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1) (30/112)

챕터 7. [9월. 2학기. 새로운 시작] (1)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이 여름내 햇빛을 잔뜩 머금었을 잎사귀를 강타한다. 적적한 타악기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부드러운 스트로크에 닿아 본연의 음을 뽐냈다.

가을을 맞이하는 키아나트리체의 마지막 여름비가 내린다. 더위를 깜박한 날씨에 회색 공기는 선선하기만 하다. 생명의 녹음은 이내 타들어 가서 이파리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 바퀴가 웅덩이를 파헤치고 정지했다. 진주가 알알이 박힌 우산이 남의 손에 들렸다. 발을 디뎌 사뿐히 내린 고귀한 걸음은 웅대한 철문 안으로 사라졌다.

수도 아가타의 중심에 높게 솟은 황금빛 첨탑에도 빗방울이 시원스레 미끄러져 손에 닿지 않던 먼지를 씻어 내렸다.

스스로 인류의 희망이라 자부하는 키아나트리체 왕실 궁궐의 지붕을 긍지가 똘똘 뭉친 기둥이 받쳤다. 성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가 타닥타닥 빗물을 맞으며 늦은 오후 티 파티를 즐기는 이들의 머리 위에서 대신 땀을 흘렸다.

읊조리듯 수군거리는 소리는 비밀을 교환하느라 낮고 조심스럽다. 명실상부 키아나트리체의 실권을 흔드는 높으신 분들의 은밀한 랑데부.

세간에는 귀족파라고 알려진 반어빌리터파의 비정기 집회에서는 9월을 맞이하여 들려온 새로운 소식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이다.

그들은 초조함을 가면 속에 숨기며 가식적으로 부채를 살랑거렸다. 까막눈에 귀먹은 하인들이 빈 찻잔을 채우고 그들을 시중든다. 그들은 부채로 입 모양을 가리며 일전에 일어난 중대한 일에 대해 날카롭게 속삭였다.

“며칠 전 백장미 부대가 훈련 중이던 타고시아 해변에 등급1의 니켈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렸소만.”

“해변에는 왕녀가 있었다지?”

“게다가 류제 신리와 셀로니아 가문의 생존자도 함께 있었다 했습니다.”

“니냐롯트 왕녀와 류제 신리? 우연인가 필연인가.”

오랜 시간 공들여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왕녀의 사이를 비틀어놓았지만 새로운 장기말이 될 류제 신리가 왕녀와 행동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강력한 말이 남의 수중에 있다면 그건 내 말이 아니라 적의 말이다.

세대교체 전 쓸모 있기도 전에 말을 죽여야 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몇몇이 혀를 찼다.

백작 부인이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콧잔등을 털어냈다. 그녀는 보석이 박힌 상등품 천으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눈에 띄지 않습니까, 멜가로스크.”

“그대 시선이 나를 향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냉정한 질문에도 태평하게 뒷짐 진 독수리 가면을 쓴 남자가 모르쇠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백작 부인과 더불어 몇몇 귀족들도 타고시아 해변에 니켈이 등장한 배경에 그 남자가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인지 가면 아래로 차가운 눈초리를 흘렸다. 백작 부인이 거보라며 부채를 접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경거망동한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샐러맨더의 왕과 가장 긴밀한 자가 멜가로스크 자작인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것 참 너무하군. 본인은 전혀 모르는 일이외다.”

그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아가타와 가장 가까운 해변에 예고도 없이 등급1의 수마족이 등장했다는 것은 반어빌리터파인 그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이상향은 마족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마족을 지배하는 것도 아닌 상호 간 균형이 잡힌 세계다.

과거처럼 어리석은 국민들이 고작해야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위기가 필요하다. 합의가 되지 않은 대규모 공격은 서로 금하기로 밀약을 맺지 않았나.

“이러다 정말 누명을 쓰게 생겼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시오, 화마의 군주여.”

[글쎄.]

백작 부인이 앉아있던 의자의 그림자에서 화마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바람 타고 날아온 불씨에 불이 붙은 등불처럼 홀연히 켜졌다.

외관은 어린아이인 주제에 노인처럼 시린 백발과 새빨간 눈동자를 품은 그가 악독한 기를 으르렁거렸다. 표정만큼은 심드렁한 그는 검고 뾰족한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변덕쟁이거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던 백작 부인이 혀를 차며 율폰을 흘겼다. 그녀는 어빌리터도, 마족도 믿지 않았다. 그녀가 믿는 것은 오로지 평범한 인간뿐이었다.

“니켈의 왕은 마왕이 죽고 근 백여 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자가 나타났다는 건 단순한 변덕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샐러맨더의 왕이여, 설마 우리를 배신하려는 속셈은 아니겠지요?”

[종족의 생사가 네놈들의 손에 달려있는데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섣부른 행동은 안 해.]

마치 아부를 하듯, 아니면 조롱하듯 불길처럼 일렁거리는 율폰이 악마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섣부른 행동, 즉 배신을 하려 했으면 진작 이곳에 있는 인간들부터 죽였다는 의미다. 그것을 증명하듯 율폰은 꼬리 내린 개처럼 온순한 불꽃을 쓰다듬었다.

독수리 가면을 쓴 남자가 거보라며 비죽거렸다.

“그렇소. 마족은 토벌전으로 수를 많이 잃었소. 우리는 마족이 다시 득세하길 원하지. 공생 관계는 신뢰만이 생존 전략이 아닌가. 의심하지 마시오, 백작 부인. 그리고 이건 그대가 원한 것이 아니었소?”

“감당 안 되는 일을 벌인 주제에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 내가 원했다니.”

“안티 슬렉터를 더 시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백작 부인 의견이었지.”

“…그것은 물론 그렇소만.”

“보아하니 아직 읽지 않았나 보군. 귀여운 장난감이 써준 보고서는 제대로 읽었어야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테이블 위에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이전에 올렸던 보고서를 던졌다.

타고시아 해변에 등장한 등급1의 수마가 펼친 광범위 수면 마법의 위험성과 알라마니 기간트리카 기술관의 보안 능력에 커다란 파장을 남겼던 안티 슬렉터의 재등장에 관한 보고서. 이곳에 있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돌려봤는지 종이에 손을 탄 흔적이 있었다.

“타고시아 해변을 급습한 수마의 군주가 ‘러다이트’를 사용했다고 하는군.”

“하, 그리된 것이었군요. 타고시아 해변에 백장미 부대가 있으니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상대로도 실험이 가능했겠지요. 거기에 류제 신리까지. 우리들 몰래 그런 발칙한 짓을 하다니, 그야말로 탁월한 순간이었지 않습니까.”

“성능은 어땠지?”

“어디까지 막을 수 있었나?”

“등급1의 병마 침입 이후 알라마니 기술관의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된 S_script 보안 프로텍터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전방의 괴물 포르테 들라크루아조차 한 번에 무력화되었다고 하니 만족스러운 결과입니다.”

“하하, 아름다운 목줄이야.”

[크크큭…….]

화마가 그들을 따라 웃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광경이다.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운 마음에 유일하게 적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어빌리터들을 끌어내리려고 발버둥이다. 그것도 적의 힘을 빌려서.

인간이란 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우스운 종족이란 말인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어리석은 가축들이다.

“잠깐. 그럼 류제 신리가 니냐롯트 왕녀와 함께 타고시아 해변에 있었던 이유는 뭔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건 류제 신리를 왕녀파로 이끌려는 왕녀의 속셈이 아닌가.”

[…….]

“그렇기에 우리가 이걸 필요로 하는 것이지.”

독수리 가면을 쓴 남자의 손아귀에서 옥빛의 정밀한 기계가 포착되었다. 나콜렙시가 타고시아 해변에서 사용했던 개량형 러다이트다. 백작 부인은 율폰이 멜가로스크 자작에게 넘겨준 것이라 짐작했다.

“어빌리터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반어빌리터파인 그들은 마족들의 기술인 안티 슬렉터 ‘러다이트’와 안티 어빌리티 ‘옵시그나티오’를 이용해 어빌리터들을 견제할 생각이었다.

기간트리카. 그것이야말로 어빌리터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살상 무기.

그것이 마족을 향한다면 상관없지만 마족이 없다면 그 무기는 인간을 향할 터. 어빌리터가 인류를 배신해 쿠데타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한 도구를 그들은 손에 넣었다.

순수한 인간들만을 위해야 하는 나라를 원하는 그들은 어빌리터 왕녀의 등장 후로 자리를 잃어갔다. 쿠데타가 아니더라도 황제의 하나뿐인 혈육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는 높은 척도를 자랑하는 어빌리터이고, 다음 왕좌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왕녀가 유일무이한 황족이 되면 어빌리터가 최고 권력을 잡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현재도 왕녀는 친위대를 빙자한 어빌리터로 구성된 강한 사병을 소유하고 있다. 제립학교로부터 영역을 넓혀가는 그녀가 다음 키아나트리체의 통치자가 된다면 그들은 그녀의 힘을 견제할 방도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 왕비까지 해치운 그들이 적과 손을 잡고 얻어낸 것이 러다이트와 옵시그나티오. 그리고 마왕의 부활을 전제로 한 마족과 인간의 전쟁.

감히 이능자 주제에 순수한 인간의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려 하다니. 그들에게 있어서 어빌리터는 통제하고 억눌러야 하는 야수와 같은 존재였다. 야수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야수가 필요하다.

“전쟁 계획은 순조롭나?”

[나쁘지는 않아.]

“기대되는군.”

가장 인간을 위해야 하는 자들의 손으로부터 차근차근 전쟁은 준비된다. 서로의 욕망을 위해. 다시 100년 전의 혼란스러웠던 때로 돌아가기 위해.

율폰은 수백여 년간의 배고픔 끝에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둔 이처럼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어리석은 로라 하놋이 망쳐놓은 세상의 균형을 우리는 다시 맞출 것이다.”

“대역죄인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어 영원히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인류의 배신자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왕을 죽여 평화를 가져온 로라 하놋은 인류의 영웅이 아니다.

백여 년 전, 로라 하놋은 키아나트리체 지도부의 속내를 알았다. 그녀는 증오밖에 모르는 마족을 동정했다. 적을 동정한 그녀는 반역자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마왕을 죽였다. 인류는 돌연 찾아온 평화에 열광했지만 공포가 필요한 그들에게 있어서 마족의 몰락은 절대 희소식이 아니다.

이는 그들의 멸망을 원하는 로라 하놋의 꾀였다. 그렇기에 반역자 로라 하놋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져야 한다.

[손님이 왔군.]

율폰의 말에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왕관을 쓴 중년의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 가면을 쓴 그들은 키아나트리체의 황제를 응시하며 여유롭게 입을 다물었다. 율폰은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 * *

물에 젖은 풀 냄새. 진득하게 흐르는 흙탕물. 고인 웅덩이로 방울방울 비가 내린다.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던 류제와 비키가 비를 피해 몸을 숨겼던 정자에 대자로 누운 재경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천장 나이테를 세었다.

개학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는데 도무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산책로 아래로 보이는 기숙사에서는 여름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로 소란이 한창이었다. 짐을 옮겨야 하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사람들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학교로 돌아온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다섯 히로인들도 저곳에서 비를 맞으며 고생하고 있을 테지만 재경은 얼굴 보기 염치없어 도와주러 갈 결심도 머뭇거려졌다. 제 코가 석 자라 다른 것을 신경 쓸 여유 따위 없기도 했다.

“…….”

스토리가 또 바뀌었다. 어긋나기 시작하는 나비효과를 따라 수렁으로 발이 미끄러진 기분이었다.

8월의 꿈속 이벤트에서 아세미가 아닌 그가 꿈의 핵이 되었다. 꿈속에 들어가지 못한 그는 이벤트 성공 여부를 모른다. 다섯 개나 되는 호감도 이벤트는 꿈이라는 특성 때문에 기억에서 잊혔고, 지금 와서 캐낸다고 허둥거려 봤자 뒷북에 불과했다.

이벤트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는 이는 미나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없다.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남는 것은 무력감과 스스로를 탓하는 후회뿐이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정해진 이야기가 바뀐 건 히로인들의 생각이 바뀌는 등의 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저번 챕터에서 스토리가 변한 이유는 접점 하나 없던 수마의 심경 변화 때문이었다.

대체 그 마족은 왜 나를 택한 거지? 그 이유를 짚어보아도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그러니까 더 속이 터지고 억울한 거다.

몇 날 며칠 생각해 본 결과 결국엔 신재경이 본래 렌 지미와 다르게 행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유력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류제와 함께 아가타로 이동한 것, 비치발리볼을 하다가 아침까지 기절하지 않은 것, 그래서 왕녀의 만찬회의 참석한 것이 전부다.

이 중 무엇이 수마의 왕에게 거슬렸단 말인가. 수마의 왕은 아세미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날 택한 걸까. 혹시 공범인 미나의 짓인가?

“미치고 팔짝 뛰겠네.”

혼자서 고민해 봤자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생산력 하나 없는 의심만 들고 도출되는 건 마음고생이다.

비키의 어릴 적 악몽도, 유네의 친구를 향한 두려움도, 세라 선생님의 과거도, 미나의 가짜 꿈도, 왕녀가 늘 꾸는 악몽도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것도 단언 못 한다.

더군다나 비키는 만일 이번에도 실패했다면 호감도 최대치가 3이 되어버린다. 최악이었다. 말인즉슨,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를 연이어 실패하게 된다면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모두 3 이상이어야 하는 조건을 가진 진히로인 왕녀의 전쟁 승리 엔딩, 즉 트루 엔딩이 탈락하게 된다는 소리다.

트루 엔딩은 해피 엔딩의 최후의 보루로 남겨둬야 한다. 그럼 노말 엔딩 히로인으로 남게 되는 건 유네와 세라가 전부.

두 사람 다 꿈속에서 벌어진 호감도 이벤트를 실패했다고 가정한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이벤트를 모두 성공시켰다 하더라도 호감도 최대치가 4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히로인 엔딩 때 배드 엔딩 발생 확률이 20%가 된다.

“…하아.”

그가 안일했기 때문인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세이브도, 로드도 없는 미연시 세계는 배드 엔딩이 가혹하기만 하다.

이제는 내 역할도 헷갈린다. 이래서야 주인공 일행을 괴롭히는 삼류 악당도 아니고, 숨은 조력자 역할도 아닌 이야기를 엉망으로 헤집는 성격 나쁜 방해꾼이지 않은가.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이놈아! 추워 뒤지겠는데 밖에서 청승이야, 청승은.”

누군가가 지팡이로 재경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아픈 곳만 굳이 골라 때리는 익숙한 타격감. 혼자 있는 줄 알았는데 누가 큰 소리로 태클을 걸자 재경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신경질적인 할머니 목소리로 그를 타박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었다.

“수상한 할머니!”

“누가 누구더러 수상하대? 내 이름은 사라 하놋이라고 몇 번을 말해!”

“악! 알았어요. 그만 때려요. 그런데 가…갑자기 여기는 무슨 일로…….”

저번에 사라의 앞에서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만들겠다고 잘난 척을 했던 재경은 연속된 실패에 겁에 질려있었다.

그녀는 예언에 개입하는 재경을 쓸모없는 방해꾼 취급을 했었다. 그녀가 온 이유는 결국 그녀의 말이 맞았다고 재경을 나무라기 위해 찾아온 것일 터였다.

“흥, 내가 어딜 가든지 내 맘이지.”

“온다고 미리 말 좀 해주면 덧나나.”

저번 호감도 실패 이후로 기운을 차렸나 싶었더니 다시 풀 죽은 모습을 보이자 사라가 저거 또 저런다며 혀를 찼다. 재경을 따라 정자에 앉은 그녀는 재경을 후려갈겼던 지팡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잘도 막 태어난 똥개 새끼처럼 뽈뽈거리면서 고개 디밀고 다니더니 오늘따라 왜 이래?”

“으… 뭐예요. 다 알고 오신 거 아녜요?”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 나를 위대한 나의 언니와 동급 취급하지 마라. 나는 남의 꿈속에 들어가는 재간은 없어. 못 보고 못 들은 것을 알아낼 재간도 없고.”

사라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녀는 전보다 더 늙은 것처럼 주름이 자글자글 꼈다. 말하는 것은 정정해 보여도 그녀는 백 살이 넘은 호호 할머니였다.

“뭐, 저질렀다는 표정을 보아하니 안 봐도 뻔하다. 거하게 말아먹었겠지.”

“하아, 꿈속은 못 들어갔어도 제가 아세미… 류제의 동생 대신이 되어버렸다는 건 알고 계실 거 아녜요. 저도 꿈속 구경도 못 했어요. 할머니 말대로 아주 거하게 말아먹었고요.”

재경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라가 그럴 줄 알았다며 언짢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외로 재경이 생각했던 것만큼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왕의 부활체는 네 방해 없이 스스로 갈 길을 잘 선택했다는 말이겠지. 쌤통이다.”

사라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류제 본인의 선택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오히려 재경이 개입하지 않았기에 로라 하놋의 의지처럼 류제가 자기 원하는 대로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할머니는 걱정도 안 돼요? 원래 아세미가 핵이어야 했는데 바뀌지 않아야 할 예언이 바뀐 거잖아요!”

“말했잖느냐. 나는 누가 뭐래도 류제 신리의 선택을 존중한다고. 너처럼 선택지를 강요하게 만들 생각 없어. 이 정도 일이 틀어지는 것이야 너 같은 이레귤러가 간섭하는 시점에서 예상했던 바지.”

“태평하게 굴지 마요. 까딱하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요! 류제가 마왕으로 부활해서 인간이 멸망해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는데요? 할머니는 그렇게 될 거 알고 있잖아요. 책임감 안 느껴요?”

“나야 오늘내일하는 노인네인데 마왕 까짓것 부활하든가 말든가.”

“아, 진짜. 장난하자는 거 아니거든요?!”

“나도 장난하는 거 아니야. 시끄럽다!”

사라가 지팡이로 머리통을 후려갈기자 재경의 눈앞이 번쩍거렸다. 덕분에 따박따박 대꾸했던 입이 냉큼 다물어졌다.

얼얼한 뒤통수를 붙잡은 재경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동안 사라가 콧방귀를 뀌며 핀잔했다.

“나는 언니의 예언에 따라 필요할 때만 움직일 거다. 나머지는 류제 신리 본인의 몫이야. 네가 분수도 모르고 끼어들려고 하니 이런 사달이 나는 거다.”

맞는 말이다. 재경이 죽는다고 머리를 비비다 입술을 한가득 내밀었다.

아니라며 땍땍거리며 반박을 하는가 싶더니 오늘은 얌전히 입을 다문다. 사라가 뭐 잘못 먹었냐며 재경을 수상쩍게 흘겼다.

“뭐냐, 갑자기 불안하게 왜 그리 조용해?”

“하지만 할머니가 그랬잖아요.”

재경은 그때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이 두려웠다. 사라가 이런 자신을 보고 뭐라 생각할까.

“할머니, 역시 난 해피 엔딩은 개뿔 예언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일 뿐이겠죠? 수습도 못 하면서 들쑤시기나 하는.”

지금껏 제멋대로 참견하던 그가 이제 와서 시무룩해하니 사라는 그런 재경이 낯설기만 했다.

“허이고, 그걸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내가 말할 땐 듣는 척도 안 하더니.”

그녀와 재경의 관계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였다. 둘 다 성격이 솔직하지 못하니 똑같은 말도 꼬이게 들린다. 재경은 사라에게마저도 쓸모없는 사람임을 긍정당하자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런가. 역시… 지금이라도 진짜 삼류 악역으로 돌아가는 게 나으려나.”

재경이 중얼거렸다. 고작 엑스트라에 불과한 내가 호감도 이벤트에 끼어들려 했다니, 건방진 생각이었다. 사라가 맞았다. 여전히 틀린 건 재경이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고 하던데. 갑자기 얌전해지다니 뭘 잘못 먹었냐?”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그야 그렇다만.”

사라 하놋이 하얗게 센 머리를 지팡이로 살살 긁었다.

백여 년간의 기다림 끝에 류제 신리가 아가타로 상경하자 로라 하놋의 말대로 행동을 개시한 그녀다. 그러니 당연 눈앞에서 알짱알짱 예언을 망치는 저놈이 개떡 같았지만 침울한 모습을 보니 마음 한쪽이 싱숭생숭했다.

혀를 차던 그녀가 지팡이로 재경의 허리를 푹 찔렀다.

“이미 형성된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알고 있거라.”

“더 큰 혼란이라니 그건 또 뭔데요?”

“내가 이전에 예언에서 중요한 건 그 아이들의 마음이라고 했지? 너는 이미 예언과 달리 그 아이들하고 복잡하게 얽혀버렸어. 그런 네가 갑자기 그 아이들을 잘라낸다고 해서 그 아이들의 마음이 예언대로 움직일 것 같으냐?”

재경의 표정이 깨진 접시같이 이상해졌다. 모두를 위해서라고 다짐하고 있던 일이었는데 혼자만 마음 편하자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려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모르겠으면 잘 고민해 보거라. 기로가 생기는 예언이 없는 이번 달에는 너도 조금 머리를 식힐 수 있겠지. 그동안 너의 존재의 의미를 고찰해 봐.”

“뭘 어떻게 더 생각하라는 건데요. 충분히 생각했는데.”

“급하게 생각하지 마.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판단도 성급해지는 법이야.”

그녀가 달래도 재경은 이미 자신감을 잃었다. 그가 개입해 봤자 엉망만 된다. 하지만 아까 사라가 말한 대로 이미 그들과 친구가 되어버린 재경이 일방적으로 연을 끊는다면 더 큰 파장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히로인들의 마음도 중요하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재경은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뭐든 밑도 끝도 없이 몰아붙이는 게 네 특기 아니냐. 그게 맞다고 여기고 행동을 했다면 포기하지 말고 책임을 져라. 김빠지게 굴지 말고. 아니면 너를 배제하지 않은 나는 언니를 볼 낯이 없다.”

“저도 이렇게 될지 알았겠어요? 미안하게 됐네요. 제길.”

재경을 노려본 사라는 고개를 돌려 후드를 둘러쓰고 예의 ‘공간’ 어빌리티를 이용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또 뭘 잘못했을까. 재경은 사라가 사라진 곳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자가 있는 산책로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비만 추적추적 내렸다.

어빌리티를 통해 거처로 돌아온 사라 하놋은 속에서 울렁거리는 메스꺼움에 잠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낡은 가구와 적막한 공기가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그녀는 어지러운 듯 눈을 질끈 감다가 품 안에서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쿨럭… 콜록…콜록.”

정정하게 보였던 사라 하놋은 어빌리티를 쓰면 쓸수록 몸이 죽어갔다.

인간이란 나약하다. 그녀는 언니의 말을 어기고 무리하게 어빌리티를 쓰고 있었다. 재경에게 영향을 받은 이는 예언의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서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이르지 않는가.

“쿨럭… 후우… 조금만 더 버텨주면 좋으련만.”

류제 신리를 지켜보는 임무를 위해서 평생 혼자 살아왔던 그녀의 소소한 낙은 재경의 근황을 살피러 찾아가는 것이다.

옛날 언니와 놀던 그 시절이 떠올랐던 그녀는 꼬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내심 즐거웠다. 보면 볼수록 언니와 닮은 소년. 자꾸만 그 소년과 언니가 겹쳐진다.

재경이 예언을 헤집고 다닐지언정 그 목적은 순수하다는 것을 그녀도 알았다. 그렇기에 예언의 목적과 대비되는 행동도 존중하고, 직접 찾아가 조언까지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녀는 곧이어 진정된 몸을 이끌고 행거에 젖은 후드를 걸쳐놓았다.

좋으나 싫으나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앞길에 대해 고민하고 고민하거라, 세계를 바꿀 아이들아.

그칠 줄 모르는 비는 늦은 저녁까지 내렸다.

사라 하놋에게 난감한 충고를 들은 재경은 그녀가 무슨 말을 전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책임을 지라니. 책임을 지라고 해서 지려고 했는데 그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면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는 꼬리를 물며 예언을 망치고 있었다. 그 증거가 더해갈수록, 재경은 죄책감에 팔다리가 하나씩 붙잡혔다.

그럼 어쩌란 말야. 이대로 히로인들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자는 거야? 이야기가 엇나가는 원인이 무엇인지 점점 명확해지고 있는데?

“하아…….”

이제는 텅 빈 옆방을 흘긴 재경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A동 기숙사 532호 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늘 비어있던 왼쪽 자리가 누군가의 개인적인 물품들로 들어차 있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류제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까 다른 애들 짐 옮기고 있어서 도와줬는데. 어디 있었어? 다들 너 찾더라.”

“밖에 산책~”

“비가 이렇게 오는데?”

“답답하잖아.”

비가 오면 싫은 기억도 나고.

재경이 힘없이 안으로 들어와 원래 유네의 것이었던 침대에 무력하게 걸터앉았다.

이번 학기부터 이 침대는 공식적으로 렌 지미의 것이 되었다. 내일 개학을 하면 동아리 활동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생성될 텐데 만일 주인공이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고 방으로 돌아오면 삼류 악당 렌 지미가 방에서 그를 반겨줄 것이다.

렌 지미는 쉴 새 없이 플레이어를 도발하고 괴롭혀대니 그게 싫은 플레이어는 [기숙사로 돌아간다]는 선택지 대신 동아리 활동을 택하곤 했다.

“유네는 어땠어? 비키와 같은 C동 기숙사로 갔댔지?”

“여자 교복 입은 것 보니 기분이 이상하기는 하더라.”

“네 개인적인 의견 말고 다른 애들 반응이 어땠냐고.”

“어… 몰라. 평범했었나?”

류제가 정말로 기억 안 난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고생을 하는 건 재경인데 류제는 여전히 히로인들에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방을 쓴 친구인데 저렇다며 재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2학기가 코앞인데 적어도 유네한테는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줄 알았다.

“됐어. 너한테 물어본 내가 잘못했지.”

“정 궁금했으면 네가 가서 보지 그랬어. 반가워했을 텐데.”

류제가 요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티를 내는 렌에게 조심스레 웃어 보였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마족에게 변을 당한 이후로 계속 저런 상태다. 거기에 어제까지 방학 숙제를 끝내느라 밖에 나가지도 못해서 기분을 풀어줄 시간도 부족했다. 류제는 그런 재경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하지만 렌은 거절했고, 류제는 혹시 수마의 마법에 부작용이 있었나 개인적으로 수마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마족에 관한 책이었다. 책에 쓰인 바에 따르면 혹시 렌이 마법의 핵이 되었을 때 나쁜 기억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에 질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해야 할까.

류제가 덮은 책 표지를 무감각하게 쓰다듬었다.

“그래 봤자…….”

재경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의욕이 나지 않았다. 유네에게는 반드시 전쟁을 막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무슨 낯으로 얼굴을 본단 말인가.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 자신을 탓할 것만 같았다.

“그래 봤자 뭐?”

“…류제, 너는―”

너는 내가 멀어지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라고 재경은 물어보고 싶었다. 곧 이 질문이 어리석다고 치부한 그가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류제는 다른 사람한테 무관심하기는 해도 아무 말도 없이 친구 관계가 흐트러지는 것은 그냥 두진 않을 애였다. 저번처럼 내가 사과할 때까지 화를 낼지도 모르지.

수상한 할머니 말이 맞다. 류제는 스토리가 바뀌든 말든 바로잡으려고 할 거야. 내가 깊게 얽혀버린 탓에 그게 잘못된 방향인지도 모른 채.

“왜?”

“아냐. 아무것도.”

재경이 침대에 누우며 말을 돌렸다. 화면에 버튼이 있다면 일시 정지를 누르고 싶다. 만약 챕터 시작인 내일부터 이야기가 틀어지기 시작한다면 숨이 막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류제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피곤한 듯 눈을 감는 렌을 보면서 씁쓸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덮은 책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다. 저 우울함 때문에 왕녀가 손등에 키스를 한 이유를 아는지 아직까지 물어보지 못했다.

모처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들뜨지 않았다. 렌이 어서 마음을 풀었으면 좋겠다.

그는 렌에게 휘둘리기만 했다. 한숨을 내쉰 류제가 의자를 돌렸다. 똑같이 휘둘릴 거면 차라리 렌이 기뻤으면 나으련만.

“걱정 있으면 혼자서만 너무 담아두지 마. 우린 친구잖아.”

책상에서 일어난 그가 내일 필요한 준비물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네가 걱정할 건 아냐.”

겁에 질려 세 걸음 물러나면서도 재경은 제발 류제에게 이 답답한 심정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류제는 그가 지금까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 그를 역겨워할 것이다. 자신은 이 세계를 망쳐놓고 있는 이물질이니까.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렌, 잘 거야?”

재경은 답하지 않았다.

렌이 무시하자 류제도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렌이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털어놓는 성격이었다면 진작 털어놓았겠지. 기대했던 게 바보 같다.

“…….”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 2학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엔딩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가 될 것이다. 이 이상 나 때문에 세계가 엉망이 되게 할 수 없다. 그러면 정말로 그가 이 세계를 망치기 위해 온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비가 그치고 축축한 땅이 바람에 스쳐 말라갔다. 땅에 작은 웅덩이만이 고였을 무렵 잠이 깬 새들이 활기차게 지저귀며 아침을 알렸다.

오랜만에 기상 방송을 듣고 일어난 류제와 재경은 다른 A동 기숙사생들과 함께 아침 운동을 마치고 등교를 했다. 시답잖은 수다에 유네가 없어서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학교로 가니 교실은 유네에 대한 소문으로 시끌벅적 소란스러웠다. 교실 문을 열고 자리에 채 앉기도 전에 같은 반 여자애들이 너희는 알고 있었냐는 둥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는 둥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을 했다.

그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한곳을 둘러싼 인파를 헤치니 1학기 동안 앉았던 창가 자리에서 여자 교복을 입은 유네가 반갑게 인사했다.

파란 머리에 분홍색 리본을 매고 제립학교 여자 교복을 입은 유네는 익숙함에 비례하게 이질적이었다.

“안녕, 렌 군. 류제 군. 렌 군은 어제 기숙사에서 안 보이더라. 못 만나서 아쉬웠어.”

“개인적인 용무로 바빠서 말야. 류제가 짐 옮기는 거 도와줬다지?”

“으응. 비가 와서 난처했거든. 덕분에 고마웠어, 류제 군. 류제 군이 아니었다면 고생했을 거야.”

“에이, 그것 가지고 뭘. 새로운 교복 잘 어울린다. 기분이 어때?”

“에헤헤, 역시 긴장되네.”

그녀의 낯에 어색한 웃음이 흐릿하게 꼈다. C동 기숙사로 방을 바꿔 들어온 어제부터 끊임없이 쏘아지는 날 선 질문들에 기가 죽은 유네가 새파래진 안색을 숨겼다.

그걸 본 재경은 저도 모르게 착잡한 숨을 내쉬었다. 역시 유네는 호감도 이벤트에 실패해서 악몽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비키 양이 곁에 있어서 살았어.”

우울함이 옮아버린 재경을 위해 유네가 애써 괜찮은 척했다. 큰 결심을 했으니 앞으로는 그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다행히도 타고시아 해변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바람에 먼저 비밀을 알게 된 비키는 평소처럼 똑같이, 아니 더 친근하게 다가와 주었다. 룸메이트의 양해를 구해 비키와 같은 방을 쓰게 되어 안심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비키와 유네는 이걸 계기로 친해져서 단짝이 된다. 유네가 악몽을 극복하지 못했을 경우에도 비키가 옆에 있어주어서 유네도 아슬아슬하게 학교생활을 해쳐나간다. 그것만큼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비키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정신은 이럴 때 써먹어야지.”

유네의 곁에 비키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든든해진 재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던 류제가 재경에게 작게 충고했다.

“쉿, 그거 비키 앞에서 말하면 분명 정강이가 차일 거야.”

“이미 들었어! 뭐라고?!”

이 익숙한 날 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잠시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다녀온 비키였다. 오늘부터 유네와 함께 등하교하게 된 비키가 허리에 손을 얹은 트레이드마크 자세로 재경을 노려보았다.

일주일 전과 비교해도 달라진 것 없이 샐쭉하고 탐스러운 빨간 포니테일과 노란색 리본이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츤데레 히로인이었다.

“감히 날 써먹는다느니 건방진 소리 하기는. 그 자신만만한 표정은 뭐야. 방학 숙제는 다 하긴 한 거야?”

만나자마자 무슨 끔찍한 이야기를 하냐며 재경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물론 방학 숙제를 까먹은 그를 지적한 사람이 비키였지만 솔직히 잊어버리고 있을 줄 알았다. 재경이 얼버무리듯 변명했다.

“반절은 류제의 도움이지만 흉내는 냈어.”

“반절이 아니라 대부분이겠지. 적어도 수학 숙제는 전부 베꼈잖아.”

“윽.”

편들어 줄 줄 알았던 류제에게 정곡을 찔리자 재경이 애써 비키의 시선을 피했다. 비겁한 짓을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비키의 눈초리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 고작 1주일을 남겨두고 그 많은 방학 숙제를 다 끝냈어야 했는걸. 게다가 류제의 방으로 기숙사 짐도 옮겨야 했고, 개학 준비에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했단 말이야. 방학 숙제에 집중할 틈이 어디 있어.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다 끝낼 때까지 절대 책상에서 못 일어나게 감시했을 텐데. 안일한 류제 같으니. 넌 렌에게 너무 약해!”

“약하다니 류제도 똑같이 악랄하거든? 날 완전 말려 죽일 셈이냐. 방학 내내 보충수업 들었으면 됐지 더 이상 공부는 싫어.”

“공부를 안 하면 겨울방학에도 똑같이 보충 삼매경일걸? 그때 가서 불평하면 늦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비키가 엄마처럼 잔소리했다. 반박하래도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개학하자마자 다음번 보충수업을 걱정하는 팔자라니 그건 그것대로 싫었다. 안 그래도 요즘 기분 더러워 죽겠는데 즐거운 이야기만 하면 좀 좋아.

“렌 군은 잘할 거야. 렌 군의 특기인 호신술 과목도 새로 생겼고. 옆에 공부 잘하는 비키 양과 류제 군이 붙어 도와줄 테니까.”

착한 유네가 풀 죽은 재경 대신 파이팅 응원을 했다. 재경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좌비키 우류제라. 세기말이냐? 죄인 호송당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흐음, 기대하는데 미안하지만 이번 학기에는 공부 많이 못 봐줄지도 몰라.”

비키가 안타깝게 되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타고시아 해변에서 돌아온 그녀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고 고민에 빠졌다. 그 꿈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당분간 바쁜 학교생활을 보낼 예정이다.

“동아리에 입부할 거거든. 덕분에 방과 후 스케줄은 꽉 찼어. 이번 학기부터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는 건 알지? 너희는 따로 생각한 곳 있어?”

“동아리?”

류제가 처음 듣는다며 어리둥절 끔벅거렸다.

튜토리얼처럼 비키가 새로운 시스템을 설명해 주는 건가. 진작부터 그럴 거라는 사실을 알았던 재경은 시큰둥하니 모르는 척 턱을 괴었다. 비키와 류제가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대화를 나눴다.

“너는 부반장이면서 그것도 몰라?”

“나 아직도 부반장이었구나.”

“하아, 기대도 안 한다. 몰라도 이따 세라 선생님이 제대로 이야기해 주실 거야.”

그때 밖에서 과한 소란이 들리는가 싶더니 친위대를 이끈 왕녀가 8반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금으로 자아낸 듯한 아름다운 머리칼과 은빛 눈동자는 보기만 해도 설레서 심장이 덜컥거렸다.

간만에 보는 고귀한 풍채에 넋이 나간 여학생들이 순식간에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쩜 여전히 아름다우셔라!”

“방학 잘 보내셨나요? 휴양은 어디서 즐기셨나요?”

“왕녀님, 혹시 유네에 대해서…….”

“에이이잇, 시끄럽다. 물러가라!”

무뚝뚝한 왕녀에 이어 거만하게 학생들을 물리는 루이나가 교실로 들어왔다.

니냐롯트도 범접할 수 없는 권력과 미모로 재경과 다른 의미의 소란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왕녀는 도도하게 교실 전체를 슥 훑더니 재경과 눈이 마주치고 시선을 외면했다.

요정이 노래하는 음색으로 반 친구들과 간단히 인사한 그녀는 피곤할 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다른 반에서도 인사를 하러 찾아온 학생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시끌벅적한 안부 인사 사이로 옥구슬 굴러가는 선명한 목소리가 얼핏 들렸다가 사라졌다.

왕녀에게 순식간에 시선을 빼앗겼던 비키가 눈치를 슥 살피더니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옆으로 한 걸음 다가간 그녀가 재경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그런데 그… 저번에 왕녀님과는 왜 그런 거야?”

비키도 그때 일을 한시라도 빨리 물어보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재경은 뭔 개소리라며 비키를 흘기다가 잊고 있었던 왕녀의 손등 키스 사건을 떠올리고 식겁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왕녀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으셨을 것 아니야.”

비키가 버럭 반박했다. 그녀가 렌에게 뭐라고 속삭였는지 대충 감 잡은 유네와 류제도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재경도 그 이유를 몰랐기에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진짜로 몰라. 정말이야.”

“그때 왕녀님께서 너한테 뭐라고 말씀하셨던 건 뭐야. 분명 걸리는 게 있을 거야. 잘 생각해 봐.”

“몰라. 기억 안 나. 진짜로 안 나.”

그때는 여러모로 당황해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으니까. 그날 새벽 있었던 수마와의 전투를 까마득하게 모르는 비키와 유네는 렌의 안쓰러운 기억력에 탄식했다. 무려 왕녀님께서 해주신 손등 키스다. 그게 얼마나 값지고 명예로운 일인데!

“여튼 난 정말 하나도 모르니까 물어보지 마.”

“시시하기는.”

류제도 김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당사자가 모른다는데 더 물어봐도 정보를 캐낼 수 없을 것이다. 물음표를 띄운 채 갸우뚱한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이상한 데에서 둔한 녀석이라니까.”

“너한테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눈가를 실룩거린 재경이 이성의 시선에 둔하다고 학교에서 정평이 난 류제에게 대결 심리를 느꼈다.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류제한테 둔하다는 말을 듣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예비 종이 치자 남의 교실에 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친위대원들이 각자의 반으로 돌아갔다. 교실이 한결 조용해졌다. 반 학생들도 원래 자기 자리를 찾아 의자에 앉았다.

곧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검은색 웨이브 머리를 찰랑거리는 세라가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타고시아 해변에서도 봤지만 그때는 군복 차림이었고, 지금처럼 세련된 교사 유니폼을 입고 있는 모습은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다.

“오랜만입니다, 제군들. 첫 방학 유익하게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로 돌아오니 새롭게 바뀐 것들이 참 많지요?”

그중 하나에 해당하는 유네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겁먹은 쥐처럼 애써 교실 분위기를 살피던 유네는 진정하려는 듯 심호흡을 크게 했다.

등교하기 전, A동 기숙사 사감실까지 찾아온 유네가 세라에게 부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제군들, 소문을 들어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학급에 다시금 소개를 해야 하는 학생이 생겼습니다. 2학기 첫 아침 조회 전에 우선 이 친구부터 새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세라가 눈짓을 보내자 유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 교복 차림으로 느슨하게 묶은 작은 꽁지머리에는 부적으로 축제 때 류제와 렌이 사줬던 분홍색 리본이 묶였다. 괜찮을 거야. 유네가 간헐적으로 몸을 떨며 교탁 앞으로 향했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어 보는 사람조차 긴장되었다. 재경도 이후에 나올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하고 절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쪽에 서세요, 유네 학생.”

세라가 교탁을 비워주었다. 반장으로서 학생들을 호령하는 비키처럼은 당차지 못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주목 받은 유네는 어지러워서 제 발이 다 휘청거렸다.

그녀는 꿈을 통해 미움받는 두려움을 극복했다. 무섭다고 도망가면 미들스쿨 때 일이 반복될 뿐이겠지. 내가 진심을 다해 부딪치면 친구들도 언젠가 나를 받아들여 줄 거야.

“그…그게.”

침묵 속에서 달싹거리기만 하던 입술이 드디어 떨어졌다. 반 학생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유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마…많이 놀랐…지? 그…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난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남장을 했었어. 거짓말해서 미안해.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간신히 사실을 밝힐 용기를 얻었어. 갑작스럽겠지만 다시 여자로서 너희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나…나…날 미워해도 괜찮아! 그래도 내게 한 번만 더 친구가 될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

심하게 더듬고 말았지만 유네가 무사히 인사를 끝마쳤다.

그 말을 듣고 놀란 사람은 반 친구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레짐작하고 상처받지 않으려 무력하게 턱을 괴던 재경도 유네의 입에서 나오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감으로 숨이 들이켜졌다.

유네는 악몽을 극복했을 때와 못했을 때 상호작용이나 대사가 달라졌다. 저 말이 시사하는 바는…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세상에. 분명히 다 망쳤다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류제, 너……!

재경은 여러 불상사가 벌어졌던 저번 챕터에서 류제가 의외로 선전했을지도 모른다는 한줄기 믿음이 생겨났다.

악몽을 극복하지 못해 친구들에게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소심해서 남 앞에 나서기 무서워하는 유네가 저런 말까지 하다니 기특해 죽겠다.

“그…그럼 이…이…이번 학기에도 자…잘 부탁해!”

유네가 교탁에 쾅 이마를 부딪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바싹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킨 유네는 소란스러워진 교실을 살피다가 재경을 보고 해냈다며 미소를 지었다.

소개가 끝나자 그녀는 제식훈련이 무색하게 손발을 같이 들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네가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재경이 파란 머리통을 꾹 눌렀다.

“잘했어, 유네!”

“에…에헤헤… 엄청 떨렸어. 고마워, 렌 군.”

“짜식아, 너도 잘했다!”

“나…나? 나는 왜?”

뒤에서 재경이 머리를 쓰다듬자 류제도 당황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렌이 웃다니 다행이다. 아가타로 돌아온 이후로 계속 표정이 굳어있었으니까.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류제도 남몰래 입꼬리를 실실 올렸다.

“혹시 렌 군, 나 걱정했었어?”

“말이라도 못할까 십 년은 감수했다, 이 자식아.”

감동한 유네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렌 군이 계속 표정이 안 좋았던 게 날 걱정해서였다니. 렌에게 뭔가 잘못한 줄만 알고 가슴 졸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유네는 심장이 절로 두근거렸다. 다 제쳐두고라도 곁에 렌 군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자. 조용! 궁금한 건 자유 시간 때 유네 학생에게 직접 물어보시고, 서로 상처받을 유언비어는 퍼트리지 않기 바랍니다. 반장, 제가 주는 유인물을 친구들에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네!”

유네가 연습했던 대로 잘 해내자 비키도 세상 활기차게 대답했다.

세라도 커다란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해낸 유네를 보고 저런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역경이라도 잘 극복해낼 거라는 믿음이 갔다.

거기에 반에서 가장 활기차고 마당발인 렌과 친구이지 않은가. 든든한 아군을 가졌으니 어떻게든 잘 풀릴 것이다.

“제군들 모두 유인물 한 장도 빠짐없이 다 받으셨나요?”

세라가 나눠준 유인물 중 흥미로운 내용이 적힌 종이는 총 두 장이었다. 새로운 2학기 시간표와 이번 학기부터 입부할 수 있는 방과 후 동아리 활동 설명서.

세라가 유인물 중 그것 두 개를 들며 차례대로 설명했다.

“2학기부터는 호신술 수업과 S_script 수업이 추가되었습니다. 어려운 과목이지만 잘하실 것이라 믿고, 군인이 아닌 연구직을 목표로 하시는 학생분들이 있다면 S_script 과목을 특히 열심히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학기부터 제군들도 다른 학년들처럼 방과후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교실이 술렁거렸다. 학생들의 관심사는 새로운 실기 수업인 호신술 수업도, 어려운 S_script 과목도 아니라 동아리 활동이었다.

다음 달에 있을 학교 축제도 그렇고 동아리에 들어가면 기간트리카 훈련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새로운 취미 생활이 늘어난다. 학교생활이 더 즐거워질 것이 분명했다.

누구는 악기를 배운다느니, 그림을 그린다느니, 사교댄스부터 요리, 독서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에 대해 떠들어댔다.

“유인물을 읽어보시면 학교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동아리들이 적혀있습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응급처치 동아리도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이번 달 말까지 각 동아리를 찾아가 입부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죠?”

“네!”

“개학식은 11시 대강당에서 실시하니 방송이 나오면 한 분도 빠짐없이 반장의 인솔을 따라 강당으로 가시기 바랍니다. 교과서는 개학식 이후에 배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비키 학생, 렌 학생. 오늘은 절대 허락 없이 기간트리카 대결을 펼치면 안 됩니다. 다투는 것도 안 돼요!”

세라의 경고에 반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저번 학기 입학식 날 멋대로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다가 봉사 활동을 하게 된 것을 떠올린 재경과 비키의 얼굴이 동시에 새빨개졌다. 류제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그런 적이 있었지. 그게 벌써 언제 적 이야기야.”

“렌 군, 기억나?”

“안 날 리가 있냐?!”

다들 그를 놀리는 분위기에 재경이 으르렁 화를 냈다.

그런 재경을 힐끔거린 니냐롯트는 한숨을 내쉬고 유인물을 살폈다. 관심을 끄는 동아리들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그녀는 피곤한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럼 비키 학생, 선생님은 개학식 문제로 교무실에 가봐야 할 것 같으니 자유 시간 동안 학생들을 통솔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맡겨주세요.”

개학 일로 바쁜 세라는 교무실로 사라졌다. 선생님이 나가자 수많은 떡밥들로 교실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나마 동아리 소개 유인물 덕분에 유네에게 쏠릴 뻔했던 관심이 분산되었다. 세라 선생님도 이걸 염두에 두고 무엇보다 유네를 가장 먼저 소개한 듯하다.

자유 시간이 주어지자 옆줄에 앉은 미나가 평소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유네에게 다가왔다. 유리구슬 같은 분홍빛 눈동자가 사랑스럽다.

“유네, 용기를 냈구나. 많이 떨렸지? 멋졌어.”

“미나 양! 고마워. 덕분이야.”

“오랜만이야, 류제, 렌. 타고시아 해변에서 제대로 작별 인사를 못 한 것 같아서 미안해.”

가식적인 인사에 의도적인 친절이 묻어났다. 미나는 인간들의 정기를 흡수하는 서큐버스이다. 남녀의 정기는 색이 다르기에 그녀는 보기만 해도 성별쯤은 쉽게 구별했다.

더군다나 타고시아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을 한 유네와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유네에게 다가갈 기회까지 가지고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털이 바싹 선 고양이가 된 재경이 초 친다며 미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끼어들지는 않았다.

“다 같이 사진 찍었는데 미나 양이 없어서 아쉬웠어.”

“다음번에 같이 찍으면 되지. 그때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만.”

미나가 류제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류제는 당시 꾸었던 해괴망측한 꿈 내용이 기억날 듯 말 듯 하여 어렴풋한 감각에 집중했다.

결국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미나를 보니 반갑고 믿음직스러웠다.

“미나 양은 무슨 동아리 들어갈 거야?”

세라에게 받은 유인물을 살피던 유네가 물었다. 무지한 유네에게 미나가 하하 웃으면서 설명했다.

“나는 도서위원이잖아. 도서위원은 처음부터 도서부 소속으로 되어있어.”

“에엣. 그랬구나. 그럼 미나 양은 1학기 때부터 동아리 활동을 했던 거네. 전혀 몰랐어.”

유네가 유인물에서 도서부를 찾아보았다. 덕분에 마족이면서도 학교 도서관에 있는 인간의 책은 전부 뒤져볼 수 있었던 미나가 알이 커다란 안경을 고쳐 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달에 한 번씩 필독 도서를 선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난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너희들은 무슨 동아리 들어갈 거야? 혹시 도서부에 관심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켁, 도서부는 무슨. 차라리 여기 있는 S_script 심화 동아리를 들어가겠다.”

재경이 고약한 것을 씹은 것처럼 혀를 내밀며 질색했다. 요란 법석을 떠는 재경이 무례하게 진절머리 치자 류제가 재경을 다독거리며 대신 변명했다.

“이해해 줘. 렌은 책이라는 글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난 것처럼 질색하거든.”

“그렇구나. 미안한걸. 항상 다달이 독후감을 걷는 건 나니까. 앗, 설마 그것 때문에 날 싫어하는 건 아니지?”

“뭐래. 도낏병 있냐?”

재경이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시작되는 렌 지미의 심술에 미나는 속으로 지지고 볶고 성을 냈다. 저 인간을 어떻게 골탕 먹여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유네에게 볼일이 있는 여학생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미나는 뒷전으로 물러났다.

경계심을 풀었던 유네를 영리하게 압박하려던 것이 미나의 원래 목적인 듯하다.

따돌림 당했던 경험 때문에 또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 겁났던 유네가 식은땀을 흘렸다. 남장을 했다는 방어막이 없으니 빨가벗은 기분이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여학생들은 유네를 비롯해 둘로 줄어든 8반 남학생들에게 사납게 따졌다.

“왜 우리를 속인 거야?”

“렌, 류제! 너희는 알고 있었어? 특히 류제 너! 유네하고 같은 방이었잖아. 어떻게 우리한테 그럴 수가 있어?”

여자 교복을 입은 유네에겐 말을 붙여보지 못한 여학생들의 화살은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 탐탁지 못한 눈빛이 정신에 대미지를 입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류제는 방패를 자처했다.

“진정해. 나도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알았어.”

“그 말을 우리더러 믿으라는 거야?”

“지금까지 남녀가 같은 방을 썼다는 것도 이상한데 왜 이제 와서 밝힌 거야? 숨기려면 끝까지 숨기든가!”

죄 없는 류제에게도 융단 폭격이 이어졌다. 듣다 못한 재경이 빈정거렸다.

“뭐야, 유네가 남자든 여자든 친구면 친구인 거지. 귀찮게 시시콜콜 따지기는.”

“렌, 너는 생각이 단순해서 좋겠다. 얼토당토않은 거짓말이 그게 쉽게 수용이 돼?”

“넌 바보니까 아무렇지 않겠지만 우리는 완전 배신당한 기분이라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교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돌아왔다. 체육대회 때 같이 응원 담당 치어리더를 하는 등 유네와 자주 어울렸던 여학생은 자기가 의도한 건 이런 어투가 아니었는지 상처받은 유네를 보고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이 심정을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들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개학 날부터 싸울 셈이야?”

무려 입학식 날 렌 지미와 싸우다가 일주일 동안 봉사 활동을 해야 했던 비키가 지적하자 그녀들은 못마땅한 듯 유네를 흘기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분위기를 풀어보려던 유네가 머쓱하게 웃었다.

“저 애들도 아직 어색한가 봐.”

“괜찮아. 앞으로는 잘될 거야. 그지?”

“고마워, 렌 군.”

정체를 밝히기로 결심한 유네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은 그녀의 교우 관계가 달라짐을 의미이기도 했다. 그 길에 있을 변화의 향방을 아는 재경은 자신에게 해주고픈 말을 유네에게 하며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친구들의 어색한 태도에 상처받았던 유네는 다시금 용기를 얻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렌 군의 미소는 언제나 사람을 안심하게 해주었다.

* * *

방학 동안 달라진 인간관계가 본격적으로 대입되는 2학기 첫 주 수업 날.

이번 챕터는 한꺼번에 몰려든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의 완급을 조절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

그렇기에 스토리를 전개할 때 호감도 이벤트 대신 동아리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설명하고 플레이어가 동아리를 선택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혹은 세계관 이입을 도와주기 위해 새 학기에 추가된 수업을 미니 게임 형식으로 진행하거나 미흡했던 세계관 설명을 보충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바로 최후자에 해당하는 날이었다.

“자, 조용.”

점심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렸어도 재잘재잘 떠들어대던 학생들이 세라의 외침에 끝끝내 아쉬움을 표하며 하나둘 칠판을 쳐다보았다.

개학 후 처음 있는 히로인 세라 밀로니의 기간트리카 이론 수업시간. 점심을 먹은 직후 5교시 수업은 의욕 없고 나른하기만 하다. 방학에 젖은 몸도 덜 말린 학생들은 지루한 이론 수업을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교탁에 선 세라가 책상에 의욕 없이 앉아있는 학생들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역시나 아이는 아이라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운 눈 밑 점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교실이 조용해지니 토라진 어린아이 달래듯 그녀가 반갑게 인사했다.

“집에서 쉬다가 다시 학교생활에 따라가려니 힘들지요?”

“네에…….”

수업이 싫은 학생 몇몇이 칭얼거렸다. 오늘만 수업을 빼주기를 원하는 게 빤히 보였다. 그에 맞선 세라가 지독하게 어른스러운 답변으로 회피했다.

“하지만 저는 제군들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이니 제군들을 위해서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지요.”

그녀가 채 말을 다 잇기 전에 학생들이 아쉬움이 가득 담긴 야유를 보냈다.

칭얼거림이 길어지자 입술에 검지를 댄 세라가 쉬잇, 조용히 하라며 침묵을 기다렸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녀도 2학기 첫 수업인 오늘 무리하게 진도를 나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저도 이맘때쯤이면 워밍업으로 제군들이 흥미 있어 할 주제로 수업을 진행하곤 한답니다. 당신들도 아시겠지만 누군가가 제대로 설명해 준 적은 없는 이야기일 테니 옛날이야기를 듣는다는 심정으로 잘 귀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의욕이 좀 날까요?”

분필을 든 세라가 판서했다. 믿었던 세라마저도 자비 없이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리에 투덜거리던 학생들은 세라가 칠판에 적는 수업 주제를 보고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마족]

실망했던 학생들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마족이라 함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들을 괴롭혀 온 미지의 존재들이었다. 마왕이 죽고 이제야 힘겹게 인간이 우위에 서기 시작한 시대. 제립학교 학생들은 미래에 마족들을 상대할 새로운 영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1학년 햇병아리인 그들에게 세라가 꺼내 든 이 키워드에 관해 전문적으로 설명해 준 사람은 없었다.

“흥미가 생겼을까요?”

학생들이 조용해지자 세라가 교탁에 팔을 기대고 섰다. 학생들은 그녀의 입에 집중했다. 모든 학생들이 그녀를 응시할 때까지 애태우던 세라가 마침내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제군들이 이들을 얼마큼 아실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이 베일에 싸인 존재들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제 경험보다는 지금껏 인간이 쌓아온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제군들께 마족의 정체를 서술할 것입니다.”

세라 또한 8반 학생들에게 처음 설명하는 것임을 의식했다.

학교 밖 일반인들은 마족과 싸워본 적이 없으니 마족에 대해서 물어보면 두려워하며 쉬쉬하는 편이었다. 마족에 대해 알아갈수록 학생들의 두려움이 커질 것이라 염려한 것인가, 학교에서도 1학년 1학기까지는 마족에 대해 공식적으로 가르치지 않기로 약조했다.

바로 오늘 고대했던 그날이 찾아오리라 예상 못했던 학생들이 차례로 숨을 죽였다.

이미 게임으로 알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마족에 관한 대부분의 진실을 알고 있는 재경조차 흥미롭게 눈을 치켜떴다. 과연 그녀가 어디까지 알고, 학생들은 어디까지 알아야 할지 수업이 끝나면 재경도 얻어가는 게 있을 것이다.

“마족은 인간과 다릅니다. 생김새는 비슷할지언정 생각, 행동, 수명, 육체적 능력, 본능 등 모든 습성이 상이하지요. 우리들은 그들이 어디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어도 학생들은 침묵을 지켰다. 한시라도 빨리 뒤에 나올 말을 기다린 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수세기 동안 확인된 바로 마족에게도 계급이 있습니다. 측정할 수 없는 긴 수명을 가진 마족의 사회는 우리 인간들보다도 훨씬 절대적인 계급사회라고 추측됩니다. 그들의 계급도는 권력이 아닌 순수한 힘에 의한 것이므로 인간의 것과 다른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다음 말에 앞서 세라는 무의식적으로 류제를 흘겼다. 얼핏 세라와 눈이 마주친 류제는 그녀가 다음에 어떤 말을 하려는지 어렴풋이 짐작했다.

“설명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피라미드가 적당하겠군요. 맨 꼭대기에는 그들을 다스리는 마왕이 있습니다. 마왕에서부터 분파가 갈라진 일반 마족들은 수직적 상하 계급으로 조직을 형성합니다.”

“분파가 있다면 자기들끼리 세력 다툼 같은 것도 있겠네요?”

어떤 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인간을 멸시하는 마족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미지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인간들처럼 세력 다툼을 한다니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물론 있습니다. 세력 다툼보다는 상성 관계라고 할까요. 상성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마왕 아래에 있는 분파 안에서도 상하 관계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분파를 다스리는 군주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마왕은 왜 군주를 두고 마족들을 통제하게 하였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아직 정설로 취급받는 가설은 없습니다. 그저 추측만 할 뿐이죠.”

세라가 새롭게 판서했다. 마왕이라는 글자와 그 아래로 여러 동그라미들이 뻗어나가면서 추가되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마왕이 마국 나라카 외부 활동을 꺼려했다는 상황을 증거로 들어 분파의 군주가 마왕을 위해 인간계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전형적인 여왕벌과 일벌의 관계죠. 그렇게 되면 왕을 위해 군주가 낮은 계급을 가진 마족에게 먹이를 가져오라 명령하는 상하적인 구조가 됩니다.”

마족들의 주식(主食)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혐오감으로 찌푸려졌다. 마족은 오래전부터 인간을 사냥해 왔던 존재들이다. 마족들에게 붙잡혀 실종된 자들의 이야기는 괴담으로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흔하다. 8반 학생들도 친척이나 직계가족이 마족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다.

싱숭생숭해진 분위기에도 세라는 멈추지 않고 다시 분필을 들었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열 개 정도의 단어를 적었다. 딱딱거리는 판서 소리가 반 안을 고요하게 채웠다. 마지막 단어까지 다 쓴 그녀가 다시 교탁에 팔을 기대고 입을 열었다.

“나라카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마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백 년 전 ‘순간 이동’ 어빌리터의 손에 죽었으니 그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 우리가 상대할 가장 강력한 마족은 분파의 군주들입니다. 분파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위와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몽마(夢魔), 화마(火魔), 빈마(貧魔), 천마(天魔), 업마(業魔), 뇌마(惱魔), 사마(死魔), 수마(睡魔, 水魔), 병마(病魔), 백마(白魔).

재경도 들어본 분파도 있었지만 들어본 적 없는 분파들도 많았다.

그중 병마와 화마, 수마를 직접 본 적 있는 류제가 아직도 보지 못한 마족 분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심각해졌다. 책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이상 얼마나 더 많은 분파들이 있다는 건가.

나라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마왕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건가. 그 ‘순간 이동’ 어빌리터는 뭘 알고 있었던 것일까.

류제는 참을 수 없는 목마름을 느꼈다. 그 수상한 할머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중에서 몽마, 화마, 수마, 병마 등은 아직까지도 대단한 세력권을 가진 마족 분파입니다. 인간들에게 특히 위협적인 마족들이죠. 이를 제외한 나머지 마족들은 특수한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거나 토벌전 이후로 상당한 수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타고시아 해변에서도 마찬가지로 최근 키아나트리체를 습격한 마족들은 저 분류에 들어가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뇌마는 군주의 사망을 확인했고, 백마의 군주은 눈이 쌓인 툰드라 지방에서만 드물게 확인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마의 군주는 죽음의 냄새를 좋아하며 한때 텐마이어와 미노타의 전쟁터에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그때 인류 역사상 최악으로 손꼽힐 만큼 수많은 사망자가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마족이 아니라 자연재해를 설명하는 것 같네요.”

그녀가 가볍게 농담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마족에게 대적할 방법이 없던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마족은 인간들에게 있어서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는 비유는 적절했다.

그녀는 몇 개의 마족 분파를 동그라미로 묶었다.

“분파라고는 하나 두 가지의 성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족도 존재합니다. 마족들이 개체를 늘려가는 방식을 모르는 저희로서는 부모의 형질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미나가 잠시 웃음을 참았다. 멋대로 지껄이기는. 어떻게 마족이 태어나는지 인간들은 천년이나 가까이 지났음에도 무지했다. 그걸 보자니 하찮고 우스워서 경멸감이 들었다.

마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왕뿐이다. 그 형질이 드러나는 것은 오롯이 증오의 종류에 달려있었다.

그녀도 오래전 인간을 끔찍하게 증오하게 되면서 마왕에게 기꺼이 목을 내어주었다.

정신을 차리니 그녀는 정말로 인간들을 잡아먹는 마족이 되었다. 어리석었던 인간일 때와는 다르게 정신도, 육체도 모두 뒤바뀌어서 한때 나약하고 더러운 인간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겨웠다.

“이들을 제외하면 전투 외 기록이 적어 여러 가설이 팽배하니 비교적 유명한 이 네 분파 위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몽마입니다.”

재경은 옆자리에 있는 미나를 흘겨보고 싶은 욕구를 끝내 이겨냈다. 얼굴을 보았다간 그녀가 얼마나 세라를 업신여기고 있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몽마는 주로 업마와 활동을 같이합니다. 혹은 몽마와 업마의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는 존재들을 통틀어 일컫기도 합니다. 마족들의 언어로 ‘서큐버스’라고 하지요.”

서큐버스는 키아나트리체의 전승이나 전래 동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마족이었다. 사람을 홀리고, 잡아먹고, 유혹하고, 배신하는 존재로 정평이 나있는 그들은 인간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혐오스러운 마족이었다.

“그들은 악몽을 좋아하고 인간의 활력인 정기를 섭취함으로써 에너지를 얻습니다. 물리적인 공격력은 높지 않지만 정신계 공격이 강력해 인간을 유혹해서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미는 걸 좋아하는 악취미적인 마족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은 주로 ‘악몽 마법’, ‘유혹 마법’, ‘세뇌 마법’ 등이 있습니다. 등급3까지는 기간트리카의 프로텍터로 방어가 가능하나 그 이상은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개체 수는 많지 않지만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의태 가능하다는 가설이 있습니다.”

의태. 그 소리에 학생들이 일순 술렁거렸다. 무찔러야 하는 적이 인간의 모습으로 섞여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 불신의 두려움을 섞어주었다.

재경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 반에도 인간 어빌리터인 척을 하고 있는 서큐버스가 있지 않나. 모르고 봐도 두렵지만 알고 봐도 두려운 존재였다.

이 대목은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히로인 중에서 누군가가 서큐버스이며, 저번 챕터에서 꾸었던 꿈이 수마뿐만이 아닌 몽마와도 연관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과연 류제가 그 부분을 잘 캐치했을까. 아마 아닌 것 같긴 한데.

“다음으로 설명할 마족은 수마입니다. 수마는 ‘水魔’이자 ‘睡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니켈’이라고도 부르는 그들은 정신계 공격이 주를 이루는 ‘서큐버스’와는 다르게 정신계, 공격계, 수비계 모두 뛰어난 마법을 구사합니다. ‘니켈’들은 ‘수면 마법’, ‘물 마법’을 공통으로 사용하죠. 하지만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해 게으르고 공격성이 떨어집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지요. 참고로 정신계 마법은 ‘서큐버스’보다 단계가 낮은 것으로 확인됩니다.”

수마는 타고시아 해변에서 류제와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상대했던 마족이기도 했다. 물 마법은 고사하고 수면 마법 때문에 백장미 부대를 포함해 타고시아 해변 일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잠에 빠져 에너지 드레인을 당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들이 조금만이라도 부지런하고 공격성이 높았으면 인류는 진작 멸망했을지도 몰랐다.

“병마. ‘페스트’라고 불리는 분파는 현재 인류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굉장히 적대적이고 공격적입니다. 한 병마족이 두 개의 마을을 하룻밤 사이에 멸망시켰다는 소리는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니까요. 군에서도 가장 까다롭게 다루는 마족 분파가 ‘페스트’입니다. 그들은 ‘독 마법’이나 ‘역병 마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선생님, 저번에 학교에 쳐들어왔던 마족이 병마족이죠?”

“그렇습니다. 등급1의 군주급 존재였지요.”

잠시 본가로 돌아갔을 때 학교에 가장 공격적인 마족이 쳐들어왔었다는 말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등급1의 병마족 이야기가 나오자 니냐롯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자를 떠올렸다. 거절당한 감각이 선명한 손을 쳐다보던 그녀가 약하게 주먹을 쥐었다.

피곤하다. 니냐롯트가 교실 반대편에 있는 렌 지미를 건너보았다. 생각을 알 수 없는 그는 주둥이로 연필을 까딱거리며 세라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만일 여러분들 앞에 이 마족이 있다면 저는 무슨 수를 써서도 도망가라 권하고 싶습니다. 그 공격성으로 인해 가장 많은 수가 토벌당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눈앞에 인간이 있으면 사냥을 감행할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 위험한 존재입니다. 특히나 신체 변형에 강점을 보이는 분파라서 핵을 찾아 파괴하기가 까다롭습니다.”

세라가 병마의 글자에 동그라미를 여러 번 그렸다.

류제도 체육대회가 끝난 직후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뒤틀린 날개와 찌그러진 눈동자. 옆으로 난 거대한 소뿔. 독 늪과도 같은 머리칼과 기괴한 붉은 동공. 두 명의 부하와 함께 학교로 찾아온 병마는 학교를 지키는 어른들을 무력화시키고 학교를 점거했었다.

기괴하게 변하는 신체 부위와 끔찍한 독 공격으로 렌이 죽을 뻔했고, 왕녀가 친위대를 이끌고 와주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그 마족의 핵 위치는 렌도 파악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마족은 화마입니다. ‘샐러맨더’라고 불리는 분파지요. 이들은 ‘화염 마법’을 사용하며 병마와 마찬가지로 호전적이고 잔인한 성격을 가지는 마족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내보내는 검붉은 화염은 평범한 물로는 끌 수 없다고도 하는군요. 병마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광기를 비치는 반면 화마는 진중하고 교활합니다. 병마보다는 화마가 더 다루기 까다롭다고 하는 분도 봤습니다.”

그 이야기에 가장 눈을 빛낸 사람은 비키였다.

다른 학생들도 등급1의 군주급 화마가 셀로니아가를 직접 멸족시켰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았다. 몇몇 학생들이 비키를 안쓰럽게 힐끗거렸다.

비키도 화마의 군주에 대해서 더 듣고 싶어 하는 듯 보이다가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그녀가 알아버릴 것 같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아까 마족에게는 상성 관계가 있다고 했죠? 대표적으로 병마와 화마의 상성이 좋지 못하기로 유명합니다. 샐러맨더의 불이 페스트의 마법을 무력화시켜 페스트가 샐러맨더를 피해 다닌다는 목격담이 종종 들립니다. 니켈과 샐러맨더도 대표적인 불과 물의 관계로 상성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반면 페스트와 니켈은 상성이 좋죠. 역병은 습한 곳에서 더욱 잘 퍼져 나가니까요.”

상성이 관계까지 포함한 것은 아니지만 저 설명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미나는 인간의 입에서 들리는 마족의 이야기를 어느새 흥미롭게 듣고 있었다.

“샐러맨더와 서큐버스의 관계나 페스트와 서큐버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불분명합니다. 서큐버스와 니켈은 반대로 정신계 마법을 써서인지 같이 활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세력 다툼보다는 이런 상성에 따라 행동하곤 한답니다.”

이렇게 해서 상성 이야기와 대표적인 네 분파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몽마를 제외하면 류제도 전부 한 번씩 본 적이 있어서 세라의 말을 이해하기가 편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마족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고작 몇 달이 지났다고 옛날처럼 무지했던 생활에서 붕 뜬 기분이다. 류제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지고 있는 짐이 무거웠다.

“마족을 분류하는 등급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겠네요. 이러한 마족들을 그들이 소유한 마력을 기준으로 인간들이 편의상 나눈 기준이 등급입니다. 등급0은 마왕, 1은 분파의 군주급. 그 아래로 2, 3, 4, 5, 6, 7, 8의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에 관계없이 마족들은 공통으로 붉은 동공과 악마의 뿔, 피막이 달린 검은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등급0. 그를 마왕이라 지칭하는 마족들의 저주를 떠올린 류제가 소름 끼친 팔을 쓸었다.

세라의 말대로 마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도서관을 전부 뒤져도 몇 줄 설명이 적힌 것이 다였다. ‘순간 이동’ 어빌리터는 백 년 전 어떻게 마왕을 죽일 수 있었던 거지?

“가축처럼 인간을 대하는 마족들은 어찌 보면 우리를 증오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백여 년 동안 마족에게 고통받아 온 인간들을 그들이 증오하다니 이상한 말이지요. 그들의 원동력은 증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제군들이 마족과 마주한다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류제가 스쳐 지나갔던 마족들도 그랬다.

특히나 병마가 그랬지만 그들은 모두 증오로 찬 눈을 하고 있었다. 붉은 동공에 비치는 싸늘한 경멸과 걷잡을 수 없는 미움이 지독하다. 그가 마기에 붙들렸을 때 느껴졌던 감정도 증오에 가까웠다.

“이런 마족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심장에 말뚝을 박고 머리를 자르면 죽지 않을까요?”

마족을 상대해 본 적이 없는 학생이 손을 들어 답했다.

아무리 강하고 두려운 존재일지언정 살아있는 생물이다.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찌른다면 살아날 생물은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당연한 의문에서 도출된 답변에 세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흥미로운 의견입니다. 생물이라면 반드시 죽겠죠. 하지만 마족의 재생력과 신체 능력은 그 어떤 생물보다 월등하답니다.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지요. 그들은 신체를 마음대로 변형하고 회복합니다. 땅에서 벗어나 날개로 하늘을 나는 것도 그들에게는 쉬운 일. 기간트리카가 없던 옛날에는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마족을 쓰러뜨리죠?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어떻게 토벌전을 이끈 거예요?”

“그런 그들에게도 유일한 약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들의 신체 어딘가에 있는 핵입니다.”

류제는 렌에게서 이 이야기를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그 예시가 바퀴벌레이긴 했지만 덕분에 어떻게든 두 명의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렌은 의외로 날카롭다. 마족의 공격을 예상해서 피한 것도 그렇고. 책도 안 읽으면서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은 걸까. 가족 중에 어빌리터가 있던 걸까?

“손톱만큼이나 작은 그 핵을 찾지 않으면 마족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 옛날 펠노아에서 있었던 마족들과의 전투에서 마족의 핵을 찾아내어 첫 승리를 쟁취한 이후 우리들은 정신계 마법을 방어하고, 마법 인자의 침입을 막으며, 견딜 수 없는 물리적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마족만큼 상승된 육체 능력으로 마족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고, 한 영웅의 위대한 희생으로 마왕이 소멸한 후 우리는 드디어 마족을 토벌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세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의 슬픔과 고통이 없기 위해서는 역전한 이때 마족을 반드시 몰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류제의 일도 있고, 학생들이 자기 꿈을 이루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는 세라는 이 미묘한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불안함을 안았다.

“그 이래로 마족은 퇴보의 길을 걷고 있으며, 토벌전으로 그 수도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등급이 낮은 존재들은 거의 소멸했지만 반대로 상등 마족들은 인계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군인이 되면 이런 마족들을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가까운 미래를 떠올린 세라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간트리카 선생님이 되는 길을 선택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학생들이 실전에 나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밖에 없었다.

“이번 학기부터 기간트리카와 더불어 호신술 수업이 실전으로 추가되는 것 알고 계시죠? 그럼 다 함께 이번 학기도 힘내봅시다.”

그녀가 말을 마쳤다. 그녀가 싱긋 웃었음에도 따라 웃어주는 학생은 없었다. 다들 서로 가지고 있는 결심을 다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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