 둘러보기만 하는 거야.”
류제가 손을 내저어 부정했다.
이처럼 동아리를 찾아다니면 다른 히로인들도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렌 군! 여기 정말 멋있어. 우리 수학여행 서바이벌 요리 대회처럼 막 그런 걸 알려준대!”
“알았어. 알았으니까 칼 휘두르지 마.”
대저택에서 메이드들과 부모님 손에 오냐오냐 자란 유네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이 생겼는지 류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동아리 부장에게 세뇌라도 당한 건가. 전투 요리를 할 것 같은 환경에 취한 건지. 아니면 렌이 찾아와서 그런 건지. 무슨 이유가 되었건 신이 난 유네를 보면 여긴 무조건 X였다.
“그럼 오늘은 칼질을 배워보도록 하겠다! 1학년을 위한 동아리 모집 기간이니 다른 학년들도 복습한다 생각해라. 준비되었으면 앞에 있는 식재료를 썰어서 달걀말이를 만들어보도록 하자. 달걀은 크든 작든 날개 달린 짐승들에게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이지.”
부장이 먼저 시범을 보여주었다. 요리 동아리의 장이라는 감투가 괜히 주어진 게 아니라는 듯 그녀는 모 요리 만화처럼 등 뒤에 불길이 치솟는 오라를 깔고 평범하게 양파와 당근이 들어간 야채 달걀말이를 만들어냈다.
“주어진 야채를 다져서 푼 계란과 섞은 다음 프라이팬에 부어 굴리기만 하면 된다. 좋아하는 재료가 있다면 추가해도 상관없다. 궁금하면 언제든지 배지를 찬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해라. 그럼 시작!”
“우리도 해야 하는 거야?”
귀찮았던 류제가 작게 속삭였다. 재경은 뭐 저런 단순한 것 가지고 오버를 떨어대냐며 곧바로 움직였다.
그가 주변에 있는 볼 아무거나 가져다가 달걀 두 개를 풀었다. 양파와 당근은 씻어서 껍질을 벗기고 두어 번 동강을 냈다.
고양이처럼 손을 말아 빠르게 야채를 다진 재경은 프라이팬에 적당량 기름을 둘러 달궈지는 동안 계란물에 소금 간을 하고 야채를 부었다.
다른 학생들은 전부 이제 막 계란을 다 풀고 채칼로 당근 껍질을 다이아몬드처럼 도려내고 있었는데 재경은 이미 계란을 프라이팬에 부어 위에 체더치즈를 올린 후였다.
계란이 다 익어갈 무렵 술술 말아서 도마에 내려놓은 재경은 뚝딱뚝딱 썰어서 접시에 담아냈다.
“다 만들었는데요.”
“우앗. 렌 군, 벌써……!”
칼질을 못해서 겨우겨우 양파를 썰고 있던 유네가 눈물을 훔치다 완성된 요리를 보고 눈을 비빌 뻔했다.
류제도 마지못해 당근을 썰고 있었는데 빠르기는 정말 귀신이 곡할 정도로 빨랐다. 수학여행에서 봤던 것처럼 렌은 요리를 곧잘 했다.
“오호라, 그렇게 안 봤는데 재능이 있군.”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하아.”
그쪽 애들이 너무 못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재경은 막말할 수도 없고 한숨을 내쉬며 앞치마를 벗었다.
부장은 1등으로 완성한 재경의 계란말이를 맛보고 잘했다며 박수를 쳤다. 그녀가 접시를 내려놓자 유네가 냉큼 계란말이 조각을 집어 먹었다.
“우리 동아리에 인재가 들어왔다. 요리 동아리는 유서가 깊어 입부 시 받을 평가 점수가 높다. 어떤가! 자네 정도라면 배지를 다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름이?”
혹시라도 재경이 이 동아리에 들어가겠다고 말할까 봐 류제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런 이상한 단체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렌이 들어간다고 하면 눈물을 머금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재경은 류제가 원하는 답을 말했다.
“윽, 관심 없어요.”
“왜애? 렌 군 요리 잘하잖아. 이 기회에 나랑 같이 요리 동아리 하는 건 어때?! 응? 응?”
“이름이 렌 군이라고? 독특한 이름이구만. 자네 친구의 말이 맞네. 어떤가, 렌 군아. 응?”
유네는 아직도 렌과 같은 동아리에 들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알랑방귀를 뀌며 꼬리를 살랑거렸다(그 모습이 썩 귀여워 류제는 유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처음으로 짜증을 냈다).
부장과 유네가 고개를 디밀었지만 재경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아리에 입부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기숙사 방에서 류제를 놀려주는 삼류 악당 렌 지미의 역할을 할 거라고. 누가 그런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갈까 보냐!
“됐어요. 난 류제 따라온 거고. 유네 너도 나 말고 류제한테 졸라봐.”
“하지만 나는 렌 군하고…….”
“호오. 자네 의견이 그러하다니 아쉽지만 우리들의 유명 인사 친구를 보자니 기대감이 절로 높아지는군, 류제 신리!”
쉽게 포기한 부장은 원래 목적인 잘생기고 키가 크고 능력 좋은 류제를 향해 눈을 빛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풀 네임으로 부른다는 좋지만은 않은 기분과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불유쾌한 환경 속에서 칼질하는 류제는 그의 성격에 걸맞은 적당적당한 계란말이를 만들어냈다.
투박하긴 하지만 맛이 없지는 않고 양은 양대로 많은, 그야말로 취사병의 요리였다.
“뭐라 말할 것이 없는 맛이구만. 허나 우리 요리 동아리와 함께한다면 보다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자, 어서 입부 희망서를 쓰거라. 우리는 네가 필요하다!”
“저는 그냥 구경을 하러―”
“어허. 선배 말에 트집 잡는 거 아니야.”
류제가 부장에게 시달리는 동안 재경은 유네가 신경 쓰였다. 시무룩해진 유네는 난장판이 된 도마 위에서 당근을 서툴게 썰었는데 저 칼이 어디로 튈까 불안했다.
칼을 양손으로 잡아서 검 휘두르듯 탕탕 힘을 가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당근 조각은 이리저리 튀고, 모양도 하나도 안 예뻤다.
“그렇게 하면 안 돼. 이렇게 칼은 한 손으로 잡고 왼손을 말아야 안 다친다고. 나중에 피 본다.”
보다 못한 재경이 유네의 손 위를 감싸 잡아 칼을 쥐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심장이 두근거린 유네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렌 군이 정말 요리 동아리에 들어온다면 좋을 텐데.
옆에서는 렌이 유네에게 치근덕거리고 있지, 부장은 입부 희망서를 가져와서 그의 지장을 (인)에 찍으려고 하고 있지.
이대로 있다가는 렌도 빼앗기고 강제 노예 계약을 할 것 같아 류제가 재경을 낚아채 동아리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럼 다른 동아리 조금만 더 둘러보고 결정할게요. 안녕히 계세요!”
“처음에는 천천히… 우앗, 류제!”
칼질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초를 치다니. 재경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류제를 노려보았다. 미안할 새도 없는 류제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달려오는 선배들을 피해 달아났다.
“잠깐만, 좀 천천히!”
노련한 선배들에게 붙잡힐세라 어빌리티를 쓴 류제는 이 학교에는 정상인이 없다면서 쫓아오는 선배들을 피해 신관의 끝으로 달렸다.
“저긴 일만 금을 준대도 절대 안 들어가.”
성격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유네가 입부한 요리 동아리를 빠르게 스킵한 류제. 튜토리얼이 끝났으니 이후부터의 이야기는 그의 선택에 달려있었다. 다음으로 그가 향할 곳은 어디일까.
재경은 왜 각 동아리별 히로인들의 대사나 행동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까 미간을 찌푸렸다. 이전에는 가물가물하더라도 이벤트에 돌입하면 기억이 곧잘 나곤 했는데 이번엔 도통 뿌연 안개처럼 흐릿했다.
분명 이 부분도 다 회차 플레이를 한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몇 번 해본 적 없는 것처럼 새롭다. 빙의한 지 7개월이나 지났으니 잊힐 법도 하나. 그건 또 아닌데.
“잡아라! 류제 신리다! 남자다!”
“잘생긴 남자를 붙잡아!”
요리 동아리 출신 자객 무리를 간신히 따돌린 류제가 벽 뒤에 숨어 상황을 살폈다. 소란이 수그러들자 류제가 숨을 헐떡거리는 렌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헥… 헥… 허억… 헉… 좀 천천히 달리라고! 난 너처럼 그런 편리한 능력 없단 말이야!”
재경은 저놈은 자기 불리할 때만 능력을 쓴다면서 불평을 쏟아냈다. 달리기로 어디 가서 꿀린 적이 없었는데 ‘강화’ 어빌리티를 가진 저놈이랑 같이 있으면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잖아. 하아, 유네도 참 별난 동아리에 들어갔네.”
“요즘에 성격 바꿔보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하더라. 분위기를 보니 딱 어울리긴 하다만.”
유네가 요리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그 계기를 확실하게 마련해 준 사람이 재경이었지만 까맣게 모르는 그는 땀을 닦으며 어깨만 으쓱였다.
“난 너무 산만해서 싫어. 선배들이 이상한 사람 같아.”
“인기 많아서 좋겠네~”
“빈정거리지 말랬지?”
“선배들이 널 좋아해서 쫓아다닌 건 맞잖아.”
“그런 인기는 바라지도 않거든?”
아저씨 말투의 부장과 변태 같은 말을 외치며 그들을 잡으러 다니던 선배들을 머릿속에서 걷어낸 류제가 다음 동아리를 탐색했다. 재경은 거참 따지는 것 많다며 혀를 찼다.
“이번엔 사람이 없는 동아리였으면 좋겠다.”
제발 그러길 바라며 그가 사전에 추려놓은 동아리를 하나둘 방문했지만 요리 동아리처럼 나사가 하나씩 빠진 곳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다른 곳을 둘러보고 오겠다며 옷가게를 빠져나오듯 어색하게 도망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도 아냐?”
“음. 좀 달라.”
“너 의외로 깐깐하네. 무신경하니 아무 동아리나 들어갈 줄 알았더니.”
“입부하면 귀찮아도 신경 써야 하니까 신중하게 정하는 게 좋지.”
류제가 좀처럼 히로인들이 입부한 동아리로 향하지 않자 슬슬 재경이 류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오늘 내로는 정해라.”
“알았어.”
게임에서도 히로인들이 있는 동아리 말고도 다양한 동아리에 들러 간단한 이야기를 듣는 게 가능했지만 괜히 힌트를 준 게 아니라는 듯 둘러보는 데 시간제한이 있었다.
그게 무슨 이유 때문이었더라? 아, 뭐가 생각날 것 같은데. 으, 신경 쓰여. 이래서 간섭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는데.
“어, 도서부……!”
류제가 마침내 미나가 속한 도서 동아리에 관심을 보였다. 책을 좋아하는 미나가 속한 동아리라면 조용하고 편안할 것 같긴 하다. 문을 두드린 류제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재경은 책 냄새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듯 질겁하며 코를 막았다. 도서부 동아리실은 각 학년별 추천 도서는 물론 수많은 책장들이 도서관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다른 동아리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류제를 환영했다. 이게 바로 류제가 원하던 동아리였다.
“부장님은 지금 도서관에 가셔서 안 계시는… 아, 류제!”
널브러진 책을 정리하고 있던 미나가 류제를 반겼다. 1+1행사처럼 있는 듯 없는 뚱하게 선 렌도 있었다. 책을 책상에 잠시 둔 미나가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도서부에는 무슨 일이야? 설마 입부하려고?”
“아직은 구경만 좀 하려고. 괜찮을까?”
“일단 들어와. 서있기 뭐하다.”
흔쾌히 그들을 안으로 들인 미나는 교장실에서 학부모 면담할 때나 쓰는 거대한 소파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분위기에 압도당해 기가 빨린 재경이 소파에 푹 눌러 앉았다.
미나가 탕비실에서 차를 세 잔 타서 가져왔다.
“우리 동아리는 인기가 없어서 추천해 주기는 뭐하다. 할 일이라고 해야 다달이 반에 추천 도서 리스트를 뽑는 것밖에 없거든.”
“그래도 조용하니 좋아 보이는데.”
“알아주는구나. 지금처럼 혼자 있으면 아무 눈치도 안 보여서 책 읽기 딱 좋아.”
미나가 이를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만큼은 마족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순수하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재경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부원 된 사람으로서 추천을 해야지. 도서부에 오면 좋아. 도서관에는 없는 책들도 꽤 있어.”
“없는 책?”
“어디 보자. 꼭 하나를 고르자면 인류를 구한 영웅에 대한 단상을 다룬 수필. 이거 절판되어서 찾기 어렵거든. 관심 있니?”
미나가 책상에 있던 책을 하나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림 하나 없이 폰트 작은 글씨로만 이루어져 있을 것 같은 책 표지에 렌이 딱 싫어할 수필집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영웅주의에 대한 단상』 저자 한스테데 가트만
책 제목을 빠르게 읽어내린 류제가 감탄사를 내질렀다. 저건 마왕을 죽였던 어빌리터의 이야기가 적힌 책 중 한 세기나 이어져 내려온 오래된 책이다. 가죽은 바래서 이곳저곳 벗겨지고 군데군데 좀먹었지만 명색이 도서부라서인가 보관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와, 한스테데 박사의 수필집이잖아. 학교 도서관에서는 없던데. 도서부에 있었구나.”
“이것도 우리 동아리에서 어렵게 구한 거야. 후후, 고생하게 하기는. 영웅이면서 참 베일에 싸인 사람이지 않니?”
미나가 책 표지를 소중하게 쓸었다.
마족 사천왕 주제에 인간 어빌리터의 학교에 잠입해 마왕을 죽였던 인간을 탐구하다니. 무슨 생각인지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야기에 끼어들 수도 없고. 마침 목이 탔던 그가 찻잔을 들었다. 서큐버스가 탄 차. 먹고 탈 나면 어쩌나라는 걱정과 반대로 평범한 페퍼민트 맛이 났다.
“나도 최근에 존재를 알게 된 책인데. 미나 너 정말 대단하구나.”
“필요하면 빌려줄 수도 있어. 후후.”
류제와 미나는 뜨거운 차를 홀짝이는 재경을 내버려 두고 저들끼리 정해진 대본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네가 소속된 이상한 동아리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해서 류제는 도서부가 마음에 들었다. 미나가 보여준 책도 그가 흥미를 가져오던 것이었다.
“그 영웅은 인류의 오랜 고민거리를 해치워 준 사람인데 그에 비해 자료가 없는 것 같기는 해.”
도서관에서 그녀와 관련한 책을 찾다 진절머리가 났던 류제가 미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렇지? 마왕을 죽였다는 업적만 봐도 그녀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획을 그은 어빌리터라는 건 부정 못 할 거야. 아, 이 책에서 그녀를 독특한 비유로 설명한 부분이 있어. 들어볼래?”
신이 난 미나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그 누구도 아닌 마왕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류제와 소중한 대화다. 주제는 전생의 그를 죽였던 자에 대한 이야기.
마왕을 흠모하다 못해 경외하고 찬양하는 미나는 죄를 짓는 것 같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을 찾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여기 있다! 류제, 혹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들어봤니?”
“데우스… 뭐?”
생소한 단어의 조합에 류제가 말을 더듬었다. 그의 반응을 예상했던 미나가 후후 웃었다. 그녀가 류제에게 책 내용을 보여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극작에서 쓰는 용어인데, 파국으로 치달은 문제를 신이 해결해 주는 기법을 의미한대.”
“그렇구나. 신기한 말이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신이라 함은 그가 살았던 고아원 수녀 루나나 신부님이 기도를 올렸던 전지전능한 절대자가 아닌가.
고아원에 있을 때에도 버릇처럼 기도문을 외기만 했지 그 존재를 성실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류제는 미나의 난데없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나 종잡을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할 때 돌연 신이 등장해서 모든 불합리하고 괴로운 것들을 통쾌하게 해결해 버린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기쁘겠어? 뭐, 자신의 고민을 문학에서라도 극복하고 싶다는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이야.”
그런 그를 떠보는 미나는 본질을 회피하며 지식을 뽐냈다. 류제는 그래도 모르겠다며 미간을 좁혔다.
“그거랑 그 영웅이랑 무슨 상관인데?”
“후후, 류제도 참 성급하기는. 여기를 잘 읽어봐.”
류제가 책을 읽을 수 있게끔 돌려준 미나는 그가 그 구절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인류를 구한 영웅을 말하는 저자의 단상을 읽은 류제가 미나의 열띤 주장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라카가 발견된 무려 천 년 가까이 인류는 단 한 발짝도 마국 나라카에 다가가지 못했다. 마왕은 그런 나라카의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성에 있다고들 전해진다. 범접할 수조차 없이 강대한 적이었던 마왕은 어느 날 등장한 인간에게 살해당했다. 인류에게 너무나 가볍게 평화의 발판을 마련해 준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 책의 저자나 미나의 말대로 그녀는 인류의 고민을 통쾌하게 해결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로라 하놋의 정보를 구하기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어. 저명한 학자들도 나서서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는 누구에게나 두려운 존재잖아. 로라 하놋이 키아나트리체의 왕실에게 그랬던 거지.”
“로라 하놋?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순간 이동 어빌리터 말이야, 이 바보야. 마왕을 죽였다는 영웅. 내내 그 이야기 했으면서.”
“아아, 그렇네. 참고 고마워, 렌.”
그녀는 늘 ‘순간 이동 어빌리터’라는 보다 불명확한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니 매칭이 잘 안 된다. 류제는 신체검사를 하러 갔을 때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서 들었던 인류의 영웅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는 모든 인류를 사랑했다고 하던가?
그나저나 도서관을 뒤졌던 그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책이라면 진절머리를 치는 렌이 알고 있다니. 미나와 류제가 의외라면서 재경을 쳐다보았다.
“헤에. 렌, 너도 잘 아는구나. 맞아, 마왕을 죽였다던 그녀의 이름이 로라 하놋이야. 신기하게도 이런 종류의 책을 읽어보면 공통적으로 그녀는 전능한 신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묘사하곤 해. 머리가 굉장히 좋았다나. 한번 본 걸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대. 그야말로 무소불위. 나라도 무섭겠다.”
그녀가 책을 덮었다. 어째서 마왕이 인간의 손에 죽은 건지 알고 싶었던 미나는 마족의 주적 로라 하놋의 이야기가 키아나트리체의 지도자들에 의해 족족 불태워지고 탄압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동정심을 느꼈다.
“처음 들어보는걸. 영웅이 척도만 높은 게 아니었구나. 과연 요행으로 마왕을 죽인 게 아니라는 건가.”
“혼자서 인류의 몇 보는 앞질러 있던 사람이라고 보면 돼. 지금 키아나트리체를 대표하는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괴물이었어. 네가 등장하기 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어빌리티 척도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하아,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대단하다고는 하지 말아 줘.”
자신이 어깨에 진 짐이 부담스러워진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위대한 사람보다 자신의 척도가 더 높다는 게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진다.
류제는 그게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미나가 영웅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대단했던 그녀의 운명도 참 기구해. 어빌리티를 너무 많이 쓴 건가 고작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사망한 데다 키아나트리체는 로라 하놋이란 영웅의 이름을 금칙어로 정했거든.”
“금칙어로 정했다고?”
“그래. 너도 ‘로라 하놋’이라는 이름이 생소했잖아. 인류의 영웅인데도 도서관에도 기록이 얼마 없고.”
이 책이 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라 하놋에 대한 책의 분서가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녀의 이름만 언급해도 출판이 어렵고 책도 분서당해 남은 것은 창고에 처박혀 있던 몇몇 도서뿐이었다.
같은 편인 인간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줄 알았으면 로라 하놋은 마왕님을 죽였을까. 마왕님이 그녀를 타락시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6월에 있는 마왕의 죽음을 축하하는 축제를 로라(Laura)가 아닌 비틀어서 라우라(La―ura) 축제라고 하는 거야.”
“아아, 왜 라우라일까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인류를 구한 영웅의 이름을 자랑으로 삼지 못할망정 금칙어로 삼다니 이 나라도 참 이상해. 왕녀한텐 미안한 말이지.”
그것이 이 나라가 가진 꺼림칙하고 더러운 부분이다. 율폰과 함께 이를 이용하고 있던 미나가 모르쇠 어깨를 으쓱였다.
“인류의 영웅이 황제보다 인기가 많으면 곤란했나 봐. 마왕이 살해당한 초반엔 폭주하는 마족이 많아서 인계도 피해를 만만찮게 입었거든. 모든 것을 사랑한 나머지 마족마저 사랑해 버린 로라 하놋이 인류를 배반한 거라 여겨서 역사에서 지우는 거라고 누군가가 말했던가. 하지만 마족을 사랑하는 여자가 마왕을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나도 그 여자 생각을 모르겠어.”
“모르겠다니. 하하, 미나 넌 그 사람을 옆에서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어머, 그래?”
잠시 말실수를 한 미나가 입을 가리고 짧게 웃었다.
로라 하놋이 마왕을 사랑했다는 말에 류제는 흐릿해진 꿈을 떠올렸다. 렌과 닮았던 그녀. 이제는 정말 닮았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류제는 그녀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심장을 찔렀던 그 감각이 떠올랐다.
기분 나쁘고 꺼림칙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는 이유가 왜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그녀에 대해서 더 알게 되어서 좋았다.
“미나 네 말대로 나도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 전혀 모르겠어.”
“제한적인 정보만 가지고 추론하기엔 벌써 백 년도 전인걸. 불행하게도 초상화조차 남지 못한 사람이니까. 흐음… 어때?”
“뭐가?”
“내 이야기를 들으니 도서부에 흥미가 생겼어?”
로라 하놋이 어떻게 마왕을 죽였는지 알고 싶었던 류제는 미나의 이야기에 혼이 쏙 빼앗겼다. 너무 재미있게 듣던 나머지 도서부에 견학을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만족한 그의 눈동자에 별이 반짝였다.
“이야, 역시 솜씨가 대단한걸.”
“류제니까 해주는 특별 서비스지. 후후, 사탕발림이 잘 들어서 다행이네.”
미나가 정리하던 책들을 다시 품에 안았다. 류제는 지루한 듯이 소파에 앉아있는 렌을 확인했다. 꿍해진 그는 이제 이야기 끝났냐며 얼마 남지 않은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 고마워. 이 동아리도 입부하고 싶다. 조용하고 몰랐던 것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렌, 네 생각은 어때?”
“나한테 왜 묻냐. 네 맘대로 하면 되는걸. 나라면 이딴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절대 싫지만.”
재경이 입술을 비죽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하고 아무도 없는 지독한 곳은 싫다. 책도 싫고 정적에 짓눌려서 숨 막혀 죽을지도 몰라. 뭐가 좋다고 둘이서만 주절주절 떠들어대는지. 물론 마족 따위랑 이야기 놀음 할 생각도 추호도 없다.
렌의 반응이 시원찮으니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는 마시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식어있었다. 류제가 예의상 차를 들어 원샷했다.
“미안해. 바쁜데 시간 잡아먹어서.”
“아냐, 어차피 나 혼자 있었는데 뭐.”
책을 정리하던 미나가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한 그녀도 책 정리를 하며 로라 하놋에 대한 자료를 은밀하게 찾아야 하기에 선배들이 아무도 없는 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재경도 시간을 살폈다. 시간제한이 몇 시까지더라. 6시까지였었나?
“가자, 렌. 다른 곳에도 들러보고 다시 올게. 여기 정말 마음에 든다는 것만 알아줘.”
“그래. 꼭 다시 와주길 바라. 잘 가!”
미나가 짧게 그들을 배웅했다. 언제나 친절한 그녀에게 답인사를 해준 류제가 동아리실 밖으로 나왔다.
책 냄새 가득 밀폐된 공간에서 소외된 채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재경은 멀미가 나서 파리한 안색으로 헛구역질을 했다. 밖의 공기에 심호흡을 크게 한 재경이 죽겠다고 기지개를 쳤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반대로 류제는 미나가 입부한 동아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재경을 힐끗거리다가 물었다.
“여기 들어간다고 말하면 싫어할 거지?”
“아까부터 뭐야. 사내자식이 줏대도 없이 남이 결정한 대로 따를 거냐? 어엉?”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건 그것대로 거짓말이다. 옆에서 치근덕거리며 시도 때도 없이 참견했던 렌에게 익숙해진 류제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어색했다. 매번 이래라저래라 했으면서 치사하긴.
“…네가 미나를 안 좋아하니까 그렇지.”
류제가 복잡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형편 좋은 재경의 귀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자, 빨리 가자. 농땡이 칠 시간이 어디 있어.”
“알았어.”
손깍지를 껴서 뒤통수에 팔베개를 만든 재경이 한량처럼 류제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