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1) (20/112)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1)

“여기가 아가타인가!”

키아나트리체의 수도 아가타. 수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아가타 역에서 커다란 짐을 든 사람이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커다란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수녀님이라면 드문 편이었다.

기나긴 여정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그녀가 나부끼는 수녀 모자를 붙잡고 아가타의 뜨거운 바람을 맞았다.

“여기나 그곳이나 덥기는 매한가지구나. 그렇지 않니, 아세미?”

뒤를 돌아 검은 수녀복을 펄럭인 그녀는 아가타 기차역 정문 계단에 우뚝 서서 류제가 있을 수도의 눈부신 태양에게 인사했다. 류제를 닮은 건강한 푸른색 눈동자가 활기차다.

“이제 다 도착한 거야?”

옆에서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어린 소녀가 들뜬 수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오는 데에만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리는 이 멀고도 먼 수도 아가타는 어린 소녀에게 낯선 타지에 지나지 않았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고향과 전혀 다른 풍경이 어색하다. 어린 소녀는 낯을 가리듯 초조한 기색이었다.

“지하철로 갈아타기만 하면 된단다. 그럼 류제 오빠를 만날 수 있어. 아세미야, 조금만 더 힘내자.”

“…응, 아세미 힘낼게.”

그렇게 기다려 마지않던 류제를 볼 수 있다는 수녀의 말에 여자아이가 힘을 내었다.

더운 여름 앞길 모르는 긴 이동은 어지간히 지치는 일이었지만 여기는 류제가 있는 아가타가 아닌가. 버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밀짚모자 아래로 그늘진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청명한 아가타의 같은 하늘 아래. 방학이라 사람이 없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운동장은 잘게 쪼개진 석영으로 눈이 멀 듯이 빛난다. 마치 바다 같다.

오늘은 방학이 끝나가는 8월 마지막 주. 보충수업 때문에 방학에도 열심히 등교했던 재경이 룰루랄라 머리에 가방 끈을 둘러쓰고 뜀박질을 했다.

텅 빈 학교에 들려오는 건 재경의 경쾌한 발걸음뿐이다.

아직 점심 먹을 시간인 12시도 넘지 않았는데 벌써 하교라니? 기말고사를 망치는 바람에 보충수업을 무려 3개나 들어야 하는 재경이 결국 류제 몰래 땡땡이를 친 건가 혀를 찰 수도 있지만 잠시 진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를 용서해 주자. 오늘은 보충수업의 마지막, 추가시험을 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재경은 신이 나서 펄쩍 뛰었다.

“헤헤헤.”

추가시험을 치고 나온 얼굴이 후련하다. 방학 내내 자유도 없이 공부 지옥으로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다. 머리에서 푸쉬쉬쉬 연기가 나던 날도 이제 끝이라고! 나는 이제 자유다. 자유로운 삶을 얻었어! 재경이는 자유예요. 우하하하!

“그보다 류제 이 자식은 어디에 있는 거야?”

어서 점심을 먹고 싶은 재경이 류제가 기다리겠다 말했던 장소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류제의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충수업 듣고 있을 때 류제는 방학 내내 혼자서 꼼지락꼼지락 뭘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그보다 어서 류제를 찾아서 추가시험이 끝났다는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고 싶었다.

분명 끝날 때쯤에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었는데. 그게 교실 밖이 아니라 학교 밖이라는 뜻이었나?

숨바꼭질 술래 노릇을 하다 못한 재경이 학교를 나와 건물이 만들어내는 진한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건물 밖은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그림자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으으… 더워.”

이놈의 오버 테크놀로지 세계는 왜 더운 여름에 가장 필요한 에어컨을 개발하지 않은 걸까. 다른 것들은 다 있으면서.

과학 기술이 한쪽으로 치우쳐있다고 생각 안 해? 찜통 같은 기숙사에서 매일 밤 자야 하는 내가 불쌍하지도 않나. 이제 나는 내가 아니라 오븐에 구워지는 통삼겹 구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야. 통삼겹 구이는 맛있기라도 하지 난 맛없어! 분명 질길 거라고.

“류제에에? 어디에 있어?”

분명 아침에 헤어지기 전에 나한테 기다리겠다고 했으면서 진짜 어딜 간 건지 보일 생각을 안 하고. 날이 더워서 소리칠 기력도 없다.

땀을 찔찔 흘리던 재경이 약속을 깨버린 류제를 잘근잘근 곱씹었다. 아침에 시험 잘 치라고 그렇게 잔소리한 건 류제면서 날 또 혼자 내버려 두다니. 두고 봐.

열받아서 먼저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재경이 뒤늦게 운동장 구석에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덥수룩하게 긴 새까만 머리가 뙤약볕 아래에서 가만히 서있었다. 류제다.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열사병 걸린다고! 미친 거 아냐? 라고 생각되다가도 류제는 더위를 탈 일이 없으니 순간이라도 걱정했던 게 바보 같다.

재경이 약속을 잊어버리고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류제를 깜짝 놀래기로 결심했다.

킬킬킬, 사악하게 웃어 보인 재경이 류제를 놀래기 위해 살금살금 다가가 왁! 하고 소리 지르려고 하는 순간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던 류제가 재경을 인정사정없이 제압했다.

“으악! 아파!”

“…앗.”

갑자기 공격당한 건 재경인데 깜짝 놀란 건 류제 같다.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류제의 눈동자에서 당혹감이 묻어나왔다.

넘어질 뻔한 재경이 류제를 붙잡고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랜 건 성공한 것 같은데 왠지 진 기분이다.

“아프잖아. 뭐 하는 짓이야?!”

“렌?! 벌써 시간이… 미… 으윽!”

류제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 찰나 그의 주변에 놓여있던 처음 보는 작은 기계들 중 하나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청력을 강화하고 훈련하던 류제가 귀를 막고 허둥지둥 알람을 껐다.

“미안, 심심해서 특훈 중이었어.”

“심심해서 특훈? 안 어울리게 특훈은 왜?”

“그냥 내 어빌리티 연구.”

“흐음, 너도 참 고생이네.”

재경이 류제를 위아래로 훑었다. 재경이 생각하는 특훈은 뜨거운 기합과 함께 땀을 빼면서 몸을 움직이는 건데 류제는 아까 전부터 가만히 서있기만 하지 않았나. 그게 뭐가 특훈이야?

저돌적일 정도로 단순한 재경이 생각하는 먼지 나는 특훈은 아니었지만 류제는 자신의 어빌리티의 장단점을 파악해서 행동하는 연습 중이었다.

특히나 저번 수학여행 때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단번에 파고든 ‘청력 강화’의 약점 극복을 위해 저번 주부터 렌 몰래 청력 강화를 특훈 중이다. 들키다니 부끄러운걸.

“저건 뭔데?”

“타이머야. 집중할 때 쓰려고.”

류제가 주섬주섬 주변에 널브러진 타이머를 집어 가방 안에 넣었다. 이건 매주 토요일에 건강검진을 하러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에 가는 류제가 연구원에게 부탁해서 개량한 랜덤 타이머였다.

이 타이머는 누르면 짧게는 10초, 길게는 10분까지 랜덤으로 벨이 울린다. 류제는 청각을 강화했을 때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날 경우 그 전조를 바로 캐치해서 강화를 취소하는 연습과 타이머를 누르는 연습을 동시에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특훈 내용을 말하기 부끄러웠던 류제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아,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보다 추가시험은 어때?”

“후.후.후.”

재경이 기고만장하게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저 자신만만한 얼굴이 과연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자포자기해서 자기를 너무 높게 보는 거 아니냐는 의미일까.

설마 추가시험 망친 건 아닐까 류제가 쓸데없이 걱정하는 찰나 재경이 허리에 손을 짚어 우렁차게 웃었다.

“세 과목 다 50점 넘었지롱! 합격이야, 합격!”

“휴우, 다행이다. 유급의 위기는 한차례 넘겼구나.”

“헤헤헤, 날 뭐로 보는 거야. 이 정도는 껌이지! 8월 달 내내 공부만 한 보람이 있다. 우하하하.”

어제도 어울리지 않게 류제와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던 재경이다. 재경은 기말고사 때에도 이만큼 공부 안 했다며 잘난 척해댔다.

그야 기말고사 때 그렇게 공부를 안 했으니 지금 공부를 그렇게 하게 된 거지. 조삼모사라고 아나 모르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렌이 추가시험을 합격했다는 건 류제에게 있어서도 다행이었다.

“빨리 합격한 거 자랑하고 싶었는데 넌 코빼기도 안 보이고. 치사하게 나 빼고 혼자 특훈이냐?”

“미안, 보여주기 부끄러워서.”

“흥, 혼자서만 강해질 생각을 하다니, 괘씸하긴. 혼자 무쌍 찍고 있으면서 그 이상 강해져서 뭐 하게? 그보다 나랑 한 약속 먼저 지켜야지! 내가 추가시험 한 번에 합격하면 맛있는 거 사주기로 했잖아. 시치미 떼려고 하지 마라?”

“걱정 안 해도 기억하고 있었어.”

왜 렌이 추가시험 합격하는데 내가 밥을 사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약속이 그렇게 되었다. 세라 선생님도 안 계시고, 마땅히 자랑할 데가 없어서 그렇겠지. 날 가족처럼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비싼 걸 원하는 것 같은데 아직 이번 달 용돈도 남았으니 괜찮겠지, 뭐. 추가시험 합격한 거 나도 기쁘고.

“그래서 이 더운 날 나를 찾으러 기어코 여기까지 온 거구만. 그래서 뭘 먹을 건데?”

“후후후, 한여름 보양식으로 소고기 샤브샤브. 분명히 사 준다고 약속했다?”

“으윽…….”

그 비싼 걸 잘도 고른다. 류제는 개학 전까지 주머니 사정 괜찮으려나 내심 걱정되었다. 소고기라면 분명 빈털터리가 될 텐데.

“빨리 가자! 배고프단 말야.”

“알았어.”

재경이 칭얼거리자 류제가 가방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 추가시험이 끝나서 후련하겠다, 류제가 사주는 공짜 점심도 먹을 수 있다니 기분 최고다. 재경은 약 3주 만에 나가는 학교 바깥이 기대돼서 총총 신나게도 걸었다.

“샤브샤브~ 소고기 샤브샤브~”

“촐싹거리다 또 다친다. 얌전히 걸어.”

“내 기분은 이것보다 만 배는 더 촐싹거리고 있다고. 나 참, 기뻐할 때는 기뻐하게 내버려 둬. 안 그러다간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버린단 말야.”

맴맴맴, 8월이 끝나가는데도 여름 매미가 우렁찼다.

보충수업이다 뭐다 여름을 만끽하긴커녕 유네네 집에 가서 며칠 묵고 온 것이 여름방학의 전부였던 재경은 보충이 끝나자 고작 1주도 남지 않은 여름방학이 아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추가시험이 합격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어 봐. 진짜 2학기는커녕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할지도 몰랐다고. 으으, 끔찍해.

“이제 다음 주면 개학인가? 8월도 빨리 지나가네.”

“내 여름의 청춘은 보충수업밖에 남지 않았지만 말야. 설마 겨울방학 때도 보충이면… 으으.”

“그러니까 반성하고 2학기부터는 열심히 공부해.”

“말 안 해도 알아, 이 잔소리쟁이.”

“잔소리? 네가 아쉬워하니까 하는 소리 아냐.”

류제가 입을 한 바가지 내민 채 투덜거렸다.

청춘이 보충수업밖에 없다 뭐다 그러면 옆에서 남아있던 내가 뭐가 되냐고. 나는 렌하고 여름방학 내내 둘이 학교에 남아있는 게 행복했는데.

좋지 않아? 열 명이 채 안 되게 남은 학교 기숙사에서 아침도 느긋느긋 둘이서만 먹고. 조용한 학교도 신기하고. 유네가 없으니 렌도 내 방에서 종종 자고. 얼마나 좋아? 천국 아니야?

“오랜만에 보는구나. 추가시험은 합격했냐?”

“물론이죠. 그 정도는 껌이거든요? 기념으로 샤브샤브 먹으러 갈 거예요.”

“시험이 껌인 녀석은 보충 같은 건 안 듣지 않아? 하하, 농담이야. 축하한다. 밖에 놀러 나가는 거지?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거라.”

“샤브샤브 맛있게 먹고!”

재경과 안면을 튼 경비병이 교문에서 호쾌하게 인사를 해주었다.

상쾌한 배웅에도 더운 여름에 아머를 풀로 장갑한 경비병들의 이마에는 땀이 줄줄줄 흐르고 있었다. 반팔 체육복 차림인 재경도 더워 죽을 맛인데 아무리 돈 받고 하는 짓이라지만 경비병도 고생이다.

“저 아저씨들도 대단하네. 저건 미쳤어. 가을이 오기까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날씨가 너무 더운 거 아냐? 가을이 오기는 하는 거냐?”

“그러게. 언제쯤이면 시원해질까.”

말만 저렇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류제가 적당히 받아쳐 주자 가증스러워서 재경이 류제의 등짝을 퍽퍽 쳐댔다.

“너는 좋겠네! 네 어빌리티는 만능이니까. 잘 때도 혼자서만 시원하게 자고.”

“아야, 아야야. 나도 다른 사람한테도 내 어빌리티를 쓸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류제는 뙤약볕 아래에서도 더운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기숙사에 에어컨이 없어서 재경도 겨우겨우 열대야 밤을 지새우는 중인데 혼자 ‘열기 내성 강화’ 버프를 걸어서 혼자만 파충류처럼 차갑다.

재경은 그 능력이 오늘만큼이나 부러웠던 적이 없었을 거라고 투덜거린 횟수의 기록을 갱신했다.

“네 주변만 엄청 서늘하다니. 설인이냐?”

“저번엔 파충류라더니. 하나로만 통일해 줘.”

보통 이렇게 더운 여름이라면 사람과 붙어있기 꺼리는 게 당연한데 류제는 아이스 팩처럼 시원하니까 왠지 들러붙게 된다.

암만 새까만 남정네 둘이 붙어있는 꼴이 어색해도 이 더운 여름 시원하게 보낼 수만 있다면 재경은 류제한테 매미처럼 붙어있어도 아무래도 좋았다.

기숙사에서 자주 그랬던 것처럼 재경은 류제를 등에 업고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찜통 속에서 냉장고 문을 연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으으, 시원해. 미니 사이즈 류제도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류제가 재경의 보폭에 맞춰 어적어적 걸어가며 난감해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쳐다보는 사람들도 부끄럽지만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혐오스럽다. 젠장, 나도 갈 데까지 갔나. 벌렁벌렁한 심장 소리가 류제의 귀를 덮었다. 렌의 거리감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가게가 이쪽이던가?”

“바람피우면 안 돼!”

멀리서 고작해야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돌진해 재경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샤브샤브를 팔던 가게 위치가 헷갈려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두 사람은 쪼그마한 꼬마가 내는 보잘것없는 힘에 우당탕 도미노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우아악! 뭐야? 누구야? 뭐 하는 짓이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아세미의 류제 오라버니에게 들러붙다니. 류제 오라버니! 이놈은 더러운 악당이라구. 이 악독하게 생긴 얼굴이 안 보여? 아세미가 늘 조심하라고 했잖아. 가까이하면 안 돼!”

“으으… 그게 무슨 소리야. 어?”

얼결에 렌의 작은 품을 감상한다고 지금까지 특훈했던 감각 집중 훈련이 수포로 돌아가든가 말든가 변태처럼 얼굴을 실룩거리던 류제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렌의 귓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지푸라기 같은 엷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간질간질 볼에 부벼졌다. 렌 냄새…….

아니, 아니아니, 아니아니아니.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분명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세미?”

엉엉 울면서 아가타로 향하는 나를 배웅해 줬던 게 엊그제였던 고아원 막내, 아세미?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우리 류제야. 많이 컸구나! 아이는 부모 손을 떠나면 빨리 큰다던 말이 사실이었어.”

고아원에 있을 때보다 족히 10센티는 넘게 큰 류제에게 어떤 수녀가 와서 반갑게 인사했다. 바닥에 뒤통수를 뭉개고 곰 인형을 안듯 친구를 안고 있는 류제가 잘도 전보다 큰 걸 알아본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류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런 모양새로 맞이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은 바로 류제의 고아원 수녀와 막냇동생이었다.

“누나? 어…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예요?”

절대 아가타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류제가 혹시나 누가 더 왔을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녀 누나의 얼굴을 보자니 설마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아가타에 온 건가 놀랐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눈에 익은 얼굴이라곤 그녀와 막냇동생 아세미밖에 없었다.

“둘이서만 온 거예요?”

“모처럼 여름방학인데 네가 내려오지 않겠다고 했잖니. 신부님은 바쁘시고. 그래서 내가 아가타까지 온 거야. 우리 아세미는 네가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서 데리고 왔고.”

네가 여름방학 때는 꼭 내려올 거라고 달랬더니 왜 류제 오빠 아직도 안 오냐고 날 들볶지 뭐니. 그녀가 고집불통 아세미의 밀짚모자를 누르며 오호호 웃었다.

“그쪽은… 친구니?”

“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했는데…….”

류제가 눈앞에서 사라진 재경을 찾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앞에 얼쩡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갔나 했더니 재경은 류제의 뒤에서 수녀와 아세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숨어있었다. 그를 밀쳐 넘어뜨린 아세미가 짜증 난 것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듯했다.

어째서? 류제네 식구들? 수녀복? 잠깐만, 설마 오늘이 이번 8월 챕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고? 아차, 오늘이 8월 마지막 주였잖아. 젠장, 젠자앙! 내가 왜 까먹고 있었던 거지?

이게 다 보충수업 때문이야! 추가시험 친다고 완전히 정신이 나가있어서 이번 챕터는 안중에도 없었던 게 탈이다.

추가시험 때문에 호감도 이벤트 분석도 제대로 못 했는데 하필이면 왜 나랑 류제랑 둘이서 사이좋게 샤브샤브 먹으러 가려는 날 등장한 거야?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잖아!

이벤트 뜨는 타이밍 한번 더럽게 변덕스럽다고 재경은 투덜거렸다. 하지만 게임 스토리상 이번 챕터는 학교에 남아 홀로 특훈을 하고 있던 류제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마음이 답답해 학교를 나와 마을을 돌아다니고, 거기서 아가타로 올라온 고아원 수녀님과 여동생을 만나게 되는 걸로 시작하는 것이 맞았다. 재경이 그 징조를 완전히 까먹고 있었을 뿐이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입장상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어린아이의 시선을 많이 겪어본 수녀는 재경의 날 선 눈동자에도 당황하지 않고 상냥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안녕? 나는 류제가 있던 고아원의 수녀란다. 루나 에펜시타르. 이름으로 부르기 어색하다면 수녀님이라고 불러주렴. 누나라는 말도 좋단다.”

“어어… 아… 그…….”

“너는 류제 친구니? 이름이 뭐니? 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루나가 친근하게 인사하자 옆에서 아세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반발했다.

“루나 언니! 자기소개를 할 때가 아냐. 이딴 게 아세미의 류제 오라버니와 친구일 리 없잖아. 류제 오라버니를 이용하려는 악당이란 말야.”

“아니, 렌은 내 친구 맞는데…….”

“아니야. 친구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저 못생기고 못났고 바보 같고 악독해 보이는 주근깨투성이와 나의 완벽한 류제 오라버니가 서로 친구라고?

류제를 좋아하다 못해 숭배하는 아세미는 류제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고집을 부리며 좌우로 고개를 젓는 게 필사적이라서 졸지에 존재를 부정당한 재경도 어린애 앙탈에 열이 뻗칠 정도였다.

“용서할 수 없어! 싫어. 친구 하지 마!”

“어허. 아세미야, 류제 오빠 친구분한테 나쁜 소리 하면 못써요. 실례잖니.”

“하지만 루나 언니. 아세미는 저런 게 류제 오라버니의 친구라니 용납 못 해!”

아세미는 잘생긴 류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재경이 못마땅했다. 류제 오빠는 여름의 뜨거운 햇빛 아래서도 저렇게나 완벽한데 뭐야, 저 사람은. 더럽게 땀으로 녹아내리고 있잖아. 기분 나빠! 분명 성질도 더럽고 불쾌하겠지.

“자, 자. 아세미도 그러지 말고 오빠 친구한테 예의 바르게 인사하도록 해. 미안해, 얘가 질투가 심해서. 류제를 참 좋아하거든.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줘.”

“아… 예.”

루나의 말이 맞다. 재경은 더워 죽겠는데 애를 상대로 열 낼 것 없다고 성질머리를 꾹꾹 눌러 담았다. 잘 알지. 재경은 저 건방진 꼬맹이가 왜 저러는지 알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나 오는 쬐끄만 게 발라당 까져가지고 맨날 결혼할 거라고 달려드는 류제의 고아원 막냇동생 아세미 신리는 그야말로 미연시 주인공의 어린 여동생 포지션을 착실하게 고수하는 캐릭터일 뿐이다.

근데 오라버니는 뭐야. 오글거려 죽겠네.

“아세미야, 고집부리지 말고 류제 오빠 친구에게 자기소개하렴. 어서.”

“…나, 아세미 신리. 10살. 챠밍 포인트는 류제 오라버니와 같은 검은색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은 거야. 이래 보여도 류제 오라버니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니까 참고해. 류제 오빠의 미래 신부라고나 할까. 성은 신부님 성을 따른 거니까 피는 안 섞여 있다구! 류제 오빠와 친분을 유지하고 싶다면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아, 그러냐. 류제의 신부냐.”

“아냐, 렌. 오해야. 난 그런 약속 안 했어. 이상한 이야기 하면 못써, 아세미!”

고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는데 류제가 단번에 부정하자 울컥한 아세미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세미랑 결혼한다고 약속했잖아. 진지한 얼굴로 서로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아세미는 아직도 선명한데! 그런데도 류제 오라버니는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는 집에 돌아올 생각도 안 하고. 아세미는 내내 류제 오라버니 기다렸는데!”

약혼자니 결혼이니 빽 소리를 지르는 것이 길 가던 사람들이 죄다 돌아볼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막무가내다.

“이런 커다란 동네에 왔다고 아세미 같은 거 잊어버린 거지? 그래서 여름 내내 고아원에 안 돌아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런 약속은 그냥 의미 없이―”

“약속을 하기는 했다는 거네?”

어찌 되었건 피를 나누지 않은 여동생과 나눈 어릴 적 약속을 상대방이 잊지 못하는 클리셰는 진부한 설정이었다.

아세미는 게임상 플레이어인 나한테 오라버니라고 부르면서 졸졸졸 따라다니며 결혼하겠다고 하는 멋모르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는데 실제로 겪으니까 진심 사람 성질머리를 툭툭 건드려댄다.

게다가 10살이라고? 꼬맹이 주제에 너무 진심 섞인 거 아니냐?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진짜로 류제 저 자식, 어린아이를 상대로…….

재경의 눈이 한겨울 서릿바람처럼 싸늘해졌다. 류제를 소아성애자 쓰레기로 보는 눈빛이다.

당황한 류제가 여름날 한 방울 흘리지도 않던 땀을 뻘뻘 흘리며 부인했다.

“아냐, 지…진짜 아니라고! 렌, 진짜 아니야! 아세미가 약속을 안 하면 울음을 그치지 않아서……!”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가 아가타로 떠나기 전 둘이서 아름다운 약혼식을 올렸어. 오라버니도 기억하지? 그렇지?”

“아세미! 그런 말 하면 렌이 진짜 오해하잖아. 그건 그냥 네가 떼를 써서―”

“아니긴……. 뭐… 그렇다고 치자.”

“아냐! 진짜 아냐! 그리고 애초부터 난―”

“오라버니가 잊어버렸어도 아세미는 반드시 오라버니랑 결혼할 거야.”

“싫어! 안 할 거야!”

류제가 소녀의 꿈을 엑스자로 으름장을 놓았다.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

아세미에게 류제가 어른스럽지 못한 반응을 보이자 놀란 아세미가 히끅히끅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내가 아는 상냥한 류제 오라버니가 아니야.

“으아아앙, 류제 오라버니가 변했어!”

“윽… 울지 마, 아세미. 그게…….”

“어휴, 쥐똥만 한 꼬맹이가 결혼, 결혼 시끄럽네. 결혼은 무슨. 너랑 류제랑 이어지는 그럴 일은 없으니까 꿈은 일찌감치 접어라, 건방진 꼬맹아. 류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렌…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넌 끼어들지 마! 이 못생긴 메기 같은 게!”

울면서 할 말은 다 한다. 재경이 발끈해서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아니, 공략 가능한 히로인 목록에 니가 없다고! 사실을 말해줬을 뿐인데 뭐? 메기? 하여튼 건방진 꼬맹이.

다혈질인 렌이 참지 못하고 아세미의 정수리에 한 대 쥐어박기 전에 류제가 아세미의 가시 같은 주둥아리를 말렸다.

“내 친구한테 못된 말 하면 오빠가 정말로 싫어할 거야. 그만해.”

“류제 오라버니는 바보야! 아세미보다 저 메기가 더 좋다는 거지?”

“…….”

“으아아앙, 왜 아세미가 더 좋다고 대답해 주지 않는 거야. 아세미 힘들었지만 류제 오라버니 보겠다고 여기까지 열심히 왔는데.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가 칭찬해 주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니 류제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더운 여름에 자기 보겠다고 고생해서 올라온 아이를 나무랄 수도 없고.

류제는 아세미가 저렇게 떼쓰는 게 귀찮아서 냉큼 결혼하겠다 말도 안 되는 약조를 해버린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류제가 골치 아파 머리를 긁적이자 그녀를 말리는 마지막 역할인 수녀님이 우는 아세미를 안아주었다.

“아세미야, 길거리에서 큰 소리로 울면 안 돼. 뚝! 억지를 부리면 류제 오빠가 난감해하잖니. 미안하구나, 류제야, 류제 친구야. 얘가 막내다 보니까 온갖 어리광을 전부 받아줬더니 고집만 세졌구나. 아휴, 아직도 친구 이름을 못 들었네. 친구는 이름이 뭐죠?”

“레…렌 지미라고 하는데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지하철에서 만났다던.”

“그런 거 싫어!”

아세미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재경을 절대 류제의 친구로 인정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가장 친한 친구라니. 재경의 귓불이 붉어졌다. 하렘 미연시 주인공 주제에 이럴 때 쓸데없이 정직하기는. 하지만 왠지 류제의 마음속에 내가 1번이라니 저 건방진 꼬맹이한테 고소해 죽겠다.

아세미를 이긴 재경이 우는 아세미 앞에서 잘난 척을 했다.

“싫어도 류제의 절친 자리는 내 거야. 바―보.”

“아세미는 그런 거 안 믿어!”

“네가 안 믿으면 어쩔 건데? 그건 사실이거든?”

“시끄러워, 못생긴 메기가!”

“뭐라고?!”

한숨을 내쉰 루나가 재경에게 험한 소리 하며 달려드는 아세미의 밀짚모자를 푹 내렸다.

“아세미야, 떼는 어린아이나 쓰는 거라고 했지? 언니 정말 화낼 거니까 그만해. 더운데 힘들지? 그런데 두 사람 다 어디 가던 중이었나? 나랑 아세미가 아가타에 온 걸 초능력으로 알았던 걸까?”

“아뇨, 우연이에요. 저희는 점심 먹으러 내려오는 길이었어요.”

“점심? 그것참 다행스러운 우연이구나. 오랜만에 본 류제한테 제일 먼저 점심을 사주고 싶었는데. 배고프지? 어디 정해둔 곳 있었니?”

“네, 샤브샤브를…….”

쨍쨍쨍 태양이 울어대는 날 하필이면 샤브샤브라니. 류제는 렌의 메뉴 선정에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왜 굳이 샤브샤브인가에 대한 이유는 몰랐다.

“엄청난 도전 정신이구나. 좋아, 누나가 사줄게. 아가타 지리는 모르니까 대신 안내 부탁한다, 류제야.”

“정말요? 저야 좋죠. 좀 걸어야 하는데 짐 주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돈 굳었다는 생각에 류제가 수녀 루나가 들고 왔던 커다란 짐 덩이를 손쉽게 어깨에 둘러멨다. 루나는 류제더러 굉장히 듬직해졌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모르는 사람에게 떼나 써대는 아세미와는 다르게 날 때부터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처럼 보인다.

“…야, 너와 결혼을 약속한 류제가 너 버리고 가는데?”

“아세미랑 류제 오라버니는 댁처럼 바람 불면 사라질 관계가 아니거든?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랑 같이 가!”

훈훈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아세미가 재경과 함께 있는 걸 견디지 못했는지 관계를 과시하며 류제의 등에 푹 안겼다. 저리 보니까 피는 이어져 있지 않아도 유대감으로 형성된 가족이라는 형태가 느껴졌다.

류제 등 시원하지. 젠장,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 때문에 내 이동식 에어컨을 빼앗겼다.

그보다 어쩐다. 이번 챕터는 분석을 못 해서 기억이 아리까리한데. 적어도 노트라도 있으면 되새기기 좋으련만 그건 기숙사에 있었다.

플레이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류제네 수녀님과 만나서 곧바로 바다로 갔던 것 같기도 하고. 마지막 사천왕이 등장해서 주인공과 히로인들이 꿈나라 여행을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젠장, 정확한 게 하나도 없다. 지금 가서 가지고 올까?

“렌! 빨리 와!”

“아… 나는…….”

“어서. 샤브샤브 먹고 싶어 했잖아?”

끼어들기 민망한 분위기 속에서 이제 와 자기는 기숙사로 돌아간다 말하기가 껄끄럽다.

류제가 멋대로 고민하는 재경에게 돌아와 억지로 붙들었다. 난감하기 짝이 없다. 젠장, 하필이면 스토리 시작 부분이 언제인지 홀라당 까먹어서.

걱정이 드는 한편 재경은 어차피 맨땅에 헤딩하는 성격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얼버무린 그는 입을 비죽거리면서 마지못해 류제에게 질질 끌려갔다.

“사양하지 말고 먹으렴.”

얼굴보다 큰 부채를 부쳐주는 루나가 머뭇거리는 재경에게 열렬하게 권했다. 어떤 악마도 정화시킬 것 같은 화창한 웃음이 서린 그녀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현재 기온 35도가 육박하는 가운데, 아가타에서 가장 더울 것 같은 장소에 도달한 그들은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메뉴 선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토록 그리워한 류제가 먹자고 했기 때문에 아무 불평 없이 땀만 찔찔 흘려댔다.

“야채도 맛있어 보이는구나. 원래 더위는 이열치열이라고 했단다. 먹고 나면 밖이 아주 시원하게 느껴질 거야.”

이 바보 신재경 같으니. 시설의 최첨단을 달리는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도 없는 에어컨이 동네 식당에 있을 리가 없잖아. 왜 식당에 들어가면 시원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는지. 재경은 샤브샤브는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했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앞에 있는 뜨거운 국물은 보글보글 끓었다. 어빌리티를 써서 혼자서만 쾌적한 류제가 다른 사람 마음도 모르고 흔쾌히 말했다.

“어서 먹어. 먹고 싶어 했잖아.”

“그야 그랬지…….”

재경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차가운 국물 요리를 먹자고 할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미칠 듯이 덥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내 돈 내는 것도 아니니 샤브샤브는 마음껏 먹을 테다.

“먹기 전 다 함께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란 말에 류제와 아세미가 버릇처럼 합장했다. 수녀니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재경은 류제네 고아원에서 하는 식전 기도가 어색했다.

이제 먹어도 되나 눈치를 보던 재경이 얇은 소고기 한 조각을 집어 국물에 헤집었다. 냠. 질 좋은 소고기를 한입에 꿀꺽하니 더워도 끝내주게 맛있다.

온몸이 땀으로 샤워한 것처럼 질척질척한 것만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찝찝해.

“엇……!”

“흥!”

재경이 물을 마시려고 하자 건방진 아세미가 시원한 물병을 빼앗아 재경 말고 다른 사람들 컵에 모조리 따라줘 버렸다.

더워서 짜증 나 죽겠는데 옆에서 귀찮게 굴긴. 연적들은 나중에 천지삐까리로 볼 텐데 저 꼬맹이는 왜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물 다 떨어졌어? 내 물 마셔.”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어!”

어찌 되었건 아세미가 저러는 건 다 류제 탓이니 재경이 류제가 주는 시원한 물을 덥석 받아 원샷했다. 아세미는 약 올라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재경을 노려보았다.

고기를 먹는 그들에게 열심히 부채를 부쳐주던 수녀가 이 더운 여름에 류제처럼 학교에 남아있는 재경이 안쓰러웠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렌아. 너는 본가로 내려가지 않은 이유가 뭐니?”

“보충수업 받아야 해서요.”

“어머, 나는 또 우리 류제처럼 오기 귀찮다는 매정한 소리를 할 줄 알고 한 소리 해주려고 했는데 아니었구나. 너는 그러지 말렴. 부모님께서 아쉬워하신단다.”

“어… 수녀 누나, 그게 렌은―”

렌의 쥐약 같은 약점을 대놓고 파고드는 루나에게 류제가 사정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렌의 표정을 살피다가 그만 루나에게 선수를 놓치고 말았다.

렌에게 말을 건 것은 그저 포석이었는지 루나가 타깃을 돌려 따발총처럼 류제에게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너도 말이야, 바쁘다고 몇 줄 편지만 써서 보내고 그러면 못써. 신부님이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아니? 다른 애들도 여름방학 때 네가 돌아오면 깜짝 파티를 열겠다고 설레발이었단다.”

“그… 진짜 바빠서…….”

“그러면 편지라도 성의 있게 써서 보내주지 그랬니. 네 소식은 날아오는 성적표로밖에 모르겠고, 네 편지는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먼 타지에서 혼자 잘하고 있을까 걱정이지, 교우 관계는 어떻나, 잘 먹고 있나, 이 누나는 정말이지 매일 밤 걱정이 되어서……!”

도저히 렌을 두고 내려갈 수 없었다고 말하지 못한 류제가 쏟아지는 수녀님의 잔소리를 방어하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류제가 6살이었을 무렵 소외 지역 봉사 활동이라고 15살에 교회에서 파견 나와 지금껏 함께 살아왔던 수녀가 저런 말을 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고아원과는 다르게 여기는 내 방도 있고 누나나 신부님에게 부담되고 싶지 않아서 가기 꺼려진 것도 있었다. 하지만 수녀 누나가 아쉬웠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알겠니? 자주 못 내려오는 형편인 거 우리도 아니까 편지라도 열심히 써주렴. 다들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몰라. 우리는 가족이잖니.”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럴게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네. 그보다 누나도 어서 드세요.”

누나가 아니라 엄마 같은 잔소리다. 그때부터 쭉 루나의 보살핌을 받아왔기에 류제는 루나의 말이라 하면 꿈쩍 못했다. 저렇게까지 부탁하는 루나에게 렌 앞에서 가족 이야기는 지양해 달라 말하지도 못한 류제가 고기로 루나의 입을 막았다.

“너는 이런 식으로 늘 무마하려고 하지.”

“그런 거 아녜요.”

재경은 매번 자신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류제가 누굴 닮아서 저렇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아서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세미는 또 자기만 뒷전으로 남기는 류제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연약한 척을 했다.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뜨거워서 고기 못 먹겠어. 아세미도 챙겨줘.”

“그래, 그래. 아세미도 많이 먹어야지. 아, 렌. 고기 더 먹을래?”

“말 안 해도 먹을 거야!”

아세미를 챙겨주기 전에 렌의 빈 접시부터 확인한 류제가 재경에게 먼저 고기 몇 덩이를 건져서 담아주었다.

아세미는 자기랑 일면식 없는 이상한 사람을 먼저 챙겨주는 류제가 미웠다. 아까부터 줄곧 류제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재경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나의 잔소리 때문에 렌에게 괜히 미안해진 류제는 아세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재경에게 고기가 쌓인 접시를 내밀었다. 렌도 참. 땀을 저렇게 뻘뻘 흘리면서 뜨거운 고기를 잘 먹네. 눈가도 빨갛고 얼굴이 달아올라 주근깨가 잘 안 보여.

“안 더워?”

“더워!”

“근데 되게 잘 먹네.”

“고기 먹는데 더운 게 대수냐!”

마음 불편한 재경이 틱틱거리며 류제가 덜어준 고기를 왕창 집어 먹었다. 류제는 많이 먹으라고 뿌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집게를 내려놓았다.

아세미는 또 자기 몫을 덜어주는 걸 까먹은 류제를 보면서 질투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고아원에서는 늘 아세미만 일등으로 챙겨줬는데.

“류제 오라버니, 바보!”

아세미는 삐져서 류제가 들고 있던 집게를 빼앗아 고기만 몽땅 건져 자기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욕심이란 욕심을 다 부린 아세미는 기어코 자기가 건져낸 고기를 전부 먹어치웠다. 식사가 끝난 후 그녀는 부른 배가 울컥거려 죽겠다며 자리에 축 늘어졌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먼저 일어나 샤브샤브값을 계산한 루나가 호호 웃으며 점주에게 입바른 말을 했다.

활짝 웃는 점주는 그것참 다행이라며 웃는데 표정에서 왠지 모를 기괴함이 돌았다. 홀린 것처럼 시선이 흐리멍덩했다.

이 더운 날 뜨거운 샤브샤브를 팔기 위해선 저럴 수밖에 없나, 루나는 점주의 이상 징후를 별것 아니라고 흘려 넘겼다. 그녀의 긍정적인 마음이 불러일으킨 안일함이었다.

“맛있게 먹어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이번 저희 가게에서 여름맞이 특별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한번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맛있게 드셨다면 부디 도전해 주십사 합니다. 오늘이 행사 마지막 날이거든요.”

“예? 행사요?”

수녀 루나는 자신과 영 연관이 없는 단어를 듣고 눈을 끔벅거렸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던 천막을 가리킨 점주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카운터 아래에서 추첨 기계를 꺼내 들었다.

“여기에 쓰여있지 않습니까? 이 더운 여름날 저희 가게의 샤브샤브를 즐겨주신 모든 고객님께 추첨을 통해 1등상으로 타고시아 해수욕장에서 무료 바캉스를 즐길 수 있는 여행 패키지를 제공해 드린답니다.”

“어머머, 정말요? 왜 못 봤지?”

“1박 2일 숙박 무료, 교통비 무료! 시설물 이용 무료. 최대 4인까지 가능합니다. 어떠십니까? 밑져야 본전인데 도전해 보시죠?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허파에 바람나게 웃으며 루나에게 추첨 기계를 들이밀었다. 배불러 꼼짝을 못하는 아세미와 루나의 짐을 챙기던 류제가 무슨 일이냐며 수녀 옆에 알짱거리며 섰다.

재경도 긴가민가 알쏭달쏭한 기억으로 루나에게 다가왔다가 점장의 옆에서 의자에 늘어진 채 쿨쿨 자고 있는 남색 바닷빛 머리칼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류제가 아이가 들고 있는 피켓을 읽었다.

“…여름맞이 타고시아 해변 바캉스 패키지 추첨?”

의자에 앉은 채 세상 떠나가는지도 모르고 자는 아이는 뒤에 가짜 천사 날개를 달고 별 달린 수면모를 쓰고 있었다.

자면서도 열심히 피켓을 들고 있는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한 재경이 안색이 창백해져서 남모르게 침을 삼켰다.

“음냐냐냐… 쿨…….”

“어디… 공짜라는데 한번 해볼까?”

수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류제를 힐긋거렸다. 일평생 교회에 몸을 맡겨 봉사 활동을 하느라 한 번도 해변에 가본 적이 없는 그녀는 모처럼의 기회를 날리기 아쉬웠던 모양이다.

재경은 조심스레 점장의 상태를 살폈다. 범죄자처럼 흐리멍덩하고 시체처럼 축 늘어진 눈매가 괴기스럽다. 젠장, 빙고다. 뭔가에 홀린 게 틀림없다.

“그러세요. 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머, 정말로? 당첨되면 다 같이 바다에 가는 거야. 알겠지? 그럼… 후후후.”

설레발을 친 루나가 추첨 기계를 힘차게 돌렸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면서 빙글빙글 잘도 돌아간다.

맞아, 그랬었지. 주인공이 갑자기 해변에 가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어.

아가타까지 류제를 찾아온 누나 포지션 고아원 수녀님과 여동생 포지션인 건방진 꼬맹이는 류제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그 가게 행사에 당첨되어 타고시아 해변으로 향한다.

하지만 저 추첨은 전부 조작된 것이다. 저 정신 못 차리는 가게 주인아저씨 좀 봐. 회까닥 낮에 술 한잔한 것 같잖아. 저건 분명 망할 서큐버스가 작당하고 무슨 짓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거기에 옆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는 저 마족! 당연한 듯 인간 행세를 하고 있지만 저건 마지막 사천왕, 수마 니켈의 왕이잖아……!

젠장, 왜 꿈나라 여행인가 했더니 이번 챕터 전개는 미나와 수마의 합작이었나.

“축하합니다! 1등상 당첨입니다! 타고시아 해변 여행권으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여름휴가를 즐기세요. 타고시아 해변행 기차표 기한은 오늘까지니 늦지 않게 사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첨 기계에서 툭 튀어나온 황금 구슬에 점장이 종을 울렸다. 대본을 읊는 듯한 말투가 괴리감이 들었다.

“어머, 정말요? 류제야, 아세미야. 들었니? 당첨이 되었대! 세상에, 나 이런 거 당첨된 거 태어나서 처음이야!”

그야 애초부터 당첨 구슬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재경은 짜게 식은 눈으로 기뻐하는 수녀와 쿨쿨 자고 있는 마족, 얼떨떨한 류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족이 저지른 일이라도 이번 챕터의 시작이 정상적으로 시작된 건 기쁜 일이다. 내 팔자야.

“류제야, 아세미야, 렌아. 아가타도 좋지만 역시 여름이라 하면 바다가 아니겠니. 나는 언젠가 꼭 한번 우리 아이들과 바닷가에 놀러 가보고 싶었어.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나쁘지는 않지만… 이렇게 갑자기요? 누나 일정 괜찮아요?”

“물론 너와 즐겁게 여름을 보내기 위한 일정이잖니. 기차표 기한이 오늘까지란 걸 보면 이건 분명 주님의 인도란다. 너를 만나서 즐겁게 놀라는 주님의 인도.”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활기 넘치는 루나 에펜시타르는 이 일이 전부 조작된 것임을 꿈에도 생각 못 하는 듯했다.

류제를 만나러 먼 곳까지 걸음 했더니 이런 여행권도 당첨되고. 그녀는 연이은 행운이 기뻐서 의심이랄 것도 없이 해변에 가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다.

“누나? 잠깐만……!”

들뜬 루나의 손에 이끌려 그들이 가게를 떠나자 세상모르고 자던 소녀가 번쩍 눈을 떴다. 몽환적인 보라색 눈동자 가운데에 새빨간 동공이 희번덕이었다.

“으하암…….”

그녀는 곧 볼일 없다는 듯 다시 눈을 감고 쿨쿨 잠이 들었다. 인간의 잠이 주식인 수마답게 24시간 중 24시간이 수면 시간인 그녀다. 잠만 잘 수 있다면 그녀의 앞에 얼마나 중요한 일이 달려있건 관심 밖 일이었다.

붉은색 낡은 기와가 들썩거리는 샤브샤브 가게의 꼭대기.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 무료한 눈의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가 떠들썩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그들을 응시했다.

역시 가볍게 걸려드는군. 역시 인간이란 이런 존재지.

“읏……!”

그들을 내려다보며 비웃던 미나는 고개를 든 렌 지미와 눈이 마주친 치고 몸을 숨겼다.

어떻게?

그녀가 굴뚝 뒤에서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눈이 마주쳤다 생각한 렌 지미는 류제 신리와 시답잖은 말을 나누고 있었다.

내가 잘못 봤나. 아니, 렌 지미는 언제나 기상천외하며 의미 불명이라 방심할 수가 없다. 그녀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아래를 흘기다 훅 사라졌다.

모든 등장인물이 그녀가 준비한 무대에 다가선다. 이제 슬슬 무지한 류제 신리에게 불신의 씨앗을 남겨줘야 할 때였다.

* * *

심장을 찌르는 죄책감. 질타하는 손가락이 비수가 되어 목을 조른다. 불타는 아가타. 교활한 마족의 날갯짓 소리. 공기가 찢어지는 비명.

아프다. 아프다. 존재 하나하나가 그녀의 살갗을 베어 아프다.

‘다 네 탓이다!’

멀어버린 시선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황제의 말이 그의 딸을 옥죄어 온다. 그녀의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칼이 풀어 헤쳐져서 금빛 실타래가 망국의 깃발처럼 어지러이 나부꼈다.

어두운 세계에 전복되어 불타는 나라. 죽어가는 백성. 원망하는 황제. 무력하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 다 무력한 나의 탓이다.

‘왜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 건가요?’

백성의 망령이 속삭였다. 그 질문에 목이 탄다. 대답을 찾느라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미안. 미안하구나. 내 무능 탓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어.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내가 더 잘 지킬 수 있었더라면…….

“…저하! 왕녀 저하! 괜찮으십니까?”

루이나가 가위눌린 니냐롯트를 흔들어 깨웠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녀가 눈을 떴다.

아름다운 은색 눈동자를 굴리던 니냐롯트는 또 악몽을 꾸었음을 깨닫고 애써 침착한 척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목덜미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잠을 설치셨습니까? 다시 불길한 꿈이라도 꾸신 겁니까?”

“…근래에는 괜찮다 생각했는데. 별안간 이러는구나.”

자는 동안 전부 타버린 향초를 보며 니냐롯트가 낮게 한숨지었다. 나는 아직도 홀로 불안해하고 있는 것인가. 극복해낸 줄 알았던 악몽을 또다시 꿀 줄이야.

스스로에게 타협해도 걱정은 끝없이 늘어난다. 아무리 나라를 걱정해서라지만 휴양까지 와서 뇌우를 뿌린다면 나는 나라를 다스릴 왕녀가 아니라 나라에 재앙을 뿌리는 해악이 아닌가.

나라를 위해서라면 내 자신의 근심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하거늘. 다행히도 하늘은 아직 맑으니 다시 마음을 추스르면 해가 나겠지. 늦게 깨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타고시아 해변에 있는 왕족의 별장에서 잠시 낮잠을 잤던 왕녀가 물결처럼 흘러내리는 실크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루이나가 그녀에게 얼음이 떠있는 시원한 음료 한잔을 넘겨주었다. 우아한 섬섬옥수가 투명한 크리스털 컵에 마주 닿는다.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고귀한 자태였다.

그 자태를 흠모하던 루이나가 헛기침을 하고 유연하게 니냐롯트를 위로해 주었다.

“너무 마음 쓰시지 마십시오. 분명 연이어 마족이 나타난 것 때문일 것입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루이나.”

목을 축인 니냐롯트가 얼음이 부딪히는 크리스털 컵을 잠시 해가 드는 창가에 내려놓았다. 거대한 창문 밖에서 파도가 철썩거렸다. 키아나트리체의 여름은 지독하게 덥다.

요양 차원에서 오랜만에 타고시아 해변에 와 몸을 추스르던 그녀는 그녀의 반 친구가 찾아왔다는 하녀의 안내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반 친구라니? 오늘 누군가 만나러 오겠다고 전언한 걸 사전에 전해 듣지 못했다.

“왕녀님, 잘 주무셨어요?”

안경잡이에 초록색 단발머리를 한 수줍은 소녀. 미나 플로리아가 웃으며 니냐롯트의 공간에 침범했다.

하녀를 낚았을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미나의 눈동자에 옅은 마기가 돌았다. 그 마기는 니냐롯트와 루이나에게 손쉽게 영향을 끼쳤다. 은빛의 눈동자가 미나의 분홍색 눈동자에 순간 잡아먹혔다.

니냐롯트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들은 납득했다.

미나 플로리아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 존재하는 게 당연할 뿐. 그러니 의심하지 않고 반갑게 그녀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나.”

“후후, 여름방학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여기서 같은 반 친구들을 참 많이 만나는 것 같아요. 비키도 그렇고, 유네도 그렇고. 얼핏 봤는데 해변 반대편에 세라 선생님도 계셨으니까요.”

“…백장미 부대가 해상 훈련을 마치고 복귀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들도 오늘 같은 날엔 훈련을 끝내고 해변에서 더위를 씻는 게 당연한 수순이겠지.”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괴물들만 모아놓은 백장미 부대일지라도 이런 살인적인 뙤약볕 아래에서 훈련을 했으면 바닷가에 몸이라도 담가야 마땅했다.

타고시아 해변은 군인인 그들에게 좋은 휴식거리일 것이다. 그런데 내 악몽 때문에 뇌우라도 내리쳤다면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에게 큰 불평을 들을 뻔했어.

“그런데 비키 셀로니아와 유네 나르타도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 타고시아 해변에?”

“예, 가족들과 함께 휴양을 하러 온 것 같았어요. 왕녀님은 모르셨나요?”

“몰랐다. 대단한 우연이구나.”

날이 덥긴 하지만 8월 말은 휴가를 즐기기엔 어중간한 여름의 끝물이 아닌가. 그런데 이 타고시아 해변에 눈에 익은 반 친구들이 몇 명이고 있다니 그 인연이 신기하다.

물론 이 인위적인 우연은 모두 미나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 이에 끝나지 않고 곧 마지막 초대 손님이 타고시아 해변에 들어설 것이다.

미나가 수줍게 웃으며 왕녀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선사해 준 악몽은 어땠냐고 속삭이고 싶은 입술이 요염하게 실룩거렸다.

챕터 6. [8월. 여름의 끝은 노을 진 백사장에서 맞이하는 것이다] (2)

아주 뻔할 뻔 자로 어떤 양산형 시간 때우기용 장르든 여름만 되었다 하면 추진되는 바다 피서는 “와! 바다다!”라는 들어봄직한 외침과 함께 화창한 하늘 아래 파도가 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쨍한 태양. 피서를 즐기는 사람들. 살갗이 드러나는 수영복. 거대한 튜브. 모래사장의 파라솔.

일련의 것들이 카메라에 비치고 나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귀찮은 과정은 전부 편집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주인공 무리다.

그와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시선이 이동하며 비추는 장면은 히로인들의 새 수영복 자랑 시간.

아세미가 빙그르르 돌아보며 귀여운 아동용 수영복을 류제에게 어필했다.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의 수영복 어때?”

“귀엽네. 렌, 괜찮아? 아까 계속 기차 화장실 안에 틀어박혀 있더니.”

“난 괜찮아, 짜샤. 것보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가 더 어리둥절하다.”

류제가 수영복 자랑 시간을 싹둑 잘라먹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재경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저 추가시험에 합격해서 류제를 졸라 샤브샤브를 먹으러 내려왔던 것일 뿐인데 갑자기 기차를 타고 타고시아 해변까지 오게 되다니. 이 무슨 두려울 정도의 추진력이란 말인가. 무섭다, 류제네 수녀 누나.

아무리 여행권이 당첨되었고, 그게 정해진 스토리라인이라지만 그런 수상쩍은 이벤트를 냉큼 받다니 저 누나는 얼마나 순진한 거야? 게다가 오늘 처음 본 나까지 냉큼 데리고 오는 건 또 뭔데?

안색이 좋지 못한 재경을 걱정하느라 또 류제가 자신을 봐주지 않자 아세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으으, 류제 오라버니는 또 저 돼지한테만 관심을 주지? 아세미는 실망이야!”

“이제 메기에서 돼지로 진화했냐? 내가 왜 돼지야? 나는 정상 체중이거든? 내 복근 안 보여? 차라리 메기라고 해라.”

“몰라! 아세미는 더러운 건 안 봐.”

“진짜 쪼그마한 게 입만 살아가지고!”

“어머, 아직도 싸우는 거니? 기차에서 화해한 거 아니었어?”

처음으로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고 헤매다가 뒤늦게 온 루나가 모래사장을 차며 달려왔다. 그들의 시선이 루나에게 꽂혔다. 과감한 수영복이 부담스러웠던 그녀가 쑥스럽게 몸을 가리면서 머뭇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가리는 수녀복을 벗고 드러낸 육체는 상처도 많고 고되다. 하지만 대지의 여신처럼 풍만하고 아름다웠다.

“누…누나까지 웬일이에요? 그런 옷을 다 입고…….”

“바다잖니. 바다는 이래야지. 후후후, 이때 아니면 입을 수도 없고. 부끄럽지만 내 꿈이었단다.”

과감한 옷을 입었으니 반응이 유별날 것이라 기대했던 그녀는 류제가 생각보다 시큰둥하자 머쓱했는지 어서 가자며 귀여운 동생들의 등을 밀었다.

수상쩍은 여행권 패키지 비용에 포함된 평범한 반바지 수영복 차림이었던 류제와 재경은 루나의 과감한 비키니 핏을 보자 무럭무럭 자라나는 엉큼한 생각을 뿌리치며 후다닥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루나에게서 멀어졌다.

“어머? 그렇게 빨리 바다에 들어가고 싶었나? 다 큰 것처럼 보여도 아직 애들이라니까.”

그들이 왜 도망가는지 대충 알아챈 아세미는 어른인 루나의 몸을 보다가 자신의 막대기 같은 어린아이 몸매를 보고는 볼을 부풀었다.

루나 언니도 아세미 하나도 안 도와주잖아! 나도 3~4년만 지나면 루나 언니처럼 저렇게 될 수 있다고! 류제 오라버니가 없는 동안 키도 많이 컸는데 왜 류제 오라버니는 아세미만 뒷전이야?

까딱했다간 류제가 은팔찌를 차게 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품은 아세미가 한시라도 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며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17살. 사춘기 소년들이 보기엔 남사스럽게 육덕진 비키니에서 도망쳐 달궈진 모래사장을 달린 두 남정네들은 그 풍만한 신체로 가득 채워진 화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바다에 몸을 담갔다.

수녀 누나가 비키니 차림이라니. 너무 갭이 크잖아! 암만 바다라지만 수녀라고 해서 건전할 줄 알았다고, 난!

재경이 무언의 비명을 질렀다. 루나의 비키니는 암만 봐도 렌 지미가 입학식 전날 가져온 19금 잡지에나 있을 법한 차림이었다. 그런 남사스러운 옷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었다.

19금 잡지 보면 할머니가 감옥 간다고 했는데 그럼 잡지 말고 실제 사람을 보면 어떻게 되는 건가. 알고 싶지 않았다.

류제도 평생 루나가 수녀복을 입은 모습만 봤지 저런 수영복을 입은 걸 처음 본지라 그 갭에 놀라 얼결에 같이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푸하, 시원해. 드디어 살겠네!”

몸에 열이 오르기 전에 차가운 바다에 얼굴을 쑤셔 넣었던 재경이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푸르르 털었다.

살인적인 뙤약볕이 너무해도 출렁이는 파도가 정강이와 무릎을 시원하게 식혀서 피서를 즐기기 딱 좋았다. 간질간질 물에 젖은 모래가 재경의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장난질을 쳤다. 이제야 머릿속이 좀 진정된다.

바다라.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세계의 낯선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할머니도 이런 바다를 본 적이 있을까.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마. 파도가 사람 덮치는 게 한순간이래.”

“거참, 걱정도 팔자다. 여기서 파도가 날 덮칠 것 같냐?”

늘 그랬듯 류제의 쓸데없는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재경이 바닷물에 세수를 했다. 짠 기가 입 안에 훅 돌았다. 바다는 진짜 짜다. 재경이 짭짭짭 입맛을 다셨다.

“뭐 그렇긴 하지만. 바다에 들어오기 전에 파라솔 자리를 잡아야겠지? 짐 놔둬야 하니까.”

“맞다. 깜짝 놀라서 그대로 두고 달려와 버렸네.”

당첨된 패키지에 포함된 렌털 파라솔 번호를 떠올린 재경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엉겁결에 바다로 뛰어들어 오긴 했지만 타고시아 해변에 와서 처음 해야 할 건 파라솔 확보였다.

류제가 잊어버리기 전에 가자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첨벙첨벙 해안가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던 재경이 일순 말썽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류제의 등이 무방비하다. 아까 학교에서도 내가 놀라게 하기 전에 류제가 먼저 날 쓰러뜨렸지. 이번에도 당할까 보냐.

재경이 류제를 따라가는 척 살금살금 손을 바다에 집어넣어 물을 한 바구니 모았다.

“에잇!”

“으앗, 차가워!”

“우하하. 멍청이. 감히 나한테 등을 보이다니. 어떠냐! 에잇. 에잇!”

“으악, 그건 반칙이지!”

뒤늦게 물장구질에 동참한 류제가 재경의 비겁한 공격에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먼저 눈을 찌르는 바다의 짠 기운 때문에 류제는 도저히 시야를 확보할 수 없어서 공격이 자꾸 엇나가고 말았다.

첨벙첨벙. 결국 류제가 재경의 집요한 술수에 눌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렌, 그만! 항복! 그만하라니까!”

“아…아뇨, 전 괜찮… 으응? 류제 군?”

부딪힌 감촉이 조그마하니 작은 체구라서 아세미보다 조금 큰 어린아이인가보다 했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유네였다.

저번 달을 마지막으로 여름방학 내내 볼 수 없었던 유네가 우리와 함께 타고시아 해변에? 기막힌 우연에 류제가 넋이 나갔다.

바다에 어울리는 파란색 머리에 눈에 띄는 투피스 여자 수영복이 앙증맞게 귀엽다. 손에는 막 가지고 놀았던 비치 볼이 들려있었다.

“어어… 렌 군도 있어?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그야 여름에 바닷가에 온 이유가 따로 있겠냐만 류제는 그 물음을 그대로 유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유네! 역시 너도 왔구나. 오랜만이네!”

자세한 스토리가 정리된 공책을 참고할 수는 없어도 n회차 플레이를 했었기에 이 해변에서 모든 히로인들이 총출동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던 재경이 유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어어어…….”

류제 군에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렌 군까지 타고시아 해변에서 마주치다니, 세상에. 유네가 감격한 눈빛으로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엄청난 우연이다……! 신기해!”

“너야말로 이런 곳에 웬일이야. 놀러온 거야?”

류제가 위아래로 익숙하지 않은 차림의 유네를 훑었다. 남장을 했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 평소처럼 대하기 어색했다.

유네는 자신을 포함해 돌연 가족들 전부 변덕을 부려 아침부터 부랴부랴 타고시아 해변에 온 것을 떠올렸다. 오늘따라 바다에 너무 가고 싶었달까. 그런 하찮은 이유를 말하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아…하하하. 근처에 별장이 있거든. 너무 더워서 부모님하고 마지막으로 놀러 왔어. 다음 주면 개학인데 아직도 덥네.”

“찜통이야 완전. 가만히 있어도 더워 죽어. 그거 알아, 유네? 류제 이 자식은 혼자서만 어빌리티 사용해서 땀 한 방울 안 흘린다. 진짜 얄밉지 않냐.”

“역시 류제 군의 어빌리티는 부러워. 그럼 둘이서 피서 온 거야? 혼자서 심심했는데 잘됐다. 같이 놀자.”

여기서 두 사람을 만난 게 운명 같다 생각했는지 유네가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개의 눈으로 초롱초롱 그들에게 기대를 표했다.

매일 남자 교복 입은 것만 보다가 갑자기 투피스 수영복이라니. 아무리 저번 달에 우리들이 유네가 여자란 걸 알게 되었어도 허들이 너무 높아진 거 아닌가.

재경이 유네의 생소한 차림을 보다가 괜히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유네가 그걸 듣고 아차 제 옷을 둘러보았다.

“앗! 에헤헤. 두 사람한테는 이런 차림이 처음이네. 어…어때?”

“어…어울리네.”

“적응은 안 되지만.”

여기서는 내 뒤를 이어 ‘정말 귀여워!’라고 답하는 게 맞다고, 이 바보 류제!

재경은 또 한순간에 대충대충 선택지를 고르는 류제를 흘기며 혀를 찼다. 적응 안 된다는 말에 유네는 역시 그렇다며 열없게 웃어 보였다.

뒤이어 자기가 한 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류제가 더듬더듬 사족을 붙였다.

“이렇게 보니까 여자애는 맞구나. 이게 바로 선입견이라는 건가? 으음.”

“그…그래?”

반나신을 봐도 여자란 걸 눈치챌 구석이 없던 류제가 저런 말을 하니까 왠지 으쓱하다.

적당히 드러나는 유네의 가느다랗고 하얀 팔다리와 예쁜 머리띠, 손목에는 슬렉터와 재경이 준 소원 팔찌가 다른 액세서리와 함께 걸려있었다. 다분히 소녀 같은 취향이다.

수녀 누나도 그렇고 유네도 그렇고 여기도 저기도 격차가 엄청나구만. 왜 여름만 되면 미연시에서 일부러 이런 해수욕장에 데리고 와 벗겨대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납득한 재경이 음음 고개를 끄덕거렸다.

꽤나 집요한 렌의 시선에 류제도 유네도 어리둥절하던 중 멀리서 그들의 일행이 류제와 재경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렌아! 류제야! 어디에 있니?”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는 쉬고 싶어!”

“루나 누나가 우릴 찾네. 미안, 우리 지금 파라솔 자리 맡으러 가야 하거든. 나중에 같이 놀자.”

“어… 응! 일행이 있었구나. 난 여기서 놀고 있을게. 정리되면 와! 같이 비치발리볼 게임 하자.”

“이따 봐, 유네.”

무릎까지 오는 바닷물을 헤치며 해변으로 걸어간 두 사람을 보며 유네가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둘이서 놀러 온 줄 알았더니 누구지? 유네가 사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좇았다.

어른의 몸매를 자랑하는 풍만한 여성과 유네보다도 작은 어린아이가 류제와 렌을 발견하고 알은척을 한다.

류제 군은 아가타에 지인이 없다고 했는데. 렌 군은 그런 말 잘 안 하니까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렌 군의 지인인가? 하지만 저 두 사람 모두 왠지 류제 군에게 더 살가운걸.

그들이 유네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출렁거리는 물의 감촉을 느끼며 유네가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끼는 것 같았는데 다시 맑아졌다.

엄마랑 아빠는 다른 곳에서 태평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어서 나 혼자 심심했는데 잘 됐다. 오늘은 류제 군하고 렌 군하고 같이 바비큐 파티나 해볼까? 고기 굽는 렌 군은 멋지고 귀여워서 좋아.

렌과 만나서 기쁜 나머지 앞으로 있을 일을 멋대로 망상하며 히죽히죽 웃는 유네의 뒤로 붉은 포니테일이 찰랑거리며 지나쳤다.

태양 아래로 드러나는 우윳빛 살갗. 구매해서 처음 입어보는 조금 과감한 비키니가 부끄럽지만 이제 몇 년만 더 있으면 어른이니까 이 정도쯤은 전혀 문제없다.

“지쳤어.”

지금까지 계속 바다 수영을 즐기고 있던 비키가 허리에 낀 튜브를 빼냈다.

남들에게 들키면 부끄럽지만 비키는 물에 약했다. 비키는 그걸 ‘화염’ 어빌리티 탓이라고 변명하고 있었다.

하여튼 비키는 맥주병이기 때문에 바닷가에 놀러 갈 때면 튜브가 필수였다. 모든 분야에서 완벽해야 하는 셀로니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부끄럽지만 수…수영 정도는 좀 못해도 되잖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일광욕이라도 하다가 돌아갈까? 유모가 걱정하니까.”

유네와 마찬가지로 타고시아 해변에 셀로니아 가문의 이름으로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비키는 변덕일지라도 오랜만에 이곳에 오길 잘했다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순수하게 놀러 올 목적으로 집을 떠난 건 가족들이 참사를 당했던 이후로 처음인가. 공부가 지쳤을 때 가끔씩은 기분 전환으로 이런 것도 좋네. 머리도 잘 돌아가고.

노점상에서 시원한 블루 레모네이드를 산 비키가 빨대로 내용물을 쭈욱 들이켰다. 맡아두었던 셀로니아가 전용 파라솔 아래 선베드에 앉은 그녀가 다리를 쭉 뻗었다.

쉬면서 가볍게 낮잠이나 자볼까.

“파라솔이 한 개뿐이야? 선베드도 한 개? 사람이 네 명인데?”

“뭐, 무료 당첨권이었잖아. 어쩔 수 없지.”

“옆에 빈 파라솔 그냥 쓰면 안 되려나? 어차피 쓰는 사람도 없는데.”

“지루해. 아세미는 빨리 바다에 가서 놀고 싶어.”

“혼자 가서 놀면 되잖아. 징징거리지 마, 건방진 꼬맹아. 세상살이는 원래 혼자 하는 거야.”

“너한테 안 물어봤어. 멋대로 답하지 마. 못생긴 게!”

“뭐라고?!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이게 진짜!”

“꺄아악! 류제 오라버니! 봤어? 저 사악한 인간이 본색을 드러내고 아세미를 때렸어!”

가족끼리 놀러 온 건지 옆자리에서 교양도 없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셀로니아 가문의 명당 파라솔 자리가 무색할 정도다.

옆이 소란스럽든 말든 선베드에 여유롭게 누워 블루 레모네이드를 즐기던 비키는 꺄악꺄악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는 어린아이가 모래를 던지다가 자신의 음료수에 골인시킨 것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저기 잠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똑바로 관리 못 해?”

“으아아… 아세미! 그러면 못써. 죄송합… 비키?”

렌에게 심술을 부리는 아세미를 말리기 위해 쭈그려 앉은 류제가 막냇동생을 붙들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비키니 차림의 비키가 있었다.

유네에 이어 비키까지? 거기에 비키니 차림? 류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진짜 안 어울린다.

“아세미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걸!”

책임을 회피하는 아세미는 사나운 인상의 비키가 무서워서 류제의 뒤에 숨었다. 트레이드마크인 노란색 리본을 도깨비 뿔처럼 세운 채 으르렁거리는 비키는 여기서 볼 일 없을 거라 여겼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류제?”

에퉤퉤. 아세미가 던진 모래를 먹어 작은 혀를 페페거리던 재경도 비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네에 이어 비키인가. 그다음은 세라 선생님이었던가? 왕녀였던가? 역시 알아서 하나둘씩 스토리대로 등장하는고만.

머리에 묻은 모래를 털어낸 재경은 너무 놀라 말을 잃은 두 사람 대신 비키에게 모르는 척 인사를 했다.

“뭐야, 비키. 너도 놀러 왔냐?”

“거기에 바보 렌까지! 여기는 무슨 일이야. 잠깐… 오늘은 평일인데? 설마 보충수업 땡땡이친 건 아니겠지?”

“무슨 여름방학 내내 보충수업 듣는 줄 아나. 오늘 추가시험 합격했거든? 난 이제 자유의 몸이라고.”

“하, 오랜만인데도 기가 찰 정도로 바보 같아. 어디, 여기까지 놀러 온 걸 보면 방학 내내 머리통에 뭐가 쌓이긴 했을까?”

비키가 비죽비죽 웃으면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교복 차림이었다면 살짝 엉덩이를 내빼고 가슴을 들이민, 자신감 넘치면서 상대방을 놀리려는 포즈겠지만 이게 또 차림이 다르니 기묘하다.

게다가 저 파렴치한 수영복은 뭐야. 저런 취향이야? 재경이 얼떨떨해서 뻘게진 얼굴을 획 돌렸다. 저런 도발하는 말, 받아줄 가치도 없다.

“어머나. 류제야, 저 예쁜 여자아이는 누구니? 친구니?”

어떻게 하면 작은 선베드를 4명이서 번갈아 가며 이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루나는 아세미 때문에 다툼이 인 옆자리 사람과 류제의 분위기에서 친근함을 엿보고 발랄하게 물었다.

류제가 그녀에게 선뜻 비키를 소개시켜 주었다.

“네, 같은 반 친구예요. 반장이고.”

“비…비키 셀로니아라고 합니다.”

류제와 어울리지 않는 연상의 여자에게 비키가 긴장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비키가 류제의 허리를 찌르며 눈치로 물었다. 누구야?

“이분은 우리 고아원 수녀님이야. 나 때문에 아가타까지 올라오셨는데 마침 타고시아 해변 여행권이 당첨되었지 뭐야. 그리고 이쪽은 아세미 신리. 내 여동생.”

“여…여동생?”

셀로니아 가문의 막내였던 비키가 동생이란 단어를 도저히 용납 못 하겠다며 그를 경계했다.

여동생이라니. 저 타인에게 관심 없고 자기 일 아니면 대충대충 사는 류제 신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요즘엔 좀 변하는가 싶지만 사람 본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않잖아. 그런 류제한테 여동생이라고?

아하, 저 트윈테일 꼬마. 시끄럽게 떽떽거리는 게 가정교육의 문제인가 했는데 류제가 관심을 안 주니까 일부러 저러는 거였던 건가. 그런 거라면 새끼손가락 한 마디만큼은 아량을 베풀어 줄 수 있지.

“우리 고아원 막내야. 나랑 7살 차이.”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의 약혼녀야!”

예쁜 비키를 보고 류제를 향한 독점욕을 불태운 비키가 류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눈에서 보이는 진심에 비키가 이전에 재경이 했던 것처럼 짜게 식은 눈초리로 류제를 내리깔았다.

“아아… 뭐, 붙잡혀 가지나 말아라.”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렌과 똑같은 반응이다. 류제가 식겁해서 부리나케 손을 내저었다.

“그러니까 아니래도! 아세미, 내 친구가 오해하잖아.”

“오해 아닌걸.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랑 결혼을 약속했는걸!”

“으하하. 비키가 등장했으니 나는 저 건방진 꼬맹이로부터 해방인가!”

타깃에서 벗어난 재경이 이제야 살겠다며 허리를 쭉 폈다. 이제 히로인들이 하나둘 등장하고 있으니 정상적으로 아세미의 모든 어그로가 다른 애들한테 향할 거다.

어휴, 하여튼 꼬맹이. 커서 뭐가 되려고 벌써부터 저렇게 욕심이 크냐. 진짜 애만 아니었으면 뒤통수를 그냥 팍!

“레엔. 가만히 있지만 말고 해명해 줘!”

“사실이잖아.”

“역시……. 변태.”

“그렇긴 하지만 그러니까 그냥 그건 어린아이를 상대로……!”

류제가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했지만 비키와 재경 사이에서 류제는 일단 로리 캐릭터에 흥미를 보이는 소아성애자로 낙인찍힌 모양이다.

억울한 류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아세미는 그저 류제가 좋아서 에헤헤 좋다고 끌어안았다.

아세미 덕분에 약속이란 상대가 누가 되었건 함부로 할 것이 못 된다는 걸 몸소 깨달은 류제는 비키에게 다시금 자신이 변태라는 걸 환기시켜 줌으로써 변명할 여력을 잃었다.

다 필요 없고 제발 아세미가 무럭무럭 자라 무사히 자기 또래 아이를 좋아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세미야. 언니 오빠들 이야기하는 데 방해하면 못써요. 그리고 언니한테 실례한 건 제대로 사과해야지.”

참패한 류제 대신 구세주처럼 등장한 루나가 아세미에게 잔소리했다. 고아원에서 제일가는 응석꾸러기에 제멋대로인 아이지만 루나의 엄격함을 알고 있는 아세미가 찔리는 얼굴로 외면했다.

억울하다. 아세미가 뭐 어쨌다고. 아세미가 루나 언니에게 혼나는 건 다 저 못생기고 성격 더러운 돼지 때문이야.

“아세미는 잘못한 거 없…….”

“아세미야! 류제 오빠 만나러 올 때 언니랑 한 약속이 뭐였지?”

아세미는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세미는 사랑하는 류제와 그 친구들 앞에서 질타당하자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류제는 멀뚱멀뚱 서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아세미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세미가 잘못했어요……. 음료수에 흙 던져서 죄송합니다.”

재경은 저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꼬맹이가 수녀 누나가 꾸지람 한번 했다고 비키에게 곧바로 사과하는 게 신기했다.

결혼이니 뭐니 발라당 까졌어도 애는 애라는 건가? 재경이 기웃거리자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착각한 아세미는 치욕스러워 주먹을 바들바들 떨었다.

뜻밖에 친구들을 만나는 통에 마시던 음료수가 엉망이 되었다는 걸 잊어버렸던 비키가 아세미의 사과를 듣고 어흠, 헛기침을 했다.

“어린아이이고 초범이니 이번만큼은 내가 관대하게 넘어가 주지. 하지만 다시는 이 셀로니아 가문 영애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도록 유의해.”

“에헤이, 이럴 때만 귀족인 척~”

“시…시끄러워! 원래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고! 알아? 나는 원래 미천한 평민인 너희들과는 어울릴 수 없는 고귀한 대귀족, 셀로니아 후작 가문의 사람이라고! 설마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그런 애가 라우라 축제 때 푸딩이 먹고 싶다고 많이 먹―”

“류제, 너는 조용히 해!”

평생의 비밀에 부치기로 한 금단의 문장을 말하려고 하자 비키가 류제의 정강이를 거세게 걷어찼다. 그러다 류제의 보호자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걸 인지하고 우물쭈물 고귀한 귀족 행세를 했다.

그런 헐벗은 몸으로 그래봤자 고귀하다니 뭐니 하나도 태 안 산다.

“호호. 류제야, 친구분이 친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어디가요. 그냥 폭력녀지!”

“으하하하, 폭력녀래. 류제한테 동의. 하하하!”

“윽, 너…너…너희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나도……!”

“왜 날 같이 끼고 난리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거든?”

“시…시끄러워. 너희는 한 세트니까 연대책임이야!”

“그게 뭐야. 고귀한 귀족 나으리께서 이렇게 판단이 불합리하면 우리 같은 평민은 어떻게 살라는 거냐?”

“잔말하지 마. 또 폭력녀라 그랬다간 진짜 폭력이 뭔지 보여줄 테다.”

말다툼을 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싫은 기색이 없었다. 여전히 막무가내지만 오랜만에 비키와 이야기하고 있으니 반가움이 물씬 일었다.

그들은 옆에 아세미와 루나가 있다는 것도 잊고 학교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 뒷전이 되어버린 아세미는 자기가 모르는 류제를 보는 것 같아 속이 거북했다.

류제 오빠는 항상 의젓하고 왕자님 같고 아세미만 챙겨야 하는데 저런 모습은 전혀 의젓하지도 않고 아세미만의 왕자님도 아니다. 분명 류제 오라버니는 아세미 같은 거 아무래도 좋은 거다. 그래서 변한 걸 거야.

“아세미야, 류제가 저러는 거 처음 봤지? 정말 즐거워 보이지 않니?”

반면 타지로 떠난 류제가 늘 걱정이었던 루나는 류제가 자기 또래 친구들하고 평범하게 이야기하고 노는 것이 그저 감사하고 신기했다.

고아원에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 누나나 동생들뿐이지, 철이 일찍 들어서 동생들에게 늘 양보만 하지. 드디어 제 나이 또래처럼 구는 걸 보고 있자니 마냥 뿌듯했다.

루나는 더 이상 류제를 독점하지 못하는 아세미를 상냥하게 다독거려 주었다.

“류제 오빠도 아직 아이니까 당연한 거란다. 그러니 아세미, 여기서는 이해해 주련. 분명 고아원에서는 아세미의 오빠로 돌아가 줄 거야.”

믿었던 루나까지 저런 말을 한다. 어린 아세미는 마음에 안 들어서 고개를 돌리고 멋대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루나가 아세미를 부르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찰팍찰팍 아세미의 발자취를 따라 모래사장이 옅게 들썩거렸다.

이렇게 하면 류제가 늘 뒤쫓아 찾아와서 같이 놀아주고는 했는데 지금은 친구들하고 이야기한다고 자기는 안중에도 없다.

류제 오라버니, 미워.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만 보기 위해서 먼 길을 따라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류제 오라버니는 아세미를 신경도 안 쓰지. 류제 오라버니는 아세미가 싫어진 거야!

눈물이 찔끔 흐른 아세미는 절대 갓난쟁이처럼 울지 않겠다며 얼굴을 찌그러뜨렸다. 모래사장을 달려나가던 아세미는 결국 팔뚝으로 눈을 벅벅 닦았다.

아세미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아이다. 머릿속으로 아세미 불행론을 펼치던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고 누군가와 부딪혀 버리고 말았다.

“아야!”

작은 아세미가 반작용으로 튕겨서 모래사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세미처럼 귀여운 아이를 못 보고 세게 부딪히다니. 이래서 어른들이란!

안 그래도 화나 죽겠는데 꼴사납게 넘어지기까지 하자 아세미는 그 화풀이로 상대방에게 버럭 소리 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아세미는 까마득히 위로 보이는 얼굴이 무뚝뚝해서 한 번 깜짝 놀라고, 요정과도 같은 용모에 두 번 놀라느라 목소리를 내는 것도 잊고 말았다.

“네 이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감히!”

니냐롯트의 옆에서 양산을 들어주던 루이나가 아세미에게 외쳤다. 호랑이 같은 불호령에 아세미가 겁을 집어먹자 니냐롯트가 되었다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느냐.”

니냐롯트가 친히 쭈그려 앉아 넘어진 아세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해변에 산책을 나온 것이라 옷은 여름에 입는 시폰 롱스커트에 가벼운 나시 차림이지만 그 품새에서 우아함이 느껴진다.

신비로운 은색 눈동자와 누구와 비견해도 죄스러울 뿐인 아름다운 용모에 심술을 부리려고 했던 아세미의 얼굴이 도리어 시뻘게졌다.

“아…아…아세미는 괘…괜찮아요.”

“다행이구나. 그런데 왜 울고 있는 것이냐? 부모님을 잃어버린 것이냐?”

니냐롯트가 아세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워주었다.

부모를 잃어버렸냐니. 아세미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엉덩이를 털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세미는 그냥 답답해서 그래요.”

“행복해야 할 어린아이가 뭐가 그리 답답하니?”

“애 취급하지 마요. 아세미는 조금만 더 있으면 어른인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주제에 어이없다. 루이나는 허, 콧방귀를 뀌며 처음 보는 아이에게 친절을 베푸는 니냐롯트를 만류했다.

“왕녀 저하. 아이를 상대로 시간을 낭비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귀중한 시간입니다. 산책을 계속하시지요.”

“뭐 어떤가, 루이나. 휴가이지 않느냐. 나도 지금만큼은 잠시 왕녀의 자리에서 휴가를 나왔다고 하면 이런 어린아이와도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왕녀 저하!”

“왕녀님? 왕녀라면… 공주님이라고 루나 언니가 그랬는데.”

루이나는 점점 체통을 잃는 것 같은 니냐롯트의 모습에 속이 다 타들어 갔다. 일국의 왕녀가 모래사장에 쭈그려 앉으시다니 천지가 개벽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게 다 제립학교에서 유명한 불순분자들과 어울리니 그런 거다.

특히나 그 렌 지미! 도대체가 그 하찮은 미꾸라지 같은 게 저하께 무슨 바람을 집어넣어 놓은 건지 원!

“언니는 공주님이에요?”

“그럼. 공주님이지.”

아세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모래사장에 주저앉은 모습도 기품이 흘러넘친다.

공주님이라는 말에 아세미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이런 모래사장 한가운데에서 공주님을 만나다니. 아세미는 어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일까. 아세미의 불행론이 행복론으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공주님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그대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왔느냐?”

“바…바닷가를 보러 온 거였는데요.”

“나도 바닷가를 보러 왔단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탁 트여서 기분이 좋거든.”

평화로운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악몽의 도가니도 없던 것처럼 된다. 뭉게구름을 쓴 바다의 경계를 응시하던 니냐롯트가 그렇지 않나며 아세미를 향해 작게 웃었다.

요정이 웃고 있어……! 심장이 두근거린 아세미가 본의 아니게 허둥거렸다.

니냐롯트는 그런 아세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시 긴장한 건가? 아무래도 이런 어린아이 혼자 타고시아 해변까지 온 건 아닐 거고.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흘러내린 아세미의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상냥하게 타일렀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걱정할지도 모른단다.”

“별로 그러지도 않을걸요. 루나 언니도 류제 오라버니도 이제 아세미한테 관심 없으니까.”

아세미가 자신은 모르쇠하고 친구들하고만 이야기하는 류제를 떠올리며 흥, 도리질을 쳤다. 익숙한 이름에 니냐롯트가 후후 웃었다. 그걸 본 아세미가 볼을 부풀며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님도 아세미 보면서 꼬맹이 주제에 건방지다고 생각했죠?”

“아니, 그건 아니다만.”

“아세미도 알아요. 건방진 건 류제 오라버니 옆에 붙어 다니는 그 못생긴 돼지인데. 어른들은 맨날 아세미가 너무하다고 그러죠. 그거 다 몰라서 그런 거예요.”

아세미는 어른들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늘 제멋대로라고 투덜거렸다. 늘 아세미의 말을 부정만 한다. 류제 오라버니만큼은 그러지 않았는데 왜 여기서는 아세미를 부정하는 걸까. 역시 아세미가 싫어진 걸까. 아가타에 와서 변했어.

“내가 웃은 건 그대의 오라버니가 나의 벗과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를 비웃은 게 아냐. 그러니 풀 죽지 말라.”

“류제 오라버니의 이름이랑요?”

“그래, 그대더러 건방지다 생각한 것은 아니었어.”

왕녀가 친히 손을 내밀어 아세미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세미의 트윈테일이 물결처럼 흔들거렸다.

루이나는 답답해서 눈을 질끈 감고 몰래 억눌린 한숨을 내쉬었다. 신원도 모르는 고작 어린아이에게 저런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주다니. 혹여 누군가가 이런 모습을 보고 왕녀를 호락호락하게 생각할까 걱정이 앞선다.

나중에 한 나라의 황제가 되어야 하는 분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데 저 건방진 꼬맹이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쓰다듬지 말라고 버둥거린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건방진 것들투성이다.

“그럼 그대는 그대를 신경 써주지 않는 가족들이 미워 뛰쳐나오다 나와 부딪힌 것인가?”

“미…미워하는 건 아니에요. 아세미는 류제 오라버니가 정말 좋은걸요.”

“하지만 그대의 오라버니는 그대를 신경 쓰지 않고?”

“맞아요. 분명 아세미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시치미 떼면서 아니라고 그러고. 분명 아세미가 싫어진 거예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니냐롯트는 아세미와 조금의 동질감을 느끼다가 손을 우뚝 멈추었다.

친동생과… 결혼… 약속……? 그녀는 자기가 잘못 이해했나, 머리에 에러가 떠서 새하얘지는 바람에 사고가 정지되었다.

자기가 모르는 풍습이 이 키아나트리체에 있었나, 그 짧은 순간 방대한 지식의 사고를 뒤진 니냐롯트는 뒤에서 양산을 들어주던 루이나를 곤란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윽, 귀여워. 저거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는 왕녀 저하의 안절부절못한 표정이다. 당장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아쉽다.

“어…어흠! 이봐, 꼬맹아. 남매끼리는 본래 결혼을 하지 못한다.”

“남매라도 피는 안 이어져 있는걸! 그러니 괜찮은걸! 류제 오라버니도 아세미랑 약조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그대 오라비는 연령이 어찌 되느냐?”

“아세미랑 7살 차이예요. 어엿한 어른이지요.”

피가 안 이어진 남매에… 일곱 살 차이. 그렇다면 나와 동갑이다. 나와 동갑인 남자가 저런 어린아이와 결혼 약조를 했다라. 이 무슨 마니악하고 변태스러운 남자란 말인가.

루이나와 니냐롯트가 질려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을 찰나 저 멀리서 아세미를 찾는 류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세미. 아세미! 어디 있어? 아세미!”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가 변태의 등장을 알리자 루이나도 니냐롯트도도 아세미를 보호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모래사장을 달려가며 아세미를 찾고 있는 건 아세미와 같이 검은색 머리를 하고 있는 류제 신리였다.

분명 또 그 모자란 주근깨투성이 못난이한테 정신이 팔려서 아세미 따윈 신경 안 쓸 거라 생각했는데 류제가 곧바로 자신을 찾아와 주자 아세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류제 오라버니는 아세미가 우선이야!

“류제 오라버니, 아세미 여기 있어!”

아세미가 신나서 류제를 향해 뛰어갔다.

니냐롯트도 아세미를 따라 천천히 쭈그렸던 다리를 폈다. 다시 봐도 아세미가 류제라 부르는 자는 그녀가 아는 류제 신리였다.

“혼자 왜 갑자기 뛰쳐나가고 그래. 길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여긴 우리 동네가 아니라서 미아가 되면 큰일 나.”

아세미를 발견한 류제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결혼이니 약혼자니 막무가내긴 해도 소중한 동생이니 혼자 뛰쳐나가 사라져버리면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다.

더군다나 아세미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 같은 아이니까 한시라도 시야에서 벗어나면 무슨 사고를 칠까 걱정되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군, 류제 신리여.”

“어…어어? 와…왕녀?”

“네 이놈! 말조심해라! ‘님’을 붙이지 못할까?!”

양산을 들고 있던 루이나가 버럭 외쳤다. 당장에라도 칼을 빼 들 듯한 얼굴이었으나 어린아이가 있다고 감내하는 걸 보니 눈곱만치의 상식은 있는 모양이다. 눈초리만큼은 류제를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로 보고 있었다.

“…설마 했더니 저 아이가 그대의 여동생이었나?”

“어? 아아, 아세미 말이지? 날 만나러 아가타까지 올라와 줬어. 우리 고아원 막냇동생이야. 왜?”

어째 설명을 하면 할수록 왕녀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류제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시선에 압도되어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주춤거리게 된다. 루이나야 날 싫어하니 둘째 치고. 내가 왕녀한테 뭐 나쁜 짓이라도 했었나? 없는데?

그 궁금증은 머지않아 단숨에 풀렸다.

“여동생이 그대의 약혼…자라고 하던데.”

또 그 말 때문인가. 류제는 이제 저런 시선은 지긋지긋하다며 입가를 실룩거리면서 문제의 근원인 아세미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아―세―미! 내가 남들한테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곤란하다고!”

“아파! 하지만 사실인걸. 류제 오라버니도 아세미랑 결혼할 거라고 말했으면서. 그보다 오라버니는 공주님과 아는 사이야?”

지금 이 상황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아세미가 물었다.

“어휴 내 머리야……. 왕녀와는 제립학교 같은 반 친구야. 그…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데 이상한 오해 하지 말아 줘. 약혼자고 뭐고 어린애 상대로 한 말을 그대로 믿는 건 아니겠지?”

류제가 골치가 아파 이마를 탁 치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이렇게까지 머리가 띵하지 않을 것 같다. 렌하고 비키에 이어서 왕녀한테까지 이런 오해를 받다니.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는 애들은 뭐야.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군. 어린아이가 끔찍한 범죄에 연루된 줄 알고 마음 졸였다. 그대의 말을 믿겠다만…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말게나. 헌데 그대를 타고시아 해변에서 만나다니 대단한 우연이구나.”

“제발 믿어주길 바란다. 나도 널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비키랑 유네도 만났는데 혹시 인사했어?”

그건 미나가 좀 전에 말해서 알고 있었다. 니냐롯트가 고개를 저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타고시아 해변은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하니 그들과 휴가가 겹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대는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여행권에 당첨되었거든. 기차 기한이 오늘까지라 겸사겸사 하루 놀다 가려고.”

“그렇군. 반대편 해변에서는 백장미 부대원들이 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던데 잘만 하면 담임 선생님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직 학교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개학한 것처럼 떠들썩한 기분이구나.”

그녀가 후후 웃었다.

담임 선생님이면, 세라 선생님? 류제가 세라가 백장미 부대와 있다는 사실에 눈에 불을 켰다. 백장미 부대라면 전장의 영웅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있는 곳 아냐? 그런 데에 선생님이 있다고?

“세라 선생님이 왜?”

“훈련을 하시는 것이겠지. 자세한 사항은 기밀이라 나도 말할 수 없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불편한 니냐롯트가 짐짓 입가를 달싹거리며 군인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반대편 해변을 바라보았다.

아주 작게나마 열과 행을 짓고 서있는 백장미 부대원들이 보였다.

“그대는 이 먼 곳을 여동생과 둘이서만 온 것인가?”

“아… 그건 아니야. 내가 살던 고아원 수녀 누나랑 렌하고 아세미하고 이렇게 4명이서 왔지. 렌도 방학 동안 학교에 있었거든.”

“그러한가. 그대가 렌 지미와 동행인 건 별일은 아니구나. 렌 지미는 보충수업을 듣는다고 했었나?”

“알고 있었어?”

“그렇게나 큰 소리로 떠들어대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류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렌이 기말고사 성적표가 나오고 나서 방학 내내 보충수업을 들어야 한다며 반 친구들한테 징징거리곤 했다. 그 소동 속에서 왕녀가 모르는 게 이상한 걸지도.

“그는 건강한가?”

“렌이야 건강 빼면 시체잖아. 걱정했는데 추가시험도 합격해서 2학기도 무사히 진급해.”

“그것참 기쁜 일이구나.”

니냐롯트가 피식 웃으며 올라간 입가를 손으로 다소곳하게 가렸다. 루이나가 씌워준 양산 아래에서 빛나는 은빛의 눈동자가 반가움으로 들떴다.

류제가 그 모습에 동요하기 전에 뒤에서 류제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제! 어디까지 간 거야?”

“어어. 렌! 이쪽이야. 아세미 찾았어!”

류제가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있는 아세미의 어깨를 붙들며 멀리서 다가오는 재경에게 외쳤다.

왕녀가 있는지도 모르고 푹푹 꺼지는 모래밭을 건너온 재경은 진짜 번거로운 애라고 투덜거리다가 중간에 가서야 루이나가 든 양산 아래에서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는 니냐롯트를 발견하고 뒤로 주춤거렸다.

젠장, 왕녀는 언제 또 만난 거야? 하여튼 류제 이 자식은 눈만 떼면 마음대로 스토리 진행시키고 그런다니까. 왕녀랑은 그때 이후로 말을 안 해서 껄끄러운데.

“오랜만이구나.”

“…뭐…….”

재경이 뻘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눈동자는 오갈 곳이 없다.

루이나는 류제고 렌 지미고 하나같이 건방지다며 옆에서 혀를 찼다. 왕녀 저하께서 저렇게 친히 말을 걸어주시는데 오만방자한 태도라니.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고 싶지만 저 드넓은 바다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저하께서 싫어하시니 그녀는 오늘도 이를 악물고 바득바득 화를 참았다.

중간 보스전 이후로 왕녀가 어색했던 재경은 어쩔 줄 몰라 눈치를 보다가 류제를 붙들며 말을 돌렸다.

“선베드는 비키가 빌려주기로 했어. 실컷 잘난 척하는 거 받아주느라 애썼다고.”

“진짜? 다행이네. 하나 가지고 4명이 어떻게 쓰나 걱정했더니.”

“꼬맹이 찾았으면 우리도 바다나 들어가자. 이러다 해 지면 놀지도 못하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잖아.”

당연 대화를 들었으니 그들이 지금부터 바닷가에서 놀 거라는 것을 짐작했을 루이나와 니냐롯트를 뒤돌아보며 류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우리는 놀러 간다. 너희는 바다에 안 들어가?”

“벌써 가는 거야?”

기척 없이 뒤에서 귀신처럼 등장한 미나가 재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왕녀를 경계하다 자지러지게 놀란 재경이 끼야악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뭐, 뭐, 뭐, 뭐야?!”

재경이 고개를 들어보니 등 쪽에 서있던 미나가 뒷짐을 진 채 괘씸하게 웃으며 재경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을 가리는 동그란 얼굴이 거꾸로 보였다.

“어라, 미안. 많이 놀랐어?”

“미나! 너도 와 있었어?”

또다시 아는 사람이 등장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우연이야. 타고시아 해변이 만남의 장이었다니. 류제가 오랜만에 만난 미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렌이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미나와는 대화를 많이 못 나누지만 좋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류제. 여름방학 잘 지냈니?”

“말하는 것을 깜박 잊었구나. 그녀는 나와 함께 왔다.”

미나가 싱긋 웃으며 왕녀 쪽에 가서 섰다.

류제가 화려하게 넘어진 재경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미나를 본 렌의 얼굴에 적개심이 가득했다. 이유는 몰라도 워낙 미나를 싫어하는 렌이다. 저러다 마음에도 없는 가시 돋친 말을 해서 미나를 상처받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별안간 걱정이 들었다.

“미나, 너까지 타고시아 해변에 있다니 신기하네.”

“실내파인 나도 가끔씩은 기분 전환이 필요하거든. 그런데 왕녀님은 아직도 옷 안 갈아입으신 건가요? 저와 같이 바다에 들어가기로 했잖아요. 기다리다 지쳐서 찾아왔건만 너무하셔라.”

오늘은 그저 해변 산책에 나선 것일 뿐인데 미나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니냐롯트는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나 어리둥절하다가 반대편에서 보이는 미나의 오묘한 분홍빛 눈동자에서 붉은 동공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퍼뜩 눈을 깜박거렸다.

“아, 미안하구나. 저 소녀와 이야기를 하느라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왕녀 저하. 제가 기억했어야 했는데 저조차도 잠시…….”

“괜찮아요. 덕분에 류제를 만날 수 있었잖아요. 같은 반 친구들을 이렇게나 많이 만나다니.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 할 정도인데요?”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레엔! 또 나쁜 소리 한다.”

주의하고 있던 류제가 잽싸게 재경의 입을 가려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을 막았다.

운명은 개뿔이. 재경은 서큐버스가 앞에서 알짱거리는 것이 퍽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지가 다 이상한 마법으로 꼬드겨가지고 데리고 온 거면서 운명 같은 소리 한다.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류제는 또 사람 좋은 말이나 하고 있고.

이번 챕터가 마족의 손아귀에서 굴러가는 스토리라는 게 재경은 불쾌했다. 반드시 스토리대로 굴러가게 하겠다고 결심한 지가 언젠데 냉큼 스토리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후. 당장이라도 미나의 정체를 폭로하고 싶어지네. 흥, 두고 봐라.

재경이 쀼루퉁하게 미나를 노려보니 미나는 순박한 눈동자를 굴리다가 쩔쩔매며 미안한 연기를 했다.

“너무 거창한 말을 했나? 렌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지?”

“흥! 알 게 뭐야. 난 네가 하는 마―”

“와아악. 아하하, 우리는 먼저 바다로 갈게. 파라솔 앞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심심하면 같이 놀자.”

“정말로? 고마워. 조금만 기다려. 왕녀님 데리고 곧 갈 거니까!”

니냐롯트는 자기가 진짜 바닷가에 들어가기로 했었나 아직도 어리둥절했지만 그런가 보다 하며 미나에게 등 떠밀려 탈의실로 향했다.

그나저나 렌 지미와 또다시 어울리게 되다니. 이번에야말로 말을 붙여보겠다며 니냐롯트가 작게 다짐했다.

철두철미한 루이나는 그들이 떠나든가 관심 없이 탈의실로 가는 도중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왕녀의 수영복 시리즈를 펼쳐놓고 뭐가 좋은지 중얼중얼 고민했다.

사악한 미나의 손아귀에서 버둥거리지도 못한 채 꼭두각시놀음이나 하는 바보들의 향연이다.

“왕녀도 루이나도 변함이 없구나. 내가 멋대로 굴었나? 혹시 싫어?”

렌이 유달리 미나를 껄끄러워했던 것을 떠올린 류제가 아차 싶어 렌을 돌아보았다. 뭐, 어쩌겠니. 재경은 하아, 한숨을 내쉬면서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놀기로 한 거 어쩔 수 없지.”

“정말 기분 나쁜 거 아니야? 하기야 넌 왕녀와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아니야!”

“아니라고?”

소리치는 걸 보니 기분 나쁜 것 같은데. 류제는 미안하다며 어깨동무를 하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다.

“류제 오라버니, 류제 오라버니, 류제 오라버니! 정말 공주님하고 아는 사이야?”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아세미는 왕녀가 떠나자 류제의 다리에 찰싹 들러붙었다. 그녀가 콧김을 내뿜으며 흥분을 내비쳤다.

키아나트리체의 공주님인 니냐롯트가 류제와 거리낌 없이 인사했다. 아세미는 류제를 다시 봤다며 눈을 빛내며 아양을 떨었다. 순정 만화 주인공 눈처럼 굉장히 부담스럽다.

“걷기 불편하잖아. 좋게 떨어져서 걸어.”

“아세미 감동했어! 역시 류제 오라버니는 저런 메기랑 급이 다른 사람이구나!”

“뭐라고? 야, 나도 왕녀하고 같은 반이거든? 못 봤냐? 왕녀가 나한테 웃어준 거?”

하찮은 재경이 뭐라 하건 아세미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왕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꽃밭에 가서는 제가 마치 일국의 공주라도 된 양 의기양양하다.

“공주님이라면 아세미의 라이벌로 충분하지. 공주님이라면 류제 오라버니의 옆자리에 세워주지 못할 것도 없어. 공주님을 직접 만나다니 아세미 너무 기뻐. 다 류제 오라버니 덕분이야.”

“야! 나도 왕녀하고 같은 반이라니까? 가끔씩 말도 한다고!”

“이따가 공주님하고 같이 놀기로 했지? 이거 꿈 아니지? 아세미 수영복 이상하지 않지?”

“야! 내 말 무시하지 마!”

아세미는 또 그 나이 또래에 가지는 공주님에 대한 환상을 품은 채 언제 삐졌냐는 듯이 헤벌쭉 웃어댔다.

류제 오라버니가 어빌리티가 발현되었을 때 엄청 대단한 거라고 루나 언니도 신부님도 떠들썩거렸지만 아세미는 어려서 그런 거 잘 몰랐다. 그때는 류제 오라버니가 멀리 떠나는 게 마냥 싫었는데.

그러던 류제 오라버니가 아가타에서 공주님하고 아는 사이가 되다니.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잖아. 역시 류제 오라버니는 최고로 대단하다.

재경은 아세미의 차별적인 태도에 질렸다. 저딴 꼬맹이 신경을 쓴 내가 어리석은 놈이다.

아세미를 대하는 심정이 복잡한 재경은 염분을 먹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왕녀는 물론이거니와 네가 음료수에 모래를 던진 사람은 대귀족이라고. 알기는 아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이란, 쯧.

“류제 오라버니는 정말 멋있어. 아세미 또 반해버렸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그러거나 말거나 왕녀를 봐서 신난 아세미는 류제에게 철썩 들러붙어 끊임없이 조잘거렸다. 비뚤어진 재경은 망가진 모래성을 퍽 발로 찼다.

지금부터 같이 놀 사람들이 하나같이 너 같은 꼬맹이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것도 모를 테지. 공주님이고 뭐고 주제 파악이나 해라.

어디 보자. 이따가 마지막으로 세라 쌤이랑 무서운 군인 아줌마하고 만나서 모든 히로인들과 함께 비치발리볼 게임을 하게 될 거다.

거기까지는 어찌어찌 기억이 났다. 근데 그건 별로 중요한 이벤트가 아니다. CG 올 컬렉트 도전 과제를 위해 레어 일러스트를 구하려고 열을 내지 않는 이상 반복할 것도 없는 컬렉터 전용 이벤트일 뿐이다.

이번 챕터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오늘 밤 숙소에서 잠을 잘 때 꿈속에서 일어났다.

호감도 이벤트는 실제 세상이 아닌 미나와 마지막 사천왕의 합작품으로 만들어진 ‘히로인들의 꿈과 연결된 세계’에 플레이어인 류제가 들어가면서 벌어진다.

말만 어렵지 뻔한 이야기다. 즉, 주인공이 꿈속의 세계에서 악몽 때문에 정신이 나가는 히로인들을 하나하나 구원해 주면서 동행하는 서유기적 이야기란 거다.

삼류 악당 렌 지미도 훼방을 놓으면서 등장했던 것 같은데 렌 지미야 늘 그렇듯 모든 일을 방해하지만 별 볼 일 없는 효력만 발휘하고 뒷전으로 밀려나는 캐릭터고,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게 분명하니까 그런 형태만 유지하면 내 개입은 신경 쓸 거 없다.

“렌, 뭘 또 멍때리고 있어?”

“세상에서 네가 제일 문제야!”

내가 류제를 도와주려면 류제가 꿈속 세계에서 나를 제일 먼저 찾아야 하는데 저놈은 내가 눈을 떼면 무슨 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안심을 못 하겠다.

주인공 주제에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나 짓지. 그러다 혼자서 선택지 1번 직진하다가 망하면 어쩌나 재경은 걱정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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