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4)
왕녀가 주최하는 야외 만찬회에서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주인공은 흩어진 히로인들과 만나 대화함으로써 나중에 있을 악몽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번 챕터에선 악몽에 관련하여 미나의 진짜 과거 이야기가 아주 조금 노출되는데 이건 첫 회차 플레이어가 찾을 수 있는 미나가 서큐버스라는 복선이기도 하다.
만찬회가 끝나면 히로인들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간다. 그날 밤 마족들에 의해 은밀하게 이야기는 진행되고, 주인공은 몽마와 수마가 만들어낸 꿈속 세계에서 눈을 뜬다.
그 꿈속 세계를 떠돌면서 악몽에 붙들린 히로인들의 마음을 구해주는 것이 플레이어의 역할이었다. 류제가 각 히로인들의 꿈을 악몽에서 길몽으로 바꾸어주면 호감도 이벤트 성공. 아니면 실패. 간단한 규칙이다.
지금은 만찬회에 참석해서 주인공이 히로인들의 악몽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때였다.
재경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가장 늦게 왕녀의 만찬회에 당도한 네 사람은 같이 초대된 백장미 부대원들의 떠들썩함에 압도되어 잠시 들어가길 망설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 그들은 요란할 만큼 법석을 떨어대는 중이었다.
“사람이 많네.”
“그야 뭐, 일국의 왕녀님이니 규모가 남다르겠지.”
만찬회 일대는 주홍빛 전등이 크리스마스처럼 주렁주렁 기둥에 매달려 있어서 밤이어도 시야가 밝았다.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기승을 부리던 바다 모기도 사람을 귀찮게 굴지 않아 식사를 하기 쾌적한 데다 공기가 시원하기까지 하다. 부자 동네에 캠핑 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재경이 만찬회의 첫인상을 평가했다.
왕녀가 주최한 야외 만찬회는 전속 요리사가 따로 마련되어서 접시에 원하는 음식을 담아 먹으면 되는 고급 뷔페 형식이었다. 왕궁에서 열리는 디너파티를 간소화시킨 버전이라지만 키아나트리체의 차기 왕위 계승자의 명성에 걸맞은 위용이다.
마지막 손님을 맞이하는 왕녀는 언제 옷을 갈아입었는지 차분하면서도 고귀한 차림으로 돌아와 그들을 반겼다.
“왔는가. 생각보다 빨랐구나. 음식은 많이 있으니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란다.”
“네깟 것들을 초대해 주신 왕녀 저하의 인자함에 감복하며 음식 한 입 씹을 때마다 저하께 세 번 절하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옆에서 더 나서서 생색내는 루이나를 니냐롯트가 쌈박하게 부정했다. 그럼에도 루이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먹으라면서 끝까지 왕녀를 치켜세웠다.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은 니냐롯트는 고고한 눈으로 재경을 흘기더니 작게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재경은 왜 왕녀가 웃었는지 몰라서 어리둥절 눈을 끔벅거렸다. 왕녀의 미소를 보지 못한 류제는 니냐롯트가 가자마자 주변을 둘러보며 참았던 감탄사를 터뜨렸다.
“저 군복 입은 사람들이 전부 백장미 부대원인가?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사람들이 여기 모여있다는 소리잖아. 얼마큼 강할까?”
“겨뤄보면 알겠지. 가서 내가 바로 그 셀로니아 가문의 여식이라 말 걸면 상대해 주지 않을까?”
“아서라, 분위기 깬다.”
드문 기회에 비키는 자신의 강함이 지금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몸소 확인하고 싶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치열하게 비치발리볼 시합을 했으면서 아직도 몸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호탕하게 웃어대는 백장미 부대원들 쪽으로 눈이 갔다.
강함을 추구하는 데 흥미가 없는 유네는 고픈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녀는 무서운 군인 언니들을 피해 접시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담았다. 류제도 재경도 유네를 뒤따라서 음식 탐색에 나섰다.
“류제, 네 여동생은? 사람이 북적거려서 찾기 어렵네.”
“저쪽에 아세미랑 수녀 누나가 있는데. 반대쪽에는 미나랑… 백장미 부대원들 사이에 세라 선생님. 왕녀는 아까 저쪽으로 갔고.”
“어디? 안 보여. 눈 좋네.”
“어빌리티를 쓰면 보통이지.”
여름방학 동안 어빌리티 특훈을 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류제는 능력을 이전보다 수월하게 사용했다.
“자랑이다.”
히로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으면 밥 먹으면서 히로인들이 꿀 악몽에 대한 단서도 찾으라고. 먹을 생각만 하지 말고. 류제의 엉덩짝을 차주고 싶은 재경이 대신 콧숨만 내쉬었다.
하지만 류제는 히로인들 위치 파악만 했을 뿐 아무 행동도 개시하지 않았다. 재경이 접시를 가득 채워 밥 먹을 생각에 신이 난 류제를 흘겼다. 이놈은 역시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려고 한다니까.
저래 보이는 류제라도 여기서 히로인들을 더 알게 되면 꿈속에서 날 못 찾을지언정 길몽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저놈은 무신경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쁜 놈은 아니었다.
“와, 이것도 맛있겠다. 급식으로 나온 적 없는 거 아냐?”
“좋냐?”
떨떠름한 재경이 먹을 것에 신난 류제를 쏘아보니 류제가 철딱서니 없이 이거 맛있다며 음식을 자랑했다.
어휴, 저놈을 진짜. 누구를 다섯 살배기 애로 아나. 못마땅했던 재경은 류제를 무시하고 제 접시에 스스로 음식을 담았다.
“됐어, 내가 알아서 먹을 거야.”
“그래? 덜어주려고 했더니.”
류제가 아쉬운 목소리로 답했다. 꼬리가 달려있다면 바닥을 쓸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른 친구들이 있으니까 렌은 또 날 뒷전으로 보내는 것 같다.
언제나 렌을 독차지할 수는 없으니 이해는 한다만 부적절한 심정이 불쑥 치밀어 올라서 목에 가시라도 박힌 것 같았다. 이게 진짜 중증이지. 하아, 내 팔자야.
신이 났던 류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무의미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으려니 먼저 자리를 잡은 유네가 테이블이 비었다며 손을 흔들었다. 같이 왔던 비키는 벌써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기간트리카 대결이니 뭐니 하더니 포기하고 푸딩이라도 찾으러 간 건가?
“용케 우리를 찾았네.”
“아무래도 류제 군은 눈에 띄니까.”
“키가 커서 그런가?”
“그러겠지.”
다시 모인 세 사람이 테이블에 앉았다. 재경의 맞은편에 앉은 유네가 음식을 담은 접시를 뒤적거리다가 문득 한낮에 들었던 생각을 떠올리고 열없게 웃었다.
“나는 저번처럼 셋이서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왕녀님께서 초대해 주실지 몰랐어.”
“가끔 이런 것도 좋지. 안 그래, 렌?”
“당연한 소리를. 바비큐는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알아? 유네, 너네 집처럼 메이드 누님이 모든 것을 해주지는 않는다고. 그리고 이런 기회가 한두 번인 줄 아냐?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먹어. 불평의 불 자도 사치다.”
“치. 그건 나도 말 안 해줘도 알고 있는걸. 엄마도 아빠도 왕녀님이 초대해 주신 야외 만찬에 간다니까 어서 가라느니 옆에서 더 난리였어.”
나는 야외 만찬보다 두건을 둘러쓴 렌 군이 목장갑을 끼고 고기를 구워주는 걸 또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렌 군은 그것도 모르고 매번 매정한 소리나 한다.
삐죽삐죽 흘러나온 입술을 들썩이던 유네가 꿍한 얼굴로 음식을 마저 씹었다.
“흠.”
바비큐 파티라.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수학여행 때도 했고 유네네 집에서도 해본 데다 렌의 말처럼 이런 호화로운 만찬회도 좋았기에 류제는 렌의 생각에 동의했다.
게다가 왠지 유네네 별장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다면 흐름상 비치발리볼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전부 초대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심장이 유약한 유네가 루이나를 헤치고 왕녀에게 초대의 말을 할 수 있나 영 탐탁지도 않았다.
입고 왔던 수영복에 가벼운 남색 카디건을 걸친 차림이던 유네를 훑은 류제는 다른 친구들도 유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걸 새삼 떠올렸다. 유네는 여자애니까 루이나가 이전보다는 덜 경계하려나.
“그래도 천만다행이네. 다른 친구들이 네가 여자란 걸 흔쾌히 받아줬잖아. 난 적어도 비키가 뭐라 할 줄 알았어. 걔 그런 방면에서는 고지식할 거 같거든.”
“아, 맞아. 그래서 나도 깜짝 놀랐어. 비키 양도 그렇지만 세라 선생님도 그래. 물론 세라 선생님한테는 저번 달에 아빠가 학교로 찾아가서 사과를 했다지만 날 보면 괘씸하다고 꿀밤은 때리실 줄 알았거든. 헤헤헤.”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다행이네. 개학해서도 걱정 없겠다.”
빈말인지 모를 그 말을 들은 유네는 우물쭈물거리다가 바보같이 웃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렇지 않아. 무슨 사정이 있었든 간에 난 지금까지 친구들을 속였던 거니까.”
“그래? 아… 유네 너랑 잘 안 맞는 애들 있잖아. 걔네들 때문이야? 그… ‘무게’ 어빌리터나 그 무리 애들.”
“응? 헤헤. 아니. 실은 저번 달에 렌 군하고 류제 군 학교로 돌아갔을 때 그 애한테 찾아가서 고백했거든. 나 여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어. 근데 그 애는 이미 알고 있더라고. 나한테 주의까지 해줬는걸. 차도 대접받고 분위기 괜찮았어.”
“진짜? 그 애가? 의외네.”
“그지?”
“그럼 뭐가 무섭다는 건데?”
유네가 꿀 악몽의 핵심이 되는 질문에 순조롭게 다가간 류제를 살핀 재경이 최고급 소고기로 만든 찹스테이크를 씹다 말고 의외라며 눈빛을 빛냈다.
선택지에서 급발진할지도 모르는 류제를 저지할 브레이크 대용으로 류제의 발을 힘껏 밟을 준비를 하고 있던 그가 조심스레 발을 치웠다. 좋아, 이 정도면 합격이다.
류제의 질문을 듣고 고민하던 유네는 이번 유네 호감도 이벤트 핵심이 될 문장을 머뭇거리며 입에 담았다.
“내가 남자인 걸 좋아하는 내 친구들의 생각이 무섭지. 이런 걸 보고 바로 걱정도 팔자라고 하는 건가?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밤잠을 설쳐.”
“괜한 걱정이야. 그 애들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걸? 그런 쓸데없는 것에 정신 팔고 있다가는 애써 낸 용기가 말짱 도루묵이 될 거다.”
“그런가? 렌 군이 그렇게 말해주다니 기쁘다.”
유네는 안심이 된다며 웃어보지만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두려운 것은 소심한 그녀에게는 당연했다.
유네의 눈가에 살짝 진 음영을 보고 재경이 한마디 더 던져주려다가 꿀꺽 참았다. 여기서 더 위로해 줘서 유네가 안도해 버린다면 악몽을 꾸지 않을 수도 있으니 내 개입은 이 정도로 하자.
조오았어. 유네의 힌트는 이 정도로 됐다. 이걸로 류제도 꿈속에서 유네를 봤을 때 대충 감 잡을 수 있겠지.
“벌써 한 접시 해치웠네. 렌, 다 먹었으면 새로 음식 담으러 갈래?”
“그래. 아까 저기에 엄청나게 큰 닭고기 있더라. 유네 너는 어때?”
“난 아직 많이 남아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둘이서 갔다 와. 그거 아마 칠면조 고기일 거야.”
“칠면조?! 오예! 먹어본 적 없는데!”
“다 먹을 때까지 우리가 안 돌아와도 굳이 기다리지 마. 금방 갔다 올게.”
유네가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테이블에 빈 접시를 두고 새로운 음식을 찾으러 자리를 뜬 두 사람은 왁자지껄 분위기를 타는 백장미 부대원들을 제치고 셰프들이 막 만든 요리들을 접시에 담았다.
아까 재경이 봤던 푹 익힌 칠면조 고기도 새로 들어왔다. 재경이 고기의 야들야들한 부분만 골라 소스를 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서 더위 죽을 것 같았지만 어차피 온몸이 모래 범벅 염분 범벅이 된 거, 땀 정도는 애교였다.
혹시라도 꿈속에서 제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히로인들의 힌트를 류제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 재경은 음식을 담는 와중에도 흩어진 히로인들을 찾았다.
어디 보자. 유네 다음으로 만만한 게 비키인데 이놈은 잘만 알짱거리더니 이 중요한 순간에 어디를 간 거야?
“말 다 했어?!”
그들이 만찬회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접시를 가득 채웠을 무렵 백장미 부대원이 모여있는 곳에서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 하나가 엎어졌는지 쓰던 식기들이 모래사장에 파묻혀 있었다.
“학생들도 있는데 큰 소리 내지 마.”
“그깟 애새끼들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네네 슈만이 세라의 멱살을 쥐고 으름장을 놓았다. 세라는 동요하지 않고 침착한 자세를 고수했다.
재경은 언뜻 스치는 기억을 떠올렸다. 아, 이건 세라 쌤의 이야기다. 사이 안 좋은 저 아줌마에게 시달렸던 쌤은 저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꿨던 것 같다.
“나는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이런 곳에서 화내고 싶지 않아. 이거 놔.”
“먼저 시작한 건 너다. 뭐라고 지껄였는지 내가 도통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다시 나불거려 봐, 세라 밀로니. 뭐라고?”
“아직도 과거에 붙들려서는 나를 깎아내리는 게 재밌냐고 물었어. 거기에 열을 내는 건 찔려서 그런 건가?”
“웃기지 마!”
소대장끼리 싸움이 나자 대원들이 주변을 둘러싸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랫놈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기강에 문제가 생긴다. 그럼에도 FM에 고지식한 군인인 네네 슈만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데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네가 죽게 내버려 둔 놈들 중에 내 친구도 있었단 사실을 지금 와서 모르쇠 하는 거냐?”
“사람이 적당히 떨쳐낼 줄도 알아야지. 만나는 족족 내게 시비를 걸어서 화풀이를 하는 게 네가 자주 자랑하던 백장미 부대의 긍지인가 보네. 레퍼토리가 조금은 달라졌나 싶었는데 일주일 내내 똑같은 이야기에만 시달렸더니 지긋지긋해.”
“세―라 밀로니!”
약이 오른 네네 슈만이 도깨비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 자리에서 세라를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세라도 불쾌했는지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까득까득. 부대원으로 둘러친 울타리 안에서 네네 슈만의 분노가 응축되었다. 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그녀 역시도 군인이었다. 세라는 늪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이 일었다.
소란을 듣고 기웃거리다가 세라의 의외의 면모를 목격하게 된 재경과 류제는 당황해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저러다 세라 선생님이 네네 슈만에게 한 대 맞는 거 아닐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대치 상황을 관전했다.
“…흥!”
찌릿한 살기를 내비치던 네네 슈만이 붙잡았던 세라의 멱살을 그대로 내던졌다.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져서 조금이라도 건들면 수그러들었던 살기가 그대로 폭발할 것 같았다.
못마땅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피하고 싶다. 죽일 듯이 흘기던 세라를 지나친 네네 슈만은 부대원들 뒤에서 사건을 지켜보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지.”
그녀는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특별 취급을 하는 류제 신리의 어깨를 밀치며 자리를 떴다. 애초부터 이런 사람 북적거리는 곳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와아, 저 아줌마 여전히 무섭네.”
“세라 선생님이 저러시는 거 처음 봤어.”
류제가 네네 슈만과 부딪힌 어깨를 툭툭 털었다. 늘 인자하고 상냥한 엄마 같은 성격인 줄 알았는데 저 사람과의 대치하는 상황에서도 한마디도 안 지다니.
게다가 세라 선생님이 저분의 친구를 죽게 내버려 뒀다는 말은 뭐지?
“후우.”
심호흡을 하며 머리끝까지 올라왔던 혈압을 내린 세라도 후배들 보기 껄끄러워 자리를 피하려다가 불쑥 솟아있는 류제의 검은 머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설마 학생들이 보고 있었다니. 세라가 씁쓸하게 웃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 간의 더러운 싸움을 보여주다니 어른으로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다.
네네 슈만이 떠나자 구경하던 대원들도 흐트러지고 그사이에 세라는 저들끼리 이게 무슨 일인가 숙덕거리는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어색하게 반기는 그들에게 그녀가 작게 인사했다.
“렌 학생, 머리는 좀 어떤가요? 아직 많이 아프나요?”
“에이. 쌤 저 그 정도로 약골 아녜요. 완전 괜찮은데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세라가 별것 아닌 듯 웃어 보이자 류제와 재경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진 세라가 멋쩍게 웃으며 둘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못 볼 꼴을 보였지요? 당신들도 있었는데 큰 소리를 내다니.”
“그분하고 사이가 많이 안 좋으세요?”
“네네가 저를 일방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죠? 그럴 것 같았어요. 그 아줌마 성질머리 더럽잖아요. 첨 봤을 때부터 다짜고짜 얼음 창을 들이밀어서 협박이나 하고. 참은 세라 쌤이 용하지.”
재경이 동감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렌에게서 다른 사람 성질머리 더럽다는 말이 나오니 왠지 웃겨서 류제와 세라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왜? 왜 웃는데요?”
“아뇨, 귀여워서요. 후후후. 그렇죠. 슈만 중위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원칙대로 하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리는 성격이라 어릴 적부터 잘 안 맞아서 저와 자주 다투고는 했습니다.”
세라는 제립학교 시절 네네 슈만과 부딪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서로 고집만 세서 자기가 옳다 여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예의 그 사건 이후로 네네 슈만이 세라를 싫어하게 되었다.
방금 전 네네 슈만이 말한 유언비어를 들었던 류제는 세라의 과거를 잘못 알고 있는 게 미안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 아까 그분이 세라 선생님이 친구를 죽게 내버려 뒀다는 소리는 뭔가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문을 내는 건 사람으로서 너무하지 않아요?”
“그것도 들으셨군요……. 물어보지 않을까 했습니다만.”
세라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이래서 학생들 앞에서 네네 슈만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거짓말은 아닙니다. 제가 그녀의 친구를 죽게 내버려 둔 건 사실이니까요.”
상냥하신 세라 선생님이 저 사람의 친구를 죽게 내버려 뒀다고? 지금껏 그녀를 봐온 바로써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세라 선생님이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류제가 세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씁쓸하게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많이 먹어야 쑥쑥 자라지요.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당신들은 느긋하게 식사 즐기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선생님…….”
“니냐롯트 학생은 당신들을 많이 신경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불편한 백장미 부대원들이 있을 텐데도 당신들을 초대해 주신 걸 보면. 친구와는 늘 사이좋게 지내세요. 그게 누구든 간에요.”
“백장미 부대하고 왕녀가 무슨 관계인데요?”
황제에게 충성하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왕녀 니냐롯트와의 어정쩡한 관계를 모르는 류제가 되물었으나 세라는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걸로 세라 선생님의 힌트도 끝이다.
세라가 사라지자 류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 속은 알기 어렵구나. 세라 선생님이 그런 사정이 있을 줄 몰랐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른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재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세라 쌤의 힌트도 끝났는데 그보다 손에 있는 따끈한 음식이 식어간다. 아직도 배가 안 차서 속이 허해서 어서 먹어치우고 싶었다. 분명 아까 기절해서 그럴 거다.
“얼른 유네한테 돌아가자. 기다리겠다.”
“다 좋은데 좀만 시원했으면 좋겠다. 선풍기는 없나.”
세라 선생님은 렌을 잘 챙겨주었으니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말이 꽤나 충격적일 법도 한데 렌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렌은 안 궁금한가? 호기심 많아서 공부만 제외하면 뭐든 끝까지 물어뜯는 애인데. 류제가 가려진 앞머리 사이로는 읽을 수 없는 렌의 표정을 살폈다.
설마 여기서도 혼자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세라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에서 알아낼 만한 게 있었나? 전혀 모르겠는데.
이상한 오한이 든 류제가 설마, 싶어서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내린 결론. 괜히 말 꺼냈다가 또 그것도 모르냐면서 타박받기는 싫다. 암만 세라 선생님이라도 솔직히 남의 일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시끌벅적 값비싼 술이 들어가 행동이 과해지는 백장미 부대원들을 헤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유네가 있던 자리에 비키가 대신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키? 아까부터 한참 안 보이더니 어디 갔다가 온 거야?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고 비키의 맞은편 의자를 뒤로 뺀 류제가 피식 웃으면서 비키를 놀렸다.
“또 푸딩 사냥이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자리에 앉는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본 비키가 들고 있던 포크를 놓지 않고 그대로 입 속에 넣었다. 우물우물. 재경처럼 교양 없이 입을 벌리지 않고 음식을 먹고 꿀꺽 삼킨 비키가 말을 이었다.
“기간트리카 대결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어. 아 맞다, 유네는 아까 어디로 가더라.”
“뭐어? 진짜 부탁하러 갔었단 말이야?”
“난 한번 결정한 건 이래저래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고. 그것도 몰라?”
“이 띨빡아. 학교에서도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려면 선생님 허가장이 있어야 하는데 군인들이 학생을 상대로 잘도 해주겠다.”
재경이 들고 있던 포크를 허공에 찍으면서 핀잔했다. 비키는 그딴 건 알고 있다면서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키고 마족에게 복수할 의무가 있어. 그럼 안 된다는 걸 알더라도 이 정도 열정이야 보여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또 벌 받으면 어쩌려고. 어휴, 그래 너 잘났다. 열심히 해라.”
기가 막혀서 재경이 툭 말을 내던졌다.
비키는 눈가를 실룩거리면서 테이블에 주먹을 갈겼다. 쿵 소리와 함께 놓인 식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들 사이로 덜그럭거렸다.
“뭐야. 무시하는 거야? 내가 내 목표대로 행동하겠다는데 괜히 빈정거리지 마. 렌, 너는 절대 모를 일이지. 눈앞에서 일족이 멸했다는 슬픔 따위.”
“누가 뭐래? 왜 시비야?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하랬잖아.”
“또 시작이네. 렌의 말에 너무 열 내지 마, 비키. 렌도 네 심정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
“저 바보가 무슨! 저 태도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비키가 들고 왔던 커피를 원샷했다. 쉽게 분개하는 이유는 살짝 카페인이 들어가서 더 그런 듯하다.
아니, 알걸. 류제는 렌도 비키처럼 남아있는 혈연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보호자가 없으면 어빌리터의 신원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나라가 관리한다. 렌의 보호자는 현재 제립학교 교장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암만 그래도 렌의 말하는 방식은 상대방이 기분 나쁠 만도 했다. 비키가 그 부분을 지적하며 화를 냈다. 분노로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자랑하며 주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럼 네 잘난 목표는 뭔데? 뭘 하고 싶기에 내 원대한 목표를 비웃는 거야?”
“비웃은 거 아냐. 저돌적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게 그거잖아!”
“거참 시끄럽네. 사소한 거에 일일이 반응하면 귀찮지도 않냐?”
“너야말로 내 말 하나하나에 토 달면 귀찮지도 않아?”
으악, 아직도 안 끝났어. 류제는 심심하면 일어나는 렌과 비키의 말다툼에 질렸다며 귀를 막았다. 시끄럽고 의미도 없다. 더 언성이 높아지기 전에 막아야지.
“둘 다 그만해. 기껏 놀러 와서 옆 사람 껄끄럽게 싸우지 좀 마. 그거 알아? 렌의 꿈은 혹시 모를 마족과의 전쟁을 막는 거래. 둘 다 원대하다. 이제 됐지?”
“뭐어? 마족과의 전쟁을 막아?”
마왕이 등장한 이래로 그 누구도 종식시키지 못하고 대단히 긴 세월동안 서로 싸워왔던 인간과 마족이다.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도 아니고 고작 어빌리티 불명의 하찮은 렌 지미가 그걸 막겠다고 한 거야?
미치고 팔짝 뛰어도, 세상이 거꾸로 바뀌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비키의 얼굴이 웃기게 변했다. 오른쪽 눈가, 왼쪽 입가가 번갈아 가며 실룩거린다. 설마 내 꿈도 쟤네들한테 허무맹랑하게 들린 건 아니겠지?
“그…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재경이 놀라 눈을 번뜩였다. 이 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어떻게 그걸 알아챘지?
“어떻게 알긴. 저번에 유네네 집에서 네가 알려줬잖아. 뭐야, 진짜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어? 그냥 한 소리였는데.”
“설마 진심이야? 허, 누가 누구한테 저돌적이래?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긴. 꿈이란 것도 정도가 있지. 차라리 억만장자가 되겠다고 하는 게 현실성 있겠다.”
“아, 진짜! 그런 거 아냐!”
비키가 빈정거리자 이번엔 재경이 테이블을 쿵 쳤다. 두 번째로 식기가 덜그럭거렸다. 비밀로 하고 있었던 꿈이 들통나 부끄러웠던 재경의 귓불이 단숨에 빨개졌다.
“자, 싸움은 이걸로 끝. 이걸 서로의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되겠네. 렌도 알았으면 비키의 꿈을 놀리는 건 그만둬.”
“안 놀렸어! 그리고 별로 꿈같은 거 아냐. 생각만 하는 거지.”
“그렇다고 치자.”
“진짜 아니라고!”
“누가 뭐래? 바아보.”
마족에게 복수하고 셀로니아가를 부흥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진 자신을 비웃을 처지도 못 되는 렌 지미의 허황된 꿈을 듣고 마음이 풀린 비키가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도도하게 식사를 계속했다.
비키가 식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재경이 류제의 옆구리를 툭 치며 속사포로 속삭였다.
“너 진짜 남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부끄럽잖아!”
“뭐 어때. 꿈인데.”
“별로 꿈 아니라니까!”
더 말했다가는 말도 안 섞을 것처럼 화낸다. 별 게 다 비밀이다. 류제가 알았다며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만족한 재경이 류제를 흘기고는 처음 보는 음식을 꾸역꾸역 씹었다. 더럽게 맛있네.
“마족에 대한 복수라면 그럼 비키, 넌 그때 봤던 화마를 해치우고 싶은 거야?”
라우라 축제 때 함께 마주쳤던 등급1의 화마족을 떠올리며 류제가 물었다. 어찌어찌 두 사람간의 대화가 비키의 꿈에 대한 류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류제 저놈이 언제 비키에게 제대로 물어볼까, 안 물어보면 저번처럼 또 속성 과외를 해줘야 하는 건가 고민하던 재경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맞아. 왜 셀로니아가를 노렸는지, 왜 우리 가문이어야 했는지, 왜 나만 살려뒀는지, 그 모든 것을 알아낸 다음 철저하게 배제할 거야.”
“너를 살려뒀다고?”
잘못 말했다. 비키가 난감한 듯 눈동자를 돌리다가 말을 정정했다.
“…실언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잊어버려. 여튼 그 일 이후로 들라크루아 님의 주도로 토벌전이 일어나고 마족이 물러서자 키아나트리체가 안정되었지. 우리 가문의 멸족이 키아나트리체의 안정을 야기했다니 기분 나빠.”
말을 마친 비키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전부 해치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찌 되었건 난 내 꿈을 위해서라도 백장미 부대원과 반드시 대결하고 말 테니까 두고 봐. 렌 지미 따위한테 절대 비웃음당하지 않을 거야.”
“따위라니. 너야말로 말투가 그게 뭐야!”
“내가 백장미 부대원과 대결할 수 있게 되더라도 너희는 절대 안 끼워줄 거야. 잘 있어!”
“잘 가. 아, 아까 저쪽에 푸딩 나온 거 봤는데.”
“뭐? 어디에……. 벼…벼…별로 그런 거 궁금하지 않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류제가 손가락질한 방향을 잽싸게 찾던 비키가 얼굴을 붉히고 후다닥 사라졌다.
별꼴이야. 재경이 쯧쯔 혀를 찼다.
“남은 건 왕녀와 미나인가.”
“뭐라고? 누구?”
“암것도 아니야.”
왕녀와 미나에 대한 힌트는 연달아서 일어난다. 왕녀만 찾으면 미나가 알아서 참견하러 올 텐데.
왕녀는 어떻게 찾으러 갔었지? 왕녀는 그러니까… 그 무서운 아줌마랑 엮였던 거 같은데.
재경의 예상대로 니냐롯트는 무서운 아줌마인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세 번째로 빈 접시를 채우러 갔을 때 이미 왕녀와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원래부터 까다로운 사이였던 그들이다. 니냐롯트는 이 정도 충돌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말이 안 통할지는 몰랐는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반푼이 왕녀 소리나 듣는 게요. 반어빌리터파든 어빌리터파든 파벌이란 미움이 아니라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오.”
“하지만 아바마마께서는―”
“폐하? 한 나라의 수장이 주적을 앞에 두고 고작 사적인 감정 때문에 나라를 움직인다 생각하시오? 황제 폐하께서도 자신이 반어빌리터파에 있어야 나라에 이익이 된다 생각했기에 그런 것이오. 그건 왕비님의 서거와 아무런 관계가 없소. 그것이 황제 폐하의 의견이고 나는 그에 따를 뿐이지. 전부터 말해왔지만 군인에게 개인적인 의견은 필요 없소. 나는 인류의 도구일 뿐이오. 나를 움직이는 자가 황제 폐하이고.”
“그대는 그것으로 만족하오?”
“그것이 싫다면 왕녀 그대가 그 자리를 꿰차면 되면 되는 거야. 그리하여 나를 움직이면 돼. 시시한 대화는 이만하도록 하겠소. 나라의 부속품인 나는 훈련 보고로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내 부하들이나 제때 돌려놓기를 바라오.”
제 할 말만 마친 포르테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잠자코 포르테의 말을 듣고 있던 니냐롯트는 그녀가 떠나자 얕게 인상을 썼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알면서도 저러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저렇게 생각하는 걸까.
이대로 반어빌리터의 세력이 커지면 어벌리터들에게 어떤 제약이 더해질지 아무도 모른다. 설마 그걸 어빌리터인 그녀가 모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는 영리하니까.
“와아, 무섭다. 아까 같이 비치발리볼을 한 게 거짓말 같아.”
“그녀는 한 부대의 대대장이지 않나. 당연한 것이겠지.”
가녀린 눈동자로 막 걸음을 당도한 류제를 살핀 니냐롯트가 씁쓸하게 웃었다. 류제 신리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자꾸만 보여주는구나.
멋대로 다가오는 류제에게 한 소리 하려는 루이나에게 입을 잠시 다물어달라 손짓한 그녀가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 장난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어빌리터들을 도구 취급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러기엔 어불성설이지. 우리는 인류 최후의 검이 아닌가. 모두 의지가 없고, 손잡이를 쥐는 사람에게만 복종하는 군인이 될 테지.”
“난 그게 편할 것 같은데. 정계 쪽은 어지간히 복잡하나 보구나.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후후, 마치 그물망처럼 얼기설기해서 하나만 어긋나도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이 정계가 아닌가. 번거로운 일이다.”
“어리석은 류제 신리. 왕녀 저하의 노고를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원래부터 저하께서는 너와 어울리는 세계에 있는 존재가 아니시다. 주제를 알거라!”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무례에 화난 루이나가 노갑이을하듯 외쳤다. 울컥했지만 류제는 처음으로 루이나의 말에 동의한 것 같았다.
포르테의 막말을 잘도 참고 있던 루이나는 분에 겨워 발을 구르며 주먹을 쥐었다. 니냐롯트가 뭐래도 충복으로서 그녀는 이 말은 꼭 해야 했다.
“저하께서도 그런 뇌 근육 원칙주의자와 대화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그자는 그야말로 도구. 말이 안 통하는 도구라고요! 스스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인간이다. 인간은 소통하는 존재이고. 무례한 말 말거라. 그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는지 모르느냐. 나를 지키는 너도 도구가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괜한 소리 말거라. 여기에는 듣는 귀가 많다.”
주변이 백장미 부대원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사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 만든 장이지만 그 여파로 듣는 귀가 많고 말하는 입이 많다. 언제 어떻게 이야기가 나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대는 렌 지미와 함께가 아닌 건가? 곁에 모습이 보이지 않구나.”
“응? 아니, 렌은 같이 있―”
의외라는 듯이 말해서 류제가 아니라며 옆자리를 찾는데 렌은 어느새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한테 철썩 들러붙어 있었으면서 웬일이지. 화장실이라도 갔나?
“…었는데 없어졌네.”
“후후, 그는 여전히 내가 불편한 모양이구나.”
“그야 마땅합니다. 렌 지미 자식, 그런 주제에 저번에도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해서는―”
“루이나.”
왕녀가 루이나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는 모두 류제의 귀에 들어간 후였다. 렌이 왕녀한테 부탁을 했었다고? 처음 듣는 소리다.
“부탁이라니? 렌이 왕녀한테? 언제? 무슨 부탁?”
류제가 집요하게 물으며 갸웃거렸다. 렌과 왕녀의 조합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다.
“흥, 렌 지미 따위가 무슨. 그럴 리가 없잖아.”
“아아, 그보다 류제 신리여. 그대가 선물해 주었던 향초가 다 떨어졌더구나. 그게 아주 효과가 좋아. 숙면을 취하고 싶은데 어디서 난 상품인지 알 수 있을까?”
왕녀가 드물게 질문을 회피했다. 루이나와 왕녀의 언동이 수상쩍었지만 답변해 줄 것 같지 않아 류제는 잠자코 넘어가 주었다.
그보다 향초? 그건 렌이 골라준 거였는데.
“나도 수학여행 마지막 날 전날 벼룩시장에서 산 거라 자세히는 몰라. 도움이 안 되어서 미안한걸. 숙면을 취하고 싶다니. 아직도 악몽을 꾸는 거야?”
“안타깝게도 향초가 떨어지니 다시 그렇다.”
“옛날에 말해줬던 그 꿈?”
“그래. 늘 같은 꿈이지. 모른다니 어쩔 수 없구나.”
선물을 해준 류제도 모른다고 하자 아쉬운 듯이 웃어 보인 니냐롯트가 자리를 털고 먼저 일어섰다.
“만찬회는 충분히 즐기고 있는가. 부족하면 뭐든 말하라. 할 수 있는 선에서 이루어주도록 하지.”
“충분해. 덕분에 맛있게 먹었어. 아세미랑 수녀 누나까지 초대해 줘서 고마워.”
“네 지인들이지 않느냐. 멀리서 올라왔다 들었는데 이 정도 대접은 해주어야지. 나도 축하해 주고 싶었고.”
“축하? 무슨 축하?”
“후후, 글쎄다.”
렌 지미는 아쉽게도 나를 아직도 껄끄러워하고 있다. 니냐롯트가 류제의 고아원 수녀가 아세미, 유네와 함께 백장미 부대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았기 때문에 너를 받아들이는 건가…….”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남기며 니냐롯트가 자리를 떴다. 루이나는 묵묵히 그녀 뒤를 따랐다.
이해관계? 왕녀가 떠나기 전 남긴 말에 류제는 아리송했다.
반어빌리터파라. 반어빌리터하니 생각났는데 저번에 마주쳤던 유네네 미들 스쿨 때 친구들이 그랬었지. 어빌리터라는 것을 핑계로 유네를 괴롭혔지 않았나. 참 복잡하다.
“뭘 그렇게 생각해?”
왕녀가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나가 돌연 시야에 난입했다. 놀란 류제가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녀를 인지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옆에 서있다. 신출귀몰하네.
“그냥 쓸데없는 생각이었어.”
“그렇구나. 그보다 왕녀님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까 분명 여기에 있었던 것 같은데 보이질 않네.”
“왕녀라면 아까 저쪽으로 가던데.”
“그래? 그렇구나. 고마워. 어휴, 나와 함께 있겠다고 했으면서 어디까지 가신 거람.”
왕녀가 자신을 따돌려서 미나가 삐친 듯이 볼을 뿌우 내밀었다.
미나는 유네처럼 작고 내향적인 데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상식인이지. 류제가 실례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미나, 너는 네가 어빌리터라고 해서 괴롭힘을 당한 적 있어?”
“응? 나? 하하, 이상한 걸 물어보는구나.”
류제의 물음에 미나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야 아주 많지. 마왕님도 참으로 많으실 거라 추측한다.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인간들이 그녀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당시엔 그저 ‘매혹’이라는 정신계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었을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그게 컨트롤이 어려웠을 뿐인데 인간들은 나를 마을을 망치는 마녀 취급하면서 돌을 던졌다.
오로지 그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떳떳하게 이용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때는 기간트리카라는 병기가 발전하기 전이었으니 인간들에겐 마족도 못 해치우는 어빌리터 따위 필요 없었다. 오히려 그녀 같은 어빌리터는 마족과 똑같은 취급이었지 싶다.
그 반동으로 내가 나 스스로 인간을 버렸으니 감사를 표해야 하나? 모름지기 현명한 선택이었다.
인간을 버리라고 날 설득한 것도 마왕님이었는걸. 후후후, 이제는 내가 마왕님께 인간임을 버리라고 꾀고 있지만. 마왕님은 고민하는 날 두고 이런 심정이었을까.
미나가 의뭉스럽게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안경 사이로 얼핏 보이는 눈동자가 차가웠다.
“내 어빌리티는 쓸모없잖아? 멋지지도 않고. 그래서 놀림을 당했어 하지만 제립학교는 좋아. 모두 어빌리터들뿐이니까 다들 개성 넘치고. 비어빌리터들은 시시하기만 해.”
“시시하다니. 미나 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구나.”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어도 어빌리터를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으니까. 그게 무슨 이유든 간에. 그럴 바에 차라리 우리들끼리 있는 게 더 낫다는 게 난 좋아.”
“그래?”
우리끼리만 고립된다면 같은 인간으로서 비어빌리터와의 의견 차이는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거 아닌가. 류제는 미나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지 못한 추억이라 선뜻 말하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 시원하게 말한다.
미나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유네도 미들 스쿨 때 괴롭힘을 당했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걸.
“이상한 이야기 해서 미안해. 왕녀님은 저쪽으로 가셨다고? 어서 쫓아가야겠다. 그럼 안녕!”
“아… 응.”
류제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어쩐지 친구가 된 이후 처음으로 미나의 진짜 생각을 알게 된 것 같아 류제는 기분이 새로웠다.
본의 아니게 다섯 명의 히로인들이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확인한 류제는 그녀들이 가진 각자의 사연이 기구하다는 걸 알고 뒷맛이 씁쓸했다.
렌과 함께 있노라면 내가 단순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어려웠는데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무신경한 내가 단순한 것처럼 느껴진다.
“렌, 너는 무슨 고민 없어?”
“윽……!”
류제 몰래 살금살금 다가오던 재경이 괴발디딤으로 걷던 발을 얌전히 바닥에 붙였다.
류제가 무심코 왕녀에게 향하자 먼발치에서 지켜보기 위해 거리를 두었던 재경이다. 류제가 혼자서 미나의 힌트까지 완수하자 모르는 척 다시 돌아오려던 그는 진작 기척을 읽은 류제에게 걸리고 말았다.
류제가 도둑고양이 렌을 내려다보았다. 비어있던 옆구리에 당연한 듯 그가 있었다. 난감한 표정이 괘씸했다.
“말도 없이 어디 갔다 온 거야? 네가 좋아하는 왕녀랑 대화할 기회였는데.”
“화…화장실. 금방 갔다 오려고 했는데 그새 알아차리다니. 귀신같은 놈.”
“귀신같다니. 네 기척에 익숙해진 거라고 생각해 줘.”
“네 안에서 내 프라이버시는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 거지?”
“뭐래, 말도 없이 사라진 건 너면서.”
그 누구보다 렌을 신경 쓰며 렌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칠까 유의하고 있던 류제는 소름 끼쳐 하는 렌의 반응에 부루퉁해졌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
비틀비틀 아주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다른 친구들은 어련히 자기 길 찾아갈 인성들이니 꽃길을 걷든 어디를 걷든 아무래도 좋은데 나는 오로지 렌만 걱정이다.
“그보다 렌, 너는 무슨 고민 없냐니까?”
“내 고민은 왜? 알아서 뭐 하게.”
하지만 렌은 쓸데없는 말만 구구절절 늘어놓기 바쁘지 정작 중요한 사실들은 죄다 마음속에 꽁꽁 숨겨놓기만 한다.
아무리 함부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나한테도 부모님이 안 계시고 할머니랑 둘이서만 살았었다는 이야기를 안 했는걸. 렌이라면 고민이 있더라도 내가 강제로 끄집어내지 않는 이상 절대로 먼저 털어놓지 않을걸?
“친구끼리 말해 줄 수도 있지.”
“없어!”
거봐, 아까도 혼자 중얼중얼 생각에 빠졌던 주제에 또 모르는 척을 한다. 하물며 유네가 걱정이라고 말할 법도 한데 저렇게 곧바로 부정하는 건 반대로 확실하게 있다는 의미 아냐?
“만찬회에 왔으면 만찬회나 즐겨. 네 여동생이 너 어디 있냐고 아줌마들 사이에서 아주 돌고래 소리를 내더라. 가서 놀아주지 그래? 네가 자기랑 안 놀아주는 게 내 탓이라며 사람 귀찮게 하기 전에. 내 고민은 바로 저거다. 어서 가서 해치워.”
“아세미 말이지. 하아…….”
툭하면 결혼 이야기나 꺼내 드는 아세미를 상대하기 싫다는 마음 반, 렌이 또 말을 돌렸다는 생각에 시무룩한 마음 반으로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복잡한 마음 대신에 머리칼을 헤집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렌은 잘 알겠으면서도 모르겠다. 내게 뭔가를 숨기려는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럴 테지만 나는 렌을 더 알고 싶단 말이야.
류제는 싫증 난 걸음으로 아세미에게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축축 늘어졌다.
결국 만찬회가 끝날 때까지 렌과 의미 있는 대화를 하지 못한 류제는 끈덕진 아세미와 놀아주는 데 시간을 다 할애했다.
폭주하는 아세미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던 수녀 누나는 백장미 부대원들의 무용담과 값비싼 포도주에 홀라당 넘어가서 류제 쪽은 안중에도 없었다.
부대원들도 리액션이 좋은 루나의 반응에 재미 들렸는지 최근에 있었던 전투를 과장하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난리도 아니었다. 듣기만 하면 부대원 전부가 포르테 들라크루아급이다.
백장미 부대원과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고 말겠다며 들쑤시고 다니던 비키는 결국에 어빌리티 1합 시합(단 1번의 어빌리티 사용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을 조건으로 백장미 부대원과 승부를 겨루는 데 성공했다. 끈기 하나는 끈덕진 녀석이다.
아까는 꿈지럭꿈지럭 내 발을 밟으려고 하는 둥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던 렌은 이제는 마음이 놓였는지 끈이 풀어졌다. 렌은 그동안 비키가 대결하는 모습을 안주 삼아 유네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네가 여자란 걸 알고 나니 유네와 렌의 거리감이 상당히 가깝다는 것이 거슬리지만 친구 사이니까 뭐라 말할 수도 없다.
상냥하신 세라 선생님은 과음해서 뻗어버린 부대원에게 일어나라며 부축을 해주었다.
미나도 왕녀를 만나서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고. 루이나는 여전히 왕녀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입술을 노리는 아세미 같다.
아니, 그래도 이성은 가지고 있는 루이나와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야생마 아세미를 비교하는 건 좀 너무한가?
“떠들썩하네.”
조용한 학교에만 있었으면 느껴보지 못했을 좋은 추억이다. 올 때는 이만큼 막무가내여도 되나 걱정이었는데 왕녀 덕분에 아세미는 물론이거니와 수녀 누나까지 즐거워하니 만족스럽다. 따라다니는 루이나가 귀찮아서 그렇지 그것만 아니면 왕녀도 좋은 애란 말이야.
…그런데 결국 왕녀는 우리의 뭘 축하해 주고 싶었던 거지? 개학? 우연히 마주친 거?
그 어느 것도 성대한 만찬회에 초대해 줄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에 류제는 그것만큼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렌 지미가 무사히 추가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는 사실은 재경도 모를 일이었다.
만찬회가 끝나고 시간이 늦자 세라는 인사불성이 된 소대원을 이끌고 부대 막사로 떠났다.
볼일이 있어 만찬회 장소에 남아있는 니냐롯트와 작별 인사를 한 1학년 8반 학생 일동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기네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걸음걸이로 밤바다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어두운 파도에 비친 달빛이 그들이 만들었던 거대한 모래 거북이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쏴아아. 잠잠해진 열대야에 시원한 파도 소리는 아직도 그들이 여름방학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 중 누군가는 조금만 더 일찍 만나서 놀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숙소가 근처에 있는 유네와도 금방 헤어지고, 남은 건 쿨쿨 잠자는 아세미를 업고 있는 류제와 술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며 비틀거리는 루나를 부축하는 재경, 빈손으로 뒷짐을 지고 걸으며 붉은색 말 꼬랑지를 출렁거리는 비키다.
“배불러. 장난 아니게 먹어치웠네.”
“적당히 먹지 그랬어… 라고 잔소리하고 싶지만 나도 과식을 했으니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네.”
“명색이 제립학교 학생이라면 식욕 정도는 알아서 조절하란 말야. 무슨 석 달은 굶은 애들도 아니고 게걸스럽게 해치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단순하기는.”
“너 잘났다. 귀족이라서 맨날 이런 것만 먹었던 넌 모르나 본데 우리는 평범하디평범한 사람이거든? 그런 진미를 맛보면 위가 컨트롤이 안 된단 말야.”
왕가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라 그런가 만찬회의 음식은 제립학교의 급식보다 질이 훨씬 뛰어났다.
평소에는 감히 들여다볼 수도 없던 랍스터 요리까지 있었는걸. 그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생각해 봐. 과식하는 건 결정되어 있는 사항이라고. 암.
“그보다 비키, 너는 안 돌아가?”
“말 안 해도 인사하려고 했어.”
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당도한 비키가 웨지힐 슬리퍼를 달각거리다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하늘하늘 시원해 보이는 여름용 원피스에 가벼운 카디건을 입은 차림은 집이 아니고서야 절대 볼 수 없는 비키의 사적인 모습이었다. 그녀가 샐쭉한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자. 좋은 꿈 꾸고.”
“오냐, 그건 내가 할 말이다.”
재경이 이상하게 되받아치자 비키가 피식거리다가 셀로니아 가문의 별장으로 사라졌다. 탐스러운 머리칼이 여우 꼬리처럼 쫄랑거리다가 거대한 문 안으로 휙 사라졌다.
류제와 재경은 그녀가 별장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루나를 부축하며 자리를 옮겼다.
타고시아 해변 끝자락에 있는 낡은 숙소. 이곳이 그들이 하루 머물다 갈 장소였다. 2층 침대가 나란히 붙어있는 것이 다인 작은 숙소는 왕족이나 귀족의 별장, 혹은 돈 많은 부자의 별장에는 비할 수 없이 초라하지만 이런 생활 방식에 익숙했던 그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한 쉼터였다.
“늦은 밤. 삐걱거리는 2층 침대. 나무 냄새 나는 방. 딱딱한 베개. 몸에서는 아직도 모래가 묻어나오는 것 같은 기분. 으으음, 이것이 바로 바닷가에서 보내는 휴가인가. 운치가 있구만.”
땀과 바닷물과 모래 범벅이었던 몸을 씻고 나온 재경이 숙소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반대편 침대에 1층 2층 차례로 누워 업어 가도 모르게 쿨쿨 잠들어 있는 아세미와 루나를 보며 그가 턱을 괴었다.
생전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바다에 오는 것도 괜찮네. 처음 알았다. 할머니도 왔으면 좋았을걸.
“씻고 왔어?”
“모래 때문에 배수구가 막혀서 고생이었어.”
“그래서 늦었구나. 으하아암.”
침대 2층에서 자기로 한 류제가 난간에 매달려 제 아래에 있는 재경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려진 푸른 눈동자가 끔벅끔벅 졸음을 한가득 집어먹었다.
“안 피곤해?”
“알아서 잘 거야. 피곤하면 먼저 자.”
“그래, 나 먼저 잘게. 너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
류제가 손을 뻗어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잠이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아세미에게 시달리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육체를 손쉽게 강화시키는 만능 어빌리티라지만 시도 때도 없이 몸을 강화해서 피곤을 날려버리기는 무의미하니 류제도 오늘 같은 날에는 어빌리티를 쓰지 않고 적당히 퍼질러 자곤 했다.
“뭐야. 왜 이러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자다 말고 내 머리는 왜 쓰다듬고 난리야? 쓸데없이 왜 날 기다려? 나 참, 이래서 하렘 미연시 주인공이란.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저런 행동 때문에 히로인들이 무신경한 저놈한테 뿅 가는 건가.
잠시 미연시 주인공의 대충대충인 성격에 대해 고찰하던 재경이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냐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들쑤셨다.
“진짜!”
귓불이 공연히 붉다. 슬렉터로 시간을 살핀 재경은 마족들이 활동할 12시 정각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제 때문에 열받는다. 재경이 잠깐만 바람을 쐐서 몸을 식혀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밖은 미지근한 바람만 불었다.
“가을이 오긴 하는 건가.”
아무도 모르게 숙소 앞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은 재경은 꿈속에서 일어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오늘 밤. 마왕의 측근이었던 마족의 사천왕 중 미나와 새롭게 등장한 수마가 합동하여 타고시아 해변 전체에 있는 모든 인간들을 꿈의 세계로 보내버린다.
목적 따위야 알 게 뭐야. 걍 미연시니까 그런 거지. 젠장, 공책만 가져왔어도.
미나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꿈속에서 그게 꿈이란 것을 눈치챈 사람은 주인공인 류제뿐이다.
왜 류제 뿐인지는 아리송한데 아마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대충 주인공이니까 그런 거겠지, 뭐.
주인공은 꿈속을 거닐다가 수마의 수면 마법 범위 내에 있는 여러 사람들의 욕망이 담긴 꿈을 엿보게 되고 가장 중요한 다섯 히로인의 꿈(미나는 자기가 만들어낸 가상의 꿈을 류제에게 보여준다.)들이 점점 힌트로 들었던 내용과 연관되는 악몽으로 변하는 것을 눈치챈다.
그 악몽을 다시 길몽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그들이 무슨 꿈을 꾸게 될지는 뻔하니까 패스. 문제는 내가 류제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류제가 꿈속에서 나를 가장 먼저 찾아야 한다는 건데.
미나의 능력이 어디까지일지 모르니 나도 꿈속의 세계에 말려들어 갔을 때 그게 꿈이란 걸 알아챌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야 꿈속 세계는 처음이라고. 아니, 그런 터무니없는 세계는 누구라도 처음일 거 아냐. 그런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어떻게 미리 경험해 봐? 미연시 빙의라면 모를까.
더군다나 류제 저놈이 모르는 척 내 뒤통수를 칠지 누가 알아. 나 꿈속에서 멋도 모르고 이상한 소리 늘어놓는 거 아니겠지?
재경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잘 생각해 보자. 어차피 게임 속 렌 지미도 꿈에 등장했었어. 렌 지미가 히로인의 꿈속에 멋대로 난입해서 장난질을 치다가 정의 구현 당하는 장면이 몇 있었잖아. 렌 지미의 삼류 악행만 잘 조종한다면 류제와 만나는 건 쉬울지도 몰라.
“벌써 시간이…….”
잠깐 나와 있으려고 했는데 조금만 있으면 그들이 행동을 개시할 때였다. 재경이 언뜻 숙소가 있는 불 꺼진 방의 창문을 살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미나가 마법으로 사람들의 꿈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수면 마법 영향 아래에 있는 인간들 중 한 명을 ‘꿈을 이어주는 꿈을 꾸는 역할’을 하는 매개체로 만들어야 했다.
그 매개체는 꿈속에서도 잠에 빠져 서큐버스에게 꿈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매개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인과 연결되기 쉬운 어린아이가 유리했었나.
이번 챕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는 아세미뿐이다. 즉, 아세미가 그들이 만들어나갈 꿈속 세계의 핵이 될 것이다. 그놈들은 제일 먼저 꿈속 세계의 징검다리가 될 아세미를 찾아갈 텐데. 마주치면 곤란하다.
“그만 갈까.”
그들이 굳이 아세미를 선택한 건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건 재경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마법에 홀려 꿈속에 들어가려면 잠이나 자야겠다. 11시 50분을 가리키는 시간을 보며 재경이 슬렉터의 홀로그램을 끄고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자― 귀찮게 하지 말고 이대로 코 자도록 하자.”
미적지근한 바람이 소스라치게 춥다. 핏기 없는 손바닥 하나가 재경의 눈을 가렸다. 양쪽 눈이 전부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손바닥이었다. 재경은 손바닥 사이로 거대한 보름달을 보았다.
어린아이. 재경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곳에 떠있는 미성숙한 어린아이. 검은 비막의 날개. 붉은 동공. 단단한 뿔. 어린아이인 외모는 거죽뿐인 듯 속에서 느껴지는 잔인한 그림자.
“어라…….”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채기도 전에 미친 듯이 졸음이 쏟아졌다. 몸이 무너진다. 뭐야, 갑자기 왜? 생각을 해야 하는데 눈을 뜰 수가 없어…….
그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소리 외에는 밤의 바다는 어떠한 불합리한 소음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수마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이 재경에게 친히 선사해 준 ‘수면 마법’은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등급의 마법이었다.
들었던 바와 달리 저자가 강하다는 기분은 못 느낀 나콜렙시가 너무 손쉽게 쓰러져 버린 인간을 발로 찼다.
강한 수면 마법 탓에 제대로 된 반항 하나 없이 심층으로 떨어져 버린 인간은 자극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 어린 인간을 핵으로 삼고 싶었는데.”
“약속이었잖아. 이제 와서 딴말하지 마.”
하늘에서 살며시 내려온 미나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쓰고 다니던 동그란 안경은 어디로 갔는지 분홍빛 눈동자 가운데로 번뜩거리는 붉은 동공이 사뭇 어른스럽다.
초록색 단발머리 사이에 솟은 양 뿔과 허리를 따라 자라난 마족의 날개. 인간 미나가 아닌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의 모습이었다.
졸린 눈의 나콜렙시는 재경을 툭툭 차다가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쉬워. 시시해.”
“그럴 리가.”
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쉽다니. 최상위 정신계 마법을 쓰는 그녀조차 혼자 힘으로 렌 지미의 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형태로라도 렌 지미의 꿈속에 접속하려고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게 아니겠는가.
수면 마법은 악몽 마법보다 한 단계 아래 등급에 속하는 정신계 마법이고, 그만큼 렌 지미의 정신적 반발이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나콜렙시가 쉽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이해가 가능하다.
수마의 군주가 부여한 마법의 영향력하에 있으면, 즉 인간이 나콜렙시에 의해 강제로 수면을 취하게 되면 아무리 정신력이나 방어기제가 강한 인간이라도 몽마의 간섭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정체불명의 인간에게도 수면 마법의 메커니즘이 적용된다면 오늘 그녀가 렌 지미의 꿈속에 들어가는 것은 의도된 수순이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미나가 바닥에 쓰러진 재경을 벤치 위에 눕혔다. 그녀는 잠이 든 재경의 이마에 뾰족한 손톱을 가져다 대었다.
어떠한 노력에도 지금껏 렌 지미의 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그녀다. 이건 내 비장의 무기야. 미나가 손가락 끝을 ‘악몽 인자’로 바꾸어 침입을 시도했다.
렌 지미의 무의식 방어막이 얼마나 단단한지 섣부르게 침입하기 힘들다. 그래도 진전은 있었다. 손톱 끝부터 시작해서 꾸역꾸역 밀어 넣어 오른손 팔뚝까지 꿈에 들어간 미나가 자신을 거절하려는 의식을 거슬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뭔가를 낚아채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
“역시 어렵네.”
“대충 해…….”
으하아암. 미나가 그깟 인간에게 끙끙 앓는 동안 나콜렙시는 졸린 눈을 끔벅거리며 강아지처럼 재경의 배 위에 폴짝 앉았다.
나콜렙시는 플로냐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이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기대했었다. 그 기대에 별로 큰 가치는 없었지만 제법 양질의 수면이었다.
그녀의 입으로 양질의 수면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쾌하고 뒤숭숭한 부류이다. 좋군. 푹 잘 수 있겠어. 그녀가 빨리 자고 싶어 길게 하품했다.
“아직 멀었어? 나 졸려.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다고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봐.”
조급해진 미나가 침입한 꿈속의 밀도 높은 어딘가를 헤집다가 왼쪽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눈알이 꿈에 침입한 오른 손바닥에 불쑥 자라나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녀가 그것을 잡아챘다.
“찾았다.”
그건 바로 몽마가 침입한 꿈의 주인인 재경의 의식이었다. 원래라면 바로 찾을 수 있는 것인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시간이 꽤 소요되었다.
어지간한 놈이군. 정신적 방어기제가 이놈의 어빌리티인가? 자기 스스로 어빌리티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아.
몽마의 군주인 나조차도 나콜렙시의 힘을 빌려야 간신히 오른손만이 침입 가능한 이런 높은 수준의 정신적 방어기제는 절대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니까.
“됐다.”
그녀는 강한 몽마였기 때문에 몸이 전부 침입해야 꿈을 컨트롤할 수 있는 다른 유약한 서큐버스와는 달리 오른손만 침범하더라도 꿈속의 재경을 꿈속의 꿈속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를 압박하던 꿈속의 공기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꽉 조였던 스타킹을 벗어 던진 기분이다. 후우, 이제야 좀 편안하군.
“이제 자도 돼.”
“잘 먹겠습니다.”
나콜렙시가 재경의 위에서 개처럼 몸을 말고 쿨쿨 잠을 잤다.
그와 동시에 나콜렙시의 광범위 수면 마법이 발동되었다. 타고시아 해변을 뒤덮는 거대한 마법진 속에서 발생한 무형의 공격이 무방비한 인간들을 덮쳤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마족을 멸했다던 백장미 부대도, 세상을 바꿔 쓸 수 있을 만큼 높은 어빌리티 척도를 가진 류제도, 뛰어난 ‘탐색’ 어빌리티를 가진 세라도, 모든 유한한 인간들은 나콜렙시가 원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녀를 눈치챌 수 없다.
‘군주급’이란, 등급1의 마족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특히나 마왕만큼이나 오래 살아온 나콜렙시는.
나콜렙시의 식사 인사와 함께 미나는 재경의 꿈속으로 꿀꺽 삼켜졌다. 꿈의 주인은 꿈속에서 잠을 자고 있으니 재경의 꿈의 주인은 미나다.
드디어 렌 지미의 꿈속에 들어왔나. 이제 이 꿈은 내 컨트롤하에 있다. 미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꿈속의 꿈에서 재미있는 꿈을 꾸길 바랄게, 렌 지미. 너만을 위한 내 선물이야.
또각또각 미나가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재경의 꿈을 거닐었다. 주인을 잃어 백지상태가 된 꿈속에서의 재경은 망가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쓰러져 있었다.
“후후후.”
방해꾼이 사라졌다. 드디어 내 세상이다. 악몽의 세상이다.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인 그녀가 멋대로 잘라내고 수정한 재경의 꿈은 나콜렙시가 펼친 수면 마법의 영향하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꿈을 바늘로 기워 연결시켰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