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6) (24/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6)

유네의 분투노력으로 그녀가 머무르던 숲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 과정이 본 게임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등의 의견은 그들에게 있어 번외에 해당했다.

잘 끝났으니 해피 엔딩이다. 해피 엔딩이면 다 함께 피크닉을 즐겨야지.

의도치 않게 유네의 악몽에 휘말려 버린 류제도 마저 진짜 렌을 찾으러 떠나려다가 쉬다 가라는 유네와 렌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피크닉을 즐겼다.

유네의 순진하고 다정한 렌들에게 푹 빠져있던 류제가 어느덧 변한 주홍빛 하늘을 올려다보고 촉박함을 느꼈다. 꿈속인데 노을이 질 정도로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다.

“출발해야 해.”

마음을 바꾼 류제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 계속 같이 놀자며 류제한테 매달려 있던 렌들이 봉숭아씨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렌들이 류제더러 가지 말라고 아세미처럼 칭얼거렸다. 류제는 일순 떠나는 것이 아쉬워졌다. 여기에 있는 렌들이 진짜 렌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고 있지만 유네의 렌들한테 둘러싸여 있는 게 정말 좋았던 모양이다.

“류제 군. 벌써 가게?”

“응, 여기서 세월아 네월아 있다가는 평생 성으로 못 갈 것 같아서.”

유네도 류제가 떠나는 것에 미련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가야만 했다.

류제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유네를 괴롭히던 애들이 또 오면 어쩌나 걱정하는 렌들 때문에 한동안 지켜봤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앞으로도 안 올 듯하다.

그렇다면 안심이다. 유네도 질투니 뭐니 시원하게 외친 것을 보면 훌훌 털어낸 것 같고.

“렌, 그럼 우리도 갈까?”

“이제야 말하긴. 기다리느라 지쳤다고.”

류제가 간다니까 비키도 덩달아서 자리에 일어섰다. 비키가 일어서니 자동으로 비키의 렌도 그녀를 뒤따랐다.

유네에게는 렌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떠나는 것에 어지간히 서운했는지 유네가 에에― 아쉬운 소리를 내며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유네와 짝짜꿍 잘 놀던 비키까지 질리지도 않고 따라나선다고 하자 이번 기회에 비키를 떼어놓을 속셈이었던 류제가 설마 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너도 가게?”

“뭐야, 벌써 잊어버렸어? 성까지 널 따라가겠다고 했잖아. 나도 성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그리고 다음에는 또 누구를 만날지 기대되거든. 저택에만 있으면 아무래도 이런 경험을 못 하니까. 불만이야?”

“그러게 누가 집구석 백수처럼 틀어박혀서 울기만 하래. 그러니까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되지.”

“우…울다니 누가!”

유네의 몽실몽실한 렌들보다 오리지널 렌에 가까운 비키의 렌이 실제로 렌이 할 법한 말을 툭 내뱉었다.

그래, 저게 렌이지. 라고 생각되다가도 틱틱거리던 렌이 비키를 조심스레 보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대감이 짜게 식는다. 말하고 행동하고 너무 다른 거 아니야?

“히잉…….”

유네가 우는소리를 냈다. 류제 군에 이어서 비키 양까지. 계속 이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는데 피크닉 손님들이 하나둘 떠나갈 준비를 했다.

홀로 뒤처지는 기분에 우물쭈물거리던 유네가 류제의 소매를 조심스레 당겼다.

“류제 군, 류제 군. 비키 양은 류제 군의 여행 동료가 아니야?”

“들판 너머에 있는 대저택에서 만났어. 나는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왔고.”

그 과정에서 이곳이 말도 안 되게 굴러가는 꿈속이란 것을 눈치챘고 말야.

그 말을 듣고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유네가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나도 함께 가도 될까?”

“뭐? 너도?”

“으응. 나도 같이 가고 싶어.”

유네가 렌들과 이곳에서 피크닉을 하던 이유는 숲속에서 여기가 가장 편안하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 평화로운 장소에 숨어있었지만 때때로 떠오른 걱정들이 악몽 인자에 반응하여 실체화해서 유네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악몽 인자를 해치웠으니 드디어 유네도 숲 밖으로 나갈 결심이 섰다.

감히 유네의 부탁을 거절이라도 했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렌들을 뒤로 한 채 유네가 애틋한 얼굴로 류제와 비키를 쳐다보았다. 여섯 쌍의 눈빛이 참으로 다양하게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든다.

“윽.”

류제는 비키를 떼려다 유네까지 붙이게 될 위기에 처했다. 더 이상 사람이 늘어나는 건 성가시다. 곤란해진 그가 볼가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넌 여기서 렌들하고 피크닉을 하는 중이었잖아. 성에는 내 개인적인 용무로 가는 거야. 굳이 안 따라와도 돼.”

“아니, 가고 싶어. 나도 렌들하고 다 함께 숲 바깥을 한번 보고 싶어. 나는 이 숲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 렌 군들은 나 때문에 계속 내 옆에 있었고. 응? 부탁할게…….”

“그…그래?”

유네가 흥분해서 상기된 얼굴을 들이밀자 류제가 주춤거리며 얼굴을 뒤로 뺐다. 분위기에 휩쓸리기만 하는 유네가 언제 고집을 꺾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제 욕심대로 안 돼서 짜증이 났던 게 죄책감으로 인해 밀려났다.

“그래도 될까? 류제 군… 비키 양!”

“나는 좋아. 솔직히 따라다니고 뭐고 할 것 없이 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지 뭐.”

“정말?!”

어영부영거리던 류제 대신에 비키에게 허락을 받은 유네는 비키가 마음을 바꿀세라 헐레벌떡 피크닉 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렌들이 삼삼오오 모여 백지장을 맞드니 유네와 렌 6명, 비키와 류제가 들어갈 정도로 컸던 피크닉 자리가 정리되었다.

“숲을 떠난대!”

“저 성에 간다고?”

“성에는 뭐가 있는데?”

“몰라.”

유네와 함께 숲을 떠난다는 사실이 즐거웠는지 유네의 렌들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해졌다.

피크닉 자리는 작은 빵 바구니에 정리되어서 양 갈래 머리 여장 렌이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이것으로 유네도 떠날 준비 완료다.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어.”

“정말 여기를 떠나도 되겠어?”

“응. 류제 군이 무사히 성까지 가는 걸 지켜보게 해 줘.”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하기에는 유네에게 대야 할 하찮은 이유가 부끄럽다. 귀찮았지만 류제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라랏따다― 유네가 동료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으로 가는 여행길에 3명의 사람과 5+1의 도플갱어가 함께 오르게 되었다.

설마 여기서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인원이 추가되는 건 아니겠지. 류제가 불길한 심정을 꿀꺽 삼켰다.

숲의 주인인 유네의 마음이 편안해졌기에 그들은 어렵지 않게 숲을 빠져나갔다.

자신들의 렌과 꽁냥거리는 비키나 유네와는 다르게 제 옆구리는 텅 빈 피톤치드(공기)뿐이었던 류제가 혼자서 꿍얼꿍얼 불평한 것을 빼면 그들의 여정은 별 탈 없이 순조로웠다.

“우와. 저거 봐!”

꿈속의 세계를 처음 둘러본 유네는 자신의 공간인 평화의 숲을 빠져나가자 온갖 사람들이 각각의 상상력으로 꿈속을 돌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고 관광 온 사람처럼 무심코 그들을 구경해 버리고 말았다.

뚫어져다 쳐다보니 그쪽도 뚫어져라 쳐다본다. 서로를 인지하고 무의식이 충돌한다. 유네는 모든 과정이 신기했다. 거리를 나도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가진 관념들이 깨지는 것 같았다. 머물던 숲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다.

“너무 신기해!”

특히나 현재 앞에 둔 마을은 그녀가 듣도 보도 못한 구조로 되어있었다. 그 마을은 특이하게 사면이 딱딱한 육면체 블록들로 구성되었고, 사람들이 머리 위에 걸어 다니질 않나, 오른쪽에서 수평 이동하지 않나, 그야말로 발만 디딜 곳이 있으면 중력이 있는 괴이한 장소였다.

“와와… 이게 다 뭘까……!”

큐브 속에 존재하는 거대한 미로 마을에는 안쪽 면, 바깥쪽 면, 모든 면으로 사람들이 거닐고 그 안에 다른 큐브들이 차곡차곡 쌓아져 새로운 길과 공간을 만들었다.

모든 오브젝트가 결벽증에 이를 정도로 정돈되어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퀴퀴한 공기가 마을을 뒤덮고 있다는 기괴함만 제외하면 프랙털처럼 신기한 거울 놀이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제법 대단한데?”

류제와 비키도 처음 보는 형태에 경탄했다. 많은 곳을 지나쳐왔지만 이런 뻥 뚫렸지만 꽉 막힌 기분이 드는 마을은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독특한 부류였다.

한 번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연결된 꿈속에 존재하는 마을이란 꿈이 연결되어 버린 사람들끼리 충돌해서 만들어진 하나의 무의식 군락이었다.

이번 마을 사람들은 획일적이고 똑같았다. 애초부터 어떤 집단을 이루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조금 소름 돋네.”

“줄지어서 어디를 가고 있는 걸까.”

마을의 모든 것들이 규격화되어 있었다. 거주지도, 복장도, 머리 모양도, 걸음걸이도. 그걸 구경하고 있자니 생판 다르게 생긴 마을 사람들보다 똑같은 얼굴인 6명의 렌이 더 다양한 것 같았다.

비키나 유네의 렌들은 얼굴은 똑같아도 전부 구별이 가잖아. 아, 큰일이다. 나 유네가 렌을 저렇게 많이 만들어낸 이유를 알 것 같아.

“우와, 저거 봐. 완전 쩐다.”

“숲이랑 달라서 이상해.”

“유네 양, 여기 정말 괜찮은 곳인가?”

“길이 엄청 복잡해. 땅에도 하늘에도 옆에도 전부 길이 나있으니 미아가 되면 큰일이겠어.”

“우리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유네.”

유네의 렌들은 무슨 잔소리들이 그렇게 많은지 새로운 것을 하나 볼 때마다 감탄사를 내지르다가 결국에는 유네에게 조심하라는 말로 이야기를 끝냈다.

팔불출들이 5명이나 되니 보는 사람이 질릴 정도로 잔소리를 해댄다. 설마 내가 진짜 렌한테 잔소리를 하는 게 이렇게 들리지는 않겠지. 류제가 유네를 둘러싸고 있는 렌들을 남몰래 흘겼다.

렌, 이 자식. 내가 잔소리할 때는 맨날 신경질 냈으면서. 하아… 뭐, 쟤네들이 진짜 렌은 아니니까.

“언제쯤 성에 갈 수 있을까.”

류제가 가짜 렌들을 오리지널과 비교하는 자신이 지긋지긋해서 한탄스럽게 정육면체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질투심도 다 진짜 렌을 찾으면 해결될 문제다. 그러려면 이 마을 반대편에 있는 성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 그들이 부딪힌 난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곳은 미로로 되어있는 마을이다. 반대편으로 간다고 무턱대고 파고들어 갔다가는 그대로 길을 잃고 마을에 갇힐 게 분명했다.

“길목에 마을이 있어서 들어오기는 했는데 성으로 가려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야 한단 말이지. 길은 전부 마을의 심층부로만 향해있는 것 같고…….”

모든 면이 중력의 기준이 되니 공간이 다른 평범한 마을에 비해 수십 배는 넓다. 게다가 주요한 길들이 죄다 큐브 안쪽 중심에서 만나서 다른 길로 흩어지니 마을 반대쪽으로 가려면 필히 마을의 중심을 지나야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것도 미로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도 미로다. 비키가 그 부분을 기어코 지적하고 나섰다.

“저게 안 보여? 여기 미로라고, 미로. 대충대충 안일하게 움직였다가는 까딱했다 여기서 못 나가게 될지도 몰라.”

“역시 그렇겠지? 하지만 마을을 안 지나가면 성으로 갈 수 없는데.”

렌들이 소매를 쭉쭉 잡아당기기에 가리키는 곳을 찾던 유네가 마을 입구 근처에 세워진 안내 센터를 발견했다.

“저기… 저 사람한테 물어보면 어때?”

유네가 센터 창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하얀 장미꽃을 가리켰다.

사람……? 유네야, 저게 사람이라고 했니?

저게 왜 사람이 아닌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류제가 잠시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꿈이란 걸 알아도 태클이 절로 나온다. 얼굴이 꽃이잖아. 커다랗고 하얀 장미꽃이잖아. 몸뚱이는 성인 여성의 몸이라고 해도 얼굴은 아니야. 사람이라고 단언하지 말아 줘. 아니, 그보다 꽃이 말은 할 수 있어? 왜 꽃이 안내 센터에 있는 건데?

꿈이란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버젓이 이게 꿈이란 것을 알고 있는 류제가 봤을 때 안내 센터 직원은 피에로가 나오는 악몽처럼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재경이 봤더라면 공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디자인이라고 꽤애액 비명을 질렀을 거다. 류제도 딱히 그 꽃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안 와?”

류제가 고민하는 동안 의심 없는 비키와 유네는 벌써부터 안내 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 오싹함을 표현하자니 겁쟁이라고 할 것 같다. 류제는 그래, 꿈인데 무슨 걱정일까 두려운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마을 반대편으로 가고 싶어서 그런데요.”

제일 먼저 도착한 유네가 높은 창구에 까치발을 들고 하얀 장미 여인을 불렀다.

유네가 있으면 당연히 5명의 렌도 한 몸이다. 그녀의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인 옷만 다르게 입은 렌들도 창구 앞에 서서 하얀 장미 여인이 유네의 말에 반응해 주길 기다렸다.

“으음.”

졸고 있던 하얀 장미 여인은 꽃잎을 푸르르 털다가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보니 잘 몰랐는데 센터 안에 있던 여인은 유네의 두 배 정도는 컸다.

류제조차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것을 보면 거인이 아닐까도 싶은데, 아무래도 얼굴이 장미이니 보통의 인간이 아니란 전제하에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막상 장미 인간을 마주하니 끔찍하다는 것을 빼면 류제는 아무래도 좋아졌다. 날 해치려고만 안 하면 돼.

“뭐야, 이 햇병아리들은. 여기는 너희 같은 꼬마들이 오는 곳이 아니야. 썩 꺼져!”

그녀는 창구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인간들을 이곳저곳 흘기더니 어이가 없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네? 하…하지만 류제 군이 성으로 가려면 이 마을을 지나야 한다고 그랬는걸요…….”

“성? 그게 뭐야. 이곳은 너희처럼 모자란 것들이 들어왔다가는 영영 나가지 못하게 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오로지 선택받은 우리 백장미들만이 이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어.”

그녀는 어림도 없다면서 손으로 엑스 자를 쳤다. 실망한 세 사람은 어떻게든 안 되냐며 떼를 썼다.

“그냥 마을을 지나가는 건데요. 살지는 않을 거예요.”

“맞아요. 우리는 그냥 마을 반대편으로 가고 싶을 뿐인데.”

“제발요.”

하얀 장미 여인은 어린애들이 애원하는 목소리를 듣고 흐음, 고민에 빠졌다. 이곳이 만들어진 이후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서 마을 반대편으로 보내본 적이 없는데 어쩐다.

그녀가 어디 한번 보자며 들고 있던 규칙 책자를 훑었다. 전부 외우고 있는 모양인지 책자에 수많은 인덱스 테이프가 붙여져서 너덜너덜하다.

“반대편으로 가려면 중심부를 지나야 하지. 외부인들은 마을 중심부로 가면 규칙 위반이다. 미안하지만 내 범위 밖의 일이야. 포기해.”

“왜요?”

“그런 규칙이니까!”

“그럼 이 길은 어떻게 지나가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이 나중에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때도 그러실 건가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무책임해.”

“뭐라고?!”

무책임하다는 말에 그녀의 꽃잎이 파르르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규범. 규약. 규율. 규칙. 정해진 것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마을의 룰은 완벽하다. 그로 인해 마을이 톱니바퀴에 맞물려 알맞게 돌아간다.

마을을 위해 존재하는 규칙이 무책임하다니. 마을의 규칙을 상징하는 하얀 장미에게 있어서 그건 감히 외부인 주제에 지껄이기엔 용서가 안 되는 말이었다.

“우리 하얀 장미들에게 무책임하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다.”

그녀가 창구를 비집고 거대한 몸을 내밀었다. 너덜너덜해진 하얀 꽃잎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거대한 꽃이지만 그렇기에 더 무서웠다.

하얀 장미? 규칙? 그거참 백장미 부대 같은 곳이라고 생각한 류제는 설마 그렇겠냐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융통성 없어 보이는 하얀 장미의 여인은 화가 나서 꽃잎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 모습에 유네가 기겁해서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장미꽃에게 해코지를 당하기 전에 작전상 후퇴를 감행했다.

비키가 난처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 마을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니 앞길이 막막하다.

“곤란하네. 이대로 가다가는 여기서 막히겠는걸. 좋은 돌파구 없을까.”

좀비처럼 꿈틀거리며 창구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안내 센터의 하얀 장미 여인을 피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그들은 그녀가 쫓아오지 않자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한 그들이 블록에 주저앉았다.

“어쩌지? 류제, 뭔가 생각나는 방법 있어?”

“나한테 묻지 마. 나도 몰라.”

“무…무서운 장미꽃이었어…….”

달리기에 지친 유네가 좌우지간 헥헥거렸다. 처음에만 신기했지, 숲 밖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이제 성에 못 가게 되는 거야?”

“설마. 정말이지 규칙 하나 어긴다고 큰일이라도 나나. 융통성 없는 사람이야.”

아니. 비키야, 그거 사람 아니야. 아무리 봐도 사람 아니야. 류제가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꿈속에서 백장미 부대가 저런 이상한 모양새로 의인화되어 있었다니. 류제는 도통 자기 무의식을 알 수가 없게 되어갔다.

그나저나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진행 불가능 상황은 예상외였다. 어차피 꿈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던 류제가 짜증이 나서 미간을 구겼다. 슬슬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맞장구쳐주기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저기, 저기, 유네. 블록 페인팅 타임이 무슨 뜻이야?”

소풍 바구니를 든 채 팔랑팔랑 하늘색 원피스를 펄럭거리며 느긋하게 뛰어오던 여장 렌이 책자를 보다 유네에게 물었다.

“블록 페인팅 타임?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유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네가 모르는 걸 렌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렌 군이 다정하고 상냥하고 멋있고 씩씩해도 공부만큼은 절대로 안 하는걸. 하물며 여장한 렌이라도 다른 렌들과 바보라는 공통적인 속성을 공유했다. 그런 렌 군이 어디서 블록 페인트 타임이라는 이상한 단어를 들은 거지?

“여기, 여기에. 규칙 3857. 외부인은 마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다. 어기면 500,000,000 블록 페인팅 타임(BPT) 동안 구금. 이후 마을에서 추방. 이라고 되어있어. BPT가 뭘까.”

“5억? 시간 개념 같은 건가? 터무니없는 숫자인데.”

“레…렌 군, 이 책자 어디서 난 거야?”

“우리가 떠나니까 저 장미 씨가 읽어보라고 줬는걸.”

여장한 렌이 백치미 돋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그들의 두 눈이 동시에 안내 센터에 꽂혔다.

하얀 장미 여인이 책자를 줬다고? 엄청 화난 줄 알았는데 규칙을 숙지하라 잔소리를 하려고 한 것일 뿐인가.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모두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유치장에 갇힌대. 구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풀어주나 봐. 대부분은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거 같아.”

“뭐?”

류제가 헛웃음을 쳤다. 얼굴은 전혀 웃는 상이 아니었다. 도통 아까부터 방해만 일어난다.

5억이라니, 아세미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 지폐 금액도 아니고. 욕구와 호기심으로만 이어지던 여정이 막히자 권태감을 느낀 그는 마음처럼 되지 않는 꿈속에서 깨어나고 싶어졌다.

꿈에서 깨면 렌이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데 여기서 렌을 찾겠다고 왜 이런 생고생을. 혼자만 상황을 이성적으로 대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말도 안 통해. 하나하나 태클을 걸다 보면 숨이 막혔다.

“5억 BPT라……. 블록… 페인팅… 흐음.”

의욕을 잃은 류제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동안 비키가 머리를 써서 낯선 규칙에 대해 고민했다.

블록. 블록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였다. 이 마을은 모든 거리가 정육면체로 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블록으로 쌓여 반듯반듯하다.

위에도 블록, 아래도 블록, 좌, 우도 모두 블록. 직각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잖아. 블록이 그 블록을 말하는 거라면…….

“아! 저기서 누가 블록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고 있어. 저거랑 연관이 있는 건가?”

비키가 손가락질한 곳에는 작업복을 입은 아르마딜로가 롤러로 블록에 파란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롤러를 굴리며 가로세로 높이 약 50cm에 달하는 큐브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칠하고 있는 아르마딜로는 블록을 다 칠하자 끙차 옆으로 이동해서 주황색 블록에 새롭게 페인트를 칠하기 시작했다.

“비…비키 양,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러겠어. 한 블록을 다 칠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1블록 페인팅 타임(BPT)이라고 하면 5억 BPT는… 블록 5…5억 개가 칠해질 동안 구금되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마을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가 그만큼 오랫동안 갇혀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 전에 분명 늙어서 죽을 거야!”

“저기~”

“일단 저 한 블록을 모두 칠하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보자.”

유네와 비키가 아르마딜로더러 빨리 칠하라며 응원을 했다. 옆에서는 렌들이 하나, 둘 숫자를 세며 블록 하나를 다 칠할 때까지의 시간을 셌다.

페인트를 칠하는 롤러가 끼긱끼긱 제 페이스대로 돌아갔다. 그 결과.

“5분 남짓…….”

“애매하네.”

“저기~”

“만약 저 BPT 단위가 진짜 블록 하나를 페인트칠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5억 BPT는 약 25억 분. 4천1백6십6만 6천6백6십6여 시간. 1,736,111일. 약 4,800…년.”

“저기~ 잠깐… 여기에 다른 규칙이…….”

“마을을 지나가자고 4,800년 동안 여기 갇혀 있으라고?! 그딴 걸 하느니 차라리 이 마을을 쳐부수고 말지!”

듣다 못한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아니, 고작 마을 중심을 지나가는 데 오천 년 동안을 구금돼야 하다니 미쳤어? 그동안 렌 뼈도 풍화되어서 사라지겠네. 절대 안 돼!

“웃기지 말라고 해. 난 누가 뭐래도 당장 이 마을을 빠져나갈 거야. 백장미 부대고 뭐고 아무래도 좋아.”

꿈속에서나 통하는 말도 안 되는 규칙에 얽매이다가 영영 렌을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끔찍하게 싫다. 젠장, 꿈에서 깨든 여길 강제로 돌파하든 무슨 방법이 없나.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런다고 해결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너그럽게 여유를 가져. 그렇게 안달하다간 날 생각도 안 나겠다.”

“너희들은……!”

비키의 핀잔에 머리를 쥐어뜯는 류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을 눌러 담았다. 너희들은 이미 렌을 가지고 있으니 괜찮겠지.

꿈에서 깰 방법을 모르니 성으로 가서 렌을 만나야만 한다. 류제는 친구들이 가진 수두룩한 렌을 보며 렌에 대한 소유욕이 치솟았다.

“너희들은 뭐. 우리가 왜?”

“…아무것도 아냐.”

꿈에서 깨면 다 끝날 일들이지만 그녀들처럼 렌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에 가야만 했다. 가서 그가 생각하는 렌을 만나고 싶었다. 그걸 훼방 놓자 류제는 이 방해되는 마을이 사라져버리길 바랐다.

“저기~ 그럼 규칙 1을 어기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똑같이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거 같은데.”

아까부터 그들을 불렀는데 모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어서 아무도 여장 렌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의견을 말했다.

류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규칙이고 나발이고 이딴 규칙 만든 인간 얼굴이나 보고 싶다. 그놈을 해치워 버리면 마을에서 나갈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우리 규칙 1에 대해서 생각을…….”

“좋아, 이딴 마을 그냥 부숴버리자.”

“에에… 류제 군? 어째서 그런 폭력적인 결론이 나온 거야?”

“맞아, 아무리 그래도 여기를 지나가겠다고 죄 없는 마을을 없애버리자니 발상이 이상하잖아.”

류제가 입바른 소리만 하는 비키를 사납게 흘겼다. 뭐가 이상한 건데. 그거 말고 무슨 방법이 있어?

이 마을의 죄는 날 방해한 죄지. 그딴 이상한 규칙 때문에 렌을 찾아야 한다는 목적이 엇나가고 있는데 왜 내 목적을 있는 힘껏 방해받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면 안 되는 거야. 5천 년? 농담도 지나쳐.

“저기~ 규칙 1은 어기기도 쉽고 구금 시간도 짧아.”

“문명인으로서 이성을 지키는 건 어때?”

“맞아, 류제 군. 그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화내지 말고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려.”

“여기서 내가 제일 이성적이야!”

참다못한 류제가 옆에 있던 블록을 내리쳤다.

그의 꿈을 다른 이들에게서 지켜주는 냉철한 이성이 분노로 점철되었다. 악몽처럼 거무튀튀한 기운이 그의 주변에 휩싸였다.

내가 왜 내 꿈속에서 내 길을 방해받아야 하는데? 난 렌을 찾고 싶을 뿐이야. 이딴 마을이 없어지면 순조로울 텐데. 어차피 이놈들은 날 없앨―

“류제! 듣고 있어? 내가 열심히 읽어주고 있잖아!”

분노하는 어두운 기운 사이로 렌의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류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그가 안 된다며 그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

그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건 그가 부정적인 감정에 잡아먹혔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불쾌하고, 짜증 나고, 이유를 모르는 증오가 툭툭 건드리고, 방해되는 것들은 치워버리고 싶고, 가지고 싶은 것들은 전부 가져야 풀릴 것 같은 분노가 감정을 지배한다. 경계해야 하는 감정이다.

이런 꿈속에서조차 나는 또……. 류제가 이래서는 안 된다며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이곳은 정신의 세계다. 한번 불쾌해지기 시작한 감정은 손쉽게 바로잡아지지 않았다.

“저기~ 내 말 좀 집중해서 들어줘. 여기 적힌 바에 따르면 규칙 1을 어기면 50BPT만 구금한대. 유치장은 마을 중심에 있잖아. 규칙 1을 어겨서 마을 중심에 있는 유치장에 가는 순간 우리들은 마을 내부인으로 취급되어서 외부인은 마을 중심에 갈 수 없다는 3857번째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단 말이야. 듣고 있는 거야?”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류제에게로 직접 가서 열심히 설명하는 여장한 렌은 역시나 누군가와 닮았다.

류제는 저 모습이 어딘가 불편했다. 렌과 닮은 양 갈래 머리에 자신만만한 얼굴. 뭐든지 알고 있다는 듯 잘난 듯이. 나를 감시하는 기분이다. 그 녀석이 날……!

감시라니? 무슨 소리야, 그게.

“류제?”

“듣고 있어…….”

아무래도 흥분해서 그런가 상태가 이상하다. 류제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렌을 만날 수 없다는 초조함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꿈인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나만 정상인 세상 따위 하나도 재미없으니 빨리 꿈에서 깼으면 좋겠는데 깨는 방법은 모르겠고,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렌은 성에 있으니 빨리 찾으러 가서 당장에 내 걸로 만들어야 하는데 5천 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짜증이 치솟고 말았다.

친구들이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각자의 렌을 가진 그녀들을 보자니 견딜 수가 없었다.

“류제?”

“계속 말해봐. 규칙 1이 뭐 어쨌다고?”

“역시 안 들은 거지?”

“아… 렌 군, 나는 제대로 들었어. 규칙 1을 어기면 50BPT. 즉 약 250분. 4시간 동안만 구금되어 있으면 마을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잖아. 와…와아! 류제 군, 4시간만 있으면 마을에서 나갈 수가 있대!”

“4시간도 버티기 싫어.”

“고집부리지 마. 일단 렌이 생각해 낸 방법이 최선이잖아. 더 좋은 방법 있어? 여기를 부순다니 뭐니 하는 말 말고.”

5천 년에서 4시간으로 줄어들다니. 남들이라면 이 맹점을 알아낸 사람에게 넙죽 엎드려 감사하다고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류제는 그 4시간도 탐탁지 않았다.

내가 왜 이딴 규칙 때문에 내 귀중한 4시간을 허비해야 하는데. 이 마을이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게 싫다고 무턱대고 마을 중심으로 향했다간 꼼짝없이 미라가 될 판이다.

4시간에서 조금이라도 더 소요되었다가는 당장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마을 반대편으로 향해버릴 테다. 류제는 지금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온몸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기분 안 좋다는 오라를 뿜어대고 있는 류제를 보며 유네와 비키가 서로 왜 저러냐며 수군거렸다. 4시간도 못 견딜 정도로 성에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는 건가?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오히려 귀차니즘 절정인 류제가? 그게 뭘까 궁금한데.

“저 녀석, 이 마을에 오고부터 상태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그러게. 간간이 렌 군들을 무지막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왜지? 혹시 자기만 렌이 없다고 그러는 거야?”

“아…아니면 역시 우리가 방해가 되었다거나…….”

용기 내서 숲을 나가겠다고 한 건데 나 같은 방해꾼이 하나 더 느니까 류제 군한테는 그게 부담이었던 거야. 그야 나랑 렌 군들이 함께 있으면 버겁겠지. 나는 도움 하나 되지 않으면서 렌 군의 응석을 받아줘 버리는걸.

류제 군은 제멋대로 구는 렌 군한테 잔소리를 하는 담당이었는데 렌 군이 5명이나 되니까 힘이 들어서 그런 건가?

유네가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류제랑 똑같이 ‘후에에에’ 상태가 되었다. 유네니까 ‘후에에에’지 류제는 뒤틀린 황천의 살인마 눈빛으로 안내 센터를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그 시선은 비키도 절로 주춤할 정도였다.

“둘이서 뭐 하는 거야? 이러고 있을 시간에 뭐라도 하는 게 시간 절약이네. 봐, 아르마딜로 씨가 벌써 블록 1개를 다 칠했잖아. 저기, 파란 원피스 렌? 그 책자 좀 제대로 보여줄래?”

“으응. 자, 전부 이상한 규칙들밖에 없지만…….”

렌이 말했던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비키가 책자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짚었다.

『마을 규칙』이라고 쓰여있는 책자의 제목은 단순해서 김이 빠졌다. 어디 동네 반상회에서 돌리는 팸플릿이 이것보다는 더 정성 들일 거라고 누군가는 말할 거다. 원래 있는 레이아웃을 그대로 가져다가 쓴 듯한 이 촌스러움은 뭐야.

보다 보니 오히려 이런 촌스러움에서 정체 모를 박력이 느껴졌다. 비키가 침을 꿀꺽 삼키며 첫 번째 장을 넘겼다.

규칙 1. 마을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걷다가 위로 오르기 금지. 어기면 50BPT 동안 구금. 마을에서 추방.

규칙 2. 양다리를 전부 땅에 떨어뜨리지 말 것. 어기면 120BPT 동안 구금. 마을에서 추방.

규칙 3. 꽃잎을 떨어뜨리지 말 것. 어기면 280BPT 동안 구금.

규칙 4. 오른발 다음에 다시 오른발로 걸음을 옮기지 말 것. 어기면 300BPT 동안 구금.

규칙 3857. 외부인은 마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음. 어기면 500,000,000BPT 동안 구금. 마을에서 추방.

비키는 대략 말을 잃었다.

제대로 된 규칙이 하나도 없잖아! 아니, 왜? 어째서? 규칙에 대한 이유는? 이유는? 이유는!

왜 마을에서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걷다가 위로 오르면 안 되는데? 양다리를 전부 땅에서 떨어뜨리면 왜 안 되는데? 그 꽃잎은 떨어지는 거였어? 오른발 다음에 다시 오른발로 걸음을 옮길 수는 있는 거야? 오히려 호기심이 들어서 규칙을 어기게 되겠네!

어처구니가 없던 그녀가 부리나케 책자를 살피던 중 어디선가 평범하게 생긴 마을 사람이 길을 걷다 발을 헛디뎌 오른발을 깽깽이걸음으로 한 번 더 디뎠다.

그녀는 어이쿠, 하고 곤란하다며 잽싸게 발을 바꾸었지만 규칙 4처럼 오른발 다음에 다시 오른발로 걸음을 옮긴 꼴이 되었다.

“저기 규칙 4를 어긴 자가 있다! 잡아들여라!”

그러더니 어디에서 등장했는지 모를 수많은 장미 여인들이 마을 사람을 구속하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저걸로 정말 구금인가. 비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이해를 못 하겠네. 저런 규칙에 의미가 있는 거야? 그냥 생트집이 아니라?

“우와, 살벌해. 아줌마들이 미쳐 날뛰는구만.”

그 생각을 똑같이 했는지 비키의 옆을 지키던 비키의 렌이 멈칫하며 그 광경을 흘겼다.

“무례한 소리 하지 마. 뭐, 여기가 얼마나 규칙을 중요시 여기는지는 알겠어.”

마을 외부인이 마을 중심에 침입한다고 사람을 4,200여 년 동안 가둘까 의심하기는 했는데 저걸 보자니 진짜 그럴 것 같은 기분이다. 비키가 이어서 예의 그 규칙을 찾았다.

“규칙 3856. 외부인이 규칙을 어겼을 경우도 위와 같다. 그와 동시에 외부인은 내부인과 같게 취급된다. 외부인이 규칙을 어기는 경우를 눈감아 주었을 경우 600,000BPT 동안 구금. 마을에서 추방. 이에 해당하지 않는 예외인 규칙은 규칙 3857에서 기술한다. 규칙 3857. 외부인은 마을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음. 어기면 500,000,000BPT 동안 구금. 마을에서 추방.”

5억. 그들의 추측으로 약 4,800여 년.

“5억이라니 들을 때마다 실감이 안 나는 숫자네. 너무 커서 헛웃음이 나와.”

“문제는 우리가 이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겠지. 확실히 유네 말대로야. 상당히 맹점이 있는 규칙 아냐.”

외부인인 우리가 규칙을 어겨 마을 내부인이 되었다가 마을에서 추방당하면 성이 있는 마을 반대편으로 갈 수 있다. 추방되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이쪽이 이득이다. 이 마을에 다시 돌아올 일이 없으니.

음, 근데 성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렌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뭐. 적당히 타협한 비키가 책자를 탕탕 두드리며 그로기 상태에 진입하기 시작한 두 사람을 불렀다.

“류제, 유네! 내 말 들었어?”

유네는 다섯 명이나 되는 렌들에게 둘러싸여서 우쭈쭈 사랑받고 있는데 류제 옆은 휑하니 아무도 없었다. 류제는 긴 앞머리 새로 그런 유네를 서슬 퍼런 눈동자로 쳐다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금단증상이라도 걸렸는지 그는 상스럽게 다리를 떠는 초조함을 보였다. 슬슬 찾아오는 렌 금단증상이었다. 실제로 류제는 입학식 전날부터 지금까지 렌과 정신적으로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없었다.

짝사랑을 자각한 이래로 렌에 대한 생각이 넘쳐흐르는 그인데 생각 속에서도 만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더군다나 가짜 렌들이 그의 주변을 설치고 다니는 상태로.

“그런 무서운 눈은 그만해 줄래? 이 마을 반대편으로 가야 하잖아. 어서 나를 따라 하도록 해.”

“뭘 하는 건데?”

“마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규칙 1을 어기려고 하는 거지. 한 줄로 나란히 서.”

비키가 떠들썩한 렌들을 세우며 그들을 부추겼다. 그들은 의욕을 보이지 않는 류제도 억지로 끌어서 기간트리카 실전 훈련 과목 때 운동장에 나가서 하는 것처럼 한 줄로 섰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걷다가 위로 오르기를 할 거야. 다들 실수하지 말고 따라 해.”

“규칙을 어기려고 하니까 왠지 떨린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렌 군?”

“완전 두근거리는데?”

“짱 재미있겠다!”

“빨리해 봐, 비키!”

학교 규칙도 밥 먹듯이 어기는 렌 지미는 다 함께 규칙을 어기는 상황이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비키를 재촉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충실하게 본체를 재현하다니 유네의 렌은 알다가도 모르겠는 녀석들이었다.

“그럼 다 같이 왼쪽으로 한 번 갔다가…….”

그녀가 왼쪽으로 움직이자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왼쪽으로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한 번…….”

다시 제자리.

“다시 왼쪽으로 한 번 걷고 위로 오르기.”

왼쪽으로 한 번 걸음을 걸은 비키는 위로 오르기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위로 올라가는 시늉을 해보았다.

어차피 중력이라는 개념이 이상한 동네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 발을 직각으로 디디면 당연 중심이 흐트러진다. 비록 꿈속이지만 말이다.

헛발질을 하다 꽈당 뒤통수를 박은 비키는 처음으로 자신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웠다.

“비키. 왜 우리는 단체로 넘어져 있는 거지?”

“…나한테 묻지 마.”

“아니, 네가 따라 하라고 했잖아! 뭘 묻지 마야.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나 알아? 꿈나라에 빠진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내 이성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단 말이다!”

류제가 좀비처럼 일어나서 비키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비키도 여기 처음 왔는데 이 마을 규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중력도 제멋대로에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기껏 대신 고민해 주었건만 왜 짜증이야?!

“시끄러워! 그럼 잘난 척하지 말고 네가 해보든가!”

“네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한다고 나섰으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젠장, 머리가 돈 너희한테 기댄 내가 잘못이지. 더 이상 못 참아. 당장 마을을 부수고 떠난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야.”

“와와와. 류제 군, 진정해! 눈에 진심이 보였어.”

“우리들이 비정상이라는 그 말투는 뭐야. 우리들도 아주 정상이거든?”

“맞아! 비키를 모욕하지 마!”

“네 옆에 있는 그거 때문에 니들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거야! 제기랄. 이딴 규칙 따위!”

흥분한 류제가 비키가 들고 있던 책자를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책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이 나서 꽃잎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며 멋대로 성큼성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그들을 덮쳤다.

“너희들을 규칙 4000, ‘규칙이 적힌 책자를 찢으면 안 된다.’를 어긴 죄로 구금하겠다.”

익숙한 칼 단발 주황색 머리와 그를 따르는 하얀 장미들이 그들을 둘러쌌다. 그들의 인원만큼이나 상당한 수다.

“벌로서 20억 BPT 동안 갇혀있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네네 슈만의 얼굴은 안내 센터의 하얀 장미 여인보다 융통성 없어 보였다.

20억? 20억이라고 했어? 50도 못 참아서 미칠 것 같은데 20억? 류제의 안에서 뭔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류제는 더 이상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않았다. 이 이상한 것들을 한시라도 빠르게 배제시키고 렌에게로 갈 거다.

규칙이니 뭐니 네까짓 것들이 만든 그딴 걸로 날 얽매지 마. 규칙 따위 알 게 뭐야. 내 세상에선 너희들이 규칙 위반이야……!

“구속해.”

“2…20억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 말아요!”

“우에에… 5억의 4배… 어쩌지?”

수많은 장미 여인들이 규칙을 위반한 그들을 둘러쌌다. 비키가 이대로 엄청나게 긴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있어야 하는 건가 식은땀을 흘렸다. 고작 규칙이 적힌 책자를 찢었을 뿐인데.

“그런 규칙이 있는지 몰랐어요. 저…저희는 마을 외부인이라서…….”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규칙을 어겼으면 구금이다. 예외는 없다. 어서 붙잡아라!”

“꺄악! 우…우리들은 어째서?!”

네네 슈만의 명령을 받은 하얀 장미 여인들이 손을 더듬으며 그들을 붙들었다.

비키가 그녀들의 손을 피해 버둥거렸다. 얼굴 없는 장미들이 무서워서 유네는 저항하기를 포기한 상태고, 렌들은 붙잡히기 싫어서 발버둥 치며 장미 여인의 꽃잎을 뜯어내려 안간힘이었다.

규칙을 어긴 것은 류제인데 다른 사람들까지 똑같이 철창행이라니. 억울한 연대책임이었다.

“이거 놔. 내 몸에 손대지 마!”

“규칙을 어긴 건 류제잖아! 왜 우리들한테 그래?”

“유네 양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가는 이 몸이 벌을 내릴 줄 알아!”

“비키!”

물고, 뜯고, 치고. 반항하는 그들의 아비규환에도 네네 슈만은 동요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규칙이라는 이름하에 붙잡아두었다. 이런 하찮은 반항은 우스운 일이었다.

“20억?”

5억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숫자에 류제가 앞머리로 깊게 진 음영 속에서 웃었다. 그건 헛웃음이었다.

하얀 장미 여인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얌전히 있던 류제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20억? 20억이라고? 하하. 아세미의 장난감 은행 지폐 숫자도 저것보단 적다.

“웃기지 마!”

사람 미치게 만드는 장난질에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난 류제가 장미 여인들을 단번에 뿌리쳤다. 류제의 무지막지한 의지가 담긴 반항에 규칙이란 이름하에 류제를 제지하던 장미 여인들이 떨어져 나갔다.

네네 슈만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류제는 사냥감을 응시하는 육식동물처럼 악의 찬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걸 본 네네 슈만이 이죽거리다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규칙을 어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거냐?”

“그딴 규칙 알 게 뭐야. 내가 지키겠다고 동의한 것도 아닌데!”

“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사실부터가 규칙에 동의했다는 증거다. 붙잡아!”

류제는 절대로 기나긴 세월 동안 이 빌어먹을 마을에 갇혀 지낼 생각 따위 없었다. 안 그래도 짜증 났는데 이제 됐어. 강행 돌파다. 류제가 그에게로 달려드는 장미 여인들을 붙잡아 보란 듯이 네네 슈만에게 내던졌다.

“류제?!”

“다 꺼져!”

금단증상 때문에 인내심이고 뭐고 전부 알 바가 아니게 되어버린 류제가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장미 여인을 패대기치고 전진했다.

나는 성으로 가야만 해. 당장 내 렌을 찾아서 이 정신 나간 세상을 없애버려야 해. 장미 머리고 단발머리 아줌마고 죄다 뒈져버리라지!

“곱게 데리고 가려고 했더니. 그걸 써라!”

폭주하는 류제를 보며 네네 슈만이 측근에게 손짓했다. 하얀 장미 여인들이 어디서 등장한 건지 모를 바주카포를 들고 왔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장미 여인들을 발로 차며 도망가는 류제를 향해 바주카포가 겨냥되었다. 지체할 것 없이 그녀들은 단번에 바주카포를 쏘았다. 신호에 맞춰 끈질기게 들러붙던 장미 여인들이 류제에게서 벗어났다.

“류제 군!”

“류제!”

제 꿈속에서 설마 그런 무기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류제는 속절없이 포탄에 적중했다.

그 공격은 보기와는 다르게 살상력이 전혀 없었다. 밀가루 폭탄처럼 맥없이 터진 포탄에 류제는 황당했지만 적이 가져야 할 부끄러움까지 고려할 배려심은 사치다.

“이게 뭐야.”

하지만 그는 그것의 정체를 한시라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바주카포를 맞자 몸에 빨간색 X 자가 표시된 것이나 끈질기게 들러붙었던 하얀 장미 여인들이 그를 놓아준 이유를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더라면 그는 의지만으로 이 끔찍한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윽……?!”

돌연 중력이 역전되는 감각에 소스라친 그가 달려나가려 했을 때에는 이미 천장이었던 곳에 거꾸로 처박힌 후였다.

이성이라는 필터에 걸러지지 않은 집착과 분노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류제는 자신이 왜 천장으로 떨어졌는지 어리둥절했다. 얼떨떨해도 이딴 마을을 벗어날 수 있으면 아무렴 좋다.

비틀비틀 일어난 류제가 다시 도망가려는데 그다음은 오른쪽, 아래, 다시 위로 중력이 역전되어 어디로 가든 몇 걸음 채 옮기지 못했다. 까마득한 곳에서 미끄러지고 떨어진 그는 종국엔 원래 있던 바닥에 처박혔다.

땅에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마을 이곳저곳에 쾅쾅 부딪힌 류제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네네 슈만 발밑에 주저앉았다. 꿈이라서 아프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 어지러워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제야 얌전해졌군. 끌고 가.”

이상한 리모컨으로 중력을 조종하던 네네 슈만이 그것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류제의 몸에 맞은 바주카포의 어떤 성분으로 류제의 중력만 조종하는 게 이 마을의 기술인 모양이다.

그들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가다가 잡혀버린 류제에게 비키가 분노의 발길질을 했다.

“이 멍청이! 잘 하는 짓이다. 다 류제 네 탓이잖아! 치사하게 너만 도망가려고 했냐?”

“우에에… 20억은 말도 안 돼.”

6명의 렌과 비키, 유네, 류제는 한차례 반항 끝에 하얀 장미 여인들에게 포박되어서 질질 끌려갔다. 류제까지 잡혀버렸으니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각성한 류제는 몇 번 더 반항을 시도했지만 네네 슈만은 맹수를 다루는 베테랑 사육사처럼 리모컨으로 까딱까딱 중력을 조종하여 그를 손쉽게 굴복시켰다.

패턴에 익숙해진 류제가 마을에서 도망갈 수 있었을 무렵 그들은 가고자 했던 마을 중심에 당도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말짱 도루묵이다.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네네 슈만은 렌 6명과 다른 세 사람을 격리시켜서 유치장에 가두었다. 철컹. 어두운 방 안에 내던져진 그들을 감금할 쇠창살 문이 잠겼다.

주인과 분리된 렌들이 내보내 달라고 철창을 붙잡고 난동을 부렸지만 마을의 실권자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젠장. 빨리 내보내 줘! 적어도 유네 옆에 있게 해달란 말이야!”

“왜 우리들만 격리시킨 거야?!”

“렌 군, 진정해. 그러다가 저 사람들한테 밉보일지도 몰라.”

“칫. 이걸 어쩌지? 무슨 좋은 방법 없을까?”

유치장은 마을보다 이질적이었다. 검은 블록으로 가득 찬 철창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중력이 거꾸로 된 방에서 거울처럼 비친 죄인들이 똑같이 유치장에 갇혀있었다. 옆도 마찬가지였다.

각 벽면에 있는 유치장은 철창으로 3등분으로 나뉘었는데 갇힌 렌들을 보자면 5명이 들어가면 벅찬 공간이었다. 좁은 복도를 빼면 앞뒤 좌우 철창으로 막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야? 다 류제 네 탓이잖아!”

비키의 비난을 듣고는 있는지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류제는 네네 슈만의 얼굴을 곱씹으며 중얼중얼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유치장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듯했다.

“류제! 야. 류제!”

“비…비키 양. 지금은 안 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무관심하고 이성적인 류제가 저렇게까지 화를 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유네는 류제의 멱살을 잡으며 짤짤 흔들어대는 비키를 만류했다.

끔찍할 정도로 긴 시간을 이곳에 갇혀서 지내야 한다니. 막막한 사람은 비키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눈앞이 캄캄하네.”

한순간에 엇나간 계획이 억울했던 비키가 유치장을 발로 찼다. 류제가 그런 규칙이 있는지 알고서 움직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가 조금만 더 현명하게 행동했더라면 평범하게 규칙 1을 어기고 마을 반대편으로 평화롭게 추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좀 열려!”

미동도 안 하는 철창을 노려보는 비키의 주먹이 부들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류제를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쳐도 밖으로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옆 철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념한 어투는 그들이 아는 사람의 상냥하고 긍정적인 성격과 달랐다.

“누구… 어?”

그래서 비키는 홀로 옆 철창에 갇혀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사람이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세라 선생님?”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있었던 세라는 반가운 제자들을 보며 얇게 웃었다.

어째서 그들마저 이런 곳에 오게 된 건지 세라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별것 아닌 죄로 잡혀 와서 긴 시간 동안 속박당하고 마을에서 추방된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결국엔 이렇게 되기에 규칙에 반기를 들기 어려웠다.

“당신들도 규칙을 어겼나요?”

“어긴 건 류제예요! 그런 규칙이 있는지도 몰랐고요. 이건 불합리해. 선생님, 어떻게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을까요? 우리랑 같이 탈옥해요. 평생 여기에 갇혀있어야 한다니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비키가 세라가 있는 옆방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세라라면 분명 이 마을에 대해서 뭐든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라는 탈출할 의지가 없었다. 그녀는 그들과는 달리 진짜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귀여운 제자들이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세라는 그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여기서 나갈 방법은 없습니다. 저 또한 그저 때가 돼서 부디 이 마을에서 추방당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

철창을 붙잡았던 손이 실망에 빠져 추락했다. 죽어서도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고 갇혀있을 것을 생각하니 까마득해서 실감 나지 않았다.

비키가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어. 복수도 해야 하고, 가문도 부흥시켜야만 해. 그런데 이런 곳에 붙잡혀 언제까지고 멈춰 서야만 하다니.

“이게 전부 너 때문이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가만히 있지 말고 대답해, 류제!”

“…조용히 해. 지금 생각 중이잖아.”

까득까득 손톱을 물어뜯던 류제가 비키를 노려보았다. 흠칫한 비키가 류제를 밀쳤다.

저런 류제는 본 적 없다. 뭐야, 아까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항상 귀찮은 표정에 의욕 없는 녀석이었는데 이 마을에 오고 나서부터 이상해지고 있다. 세라 선생님도 그렇고, 아무리 규칙을 어겨서 상황이 복잡해졌다지만 왜 다들―

그때 위에서 철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키가 고개를 들어 거울처럼 대칭으로 만들어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가 하얀 장미 여인들의 손에 유치장에서 끌려 나오고 있었다.

“으악! 악! 제발 밖으로 쫓아내지만 말아 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규칙을 어긴 자가 우리 마을에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저는 이 마을이 아니면 갈 곳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자비를……!”

비명 소리가 멀어져 갔다. 비키가 혀를 찼다. 복에 겨운 소리나 하기는. 누구는 여기서 긴 세월을 갇혀있어야 할 판인데. 우리랑 바꿔주지 그래.

막막해진 비키가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몸을 기댔다. 고작 책자를 하나 찢은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아무것도 없는 철창에 갇혀 평생을 기다리다가 죽어야 한다니. 이래서야 셀로니아 저택의 비밀 통로에서 그저 기다리고 있던 때와 다르지 않잖아.

“후에엥. 우리 이제 어쩌지. 정말 계속 갇혀있어야 하나?”

“분명히 나갈 방법이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 보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자 적막이 찾아왔다. 류제는 여전히 구석에서 불안정한 모습으로 철창을 노려보고 있고, 가만히 앉아있던 유네는 흥분한 옆 철창 렌들을 달래주었다. 세라가 그들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했다.

삶의 의욕도, 미련도 없어 보이는 세라의 시선이 비키는 불편했다. 비키가 무릎걸음으로 세라가 있는 철창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은 왜 이곳에 갇히게 된 건가요?”

“후후, 그러게요.”

명확한 대답 없이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라는 생각하기 지친 상태였다.

그녀가 저지른 죄는 저 작은 아이들이 한 실수보다 걷잡을 수 없이 커다랬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선생님이 되었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꼴이다.

“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갇혀있는 것이 억울하지 않아요.”

“죄라뇨. 그럴 리가 없어요. 누구보다 청렴하고 온화하신 선생님이신걸요. 선생님도 분명 우리들처럼 터무니없는 죄를 덮어쓴 거예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유네도 렌들을 뒤로하고 비키처럼 세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맞아요. 책자에 써진 것처럼 걸음을 잘못 걸었다든가, 그런 이상한 이유일 거예요. 이 마을은 정상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거기에 맞출 이유는 없어요.”

“흥, 멋대로 지껄이는군.”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비키와 유네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철창 밖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네네 슈만이 서있었다. 그녀는 오만한 시선으로 철창에 갇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흐트러진 세라의 몰골을 네네 슈만이 비웃었다. 꼴좋다는 듯 사적인 감정이 가득했다.

“저년이 여기에 갇힌 이유는 사람을 죽여서이다.”

“어차피 누명 씌운 거겠지. 고작 책자 찢었다고 사람을 죽을 때까지 가두는 곳인데.”

“마…맞아, 세라 선생님이 그러셨을 리가 없잖아!”

비키와 유네가 너 나 할 것 없이 네네 슈만에게 반박했다. 겁보 유네는 네네가 무서워서 손을 벌벌 떨었다. 반대편 철창의 렌들도 맞아맞아 호응을 하며 적의를 드러냈다.

네네 슈만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철창 안에 들어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들을 그녀가 무서워할 리 없었다.

“세라 밀로니는 사람을 죽였다. 아주 악독한 살인자란 말이다.”

“거짓말!”

“믿는 건 네 자유다. 저자는 내 친우를 죽였어. 그래서 갇혀있는 것이다. 살인자에게 마땅한 벌이지. 효수하지 않은 것을 마을의 은혜라고 여겨야 할 판이야. 내 말을 부정해 봐라, 세라 밀로니.”

“나는…….”

네네 슈만의 차가운 눈초리에 세라는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죽였다. 죽게 내버려 두었다. 분명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선생님이 되었다. 어차피 나는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핑계로.

“세라 선생님, 어서 부정해요. 저 짜증 나는 아줌마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봐요!”

세라는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제자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잘난 듯이 가르치고 있지만 그녀의 실상은 현실에 굴복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네네 슈만의 살기에 세라는 먼 기억을 떠올렸다. 어두운 밤 적에게 습격당한 소대. 살아남은 자는 없다. 의무 복역 기간이 지나면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던 그녀의 동기가 세라에게 말했다.

“도망가, 세라…….”

그녀의 생명은 끊어져 가는데 세라는 한계까지 쥐어짜여서 어빌리티가 발현되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숨이 가빠오는데도 남들에게 인정받아 온 이능은 미동조차 없었다.

세라는 자신의 생명을 그녀에게 이어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녀는 죽었다. 세라의 눈앞에서. 세라는 오열했다. 그녀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곤 했다.

세라가 죽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네네 슈만의 죽마고우였다.

그때부터 세라는 의문을 품었다. 왜 우리들은 희생만 해야 하는 걸까. 그 애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아 했어. 하지만 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제립학교에 들어와 군인이 된 거야. 그 애에겐 다른 꿈이 있었지. 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잖아, 네네 슈만.

왜 우리에겐 꿈을 꿀 희망조차 주지 않아? 왜 우리는 원하지 않은 역할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라는 선택지는 없는 거야?

“너 같은 유약한 게 있으니까 인간들이 약해지는 거다. 너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니까 언제까지고 적들이 토벌되지 못하는 거야. 그 애가 죽은 건 전부 네 탓이다.”

세라의 생각을 읽은 네네 슈만이 그녀를 매몰차게 비난했다.

날카로운 공기가 스치는 가운데 오른쪽 벽면에서 철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엔 네네 슈만과 똑같이 생긴 자가 새로 들어온 죄인을 감금하고 있었다.

그걸 본 유네가 비키의 옷자락을 잡았다. 네네 슈만이 둘이다. 뭔가 이상하다.

세라의 앞에 선 네네 슈만도 유치장에 갇힌 렌과 비슷했다. 꿈속에서 만들어낸 가상의 렌. 다른 점이 있다면 세라의 눈앞에 있는 네네 슈만은 유네를 괴롭혔던 음영진 얼굴의 그녀들처럼 ‘악몽 인자’로 만들어진 세라의 악몽의 한쪽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신을 긍정해 주자 네네 슈만이라는 죄를 매도하는 존재를 만들어낸 세라의 자책이다.

“서…선생님?”

비키가 가짜 네네 슈만을 수상쩍게 흘겼다.

늘 그녀의 매도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던 세라지만 학생들 앞에서는 언제까지고 선생님이고 싶었다. 유능하고, 그들의 미래를 축복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세라 밀로니 선생님이고 싶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도대체…….”

학생들이 자신을 긍정해 준 것을 부정하기 위해 가상의 네네 슈만을 만들어냈음에도 그녀의 매도를 반박하려는 모순된 감정. 꿈이라서 가능한 자아의 솔직한 변명.

세라가 고개를 돌려 네네 슈만에게 나지막이 반박했다.

“유약한 게 아니야. 나는 처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했을 뿐이야.”

“직시?”

가짜 네네 슈만이 되물었다. 그녀는 네네 슈만의 껍데기만 둘러썼지 세라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꼈던 동일한 존재였다. 그 말은 가짜 네네 슈만은 세라의 변명을 전부 간파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직시한다고 뭐가 달라지지? 뭘 바꿀 수 있다는 거지? 그딴 것보다 하나라도 더 많은 적을 섬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높으신 분들의 입맛대로 충성하는 것뿐이잖아. 알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린 것을 그런 말로 변명하면 스스로가 대단한 인물이 된 것 같아서 좋지?”

세라가 그녀를 비웃었다. 우리는 둘 다 비틀렸다. 군인으로 만나서는 안 됐어. 하지만 네네 너는 네 운명에 순응하고 싶겠지. 복수하고 싶으니까.

“그럼 넌 뭘 할 수 있지?”

네네 슈만이 으르렁거렸다. 세라를 죽일 듯이 내려다보는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

모든 것을 침몰시키는 검은 늪처럼 그녀는 철창을 녹이고 세라에게 다가갔다. 세라가 있던 유치장의 바닥이 찐득하게 변했다. 축축하고 기괴한 광경에 비키가 저것 좀 보라고 류제를 흔들었다.

이번에도인가. 류제가 네네 슈만과 대치하는 세라를 흘겼다. 여기서 나는 세라 선생님이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를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비키 때도 그랬고, 유네 때도 그랬으니까.

세 번째나 반복하다 보니 지긋지긋하지만 녹은 철창을 보자면 쓸모없지는 않은 것 같다. 조금만 더 녹이면 탈출구가 생길 것이다.

“대답해 봐, 세라 밀로니. 뭘 할 수 있지?”

“적어도 너보다는 미래지향적인 일이야.”

“그게 뭔데? 미래? 미래라고? 세라 밀로니의 미래라. 그래서 제 입맛대로 판단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학생의 길을 방해한 건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죄책감을 네네 슈만이 서슴없이 공격했다. 정곡을 찔린 세라의 시선이 멀리 철창 안의 렌과 맞았다. 앞길을 막았다.

그녀는 렌 지미가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어빌리티 척도를 속였다. 그 아이는 절대 정계의 간섭을 감당하지 못해. 그 애는 류제처럼 영리하지도 않고 어빌리티가 안정적이지도 않아. 착각일지도 모르는 그 결과를 보고하면 정계에서 그 애를 어떻게 취급할지 뻔히 보이는데 선생님으로서 어떻게…….

“너는 이기심으로 그 애의 가능성을 막았다. 그런 네까짓 게 선생님? 미래지향적? 그게 아니라면 뭐냐. 인류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존재의 부활을 멋대로 비밀로 한 것? 그게 네가 원하는 미래냐?”

도망갈 궁리만 하던 류제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세라는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우리들이 조금만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기껏 평화가 찾아왔으니 모두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인류에게 위협을 주려고 했던 게 아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뭐야. 높으신 분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주제에 마음속으로만 반항하면서 결국에는 시키는 대로 하는 네가 나와 뭐가 다르지? 뭐가 다르다는 거냐? 응? 무능한 세라 밀로니. 이것도 변명해 봐!”

“아냐! 나는―”

“너는 위하는 척 네 제자들의 인생을 망치고 있어. 인류를 위협으로 이끌면서 뭐라도 된 양 반항하는 척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자신의 못남을 남 탓하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하지. 이 위선자!”

세라를 가두던 철창문이 완전히 녹았다. 네네 슈만이 힘없이 벽에 기대고 앉은 세라의 앞에 섰다. 네네 슈만의 뒤로 검은 늪이 질척거리면서 퍼져나갔다.

악몽 인자가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세라를 잡아먹으려고 쉭쉭거렸다. 이상함을 느낀 비키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세라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저런 아줌마가 하는 말 따위 무시하고 저 사람한테서 떨어져요! 선생님, 선생님!”

“무능한 세라 밀로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라 밀로니. 착각에 빠진 아둔한 세라 밀로니.”

네네 슈만 흉내를 내는 ‘악몽 인자’가 제멋대로 만들어낸 가사로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세라의 목을 졸랐다. 세라는 네네 슈만과 함께 검은 늪에 빨려 들어갔다.

“선생님! 안 돼. 그렇게 두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비키 양, 위험해!”

“선생님, 제 손을 잡아요!”

검은 늪에 의해 망가진 철창의 틈에 들어간 비키가 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세라의 체념이 비키가 그녀를 이끌어주는 힘보다 강했기에 비키도 검은 늪 속에 빨려 들어갔다. 비키가 미끄러지자 유네가 뒤를 이어 비키를 붙잡았지만 유네의 힘으로도 두 사람을 끌어 올리기에 어림없었다. 옆방에 있던 렌들이 철창을 흔들었다.

“비키, 비키! 위험한 짓 하지 마.”

“유네! 젠장, 이 망할 철창 까짓 게!”

“위험하니까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가면 안 돼!”

“으으으… 비키 양, 조금만 더 힘내!”

“크흑. 바닥이 안 짚여. 유네―”

턱까지 차오르는 늪의 감촉에 불쾌감이 물씬 든 비키는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손에 잡힌 선생님의 손목을 감히 놓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류제! 당장 우리를 도우란 말이야. 누구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온 건데!”

“류제 구우운. 도와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비키는 세라처럼 악몽 속에 꿀꺽 집어삼켜졌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류제는 고민했다. 어찌 되었건 가짜 네네 슈만의 힘으로 철창이 뚫렸다. 지금이면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비키나 유네나 그에 딸린 렌들을 귀찮게 달고 다니지 않아도 될지도 모르지. 류제가 냉정하게 그들을 흘겼다. 난 렌을 만나러 가야 해.

“…….”

어두운 마음이 그를 유혹했음에도 류제 역시 본성은 선량한지라 마음속 깊이 아릿아릿 느껴지는 양심을 거스르지 못했다.

더군다나 만일 자신이 그들을 무시하고 혼자 성으로 향한다면 진짜 렌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두렵기도 했다.

“제길.”

류제가 코끝까지 빨려 들어간 유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적어도 이딴 철창 속에 갇혀있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겠지. 류제가 버둥거리는 유네의 손을 붙잡고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악몽 인자는 세라의 마음속 어둠을 먹고 커질 대로 커져서 류제가 서있던 발판까지 녹였다.

그냥 갈걸, 하고 후회해도 재경이 그 아슬아슬한 선택지 갈림길을 봤더라면 류제의 뒤통수를 때리려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해서 다행이라고 깊게 안도했을 것이다.

검은 늪에 발목이 붙잡힌 류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두려움을 머금은 유네마저 늪 속에 집어삼켜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똑같이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철창에 남은 렌들이 기겁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어둠 속에 삼켜진 그들에게 그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악몽 인자는 마을 한가운데에서부터 분수처럼 흘러넘쳐 폭주하기 시작했다. 규칙에 얽매인 마을을 없애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하나가 되어버리려는 건가. 세력을 키운 그것들이 좀먹듯이 마을을 침입해 나갔다.

꺼림칙한 기분을 느낀 진짜 네네 슈만이 서둘러 유치장으로 돌아왔다. 규칙을 어긴 자들을 구금한 유치장이 검은 늪이 되어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녀가 혀를 찼다.

진짜 네네 슈만은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렌들마저 집어삼켜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곳에서 벗어난 네네의 발걸음이 어디론가 향했다.

“여긴…….”

검은 늪에 집어삼켜져 휩쓸리다가 간신히 눈을 뜬 류제는 앞에 펼쳐진 절망과 분노의 중심을 보았다. 세라의 과거가 단편화되어서 눈앞에 스쳤다. 노랗게 바랬지만 똑똑하게 보이는 기억의 조각.

“세라, 난 말이야.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어.”

순진하게 생긴 금빛 눈망울을 가진 어떤 여자가 주저하다 말했다. 네네에게는 비밀이라고 당부한 그녀는 곧 못 들은 걸로 하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그러지 마, 네네. 세라도 그렇고 사람은 각자의 방식이 있잖아. …나도 실은…….”

어빌리터는 군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고지식한 친구 옆에서 차마 진심을 말하지 못하고 꾹 눌러 담고 있다가 세라에게 스치듯이 전한 말. 세라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이미 늦은 후였다.

“도망가, 세라…….”

나름의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엔 죽기 위해 함께했던 그들.

그녀는 상대가 누구든 싸우는 것을 싫어했다. 평화를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녀의 천성이었다.

세라와 같은 소대에 배정받은 그녀는 의무 복역이 끝나면 교직으로 전환해 제립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그게 좁은 선택지 속에서 고른 그녀의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족과의 싸움 한복판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세라는 무능했고 그녀를 살릴 수 있었던 힐링 팩터는 고위 간부들의 몫이었다.

“왜 우리들은 군인이 되어야만 하는 거지?”

“그것은 우리가 어빌리터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은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거지?”

“그것은 우리에게 적을 물리칠 힘이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의 꿈은 외면받는 거야?”

“그것은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왜 우리들만 희생되어야 하는 거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주적 마족의 토벌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해서 인류가 얼마큼의 기대를 걸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그걸 학생들에게 자랑스레 설파한 것은 너일 텐데?”

눈물을 흘리는 세라와 그 앞에 선 네네 슈만이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환영처럼 보이는 그들이 진짜 그곳에 있는 것일까. 문득 류제는 의심이 들었다.

“희생하고 싶지 않아 했어. 그 애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어.”

하지만 소꿉친구인 너의 태도 때문에 그 애는 항상 혼자서만 속앓이를 했지.

“그 애는 의무 복역이 끝나면 선생님이 될 생각이었어.”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족에게 살해당했다.

“나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마족의 세를 죽인 지금도 강한 어빌리티를 가진 아이들은 정계에 휘둘리며 그들의 장기말이 되고, 약한 어빌리티를 가진 아이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주변의 시선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실상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빌리터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 제힘으로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그들이 버린 의지를 대신 짊어지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다.

“그러는 너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순응하고 있잖아.”

세라 앞에 무릎 꿇은 악몽이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학생들에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육을 한 건 그녀다.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한 것도 그녀다. 왜냐하면 위에서 그렇게 시켰으니까. 거절할 명분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이 된 그녀는 여전히 무력했다.

“속으로는 불평하지만 네 행동은 우리와 아무것도 다르지 않아.”

어빌리터를 장기말 취급하는 높으신 분들에게 휩쓸리며 제대로 된 반박 하나 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의 세라 밀로니다.

속으로는 좋은 선생님인 척, 참된 교육자인 척하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여전히 졸업을 해서 전선에 나가고 희생하는 선택지밖에 없다.

“네 반항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야.”

담당하고 있는 학생의 척도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학생 중 한 명이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정계에 밝히지 않은 것. 이것이 과연 어빌리터나 비어빌리터들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마왕이 부활해서 인류가 위험으로 내몰릴 수 있는 가능성을 무시하는 이유가 고작 그가 그녀의 제자라서라니. 추악한 욕심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의 과욕이 오히려 인류를 위험으로 내몬다는 불안. 그 감정이 그녀를 잠식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척해주던 세라의 결심이 이렇게까지 그녀를 얽매고 있었음을 알아버린 류제는 마음에 거슬리던 죄책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어차피 꿈속이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마을을 빠져나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임에도 그가 세라를 구한 이유는 그를 향한 그녀의 희생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류제는 세라를 구하는 선택지를 택한 걸 한시라도 후회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악화시키지 않아.”

류제가 괴로워하는 세라의 앞에 착지했다. 악몽을 극복하는 것은 그녀의 역할이지만 죄책감의 원천인 그가 죄책감을 부정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선생님이 날 선택해 준 걸 후회하지 않게 할 거야.”

“…류제 학생?”

아무리 꿈이라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방심하면 안 된다. 이는 날 믿어준 선생님이나 렌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다.

“전 선생님의 과거는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계신다는 것만은 알아요. 선생님 덕분에 제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겁니다. 저는 그런 선생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자신이 괴물임을 눈앞에서 목격했음에도 받아들여 줬던 세라의 상냥함은 계산된 것이나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타인을 믿고 싶어 하는 순수한 성격이다.

그 덕분에 머리를 부딪쳐 죽어가던 렌은 살아났고, 자신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망설였지? 세라 밀로니를 구하는 것을 귀찮다고 생각했잖아.”

네네 슈만의 형상을 한 악몽이 류제에게 속삭였다. 그건 사실이었기에 류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난 세라 선생님을 구하는 것을 택했어. 널 보니 세라 선생님이 해왔던 행동이 나쁘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지네.”

“류제 학생, 정말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언뜻 비치는 희망에 악몽이 얼굴을 구겼다.

“자기 위안 그만둬, 세라 밀로니.”

“자기 위안이 아니야. 나는 세라 선생님의 제자인 류제 신리로서 선생님에게 말하는 거야.”

“무능한 주제에……!”

“세라 선생님은 무능하지 않아!”

악몽에 휩쓸리다가 중심에 당도한 비키와 유네가 기류에서 벗어나 세라의 곁에 섰다.

“당신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매도하지 마. 세라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이란 말야.”

세라를 찾아 여기까지 간신히 도달한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을 숨겼다. 그녀들은 한번 악몽을 극복해 냈다. 이번엔 그 힘으로 세라를 일으켜 세워줄 차례였다.

“너희들의 존재가 세라 밀로니를 무능하게 만드는 거다!”

악몽이 세라에게서 희망을 숨기려고 발버둥을 쳤다. 기류가 강해지고 악몽은 곰팡이처럼 마을을 침식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 세라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하신데!”

“선생님은 틀리지 않았어. 뭔지는 몰라도 틀린 건 반드시 당신이야. 그걸 우리가 증명해 나가겠어.”

세라를 향한 확고한 믿음. 그들이 배신을 당한 적 없는 어린아이들이라서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세라의 진가를 알아서인가 따지기는 까다로웠지만 그들은 눈앞에 있는 세라를 믿었다.

세라가 사람을 죽였다거나 나쁜 짓을 했다고 말하는 건 반드시 어떤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 정말로 나쁜 사람이면 죄책감 따위 안 가지는걸.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세라 선생님 편이야. 당신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어. 우리는 세라 선생님을 믿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 주제에!”

악몽이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물러서지 않고 세라를 지켰다.

류제도 이번에야말로 세라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때라고 생각했다. 세라의 과거를 보고 있자니 꿈속이지만 이곳의 세라가 가상의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알 수 있는 거야.”

아직 아무 색으로도 물들지 않은 아이들이었기에 선생님으로서의 그녀를 볼 수 있다.

“선생님은 우리들이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셔. 그것만 알면 되는 거 아냐?”

비록 꿈속이지만 욕구에 눈이 멀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한순간이나마 내칠 뻔했던 그는 결국 이곳으로 왔다. 그것은 오롯이 세라가 해낸 일이었다.

“류제 학생.”

세라의 눈에 눈물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그들이 말한 것처럼 잘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말을 들으니 그녀가 지금껏 해왔던 행동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선생님이 있으니까 우리들은 안전하게 꿈을 꿀 수 있어.”

세라는 몇 번이고 학생들을 위험 속에서 지켜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어둠에 먹힐 뻔한 류제와 머리를 다친 렌. 학교에 병마족이 침입했을 때 그녀가 부재했다면 역병 인자에 감염된 다른 학생들이나 렌은 이 세상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죠, 세라 쌤?”

악몽 속에서 등장한 낯선 손이 세라의 어깨를 붙들어 안았다. 그 손은 찐득한 타르에서 빠져나와 익숙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세라 쌤 없었으면 난 몇 번 죽었잖아요. 히히.”

별생각 없어 보이는 바보 같은 웃음. 그 미소에서 보이는 그녀를 향한 순수한 호의. 가르친 아이들이 짓는 활기찬 미소는 나약한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녀의 바람은 오직 하나다. 학생들의 행복. 가장 아픈 손가락이 환하게 웃으니 악몽 인자를 자극했던 몹쓸 마음이 세라의 눈물과 함께 소나기에 씻겨 내려간다.

“쌤?”

세라가 말을 않자 렌이 눈앞에 손을 저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이지 말썽꾸러기다. 그래, 내가 포기하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겠어. 기댈 수 있는 어른이 한 명도 없는 위태로운 아이인데.

혼자 동떨어진 기분을 내색하지 않는 척하지만 실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다. 내가 저 아이를 바른길로 인도해야만 해.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이 작은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마저도 포기하려고 했던 건가.

“정말…….”

세라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와준 학생들을 꼭 안아주었다.

네네 슈만의 형상을 한 악몽 인자가 버둥거리더니 세라가 품은 빛에 먼지가 되어 흐트러졌다. 기묘한 미로 마을을 좀먹던 타르색 악몽의 늪 또한 초콜릿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다가 환상처럼 사라져버렸다.

드디어 세라가 그들이 알고 있는 선생님으로 돌아왔다. 유네가 안도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걸 본 렌이 낄낄 웃으며 세라에게 고자질하였다.

“쌤~ 유네가 또 운대요.”

“노…놀리지 마, 렌 군. 선생님, 훌쩍,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으아앙, 진짜 무서웠어요.”

“물론이지요.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제 곁에 있어줘서.”

주저앉았던 세라가 당차게 발을 딛고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금 끌어안아 도닥여 준 후 정면에서 환하게 비쳐오는 태양을 응시했다. 어두컴컴한 기운이 감돌던 마을에 야곱의 사다리가 내려왔다.

세라의 악몽 인자가 마을을 좀먹은 덕분에 마을 중간중간에 숭숭 구멍이 나서 마을 반대편 멀리 류제가 그토록 찾던 성이 보였다.

“결국 마을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군요. 이대로 붙잡히면 더 큰 죄를 물리려고 할지도 몰라요.”

“그럼 어떻게 하죠?”

“괜찮습니다. 마을이 이렇게 된 건 당신들 탓이 아니라 제 탓이니까요. 마을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하셨죠? 이 틈을 타 도망가도록 하세요.”

“그럼 선생님은요? 그 이상한 장미들에게 붙잡히면 선생님도 위험해질 거예요.”

세라가 다시 감옥에 갇혀 무력하게 기대고 있을 모습을 상상한 유네가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범인을 잡기 위해 무장한 하얀 장미 여인들과 그들을 이끄는 네네 슈만이 호각을 불었다.

네네 슈만이 조종했던 중력을 거스르는 이상한 바주카포와 리모컨에 걸리면 끝장이었다. 다행히 늪에 끌려 들어갔을 때 류제의 몸에 남은 X 자 흔적이 지워졌지만 또 맞으면 곤란했다.

“유네에. 유네!”

“비키. 우리 보여?”

“유네 양. 무사해서 다행이다. 빨리 이쪽으로 올라와.”

“우리가 나가는 길을 찾았어!”

그들이 서있던 공간 위편 조각난 천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멍이 숭숭 난 머리 위편의 건축물들 사이에서 렌들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악몽 인자에 삼켜졌었던 틈을 타서 도망갈 길을 파악한 모양이다.

귀찮게 줄줄 딸려오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할 때는 하는 부분은 진짜 렌하고 닮았다고 류제는 생각했다.

“이거 잡아!”

렌들 중 누군가가 밧줄을 던졌다. 서로의 얼굴을 살피던 세 사람은 주저 없이 밧줄을 잡았다.

“선생님도 가요. 렌, 너도!”

가만히 서있는 세라에게 류제가 손을 뻗었다. 세라는 망설이다가 류제의 손을 붙잡고 렌들이 끌어 올려주는 밧줄을 타고 올라갔다. 이곳을 나가려는 아이들을 보고 세라도 결심이 섰다. 명색이 선생님인데 학생들끼리만 내보낼 수야 없다.

엉망진창인 중력을 이용해 천장에 있는 렌들과 어렵지 않게 합류한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잠시 미루었다. 구멍이 숭숭 난 마을을 뒤집어 도망친 죄인들을 잡아넣느라 혈안이 된 백장미 여인들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렌들의 인도를 통해 답답하게 그지없던 미로 마을을 빠져나온 그들은 보다 가까워진 성을 향해 위풍당당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때 탈옥한 죄인을 잡기 위해 뒤를 쫓아온 네네 슈만과 하얀 장미 여인들이 도망가는 그들에게 외쳤다.

“거기 서라!”

“감히 우리 마을을 박살 내다니, 도망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어서 바주카포를 날려!”

거기 서란다고 서는 멍청이는 없다. 다시 마을로 붙들려 갔다간 언제 빠져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쏘냐.

그들은 아침마다 운동장을 돌았던 게 괜한 짓이 아니었다는 잽싼 몸놀림으로 도망쳤다. 뒤에서 들리는 펑펑 바주카포가 터지는 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다.

“우악!”

“그쪽이 아니야!”

그 와중에 새로 합류한 세라의 렌이 혼자서만 이상한 길로 빠질 뻔한 것을 류제가 낚아채서 허리춤에 끼었다.

류제라도 잡아보고자 리모컨을 이리저리 조종하던 네네 슈만이 리모컨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외쳤다.

“네 죄에서 도망갈 셈이냐, 세라 밀로니!”

네네 슈만의 고함 소리에 세라가 뒤를 돌았다. 세라는 잠시 멈춰 서더니 악우에게 전했다.

“나는 마주하는 것을 선택했어. 너처럼 계속 과거에 붙들려 있기엔 시간 아깝잖아.”

그렇게 말한 세라는 속 시원한 얼굴로 제자들을 뒤이어 쫓아갔다.

네네 슈만은 세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얌전히 갇혀있었던 주제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단 말인가.

“저 불온분자들이 꼬드긴 건가.”

그녀가 혀를 찼다. 마을 밖으로 나가버렸으니 중력을 바꾸는 리모컨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마을은 무너졌지, 시간을 재야 하는 아르마딜로 페인트공들은 놀라서 공이 되어버렸지.

그녀가 허리춤에서 아까부터 계속 오기 시작한 무전을 짜증스럽게 받았다. 마을이 혼란에 빠졌으니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다급한 전언이 들려왔다.

“…흥. 어디까지 외면할 수 있나 두고 보겠어. 철수한다!”

그녀가 망토를 펄럭거리고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났다. 식충식물처럼 으르렁거렸던 하얀 장미 여인들이 세웠던 가시를 수거하고 꽁지 빠져라 도망가는 탈옥수들을 흘겼다.

마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유유자적 도망간 범죄자들을 놓쳐버린 후 빈손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치욕으로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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