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7월. 그인 그녀와 그와 나] (4)
다음 날 아침,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가 이루어지는 운명의 날의 해가 떠올랐다.
류제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손님방에 딸린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가 크레셴도가 된 류제는 이 기쁜 날에 걸맞지 않게 잠을 설쳐 퀭한 얼굴이다. 그가 아침부터 화장실에서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재경에게 외쳤다.
“언제까지 화장실에 있을 거야? 유네네 어머니께서 아침 먹으라고 내려오라 하셨다고 했잖아!”
“알았어. 좀만 기다려 봐!”
“그 말만 지금 몇 분째인 줄 알아? 혹시 변비야? 내가 셀러리 편식하지 말라고 했지?”
“그런 거 아냐!”
거참, 화장실에서도 잔소리하긴. 변기 뚜껑을 내리고 앉은 재경이 혹시 몰라 들고 왔던 스토리 정리용 공책을 연이어 살폈다.
기억하는 내용을 족족 다 쓰기는 했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가물가물한 부분이 있었다. 벌써 내가 렌 지미한테 빙의한 지 무려 5개월 정도 지났고 말이야. 오늘 분명 유네가―
“어디…….”
재경이 유네의 세 번째 호감도 이벤트가 어떤 식으로 흘러갔었나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공책을 훑었다.
토대는 입학식 전날에 쓴 거라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들이 다 이상하다. 7월 남장여자 히로인의 호감도 이벤트.
챕터는 기말고사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이 끝나고 난 후, 유네를 싫어하는 날라리 엑스트라가 유네에게 여장 사진을 들이밀며 협박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나 했더니 별 탈 없이 시험이 끝나고 방학에 돌입한다. 빨간 포니테일 귀족 히로인이 시험 잘 봤다고 잘난 척한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연찮게 목욕탕에서 마주하게 된 주인공과 남장여자 히로인. 알몸이 다 까발려져서 남장여자 히로인은 정체를 들킬까 봐 당황했지만 둔한 주인공은 눈치채지 못한다.
같이 목욕을 하며 선택지를 잘 고르다 보면 높은 확률로 주인공이 히로인에게 친구들 집에 놀러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하게 되고 남장여자 히로인이 주인공을 자기네 집에 초대한다.
그렇게 해서 남장여자 히로인―유네네 집에 오게 된 주인공. 주인공은 평범해 보였던 유네가 사실 엄청난 부자라는 것에 놀란다.
딸 바보 부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주인공은 저택을 돌아다니며 유네가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포착한다.
점심 식사를 함께하던 그들은 유네와 주인공을 커플로 엮으려는 엄마와 주인공을 극구 반대하는 아빠의 등쌀에 못 이겨 밖으로 나오게 된다.
둘은 데이트하는 것처럼 놀이공원에서 놀다가 잠시 살 것이 있어 슈퍼에 들르게 되는데 거기서 유네와 주인공은 유네의 중학생(?) 때 친구들과 우연찮게 만나게 된다.
친구들에게 또다시 괴롭힘을 당하는 유네를 주인공이 구해주게 되고(1. 무시한다 2. 구해준다 중 2를 선택하면 된다. 사나이는 당연히 2번!) 거기서 유네의 천적 악역 여자애와 그녀의 소꿉친구 남자애가 등장한다.
소꿉친구 남자애는 여자애랑 사귀고 있지만 아직 유네에게 마음이 있다.
“그렇지… 여기까지가 어제 있었던 일. 여기서부터는 유네의 과거 이야기네.”
재경이 추가로 써놓은 유네가 남장을 하게 된 경위를 자세하게 읽었다. 어제 수상한 예언가 할머니가 말했다. 예언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형태뿐만 아니라 히로인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괴롭힘을 당하다 못해 큰 충격을 받은 유네는 겨울방학 전까지 등교 거부를 한다. 하지만 유네는 어빌리터이기 때문에 다음 해에 여학생이 9할을 차지하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로 입학해야만 했다.
또래 여자애들에게 극심한 왕따를 당했던지라 여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제립학교에서도 똑같은 일을 당할까 유네는 무서웠을 것이다.
게다가 유네는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라서 장래 희망은 군인이 아니고 세라 쌤처럼 선생님이 되거나 왕실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 유네는 제립학교에 가기 두려워했다.
그런데 그런 유네한테 그 엑스트라 악역 자식… 어제 지켜지고 싶지 않니 뭐니 괘씸한 말을 했겠다. 재경이 틈을 봐서 반드시 복수해 줄 거라고 이를 갈았다.
뭘 어쨌다고 어빌리터를 싫어하는 거야? 그냥 유네가 귀엽고 착해서 인기가 많으니까 싫은 걸 괜히 어빌리티로 트집 잡는 거 아냐?
제립학교에서는 어빌리터들만 모여있으니 그 여자애처럼 어빌리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이미 유네는 또래 여자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런 유네를 보며 유네네 아빠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바로 남장을 하는 것이다.
남장을 하면 아무래도 이성이다 보니까 적당히 거리감이 생기고 기가 세기로 유명한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학생들 중 유네의 성격을 무시하는 사람이 적어지지 않을까 생각한 유네네 아빠는 가지고 있는 부와 권력을 이용해 유네의 성별을 속이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유네는 제립학교에 남자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신 왕족이나 귀족 등 좋은 가문 학생들이 쓰는 기숙사 C동을 쓸 수 있을 만큼 부자면서도 남학생들이 쓰는 시설 안 좋은 A동 기숙사를 쓰게 되었고, 렌 지미가 혼자 쓰던 기숙사 방에 배정받을 예정이었으나 행정상의 착오로 류제와 같이 방을 쓰게 되면서 남장여자 히로인 역을 하게 된다.
“흐음…….”
학교에서는 잘 해나가는 듯이 보였던 유네는 어제 보았듯이 중학생(?) 시절 때 있었던 일을 여태 떨쳐내지 못했다.
어제저녁에 전쟁이 무섭다느니 그런 말을 했잖아. 그 여자애가 유네한테 지켜지고 싶지 않느니 뭐니 이야기를 해서 유네가 부담감을 느껴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학교에서는 날라리 엑스트라인 ‘무게’ 걔가 여자인 걸 눈치채고 주의를 주지, 기껏 친구를 집에 초대했더니 저런 말이나 듣게 하지. 유네는 그만 입학 당시처럼 자신감이 떨어지고 만다.
그런 데다가 바로 오늘, 어제처럼 주인공과 데이트를 하던 유네는 또다시 그 무리와 마주치게 된다. 어제 유네의 여장 사진을 보고 수상함을 느꼈던 악역이 유네의 약점을 잡기 위해 머리를 굴려 유네가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악역은 그걸 주인공인 류제 앞에서 떠벌리고 유네는 설마 같은 반 날라리 엑스트라가 소문을 냈나 의심을 하면서 두려워한다.
그리고 드디어 류제에게 남장한 사실을 들켜버린 유네가 주인공 류제를 걱정스럽게 쳐다본다.
여기서 이미 유네가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던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유네의 호감도의 성공 여부가 갈린다.
1. 뭐? 너 여자였어?
2. 혹시 그런 성벽이니……?
3. 유네가 여자인 게 왜? 난 이미 알고 있었어.
4. 네가 뭘 알아. 유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5. …….
선택지를 보자면 완전히 아닌 대답과 솔깃한 대답이 두 개가 있다. 하지만 이건 모두 함정이다.
1을 선택하면 유네를 이성으로 여기지 못하는 데다가 둔하고 유네에게 전혀 관심 없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당연히 호감도가 상승하지 않는다.
2는 마찬가지로 땡이고 3. 유네가 여자인 게 왜? 라는 그럴싸한 대답은 반대로 적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여자인 걸 알면서 같은 방을 썼다는 뉘앙스이기 때문에 트집을 잡혀 변태로 몰린다.
그렇다면 4. 이게 가장 현명할 것도 같지만 이것도 위험한 발언이다. 유네는 여자애들한테 따돌림을 당했지만 남자애들에겐 인기가 좋아서 악역이 더 유네를 싫어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유네가 원하는 건 저런 왕자님같이 지켜주는 말이 아니라 유네의 고민 자체를 해결해 주는 말이다.
유네가 남장을 한 연유를 긍정해 주면서 어빌리터라는 숙명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유네를 달래주고 정체를 들켜버린 그녀를 부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입 다물게 하는 만드는 문장은 5번, 사전 침묵부터 시작한다.
유네를 둘러싼 폭로전에 일단 침묵을 유지한 주인공은 머릿속에서 단어를 선택한다. 플레이어 스스로 문장을 완성해야 하는 일종의 미니 게임과 같은 선택지가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그리하여 완성된 문장은…….
“좋아.”
차근차근 유네의 감정에 이입해 스토리를 분석한 재경이 반드시 해낼 수 있다며 다짐했다. 모든 것은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재경은 힘겨운 책임감을 다잡으며 투지에 불타올랐다.
밖에서는 끈질기게 류제가 언제까지 쌀 거냐며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려댔다. 유네네 부모님은 언제쯤 내려올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독촉하고, 렌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 류제가 다급해진 찰나 재경이 화장실 여닫이문을 쾅 열었다.
“으악!”
급작스러운 공격에 문에 턱주가리를 맞고 우당탕 뒤로 넘어진 류제는 싱글벙글 웃으며 뭔가를 뒤로 숨긴 렌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의 집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내보낸 건지 얼굴이 아주 환하다.
“가자!”
그러면서 턱이 아파 정신을 못 차리는 류제를 지나쳐 후다닥 가방 속에다가 뭘 넣는데 하여튼 어제부터 무슨 꿍꿍이속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남의 집 화장실에서 잘도 이렇게 오랫동안 있는다, 너.”
“넓어서 좋잖아~”
번쩍번쩍 황금으로 도금된 귀족풍 화장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혼자 있기 딱 좋은 장소였다.
렌이 뭘 숨겼나 궁금한 류제가 가방을 기웃거리자 재경이 되레 늦었다고 그를 질질 끌고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렌 군! 류제 군! 좋은 아침이야!”
“호호, 낯선 집에 있다 보니 적응이 안 되죠?”
“에헴, 흠.”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유네네 가족들이 두 사람을 반겼다. 때맞춰 메이드가 트레이에 아침 식사를 담아 가지고 오는 중이었다.
렌 너 때문에 늦었다며 소곤소곤 핀잔한 류제가 제 자리를 찾아 예의 바르게 앉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런 게으… 으윽.”
“아니에요, 자라나는 학생들은 잠을 푹 자야 한답니다. 오랜만에 기숙사를 벗어나서 잠도 설쳤을 텐데. 호호.”
식탁 아래에서 또 뻘소리 하려는 유네네 아빠의 뱃살을 몰래 움켜쥔 유네네 엄마가 인자하게 웃었다.
메이드들의 손놀림으로 테이블이 우아하게 채워졌다. 종류별로 소분된 빵, 수프, 시리얼, 샐러드, 직접 만든 소시지, 잼, 크림치즈부터 초콜릿 스프레드까지.
제립학교도 왕실의 지원을 빵빵하게 받고 있으니 급식이 서민 음식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훌륭했으나 부자 가정집에서 준비한 정성 가득한 아침밥도 비할 바 없이 화려하다.
“맛있게 드시고 오늘도 즐겁게 노세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제 사라 하놋을 만나 기분이 좋았던 재경이 오늘은 눈치를 살피지 않고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렌 지미는 사교성 좋다니 활기차다니 유네에게 듣던 것과는 달라 얌전한 줄 알았는데 친구 부모님 앞이라고 낯이라도 가렸었나. 유네의 엄마는 그들이 참 마음에 들었다.
“흠…흠!”
“당신도 신문 그만 보고 어서 드세요.”
“아…알았어요.”
거드름을 피우던 그가 꿍얼거리며 신문을 접었다. 유네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화목한 가정의 식탁이 좋았다. 친한 친구를 집에 초대한다는 게 이만큼 행복한 일이었구나 뿌듯하다.
“아침은 운동 끝나고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먹었는데. 집에 오니까 여유로워서 좋구나. 그렇지 않아, 렌 군?”
“그래?”
앞에 놓인 빵을 우걱우걱 교양 없이 집어먹던 재경이 답했다. 태평하니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렌 군은 똑같이 허겁지겁 먹는구나. 했던 말이 무안해진 유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천천히 좀 먹어. 누가 안 뺏어 가.”
“으엑, 유네야 류제가 또 잔소리 시작했다.”
“뭐라고?”
류제의 이마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이곳이 유네네 집이 아니었더라면 저 건방진 귓불을 고무줄처럼 잡아당겼을 게 뻔하다. 그 분위기를 읽은 재경이 유네에게 쪼르르 붙어서 그새 일러바쳤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자기 딸에게 들러붙은 모습이 탐탁지 않았던 유네네 아빠는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뿌듯해하는 것을 살피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못마땅하지만 내 사랑하는 유네가 좋아한다면 그걸로 됐다.
“오늘도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네. 식사 맛있게 했습니다.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엄마, 아빠. 다녀올게요!”
유네네 엄마가 저택 바깥까지 그들을 배웅해 주었다.
그들은 오늘도 재미있게 놀기 위해 저택을 나섰다. 어제 놀이공원 근처는 미들 스쿨 친구들과 만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유네는 예정을 바꿔서 집에서 떨어진 번화가로 그들을 이끌었다.
제립학교 주변에 조성된 상점가가 미성년자인 제립학교 학생들과 그 근방에 사는 가족 단위의 마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면 유네가 이끌고 간 번화가는 성인들이 놀기 위한 시설이 많았다.
구석에는 야리꾸리 커플들을 위한 숙소, 미성년자 입장 불가 가게부터 시작해서 평범하게 놀 수 있는 오락실이나 옷가게, 술집 등이 즐비했다. 중세 유럽풍의 건물이지만 어찌 보면 재경이 살던 곳 근처에 있던 번화가와 비슷했다.
“과연. 여기는 이런 느낌인가.”
“골목으로 들어가지는 마. 대로에 우리가 놀 수 있는 곳이 많거든. 펠노아에서 먹었던 빙과당 체인점도 들어왔댔어.”
“오오! 빙과당. 오랜만에 들어보는데.”
펠노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 먹었던 빙수 맛있었는데. 깡패랑 실컷 싸우고 나서 애들하고 마피아 게임 하면서 먹었지. 물론 테이크아웃이라 빙과당 문턱도 못 밟았었지만.
“하하, 빙과당이라.”
류제는 그때 왕녀와 감정싸움을 하느라 혼자서만 자리를 떴던 기억을 되짚었다.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렌의 조원이 뛰어와서 렌이 깡패들과 싸우고 있다는 소리를 했었지. 진짜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하는 데 일가견 있다니까.
“너무 넓어서 어디부터 가야 할지 모르겠다.”
“저기 가자. 저 게임 센터라고 적힌 곳.”
“여기도 이런 곳이 있구나. 역시나 쓸데없이 오버 테크놀로지인 세상.”
“오버… 뭐라고?”
“암것도 아냐. 류제, 너도 게임 좋아해?”
“해본 적 없어서 몰라.”
“그래애?”
맨날 공부 타령만 하는 범생이 주제에 게임 센터에 냉큼 가보고 싶다고 하니 뭔가 수상쩍다. 재경이 류제를 위아래로 흘기자 지레 찔린 류제가 입가를 실룩거리며 변명했다.
“뭐…뭐야, 그 시선은. 나는 해보고 싶은 마음도 못 가지냐?”
“누가 뭐래~”
“뭐라 하는 시선이었잖아. 난 깡촌에 살아서 저런 건 처음 본단 말이야.”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찔려가지곤.”
“그럼 두 사람 다 게임 센터 가고 싶다는 거지? 가보자! 나도 이런 가게 처음 봐서 신기해.”
유네가 이 더운 여름에 바깥에 오래 있지 말고 안에 들어가자며 두 사람의 등을 질질 끌고 게임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주중이라 안은 방학한 학생들로만 가득했다. 교복을 입지 않으니 평범한 또래처럼 보였던지라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만 한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류제가 흥미로운 기계를 발견했다.
“맨 처음은 이걸로 하자.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내기라도 걸까?”
류제가 제일 먼저 가리킨 건 펀치 기계였다. 재경은 어차피 어빌리티를 써서 혼자서만 눈에 띌 거면서 자기한테 유리한 것만 고른다고 치사하다 빈정거렸다.
“어빌리티 안 써. 진 사람이 빙과당에서 아이스크림 쏘기. 어때?”
“에에에…….”
이번엔 유네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그야 당연히 근력이 가장 딸리는 건 유네였기 때문이다.
으음, 좀 불공평한가. 류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재경이 냅다 손을 들었다.
“그럼 나부터 한다.”
“진짜 하게?”
“하자며?”
치사하다며 투덜거렸어도 하기 싫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류제에게 강탈한 지폐를 동전으로 바꿔 온 재경이 펀치 기계에 돈을 넣고 손목을 풀었다. 긴장한 입술을 쩝 다신다.
내 펀치도 쓸 만하지. 저 둘보단 내가 펀치 기계는 배로 쳐봤을걸!
“으라차!”
뒤로 물러섰던 재경이 몸의 반동을 이용해 시원하게 펀치 기계를 후려쳤다. 쾅, 하고 제법 큰 소리와 함께 펀치 기계가 흔들거렸다. 빨간색 디지털 계기판 숫자가 올라갔다. 점수는… 698점.
“으악.”
“오오… 잘한 건가?”
“렌 군, 대단해!”
“으윽, 별로 대단한 거 아냐.”
왠지 높아 보이는 점수에 유네가 박수를 쳤다. 원래 세계에서 심심할 때마다 쳐보곤 했으니 나름대로 점수가 잘 나오는 노하우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700이 간당간당 못되다니. 재경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다음은 유네의 차례다.
“에잇!”
조그마한 몸으로 달려가 열심히 펀치 기계를 쳤지만 근력 차이가 있기 때문에 유네의 점수는 575점을 기록했다.
150대 중반의 키를 가진 여자애치곤 상당히 높은 점수였다. 아무래도 다른 평범한 여자애들과는 다르게 매일매일 운동하는 덕분일 것이다.
“우아아, 힘들어.”
펀치 기계를 온몸으로 쭈욱 눌렀던 유네가 고작 주먹 한 방에 힘이 다 빠져 헤글헤글 비틀거렸다.
그래도 유네는 이겼다. 당연한 걸 가지고 재경이 안도했다.
“이제 류제 네 차례야.”
“이게 은근히 긴장되네.”
“자자, 시작한다~”
펀치 기계가 노래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류제는 재경이 시범으로 보였던 펀치 동작을 떠올리며 몸에 시동을 걸고 펀치 기계로 달려들었다.
“어, 저기 수상쩍은 마족이 나타났다!”
“뭐라고? 우악!”
류제가 펀치 기계를 내리찍으려는 순간에 재경이 바깥을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문에 방심한 류제가 저도 모르게 어빌리티가 발현돼 펀치 기계를 작살내 버렸다.
류제의 힘을 견디지 못한 펀치 기계가 저만치 날아가 나뒹굴고는 기괴하게 구부러져 이상한 연기를 내뿜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때문에 게임 센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류제 어빌리티 썼대요. 류제의 반칙패네. 아이스크림은 류제가 산다!”
“와아!”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놀랐잖아.”
“네 어빌리티 컨트롤이 미숙해서 그런 걸 왜 내 탓을 하냐?”
재경이 유네와 짝짜꿍을 하며 킬킬거렸다.
감히 그런 술수를 쓰다니. 류제는 억울했지만 그런 말에 낚인 자신이 바보 같아 입만 부풀었다.
렌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류제가 힘 조절을 못 해 망가진 펀치 기계는 소생 불능처럼 보였다. 유네가 연기가 나고 있는 펀치 기계를 보며 걱정스러워했다.
“그런데 어쩌지. 고장 난 거 같은데. 고치려면 아이스크림값보다 더 많이 내야 할지도 몰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졌네. 그러니까 남을 놀리긴 왜 놀려!”
“아야!”
류제가 이게 다 네 탓이라며 재경에게 꿀밤을 때렸다.
신세를 지고 있는 유네한테 아이스크림 사라고 하기 미안하고 내가 사기는 싫으니까 그런 건데. 재경이 이건 힘 조절 못 한 류제 탓이라고 투덜거리려다 또 꿀밤을 맞을까 봐 말을 아꼈다.
성실한 류제는 도망가면 될 걸 가지고 기어코 게임 센터 주인에게 찾아가 사과를 했다.
그 과정에서 세 사람이 방학을 맞이하여 놀러 온 제립학교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게임 센터 주인은 앞으로 더 강해져서 키아나트리체를 열심히 지키라며 흔쾌히 펀치 기계를 고장 낸 것을 용서해 주었다. 거기에 하나씩 먹으라고 사탕까지 쥐여주었다.
“어빌리터란 건 꽤나 편리하구나.”
“뭐… 인류를 대표해서 마족과 싸워야 하니까 그런 거겠지.”
멀쩡한 펀치 기계를 고장 냈으니 미안해서 더 놀지는 못하고 세 사람은 막대 사탕을 할짝거리며 게임 센터에서 나왔다.
“흠. 어제 그 애는 어빌리터를 싫어하는 것 같았는데.”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따지면 어제 유네를 괴롭혔던 그 여자애가 특이한 부류였다. 재경이 그때 기억을 떠올렸다. 라우라 축제에서도 그렇고 수학여행 가서도 그렇고 제립학교 학생이라고 하면 수고한다고 하면서 서비스 많이 주면서 좋아하는데.
“이제 어디 가지?”
“노래방 어때?”
사탕을 할짝거리다가 게임 센터 맞은편에 있는 작은 노래방을 가리킨 유네가 제안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야 렌 군 노래 잘 부르는걸. 다시 듣고 싶단 말이야.
“에엑, 나 아는 노래 없는데.”
“나도.”
“나도 그래. 으음… 그럼 기각…….”
“저건 어때?”
류제가 이번엔 간단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계를 가리켰다. 게임 센터 바깥에 있는 그 스티커 사진 기계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것인지 반짝반짝 신기하다.
“오오… 신기술이다. 사진이 바로 출력되어서 나온대. 자기가 직접 꾸밀 수도 있나 봐. 알레흐카이잔 최신 수입품이라는데?”
“좋아, 해보자.”
다 함께 스티커 사진을 찍자는 말에 유네가 뛸 듯이 기뻐했다.
펀치 기계에 이어 스티커 사진기라니. 재경은 또 이런 적당 적당한 오버 테크놀로지가 어이없었지만 지하철도 있고 기차도 있고 기간트리카도 있는데 이런 스티커 사진 기계 정도야 있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대충 납득시켰다. 이제 이런 쓸데없는 곳에다가 태클 걸기 귀찮다.
“에헤헤, 셋이서 같이 사진 찍는 건 처음 아닌가?”
“그래? 수학여행 때 받았던 사진에는 없던가?”
“그건 다 같이 찍은 거였잖아.”
청춘들이란 놀기 위해서라면 행동력 하나는 끝장난다. 그들은 곧바로 스티커 사진 기계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좁은 공간을 살피던 세 사람은 뭔지 모를 버튼들을 왕왕 눌렀다.
돈을 넣는 곳을 발견한 유네가 지폐를 투입하니(꽤 비쌌다) 갑자기 기계 노래가 큰 소리로 울려 퍼졌다. 돈을 넣은 유네고 버튼을 눌러보던 류제고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뭐…뭐야?”
“모…몰라. 이걸 누르라는데?”
갑자기 화면에 그들의 모습이 떴다. 사진을 찍을 자세를 잡으라는 안내 글과 함께 시간제한이 떴다.
그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시원하게 첫 번째 사진을 말아먹었다. 두 번째는 유네가 중간에 끼어서 얼굴이 안 나왔고, 세 번째는 전부 흔들렸다. 네 번째, 다섯 번째는 간신히 성공.
“뭔가 엄청났어…….”
“사진 되게 쪼그마하네. 손톱만 해서 보이지도 않는데? 근데 가격이 저모양이라고?”
“어쩔 수 없잖아. 저런 기계에서 막 뽑는 건데 선명한 사진이 나올 리도 없고. 그냥 신기해서 하는 거지 뭐.”
사람 눈코입이 제대로 달려있는 건지 마는 건지 쥐똥만 한 사진을 나눠 가지며 재경이 불평했다.
저래놓고 비싸기는 사격 게임의 배는 비싸단 말야? 으으, 오버 테크놀로지의 부작용 같은 건가.
“그래도 색달라서 재미있었어. 류제 군, 의외로 꾸미는 데 솜씨 없네.”
“시끄러.”
류제가 찔려서 일갈했다. 간신히 건진 마지막 사진은 류제가 꾸몄는데 가장 허술하고 재미없었다. 재경이 원래 이놈한테 그런 걸 기대하면 안 된다고 킬킬 비웃었다. 류제가 손날로 재경의 머리통을 툭 쳤다. 그렇게 말할 거면 본인이 하지 그랬나.
“그럼 류제가 아이스크림을 살 일만 남았나?”
“어휴. 그래 알았다, 알았어. 사주면 될 거 아냐.”
“정말? 와아. 고마워, 류제 군.”
“안 사면 돌아갈 때까지 징징거릴 거지?”
“당연하지!”
자신 몫의 스티커 사진을 둘러보던 재경이 뻐겨댔다. 기분 좋아 보이니까 됐나. 류제가 빙과당에 가기 전 지갑을 빼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지갑이 잘 잡히지 않아 몸을 틀던 류제는 그들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무리가 점점 둘러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위기를 읽은 류제가 옆을 힐끗거렸다. 갑자기 왜 우리한테 시비지? 펀치 기계를 박살 낸 것 때문인가?
“…렌, 유네. 잠시만.”
“으응? 왜 그래, 류제 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적개심을 보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수학여행 때 렌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덩치 큰 어른인 것도 아니고 류제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도 촌스럽게 학생들끼리 구역 싸움 같은 게 있나? 우리는 못 보던 애들이니까 견제하려는 거? 에이, 어린애도 아니고.
“곤란한걸. 조용히 놀다 가고 싶은데.”
이유가 뭐건 싸움을 걸어온다고 해도 어빌리터한테 비어빌리터가 상대가 될 리 없다. 하지만 제립학교 학생의 입장에서 민간인에게 어빌리티나 기간트리카를 쓸 수 없기 때문에 난감했다.
타인에게 관심 없는 류제는 쓸데없는 트러블은 피하는 주의였다. 둘을 옆구리에 끼우고 도망갈까. 상대하기 버거우면 줄행랑도 나쁘지 않다.
“야, 유네 나르타. 질리지도 않고 여기에 있네.”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그들과 마주해서 걸어오는 사람은 어제 유네에게 시비를 걸었던 악역 엑스트라 여학생이었다. 유네를 얼마나 싫어하면 이렇게 사람까지 모아 올 정도로 정성을 보일까. 이 정도면 실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라는 쓸데없는 감탄이 나왔다.
유네는 싫으면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걸 왜 굳이 이렇게까지 괴롭히려 드는지 이해를 못 했다. 무시하고 싶은데 오늘따라 수상쩍은 저 웃음이 유네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유네가 기겁하자 재경이 입술을 까뒤집으며 이를 드러냈다.
“뭐야, 왜 시비야? 서로 갈 길 가지?”
“난 유네 나르타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을 너희도 아나 싶었을 뿐이야. 선의를 베풀어주려 했더니 감사 인사는 못 받을망정.”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유네의 여장 대회 사진을 포커 카드 잡듯 펼쳐 들었다. 예정대로 유네의 정체를 떠벌릴 목적이군. 재경이 드디어 때가 왔음을 짐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른 것 같지만 이건 피할 수 없는 이벤트다. 걸어오는 시비 피하지 않는 주의인 재경은 제발 참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거,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 사진이지? 근데 왜 유네 나르타가 여기에 있을까?”
“네가 무슨 상관이야. 내가 억지로 나가라고 했어.”
“억지로 나갈 수 있어? 유네가, 여장 대회를?”
“푸하하, 와. 설마 했더니 진짜 그쪽 친구들한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중인 모양이네.”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미친 건가 봐. 제정신이 아니야.”
“너희들 유네 나르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류제를 비웃었다. 이번에도 기사님 뒤에 숨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유네 나르타. 네 거짓말을 네 소중한 친구들한테도 전부 떠벌려 줄 테다.
“얘가 어제저녁부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진짜 유네 나르타잖아? 꼴에 잘도 나타났네. 야, 여기 우리 구역이거든? 서로 얼굴 안 보기로 하지 않았나?”
“유네 나르타라면 그 어빌리터 맞지?”
“그 시답지도 않은 바람 일으키는 거 가지고 제립학교 들어갔다던?”
“그 못 미덥게 생긴 여자애?”
껄렁껄렁 다가오는 사람들이 저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류제는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흠칫거렸다. 못 미덥게 생긴… 여자애? 그게 무슨 소리지?
“제립학교인가 뭔가 하는 데에서 남자처럼 하고 다닌다며? 하다못해 여자애들 관심이라도 끌려고 변태라도 된 거야?”
“유네한테 여자라니. 사람 앞에서 무슨 실례되는 말을 하는 거야. 아무리 사이 안 좋다지만 너무한 거 아냐?”
“제3자는 빠져.”
류제가 다가오는 그들을 막아서자 누가 류제의 어깨를 밀쳤다.
학교 밖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건 좋지 못하다. 게다가 지금 유네네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 책임이 유네네 부모님께 돌아가잖아. 참자, 참는 거야… 제발, 렌……!
“저게 진짜……!”
자기가 아니라 렌을 향해 그렇게 빈 류제가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렌을 붙잡을 준비를 했다. 내가 밀쳐진 건 아무래도 좋지만 렌이 덤벼드는 건 곤란하다.
“그…그만둬. 무…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았으니까. 레…렌 군하고 류제 군은 상관없잖아!”
“상관없어? 쟤네들도 알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상관없단 말을 못 할 텐데? 그렇지?”
“그…그런…….”
“우와아. 대단하다, 정말. 너희들 유네 나르타가 남자 흉내를 내고 있었던 걸 알았단 말야? 그러면서 같이 다닌 거야? 정말 끔찍한 우정이네.”
류제는 아까부터 도통 영문을 몰랐다. 남자 흉내를 낸다고? 유네가? 무슨 악질적인 농담이야. 아무리 싫다지만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지. 유네는 남자야. 흉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이 심하잖아. 더 이상 심하게 굴었다간 나도 안 참을 거다?”
“안 참으면 뭐. 우리한테 해코지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희 주제에 감히 우리한테 손댈 수 있어?”
“마족이 아니라 인간한테 주먹을 들다니. 괘씸한 놈들이네. 우리 엄마가 그랬어. 요즘 어빌리터들은 하는 일도 없으면서 돈 없는 우리들 세금이나 뜯어먹고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그…그렇지 않아!”
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을 비하하는 말만큼은 참지 못한 유네가 용기 있게 나섰다.
“우…우리들은 마족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하지만 토벌전 이후로는 아무도 마족 본 적 없잖아~”
“맞아. 실은 마족은 진작 없어졌는데 일부러 거짓말하는 거 아냐? 유네 나르타는 거짓말쟁이잖아. 어빌리터들도 같은 거짓말쟁이겠지.”
“아냐!”
“아니긴. 뭐야, 시끄럽게 큰 소리나 지르긴. 혼자서만 제립학교 입학했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눈에 뵈는 게 없나봐?”
앞에 있던 누군가가 유네를 작정하고 밀쳤다. 비틀거리는 유네를 재경이 붙잡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나 늘어놓고. 너희야말로 목적이 뭐야?”
“그냥 오~랜만에 보는 유네 나르타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너희들에게도 알려주고 싶고.”
악역 엑스트라가 유네의 여장 대회 사진을 들이밀며 가식적으로 웃었다.
“유네도 우리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 우리 좀 볼까?”
“그…….”
“그렇지? 유네, 우리랑 옛날처럼 어울려줄 거지?”
협박하고 있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분명 내가 여자란 걸 이 두 사람에게 떠벌릴 셈이야. 어쩌지, 어쩌지……!
유네는 주변에서 무슨 일인고 흘깃거리는 구경꾼들과 유네의 눈치를 보고 있는 두 친구, 그리고 사진을 팔랑팔랑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면서 혼란에 빠졌다.
“웃기지 마, 이 메주야. 혼자서는 쪽도 못 쓰니까 떼거지로 덤벼드는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
“메…메주우? 말 다 했어?”
“유네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지 알 게 뭐야. 저런 것들 상대할 필요 없어!”
앞뒤 보지 않고 덤벼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던 재경이 유네의 손목을 낚아챘다. 진짜 도저히 좀 쑤시고 열 뻗쳐서 가만히 못 있겠네.
“류제!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고 좀 해봐!”
어디 보자. 류제는 쪽수가 많다고 거드름을 피워대는 그들을 살피다가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하나 주웠다.
“난 누가 날 귀찮게 하는 걸 정말 싫어해.”
그가 악력만으로 쥐고 있던 돌멩이를 가루가 되도록 으스러뜨렸다. 어빌리터라고는 ‘바람’을 일으키는 하찮은 능력밖에 없는 유네만 알다가 류제의 힘을 직접 목격한 그들이 겁에 질려서 얼굴이 하얗게 떴다.
어빌리터는 민간인들에게 힘을 못 쓴다고 들어서 끽하면 진짜 덤비려고 했던 그들이 엉겁결에 뒤로 물러났다. 세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원이 점점 넓어졌다. 그걸 본 악역 엑스트라가 짜증을 내며 손가락질했다.
“물러서지 마! 어차피 쟤네들은 우리 앞에서 어빌리티를 못 써!”
“그쪽에서 먼저 내 친구를 괴롭히려고 하면 다르지.”
이 쪽수로 어빌리티 없이 싸우다가 렌이 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류제가 생각하기 가장 싫은 최악의 상황은 바로 그거였다.
류제가 내려앉은 앞머리 안쪽으로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재경조차 히익 하고 새된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무서운 눈이다.
저거… 당장 내일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를 한 토씨도 안 썼을 때 나오는 눈빛인데……!
“유네 나르타 까짓 게 뭐라고. 친구? 뭘 모르는 모양인데 사실을 알면 친구라고도 못 할걸? 유네 나르타는 너희같이 남자가 아니야!”
“자…잠깐! 부탁이야. 마…말하지 말아줘……!”
“유네 나르타는 남자인 척하는 변태 여자라고!”
얼굴을 질투심으로 떡칠한 악역 엑스트라가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직설적인 외침에 류제는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뭐? 너 여… 읍……!”
“좀 닥쳐봐! 이 바보!”
1. 뭐? 너 여자였어?
2. 혹시 그런 성벽이니……?
3. 유네가 여자인 게 왜? 난 이미 알고 있었어.
4. 네가 뭘 알아. 유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5. …….
이 수두룩 빽빽 많고도 많은 선택지 중에서 곧바로 1번을 선택하는 류제의 입을 막기 위해 류제의 발등을 콱 밟은 재경이 가만히 있으라며 연이어 팔꿈치로 류제의 배를 찔렀다.
“으윽!”
아파 죽겠다. 저 여자애 말대로 유네가 진짜 여자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려고 했을 뿐인데 렌에게 발을 밟히고 팔꿈치 촙으로 배까지 찔린 류제는 왜 자기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 억울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어휴.”
일단 류제 입은 잘 막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재경이 복장 터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류제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진짜 얘는 내가 그냥 내버려 두면 배드 엔딩 직행열차에 한 발 올려둘 거라고 재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잘 생각하란 말야, 이 칠칠치 못한 짜식아. 그래가지고 세상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대뜸 여자였냐고 묻는 게 어디 있어? 그런 말을 하면 유네가 상처받잖아!”
“상처? 유네가?”
다른 사람이 상처받을 말을 한다고 렌한테 지적받다니. 자존심이 상하는데 말은 또 그럴싸하다.
잘 모르겠지만 일단 렌이 허투루 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으니 류제는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흐음…….”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저 여자애 말대로 만에 하나 유네가 여자였다고 치자. 사이 나쁜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이 상황에서 나까지 동요해 버리면 유네는 상처 입겠지.
입학식 전날부터 쭉 같은 방을 써서 아는데 유네는 숙제 보여달라고 철없이 졸라대는 렌을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착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여자인 사실을 비밀로 한 건 뭔가 사정이 있을 게 분명하다. 저 녀석들이 얽혀있는 뭔가의 사정.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게 저들이 바라는 거야. 유네가 여자라는 말이 거짓말이었을 경우도 유네가 자기 말보다 저 애들을 신뢰하는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르지.
안 되지, 안 돼. 룸메이트로서 그건 안 돼. 렌한테 지적받을 정도라니 내가 좀 둔하게 반응하긴 했군. 그럼 여기서는 일단 유네의 편을 들어주고 나중에 진실을 듣는 걸로 할까.
“그럼… 유네에 대해 함… 윽……!”
“그것도 아니야, 이 바보야!”
제일 무신경한 1번 선택지를 필사적으로 막았더니 류제가 이번에는 제일 그럴싸한 선택지인 4를 고르려고 했다.
자기 작품에 불만 가득한 도자기 장인처럼 부정한 재경이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듯이 류제의 발등을 찍었다.
유네를 괴롭히는 여자애에게 멋들어지게 한 소리 해주려고 했던 류제의 말은 또다시 막히고 말았다.
“~아파!”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또래 아이들이 쟤네 뭐 하냐며 식은땀을 찔끔 흘렸다. 진짜로 미쳤나 봐.
그건 그렇고 아파서 발을 들고 펄쩍펄쩍 뛰던 류제가 아까부터 이유 모를 짓이나 하는 재경에게 버럭 외쳤다.
“도대체 왜 그래? 뭐가 문제야?!”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좀만 좀 제대로 생각해 봐! 것보다 좋은 말 있을 거 아냐!”
눈을 끔벅거리는 유네의 눈치를 살핀 재경이 류제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속삭 몸부림쳤다. 이놈은 왜 이런 선택지에서는 도통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거야. 있잖아, 그런 거! 그런 것보다 더 좋은 말!
“너희 뭐야……?”
아까까지만 해도 진지한 상황이었는데 이게 뭐지. 유네가 여자란 사실을 폭로하니 두 사람이 콩트를 찍고 있다. 유네의 비밀을 폭로했던 그녀가 못마땅해서 눈가를 실룩거렸다.
유네도 드디어 두 사람에게 들켜버렸구나 눈을 질끈 감았는데 평소처럼 변함없는 두 사람의 말싸움에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이런 반응이 아닌데. 무…물론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어… 저기… 렌 군? 류제 군……?”
“그―러―니―까! 다짜고짜 유네더러 여자라고 하는 애들한테 날더러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여자냐고 물어보는 것도 안 돼, 유네한테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도 안 돼. 어쩌라고?”
“뭔가 있잖아! 쟤네들한테 한 방 먹여줄 만한 그런 말! 뻔하고 클리셰 덩어리지만 그럴싸하게 좋은 말! 너 국어도 잘하잖아. 떠올려 봐!”
“그런 말 있으면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왜 갑자기 사람 발등을 밟고 그래?”
“네가 해야 하는 말이니까 그렇지. 그러지 말고 빨리 말해! 어서. 빨리. 시간 없어!”
“갑자기 그런다고 해서 생각날 리 없잖아! 억지 부리지 좀 마!”
“저기……?”
친근해 보이는 세 사람 사이를 유네의 거짓말을 이용해 분열시키려고 했던 악역 엑스트라는 분열이 되긴 된 것 같은데 뭔가 좀 다른 느낌으로 분열된 것 같은 기분에 그들을 불러 세웠다. 대화 주제 좀 이상하지 않아?
“이봐… 너희들끼리 싸우지 말고… 유…유네 나르타가 여자라니까?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시끄러워! 지금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시끄러워! 지금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동시에 똑같이 윽박지르는 모습이 아주 판박이다. 그녀는 뭐 이런 애들이 있냐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도저히 이야기 정리가 안 되는 류제가 땅에 있던 나뭇가지를 집어 들어 재경과 함께 쭈그려 앉았다. 이 와중에 그들이 본격적으로 이야기 정리에 나섰다.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얼떨떨한 얼굴로 지켜보는 유네와 그들을 둘러싼 채 볼썽사나운 꼴이 되어버린 이번 챕터의 악역의 모습이 보기 험하다.
“그러니까 쟤네들이 지금 유네가 여자라고 하는 거지?”
류제가 나뭇가지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고 유네라고 썼다. 그다음 거기에다가 나비 리본 같은 걸 하나 그렸다. 표현력 쥐똥인 류제가 나름대로 여자라고 표현하는 거다.
“그렇지. 잘 이해했네.”
“그럼 유네는 진짜 여자인 건가?”
“하아… 아직도 그 이야기야? 지금 중요한 건 유네가 여자였다는 게 아니라고.”
“중요한 거 아냐? 난 엄청 충격적인데. 넌 충격 안 받았어?”
“진짜 둔하다, 너. 지금껏 같은 방 썼으면서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는 게 자랑이냐?”
“하지만 우리 그때 목욕 같이… 아.”
류제가 우연찮게 같은 목욕탕에 들어갔던 전적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알몸이 좀 여자애같이 호리호리하긴 했다.
류제의 엄한 생각에 재경의 얼굴이 다 붉어졌다.
“갑자기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이…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여튼 유네는 진짜 여자애고 그걸 비밀로 하고 있었는데 저 애가 그걸 우리 앞에서 까발렸다는 거지? 으음, 유네가 여자였다니 충격적이긴 한데 별로 유네가 여자고 뭐고 나랑은 상관없는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일러바칠 일인가?”
“그래! 바로 그런 마인드야!”
유네고 뭐고 어차피 렌 외에는 관심 없으니까 하는 소리였는데 재경이 그게 포인트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막상 류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인드? 포인트? 내가 뭐라고 했나?
“이제 그걸 좀 좋게 정리해 봐.”
“그러니까 뭘?”
“저기, 아직 멀었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 거참. 인내심 없네. 거의 다 됐으니까 좀만 더 기다려 봐.”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한 악역 엑스트라가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렸다. 이마에는 핏줄이 잔뜩 서있다.
정답까지 거의 다 왔는데 시간이 얼마 없다. 직접 도출하게 하는 건 포기하고 집중 강의를 해야겠다며 재경이 류제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빼앗았다.
그러니까 이게 이렇고, 저렇고. 그러니까 유네가 여자라고 우리랑 친구가 아닌 건 아니니까 이걸 좀 뻔한 말로 표현하면…….
“알았지?”
“대충.”
“그럼 어서 말해!”
“알았어. 하아, 아이스크림 사러 가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숙덕거리다가 결국 류제에게 정답을 대놓고 말해줘버린 재경의 말을 빌려 류제가 위풍당당하게 손가락질했다.
“여자든 남자든 유네는 유네일 뿐이야! 그런 것 때문에 유네를 괴롭히지 마! 귀찮게.”
“좋아! 잘했어! 할 수 있으면서, 짜식이! 귀찮게라는 말은 좀 빼지. 에이 뭐 어때.”
편법이기는 해도 어떻게든 류제가 저 말을 하게 하는 데 성공한 재경이 신나서 류제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유네랑도 하고, 왜인지 이 상황을 만들어준 그 악역 엑스트라와도 한다. 그녀는 정말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이 파이브를 했다. 나 뭐 했나?
“우하하! 역시 나야!”
분명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임에는 변치 않는데 왜인지 몰라도 기분 좋아 보인다.
그럴 만도 하다.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이후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재경이었기에 어떻게든 류제가 유네에게 호감도를 올려주는 문장을 말한 것이 속 후련했기 때문이다.
류제가 정확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남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일만 남았다.
뭐가 어떻게 된지는 모르겠지만 유네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음에도 자신을 긍정해 준 류제와 재경이 고마워서 두 손을 꽉 모았다.
“레…렌 군… 류제 군……!”
“너희들이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녀는 조무래기 보스처럼 말하며 친구들을 이용해 그들에게 린치를 가하려고 했다.
하지만 재경이 선택지 고르는 데 질질 끄는 바람에 김이 팍 새버린 그녀의 친구들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머리만 긁적거렸다. 큰 충격을 받은 유네 나르타를 몰아가려는 속셈이었지만 흐지부지 유네는 유네일 뿐이라는 둥 뻔한 이야기나 해대니 의욕이 안 산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던 류제가 손 관절을 두둑 꺾었다. 여튼 렌 마음에 드는 말을 한 것 같으니 이제 볼일 없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웃기지 마! 내가 네 학교에 다 소문내고 다닐 거야. 유네, 네까짓 게 뭐라고!”
“마…마음대로 해! 나는 신경 안 써!”
유네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렌 군하고 류제 군이 저렇게 나와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분위기를 탄 유네가 흔들림 따위 없는 올곧은 눈으로 악역 엑스트라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유네마저 이렇게 나올 줄 몰라서 주춤거렸다.
“뭐…뭐야, 강한 척하긴……!”
“있지, 쟤 정말 돈 뜯어낼 거리 맞아? 저번에 나한테 물어봤던 같은 반 어빌리터란 애도 쟤 여자란 거 알고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네…네가 뭘 잘못 본 거겠지!”
“그리고 제립학교 학생은 건드렸다간 나중에 우리가 힘들어질 수도 있어. 치안대 아저씨들은 전부 어빌리터 편이니까.”
시끌시끌. 왠지 저들끼리 내분이 난 것 같다. 그 틈을 타서 류제가 유네와 재경을 옆구리에 한 짝씩 끼웠다.
“어, 이 자세는…….”
그와 동시에 불길함을 느낀 재경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 익숙한 포지션은 설마……!
“할 이야기 끝났으면 그럼 안녕. 우리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게.”
“도망간다! 부…붙잡아!”
“류제이자식그만두지못해!”
아직 이벤트 안 끝났어! 아직 유네의 전 남친 등장이 남았단 말이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네의 과거랑 연관되어 있으니 이벤트 스킵하지 말라고! 이야기가 똥 싸다 끊기게 됐잖아, 이 망할 류제!
그리고 내가 나 옆구리에 끼고 뛰어오르지 말라고 맨날 말하는데!!
고소공포증 때문에 높은 곳은 쥐약인 재경이 그들을 둘러싼 원을 높은 점프로 빠져나가 가로등을 디딤판 삼고 도망치는 류제의 품에서 비명을 질러댔다.
이런 결말이 아니라고!
“다른 애들한테 들었어. 너 어제부터 뭐 하는 짓이야……!”
뒤이어 도착한 전 유네 짝사랑남이 현 여자 친구를 말리기 위해 찾아왔건만 이미 그들은 이벤트를 스킵하고 저 멀리 도망간 후였다.
유네 이외의 어빌리터가 어빌리티를 쓰는 걸 처음 본 그녀의 친구들은 류제의 모습에 홀라당 반한 듯 보였다. 사람 둘을 옆구리에 끼고 그만한 점프를 해서 가다니. 포르테 들라크루아 같은 슈퍼히어로 같다.
“이게 뭐야!”
악역 엑스트라가 짜증 나서 옆에 있던 쓰레기통을 발로 찼다. 되는 일이 하나 없다. 마음에 안 들어! 그 낙서장 주근깨 얼굴이 내 계획을 전부 망쳐버리다니.
그녀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똑같이 왁왁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까지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유네 나르타를 이길 수 없었다.
* * *
잘 되어가다가 막판에 방심하는 바람에 또 류제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하늘로 솟아버린 재경은 고소공포증의 부작용으로 몇 분간 행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벤치에 앉아 헉헉거리면서 차갑게 질린 얼굴로 그 끔찍한 감각을 곱씹고 있노라니 빙과당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돌아온 류제가 재경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며 되도 않는 소리나 해댔다.
“빙과당하고 얽히면 좋은 일이 없네.”
“다 네 탓이잖아!”
재경이 태평한 말을 늘어놓는 류제를 향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말도 없이 훌쩍 뛰어오르다니. 고소공포증 있는 것도 알면서 너무한 거 아냐? 이런 사람 배려할 줄 모르는 자식 같으니라고! 커서 뭐가 되려고 저래?
“네가 롤러코스터 탈 때 고소공포증을 극복했다고 했잖아. 이제 괜찮은 줄 알았지.”
“그건 1할 정도 극복한 거고! 계속 무서웠던 게 그렇게 쉽게 하루아침에 고쳐지겠냐?!”
“그런가? 그래도 거기서 곤란해지는 것보다 낫잖아.”
“차라리 거기서 곤란한 게 나아!”
고작 곤란한 게 싫다고 남아있던 이벤트를 스킵해 버리다니!
머리가 복잡해진 재경이 봉투를 요란스럽게 뜯었다. 마음에 안 든다. 그가 분노를 담아 소다 맛 아이스크림을 와구와구 씹어 먹었다.
류제 똥멍청이! 내 덕분에 이벤트 성공해서 망정이지 그렇게까지 했는데 호감도 대사도 제대로 못 말했더라면 정강이 걷어찼다, 진짜!
“자, 유네.”
“아… 응, 잘 먹을게.”
유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류제에게서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넘겨받았다. 아까는 렌 군의 영문 모를 분위기를 타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었는데 막상 세 사람만 남으니까 어떤 눈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머뭇머뭇 꼼지락거리던 유네가 아이스크림 봉투를 뜯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진실을 밝히는 게 좋겠지. 류제 군도 아까부터 궁금해하는 눈초리고. 또 다물고만 있다간 오해만 쌓일 거야.
“…아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유네가 우물우물 고개를 숙였다. 기껏 산 아이스크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옆에 앉아 자기 몫 아이스크림 봉투를 뜯던 류제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냉큼 물었다.
“그래서… 유네, 너 진짜 여자야?”
“켁,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라.”
“깜빡이? 그게 뭐야. 궁금한 걸 어떻게 해. 너 때문에 당장에 물어보고 싶은 걸 참았건만 이쯤 왔으면 말해 줄 수도 있지.”
“그래도!”
이제 우리밖에 없고 이벤트도 끝났으니까 유네의 입에서 그녀가 남장을 하게 된 경위를 듣게 되는 건 당연한 흐름이겠지만 재경은 류제의 돌직구에 기가 찼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다니 이놈 참 무신경하다. 그렇게 유네의 비밀을 캐내고 싶나? 그만큼 유네가 좋나? 하지만 또 선택지 고른 걸 보면 그런 것 같지 않고. 이놈 속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재경의 미심쩍은 눈빛에 류제가 꿍얼꿍얼 변명했다.
“하지만 진짜 깜짝 놀랐는걸. 아직도 농담처럼 들려. 지금까지 같은 방을 썼는데 여자인 걸 전혀 몰랐다니.”
“아하하, 그…그렇지. 나도 처음에 남장하란 말을 듣고 아빠가 농담하는 건 줄 알았으니까.”
이렇게 밝혀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만 지금껏 마음 한구석 그녀의 죄책감을 짓누르던 거짓말이다. 유네는 한시라도 빨리 이 거짓말에 대한 죗값을 받고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친구들한테 거짓말 치고 싶지 않아. 렌 군과 류제 군은 내가 여자라고 해서 멀어지지 않을 거야. 분명해. 할 수 있다, 유네 나르타.
“나…난 성격이 이렇잖아. 어리버리하고… 맹하고 좀 답답하고. 그래서 미들 스쿨 친구들이 날 많이 싫어했어.”
유네는 어렵게, 어렵게 트라우마로 남았던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따돌림을 당한 건 미들 스쿨 때의 일이긴 했지만 그 징조는 유네가 10살 무렵이었던 프라이머리 스쿨 때에도 있었다. 그때는 어빌리티가 발현하기 전이었으니 또래 아이들의 질투가 덜한 편이었다.
동네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였던 유네와 친하게 지내면 딸려 오는 것들이 많았기에 꿈틀거리던 질투가 쉽게 드러나기 어려워서일지도 몰랐다.
작고, 귀엽고, 부자에, 착하고 연약한 파란 머리 소녀. 들판 색 눈동자가 커다래서 살아 움직이는 인형 같던 유네는 또래 남자아이들의 로망이었다. 암만 학교에서 사고만 치는 천방지축 장난꾸러기 소년이라도 유네 앞에서는 헤벌쭉 꼬리를 내릴 정도로 유네는 인기가 좋았다.
그러던 중 미들 스쿨에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네는 어빌리터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고작 돌풍을 일으키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막 사춘기에 접어든 남자아이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유네를 동경하게 되었다.
특별. 비범함에 애정을 느끼는 사춘기 아이들에 있어서 마법의 단어다.
날 때부터 부유한 상인 집안 자제에 어빌리터라 성공된 미래가 보장된 귀여운 소녀. 착하고 상냥하기까지 한 유네는 또래 남자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미들 스쿨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소문난 아이도 유네를 좋아했다.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처럼 유네를 좋아하는 분위기를 타는 것도 있었지만 유네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수록 당연하게도 그들은 유네를 특별 대우 했다.
특별한 능력. 특별한 대우. 아마 유네가 가진 부자라는 편리성과 질투 사이에서 그 여자애들이 저울질하게 된 건 이때쯤부터였을 거다.
미들 스쿨 2학년 때였나, 서로 눈치를 보는 와중 결국 유네를 좋아하던 학교 제일의 미남 남학생이 유네에게 고백을 했다. 유네는 사랑이니 뭐니 전혀 몰랐기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고백을 거절했다.
그게 화근이었을 거다. 그 이후, 그 남학생의 소꿉친구이자 그를 좋아했던 여학생의 주도로 유네는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여기저기 꼬리 치고 다니는 거 아냐? 순진한 척하면서 알 거 다 안다니까.”
“야, 인기 많아서 좋냐?”
“도…도…돌려줘……!”
“어빌리터잖아? 네 힘으로 뺏어보지 그래?”
소지품 갈취는 물론이고 이상한 명목으로 돈을 빼앗지 않나 괜히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수업 중에 교복 등에 낙서를 하고 단체 활동을 하는 체육 시간 때나 점심을 먹을 때는 절대 어울려주지 않았다. 평범한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그러자 같은 반 남학생들이 반발해서 유네의 편을 더 들었고 그럴수록 따돌림은 심해졌다.
“진짜, 남자애들은 눈이 삐었다니까. 저 덜떨어진 애를 왜 좋아하는 거야?”
“그래봤자 부자고 어빌리터니까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는 거지.”
“쉿, 조용히 해. 쟨 바보라서 그런 거 모르거든.”
들으라고 대놓고 소리치면서 저들끼리 시시덕거린다.
유네는 곧 여자인 친구가 하나도 없어졌다. 유네를 싫어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워낙 저들의 목소리가 커서 유네처럼 그녀들에게 시달리는 게 싫었던 친구들이 질려 멀어져 버린 것이다.
“선생님이 특별 취급한다고 기고만장하긴. 아빠가 학교에 기부를 많이 했나 봐?”
“어빌리티도 별것 없으면서 잘난 척만 잘해.”
“저 녀석이 포르테 들라크루아랑 같다고? 믿을 수 없어.”
“유네 같은 어빌리터한테 구해지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하하하! 진짜 싫어.”
특히 어빌리터지만 능력이 별 볼 일 없는 유네에게 아이들이 트집을 잡고 놀려댔다. 자신을 부정당하는 이 지옥 같은 기분을 유네는 참을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을 늘 말려줬던 게 유네에게 고백했던 잘생긴 남학생이었지만 곧 그도 드센 기에 지쳐서 유네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들 사이를 중재하려 들수록 유네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의도는 유네를 배려한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유네는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소외되어 버리고 말았다.
입으로는 유네를 대놓고 비웃으면서 깔깔거리고, 행동으로는 자존심을 짓이겨 놓는데, 미들 스쿨을 졸업할 무렵 유네는 믿을 수 있는 친구 하나 없는 상태로 트라우마에 걸리고 말았다.
“싫어! 학교 같은 데 안 갈 거야. 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혼자가 될래. 싫어……!”
“유네야, 그래도 어빌리터는 반드시 제립학교에 입학해야 한단다…….”
“싫어, 아빠. 나 학교 가기 싫어. 학교 절대 안 갈 거야. 가면 또 괴롭힘당할 거야. 분명 또 그럴 거야.”
“괜찮을 거야. 거긴 남학생도 얼마 없잖니. 그럴 일 절대 안 생겨. 거기 다니는 애들은 다 너와 같은 어빌리터란다. 널 무시하는 일은 없을 거야.”
“아냐. 더 무시당할지도 몰라. 무서워. 아빠, 나 학교 가기 싫어……!”
또래 여자애들에게 완전히 미운털이 박혀버렸던 유네는 남학생들이 극소수라는 제립학교가 미들 스쿨보다 더 무서웠다.
어차피 나는 태생부터 어영부영 소심하고 주도적이지 못한데 공격적이고 드세기로 소문난 제립학교 분위기에 맞출 수 있을 리가 없다.
내 어빌리티는 보잘것없어서 거기 있는 뛰어난 어빌리터 여자애들은 날 무시하고 괴롭힐 거야. 게다가 거기는 기숙사제잖아. 3년 동안 괴롭힘을 당하라고? 이제 그런 거 싫어. 차라리 이대로 없어져 버리고 싶어.
“그럼 유네야, 차라리 남자가 되면 어떠냐.”
사랑스러운 딸이 방학 내내 방에 틀어박혀서 졸업식도 안 가고 서럽게 우는데 어느 부모가 발을 뻗고 잘까.
사흘 밤낮으로 고민하던 아빠가 내놓은 답은 그것이었다. 어빌리터라고 등록된 이상 반드시 제립학교에는 입학해야 한다.
어빌리터만 들어갈 수 있는 제립학교는 남학생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다. 그럼 차라리 남장을 하면 성별이 다르니까 여학생들이 유네를 만만하게 보더라도 거리감은 주지 않을까 싶었던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유네의 서류를 조작해 성별을 속이고 제립학교에 입학시켰다.
대신 가장 시설이 좋지 않은 A동 기숙사를 쓰게 되었지만 유네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는 입학식 전날 학교로 향하는 유네를 다독였다.
남학생이 홀수라서 그는 맨 마지막 방을 유네의 것으로 배정받게 할 예정이었으나 행정상의 착오로 그 옆방인 류제와 같은 방이 되었다.
입학식 전날 유네가 무방비하게 옷을 갈아입었던 이유는 자기가 혼자 방을 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룸메이트 류제와 얼결에 친구가 되고 곧바로 저녁을 먹으러 가려고 옆방에 노크를 했다가 렌하고도 친구가 되었다. 그때부터 계속,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그렇게 된 거야.”
구구절절 자신이 남장을 하게 된 연유에 대해 전부 털어놓은 유네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말은 끝냈는데 어떤 얼굴로 렌 군하고 류제 군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 유네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따가운 햇볕에 무의미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어. 내가 지레 겁먹어서 지금 우리 반 친구들도 날 괴롭혔던 그런 애들하고 똑같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성격이 안 맞는 애들이 있지만 내가 여자였어도 친구들은 날 절대 무시하지 않았을 거야. 그걸 깨달으니 언제나 무서웠어. 차라리 거짓말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친구들에게 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거든.”
“…우리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까?”
지금까지 비밀로 해왔듯 같은 반 친구들한테 여자인 걸 비밀로 할 거냐는 물음에 유네가 잠시 동요했다.
렌 군도 류제 군도 나는 나라고 했어. 하지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아. 만에 하나 다른 애들이 내가 여자라고 싫어하게 되더라도 나는 나일 뿐이야. 언제까지고 겁쟁이로 살 수는 없잖아.
“아니, 괜찮아. 이렇게 된 거 여름방학 끝나면 전부 밝히려고 해.”
“정말? 그래도 되겠어?”
“지금껏 어영부영 고민했었는데 이제 확실해졌어. 혹시나 만약 다들 거짓말한 날 싫어하게 되어도 나한테는 렌 군도, 류제 군도 있잖아. 그지?”
유네가 쑥스럽게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 어찌 보면 진짜 여자애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애들도 미들 스쿨 때처럼 마냥 날 싫어하지는 않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
유네는 아까 자신들을 둘러쌌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듯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쟤 정말 돈 뜯어낼 거리 맞아? 저번에 나한테 물어봤던 같은 반 어빌리터란 애도 쟤 여자란 거 알고도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때 그 일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처음엔 그 애도 내가 여자란 걸 가지고 협박하려는 줄 알았는데 날 위해서 충고해 준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 애한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럼 다음 학기부터는 같은 방을 못 쓰는 건가?”
“뭐? 진짜? 그건 생각 못 했는데. 으으, 그럼 누구한테 숙제를 보여달라고 하지?”
“스스로 해. 스스로!”
“아하하. 걱정 마, 렌 군. 그렇게 되면 류제 군 몰래 많이 빌려줄 수 있으니까.”
“제발 버릇 나빠지니까 그러지 말라니까, 유네. 다음 학기에도 보충을 듣게 할 참이야?”
“흥, 누가 뭐래도 유네가 짱이다. 유네는 숙제 얼마나 잘 보여주는데 류제 넌 짠돌이처럼 그러냐? 대머리나 돼라.”
“뭐라고? 대머리? 학교에 돌아가서 두고 보자!”
“아하하하.”
여자란 게 밝혀졌어도 여전히 렌 군과 류제 군은 똑같다. 그래, 여자든 남자든 나는 나일 뿐이야. 자신감을 줘서 고마워, 렌 군, 류제 군.
류제가 괴롭힌다고 재경이 유네를 방패막이로 썼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익숙한 전경에 유네가 허파에 바람 든 것처럼 웃었다.
어차피 재경이야 그녀와 만났던 맨 처음부터 여자란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게 밝혀졌다 싶을 뿐이지 유네가 여자라는 사실에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유네는 당황했던 류제와는 달리 평정심을 유지하던 렌의 모습이 기뻤다.
렌 군은 상냥하다. 나보다 더 강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다.
“정말로 렌 군하고 류제 군하고 친구가 되어서 다행이야!”
“오버하긴.”
“헤헤헤.”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는 무사히 성공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유네의 눈에 비치는 사람이 류제가 아니라 렌 지미라는 것이다.
재경은 그 시선을 까맣게 모르는 채 헤드록을 걸어대는 류제에게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 * *
날씨가 좋다 못해 후덥지근하다.
학교로 돌아가는 마차 안. 재경은 떠날 때까지 안절부절못했던 유네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이니? 정말로 친구들한테 들킨 거야? 어쩌다가 그랬어? 응? 괜찮은 거 맞지?”
“유네야, 정말 밝힐 예정이니? 또 상처받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는 그런 거 못 견딘다. 네 눈에 눈물 나는 꼴은 절대 못 봐.”
“너희들, 내 딸이 여자란 걸 알았겠다? 유네에게 감히 눈독 들이거나 허튼짓을 했다간 혼구녕을―”
“당신은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아니… 그건 아니지만……. 유네야,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련. 정말로 다음 학기부터 친구들에게 여자라고 밝힐 생각이야? 후회하지 않겠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엄마는 말리지 않을게.”
유네네 부모님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제립학교 가기 싫다고 엉엉 울었던 딸이 걱정되는 데다가 조작한 서류를 다시 원상 복귀 시키는 데에 들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하지만 울며 겁에 질리기만 했던 딸의 생각이 바뀐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는지 오늘 아침 집을 떠나기 전에는 두 손을 맞잡고 고맙다고 인사를 해주었다.
“우리 딸과 친구가 되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어흠.”
끝까지 튕기기만 했던 유네네 아빠가 마지못해 고맙다고 얼버무린 걸 마지막으로 떠올린 그들이 노곤한 몸을 턱에 기대었다.
“다이내믹한 3일이었어.”
달각달각. 유네가 없는 마차 안에는 류제와 재경만 마주 앉은 채 창밖 풍경을 구경했다.
또 언제쯤 그런 메이드들이 수발들어 주는 대저택에서 놀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얼결에 유네의 비밀도 알아버리고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굉장한 경험을 했다.
정말 유네가 여자일 줄이야. 렌의 센서의 예리함이 대단한데. 매번 유네가 여장한 거 가지고 예쁘다 귀엽다 난리였잖아. 유네는 여자니까 여장한 게 아니라 그냥 꾸민 것이었다 치면 여자를 좋아하는 렌이 귀엽다 뭐다 그렇게 반응한 건 당연하겠지.
“아.”
잠깐, 그렇게 된다면 렌이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영영 0이 되는 건가. 결론은 그거다. 류제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유네가 여자로 밝혀져서 나한테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아, 아니. 잘만 하면 다음 학기부터 렌이랑 같은 방을 쓰게 될지도. 좋긴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생지옥?
“뭐야? 뭐 잊어버렸어?”
왜 감탄사를 내뱉다가 아무 말도 안 해. 재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류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넌 유네가 여자였다는 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어제부터 침착하기만 하고.”
“나? 뭐…….”
같이 목욕탕에 들어간 전적이 있으니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재경의 귓불이 빨개졌다.
곰곰이 생각하던 류제는 저번에 이상했던 렌이 떠올라서 손바닥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잠깐, 그럼 그제 슈퍼에서 나한테 눈치 못 챘냐고 했던 게 그것 때문이야?”
“응? 슈퍼?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때 그 표독스러운 여자애를 봤을 때 말야. 남자애가 찢어진 유네 사진을 주워줬잖아. 그 후에 나한테 뭐 이상한 거 못 느꼈냐고 물어봤던 거 기억 안 나?”
“아아, 그때? 별걸 다 세세하게 기억하네. 그야 여자애가 남자애를 두고 유네를 질투하고 있었잖아. 당연히 알아채지. 진짜 둔하다 둔해.”
“둔해서 미안하네.”
류제가 빠직 핏줄을 세우며 투덜거렸다. 누가 더 둔한데 나한테 그래? 젠장, 유네가 부럽다. 렌하고 내가 성별이라도 달랐으면 저놈이 날 의식이라도 할 텐데.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해서 기분 좋은 재경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본 류제가 심술보 가득 담긴 말을 던졌다.
“남은 여름방학 동안 보충이나 열심히 들으라지.”
“뭐야, 왜 또 심술이야. 기분 좋은데 김새는 말 하지 마!”
“추가시험 망치면 진급하는 데 문제 있다지~? 이러다가 혼자서만 1학년 수업 다시 듣는 거 아냐?”
“으으… 싫어. 류제, 나 공부하는 거 도와줄 거지? 그지?”
“나한테 공부 배우기 지긋지긋하다며?”
“치사한 자식아, 친구가 공부 때문에 이렇게 괴롭다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냐?”
“열심히 하는 거 보고 생각해 볼게.”
“류우제에~ 생각만 하면 안 된다? 응? 나도 너 도와줬잖아~”
“도와주긴 뭘 도와줘.”
여름방학 동안에는 학교에 유네도 없겠다 단 둘뿐이라 닥쳐오는 보충수업과 추가시험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재경이 마지막 희망인 류제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유네고 비키고 믿을 사람 하나 없으니 나한테 들러붙는구만. 류제는 그에게 기대려 하는 렌이 징징거리며 애원하자 괜히 튕겨대며 모르는 척했다.
재경은 제발 자기 성적을 버리지 말아 달라며 눈을 반짝반짝 없는 아양을 떨어댔다. 젠장, 이벤트가 이루어질 때 히로인들의 마음만 제대로 분석하면 됐지 왜 내가 주인공인 류제한테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 시각 두 사람을 배웅한 유네는 굳게 마음먹고 어느 집으로 향했다. 8반 학생들의 집 주소가 적힌 연락망과 주소를 비교해 본 유네가 침을 꿀꺽 삼키고 초인종을 눌렸다.
―누구세요.
“저… 그…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유네 나르타라고 하는데요……!”
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나 싶더니 유네가 흙으로 발장난을 하고 있을 무렵 곧 안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귀찮은 듯 슬리퍼를 찍찍 그으며 엄한 차림으로 나온 그녀는 다름 아닌 ‘무게’ 어빌리터 소녀였다.
“뭐야, 짜증 나게 우리 집에는 왜 왔어.”
“아니, 그… 하…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꾸물거리는 모양새가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녀는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낮잠을 방해한 거냐며 눈을 부라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말해보라며 짝다리를 짚은 그녀는 머뭇거리는 유네를 견디다 못해 발걸음을 돌려 집에 돌아가려고 했다.
“고…고마워!”
유네가 쇳소리를 섞어 외쳤다.
별 유네 나르타한테서 들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그녀가 당황해서 삐끗거렸다. 뭐? 미친 거 아냐? 왜 나한테 갑자기 고맙다고 하고 난리야? 진심 이해 안 돼.
“뭐야, 헛소리할 거면 빨리 꺼져.”
“허…헛소리가 아니라…….”
“난 너한테 고맙다는 말 들을 만한 일 안 했거든? 어이없어, 정말. 네가 여자란 걸 소문내지 말라는 속셈으로 온 거면…….”
“마…맞아, 네 말대로 나…난 여자야.”
“그래서 뭐.”
그녀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지 몰라도 충고해 줬으면 됐잖아. 괜히 날 갖다 엮지 마. 성가시니까.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네가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사정이 있어서 남장을 했지만… 다…다음 학기부터는 다시 여자로 돌아갈 거야.”
기껏 다른 애들한테는 조심하라고 말해줬더니 여자로 돌아간다니 내 충고는 무슨 소용이야. 그녀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유네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에도 유네가 용기 내서 다시 입을 뗐다.
“새…생각해 보니까 바보 같았어. 어떤 자신도 나일 뿐인데 고작 여자애들이 무섭다고 남…남장을 하다니. 이래서야 미들 스쿨 때처럼 도망밖에 못 가는 거잖아.”
“…그러냐.”
“그래서… 그… 결심했어. 기…기껏 충고해 줬는데 마음을 바꿔버려서 미안해. 그래도 고마워.”
“그걸 왜 굳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난리야. 마음대로 밝히든가. 나랑 상관없잖아.”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 날 생각해 준 거잖아. 덕분에 용기도 났고.”
예상치 못한 감사 인사에 그녀는 삐죽삐죽 입가를 실룩거리다가 혀를 찼다. 남자든 여자든 유네 나르타처럼 덜떨어진 성격은 진심 싫다. 착한 척, 연약한 척 다른 사람이 챙겨주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햄스터 같은 사람은 그녀는 징그러울 정도로 끔찍했다.
그래서 매번 괴롭혔는데 뭐가 좋다고 나한테 고맙다고 하는지. 멍청이 같아.
“…들어와. 더운데 뭐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래.”
“응!”
하지만 의외인 부분에서 용기를 내는 유네를 보자니 용서가 안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오랜만에 호의를 베푸는 척 유네를 집으로 들였다. 친구는 아냐, 친구는. 그냥 이 더운 여름에 여기까지 찾아온 게 바보 같아서 차라도 한잔 내주려고 한 거지.
다양한 의미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 유네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집에 들어갔다. 그녀는 그렇게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사라 하놋은 그런 유네의 모습을 그녀의 ‘공간’ 어빌리티로 기쁘게 관찰했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유네 나르타,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구나.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네가 잘 이끌어줄 테냐?”
그녀가 공간을 바꾸어 보충수업 싫다고 빽빽 소리를 질러대는 재경과 그 옆에 있는 마왕의 부활체를 살폈다.
“인간은 상처를 극복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부축받아 용기를 얻고 그 힘으로 스스로 걸어 나아간다. 절망은 그저 절망으로 끝나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괴로움을 증오로 바꾸는 능력뿐만이 아니다. 예언의 1년 동안 네가 그걸 깨달았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그걸 옆에서 도와줄지 망칠지 미지수인 렌 지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찌 되었건 옆에 두면 꽤나 시끌벅적 지루하지는 않은 놈이다.
“예정 외지만 혼자 고군분투하는 게 불쌍하니 도와주도록 할까.”
그녀가 어빌리티를 거두었다. 지친 기색이 보인다. 다음 달에는 모든 운명의 아이의 예언이 존재한다. 이번엔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다음 건 더 잘해내길 바란다.
“중요한 건 마음이야.”
그녀가 사라졌다. 그늘 아래 여름 매미가 맴맴맴 나무에서 시끄럽게 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