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7) (25/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7)

네네 슈만과 하얀 장미 여인들을 피해 숨 가쁘게 도망간 그들은 장미들이 쫓아오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거친 호흡을 헉헉거리며 길가에 주저앉았다.

성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기 때문에 여기가 어디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일단 미로로 뒤덮인 마을에 1억 년이나 붙들려 있지 않고 빠져나간 것은 박수를 쳐줄 만큼 대단한 성취였다.

“렌 학생, 조심하세요!”

세라가 만들어낸 렌이 칠칠치 못하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지친 와중에도 세라가 렌에게 달려가 부딪친 무릎을 살폈다.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류제는 세라의 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칠칠치 못한 활기찬 바보 맞지?

“쌤, 장난 아니게 아파요.”

“어디 봐요. 선생님이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이 잔소리하자 렌이 싫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지만 칭얼거리는 애처럼 입을 비죽이기만 할 뿐 치료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또 추가된 렌은 물론이고 정신없이 도망가느라 난잡해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이 중에서 가장 정상인이자 자신이 이 지옥 같은 꿈의 주인이라고 믿는 류제가 인원 파악에 나섰다.

제일 처음 합류한 비키와 렌. 저 둘은 찰떡같이 붙어있다. 지친 렌을 비키가 기고만장하게 농락하는 중이다.

두 번째로 합류한 유네와 5명의 렌. 6명 다 지쳐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머지는 이번에 합류한 세라 선생님과 세라 선생님의 렌.

류제를 포함하면 무려 11명이나 되는 인원이었다. 더군다나 렌만 7명이라니. 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돼먹은 거야?

“하아. 그것들 이제 진짜 안 쫓아오는 거 맞지?”

“그…그런 것 같아, 비키 양.”

“그에에. 죽겠다.”

“평생 뛸 거 지금 다 뛰었네.”

소풍 바구니를 옆에 두고 다소곳하게 바위 위에 앉아 쉬고 있는 여장 렌은 물론이고 유네의 렌들은 흙바닥을 구른 그대로 일어설 생각을 못했다.

류제도 숨이 턱 끝까지 막힐 정도로 달렸으니 지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비키. 어떻게 생각해?”

“뭐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류제가 질문했지만 비키는 그 의도를 모르겠어서 맞받아쳤다. 허리에 손을 올린 비키에게 류제는 이 총체적 난국들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하나가 또 추가되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 어때. 전부 필요한 렌이잖아.”

“필요하다고? 이상하다는 생각은 절대 안 들어?”

“이상하다니. 렌이 여기 있는 게 이상하다는 거야? 영문 모를 소리만 하네.”

비키는 렌이 하나둘 늘어난 것 따위 그럴 수도 있다는 눈치다. 류제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건 너라고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고개를 내저었다.

정녕 이 이상함을 공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건가. 아무리 꿈이라지만 답답해 죽겠으니까 슬슬 이야기 나눠줄 사람 한 명쯤은 나타나 줬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류제 넌 괜찮아? 아까 기분 안 좋아 보이더니. 다른 사람이라도 된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 솔직히 우리 버리고 혼자 가버릴 줄 알았단 말야.”

“그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마을도 빠져나왔고 성도 아까보다 가까워졌겠다, 아무래도 좋아.”

“뭐야? 진짜 버리려고 했단 말이야? 이 망할 류제! 자빠져서 코나 박으라지!”

비키가 유도 심문에 걸린 류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번만큼은 그가 잘못했으니 류제는 깊게 반성했다. 이기적으로 굴려고 했던 게 염치없다.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지, 왠지 그때 진짜 혼자 탈출해 버렸으면 렌한테 혼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를 긁적거린 류제가 새로운 멤버인 세라와 세라의 렌을 살폈다.

유네의 렌들과 비키의 렌이 새롭게 영입된 세라의 렌을 둘러싸고 뚫어져라 경계했다. 정신 사나운 세라의 렌은 자기와 똑같이 생긴 6명의 렌을 보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다가 어딘가에 부딪혀서 다치기가 부지기수다.

류제가 머리를 팍 쳤다.

“하필이면 골치 아픈 타입이 추가되었네.”

세라 선생님의 렌은 예상대로 어딘가 칠칠맞은 말썽꾸러기였다. 목소리도 뭐 저렇게 우렁찬지 꿈인데도 귀가 따갑다.

류제가 단념하는 동안 바위에 앉아있던 여장 렌이 소풍 바구니에서 언젠가 렌이 썼던 고양이 가면을 꺼내 들었다.

콧노래를 흥얼흥얼거리며 고양이 가면을 쓴 그녀(?)는 다시 다소곳이 다리를 모아 무릎에 손을 얹었다. 옆에 마주 앉은 유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와아. 렌 군, 그거 오랜만이다.”

“그지? 귀여워?”

“응응, 귀여워. 엄청 귀여워. 그런데 웬 가면이야?”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일품인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 아래로 여장 렌이 고양이처럼 씨익 웃었다.

“이다음 이야기를 위해서지.”

그녀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유네는 그 미소가 어딘가 꿍꿍이속 가득 의미심장해 보였다.

렌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던 유네는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려다가 이내 여장한 렌이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특유의 바보 같은 웃음을 지은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심했는지 모르겠지만 유네는 어쨌든 렌이 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그들은 다시 본 목적지인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머물던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빠져나오는 바람에 있을 곳이 사라진 세라도 자연스럽게 여정에 합류했다.

처음에는 세라도 7명이나 되는 다양한 렌들을 보고 놀랐지만 역시 비키나 유네가 납득했던 것처럼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나마 정상인처럼 보이던 세라 또한 이 세계가 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만큼 걸었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머네. 언제쯤 성에 도착할 수 있을까? 성에 뭐가 있을지 궁금해.”

“비키, 넌 짐작 가는 거 없어?”

“나는 몰라. 류제가 알겠지.”

류제의 뒤에서 비키와 렌이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그들을 따라오는 세라의 렌은 얼마나 활기찬지 몸은 다 큰 주제에 다섯 살배기 애처럼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아무 곳에나 돌진했다.

“와아아. 우와아!”

“렌 학생. 뛰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새로운 렌의 패기에 질려 유네의 뒤에 숨어서 가던 유네의 5총사 렌들은 미로 마을에서 검은 늪에 삼켜지고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아까 정말 무서웠지. 간 떨어질 뻔했다고.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행이야. 안 그래 유네?”

“나한테는 렌 군이 있잖아. 하나도 안 무서웠어.”

“헤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계속 옆에 있어줄게.”

“우리만 믿어.”

개미처럼 줄지어 걸어가는 좁은 오솔길 뒤편은 시끌벅적 소란스러웠지만 류제의 옆구리만 비었다. 그래도 성이 더 가까워졌으니 곧 진짜 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줄줄이 제 렌들과 짝을 이루어 따라오는 그녀들이 부럽지 않다며 류제가 자신을 세뇌했다.

이쯤 왔으면 아무리 바보라도 플롯이 반복됨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새로운 등장인물의 암울한 과거를 렌이 등장해서 구해준다는 루틴을 벌써 3번이나 겪었다.

그럴 때마다 성이 점점 가까워지니 성에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 다른 사람에게서 렌을 추출(?)해 내는 것이라면 류제는 다른 사람과 만나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근데 렌을 추출(?)한 멤버들도 전부 타고시아 해변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비키, 유네, 세라 선생님도 그렇고. 렌도 나온 거라고 치면 이다음에 나올 사람은 아세미랑 수녀 누나랑 루이나랑 왕녀, 그리고 네네 슈만도 이전 마을에서 봤으니 들라크루아 중령님이 나올지도. 또 있다면 미나 정도인가. 다음번에 이 인원 중에 한 사람을 만난다면 내 가정이 맞을 거야.

거기에 세라 선생님의 과거를 내가 자세하게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미심쩍다. 내가 내 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온 것 같다. 이 꿈은 정체가 뭘까.

류제가 의심을 키우며 성으로 향하는 동안 이 모든 것을 계획한 미나가 다른 곳에서 가증스러운 물밑 작업을 진행했다.

그가 어서 이곳까지 오기를 미나는 기대해 마지않았다. 계획대로라면 류제 신리는 가는 길목마다 그녀가 배치해 놓은 귀중한 인간 제물들의 악몽들도 순조롭게 목격했을 것이다.

이번엔 미나 플로리아의 가짜 꿈속에 가까워질 차례다. 희열을 느낀 미나가 소악마처럼 히죽 웃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모든 것이 완벽하다. 계획대로야. 방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나 원만하게 흘러가는걸.

“후후후.”

타고시아 해변에 있던 사람들을 꿈의 세계로 이끈 그녀의 목적은 상처받은 친구들의 악몽을 체험한 마왕의 부활체에게 인간들이 어빌리터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상황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기는 했지만 엄연히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 마족이 존재하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실재하는 현실이다.

키아나트리체의 중심부는 이런 갈등을 강제로 조장하면서도 마족의 존재를 호소하는 방법으로 인간들을 통치한다고 율폰이 그랬다. 현실성도 높으니 단연 설득될 수밖에 없겠지.

이렇듯 인간들이란 제 욕심만 챙기려고 드는 괘씸한 가축들이다. 이딴 놈들을 지킬 필요 없이 마왕으로 각성해서 욕구에 충실한,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되어 마족을 이끌면 된다는 생각을 미나는 류제의 무의식에 단단히 박을 셈이었다.

“시나리오도 완벽하고 연기도 완벽해. 이걸 위해서 내가 무슨 개고생을 했는데.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돼. 물론 이 내게 실패란 없을 테지만.”

그걸 위해 향후 마왕님이 부활하시면 고등급 마족이 될 수 있는 제물들까지 이 타고시아 해변까지 데리고 온 거라고. 로라 하놋을 잇는 괴물인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내 정체를 들키면 어쩌나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거기에 나라카의 마왕성에서 꿈쩍도 않고 쿨쿨 잠만 자는 나콜렙시를 설득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짜증 나게 마가릿 그 미친년까지 봐버렸어. 성질 더러운 년이 끝까지 열받게 하네.

일주일 전부터 아가타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제물들을 찾아 꿈속에 침입해 타고시아 해변에 가고 싶다는 사념을 매일 밤마다 내보냈다고 생각해 봐. 여름방학 동안 열심히 모았던 정기가 전부 소모될 정도야.

야금야금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율폰 그놈은 찔끔찔끔 찾아와서 독촉이나 하고. 붙어먹고 있는 인간들이나 잘 처리할 것이지 사사건건 집요하긴.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날 경계하고 방해하는 렌 지미를 꿈을 잇는 핵으로 만들어버려서 얼마나 후련한지 모른다. 그런 게 꿈속에 섞여서 들어왔다가는 내 계획이 또다시 엉망이 될지도 모르잖아?

역시 난 똑똑해. 사전에 렌 지미를 배제한다는 건 좋은 아이디어였어.

“하하하. 이제 이 여름 동안 고생한 노력의 결실을 맺을 때야.”

수백,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의 악몽을 흡수해 힘이 넘쳐흐르게 된 미나가 깔깔깔 웃으면서 붉은 동공을 빛냈다.

축제에서 율폰과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그 뒤로 등장하지 않았던 그녀가 그동안 겪은 여정이 하찮아서 그런가 마치 렌 지미 같은 삼류 악당이 웃는 것 같다.

“왔다.”

마왕의 기척을 느낀 미나가 웃음을 멈추었다. 애가 타 미치는 줄 알았잖아. 류제.

서큐버스의 차림이었던 그녀는 허둥지둥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돌아가 악몽을 연기해 줄 꼭두각시들을 불렀다. 무섭고 큰 인간 모양의 꼭두각시 인형은 그녀의 각본대로만 움직일 것이다.

“준비 완료했습니다, 주인님.”

“좋아.”

류제가 내 가짜 꿈에 당도하면 더러운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 꼭두각시들이 날 핍박할 거다. 그 순간 류제 신리가 나를 구해주겠지.

그러면서 지금까지 톺아본 다른 악몽을 떠올리며 비어빌리터가, 아니 인류가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로 그들을 속이고 있는지 깨달을 것이다.

“연습했던 대로 하는 거야, 알았어? 우리들의 손에 마족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걸 잊지 마.”

“알겠습니다, 주인님.”

“실패란 없다!”

시합 전에 선수들이 모여서 파이팅을 넣는 것처럼 가짜 악몽에 출연할 배우들이 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를 다독였다.

점점 다가오는 류제의 기척. 미나는 꼭두각시들에게 신호를 주고 끄덕거렸다. 배우들이 각자 위치로 향했다. 기억을 더듬어서 만든 마을 배경도 완벽하다.

자신을 괴롭히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궁지에 몰린 미나. 미나에게 다가가 겁박할 준비를 하는 대여섯의 꼭두각시들. 이 모든 타이밍은 바로 류제가 그녀의 가짜 악몽 속에 발을 디딜 순간에 맞춰져 있었다.

“여기는 분위기가 좀 음산하네.”

“꺄아악! 그…그만! 하…하지 마세요. 제발……!”

“쓸모없는 년 주제에. 가만히 있어!”

“누…누가 좀 살려줘!”

인간들 사이에 숨어있느라 늘어난 연기력 하나 기똥차다. 완벽한 인트로야. 미나가 남몰래 씩 웃었다. 이럴 때만큼은 인간일 적 기억이 도움이 되는군.

류제, 어서 날 구해줘. 그러면서 잔뜩 깨달으렴. 인간들은 모두 멍청이에 거짓말쟁이에 이기적인 족속들이라는 것을!

미나가 섣부른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누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

“도와줘야 해!”

“이야압!”

매사에 시큰둥한 류제보다, 아니 누구보다 먼저 미나에게 달려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의로운 렌들이다.

비키의 솔직하지 못하지만 아닌 척 상냥한 렌도, 유네의 다정하고 혈기 넘치는 렌들도, 세라의 폭주 기관차처럼 저돌적인 렌도 모두 ‘괴롭힘당하고 있는 사람은 구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있는지 그들은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앞으로 달려나가서 미나의 꼭두각시들에게 들입다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꺄악! 뭐…뭐야?”

“이 쥐꼬리만 한 놈들이― 윽!”

“저리 꺼져. 이 악당!”

“작다고 무시하지 마!”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거 몰라?”

길거리 깡패처럼 생긴 꼭두각시들에게 올라타 퍽퍽 주먹질을 하는 렌들 사이로 안경이 비뚤어진 미나가 먼지 구덩이 속에 주저앉았다. 어라? 에? 응?

“우아아, 렌 군! 사람을 때리면 어떻게 해.”

“렌 학생, 제가 무턱대고 덤비면 안 된다고 늘 말하지 않습니까.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1번이에요!”

“렌, 이 바보! 위험하게 갑자기 달려가면 어쩌자는 거야! 그리고 그 상황에선 작은 고추가 맵다기보단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서 렌들이 왜 우르르 뛰쳐나갔는지 몰랐던 각 렌들의 주인이 사람을 패는 렌을 나무랐다.

고양이 가면을 쓴 여장 렌은 소풍 바구니를 든 채 싱긋 웃으면서 그런 렌들을 구경했다. 혼자만 렌 같지 않은 기묘한 분위기다.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을 살피던 류제가 여장 렌에게 떠보듯이 물었다.

“너는 안 뛰쳐나가? 똑같은 렌이잖아.”

“이 렌 군은 그런 험악한 짓 안 해!”

유네가 여장 렌은 저러면 안 된다고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고 말렸다. 그렇다며 여장 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유네가 생각하는 저 모습의 렌은 그런 이미지란 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에에? 으응……?”

삐딱해진 안경을 다시 쓸 정신도 없이 미나는 꼭두각시를 쓰러뜨리는 6명이나 되는 렌들을 보고 얼이 빠져 입이 떡 벌어졌다.

6명? 그 짜증 나는 놈을 내 꿈속에서 속 시원하게 제외시켜 버렸다고 생각했더니 무려 6명으로 늘어서 등장했다?

시작도 전에 엉망이 되어버린 극본에 미나가 난장판 속에서 홀로 혼이 나갔다.

“미나 양? 혹시 그쪽에 있는 사람… 미나 양이야?”

흙먼지가 날리는 그 난리 통에서 미나를 발견한 유네가 서슴으며 물었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미나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주춤주춤 연약한 척 벽을 짚고 일어섰다.

류제가 오다 만난 사람들을 전부 끌고 왔는지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미나가 비뚤어진 안경을 간신히 바르게 썼다.

“유네? 류제랑 비키 님에다 선생님까지. 그리고 이…이…이…이상한…….”

놈들은 뭐야? 미나가 자신의 꼭두각시를 차곡차곡 포개서 어디에서 났는지 모르는 리본으로 그들을 거대한 선물 포장하듯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렌들을 보며 입가를 실룩거렸다.

유네가 당연하다는 듯이 활기차게 답했다.

“렌 군들 말야? 렌 군들이야 렌 군들이잖아. 그런데 미나 양 괜찮아? 무슨 안 좋은 일에 휘말린 건 아니지? 우리들 아까부터 그런 일에만 시달려서 걱정이야.”

“아.”

미나의 머리가 다시금 정지되었다. 렌 군들이야 렌 군들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미나는 암만 제가 만들어낸 꿈속이라지만 인간들의 무의식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것보다 내가 인간들에게 얼마나 비참한 일을 당했는지 류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또 렌 지미 때문에 일을 망쳐버렸다.

미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계획이 억울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방방 뛰며 땅을 차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어색하게 웃는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덕분에 난 괜찮아. 하하.”

“저 사람들이 미나 양 괴롭혔던 거 맞지? 렌 군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지?”

비틀거리는 미나를 부축해 준 유네가 미나의 속도 모르고 에헤헤 웃었다. 미나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다행이라고? 다행인 것처럼 보여? 내가 각고의 심열을 기울인 끝에 기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한 계획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렌 지미들 때문에 엉망이 되었는데 지금 감히 다행이라고 말한 거야?

“잡것들이……!”

웃기지 마. 내가 얼마큼이나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여기서 마왕님이 날 멋지게 구해주고 마왕님이 내 대신 인간들에게 분노하면서 포효하는 그런 슬픔과 좌절이 있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란 말야.

이게 뭐야, 6명의 도플갱어가 한량들을 때려잡는다고? 완전히 삼류 코미디가 되어버렸잖아! 이렇게 되면 완전 플랜B도 C도 전부 무용지물 아냐?!

“해치웠다! 헤헤.”

“이 정도야 껌이지.”

“이상한 아저씨들.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면 못써.”

플랜B는 만약 류제가 그녀를 괴롭히는 인간들을 봤음에도 분개하지 않았을 경우 꼭두각시들이 류제를 협박하는 작전이고, 플랜C는 류제가 그녀를 괴롭히는 꼭두각시들에게 분개해서 해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을 향해 분노를 느끼지 않을 때 유네 같은 인간에게 타깃을 돌려 공감을 유도하도록 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꼭두각시들이 저 모양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하고 처량한 소녀여야 한단 말이야!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미나가 꼭두각시들더러 빨리 그 엉성한 리본을 찢고 나와서 이 비상사태를 해결하라고 눈짓을 지었지만 렌들이 묶은 리본이 보기보다 견고했는지 꼭두각시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팔다리 여럿 달린 살덩어리 괴물이 덫에 걸린 걸로만 보였다.

꼭두각시들은 주인인 미나가 무서워서 땀을 찔끔찔끔 흘렸다. 렌 지미들은 덩치들이 자신들에게 쫄았다며 기고만장하게 웃었다.

“우리의 두려움을 이제 알았냐?”

“이 자식~ 얌전히 거기서 반성하고 있어. 반성의 기미가 보이면 풀어주지.”

“렌 군! 묶여있는 사람 못살게 굴지 말고 내려와.”

골목대장처럼 꼭대기에 올라가 장난치는 렌들을 유네가 만류했다. 비키도 그걸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튼 조금만 잘하는가 싶으면 곧바로 잘난 척이라니까.

“맞아요. 그러다 떨어지면 더 크게 다친답니다. 미나 학생, 학생은 어디 다친 곳 없지요?”

“아앗. 네. 놀란 것일 뿐이라…….”

“다행입니다. 뒤숭숭한 세상이니 항상 조심하세요.”

“선생님 말씀이 맞아. 아무 일도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렌들이 갑자기 달려나가서 깜짝 놀랐지 뭐야. 저 녀석들이 널 괴롭히려고 한 거지?”

“으응. 내가 뭔가 잘못했나 봐. 눈에 거슬렸던 거겠지. 분명 내가 싫―”

“하여튼 어딜 가나 저런 놈들이 문제라니까. 야, 렌! 나 대신 한 대 더 때려줘.”

이번엔 비키가 미나의 툭 끊고 말했다. 잘 참고 있던 미나의 안면 근육이 움찔거렸다.

충실한 비키의 렌이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꼭두각시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그러자 삐그덕. 목이 툭 떨어져 버렸다. 소스라친 렌이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

렌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냐며 비키에게 무언의 질문을 날렸지만 비키는 미나에게 신경 쓰느라 꼭두각시의 목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지 못했다.

잘못된 거 아닌가 주변을 둘러보던 렌이 스리슬쩍 목을 주워 다시 끼워준 후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한걸음 떨어진 뒤에서 그 모습들을 지켜보던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미나를 스쳐 지나갔다.

“다친 곳 없다니 다행이네. 나쁜 놈들도 처리했으니 우린 계속 가도록 할까?”

“어어? 가…가다니 어디를?”

미나가 다급하게 류제를 붙잡았다. 아직 그녀의 과거나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활함에 대해 스토리텔링도 못했는데 내 차례가 이대로 끝? 그게 아니라며 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으란 말이야. 무관심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심하잖아!

“여기서 어디를 가는 건데?”

미나의 눈에서 표독스러움이 번뜩였다. 그 시선이 섬뜩했던지라 류제가 이상한 사람 보듯이 미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본성이 나와버린 미나가 감정 조절을 위해 시선을 회피하는 동안 옆에 있던 유네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류제 군은 성으로 가고 있어. 우리도 성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함께 따라가고 있는 중이야. 미냐 양도 따라갈래?”

“성에 간다고? 어째서?”

“글쎄. 물어봐도 류제 군이 답해주지 않네. 엄청난 보물이 있지 않을까?”

“거참, 남이사 궁금한 것도 많네.”

입을 비죽거린 류제가 모르쇠로 잡아뗐다. 류제가 별생각 없이 꿈속을 배회하는 거라 생각하던 미나는 그가 실은 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저 성은 그녀가 연결한 꿈의 중심이다. 당연히 그녀가 핵으로 만들어서 꿈을 빼앗았던 렌 지미도 저곳에서 잠들어 있다. 설마 알고 있는 건가? 알 리가 없는데?

“거봐, 치사하게 대답을 안 해줘. 그래서 우리도 궁금해서 따라가고 있어.”

“그럼 저… 그… 렌 지미들은? 저거 류제가 만들어낸 거 아냐?”

류제가 렌 지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꿈속에서 저렇게 증식시켰을 거라고 생각하던 미나가 묶인 꼭두각시들을 상대로 우당탕쿵탕 장난질하는 렌들에게 손가락질했다. 렌 지미를 저만큼 만들어냈는데 성에는 왜 가는 거야?

“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렌을 내가 왜 만들어내.”

뭐라고? 아니라고? 미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것도 모르고 유네는 렌이 많은 이유를 열심히 설명했다.

“렌 군들 말야? 렌 군들이야 렌 군들이잖아.”

그러니까 그런 이상한 문장으로 날 설득시키려고 하지 말란 말야. 세상에서 가장 신 레몬을 맛본 사람처럼 오만상을 구긴 미나는 당연한 논리로 설명했다.

“아니, 그러니까… 레…렌 지미는 원래 한 명이니 저렇게 많으면 안 되지. 응, 절대 안 돼. 도대체 저 많은 렌들이 어디서 솟은 걸까~ 싶어서.”

“아하, 미나 양도 그게 궁금했구나. 그게 어쩌다 보니 모두가 모두의 렌 군을 가지게 되었거든. 미나 양도 미나 양의 렌 군을 만들면 어때? 엄청 좋아~”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미쳤어? 내 렌이라고? 가까이 있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쳐 울컥울컥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는데 내가 왜 그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거야?

유네 나르타, 이 인간 계집,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끔찍한 소리나 하다니 악마가 따로 없군.

“아하하,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나는 별로 그런 생각이 안 드네. 모두의 렌이라니 진짜 이해가 안 간다.”

“오랜만에 맞는 소리를 듣는 것 같네. 미나 너도 역시 렌이 저렇게 많은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뭐… 평범하게 생각하면 같은 사람이 저렇게 많을 수가 없지.”

드디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등장했다. 류제가 쌍수를 들고 미나를 반겼다. 다들 ‘그럴 수도 있지.’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납득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었기에 미나마저 그럴 거라 치부했는데 웬일로 말이 통한다, 류제는 기뻤다. 아까까지 누구한테 공격당하거나 말거나 관심 없던 미나를 다시 보게 될 정도였다.

“그렇지? 같은 사람이 7명이나 되는 건 아무리 꿈속이라도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렇지. 같은 사람이 7명이나 되는 건 아무리 꿈속이라도 말이 안 되는 거야.”

쿵짝이 잘 맞는 류제와 미나가 티키타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나누고 있자 다른 히로인들은 두 사람 다 이상하다며 숙덕거렸다.

그러다 두 사람 다 상대방의 말 속에서 놀랄 만한 것을 찾아내고 웃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들이 동시에 외쳤다.

“미나, 너 여기가 내 꿈속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렌 지미가 7명이라고 6명이 아니라?”

헉. 미나는 렌 지미가 수두룩한 이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꿈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한 박자 늦게 입을 막았지만 흘러내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류제의 눈치를 살피던 미나가 잽싸게 머리를 굴려 새로운 시나리오를 하나 짰다.

일. 이. 삼. 땡. 엉성하기는 해도 새로운 컨셉으로 밀고 나가기로 결심한 미나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만지작거렸다.

“우와, 신기하다. 류제도 알고 있는 거야? 이건 이따가 우리끼리 이야기하자. 아무래도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이른바 ‘나도 너와 같은 입장이다. 내가 모든 것을 알려주도록 하마’ 작전.

이렇게 하면 류제는 나에게 기대게 되겠지. 이런 우위를 차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내가 류제에게 이 꿈속 세계에 대해 조금씩 알려주면서 인간이 얼마나 교활하고 이기적인 존재인지 어필하는 계획. 좋아, 완벽해.

미나가 새초롬하게 웃으며 다른 이들을 살피는 시늉을 하자 류제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상 인물임을 피력하는 미나의 속셈을 류제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류제도 그렇고 미나도 그렇고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렌은 현재 7명이야. 이상하게도 미나 너한테는 렌이 없는 것 같네.”

“그…그게 이상한 거야?”

“그야 사람들은 렌 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잖아?”

아니, 안 가지고 있어. 내 악몽 속에 그런 이상한 규칙 만들지 마. 미나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류제도 미나의 편을 들었다.

“미나는 너희처럼 그런 게 아니나 보지. 하지만 비키 말은 맞아. 렌은 7명이야. 저기 저 저돌적으로 달려들다 꽁꽁 묶인 사람들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넘어지는 건 세라 선생님의 렌이고, 맨 아래에 깔린 사람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건 비키의 렌, 그리고 나머지 4명의 렌과 이쪽에 있는 이 여장 렌은 유네의 렌. 모두 7명이야.”

“아… 이쪽도 렌이었구나.”

“귀엽지?”

“그…그런가?”

아니 그럼 저 망할 골 빈 멍청이가 7명이나 있다는 거야?! 미나가 있는지도 몰랐던 여장 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을 아꼈다.

남자 주제에 왜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고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는 건데? 저 턱이 없는 고양이 가면은 왜 쓰고 있는 거지? 입술은 왜 반짝반짝거리냐고! 왜 손에는 소풍 바구니를 들고 있는 거야? 자존심도 없나!

미나가 렌의 여장에 대해 모르는 눈치자 옆에서 류제가 미나의 귀에 속삭이며 설명해 주었다.

“왜, 저번에 축제 때 여장했다고 애들이 사진 돌려 보다가 자유 게시판에 붙여놓고 그랬잖아.”

“그랬나? 난 관심이 없어서. 하하하.”

“그래? 여튼 그거야. 유네가 그때 모습을 인상 깊게 생각했나 봐. 저 가면도 축제 때 썼던 거거든. 그런데 그 사진을 못 봤단 말이야? 그거 렌이 전부 빼앗는 바람에 이제 보기 힘들 텐데.”

그딴 거 알 게 뭐야. 내가 왜 렌 지미의 끔찍한 여장 모습을 봐야 하는데? 안 그래도 증오스러운 인간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것 때문에 멘탈 관리하느라 힘든데 그딴 것으로 내 안구를 버릴 필요가 왜 있어!

그래서 일부러 다른 인간들이 꺄악꺄악 웃어대던 걸 안 보고 있었는데 왜 여기서 봐야 하는 거야. 잘 피했다고 생각했더니. 으윽, 어디까지 날 귀찮게 할 셈이냐, 렌 지미!

“그렇구나, 아하하하. 나도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하하하.”

“반가워~”

“아… 그래.”

남자 목소리를 억지로 까뒤집어 높은 목소리를 내는 시늉에 미나가 소름이 끼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변태 아냐?

“근데 그럼 류제 네 렌은 없는 거야? 너는 렌하고 친하니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 그게 좀 그렇게 됐어.”

류제가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슬쩍 제정신일 것 같은 미나에게만 특별히 말해주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꼭두각시들을 상대로 사고를 치기 시작하는 제각각의 렌에게 달려나가 말리는 틈을 타 류제가 속삭였다.

“내 렌은 저 성에 있거든.”

남부끄러우면서도 직설적인 말에 사실을 알고 있는 미나의 얼굴이 다 새빨개졌다.

꿈의 중심에서 있을 렌이 그녀가 잠재운 진짜 렌이라는 사실을 류제가 꿰뚫었다는 건 세 가지를 시사했다.

하나는 류제의 마왕으로서의 힘이 전보다 강해져 미나의 억지스러운 꿈에 쉽사리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

다른 하나는 류제가 렌 지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해서 스스로 가짜 렌을 만들지 않을 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가 이 마법의 약점인 꿈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다들 렌이 있는데 네 렌만 없다는 건 이상하기는 하네. 뭐, 이 꿈속의 규칙 같은 건가 봐. 네 렌도 돌연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지금까지 경험한 바로는 렌이 나와야만 성이 가까워졌거든.”

“으응… 거…걱정해 줘서 고마워.”

류제의 입에서 나온 재앙 같은 소리에 미나가 입을 실룩거렸다. 그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 *

미나가 야심 차게 준비한 꼭두각시들이 죄다 렌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리고, 혹시나 기다린 류제가 민망하게 미나의 렌은 나타나지 않았다.

렌들에게 힘껏 두들겨 맞고 리본에 묶여서 녹아웃이 되어버린 불쌍한 꼭두각시들은 내버려 두고, 미나는 성으로 향하는 류제의 여정에 합류했다.

별수 있는가. 준비했던 시나리오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새롭게 정한 컨셉으로 밀고 나가야지.

혼자만 렌이 없는 그녀를 류제가 의심하기는 했지만 미나는 그렇다고 억지로 렌 지미 형상의 꼭두각시를 생성하는 건 절대 싫었다.

“너를 만나고 나서 아까보다 성이 가까워졌어. 이대로 가면 곧 성에 당도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그래?”

“참 이상하네. 이전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렌이 새롭게 추출(?)되어야만 성이 가까워졌거든. 미나 네 경우는 특별한 것 같아. 아, 혹시 정상인에게는 그런 과정이 필요 없는 건가?”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 저런 건 제정신이 아니어야 감히 할 수 있는 거 같아.”

여정 내내 비어있다가 드디어 채워진 류제의 옆자리는 미나의 차지가 되었다. 미나는 뒤따라오는 렌들과 그 주인들이 재잘거리자 끔찍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렌 지미가 아무리 동네방네 들쑤시고 다니는 오지랖 넓은 건방진 인간이라고 하지만 7명은 좀 심한 거 아닌가. 종류별로 다양하기도 하다. 도통 저 인간들의 무의식에 렌 지미가 깊숙하게 박힌 이유가 뭘까.

“그지? 좀 제정신 아닌 것 같지? 하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존재하다니. 정말 감격스럽다. 널 만나서 진짜 다행이야.”

“너도 저 사이에 껴서 꽤나 고생했구나. 처음 보는 나도 소름이 끼치는데 너야 오죽했겠니.”

“소름이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 안 통하니 말이지.”

“지금까지 수고했어.”

미쳐 돌아가는 세계에 익숙하지 않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미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 정상인이라며 류제가 안도했다.

미나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성에 닿기 전에 나도 미쳤겠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있으니 숨통이 트인다.

“류제, 네가 성에는 렌이 있다고 했지? 그럼 류제 넌 렌 때문에 성에 가는 거야?”

“그…그것보다는 이 세계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성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거든. 거기에 가면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 렌하고는 별로 관련 없어.”

류제가 어색하게 부정했다. 미나 말이 맞았지만 그가 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죽을 때까지 비밀이었다.

“흐음. 그렇구나.”

류제의 얼굴이 새빨갛고 말도 더듬어서 미나는 렌 지미 그놈 때문에 가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지만 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나가 안다는 걸 모르는 류제는 잘 속였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듣는다면 미나 너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거야. 간신히 맨정신을 유지한 나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어.”

류제는 정상인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에 젖어 미나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알려주었다.

처음에는 류제 그도 이곳이 제 꿈속인지 몰랐는데 성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여행을 떠났다가 비키를 만나게 되고, 비키의 안 좋은 기억 속에서 렌이 등장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걸 목격하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평소와 다른 렌의 행동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성으로 떠났는데 렌과 비키가 귀찮게 따라오지 않나, 유네를 만났는데 유네의 곁에 렌이 5명이 더 있지 않나.

덕분에 여기가 꿈속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는 것과 유네의 안 좋은 기억이 유네를 괴롭혔는데 알아서 잘 극복했다는 것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세라는 머리가 장미로 된 여인들이 있는 이상한 마을에서 만났는데 그 마을에서는 누구든지 이상한 규칙을 지켜야 했고, 성으로 가려면 반드시 그 마을을 지나쳐야 하는데 외부인은 마을 반대편으로 갈 수 없는 규칙이 있어 무척 짜증이 났었다는 것도 털어놓았다.

그러다 감옥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세라 선생님을 만났는데 세라 선생님의 트라우마에서도 렌이 불쑥 튀어나왔다고.

렌들이 증식하는, 듣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엉망진창 이야기를 전해들은 미나가 눈가를 실룩거렸다. 렌 지미는 그녀가 만들어낸 악몽 인자만큼 끔찍하다.

“엄청난 일이 있었구나.”

“돌연 꿈인 걸 깨달았지, 다른 애들은 제정신이 아니지, 렌은 점점 늘어만 가지. 답답하고 짜증 나 죽겠던 와중에 말이 통하는 정상인을 만나서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몰라.”

“아하하. 다행이네.”

가짜 렌 지미가 저만큼 많아진 내막을 알게 된 미나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저것들은 류제의 말대로 진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가짜 렌 지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렌들이 미나에게 쓸데없는 적개심을 보이지는 않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녀의 계획을 망친 건 똑같았다.

렌 지미 네 이놈. 방해꾼을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걸로 증식하다니. 속에서 입으로 불길을 쏘아대는 미나는 가증스럽게도 겉으로는 청초하고 수줍은 은방울꽃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꿈속이잖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면 괜히 피곤해져.”

“하아, 그게 잘 안 되더라. 이 이상한 세상은 영문을 모를 일들만 벌어지니까.”

댁도 렌 지미에게 집착하는 거 충분히 영문 모르게 이상하다고. 웃는 낯인 미나가 속으로 걸쭉하게 투덜거렸다.

꿈을 자각했으면 거짓임을 알아도 좋아하는 사람 하나쯤은 마음대로 만들어낼 법도 한데 어떻게 오로지 성에 있는 진짜 렌 지미만 찾을 수가 있을까. 아무리 마왕님이라지만 집착 한번 끔찍도 하다.

미나의 흉흉한 낌새를 알 리 없는 류제는 안절부절 눈짓을 보내다가 참지 못하고 먼저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저기, 미나. 이제 슬슬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여기가 꿈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었지?”

“아 그거. 미안. 깜박 잊고 있었다.”

정보를 원하는 류제의 다급함이 느껴진다. 우월감을 맛본 미나는 고민하는 척 눈동자를 굴리다가 으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거무튀튀한 속내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류제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폼 좋게 고민하는 모양새다.

뜸을 들이던 미나가 입을 열었다.

“류제. 실은 여기는 내 꿈속이야. …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

“뭐?”

“그러니까 여기는 내 꿈속이고 네가 내 꿈에 나온 거라고 말하면 믿겠냐고.”

“내가 네 꿈속에 나오고 있는 거라고?”

모름지기 인간을 속이려면 9할의 사실과 1할의 거짓말을 섞어야 한다고 했다. 미나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설명하기 힘든데 이것만큼은 확실해. 이건 내 꿈이고 내 꿈에 너희들이 나온 거야. 그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기억을 류제 네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군!”

지금껏 마음에 계속 걸렸던 부분이 명쾌해지자 류제가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질렀다. 확실히 비키도 그렇고 유네도, 세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대략적으로만 알지 정확한 내용은 몰랐는데 꿈에서는 자기가 겪은 양 생생했다.

그 이유가 서로의 꿈에 들어왔다거나 하는 기묘한 현상 때문이라면 퍼즐이 들어맞았다. 아니, 그것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아?

“하지만 그게 가능할 수 있어? 남의 꿈속에 들어와 있다니. 만화도 아니고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그러게. 으음… 이유가 뭘까. 알 것도 같은데 잘 생각이 안 나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는 척하던 미나가 적당히 얼버무렸다.

재경이 지금 옆에 있었더라면 표독스럽게 미나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을 거다. 범인은 너잖아! 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어찌 되었건 서로 꿈이 섞였다는 건 평범한 현상은 아니야.”

“어떤 어빌리터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마족이 우리를 노리고 있는 건가?”

“둘 다 가능성이 있어. 네 여동생… 아세미라고 했던가. 그 애가 어빌리티를 무의식적으로 발현하게 되었다거나. 아니면 백장미 부대에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거나.”

“설마. 아세미는 평범한 인간인걸. 아닐 수도 있지만. 백장미 부대는 잘 모르겠다.”

아세미면 다행이지 만약 마족이 얽힌 거라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고민한다고 해서 꿈에서 깨어날 방법이 툭 튀어나오진 않을 것이다. 지금은 그의 여정이 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 보탬이 되었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류제가 복잡해하자 미나가 후후 웃었다.

“왜 웃어?”

“아니, 왠지 이런 상황이면 항상 어빌리터와 마족은 한 쌍으로 의심받는구나 해서.”

허를 찌르는 문장에 류제는 지금껏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곱씹었다. 어빌리터의 입장에 선 그가 자연스레 변명했다.

“마족의 마법이나 어빌리터의 어빌리티 말고는 다른 이유가 생각이 안 나는걸.”

“그런 부분이 비슷하다는 말이야.”

그야 마족이나 어빌리터 둘 다 이능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서는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그게 저렇게 키득거릴 정도까지 웃기지는 않은 것 같다.

류제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미나의 심정을 모르겠어서 이상한 건가 되짚어 봤지만 아무리 봐도 마족과 어빌리터가 닮았다는 이야기는 웃음이 나오는 포인트가 아니었다. 난처해진 류제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있지, 류제. 넌 어빌리터와 마족은 언제나 한 쌍이라는 생각 안 들어?”

한참을 배를 잡고 웃은 미나는 안경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질문하는 음성에 웃음기가 잔뜩 어려있었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렇지 않아? 이능적인 면에서도 비슷하고. 비어빌리터의 시선에서는 마족이나 어빌리터나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둘 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에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족은 인류의 적이야. 우리는 인간이고. 인류를 대표해서 마족과 싸우고 있는데 당연 같을 수 없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안경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연분홍빛 눈동자가 샐쭉하게 빛났다. 류제는 의심하지 않았다. 웃음을 거둔 미나가 차갑게 식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도서관에 있는 고서에서 읽었는데 마족과 대립하기 전 아주 먼 옛날에는 어빌리터도 핍박의 대상이었대.”

“그래?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기록에서 찾기엔 아주 먼 이야기고 어빌리터가 마족과 싸워야 하는데 어빌리터의 반발을 유발할지도 모르니 방해가 되는 거겠지. 이런 이야기가 실린 책들은 실제 많이들 분서되었는걸. 류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미나가 초록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내 어빌리티가 너무 쓸모없어서 다른 사람들이 날 싫어했었어.”

“설마 그게 아까 그 사람들이야?”

류제가 미나의 악몽에서 렌들이 때려잡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맞아.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마족이 없다면 우리 어빌리터들은 인류에게 있어서 마족과도 같은 게 아니냐는 생각. 그야 무섭겠지. 불명의 이능은 언제나 두려운 법이잖아.”

“과장이야. 어빌리터는 인류를 위해 싸워주는 존재니까 사람들은 늘 고마워하는걸.”

“몰라서 그래. 우리들은 마족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비로소 그들 앞에 존재할 수 있는 거야.”

어빌리터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그것 하나만으로 정의 내려지다니 류제는 농담하는 건가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하려던 류제는 뭔가가 마음에 걸려 입을 달싹거렸다. 반박할 다른 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미나가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잘 생각해 봐. 우리가 제립학교에 입학한 건 마족을 해치우기 위해서잖아.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고등교육 시설에 입학했겠지. 우리의 삶은 평범함과 달라. 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군인이 되지. 이 나라부터가 우리들의 존재 의의를 그렇게 정의 내리고 있지 않아?”

“마족과 싸울 수 있는 건 우리뿐인걸.”

“그야말로 이이제이. 나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어.”

이이제이라니. 인류에게 있어서 어빌리터는 마족과 같은 입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미나의 생각이 그렇게 귀결되는 건가.

하지만 류제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다른 사람들이 어빌리터인 그를 마족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미나, 넌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가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미나는 흔쾌히 긍정했다.

“맞아, 나는 이해 못 해. 그야 내가 이능을 가졌다고 선을 그어버린 건 그쪽인걸.”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나는 아주 먼 옛날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더러움이었다. 사람을 망치고, 가족을 망치고, 마을을 망치는 요물이라고. 단지 거기에 존재했을 뿐인데.

“류제, 너는 비어빌리터들을 이해할 수 있어?”

“당연하지. 나도 몇 달 전에는 어빌리티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는걸. 어빌리터라면 다들 그랬을 거고.”

“그럼 어빌리티가 없었을 적엔 어빌리터를 이해할 수 있었어?”

“음… 별다른 관심 없었던 거 같은데.”

“거봐, 관심도 없는데 이해를 어떻게 해.”

하지만 그게 싫다는 의미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빌리터니 마족이니 그런 건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고, 그는 이 고아원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방황하던 어린아이였으니까.

“그래도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어.”

“좋아하지도 않았지? 하기야 비어빌리터 대부분이 그러겠지.”

그녀는 냉소적이었다.

잘 모르겠다. 아세미나 수녀 누나도 그랬었나? 학교 근처 상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마족을 상대하는 우리들을 신뢰하는 게 아닌가? 항상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고 덤도 얹어주는걸.

“인정받고 싶어. 노력하고 있어. 하지만 상대방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 그런 것만 보자면 어빌리터와 비어빌리터의 관계는 짝사랑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이해하지 못한다니.”

류제는 문득 렌이 자신에게 그런 의미로는 무관심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혼자서 애가 타고 절절 끌어도 상대방은 의식하지 않으니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오직 나 혼자서만. 차라리 날 싫어하기라도 했으면 포기할 의지도 생기련만 그렇지 않으니 고생이다.

아니.

아냐, 그거랑 이건 별개의 문제다.

“네가 어빌리터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건 어빌리티를 가지게 됐기 때문이야. 그와 동시에 인류가 내팽개친 싸움의 의무를 억지로 떠맡은 거고.”

“잘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난 항상 이게 불편해. 불합리하고, 이기적이지. 어빌리티 따위 가지는 게 아니었는데.”

미나는 온 힘으로 전달했다. 인간은 이다지도 이기적이고 사악하다. 네가 다시 마왕이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빌리터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느냐. 그 고통을 네가 해방시켜라.

그러니 거 봐, 눈빛이 동요하는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어렸을 적에 그런 경험을 해서겠지. 모든 사람의 생각을 하나로 정의 내리는 건 좋지 못해. 쉽게 휘둘리면 못 써 류제. 머리도 좋으면서.”

어두웠던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미나가 다시 활짝 웃었다.

미나가 비어빌리터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던지라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난감하던 류제는 그녀의 미소를 보고 비로소 안도했다.

“…농담이 과하잖아. 깜짝 놀랐어.”

“반은 진심이야. 네가 어빌리티를 가지지 않았더라면 마족과 싸우지 않아도 되었단 건 기억해 줘. 이 나라에서는 이걸 큰 힘에는 큰 책임이 지는 거라고 포장하곤 하지만.”

후후 웃어 보인 미나가 제 말만 마치고 룰루랄라 뛰어갔다. 벙찐 류제는 눈을 끔벅거리다가 복잡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생각이 돌아가질 않았다.

“류제. 얘들아! 빨리 여기로 와봐. 내가 누구를 찾았게?”

오솔길을 걷고 걷다가 둔덕에 먼저 당도한 미나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호수가 있었다. 확 트인 호수는 하늘을 똑같이 반사했다.

호숫가 근처에서는 야외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가 부케를 들고 버진 로드를 거닐었다. 하객들이 박수를 치며 신부를 축복했다.

꿈속에서도 수녀 복장을 하고 있는 루나는 주례석에 서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신랑과 함께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 설마 아세미야?”

“뭐? 누구?”

얼이 빠져있던 류제가 비키의 외침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아세미가 있다고? 아세미는 내가 성으로 향하기 전에 진작 따돌렸는데?

혹시나 아세미가 어디선가 등장해 결혼하자고 달려들까 식겁한 류제가 결혼식이 거행되는 호숫가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자신과 같은 검은색 머리에 차분한 양 갈래 머리가 귀여운 아세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눈도 좋다. 여기선 사람이 손가락 정도 크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조그마한 아세미를 어떻게 잘 찾지?

“진짜 아세미 양이네!”

“유네, 너도 봤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전혀 모르겠어.”

“저기, 저 결혼하는 신부님이 아세미 양 아니야?”

“뭐라고?”

신부가 아세미라고? 류제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쭉 내빼고 미간을 좁혔다. 저건 다 큰 성인이잖아. 아세미는 아직 어린아이인데.

게다가 아세미는 나랑 결혼하겠다고 징징거리는 애인걸. 알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결혼을 할 리가.

“아세미 양 벌써 결혼하는구나. 축의금을 준비 못 해줘서 어쩐담.”

“그 건방진 꼬맹이가 결혼결혼 거리더니 빨리도 가네. 신랑은 누구일까?”

“우리는 신부석에 앉아서 보면 되는 건가?”

“호숫가 옆에서 야외 결혼식이라니 낭만적이야~”

“바보 같은 소리를.”

어차피 꿈속이니 제정신이 아니라 류제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지 않았다. 때문에 비키나 유네가 신부더러 아세미니 뭐니 떠들어대는 소리를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아세미는 내가 성으로 떠나기 전에 진작 뿌리쳤다니까.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데 아세미가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화려한 결혼식장에 참석한 류제는 어서 이번 루틴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다 면사포에 가려진 신부 얼굴을 확인하고 놀라 자지러졌다.

“어? 지…진짜 아세미잖아?!”

“그러게 계속 말했잖아.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주례를 보는 루나의 앞에 조심스레 멈춰 선 신부가 신랑과 마주 섰다.

신부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보였다. 검은색 머리. 재주껏 생각해 낸 자신의 어른 모습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흉부가 대단하다.

상상력의 한계라서 그런가 얼굴은 앳된 구석이 남아있지만 키는 렌만큼이나 훌쩍 커서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어른인 척하는 아세미를 보고 훌륭한 성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지루해.”

아세미의 결혼이고 뭐고 관심 없는 렌들의 절반은 참지 못하고 우르르 호숫가 주변으로 도망갔다. 자유로운 그들은 호수에 뛰어들어 시원하게 물장구를 쳤다.

세라는 렌 보육 담당이 되어버린 건지 선생님 본능으로 렌들이 사고를 칠세라 뒤를 종종 따라 감시했다.

반면 참을성 있게 하객석에 남아있는 몇 명의 렌이 지루한 듯이 크게 하품을 했다.

“있지, 비키. 이거 언제 끝나는 거야?”

“주례는 원래 긴 거야. 조금만 기다려. 그나저나 신랑은 누구지? 얼굴이 잘 안 보여.”

“뭔가 익숙한 느낌인데.”

둘 다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유네와 비키가 류제의 옆모습을 살폈다. 전전긍긍한 류제가 주례를 듣고 있는 미나의 옷깃을 끌어 귓가에 소곤거렸다.

“설마 여기는 아세미의 꿈인 건가?”

“그러지 않을까? 네 여동생 이전부터 너랑 결혼할 거라고 떼를 썼었잖아. 꿈속이니까 원하는 대로 한다는 건가? 후후, 귀여워.”

“그래서 아세미가 어른이 된 거고? 하지만 아세미가 결혼하자고 쫓아다녔던 난 여기에 있는걸.”

아세미가 결혼하고 싶다 노래를 부른 상대방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랑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고, 진짜로 결혼할 마음 따위 진드기 담즙만큼도 없지만 사실이니 장담할 수 있다.

그런 아세미가 꿈속에서 누구랑 결혼을 한단 말인가. 류제가 부드럽게 웃고 있는 신랑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닭 새끼처럼 고갯짓을 기웃기웃거렸다.

그러다 아세미가 “우리 행복하게 살게요!”라며 눈물을 흘리며 부케를 날리는 순간 함께 뒤돌아본 신랑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백하게 질린 류제가 그것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나잖아!”

아세마의 옆에서 꿋꿋하게 신랑 자리를 자처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류제 본인이었다.

“진짜다. 류제 군이 둘이나 있어!”

“뭐, 아세미는 류제랑 결혼한다고 늘 말했으니까. 진짜로 할 줄은 몰랐네.”

“후후후. 류제, 네 동생 참 귀엽다. 네가 정말 좋나 봐.”

“안 귀여워! 뭐야, 저거. 호러 아냐?!”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몸만 어른인 10살배기 동생이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해 봐라. 얼마나 끔찍한지 당한 사람만 안다.

류제가 결혼식 도중에 난입하자 식장이 술렁거렸다. 신랑과 똑같은 사람이 등장했다. 부케를 던질 준비를 하던 겉멋 든 아세미가 감격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거짓말. 류제 오라버니가 둘? 아세미, 이제부터 두 명의 류제 오라버니와 사는 거야?”

“아니야!”

고개를 삐걱거린 류제는 미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눈을 말똥거리던 미나가 후후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류제 네 꿈에서도 결혼해 달라 쫓아오는 어린 아세미가 나왔잖아? 그건 류제 네가 만들어낸 아세미고 저 신부 아세미는 진짜 아세미인 거지. 진짜 아세미가 신랑인 너를 만들어낸 거야.”

“그런 게 가능해?”

“왜, 렌들은 저렇게 많은데. 그럴 수도 있지. 꿈이잖아.”

“아니, 나는―”

렌만 저런 게 가능한 줄 알았지.

류제가 포옹하러 달려오는 아세미를 피해 주춤거렸다. 흉부, 흉부가 무기다. 류제가 저리 가라면서 본능적으로 아세미를 거부했다.

“류우우제 오라버니~!”

“나 말고 네 류제 오라버니한테나 가!”

멀쑥하게 생겨먹어서 바보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류제가 닭살 돋은 피부를 쓸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하고 결혼하는 건 아니지.”

“으응… 좀… 깬달까.”

그걸 보던 유네와 비키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가 타지도 못해서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모습을 경멸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착각이 든다.

“아까까지 신나게 축하했으면서 너희들은 또 왜 난리야?! 그게 내가 니들을 보는 심정이랑 똑같다고! 어디 가짜배기 하나씩 들고 와서 소꿉놀이 하고 있는 걸 눈앞에서 보는 내 심정!”

지금껏 참아줬더니 적반하장으로 나오자 배신감이 든 류제가 성큼성큼 아세미가 만들어낸 가짜 류제 신리에게로 향했다.

실실 웃는 낯에, 답답하게 앞머리를 길러 왼쪽 눈만 슬쩍 보이는 것까지 전부 똑같지만 역시 기분 나쁘다.

류제가 어디 그 면상 똑똑히 보자며 가짜의 멱살을 쥐어 올리는데 가짜가 퐁 하고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꺄악! 류제 오라버니…가 아닌 우리 자기가 사라져버렸어~”

“우리 자기라고 하지 마!”

결혼식 종료를 목전에 두고 신랑이 사라져버리자 하객들의 이목이 신랑과 똑같이 생긴 류제에게로 향했다. 류제는 엉겨 붙는 아세미와 불쾌한 시선들에 압도되어서 숨이 턱 막혔다.

“류제 오라버니랑 결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 자기 어디로 갔어?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랑 다시 결혼해 줘!”

“아세미, 이거 놔!”

몸만 큰 아세미가 류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며 엉엉 울었다. 꿈인데도 이런 똥고집은 어쩜 하나도 안 바뀌었을까. 고아원에 있을 적에도 자기 불리하다 싶을 때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눈물을 터뜨리는 아세미를 떠올린 류제가 식은땀을 찔끔 흘렸다.

신랑이 없어져 버린 아세미가 서럽게 울자 주례를 보았던 루나가 어머머 걱정스러운 듯이 볼가를 쓸었다.

“어쩌지. 아세미가 울면 드래곤이 와버리는데.”

“드래곤?”

“여러분~ 긴급 대피 상황입니다. 아세미가 울고 있어요~!”

드래곤이니 뭐니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루나가 딸랑딸랑 종을 울렸다. 식장에 있던 하객들이 우르르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주춤하던 찰나 하늘에서 거대한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가 들려.”

“뭐지?”

“세라 쌤! 이상한 소리가 나요!”

“그러게요. 무슨 소리일까요?”

식장이 지겨워 세라를 끼고 호숫가에서 장난치던 렌들이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를 듣고 위를 쳐다보았다. 거대한 태양에 그림자가 생겼다.

“드래곤이다!”

“모두 도망쳐! 아세미가 울고 있어.”

식장은 아비규환이 되었다. 류제는 상황 변화의 급박함에 정신이 까마득해졌다. 드래곤이라고? 진짜?

하늘 전체를 덮는 용의 그림자에 질린 류제가 털썩 주저앉았다. 거대하고 육중한 몸집이 으르렁거리며 좁쌀만 한 사람들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입을 쩌억 벌렸다.

“히이이익!”

“우리도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듣고 있어, 류제?”

“으아아… 진짜 드래곤이야. 어쩌지? 렌 군들이 위험해!”

“걱정하지 말렴, 가여운 어린양들아. 내가 해결해 줄 거란다.”

상냥하게 웃는 낯의 루나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바스타드 소드를 꺼내 들었다.

“……?!”

수…수녀 누나가 바스타드 소드라고? 류제가 그 둘 사이를 이어줄 부족한 상관관계를 설명해 달라고 고개를 저었다. 남모르게 모험을 고대하는 루나의 꿈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이얍~!”

루나는 사람 열 명은 들어갈 것 같은 입을 쩍 벌리고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드래곤을 향해 뛰어오르더니 손쉽게 목을 자르고 가볍게 착지했다.

목이 떨어져 나간 드래곤은 루나의 상상력으로 인해 꽃이 되어서 호숫가에 휘날렸다.

신랑은 사라졌지, 화려했던 하객들은 전부 도망갔지,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로 생긴 돌풍에 날아간 야외 결혼식장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흩날리는 꽃만 예쁘다.

아세미는 어느새 제 나이대의 몸으로 돌아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런 아세미를 루나가 영차 안아서 착하지, 착하지 달래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류제가 루나가 들고 있는 바스타드 소드를 가리키며 말을 더듬었다.

“누나, 아까 그건……?”

“후후. 류제야, 오늘은 드래곤을 베었단다. 이것이 하느님의 안배라고 하는 거란다.”

늘 나긋나긋하고 품행이 바른 루나가 바스타드 소드로 드래곤의 머리를 베는 엄청난 장면을 봐버린 류제는 진짜 이 세계는 뭘 보여주고 싶은 걸까 진절머리가 나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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