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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3) (21/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3)

쨍쨍쨍 시끄럽게 내리쬐는 불구덩이가 너무하다.

세라 밀로니는 공허한 하늘을 쳐다보며 물씬 드는 피로를 태양 탓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뜨거운 하늘은 견디기 고통스럽다.

아까부터 알짱알짱 사람 귀찮게 구는 바다 모기가 기승이다. 그저 바다 한가운데에 둥둥 떠있는 것뿐인데도 세라는 삶의 의욕이 전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포인트 25, 부상자 발생. 기체 시리얼 넘버 16.

“힐러 세라 밀로니. 도달하는 데 20초 소요됩니다.”

자신이 필요하다는 무전이 들려오자 그녀가 공중에 떠있기 위해 수직으로 세웠던 기간트리카 부스터를 움직여 부상자가 있는 포인트로 이동했다.

지금은 더위에 질려 무기력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 해상 훈련에 집중해야 했다. 왜냐하면 현재 세라 밀로니는 키아나트리체의 군인이었으니까 말이다.

“빨리빨리 움직여!”

“마족이 발악하기 시작한다. 물러서지 마라! 기간트리카가 있다면 정신계 공격은 무의미하다. 대열을 유지하라!”

“‘빙결’! ‘빙결’! 22소대 앞으로!”

날아오는 수마(水魔)의 ‘물 인자’를 이용한 물 마법 공격을 네네 슈만이 자신의 어빌리티로 무력화시켰다.

기간트리카를 뚫고 들어온 공격 때문에 어깻죽지가 박살이 난 대원에게 다가간 세라가 대상의 공격 범위 뒤로 물리며 ‘힐링’을 시전했다.

그녀는 이제 본능만 남은 마족을 보며 그 증오의 지독함에 이를 악물었다.

“죽여…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인간 주제에!”

저건 몇 달 전 키아나트리체 군부가 생포했던 마족이다. 마족의 종족 중 수마 니켈에 해당한다.

니켈들은 물 마법과 수면 마법을 사용하는 마족이다. 그들은 바닷가나 강 등 물이 흐르는 곳에서 인간들을 습격하며 기절시킨 대상의 에너지를 드레인하는 종족으로 비교적 호전적인 마족들은 아니다.

살기 위해 필요한 인간들만 죽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핵은 건드리지 마! 부위를 정확히 노리는 것도 훈련이다!”

오른쪽 골반에 위치한 훈련 대상의 핵 방향으로 쏘아지는 공격을 쳐내며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마족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로 신참들을 실전에 투입할 수는 없기에 어떤 기간트리카 부대에서건 간간이 이런 훈련을 행하곤 했다. 그중 가장 많이 마족과 마주하는 백장미 부대가 훈련의 빈도가 잦았다.

훈련장 안쪽으로는 대마족 결계가 쳐져 있고 마족은 목에 마력 억제기를 쓴 채 군인들을 상대로 무차별한 공격만 감행했다.

강제로 한 단계 다운그레이드된 마족은 막 군에 들어온 애송이들의 상대가 되기엔 적절했다.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서는 회복도 못 하는 마족을 진짜 마족과 비교할 수 없지만 그 값은 톡톡히 해냈다.

“정신계 마법을 두려워하지 마라. 기간트리카 헬멧이 고장 났을 경우 반드시 소대원이 주변 함대로 이송시켜라.”

“기체 시리얼 넘버 16, 회복 완료했습니다.”

“그럼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참전해!”

“넵!”

지휘봉을 휘두르며 전장에 당당히 서있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기간트리카 기체가 위풍당당하다.

한시름 놓은 세라 밀로니는 다시금 안전지대로 물러났다. 그때 스쳐 지나가는 네네 슈만의 기체.

“잘 숨어계시라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 못 나타나면 곤란하잖아. 무능한 세라 밀로니.”

헬멧 안 무전으로 네네 슈만의 비릿한 웃음이 지나쳐간다. 세라는 울컥해서 한 대 때려주려다가 훈련 중이란 걸 자각하고 화를 눌렀다.

애도 아니고 정해진 역할에 태클을 거는 건 무슨 심보야. 성격은 탁 막힌 FM이면서 야전교범(Field Manual)도 제대로 안 읽었나!

라고 열 내기엔 그저 네네 슈만이 자신을 싫어해서 도발한다는 걸 세라는 알고 있었다.

그건 세라가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는 그 사건과 연관이 깊었다. 물론 그 사건 전에도 사이가 좋았던 건 아니지만 그때 이후로 네네 슈만이 세라의 방식에 불만이 더 커진 것이겠지.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훈련 중에도 저런 태도를 보이면 집중하기 번거롭다.

“명령만 아니었어도.”

하필 이번 분기 훈련이 백장미 부대 백업이라니.

저번에 학교에 마족이 들이닥쳤던 사건과 라우라 축제 때 아가타 한가운데서 화마족이 인간사냥을 한 사건 이후로 높으신 분들이 선생님들에게도 상당한 수준의 전투력을 요구하니 어쩔 수 없지만 세라는 모쪼록 네네 슈만이 있는 백장미 부대만큼은 배정받기 싫었다. 재수도 없지.

“……!”

세라의 ‘탐색’ 어빌리티에 뭔가가 걸렸다.

훈련 상대인 니켈의 상태가 이상하다. 이제 저게 마족인지 걸레 조각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정도로 너덜너덜한데 시퍼렇게 뜬 붉은 동공만이 여전히 살벌했다.

그 동공이 서슬 퍼렇게 빛나며 발버둥을 치려는 찰나 세라가 황급히 무전으로 외쳤다.

“대상의 마기가 불안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폭주의 전조입니다!”

“전원, 내 뒤로 물러나라!”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명령에 일제히 기간트리카 기체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족의 상태가 왜 저러는지 따질 수도 없이 한시가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아아아! 나콜렙시 님. 나콜렙시 님!”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인간들이 볼 수 없는 너머의 저편을 응시하는 마족이 불쌍하다 느낀 건 세라뿐이었다.

마족을 보호해 주고자 하는 의지는 한 톨도 없지만 측은지심이라는 게 그녀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세라는 애써 불경한 그 마음을 지웠다. 누가 뭐래도 마족은 인류의 적이다.

증오스러운 인간에 의해 죽어가는 니켈은 가까이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지도자, 수마의 군주, 니켈의 왕, 나콜렙시 맙불마임의 기척을 읽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 마기를 뿜어댔다.

우리의 왕이다. 그녀 정도라면 이놈들을 전부 죽여버릴 수 있을 거다. 마왕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 거다. 언제나 나라카의 마왕 성에서 꿈쩍도 않던 분이 이곳에 있다는 건 분명 자신을 구해주고자 함일 것이다.

그것이 그 마족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잠들어라. 수마답게.]

하지만 돌아온 건 구해주지 않겠다는 나콜렙시의 건조하면서도 부드러운 명령.

살고 싶었던 마족은 그 말로 눈을 감았다. 인간들에게 비참하게 당하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

“그렇게 두진 않는다!”

핵을 억지로 폭파시켜 일대를 초토화시키려는 마족의 마지막 발악을 막는 것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몫이었다.

그녀는 오른쪽 골반에서 스스로 핵을 꺼내 마기를 집중시키는 니켈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암만 육지에서 멀어져 있다지만 이 정도의 폭발이면 여파 때문에 해변에 강한 파도가 몰려올 거다. 더군다나 해변에는 왕녀가 있다.

“아…아… 나콜렙시 님……!”

핵에 응축된 마기가 폭발한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기압’ 어빌리티로 공기를 통해 폭발하는 모든 것을 응축했다.

핵이 박살 나고 마족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찢겨 소멸했다. 생포되었어도 인간한테 허투루 당하지 않겠다는 마족의 발버둥이 소름 끼쳤다.

“중령님을 보좌하라!”

포르테가 기압으로 구겨 넣은 폭발력이 새어 나오려고 하자 다른 대원들이 옆에서 2중, 3중으로 보강했다.

세라는 그런 그들 뒤에서 혹시 모를 적을 탐지했다.

나콜렙시? 누구를 말한 거지? 혹시 저놈이 끌어들인 마족이 하나 더 있다는 의미인가? 이 근방에 마족의 반응은 없는데. 아니면 죽음을 목전에 둔 마족의 단순한 발버둥인가?

폭발이 끝나자 포르테가 어빌리티를 해제했다. 핵이 조각나 버린 마족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조금 더 써먹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연달아 몇 개의 부대에서 사용했으니 망가질 법도 하지.

“훈련은 이것으로 끝이다.”

포르테가 무전으로 통보했다. 마족을 상대한다는 의미란 이런 종잡을 수 없는 사건도 포함시키는 것이니까.

등급5의 하위 마족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약화시켜 놓은 채 훈련을 하지 않으면 부하들의 목숨이 위험하다.

무사히 훈련을 마치지는 못했지만 사망자가 없다는 것에 그녀는 안도했다. 그들이 목숨을 잃어야 할 곳은 전장이지 훈련장은 아니었다.

훈련 종료 명령이 떨어지자 대마족 결계가 사라졌다. 정비를 마친 대원들이 함대로 돌아갔다. 세라도 좀 전에 소멸한 마족이 있던 자리를 흘기며 함대로 향했다.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족을 보고 있자면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제자가 눈에 밟힌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일주일 동안 함께했던 백장미 부대와의 해상 훈련은 지금으로 끝이다.

처음으로 마족을 본 햇병아리들은 육지로 돌아올 때까지 함대 안에서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활약상에 대해 입방아를 찧었다. 그와 더불어 보좌관인 네네 슈만의 위용에 대해서도 세라의 귀에 종종 들려왔다.

“흥.”

세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네 슈만은 수마와 상성이 좋았을 뿐이다. 어빌리티가 ‘빙결’ 타입이잖아. 우리 학생들도 고작 둘이서 등급1의 마족과 등급2의 마족 둘을 해치웠다고.

물론 척도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학생이라지만 네네 슈만은 훈련을 받은 군인인걸.

그런 것으로 따지면 가장 마음이 많이 가는 렌 지미 학생도 그 전투에서 살아남았지. 심각한 부상을 당했지만 혈액 응고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역시 그때 내가 빛나는 척도를 봤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걸까. 렌 지미 학생에게도 류제 학생에 버금가는 잠재적인 힘이 존재하나.

어렴풋이 의심이 들어도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내보내기 주저된다. 곁에서 보고만 있으면 강한 척하려는 작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무능한 세라 밀로니.”

복도를 걸어가던 세라를 기다린 네네 슈만이 건방진 얼굴로 입을 비죽거렸다. 세라는 드물게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웬일이야. 말 거는 거 싫어하면서 그쪽에서 먼저 다가오다니.”

“전달 사항이 있어서 온 것일 뿐이야.”

“그럼 빨리 말해.”

“지금부터 전투 수영 훈련을 목적으로 타고시아 해변으로 갈 거다.”

“뭐어? 그런 말 없었잖아!”

이대로 훈련이 끝나 바로 막사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세라는 저도 모르게 불평을 내뱉었다.

그러다 네네 슈만에게 군인답지 못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못마땅하게 입을 다물었다. 훈련을 하고 있는 지금은 자신은 선생님이라는 변명을 못 한다.

네네 슈만도 그다지 세라와 담소를 나누고 싶었던 건 아니어서 세라의 예민한 반응에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훈련이란 명목으로 대대장님께서 대원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시는 거다. 어울리기 싫다면 이탈하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탈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있어.

들라크루아 중령이 재량껏 주는 휴식 시간이라도 훈련은 훈련이다. 훈련 중 이탈은 키아나트리체 군법에서도 중죄에 해당했다.

저 괘씸한 말은 네네 슈만이 세라 밀로니를 얼마나 탐탁지 못하게 여기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덧붙여 타고시아 해변에 제1왕녀가 있다. 기밀이지만 네 담당 학생이니까 알려주도록 하지.”

“뭐어?”

“네 군복 차림이나 자랑스럽게 보여드려. 오늘까지 백장미 부대원인 게 자랑스럽지 않아, 무능한 세라 밀로니 선생님?”

네네 슈만은 피식 비웃으며 사라졌다.

세라는 자신이 입은 짙은 녹색의 군복을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학생들 앞에서는 늘 선생님이고 싶었는데. 됐어. 어차피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거니까.

그 수영복도 군용 수영복이겠지만.

지친 세라는 방으로 가서 쉬어야겠다며 터덜터덜 몸을 움직였다. 덥다. 뭐라도 좋으니까 시원하게 몸을 씻었으면 좋겠다. 기묘한 감정도, 들어서는 안 되는 죄책감도 모두 씻겨 내려가게.

백장미 부대가 탄 함대는 순조롭게 타고시아 해변에 정박했다.

군 훈련장 다른 편에는 귀족들이 주로 이용하는 휴양지가 있다. 군의 훈련장이 옆에 있어 귀족들이 불평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이 타고시아 해변은 혹시라도 마족이 습격할 시 안전하게 보호되는 장소기도 하다.

그 이유로 대부분의 귀족들의 별장이 이 타고시아 해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대장님께서는 바닷가에 들어가지 않는 겁니까?”

“나는 쉴게. 오랜만에 배를 타니 적응이 안 되어서.”

“알겠습니다. 저희는 수영 내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언제든지 와주십시오.”

“그래, 재미있게 놀아.”

“넵!”

이번 훈련에서 친해진 세라의 소대원이 활기차게 말했다. 늑대 귀를 달았지만 하는 행동은 강아지 같다. 선베드에 누운 세라는 대원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친근하게 굴어도 불편하다.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만 상대하다가 군인들을 보자면 기분이 착잡했다. 미래의 제자들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때의 기억이 간간이 되살아나서―

“하아.”

산책이라도 할까. 세라는 선베드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소대장 노릇도 오랜만이다. 지쳤어. 이런 칙칙한 군대에서 벗어나 귀여운 제자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게 보고 싶다. 빨리 개학을 했으면.

쏴아아.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안정적이다. 날은 무지막지 덥고 고된 훈련으로 심신이 기진맥진하다.

학교로 돌아가서도 2학기 커리큘럼 짜놓은 것도 마무리해야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학생들 확인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이다.

게다가 담당 학생이 어마어마한 짓을 벌여놓아서 그걸 수습한다고 훈련 전까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것도 개학하기 전에 얼추 마무리를 해야 한다.

“누가 반 학생이 성별을 속이고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는지 모르겠다.

한 달 전, 세라의 담당 학생인 유네 나르타의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2학기부터는 유네 학생이 C동 여자 기숙사로 갈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세라는 머리가 굳어서 몇 번이고 어른스럽지 못하게 되물었다.

아니, 지금껏 남자인 줄 알았던 유네 학생이 미소년이 아니라 미소녀였다고?

반 학생들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며, C동 기숙사 이동 문제는 물론 지금까지 같은 방을 썼던 류제 학생은……. 하아. 추문이나 돌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 아이, 정말 괜찮으려나.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쌓인 세라는 이마 골을 문지르며 생각을 떨쳐내었다.

우리 반 학생들은 다들 착하니까 유네 학생이 여학생이라고 해도 싫어하지는 않을 거라 믿지만 혹시라도 불상사가 일어나 유네 학생이 상처 입을까 걱정이었다.

요즘에 계속 눈에 밟히는 렌 지미 학생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안 계시지, 유일한 보호자인 할머니도 최근에 돌아가셨지. 마족들과 얽히는 바람에 크게 다쳤었던 데다가 무슨 재주를 부리는지 늘 몸이 성할 날이 없다.

다행이라면 성격이 단순하고 활기차서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옆에서 보고 있자면 위태로워서 도저히 가만히 둘 수가 없다.

유네 학생이 C동 기숙사로 가면 류제 학생과 렌 학생이 같은 방을 쓰게 될 테니 류제 학생이 렌 학생 곁에 늘 있을 수 있다는 건 안심이 된다.

그러고 보니 여름방학 내내 둘이 학교에 남아있었는데 렌 학생의 추가시험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훈련 때문에 소식을 못 들었더니 걱정이 앞선다. 설마 추가시험도 떨어졌으면 진급은…….

“으으… 상상도 하기 싫어.”

세라가 가장 골치 아픈 일을 떠올리고 진땀을 흘렸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있는 애를 억지로 떼어놓기에도 마음 아프고 다음 1학년 1학기까지 집으로 돌려보내는 건 더욱더 할 수 없는 일이다.

제발 합격했기를. 모래사장을 산책하던 세라가 잠시 멈춰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훈련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 걱정으로 최악의 여름방학 한때를 보내고 있는 세라에게 찾아온 류제와의 만남은 가히 필연이었다.

백 년 전 로라 하놋이 예언했었던 흐름, 재경이 흔히 말하는 미연시 게임의 스토리라는 것은 세라 밀로니와 류제 신리에게 언제나 접점을 주었다.

제발 렌 학생이 추가시험에 합격했기를 하늘에 간절히 바라던 세라의 발치로 데구루루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치 볼이 굴러왔다.

꽤나 먼 곳에서 날아온 것인지 사람이 콩만큼 보이는 곳에서부터 누군가가 성큼성큼 뛰어왔다. 아마도 공의 주인인 듯하다.

날이 더우니 아직 타고시아 해변도 인기가 있구나. 세라가 자신의 발을 툭 친 비치 볼을 들어 올렸다.

휴양지로 유명한 타고시아 해변의 먼바다에서 마족을 상대로 한 훈련이 있었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겠지. 아까 폭발하는 마기를 잠재우지 못했더라면 여기는 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중령님께서 애쓰신 덕분이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덩치가 큰 남자가 세라의 눈앞까지 도착했다. 축축하게 물에 젖어있는 검은색 앞머리가 미역처럼 들러붙어 저래가지고 시야가 보일까 걱정이다. 우리 반 학생 중에서도 저런 학생이 있지. 외모도 훤칠한데 굳이 앞머리로 답답하게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아이가.

유별나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저런 스타일이 흔한가?

“류제 신리 학생?”

비치 볼만 보고 달려오다가 세라의 손에 들린 공을 가져가려던 류제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젖은 앞머리 새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말한 것인데 정답일 줄은 몰랐다. 세라의 눈에도 별이 튀었다.

“세라 선생님? 훈련 끝나신 거예요?”

“네? 훈련이라니… 제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 아까 왕녀가 말해줬어요. 잘만 하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와. 진짜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랬군요. 저도 니냐롯트 학생이 여기 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같이 온 건가요?”

다음 왕위 계승자인 왕녀 측에서도 귀족파를 신경 써서 일부러 백장미 부대의 훈련이 있는 이곳에 뜨거운 감자인 류제를 데리고 휴가를 온 건가 싶었던 세라는 류제가 벌써부터 정계에 휘둘리고 있나 걱정스러웠다. 다행하게도 류제는 고개를 저었다.

“왕녀와는 여기서 만난 거예요. 저는 렌하고 같이 왔어요. 우연히 여행권을 얻었거든요.”

“렌? 렌 학생과요? 오늘 추가시험이었죠? 그럼 렌 학생은 추가시험에 합격한 건가요? 설마 위로 여행인 건…….”

“역시 선생님은 모르셨구나. 하기야 오늘 시험 쳤으니까. 당연히 축하 여행이죠. 걱정 마세요.”

가장 걱정했던 학생이 당당하게 추가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리에 세라는 지금껏 마음 반절을 차지했던 스트레스가 싹 가셨다.

세라는 선생님의 위엄이라는 것도 잊고 칠칠치 못하게 웃으면서 류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말 다행입니다. 바빠서 신경 못 써주고 있다는 게 얼마나 마음에 밟혔는지……. 그것도 늘 렌 학생 곁에 있어주던 류제 학생 덕분이겠죠?”

“네? 아… 뭐…….”

말의 내용도 부담스럽고 가까이 다가오는 세라도 부담스럽다. 류제가 뒤로 주춤거렸다. 세라가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도 처음 본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도 어색하다. 세라 선생님은 늘 동요하지 않고 강하고 꿋꿋하게 서있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정도로 렌이 추가시험에 합격한 게 기쁘신 거겠지?

“류제, 이 변태! 여기까지 와서 치근덕거리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그분에게 실례잖아.”

“치근덕거린 적 없어!”

힘 조절을 못 한 류제 때문에 공이 멀리까지 날아간 것인데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승부욕 강한 비키가 참지 못하고 기어코 류제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경기를 속히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다 류제의 앞에 서있는 세라를 발견한 비키가 깜짝 놀라 말 꽁지를 삐쭉거렸다.

“세라 선생님?”

“비키 학생? 세상에, 정말 반 친구들과 다 함께 놀러 오기라도 한 건가요?”

“우…우연이에요! 누가 저런 변태랑. 선생님은 무슨 일이신가요? 그 수영복은…….”

“저는 이 근방에서 정기 훈련이 있었습니다.”

“아하! 그래서.”

비키는 처음 보는 세라의 군용 수영복 차림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기저항을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한 수영복은 몸의 라인이 전부 드러나서 가려져 있어도 오묘하다. 거기에 가슴팍에 달려있는 백장미 부대의 마크. 비키의 눈이 흥미로움으로 고조되었다. 뚫어질 것 같은 시선에 세라의 볼에 홍조가 떴다.

“부끄럽네요.”

“아녜요, 멋있다고 생각해요. 정말로!”

“왜? 뭐가? 세라 선생님 수영복이?”

세라가 입고 있는 것이 키아나트리체 군용 수영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류제는 납득이 안 되는 눈초리였다. 수영복이 그냥 수영복이지 멋지다랄 게 따로 있나? 자기는 살갗을 다 드러내고 있으면서 가리고 있는 세라 선생님이 멋지다고 말하는 건 뭐지?

둔한 류제를 비키가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백장미 부대 마크가 달린 키아나트리체 군용 수영복의 멋짐을 모르다니. 상대할 가치도 없다.

“넌 평생 몰라도 돼. 선생님, 선생님은 그럼 지금 혼자 계시는 건가요? 훈련 끝난 건가요?”

“예? 아뇨. 호호호. 쉬는 시간이라 잠시 산책 나온 거예요. 오랜만에 훈련하려니 익숙하지 않아서.”

물론 쉬는 시간이 아니라 전투 수영 훈련 시간이지만 전투 수영은 옛날에 마스터했고 비공식적으로 쉬는 시간이라 타고시아 해변만 벗어나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으니 세라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그럼 세라 선생님도 같이 하지 않을래요?”

“뭘요?”

“비치발리볼이요! 지금 짝이 부족하던 참이었어요.”

비키가 어서 가자며 세라를 끌었다.

짝이 부족하다니? 엉겁결에 붙잡힌 세라는 어리둥절할 새도 없이 비치발리볼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경기장에는 류제가 공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에서부터 아주 잘 아는 얼굴까지 전부 반갑고도 어색하다.

여자 수영복 차림인 유네는 선생님을 보고 화들짝 놀라 가슴을 가렸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렌 군하고 류제 군이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바람에 막 그들에게 여자란 게 밝혀진 직후다.

“으앗! 세…세라 선생님! 여기에는 무슨 일로…….”

다른 사람들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까 눈치를 보느라 불안한데 세라 선생님까지 오시다니. 심장에 무리였다.

“유네 학생?”

그녀의 걱정거리 중 하나였던 남장 학생 유네가 여자 수영복 차림으로 친구들 사이에 숨어있었다.

유네 학생, 이 친구들에게는 여자란 걸 벌써 밝힌 건가?

세라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서 있자 비키가 숨어있는 유네를 꺼내서 어깨를 당당하게 펴주었다.

“비…비키 양.”

“선생님, 알고 계셨어요? 유네 여자였대요. 사정이 있어서 남장을 했다가 2학기부터 다시 여자로 돌아간다고 했어요.”

비키도 이런 차림의 유네를 봤을 때 충격적이었지만 이제는 유네가 여자란 사실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였다.

“후후, 물론 선생님은 알고 있었지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만큼 심정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밝히기로 결심했다니 장하군요. 모두들 유네 학생을 탓하지 말아 주세요.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세라가 편을 들어주자 유네의 안색이 안도의 빛으로 변했다.

비키는 것 보라며 웃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비키는 유네가 여자라는 사실이 차라리 더 친근해서 좋았다. 어빌리티 콤비도 짰는데 같은 여자라고 하니 왠지 전보다 마음도 잘 맞을 것 같다.

“고…고마워… 비키 양.”

유네가 쑥스럽게 감사 인사를 했다. 여자란 걸 밝혀도 친구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자니 걱정이 폈는지 세라가 유네 머리칼을 도닥여 주었다.

“그런데 그쪽은…….”

처음 보는 여성과 어린아이를 가리키며 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부분은 류제가 끼어들어 설명해주었다.

“제 고아원 수녀님과 막냇동생입니다. 저 보러 아가타에 올라오셨다가 같이 놀러 오게 됐어요.”

“어머,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항상 공고문으로만 이야기했지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담임을 맡고 있는 세라 밀로니라고 합니다. A동 기숙사 사감이기도 합니다. 류제 신리 학생의 보호자분 맞으시지요?”

“네에, 루나 에펜시타르라고 합니다. 세상에, 누구신가 했더니 우리 류제의 담임 선생님이셨군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반가워요.”

루나가 세라와 어른스레 악수했다. 역시 여기에 온 건 주님의 인도였어. 류제의 친구들에 이어 선생님까지 만나다니. 이 이야기를 들으시면 신부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이야깃거리가 잔뜩 있어 다들 기뻐할 거야.

“동생도 귀엽네. 몇 살이니?”

“아세미는 10살이야.”

“아세미라고 하는구나. 오빠 보러 온 거야? 장하기도 해라.”

칭찬을 받자 관심을 주는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단순한 아세미는 그저 좋아서 실실 웃었다.

그에 이어 세라는 알은척할 타이밍을 놓쳐 뻘쭘하게 서있던 렌에게 다가갔다. 세라에게 추가시험 합격했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말을 못 꺼내고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 빤히 보였다.

“렌 학생, 추가시험 합격했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려요. 선생님은 참으로 기쁩니다.”

“그…그깟 거 껌이죠.”

재경이 귓불을 붉히며 괜히 튕겼다. 세라는 기특해서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에 젖어서 가르마가 엉망이 된 엷은 색 머리카락에서 축축함이 묻었다.

“니냐롯트 학생과 루이나 학생도 있었군요. 이야기는 들었다만 너무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 주세요. 물론 무슨 일이 있다면 저나 백장미 부대가 당신을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직 훈련 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곳에 함께하는 것이 실례가 되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그럴 리가요. 사랑하는 제자들이 부르는데 와야지요. 어머, 미나 학생도 있었군요. 별일이네요.”

“선생님, 오랜만이에요. 날이 정말 덥지요?”

책을 좋아하고 도서위원이니 실내파라는 이미지가 있는 미나도 잘 어울리지 않던 멤버들과 타고시아 해변에 와있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인도하지 않아도 스스로 청춘을 찾아 즐기고 있었구나.

아무리 제립학교 학생들이 인류 최후의 검이라 지칭되지만 한 번뿐인 학교생활인데 팍팍한 훈련보다는 이런 일들을 더 많이 경험했으면 하는 게 세라의 선생님으로서의 욕심이었다.

“어서 시합 시작하자! 세라 쌤까지 왔으면 아세미도 낄 수 있잖아.”

빨리 경기하고 싶었던 재경이 류제에게서 비치 볼을 빼앗아 하늘 높게 들었다. 세라에게도 인정받아서 얼굴은 물 만난 개처럼 활기차다.

“그럼 팀을 다시 짜야겠네.”

세라 쌤이 오기 전까지 플레이했던 비치발리볼 미니 게임 튜토리얼은 끝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니 게임에 들어가는데 1차전은 세라 선생님이 끼어서, 2차전은 무서운 아줌마 둘이 끼어들어서 게임을 시작한다. 지금은 세라 쌤이 들어왔으니 1차전이다.

“류제 팀! 루이나, 왕녀님, 미나, 아세미! 렌 팀! 나, 수녀 언니, 유네, 세라 선생님!”

체격별로 공평하게 팀을 짠 비키가 앞장서 코트로 사람을 나누었다. 짝이 맞지 않아 방치되었던 아세미는 꿈에 그리던 공주님과 한 팀이라는 사실에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었다.

누군가는 여기서 렌이 들어갔는데 짝이 맞춰지는 게 이상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비치발리볼 게임에 모든 것을 망치려고 드는 하찮은 렌 지미는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우연찮게 타고시아 해변에 온 렌 지미는 비치발리볼을 하려던 주인공 류제네 무리에 끼어들어 장난을 치다가 아세미를 골탕 먹인다. 그러던 중 그들이 비치발리볼을 하려던 것을 알게 된다.

렌 지미는 게임 내에서 류제의 라이벌을 자처하니까 하찮은 비치발리볼 게임이라도 류제를 앞에 두고서 승부욕이 날 법도 했다. 그런 경위로 렌 지미가 게임 멤버로 들어가게 된다.

암, 그렇고말고. 미니 게임에서 렌 지미는 능력치는 낮지만 파워는 괜찮은 캐릭터라고. 튜토리얼도 나름대로 선방했고.

“안면 리시브는 사양이닷!”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미니 게임 1차전이 시작했다. 처음으로 서브를 넣은 류제의 공격을 받은 재경이 외쳤다. 체육대회 때 신나게 안면 리시브를 했더니 비치발리볼은 껌이다. 내 능력치를 얕보지 말라고!

하지만 역시나 상대는 하찮은 렌 지미. 실수로 배구할 때 감각으로 공을 올렸더니 멀리까지 뜨고 말았다.

공이 공기로 채워있어서 타격감이 구려. 재경이 거나하게 홈런을 날리자 같은 팀 비키가 버럭 소리 지르며 타박했다.

“비치 볼은 가벼우니까 힘 조절을 해야 한다고 아까부터 말했잖아, 이 바보야! 류제랑 똑같은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해?”

“아…알고 있다고! 좀 실수한 것 가지고 쪼잘거리긴!”

파울당할 뻔한 공을 비키가 간신히 주워서 경기장 내로 돌려놓았다.

마지막 공격의 주인은 가볍게 뛰어올라 스파이크를 날린 세라 밀로니. 상대 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은 그녀의 군인으로서의 본능이었다.

“윽, 아세미 조심해!”

“흐갸앙!”

일뽕 미연시에서나 볼 법한 이상한 비명을 지른 아세미가 세라의 스파이크를 몸통으로 받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고작 10살짜리 꼬맹이가 죽자사자 같이 게임하겠다고 덤벼들더니 실력은 저 모양이다. 하기야 성인과 어린아이의 대결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적당히 봐줬다고 생각했던 세라는 괜히 미안해졌다. 괜찮니? 라고 물어도 아세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라를 노려보기만 했다. 배신당한 듯한 눈빛이다.

“저하!”

아세미가 온몸으로 적당히 올린 공을 받아 왕녀에게 보낸 루이나와 그걸 친 왕녀의 콤보는 단연 완벽했다. 괜히 수년을 함께해 온 사이가 아니라는 듯 깔끔한 연계 공격에 유네가 속절없이 당해서 류제네 팀 1득점.

“우아아… 미…미안해! 받으려고 했는데.”

“괜찮아. 1점 따위 금방 따라잡아.”

“야. 비키 너, 나랑 유네랑 대하는 태도가 몹시 다르다? 내가 실수했을 때는 곧 죽일 듯이 쏘아붙이더니.”

“당연한 거 아냐?”

1점 따위 금방 따라잡는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 비키의 말대로 다음 순서에 순조롭게 득점을 따낸 재경이네 팀은 상품 없이 승부욕만 걸린 싸움에 기를 쓰고 치고받았다.

물론 어린 아세미나 운동신경이 부족한 유네같이 도움은 별로 안 되는 팀원 때문에 족족 구멍이 났지만 그것도 전략의 일부라는 듯 그들은 핸디캡들을 극복해 나갔다. 기간트리카 팀 대결하는 것같이 팀 간의 심리전이 고도의 긴장감을 유발했다.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놀이이니 밸런스에 맞게 적당히 어울리기로 한 세라는 보조만 하고 렌 팀의 공격은 거의 비키와 재경의 차지였다.

비키와 재경은 의외로 이런 스포츠에서는 죽이 잘 맞아서 깐죽깐죽 류제네 팀의 공격을 받아내는 데 거침없었다.

“마지막이다!”

“그렇게 안 둬!”

류제네 팀이 1점 앞서고 있는 상황. 모든 힘을 다해 류제가 스파이크를 날렸다. 빠른 공격이 화살처럼 모래로 향했다.

재경은 모래사장에 몸을 날려 공을 받으려다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비키와 사이좋게 얼굴을 부딪쳤다. 죽이 잘 맞는 것이 결국 이렇게 돌아올 줄은 누가 예상했을쏘냐.

“끄으으윽, 아파!”

공이 재경과 비키 중간에서 툭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제법 큰 소리가 나서 경악한 류제가 경기를 중지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지간히 돌머리인 재경 때문에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치던 비키가 얼얼한 이마를 붙잡고 재경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이 멍청이. 뭐 하는 거야!”

그러나 비키보다 영 좋지 못한 곳에 부딪혔는지 재경은 그대로 꽥 정신을 잃고 모래사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류제가 렌의 고개를 하늘로 향하도록 돌리니 헤롱헤롱 쌍코피를 줄줄 흘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난감해진 류제가 진지하게 비키에게 말했다.

“비키, 너도 어지간히 돌머… 끄악!”

비키가 괜한 소리를 하는 류제에게 니킥을 날렸다. 이때다 싶은 아세미가 류제를 괴롭히지 말라며 비키한테 대들었다.

“많이 다친 거야? 어머머. 렌아, 괜찮니?”

가벼운 접촉사고가 난 줄 알았는데 사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그들의 보호자인 루나가 다친 아이들에게 뛰어왔다.

“렌 학생, 정신 차리세요. 이게 몇 개인지 아시겠어요?”

세라는 여기서도 또 이렇게 되어버린 불쌍한 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렌의 상반신을 받친 그녀가 손으로 ‘힐링’ 어빌리티를 발현했다.

기묘한 삼각관계를 유지 중이던 류제와 비키, 아세미도 쪼르르 달려와 재경을 치료하는 세라의 어빌리티를 구경했다.

“이것이 담임 선생님의 어빌리티인가요?”

“네, 저는 ‘힐링’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워낙 혈기 왕성하다 보니 이럴 때 도움이 되네요.”

어빌리터라고는 류제밖에 보지 못했던 루나와 아세미는 기절한 재경의 코에서 피가 멎자 신기하다며 눈을 빛냈다.

오늘은 잘해 내나 싶더니 이걸로 렌 학생은 리타이어인가. 다칠 일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지. 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렌! 언제까지 누워있을 거야? 너 때문에 우리 팀이 졌잖아!”

류제에게 진 상태로는 아직 만족할 수 없는 비키가 이럴 수는 없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렌 지미가 다치든가 말든가 관심 없는 루이나는 어느새 양산을 꺼내 왕녀에게 씌워주고 있었다. 반대 코트에 서있던 니냐롯트는 세라의 무릎 위에서 눈을 감은 재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제가 렌 학생의 상태를 봐주고 있을 테니 여러분들은 시합을 계속해 주세요.”

“렌은 괜찮나요?”

“충격을 받고 기절한 것일 뿐입니다. 금방 정신을 차릴 거예요.”

세라가 재경을 안아 들고 근처에 있는 빈 파라솔로 향했다. 아쉬웠던 류제는 애꿎은 손만 내밀다가 불만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앞머리에 가려져서 그 얼굴을 본 사람은 미나밖에 없었다.

“이게 누구신가. 밀로니 중위가 아닌가.”

파라솔로 향하던 세라와 마주친 사람은 자신만만한 표정의 포르테 들라크루아였다.

대원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자기는 어디에 다녀온 모양인지 포르테는 군용 수영복이 아닌 군복 차림이었다. 그녀의 뒤에는 자석처럼 붙어 다니는 네네 슈만도 있었다.

여기서도 네네 슈만과 마주치자 세라는 질렸다는 듯이 눈가를 실룩거렸다. 네네 슈만도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세라를 흘겼다.

“충성.”

“그래. 충성. 그런데 그 아이는 뭐지? 눈에 많이 익군.”

“저번에 알라마니 때 수학여행을 왔던 학생입니다. 중령님과 바뀌었던.”

샤워장에 돌연 등장해서 응징해 준 기억이 있던 네네 슈만이 속삭였다. 그때서야 그 기억이 났는지 포르테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아, 그 아이. 류제 신리의 친구 놈이 아닌가. 하하하하. 설마 이놈 또 기절한 건가? 눈을 뜨고 있는 꼴을 못 보는구나.”

“들라크루아 님.”

오랜만에 보는 포르테의 위용에 류제가 알은척을 했다.

류제 신리? 오호라, 셀로니아가의 여식에 반푼이 왕녀와 그 친위대 흉내를 내는 애송이도 있잖아. 여기에 다 모여있었나. 왕녀의 짓인가? 귀여운 짓을 벌이는구만.

“세라 밀로니 중위, 지금은 전투 수영 훈련 시간이 아니었던가? 무슨 상황인 건가 설명하라.”

“좀 더 수영하기 어려운 파도가 치는 장소를 찾던 중에 학생들을 만나서 잠시 어울리던 중이었습니다.”

“흥. 뭐, 좋다.”

세라는 백업으로 부대를 도와주러 온 것일 뿐이지 진정한 백장미 부대원이 아니니 신경 쓸 바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짧은 발언에 세라는 학생들 앞에서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담당 학생들 앞에서 이런 취급은 자존심이 상했다.

어찌 되었건 오늘까지는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자신의 상사인 세라는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그녀와 마주치다니 망했다며 징계를 예상했다.

훈련에서 이탈한 건 아니지만 이탈과 다름없는 행위이지 않은가. 네네 슈만이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뒤에서 날 비웃은 것도 보기 싫었다.

“너희들은 뭘 하는 중이었지? 비치발리볼? 꽤나 앙큼한 짓을 하는구나. 그럴 나이이긴 하지.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재미있다고들 하던데.”

“그…그래도 저희들로선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시…시…실례가 안 된다면 들라크루아 님도 저희들과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드…들라크루아 님의 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포르테와 접점을 가지고 싶었던 비키가 비치 볼을 들이밀며 무리수를 두었다. 류제를 비롯하여 니냐롯트까지 모두 놀라 숨을 죽였다.

“내 실력?”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건방진 소리를 한다. 포르테가 기묘한 시선으로 비키를 내리깔았다. 비키 셀로니아. 존경했던 셀로니아 장군님의 여식. 저번보다 분위기가 변했군.

“중령님, 받아주실 필요 없으십니다.”

“아니, 좋다.”

전설로만 들려오는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이 비치발리볼 제의를 흔쾌히 수락하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모든 이들로 장내가 술렁거렸다.

포르테는 괘념치 않았다. 후배들이 얼마큼의 운동 센스가 있는지도 보고 싶고, 셀로니아가에는 빚진 것이 많으니 잠깐 어울려주는 거라면 나쁘지 않을 거다.

“중령님!”

“내 결정에 토 달지 마라, 슈만 중위. 자, 나는 어디로 가면 되지?”

네네 슈만은 가끔 영문 모를 행동을 하는 포르테의 변덕이 불안했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상사였기에 뒷말은 내뱉지 않았다. 이게 다 세라 밀로니 탓이다. 네네 슈만은 세라를 노려보았다. 세라와 네네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흥, 무능한 세라 밀로니. 넌 거기서 잠자코 구경이나 해.”

“내 제자가 다쳐서 그런 거잖아. 좋아서 구경하는 거 아니야.”

“변명하지 마. 보조 역 주제에 학교에서 기간트리카나 가르친다고 제가 뭐라도 된 양.”

학생들 앞이라서 화를 낼 수도 없고. 세라는 그녀를 모욕하는 네네 슈만의 주둥아리를 다섯 대 정도 때리지 않으면 화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걸 본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턱을 까딱거리며 그들을 불렀다.

“슈만 중위와 밀로니 중위는 동기라고 했던가? 그거 재미있군. 둘 다 내 상대나 돼라.”

“네? 하지만 중령님!”

“아니면 저런 애송이들과 내가 동등하게 대결하라고 하는 거냐?”

포르테의 당당함은 그녀의 월등한 강함을 대변했다.

네네 슈만이 세라 밀로니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안 봐도 뻔하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부른 포르테는 단 한 문장만으로 도발에 성공했다.

그녀가 애송이 취급한 제립학교 학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어빌리티를 안 쓰고 경기할 텐데 군인 둘이 있어야 엇비슷할 거라고 말하는 오만함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세미야, 아세미가 렌 오빠를 보살펴 주도록 하렴.”

“히이잉… 싫은데.”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낀 이상 고작 비치발리볼조차 기간트리카 졸업시험에 비견되는 진지한 시합이 될 게 뻔하니 대충 분위기를 읽은 루나가 아세미를 재경이 누워있는 파라솔로 보냈다.

아세미도 처음 보는 무서운 언니들과 비치발리볼을 할 자신이 없어서 처음에는 칭얼거렸지만 얌전히 말을 들었다.

물론 기절한 재경을 보살펴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눈을 빙글빙글 돌리며 기절한 재경의 몸에 모래를 발로 차서 불평을 표했다.

“너, 너, 너, 너. 반대 코트로. 여기는 나와 저 꼬맹이, 유약한 안경잡이, 허여멀건 계집, 흉내나 내는 건방진 애송이가 맡겠다.”

“꼬…꼬맹이…….”

“안경잡이…….”

“날더러 왕녀 저하의 적이 되라는 소리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수 없다!”

졸지에 꼬맹이 소리를 들은 유네, 고작 인간에게 유약해 보인다며 폄하당한 미나, 허여멀건 계집이 자기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 루나, 왕녀의 적이 되는 건 용납 못 하는 루이나가 순서대로 반응을 보였다.

포르테는 그들이 뭐라 하건 관심 없는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어서. 나는 바쁘다. 네까짓 것들과 놀아줄 시간이 얼마 없단 말이다. 시간 낭비하고 싶나?”

“루이나.”

니냐롯트는 무슨 생각인지 루이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왕녀라고 그녀를 봐주거나 하지 않을 거다.

루이나는 포르테의 무례함이 언짢았지만 니냐롯트의 부탁을 받고 발을 구르며 반대편 코트로 향했다.

“비키의 막무가내가 통하다니.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이야. 그래도 복수할 기회다.”

“뭐래. 들라크루아 님이 상대해 주시는 건 나야.”

수학여행 때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포르테에게 완전히 참패한 비키와 류제는 포르테의 두 번째 대결이 지금임을 상기하며 한여름 투지를 불태웠다.

그때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마왕을 죽인 영웅의 휘광을 가릴 정도로 위대한 군인이었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비치발리볼을 할 기회가 어디 또 있겠냔 말인가.

“에에… 내가 저 분과 한 팀?”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벅찬 무서운 사람과 무려 같은 팀으로 비치발리볼 게임을 해야 하다니. 유네는 그것부터가 용량 초과라서 뻣뻣하게 굳었다. 렌 구우운……! 나 좀 살려 줘!

“자, 시작한다. 봐주는 것 따위 없으니까 후회하지 말라고.”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시작된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첫 번째 서브. 그 공격을 받을 준비를 마친 상대 팀 류제, 니냐롯트, 네네, 세라, 비키.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쟁쟁한 팀원들이 승부욕을 불태우며 무시무시한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살인 서브를 받을 준비를 했다.

“끄으응, 할머니 나 이제 더 못 먹어…….”

“읏챠.”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고 방치되어서 심심한 아세미는 자신처럼 뒷전으로 보내진 재경의 몸을 모래사장에 파묻기 시작했다. 가위를 눌렸는지 올라간 모래가 많아질수록 재경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으랏차!”

“류제! 받아, 받아!”

아세미가 모래사장에 재경의 다리를 하나씩 묻을 때마다 비치발리볼의 승부가 결정되었다.

“올렸다!”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네네 슈만과 세라의 점수 따기 대결―

“이 무능한 세라 밀로니! 공을 도대체 어디로 보내는 거야?”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야!”

도움이 안 되어서 방치된 유네와 루나―

“후아아앙… 제발 끝났으면 좋겠다.”

“저분들은 뭐 하시는 분들이니? 기운이 참 좋구나.”

인간들의 영웅과 팀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기분 나빴지만 지고 싶지는 않은 미나―

“내가 왜 이런 걸!”

가볍게 즐기는 게임에서 어느새 기를 쓰고 덤벼드는 시합이 되어버렸다. 전설로 남을 비치발리볼 게임의 관중은 아세미뿐이었지만 그녀는 토닥토닥 재경의 몸뚱아리 위에 제멋대로 작품을 만드느라 치열한 혈투는 안중에도 없었다.

재경은 누군가 자기를 짓누르고 있다는 기분 나쁜 감각에 시달리며 끙끙거렸다.

“다 됐다. 아세미 자신작 완성! 류제 오라버니한테 보여줘야지.”

“흥, 이 정도군.”

“너…너무 강해.”

아세미가 얼굴 아래를 모래로 뒤덮어 재경을 한 마리의 거북이로 만들어놓았을 때쯤 비치발리볼 게임이 끝났다.

“83판 72승. 흠, 11패나 하다니 나도 많이 죽었군.”

거의 혼자서 공격했으면서 현역 군인인 네네부터 가장 강한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류제까지 전부 한데 모아서 야무지게 발라버린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후련한 얼굴로 스트레칭을 했다.

유네와 루나는 중간부터 빠져서 경기장 뒤편에 앉아 종알종알 떠들어대고 있었고, 루이나는 왕녀를 공격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재기 불능이 되었다.

니냐롯트는 포르테의 압도적인 경기력에 피곤한 기색이었다. 미나는 암만 그녀가 사천왕이래도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괴물이라며 간신히 웃는 낯을 유지했다.

백사장이 노을과 같은 색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 * *

“우아악!”

정체불명 인도산 코끼리가 치렁치렁 장신구를 자랑하며 지근지근 밟는 꿈을 꾸다 번쩍 눈을 뜬 재경이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꿈에서처럼 밧줄로 꽉꽉 묶인 듯이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재경이 흠칫 영문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뭐…뭐야? 이게 뭐야? 왜 몸이 안 움직여?”

잘 움직이지도 않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보이는 건 옆에서 쪼그려 앉아 그를 쳐다보는 유네와 비키의 시선이었다.

“앗.”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재경이 깨어나자 두 사람 다 흙투성이가 된 손을 멈추고 찔린 눈동자를 돌렸다.

재경은 자신이 어느새 모래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버둥거렸다. 그래 봤자 모래로 단단히 가둬졌기 때문에 거북이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만 흔들거릴 뿐이었다.

“뭐야. 이거 뭐냐고! 이거 빨리 치워!”

“바보. 우리한테 요구하지 말고 혼자서 나와봐. 그러기에 누가 기절하래?”

비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기껏 아세미가 렌의 위에 쌓아 올린 거북이를 멋들어지게 꾸몄다 싶었더니 완성도 전인데 일어날 건 뭐야. 시시하게.

“으으, 못 움직이겠어. 빨리 이거 풀어줘! 유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렌 군이 아까 비키 양하고 부딪혔을 때 기절해 버렸지 뭐야. 그래서 안전하게 이쪽에다가 옮겨놨는데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 아세미 양이 멋진 거북이를 만들어놓았더라구.”

“뭐어?”

기절? 또? 재경은 남산만 하게 솟아오른 모래를 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내가 또 기절을 했다니. 한국에서 한 번을 안 하던 기절을 이 동네에서만 몇 번이냐. 이놈의 기절, 질려 죽겠다. 게다가 내가 기절한 사이에 아세미가 나를 거북이로 만들어놓았다고? 그 건방진 꼬맹이가 진짜!

“헤헤헤. 렌 군,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거북이 같아.”

옆에 쭈그려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던 유네가 재경의 속도 모르고 실없이 웃었다.

거리가 거리인지라 엄할 정도로 다리 사이가 전부 보이는데 우연찮게 그것을 목격한 재경은 히익, 미쳤다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류제는 몰라도 나는 이런 이벤트는 사양이다!

“뭐…뭐든 빨리 꺼내줘! 야! 비키! 유네!”

“알아서 나와.”

“거북이 렌 군 너무 귀여워.”

자기랑 부딪혀서 지금까지 기절한 게 괘씸했던 비키는 물론이고 유네까지 재경의 편이 아니었다. 이 못된 것들이 정말!

“렌, 일어났어?”

마지막으로 바닷가에 들어갔다 나온 류제가 물을 뚝뚝 흘리며 재경에게 다가왔다. 찰팍찰팍 류제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모래사장에 습기가 어렸다. 뚝뚝 수영복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재경의 귓가에 떨어졌다.

“거기가 그렇게 아늑해?”

“아늑해서 이대로 있는 거 아냐! 잘 왔다, 류제. 당장 날 여기서 꺼내줘!”

“머리는 안 아프고? 세상에, 비키랑 부딪혀서 쌍코피 흘리고 기절이라니. 이걸로 비키가 너보다 돌머리라는 게 증명… 으악!”

“닥.쳐.”

류제의 면상에 주먹을 날린 비키가 으르렁거렸다. 류제는 맞아서 뻘게진 콧잔등을 문대며 유네처럼 옆에 쭈그려 앉았다.

“시원해 보인다, 렌.”

류제도 자신을 꺼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자 재경이 징징 우는 척했다. 내 마지막 희망이……!

“꺼내줘!”

“그건 어렵지 않지만… 이거 멋진 작품이란 말야. 부수기 아까워서 그래.”

“그깟 거 알 게 뭐야! 작품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아세미가 틀을 잡고, 비치발리볼에 참여했던 히로인들이 한 명 두 명 참여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 타고시아 해변의 모래 거북이는 이대로 망가뜨리기 아쉬울 정도로 수작이었다. 모래 거북이 만들기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뭐야? 열심히 만들어줬는데 기뻐하지 못할망정. 바보 렌 주제에 너무해.”

“해달라고 빈 적 없거든?!”

“하여튼 부수는 건 절대 안 돼. 평생 거기서 살아!”

유네와 함께 마지막 공동 작업으로 멋진 장식물을 만들었던 비키가 고개를 획획 저었다. 처음으로 모래사장에서 만들어본 역작인데 이걸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재경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날도 이제 어둑어둑해져서 삼십 분만 더 있으면 완전히 해가 질 것 같은데 날더러 평생 여기 있으라고? 미쳤냐?

비키는 설득하기를 포기하고, 여름방학 내내 둘이서만 있으면서 좀 칭얼거리면 류제가 마지못해 부탁을 들어준다는 사실을 용케 알게 된 재경이 류제에게 마저 냥냥거렸다.

“류제에에~ 너는 날 꺼내줄 거지?”

“흐음, 어떻게 하지? 나도 아깝다는 생각에는 동감이거든.”

“왕녀님께 말해서 여기서 저녁을 먹는 건 어때? 렌 군, 걱정 마. 내가 고기 구워서 입에 넣어줄게.”

“시잃어!”

재경이 제발 그것만은 봐달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유네까지 저러다니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편 하나 없다.

재경이 필사적으로 몸을 꿈틀꿈틀거리니까 거북이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어어, 하고 비키가 아쉬운 소리를 내었다.

“흠, 이렇게 하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류제가 살살 재경의 머리맡을 파기 시작했다.

재경은 류제가 이제 자기 머리까지 파묻는다며 기겁했다. 대충 류제가 어떻게 할 것인지 각이 보인 유네와 비키는 충치 뽑는 애처럼 비명을 지르는 렌을 가만히 구경했다.

“됐다. 이대로 빼면 형태는 안 무너지지 않을까?”

“동전 탑 밑에 깔린 테이블보를 빼는 느낌으로? 류제 주제에 머리를 썼네. 칫. 그래도 여기에 바보 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인데.”

“칫이긴 뭐가 칫이야? 뭐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내 머리까지 묻는 건 용서 못 한다?”

“자, 머리에 힘 단단히 줘.”

“뭐? 끄아악!”

모래 거북이 무너지지 않게끔 뱀이 탈피하는 것처럼 재경을 끌어내자 바다거북의 가운데 부분이 살짝 내려앉았다.

좀 어정쩡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모양을 유지하는 모습에 비키와 유네가 오오, 하고 박수를 치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테이블보 빼기 성공이다.

“너네 전부 죽었어…….”

치욕스러운 꼴이다. 류제에게 머리를 붙잡힌 재경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를 탐했다. 머리도 몸도 죄다 모래투성이라 찝찝해 죽겠다. 나는 왜 기절에서 이딴 꼴을 당해야 하는 거야? 비치발리볼은? 일러스트는?

“세라 선생님은?”

“훈련 때문에 다시 가셨지. 그거 알아? 우리 아까 전까지 백장미 부대의 ‘그’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님하고 비치발리볼 게임 한 거. 거의 그분 혼자서만 경기했는데 우리들 완전히 참패했어. 아직도 갈 길이 멀더라.”

“맞아, 난 그분하고 같은 팀이었는데 나한테 공이 전혀 안 오더라.”

유네가 쓸모없는 취급이 씁쓸해서 볼가를 긁적거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거북이에서 빠져나온 재경이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귀에도 모래가 들어갔는지 서걱서걱 환청이 들려 불쾌해 죽겠다.

어차피 이번 미니 게임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아줌마가 왔다는 걸 보면 비치발리볼 게임까지는 잘 온 것 같은데. 다음엔 뭐였더라.

“바다에 들어가서 모래 좀 털고 나와. 안 그러면 나중에 숙소 샤워장이 모래 바다가 될 거야.”

“그래야지. 으으… 머리가 지끈지끈거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 재경이 비키와 부딪혔던 부분을 문질렀다. 아직도 얼얼했다.

원래 스토리에서도 렌 지미가 기절을 하던가? 생각하다가 뭔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던 재경은 렌 지미의 챕터마다 존재하는 불행에 대해서 문득 떠올렸다.

맞아. 렌 지미는 원래 비치발리볼 게임을 하다가 비치발리볼 경기장으로 걸어오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공을 던져버리고, 그 공을 주워서 돌려주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풀파워 서브를 정통으로 맞고 기절했었지.

렌 지미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그 부하 네네 슈만이 경기장에 난입함으로써 리타이어되고 누군가의 손에 끌려가 어딘가에 적당히 방치된다.

류제의 여동생 포지션인 아세미가 그들이 경기하는 동안 렌 지미 위에 모래성을 만들고, 경기가 끝나고 모두들 렌 지미를 잊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가 잠이 든다.

렌 지미는 그대로 아침까지 방치된 채 잠이 들어 사천왕 니켈과 서큐버스의 합작인 꿈나라 세계에 엮이게 되고…….

주인공인 류제와 히로인 일동이 모든 일을 해결하고 난 후 눈을 떠보니 파도가 얼굴까지 차있는 것으로 챕터 마무리…였었나?

챕터 에필로그로 바닷가에서 정신을 차렸던 렌 지미의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면 그랬던 거 같은데. 아니, 백 퍼센트 그랬어! 이건 확실해! 나 갑자기 그 화면이 퍼뜩였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진짜 저대로 될 뻔했다는 생각에 재경의 얼굴이 사아아 새파랗게 질렸다.

“이딴 걸 스토리라고 만들어놨냐? 렌 지미 이 자식, 초인 아냐?”

“뭐라고?”

“암것도 아냐!”

제발 렌 지미가 안전한 곳에서 잠들었다는 이유로 스토리가 뒤바뀌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빈 재경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안 그래도 노트를 깜박하는 바람에 기억이 잘 안 나서 미치겠는데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가 엉망이 되어 봐.

이번에는 수학여행 때처럼 모든 히로인들 호감도 이벤트가 등장한단 말야. 여기서 망하면 답도 없어! 인류가 망할지 살아남을지 완전히 확률 싸움이 되어버린다고.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맞다. 렌 군! 왕녀님께서 저녁 야외 만찬에 초대해 주셨어. 렌 군하고 류제 군하고 루나 씨랑 아세미 양도 전부 초대해 주셨는데 우리가 지금 꼴찌야.”

“빨리 안 나오면 내버려 두고 갈 거야.”

“알았어. 사람 들볶기는. 간다.”

설마 내가 눈을 뜬 것에 이어 야외 만찬회에 살짝궁 끼어든다고 저번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왕녀가 나까지 초대해 줄 줄은 몰랐지만 설마 이것 때문에 심경의 변화가 생겨서 왕녀의 악몽이 사라진다거나 하는 경우는 절대 없지 않겠어? 그러니 삼류 악당 렌 지미도 참석해도 될 거야.

혼자서 만찬회에 안 가기는 죽어도 싫은 재경이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푸라기 같은 머리를 바닷물에 담가서 푸르르르 백색의 고운 모래를 전부 털어내었다.

“이번에도 무사히 잘되어야 할 텐데.”

재경이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바닷가에서 나왔다. 재경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네와 비키, 그리고 주인공 류제가 노을을 뒤로한 채 바다에서 돌아오는 재경을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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