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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8) (26/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8)

“이번엔 꽝이네. 네 여동생이나 수녀 언니에게서 렌이 나오지 않았잖아. 성도 가까워지지 않았고.”

“그러게.”

소름 끼치는 경험뿐인 호숫가를 떠나 성으로 향하는 류제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남의 꿈에 난입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었다. 그것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가족 같은 사람의 이면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바스타드 소드라니.”

수녀 누나는 우리 고아원이 답답한 걸까. 물론 누나가 모험을 하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곁에 있는 게 당연해서 한 번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힘내, 류제. 어떻게든 될 거야.”

미나가 옆에서 미적미적 걷는 류제를 달랬다. 축 처진 류제는 렌만 옆에 있으면 이런 것에 일일이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아.”

언제쯤이면 성에 당도할 수 있는 걸까. 한시라도 빨리 진짜 렌을 만나고 싶은 류제는 빈말을 늘어놓는 미나를 두고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표했다.

미나의 이마에 핏줄이 불쑥 솟았다. 내가 렌 지미가 아니라서 미안하게 되었네, 류제 신리.

“저리 비켜!”

“우하하! 나 잡아봐라~”

“너 두고 보자.”

뒤에서 들리는 렌들의 고함 소리가 따가워서 미나가 귀를 막았다.

암만 마왕의 부활체가 그녀에게 기댈 절호의 찬스라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고 소름이 끼치는 렌들과 꿈속 여행을 오래 하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마왕의 부활체와 교감도 중요하지만 메리트보다 복수(複數)의 렌 지미라는 디메리트가 컸다.

어쨌든 미나도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타고시아 해변에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악몽을 선사하고 에너지를 빼앗음과 동시에 류제에게 비어빌리터와 어빌리터 사이의 대립 구도에서 비롯한 적개심을 심어주는 것.

비록 가짜 렌 지미들 때문에 예정과 틀어지기는 했어도 의구심을 심어주는 데까지는 성공한 미나는 다음 길목에 있을 악몽을 마지막으로 이 한여름 밤의 꿈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류제가 성의 중심으로 간다는 목적이 있으니 곤란하게 되었다. 내가 이탈하기도 뭐하니 류제가 이 꿈을 해제하는 역할을 대신해 줘야겠다. 그다음에 렌 지미에게 복수를 할 테다.

미나는 시끄럽게 따라오는 렌들을 표독스럽게 흘겼다. 아까부터 저들끼리 쫓아다니며 술래잡기를 한다. 거슬려 죽겠다.

“얍!”

“안 사라졌어. 너는?”

“나도 안 사라졌어. 너는?”

“나도.”

아세미가 만든 가짜 류제가 진짜 류제의 손이 닿자 사라져버린 것을 본 일부 렌들이 찰팍찰팍 다른 렌들을 만져댔다.

세라는 다른 렌들이 자신의 렌에게 들러붙어 만지작거리는 이유를 몰라 근처에 있던 비키에게 물었다.

“렌 학생들이 아까부터 왜 저러고 있는 걸까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까 류제네 여동생과 결혼식을 올리던 사람이 류제였거든요. 그런데 류제가 류제의 멱살을 잡으니까 류제가 사라졌어요. 그걸 보고 저러는 것 같은데.”

비키가 맨정신으로 들으면 헛소리라고 했을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그걸 듣고 세라가 용케 납득했다.

호숫가에서 만난 아세미와 루나는 성으로 향하는 여정에 합류하지 않았다. 아세미를 달래줘야 한다며 루나가 드래곤 때문에 난장판이 된 야외 결혼식장에 남은 것이다.

스토리대로라면 꿈속 세계에서 루나와 아세미의 등장 신은 없었다. 본래 아세미가 꿈속 세계의 핵이었기 때문이다.

재경이 아세미 대신이 되어 이야기가 꼬이긴 했어도 두 사람이 여정에 합류하지 않은 것이 이 세계의 이치와 맞았다. 가타부타 스토리를 따지는 사람은 재경뿐이니 유네는 그보다 다른 부분을 꼬집었다.

“왜 아세미 양의 류제 군이 그렇게 사라져버린 걸까?”

내 렌 군들도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사라지면 어쩌지. 아세미의 류제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걸 목격한 유네도 렌들이 그처럼 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냈다.

“혹시 류제가 만져서 그런 거 아니야? 아까부터 잘난 듯한 소리만 늘어놓으니 수상해.”

그건 비키도 마찬가지였는지 불안한 듯 렌의 손을 잡고 제멋대로 추측을 내뱉었다. 제정신이 아닌 주제에 날카로운 구석은 여전하다.

“우리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사라지게 만든 건 류제의 능력 아니야?”

“그…그럴 리가. 렌 군들이 류제 군에게 들러붙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걸.”

“맞아. 이거 봐.”

렌들이 류제에게 들러붙었다. 잘 가다가 난데없이 렌들이 우르르 그를 덮치자 류제가 바닥에 코를 박고 넘어졌다. 렌들은 거 보라며 잘난 듯이 코를 높였다.

“갑자기 뭐야?”

예고도 없이 지면과 키스한 류제가 등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눈가를 실룩거렸다.

“미안해, 류제 군. 실은 아까 아세미 양의 류제 군이 사라져버린 것을 이야기하는 중이었어.”

“아, 그런 일도 있었지.”

수녀 누나가 드래곤의 목을 베는 모습이 강렬해서 가짜 내가 등장한 것을 잊고 말았다. 류제는 도플갱어가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던 기억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오리지널과 접촉하면 가짜들은 사라지는 거 아니야?”

등에 올라탄 렌들을 무시하고 일어난 류제가 미적미적 대답했다. 꿈속이니 아프지 않아서 망정이지 하여튼 렌이란 위험천만한 행동만 한다.

류제가 떨어지지 않는 렌들을 털어내며 별것 있냐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린 유네가 되물었다.

“오리지널이라니?”

“너나, 나나, 우리 같은 진짜 사람들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이 렌들이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말이야?”

“오리지널이 괜히 오리지널이겠어? 세상에 단 한 명이니 오리지널이지. 그러게 내가 계속 말했잖아.”

류제가 반박해 보라며 가짜 렌들에게 손가락질했다. 진짜 류제가 손을 대자 아세미의 류제가 없어진 건 사실이다. 설마 진짜 그런 건가? 내 렌 군들은 가짜가 아닌데. 다 진짜 렌 군들인데.

유네가 꿍해지자 장난을 치던 렌들이 울지 말라고 부둥부둥 유네를 도닥였다.

“…가짜라니.”

비키도 그럴 리 없다며 렌의 손을 놓지 않았다. 비키도 아세미의 류제가 뿅 사라져버린 것을 목격한 탓에 류제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으로 향하는 류제는 가짜 렌을 향한 그녀들의 불안을 엿들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꼴좋다 생각했는지 입가가 비식비식 올라갔다.

언제쯤 알은척을 해야 하나 타이밍을 보며 상황을 흘기던 미나가 이때다 싶어 뭔가가 떠오른 듯 손바닥을 마주치고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 생각났어!”

“뭐가?”

“이 꿈속 말이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꿈이 연결되는 현상. 분명 도플갱어가 나올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아. 가짜들은 진정한 나와 접촉하면 사라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어.”

“그래서 이 꿈의 정체가 뭔데?”

저 렌들이 가짜라는 주장을 피력한 후 속이 후련해진 류제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류제는 자신의 미소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눈가를 실룩거리던 미나가 어흠, 헛기침을 하고 작게 속삭였다.

“도서관에 마족들이 쓰는 마법에 대한 내용이 적힌 책에서 읽었어. 정신계 어빌리티를 가진 어빌리터가 수마에 빠진 마을에 들어섰을 때 알아낸 수마족의 마법 중 인간들의 꿈이 연결되는 종류가 있었던 거 같아.”

“그 말인즉슨 타고시아 해변 한가운데에 마족이 있다는 소리야?”

수마의 마법으로 잠든 사람들의 꿈이 연결되기 위해서는 악몽 마법을 쓸 마족 또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나는 자연스레 숨겼다.

미소 짓던 류제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곳이 서로의 꿈이 얽힌 세계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품고 있던 의심이었지만 진짜일 가능성이 높아지니 불안해졌다. 마족과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이 증상이 책에서 본 내용과 같다면 분명 마족의 짓이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부정해 주길 바라던 류제가 크게 탄식했다.

“그럼 당장 꿈에서 깨야 하는 거 아냐?”

“그게 좀 곤란해. 꽤 강력한 마법이라고 알고 있거든.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아무리 어빌리티 척도가 높은 류제 너라도 깨어날 수 없을 거야.”

“젠장. 태평하게 성으로 향할 게 아니었어. 마족이라니. 그것도 수마족? 마족이 타고시아 해변에는 왜 온 거야!”

수마족이라는 말에 세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트리거로 작용한 단어에 반응한 강렬한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상기되었다.

“수마족… 수마족이라면 분명 훈련에서…윽……!”

세라는 백장미 부대와의 훈련에서 백업을 맡을 때 수마족과 대치했었다. 하지만 여긴 꿈속이고, 당장 현실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니 그녀는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이건…….”

세라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은 전투가 어렴풋이 형태를 잡기 시작했다. 물론 세라를 자극한 것 또한 미나의 계획이다.

“아…아아아! 나콜렙시 님. 나콜렙시 님!”

발버둥 치며 괴로워하는 마족을 형상화하던 세라는 고통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렌이 걱정스럽게 쳐다보자 숨을 헉 들이켠 그녀는 다시금 만들어질 뻔한 악몽을 깨뜨렸다.

세라가 비틀거리면서 쓰러지자 그녀 곁으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나콜렙시? 선생님, 괜찮으세요?”

“으으… 제가 왜 이럴까요. 갑자기 이상한 게 떠올랐습니다.”

덕분에 류제는 큰 힌트를 얻었다. 이건 세라 선생님의 기억이다. 선생님은 오늘 백장미 부대와 훈련이 있었다고 했다. 아까 그 형상 속의 장소는 타고시아 바닷가였어.

설마 그 걸레 조각 같은 처참한 존재가 마족인 건가? 그 마족이 말한 나콜렙시라는 존재는―

“미나. 설마 세라 선생님이 본 마족 말고 다른 마족이 이 타고시아 해변에 있는 걸까?”

“최악의 경우에는 그럴지도 몰라.”

수마라는 말에 반응한 세라 덕분에 확신을 얻은 류제는 꿈에서 깨야 하는 심각성을 상기시켰다. 지금 렌이 문제가 아니다. 나를 노리는 고등급의 마족이 해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같잖은 짓을 벌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젠장. 어떻게 하지. 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거야?!”

“진정해.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구.”

기껏 알려줬는데 적반하장으로 성을 내니 미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걸음을 멈춘 류제가 정신 사납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꿈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책에 안 적혀있었어?”

“그게… 사람들의 꿈을 묶고 있는 꿈의 중심으로 가서 핵을 깨워야―”

“꿈의 중심에서 핵을 깨운다고? 꿈의 중심이 어딘데.”

“글쎄. 이 마법은 고위 마법이라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정신력을 가진 사람만이 제정신을 유지해서 마법을 해제할 수 있다고 했어. 나나 류제 넌 아마 어빌리티 특성상 높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서 꿈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런 우리 둘이서 꿈의 중심을 찾―”

“그럼 너도 꿈의 중심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거야? 그럼 무슨 소용이야. 그 마족이 렌에게 해코지를 한다면 어떻게 해!”

한시가 급하다. 하나같이 미나의 말을 끊어먹은 류제가 조마조마한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미나가 가증스럽게 미소를 숨겼다. 그녀의 눈동자는 류제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U 자 모양 열쇠에 향해 있었다.

그녀도 류제처럼 다급한 연기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수마족은 학교에 쳐들어왔던 병마족처럼 공격적인 성향이 아니라는 거야. 그랬더라면 진작 큰일이 났겠지. 적어도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건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잖아.”

“전혀 다행이 아니야. 젠장… 꿈의 중심이라.”

류제가 전혀 감을 못 잡자 짐짓 고민하는 척하던 미나가 다른 힌트를 선물로 주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내 생각엔 류제 네가 향하고 있던 저 성이 꿈의 중심이 아닐까 싶어.”

“뭐? 어째서?”

“이 마법에는 각 마족마다 다른 파훼법이 있다고 했어. 네가 말하길 다른 사람의 안 좋은 기억을 봤더니 렌이 나오고 성이 가까워졌다고 했잖아. 그건 어떤 파훼법이 작용해서 꿈의 중심에 가까워지는 게 아닐까? 류제 네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성에 진짜 렌이 있다고 했으니 이 마법의 핵은 아마…….”

렌.

마족의 마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류제가 더 크게 동요했다. 마음이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여 간다.

성에 있는 렌이 실은 마족이 부린 마법에 갇혀있는 거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거야? 만일 그렇다면 현실 세계의 렌은 지금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가장 먼저 성으로 향할 생각을 했다니 류제 넌 감이 정말 좋은 것 같아. 역시 우리 반 유망주.”

미나가 순수하게 류제를 칭찬했다. 본래라면 수학여행 때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건을 겪으며 류제가 마족과 연관된 수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알아야만 했지만 미나는 재경의 끊임없는 방해를 받고 아직도 류제가 가진 마왕의 힘에 대해 알은척을 못 하는 상황이다.

칫. 렌 지미만 없었어도 여기서 류제가 나에게 더 의지할 수 있을 텐데.

“감이 좋다니.”

뭔가가 떠오른 류제는 설마 하는 생각에 멈칫했다. 여기가 진짜 마족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세계라면 내가 마왕의 부활체이기 때문에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가.

아니, 미나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잖아. 높은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서라고 미나가 그랬어.

지금은 그런 한심한 생각에 빠져 지체할 시간이 없다. 한시라도 빨리 저 성에 당도해야만 한다. 류제가 무턱대고 성이 있는 곳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류제가 달리자 다른 사람들도 놀라 뒤따라 뛰었다.

“뭐야, 류제. 왜 그렇게 서둘러?”

“나중에 설명할게.”

류제는 어떻게든 성으로 가보려 했지만 타인의 악몽과 만나지 않는다면 성은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다. 다급해질수록 렌이 마족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떨어지는 장면만 떠오른다.

젠장, 그래서 렌이 성에 있었던 거라니. 나는 렌이 위험에 처해있는 것도 모르고 여기서 어영부영 뭘 하고 있던 거야.

“젠장… 젠장! 나오지 말라고 빌어도 그렇게 잘 나오더니 왜 필요하니까 안 보이는 거야?!”

미친 듯이 뛰어도 성과가 없자 류제가 지친 정신을 헐떡거리며 성을 노려보았다. 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그것밖에 없다. 그것만이 꿈의 중심에 다다를 파훼법이었다.

아무라도 좋다. 제발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나서 악몽을 꾼 다음 렌을 내보내 줘!

“히…힘들어. 류제 군,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돼?”

“그럴 시간이 없어.”

“융통성 없긴.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서둘러야 할 이유라도 있어?”

그걸 설명해서 그녀들이 알아들을 보장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말하겠지만 저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아까 세라 선생님이 언뜻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했지만 결국엔 다시 원상 복귀 되었잖아.

그녀들을 무시한 류제는 다시 앞으로 뛰어갔다. 누구든 좋다. 제발 누구든 좋으니까 내 눈앞에서 악몽을 꿔!

“윽!”

다급했던 류제는 길을 아장아장 건너가는 두세 살배기 어린아이를 보지 못하고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조그마한 아이가 다리에 차여 반대쪽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아이가 들고 있던 뿅망치가 삑삑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류제가 놀라 허둥지둥 다가갔다.

“아, 미안해. 내가 가는 길이 급해서. 다친 곳은 없니?”

“뭐야, 앞 똑바로 보고 다니지 못해?”

꼬마가 빽빽 소리를 지르며 투덜거렸다. 류제의 무릎 위치보다 조금 더 큰 어린아이는 다름 아닌 작은 렌이었다.

서스펜더가 달린 반바지에 긴 양말을 신은 아이가 짜증스럽게 류제를 쳐다보았다. 류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마지않던 새로운 렌이다.

어린 시절의 렌? 누구의 렌이지?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 먼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꼬마 렌이 땅에 떨어뜨린 거대한 뿅망치를 들고 총총총 어디론가 걸어갔다.

작지만 트레이드마크인 주근깨 하며, 지푸라기를 닮은 머리카락과 매사 불평불만 많은 것 같은 샐쭉한 눈매는 어딜 봐도 렌이다.

류제가 기뻐서 어린 렌에게 기분 나쁜 변태처럼 따라붙으며 물었다.

“레…렌? 렌, 맞지? 쪼그마하지만 렌이지?”

“그럼 뭐로 보이냐? 바쁘니까 말 걸지 마.”

“아니, 잠깐, 그―”

류제가 이 기회를 놓칠세라 꼬마 렌을 따라가는데 꼬마 렌 앞으로 박쥐처럼 생긴 작은 벌레가 세 마리 등장했다. 성인 손바닥만 한 몸뚱이를 팔락거린 벌레들이 꼬마 렌을 공격했다.

꼬마 렌 대신에 류제가 그것들을 쫓아내 주려는 찰나 렌이 뿅망치를 휘둘러 손쉽게 퇴치했다. 이상한 벌레들은 펑, 연기가 되어서 사라졌다.

“흥!”

꼬마 렌은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며 기고만장해하며 성큼성큼 가던 길을 걸었다. 저것도 진짜 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렌처럼 누군가가 만들어낸 렌일 것이다. 새로운 렌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류제가 꼬마 렌에게 끈질기게 물었다.

“저기, 렌. 넌 누구의 렌이야?”

“알아서 뭐 하게.”

퉁명스럽게 답한 렌은 류제를 가뿐하게 무시했다. 아무렴 좋다. 이 렌의 주인과 만난다면 분명 성으로 갈 수 있을 거다.

뿅망치를 자랑스럽게 둘러멘 어린 렌은 근위병처럼 위풍당당하게 걷더니 어느 거대한 막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제 몸뚱이를 못 가누어 휘청휘청 걸어 다니는 꼬마 렌들이 똑같은 뿅망치를 들고 박쥐들을 삐꼬삐꼬 잡고 있었다.

“조그마한 렌 군들이 엄청나게 많아!”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굉장하군요. 이 많은 렌 학생들을 전부 케어할 수 있다니.”

유네와 비키와 세라가 차례로 조그마한 렌들의 아지트를 훑은 소감을 말했다. 침묵하는 미나는 악몽 하나만큼은 믿었던 ‘그녀’마저 배신하자 악문 이가 덜덜 떨려왔다.

이건 누구 꿈일지 류제는 감도 안 잡혔다. 아무래도 이번 꿈의 주인이 막사 안에 있는 모양이다. 그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조그마한 렌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뿅망치를 들이밀었다.

“넌 뭐야?”

“적이냐?”

“허락도 없이 들어가지 마!”

“신원을 밝혀라!”

장난감 나라 병정들처럼 십수, 아니 수십이 넘어 보이는 렌들이 그들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류제는 렌들의 기세에 뒤로 밀려났다.

그때 막사에서 소란스러움을 느낀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웬 소란이냐? 간식 시간은 아직 멀었을 텐데?”

“왕녀님, 수상한 자입니다!”

“우리들이 붙잡았습니다!”

칭찬을 바라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렌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장한 사람은 바로 이 키아나트리체의 고귀하고 거룩한―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였다.

“와…왕녀?”

“음?”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나 렌들이 하나둘 증식하는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그보다 더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하던 류제가 변화구에 당해 혼이 쏙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녀는 무덤덤한 걸 보니 여기가 니냐롯트 본인의 꿈이 맞는 모양이다.

니냐롯트는 꼬마 렌들이 적이라며 붙들은 류제를 발견하고 호오, 반가움을 표했다. 이 역전의 전장 속에 드문 손님이 찾아왔다.

“놀랄 일이군. 그대가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그거 내가 할 말인데.”

정신이 어질어질해진 류제가 외면하고 싶은 시야를 가리며 중얼거렸다.

기가 막혀 태클 걸 여력도 없다. 무릎 근처밖에 오지 않는 꼬마 렌들이 장난감 병정들처럼 수두룩한 꿈의 주인이 왕녀라니.

왕녀는 렌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 렌하고 왕녀하고 교류가 있기는 했던 거야? 있으니까 이런 꿈을 꾸는 거겠지? 언제? 있다면 왜? 렌은 그런 기색 전혀 없었는데? 물론 렌이 수학여행 내내 왕녀, 왕녀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왕녀님. 왕녀님. 수상한 자입니다. 물러나세요!”

“함부로 다가가면 큰일 난다고요!”

“저리 가! 왕녀님한테서 떨어져!”

깽알깽알 조그마한 렌들이 걸리버에 나오는 소인국 백성들처럼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들 사이에 끼어든 꼬마 렌들이 들고 있던 뿅망치로 삐꼬삐꼬 손님들을 몰아냈다.

하나도 아프지 않은데 열심히 적을 배제하려는 부루퉁한 모습이 귀여워서 다른 곳이 아프다. 아니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왕녀님? 이게 무슨 일이죠?”

류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꼬마 렌들의 군단과 왕녀의 등장에 상당히 놀랐지만 개중에서 가장 정신이 나간 인물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미나였다.

인간 나라의 대국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를 떠안은 니냐롯트가 가진 압박감을 익히 아는 자도 아이러니하게도 미나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뿅망치질을 하고 있는 꼬마 렌들을 보고 꿈틀꿈틀 경련했다.

왕녀가 진 마음의 짐은 가히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악몽에 걸려들어 자신을 절망으로 밀어 넣지 않았던가.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하는 망국의 왕녀가 되리라는 비난이 담긴 서큐버스의 저주로 만든 악몽을 끝도 없이 봐왔을 니냐롯트다. 그런데 이 세상 진지한 여자조차 다른 얼빠진 이들처럼 렌 지미 타령이라고?

갑자기 왜?! 왜냐고,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아! 지금까지 잘해왔잖아. 렌 지미만 얽히면 왜 다 머저리 미친년들이 되는 건데?

“저리 가. 저리 가!”

“에잇.”

“왕녀님께 다가오지 마.”

적에게 향해야 할 뿅망치가 친우들에게 겨눠지자 탐탁지 않은 왕녀가 유치원 선생님처럼 꼬마 렌들을 말렸다. 더불어 미나의 물음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렌 지미여, 이들은 내 손님들이니 무례하게 굴지 말거라. 무슨 일이라니 무엇이 말인가? 언제나 다름없이 나는 우리 키아나트리체를 지키고 있을 뿐. 그대도 나의 노고를 알고 있다고 여겼는데 아닌가?”

“키아나트리체를 지킨…다고요?”

뿅망치를 든 렌들과 함께 키아나트리체를 지키고 있었다는 왕녀의 말도 안 되는 설명에 비키가 환호했다.

“역시, 이 비키 셀로니아. 왕녀님이시라면 언제나 키아나트리체를 위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과연 그래서 렌 학생이 저렇게 많았던 것이군요. 니냐롯트 학생이라면 충분히 렌 학생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왕녀님께서는 렌 군들하고 키아나트리체를 지키고 있었구나!”

그러니 꼬마 병정 렌들이 이정도로 많지. 류제와 미나를 제외한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이 미친 상황을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그때서야 다른 히로인들을 인지한 니냐롯트는 그들과 함께 있는 낯선 렌들을 보고 당혹했다. 가면을 쓴 여장 렌부터 고양이 잠옷을 입은 렌까지, 렌의 다양한 모습을 본 니냐롯트의 눈에 호기심이 동했다.

“반가운 이들이 이리 많이 찾아오다니 오늘은 길한 날인가 보군.”

“다망하신 왕녀님께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내방했나이다. 예법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무례를 범하더라도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사해 주시길. 하찮은 우민인 류제 신리가 왕녀님께 볼일이 있는 듯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러한가. 안으로 들라. 내 반가운 그대들을 위해 차 한잔 대접하지.”

꼬마 렌이 아닌 제 나이 또래의 렌들을 훑어본 니냐롯트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들을 막사 안으로 들였다. 왕녀는 꼬마 렌들 말고도 다른 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하나 그 이유나 원인은 궁금하지 않아 보였다.

하기야 이곳은 그녀의 꿈속이다. 꼬마 렌들이 등장한 것에서부터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비이성으로 점철되었으니 렌이 하나둘 더 등장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다.

비키의 우민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류제도 불평 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두고 보자, 비키. 꿈에서 깨면 두고두고 놀려줄 테다.

“빨리 들어가 이 바보들아!”

“밀지 마.”

“네가 먼저 밀었거든?”

소중한 왕녀를 모르는 이들과 둘 수 없었던 꼬마 렌들도 우르르 막사로 들어왔다. 꾸역꾸역 막사로 들어오는 꼬마 렌들이 화수분처럼 증식했다. 좁은 막사가 꼬마 렌들로 가득 들어찼지만 밖에는 아직도 꼬마 렌들이 줄을 서있었다. 이래서는 끝도 없다.

니냐롯트가 종을 흔들어 꼬마 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자 시끌시끌거리던 꼬마 렌들의 주둥이가 슥 다물어졌다.

“그대들은 일대의 적들을 소탕하고 있으라. 열심히 하면 이야기를 마치고 간식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와아! 간식 시간!”

“맛있는 간식!”

“오늘 간식은 뭐지?”

간식이라는 말에 삐꼬삐꼬 뿅망치를 휘두르던 꼬마 렌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그들은 다시 이상한 박쥐들을 몰아내는 일에 집중했다.

막사 안을 가득 채웠던 꼬마 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니냐롯트는 “음, 좋아.” 하고 까닭 모를 만족감을 내뱉었다.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군. 지금은 전시 상황이라 병사들의 신경이 날카로운 것을 이해해다오.”

“아… 응?”

납득하려는 답의 말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전시 상황이라니, 뭐야. 뭐랑 싸우고 있는 설정인데?

류제는 마음속으로 온갖 태클을 다 걸었다. 한마디라도 던지고 싶지만 말꼬리 잡고 늘어지다가 더 늦어지고 싶지 않았다. 진짜 렌을 위해서라며 류제는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의 소리를 억눌렀다.

“헌데 그대들이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지?”

니냐롯트가 찬장을 뒤지며 물었다.

막사 안은 작전 회의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상에는 검은색으로 표시되는 적들의 모형과 그와 반대되는 파란색 말들이 지도 위에 어질러져 있다.

그중 다른 말의 네 개만큼 큰 파란색 말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갈 곳 없이 방치되어 있었다.

“자진해서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오다니 간도 크구나. 볼일을 마치면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도록 하거라.”

“여기가 뭐 하는 곳인데?”

“보고도 모르는가? 전장의 한가운데가 아닌가.”

니냐롯트가 단언했다. 류제는 꼬마 렌들을 떠올렸다. 농담도 지나치지. 전시 상황이라 하더니 꼬마 렌들이 뿅망치를 들고 간식을 얻기 위해 박쥐들을 사냥하는 여기가 정말 전장? 아니, 궁금해하면 안 돼. 말꼬리 잡아 늘이지 마!

“지금은 유능한 병사가 있어 망정이지 이곳은 실로 위험한 장소이다. 그대들이 한가롭게 올 법한 장소는 아니야.”

“그…렇구나.”

나는 전혀 한가롭지 않고 왕녀의 전장이란 말도 이해 못한다.

정신 차려. 이곳이 상식이 안 통하는 장소라는 거 알잖아. 꼬마 렌들이니 뭐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들이 마족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연결된 꿈을 꾸고 있다는 거야.

거기에 렌이 이 소용돌이의 가운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태클 걸 시간에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기 위해서는 미나 왈 제정신을 유지한 사람이 마법의 중심인 꿈의 핵으로 가야 한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꿈에서 만난 사람들이 렌과 함께 나쁜 기억을 극복해야 하는 조건도 딸려있다. 왕녀는 그 마지막 상대다. 이것만 해내면 모든 것이 끝난다.

잠깐, 꼬마 렌을 보고 무턱대고 따라오기는 했는데 왕녀는 이미 렌을 어마어마하게 가지고 있는 상태잖아. 렌이 이미 추출(?)된 거 아니야?

설마 왕녀의 꿈은 유네처럼 미리 렌을 가지고 있다가 그 렌들로 나쁜 기억을 헤쳐나가는 타입인가. 그런데 왕녀 말로 전장에 유능한 병사들이 있다는데 꼬마 렌들은 왜 있는 거지? 귀여움 담당?

“레…렌들은 이런 위험한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들이 이곳을 지키는 유능한 병사들이다. 보고도 모르는가?”

보고도 몰라, 그런 거! 그냥 귀여운 렌이잖아!

류제가 테이블에 이마를 처박았다. 니냐롯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는 걸까,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고 고고했다.

“니냐롯트 학생도 걱정이 많군요. 당신의 담임 선생님의 입장으로서는 너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별로 그렇지도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할 뿐.”

“왕녀님, 이 비키 셀로니아가 반드시 셀로니아가를 부흥시켜 왕녀님의 편에 서겠습니다. 그 탐욕에 절은 인간들과 홀로 다투시느라 힘드시지요.”

“나는 그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혼자도 아니니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적은 따로 있지 않느냐.”

“왕녀님.”

비키는 감동해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어려운 이야기에 유네나 다른 렌들이 쭈구리가 되어서 눈치를 살폈다.

셀로니아가는 멸족으로 세력을 잃었어도 명실상부 어빌리터파이며 세라 또한 군인으로서 높으신 분들의 의뭉스러운 점을 알고 있으니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세력 싸움을 할 왕녀의 마음고생을 알았다.

다만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서 그 목표가 비뚤어졌다는 게 문제지.

“마음만으로도 고맙다. 지금은 나의 병사들로도 충분하다.”

니냐롯트가 짧게 웃었다. 그녀는 그녀를 돕는 꼬마 렌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간신히 테이블에서 머리를 뗀 류제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했다. 스스로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온 그는 멀쩡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걱정이 있다면 우리들에게 털어내 줘.”

그래야지 내가 성으로 갈 수 있으니까. 뒷말을 숨긴 류제가 사람 좋게 웃었다. 왕녀의 나쁜 기억을 이용해야 했지만 렌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은 죄책감을 덮고도 충분했다.

“걱정이라. 그걸 물어보기 위해 여기까지 날 찾아온 것인가? 그대가?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이상하다니.”

“그대가 내게 그런 관심을 가지다니 의외의 일이다 싶어서.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하다.”

왕녀가 찬장에서 티파티 세트를 꺼내 차를 따라 인원수 별로 건넸다.

찻잔을 받은 류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반투명한 액체를 쳐다보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난 꿈속에서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다른 사람한테 무관심한 건가?

무…물론 걱정을 털어내라 말한 것도 진짜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라 렌 때문에 그런 거지만 의외라는 말을 들을 정도야? 난 적정 수준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대가 여기까지 찾아올 정도면 다분히 나를 걱정했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 나에게는 걱정이 없다. 적의 토벌도 순조롭고 우리 왕국은 안전하다. 이게 다 유능한 나의 병사들 덕분이다.”

니냐롯트가 뿌듯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렌을 가지고 있으면서 털어놓을 걱정이 없다니. 본 적 없는 상황이라 도움이 시급했던 류제가 미나의 팔을 흔들었다.

“큰일 난 거 아니야? 왕녀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다는데?”

“…그…러게.”

“설마 우리가 너무 늦게 온 건가? 이미 렌들로 걱정을 털어냈다는 뜻이야?”

미나는 분해서 입을 앙다물었다. 그럴 리 없잖아! 왕녀는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어야 한단 말야!

왕녀의 꿈에서 키아나트리체 지도부의 모순을 목격한 류제 신리가 찝찝한 심정으로 마법을 해제해야 완벽한 마무리가 될 텐데.

이제 내 마법도 내 마음대로 못 끝낸다는 거야? 아니, 왕녀는 지금껏 내 손에 마음대로 휘둘렸던 주제에 왜 이런 중요한 날 마음이 바뀐 거야? 이것도 렌 지미 탓인가? 왕녀와 렌 지미가 무슨 접점이 있다고?

실은 병마 페스트의 왕이 학교에 쳐들어오기 전 그걸 예견한 재경이 나냐롯트에게 사활을 건 부탁을 했고, 니냐롯트가 고심 끝에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두 사람만의 연결 고리가 있었다.

왕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후인 데다가 렌 지미조차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던지라 니냐롯트가 재경에게 무슨 감정을 품었는지는 그녀만 아는 일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재경이 등급1의 병마가 학교에 쳐들어올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않아 둘 사이는 굉장히 어색했다.

재경은 몰라도 니냐롯트는 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는 마음과 동시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렌 지미와 화해하고 싶다고 바랐다.

그 마음을 남몰래 숨겨오던 와중 왕녀는 여름방학 끝 무렵 악몽에 시달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타고시아 해변에 찾아왔고, 우연찮게 렌 지미와 마주쳤다. 그것을 계기로 그와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이 수면 중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한 감정이 미나의 악몽과 대립하는 바람에 낮잠을 잘 때까지만 해도 악몽이었던 니냐롯트의 꿈이 미나의 말마따나 이 모양 이 꼴로 렌밭이 되어버린 거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나? 미나 네 생각은 어때?”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왕녀가 악몽 인자들을 박쥐로 형상화해서 왕녀 대신 삐꼬삐꼬 때려잡는 렌 지미들에 미나가 쓴 속내를 숨겼다.

“걱정거리… 흠. 걱정거리라.”

여기까지 찾아온 친우들인데 아무 성과도 없이 돌려보내기엔 니냐롯트의 성품이 용납하지 않았다. 니냐롯트가 다향을 음미하다 테이블에 조심스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하나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있었다.”

사적이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송구하게 털어놓을 배짱은 날 때부터 자제되어 왔지만 이곳은 꿈속이고, 그렇기에 덧없을 만큼 솔직한 마음속이다.

그녀가 이전부터 신경 쓰고 있던 부분에 대해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게 뭔데?”

혹시 그녀가 불안을 털어놓으면 조건이 충족되어 성에 갈 수 있지 아닐까, 류제가 눈을 빛냈다.

왕녀는 이전부터 악몽에 자주 시달린다고 했다. 그 이유가 잠잠해진 마족들이 언제 다시 인간들을 해칠지 걱정되어서였던가. 왕녀의 걱정은 분명 그거랑 관련이 있을 거야.

내게 시원하게 근심을 털어놓고 개운해지라고 왕녀. 그럼 이 빌어먹을 꿈에서 깨어날 수 있겠지. 누이 좋고 매부 좋다.

“유능한 병사들이 노력한다고는 하나 아직 우리만으로는 쓰러뜨리지 못하는 적이 있다. 산 하나는 덮을 법한 아주 커다란 적이지. 그자가 숨을 들이마셔 바람을 크게 불어버리면 작은 병사들이 다 날아가 버려서 좀처럼 반격할 수가 없어.”

“…그게 네 걱정이야? 그게 끝?”

“걱정일까 걱정의 결과일까. 실은 그 커다란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럼 쓰러뜨리면 되는 거 아냐?”

“그러지 못하는 것이 나의 근심이다.”

후우. 시무룩해진 왕녀가 차로 마른입을 적셨다.

류제와 미나가 눈빛 교환을 나누었다. 쓰러뜨려야 할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어 걱정인데 실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고? 적이란 마족을 의미하는 거 아니었어?

“쓰러뜨릴 수 없는 이유가 있으신 건가요?”

병사 꼬마 렌 지미로 점철된 낯선 왕녀의 속마음이 정말로 궁금해서 미나가 질문했다. 그녀가 괴롭혔던 왕녀의 악몽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제발 왕녀가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이유가 원래 꾸던 악몽과 관련이 있길 바랐지만 오늘의 왕녀는 좀처럼 미나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그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작은 병사가 아닌 큰 병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 병사가 토라진 상태라 말이다. 아무리 달래주어도 화를 풀지 않는구나.”

“큰… 병사?”

뜬금없는 세계관 확장에 류제와 미나가 어안이 벙벙해서 되물었다.

렌들이 저게 다가 아니란 말이야? 저런 제 몸만 한 뿅망치를 들고 다니는 렌이 더 있다고? 그것도 큰 버전으로? 근데 그게 뭔데?

“큰 병사는 작지 않은 렌… 병사를 말하는 거야?”

“그렇다. 실력이 좋은 병사지.”

“설마 그 병사도 저 꼬마 렌들처럼 엄청 많은 건 아니지?”

정말 그렇다면 정신 나갈 것 같다. 류제가 수백이 넘는 원래 사이즈 렌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것을 떠올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이래 봬도 비밀 병기이다. 작은 병사들처럼 수가 많으면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해서 말이다. 그 병사만 있으면 적을 쓰러뜨리는 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나와 다투어서 그만 혼자 틀어박혀 문을 열어주지 않는구나.”

왕녀가 정말 어렵다며 작게 독백했다.

그 말에 류제의 귀가 쫑긋 섰다. 렌하고 왕녀가 다투었다고? 내가 몰랐던 둘 사이 접점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줘도 이전부터 계속 저렇다. 내 방식이 틀린 것인가. 무슨 방법이 있을까?”

마족 때문에 생긴 압박감은 아니지만 분명 왕녀의 고민은 현실 세계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동안 왕녀와 렌이 다투었다니. 하지만 렌은 비녀를 고쳐줄 정도로 왕녀한테 친절한 편인데?

아, 맞아. 분명 야외 만찬회에서 루이나가 스치듯이 말하길 렌이 왕녀에게 무엄한 부탁을 했다고 했었나.

“다툰 이유를 알려줄 수 있어?”

이건 기회였다.

한시가 급하니 쓸데없는 사족 떨쳐내고 왕녀의 고민만 해결해야 하는데 렌 이야기가 나오면 자제가 안 된다.

왕녀는 사이가 왜 나빠졌었는지 떠올리다가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가 싫어할 것이다.”

“렌이?”

“그렇다. 그래서 나와 언쟁이 오갔으니까.”

신념이 굳은 왕녀는 답하지 않았다. 접점을 알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류제가 실망해서 투덜거렸다.

“이유를 모르는데 어떻게 조언을 해.”

“류제의 말이 맞습니다, 왕녀님. 왜 싸웠는지 알아야 제대로 된 해결법이 나오겠지요. 저도 과거에 이 바보와 싸운 적이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야야. 아파!”

비키가 옆에 앉은 죄 없는 렌의 귀를 잡아당겼다. 하기야 비키는 처음부터 렌과 사이가 좋았던 것이 아니니 설득력이 올라갔다. 잘했어, 비키. 현실로 돌아가면 많이 놀리진 않을게!

“역시 그러한가. 으음…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이전에 내게 무리한 부탁을 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았지. 내가 캐묻자 변명을 하고 사실을 숨기지 않는가. 무리한 부탁은 좋은 결과를 내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화를 내버렸다. 그랬더니 토라져서는…….”

방에 틀어박혀서 알은척도 안 하고 대꾸도 안 하고. 그래서 중요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렌 군은 장난꾸러기니까.”

“하지만 그가 정말로 장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는 궁금하지만 이제 그만 화해하고 싶어.”

“흐음, 예의 그건가.”

렌을 가까이서 봐온 류제가 짚이는 구석을 툭 내던졌다. 렌의 비밀주의. 맨날 몰라도 된다느니 아무것도 아니라느니 분명 뭔가 알고 있는데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개인적인 일에 관련해서 그렇다. 렌의 가정사를 아는 사람은 나나 세라 선생님 정도일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렌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굴었으니까. 왕녀에게 한 부탁도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그것이 내 고민이다. 그대가 바란 대로 털어놓았는데 해결할 방도가 있을까?”

“렌이 말을 안 하는 거라면 어지간해선 입을 열게 하기 힘들 텐데.”

“화해만 하는 거라면 직접 만나서 사과를 해보는 것이 어떤가요?”

비키가 정론을 펼쳤다. 왕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역시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몇 번 시도했지만 불가능했다. 대화조차 나누려고 하지 않아.”

“렌 주제에 고집불통이네. 왕녀님이 나쁜 것도 아닌데.”

“내 대처가 잘못되어서 그렇다. 그리 몰아붙이지 말았어야 했어.”

왕녀가 당시의 기억을 왜곡되게 떠올렸다. 그녀가 몰아붙이자 재경이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굴리며 훌쩍이는 모습은 사실과 상당히 괴리가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각자 해결책을 강구하던 와중 유네가 번쩍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럼 같은 렌 군이라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까요?”

“같은 렌?”

“네, 저희 렌 군이 있으니까요. 렌 군이라면 분명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유네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섯 명의 렌들을 끌어안았다.

비키에게도 렌이 있고, 세라의 렌은 세라가 모르는 틈을 타 꼬마 렌들을 따라 어딘가로 가버렸지만 같은 렌이라면 이야기를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말은 확실히 설득력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감히 부탁하고 싶군.”

“물론 왕녀님과 렌 군의 일인데 도와드려야죠. 그지, 렌 군?”

“어쩔 수 없지. 유네 양의 부탁이라면.”

“후후, 재미있을 거 같아.”

“나한테 맡겨둬!”

유네의 렌들이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그들은 유네가 어떤 터무니없는 부탁을 할지라도 무조건 하겠다고 할 거다.

“그럼 안내하지. 서두르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적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지체할 시간이 없구나.”

“아니, 이쪽도 상당히 바쁘거든. 말보다는 행동이지. 도와줘서 고마워, 유네.”

“에이, 그런 것 가지고. 헤헤.”

유네는 류제의 감사 인사가 쑥스러웠다. 아까부터 방해만 되는 것 같아 미안했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그럼 부탁한다.”

“네. 가자, 렌 군들!”

렌들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막사를 나온 왕녀가 돌산이 있는 곳으로 유유히 안내했다.

가는 도중 꼬마 렌들이 왕녀와 함께하는 그들에게 심술궂은 눈빛을 보내다가 세라의 렌에게 붙들려 잔뜩 괴롭힘을 당했다.

왕녀의 걱정거리인 커다란 렌은 방에 틀어박혔다 했는데 막사 주변에 마땅한 건물은 없었다. 왜 돌산으로 가나 했더니 그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동굴에는 교실 미닫이문이 꽉 닫혀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1학년 8반 교실 문이다.

“응답해 줄지는 장담 못하나 같은 렌 지미라면 말이 통할지도 모르지. 부탁한다.”

왕녀가 큰 버전의 렌 지미가 틀어박힌 곳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그녀를 제친 유네의 렌들이 옹기종기 모여 교실 문을 쾅쾅 두들겼다.

“야. 문 열어!”

“쪼잔하게 언제까지 틀어박혀 있을 거야?!”

“안 나오면 부수고 들어갈 거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다분히 폭력적인 설득에 저래도 되냐며 왕녀가 떨떠름하게 지적했다.

“같은 렌들이니 생각도 비슷하겠지.”

“그래도 저러면 더 놀라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커다란 렌을 상처받은 길고양이처럼 생각하는 듯 왕녀가 노심초사 안절부절못하는 눈초리로 류제를 힐끗거렸다. 렌 지미의 담당은 류제이니 네가 어떻게든 해보라는 뜻 같았다.

바로 그때, 무슨 기적인 건지 교실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뭐야.”

문 사이로 간신히 보이는 삐친 렌의 오른쪽 눈이 매섭다.

그녀가 암만 노력해도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던 그가 다른 렌들의 말에 덥석 문을 열다니 감격한 왕녀가 입을 감싸며 류제를 힐끗거렸다. 저것 좀 보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너희들은 뭐야. 앗. 저리 가. 이거 놓지 못해?!”

“이때다. 어서 문을 강제로 열어!”

“에이잇!”

열린 틈을 타 유네의 렌들이 무턱대고 교실 문 안에 손을 넣었다. 유네의 렌들은 다정하지만 단순 무식의 결정체인 것 같다.

아니, 그녀들의 렌 중에서 그 누구도 지적이고 생각이 있는 놈이 없으니 그냥 그녀들의 렌에 대한 인식이 그 부분에서는 똑같겠지 싶다.

“왜 나랑 똑같이 생긴 놈들이 있는 거야?”

문 안쪽에 있던 렌이 절대 지지 않겠다며 덜컹덜컹 떨려오는 교실 문을 닫으려 힘쓰다 렌답지 않게 머리를 썼다. 문을 확 열고 렌들을 발로 뻥 차준 렌은 다시 미닫이문을 쾅 닫고 문을 잠갔다.

그러니 왕녀가 결국 저렇다며 시무룩한 얼굴로 류제를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왜 나한테 그래? 문제를 해결하겠다 발 벗고 나선 건 내가 아니라 유네잖아!

안에 틀어박힌 왕녀의 렌에게 한 방 먹은 유네의 렌들이 분하다며 단단히 닫힌 교실 문을 노려보았다. 분명 똑같은 렌일 텐데 왜 저렇게 고집불통인지. 한 번 더 해보자며 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닫힌 문으로 달려들었다.

“무슨 짓이야. 당장 이거 열어!”

“안 나오면 쳐들어갈 테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문을 열려고만 하지 상대방을 설득할 생각은 쥐뿔도 없는 유네의 렌들의 만행은 바라지 않은 왕녀는 저들을 멈춰달라며 류제를 툭툭 쳐댔다.

유네도 동네 저잣거리 불량배 패거리들이 죄 없는 사람 집에 쳐들어간 것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음을 알았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는 세상 진지한 기사님 정신을 발휘하는 렌들 때문에 어쩌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렸다.

비키는 유네의 렌들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고 혀를 찼고, 일의 적임자인 세라는 어디론가 튀어간 자신의 렌을 잡으러 사라져 없었다.

미나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퀭한 얼굴이다. 역시 미나라도 이런 정신 나간 꿈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힘든 가보다. 렌을 좋아하는 나도 힘든데 당연하겠지.

“하아, 결국 뒤처리는 내 몫이군.”

류제가 어쩔 수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녀의 렌과 왕녀를 화해시키면 이야기를 끝낼 수가 있다. 왕녀의 렌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나서서 도와주도록 할까.

“물러서 봐. 내가 설득해 볼게.”

그가 시정잡배처럼 건들거리고 있는 렌들을 치우고 교실 문 앞에 섰다.

왕녀의 렌의 심기를 불편하게만 한 유네의 렌들은 류제가 방해한다고 불평을 털어놓으며 주인에게 엉겼다. 고양이 가면을 쓰고 있던 여장 렌이 싱글싱글 웃으며 류제가 어떻게 나오나 즐겁게 관찰했다.

류제가 교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왕녀의 렌이 반대편에서 문을 지키고 서있는 듯했다.

“저기, 렌. 내가 누군지 알겠어?”

“…류제잖아. 여긴 왜 온 거야? 귀찮게 굴지 말고 저리 가.”

안에서 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격을 보아하니 까칠 버전의 렌인가? 나사 풀린 렌들이 너무 많아서 까칠하게 날 세우는 게 되게 반갑네.

“왕녀가 너와 이야기하고 싶다는데 얼굴이라도 비쳐주면 안 될까?”

“싫어.”

즉답이다. 문을 사이에 둔 목소리는 단호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래?

“왜 화가 난 건지 이야기를 해줘야 상대방이 알고 사과를 하지.”

“사과 안 해도 돼. 저리 가.”

왕녀의 렌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거절이 완강하다. 이래서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곤란하네. 왕녀의 렌은 까칠한 만큼 섬세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럼 평생 거기에 있을 거야? 왕녀 말로는 네가 있어야 적을 해치울 수 있다고 하는데.”

“조그마한 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흥.”

말에 가시가 있다. 조그마한 놈들? 설마 하는 생각에 류제가 넌지시 지레짐작을 던졌다.

“설마 꼬마 렌들에게 질투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딴 놈들 아무래도 좋아!”

무례한 지적이 불쾌함을 건드렸는지 왕녀의 렌이 문을 차고 소리를 질렀다. 류제가 화들짝 놀랐다. 그딴 놈들이라니. 그것들도 왕녀의 렌이지 않나. 같은 렌이지만 다른 렌이라서 그런가 꿈속의 가짜 렌들의 관계를 도통 모르겠다.

화내는 걸 보니 질투로 짱박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꿈속 주인인 왕녀 본인이 이유를 모른다면 왕녀가 만들어낸 렌도 화가 난 이유를 알 수 없지 않을까.

“그럼 왕녀의 고민은 풀 수 없게 되어버리는데.”

“관계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끼어들지 마. 이제 됐어. 흥!”

“렌? 렌! 잠깐 기다려. 네가 그래버리면 내가 성에―”

류제의 사정은 알 바 없는 렌의 인기척이 멀어졌다. 왕녀의 말도 무시하는 왕녀의 렌인데 상관도 없는 류제에게 털어놓을 리 없다. 가짜 렌이 당연히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류제는 머쓱해졌다.

“늘 저런 식이야?”

“그렇다. 그래서 곤란하지. 그러나 이는 그대와 관련이 없는 일. 그대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

말은 그렇지만 왕녀의 얼굴에서는 미련과 실망감이 뚝뚝 흘렀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지금 그 누가 렌이 화가 난 이유를 알겠느냐만 꿈에서 깨어나 렌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으니 난처하게 되었다.

“미나, 무슨 뾰족한 수 없을까?”

“다 뒈지라지, 빌어먹을 렌 지미들.”

“어? 뭐라고?”

그녀가 열심히 준비한 모든 곳에서 우후죽순 튀어나와 시나리오를 망치는 렌 지미들 때문에 열이 오른 미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미나의 본심은 다행히도 필요할 때만 귀가 좋지 않은 류제 덕분에 없었던 일이 될 수 있었다.

“나 불렀어? 미안, 나도 곰곰이 생각하느라.”

연기력 하나 일품인 미나는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으로는 렌 지미들을 온갖 방법으로 죽이고 있는 주제에 얼굴만큼은 천사처럼 상냥하다.

“잘못 들었나 봐. 네가 뒈지라는 상스러운 말을 쓴 줄 알고.”

“뭐? 후후, 류제 너도 슬슬 피곤하나 보구나. 적이 바람으로 조그마한 렌들을 날려버린다니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생각난다고 말했는걸~”

유일한 조력자의 연기를 류제는 당연히 믿었다. 미나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류제는 맛이 간 제 귀를 애꿎게 탓했다.

“죄송해요, 왕녀님. 렌 군들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니다, 마음 쓰게 한 것 같아 내가 더 미안하군. 언젠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던 유네는 결국 으름장만 놓고 경계심만 높여놓은 렌들의 행패가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못 들었다.

유네의 렌들도 저런데 더 까칠한 비키의 렌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왕녀의 말대로 이건 왕녀와 왕녀의 렌 둘이 사이좋게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난처한걸.”

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릴 만큼 태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난이도 높은 시험문제를 만난 것처럼 막막하다.

“후.”

미나는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사세부득이 류제의 파몽에 힘썼다. 그녀조차 통제가 안 되는 렌 지미투성이의 꿈은 미나의 악몽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왕녀에게 보낸 악몽 인자가 근처에 있을 거다. 그녀는 그 악몽 인자에게 더 큰 힘을 보냈다.

그때 커다란 땅울림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있던 지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거대한 무엇인가가 다가왔다. 그 정체를 바로 알아차린 왕녀가 당황하며 류제의 등을 밀었다.

“이런, 커다란 적이다. 그대들은 어서 막사 안으로 피신하라!”

잠잠하나 했더니 하필이면 이럴 때 쳐들어오다니. 왕녀가 진원지를 노려보며 허리에 찬 칼에 손을 얹었다.

“커다란 적? 저건 커다란 렌만 쓰러뜨릴 수 있다며?”

“방어라면 작은 병사들로도 어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서있는 것은 위험하다. 어서 움직여.”

“셀로니아 가문의 사람이 겁쟁이처럼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미천한 힘이라도 돕게 해주십시오, 왕녀님.”

대장부가 따로 없다. 언제나 꿈속에서 혼자 싸워왔던 왕녀였기에 비키의 든든함이 달콤했다. 렌 지미들로 악몽에 맞서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도.

친우인 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다. 그러나 그녀를 돕고자 하는 진심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좋다. 그럼 병사들을 따라 진형을 만들라.”

“네. 날 도와줘, 유네.”

“으응.”

현실에서 어빌리티 콤비를 짰던 기억 때문인지 비키가 유네와 합심하고 작은 렌들을 찾았다.

호기심 왕성한 세라의 렌에게 괴롭힘 당하고 있던 꼬마 렌들이 거대한 적이 쳐들어온 것을 느끼고 개미 떼처럼 우르르 모여서 뿅망치를 휘둘렀다.

높은 바위산 위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작지만 제대로 된 병사로 느껴진다.

여기까지 와도 감이 안 잡힌다. 왕녀가 생각하는 렌은 대관절 뭐지? 병사? 유능? 작은? 큰? 까칠한 성격인데 작은놈들은 귀엽고. 지금까지 겪었던 렌들 중에 가장 미스터리하다.

쿵, 쿵, 쿵 발걸음 소리마저 거대한 적의 깊은 그림자가 협곡 너머에서 다가왔다. 곧 나팔처럼 큰 뿔과 박쥐 날개를 가진 미노타우로스가 까마득하게 높은 몸체를 이끌고 모든 것을 짓밟으며 등장했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함락시켜 주마!]

“그렇게 하도록 놔둘까 보냐!”

비키가 어디선가 난 뿅망치를 들고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전혀 폼 나지 않았지만 표정만큼은 포르테 들라크루아 부럽지 않다.

“비키 셀로니아여, 녀석은 강력하다. 공격이 아닌 방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왕녀의 명령으로 꼬마 렌들이 진형을 만들고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그들에게 밀려 휩쓸린 류제는 바위산 위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달려들려는 렌을 말리는 세라를 발견했다.

“세라 선생님, 위험해요!”

[모두 다 날아가 버려라!]

작은 병사들을 날려 보낸다는 예의 바람 공격이 그들을 강타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후우― 뱉자 거센 돌풍이 협곡을 휩쓸고 돌진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강한 바람에 꼬마 렌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우르르 날아가 버렸다.

[하하하하, 이 유약한 것들. 이 내가 전부 무너뜨려 주마.]

왕녀에게 침입하는 악몽 인자는 방어 태세를 갖추는 꼬마 렌들을 손쉽게 물리쳤다.

미노타우로스가 걸음을 뗄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울렸다. 그 진동에 꼬마 렌들은 트램펄린에 선 것같이 몸이 붕 떴다가 떨어졌다를 반복했다.

“저…저렇게 크단 말이야? 저걸 어떻게 막아?”

“할 수 있다. 병사들이여, 자리를 지켜라!”

발도하며 지시를 내린 왕녀는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지만 이놈의 렌 지미들투성이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은 미나로 인해 더욱 강해진 ‘악몽 인자’는 자신만만했다. 스모 선수처럼 다리를 크게 든 미노타우로스가 쿵, 땅을 울렸다.

“우앗!”

“꺄악!”

“으에에.”

류제조차 제대로 설 수 없는 강력한 땅울림 공격이 이어졌다. 바람을 버텨냈던 꼬마 렌들이 우당탕 나동그라졌다. 그 틈을 타 미노타우로스가 다시금 바람을 불었다. 나동그라진 렌들이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하하. 쉽군, 쉬워!]

“꼬마 렌들이……! 너무 강해. 이걸 어떻게 버티란 말이야?!”

“할 수 있다!”

손톱 갈퀴를 휘두르는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보는 니냐롯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손톱 갈퀴가 정확히 그녀를 노렸다. 왕녀는 횡단 베기를 할 태세를 마쳤다.

젠장. 류제가 몸을 날려 왕녀를 피신시켰다. 간발의 차로 미노타우로스의 손톱이 지면을 찢었다.

[도망가지 마라!]

미노타우로스가 다른 손을 휘둘렀다. 이번엔 비키와 유네가 뿅망치를 휘둘러 저지시켰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태산만 한 적을 이쑤시개 정도에 불과한 검으로 대처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 왕녀에게 류제가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타박했다.

“위험하잖아!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흠, 이상하군. 원래 이 정도로 강한 적이 아니다.”

손톱 공격이야 칼을 휘둘러 잘라내 버리면 되는데 어느새 반대로 칼이 부러져 버릴 정도로 강해졌다. 니냐롯트가 두 동강이 난 칼을 살피다 미련을 보이지 않고 칼집에 넣었다.

방어 전문이던 꼬마 렌들은 왕녀가 공격당하자 미노타우로스의 몸에 올라타 삐꼬삐꼬 분노의 뿅망치를 휘둘렀다.

“저리 가, 이 나쁜 놈!”

“에잇, 에이잇!”

[우하하하, 가렵기만 하군. 이제 끝이다. 여긴 내 세상이다!]

미노타우로스가 몸에 올라탄 꼬마 렌들을 벌레를 잡듯 손가락으로 툭툭 튕겼다. 볼썽사나울 정도로 꼬마 렌들은 쪽을 쓰지 못했다.

“무슨 방도라도 있어?”

유감스럽지만 없다. 저 커다란 적을 쓰러뜨리는 것은 언제나 큰 병사의 몫이었다. 때가 안 좋게 적이 평소보다 더 강해진 것 같다. 큰 병사가 틀어박힌 틈을 타 이번에야말로 나를 함락시키겠다는 의미인가. 작은 병사들도 몸짓 하나로 우수수 쓰러지는데 방도가 있을 리가.

“역시 그 렌밖에 없는 건가!”

왕녀는 침묵했다. 류제는 이런 상황임에도 큰 렌에게 부탁하지 않는 그녀를 독하다 흘기며 왕녀의 렌이 있던 동굴로 달려갔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로 적이 쳐들어온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굳건히 문을 닫은 렌을 보자니 고집불통에 자존심 강한 현실의 진짜 렌을 보는 것 같아 화가 절로 났다.

류제가 1학년 8반 교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외쳤다.

“렌!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이야. 네가 없으면 왕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큰일 날지도 모른다고. 정말 안 나올 거야?”

“…….”

“적이 너무 강해서 네가 없으면 쓰러뜨릴 수 없어. 네가 필요해. 들리면 뭐라고 말 좀 해봐!”

현실의 렌에게 한 적 없는 말을 가짜 렌에게 하려니 기분이 이상하다. 꿈이라서 망정이지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는 렌에게 부탁하지 않을 것이다. 렌이 다치는 것은 보기 싫다. 제 몸 아낄 줄 모르는 렌은 상대가 얼마나 강할지라도 무턱대고 덤벼들겠지.

하지만 저 렌은 진짜 렌도 아니거니와 진짜 렌을 구하기 위해서는 저 몬스터를 반드시 쓰러뜨려야 했기에 류제는 불편함을 인내했다.

류제의 거짓된 감정을 읽은 건지 그저 고집을 부리는 건지 왕녀의 렌은 완강했다. 그러는 동안 방어진이 무너졌다.

비키를 비롯해 꼬마 렌들이 합심해서 미노타우로스를 막고는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함락당하는 데 시간이 없다.

이 고집불통. 뭐 때문에 화가 난 건데? 말을 해야 어떻게든 할 거 아니야!

“네게 있어서 왕녀는 이 정도일 뿐인 거야?”

“…….”

“네가 없는 바람에 왕녀가 위험해져도 좋아?”

다른 렌들이라면 충성심을 의심한다고 분개했을 말을 내뱉어도 왕녀의 렌은 묵묵부답이다. 류제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무렵 그의 노력을 잠자코 지켜보던 니냐롯트가 몇 걸음 다가왔다.

“그를 몰아붙이지 말거라. 잘못한 것은 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도 안 나오는 건 널 배반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네 렌은 이 정도야?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놈이냐고!”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지만, 본디 나 혼자 싸워야 하는데 그가 나를 도와준 것이니 강요할 수 없다.”

쾅. 미노타우로스가 꼬리와 날개를 펄럭거리다 빙그르 돌아 주저앉았다. 엄청난 충격파가 그들을 덮쳤다. 비키와 유네가 날아가는 꼬마 렌들을 붙들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구나.”

류제의 말이 맞다고 니냐롯트가 시인했다.

그녀만 다친다면 상관없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녀를 도와주겠다 나선 다른 이들이 상처 입을 것이다. 그가 나서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는 것을 안다면 렌은 더욱더 동굴에서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렌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내버려 둔 건 그녀의 고집이었다. 언젠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머뭇거리던 왕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런 때에만 널 필요로 해서 미안하다.”

그녀가 류제를 제치고 교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굳게 닫힌 문 안에서 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하다.”

“흥, 매번 자기 필요할 때만 부르고.”

답이 없던 렌이 차갑게 대꾸했다. 류제는 이런 것에 하나하나 질투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며 뚱한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래도 계속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던 렌이 답을 해주었다는 건 렌도 왕녀와 화해하고 적을 쓰러뜨리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날 믿지도 않으면서.”

이 말에 니냐롯트는 렌 지미에게 품은 죄책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병마족의 학교 침입 이후의 일이다. 그녀에게 진심 어린 부탁을 했던 렌 지미가 후에 장난이었다 변명하는 바람에 그녀가 실망감을 쏟아내었을 때.

렌 지미는 그런 부탁을 서슴지 않을 만큼 그녀를 믿었다. 반면 그녀는 명분을 저울질하느라 중요한 때를 놓쳤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죽고 렌 지미가 중상을 입었다. 거기에 렌과 류제가 싸우면서 사이가 냉랭해졌다.

마음이 쓰였던 와중 두 사람은 사이를 회복했고, 그녀는 안도했다. 그것과 별개로 본분에 따라 렌 지미가 어떻게 군주급 마족이 학교로 쳐들어올 것을 알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니냐롯트는 그와 접촉했다.

하지만 렌은 그때 그 상황을 모두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러자 니냐롯트가 그만 자신과 류제 신리를 겹쳐본 것이다.

“왕녀, 위험해!”

미노타우로스가 꼬마 렌 지미들이 만든 두 번째 방어진을 무너뜨렸다. 쿵, 쿵, 쿵. 꼬마 렌 지미들도 비키와 유네와 함께 끈질기게 버티고 있지만 얼마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을 뿐.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겠지.

니냐롯트는 그렇게 된다면 정작 후회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일 것만 같았다.

“너를 믿지 않는 게 아니다.”

“여기도 위험하다니까? 일단 물러서!”

“네가 답변을 회피한 이유가 나를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해 화가 나서 말이 그리 나왔다.”

“왕녀!”

닫힌 문 앞에서 버티고 있는 왕녀를 지키겠다며 꼬마 렌들이 작은 몸을 다 바쳐 손톱을 휘두르는 미노타우로스를 막아섰다. 미노타우로스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런 렌들을 날려버렸다.

[일국의 공주여, 여기까지다. 너를 단번에 꿀꺽 삼켜주마.]

“왕녀님은 내가 지킬 거야.”

“저리 가, 이 괴물아!”

“왕녀님을 괴롭히지 마!”

콧바람에 날아갔던 렌들이 기어 나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미노타우로스를 막아섰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으나 역부족이었다. 적을 쓰러뜨리려면 반드시 그가 고집을 꺾고 문을 열어야 했다.

“네게 분풀이해서 미안하다. 네 노고에 감사하고 있다. 나는 그대를 믿고 있어. 그러니 이제 그만 화를 풀련. 이리 부탁한다.”

은빛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났다. 그녀 스스로가 렌 지미에게 가지고 있던 미안함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때는 무르익었다. 악몽 인자 미노타우로스가 미나에 의해 자극되어 커다란 주둥이를 왕녀를 향해 게걸스럽게 들이밀었다. 상황은 극적으로 치달았다.

“끄아앙.”

“으악!”

“왕녀님!”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왕녀를 지키려는 꼬마 렌들이 미노타우로스의 콧김에 날아가 버렸다.

입을 벌리면 그들 따윈 가볍게 잡아먹을 수 있는 괴물에 비키와 유네도 지쳤다.

“나를 도와주었으면 한다. 나의 병사여. 나의 벗이여.”

니냐롯트를 잡아먹으려는 미노타우로스의 주둥이가 흉측하게 벌어졌다. 악독한 엄니 사이로 늘어진 끈적끈적한 침이 왕녀를 위협했다.

류제는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꿈속이라 진짜 죽을 일은 없다지만 만일 여기서 정말로 왕녀가 죽기라도 하면 마법은 어떻게 되는 거야?

“부디.”

왕녀는 그녀의 렌을 믿었다. 그는 어리석고 아둔하지만 상냥하고 답답한 머리에 이따금 바람을 넣어주는 자였다.

그는 용감하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눈앞에 두고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니냐롯트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왕녀!”

악어처럼 벌어졌던 미노타우로스의 입천장이 닫혔다. 누군들 순식간에 찌그러져 형체조차 남기 어려울 강도의 치악력이다.

왕녀를 덮치는 괴물의 반대쪽 손을 막던 류제가 식겁해서 뒤돌아보았다.

[네놈. 감히……!]

연기가 걷혔다. 왕녀의 영롱한 황금색 머리칼이 무사히 휘날렸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둥이를 막은 것은 니냐롯트의 귓가를 스친 하나의 팔이었다. 눈앞에 그녀가 그토록 열리기를 바라던 문이 열려있었다.

“이런 식으로 협박하다니. 진짜 두고 봐, 너.”

“그래, 얼마든지.”

니냐롯트가 웃었다. 그녀를 제친 렌이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했다. 꼬마 렌들과 다른 이들이 온 힘을 다 해도 막는 것이 벅찼는데 그런 강대한 적을 큰 렌은 한 손으로 가뿐하게 저지했다.

“세상에.”

류제가 바람 빠진 얼굴이 되었다. 왕녀의 렌은 여전히 삐죽삐죽한 얼굴에 세상만사 불평불만이 많았지만 대단히도 믿음직스러웠다.

“저리 비켜!”

왕녀의 렌이 왕녀에게 주둥이를 들이밀었던 미노타우로스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엄청난 힘에 미노타우로스가 우당탕 뒤로 넘어졌다.

“하아……. 내 팔자야.”

미나는 끔찍하다며 얼굴을 싸맸다.

어쩔 수 없이 도와주기로 하긴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에는 악몽다운 악몽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왕녀의 렌 지미가 이렇게까지 강할 줄이야. 왕녀의 안에서 렌 지미가 이렇게까지 상징화된 이유가 뭐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손수 고른 이들은 후에 마왕이 부활했을 때 마족의 부흥을 위해 마족으로 만들어야 할 귀중한 어빌리터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불합리함에 분노하고 인간들을 미워해야 한다. 그런데 그놈의 렌 지미가 뭐라고 전부 다 극복해 버리면 쓸모가 없다.

“분명 율폰에게 잔소리 듣겠지.”

미나가 옆에 있던 돌을 찼다. 슈퍼맨처럼 날아올라 악몽 인자를 시원스럽게 때려잡는 렌 지미가 꼴 보기 싫다. 내 자존심을 건드리다니 꿈에서 깨서 보자, 렌 지미.

나콜렙시가 부디 그놈의 귀차니즘을 떨쳐내고 전달한 대로 움직이기를 바랐다. 그녀의 심정을 대신하듯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지며 삼류 악당이나 내뱉을 말로 경고했다.

[두고 보자.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흥, 시끄럽게 쫑알쫑알거리긴.”

결정타를 날린 렌이 콧방귀를 뀌며 착지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사라졌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먼지를 털었다.

미노타우로스가 소멸하자 꼬마 렌들이 승리를 축하하며 삐꼬삐꼬 만세를 외쳤다. 그의 뒤로 그가 적을 쓰러뜨릴 때까지 자리를 지켜주던 니냐롯트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분명 나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시꺼. 내가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쑥스러웠는지 왕녀의 렌은 턱을 삐죽삐죽 내빼며 같은 손발을 올리며 걸어갔다. 동굴 문도 고장 났겠다, 왕녀도 사과했겠다 그는 이제 그만 틀어박히기로 했다.

“와아. 간식. 간식!”

“간식 시간!”

“왕녀님 간식 시간이야!”

적들을 훌륭하게 물리치는 데에 일조한 꼬마 렌들이 왕녀의 옷을 붙잡고 흔들었다.

좋은 일을 했으니 간식을 먹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움직이는 꼬마 렌들은 왕녀가 주기로 한 간식 약속에 눈이 멀어 아우성이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막사 쪽으로 걸어가는 렌을 본 니냐롯트가 웃었다. 화해해서 다행이다.

“으아아, 다…다행이다.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렌 주제에 엄청 강하네. 너는 왜 약한 거야?”

“약한 거 아니거든? 저거 봐. 쟤 밸런스가 이상한 거야!”

비키의 렌이 막사로 걸어가다가 비실비실 날아오는 박쥐에게 머리를 맞고 넘어진 왕녀의 렌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커다란 렌이 꼬마 렌들이나 상대하던 박쥐 때문에 쓰러지자 비키의 말총머리가 안테나처럼 섰다. 옆에서 꼬마 렌들에게 시달리던 니냐롯트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커다란 적에 특화되어 있으니 작은 적에게는 약하다.”

비키의 렌이 거 보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산만하게 움직이는 본인의 렌을 데리고 간신히 바위산에서 내려온 세라는 처음 보는 렌이 꼴사납게 넘어진 것을 보고 치료해 주었다.

세라의 고삐 풀린 망아지 렌은 꼬마 렌들을 잡으러 다니고, 간식 생각에 신이 났던 꼬마 렌들은 세라의 렌을 피해 사방팔방 도망갔다.

“어쨌든 무사히 해치워서 다행이다. 잘 했어, 유네.”

“에이. 비키 양이 다 했지. 그런데 류제 군은?”

“어, 류제?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미나, 너 류제 못 봤어?”

“응? 그…그러게?”

잠시 딴생각을 하는 틈을 타 사라진 류제가 당황스러워서 미나가 주변을 황급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찔끔찔끔 가까워지던 꿈의 중심, 류제가 가기 위해 노력했던 성이 미노타우로스가 등장했던 협곡 너머에 곧 닿을 듯 거대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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