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9) (27/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9)

미나의 예상대로 동료를 매몰차게 내팽개친 류제는 홀로 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괴물이 쓰러지고 가까워진 성을 보자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몸을 움직인 그다. 목적지가 분명한 뜀박질이 성급하게 잘박거렸다.

적절할 때 나와준 큰 버전의 렌 덕분에 왕녀의 이야기는 무사히 끝났다. 렌과 왕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좌우지간 왕녀는 괴물을 쓰러뜨렸고 성은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류제는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그들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궁금할지언정 이 세계에 있는 건 시간 낭비다.

“드디어!”

공주를 구하기 일보 직전인 용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아세미가 보던 동화책이 생각난다. 류제가 정면에서 보이는 성을 보며 순수하게 기뻐했다.

성이 마침내 내 눈앞에 있다. 어서 렌이 무사한지 확인해야 해. 성에 있는 렌이 진짜 렌인지도 알아야 하고 렌을 깨워서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렌, 조금만 기다려. 내가 꼭 구해줄게.

성문 앞에 당도한 류제는 까마득하게 높은 첨탑으로 이루어진 으스스한 성이 마족이 부린 마법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굳게 닫힌 성문을 밀쳤다.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니 성문이 막힘없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성문은 기묘한 문양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엇?!”

꿈쩍도 않는 성문은 쇠가 부딪히는 덜컹거리는 소리만 날 뿐 침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문을 모든 방향으로 당기고 밀어보았지만 열쇠로 잠긴 문은 물리적인(꿈의 세계이니 물리적인 힘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힘이 소용이 없었다.

문이 안 열린다면 벽을 타고 올라갈 곳이 있다거나 어디 틈새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지를 눈앞에 둔 류제가 침착하게 주변을 확인했다.

그럴수록 도저히 문이 아니고서는 성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는 것만 확실해졌다. 성 전체를 두르는 매끈한 성벽은 발을 디딜 틈이 없었다.

“왜 안 되는 건데?!”

무슨 고생을 해가며 여기까지 왔는데. 성공을 앞두고 눈앞에서 턱 막혀버리다니 아닌 밤중에 날벼락도 이것보단 덜 짜증날 거다. 조바심 나서 사고가 이성적이지 않은 류제가 성문을 발로 찼다.

쾅.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성문은 멀쩡했다. 뭐가 문제인 거야. 다 해결된 줄 알고 죄다 내버려 두고 뛰어왔더니 이런 문턱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냐고.

하기야 마족의 마법이니 쉽게 풀리는 것도 이상하겠지. 류제가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우리를 이 세계에 붙들고 있는 마족의 목적도 이상하다. 다른 마족들처럼 인간을 사냥해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이런 짓을 해서 뭐가 이득이라는 거야? 장난치는 건가? 그때 봤던 사냥 놀이 같은 거? 인간을 우습게 보는 것도 유분수지.

“류우우제~! 어디에 있어? 류제!”

“미나?”

맞아, 미나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 허탈하고 답답해서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류제가 한 줄기 빛이 내리는 구원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끌시끌 번잡한 소리도 쓸데없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정상인 콤비를 이루던 미나가 정신이 나간 다른 사람들과 가짜 렌들을 우르르 인솔하고 있었다. 그가 성문 앞에서 시간을 버리는 동안 미나가 다른 이들까지 성으로 안내한 모양이다.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8명의 렌과 5명의 히로인들 군단에 류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기회에 혹을 떼려고 했는데 미나가 대신 주렁주렁 매달고 왔네.

“그것들은 왜 달고 온 거야? 기껏 떨쳤더니.”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미나도 이것들을 끌고 오고 싶은 마음 개미 눈곱만큼도 없었다. 착하고 소심한 책벌레 인간을 연기한다는 게 얼마나 제약 사항이 많은 건지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겠지.

이제 다 끝날 일이니 미나도 포기 상태다.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다음부터는 개별 공략으로 가야겠다. 다시는 이딴 짓 안 해.

“그것들이라니 류제 너 말 다 했어? 내가 분명 성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지?”

몇 번을 떨구래도 진드기처럼 따라온 비키가 성을 냈다. 비키야 끈질긴 성향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왕녀까지 데리고 오는 건 뭐야? 불행 중 다행인 건 개미 떼처럼 드글드글한 꼬마 렌들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다는 건데.

“너는 왜 온 거야?”

류제가 왕녀를 위아래로 흘겼다. 친위대장 루이나가 봤더라면 노발대발 열을 낼 정도로 의도가 좋지 못한 시선이다. 니냐롯트는 나쁠 게 뭐 있냐며 답했다.

“그대가 성에 가는 이유를 모른다고 다른 이들이 말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커다란 적도 쓰러뜨렸겠다 새로운 일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꼬마 렌들은?”

“작은 병사들은 간식 시간이라 간식을 먹고 있다. 그들은 간식을 먹을 때는 아무것도 못 하거든. 그 틈을 타 잠시 나왔지. 후후후.”

꼬마 렌들이 뿅망치를 내려놓고 암냠암냠 초코머핀을 우물거리고 있을 모습을 떠올린 냐니롯트가 뿌듯하게 웃었다.

꼬마 렌들은 내버려 뒀지만 큰 렌의 손아귀에서는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이군. 류제가 그녀의 뒤에서 류제를 노려보고 있는 왕녀의 렌과 눈이 마주쳤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또 렌이 늘었잖아.

“하아, 내 용무에 무슨 궁금증이 일어서 하나같이 우르르 쫓아오는 거야.”

“그대가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어차피 성에서 자고 있을 진짜 렌을 깨우면 꿈이 깨진다고 했지. 아무래도 좋다. 머리가 많으면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더 빨리 나올 거야. 정상인 내가 참는다.

“류제 군은 진작 성으로 들어갔을 줄 알았는데 우릴 기다려준 거야?”

동료를 내버리고 갈 만큼 마음이 급해 보였던 류제가 아직도 밖에서 알짱거릴 줄은 몰랐다. 유네의 물음에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여기까지 온 건 좋은데 성 안쪽으로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 문도 안 열리고.”

“문이 잠긴 건가요?”

“네,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하아…….”

세라는 실망한 류제에게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라 다독여 주었지만 그녀 역시 제정신이 아닌지라 그 위로는 류제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구멍이 없을까 성 주변을 살피던 렌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류제가 시도했던 것들을 똑같이 따라 했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도 보고, 성문을 강제로 열어봤지만 되는 것은 없었다.

“정말이야. 전부 막혔어.”

“뭐야, 그럼 성에 못 가는 거야?”

“어쩌지?”

비키도 김이 새버렸다. 실망한 류제에게 마지막 보루가 있었다. 미나다. 분명 박학다식한 미나는 알고 있겠지. 그가 다소곳하게 성을 올려다보고 있는 미나를 붙들었다.

“미나, 너는 알지? 무슨 방법 없을까?”

“글쎄. 나도 기억이 잘……. 도움이 안 되어서 미안해. 조금만 생각하면 될 거 같은데.”

믿고 있던 미나조차 모른다니. 류제가 얼굴을 싸맸다.

미나는 류제의 허리춤에 달린 U 자 모양 열쇠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거렸다. 쉽게 알려주지는 않을 거다.

류제를 그녀에게 의존하게 하고 그 기억을 무의식으로 남기는 것은 마왕을 부활시켜야 할 미나에게 필요한 의식이다. 빌어먹을 렌들이 마왕님의 성을 들쑤시는 게 싫지만 정상인인 나를 부각하려면 어쩔 수 없다.

“저기 류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이건 뭐야?”

미나가 후후후 웃으며 악역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눈치 없는 여장 렌이 류제의 허리춤에 있는 말발굽 모양의 철을 가리켰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그가 제정신을 차리기 전 열쇠를 구하니 뭐니 하다가 가지게 된 이상한 모양의 U 자 열쇠였다.

눈뜨고 역할을 빼앗기자 미나의 웃고 있던 입에서 피가 찍 흘러나왔다. 저 바보 같은 여장 렌. 감히 내가 할 일을 낚아채다니! 류제가 조금만 더 고민하는 것을 보고 절망하려는 순간에 손을 내밀어 주려고 했는데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저 성문 자물쇠에 달린 돼지코 모양하고 비슷하지 않아?”

“어, 그러네? 완전히 잊고 있었어.”

밑져야 본전이다. 류제가 당장 성문으로 달려갔다.

류제가 더 곰곰이 생각한 후에 열쇠의 존재를 알려주려고 했던 미나는 자신이 할 일을 낚아챈 여장 렌을 피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녀의 표독스러운 시선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여장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여우 같은 년……. 얄미워도 저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미나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미나를 골탕 먹인 여장 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휘파람을 불며 다른 렌들에게 합류했다.

주먹을 떨던 미나는 간신히 본성을 참아냈다. 어차피 저 렌들은 꿈의 주민. 꿈에서 깨면 부질없이 사라져버릴 존재들이다.

여장 렌의 말을 듣고 힌트를 얻은 류제가 허리춤에 있던 말발굽 모양 열쇠로 자물쇠를 해제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열쇠를 얻을 때 성으로 가는 열쇠를 달라고 했었지. 정말 이게 성의 열쇠였다니 의외다. 그 도마뱀 대장장이 완전 사기꾼처럼 보였는데.

“열렸다.”

거짓말처럼 자물쇠가 풀렸다. 끼익, 낡은 쇠창살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음산하고 오싹한 성의 안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법의 최종 보안이 풀리고 길고 길었던 이야기의 끝이 도래했다.

드디어 성이다. 류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와아아~”

“성이다아!”

신이 난 렌들이 류제가 들어가기도 전에 우르르 앞질렀다.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성에 잘도 겁도 없이 들어간다.

렌들이 있으면 분위기를 잡으래도 확 깨지지. 주춤거렸던 류제가 과감하게 성으로 발을 디뎠다.

낡은 회색 벽돌에 쌓여 빛이 드문 성안은 낯선 장소였다. 터벅터벅 걷는 소리만 고요하게 들려왔다.

렌은 성의 어디에 있을까. 자고 있을 거라고 했으니 불러도 대답하지 못하겠지. 빨리 만나고 싶다.

“저기요? 누구 있어요? 들리면 대답해 봐요!”

“아무것도 없어.”

“으으… 무서워. 생각한 거랑 너무 달라. 성이라고 해서 좀 더 화려하고 반짝반짝한 걸 상상했는데.”

“얼마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던 걸까.”

“발밑을 조심하세요. 어둡습니다.”

신이 난 렌 지미들을 먼저 보낸 그녀들이 뒤따라 성에 들어갔다. 성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겁이 없는 류제도 음습한 내부에 움츠러들었다. 안은 으스스하고 인기척 하나 없었다.

한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것인지 먼지 냄새에 곰팡이 냄새가 역했다. 찬란함을 장식하던 성이 지금은 텅 비었다고 생각하니 더 꺼림칙했다.

“류제… 정말 여기에 뭔가 있기는 한 거야?”

“분명히 있어.”

이 성에서 렌의 존재가 느껴졌다. 류제가 모든 방문을 열어 확인했다. 히로인들도 류제가 찾고 있다는 무엇인가를 함께 수색했다.

이 음산한 곳을 잘도 쏘다닌 렌 지미들은 벌써 성의 지리를 익힌 듯했다.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구석진 곳까지 뒤지는 렌 지미들의 웃는 소리로 성안이 분주했다.

혼자서만 찾았으면 이 넓은 성에서 한참을 헤맸겠지. 저들을 데리고 온 게 시간 낭비만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류제가 유쾌하게 성을 누비는 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님의 기억은 아직 끌어낼 수 없는 건가…….”

성안을 둘러보아도 류제가 아무런 기억도 되찾지 못하자 미나는 실망을 감추었다.

이 성의 모티브는 바로 나라카에 있는 마왕성이다. 류제가 이 성에 있자니 언제나 왕좌에 앉아 무료한 눈으로 턱을 괴고 있던 마왕님이 아른거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마왕은 도망가는 로라 하놋의 손에 몸이 바스러지고 있었으니 그때의 기억과 오버랩되어 애간장도 배가 되었다.

한시라도 빨리 류제 신리가 마왕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마왕님을 볼 때면 가슴이 아팠다.

“으아아악!”

멀리서 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유령이 나올 것처럼 으스스한 곳이다. 설마 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왕녀가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올렸다.

“적인가?”

“그런 기척은 없었습니다만.”

“안 돼. 렌 군들이 위험해!”

유네가 달렸다. 비명 소리가 들린 방에 모인 그들이 주변을 확인했다. 그곳은 거대한 침대가 놓인 고풍스러운 왕족의 침실이었다. 모든 렌들이 그 장소에 모여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걸려있는 태피스트리는 물론이거니와 어두컴컴한 붉고 검은빛의 천들이 음산해서 마치 마족이 자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왜 그러시죠?”

방 안은 적은커녕 렌들뿐이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그들은 처음 보는 방 안에 조심스레 진입했다. 버려진 성에 이런 침실이 남았다니.

“렌 군, 괜찮아?”

왕녀의 렌이야 니냐롯트의 곁에 찰떡같이 붙어있으니 제외하더라도 어째 렌들의 숫자가 부족하다. 유네가 하나둘 수를 세어보다가 꾸물꾸물 고양이 잠옷을 입은 렌과 춘추복을 입은 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어… 어어? 다른 렌 군은? 내 렌 군이 두 명이나 부족한걸?”

유네의 렌들은 서로 뭉쳐 다니는 편이었다. 그런 그들 중 두 렌이 보이지 않다니, 유네는 비명을 지를 만큼 무서운 일을 당한 게 그 두 렌임을 짐작했다. 그 사실이 맞다는 듯 왕자님 렌이 유네에게 뛰어왔다.

“유네 양. 큰일이야! 사라졌어. 사라져버렸어!”

“그냥 깨우려고 했을 뿐인데 만지니까 연기가 되어서 없어졌어.”

“누…누가 사라졌다고? 설마 렌 군이?”

“이렇게 위험한 애인 줄 몰랐어. 도대체 뭐야!”

가짜 렌이 사라졌다. 이 말에서 무엇인가 짐작한 류제가 렌들을 물리치고 침대를 살폈다. 그곳에는 죽은 듯 잠이 든 렌이 있었다.

진짜 렌이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짜 렌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득 새하얗게 질린 렌의 얼굴이 담겼다.

진짜 렌이 이 성에 있다는 건 수마족이 있다는 미나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꼴이다. 장난질에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을 만큼 위험했다.

“렌. 렌! 일어나!”

류제가 렌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 아무도 없는 성에서 홀로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걸까. 반갑고 기쁘고 슬퍼서 류제가 무심코 재경을 꽉 껴안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히로인들은 렌이 둘이나 사라져버려 당황스러웠다. 거기에 버려진 성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렌이라니. 이건 누구의 렌일까.

“설마 여기 있는 렌은 그럼…….”

이전에 아세미가 만들어낸 가짜 류제를 진짜 류제가 만지자 사라졌다. 그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 렌들이 정말 가짜 렌이었다는 건가?

“렌. 렌!”

류제가 꿈속에서 꿈을 꾸는 재경을 깨웠다. 진짜 렌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들은 자신들의 렌이 사라질세라 옷깃을 붙잡았다.

가짜 렌에 대해 들은 바 없는 왕녀의 렌은 무슨 일인고 기웃거리다가 컴컴한 침대에 렌이 또 있자 겁도 없이 손을 뻗었다.

“뭐야, 몇 명이나 있는 거야? 그리고 얘는 왜 자고 있어?”

“렌 지미여, 잠깐―”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니냐롯트가 그녀의 렌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때는 늦었다.

왕녀의 렌이 진짜의 어깨를 만지자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자신을 지켜주었던 존재가 소멸하자 니냐롯트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게 일그러졌다.

“왕녀님의 렌도 사라져버렸어.”

“류제! 성에 있다는 게 진짜 렌을 말한 거였어? 너 알고 있었던 거야?”

배신하는 것도 가지가지지. 비키는 믿을 수 없었다.

“진작 이야기해 줬으면 미리 조심하라고 했을 거 아니야!”

“조심하긴 뭘 조심해! 이제 곧 이런 부질없는 세계 따위 끝날 거라고!”

“끝나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왜 그러는 거야?”

“렌! 정신이 들어?”

비키의 질문에 듣는 척도 하지 않은 류제가 렌을 흔들었다.

잘 자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시끄럽기 짝이 없다.

비키는 비키대로 사실을 숨긴 류제에게 잔소리 중이고, 유네는 렌들이 사라져버렸다고 징징거리고, 세라 선생님은 그녀의 렌이 진짜 렌을 만지지 못하도록 하면서 진짜 렌이 깨어나지 않자 상태를 걱정했다.

렌이 소실되어 버린 왕녀는 허탈해져서는 다시 렌이 나타나지 않으려나 이것저것 해보고 있지만 되는 건 없었다. 열이 넘는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총체적 난국이다.

“으… 시끄러워……!”

결국 참지 못한 재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꺼풀을 들썩거렸다. 류제가 환희를 표했다.

렌.

재경이 눈꺼풀을 천천히 뜨는 순간 그를 중심으로 기묘한 파형이 빠져나왔다. 파형은 성을 지나 모든 꿈의 세계에 퍼졌다. 서큐버스가 기워놓았던 꿈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꿈을 빼앗겼던 재경이 꿈속에서 눈을 뜨면 마법의 핵으로 쓰인 꿈이 다시 그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연결된 꿈이 깨졌다.

재경이 가진 방어기제는 최상위 정신계 마법을 구현하는 서큐버스의 왕마저 견디기 벅찼기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꿈을 되찾은 재경에게 정중히 거부당했다.

“기분이 이상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류제.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거 괜찮은 거 맞아?”

몽롱해지는 정신에 그녀들이 손을 허우적거렸다. 서로가 멀어져간다.

꿈이 깨어지는 것을 느낀 비키의 렌이 작별 인사라도 하듯 비키의 손을 잡았다. 남은 유네의 렌들도, 세라의 렌도 각자 자신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웃으며 헤어짐을 고했다.

“안녕. 만나서 재미있었어.”

“힘들면 언제든지 우리를 찾아.”

“알았죠, 세라 쌤?”

숨이 헐떡여질 만큼 강한 거부에 정신이 멀어져 간다. 비키는 손을 놓기 싫어서 끈질기게 붙잡았지만 비키의 렌이 먼저 손을 놓았다.

그들이 현실 세계로 밀려나 버렸기에 꿈의 세계 주민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비키의 렌도, 유네의 렌도, 세라의 렌도 조용히 사라졌다.

드디어 만났는데. 류제는 렌과 함께 있고 싶어 꿈에 남으려고 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싶어. 곧 깨어날 거잖아. 위험한 곳에 있는 거 아니지? 무사한 거 맞지?

조금이라도 이 행복을 만끽하자며 류제는 끌어안은 재경을 놓지 못했다.

“렌……!”

그걸 홀로 지켜보는 자가 있었다. 그것은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도 아니고, 류제의 세계에 실존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와 여정을 함께한 사람 중 단 한 조각이 제외되어 그곳에 남았다.

“너도 가야지.”

정신을 차리려는 렌을 끈질기게 붙잡던 류제를 그자가 밀쳤다.

드디어 둘만 있게 되었는데 힘없이 떨어져 렌과 한순간에 멀어져 간다. 어째서. 류제가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가 웃으며 가면을 벗었다. 거만하게 씨익 웃는 모습은 언젠가 어느 순간에 본 듯한 그리운 장면.

“오랜만에 소풍 온 것 같아서 즐거웠어. 이제 깨어날 시간인가.”

“너는―”

“걱정 마. 어차피 너희들은 꿈속에서 겪은 일들은 전부 잊어버릴 테니까. 꿈이란 그런 거잖아?”

그,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의 말이 시야와 함께 페이드아웃 된다. 렌을 닮은 양 갈래 머리의 그녀. 누구였더라? 분명 어디선가에서 본 적이 있다.

“현실에나 제대로 종사하도록 해, 귀여운 꼬마 마왕님.”

마법이 깨졌다. 한여름 밤의 꿈보다 허무한 꿈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의식은 수면 위로 상승하고 눈이 떠진다. 사라졌던 육체의 감각이 돌아왔다.

* * *

잠들었던 긴 호흡이 순간 가쁘게 들이켜졌다. 검은 머리칼에 어질러진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독하게 길었던 꿈에서 깨어난 류제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듯 어두운 숙소 안을 두리번거렸다. 열린 창문 바깥에서 흘러오는 바닷가 내음. 은은하게 속삭이는 파도 소리. 여기는 타고시아 해변이다.

“하.”

허탈해진 류제가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이상한 꿈을 꾼 거지. ‘마족의 마법’이네 ‘렌들’이네 열 살짜리 아세미도 혀를 찰 말도 안 되는 것만 생각하고.

마지막에 기어코 렌을 찾았나 싶더니 갑자기 시야가 하얗게 되어서… 뭐였더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본 것 같은데. 이제는 잊어버렸다.

이 나이 먹고 현실과 꿈을 헷갈리다니 부끄러웠지만 류제는 무서운 꿈을 꾼 어린아이가 벽장문을 열어 귀신을 확인하듯 거꾸로 매달려 렌이 자고 있을 1층 침대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확인해서 나쁠 건 없잖아.

“……렌?”

어두컴컴한 새벽. 아직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아닌데 렌의 침대가 비었다. 꿈의 정체가 생각난 류제는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러다가도 류제는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았다. 속단하긴 일러. 화장실에 간 것일 수도 있잖아. 호들갑을 떨다가 꿈이랑 혼동했다는 걸 알면 렌이 날 엄청 놀릴걸. 진정하자.

옆 침대를 보니 아세미와 루나는 어제 하루 종일 노느라 지쳤는지 쿨쿨 잠들어 있었다. 기다리던 류제는 렌이 보고 싶어졌다. 자다 깼을 뿐인데 오랫동안 렌을 못 본 것 같은 기분이다.

그가 2층 침대에서 사뿐하게 내려왔다. 실컷 잔 것 같은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건 왜일까.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1층 침대를 보자니 렌의 이불은 한 번도 뒤척여진 적이 없다는 것처럼 말끔하게 펴져있었다.

이상하다. 나간 게 아닌가? 애초부터 침대에 없던 거야? 분명 내가 잠들기 전에는 렌이 여기에 앉아서… 잠이 들었나?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함이 몸을 채웠다. 머뭇거리던 류제는 고민할 것 없다는 듯 방을 뛰쳐나갔다.

“렌! 어디 있어?”

허무맹랑한 꿈은 기억에서 지워져 가는데 렌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확신만 든다. 어빌리티를 발현한 류제가 숙소를 빠르게 뒤졌지만 실종된 렌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 목소리, 냄새 그 어느 것도 흐릿했다. 차라리 숙소로 돌아온 렌이 허둥거리는 그에게 무슨 착각을 했냐며 비웃는 게 나을 지경이다.

낡은 숙소를 전부 뒤져 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바깥으로 나갔다. 신발을 신을 정신도 없이 맨발로 뛰쳐나간 류제는 렌의 이름을 연신 불렀다. 더위를 타지 않는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혀 떨어졌다.

마법이 깨진 것을 느낀 나콜렙시가 눈을 떴다. 그녀는 졸린 듯이 눈을 끔벅거리다가 스읍 침을 닦았다. 플로냐도 참.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리 깨졌잖아. 난 조금 더 자고 싶은데.

그녀가 깔고 자던 인간은 마법이 깨졌어도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흉부만 들썩거렸다. 하기야 핵의 역할은 부담이 크지.

플로냐는 악취미야. 나는 이런 귀찮은 짓 절대 안 해. 나콜렙시는 으하아암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다시 누우면 곧 자버릴 것처럼 눈이 비몽사몽 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몸을 움직여야 한다. 각성하지 않은 마왕의 부활체는 만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벤치에 누워 자고 있는 재경을 쳐다보던 그녀가 그를 붙잡고 가볍게 날아올랐다.

인간 세계에 잠입해 마왕을 부활시키는 담당인 플로냐가 한 부탁이니 귀찮아도 들어줘야겠지. 싫다고 하면 율폰이 시끄럽게 잔소리를 할 거다. 율폰의 잔소리는 귀찮아. 꼬맹이 주제에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니까.

“어디 있어?! 렌, 대답해!”

류제가 모래밭을 뛰며 목이 터져라 재경을 찾았다. 나콜렙시의 귀가 쫑긋거렸다. 빠르네. 마법이 깨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보통의 인간들이면 잔뜩 에너지 드레인 당한 탓에 꼼짝 못 하는 상태로 눈을 떴다가 다시 자버릴 것이다.

뭐, 마왕의 부활체이니 보통의 인간은 아닌가. 아니면 내가 데리고 있는 상대가 상대라서? 죽기 전에는 왕좌에 앉아 무료하게 기대어 있던 마왕이 필사적인 모습을 보이다니, 짜증이 일었다.

플로냐도 이 핵을 특별 취급했지. 이 인간이 그만큼 소중하나? 우리들보다도? 우리와 했던 약속은 전부 잊었지? 지금 마왕님은 증오스러운 인간의 껍질에 싸여있으니까 전부 잊어버리고 혼자서만 행복한 거지? 그렇지?

“언제나 함께 있자. 나는 항상 곁에 있어줄게, 오빠…….”

“시에스타.”

까마득한 과거. 사랑했던 자들이 전부 죽었던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 희미해져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데 마왕의 부활체를 보니 아련하게 그녀를 부르던 그가 떠올랐다.

그들의 왕, 그들의 의지,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 인간에게 버림받고 기댈 곳 없이 헤매는 그녀들을 보듬어준 유일한 자.

마왕이 소실된 100년의 세월은 천 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찰나에 불과했지만 마왕이 없는 나라카의 성에 틀어박혀 그가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던 나콜렙시는 마왕이 아닌 마왕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이 되어 인간들과 어울리며 하하호호 평화롭게 노닐다니.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인간을 사랑하는 마왕은 마왕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제 플로냐의 부탁을 받고 마왕의 부활체와 마주쳤을 때, 그녀는 마왕의 부활체의 곁을 알짱거리며 동생 역을 자처하는 조그마한 인간이 싫었다.

마왕님의 하나뿐인 동생은 그녀의 역할이다. 감히 인간 주제에 마왕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옆자리까지 차근차근 빼앗을 셈이다.

그녀는 심술을 부려 아세미라는 인간 꼬마를 꿈의 핵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플로냐가 반대하며 이 인간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하찮은 인간을 인질로 잡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플로냐가 괜히 이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이 가축은 마왕님이 싫은 행동만 하게 만들었다.

그딴 꼬마는 아무래도 좋을 만큼 이 인간을 바라보는 마왕님의 눈이 비할 바 없이 따스하니 이자를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저걸 보라고. 인간을 향한 집착. 나콜렙시가 졸린 눈으로 아래를 흘겼다. 그녀의 발치에 친구의 기척을 뒤져 기어코 그녀를 찾아낸 류제가 나콜렙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크게 하품을 했다.

“늦었어.”

“역시 그 꿈은 네 짓이었나. 렌을 돌려줘, 마족.”

지는 달밤.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흉내 내며 부서지는 파도. 그 위에 부유하며 잠든 재경을 가볍게 들고 있는 나콜렙시의 외관은 아세미보다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껍질 안에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은 잔혹했다.

정말로 타고시아 해변에 존재할 줄이야. 류제는 그 어이없는 꿈이 저 마족의 짓이었다니 아직도 거짓말 같았다.

“덜 깬 거야? 멍청한 얼굴이네. 언제 정신을 차리려나.”

“렌을 돌려주라고 말했어.”

“싫어.”

나콜렙시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역시나 마왕의 영혼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래서 각성하지 않은 마왕님 따위 보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기억도, 우리들에 대한 기억도 없이 인간들의 편에 서서 증오의 눈으로 우리를 보잖아. 당신이 증오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데.

나콜렙시는 귀찮았지만 이딴 인간이 뭐라고 자신을 그리 응시하는 그가 짜증 나겠다, 플로냐가 바라던 대로 심술이나 부리기로 했다.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그녀는 품에 들려 축 처진 인간의 머리칼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쥐어 잡고 강제로 얼굴을 들었다.

“기다리다 심심해서 그만 가버리려던 참이었어. 기다려준 만큼 나랑 재미있게 놀아줄 거지?”

“렌을 돌려줘. 나는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렌만 돌려주면 이상한 마법으로 인간을 공격한 널 붙잡지 않겠어.”

“썩어도 준치라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방진 시선이네. 내가 왜?”

그녀가 친절하게 거절 의사를 표했다. 류제가 인간을 구하기 위해 어빌리티를 사용할 기미가 보이자 그녀는 날카롭게 뽑은 손톱으로 재경의 목을 붙잡았다.

더 이상 다가오면 이 인간의 목을 찢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 그 광경에 머리에 피가 몰린 류제가 이를 악물었다.

빛이 나던 류제의 슬렉터가 까맣게 점멸했다. 대신 나콜렙시의 푸른 머리칼이 노랗게 빛났다. 달의 역광은 그녀를 악마가 아닌 성녀로 둔갑시켰다.

“너희들이 쿨쿨 자는 동안 생각해 봤는데 난 이 애가 마음에 들었어. 그래서 내 걸로 만들어버릴까 고민 중이야. 하지만 구울이 된 인간은 맛이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그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재경의 목덜미에 가져다 대었다. 류제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의도에 이끌린 류제는 동요했다.

마족에게 물리면 인간은 의지를 잃고 마족이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버린다. 깊게 믿었던 가족이 마족의 손에 떨어져 마을을 망가뜨린다는 내용의 동화는 어릴 적에 질리도록 읽었다. 그래서 고아원을 찾은 아이들이 몇인데.

절대,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감히 내 눈앞에서 렌을 마족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둘쏘냐. 렌은 내가 지킬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내가 내 손으로 지킬 거라고 결심했어.

“경고했어. 절대 렌에게 손대지 마.”

류제의 눈빛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옛 마왕의 첫 종자가 된 이래로 그녀에게 향한 적 없던 마왕의 적대감. 인간인 그에게는 당연하겠지. 나콜렙시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얼굴이 비슷해서 조금이나마 반가웠던 기분이 든 게 바보 같다. 이자는 역시 아직 마왕이 아니다. 독한 살기에도 나콜렙시는 여전히 졸린 눈이다. 다만 붉은 동공에서 오싹한 광기가 생겼다.

“마족이 인간을 사냥하는 건 당연하잖아. 이건 내 사냥감이고 나는 이걸 내 거로 만들 거야. 네까짓 게 뭐라고 내게 참견하지? 네가 우리들의 뭐라고?”

“그 애는 내 소중한 친구야. 너 따위에게 상처받게 내버려 둘 것 같아?”

“그렇게 소중한 친구는 지금 내 손에 있는걸.”

나콜렙시가 가증스럽게 웃으며 재경의 목덜미를 핥았다. 조그마한 어린아이의 혀에 희롱당하는 재경의 목에서 피가 흘렀다.

젠장, 렌은 언제부터 마족에게 잡혔던 걸까. 꿈의 시작점부터? 그렇게 생각하니 류제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졌다. 내가 이런 시답잖은 마법에 걸리지만 않았더라면 렌이 붙잡혔을 없었을 텐데.

제대로 렌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어. 내가 안일한 탓이야. 내가, 내가 제대로……!

“너희들이 용건이 있는 건 나지? 내가 너희들의 중요한 무언가라서 이 타고시아 해변까지 온 거 아냐? 그래서 내게 마법을 깨게 만든 거지? 그렇다면 나에게 집중해. 죄 없는 렌은 괴롭히지 말고.”

“어라라, 자신을 쉽게 내던질 정도로 이 인간이 그렇게 소중해?”

류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스치는 수많은 욕망이 천년을 살아온 나콜렙시의 눈에는 보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비틀렸다. 안광에 비친 광기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용모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쳤다.

“그렇구나. 그러네. 후후후.”

나콜렙시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런 주제에 잘도 아직 각성을 못 했다니. 완전히 시한폭탄이잖아. 플로냐는 무슨 바보 같은 짓을 하고 다니는 거람.

“그러게 진작 물어서 네 것으로 만들어버렸으면 이런 일 없었을걸. 응? 마왕님.”

“닥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마왕이라는 말이 싫다. 나는 절대 마족 따위가 아니야.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드느니 나는 그런 식으로 렌을 생각한 적―

“난 알아. 눈동자만 봐도 알 수 있어. 널 계속 지켜봤거든. 이 인간을 좋아하지? 하지만 좋아해선 안 되니까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지? 실제로는 이 애가 너만 바라보고, 너만 사랑하고, 너만을 위했으면 좋겠지?”

“멋대로 지껄이라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품에 가두어서 쇠사슬로 꽁꽁 묶고 싶잖아. 하루에 열두 번은 넘게 추잡한 상상을 하며 이 얼굴에 욕망을 쏟아내고 꿈속에서조차 이 아이에게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서 화가 나지. 하하, 그게 네 본성이야. 그걸 추악하다고 외면할 거야? 그게 너인데? 그게 마족의 사랑 방식인데?”

아니다. 나는 순수하게 지금 그대로의 렌을 좋아하는 거야. 마족과는 관계없어. 이제 지긋지긋해. 나는 인간이야. 분명히 인간이라고! 허상에나 가까운 거짓말쟁이 마족들의 말 따위 믿지 않아.

“난 사람 꿈이나 엿보는 악취미를 가진 너희들과 달라. 같은 취급하지 마!”

류제가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세뇌에 가까운 마족의 괴롭힘에도 자신을 인간이라 강박적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라 선생님이 그랬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이라고. 아무리 수상쩍은 마기를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는 죽을 때까지 인간일 것이다.

이런 유혹으로는 나를 흔들 수 없어. 나는 인간이고, 인간의 감정으로 렌을 지킬 거다. 그게 내 의지다.

“난 네 욕망이 보여. 꿈이 아니더라도 네게서 철철 흘러나오는걸.”

나콜렙시가 푸하 나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본성은 숨길 수가 없다. 이 마왕의 부활체, 내가 이 인간의 목에 송곳니를 가져다 댈 때마다 부러워하고 있어.

소중한 사람을 손쉽게 복종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탐욕스러운 듯이 눈동자를 빛내는데 우리들하고 다르다고? 무슨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람.

“좀 더 설득력 있게 부정해 봐. 눈이 흔들리고 있잖아.”

나콜렙시가 축 늘어진 재경의 목을 물 듯 말 듯 혀로 할짝거렸다. 류제의 얼굴이 초조해졌다. 마족이 진짜 렌을 물어버리면 그 순간 렌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마족에게 목을 물린다는 건 죽음이랑 동등한 의미다. 그럴 거면… 그럴 거면 차라리…….

“네가 물어버려.”

마음을 읽은 듯이 나콜렙시가 속삭였다. 마왕이 되어버리는 거야.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말을 내뱉는 그녀의 내면에 어린아이를 초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인간에게는 아득한 세월을 마왕의 곁에서 머문 그녀다. 그녀의 앞에서 하는 거짓말은 모두 벗겨져 탄로 난다.

“그럼 이 인간은 네게 순종적으로 복종할 거야. 너만을 사랑하고 너만을 원하는 새로운 마족이 될 거야.”

심장이 옥죄어지는 것 같다. 류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노골적인 욕망에 그녀가 조롱하듯이 웃었다. 목소리에 비웃음이 어렸다.

류제는 아니라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나는, 난…….”

“거짓말은 못써.”

변명하는 류제를 업신여기던 나콜렙시의 오른쪽 얼굴이 뻥 뚫렸다. 그녀의 피가 재경의 얼굴에 튀었다.

나콜렙시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 졸린 눈에 동요가 어렸다. 류제 신리의 공격은 아니다. 그럼―

“거기까지다, 빌어먹을 마족.”

천하를 호령하는 찌릿찌릿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몰아붙여진 류제 대신 나콜렙시를 공격한 사람은 키아나트리체 전장의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였다.

“중령… 들라크루아 님!”

“어라, 깨어 있는 사람이 있었나. 내 눈을 속이다니 대단하네.”

구세주라도 등장하듯 군복을 입고 서있는 포르테의 얼굴에는 확신이 가득 차있었다. 그녀는 나콜렙시가 타고시아 해변에 등장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달밤의 하늘에 떠오른 마족에도 덤덤했다.

과연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다. 어제 백장미 부대가 타고시아 먼바다에서 붙잡은 수마를 대상으로 훈련을 할 때 수마는 수상쩍은 이름을 연신 호명하다 자폭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철저한 인물이다. 주적 마족이 내뱉은 말을 그냥 흘려듣지는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네네 슈만까지 나왔던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녀는 해상 훈련을 끝마치고 단독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왕녀의 만찬회 이후 정보통으로부터 몇백 년 전에 존재하는 기록의 결과를 보고받은 포르테는 나콜렙시라는 괴물의 존재에 도달했다.

그녀는 수마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부하들을 두고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수마의 수면 마법에서 벗어났다.

류제가 꿈의 세계에 붙들려 있는 동안 그녀는 이 일대를 조사해 마법의 범위를 알아냈고, 그 중심이 어디인지 찾았다.

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낸 그녀는 단지 약점일 것이라고 짐작한 공격이 확실한 약점을 노리지 못해 분했다.

“역시 이 근처에 있었군.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이야, 가축 주제에 방심할 수 없는걸. 그래. 내가 바로 수마의 군주,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이야. 반가워.”

“우리 백장미 부대가 있는 타고시아 해변에서 당당히 광범위 마법을 펼치다니 간도 크군.”

“헤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기압 차로 인해 터져버린 얼굴을 차분하게 회복했다. 빙그르르 눈동자가 돌아가고 흩어진 뇌수와 피가 스스로 모여들어 다시 그녀를 이루었다.

아무리 마족에게 있어서 먹이일 뿐일지라도 인간을 뛰어넘어 마족조차 두려움에 떠는 실력자가 나타났는데 그녀는 무료하게 웃을 뿐이었다.

인간에게 자신의 행동을 설명해 줘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마왕이 아닌 다른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관심사가 아니었다.

“뻔뻔한 마족 놈. 대답해라.”

“가축에게 행동을 일일이 보고하는 바보는 없어.”

“그 가축의 손에 멸망하고 있는 건 어디의 누구였지.”

“멍멍아, 그 잘난 입을 어디까지 찢어줄까?”

하찮은 인간이 감히 우등한 존재를 모욕하다니. 자존심이 상한 나콜렙시의 눈동자가 희번덕 포르테를 노려보았다. 나콜렙시와 포르테 둘 사이에 긴장감이 저릿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콜렙시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00년 전 마왕을 죽인 영웅, ‘순간 이동’ 어빌리터 로라 하놋으로 인해 마족들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현실은 명백했다.

번식의 기회를 잃고 개체 수가 줄어드는 마족들은 어떻게든 살아날 궁리를 찾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니 그들은 마왕의 부활에 집착하지. 성에만 틀어박혀 잠을 자던 나콜렙시가 여기까지 올 정도로.

포르테는 대규모 수면 마법이 발동하는 동안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류제 신리라는 애송이가 그녀보다 일찍 니켈과 마주한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지만 마족이 인질을 잡고 있든 상관없이 그녀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적을 멸할 것이었다.

“치매기 다분한 1,000살 괴물 노인네의 변덕 따위 이유를 들어봤자 무의미하지. 감히 이 몸의 입을 찢어주겠다고? 이봐, 니켈. 네가 내 몸 털끝 하나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미천한 개가 죽기 전에 시끄럽게 짖는구나.”

“호오, 넌 세 번째로 개에게 물려 죽은 왕이 되겠네. 마왕과 함께 지옥에서 손뼉치기나 하지 그래?”

상대를 자극하는 도발. 두려움을 숨기는 호기. 순간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순간에 눈앞에서 등장한 그녀는 어느새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인질을 붙들고 있는 인류의 숙적에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맹공격을 퍼부었다.

일순간 류제에게 스치는 직감.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마족에게 향할 공격은 반드시 물불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함.

만일 ‘기압’ 어빌리티를 가진 그녀가 인간이 아닌 마족과 대치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싸울까.

찰나 동안 의구심이 들었던 류제는 마족은 몸속 어딘가에 핵이 있으며 그 핵을 파괴해야만 소멸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곧 포르테는 마족이 그녀의 어빌리티를 짐작하지 못하는 틈을 타 마족의 전신을 덮을 공간을 단번에 찌그러뜨릴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마족을 공격한다는 것보다 렌을 지킨다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던 류제는 포르테가 손을 움직이자 곧바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포르테를 붙잡아 그 공격을 저지했다.

나콜렙시는 그럴 줄 알았다며 턱을 치켜들었다. 류제가 마족의 편을 들자 군용 기간트리카 안에서 들려오는 포르테의 목소리에 분노가 어렸다.

“뭐 하는 짓이지?”

“다…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짓입니까? 렌을… 제 친구도 죽일 셈입니까?!”

“모르는 건가! 저 마족은 어린아이처럼 보여도 터무니없는 거물이다. 저것의 변덕으로 이 일대의 인간이 전멸할 수도 있단 말이다. 너는 그 위험에서 인간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지금 날려버렸다!”

“그래도 적어도 렌을 구하려는―”

“저리 비켜!”

수학여행 때 그랬던 것처럼 포르테는 진지하게 맞붙어 오는 류제를 모래사장에 내팽개쳤다. 시야에서 류제가 치워지자 바다에서 나온 사나운 물줄기 뱀이 포르테를 노렸다. 그녀는 수마의 물 마법을 피해 모래사장을 몇 번을 구르다가 하늘로 떠올라 나콜렙시에게 공격을 날렸다.

나콜렙시의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 팔이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몸뚱이와 팔은 서로 연결되어 회복되었다.

“헤에~ 너 반가운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네.”

겨우 맞힌 공격을 피할 이유조차 없다는 건가! 게다가 저 괴물 놈, 벌써 내 어빌리티를 파악하다니.

인질로 잡힌 재경을 포기한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마족 앞에서는 잘난 척했지만 저 어린아이 인두겁을 쓴 마족은 군주급 존재다. 괴물 중에 괴물이란 말이다.

여기서 누구도 죽지 않으려면 얌전히 저 마족이 돌아가 주는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는데 그런 자를 상대로 인질을 구해내면서 상대하라고? 그건 힘의 우위를 가져야 가까스로 가능한 일이다.

백장미 부대는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해도 된다는 결심으로 전장에 임한다. 키아나트리체의 인류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살아남게 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다.

더군다나 인질로 잡힌 상대는 어빌리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 죽는 것은 인류를 위해서 마땅히 희생해야 하는 어빌리터의 숙명이다.

“냉정하네~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어.”

악마라 불려도 좋다. 그녀는 인질로 잡힌 한 명의 제립학교 학생보다 타고시아 해변 일대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이 더 중요했다. 수천 명의 사람에는 왕녀도, 셀로니아가의 여식도,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인질로 잡힌 아이를 구하려다가 시간을 허비해서 저 마족이 또다시 인간을 공격할 틈을 줘버리면? 그걸 계기로 수많은 인간이 죽어버리면? 니켈이 호전적인 놈들은 아니더라도 그건 상대적인 의미지 인간에게 적대감이 없는 건 아니다.

“불쌍하구나, 인간 꼬마. 버림받았어.”

훌쩍거리는 시늉을 한 나콜렙시가 축 늘어진 재경을 붙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인간들의 영웅이라고 해도 마가릿이 당했을 때처럼 정예부대가 습격해서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홀로 나와 대치해야 하는 것치곤 상황 판단력이 좋다.

이 인간을 내 손에서 구해내면서 방어와 공격을 함께할 자신이 없는 거야. 거기에 내게 유리한 지형인 바다로 전장이 바뀌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유도하면서.

“네가 유약한 영웅이라서 인가? 웃겨라.”

“무어라 말해도 나는 변함없이 너를 배제한다.”

죄책감을 자극해도 소용없다. 틈을 파고들 수 없는 끔찍한 전투에만 집중한다.

기회를 엿본 포르테가 나콜렙시의 시야각 밖에 있는 곳을 공격했다. 터지는 피. 물로 변해 유연하게 합류하는 살갗. 핵을 공격하지 못한다면 나콜렙시는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고 졸린 눈을 끔벅일 뿐이다.

도대체 어디냐. 핵은 어디냔 말이다!

“제가 렌을 구할게요. 돕게 해주세요.”

인간이 마족과 대치하는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전장 속, 모래사장에 내팽개쳐진 류제가 싸움에 끼어들며 포르테를 설득했다.

“끈질기군. 훈련도 안 된 애송이와 싸우는 것은 방해만 된다!”

헬멧 시야에 표기되는 공격의 위치를 재빠른 동체 시력으로 확인한 포르테가 나콜렙시의 뱀들을 전부 피했다. 반면 공격을 맞은 류제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아무리 센스가 좋고 척도가 높아도, ‘학생용’ 기간트리카를 잘 다룰지라도 매일 합을 맞추고 서로의 어빌리티를 이해하며 수천, 수만 번의 훈련을 함께해 왔던 동료조차 한순간의 실수로 전장에서 사망하는데 애송이와 팀을 꾸려 괴물과 대치한다는 것은 포르테 그녀에게 있어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날 방해하지 마라.”

“저는 렌을 구할 겁니다! 렌은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더 사랑하라는 것이 당신의 가르침이잖아요!”

“뭐야, 내부 분열이야?”

나콜렙시가 바다에서 더 많은 물을 끌어와 거대한 뱀을 만들어냈다. 받아내기 귀찮은 공격은 포르테와 류제가 서로 교차하게끔 흘리며 노련하게 방어한 그녀는 포르테를 희롱하는 듯 속삭였다.

“이렇게 공격이 막혀서야 내 마법이 다시 완성되고 마는걸?”

마족의 손에 마법진이 그려지고 있었다. 포르테는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있으니 정신계 마법에 보호받는다. 그러니 저건 정신계 마법이 아니다.

물 마법인가? 분명 내게 자만하듯 보여준 것을 보면 규모가 큰 마법이다. 군주급 니켈의 광범위 물 마법은 상상을 초월할 터.

현재 수면 마법의 여파로 백장미 부대를 포함한 수천 명의 인간이 에너지 드레인이 되어 꼼짝을 못하는 상태다. 지금 거대한 해일이 이 타고시아 해변 일대를 덮치면―

“그렇게는 안 돼!”

“왜?”

장난꾸러기처럼 답한 나콜렙시는 포르테의 앞에서 보란 듯이 마법진을 만들어냈다. 마법을 해제하기 위해 어떤 수를 쓰더라도 포르테는 나콜렙시를 저지해야만 한다.

포르테의 공격은 언제나 재경이 부상당할 수 있는 유효거리 내였다. 류제는 렌을 다치게 하는 포르테를 저지해야 했고, 포르테는 그런 류제 때문에 공격이 어긋날 때마다 이를 갈았다.

“류제 신리,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욕심을 부릴 상황이 아니야!”

“안 돼요. 절대로 렌을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왜 시도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겁니까!”

“우리에게는 시도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영웅을 방해하는 류제. 나콜렙시를 사이에 두고 공격의 향방에 대치하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그리고 물로 만든 뱀으로 여유롭게 둘을 농락하는 나콜렙시.

인질 여부에 상관없이 원, 근거리 공격을 감행하는 포르테와 그에게서 렌을 지키려는 류제, 류제를 이용해 포르테의 공격을 교활하게 막아내는 마족.

그러는 동안 마족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대재앙. 눈으로 좇을 수 없는 빠르기로 그들이 움직인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가축들 주제에 어제는 잘도 내 귀여운 부하를 걸레 조각으로 만들었겠다. 네놈들의 분수를 알게 해주지.”

“망할 자식.”

“스스로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멍멍아.”

“렌!”

류제 신리가 사사건건 공격을 방해하는 한 마법을 저지할 수가 없다. 이러다간 마법이 완성되고 커다란 해일이 타고시아 해변을 덮칠 것이다.

포르테는 그럴 바에 차라리 류제를 먼저 처리하고 마족을 저지하는 것이 시간상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녀는 니켈을 공격하는 척 류제를 붙잡아 기압을 터뜨리고 그 반동으로 모래밭에 처박힌 류제가 부스터로 일어서려는 것을 다시금 짓눌러 류제의 손목에 차인 슬렉터를 붙잡았다. 장갑을 강제로 해제시킬 셈이다.

“왜… 어째서 렌을 구해주지 않는 겁니까. 당신은… 당신은 인류의 영웅이잖아요.”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나는 로라 하놋이 아니야. 포르테가 그 말을 삼켰다.

강제로 슬렉터를 벗겨내는 포르테의 손을 붙잡은 류제가 최후로 저항했다. 포르테의 어빌리티가 류제의 손목과 슬렉터를 동시에 일그러뜨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류제가 비명을 질렀다. 포르테는 거기까지 약 12초 남짓을 소요했다.

군용 기간트리카와 학생용 기간트리카의 차이. 군인과 학생의 차이. 책임져야 할 생명의 숫자의 차이. 신념의 차이. 모든 것에서 류제는 졌다.

류제의 기간트리카가 망가진 것을 확인한 포르테는 미련 없이 나콜렙시에게 향했다. 포르테의 뒷모습을 보며 류제가 분한 듯 주먹으로 모래사장을 쳤다. 기간트리카를 쓸 수 없으면 하늘에 떠있는 그들과 공중전이 불가능하다.

분해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맨몸으로 도약해 포르테의 기체까지 점프를 했다.

집중하고 있는 찰나 매달린 류제 탓에 무게중심이 엇나간 포르테의 공격이 시원하게 빗나갔다.

“끈질기군. 포기해라!”

“당신이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포기하면 렌의 목숨은 장담 못 한다. 잃고 후회하느니 끝까지 쟁취할 것이다. 나콜렙시와 포르테의 숨 막히는 결전 속에서 포르테에게 매달려 꼴사납게 방해될지언정 그는 렌을 지키고 싶었다.

“어리석은 놈, 일의 경중을 모른단 말이냐.”

“전 렌이 더 중요합니다.”

말이 안 통하는군. 이래서 사리 분별 못 하는 애들은. 포르테는 자신의 기체에 엉겨 붙어 방해하는 류제를 붙잡아 바다에 던져버리려고 했다.

그녀의 공격을 피해 기체에 붙어있기 위해서 시야를 ‘강화’했을 류제다. 포르테가 그 약점을 이용해 왼쪽 팔에 있는 부스터의 불꽃을 이용해 시야를 공격해 그 틈을 타 류제를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나 수학여행 때 당하기만 했던 류제가 아니다. 여름방학 내내 재경이 보충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 그는 홀로 학교에 남아 자신의 어빌리티를 연구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류제는 포르테가 그 공격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회피해 역전타를 날렸다.

이 모든 공격이 포르테가 프로텍터를 확인하며 나콜렙시의 공격을 피하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류제는 제 고집만 부렸다.

“저는… 예전의 저보다 한발 나아갔다 생각합니다. 절 믿고 저와 함께 렌을 구해요!”

포르테는 애송이인 류제를 신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에서 최적의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한 방 먹인 류제를 역으로 공격해 다시 모래사장에 내팽개쳤다.

그녀는 높이 치솟아 나콜렙시를 향한 공격을 감행했다. 기압을 이용한 돌진, 목표를 포착, 마법을 쓰기 전에 폭사시킨다.

“유감이야. 재미있는 쇼 잘 봤어. 나는 너희들이 절망하는 모습 정말 좋아하거든.”

“무슨……. 그건!”

최대 강도의 부스터로 마족에게 돌진하는 그녀에게 나콜렙시가 손을 펼쳐 들고 있던 녹빛의 기계를 보여주었다. 마가릿이 사용했던 러다이트, 안티 슬렉터다.

그 기계를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지만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이 모를 리 없다. 그전에 나콜렙시를 저지하려고 들었지만 러다이트는 발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그리는 척했던 것은 저걸 기동하기 위한 눈속임이었나!

“기계 따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영웅님. 이번에야말로 잘 자.”

수마는 악마처럼 웃었다. 포르테의 기간트리카가 강제로 해제되었다. 나콜렙시가 그리던 마법진은 물 마법이 아닌 수면 마법이었다. 러다이트의 존재를 고려하지 못한 포르테는 패배했다. 그녀의 눈앞에서 강력한 수면 마법이 발동한다.

“이런!”

정신계 마법을 보호해 줄 헬멧이 사라진다.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 자신했던 포르테의 눈꺼풀이 참을 수 없는 수마에 떨어져 감겼다.

그녀는 그럼에도 나콜렙시에게 덤벼들려는 듯 바보처럼 허우적거리다가 모래사장에 추락해 기다란 선을 그리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아직 쓸 만하네. 마가릿은 의외로 세심하다니까.”

편법을 쓰긴 했지만 인류의 영웅을 무력화시킨 나콜렙시는 그럼 그렇지 라며 따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겠어. 율폰한테 혼나기도 싫고 별로 이 이상의 일을 할 생각은 없었는데 버릇없이 덤벼들다니. 이래서 가축들은 교양이 없다니까.

인간의 영웅 따위 확 죽여버리고 싶지만 율폰이 지금은 잠자코 있으랬으니 참아야지.

“괜찮아? 졸려? 정신 차려. 이제 다시 우리 둘이 되었잖아. 같이 이야기해.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방해꾼 때문에 못 들었어.”

“…렌을… 돌려…줘.”

“욕망에 솔직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걸.”

“시…끄러워.”

안 돼. 잠들 수 없어. 여기서 내가 눈을 감으면 렌은 죽을 거다. 지금까지 실컷 잤잖아. 정신 차려, 류제! 네 결심을 물거품으로 만들 셈이야?

“대단해.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할 여유가 있구나. 영웅에게도 버림받고. 이 애가 마족이라면 죽을 리도 없을 텐데.”

“개…소리…….”

“네가 우리의 왕으로 돌아오면 해결된 일을. 저 거만한 인간의 영웅도 네 손짓 하나로 으스러질걸. 자, 이 애를 가져. 내게 그만하라고 명령해. 마왕이 되란 말이야.”

“나는… 너희랑 달라. 내가… 내가 진짜로 마…족의 힘을 가졌어도… 나는… 인간으로 살 거야.”

“정마알?”

나콜렙시가 공중에서 사뿐히 내려와 류제의 앞에 섰다. 창백한 렌의 얼굴이 손에 닿을 듯이 아른거린다.

졸려. 자면 안 돼. 렌을 구해야만 해. 필사적으로 모래밭을 기어가는 류제의 눈앞에서 나콜렙시는 이번에야말로 재경을 물어버리겠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목덜미에 그녀의 입술이 장난스레 닿는다.

“인간을 직접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그만…둬.”

그는 나콜렙시가 렌의 목덜미를 자극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했다.

내가 더 강해야 하는데. 렌을 포기하려고 한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야 한다. 렌을 지켜주기로 결심했지만 왜 나는 이렇게 약한 걸까.

내가 더,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저 마족에게서 렌을 돌려받을 수 있을 정도로만…….

“잘 먹겠습니다.”

정말로 물어버릴까. 구울로 만들어서 짓이겨 버리면 그 재미도 괜찮지.

흥얼거리며 송곳니를 드러내던 나콜렙시가 흘러나오는 마기를 느끼고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의 마법에 저항하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서는 류제의 눈에 붉은 동공이 보였다.

“헤에~”

대견하네. 과연 그렇게 나와야지.

보름달이 진다. 고요한 모래밭에 서서 유일하게 나콜렙시와 대치하는 류제의 눈에 질투와 분노가 어렸다.

“욕심꾸러기.”

그녀가 재경의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히히 웃었다. 마기에 취해 흥분한 류제는 이성을 잃고 나콜렙시에게 달려들었다. 망가진 손목이 수복된다. 기간트리카 대신 등뼈를 비집고 나타난 추악한 날개가 그를 공중으로 띄웠다.

“이렇게 위태위태해서야 숨기는 게 더 일이겠는걸.”

오로지 그녀의 손에 있는 인간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드라코니스 입자에 반응한다. 재경을 빼앗으려는 류제를 농락하며 빠져나가는 그녀를 붙잡은 류제가 휘둘러 던져버렸다. 인간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다.

“읏……!”

이 인간도 죽일 셈이야? 나콜렙시가 이성을 잃고 돌진하는 류제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성을 잃은 류제는 재경을 빼앗아야 한다는 목적이 나콜렙시를 공격한다는 쪽으로 뒤바뀌어 무차별적으로 덤벼들었다.

증오가 커질수록 마기 또한 커지고 마기가 커지면 마왕의 힘 또한 부활한다. 이론대로 그 임계점을 넘으면 마왕은 완전히 부활할 터. 이 인간이 죽으면 그 임계점은 손쉽게 넘기겠지.

“이제 이 애는 아무래도 좋은 거야?”

“죽여버릴 테다……!”

마기에 취한 류제는 공격 본능밖에 남지 않았다. 인간이라고 그렇게 우기더니 지금은 마족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이전의 마왕이 아닌 조금의 교양도 느껴지지 않는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각성의 향방은 그녀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뭐든 플로냐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나콜렙시는 조소를 날렸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따끔따끔한 기운을 느낀 나콜렙시는 이제 이 짓을 그만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시시해라. 자, 돌려줄게.”

마음이 바뀐 나콜렙시가 재경을 손쉽게 놓았다. 바다가 넘실거리는 공중. 아래에는 깊은 바다가 어두운 기운을 뿜어냈다.

류제는 그녀의 손에서 재경이 추락해도 그녀를 없애기 위해 움직였다. 나콜렙시의 눈이 차가워졌다.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폭주는 불안정하고 공격성만 높다.

결국 당신도 그 인간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네.

나콜렙시가 류제의 귓가를 붙잡고 속삭였다. 류제가 그녀의 허리춤을 반토막 냈지만 평온한 얼굴이다.

“지금 가지 않으면 네가 보게 되는 건 차가운 시체가 되겠지. 좋겠네.”

렌.

류제의 눈동자에 번뜩 생기가 돌았다.

렌, 렌은 어디에 있는 거지!

나콜렙시의 손에는 렌이 없다. 아래에서 들려오는 무거운 풍덩 소리. 헤매던 류제는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었다.

상처를 치료하던 나콜렙시는 시무룩해졌다. 그가 그녀를 상처 입혔다. 나는 아무래도 좋고 오로지 저 인간만 소중하다는 거네. 나중에 마왕님으로 돌아오면 이 일을 잔뜩 심술부릴 거야.

“뭐 하는 짓이야! 마왕님을 부활시키는 건 내 역할이야. 빼앗으면 너라도 용서 못 해.”

단단히 화가 난 미나가 나콜렙시에게 투덜거렸다. 미나가 알고 있는 나콜렙시는 수마 특유의 귀차니즘 때문이라도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마족이 아니었다.

오히려 요구했던 것보다 덜 해서 짜증을 내던 것은 미나였는데 오늘은 과도하게 일을 벌였다. 마왕의 부활체를 보고 자극받았나?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끌어들인 건 오차 내였으니까 됐어. 하지만 렌 지미를 이용해 류제 신리를 각성시키려고 하다니. 지금 너 내 영역을 침범한 거 알아?”

“뿌리까지 흔들려면 먼 것 같은데 이 정도 변덕이야 어때.”

“변덕 수준이 아니니까 그렇지. 사사건건 그의 행동에 질투하지 마. 각성을 한다면 다 없는 일이 될 테니까.”

“알아, 나도. 알고 있어.”

알지만 짜증 나는데 어떻게 해. 욕망에 충실한 게 우리 마족인걸.

러다이트 본체를 회수한 나콜렙시는 천사처럼 하늘 위로 사라졌다. 미나가 한숨을 내쉬며 류제가 바다로 뛰어들어 간 곳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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