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5)
본디 꿈은 꿈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욕망 분출에 솔직하다. 욕망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 없는 욕구에 휘둘리는 동안 조그마하게 존재하는 이성 때문에 우리는 꿈을 꿀 때 불쾌하다. 하지만 그 무모함에도 꿈이란 역시 재미있는 법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꿈의 시작이란 흐지부지하고 불명확하다. 목적도, 이유도 모르는 채 빙글빙글 자신의 무의식에 시달리다 불현듯 눈을 뜨면 그게 꿈에서 깬 것 아니겠나.
꿈에서 깨지 못한 류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꿈속 세계의 모든 것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여기가 학교인지, 아니면 예전에 살던 고아원 뒤뜰인지 기억이 뒤죽박죽 섞였다.
결혼하겠다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웨딩드레스에 부케까지 들고 죽자 사자 달려드는 아세미와 그 뒤를 쫓는 치안대 무리를 피해 간신히 도망치는 데 성공한 류제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느 날의 둔덕에 걸터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끌려갈 뻔했다.
“아세미는 엄청 끈질기다니까. 치안대원들이 날 잡으려고 하는데 왜 나랑 결혼을 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아세미가 동화책에 나오는 드래곤이 돼서 불이라도 뿜을까 말을 못 하겠다.
분명 전까지만 해도 그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했었던 것 같은데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아세미에게 시달리다 보니 정작 류제는 그가 좋아한다는 사람이 누구고 어디에 있는지 기억이 깜깜했다. 늦기 전에 찾아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아, 맞아. 나는 그 사람을 구하러 가야 했었어. 그런데 나를 잡으러 다니던 아세미와 아세미랑 결혼하면 나를 잡아가려고 내 뒤를 쫓는 치안대원이 방해를 했지. 그래서 깜박한 건가. 이런… 시간 낭비했잖아.
어서 가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가면 얼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거야.
류제는 그 사람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찾으러 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느꼈다. 왜냐고? 별 이유 있나. 꿈이니까. 그리고 보고 싶으니까.
결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선 류제는 산 넘어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성을 응시했다. 저기로 가야 한다. 엄지손톱보다 조그마하게 보이는 성에는 분명 그가 찾는 사람이 있을 거다. 저기서 해답을 얻어야겠어.
아세미와 치안대원을 따돌린 걸 확인한 류제가 씩씩하게 들판을 거닐었다. 언젠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고아원 주변을 탐색하다가 발견한 고요한 들판과도 닮았다. 산들산들 마른 갈대와 지푸라기가 익숙한 빛깔로 흔들거렸다.
열심히 걸어도 성은 여전히 까마득하다.
잠깐만 집중한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멈춰 서면 머리가 멍해져서 의욕을 잃었다. 여기에 서있는 이유조차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신하는데 분명 저 갈대같이 서로 부딪히면 스스스 시원하게 파도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들판에서 벗어나니 사람들이 왁자지껄 제멋대로 헤집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새로운 마을이다.
그곳에는 뱀처럼 긴 이상한 동물을 타고 날아오르는 사람부터 하늘 위로 나있는 도시를 헤매는 사람, 트레이를 타고 빙글빙글 똑같은 곳을 돌면서 마냥 웃고 있는 사람, 구름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 등등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들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각자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이 납득 가능한 행동을 했다.
마을에는 원래 사람들이 많지. 저들이 몽마가 만들어낸 꿈에 끌려 들어온 타고시아 해변 일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리 없는 류제는 성큼성큼 누군가가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 옵쇼!”
철색의 무언가를 찰흙처럼 주무르고 있던 어떤 이가 류제를 반겼다. 날개 달린 도롱뇽처럼 생겨가지고 얼이 빠져 헤헤 웃는 그자는 딱딱한 마룻바닥을 고무처럼 휘게 들어 빈 공간에서 검은 것을 마저 더 꺼내 들었다.
아, 저거 철이다. 만들고 있었구나. 바쁜데 온 건가?
“열쇠를 얻고 싶은데요. 여기 오면 구할 수 있다고 했는데.”
“물론이죠. 무슨 열쇠를 드릴까요?”
“저 성의 열쇠입니다.”
류제가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성을 가리켰다. 아직도 엄지손톱만큼 작게 보이는 성이 창밖에 있었다.
“물론 있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정신 나간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찰흙 질감의 쇠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 보던 그는 그걸로 긴 막대기 같은 것을 만들어 류제에게 넘겨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니…….”
류제가 그걸 건네받자 열쇠로는 영 쓰지 못할 정도로 약해서 금방 아래로 구부러졌다.
이래서 문제라니까. 류제가 불만스러운 듯이 투덜거렸다.
“이건 열쇠가 아닌데요.”
“하하하, 열쇠는 이제 없어요.”
“그럼 절더러 저 성에 어떻게 가라는 건가요?”
“못 가는 거지.”
그는 낄낄 비웃다가 다시 마룻바닥을 들췄다. 그 안에는 찰흙 쇠 대신 검게 점철된 기묘한 공간이 있었다. 그는 짜증을 내려는 류제를 피해 그 아래로 점프해서 사라졌다.
사람 하나가 들어가긴커녕 팔뚝도 간신히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좁은 곳에 주인장이 삼켜져서 사라지자 대장장이 용품도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꿀꺽 집어삼켜졌다.
류제는 눈을 끔벅거렸다. 어느새 마을 밖에 있는 그는 모르는 곳에 서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성은 아직도 저 먼 곳에 있었다. 손에는 구부러진 열쇠 하나.
어쩔 수 없지. 이걸로 새롭게 열쇠를 만들어보는 수밖에. 열쇠를 만지작거리던 류제는 찰흙 질감이었던 열쇠가 어느새 단단하게 바뀌어있는 것을 보고 아차, 이마를 짚었다.
철은 조금만 지나면 물렁물렁하던 게 굳어버린다고. 도망가기 전에 진작 바꿔달라 했어야 했는데. 이미 굳어버렸나. 어쩌지, 성에 가려면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유니언 기호인지 말발굽 모양인지 U 자로 바뀌어버린 열쇠를 류제가 호주머니 어딘가에 넣어두었다. 열쇠는 어쩔 수 없지. 성에는 강제로 들어가야겠다. 류제가 성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기롭게 산을 넘고, 강을 건넜지만 가도 가도 가까워지지 않는 성은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같았다. 몇 번이고 주변 풍경이 바뀌었어도 평생을 제자리걸음을 걷는 기분이다.
걷다 못해 지쳐서 멈춰 선 류제는 현재를 의심했다. 내가 성에 도달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짓인 건가. 성이란 그저 세상의 배경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막연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아니야, 성은 반드시 존재해. 존재하는데 내가 다가가지 못하는 거야.
으음, 지금 생각해 보니 성에 가려면 다른 조건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 조건을 모르면 나는 영영 성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그게 뭐였더라.
그럼 이 열쇠는 완전 지레짐작이었던 건가. 내가 열쇠를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난다. 알아서 잘 풀릴 것이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고작 마을로 가서 대장장이에게 부탁했던 게 무슨 고생인지는 모르겠으나 꿈속이니 그것도 고생으로 따져지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바위에 앉아 진지하게 고민하던 류제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다. 저기 있을 사람한테 물어보자. 분명 성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야. 실마리를 얻을 생각에 마음이 풀린 류제가 연기가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이제 저 성에 갈 수 있어. 돌려받을 수 있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들판을 건너 연기가 나는 곳까지 질주한 류제는 거대한 대저택이 불타며 검은 구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신났던 마음을 접었다. 연기는 모험가가 지펴놓은 작은 모닥불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새까만 뭉게구름이 주변을 덮으니 위기감이 느껴졌다. 왜 저택이 불타고 있는 거지? 위험하니까 일단 불을 꺼야 하는데 큰일이다, 이 일대에는 물이 없다.
“안에 사람 있나요? 있으면 도와드릴게요!”
류제가 저택 바깥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위험에 처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올바른 도덕관념을 배운 그는 위험을 그대로 모른 척할 수 없었다.
1층, 2층, 3층, 4층. 류제가 고개를 위로 들며 창문 수를 세어보았다. 창문 안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저택이 너무 커서 바깥으로 탈출하지 못했나? 큰일인걸. 내가 구해줘야 할지도 몰라.
[하하하하. 드디어 종지부를 찍는다. 하하.]
땅이 울릴 정도로 으리으리한 목소리가 검은 연기 안에서 들려왔다. 검붉은 염화. 저택을 뒤덮은 검은 구름 속에서 새빨간 불덩이가 숯처럼 빛났다.
저택 안쪽에서 누군가가 처절하게 웃고 있다. 이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려오는 거지? 류제는 연기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인기척을 찾아 그곳을 살폈다.
울렁이는 그림자만 보아도 소름이 전신을 훑었다. 분명 누군가가 있다. 이 저택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저기요?”
그가 인기척을 향해 외쳤지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여러모로 수상하다. 새까만 연기도 점점 기분 나쁘게 변해갔다. 일대에 검은 안개가 끼었다. 그렇게 인지하니 청명했었던 하늘은 별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으로 내려앉았다.
“윽, 숨 막혀.”
코를 막아도 기관지를 괴롭히는 답답한 연기. 비릿한 쇠 냄새. 박쥐의 날갯짓 소리. 깔깔깔 누군가를 비웃는 웃음. 저택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한둘이 아니다. 일대에서 속삭이는 웃음소리는 어떤 무리의 것이었다.
불이 난 건가 했더니 습격을 받고 있는 건가? 이 저택은 굉장히 위험한 곳이었잖아. 설마 이 웃음소리들 전부 다 적들의 것인 건 아니겠지?
저택 꿈을 꾸는 자의 두려움에 쉽게 전염되어 버린 류제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공포를 느꼈다. 뚜벅거리는 소리, 타는 냄새, 좁은 시야, 스산한 공기에 돋는 소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무리가 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다. 이 저택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그들과 싸움을 계속하는 중이다.
“죽어라, 사악한 마족들아!”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
“비키는? 비키는 제대로 피신했느냐?”
“걱정 마세요.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그보다 어서 이놈들을 해치워야 합니다.”
“오빠! 오빠, 위험해!”
“절대로 흩어지지 마. 마족을 상대로 홀로 싸우는 건 자살행위와 매한가지다. 우리는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의 위대한 군인들이다. 절대 마족을 상대로 물러서지 마라!”
어떤 여인의 근엄한 목소리가 어수선한 주변을 지휘했다. 아군이다. 류제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저택은 새까만 연기에 가둬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런 대화를 나누는 자들이 누구인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연료가 다 된 부스터 소리.
웃는 자들과 상대하는 누군가의 고함.
살갗이 베이는 소리와 평행하는 날카로운 비명.
피가 튀고 사람이 죽는다. 그가 목소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은 안개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다들 살해당하고 있다. 위험해. 여기에 있다가는 나도 같은 꼴을 당해버릴 거야.
“셀로니아가의 명예를…….”
[셀로니아가에 명예 따위는 없어.]
냉소적인 목소리가 툭 던져졌다. 마지막까지 고결하던 목소리에 죽음이 어렸다. 아아, 안 돼. 믿었던 그녀마저도.
“으흑…흑… 스물셋… 흑… 훌쩍… 스물넷… 흑… 엄마… 엄마아… 아빠… 흑… 스물다섯…….”
메케한 연기 사이로 누군가가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붉은색 꽁지머리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어린아이. 손에는 가족사진이 담긴 펜던트를 꼭 쥔 채 두려움을 삼키며 숫자를 세고 있었다.
류제는 저택 바깥에 있었던 그가 어째서 이 작은 비밀 통로에 서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적들의 웃음소리가 그녀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몸을 움츠리며 눈물을 닦은 그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를 세었다.
류제의 마음이 떨려왔다.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친구, 비키 셀로니아였다.
류제는 일순 스치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이마를 짓눌렀다. 그건 뭐였지?
당장 가장 중요한 렌도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류제이기에 저 아이가 비키 셀로니아라고 해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다가 모습을 보니 이름만 떠올랐을 뿐. 저 빨간 꽁지머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가 힘없이 울고 있다. 그녀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무의식 속에 박힌 류제는 왠지 모를 언짢은 기분을 느꼈다.
이런 애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외견도 조그마한 데다가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은 애가 어둡고 습한 곳에서 소리를 죽이며 울고 있다니. 류제는 인식이 혼란스러웠다.
“비키?”
“으흑…흑… 서른…다섯… 서른…여섯… 흑…….”
“여기서 뭐 해?”
“……흑…흑.”
맞아. 평상시의 비키라면 당장에 저놈들을 물리치자며 류제를 끌고 나갔어야 했다. 가문의 부흥이니 복수니 말하면서 무기를 들고 고집부리며 저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나대야 한단 말이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비키는 언제까지라도 이곳에 숨어 숫자를 세고 있을 모양인 듯했다. 훌쩍거리기만 하는 그녀는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듯 궁금증을 하나도 답해주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성으로 가야 하는데.”
비키와 함께 낯선 비밀 통로에 갇혀버린 류제가 난감한 듯이 머리를 싸맸다. 밖에는 사람을 죽이는 적들이 들끓어서 섣부르게 나갈 수도 없다.
나는 왜 이런 곳에 들어왔던 거지? 분명 저택 바깥에 있었던 것 같은데. 검은 연기에 삼켜져서 이쪽으로 이동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셀로니아 가문을 상징하는 사자 모양 석상 안쪽. 알고 있는 사람만이 작동할 수 있는 비밀 통로는 적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장소에 있었다.
이 비밀 공간은 예로부터 창고나 금고 같은 걸로 쓰였는지 먼지가 자욱하게 낀 채 잡동사니들이 한쪽에 처박혀 쌓여있었다. 오래된 초상화부터 시작해서 이상한 고문 도구에 거미줄 낀 금화까지. 느껴지는 세월의 흐름이 기분 나쁘다.
흉흉한 것들과 영겁의 시간을 보내는 비키는 이런 곳에 혼자 숨어있으며 저택에서 함께했던 모든 이들의 사라지는 말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머물 곳이 사라져간다. 외부로부터 침입해 온 적들에 의해. 사건의 인과는 어찌 된 것인지 모르는 채로.
비키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음에도 적들은 만족하지 못했는지 배후를 어슬렁거리며 늑대처럼 주변을 탐색했다. 밖이 보이지 않는 류제도 그것이 느껴졌다. 당시의 일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비키의 무의식에 감응한 탓일 것이다.
그들의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류제는 다급해졌다. 이러다가 둘 다 들킬 거다. 이 장소가 발각되기 전에 저택 밖으로 도망쳐야 했다.
“비키… 여기서 나가야 해. 여긴 너무 위험해.”
“안 돼! 아빠가 여기에 있으라고 했어. 금방 돌아온다고 했단 말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적들을 물리치고 저 문을 열어주실 거야.”
“고집부릴 시간 없어!”
“싫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고집불통이다. 어린 비키는 훌쩍훌쩍 울기만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리 긍지 높은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은 강하다. 어빌리터라도, 비어빌리터일지라도 다 함께 모여서 정의롭게 마족을 물리친다.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셀로니아 가문이다.
분명 이번에도 멋지게 마족들을 쓰러뜨린 가족들이 나를 찾으러 와줄 거야. 가족들이 날 버리고 죽을 리가 없는걸. 우리는 키아나트리체의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이니까.
“반드시… 반드시… 아빠가 다시 날 찾으러 올 거야! 그러니까 난 여기에 있을래.”
류제는 도리질을 치는 비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설득할 방도가 있을까. ‘너희 가족들은 이미 모두 죽었어.’라고 진실을 마주하게 해줘야 하나? 잔인할 정도로 가차 없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그녀 또한 그녀의 가족들이 저들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어서 부인하는 거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고 나가지 않는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우니까.
깔깔거리는 소리가 한차례 지나가고 저벅, 저벅, 누구인지 모르는 발걸음이 가까워진다. 인간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와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중첩되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걸 알아챈 건가? 류제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긴 통로를 따라 울려 퍼지던 발걸음 소리가 그들이 숨어있는 비밀 통로 바깥에서 우뚝 멈추었다.
“…아빠?”
비키가 헛된 기대를 품고 고개를 번뜩 들었다.
아빠가 돌아왔다. 서둘러 몸을 돌린 그녀가 조각상 바깥을 볼 수 있는 작은 틈에 눈을 맞췄다. 비밀 통로 안으로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이 비키의 눈에 의해 막혔다.
아빠가 날 구해주러 온 거다. 엄마가 적들을 전부 물리치신 거야!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던 그녀의 시선에 닿은 것은 눈을 까뒤집은 아버지의 목이다.
“꺄아아악!”
잔인한 모습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자지러져 목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아빠가, 아빠가 왜 저렇게……!
[흥, 아직도 이런 곳이 존재하다니.]
밖에 있는 자가 억지로 조각상을 뜯어냈다. 돌로 만들어진 조각을 손쉽게 뜯어내서 셀로니아 가문의 비밀 공간에 침입한 그는 비키보다 조금 더 큰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자의 불길한 용모가 평범한 어린아이라는 단어를 거부했다. 피처럼 빨간 눈. 하얗게 센 머리. 버펄로를 닮은 거대한 뿔과 몸에 뒤집어쓴 인간의 피는 그가 잔혹한 악마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벌벌 떨며 그의 손에 들린 아버지의 목을 목격한 비키는 이곳에 숨어있으라 인자하게 타이르던 그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죽었어, 아빠가.
“아…아…아빠……. 아빠!”
이럴 리가 없어. 아까까지만 해도 가족끼리 다 함께 티파티를 열었다고. 곧 다가올 엄마 생일을 어떻게 축하해야 할까 이야기도 나누고 바보 같은 의견을 낸 오빠를 핀잔하기도 하면서 언제나처럼 행복하게 살았단 말이야.
우리 가족은 행복했어. 그런데 왜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무엇 때문에?
“흑……. 흐윽…흑…….”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다. 자상한 아빠가 저렇게 허망하게 죽었을 리가 없어. 엄마는? 오빠는? 언니는? 고모는? 삼촌은?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아, 나는 알고 있다. 전부, 전부 다 죽었어. 저 마족의 손에 새까맣게 타버렸어. 까마귀 떼가 헤쳐놓은 듯이 육체가 물어뜯긴 채 처참하게 죽었어. 나만 남겨놓은 채. 셀로니아가의 저택을 검붉은 불꽃으로 태우면서.
분노. 복수심. 두려움. 의문. 이 울분을 풀 곳이 없던 비키는 두려움의 집합체인 그 악몽 인자에게 처절하게 외쳤다. 기억 속에서 하지 못한 것을 꿈에서라도 울부짖으며 뒤늦게나마 묻는다.
“왜 우리 가족이어야 하는 거야. 왜 하필이면 우리 가족들이냐고!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누구한테도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는데! 왜 너희 마족들에게 이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비키, 물러서. 위험해!”
“왜, 왜, 왜!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너희 마족들에게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로 나쁜 삶을 산 것도 아니었는데, 왜?!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째서?”
비키의 꿈에 의해 구현된 화마족의 군주가 웃었다. 음영이 진 얼굴에 귀신처럼 주욱 찢어지는 입꼬리가 괴기스럽다.
그녀를 비웃으며 활처럼 휜 눈매가 지독히도 비키를 조롱했다. 그의 손이 비키의 목에 향한다.
“안 돼! 비키!”
류제가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 비키의 악몽은 그걸 호락호락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류제는 좀처럼 비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꽉 막힌 무엇인가가 두 사람의 정신적인 거리를 강제로 벌려놓았다.
그가 다가가지 못하는 동안 비키는 목이 졸린 채 켁켁거렸다. 작은 과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서 그대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저택의 유일한 생존자인 비키마저 당해버릴 거야.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아무리 달려도 손이 닿지 않는다.
지쳐버린 비키는 저항을 거부했다. 류제가 어떻게든 비키를 설득해 보려고 했다.
“정신 차려. 복수하겠다고 했잖아! 긍지 높은 셀로니아 가문의 생존자는 너뿐이야!”
“난…난 아무것도 못 해… 아무것도…….”
무력감에 잡아먹혀 그저 몸을 축 늘어뜨린 비키의 눈에 생기 하나 없었다. 그녀는 포기했다. 이대로 이 손에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라. 혼자서 살아남기는 싫어. 외로워. 쓸쓸해.
비키가 포기하자 마족이 그녀를 죽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염화로 그녀의 육신까지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류제는 발버둥을 쳤지만 비키와의 거리는 절대 가까워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 내가 아는 비키는 저렇지 않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려는 사람이라고. 저런 것처럼 무력하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마치 누구처럼. 근데 그게 누구였더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류제는 단어를 찾아 헤매기만 했다.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루나 누나? 누가 좀 알려줘……!
마음이 급했던 류제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을 내던졌다.
“그렇게 어영부영거리다간 나중에는 렌한테도 뒤처질걸!”
말을 끝마친 류제는 번뜩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머릿속이 상쾌하게 맑아져 간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렌?
말이란 발언하는 자의 의지다. 말은 상대방을 감응시키고 생각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다.
류제는 말을 했다. 이곳은 현실 세계가 아닌 타인과 연결된 꿈속이었으니 보다 정확히 따진다면 그의 사념을 상대방에게 강하게 피력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꿈속에서 서로의 무의식이 충돌하면 왜곡 없이 마음을 전달한다. 류제의 말은 류제의 정신에서 비키의 정신으로 전이되어 비키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동등하게 연결된 세계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상상력은 그보다 반응이 빨랐다.
“맞아, 멍청한 비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류제가 말을 끝내자마자 비키의 앞에 누구보다 위풍당당한 발이 성큼 들어섰다.
그는 비키의 목을 조르는 화마족의 군주에게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주먹을 휘둘러 가볍게 그자를 무찔렀다. 비키를 괴롭히던 적이 손쉽게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런 놈을 상대로 포기하다니 완전 멍청이 아냐? 아직도 질질 짜고 있냐? 울보 주제에 셀로니아가의 부흥이니 뭐니 어림도 없는 소리 하기는. 이래서 넌 안 된다니까.”
그가 쯧쯧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를 찼다.
비키의 눈썹이 까딱거렸다. 사람 부아가 치밀게 하는 말투,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짜증이 나고 승부욕이 절로 치솟는다.
졸렸던 목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던 비키는 지금 슬퍼서 힘든데 사람 약 올리는 말투로 지껄이고 있는 그자 때문에 미간에 핏줄이 불쑥 솟아올랐다.
감히 이 재색 겸비 문무 양도 비키 셀로니아인 내가 렌 지미한테 이딴 말을 들을 처지란 말인가? 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렇게 건방지게 툭툭 말이나 내뱉고……!
“말 다 했어?! 내가 왜 하찮은 렌 지미 따위한테 그딴 빈정거림을 들어야 하는 건데? 이 덜떨어진 야만인! 바보는 너야!”
대여섯 살 울고만 있던 어린아이였던 비키의 몸이 불쑥 자라 렌에게 윽박질렀다. 그녀의 진심 담긴 분개에도 렌은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피식피식 비웃기 바빴다.
“저~런 놈한테 꼼작도 못 하고 겁에 질려있던 주제에 큰소리치긴.”
“겁에 안 질렸어. 나도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저런 마족 따위 한 번에 해치울 수 있었다고! 네…네가 방해를 해서 그런 거잖아!”
“말은 잘하지~ 그럼 진작 해치우지 그랬냐? 나는 분명히 들었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며? 크하하. 이 거짓말쟁이!”
“시끄러워!”
언젠가 매일 봤었던 익숙한 풍경. 류제는 이 참을 수 없는 기시감에 얼음이 되었다. 나까지 긴장할 정도로 강한 적을 저 애가 혼자서 정리했다고? 아까까지 흐르던 긴장은 어디로 갔어? 이게 말이 돼? 비키는 갑자기 왜 저렇게 커진 거야? 그보다… 어어?
“내가 구해줘서 기쁘다고 솔직하게 인정하시지?”
“절대 싫어!”
등장하자마자 산통을 깨는 저 인물을 류제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리가 없다. 그야 렌인걸. 저 성에 내가 찾으러 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어라? 근데 내가 왜 성에 가려고 했었지? 어라? 근데 여기는 또 어디야. 어라? 비키? 나 분명 만찬회 끝나고 나서 타고시아 해변 숙소로 돌아와 잠들지 않았나? 어라?
어라라?
의심하기 시작하자 어렴풋이 느꼈던 불협화음이 의식 바깥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렌이 등장하자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던 비키가 류제가 알고 있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왜 지금에서야 깨달았을까. 류제는 어떠한 것부터 먼저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몰라 생각이 뒤죽박죽 꼬였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나는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비키랑 렌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것도 엄청 자연스럽게.
“비…비키? 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말을 하면서도 머릿속이 계몽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가 별안간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뻥 뚫린 감각.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자 이전에 했던 행동들이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렌은 그가 당도하지 못한 성에 있다. 모든 것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는 했어도 나는 렌을 찾으러 가는 여정 속에 있었단 말야.
물론 좀 철이 무르니 열쇠가 어쩌니 말도 안 되는 경험을 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렌이 성에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런 렌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뭐 하는 거야, 류제 이 자식. 한심한 표정이나 짓긴. 비키에게도 지는 주제에 그렇게 방심하다간 내가 널 따라잡을 거다?”
렌이 딱하다는 듯이 류제를 흘겼다.
내가 비키한테 진다고? 아니, 질 때도 있기는 한데 평균적으로 볼 때는 아직 내 승률이 높다. 알고 있으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적어도 비키와의 대결에서는 날 응원했잖아!
렌이 편을 들어주자 비키가 기세등등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렌 주제에 어림도 없다는 표정이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꿈도 야무지지. 괘씸한 소리나 하긴.”
“뭐래, 너야말로 저런 마족 따위한테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으면서.”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그때는 내가 어렸단 말야! 네가 어렸을 땐 얼마나 잘났는데 그래?”
“나야 어렸을 때에도 지금이랑 똑같이 대단했지. 변명하지 마.”
렌이 멋대로 류제에게 다가왔다. 류제는 이게 도통 무슨 상황인 건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상황도 이상하고 다가오는 렌이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류제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짜증 날 정도로 자신만만한 얼굴에 이죽이죽 웃는 렌은 흔하지 않다. 늘 불평불만 가득한 얼굴에 마음처럼 안 되는 일 때문에 시무룩한 붕어 입이 기본값인데?
“뭐 하는 거야? 저리 비켜.”
류제가 길을 막고 있자 렌이 호쾌할 정도로 당당하게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을 밀쳤다. 어두컴컴한 벽돌 길목이었던 류제의 등 뒤는 어느새 푸른 들판과 연결되어 있었다.
“렌! 밖에는 아직 적들이 있…는데… 어어?”
“뭐? 무슨 개소리야? 이제 다 끝났잖아. 이런 먼지 구덩이 속에서 잘도 있는다. 으엑, 숨 막혀.”
렌이 무너진 벽돌 사이를 지나 바깥으로 나갔다. 아니, 난데없이 등장한 건 렌이었으면서. 그나저나 렌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이런 구멍은 언제 난 거고?
류제는 아까부터 벌어지는 이해 불능인 일들투성이에 멀어져가는 렌을 붙잡으려고 했다. 지금의 렌이라면 뭐라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끝나다니. 어디 가는 거야? 기다려봐!”
“내가 왜? 넌 비키네 집에 계속 있고 싶은 거야?”
렌이 퉁명스럽게 답하며 다가오는 류제를 무시했다.
잠깐, 비키네 집? 비키의 집이라고? 여기가 셀로니아 가문의 저택이란 말이야?
류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불에 그슨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 그렇게 따지니 납득이 갔다. 숨어서 숫자를 세며 울고 있던 비키, 바깥에서는 가족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따스한 보금자리가 불탄다.
아아, 이 전경은 비키의 과거의 일부다. 엉망진창 흔들리고 심장이 찢어지는 좌절뿐인 기억. 그런데 왜 내가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거지. 렌은 여기서 왜 나오는 건데? 말이 안 되잖아. 완전 뒤죽박죽이야.
“렌, 잠깐만!”
렌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 거다. 류제가 렌의 뒤를 쫓았다.
“둘 다 제멋대로긴.”
제때 등장한 렌 덕분에 엉겁결에 악몽 인자의 손길을 뿌리친 비키는 못마땅하게 툴툴거렸다. 하기야 렌이 있다면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렌 지미가 끼어들면 모든 건 엉망이 되지만 나름대로 말끔하게 끝난다. 항상 그랬다.
정말 렌 지미는 어이없는 애라며 어휴, 한숨을 내쉰 그녀는 자기가 졌다며 어른스러운 척했다.
그녀는 렌의 도움으로 가장 두려워하던 꿈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기억을 되짚기만 하면 복수심과 증오와 무력감에 휩싸이던 비키가 기억을 좀 더 세심하게 되짚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을 따라 비밀 통로 안쪽에 펼쳐진 넓은 들판으로 나가려던 비키는 비밀 공간에 놓인 여러 잡동사니 중에서 초상화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먼지는 가득 쌓이고 낡았지만 거기 그려져 있는 사람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초상화에 그려진 이는 백금발 머리칼에 붉은 눈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년이었다.
비키는 얼핏 스쳐 지나가는 ‘진짜 기억’에서 초상화를 찾았다. 밖에서 추악하게 웃으며 그녀를 내리까는 그자. 그리고 초상화.
어린 비키는 그를 향한 두려움 때문에 이 초상화를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초상화 밑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율라그라이프 셀로니아.’
초상화의 주인은 가문을 멸절시킨 등급1의 화마족의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렌! 혼자서 어디까지 가는 거야?”
“내가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너는 네 갈 길 가. 나는 바빠.”
“아니… 그게 아니라… 너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
성큼성큼 잘도 앞서가는 렌을 잡아채 류제가 다급하게 물었다. 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손을 뿌리쳤다.
“그야 셀로니아가의 대저택이잖아.”
“그…그건 그렇긴 한데 왜 내가 여기에 있냔 말이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알지. 날 너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니, 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뭔가 아는 줄 알고… 그럼 너는 여기 왜 온 건데?”
“바보 같은 비키를 바보 취급해 주기 위해서가 당연하잖아. 그것도 모르냐?”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하아.”
도저히 말이 안 통하자 생각이 복잡해진 류제가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것투성이다.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몽롱하니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라 집중도 잘 안 된다.
분명 나는 숙소로 돌아가서 렌한테 잘 자라 인사해 주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까 이런 곳이라는 게 이상하잖아.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아.
꿈?
그럴싸한 단어에 류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고민하는 동안 앞에 서있던 렌은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그새 어디로 간 거야?
“렌?!”
류제가 렌을 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빌리티를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웬걸, 평소처럼 어빌리티가 발현되지 않았다. 어어? 오늘따라 왜 이래?
당혹스러워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류제가 제 몸을 더듬거렸다. 잘못된 것을 찾으려는 그의 손짓이 허둥거렸다.
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늘 왼손에 차여져 있던 슬렉터도 없고, 옷도 이상한 옷이고, 정신은 몽롱하고, 렌도 이상하다. 모든 것이 비정상이다.
“야, 바보 비키.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야?”
“지…지금 갈 거거든?”
렌이 재촉하자 심각한 얼굴로 서있던 비키가 드레스를 잡고 성큼성큼 뛰어왔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들판에 서있으니 비키는 정말로 어느 왕국의 귀족 영애처럼 보였다.
“어…어…어?”
렌을 찾던 류제가 말을 잇지 못해 설단 현상이 온 것처럼 어버버거렸다. 어빌리티가 발현이 안 된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장면이 황당무계하다 못해 충격적이었다.
류제는 제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비키에게로 돌아가고 있던 렌이 손에 들고 있던 코스모스 하나를 비키의 귀에 살며시 꽂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비키는 그걸 또 당연하다는 듯 음미하면서도 까칠하게 튕겼다.
“이런다고 내 기분이 풀릴 줄 알아?”
“누가 뭐래. 내 맘이거든?”
레…레…레…렌이, 레…렌이 비키한테 꼬…꼬…꽃을… 귀에 꽃을 꽂아줬다고? 뭐라고? 잠깐만, 내 눈이 이상해진 거 아니지? 환각인가? 환각이야? 아니면 단체로 미치기라도 한 거야?
역시 꿈인가? 개꿈인 건가? 근데 개꿈이라도 내가 비키의 과거를 이렇게 생생하게 알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레…레…렌, 너 미쳤어?”
“뭐? 야, 사람더러 미쳤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하냐? 너야말로 왜 그래?”
“아…아니, 그러니까…….”
비키에게 하는 행동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제는 그야말로 가루가 되었다. 언제부터 비키와 렌이 저만큼 가까워진 거지? 그보다 렌의 성격상 저런 오글거리는 행동이 용납이나 돼? 비키는 왜 저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데?
류제의 속에서 6개월간의 렌의 모습이 한 번에 부정되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사실이라면 믿는 도끼에 배신당한 거다.
괴리감을 버티지 못한 류제가 머리를 쥐어짜다가 삼류 코미디 쇼를 하는 두 사람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너희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뭐가?”
“뭐든지 이상하잖아. 누가 설명 좀 해봐! 나는 왜 비키 네 과거를 보고 있으며, 렌은 어디에서 등장했고, 저 성은 뭐고, 이 들판은 또 뭐야. 찰흙 질감의 철은 뭐고 열쇠는 뭐고 말이 되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나 참, 깐깐한 녀석일세.”
재경이 쯧쯧 혀를 차면서 돌담에서 내려오는 비키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해주었다. 그걸 목격한 류제가 무언의 비명을 질렀다.
그런 부분이 이상하다는 거야! 이상해. 하여튼 이상해! 진짜 렌은 절대로 저런 거 안 한다고! 무신경하고 이성간 배려라든가 귀족에 대한 예우라든가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 애란 말이야.
근데 또 차림은 저게 뭐야! 교복에서 언제 품격 있는 키아나트리체 귀족 정장으로 갈아입은 건데? 무슨 재주야?! 진짜 환각이야?
“그야 렌이 날 보필해야 하니까 그렇지. 시끄럽게 아까부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뭐? 렌이 널? 언제부터 그게 결정 났는데?”
“원래 그렇잖아.”
비키가 왜 그러냐며 이상하다는 눈으로 절규하는 류제를 힐끗거렸다. 멘탈이 나간 류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고만고만한 둘이 꽁냥꽁냥 소꿉친구 귀족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 열불이 터지고 울화통이 치민다. 류제가 세상 끔찍한 표정을 안 숨기고 있으려니 적반하장으로 비키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왜 트집만 잡는 건데? 렌한테 뒤처지고 싶냐고 말한 건 류제 너 아니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정말 뭐야. 번잡해서 상대할 가치도 없네.”
“히스테리야, 히스테리. 너한테 밀리는 게 분해서 그래.”
“역시 그런가?”
렌이 맞장구를 치자 비키가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저 렌은 비키의 비위를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지 모르겠다. 지지고 볶고 싸우지 않았나? 언제 사이가 좋아졌어? 머리 아파.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건 적이 꾸며낸 짓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까지 밖에 답을 못 내리겠다. 환각? 꿈? 뭐든 누군가가 그를 괴롭힐 목적으로 만든 끔찍한 악몽이었다. 류제는 지쳐서 바닥에 털썩 널브러졌다. 멀리 성이 보였다. 아까보다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가 문제인데 그래?”
비키가 다소곳하게 다가와 류제의 옆에 섰다. 류제는 모든 것이 문제라고 말해주려다가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됐어. 무시할 거다. 내가 어떻게든 정상으로 되돌리면 돼.
“나는 성으로 가겠어.”
다짐한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에는 렌이 있다.
그것 하나만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인데 내 옆에는 정신이 반쯤 나간 렌이 있고, 그나마 정상적인 비키는 자기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류제는 모든 정답은 성에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성에 있어야 한다. 없으면 큰일이다. 저런 렌은 싫어.
“뭐어? 가지 마. 여기에 있어. 네가 없으면 누구랑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는데?”
“그 렌이랑 해!”
“렌은 내 상대가 안 된단 말이야!”
더 이상 이 정신 나간 곳에 있고 싶지 않았던 류제가 비키의 말을 무시하며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여기가 셀로니아 가문의 저택이든 어디든 벗어나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다.
류제가 오기 찬 표정으로 떠나버리자 비키가 쫄랑쫄랑 뒤를 따라왔다. 그 옆으로는 렌이 뒤를 이었다. 성가신 꼬리가 생겨 짜증이 난 류제가 뒤를 돌아보며 역정을 냈다.
“따라오지 마!”
“왜? 왜 따라가면 안 되는데? 성에는 왜 가는데? 성에 뭐가 있어?”
“몰라. 귀찮게 따라오지 마.”
“성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왜 가는데? 나도 갈래. 렌, 너도 갈 거지?”
“나야 당연히 가야지. 비키, 네가 있는 곳인데.”
말도 안 되게 오글거리는 대사를 듣자 하니 몸에 오한이 끼쳤다. 류제가 제정신이냐며 렌을 흘겼다. 렌은 왜 보냐며 시비를 걸듯 눈가를 실룩거렸다.
역시 정상이 아냐. 비정상에 질린 류제가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저 둘을 어떻게든 떼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류제가 들판을 건너고 어두운 숲을 지날 무렵까지 비키와 수상쩍은 렌은 대놓고 그의 뒤를 밟았다.
그들을 따돌리기 위해 함정을 놓으며 돌아서 성으로 향하던 류제는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 그는 숲속 한가운데에서 두 사람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할 일도 없어?”
“궁금해서 그렇지. 너는 남 일에 무관심한 데다가 목표도 불분명하고 강한 주제에 자만만 하는 안쓰러운 놈이잖아. 그런데 그런 네가 성에 간다니 수상해.”
“내 목표는 분명하고, 남 일에 무관심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사회생활에서 적절한 거거든? 그리고 자만 안 해. 남이사 성에 가든 말든 내 맘이지.”
“그럼 널 따라가는 것도 내 마음이야. 됐지?”
류제의 말을 멋지게 받아치는 데에 성공하자 비키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펼쳤다.
짜증 나. 류제는 비키와 그 옆에 서있는 수상쩍은 렌을 번갈아보다 한숨을 팩 내쉬었다. 비키가 원래 이 정도로 귀찮은 성격이었나? 뭐, 렌도 이상한데 비키라고 안 이상할 수는 없겠지. 아, 속 탄다.
두 사람을 포기한 류제는 기운 쏙 빠진 걸음걸이로 숲길을 걸었다. 깊은 숲에 따스한 햇볕이 나뭇잎 사이로 비쳤다.
자박자박 길가에 쌓인 마른 나뭇잎이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을 재잘거렸다. 성은 조금 더 가까워지나 싶었더니 아직도 그대로다. 진짜 답이 없다.
류제는 아까부터 하늘 정중앙에 박혀 꼼짝도 안 하는 태양을 보며 세상도 미쳤다면서 혀를 찼다. 해도 안 져, 성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지도 않아, 비키랑 렌은 정신이 이상해, 상식도 안 통해. 진짜 꿈속이기라도 하다는 건가?
류제가 혹시나 볼을 꼬집어보았다. 있는 힘껏 꼬집어보아도 이게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 모르겠을 무렵, 어디선가에서 배구공 하나가 불쑥 튀어와 류제의 발밑에 걸렸다.
“뭐야, 이건.”
이번엔 배구공이냐. 류제가 그 공을 주워서 살폈다. 팔다리라도 솟아날까 하는 걱정과는 다르게 평범한 배구공이었다.
이제 하다못해 숲에서 배구공이 굴러오다니. 어디서 굴러온 건지 주변을 둘러보던 류제가 공을 찾아 그에게 달려오는 누군가를 보고 경악했다.
“공… 유네 양의 공……! 야, 거기 너. 유네 양의 공 돌려주지 않을래?”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생긴 것도 미화된 그자는 분명 렌이었다. 식겁한 류제가 비키 옆에 있던 렌을 찾았다. 렌이… 렌이 두 명……?
“이거 참, 잘 보니까 류제 군이 아닌가!”
렌 입에서 나오기엔 세상 끔찍한 말투다. 류제 군? 군? 아니, 뭐? 미친 거 아니야? 겁에 질린 류제가 뒷걸음질 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 전혀 아프지 않다. 렌이 두 명. 지지 않는 해. 비키의 기억. 이번엔 유네라고? 잠깐, 이거 진짜 꿈이야?
꿈이냐고, 빌어먹을 내 상상력아!
원본에 비견되는 생김새는 차치하고서라도 두 명이나 되는 렌 때문에 얼이 빠진 류제가 혼이 나가 흔들흔들 흔들렸다.
류제의 이상한 태도를 흉보던 중 그가 비명을 지르자 그때서야 새롭게 등장한 렌을 발견한 비키와 렌 1호는 렌 2호의 용모를 보고 적대감 섞인 경계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뭐야, 넌! 왜 렌하고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눈이 반짝거리다니 기분 나빠. 그리고 양이니 군이니 난 그런 말투 안 써!”
렌 2호가 잘못 답했다가는 사달이라도 날 분위기다. 하지만 류제가 보기에는 비키도 렌 1호도 충분히 이상했다. 사돈 남 말하고 있네. 류제가 경직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꿈… 하하, 꿈… 꿈이라면 제발 깨라.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나무에 박는다면 언젠가는 깨지 않을까.
“오오, 처음 보는 차림인데 너도 렌인가 보군.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난 유네 양과 놀기 위해 공을 가지러 온 것일 뿐이니까.”
“너‘도’? 잠깐, 그럼 렌이 더 있단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조사(助詞)에 류제가 왕자님 차림의 렌 2호의 멱살을 잡았다. 렌 2호는 그야 뭐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류제의 손목을 붙잡고 따라오라며 이끌었다.
“뭐야?”
“와보면 알아.”
렌 2호가 상큼하게 웃었다. 새하얀 치아가 반짝였다.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왕자님 미소였다.
아니, 뭐, 렌이 내 손목을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거야 종종 있는 일이지만 렌이 아닌 것 같은 렌에게 끌려가는 심정은 참으로 오묘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뭐가 나타날까 긴장한 류제의 이마에서 뚝뚝 식은땀이 떨어졌다. 비키와 렌 1호도 으르렁거리면서 낯선 길로 인도하는 렌 2호를 따라갔다.
“류제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야? 허튼짓하지 마.”
“맞아, 이 가짜 녀석아!”
마음은 고맙다만 너네 둘 다 가짜야, 이놈들아. 류제는 될 대로 되라 단념했다. 그래, 꿈인데 뭐 어쩌겠어. 렌이 둘일 수도 있고, 셋일 수도 있고, 넷일 수도 있는 거지 뭐.
혹시 어디서 분열하는 장치라도 있나? 찾아서 어떻게든 하고 싶네. 내가 꿈속에서 렌을 분열하는 장치를 만들어내다니. 내 머릿속은 어떻게 되먹은 거야?
“여기야. 유네 양이 너희를 본다면 아주 기뻐할 거야.”
유네가 있는 곳까지 류제를 안내한 렌 2호가 배구공을 들고 뛰어갔다.
여기에 유네가 있다고? 난 비키에 이어서 유네가 나오는 꿈까지 꾼단 말이야? 유네가 여자란 것이 충격적이긴 했는데 그게 꿈속에 나올 일이던가?
“어어? 류제 군이잖아! 반가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기뻐. 비키 양도 있었네! 어서 와.”
숲속에 나있는 작은 공터에 커다란 돗자리를 깔고 다른 이들과 피크닉을 온 유네가 귀여운 인형 같은 옷을 입고 그들을 반겼다. 짧게 친 꽁지머리였던 푸른색 머리가 꿈속에서는 라우라 축제 비키만큼이나 긴 생머리라 한층 더 소녀처럼 보였다.
류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유네의 머리 긴 모습 따위 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이건…….
“레…렌이 도대체 몇 명인 거야?”
“으응? 렌 군들이 왜?”
류제가 인사는 안 하고 오자마자 돗자리 위에 앉아있는 손님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유네는 류제의 태클에도 이상한 점을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돗자리 위에서 교양 없이 샌드위치를 집어 먹고 있는 사람은 제립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는 렌이었다. 그 옆에서 누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사람은 하복을 입은 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은 꾸물꾸물 고양이 잠옷을 입은 렌.
순식간에 불어난 렌 3, 4, 5호가 류제를 발견하고 다 같이 호쾌하게 인사했다. 진짜 렌이 봤더라면 뒷목 잡고 졸도했을 풍경이었다.
“오, 류제. 안녕!”
“뭐야, 왜 왔어? 방해하지 마. 지금 유네랑 놀고 있는 거 안 보여?”
“샌드위치 먹을래?”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얼굴. 지푸라기처럼 붕 뜬 오 대 오 앞머리와 고양이처럼 날 선 눈매를 부각시키는 작은 눈동자, 피부가 약해서 흐릿한 주근깨를 가진 얼굴은 분명 렌 지미였다. 이거고 저거고 전부 다 렌이다.
“유네 양! 저기서 류제 군을 발견해서 말이야. 내가 데리고 왔어. 잘했지?”
안내를 마치고 훌쩍 떠나버렸던 왕자님 렌이 유네에게 다가가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배구공은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질 않는다.
“정말 고마워, 렌 군! 피크닉은 사람이 많아야 재미있지. 류제 군, 비키 양도 렌 군도 어서 와서 앉아.”
“피크닉이라니… 지금 그걸 논하기 전에 다루어야 할 더 큰 문제가 눈앞에 있지 않아? 렌이 왜 이렇게 많은 건데? 유네, 너 속고 있는 거 아니야? 렌은 저기에 있다고!”
비키가 자신의 렌을 가리키며 유네의 렌들을 부정했다. 새로운 렌의 등장에 유네의 렌들이 술렁거렸다.
오랜만에 친구들하고 만나서 반가웠는데 왜 큰 소리를 내는 걸까. 소중한 렌들을 부정당한 유네는 그럴 리 없다며 울먹거렸다. 지금 그녀에게 렌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아니야! 다 렌 군인걸. 렌 군들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하지 말아줘.”
“맞아, 비키 너 심술 그만 부려.”
“맨날 큰소리나 내고 잘난 척한다니까.”
“그러니까 다른 애들이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한마디 했더니 거기에 렌들의 입이 더해져 배는 되어서 돌아왔다. 렌들의 연이은 비난에 억울해진 비키가 이를 앙다물다가 자신의 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비키도 렌이 저만큼 많다는 사실에 류제만큼이나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다. 비키가 당연한 논리로 유네의 말에 반박했다.
“렌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게 말이 돼? 렌은 한 명이라고, 한 명!”
“몇 명이든 내 마음이야! 비키 양도 비키 양의 렌 군이 있잖아. 비키 양의 렌 군도 아니면서 왜 욕심을 부리는 거야?”
“뭐…뭐라고? 욕심부린 거 아니거든?”
비키가 뭐라 반박하려다가 이상하게도 설득되는 ‘비키 양의 렌 군’이라는 말에 고민했다. 그녀의 가는 오른손이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리저리 타협한다.
그러다가 웬일로 류제의 의견과 동일한 의견을 내던 그녀는 류제를 배신하고 유네의 말에 순순히 납득해 버렸다.
“유네 네가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지. 렌, 너는 저 렌들하고 안 섞이게 조심하도록 해.”
“뭐야, 너 날 알아볼 자신이 없냐?”
“그럴 리가 없잖아! 날 무시하는 거야?”
비키가 자신의 렌에게 짜증을 냈다. 중간에 낀 류제는 어이가 없어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아니, 알아볼 자신이 없냐니. 그보다 왜 납득하고 난리야. 순간 비키가 내 편이라 착각했던 게 바보 같다.
아아, 그래. 전부 다 꿈이지 뭐. 비키의 렌, 유네의 렌……. 하하하… 하나하나 따지다간 미쳐버릴 거야.
“자, 자. 진정하고 다들 시원한 음료수나 들어요.”
유네의 옆자리에서 뒤를 돌고 앉아있던 어떤 양 갈래머리 여자애가 인원수별로 컵을 준비해서 쟁반 위에 올렸다.
어빌리티가 발현된 이후 더위란 걸 몰랐던 류제는 오랜만에 속이 타 더워 죽을 지경이어서 그 목소리가 참으로 반가웠다.
근데 여자치고는 좀 낮은 목소리 아닌가. 렌이 억지로 가성을 낸다면 저런 목소리가 나올 것 같―
“고마워, 렌 군. 역시 렌 군은 배려가 넘치고 상냥한 사람이구나.”
“뭘 이런 걸 가지고.”
유네가 감사의 인사를 표하자 그녀(?)가 얌전하게 웃었다.
류제는 급격하게 뒷골이 땡겨오기 시작했다. 렌들 중에 유일하게 다른 사람이 있는가 싶었는데 그녀조차 렌이었던 것이다. 여장한 렌. 라우라 축제 때 했던 파란색 원피스 차림 그대로 완벽하게 고증된.
“미쳐 돌아가는군.”
돗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류제가 여장한 렌이 넘겨주는 음료수를 들이켰다. 솔직히 말해서 꿈속이라 그런지 시원함이고 뭐고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착잡하니 타들어 가는 속도 변함없었다.
“나도 한 잔 줘.”
비키도 돗자리에 들어와 컵을 낚아채 벌컥 들이켰다. 비키의 렌은 돗자리 위에 있던 다른 렌들과 기 싸움을 하던가 싶더니 같은 렌이라 그런지 코드가 맞아서 저들끼리 사이좋게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대화를 듣자 하니 정말 쓸데없는 이야기다. 렌들은 계란프라이에 소금을 어느 정도 넣어야 밥에 비볐을 때 가장 잘 간이 맞는가와 관련된 하찮은 생산성을 가진 이야기로 백날 떠들어 댈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류제는 그가 왜 그 꿈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자각몽은 내 바람대로 움직이는 게 정석 아닌가?
나는 왜 이게 꿈인 걸 알아냈는데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거지? 그리고 렌이라면 몰라도 애초부터 왜 내 꿈에 방해꾼들이 나오는 건데? 이런 꿈은 꾼 적 없어!
“…유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피크닉이라고 했잖아. 렌 군들하고 놀고 있었는데?”
“논다고? 뭐 하고?”
“으음……. 그러게.”
뜨끔한 유네가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거렸다. 그녀의 마음이 불편해지자 잘만 떠들고 있었던 유네의 렌들이 몰려들어 그녀를 둥가둥가 달랬다.
“유네… 슬퍼하지 마.”
“그런 애들은 잊어버려.”
“맞아, 싫다는데 굳이 어울려줄 필요 없어.”
“내가 있잖아.”
“유네 양, 내가 언제나 지켜줄 거라고 말했지?”
여장한 렌부터 왕자님 렌까지 다섯 명의 렌이 아주 골고루 모여서는 시무룩한 유네를 위로한다.
류제는 그 모습에 짜증이 솟구치다가도 렌을 저만큼 많이 만들어 내버린 유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호기심이 생겼다. 비키 때를 생각해 보면 이번에는 유네의 안 좋은 기억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 있었어?”
“으헤헤… 그… 별것 아니야. 좀 전에 옆 동네 친구들이 와서 피크닉을 엉망으로 만들었거든. 지금은 렌 군이 도와줘서 다시 피크닉을 즐기고 있지만 언제 또 올지 모르겠어.”
류제의 성급한 예상이 손쉽게 적중했다. 피크닉을 엉망으로 만든 옆 동네 친구들이라면… 설마 그때 그 애들인가? 류제가 저번 달에 봤던 유네의 미들 스쿨 친구들을 떠올렸다.
남들 과거를 오지랖 넓게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뭔가 석연찮다. 비키 일도 떠올려 보면 렌들이 나온다고 해서 개꿈이라 치부하기엔 시기상조일지도 몰랐다.
“류제 군은 비키 양과 이런 곳까지 와서 뭐 하고 있던 거야?”
“나는 성에 가는 중이었어.”
“성? 성이라면 저어쪽에 있는 성을 말하는 거야?”
유네가 숲 너머에 까마득하게 보이는 성을 가리켰다. 류제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의 대화에 궁금증을 보인 유네의 렌들이 류제의 곁에 붙었다. 호기심 많은 집고양이들 같다. 실제로 꾸물꾸물 고양이 잠옷을 입은 렌이 실제 고양이처럼 류제의 무릎에 턱을 올리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젠장, 내 상상력. 여기서 폭주하면 큰일 난다. 아무리 저 둘도 내 상상력의 산물일지라도 자존심이 있지 유네와 비키 앞에서 엄한 꼴은 절대 못 보여줘.
류제가 제 눈을 찰싹 내리쳐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성은 왜 가는 거야?”
“그… 찾는 게 있어서.”
“중요한 거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가야 해.”
렌은 분명 저 성안에 있지만 주변에 렌이 이렇게나 많은 것을 보면 나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류제가 눈을 감고 수상한 전파를 내보냈다. 렌아, 만들어져라. 날 좋아하는 렌아, 내 눈앞에 있어라……!
“류제 군, 뭐 해?”
사람 뻘쭘할 정도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젠장, 내 꿈인데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풀이 죽인 류제가 입을 비죽거렸다.
유네한테는 저렇게 많은데 나도 하나 정도는 만들 수도 있지. 쩨쩨하기는.
“성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겠다. 충분히 쉬었다가 가길 바랄게.”
“그래, 고마워.”
착한 유네가 무슨 잘못이야. 렌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건 질투 나기는 해도 어차피 진짜가 아니니까 괜찮다.
유네의 렌들이 내 곁에 찰싹 달라붙어 친근하게 굴어도 유네가 만들어낸 렌일 테니까 날 좋아하지는 않을 테지. 하아.
하복을 입은 렌과 체육복을 입은 렌, 고양이 잠옷을 입은 렌과 여장한 렌, 마지막으로 왕자님 렌을 차례대로 훑어본 류제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긴 내 꿈인데 비키도 그렇고 유네도 그렇고 마치 제 꿈인 양―
“다시 왔다.”
“왜 또 온 거지?”
“유네, 내 뒤로 숨어.”
류제의 생각을 방해하듯 대여섯의 모르는 목소리와 함께 풀숲이 갑자기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몸을 낮춘 류제가 그곳을 살폈다. 뭐야, 렌들이 또 있나?
반면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유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또 왔다. 그들은 몇 번이고 견뎌내는 유네를 찾아와서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쑤셔 넣었다.
“아직도 있어?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했잖아! 언제 말을 들을 거야?”
“어서 꺼져. 너 같은 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여긴 우리 구역이야!”
“언제 죽는 거야? 지금이라도 죽으면 좋을 텐데.”
음영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다짜고짜 찾아와서 잔인한 말을 내던졌다. 세상에, 얼이 빠질 일이다. 여기를 떠나라는 둥 당장 죽으라는 둥. 고르라는 선택지 한번 괴팍하다.
듣자 하니 죽거나 떠나거나 둘 중 어느 상태가 되었건 불청객들은 유네가 이곳에서 평화롭게 노닐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놈들, 또 왔구나!”
“유네를 괴롭히지 마!”
유네에게 막말을 던져대는 그녀들의 방문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유네의 렌들이 익숙하게 그녀 앞을 막아섰다.
물리칠 때마다 세를 불려서 오는 저자들 때문에 유네가 상처받을 때마다 렌들도 하나씩 늘어서 유네의 렌들이 이제 5명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만든 렌이 바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던 왕자님 렌. 이번에도 실패하면 유네는 자기를 지켜줄 렌을 한 명 더 만들 거다. 그만큼 유네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부탁이야. 이제 그만해 줘…….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든단 말이야.”
유네가 울먹거리며 애원했다. 류제 군하고 비키 양도 있는데 그러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저자들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을 바라는 비키와 류제의 시선이 수치스러워서 유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유네를 양 갈래 머리 렌이 차분하게 도닥여 주었다.
추악한 기억을 근원으로 만들어진 ‘악몽 인자’인 그녀들에게 유네의 힘든 마음은 즐거움이었다. 그녀들은 유네의 나쁜 기억을 토대로 악몽을 쏟아내면 그만이었다. 유네가 상처받을 말만 골라 내던진 그녀들이 깔깔 웃어댔다.
“매번 남자 뒤에 숨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그러지.”
“뭐 하는 거야. 어서 여기서 사라지라니까?”
“혼자서만 특별하다고 잘난 척하지 마!”
“실제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주제에.”
자신을 상처 입히는 말이 듣기 싫어 유네가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녀들은 숨어있는 유네를 손쉽게 할퀴었다. 귀를 막아도 그녀들의 목소리는 유네의 의식을 뚫고 마음을 찢는다.
유네는 듣지 않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것 없는데 그녀들은 항상 유네더러 잘못했다며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노래를 부르면서.
“너희들은 뭐야? 왜 유네한테 와서 시비야? 놀 거면 다른 곳에서 놀아.”
보다 못한 비키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유네를 지켜주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어도 그게 뭐 어쨌냐는 듯이 그녀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유네 나르타에게 말하고 있는 거야.”
“너한테 관심 없어. 갈 길이나 가.”
“너희들이 유네를 괴롭히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이니까 그렇지. 그건 유네의 친구로서 내가 용서할 수 없어!”
단단히 화가 난 비키가 허리에 손을 얹었다. 감히 문무 양도 재색 겸비, 셀로니아가의 여식에게 그따위 말을 하다니. 그녀가 성난 레드드래곤처럼 얼굴을 구기며 불청객들을 노려보았다.
비키는 유네의 과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네가 이런 이상한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여럿이서 한 명을 몰아붙이는 건 정정당당한 그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일뿐더러 저들의 행동이 열댓 살 미성숙한 아이처럼 유치해 보이기까지 했다.
새롭게 등장한 누군가가 이번에도 유네를 지켜주자 그마저도 질린 그녀들은 어휴, 무섭다면서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존경심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이번엔 비키를 조롱했다.
“친구? 하하하, 친구래. 유네 나르타한테 친―구.”
“저 계집애가 거짓말쟁이라는 건 알고 하는 소리인가? 깔깔깔. 머저리가 따로 없지. 아니, 머저리끼리 어울리는 건 당연한 건가?”
“부럽네, 유네. 널 보호해 줄 친구들이 이렇게 많아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서 눈 감고 귀 막고 뒤에 숨어서 떨다가 결국 거짓말하는 것이 다지. 한심해. 너 같은 건 한심해서 어쩔 도리가 없는 애야.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조차 경멸스럽다, 야.”
“어차피 쟤네들도 네 거짓말을 알게 되면 남김없이 떠나버릴걸? 숨어있는 것도 한순간이야. 아니면 이번에도 거짓말로 벗어나 볼래?”
“유네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야!”
비키가 식식거리며 반박했다. 하지만 유네는 정말 거짓말쟁이였다. 유네는 친구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거짓말을 했다. 비키가 편을 들어주자 유네의 죄책감은 더 커져만 갔다. 그 점을 ‘악몽 인자’가 손쉽게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아니면 그쪽도 거짓말쟁이인 거야? 어느 쪽이든 한심하네.”
“뭐야?”
맛본 적 없는 굴욕감이다. 비키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유네 대신 반박해 주려고 했다.
그녀가 성질을 터뜨리려는 찰나 일순 주변 공기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일대의 꿈의 주인은 유네다. ‘악몽 인자’ 때문에 유네의 꿈이 변화한다. 비키가 셀로니아가의 저택에 있었을 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비키의 렌이 가까이 가선 안 된다고 비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에 유네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미들 스쿨 때의 일이 연거푸 떠올랐다. 과거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평화로운 숲은 무너지고 퀴퀴하고 기분 나쁜 기억 속의 학교로 변해갔다.
유네는 당시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괴로움을 꾹 참고만 있던 못난이가 된다. 화를 억누르고 착하게만 있으면, 열심히 노력하면 분명 내 가치를 알아줄 거야. 제발 알아줘. 하지만 알아주지 않겠지. 그러면 나는 또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에게 미움을 받고…….
“맞아, 넌 미움을 받을 거야. 네 친구들은 널 싫어해.”
“유네 나르타는 한심하고.”
“멍청이 같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거짓말쟁이니까.”
깔깔깔. 당시의 기억이 뒤죽박죽 섞여서 유네의 트라우마가 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일그러진 공간 일대에 퍼져나갔다. 유네의 꿈에 동화한 류제에게도 공포감이 엄습할 정도였다.
유네는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고, 렌들은 그런 유네를 지키며 마녀처럼 웃어대는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저것 봐. 네 친구들도 너한테 질려 하잖아.”
“그럴 줄 알았어. 깔깔깔.”
“너처럼 무가치한 애는 평생 외톨이일 것이지 거짓말까지 하면서 친구를 만들 생각이나 하다니 기가 막혀.”
“꺼져, 이 마녀들아! 유네가 뭘 어쨌는데? 너희들 때문에 유네가 거짓말을 하게 된 거잖아!”
“맞아! 너희들 탓이라고!”
“꼴사나운 건 너네 쪽이야!”
한마디도 지지 않고 덤비는 렌들은 이번에야말로 저들과 끝을 보겠다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렌 지미라는 방패막이를 세워놓고 뒤에 숨어있는 것만으로는 유네는 절대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유네도 알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나서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저 웃음소리를 들으면 무서워서 시야가 흔들렸다. 유네는 비키와 류제마저 자신을 꺼리는 눈으로 보는 것 같아 손이 떨렸다.
수치스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진다. 부끄러워. 류제 군하고 비키 양이 내 바보 같은 모습을 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대로 귀를 막고 눈을 감는 것으로는 안 되겠지.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나도 알아. 아는데……!
류제 군도 비키 양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거짓말쟁이라서 나를 싫어하고 있으면 어쩌지. 눈을 못 뜨겠어.
“유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항상 같이 있을 거야. 그러니 괜찮아.”
“렌 군.”
왕자님 렌이 유네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항상 같이 있어준다니. 두려움이 가득하던 유네의 눈에 언뜻 자신감이 어렸다. 그래. 나에게는 렌 군이 있어.
두려움을 떨쳐내고 현실 세계의 렌을 떠올린 유네는 류제와 비키가 거짓말한 자신을 상냥하게 받아들여 주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맞아. 내 친구들은 여자인 날 거부하지 않았어. 내 거짓말을 듣고도 경멸하지도 않았어. 그러니 나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모두들 나를 받아들여 줬잖아. 나를 버리거나 하지 않았다고. 이대로 저 애들에게 납득해 버리면 난 또 지는 거야.
이 이상 나를 혼자로만 만들려는 저들의 괴롭힘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유네가 가문 땅에 이슬 고인 것만큼 생긴 용기를 쥐어짜서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이해를 못 하겠어. 렌 군들 말이 맞아.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된 것도 다 너희 탓이잖아. 왜 나한테만 그래?”
“이것 봐. 저 계집애가 또 우리 탓을 하는데? 거짓말을 한 건 네 선택 아니었어? 너야말로 왜 우리 탓을 해?”
“너희들이 이상한 이유를 들먹이며 나를 괴롭혔잖아. 거짓말로 날 감추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녀들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박장대소를 하면서 숲이 떠나가라 웃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마녀가 웃는 것처럼 오싹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고? 그래서 우리 탓이라고?”
“깔깔깔! 맞지. 우리가 유네 나르타를 못살게 굴었지. 하지만 그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잖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했을 뿐인데 왜 우리 탓이야? 다 네 탓이지.”
그녀들의 논리란 그야말로 유네는 괴롭혀도 죄가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도대체 내가 뭘 어쨌는데……?”
마음이 꺾인 유네가 울먹거리자 거만하게 선 그녀들이 입이 찢어져라 히죽거렸다. 경멸하는 눈빛이 기껏 용기를 낸 유네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몇 번이나 말해줘야 말귀를 알아먹는 거야? 사람들이 보잘것없는 너에게 속아 특별 취급하기 때문이잖아. 멍청해서 몇 번이고 다시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특별하다는 이유로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게 싫어.”
“그러니까 공평하게 우리들이 널 미워해 주겠다는 건데 뭐가 불만이야? 덕분에 주제 파악을 할 수 있었으니 좋은 경험 아니야?”
그렇게 쏘아붙인 그녀들이 다시 광조했다. 충격을 받은 유네가 고개를 숙였다. 그것 때문에 날 미워한다고? 그녀는 그네들이 원하는 진정한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특별하다고? 내가? 우리 집이 부자고, 내가 어빌리터라서 그런 거야? 그럼 내가 괴롭힘을 받지 않으려면 집도 버리고 어빌리티도 봉인하라는 말인가?
왜? 무엇 때문에? 왜 내가 그렇게 고통받으면서 참아야 하는 건데? 오로지 저들이 불편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 때문에 거짓말까지 한 나는 뭐야. 내 선택이기 때문에 다 내 탓이야? 그래서 내 잘못이야?
“네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지독하게 불공평해.”
“짜증 나. 그것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멍청이 따위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렇다네. 거짓말쟁이 유네 나르타.”
그녀들의 얼굴이 탐욕으로 찌그러졌다.
그렇다. 그녀들은 공평을 원했다. 똑같은 신분인데 오로지 유네 나르타만이 모든 것을 가져버렸다. 상단과 어빌리티. 부와 권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네들보다 밝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전부 집어치우고 똑같은 위치에서 시작하면 분명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을 것이 뻔한 유네일 텐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서 숨어있기 바쁜 유네 나르타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녀들은 그게 질투가 나서 참을 수 없는 거다.
이 악몽은 유네의 기억에 기반을 둔다.
유네는 미들 스쿨 때부터 그들이 어떤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지 알고 있었다. 미들 스쿨에서 그네들이 자신을 괴롭힌 근본적인 이유는 박탈감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네는 그들의 원하는 만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과 돈지갑 취급. 한심하다는 조롱.
나는 정말 노력했는데. 언제나 혼자서 열심히 노력했는데. 한도 끝도 없이 요구만 하고. 바보 취급만 하고.
나는… 나는 그것 때문에 상처받아서 일생일대의 거짓말을 할 정도였어. 그러나 그녀들은 거짓말을 한 대가조차 유네의 탓으로 만들어버렸다.
죄책감도 없고 제 탓도 없다. 유네 나르타가 저렇게 된 건 유네 나르타의 탓이다.
“유네……!”
유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렌들이 주저앉은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여기서 좌절해서는 안 돼. 조금만 더 힘내자. 난 그때처럼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내가 못나도, 남자가 아니라도, 그저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긍정해 주는 사람들은 이렇게나 많다.
내 탓이 아니야. 내가 거짓말쟁이라도, 분명 내 거짓말을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내 가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게 내 친구들인걸! 잘못된 것은 저 아이들이야!
“불공평해!”
그녀들이 숲이 떠나가라 윽박질렀다.
“불공평하지 않아!”
더 이상 못 참아. 유네가 이를 악물었다. 렌 군들이 이만큼이나 자신을 위해주고 있는데 계속 숨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렌들의 부축을 받고 용기를 내 일어섰다. 화가 난 건지, 무서운 건지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침묵을 지키던 유네가 독기 품은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불공평하면 뭐.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부모님이 열심히 가꾼 상단을 감히 망치라는 의미야? 내가 무슨 권리로? 어빌리티는 사용하지도 말라는 의미야? 내가 왜? 내가 원해서 어빌리티를 가지게 된 거 아니야. 가지게 된 걸 어쩌라고! 나에게 있어서 어빌리티는 너희들이 걷고, 뛰고, 숨 쉬고, 소리치는 것처럼 똑같은 건데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 웃기지도 않는 생떼 그만 써! 너희 말대로 거짓말까지 하게 만들었으면 됐잖아!”
식식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리는 유네가 아직도 분이 안 풀린 듯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늘 헤헤 웃기만 하고 주눅 들어서 친구들 눈치를 자주 보는 조용한 유네가 저렇게 큰 소리를 내다니. 비키와 류제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유네가 저러는 걸 볼 정도로 나는 그동안 유네가 답답했었구나. 라고 이 긴급한 와중에 류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참.
“뭐야! 결국 너희들은 항상 항상 항상 할 줄 아는 게 내가 잘못했다고 우기는 것뿐이지! 어빌리터가 대접을 받는 건 인간들을 대신해서 마족을 쓰러뜨리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도 무서워도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언젠가 대접받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려고. 그 노력만으로도 내 가치는 인정받아야만 해. 특별 취급이라는 말로 우리들의 희생을 바보 취급하지 마!”
“역시나 거짓말쟁이. 또 거짓말을 하네. 마족은 이제 없어. 계속 특권을 누리고 싶어서 거짓말하고 있는 거잖아.”
“맞아. 위험하다, 습격당했다 말만 들었지 눈으로 본 적도 없는걸. 분명 너희들이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유네 나르타는 거짓말쟁이니까.”
“뭐? 너희 지금 말 다 했―”
“거짓말 아니야!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마족이 없다는 말에 발끈한 비키를 물리고 유네가 외쳤다. 이건 내 문제다. 남들이 도와주면 극복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 나는 나다. 나는 유네 나르타다. 나르타 상단의 하나뿐인 딸에, 어빌리터이고, 제립학교 1학년 8반 학생이며, 한때 남장(거짓말)을 했었던 유네 나르타다.
그 모든 경험과 노력이 나를 만들었다. 나는 성장했다.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했지만 이제는 미들 스쿨 때처럼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탓하면서 나를 부정하지 않을 거야.
“너희들이 마족과 마주하면 당연히 죽으니까 그러지 않도록 우리가 막아주는 거잖아. 자기가 보지 못했다고 부정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 바보들아!”
흥분한 유네가 뚜벅뚜벅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유네 입에서 바보라는 소리가 나오다니. 충격이 가시질 않은 비키와 류제가 입을 떡 벌렸다.
당황한 그녀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뿔난 유네에게 왕자님 렌이 그들을 쫓아낼 때 썼던 거대한 뿅망치를 손에 쥐여주었다.
왠지 매번 당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돌자 유네를 공격하던 악몽 인자들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녀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유네의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파헤쳐서 폭로했다.
“그런다고 우리가 물러설 것 같아?!”
“우리를 부정한다고 해서 네 친구들이 네 거짓말을 받아줄 것 같냐고!”
“결국 울면서 우리 말이 맞다고 인정하게 될걸!”
“유네 나르타, 너는 외톨이여야만 해!”
“외톨이가 아니야. 친구들이 내 거짓말을 받아들여 줄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할 거야. 나는 무섭지 않아!”
유네는 지지 않고 그 뿅망치를 들고 크게 휘둘렀다.
“이것저것 이유 붙이지 말고 질투 나서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 내가 잘나서 싫다고!”
뻥! 속 시원하게 그들을 차버린 유네는 숨을 식식 들이켜면서 분을 식혔다.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가 버린 유네의 악몽 인자들이 미들 스쿨 때의 기억으로 왜곡했던 주변을 쨍그랑 깨뜨리고 숲 바깥으로 날아가 별이 되었다.
하늘 저편이 반짝 빛나고 숲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해치웠다. 유네는 스스로 힘으로 그녀들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으하아아…….”
“아… 그… 유…유네?”
낯선 행동을 보인 유네를 걱정스러워하는 비키를 뒤로하고 난생처음 남들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 유네가 안도 반, 통쾌함 반으로 자리에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혼자서 해냈다고!
감격해서 멍청하게 주저앉아 있던 유네는 너무 놀라 돌이 되어버린 두 사람을 흠칫 바라보았다. 역시나 둘 다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혼이 나가 있었다.
“미안… 험한 꼴 보였지……?”
“아니. 내 속이 다 시원해졌어. 꽤 하는데?”
정신을 차린 비키가 제가 다 뿌듯해했다. 아무리 봐도 유네가 잘 해치웠다고밖에 말 못 할 만큼 통쾌했다.
“해낼 줄 알았어!”
“역시 너는 한다면 하는 애야.”
“축하해!”
유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는 유네의 렌들이 다 같이 모여 유네를 헹가래 쳤다.
왕자님 렌도, 여장한 양 갈래 머리 렌도, 하복을 입은 렌도, 체육복을 입은 렌도, 꾸물꾸물 고양이 잠옷을 입고 있는 렌도 모두 모여 유네를 축하했다.
멋지게 혼자서 나쁜 기억을 물리쳤다. 장하다, 장해.
“어어… 잘…된 거겠지?”
이럴 때면 늘 렌이 옆에서 훈수를 뒀는데 없으니까 언제 어떻게 참견해야 할지 감을 잃은 류제는 개입할 틈도 없이 악몽을 극복해 낸 유네를 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다 비키와 눈이 마주치고 피식 서로 미소 지었다.
폭풍처럼 지나가서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네가 적들을 물리친 건 박수 쳐줄 일이었다.
“만세! 만세!”
유네의 기분에 따라 엉망진창이 되었던 숲속 렌들의 피크닉 현장은 다시 평화롭고 따스하게 빛났다.
재경이 직접 봤더라면 뒷목 잡고 119 부르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류제의 멱살을 잡고 딸딸딸 흔들었을 테지만 이 자리에 없으니 누가 이 상황에 태클을 걸겠는가.
물론 류제가 해결해야 하는 유네의 악몽에 렌들이 5명이나 나오는 것부터가 스토리가 완전히 뒤흔들어진 꼴이지만 결과로만 따지자면 유네는 악몽을 극복했다.
그럼 유네의 호감도는 오른 것인가? 유네의 악몽이 길몽으로 바뀌었으니 호감도가 상승해야 하지만 그 계기는 류제가 아니라 유네 내면에 있으니까 조건이 다르지 않은가? 결과와 원인, 둘 중 어느 곳에 집중을 해서 판별을 내려야 하는가.
그러나 이 괴현상에 관해 머리를 붙잡고 고민해야 할 재경은 이 자리에 없으므로 이 돼먹지 못한 호감도 이벤트가 못마땅해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에는 그저 6명의 기뻐하는 렌과 헹가래를 받는 유네,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는 친구들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