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2)
9월이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비가 크게 온 후부터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날이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찜통 같은 더위로 고통 받던 재경은 맹렬하지 않은 태양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점점 높아졌다. 반대로 해는 짧아지고 진녹색 잎사귀는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갔다. 공기엔 습기가 적어 무덥지 않아 좋다.
눈 부신 태양을 손으로 가려 그늘을 만든 재경은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잡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세라 선생님이 마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실지 몰랐어.”
“맞아.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화나기도 하고.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마을이 병마족의 침입으로 하루아침에 사라졌댔거든. 그 생각이 나더라.”
세라의 기간트리카 수업이 끝나고 난 후 6교시 새로운 과목인 호신술 수업 시간. 운동장으로 나와 수다를 떠는 그녀들은 한시라도 빨리 마족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깔깔 웃어댔다.
재경은 곧 그녀들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늘진 곳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대화를 귀담아들을 것도 없다. 어차피 이번 달에는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는다.
히로인들의 마음이고 뭐고 분석하는 것도 지쳤다. 어차피 내가 끼어들면 잘될 것도 안 되는데 뭐. 유네가 타고시아 해변 이벤트 성공 루트를 탄 발언을 했어도 재경은 섣부른 희망을 가졌다가 다시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하하하.”
“맞아 맞아. 그랬어.”
재경이 떠났어도 그녀들은 한참 동안 마족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신나게 입을 조잘거리던 그녀들은 얼마 안 있어 반복되는 마족에 대한 레퍼토리가 질렸다.
마침 주머니 속에 동아리 입부 설명서를 들고 있던 학생이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그럼 세라 선생님 담당인 응급처치 동아리도 좋겠다. 너는 동아리 뭐 할 건지 생각했어?”
“음, 나는 기왕이면 좀 차분한 걸 하고 싶어. 교양 있고, 왠지 좀 귀족 가문의 숙녀 같고, 기품 있어 보이는 동아리 없을까?”
“뭐래, 이 괄괄한 계집애가. 3월부터 네가 얌전히 앉아있는 꼴을 못 봤는데. 차라리 유도부나 검도부 같은 데나 들어가지 그래? 그게 훨씬 잘 어울려.”
“싫어. 별로 동아리에서까지 운동을 하고 싶지는 않아.”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말을 해도 갑자기 몸이 근질근질해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배웠던 호신술 기술을 되짚었다.
아침에 기숙사에서 기상하자마자 운동, 기간트리카 수업하면서 또 운동, 이번엔 학기엔 호신술 수업까지 있다. 동아리에서라도 문화적인 걸 하지 않으면 평생 몸만 움직이다가 운동 바보가 되어서 죽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것만큼은 끔찍하다며 절망했다.
“흐음~”
교양. 교양이라. 동아리 관련 유인물을 들고 있던 다른 친구가 대신 종이를 훑었다.
그래봤자 죄다 졸업했을 때 유리한 평가 점수와 관련된 활동뿐이다. 개중에 소소하게 요리 동아리, 퀼트나 뜨개질 동아리가 있었지만 경쟁률이 세서 저런 생활력 없는 애는 선배들 앞에서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했다.
“여기 있다. 식물 동아리 어때? 이거면 너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식물 동아리? 윽, 재미없어 보여.”
기껏 열심히 찾아서 골라줬더니 눈치 없이 씨부렁거리기만 한다. 눈가를 실룩거리던 그녀가 무작정 싫다고 하는 친구를 기어코 설득했다.
“너한테 재미있는 게 뭐야. 여기는 네가 말했던 교양 있고 귀족 가문의 숙녀 같고 기품 있어 보이는 동아리 중에 부원도 별로 없어서 경쟁률도 별로 안 센 곳이라 느긋하게 시간 보내기에 딱일 것 같은데.”
“식물 동아리는 뭐 토마토 같은 거 심어서 나중에 수확하는 원예 동아리 같은 곳 아냐? 교양은 무슨.”
“교양이야 차고 넘치지. 꽃꽂이라든가 여러 가지 식물을 키우는 법을 배우나 봐. 아는 선배가 거기 소속인데 최근에는 나라카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식물들도 연구하기 시작했대.”
“정말? 나라카면 마족들의 나라잖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흥미가 생겼어. 나중에 설명이라도, 들으러, 가, 볼까. 흐아차!”
호신술로 상대방을 엎어치기 한 그녀가 숨을 몰아쉬고 땀을 닦았다. 당하는 역할을 했던 학생이 죽겠다며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적당히 던져. 타이밍 맞춰주는 것도 힘드네.”
상대역을 맡았던 친구는 선생님한테서 배운 대로 일부러 넘어져 준 모양이다. 나름 위험한 상황을 가정하고 진짜로 기술을 걸려고 했던 그녀는 명색에 호신술인데 이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서 머리를 긁적거리던 그녀가 잘못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하라는 대로 똑같이 했는데 왜 연습하면 할수록 짜고 치는 기분이 드는 걸까.
“뭐가 문제지?”
“마음처럼 안 되지 않아? 나도 그래. 몸이 안 따라줘.”
“저거 봐. 저 바보 렌 지미는 저렇게 잘하는데.”
그녀들이 시선을 돌려 호신술 과목 담당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고 있는 렌을 옹기종기 쳐다보았다.
원래부터 달리기도 잘하고 기간트리카 컨트롤만 제외하면 체육 쪽에 독보적인 재능이 있는 렌은 이 수업이 누워서 떡 먹기인 듯했다. 아무리 봐도 렌은 처음 상대하는 친구들과도 짜고 치지 않고 진짜 상황처럼 호신술에 능숙해 보였다.
“신기한 일일세.”
“저번에 깡패랑 시비 붙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수학여행 첫째 날 아이스크림 때문에 펠노아의 양아치와 시비가 붙었던 때를 떠올린 그녀가 혀를 찼다.
그때는 그냥 죽어라 사람 패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렌은 선생님이 시범으로 보여준 기술을 제일 먼저 해냈다. 게다가 그보다 한 뼘 정도는 큰 성인 남성인 선생님의 신체를 방금 막 배운 호신술로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몸 쓰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매번 바보 취급만 받던 렌이 에이스로 나서다니 뒤쳐지는 것 같아 분했다.
“렌한테 밀리는 거 의외로 조바심 나네.”
“뭐, 렌도 잘하는 것쯤은 하나 있어야지.”
“하나? 요리 잘하지, 노래 잘 부르지, 달리기 잘하지. 하나는 아닌데.”
“쟤는 공부 빼고 다 잘해. 만약 호신술도 필기를 치면 글로 못 써서 죄다 말아먹을걸.”
그럴싸한 추측에 그녀들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다행히도 이 과목은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두 실기로 칠 것이다.
질투가 난 그녀들이 잘난 척하며 뻗대는 렌을 흘겼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의 실력이 늘어나는 일은 없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성실하게 연습에 나섰다.
그런 그녀들과 똑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이 반에 한 명 더 있었다.
“으으… 왜 제대로 안 되는 거야!”
성이 난 비키의 말총머리가 바싹 섰다. 구석진 곳에 혼자 호신술 동작을 되새겨 보던 비키는 몇 번이고 다른 학생들에게 부탁해 호신술을 걸어보았지만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아 잔뜩 약이 올랐다.
무슨 과목이든 1등이어야 하는 자신이 바보 렌 지미한테 밀리다니, 도저히 납득 못한다.
“첫 수업부터 이 모양이라니. 이대로 가다간 1등은 물론이고 내 체면이 뭐가 돼!”
바보 렌한테 잔소리하며 알려주던 게 내 몫인데 내가 밀리면 분명 렌은 비웃으며 날 업신여길 거다. 그럼 내 신용도 추락하고 렌에게 기간트리카를 알려줄 때도 전보다 내게 기대지 않을 거야.
절대 그렇게 흘러가게 놔둘까 보냐.
꿈속에 나왔던 것처럼 렌은 자신의 아래이고, 렌이 자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 여기는 비키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며 연습하고, 연습했다.
나도 선생님한테 칭찬받을 거다. 렌이 날 보고 역시 비키 셀로니아 님이라고 찬양하게 만들어줄 거야. 두고 봐.
“…흡……!”
혼자서 어떻게든 해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은 비키는 잘못된 동작을 하염없이 반복했다. 그만큼 몇 번이고 실패한 비키는 이대로 가다 찬양은커녕 발전도 없을 것이라며 무릎 꿇고 좌절했다.
안 되겠다 싶어 자존심을 무릅쓰고 선생님에게 자세를 봐달라 요구하고 싶은데 선생님은 다른 학생을 봐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계속 눈길이 렌 쪽으로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멀리 알짱알짱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죽겠다. 감히 렌 주제에 나보다 잘하다니 말도 안 돼.
그녀가 은근슬쩍 렌을 노려보는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가끔 렌과 어울려 다니곤 하는 여학생이 렌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렌이 그녀와 재미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러다 은근슬쩍 신체 접촉을 하며 호신술을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그걸 본 비키는 왠지 짜증이 치솟았다.
왜 짜증이 났냐고? 그야 감히 렌 지미가 자신보다도 잘하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그렇지. 라고 비키는 생각했다.
울컥울컥 밀려오는 감정이 불쾌해서 비키는 다시 연습에 집중했지만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갔다.
아까 먹은 점심에 이상한 게 들어있던 건지 머릿속에서 저 여학생 대신 그녀가 렌의 곁을 차지했다. 몸을 어루만지는 렌과 하늘에서 꽃가루가 휘날리는 장면.
몹쓸 상상력에 비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부끄러워서 입술은 입술대로 나왔고 눈가는 심술쟁이처럼 비뚤어졌다. 렌이 평소에 짓는 못난이 인형 같은 표정과 똑같았다.
렌이 잘못된 동작을 되짚어 주자 치근덕거리던 여학생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비키가 성큼성큼 재경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에 인기 절정인 기분을 만끽하며 힐링하던 재경은 뒤에서 느껴지는 으리으리한 열기에 식겁했다. 구석에 처박혀 혼자서 연습하던 비키가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뭐야? 왜 사람을 그런 눈으로 봐?”
“치사하게 렌 주제에.”
그녀가 중얼거렸다. 뭐가 치사하다는 거야? 재경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키를 화나게 만들었나 은근슬쩍 두려움이 앞서던 그때 비키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 노하우 좀 알려줘.”
차마 그 도도한 입으로 알려달라고 부탁하는 게 부끄러운지 비키의 귓바퀴가 스리슬쩍 붉어졌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그 비키 셀로니아가 스스로 렌 지미에게 부탁하다니. 믿을 수 없던 재경이 반문했다.
이 첫 번째 호신술 수업 스토리에서 중요한 사건은 반 친구들에게 여자인 것을 밝힌 유네 위주고, 비키는 이때 어디서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간트리카도 잘 다루고 운동신경도 좋으니까 구석에서 알아서 연습하고 있을 줄 알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수업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부탁할 줄 누가 알았겠냔 말인가.
쑥스러워서 입술이 부루퉁해진 비키를 재경이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던 그는 무슨 생각인지 심술궂게 비키를 비웃었다.
“싫어.”
재경은 진짜 삼류 악역 렌 지미처럼 짓궂어 보였다.
예언자 할머니는 그가 히로인들과 얽힌 바람에 그들과 멀어지면 오히려 예언이 꼬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두 번의 실패로 겁이 생긴 재경은 2학기부터는 아닌 척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
비키는 눈가가 새빨개져서는 식식거리며 재경을 노려보았다.
나는 내 시간 쪼개가면서 기간트리카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려줬는데. 렌 주제에 남들은 그렇게 잘 알려주면서 나한테는 조금 도와주는 것 가지고 뭐 그리 치사하게 구는데?
“너―”
“라고 말하고 싶지만, 문무 양도 지체 높은 대귀족 비키 셀로니아 님을 놀려먹을 찬스는 별로 없으니까 이 렌 지미께서 오늘만 몸소 알려주도록 하지. 대출혈 서비스니까 감사하게 여기라고.”
말을 잽싸게 끊은 재경이 장난에 속은 비키를 놀린 척 콧대를 세웠다. 찔려서 지레 물러난 그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속삭거리는 마음의 소리를 무시했다.
“뭐…뭐야? 감히 날 놀려먹겠다고?”
이 대귀족 비키 셀로니아가 자존심을 무릅쓰고 부탁해 줬더니 렌 지미 주제에 기고만장해져서는 날 보고 피식피식 비웃는다.
저럴 줄은 알았지만 비키는 농락당했단 생각에 분했다. 그렇다가도 렌이 부탁을 들어주니 은근슬쩍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하지 못한 입은 매번 그랬듯 반대의 말이 나왔다.
“이깟 호신술 수업 가지고 잘난 척하지 마. 바보!”
“어허? 자꾸 고자세로 나오면 안 알려줄 거다? 흠, 어디 보자. 비키도 보잘것없으니 이대로만 가면 호신술 수업 1등은 나로 따놓은 당상이구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누가 뭐래도 1등은 나야. 지금은 잘난 줄 알지? 학기 말에 두고 봐. 네가 나한테 알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고 있을 테니까!”
비키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했다. 류제도 그렇고 왕녀도 그렇고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셀로니아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비키는 무엇이든지 극복해 내고 1등을 쟁취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고작 렌 지미에게 1등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또 그녀는 이번 학기부터 점찍어 둔 동아리에 가입할 것이기 때문에 방과 후 렌에게 기간트리카 컨트롤 노하우나 공부를 알려줄 시간이 부족해졌다. 그걸 고려하면 렌이 그녀의 호신술 수업을 도와주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비키가 수지타산을 계산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어디, 뭐가 안 되는데? 몸은 왜 이렇게 뻣뻣하게 굳었어?”
비키의 풀색 눈동자에 렌 지미의 얼굴이 들어찼다. 주근깨 가득히 불평 품은 낯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키는 렌을 보면 언제부턴가 켕기는 것이 있었다. 낯선 듯 익숙한 이미지와 귓가에 맴도는 단어를 비키는 꼭 확인하고 싶었다.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
선명하게 떠오르는 낡은 초상화. 타고시아 해변에서 집으로 돌아간 비키는 유모와 함께 셀로니아 대저택을 샅샅이 뒤졌지만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어렸을 적 숨어있던 석상 눈 뒤 비밀 창고에서 초상화를 찾을 수 없었다.
비밀 창고는 검게 그을렸지만 어렸을 적 그녀는 그곳에서 뭔가를 봤던 거다.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아버려서 그 기억이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도 몰랐다.
비키는 가문의 기록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이름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다. 확신하기 전까지는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그녀의 의심이 사실로 밝혀지면 키아나트리체는 물론 인계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대발견일지도 몰랐다.
“야, 무섭게 갑자기 왜 멍때려?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 나한테 진짜 1등을 뺏기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어서 그래.”
“뭔데 그게.”
“그냥 내 개인적인 사정이니까 상관하지 마.”
비키가 궁색하게 변명했다. 남모르게 비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재경은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만일 꿈속에서 류제가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도 성공시켰다면 비키 또한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에 따라 비키가 들어가게 될 동아리가 결정된다. 재경은 비키의 고민이 그 기억과 관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럼 알려줄 거면 빨리 알려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잖아. 시간 낭비야.”
“거참, 멍때리던 사람이 누군데 닦달하긴.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섣부르게 기대하지 말자며 재경은 풀리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진중하지 못해서 또다시 일을 치를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선생님이 보여준 동작 시범을 재연해 줘. 너랑 내가 뭐가 다른지 궁금해.”
“흠, 어디 한번 잡아봐.”
재경이 비키에게 흉부를 들이밀었다. 주춤거리던 비키가 머뭇머뭇 재경의 체육복 멱살을 잡았다. 옷 아래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피부가 괜히 의식된다.
더러운 것이라도 집는 양 잡는 법부터가 영 시원치 않자 재경이 똑바로 잡으라며 비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렇게 단단히 쥐라면서 재경이 비키의 손을 감싸 쥐었다. 비키가 깜짝 놀라 재경의 손을 뿌리쳤다.
“어…어딜 만지는 거야?”
“네가 똑바로 안 잡으니까 그런 거 아냐?! 왜 성질을 내고 난리야.”
비키가 손을 쳐내자 재경은 어이가 없어 양손을 들어 보였다. 그 누가 시비를 걸 때 멱살을 얌전하게 잡는단 말인가. 전부 한 대 칠 기세로 달려들지. 날 더러 어쩌라는 거야?
불길하게 첫판부터 영 시원찮다. 기간트리카 대결 할 때는 날 완전 죽일 듯이 달려들더만.
“읏……. 알았어. 가만히 있어 봐. 움직이지 말고.”
비키가 어찌어찌 재경의 멱살을 붙잡았다. 어정쩡한 자세였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비키와 서로 마주 보던 재경이 짜게 웃었다.
“잘 봐.”
멱살을 잡은 손의 팔꿈치를 왼손으로 붙잡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긴 재경이 오른손으로 비키의 이마를 쳐냈다.
비키의 몸이 반대편으로 빙그르르 돌았다. 균형을 잡지 못한 비키가 그대로 휘청거렸다. 그 전에 무릎으로 비키를 받쳐준 재경이 장난스레 팔꿈치로 비키를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
시범을 다 보여준 재경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에코, 하고 땅에 떨어진 비키가 잠깐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눈을 끔벅거리다가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몇 초 후 자신이 놀림당했음을 깨달은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운 거랑 다르잖아!”
“배운 대로 하면 네가 그대로 대응할 거 아냐. 재미없게.”
어깨를 으쓱거린 재경이 그럴싸하게 변명했다. 그래도 나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나 중학생 때 선배들에게 밉보인 적도 많은 데다 보통 학교 째고 밖을 돌아다니다 보면 길 가다 시비를 하루에 꼭 한 번씩 받았던 재경은 이런 기술은 사람이 방심했을 때 걸어야 효과가 좋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싸움을 해본 적 없는 비키는 재경이 말하고픈 바를 잘못 짚고 지레 칭얼거렸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오늘 배운 동작이거든?”
“아, 거참. 알았어. 말도 많긴. 그럼 이번엔 네가 나한테 걸어봐.”
이번엔 재경이 비키의 멱살을 잡았다. 조금만 내려가면 손이 흉부에 닿을 것 같아 부끄럽다. 호신술의 동작에 필요한 자세일 뿐인데 비키는 기분이 묘해졌다.
재경이 비키의 멱살을 고쳐잡을 때 착각을 한 비키가 죽어라 내동댕이치려고 했다. 손쉽게 빠져나간 재경은 역으로 비키를 제압했다.
“뭐 하냐? 무턱대고 움직이니까 그러는 거 아냐.”
재경이 제힘에 자빠진 비키를 보면서 킬킬 웃었다. 역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재경이 유리했다.
“윽, 처음이라서 그런 거거든? 기간트리카만 장갑했어도 쉽게 빠져나가는데. 너야말로 어디서 이런 걸 배운 거야?”
“인생은 실전이거든~ 그것도 모르냐?”
부끄러운 옛날이야기 따위는 절대 이곳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능구렁이처럼 굴던 재경이 팔을 놓아주자 비키가 흙을 털고 일어났다.
“나중에 기간트리카 수업 때 두고 봐.”
“네가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준 건데? 뭐야, 알려달라는 의미가 네 호신술 기술에 그대로 당하라는 심보였어?”
“그건 아니지만……! 아까 걔는 친절하게 잘 알려줬으면서.”
꿍얼거리는 목소리는 데크레셴도처럼 점점 작아져 재경의 귀까지 닿지 않았다. 흙투성이가 된 비키를 보던 재경은 기껏 성심성의껏 알려줘도 저런다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지고 싶지 않은 비키가 볼을 부풀렸다.
“다시 해!”
“참 나, 두고 보자고 할 땐 언제고.”
억지를 부리는 비키를 위해 다시금 시범을 보일 준비를 하던 재경은 비키의 머리끝에 걸린 작은 낙엽을 발견했다.
비키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재경이 머리에 나뭇잎이 붙었다고 제 머리를 대신 쿡쿡 찔렀다. 생각 좀 하고 움직이라고 놀린 줄 착각한 비키가 찔려서 화를 냈다.
“시…시끄러. 나도 알아!”
“맨날 무슨 말만 하면 시끄럽대. 알긴 뭘 알아. 머리에 나뭇잎 붙었다고, 이 바보야.”
“뭐? 어디에?”
비키가 재경이 가리킨 방향의 반대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헤집어도 나뭇잎이 만져지지 않았다. 답답해서 보다 못한 재경이 비키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몸소 떼어내 주었다.
순간 비키의 머릿속에 이상한 망상이 스쳐 지나갔다.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 의미를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레, 레, 렌 지미 주제에 사람을 바보 취급하기는!
“뭐― 하고 있어?”
“우악!”
“꺄악!”
비키와 재경의 허리가 확 굽어졌다. 누군가 했더니 류제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어깨동무를 한 것이다. 어디에서 나타난 건지 하하하하 웃고 있는 낯이 참으로 꺼림칙했다.
깜짝 놀란 재경이 식겁하며 외쳤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너희 둘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질투가 나서.”
여자라는 걸 밝혀서 친구들과 거리감이 생긴 유네의 곁에 있어줘야 하는 류제가 두 사람의 꽁냥거림을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류제의 속도 질투로 부글부글 끓었다. 비키가 경험한 질투는 류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의 새 발의 피였다.
“나 참, 내가 유네한테… 하아, 아니다.”
이 수업 시간에 펼쳐지는 유네의 스토리에 관해서는 이야기를 망치고 있는 그가 뭐라고 명령할 처지가 아니었다.
재경이 네 마음대로 하라며 포기했다. 유네는 자기가 알아서 해쳐나갈 테니 아무래도 좋은 류제가 하하 웃으면서 물었다.
“근데 진짜로 둘이서 뭐 하고 있던 거야?”
“알아서 뭐 하게!”
비키는 부끄러워졌다. 렌에게 호신술 노하우를 알려달라고 부탁한 걸 하필이면 변태 류제에게 들켜버렸다. 문득 자존심 상한 그녀를 훑은 재경이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장난꾸러기처럼 놀려댔다.
“아아. 류제 있지, 글쎄 비키가 나한테 찾아와서는 호신술 좀 알―려달라고 하더라고.”
일부러 말꼬리를 늘인 재경이 잘난 척하며 류제와 시시덕거렸다. 그새를 못 참고 비키를 놀려먹은 것도 대단하지만 류제는 그보다 더 대단한 사건에 주목했다.
“응? 비키가? 진짜?”
“시…시꺼!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잘해?! 렌이 조오오금 더 잘해 보이니까 시…신기해서 그런 거야.”
“오호라, 그러면 이다음부터는 안 알려줘도 되는 건가?”
“그건……!”
의연하게 굴면 될 것을 갖다가 몇 배는 난리를 치니까 놀리기가 편한 거다. 재경이 킬킬 배를 잡고 웃었다.
“별로 안 어렵던데 그 정도인가? 서툴구나, 비키.”
비키는 결국 류제에게 호신술을 잘 못한다는 게 들통나고 말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 싫었던 그녀가 죄 없는 류제에게 따졌다.
“남 연습하는데 왜 참견이야! 유네는 어쩌고 혼자 있어?”
“유네는 저쪽에서 연습하고 있어. 왜? 불러줄까?”
“의미가 그게 아니잖아. 반 분위기 알면서 왜 유네만 혼자 내버려 두고 그래?”
말을 돌리려던 비키가 다급하게 유네를 찾았다. 안 그래도 여론이 좋지 못한데 홀로 내버려진 유네는 체육대회 응원도 같이했던 친구들 주변에서 어영부영 눈치를 보고 있었다.
류제를 믿고 연습에 집중했던 그녀가 바보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반장의 소임을 다하려 비키가 발걸음을 떼려 하자 류제가 비키를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자꾸 우리들하고만 같이 있으니까 친구들하고 영영 오해를 못 풀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자리를 비켜준 거야.”
“유네가 그렇게 말했어?”
“아니면 누가 그랬겠어. 괜히 마음고생만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류제가 비키의 어깨동무만 풀었다. 치사한 견제다. 이를 못 알아차린 재경은 유네가 혼자 버림받은 햄스터처럼 여자애들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여기까지는 주인공 류제의 시점에서 보면 정상적인 흐름이었다. 류제가 정말로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했다면 유네는 용기를 내서 친구들과 화해를 하고 오해를 풀 것이다. 아니라면 어정쩡하고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한다.
호감도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따돌림을 당했던 유네의 과거를 아는 재경은 유네가 숨기는 것 없이 마음을 터놓고 저 친구들과도 잘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할 수 있다, 유네야. 두려움을 극복했으면 다시 저 애들하고 친구가 될 수 있어!
재경이 마음속으로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네는 초조하게 손을 꿈지럭거렸다.
개학식 날 세라에게 부탁해 아침 조회 시간에 용기를 내서 고백을 했지만 여전히 유네는 반 친구들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학기 초반에 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기껏 용기를 냈는데 여기서 멈춰 선다면 미들 스쿨 때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다.
유네가 잠시 재경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렌 군이 해줬던 말, 잊지 않고 있어. 류제 군이 해줬던 말도, 비키 양이 해줬던 응원도 모두 기억해. 그러니까 더욱 여기서 주저할 수 없어.
드디어 결심한 유네가 어색함 반, 두려움 반으로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안녕.”
한 학기 전만 하더라도 유네를 미소년 취급하며 우상화하던 친구들이 거리를 두었다. 지금껏 남자라고 믿고 있었던 애가 사실은 여자였다니. 배신당한 그녀들은 더 이상 유네와 할 말이 없었다.
작정하고 거짓말을 한 데다 남자인 류제와 같은 방을 쓰는 등 도대체가 평범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정신머리가 아닌 것 같았다.
“우리한텐 무슨 일이야?”
그녀들 중 한 사람이 나섰다. 다가가고 싶어 하는 유네의 마음을 완강하게 거절하려는 경계심 담긴 말투다.
친근했던 예전과 달리 날이 서고 차가운 어조에 유네는 미들 스쿨을 다닐 무렵의 생각이 났다. 그때 친구들도 자신을 저런 눈으로 봤었다.
하지만 이유는 다르다. 유네는 그만큼 지금 친구들이 그녀로 인해 상처받았음을 이해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겁먹어 도망쳤던 벌이다. 그걸 극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 누구도 아닌 유네의 손에 달려있었다.
유네가 특기인 무해한 얼굴로 웃었다. 긴장해서 굳은 얼굴을 미소로 가렸지만 관자놀이에 어린 식은땀과 차가운 손은 그녀의 진짜 심정을 대변했다.
“아니, 그… 가…같이 연습하자… 말하려고.”
“류제나 렌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마른 헝겊에서 짜낸 한 방울 물기만큼이나 용기를 내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하다.
그녀들은 류제나 렌처럼 유네와 더 친한 친구들은 이미 유네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외감을 느꼈다. 그녀들은 그 정도일 뿐인 존재다. 그러니 유네가 다가와도 위선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그… 연습뿐만 아니라… 옛날처럼 치…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이 진정되기도 전인데 유네는 자꾸만 벽을 뚫고 들어오려고 한다. 그녀들은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유네가 부담스러웠다.
실은 여자였다는 사실도 버거운데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고 싶다니. 무슨 사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자기 멋대로에 이기적인 거 아닌가.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그녀들은 거절의 말을 꺼내려고 했다. 유네도 그녀들의 입에서 좋지 못한 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직감하고 시무룩해졌다.
유네의 마음이 한풀 꺾이려는 바로 그때, ‘무게’ 어빌리터가 지나갔다. 그녀는 유네와 친구들의 대치 상황을 신경질적으로 흘기더니 들으라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참 나, 친구니 뭐니 지랄하더니 결국 어쭙잖은 미소년 얼빠들이었잖아. 웃겨 죽겠네.”
“뭐라고?! 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뭐야, 내 말이 틀렸으면 반박해 봐.”
매번 유네를 괴롭혔던 사람이 본래 유네와 친했던 그녀들을 빈정거리자 양심이 찔린 그녀들이 주춤거렸다. 거짓말 한 사람은 유네인데 상처받은 그녀들이 잘못한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는 ‘무게’ 어빌리터에게 그녀들이 큰 소리로 따졌다.
“유네랑 안 친한 네가 뭘 알아. 당연히 당황스럽지. 우리는 여태껏 유네가 남자인 줄 알았으니 충격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
“맞아, 너도 몰랐던 주제에!”
‘무게’ 어빌리터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지난여름 유네가 여자인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챘지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다. 정의로운 척하는 저들도 결국 유네를 친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리벙벙한 미소년이라는 반의 아이돌을 원하는 것이다.
그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
“왜 나한테 짜증이야. 찔렸냐? 친구라면서 싸고돌더니 여자라고 밝혀지니까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고. 속셈이 빤히 보여서 소름 끼친다. 역겨워. 진심 멍청이 같아.”
날 선 기운이 그들 사이에 불어닥쳤다. 수학여행 때부터 유네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무게’ 어빌리터가 웬일로 유네의 일에 끼어들자 그녀의 친구들은 별일이라면서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너무 그, 그러지 마. 내 잘못이니까…….”
자신이 한 거짓말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친구들만 다투게 될까 유네가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지난여름, ‘무게’ 어빌리터의 덤덤한 무관심이 유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유네에게 있어서 그들 모두 소중했다. 이런 식으로 싸우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다 설명할게. 나한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줘. 그러고 나서 납득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줘.”
“뭐래. 관심 없어.”
말을 차갑게 끊은 ‘무게’ 어빌리터 소녀가 별꼴이라며 유네를 흘기더니 자기 친구들에게 합류했다. 그녀는 여름방학 때 유네와 둘이서 만났던지라 진작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어줄 만큼 그녀는 인내심이 크지 않았다.
‘무게’ 어빌리터가 유네의 편에 설 것이라 여겼던 유네의 친구들은 그녀가 제 할 말만 하고 떠나버리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쟤는 유네의 편이야, 아니면 유네의 적이야?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니까.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한차례 정적이 찾아오고 그녀들이 차례로 김빠졌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녀들도 이대로 가다가는 영영 유네와 화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녀들도 사람인지라 친구라고 믿었던 유네에게 배신감이 드는 걸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도 저 다른 사람에게 정곡을 찔리니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한 학기 동안 친하게 지내던 반에 몇 없는 남학생이 방학이 끝나고 여자가 되어버리다니. 난데없는 상황에 그녀들이 유네를 어떻게 받아들였어야 현명했을까.
그녀들은 여자 교복을 입은 유네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성별과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뒤바뀌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게 이유를 말해줘.”
“납득할 수 있으면 다시 생각해 볼게.”
‘무게’ 어빌리터 덕분에 기적적으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유네가 감사를 표했다.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유네는 그녀들이 그럴 친구가 아니라고 믿었다.
유네가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미들 스쿨 때 일을 말했다. 나르타 가문이 유명한 상단을 거느린 부자임은 익히 알려졌으니 제외하고 남은 건 그녀의 못난 교우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한 유네를 누군가가 달갑게 여기지 못한 일, 인류를 지키는 어빌리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유약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유네, 보잘것없는 ‘바람’ 어빌리티까지 더해져 그녀는 따돌림을 당했고 그때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서 제립학교에 들어갈 용기조차 꺼져버렸던 일까지 차근차근 말했다.
“그래서… 그… 만약 내 성격이 이러니까 제립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하면 어쩌지 너무 걱정이 되었어. 그러다 그… 아무래도 제립학교가 남자가 적다 보니까 내가 차라리 남장을 하면 적어도 따돌림은 안 받겠다 싶어서… 그래서 아빠한테 부탁해서 남장을 하고 입학을 한 거야.”
약점이나 다름없는 부끄러운 과거를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치욕스러웠지만 유네는 이상하게 개운해졌다.
“그러던 중에 저번 여름방학 때, 렌 군하고 류제 군을 우리 집에 초대했었는데… 그때 미들 스쿨 때 치…친구들이랑 마주치는 바람에 내가 여자라는 걸 들켜버린 거야. 렌 군하고 류제 군 모두 그때 알게 됐어. 나는 분명 내가 거짓말을 해서 둘 다 화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오히려 유네는 유네일 뿐이라고 말해줘서… 그래서… 그…….”
“…….”
“결국 어떻게 되든 나는 나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어. 이미 늦었을까 싶었지만 그… 너…너희들이라면 내가 여자라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 용기가 생겨서 그래서 다시 여자로… 그… 돌아…온… 거야.”
유네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였다. 그녀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유네의 고개가 자신감을 잃고 숙여졌다.
주춤하는 유네의 시선에 손 하나가 보였다. 놀라 고개를 드니 그녀들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들도 떨떠름한지 대표로 악수를 권한 여학생이 주저하며 말했다.
“그래도 아직 네가 여자란 게 적응이 안 돼. 그러니까… 그…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차근차근… 알아간다면 네가 유네란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유네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 기쁨을 어떻게 해야 할지 주체를 못 하던 유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악수를 권한 손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응… 응! 고마워.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아니, 그, 울긴 왜 울어?”
“아냐, 안 울어. 기뻐서 그래.”
아니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으면서. 그녀들이 유네를 다독거렸다. 어찌어찌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자리를 비켜주었던 류제가 어깨동무한 재경을 이끌고 돌아왔다.
“싫다면 싫다고 하지, 왜 울리고 그래?”
“안 울렸어!”
“우리 때문이 아니거든?! 아…아닌가?”
유네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당황한 그녀들은 류제가 그들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유네를 달래느라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곁에 서있던 재경도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무사히 스토리가 성사되었다.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지라 접촉이 풀어지자 류제가 웃음을 거두고 재경의 귓바퀴를 흘겼다.
“뭐~야, 유네. 친구랑 싸운 거냐?”
“렌 군!”
류제의 손아귀를 뿌리친 재경이 태연스럽게 알은척을 했다. 유네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그렇게 울고 그래?”
재경이 울고 있는 유네의 머리를 삽살개 쓰다듬듯 산발로 만들었다. 친구들이 유네에게 서슴없이 신체 접촉을 하는 재경에게 질겁했다.
“야, 이제 유네를 그렇게 가볍게 만지지 말아 줄래?”
“맞아! 유네는 여자거든?”
“귀찮은 자식들. 부럽냐? 너희들도 해줄까? 뭘 그렇게 따지고 난리야?”
“윽, 싫어.”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세팅하고 관리한 머리를 헝클어뜨릴 거라니. 썩은 표정을 지은 그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렌, 너도 이제부터는―”
“…잠깐.”
일반적으로 이성 간의 신체 접촉과 동성 간의 신체 접촉은 의미가 다른 거라며 반박하려던 한 친구를 다른 친구가 막았다. 유네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복받쳤다고 보기엔 확연한 변화였다.
그저 이야기가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해서 이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재경이 심술궂게 손가락질했다.
“너희들 앞으로 유네 괴롭히면 류제가 날아차기로 혼내줄 거다.”
“뭐래, 우리가 넌 줄 아니?”
“시끄러워. 바보 렌 지미.”
“어? 내가 혼내는 거야? 내가 왜?”
류제가 쪼잔하게 태클을 걸자 재경이 류제의 허리춤을 치며 투덜거렸다.
“내가 하면 선생님한테 배로 혼나잖아. 너는 모범생이니까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
대답이 마음에 안 든 류제가 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류제가 유네의 화해 작전에 동참한 이유는 렌처럼 응원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유네가 친구들과 화해한다면 렌과 둘이서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유네는 말 그대로 여자애고 억지로 남자인 척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부터는 평범하게 다른 여자애들하고 어울려 다니겠지. 그러니 괜히 날아차기 같은 건 안 할 거다.
“렌 군, 고마워.”
유네가 재경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친구들과 더 어색해질까 봐 일부러 끼어들어 주었다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유네는 렌의 작은 배려 하나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렌은 좋은 친구다. 곁에 있으면 행복하고, 솔직하지는 못하지만 툴툴거리면서 곁에 있어주려고 한다.
“내가 잘될 거라고 했지?”
재경이 그 답변을 유네의 귀에 속삭였다. 얼마 전에 렌이 해준 마법의 주문을 떠올린 유네가 귓바퀴를 작게 붉히며 환하게 웃었다. 응! 하고 대답하는 말에 온갖 감정이 담겨 흘러넘쳤다.
“너희들 거기 모여서 뭐 하는 거냐. 빨리 흩어져서 연습 안 하냐?”
학생들이 하라는 연습은 안 하고 소란스럽게 수다나 떨어대자 선생님이 흩어지라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녀들은 선생님이 눈치가 없다며 투덜거리면서 마저 연습하러 유네를 끌고 자리로 향했다.
“잘 끝나서 다행이다.”
“그러게.”
재경도 역시 유네와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이제 와서 삼류 악역처럼 유네를 괴롭힐 수는 없다. 나 때문에 이야기가 망쳐지고 있는데 아직도 이기적이게……. 이게 히로인들과 깊게 엮였다는 말의 의미인가.
“저런 걸로 고민하다니 바보 같아. 시간 낭비야.”
어느새 온 건지 고개를 치켜든 비키가 투덜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착각할 뻔한 재경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키는 타고시아 해변에서 유네가 여자인 걸 알았지만 그때도 동요가 적었다. 어쨌든 유네는 유네였기 때문이다. 재경과 비슷하게 지금껏 친구가 없었던 비키는 저런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해 보였다.
“뭐야. 비키, 너 여기서 뭐 해? 유네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내가 볼일 있는 건 너야. 노하우 알려준다고 해놓고서는 날 내버려 두고 갔잖아, 당연히 볼일이 남았지!”
비키는 결국 자신이 배운 것은 렌 따위에게 농락당한 일이었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재경이 별것 있냐며 잘난 척 주절거렸다.
“간단한 걸 가지고. 한 번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일단 호신술은 관절을 이용해서 상대방이 자신의 힘으로…….”
재경이 사람 관절이 돌아가는 방향에 대해서 비키에게 즉답으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마침 모르모트인 류제도 있으니 재경이 잘 보라며 류제의 팔을 붙잡고 끙끙거렸다.
류제는 몸무게가 더 나가는 데다가 일부러 힘을 주고 있어서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기왕 알려주는 거 끝까지 멋있는 척을 하려고 했는데 류제 저 심술쟁이가 고집을 부리며 버텨댄다.
“뭐 하는 거야?”
재경의 말과 류제의 몸이 서로 다르니 짜게 식은 비키가 두 사람을 훑었다. 다급해진 재경이 버럭 외쳤다.
“류제, 너 진짜 이렇게까지 하는데 좀 움직여 줘라!”
“별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거짓말하지 마. 힘주고 있잖아! 원래 이렇게 하면 이렇게 돌아가야 하거든?”
“됐어. 이제 시간도 다 됐고. 나중에 더 알려줘.”
“뭐? 잠깐만!”
재경이 만류했지만 비키는 고개를 돌려 선생님에게 향했다. 단둘이도 아니고 류제 앞에서 렌에게 뭔가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렌과 있으면 알면 안 되는 감정을 깨달아버릴 것만 같다. 그걸 숨기지 못해 둔한 류제에게까지 들킬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건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순식간에 태도를 돌변한 비키를 쳐다보던 재경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생각해 보았다.
“왜 저래?”
“난들 아니.”
류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렌이 자신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비키나 유네가 렌을 대하는 태도가 거슬리는 류제는 남모르게 얼굴을 구겼다. 이전과는 무언가가 다른 것 같다. 유네야 여자인 것을 밝혔으니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드러난 것일지도 몰라. 비키는……. 아닐 거야. 분명 아니겠지만 그 확신이 어딘가 불안했다.
* * *
한바탕 전교를 휩쓸고 지나간 유네 떡밥이 잠잠해질 무렵 모든 1학년 교실은 온통 동아리 이야기 삼매경이었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는 다섯 명 이상의 학생이 방과 후 정당한 목적으로 모이면 동아리로 인정해 주었고, 동아리 부원 수가 많을수록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금액이 늘었다.
그렇기에 부원이 부족한 동아리 소속 2, 3학년 선배들은 쉬는 시간마다 1학년 교실을 돌면서 동아리를 홍보하는 번거로움을 행하는 한편 유명한 동아리는 학생들이 몰려서 면접은커녕 동아리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보통 인원수가 많고 인기가 좋은 동아리에는 이유가 있었다. 동아리 활동 실적을 확인하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때, 모든 부원에게 평가 점수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평가 점수가 높으면 졸업 후 군인이 되었을 때 진급에 유리했다.
그놈의 평가 점수가 뭐라고 거기에 목매는 학생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동아리를 찾아 이리저리 계산했다.
물론 일족의 부흥을 꾀해야 하는 비키도 그중 하나여야 했지만 웬일로 평가 점수에 눈이 멀지 않은 비키는 조금 아깝더라도 다른 곳에 들어가겠다 이미 결정했다.
남몰래 동아리 지원서를 든 비키가 입부하기로 한 동아리실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평가 점수를 포기하고 마음을 바꾼 것 역시 꿈속 호감도 이벤트 성공 여부에 달려있던 일이었다.
세라가 담당하는 동아리는 응급처치 관련 동아리라고 이미 오픈되었고(이로써 세라 밀로니는 1학년 8반 담임, 기숙사 A동 사감, 제립학교 교사, 비상 대비 정기 훈련 인원, 동아리 고문이라는 어마어마한 일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나 역시 도서부로 오픈되었다.
비키도 원했던 동아리로 찾아가 신청서를 냈고 메인 히로인인 왕녀 또한 다른 이들 몰래 동아리를 정한 상태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히로인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렸던 유네 정도일 듯하다.
그녀도 친구들과 화해를 했으니 마음껏 동아리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다. 마음을 정한 유네는 최종 결정을 잠시 보류했다.
막 떠오른 해가 지면을 선명하게 비추는 상쾌한 아침. 유네가 C동 기숙사에서 비키와 함께 생활하게 된 지 몇 주가 지났다.
더 이상 류제가 옆방 렌을 깨우러 가는 진풍경이나 렌이 사감인 세라에게 혼나는 장면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여자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류제의 눈을 피해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탕 시간을 엄수해야 하는 불편함은 사라졌다.
초반에는 유네의 알몸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돌아가던 C동 학생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무법자 천국 A동에서 살았던 유네도 일국의 왕녀나 귀족 비키처럼 지체 높은 가문의 영애들이 사는 C동에 익숙해졌다.
게다가 C동 기숙사는 A동에 비해 방도 넓고 시설이 유네의 본가처럼 훌륭했다. 자신만 좋은 곳으로 가버려서 류제와 렌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기숙사에서 학교로 등교하는 길. 류제나 렌이 아닌 비키와 함께 걷는 유네가 분홍색 리본으로 묶은 꽁지머리를 다듬다 물었다.
“그럼 비키 양은 정말 거기 들어가기로 결심한 거야?”
“뭐 그렇지. 원래는 S_script 동아리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빨리 신청했지.”
“S_script 동아리도 연구원을 목표로 한 학생들이 선택하지 않아? 물론 평가 점수가 크긴 하지만… 비키 양은 군 지원이라고 했으니까 S_script 동아리도 의외야. 그것보다 더 의외인 동아리를 택하다니 깜짝 놀랐어.”
“전진만 하다 보면 놓치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가끔씩은 돌아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멋들어진 말을 해본 비키가 쓰게 웃었다.
지금도 충분히 전진하는 것 같은데 돌아간다고? 비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유네는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일족의 복수와 재부흥을 원하는 비키가 뜬금없이 입부한 동아리를 보면 과거와 관련이 있다고만 추측했다.
“유네, 너는 어때? 어제 보니까 친구들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나는 음… 아직 고민 중이야.”
“이전에 말했던 거기?”
“으응. 실은 비키 양도 같이 배우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쉬워.”
그 동아리에 함께하고 싶었다는 소리를 하자 비키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 그런 거 못하는 거 알잖아! 수학여행 때 우리 조 기억 안 나?”
“그래도 연습하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싫어! 렌한테 들키면 또 놀림당할걸. 다른 건 둘째 치고 그게 제일 싫어.”
렌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상상을 한 비키가 뚱하게 얼굴을 붉혔다. 물론 셀로니아 가문은 늘 1등을 해야 하니까 비키도 못하는 것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상황상 곤란하다. 렌에게 들켜서 놀림당하는 게 싫기도 했고, 당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떠올린 옛 기억이 사실인지 밝혀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 솔깃했어도 유네와 같은 동아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
“좋은 아침.”
“안녕, 유네~”
“비키도 안녕.”
사이좋게 교실에 도착한 두 사람이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재경은 그렇게 취급하지 않지만 비키는 다른 학생들은 간신히 말을 놓은 권위 있는 귀족인 데다 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 서투니 수다를 떨기보다는 동아리에서 빌려온 책을 읽는 데에 집중했다.
반면 소심한 성격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유네는 화해했던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조금씩 새롭게 다가갔다.
“오늘 숙제는 다 끝냈어?”
“어떻게든 끝냈어. 으아, 학기 초부터 너무 어렵더라.”
“난 모르는 부분 전부 건너뛰었어. 모르는 걸 어떻게 해.”
“나도 풀면서 렌 군 걱정되더라.”
본의 아니게 렌의 숙제 감독 담당이었던 유네는 류제의 깐깐한 관리하에 낑낑댔을 렌을 떠올렸다. 유네의 친구들은 유네가 또 렌의 이야기로 빠지자 자기네들끼리 뭔가 확정 짓는 분위기다.
책상에 가방을 걸어놓고 그녀들과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으려니 반의 이러저러한 정보들이 유네의 귀에 들어왔다. 특히나 모두의 관심사인 동아리가 그랬다.
“왕녀님은 어디 들어가신대? 뭐 들은 거 있어?”
“아니. 루이나한테 물어도 절대 답 안 해주는 거 있지. 까딱하다간 사람들이 몰려서 동아리에 피해 간다고. 맨날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나 끼치면서 사돈 남 말 하기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루이나 걔는 알고 있겠지? 왕녀님 최측근인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나?”
그녀들은 과연 학교 최고의 셀러브리티 니냐롯트가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까 망상을 늘어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의 유일한 남학생들인 류제와 렌이 함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잘 이야기하며 돌던 그녀들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을 보고 커플링 엮는 재미가 줄어들었다며 한탄했다.
“렌 군, 류제 군, 좋은 아침이야. 오늘은 늦었네.”
그들과 가장 친한 유네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따로 등교하게 된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유네는 같이 등교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컸다.
늦었다는 말에 류제가 짚이는 바가 있는지 재경의 귀를 잡아당기며 불평했다.
“렌이 아침밥 먹고 방으로 돌아와서 다시 자버렸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 아파! 요즘 계속 잠을 설쳤단 말이야. 어제도 너 때문에 숙제한다고 늦게 잤잖아. 내가 미안하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그만하면 됐지 애들 앞에서 쪽팔리게 잔소리하지 마!”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지 바뀌질 않잖아. 숙제를 한 게 나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는 것도 말이 안 돼!”
오늘도 숙제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평소와 똑같다. 유네가 하하 웃었다. 친구들은 유네와 렌을 흘기며 저들끼리 수군거렸다.
재경이 책상에 가방을 두고 있는데 유네가 그새를 못 참고 물었다.
“렌 군이나 류제 군은 동아리 정했어?”
“글쎄. 나는…….”
류제가 입을 열자 교실에 있던 다른 학생들의 귀가 모이는 소리가 들렸다.
류제는 왕녀의 후광에 가려지긴 했지만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남학생이다. 셀로니아 가문인 비키에 버금가는 뛰어난 기간트리카 실력에 측정 불능의 어빌리티 척도. 외모까지 출중해서 이야기만 나누어도 눈 호강, 귀 호강하는 하렘 미연시 주인공 류제가 어떤 동아리에 들어갈지 학생들 사이에서는 왕녀만큼 뜨거운 감자였다.
“역시 차분한 걸 하지 않을까 싶어. 사람 많으면 복잡해서 싫거든.”
류제가 일전에 보고 마음에 두고 있던 동아리 몇 개를 추렸다. 렌이 어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될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아마 이 중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이전에 친구에게서 그와 비슷한 말을 들은 여학생이 우스갯소리로 어떤 동아리를 추천했다.
“너도 식물 동아리나 들어갈래?”
“식물 동아리? 그런 동아리도 있었나? 뭐 하는 데인데?”
스토리를 알고 있는 재경도 식물 동아리에 대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미연시를 플레이할 때 들었던 동아리인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별로 중요한 데는 아닌 것 같다.
“그러게. 식물 연구를 하나? 하여튼 여긴 어때?”
“관심 없어. 난 그런 거 말고 정신적인 수양이랄까… 그런 게 하고 싶어서.”
연구라는 말을 들은 류제가 고개를 저었다. 류제가 어떤 히로인이 입부한 동아리를 선택할까 캐내려던 재경은 무슨 오지랖이냐며 포기했다. 류제의 선택에 개입 안 한다고 결심했으면서 이리저리 고개 디밀던 버릇이 자꾸만 튀어나와 곤란했다.
“정신적인 수양? 뭐야, 그게. 재미없어.”
“렌, 너는 어때?”
“생각 안 했는데.”
재경에게 동아리 활동은 중요하지 않았다. 류제가 동아리 활동을 건너뛰고 기숙사 방에 돌아올 때마다 시비를 걸어대는 렌 지미를 떠올리면 본래 렌 지미는 딱히 동아리에 안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뭐, 동아리가 필수는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애들은 들떠서 난리인데 나만 관심 없는 것도 기분이 이상하다.
“그럼 요리 동아리는 어때? 너 요리 잘하잖아.”
“관심 없는데. 생각은 해볼게.”
요리 동아리는 분명 유네가 들어가게 될 동아리인데.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거라면 웬만한 건 알고 있는 재경이 삼류 악역과 관계없는 부분을 경계하며 에둘러 거절했다.
유네가 요리 동아리에 들어가는 이유는 딱히 설명이 없었던 것 같다. 뭐, 이런 종류의 미연시에서는 요리 동아리가 그냥저냥 평범한 동아리니까 그렇게 했겠지.
재경 덕분에 유네에겐 그 이유가 명확하게 생겨버렸지만 재경이 그걸 알 리 없다. 정말 렌 군이 요리 동아리에 들어와 준다면 좋겠다며 유네는 두근두근 공상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