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10) (28/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10)

칠흑처럼 어두운 바다는 죽음을 품고 있는 듯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태양의 남중고도와 상관없이 깊은 바다는 언제나 시리다.

검푸른 바닷속에 붉은 동공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인어처럼 물결에 일렁거렸다.

지켜주겠다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결심했으면서 나는 또 실수를 범하고 말았어.

의식이 없는 채 바다로 가라앉는 재경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류제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렌의 몸 위로 달빛이 내린다. 닿을 수 없을 듯이 멀다.

자유가 된 그를 드디어 붙잡았다. 이 몸은 아까까지만 해도 마족에게 희롱당하고 있었지. 너는 그 사실을 알까.

붉은 동공으로 보는 재경의 목덜미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눈앞에서 그의 욕망을 대변한 광경을 목격하니 절제가 풀린다.

류제는 달콤한 것을 탐하는 듯 혓바닥으로 나콜렙시가 핥았던 부분을 똑같이 핥았다. 이건 내 거야.

그 순간 재경의 입에서 커다란 공기 방울이 터져 위로 상승했다. 자면서도 버둥거리던 그가 이윽고 숨을 쉬지 않았다.

렌. 안 돼. 욕심부릴 때가 아니다. 이래서는 무슨 소용이야. 결코 그 마족의 말대로 되지 않아. 나는, 난 렌을 평생 지킬 거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해.

재경을 끌어안은 류제가 재경에게 숨을 나눠주었다. 고요하고 먹먹한 물소리. 그저 폐의 공기를 공유해 주는 행위가 애틋하다.

류제의 몸을 뒤덮었던 흉악한 마기가 흩어져 사라졌다. 잡념을 떨쳐낸 류제는 재경을 이끌고 수면 위로 올라가 해변으로 헤엄쳤다.

“렌……!”

해변에 올라왔을 때엔 류제는 완전히 인간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몸에서 물이 절퍽절퍽 흐른다. 주변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재경의 얼굴을 두어 번 때렸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젖어 미동도 없다. 그가 재경의 코에 귀를 대보았다. 이런, 물을 너무 많이 먹었다.

제립학교에선 여름방학을 맞이해 기본적인 심폐 소생술을 알려주었다.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 과거의 그는 알았을까. 류제가 재경의 턱을 들고 인공호흡을 했다. 강제로 숨을 불어넣고 흉부를 꾹꾹 압박한다.

곧 숨이 터진 재경이 폐에 찬 바닷물을 토해내었다.

“컥, 콜록, 커헉……!”

“렌, 정신이 들어? 렌! 내가 누군지 알겠어?”

정신을 차린 건지 재경이 몸을 뒤집고 들이마셨던 바닷물을 온갖 구멍에서 내보냈다. 짠 기가 가시지 않는다. 그림자에 가려진 초췌한 얼굴은 감정을 알 수 없다.

류제는 눈을 뜬 재경을 와락 끌어안으려고 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너무 아팠다.

“저리 가!”

그런 류제를 재경은 매몰차게 밀쳐냈다. 그 시선에 공포와 두려움이 섞였다. 몸을 뒤집은 재경이 계속 물을 토해내었다.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몸은 수마의 질투를 기억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인가 알 수 없었다.

* * *

성이 분해되어 사라진다.

수마의 농간으로 깊게 잠들었던 재경이 류제의 도움으로 빼앗겼던 꿈의 주도권을 되찾았을 때, 마음속 깊게 묻어둔 기억도 깨어나 무방비한 그를 둘러쌌다.

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그의 주변이 거짓말같이 고요하다. 부유하는 그의 정신에 악마가 떠나기 전 남겨놓은 달콤한 악몽이 손을 뻗었다. 재경은 속절없이 끔찍한 추억 속으로 끌어당겨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외면하고 있던 생각. 보기 싫은 장면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날뛰었다. 온몸이 부질없이 조여들면서 정신이 구겨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아. 지긋지긋해. 재경이 발버둥 쳤지만 문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몽롱한 환각은 그의 의지를 조롱했다. 새까만 손이 눈을 가렸다. 그는 언젠가 먼 과거로 추락했다.

단 한 명의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부모님의 상냥함. 텔레비전 위에 놓인 사진으로만 기억되는 그들은 사진 그대로의 낯으로 재경을 젊은 할머니에게 맡겼다. 아기는 불평 없이 낯익은 손에 안겼다.

금방 돌아올게.

기억할 수 없는 목소리는 아마 상냥했을 거다. 꺼끌꺼끌한 입술이 그의 볼에 키스하고, 거친 손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경은 알았다. 그 약속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들의 이타적 행위는 불행만 남긴 채 소름 끼치는 브레이크 소리에 깔아뭉개져서 형체조차 남지 못할 것임을. 재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노크롬 속에서 까르르 웃었다.

어둠 속에 틀어박혀 눈물 훔치던 할머니는 지쳤다. 그녀는 지나친 슬픔을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헛되게 보내버린 사람을 그립지 않다 비정하게 묻었다. 한번 재경에게 말해준 최후는 금기처럼 다신 입에 담지 않았다.

돌아갈 곳을 잃을 재경은 부모님의 사진과 함께 할머니의 낡은 공간에 자리 잡았다. 그는 기억이 선명해질 때부터 오롯이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았다. 할머니와 있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그의 세계의 시작점이다.

빠꿈살이하는 것처럼 작은 집이었어도 처음에는 살림이 부족하지 않았다. 죽은 자식이 장부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숫자 적힌 장부를 농 밑에 숨겨 재경 대신 그의 미래를 키웠다. 하지만 그 풍요로움은 재경이 걸음마를 떼기 전에 다른 이의 몫이 되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오빠처럼 그렇게 죽었으면 좋겠어? 나도 콱 죽어버릴까? 싫지, 엄마. 응? 싫잖아. 그 돈 없으면 나도 죽어. 나도 죽는다고! 내가 안 돌려준다고 했어? 내가 나중에 재경이 크면 몇 배는 불려서 다시 돌려주겠다고 하는데 왜 나를 못 믿어? 나는 자식도 아니야?”

거대한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며 시체를 파헤쳤다. 장기를 빼먹고,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자랑스럽게 운다. 반짝이는 보물을 훔쳐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가는 까마귀의 눈동자에 탐욕이 젖었다.

기약 없는 약속만을 남긴 미래. 이어지는 가난. 그들은 죽어서도 자식의 피와 살이 되지 못했다. 평범한 아이들은 당연히 누리는 행복을 모르는 그는 할머니의 손에서 버겁게 살아갔다. 작은 집. 낡은 가구. 깨진 타일. 곰팡이 냄새. 바랜 햇빛. 손님은 불평 많은 늙은이들뿐.

펄럭거리는 까마귀 날갯짓 소리에 눈물 훔치는 할머니는 그에게 바르게만 자라달라고 품에 안았다. 그럼에도 그는 행복했다.

거실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장소, 눈에 익은 시계 아래 째깍째깍 시계추가 흔들거린다. 엎드린 채 시계 소리에 맞춰 살랑살랑 발을 흔들며 지나간 달력 뒤편에 할머니가 가져온 볼펜으로 낙서를 한다.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일하러 나간 할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긴 나날.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었지만 할머니랑 둘이서 있을 수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노인과 사내아이 둘이서 언제나 옹기종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던 어느 꽃샘추위로 손 시린 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수많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낯선 장소에 냉큼 떠밀렸다.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던 그에게 처음 두려움이 닥쳤다. 더듬고 더듬어 짐작해 보는 악순환의 시작점이다. 이르다고 여길지라도 이때부터 그가 바란 평화는 깨져있었을지도 몰랐다.

혼자서 할머니를 기다리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유치원에서 낯선 어른들의 동정하는 시선은 무서웠다.

작은 병아리들이 모여서 그의 주변을 알짱거렸다. 그는 아무래도 반짝반짝 빛나는 분위기와 어울릴 수 없었다. 혼자서만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정체불명의 것들과 눈씨름을 했다.

그는 남들과 달랐다.

좋지 않은 소문은 입을 타고 빠르게 퍼진다. 소문은 여러 입을 오가며 살을 찌웠다. 홀로 모래성을 쌓는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닭장 속 닭들의 눈이 그를 멋대로 연민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몰랐다. 다름은 약점이라는 것을.

그는 발견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검열당했다. 빨간 페인트가 그의 얼굴에 엑스 자를 그렸다. 감시하듯 언제나 그를 둘러싸는 시선의 울타리가 자유를 막았다.

“엄마가 더러우니까 너랑 놀지 말랬어.”

“불쌍하니까 이거 줄게.”

“야, 그거 쓰레기야, 멍청아. 그것도 모르냐?”

동정과 손잡은 비아냥은 하나의 놀이가 되어 그와 마주했다.

“쟤 아직도 글씨 못 읽는대.”

“진짜? 바보래?”

“나는 벌써 구구단 3단까지 외우는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쟤는 할머니랑만 산대. 그래서 이상한 냄새 나고 그런대.”

“왜 할머니랑만 사는데?”

“몰라.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대.”

“진짜? 불쌍하네.”

삐약삐약삐약.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는 그대로 그를 보았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나쁘다.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 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순진한 만큼 잔인하다. 가난하고 글씨도 못 읽는 바보. 할머니랑만 사는 불쌍한 아이. 같이 놀면 안 되는 애. 혼자 내버려 둬야 하는 애.

그를 향해 서슴없이 수군거리는 말을 알게 된 그때부터 재경에게 자존심이란 것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일부러라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혼자 흙장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겠지.

웃기지 말라고 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멋대로 불쌍하다 그러는 거야? 자기들은 얼마나 잘났다고. 내가 그러고 싶어서 없는 것도 아닌데.

실은 재경은 혼자 있기 싫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재경을 늘 울타리 너머에서 쳐다보았다. 수면에 돌을 던지듯 재경은 장난감을 던졌다. 그럼 아이는 울고 선생님은 재경을 탓한다. 관심이 집중된다.

유치원에 있는 재경은 나쁜 아이였다. 벌서는 것은 재경이. 옳은 것은 그들. 그 반복. 편견은 확고해지고 정착된다. 그 스스로에게마저도.

시간은 흘러 아이들은 다 함께 손을 잡고 같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머리가 커가는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형성된 카스트가 편리했다. 다수가 옳은 세상에서 그들은 여전히 재경을 희롱했다. 반에 나쁜 아이가 있으면 아이들은 하나가 된다. 편리함에 취한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모른 척했다.

재경은 학년이 올라도 사람과 어울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무도 이 잔인한 처사에 개입하지 않았다. 남의 가정사를 이해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가만히 동정당하지 않는 아이는 번거롭다. 가난하고, 거칠고 반항적인 아이를 진심으로 위해주는 타인은 없었다.

“누가 재경이한테 준비물 좀 빌려줄래?”

“준비물은 재경이가 안 샀는데 왜 우리가 나눠줘야 해요?”

“우리 반 재경이는 돈이 없어서 준비물도 못 사는가 보구나. 할머니가 어제 박스를 덜 주웠나 보다.”

교실에서 홀로 벌을 받는 그는 치욕으로 점철된 채 조롱을 받았다. 말썽만 피우는 재경에게 선생님의 주도로 내려진 공개 처형은 학급의 정례 행사였다.

그는 꾸깃꾸깃 천 원짜리를 저금하는 할머니의 손이 생각나 말하지 못했을 뿐이다. 분해서 눈물이 뚝뚝 흐르니 선생님이 선생님과 약속도 안 지킨 주제에 뭐가 잘나서 우냐며 창피를 주었다. 아이들은 반에서 제일 못난 재경이 못난 짓을 하니까 웃겨서 웃었다.

반에서 제일 이상한 신재경. 냄새나는 할머니랑 쓰레기 주우면서 다니는 글씨도 못 읽는 멍청이. 돈 없어서 오천 원짜리 준비물도 못 사는 가난뱅이. 선생님 말씀도 제대로 못 따르는 말썽꾸러기.

그건 아마도 말을 듣지 않는 재경을 향한 선생님의 화풀이였겠지. 재경은 세상에서 학교가 제일 싫었다.

재경이 제일 싫어하는 날은 소풍 가는 날이었다. 짝꿍도 없다. 버스 자리는 선생님 옆.

초등학교 저학년의 엉덩이가 들어가는 작은 돗자리는 퍼즐처럼 겹쳐졌지만 재경의 자리는 없었다. 재경이 가져온 과자와 음료수는 가방째로 던져져서 부서졌다.

할머니가 새벽부터 일어나 싸준 도시락은 그들의 손가락질로 인해 냄새 나는 썩은 음식물 쓰레기가 되었다. 앞장서 반의 골칫거리를 골탕 먹이는 반장은 아이들의 추대를 받으며 재경과 대립했다.

“선생님. 재경이가 친구를 때려요!”

“쟤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재경이가 갑자기 막 때렸어요.”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 거지? 내가 뭘 어쨌다고.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원래부터 섬세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지만 그가 친구에게 직접 주먹을 올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만히 당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는 그를 괴롭히는 아이를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때렸다. 재경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전부 다 미웠다. 뻔히 보고도 모른 척하는 선생님도, 당연하다는 듯 그가 잘못한 거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같은 반 친구들도 다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풍이 끝나고 젊은 부모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재경을 싹수 노란 놈 취급했다. 노을 진 하늘 아래서 할머니가 그들에게 허리가 휘어져라 굽실거렸다.

집으로 돌아와 왜 친구를 때렸냐는 할머니의 호통에 재경은 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말 안 듣는 말썽쟁이에 불과했던 재경은 점점 잘못된 방향으로 향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재경에게 있어서 상냥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생의 첫 계단부터 비뚤어진 재경은 호의와 비아냥거림을 구분하지 못했다. 상처받기 싫어서 생긴 단단한 자기방어. 그렇기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이 밉다. 어차피 날 얕잡아보는 게 재미있는 거겠지. 날 불쌍한 놈으로 보며 우월감에 쩔어서 깔깔 입맛에 맞는 조미료를 뿌려 주전부리로 씹어댈 뿐.

하지만 주먹질은 다르다. 폭력이 주는 우월감을 맛보게 된 재경은 자신을 무시하는 말을 듣는 족족 그 사람을 때렸다. 미안하다고 말할 때까지 팼다. 뒤에서 말려도 때리고, 때리니까 그때서야 잘난 입을 다물었다.

재경은 이제 불쌍한 신재경이 아니게 되었다. 통쾌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싸워서 이기면 잘난 건 그들이 아니라 자신이라고 증명하는 것 같았다. 내가 옳다.

하지만 언제나 틀린 건 재경이었다.

“하필이면 저런 애가 우리 반이라니. 다른 학생들한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끼쳐 봐. 학부모님들 볼 낯이 없어.”

하나같이 사시 눈인 어른들은 이전보다 더 골칫거리를 보는 눈으로 재경을 흘겼다. 재경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재경은 귀찮은 아이였다. 적당히 동정하고 보살펴 주려고 하면 날을 세우질 않나, 불쌍한 아이에게 특별히 마음 써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가 났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은 그들의 관념에 맞지 않는 재경을 똑같이 폭력으로 상자에 구겨 넣었다.

“너, 옷 입은 꼬라지가 그게 뭐냐? 당장 이리로 안 와?! 선생님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중학교에 들어간 재경이 기간이 지나도 교복을 입지 않자 나이 든 학생주임이 사랑의 매라며 뺨을 때렸다. 이후 그의 사정을 알게 되었어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다.

수학여행을 안 간다고 하니 그 정도 돈도 없냐고 오른쪽 뺨을 때리고, 할머니가 열심히 모은 돈 삥땅 쳐서 뭐 한 거냐고 왼쪽 뺨을 때렸다. 죽일 듯이 노려보니 왜 눈을 그렇게 뜨냐며 또 뺨을 때렸다.

신재경은 사건 사고만 몰고 오는 문제아니까 그래도 된다. 부모님 없이 할머니가 가난한 살림 꾸리며 오냐오냐 자라니까 괜찮다. 사람은 맞아야 사람이 되기 마련이다. 막 나가는 자식을 때려줄 사람이 없는 문제아를 사랑의 매로 훈계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라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고 나서 선생들은 불쌍한 신재경에게 동정하듯 돈을 모아 재경의 수학여행비를 마련해 주었다고 모든 사람 앞에서 박수를 쳐주었다.

그들 앞에서 재경은 치부가 드러나고,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재경은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 호의를 무시당한 그들은 재경을 탓하며 손가락질했다.

“언제 철들 거야? 어? 너 키워주시는 할머니가 불쌍하지도 않아?”

“세상에 너만 제일 불행한 것 같지? 너보다 불행한 놈들도 너보다 똑바로 살아, 인마. 세상 탓하면 뭐라도 변하냐? 정신머리가 빠져가지고. 너 그러다 커서 후회한다?”

“하아, 잘해주려고 했더니 여자라고 날 만만하게 보는데 이런 취급 받는 입장도 생각해 보세요. 자존심이 상한다니까. 우리가 자원봉사자도 아니잖아요. 포기하세요. 그게 편해요.”

어딜 가나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은 똑같다. 문제아. 문제아 맞지. 그의 인생에는 문제밖에 없으니까. 멋대로 동정하고, 교화시키다가 마음처럼 안 되니까 비난한다. 학교는 감옥이었다. 어른들은 다 똑같다. 왜 배우는지 모르는 쓸모없는 수업도 듣기 싫다. 질려버린 그는 거리로 나갔다.

자신을 휘어잡으려고만 하는 선생님들은 재미없지만 그가 휘두르는 칼에 겁에 질린 동급생은 통쾌하다. 떨어진 자존감을 살릴 법은 싸움밖에 없었다.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우월감에 빠져든 재경은 더욱더 잘못된 방향으로 끌려들어 갔다.

불행하다는 둥 미래의 일이라는 둥 아무래도 좋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싸움을 하면 생각이 단순해졌다. 져도, 이겨도, 도망을 가도 학교에 가는 것보다는 낫다.

경찰서에 불려가는 날이 늘었다. 이름 모를 경찰관에게 꾸벅꾸벅 허리를 굽히느라 할머니의 등이 굽어갔다. 할머니는 재경에게 욕을 한 사바리 내뱉고 그날 번 구깃구깃한 돈으로 분식집에 데려가 떡볶이를 먹이고는 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그래도 나를 안 버릴 거지?

“할머니만 불쌍하게 됐어.”

“저런 놈 키워봤자 억장만 무너지지.”

사람들이 그는 할머니의 족쇄라고 손가락질했다. 덜그럭덜그럭 심장에서 뽑혀 나온 쇠사슬이 할머니의 굽은 등에 박혔다.

할머니는 그를 끌고 앞길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묵묵히 걸었다. 나는 그냥 할머니랑 둘이서, 어렸을 때처럼 그저 할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인 채로 남아도 되는데.

재경은 자신의 어리광이 할머니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어렸다.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학교도 싫고 공부도 싫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왜 사는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있으면 그런 생각이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졌다.

“재경아, 이놈아, 친구는 사귀어야지.”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등짝을 때렸다. 재경은 그 흔하고 당연한 단어가 아득히 멀었다. 그에게는 할머니만 있으면 되었다.

그러던 재경은 때마침 어쩔 수 없이 체육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달리기 기록이 반에서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부탁을 거절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 말도 신경 쓰이고 별달리 할 것도 없으니 변덕을 부려봤다.

중학교 2학년. 재경은 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공동체 활동을 경험했다. 친구들과 다 함께 무엇인가를 해낸다는 소소한 유대감은 특별한 기억이었다. 이런 행사는 늘 땡땡이만 쳐서 별 볼 일 없을 거라 여겼지만 그건 그의 지레짐작이었다.

주홍빛으로 빛나는 운동장. 더운 여름. 하늘하늘 바람이 따스하다. 그가 처음으로 무언가로 친구들에게 인정받은 날. 재경은 정말 평범한 일상조차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당연한 듯이 서로에 대해 공유하고, 공감하고, 웃었다. 서로의 깊은 곳까지 참견하면서 다정하게 그 부분을 쓰다듬어 준다.

먼발치에 어색하게 선 재경은 자신도 그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함께 그럴 리 없다는 현실에 마주했다.

업보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기회를 조각냈다. 부질없는 꿈이다. 체육대회는 끝났고, 거미줄보다 얇은 관계는 사라졌다.

재경은 여전히 학교 밖으로 나돌았다. 언제나처럼 시비가 걸리면 싸움을 한다. 쥐어 터져서 교실로 돌아오면 전과 같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조그마한 바람은 재경에게 이기적인 욕심만 남겼을 뿐 별다른 변화를 선사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신재경은 선생님들이 혀를 내두르는 구제 불능 문제아다. 아무리 바란다고 할지언정 방법을 모르는 그의 곁에서 그의 모난 성격을 참고 어루만져 주는 사람은 없었다.

3학년이 되었다. 소문에는 살이 붙고 불쾌한 감정은 마주칠 때마다 덩치를 불린다. 사람은 인내의 한계가 있다. 재경을 대하는 선생님들에게도 한계도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날부터 잠잠하게 굴던 재경이 국어 수업을 듣다 책상을 걷어차고 땡땡이를 친 날이다. 재경을 50센티 철자로 때리던 그의 담임 선생님이 책상에 매를 내팽개치고 투덜거렸다.

“이 새끼는 이미 끝났어. 평생 이대로 살라고 해. 졸업하면 내 알 바도 아닌 놈을 데리고 나는 무슨 헛짓거리를…….”

그는 절망한 듯했다. 선생님들은 재경에게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재경은 나름대로 달라지려고 했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된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그를 어떤 이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그를 구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악순환이다. 그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악순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 할머니만 불쌍하지. 부모 대신 기껏 키워놨는데 저런 놈으로 자랐으니 무슨 보람이 있겠어? 남들 보기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품은 열등감을 모른다. 부러운 마음을 속이려고 가시를 세워 열등감을 숨긴다. 인정하기 싫으니까 부정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제 됐어. 그가 구제 불능이 된 건 다 남 탓이라 치부했다. 참았던 폭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차피 나 같은 건 빌어 처먹을 세상과 어울릴 수 없는 놈이다.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난 불쌍하지 않아. 왜 항상 나를 그런 눈으로 봐? 왜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멋대로 판단하고 동정하는 거야?

난 나야! 날 제대로 봐주지도 않으면서 댁들은 왜 항상 내 탓만 하는 건데?

“이 천덕꾸러기 놈아. 남들이 널 이해해 주길 바라면 그놈의 괴팍한 성질머리부터 죽여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고, 니가 그렇게 나오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

문득 앞을 보니 족쇄를 짊어지고 컴컴한 앞을 나아가던 할머니는 사라져있었다. 그는 갑자기 홀로 내팽개쳐졌다. 그가 유일하게 기대던 족쇄는 흔적도 없다.

할머니의 짐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방법을 몰랐을 뿐이야. 이제부터 열심히 하겠다고 내가 말했잖아. 내가 고등학교 들어가겠다고 했잖아. 할머니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나랑 평생 함께 있을 거라고 했으면서.

할머니는 거짓말쟁이. 나한테 뭐라고 말 좀 해봐……!

아슬아슬 살얼음판 같은 세상은 쉽게 깨졌다. 유일하게 그를 지켜주던 가족이 없으니 그가 휘둘렀던 칼은 스스로를 상처 입혔다.

그가 살아가며 증명해 낸 성품, 행동, 생각. 모든 것들이 쓰레기보다 볼품없다. 모두 모여 박수를 쳤다. 이것이 바로 신재경이 태어난 이유다. 불쌍한 신재경이 지금껏 이루어낸 성과다. 참으로 훌륭하다.

그럼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돈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신재경의 미래는 뭐가 남은 거지?

“그래서 쟤는 누가 키울 거야?”

“이럴 때 곤란하게 정말. 정정하시더니 갑자기 돌아가실 건 뭐야. 우리도 가계가 빡빡해서 안 돼. 집에 수험생도 있고.”

“누구는 돈이 남아도는 줄 아나. 참나, 여유롭다고 해도 누가 저런 놈을 데리고 가? 문제만 일으키는 놈이 뭐 좋아서. 우리가 자원봉사자야? 하물며 다달이 양육비가 들어오면 또 몰라. 아니, 작은어머님은 도대체 그 많은 보험금은 어디에다 버려두고 돈 한 푼도 없어?”

“그래서 저대로 내버려 두자고?”

“그래도 요즘 세상에 고등학교는 보내야지 않겠어? 그때까지만이라면 뭐…….”

이 세상에 네가 무슨 필요가 있어?

까악까악 반짝이는 보물을 찾는 까마귀들과 초점 잃은 닭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 모든 시선에 재경은 익사할 것같이 숨이 막혀왔다. 손을 뻗을 수가 없다.

그가 그렇게 미워하던 어른들이 그를 둘러싸 언쟁을 펼쳤다. 누가 할머니를 대신할 것인지 그들의 손가락이 재경을 찔렀다.

앞을 봐도 족쇄는 없다. 재경은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현실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제발 도와줘.

선생님.

엄마.

아빠.

할머니.

아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도와줘. 도와주세요. 제발. 혼자 있고 싶지 않아. 앞으로 제대로 할 테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싸우지도 않고, 할머니가 말했던 대로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면서 평범하게 지낼게요.

할머니, 할머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 돈이 그렇게 중요해?”

까마귀가 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바랐어도 그를 밀쳐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 그 많은 손바닥 중 그 어느 것도 그를 구원해 주지 않았다.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믿지 않은 그가 누구도 그의 세상에 들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세상을 미워하기만 할 줄 아는 아이는 세상에 필요 없다. 진눈깨비가 내렸다. 하늘의 눈물은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그는 최후에 인정했다. 그렇게나 한심한 애였구나 인정하니 마음이 편했다. 이제 와 깨달아도 늦었다. 남는 것은 후회뿐이다.

전부 내 탓이다. 내가 견디기만 했으면 된 건데. 가난한 것도,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것도, 할머니 냄새가 나는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 것도 사실인데 왜 나는 화를 낸 거지. 다름을 납득할 줄 몰랐다. 그랬다면 언젠가 누군가 나를 제대로 봐줬을지도 몰랐을 텐데.

살아생전 남을 미워만 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할머니 말대로 친구나 사귀어둘걸. 그랬다면 나는 지금이랑 많이 달랐을까. 그래서 할머니는 내게 그렇게 말했던 건가.

숨 막히는 후회 속에서 정신을 차리니 불현듯 무지개 빛깔의 새로운 무대가 펼쳐졌다.

화려한 배경, 눈부신 조명. 모든 소품이 그의 욕심을 자극했다. 무대 안의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비추었다. 새로운 삶이 선사한 활기가 생명을 달구었다.

포기하고 있던 재경의 죽은 눈이 살아났다. 신이 났다. 여기서는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를 얽매는 어떠한 것도 없는 자유로운 세상. 오롯이 그를 봐줄 것 같은 꿈과도 같은 세상. 누군가가 그에게 내린 선물. 재경은 무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

그 세상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 차례로 켜진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위에서 비추었다. 무대의 원래 주인공들이 재경을 둘러쌌다. 재경은 그들이 반가웠다. 그들은 재경의 처음 사귄 친구였다.

하지만 인형처럼 무감각한 그들의 눈동자에는 원망이 엿보인다. 밝고 아름다운 무대를 뒤로하고 줄에 매달린 마리오네트가 삐걱삐걱 움직였다. 그들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재경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비키?”

“유네.”

“…미나, 넌…….”

“서…선생님?”

“설마… 왕녀.”

이럴 리가 없다. 왜 다들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우리 서로 지금까지 잘해오지 않았어? 그지? 응?

“친구?”

마지막으로 켜진 스포트라이트는 눈앞의 류제를 비추었다. 긴 앞머리 아래 음영 진 얼굴에 눈빛만이 증오로 이글거렸다.

그의 친구. 처음 사귄 절친한 친구. 친구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이야기의 빛나는 주인공. 그의 롤 모델.

“진짜 렌 지미도 아닌 네가 친구?”

류제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놀라 숨이 턱 막혔다.

그들이 진실을 알아버렸다. 재경이 감춰오던 비밀을 눈치챘다. 재경이 존재하지 않는 가짜 등장인물이며, 그가 대본을 망쳤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비키가 차가운 눈동자로 재경을 힐난했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끔찍해. 멋대로 우리 이야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면서 친구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철면피인 거야?”

유네가 싫증 났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렌 군이니 뭐니 솔직히 역겨워. 진짜도 아니면서 잘난 척이나 하고.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아는 거야?”

악역인 미나가 재경을 그녀보다 더한 악당을 보는 눈빛으로 흘겼다.

“너는 뭐가 잘났는데 날 멋대로 방해하는 거야? 이 세계를 종말로 이끄는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네가 망치고 있는 거야. 이 더러운 위조품.”

세라가 끔찍하다는 얼굴로 그를 매도했다.

“한심해요. 저런 문제아가 내 반이라니.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퇴학을 시켜버렸어야 했는데.”

왕녀는 재경을 내리깔다가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외면했다.

그 모든 시선이 차가웠다. 사실을 알아버린 그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렌 지미가 아닌 신재경은 이 세상의 불청객이다.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비밀이었는데. 절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내…내가 진짜 렌 지미가 아니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내가 진짜 렌 지미였다면 너희들은 나와 친구가 안 되었을 거잖아. 그래서 난… 난… 내 최선을 다했어. 그야 이건 기회잖아! 이런 내가 뭔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니까. 난 그래서―”

그의 구질구질한 변명에 비키가 고개를 돌렸다. 유네가 외면했다. 미나가 뒤를 돌았다. 세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왕녀가 눈을 감았다.

찬란했던 스포트라이트가 차례로 꺼진다.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태도가 차가워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가지 마. 내 이야기를 들어줘. 제발!”

모두 사라졌다. 무대에 남은 것은 류제 혼자였다. 고개를 숙인 류제가 뚜벅뚜벅 재경을 향해 걸어왔다. 재경은 류제만이라도 남았다는 생각에 반가워서 그에게 집착하듯 달려갔다.

잘 설명하면 류제만큼은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거야. 그래야만 해.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란 건 서로를 이해해 주는 거니까. 류제, 넌 날 밀쳐내지 않을 거지? 내 손을 잡아줄 거지? 그렇지?

고개를 든 류제의 눈에는 분노가 끈적거렸다. 원망과 증오가 온전히 재경만을 향했다.

무대는 어느새 엉망진창이 되었다. 밝게 빛나던 조명도, 화려하던 배경도, 예쁜 소품들도 너덜너덜 짓이겨지고 괴기스럽게 바뀌었다. 전부 무대를 헤집어버린 재경의 짓이다.

“정체도 모르는 네가 친구라고? 왜? 우리들의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주제에 친구? 왜 내가 네 친구여야 하는 거지?”

“난… 나는 너희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네 욕심 때문에 우리 세계가 망가지고 있어. 이걸 보고도 그 말이 나와?”

류제가 재경을 밀쳐 넘어뜨렸다. 무섭다. 류제 너만은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날 미워하지 말아 줘.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그냥……!”

변명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류제가 재경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짓누르고 목을 졸랐다. 붉은 동공이 차갑게 그를 내려다본다. 언젠가 그에게서 목격했던 르상티망이 재경의 마음에 박혔다.

“너 같은 거 애초부터 없었어야 했어.”

모든 것을 망쳐놓는 가짜. 이대로 사라져버려. 직접적인 욕구가 손을 통해 가감 없이 전달되었다.

“류…류제. 제발…….”

차가운 손이 숨통을 조였다. 공기가 부족하다. 숨이 막힌다.

류제가 울었다. 울고 싶은 것은 재경이었다. 뻐끔뻐끔 어떻게라도 숨을 쉬려는 입 안에 류제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짜다. 그리고 춥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이런… 이런 건 그만―

손을 더듬어 류제의 팔을 붙잡아도 그의 생명을 앗아가는 단단한 팔에는 힘이 풀리지 않았다. 숨을 쉬고 싶다. 살고 싶다. 분명 나는 쓸모가 있는 사람일 거야. 그래서 이 세상에 온 거야. 그래야만 해. 그래야만 하는데.

그런데 나는 정말 쓸모가 있는 사람이었나?

“컥… 헉.”

나는 평범하게 친구가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나와 친구가 되어준 너희들이 행복했으면 해서 노력한 것인데 왜 나는 모든 걸 엉망으로만 만들까. 나는 그냥,

“재경아, 그래도 친구는 사귀어야지.”

최선을 다해서…….

“넌 재앙 덩어리야.”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 류제의 증오스러운 눈동자만이 똑똑하게 보였다. 재경은 바로 조금 전 머리를 쓰다듬으며 졸린 눈을 떴던 류제를 떠올렸다.

상냥했던 그가 보이는 적의는 그의 본심일까. 그들은 나를 방해꾼이라고 생각할까. 여기서도 나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나는 왜, 어째서 항상.

하나 남은 스포트라이트 속 그를 목 조르는 류제만이 엉망이 된 무대에 남았다. 마치 형벌을 내리는 듯, 거짓말쟁이에게는 당연한 벌이라며.

죽고 싶지 않아.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왜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는 거야. 누가… 누가 나를…….

“왜 그래? 이게 네 선택이었잖아.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끄윽… 컥……!”

“이것 때문에 이야기를 엉망으로 만든 거야?”

머리맡에 서있는 건 누구?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누구?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8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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