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11)
터지듯이 트이는 숨통에 재경의 흉부가 고장 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횡격막으로 폐가 압박될 때마다 식도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짠 바다 냄새가 구강에 넘쳐흐른다. 고통스러워서 기침을 그만하고 싶은데 몸은 생존 본능대로 마음껏 발버둥 쳤다.
“컥, 콜록, 커헉……!”
숨 쉬는 게 힘들어 차갑게 식은 모래를 긁어내 움켜쥐던 재경이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헛구역질하며 모래 위에 바닷물을 토해냈다.
새액새액 산소를 요구하는 거친 숨소리는 그가 지금도 여실히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끔찍한 악몽이 선명한 그는 혼란스러웠다. 줄곧 묻어두고 있던 과거에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목을 조르는 친구까지. 이곳이 현실인지 악몽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가운데 신경이 곤두선 재경의 영역에 목적을 모르는 손이 멋대로 침범했다. 입에 짠 기도 가시기 전이다. 재경은 지레 겁을 먹고 다가오는 손을 뿌리쳤다.
“저리 가!”
뿌리쳐진 손은 그를 죽이려 들었던 손길과 엇갈렸다. 꿈속의 류제가 현재와 교차한다. 류제가 괴물이라도 되는 듯 재경은 두려움에 떨며 엉금엉금 도망쳤다.
마족의 손에서 목숨을 위협받던 재경이 살아있음에 안도하고 생존을 실감하려던 류제는 거부당하자 크게 충격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마의 농간에 넘어가 마기에 둘러싸여 있던 류제다. 정신이 불안정한 와중 좋아하는 사람에게 뿌리쳐지고 두려움이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류제에게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되었다.
재경은 무릎걸음으로 도망가다가 다시금 폐에서 물을 한껏 토해냈다. 산소 부족인지 어질어질 머리가 돌아 그의 고개가 모래사장에 절로 고꾸라졌다.
여긴 어디지. 꿈을 꾸고 있나.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내 목… 목은… 류제가―
“콜록, 콜록. 허억…….”
“레…렌.”
가쁘게 숨을 내쉬며 모래에 고개를 처박은 렌을 보면서도 류제의 손이 갈 곳을 잃었다. 온 힘을 다해 지켜내서 쟁취했는데 이유도 모르고 부정당했다.
아는 건가? 분명 평생 지켜주겠다 맹세했는데 내가… 내가 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걸 알아버린 건가? 내가 또 마족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고 괴물처럼 변했다는 사실을 렌은 이제 받아들일 수 없는 거야?
진정될 때까지 연거푸 기침을 토해낸 재경은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자 간신히 머리가 돌아갔다. 그는 곧 자신이 바닷가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벽녘이라도 되는 건지 어둠의 장막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침범한다. 멀리 그들이 비치발리볼을 즐긴 코트와 무너진 모래 거북이 보였다. 이곳은 타고시아 해변의 모래사장이었다.
“허억… 헉… 헉… 하아. 여긴… 여기는 타고시아… 해변이잖아.”
타고시아 해변이어서는 안 된다. 그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눈을 뜬 거지? 여기는 꿈인가? 이벤트 시작인가? 뭐야. 아닌데. 힘들어. 숨쉬기가. 아파. 지쳤어. 여긴 꿈이 아니야. 현실이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재경이 다급하게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특정 부분에서부터 기억이 끊겼다. 자,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자. 나는 분명 이번 이벤트를 위해 숙소를 나와 생각을, 정리, 하다…가…….
“렌, 괜찮아? 정신이 들어?”
“콜록, 콜록.”
그는 걱정스레 물어오는 류제를 무시하고 비틀비틀 발이 꺼지는 모래사장을 헤치고 일어섰다. 하늘을 덮는 푸른빛의 정체는 태양이다. 저문 달의 반대편으로 어느새 아침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꽉 찬 보름달이 머리 위에 직교하던 한밤중. 곧 다가올 호감도 이벤트를 위해 숙소로 돌아가려던 찰나 어떠한 그림자와 함께 암전이 찾아왔다.
그때로부터 몇 시간이나 공백이 생겼다.
“이게… 어떻게…….”
식식 숨을 내쉬는 입에서 비린내가 역겹다. 어질어질 세상이 돌아 똑바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재경은 단단하지 못한 모래밭을 걷다가 고요한 파도 소리만이 울리는 바다를 보고 멈춰 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는 거야? 왜? 어째서!
이런 생각 하고 싶지 않지만 설마 저번처럼 강제로 스토리가 조정된 건가? 렌 지미는 본래 챕터가 끝날 때까지 모래사장에서 자다가 해가 중천이 되어서야 일어났었지. 그것 때문인가? 하지만 난… 나는… 분명…….
“윽… 어지러워.”
모르겠다. 재경이 창백한 얼굴로 아픈 머리를 붙들었다. 평소와 다른 렌의 모습에 류제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근처를 맴돌았다.
“무리하지 마.”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왜 이렇게 된 건데!”
도저히 혼자서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내렸다가는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재경이 다가오는 류제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벤트는 끝난 거야? 나 없이 이벤트가 끝나버린 거냐고. 류제, 넌 주인공이니까 알고 있지? 그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재경의 비명 소리에 기절했던 그녀가 단번에 눈을 떴다. 정신력만으로 나콜렙시의 수면 마법에 이만큼이나 저항하다니 과연 그녀의 강함은 평범한 인류에서 벗어났다.
“…칫.”
치열한 전투 흔적의 위에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그녀는 추락하면서 어깨에 부상을 입었는지 손으로 상처를 지혈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이곳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세계라는 것을 깨닫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녀는 소란이 느껴지는 곳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기절했던 인질이 눈을 뜬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손 치더라도 류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사뭇 진지하다. 류제가 저지른 일 때문이다. 모래밭을 헤치며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에 재경이 포르테를 발견하고 까무러치듯 뒤로 물러났다.
“…저 아줌마는 왜 이곳에―”
뜨는 해, 다친 인류의 영웅, 그와 대립하는 류제. 이 모든 광경이 여섯 번째 챕터의 정점을 연상시킨다.
류제가 꿈의 세계를 만들었던 또 하나의 마족에게서 아세미를 되찾은 직후의 모습. 지금 시점은 설마 모든 것이 끝난 후인가?
“믿을 수 없겠지만 마족과 전투가 있었어. 네가 마족에게 인질로 잡혀서……. 그러다 바다에 빠져서 구한 거야. 모두 무사해. 그러니 제발 진정해.”
“내가 인질이었다고?”
류제의 선고에 재경은 허탈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인질? 내가? 그건 내가 아니라 아세미의 역할이잖아. 그런 것이야말로 ‘스토리대로’ 흘러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세미는 어쩌고?
“…는?”
“뭐?”
“아세미는?”
이 주변에 아세미는커녕 그들 셋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재경이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세미야 당연히 숙소에서 자고 있지.”
“왜!”
류제가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재경을 만류했다. 그처럼 아세미가 나오는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건지 상태가 이상하다. 현실과 꿈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 눈동자가 멍하고 행동도 거칠고 평소와 달라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진정해. 내가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지금은 몸을 안정시키는 데에만 집중해. 부탁이야. 응?”
“지금, 지금 내가 진정을 할 때가 아니라고! 원래, 원래……!”
팔을 붙잡는 류제를 뿌리친 재경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꿈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세계가 이벤트에 참견하려는 그를 거절한 거다.
그럼에도 반드시 아세미가 핵이 되고 인질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세미는 여기에 없는 거야? 여기 타고시아 해변 맞지? 나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지? 왜 스토리대로 흐르지 않은 건데? 이유가 뭔데!
“렌… 제발. 흥분하면 몸이 더 안 좋아져.”
걱정스레 쳐다보는 류제의 시선에서 다른 것이 느껴진다. 쓸데없는 사족이 덕지덕지 붙어서 좋지 못한 것만 재경의 귓가에 속삭거린다.
그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꾼 악몽일 뿐인데 꿈속에서 직시한 차가운 감정 때문에 류제가 낯설다. 재경은 그게 아니라며 비틀거리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다툼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포르테가 류제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겁에 질린 재경을 포르테가 짧게 흘겼다.
“마족은?”
“아… 들라크루아… 님.”
팔에 무언가를 주사하던 포르테가 차분하게 물었다. 그녀 어깨에 있던 깊은 상처가 세라가 ‘힐링’ 어빌리티를 발현했을 때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직후 바로 물러난 것 같습니다.”
“인명 피해는 어느 정도지?”
“…없어요. 아마도.”
“그런가.”
타고시아 해변 일대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포르테가 안도의 심정을 능숙하게 숨겼다.
분명 그 등급1의 니켈, 수면 마법을 발동시킨 다음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충분히 죽이고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무력하게 마법에 당한 데다가 마족이 살려준 덕분에 생존하자 포르테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그 변덕 덕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기분이 좋든 나쁘든 그들은 운이 좋았다. 다 아문 상처를 보고 어깨를 돌려보던 그녀가 남은 ‘힐링 팩터’를 군복 안쪽에 보관했다.
그건 차치하더라도 류제가 제멋대로 공격을 방해했던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포르테가 교관과도 같은 차가운 얼굴로 류제를 노려보았다.
“왜 내 명령을 무시한 거지? 네 어리석은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가?”
포르테는 수학여행 때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단단히 화난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류제는 수천의 목숨 대신 단 한 명의 목숨을 선택하려고 했으니까. 그건 인류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녀가 류제에게 낮게 경고했다.
“너는 한 생명과 수천의 생명을 저울질한 거다. 그 의미를 알고 있나?”
“저는 렌이 더 중요했어요.”
“그 말을 네 선택으로 소중한 이를 잃은 자들 앞에서 할 수 있을까?”
대의와 책임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는 광경. 그녀는 될 수 있는 한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류제는 자신 때문에 마족이 타고시아 해변에 왔고, 자신 때문에 렌이 위험해졌다는 생각에 포르테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합리화하듯 원망스럽게 외쳤다.
“그럼 당신은, 당신은 그들의 목숨을 위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류제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생판 모르는 수천 명의 사람보다 그는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더 중요했다.
그는 당연 모든 사람이 그와 동감할 것이라 여겼다. 포르테도 강해지기 위해서는 소중한 사람을 보다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포르테가 의미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는 그래야만 한다.”
가장 소중한 자를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자를 버릴 수 있는 마음. 그 잔인한 마음을 영웅인 그녀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강하다는 이유로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을 선택하기를 강요받았다. 그녀의 부대원들은 그녀의 선택에 의해 전사했으며 죽은 그녀들은 대신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살고 싶다는 그들의 본심을 못 본 척하고 인내하고 누르고. 그녀 스스로도 죽음을 각오하고 산다. 그것을 아직 열일곱, 희생의 미래가 정해진 어린 학생에게 말해야 하는 포르테는 씁쓸하게 몸을 돌렸다. 그녀도 류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았다. 알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이번 전투는 비밀에 부쳐라. 보고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친구들에게 괜한 혼란을 주지 마.”
“…….”
“뭐, 그래도…….”
그래도 네 친구가 무사하니 다행이다. 포르테는 그런 가식적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을 달싹거리다 비틀거리며 부대로 향했다.
류제는 그런 포르테의 책임감이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재경을 보면 차마 그럴 수 없었다.
* * *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스쳐 지나갔다 하더라도 흘러가는 시간만큼은 속절없다. 그 무력함을 지금 몇 번째 겪고 있는 것인지 재경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러는 사이 무료한 루틴에 몸담은 태양은 쨍쨍하게 고도를 올려 더위에 이바지했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습한 열기. 숙소는 찜통처럼 달아올랐지만 오늘은 어제가 아니다. 적어도 재경에겐 그랬다.
숙소 앞에 있는 그늘진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멍청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재경의 관자놀이에도 땀이 흘렀다. 주변을 달구는 뜨거운 공기와는 다르게 그의 머릿속은 창백하게 시리다.
라우라 축제 비키에 이은 두 번째 실패. 그것도 다섯 명의 히로인 모두의 호감도 이벤트 실패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재경을 견디기 힘든 좌절의 늪으로 추락시켰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 선택에 대한 적절성을. 꿈속의 류제가 재경의 생각대로 움직여 줬을 가능성은 있지 않은가.
아니. 호감도 이벤트 성공 여부를 모르는 건 해피 엔딩을 노리는 재경에게 실패나 다름없었다.
아세미 대신 그가 인질로 잡혔으니 분명 전처럼 스토리가 흔들렸을 것이다. 꿈속 이벤트도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포르테와 헤어진 후 숙소로 돌아와 류제에게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들은 재경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도 되레 착잡했다.
류제는 말했다. 그와 다른 이들은 ‘수마가 만들어낸 꿈’을 꾸었다고. 하지만 꿈이다 보니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럴 수가.”
재경은 당연히 자신도 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꿈의 세계가 깨진 순간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벤트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있던 거다. 그런데 문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제외당하다니. 거기에 아세미의 역할도 빼앗았다.
도대체 왜? 내가 무언가 이야기를 틀어지게 만들 만한 행동을 했나? 물론 내가 삼류 악역 렌 지미의 역할을 애초부터… 애초부터…….
“자, 더운데 마셔.”
“그, 고마워.”
재경 앞 테이블에 물방울이 어린 플라스틱 컵이 놓였다. 류제가 노점상에서 시원한 에이드를 사온 것이다. 어제 비키가 에이드를 샀던 곳이 아닐까 싶다.
류제는 이 더운 여름에 해변을 돌아다녔어도 여전히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덤덤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았다.
“이제 좀 진정이 됐어?”
“…대충.”
재경은 죄책감에 류제를 쳐다보지 못했다. 막 정신이 들었을 때는 꿈과 현실이 혼동되는 바람에 이성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일부러 단단히 묻어두고 있던 과거의 일까지 폭죽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오고, 지금껏 부정하고 있던 불안감이 한 번에 터뜨려져 견디기 힘들었다.
지금은 진정되어서 단순히 나쁜 꿈을 꾸었다고 치부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서 멋대로 흥분해 못 볼 꼴을 보였다.
재경이 테이블 위 에이드를 집어 쭉 들이켰다. 가슴에 얹힌 답답함이 넘어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류제도 재경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그늘진 얼굴을 보고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수마의 에너지 드레인 때문에 아세미와 루나를 비롯해 타고시아 해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하루의 시작이 늦어졌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이 타고시아 해변에 나도는 사람은 부지런한 에이드 판매원을 제외하면 류제와 재경뿐이고, 아침에 뜬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둘은 아까의 일을 서로 곱씹었다.
“렌, 저―”
그 정적이 얼마큼이나 이어졌을까, 드디어 용기를 낸 류제가 입을 떼려는 찰나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아세미가 계단에서 내려오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
“으하아암. 류제 오라버니, 좋은 아침이야~”
“아세미, 이제 일어난 거야?”
“응, 루나 언니랑 아세미 늦잠 자버렸어. 근데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엄청 신기한 꿈 꾼 거 있지.”
비몽사몽 한 눈으로 비실비실 웃고 있는 아세미가 자랑스레 말했다.
류제도 마족의 농간이었던 꿈은 잠에서 깨어난 이후 기억 속에서 대부분 지워졌지만 꿈속에서 친숙한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중에 아세미도 만난 것 같다.
분명 아세미의 꿈 내용도 황당무계했겠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류제가 아세미의 동심을 위해 모르는 척 물었다.
“무슨 신기한 꿈을 꿨을까.”
“음~ 몰라. 여튼 엄청 신기한 꿈. 사람도 잔뜩 나오고 엄청 재미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
“하하, 그야 꿈이니까.”
“분명 류제 오라버니를 만났을 거야. 아세미는 늘 류제 오라버니 생각만 하는걸.”
에너지 드레인의 영향으로 몸도 무거울 텐데 아세미는 오늘도 열심히 류제에게 엉겼다.
그것을 본 재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의 핵이 되었어야 했던 아세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실패를 드러내는 것 같아 뼈가 아프다.
아세미 대신 내가 핵이 된 데다 마지막 사천왕의 인질까지 되고 류제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왜 수마의 왕은 아세미 말고 나로 마음을 바꾼 거지? 스토리상 그 어린애처럼 생긴 마족은 아세미의 여동생 포지션이 싫었던 거 아니었나?
내가 그 마족에게 뭔가 거슬릴 만한 짓을 했나? 샤브샤브 가게 말고는 마주친 적도 없는데 뭐가 스토리를 바꾼 거지?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류제 신리의 생각 말고도 이 예언의 흐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나 생각이다.”
재경이 문득 사라 하놋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번 비키 이벤트를 실패하고 우울해하던 재경에게 그녀가 해준 조언이다.
“정해진 흐름대로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면 적어도 예언이 실패할 일은 없는 것 아니겠나.”
정해진 흐름대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남의 생각을 조종하다니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 아니었나.
시도조차 못 한 노력을 트집 잡아 스스로를 머릿속에서 타박하느라 속이 복잡했다. 예언자 할머니도 지금 날 보고 있겠지. 분명 날 미워할 거야. 해피 엔딩으로 만든다고 그렇게 잘난 척을 했는데.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면 어쩌지.
“아세미도 목말라.”
“내 에이드라도 마셔.”
“응! 헤헤, 류제 오라버니랑 간접 키스네.”
그야 무려 5개나 되는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란 말이다. 수학여행과 더불어 전대미문의 이벤트가 펼쳐지는 챕터라고. 그런데 나 때문에 그 5개 전부 행방이 묘연하다고 생각해 봐. 당연히 날 탓하겠지.
정신이 까마득해진다. 재경은 허무해서 아세미가 류제에게 아양을 떨든가 말든가 그늘진 테라스에 앉아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아세미 더워~ 류제 오라버니 시원해서 좋아.”
“너무 들러붙지 마, 아세미. 곧 있으면 숙소에서 짐을 빼야 할 시간인데 지금 누나를 깨워야 할까? 아세미가 깨우고 올래?”
“걱정 말렴. 나도 일어났단다.”
아세미가 내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삐걱삐걱 발소리가 들리더니 루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너무 자서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비비며 아이들 몰래 하품을 했다. 뒤에 비치는 거대한 검 그림자가 착각처럼 스쳤다. 눈을 비빈 류제는 잘못 봤다는 걸 깨닫고 꺼림칙해졌다. 렌 상태도 저런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했다.
“미안하구나, 류제야, 렌아.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구나. 너무 오랜만에 술을 마셨나 봐. 겨우 눈을 떴어.”
“아녜요. 휴가잖아요. 푹 쉬었어요?”
“그럼. 벌써 해가 중천에 떴는데 푹 쉬었지. 배고프지 않아? 뭐라도 먹었니?”
고아원 아이들을 돌보던 버릇으로 일어나자마자 사람을 챙기려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류제는 에이드와 함께 사 온 가벼운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루나가 다행이라며 손뼉을 마주쳤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렌은 루나가 내려온 줄도 몰랐다. 잠에서 막 깬 두 사람과 함께 아침 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던 류제는 역시 바다에 빠지는 바람에 몸 어딘가 불편한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렌, 넌 안 먹어?”
“됐어.”
하지만 예리하게 날을 세운 그를 류제는 좀처럼 위로하기 어려웠다. 섣불리 만졌다가는 그를 베어버릴 것 같았다.
타고시아 해변에 별장이 있는 히로인들과 달리 그들은 경품 시간에 맞춰 방을 빼야 했다.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가져온 짐을 정리하고 아가타로 향할 준비를 했다.
“렌 군~ 류제 군~ 아세미 양~! 오늘 돌아간다며. 가기 전에 얼굴 보러 놀러 왔어.”
“시시해. 조금만 더 놀다 가면 좋을 텐데. 왜 급하게 서둘러서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비키, 유네. 온다더니 진짜 왔네.”
어제 왕녀의 만찬회에서 그들이 이 시각쯤 기차역으로 출발한다는 말을 들었던 비키와 유네가 마침 숙소를 방문했다. 어차피 1주일 후에 개학하면 또 만날 거지만 헤어지는 것은 언제나 아쉬웠다.
그녀들도 류제처럼 꿈속 내용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보였다. 재경에게 다가온 비키는 꿈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 없이 테라스 의자에 멋대로 걸터앉아 정신 사납게 부채질했다.
“오늘도 덥네. 언제쯤 시원해지는 걸까.”
“우리 메이드 언니가 그러는데 다음 주에 가을비가 내린다고 했어. 그때부터 기온이 내려간대.”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네.”
숙소 2층에 있는 루나의 짐을 내려주던 류제가 맞장구를 쳤다.
왜인지 가장 시끄럽게 날뛰어야 하는 놈이 조용하다. 이상함을 감지한 비키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멍청하게 앉아있는 재경의 허리를 푹푹 찔렀다.
“뭐 해? 짐 안 챙겨?”
“너희는 왜 왔어?”
“오늘 떠난다기에 인사하러 왔지. 불만이야? 왜 표정이 떨떠름해? 감히 이 셀로니아 가문의 지체 높은 영애가 와줬다는데.”
비키가 어이없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렸다.
재경이 뒤늦게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친 유네가 반갑다며 손 인사를 했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고개를 휙 돌려 외면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생각할 거 있으니까 절로 가서 류제랑 놀아. 싯, 싯.”
“뭐어? 네가아? 천하의 렌 지미가 생각이란 걸 한다고? 더위 먹은 거야? 정신 차려. 이런 낡은 숙소에서 머무니까 그렇지.”
“이 자식이… 시껌마. 나도 진지하게 생각할 때쯤은 있다고. 방해하지 마.”
생각이란 걸 하냐니.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한껏 진지했던 재경이 구시렁거리며 툴툴거렸다.
인사를 무시당한 유네도 기어코 재경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와서 얼굴을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남자 교복이 아닌 하늘하늘한 나시에 짧은 반바지 사복은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이다.
“들어봐, 렌 군. 우리가 정말 재미있게 놀았나 봐. 오늘 아침에 일어나는데 너무 힘들어서 다시 자버린 거 있지. 그래서 약속 시각에 늦을 뻔했는데 세상에나, 비키 양도 늦잠을 잤대.”
“유네! 그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해. 으으, 이 내가 늦잠을 자다니. 분명 들라크루아 님을 상대로 비치발리볼을 해서일 거야. 학교에서 훈련을 얼마나 하는데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근데 렌 너는 비치발리볼 도중에 기절했지 않았어? 힘도 남아돌 텐데 왜 기운이 없어?”
자기는 체력 좋다고 비키가 자랑해도 재경은 힘없이 에이드만 쪽쪽 빨며 퉁명스레 답했다.
“몰라. 여름방학이 끝나가서 그런가 보지.”
“벌써부터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렌 군. 우우. 벌써 여름방학이 끝나다니. 나도 조금 침울해지네.”
유네가 꿍한 얼굴로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유네의 걱정을 서슴없이 찔러버린 재경이 몰래 숨을 들이켰다.
분명 류제가 이벤트를 제대로 완수했다면 유네의 악몽은 해결된 상태일 것이다. 해결되지 못했다면 유네는 여름방학의 끝을 달갑지 않아 한다.
유네가 침울해하는 이유가 혹시 그래서인가 표정이 어두워지던 찰나 유네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전혀 다른 이유를 내뱉었다.
“나 아직 여름방학 숙제 덜 끝냈거든. 여름방학이 안 끝났으면 좋겠다.”
“뭐어? 숙제를 아직도?”
“에헤헤. 세계지도 그리기만 남았는데 귀찮아서… 나중에 메이드 언니들한테 도와달라고 해야겠다.”
삐그덕. 재경의 고개가 고꾸라졌다.
여…여름방학 숙제 때문에 침울한 거라고?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아. 여자란 게 밝혀지면 친구들이 어떤 취급을 할까 걱정하는 그거 있잖아. 그건 어떤데?
“비키 양은 다 끝냈어?”
유네는 중대사인 여름방학 숙제가 가장 걱정이었다.
“나야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다 끝냈지. 누구와는 다르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묻는데 렌, 너는 방학 숙제 다 했어?”
“방학… 숙제?”
보충수업 듣느라고 바빠 죽는 줄 알았는데 방학 숙제고 뭐고 그런 걸 할 정신이 있을 리가 없다. 추가 시험 때문에 이번 달 호감도 이벤트가 벌어지는 것도 깜박하고 있었는데 방학 숙제고 뭐고 했을 리가.
지레 찔린 재경이 비키의 눈을 슬금슬금 외면했다. 쪼르륵, 앞에 있던 에이드만 속이 타게 들어간다. 감을 잡은 비키가 잔소리쟁이 류제처럼 재경의 귀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류우우제! 너 렌 방학 숙제 확인 안 한 거야? 다음 주가 개학인데 어쩔 거야!”
“어? 아차. 깜박했다.”
보충수업을 도와준다고 여름방학 숙제 검사를 완전히 까먹고 있던 류제의 손에서 짐이 쿵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이 세상이 끝난 양 새파랗다.
비키는 못 말린다며 이마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방학 중에 학교에 둘이서만 남아있는 게 불안하더라.
“이거 2학기 수행평가 성적으로 들어가는데 어쩌려고 그래?”
“됐어. 어차피 성적 신경 안 쓰고.”
잔소리를 피해 도망가려던 재경이 다시금 비키에게 귀를 잡혀 열린 귓구멍으로 비키의 떽떽거리는 쇄언을 들어야만 했다.
“너는 성적 하나하나가 아슬아슬하니까 낙제 안 하려면 이런 사소한 것에도 신경 써야 한다고! 우리랑 같이 2학년으로 진급하기 싫은 거야?”
“으악! 시끄러워, 이 잔소리쟁이야! 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야!”
“이게 네 인생에 제일 중요한 일이야!”
비키와 대화를 하니 침울해 보였던 렌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떨어뜨린 짐을 다시 정리한 류제는 안도하다가도 자신이 비키보다 못하는 것 같아 속이 뒤틀렸다.
뭘까. 아까부터 느껴진 이 거리감은. 역시 렌은 이런 내 모습에 질린 건가. 아냐. 내 마족의 힘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은 안 하던데. 뭐가 문제지.
“이리 오너라!”
“어흠.”
끝도 없이 설교하려 드는 비키에게서 벗어나 헤헤 웃고 있는 유네에게 재경이 도망치고, 짐을 나르던 류제가 아세미에게 붙들려 끙끙거리는 등 숙소 테라스가 분주한 가운데 그들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여기까지 귀한 걸음을 한 니냐롯트와 그녀의 친위대장 루이나였다.
비키와 유네가 역까지 바래다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왕녀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바라지도 않았던 그들은 누구보다 빛나는 자태를 발견하고 동작을 일시 정지했다.
이 찬란한 태양 빛 아래에 황금색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칼과 백옥같은 피부. 답을 기다리는 매무새에도 고귀함이 묻어나오는 그녀를 본 류제와 재경을 제외한 이들이 후다닥 짐을 내려두고 마중 나갔다.
“왕녀님!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걸음 하셨습니까?”
“저하께서 친히 너희를 배웅하러 와주셨다. 거기 너! 맨발로 뛰쳐나와 절을 하지 못할까!”
루이나가 왕녀를 보는 척도 안 하는 재경과 머쓱한 표정으로 서있는 류제에게 타박했다.
‘누추해서 미안하다!’라고 류제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래, 어차피 난 다른 사람들처럼 타고시아 해변에 별장도 없다, 뭐.
“공주님이 와주시다니, 아세미 너무 행복해요.”
“후후, 잘 잤느냐. 밤중에 어디 불편하지는 않았고?”
“응. 아세미 재미있는 꿈 꿨어요.”
“나도 그렇단다.”
철없는 아세미는 좋다고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아세미를 안아 든 니냐롯트는 아가타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던 그들을 보고 다소 아쉬웠지만 이내 늘 그렇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벌써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인가. 좀 더 있지 않고. 내 별장을 빌려줄 수도 있는데. 하룻밤 방을 빌려준 미나도 막 떠나 적적하던 차다.”
“이 바보가 여름방학 숙제를 하나도 안 해서 그건 안 됩니다.”
꿍한 재경에게 돌아가 헤드록을 건 비키가 결사반대를 외쳤다. 재경은 귓가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기겁하며 벗어나려고 아우성이었다. 이 바보가 쓸데없이 힘만 좋아서는. 으아악!
“그러한가. 아쉽군. 그럼 학교로 돌아가는 건가?”
“어차피 1주일 후에 볼 텐데 아쉬워할 게 뭐 있어.”
류제가 들고 있던 짐을 적당한 장소에 내려놓았다. 그때 위층에서 마지막 짐을 들고 내려오던 루나가 왕녀를 발견하고 버선발로 뛰어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머나, 왕녀님도 오셨군요. 혹여 제 부탁에 귀를 기울여 주신 건가요.”
“내게도 이런 추억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다. 기념으로 나쁘지 않지.”
“일국의 왕녀님께서 이 천한 수녀의 하찮은 부탁을 귀담아 주시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쁩니다. 타고시아 해변에 오기 정말 잘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
루나가 손을 모아 기도했다. 태양 빛이 괜히 루나 쪽만 강렬하게 비추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부탁?”
비키도 영문을 몰라 보이고,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밀담에 류제가 다가와 얼쩡거렸다. 어제 왕녀와 안면을 튼 루나가 무슨 엄한 부탁을 했을 것인가 류제는 그녀가 선생님과 면담하는 것처럼 불안했다.
“우리들의 우연한 만남을 사진으로 남기면 좋겠다고 부탁했단다.”
왕녀가 그 바람을 정말로 들어줄 줄 몰랐던 루나가 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루나는 15세 이후 발령받은 고아원을 떠나본 적이 없어서 해변에서 가진 만남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다.
더군다나 타지에서 홀로 생활하는 사랑하는 동생의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니. 분명 사진을 고향에 들고 돌아가면 고아원에 있는 모든 이들이 좋아할 터였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에 맞아서 다행이군.”
“아닙니다. 이 루나 에펜시타르는 왕녀님께서 제 부탁을 잊지 않고 행차해 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기쁩니다.”
“하지만 루나 누나, 우리 조금 있다가 출발해야 하는데?”
“곧 기차 시간이 다가오는 건가? 그럼 지체할 것 없지.”
“힘들게 걸음 하셨는데 차도 대접하지 못하고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괜찮을까요?”
“물론.”
니냐롯트의 뒤에는 전속 사진사가 사진기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루나가 신이 나서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어머. 늦기 전에 서둘러서 다 함께 찍자꾸나. 응?”
“어어?!”
구석에서 뚱하게 앉아있는 재경은 물론이고 무엄하게 왕녀와 같은 사진에 찍힐 수 없다는 루이나, 영문을 모르는 다른 친구들을 이끈 루나가 가장 예쁜 배경으로 점찍어둔 숙소 앞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얼떨결에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선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각자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했다.
도저히 사진을 찍을 기분이 아니지만 강제로 끌려 나온 재경은 떨떠름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으나 빨리 오라는 비키의 손에 이끌려 탈팍탈팍 모래밭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막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소에 안 계시나 했더니 여기 계셨군요?”
타고시아 해변에서 높은 등급의 마족이 등장했다는 보고를 들은 세라가 학생들이 걱정되어 순찰차 나온 것이다.
마침 잘 되었다며 유네가 그녀를 포토존으로 불렀다.
“세라 선생님! 선생님도 빨리 오세요!”
“네?”
“사진 찍을 거예요!”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얼결에 끌려 들어간 세라가 어리둥절해서 눈을 끔벅거리다 포즈를 잡는 제 학생들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었다.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찍습니다. 하나, 둘…….”
류제의 옆에는 막 도착한 세라와 보호자인 루나, 그의 앞에는 류제바라기 아세미, 재경의 옆에는 유네와 비키, 왕녀, 루나의 손에 이끌려 온 루이나도 함께 찍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류제와 재경이 사진의 가운데가 되었다.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류제가 재경의 어깨에 손을 올려 밀착했다. 재경이 우왁, 휘청거렸다.
“예쁘게 잘 나왔다.”
“으하하. 렌, 바보 같아. 표정 좀 봐.”
“뭐야?!”
즉석 사진이 각자 한 장씩 배분되었다. 조금씩 포즈가 다른 사진을 나눠 가진 그들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손바닥보다 작은 추억을 보며 서로 흡족해했다.
재경은 류제에게 왜 그런 장난을 쳤냐며 툴툴거렸다. 깜짝 놀라서 표정이 완전 바보같이 나왔다.
“뭐 어때.”
재경이 뚱한 얼굴로 타박했어도 류제는 그저 웃었다. 사진을 찍고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 다행이다.
평소 같았으면 금세 개구쟁이처럼 웃을 렌은 오늘은 새벽의 일 때문인지 좀처럼 기뻐하지 않았다. 류제는 미소 속에 쓸쓸함을 감추었다.
재경은 특히나 이번 일의 진상을 아는 류제를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류제가 느끼는 거리감은 그의 착각이 아니었다.
상태를 확인하러 왔다가 얼결에 사진을 받은 세라가 군복 안쪽 호주머니에 조심스레 사진을 보관했다. 학생들은 마족에게 심각한 피해를 받지 않은 모양이다.
“다 같이 모여서 뭘 하나 했더니 사진을 찍는 거였군요.”
“타이밍 딱 좋았어요, 선생님. 여기까진 무슨 일이세요? 훈련이 끝난 건가요?”
“별일은 아니에요. 혹시 밤중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세라는 무사해 보이는 사람들을 훑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변덕이 심한 마족은 늘 재앙처럼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 인간을 위협하지만 이따금 아무 일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멀리서 같이 순찰을 돌던 백장미 부대 부대원이 그녀를 불렀다. 세라가 슬렉터로 시간을 살폈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학교에서 봅시다. 렌 학생도 류제 학생도, 그리고 보호자분도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다음 학기에 봐요, 선생님!”
다른 곳을 순찰해야 하는 세라는 작별 인사를 한 후 걸음을 옮겼다.
떠나는 세라에게 짧게 인사한 니냐롯트가 마저 사진을 살폈다. 가운데에 찍힌 한 사람의 모습을 본 그녀가 짤막하게 미소 지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니냐롯트가 걸음을 강행한 이유는 일종의 변덕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변덕.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던 꿈과는 달리 현실의 그녀와 렌은 여전히 서먹한 사이다. 화해를 했다는 착각이 드는 것은 이상한 꿈 때문이겠지.
핑곗거리였던 사진도 찍었으니 오늘따라 시무룩해 보이는 그를 향해 니냐롯트가 용기를 내 걸어갔다. 태양을 보며 멍청하게 서있던 재경의 앞에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뭐…뭐야?”
“오늘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군. 어디 아픈 건가?”
“별로.”
갑자기 왜 나한테 친한 척이지? 다가오는 니냐롯트를 잔뜩 경계한 재경이 뒤로 주춤거렸다.
그녀는 사진이라는 핑곗거리를 찾아 그들을 찾아올 만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었다. 꿈속에서 렌 지미를 향해 그리 결론 내린 니냐롯트는 그 마음만이 기억에 어렴풋이 남았고,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아 과감하게 다가간 것이다. 결심을 내린 그녀에게는 주저함이 없었다. 강한 결단력. 행동력. 그것이 그녀가 가진 장점이다.
“그리 경계하지 마라. 나는 그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뿐이다.”
“무…무슨 이야기? 난 별로 너랑―”
니냐롯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 뒤로 물러서는 재경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분명 니냐롯트는 거짓말을 했던 재경을 몰아붙인 전적이 있었다. 또다시 왕녀가 무언가를 눈치챈 것일지도 몰랐다. 얼어붙은 재경은 손을 떨쳐낼 생각도 못 한 채 궁지에 몰린 쥐처럼 숨을 크게 들이켰다.
투박한 손이 섬섬옥수에 이끌렸다. 그의 손등이 니냐롯트의 부드럽고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그때까지 재경은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새파란 바닷가. 하얀 모래밭. 요정이 내려주는 축복처럼 아름다운 전경. 사정을 모른다면 꿈과 같은 지독히도 동화 같은 현장이었다.
“와…왕…왕녀 저하! 천한 놈에게 무슨……!”
“그리 차갑게 말하지 말거라. 그저 장난이지 않았느냐.”
왕녀의 돌발 행동을 목격한 루이나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유네와 나누던 비키도 놀라 입을 막았고, 유네도 어버버 허둥거리기 바빴다.
“류제 오라버니,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아세미는 저게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아세미를 목말 태워주고 있던 류제의 손에서 짐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어?”
“이상해~”
철없는 아세미가 류제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깔깔 웃었다.
재경을 둘러싸고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평소라면 왕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귓불을 새빨갛게 붉히며 툴툴거리고 넘어갔겠지만 재경은 문득 이 광경의 어두운 면이 스산하게 스쳤다.
자신을 둘러싼 그들이 힐난하고 고개를 돌린다. 부담스럽고 알 수 없는 니냐롯트의 내면이 무섭다. 누군가가 친근하게 다가온다는 원초적인 무서움이 떠올랐다.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끔찍하다. 내게 호의를 가질 리 없어. 분명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거다. 짧은 패닉.
그는 니냐롯트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고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손을 뿌리쳤다.
“그… 아니…….”
용기를 낸 니냐롯트의 사과를 재경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재경은 떠오르는 기억을 참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꿈속에서처럼 사과를 받아줄 거라 여기고 감히 용기를 냈던 니냐롯트는 재경이 거부하자 충격을 받았다.
간신히 일어난 루이나가 왕녀가 저 하찮은 렌 지미에게 손등 키스를 했다는 것과 그 과분하고도 영광스러운 행위를 거부한 렌 지미를 보며 어느 쪽을 먼저 탓해야 할지 몰라 뒷목을 잡았다.
“…….”
거절당했다.
니냐롯트는 제 손을 얼이 나간 바보처럼 쳐다보았다. 오만한 생각이겠지만 설마 렌 지미에게 거절당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이게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꿈은 그저 꿈일 뿐인데. 모든 것이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는 믿음은 부질없기 짝이 없다.
충격과 공포의 현장은 기차 시간에 맞춰 적당히 붕괴했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를 피해 재경이 어딘가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니냐롯트는 풀이 죽어 루이나를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그 후 재경이 어딘가에서 나타나자 비키와 유네는 손등 키스 사건을 두고 무슨 일이냐며 쪼아댔지만 재경은 귀찮아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류제도 매한가지였지만 오늘의 렌은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자꾸 물어도 들을 수 있는 정보는 없고, 마지못해 포기하고 기차역까지 그들을 배웅해 준 두 사람은 재경이 풀죽은 이유가 방학 숙제 때문인 줄 알고 류제에게 제대로 숙제를 봐달라 부탁했다.
“잘 가고 다음 주에 봐. 수녀 언니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때까지 잘 지내!”
이제 정말로 타고시아 해변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 에너지 드레인 때문에 몸은 힘들어도 정신만큼은 개운한 그녀들은 먼저 떠나는 친구들에게 활기차게 작별 인사했다.
“이제 교복도 다르고 같은 방도 못 쓰겠지만… 렌 군도 류제 군도 개학해도 나랑 꼭 놀아줘야 해. 아세미 양도 안녕. 나중에 또 보자!”
“응. 나중에 봐.”
아세미도 창문에 붙어서 그녀들에게 인사했다.
“언니들, 안녕! 잘 가!”
덜걱덜걱 기차의 바퀴 소리가 정신없이 흔들거렸다.
깜박했던 8월의 이벤트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는 길. 아무것도 모르는 아세미와 루나는 이번 이틀간이 정말 즐거웠다고 즐겁게 떠들어댔다.
“걱정했는데 네 친구들은 다 좋은 아이들뿐이라 다행이다. 누나는 안심했어.”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랑 놀아서 정말 재미있었어. 공주님도 만났고, 무서운 아줌마도 만났지만 아세미 이런 경험 처음이야. 너무 좋아. 다른 언니 오빠들한테 자랑할 거야.”
“그래. 다행이다.”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말 제대로 듣고 있어?”
“어어. 듣고 있어, 듣고 있어.”
류제는 아까 왕녀가 렌의 손등에 키스를 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재경은 창밖만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그걸 보고 아세미는 또 류제가 재경에게만 관심을 준다고 생각했다. 뿔이 난 아세미가 류제가 멍때리는 틈을 타 볼에 기습 뽀뽀를 했다.
“앗.”
“…히히.”
아세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애정 행각도 마지막이다. 루나와 아세미는 이 길로 고향으로 내려가고 류제와 재경은 중간에 아가타에서 내려 제립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헤어지기 아쉬웠던 아세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류제를 독점하겠다며 엉겨 붙었다.
“범죄자.”
언제 본 건지 류제와 시선이 마주친 재경의 눈이 싸늘하기만 하다. 류제는 그런 거 아니라며 손을 휘저었다.
“진짜 아니라니까!”
“알았어. 농담이야, 농담.”
손을 내젓는 재경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은 딱히 류제의 범죄자가 될지도 모르는 전경을 봐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지금은 심정이 복잡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이야기는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지, 스토리는 꼬였지, 왕녀의 돌발 행동에서 느껴진 묘한 기분이 불쾌하다.
그런 자격이 없다고 말하듯 재경은 왕녀가 붙잡던 손의 감촉을 손바닥으로 세게 문질러 지웠다. 철도를 지나가는 바퀴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인정해. 너는 절대 이 사태를 바로잡지 못해. 너는 이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는 방해꾼일 뿐이니까.
그 속삭임을 이기지 못하고 인정해 버릴 것 같아 재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차 유리창 밖에 비치는 비취색 바닷가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