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7월. 그인 그녀와 그와 나] (3)
“신리 군은 변경 출신이라고 그랬죠? 음식은 입맛에 맞으셨나요?”
“네, 맛있게 잘 먹었어요.”
“그렇죠? 저희 주방장이 요리를 정말 잘한답니다. 호호호.”
점심 식사 후에 가진 애프터눈 티타임 시간. 깨뜨리면 좋은 꼴 못 볼 것 같은 디저트 트레이에 놓인 신기한 과자를 하나씩 집어 먹은 류제가 유네와 함께 유네의 부모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집에 주방장이 따로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사람 좋게 웃는 유네의 엄마와는 다르게 유네의 아빠는 마땅찮게 손님을 힐긋거렸다.
대화에 끼지도 않지만 이야기는 들어야겠다 싶은 건지 그는 테이블 중앙에 앉아 내내 신문만 읽었다.
그들이 어려워서 입을 굳게 다문 재경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니라 선생님과 면담하는 기분이었다. 그런 재경을 본 유네의 엄마가 이번엔 재경에게 물었다.
“우리 유네가 지미 군도 요리를 아주 잘한다 했었는데. 정말인가요?”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요.”
“아녜요. 우리 유네가 편지로 어찌나 칭찬을 하던지, 저도 먹어보고 싶어서 혼났다니까요. 참, 그때 여장 대회에서 우리 유네랑―”
“어…엄마,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요.”
“어머, 그게 왜 이상한 이야기니?”
싱긋 웃은 그녀가 모르쇠 하자 유네가 볼을 잔뜩 부풀렸다. 주책없게 친구들 앞에서 개인적으로 보냈던 편지 내용을 구구절절 읊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듣고만 있냔 말인가.
그건 암만 마음 여린 유네라도 고역이었다. 애도 아니고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전부 일러바쳤다고 친구들이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이다. 유네는 무안해서 붉어진 얼굴을 숙였다.
유네의 엄마는 그저 유네가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다는 사실이 기뻐서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우리 유네가 신리 군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는데, 어빌리티도 그렇고 기간트리카 실력이 굉장하다면서요? 공부도 잘하고. 우리 유네를 잘 신경 써준다고 들어서 정말 어떻게 감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유네랑 같은 방이라죠? 유네가 이상한 잠꼬대 같은 건 안 하나요?”
“아…아뇨, 평범합니다.”
“에헴, 흠!”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신문을 거세게 넘긴 유네의 아빠가 신경질적인 헛기침을 했다.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든가 왜 굳이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참견이야. 유네의 엄마가 허튼짓하지 말라고 날 선 눈으로 경고했다. 그 사인을 읽은 그는 애써 눈을 돌리며 콧수염을 비죽거렸다.
“우리 그이가 유네를 정말 애지중지해서요. 저래 보여도 여러분들을 반기고 있는 거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우리 유네, 다른 친구들하고도 잘 지내나요? 거기 학생들이 워낙 기가 세다 들어서 늘 걱정입니다.”
“어…엄마아……!”
“뭐 어떠니. 엄마도 유네의 학교생활 궁금하단 말이야.”
유네가 자기가 애도 아니고 제발 그러지 좀 말라며 칭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이때가 아니면 유네의 제립학교 생활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맞장구를 잘 쳐주는 류제를 독사처럼 끈질기게 물었다.
재경은 잔뜩 얼어서 우물거리고만 있다. 류제만 독박을 쓰게 되었지만 지금은 수가 없었다. 그가 예의 바르게 웃는 상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인기 좋아요. 다들 착하고. 저번에 기말고사 기간트리카 실전 시험에서는 유네가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와 함께 대단한 경기를 펼치기도 했고요.”
“어머 어머, 셀로니아 가문이면 유명한 귀족 집안이잖아. 얘는, 진작 이야기해 줬어야지! 그런 것만 쏙 빼놓고!”
“나…난 그저 비키 양의 작전에 따른 것일 뿐이라 별것 없었다구.”
“그래도 그런 특별한 사람과 대단한 걸 해냈다는 게 어디니. 얘가 어려서부터 어리벙벙하고 다부지지 못해서 늘 걱정이었는데 듣기만 해도 뿌듯하네요.”
호호호. 딸내미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받은 그녀는 세상 기쁘다고 활짝 미소 지었다.
미들 스쿨 3학년 겨울방학 땐 방에만 틀어박혀 엉엉 울기만 했던 유네가 너무 짠해서 나라 명령을 무시하고 제립학교를 보내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비록 남장을 했지만 친구들과 제대로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더 이상 팔불출 엄마의 참견을 참지 못한 유네가 안절부절못하며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밖에서 놀다 올게요. 자, 렌 군, 류제 군, 더 늦기 전에 가자.”
“엄마는 아쉬운걸. 유네 학교생활 이야기 더 듣고 싶은데, 그죠?”
“그건 저녁에 해도 되지. 오면서 바비큐 할 재료랑 사 올게요. 언… 누나들한테 준비해 달라고 말해주세요.”
“그래. 어쩔 수 없지. 너무 위험한 곳에 가지는 말고. 엄마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알아요. 걱정 마세요, 엄마.”
유네가 괜찮다며 그녀의 걱정을 달랬다. 슬쩍 돌아가는 상황의 눈치를 본 재경과 류제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의자를 정리했다.
유네가 어정쩡하게 서있는 두 사람더러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녀의 아빠가 괜히 유네를 쳐다봤다가 신문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분명 인사하고 싶은데 친구들 때문에 나서지 못해서 부끄러운 거다.
“다녀올게요, 아빠.”
“험험, 마차 조심하고. 이상한 놈들이 건들거리면 치안대에 신고하고. 해 지기 전에 돌아와. 무슨 일 있으면 꼭 아빠한테 말해.”
“이이도 참. 잘 다녀오렴.”
“그럼…….”
예의 바르게 인사한 류제가 유네를 따라 저택 밖으로 향했다. 이따금 마주치는 메이드복 차림의 사용인들이 어색해서 류제는 유네 뒤로 회피해 주제에 안 맞는 극진한 인사를 외면했다.
잔뜩 얼굴이 굳어 성큼성큼 거대한 대문 바깥으로 나간 그들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제야 살겠다며 턱턱 막혔던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쉬었다.
“와~ 긴장되어서 죽는 줄 알았어.”
“으으… 나야, 잘 참았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더라. 뭐야, 그거? 저번에 먹었던 고급 레스토랑 식사보다 더 엄청나잖아. 과자도 처음 보는 것투성이던데.”
참견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꿀 한가득 입에 담고 있다가 그제야 말문이 트인 재경이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주물거렸다. 유네가 점심이 좀 과하게 화려하기는 했다며 헤헤 손을 내저었다.
“아저씨가 오늘따라 식사에 힘을 많이 주셨나 봐. 당연히 평소에는 그렇게 안 먹어.”
“그렇지? 그래야만 해!”
아니면 내가 너무 비참해진단 말야. 뒷말을 꾹 삼킨 재경이 주먹을 허공 아래로 내질렀다. 맛있기는 했지만 저런 게 부자들이 먹는 평소 식사면 내가 지금까지 먹어왔던 음식이 너무 별 볼 일 없어진다.
그래, 이건 내 저번 생일에 친구 초대한다고 큰소리 뻥뻥 질러서 할머니가 생일상 차려준 수준하고 비교하면 되는 거다. 그런 거겠지?!
“너희 가족 모두 화목해 보여서 보기 좋다.”
“에헤헤, 그래?”
유네가 쑥스러워 몸을 배배 꼬았다. 류제 군도 렌 군도 오랫동안 본가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가정적인 기분이 오랜만일 것이다. 유네는 그들이 그리워할 기분을 대신이라도 실컷 만끽했으면 좋겠노라고 생각했다.
유네의 바람대로 류제는 오랜만에 키아나트리체의 끝자락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수녀 누나와 신부님이 생각났다.
가끔씩 방에 난입하는 들개와 올망졸망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은 없지만 화목해 보이는 가정을 보자니 그곳이 떠올랐다.
이번 여름에 한번 내려가 볼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렌은 계속 혼자 있어야 하는데.
재경도 유네의 부모님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거대한 저택을 묵묵히 뒤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고개를 획 돌려 신난 똥개처럼 물었다.
“어디부터 놀러 갈까? 주변에 아는 곳 있어?”
“렌 군하고 류제 군 온대서 내가 생각해 봤지. 조금만 가면 놀이공원이 있어. 어렸을 적에 자주 갔는데 괜찮으면 가볼래?”
“좋아! 결정! 가자!”
“유네가 추천한 놀이공원이라…….”
“미리 말하는데 그렇게 대단치는 않아.”
“그렇게 말해놓고선 또 입 떡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할지도 몰라. 유네 집에 갔더니 유네의 ‘대단함’의 기준을 잘 모르게 되어버렸어.”
“에이… 렌 군, 그 정도는 아니야.”
“나도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재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했다. 부자 동네 구경도 할 겸 세 사람 모두 산책로를 따라 놀이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만 인계에서 가장 번화한 키아나트리체의 수도 아가타에 살고 있다고 해도 매일 학교와 기숙사만 오가고 주말에 잠깐 나가는 마을을 제외하면 아가타 나들이를 해본 적이 없는 류제와 재경은 길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했다.
그들은 유네가 말했던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놀이공원은 관광지에서 볼 법한 평범한 유원지였다.
“어라, 오늘은 손님이 많아 보여. 방학이라서 그런가?”
“저기야? 생각보다 평범해 보이는데 나름 있을 게 다 있네.”
“그지? 헤헤. 어렸을 때는 자주 놀러 왔었는데 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못 왔어. 와아, 그립다~ 저 놀이 기구 아직도 있었구나.”
“으하하, 유원지라서 꼴에 롤러코스터도 있다! 저게 뭐야. 귀여워!”
재경이 아이들만 겨우 탈 법한 작은 레일 위에서 시동 거는 롤러코스터를 가리키며 웃었다.
집 근처 공원이라고 하기엔 넓은 토지에 자리 잡은 놀이공원은 여름이랍시고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만든 방법이 궁금해지는 바닥에서 나오는 분수로 물놀이를 깔깔거리며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학생 세 장이요.”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매표소에서 자유 이용권을 끊은 세 사람은 서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는 가장 가까이 있는 놀이 기구로 뛰어갔다.
그들은 이번 학기에 받은 학업 스트레스를 여기서 전부 날려버리겠다는 듯 미친 듯이 놀았다. 제립학교 주변에는 이런 놀이공원이 없어서 그런가 점잖은 류제조차 철없는 아이처럼 놀아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양손 가득 솜사탕을 들고 롤러코스터에 탔다가 구름처럼 하늘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헬륨 가스가 든 풍선을 마시고 이상한 목소리를 내서 킬킬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스파크가 튀는 작은 범퍼카를 타고 깔깔대며 서로를 공격하거나, 바이킹 제일 꼭대기에 가서 누가 누가 비명을 더 크게 지르나 내기도 했다.
마지막에는 더운 여름기온에 가열된 몸을 식힌다고 들어올 때 봤던 분수의 물줄기를 맞으면서 물놀이를 즐겼다.
하루 종일 웃고 떠드느라 지친 그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음에도 들뜬 열기를 이어가며 폐장하는 놀이공원을 뒤로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하늘이 파랗지만 벌써 시간은 저녁 먹을 시간인 오후 6시였다. 느긋느긋하게 달아오른 몸이 체육대회가 끝날 무렵처럼 기분 좋다.
“으하하, 하하하. 아까 류제 꼴이 장난 아니던데. 사진으로 찍었어야 했어.”
“너야말로 바이킹 탈 때 죽겠다고 비명 질렀잖아. 누가 모를 줄 알아?”
“고소공포증이 바이킹에까지 적용될 줄을 내가 알았냐? 그래도 기간트리카 덕분인지 익숙해져서 롤러코스터는 괜찮았단 말야!”
“오호라~ 그래? 그럼 이제 더 강도 높은 기간트리카 연습을…….”
“이때다 싶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싫어! 그건 싫어!”
“렌 군, 고소공포증이 많이 나아졌다니 다행이네.”
“그지? 류제 이놈은 칭찬해 주지 못할망정 못된 소리나 한다니까.”
재경이 비키처럼 콧방귀를 뀌며 젠체했다. 하찮은 잘난 척이 귀여워서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딱딱한 제립학교에서 벗어나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재미있다는 사춘기 아이들로 돌아간 그들은 저번 달 축제 때 이후로 이렇게 많이 웃었던 건 처음이라고 동시에 말했다.
그때 화마족 습격 건도 그렇고 렌의 할머니 일도 그렇고 기말고사까지 겹쳐서 웃을 일이 뚝 끊겼는데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아, 속 시원해.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것 같아.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
“우와. 렌, 너도 스트레스란 걸 받아?”
“류제 이 짜식이. 당연한 거 아니냐? 나도 기말고사랑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아서 스트레스 엄청 받았다고! 너랑 비키랑 번갈아서 아주 그냥 사람을 참깨 볶듯이 볶는데 배에 구멍이 안 생기고 배겨?”
“네가 공부를 안 하니까 그랬지. 들들 안 볶았으면 낙제 과목이 3개가 아니라 5개, 6개는 됐을걸?”
“…윽.”
“거봐, 이렇게 말하니 할 말 없지?”
“에이. 렌 군도 최선을 다한 거라고. 그지?”
“맞아, 난 최선을 다한 거야. 유네가 잘 아네. 나한텐 유네밖에 없다.”
재경이 편을 들어주는 유네에게로 후다닥 도망가 류제의 잔소리에서 벗어났다. 렌이 유네에게 아양을 떠는 모습을 바라본 류제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주머니에 느긋하게 손을 넣고 그들을 뒤따랐다.
신나게 몸을 움직인 탓인지 호화롭게 먹은 점심밥이 말끔하게 소화돼서 위가 고기를 찾아 요동을 쳤다. 뱃가죽이 진공 팩이라도 된 것 같다. 어서 돌아가서 씻고 밥 먹고 싶다.
오늘 저녁은 야외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기로 했으니 벌써부터 숯불 냄새가 코끝을 맴돌아 군침이 돌았다.
“돌아가기 전에 재료 사야 하는 거 알지? 잊으면 큰일 나.”
“아차, 바비큐용 고기가 있어야 되는구나. 어디서 사야 해?”
“가다 보면 커다란 마트가 있어.”
“빨리 가자. 축축해서 찝찝해. 한시라도 빨리 뽀송뽀송해지고 싶어.”
재경이 젖어서 피부에 달라붙은 옷가지들을 들어보았다. 덥다고 물장난을 친 건 좋았지만 액체가 태양열에 마르다 말아서 음료수를 흘린 것처럼 축축한 감각은 영 거슬렸다.
하물며 유네의 세 번째 호감도 이벤트 스토리가 곧 시작될 텐데 찝찝한 기분으로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집에 목욕탕이 있댔나? 그거 써도 돼?”
“당연하지. 누나들한테 말해둘게. 저녁 먹기 전에 목욕탕에서 씻고 나오면 기분 좋을 거야. 입욕제도 있으니까 각자 좋아하는 향을 골라줘. 아, 마트 찾았다.”
친구가 놀러온 게 들뜬 유네가 바비큐를 할 생각에 흥분해서 제일 먼저 마트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빨리 돌아가서 씻고 싶다는데 초대한 사람으로서 시간을 지체하면 실례였다.
“야. 유네. 기다려, 같이 가!”
류제와 재경도 서둘러서 달렸다. 마트 안에 들어가 유네를 찾자 먼저 들어갔던 유네는 어느새 바구니를 들고 바비큐용 고기와 버섯을 담고 있었다.
뒤따라온 두 사람이 유네를 어리숙한 보디가드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채소는?”
“쌈 채소는 안 사도 돼. 텃밭에 있거든.”
“집에 텃밭도 있어?”
“응, 엄마가 심심풀이로 관리하셔. 바비큐 소스는 주방장 아저씨가 주실 테니 고기랑 버섯만 사면 되겠다. 나머지는 대부분 집에 있을 거야.”
값비싼 바비큐용 고기를 담은 유네가 뿌듯하게 바구니를 들었다. 함께 먹을 바비큐 생각에 신이 나서 그녀가 생글생글 웃었을 바로 그때였다.
“어? 이게 누구야. 유네 나르타 아니야? 잘난 어빌리터 나으리는 영영 이곳에 안 돌아올 줄 알았더니 웬일이래.”
재경만큼이나 건방지고 비키만큼이나 깐깐스러운 목소리가 유네의 귀에 들려왔다. 그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잔인한 목소리에 유네는 들뜬 기분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설마. 어째서. 하필이면 왜 지금.
항상 행복해지려고만 하면 이런다. 저 과거는 간신히 잊을라치면 나타나 발목을 잡았다. 고장 난 로봇이 된 유네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유네의 미들 스쿨을 생활을 괴롭게 만든 근원이 자리에 서있었다. 유네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 둣한 환각이 보였다.
렌 지미처럼 하찮은 엑스트라에 불과해 특출난 일러스트도 없던 악역의 등장으로 7월, 유네의 단독 호감도 이벤트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막이 열렸다.
“아는 사람이야?”
변경 시골 출신이라 학교 말고는 아가타에서 아는 사람이 없는 류제는 유네가 우연찮게 지인을 만난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유네가 친구들의 안색을 살폈다. 의심할 여지 없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유네는 어떻게든 그녀의 거짓말을 숨겨야만 했다.
“으…으응, 미들 스쿨 때… 같은 반이었어.”
“아아. 동네 친구구나.”
류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납득했다. 류제 군이 저 애를 내 친구라고 말하다니. 앙칼진 목소리를 계기 삼아 스쳐 지나가는 끔찍한 기억에 유네의 귀여운 인상이 구겨졌다.
왜 하필이면 류제 군하고 렌 군하고 함께 있을 때 만나는 거야. 어쩌지? 내 아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이상하게 보일지도 몰라.
유네는 그녀가 빨리 이곳에서 나가버렸으면 바라며 어떻게든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유네 특유의 선한 미소. 그걸 본 여학생이 비릿하게 유네를 조롱했다.
“순진한 공주님인 척하며 여우 짓하는 건 여전하나 보네.”
“아…아니… 그……. 아하하.”
“하기야 네가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거기서도 특별대우를 받나 보네. 너만의 왕국 만들어서 좋겠다. 부러워.”
“잠깐. 무슨 말이 그래?”
듣자 하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뱉는 말이 너무하다. 남자애한테 공주님이니 뭐니. 아무리 긍정적으로 봐도 사이좋은 친구 사이로 보기엔 이상했다.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을 잡은 류제가 그녀를 막아섰다.
같은 또래들에 비해 신장이 큰 류제다. 군사교육을 바탕으로 하는 학교라 자라나는 떡대도 남달라서 얼핏 보면 위압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그녀는 류제를 보고도 코웃음만 쳤다.
제립학교에 들어간 유네와 같이 다니는 걸 보면 남자라도 어빌리터인 것 같은데, 어차피 어빌리터는 비어빌리터를 절대 상처 입힐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류제를 도발하듯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하건 그건 내 마음이지.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 왜 혼자 진지하게 과물입해? 소름 끼쳐. 그거 알아? 유네 나르타에게 홀린 남자는 세상 꼴불견이야.”
“뭐? 그쪽이 먼저 말을 심하게 했잖아. 그런 말을 듣고 누가 좋아해?”
“하, 웃겨. 주제에 날 가르치려고 드네. 아하, 너희들은 다 그랬지? 우리를 가르치지 못해서 안날 난 것처럼 선민의식에 빠져선 오지랖만 넓은 잘나신 어빌리터니까. 좋겠다, 그 학교는 너희들만의 세상이라서.”
“말이 지나친 것 같다?”
그녀가 그게 뭐 어쨌냐며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어빌리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눈빛부터 시작해서 몸에 비치는 태도에 그들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발언을 듣고 어이가 없었던 류제가 반박하려고 할 때 뒤에서 그녀의 일행으로 보이는 무리가 소란을 듣고 우르르 몰려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들의 손에 불꽃놀이 세트가 들려있는 것을 보아 방학을 맞이해 친구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기려고 했던 모양이다.
다가온 그녀의 친구 중 유일한 남학생이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살피던 그가 유네를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져서 반갑게 인사했다.
“어? 머리가 파랗다 해서 봤더니 유네잖아? 오랜만이네. 머리 잘랐어? 제립학교 간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졸업식 날도 안 나와서 걱정했었어.”
“아… 그… 안녕, 오…오랜만…이야.”
“뒤에는 누구? 친구야? 같은 학교? 방학이라서 집에 온 거야?”
“으응. 뭐. 그렇지.”
“걱정했는데 제대로 친구가 생겼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묻더니 류제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언짢다. 그걸 본 악역 여학생이 그에게 친근하게 팔짱을 끼었다.
“잘난 어빌리터는 어빌리터끼리 어울린다잖아. 참견하지 말자구. 넌 왜 눈을 그렇게 떠? 또 남의 것에 눈독 들이는 거 아니지?”
“아…아냐, 그런 게…….”
“당연히 그래야지. 가진 것도 많으면서 욕심은 끝도 없어가지고.”
“너 또 유네한테 심술부리고 있었어? 애도 아니고 그러지 좀 마. 아, 유네. 우연히 봤는데 그때 라우라 축제 때 사진 예쁘게 잘 나왔더라. 이렇게라도 우연히 마주쳐서 기쁘다.”
그가 주머니에서 어쩌다가 구하게 된 유네의 여장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악의는 없어 보였는데 그걸 본 악역의 얼굴이 표독스러워졌다. 남자 친구가 무려 유네의 사진을 몰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드러내니 질투가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그건……!”
당황한 유네가 어버버 그가 들고 있던 사진을 빼앗았다.
세상에, 이게 여기까지 퍼지고 있었다니. 서…설마 저 애들 사이에서 내가 제립학교에서 남장하고 있다는 걸 들킨 건 아니겠지? 만일 누가 그걸 학교에 신고라도 하면 난…….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사진만 봤을 때는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보여서 그들은 유네가 제립학교에서 남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듯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복병은 아군에게 있었다. 옆에서 류제가 오랜만에 보는 여장 사진을 손가락질하며 위험한 발언을 했다.
“그거 유네의 여자… 으압!”
“와악! 왁! 류제 군, 그 이야기 하지 말아줘!”
유제가 다급하게 류제의 입을 막았다. 워낙 요란스럽게 버둥거리는 바람에 류제의 이목구비가 은밀하게 나타났다.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수려한 얼굴이 스쳐 지나가자 다들 헛것을 본 양 눈을 끔벅거렸다. 기묘한 긴장감이 잠시 끊어졌다. 누군가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던지기까지 했다.
반면 악역의 눈동자에는 독기가 흘러넘쳤다. 거기서도 제일 잘난 사람을 손에 넣었다 이거지? 이해가 안 돼. 저런 보잘것없는 유네 나르타 따위 뭐가 좋다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가진 것이라곤 부모님 돈밖에 없으면서 매번, 매번 혼자서만 특별 취급받는다. 같은 어빌리터 사이에서도 저런 게 특별한 거야?
질투 어린 눈동자로 유네를 훑던 그녀는 남자 친구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깟 거 가지고 있지 말라고!”
이 세계관에서의 사진은 재경이 살았던 세계처럼 흔하게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진을 찍는 사진사가 따로 있고 고가의 전문 장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진은 귀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진은 영혼을 복사한다는 괴담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걸 찍힌 본인의 눈앞에서 미련 없이 갈기갈기 찢어버리다니. 자기 몸이 찢어지는 착각이 든 유네는 겁먹은 숨을 히익 들이쉬었다.
그런 엄청난 짓을 죄책감 없는 얼굴로 해낸 악역은 사진 조각을 쓰레기처럼 내팽개쳤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죽겠다 정말. 거기서는 다들 널 예뻐해 줘서 다행이다. 이번에도 꼬리 잘 치고 혼자서만 약한 척 열심히 해. 아, 그래도 유네한테 지켜지고 싶지는 않아. 나보다 약한 어빌리터한테 기대다니 최악이야. 그러면서 어빌리터라고 대우란 대우는 다 받겠지. 좋겠네, 어빌리터로 태어나서.”
“이 자식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혹시라도 비키 호감도 이벤트처럼 실패할까 봐 참견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재경이 꾹꾹 화를 눌러 담으며 이를 갈다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당장 유네한테 사과해!”
있는지도 몰랐던 재경이 순식간에 뛰쳐나와 악역의 멱살을 낚아채며 으름장을 놓았다. 천하의 신재경이 여기까지 참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내가 왜? 유네는 괜찮다는데. 유네, 혹시 기분 나빴어?”
“아니, 그…….”
유네가 주춤거리며 말을 흐렸다.
거봐, 연약한 척하는 유네 나르타는 이번에도 뒤에 숨기만 바쁘지. 그녀는 그게 꼴불견이었다.
이번에 등장한 기사님은 어디 보자, 앞에 있는 검은 머리 남자와는 다르게 생긴 것도 멍청한 게 별로인 데다가 상대적으로 키도 쥐똥만 해서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녀가 어쩌라는 식으로 재경의 코앞에서 깝죽깝죽 빈정거렸다.
“거봐, 아니라잖아. 왜 혼자서 그래? 돌대가리야?”
“눈앞에서 자기 사진을 찢는데 기분 안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어! 너야말로 돌대가리 아냐?”
“왜 단언해? 증거 댈 수 있어? 참나, 자기 일도 아니면서 버럭버럭 시끄럽게 소리나 지르기는. 그쪽 학교 학생들도 별것 없네. 하기야 가서 배우는 게 싸우는 것밖에 없으니 교양이 없을 수밖에 없지.”
그녀가 자신의 멱살을 붙잡은 재경의 손을 치웠다. 쳐볼 테면 쳐보라는 눈빛에 두려움이 없다.
재경은 자기를 무시하거나 시비 거는 것을 적당히 받아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진짜 화가 나서 울컥하는 찰나 그 기질을 읽은 류제가 재경을 붙잡았다.
목줄 잡힌 불도그 꼴이 된 재경이 놓으라고 버둥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뭐야!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도 제대로 다 배우거든?! 혼자서 뭐가 잘났어?! 당장 밖으로 따라 나와!”
“진정해. 학교 밖에서 소란 일으켜 봤자 좋을 거 없어.”
“하지만 쟤가 먼저!”
“내가 뭐. 아, 시시해. 가자, 얘들아. 설마 오랜만에 만난 우리 귀염둥이 유네 나르타한테 볼일 있는 사람 있어?”
류제와 유네, 재경을 번갈아 보고 비웃은 악역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하나둘 그녀의 친구들도 우왕좌왕 따라 나갔다.
비교적 유네에게 완만한 태도를 보였던 남학생도 곤란한 듯 쳐다보다가 여자 친구가 찢은 유네의 사진을 주워서 넘겨주며 유네를 달랬다.
“미안, 쟤 성격 알잖아. 이해해 줘. 그래도 만나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보자.”
“나중에 보긴 개뿔이. 이해는 무슨 이해냐? 난 저런 간잽이 싫어. 넘어져서 코나 깨져라.”
떠나가는 그의 등 뒤로 재경이 들으라고 투덜거렸다. 류제가 진정하라며 재경을 다독거렸다. 덕분에 간신히 화를 인내한 재경은 머리에서 증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담. 류제도 어이가 없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 학교 친구들이야?”
“으응, 성격이 좀 드세지? 시…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해.”
“아냐. 너야말로 괜찮아? 사진 찢어져서 어쩐담.”
“난 괜찮아. 아하하.”
별 일 아니라는 양 유네가 어색하게 웃었다.
재경이 그들이 사라진 곳을 흘기며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암만 스토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도저히 두 눈 뜨고 못 지켜볼 정도다.
젠장, 유네는 저런 애한테 찍혀서 중학교 내내 왕따를 당했었단 말야? 직접 보니까 사람 미치게 하네. 유네는 저런 걸 어떻게 참았던 거야?
“우리도 가자. 바비큐 파티 해야지.”
“쫓아가서 한 대 때려줄까 보다. 얄미워서 손이 다 근질근질하네.”
“워워, 진정해. 개에 물렸다고 생각해. 때렸다간 수학여행 때처럼 좋게 흘러가진 않을 거야.”
그때도 일반인과 싸움이 붙었지만 운이 좋아서 그냥 넘어갔을 뿐이다. 저 애는 털끝 하나 건들기라도 하면 당장 신고할 기세였다.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으로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퇴학당한 어빌리터는 갱생시설에 들어가 재교육을 받는다고 하니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계산만 하면 되지?”
돌진할 것처럼 털을 바싹 세운 재경을 붙들던 류제가 다른 손으로 유네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대신 들었다.
유네도 그녀들과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허둥지둥 마트를 빠져나왔다. 겉으로는 웃는 척해도 표정에 진 음영은 숨길 수 없었다.
괜찮다며 끙끙거리면서 제 몫의 짐을 들고 가는 유네 몰래 류제가 재경에게 속삭였다.
“친구는 절대 아닐 거야.”
“저게 친구면 난 온 세상 사람들하고 친구다. 것보다 류제, 혹시나 이상한 거 눈치 못 챘어?”
“이상한 거라니. 그 여자애가 어빌리터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그건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거고. 그건 재경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재경이 답이 없자 류제가 눈을 끔벅거렸다. 여기까지 왔으면 조금이나마 의심할 법도 한데 재경은 정말 저 둔탱이를 어찌할꼬 눈을 질끈 감았다.
“암것도 아냐. 눈치 못 챘으면 됐다, 멍충아.”
참견 안 한다고 한 주제에 성질머리 못 죽여서 기어코 참견해 버린 자신도 얼탱이가 없어 죽겠는데 저거 저거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주구장창 1번 선택지만 골라대는 저 바보는 무슨 약을 써야 나을까.
저 여자애가 남자애를 두고 유네를 질투하고 있었잖아. 그걸 보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못 느꼈나?
“뭐 다른 게 또 있었어?”
류제는 이상할 때에만 눈치가 빠른 렌이 혼자서 어떠한 것을 알아버린 건지 가늠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나도 알려줘.”
“몰라도 된다니까~”
그게 류제가 유네에게 가진 관심의 정도이니 상냥함을 둘러쓴 채 무관심을 숨기는 주인공 자식은 어제나 저제나 속 편해서 좋겠다고 재경은 생각했다.
* * *
다 된 밥에 재 빠뜨리는 불쾌한 만남을 곱씹으며 유네의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성질 나쁜 유네의 지인과 엮였던 사건을 뒷전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시금 유네네 집의 규모에 놀라 머리가 리셋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부잣집 딸이라고나 할까. 아까 했던 어빌리터니 뭐니 하는 말다툼은 미세 먼지만큼 하잘것없어 보였다.
재경이 살던 세계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목욕탕보다 화려한 목욕탕도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건 집에 바비큐 파티를 도와줄 사용인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네가 자기 집에 놀러 오면 수학여행 때처럼 바비큐 파티를 할 수 있다고 재경을 유혹했던 적이 있는데 재경은 바비큐 파티를 할지언정 그들끼리 준비해서 먹는 것을 상상했지 메이드들이 수발 다 들어주는 정경을 떠올리지 않았다.
역시 분수에 맞지 않는 영화를 누리면 몸에 안 좋다. 재경은 그들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메이드들을 보니 고기를 구워 먹기도 전에 체할 것 같았다.
“아가… 도련님, 더 필요하신 것 있으신가요?”
“괜찮아요, 어… 누나.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할게요.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들어가서 일 보세요.”
“하지만 안주인님께서 손님분들이 어디 불편하지 않을까 잘 확인하라고…….”
지위가 높아 보이는 메이드가 유네의 부탁에 곤란한 듯 답했다. 유네는 엄마가 또 그런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렌 군과 류제 군은 언니들이 자꾸 간섭하는 걸 더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아빠도 그렇다. 물론 아빠 덕분에 목욕탕 트라이앵글 눈치 싸움에 들어갈 뻔한 걸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 앞에서 호통을 치다니 너무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그건 다 큰 아들한테 보일 태도가 아니잖아. 렌 군하고 류제 군한테 괜히 의심이라도 사면 어쩌려고 그래.
유네는 방금 전 물에 푹 젖은 두 사람을 위해 목욕물을 준비하려고 했던 찰나 류제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그녀의 아빠가 노발대발한 것을 떠올리고 새삼 질겁했다.
“유네, 너는 목욕 안 해?”
“아…아니, 난 괜찮아. 먼저 해. 나는 바비큐 준비해 놓고 있을게.”
“그래? 저번처럼 같이 하면 좋을 텐데.”
흠흠거리면서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같이 목욕했다는 말을 들은 아빠가 그렇게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댄 모습을 유네는 처음 봤다.
류제는 정말 아무런 의미 없이 동성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아버지로서 필터가 낀 그의 귀에는 류제가 알몸인 유네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너… 감히 내 따… 아들과 같이 목.욕? 목.욕.을 함께 했다는 거냐?”
“네? 예… 그…그렇습니다만……?”
머리끝까지 피가 몰려서 관자놀이에 핏줄이 붉으락푸르락 불거진 그녀의 아빠는 죄 없는 류제에게 화를 어찌 풀지도 못하고 어딘가로 걸어가 괴성을 질러댔다.
류제 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고 렌 군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고 있었더랬지.
류제 군이나 렌 군 입장에서는 그저 남자끼리 평범하게 목욕한 건데 아빠가 그러니까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야. 도대체가 아빠는 내가 여자란 걸 숨길 생각이 있는 거야?
“유네, 뭐 해? 가만히 있지 말고 그거나 이리 줘.”
“아… 응! 미안!”
멍하니 있던 유네가 들고 있던 질 좋은 바비큐 고기를 렌에게 넘겼다.
같이 목욕했다는 말을 듣고 허공에 고함을 지르는 아빠에게 헐레벌떡 뛰어가서 간신히 오해는 풀었지만 아빠는 어지간히 친구들이 마음에 안 차 보였다.
남장을 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남장을 하라고 말을 꺼냈던 아빠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내가 더 무안하다. 정작 류제 군하고 렌 군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제 굽는다?”
“응! 맛있겠다. 버섯은 통으로 굽는 거야?”
“세라 쌤이 바비큐에서 버섯을 맛있게 먹으려면 통으로 구워야 한댔어.”
부담스러워서 결국 메이드들을 물리고 대신 고기를 굽게 된 재경이 바비큐 판에 고기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목장갑을 낀 채 고기와 수제 소시지를 굽는 모습이 익숙하다.
그 모습에 괜스레 신이 난 유네가 히죽 웃었다.
여기에 보이지 않는 류제 군은 수돗가에서 채소를 씻는 중이다. 늦은 저녁까지 류제 군하고 렌 군이 우리 집에 있으니까 들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뭐더라. 맞아, 우리 집으로 수학여행 다시 온 기분이야.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고기 굽는 게 재밌냐?”
“아니, 헤헤. 렌 군이 고기 굽는 게 신기해서.”
“별 게 다 신기하네.”
평소처럼 가시가 선 쀼루퉁한 말투가 오늘따라 둥글둥글하다. 부끄러운 듯이 귓불이 빨개진 것을 숯불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었던 재경이 덥다는 말을 연발하며 목장갑 낀 손으로 이마를 닦는 시늉을 했다.
숯을 뒤적거리다가 목장갑에도 숯가루가 묻었는지 칠판에 분필이 칠해지듯 재경의 피부에 검은 자국이 남았다.
“렌 군, 손으로 얼굴 닦지 말아 봐.”
“왜?”
“얼굴에 숯이 묻었어. 내가 닦아줄게. 잠시만…….”
유네가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양손이 불편한 재경 대신 더러워진 이마를 닦아주었다. 막 목욕탕에서 뽀득뽀득 목욕했는데 금세 더러운 게 묻어버리면 아깝다고 생각했다.
유네가 퍼스널 스페이스를 파고들자 턱을 뒤로 뺀 재경이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말랑말랑 귀엽게 생긴 유네의 녹빛 눈동자가 코앞에서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경이 괜히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안으로 말았던 입술이 다시 바깥으로 펴지는 건 왜 그런 걸까.
“둘이 뭐 하는 거야?”
두 손 가득 접시를 들고 있던 류제가 찌그러진 얼굴로 빤히 둘을 쳐다보았다. 수돗가까지 가서 쌈 채소를 씻어오는 사이에 파렴치한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발칙해 죽겠다.
갓 사귀는 연인 같은 짓을 하던 유네가 어느새 돌아온 류제를 보며 순진하게 웃었다.
“렌 군이 숯검댕이가 돼서 닦아주고 있었어.”
“한눈팔지 마. 고기 탄다.”
“뭐라고? 그럴 수는 없어! 유네, 비켜봐!”
방심한 사이에 귀한 고기가 타다니, 이 무슨 안타까운 불행이냐. 류제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재경이 후다닥 고기를 뒤집었다. 하지만 그건 류제의 심술에 지나지 않아서 고기는 익기는커녕 핏물이 선명했다.
“이 거짓말쟁이. 완전 안 익었는데?”
“그러니까 불판을 똑바로 봐야지. 만약 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또 자기만 빼놓고 둘이서만 꽁냥거리는 게 눈꼴 시렸던 류제가 이제야 볼 만하다고 콧방귀를 뀌었다. 렌 한해서는 마음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보다 더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씻어온 쌈 채소를 야외 테이블에 올려놓던 류제가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작게 혀를 찼다.
“옛날엔 안 그랬는데 뭘 먹고 자라서 매일같이 심술을 부린대? 혼자 숨어서 먹다가 심술보라도 자라난 거 아냐? 나랑 유네랑 친한 게 그렇게 질투 나냐?”
“아니거든?”
정곡을 찔린 류제가 곧바로 반박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했다. 지레짐작한 재경이 히죽 웃었다. 류제, 저 짜식이 유네한테 마음이 있구나. 날 질투하는 것 좀 봐. 아닌 척하면서 관심은 다 있다니까. 후후후, 류제 마음이 저렇다면 유네 루트는 안심인데.
근데 좀 눈치는 키워라. 관심 있으면서 아직도 유네가 여자란 것도 모르냐? 어, 그럼 류제는 유네가 남자인 줄 아는데 좋아하는 건가? 그게 뭐야. 이상해.
“다 익었다. 이제 먹자.”
“버섯 썰어줘.”
“마실 건 없어도 돼?”
“여기 얼음 박스에 담겨있어”
다 구웠으니 먹는 일만 남았다. 옆에서 끝까지 남아 수발을 들어주던 메이드가 유네의 부탁에 결국 항복하고 물러섰다. 저택 밖 정원에는 이제 바비큐 파티를 하는 세 사람만 남았다.
재경이 고기를 접시에 옮겨 담다 말고 적적한 백색소음을 만끽했다.
“분위기 좋은데?”
“그지? 헤헤. 옛날에도 부모님하고 이렇게 놀곤 했어”
고요하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맑은 은하수가 비처럼 쏟아질 것 같았다. 벌레를 쫓는 향 때문인지 옛날 할머니랑 살던 때 생각도 좀 나고. 저번처럼 수학여행 온 것 같기도 하다.
나긋나긋한 풀벌레 소리가 추억에 풍미를 돋운다. 여름밤의 행복이란 게 대단할 것도 없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맛있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진짜 입에서 사르르 녹네.”
“굽느라 고생했지? 고마워, 렌 군.”
“별걸 다.”
그림 같은 풍경 아래에서 평소의 배는 되는 양의 고기를 해치우고 의자에 앉은 세 사람은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을 나른하게 바라보며 부른 배를 두들겼다. 테이블 위에는 빈 접시만 남았다.
배가 꺼지길 기다리며 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를 헤아리던 유네가 시선을 돌려 재경을 힐끗거렸다. 신경 쓰이는 게 있던 그녀가 슬며시 물었다.
“렌 군, 혹시 무슨 걱정 있어?”
“보충수업을 생각하면 창자가 뒤틀리는 것 말고는 암 생각 없는데. 너야말로 걱정 있는 거 아냐?”
“아…아냐. 아까부터 렌 군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내 착각이었나 봐.”
유네가 괜한 오지랖이었다며 손을 저었다.
걱정이라. 재경은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유네 짜식이 자기 처지 생각하기도 바쁜 주제에 남 신경 쓰긴.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유네 성격상 사람 눈치를 잘 봐서 그런가 결국 티가 났나 보다.
“그냥 배불러서 그래.”
“그랬다면 다행이다.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유네가 실없이 웃자 재경이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유네 말이 맞았다. 이벤트가 시작되면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오늘도 또 그놈의 성질머리 하나 간수 못 해서 이야기에 끼어든 것을 걱정하는 중이다.
또 내가 간섭한 게 이상하게 작용해서 호감도 이벤트를 망치게 되면 류제는 유네랑도 이어지기 힘들어진단 말이야.
호감도가 낮으면 밸런타인데이 때 히로인에게 고백했을 때 성사될 확률이 뚝뚝 떨어졌다.
특수 히로인인 왕녀와 미나를 제외한 히로인들은 호감도가 5일 때 100%, 4일 때 70%, 3일 때 50%이고 그 이하부터는 절대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다.
히로인들이 고백을 받아주지 않으면 당연히 류제 타락 이벤트나 전쟁 이벤트 등 배드 엔딩과 연결이 된다.
비키는 저번 호감도 이벤트 실패로 최대치가 4로 줄어들었고 그것은 비키 루트로 가면 30%의 배드 엔딩의 확률이 있다는 의미도 되었다. 리겜이란 개념이 없는 현재로선 미래를 위해서 가장 안전한 확률이 중요하다.
하물며 ‘모두는 친구’ 이벤트도 전 히로인 호감도 3 이상이라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도 확률 싸움이란 말야. 망할 게임회사. 왜 이렇게 확률을 좋아해? 인생도 확률적으로 망했으면 좋겠나.
“선선해서 기분 좋다.”
옆에서는 류제가 이런 소리나 하고 앉았으니 속이 안 탈 수도 없다. 재경이 한숨을 내쉬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러게. 기숙사는 밤에도 더웠는데.”
“렌 군, 그거 알아? 류제 군은 어빌리티로 몸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다?”
“뭐? 그런 기능도 있어? 개쩐다. 에어컨이 따로 없네.”
“에어컨? 에어컨이 뭔데?”
“그런 게 있어.”
재경이 염려하는 불길한 미래와는 다르게 오늘 밤은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는 나른하고 평화로운 날이었다.
평화롭다. 너무 평화로워서 재경이 걱정하는 그런 미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확률이 거짓말 같았다.
그는 태평하게 앉아 별을 보는 류제를 흘겼다. 하물며 저런 눈치를 쌈 싸 먹은 놈이 세상을 멸망시킬 마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믿고 싶지 않았다.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별자리를 멍하니 바라본 유네가 오늘 기억을 되짚었다. 재경이 ‘너야말로 걱정 있는 거 아냐?’라고 반론한 것에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버렸다.
걱정은 많다. 겁이 많은 성격이라 남들은 쓸데없다고 치부할지도 모르는 고민도 많았다.
남장을 하고 있어서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도 불편하지만 최근에 만났던 마족도 그렇고 세라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어빌리터의 숙명도 그렇고 매일 평화롭기만 하고 싶은 유네에게는 그들의 존재는 너무 과분했다.
“유네한테 지켜지고 싶지는 않아. 나보다 약한 어빌리터한테 기대다니 최악이야.”
이런 나라도 만약 진짜 마족이 쳐들어온다면 사람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는 거겠지. 과연 나 같은 게 그럴 수 있을까.
“평생 렌 군하고 류제 군하고 셋이서 놀러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너무 꿈같은 이야기려나?”
“지금도 충분히 꿈같은 이야기 속에 있잖아. 대저택 앞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하지만 최근 들어 등급1의 마족이 연이어서 나타난 데다가 선생님들도 아닌 척하시지만 요즘 학교 분위기가 뒤숭숭한걸. 진짜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들도 전장에 나가야 한다면 어쩌지. 나는 렌 군이나 류제 군처럼 그렇게 강하지도 않은데 잘 싸울 수 있을까?”
“에이, 우리들은 아직 학생이잖아. 설사 그렇더라도 그런 곳에는 배치하지 않겠지. 해봤자 군부대 백업이려나.”
“류제 군 말처럼 과연 그럴까…….”
유네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인류를 지켜야 하는 어빌리터로서의 사명을 가진 유네는 자신처럼 약한 사람이 그런 잔인하고 무서운 마족 앞에서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무서웠다.
매번 자신이 어빌리터라고 소개하면 이런 유약한 점을 지적받았다. 아까 그 애도 그러지 않았는가. 약한 유네한테 구해지고 싶지는 않다고.
“아마도.”
살면서 지금까지 마족과 총 두 번을 마주친 류제는 그들의 무시무시함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확답할 수 없었다.
만약 마족들이 다시 키아나트리체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마왕의 부활체라는 내 정체는? 지금처럼 친구들하고, 렌하고 같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아마 아니겠지.
“등 따시고 배부르고 딱 좋은데 속 안 좋아지게 쓸데없는 걱정하긴. 내가 단언해 주지. 전쟁 같은 건 절대 안 일어나.”
듣다 못한 재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만 홀로 마음에 품던 걱정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들으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루트는 많다. 호감도 이벤트 몇 개 실패해도 전쟁이나 류제 타락 이벤트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유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반드시 안 일어나게 할 거다. 내 생에 배드 엔딩 따윈 없어! 왜냐하면,
“내가 막을 거거든!”
“…푸흡.”
너무 자신만만해서 어이가 없다. 류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로 막을 수 있다는 듯이 결의에 찬 눈동자가 웃기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를 어쩌려고 저렇게 장담하는지.
“유네, 안심해. 렌이 막아준다잖아.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류제 너, 그러면서 날 바보 취급하지 마. 난 진심이거든?”
“바보 취급한 거 아닌데~”
“맞잖아!”
“헤헤헤. 나는 믿을게, 렌 군.”
“그러면서 너도 실제로는 날더러 바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진지한 결심이 가볍게 치부되자 부루퉁해진 재경이 괜히 성질을 부렸다. 이것들이 사람이 모처럼 진지하게 말하는구만.
물론 나 때문에 틀어질지도 모르지만 나 때문에 성공할 수도 있는 거잖아. 짜식들이 내가 지금까지 무슨 고생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바비큐는 잘 먹었니? 시간이 늦었구나. 이제 슬슬 들어가서 자지 않으면 내일 피곤할 거야.”
그들이 늦게까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자 확인차 잠옷 위에 가운을 입고 밖에 나온 유네의 엄마가 인자하게 그들을 불렀다.
별을 보며 시답잖은 수다를 떨어대던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우는 건 저택 사용인들이 알아서 한다고들 하고. 졸린 눈을 끔벅거린 그들은 유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렌 군, 류제 군. 오늘 정말정말 즐거웠어. 잘 자, 내일 아침에 보자.”
“그래, 안녕.”
“잘 자, 유네.”
류제와 재경은 손님방 앞에서 유네와 헤어졌다.
방에 딸린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나와 같은 침대를 차지한 두 사람은 각자 끄트머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재경은 잠이 오지 않아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누워있자 다들 잠들었는지 풀벌레 소리도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낯선 곳, 낯선 잠자리. 밤이 찾아오면 다음 날이 꼭 꼬리를 물고 찾아온다.
재경은 시나브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일 드디어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난다. 과연 성공일까 실패일까. 난 유네에게 호언장담한 것처럼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류제, 자?”
등을 돌려 반대편을 보고 있는 류제는 자신을 찾는 렌의 부름에 슬며시 눈을 떴다. 하지만 답하지 않았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류제가 답이 없자 재경이 안절부절못한 심정을 참지 못하고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뒤척거려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거리는 게 할머니 건강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처럼 걱정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뒤흔들었다.
“…….”
째깍째깍 시간이 간다. 유네 것도 실패하면 세라 쌤 루트를 공략해야 하겠지. 이러다가 진짜 전쟁 이벤트가 있는 왕녀 루트로 가야 하는 건 아닐까 몰라.
미나 루트만큼은 절대 아니어야 해. 그건 순도 100% 타락 루트니까.
하아, 이렇게 고민하면 뭐 해. 내가 개입했다간 또 엉망이 될지도 모르는데. 비키 이벤트가 망쳐진 이유가 뭔지 확실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스토리대로 되는 것이 있고 멋대로 바뀌는 게 있는 걸까. 그리고 그 기준은 나인 걸까?
그가 삼류 악역 렌 지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에 비키 이벤트를 실패했다는 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또 내가 개입을 안 하면 류제 저 바보는 또 바보 같은 선택지만 택할 거란 말이지. 날더러 어쩌라는 건지, 원.
재경은 태평하게 잠만 자는 류제를 힐긋거렸다. 네 행동 하나하나에 세상의 운명이 걸렸다는 건 알기나 하는 거냐. 응? 류제 이 주인공아.
재경은 괜히 죄 없는 류제의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인류의 운명이 달린 문제인데 나만 고민하고. 미래를 안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좀이 쑤셔서 머리가 안 돌아가니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한 재경이 슬금슬금 밖으로 향했다. 문밖을 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수상쩍다.
어디 가는 거지? 자는 척하던 류제가 호기심을 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렌이 고개를 돌아볼 것 같자 잽싸게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재경은 저택 내를 헤매다가 가까스로 밖에 나와 어슬렁어슬렁 정원을 산책했다. 언제 치웠는지 그들이 난장을 피웠던 바비큐 파티의 현장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멀리서 그곳을 응시하다 말고 재경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잔디를 걷는 정처 없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지금 이 생활이 행복하기도 하고,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고, 류제가 알아서 해내야만 하는 일에 참견하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재경은 더 중요한 것을 취사선택해야 했다. 왜냐하면 비키의 이벤트를 실패한 원인이 그에게 있다는 설득력 높은 가정이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미래가 걱정되면 친구의 위치를 포기하고 원래 렌 지미처럼 제대로 삼류 악당의 노릇을 해내면 된다. 그럼 내가 좀 불행해질지언정 해피 엔딩이 될지도 모르지.
현재가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지금처럼 애들하고 잘 어울려 다니면 된다. 다만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내버려두려도 류제는 가끔씩 불안한 선택지를 고르는걸. 친구 위치를 포기하면 내가 옆에서 도와줄 수 없잖아.
아냐, 잘 생각해 봐. 류제는 나름대로 잘 해왔어. 그걸 옆에서 간섭해 망치고 있는 건 내 쪽일지도 몰라. 가정이 진짜일 때를 대비해 이제부터라도 삼류 악당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는 편이…….
수많은 선택지가 류제가 아닌 그의 앞에 있는 기분이었다. 나도 누군가 대신 정답을 정해줬으면 좋겠다. 이 어려운 문제를 나 혼자서만 결정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다.
“하아.”
그렇다고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데 아무 생각 안 할 수도 없고 말이지.
참나, 누군지는 몰라도 날 이 세계로 빙의시켰다면 책임을 지고 미션을 달란 말이야. 내가 훌러덩 삼류 악당 렌 지미에게 떨어진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안 그래?
내게 뭘 바란 거야. 사람들의 행복? 아니면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 성취?
나도 진짜. 유네한테 잘난 듯이 말해놓고 이런 것도 제대로 못 선택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누가 나한테 답 좀 줘 봐!”
재경이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외쳤다. 왜 나만 고민하는 건지 억울해 죽겠다.
“예끼 이놈아. 시끄럽다! 오밤중에 기차 화통 삶아 먹었나.”
“아악!”
하늘이 소원을 들어준 듯 돌연 뒤에 나타난 누군가가 지팡이로 재경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른 재경이 납작 만두가 된 머리통을 붙들었다.
과연 유네의 집 정원에서 별안간 자신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것도 홀홀 늙은 할머니의 목소리로 타박하면서. 재경은 머리를 맞는 익숙한 감각과 신경질적인 옛날 방식 호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수상한 할머니!”
“그래. 나다, 이놈아. 하여튼 성가신 놈. 내가 여기 온 걸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일 있어? 조용히 말하지 못해?”
재경을 습격한 사람은 바로 몇 번이고 마주쳤던 수상한 예언가, 사라 하놋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걸까. 재경은 특정한 이벤트가 아니면 절대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등장이 어리둥절하면서도 미래를 알고 있는 동지로서 반가움이 샘솟았다.
“맞다. 할머니! 할머니가 있었지. 웬일이에요? 당분간은 등장 없잖아요.”
“등장이 없다니. 사람을 무슨 병풍 조연처럼 대하누.”
“하지만……! 에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마침 잘됐다. 물어볼 게 있었는데 타이밍 짱이네요.”
재경은 고민의 해답을 내어줄 것 같은 사라 하놋에게 기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일 일어날 예언에 대해서 피차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사라 하놋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더니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수상쩍은 외계 할머니로 보였던 그녀의 자글자글한 얼굴이 밝은 달밤 속에서 은은하게 드러났다.
“당연히 물어볼 게 있었겠지. 나도 해야 할 잔소리가 산더미다. 뭐? 네가 알아서 해? 미래가 안 바뀌어? 있는 힘껏 방해해 놓았으면서 기고만장 코만 높아져 가지고는. 어떻게 책임질 거야?”
“…그건 저도 반성하고 있어요. 오자마자 잔소리하긴.”
죄책감을 가졌던 부분을 사라 하놋이 푹 찌르고 들어오자 재경이 괜히 반발심을 보였다. 그러다 사라 하놋이 화가 나서 그냥 가버리면 어쩌나 힐끗힐끗 눈치를 살폈다.
“실패했던 거 알고 있었어요?”
“알지 그럼. 난 중요한 예언의 순간은 늘 보고 있으니까.”
보고 있었다니. 재경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무가 무성한 산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은 주인공들 말고는 실종되었던 소녀와 화마의 왕밖에 없었다.
샅샅이 기억을 뒤졌지만 역시나 똑같다. 긴가민가해진 재경이 말도 안 되는 추측을 내밀었다.
“혹시 나무 뒤에 숨어있었어요?”
“그랬겠냐?”
“그럼 어떻게 봤어요? 엄청 강한 마족도 눈앞에 있었는데. 설마 할머니는 마족이랑도 짜고 쳐요?”
“흥. 어떤 망측한 입이 허무맹랑한 말을 내뱉느뇨.”
사라 하놋이 감을 못 잡는 재경을 위해 지팡이를 내저어 예시를 보여주었다.
‘순간 이동’ 어빌리터였던 로라 하놋과 더불어 그녀 또한 언니가 죽고 나서 ‘공간’을 다루는 어빌리티를 발현했다. 척도도 대단히 높았지만 예언을 위해 그녀가 어빌리터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겨오고 있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그들 주변에 수많은 공간들이 교차했다.
홀로그램처럼 시선을 조금씩 바꿀 때마다 재경의 친구들인 히로인들과 주인공 류제가 현재 존재하는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그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재경이 저도 모르게 발을 떼려는 찰나 사라 하놋이 어빌리티 발동을 멈추었다. 지친 듯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허리를 두들기며 잘난 척을 했다.
“뭐, 이런 거지.”
“개…개쩐다. 할머니도 어빌리터였어요?”
“그야 당연하지. 넌 내가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거냐. 게다가 저번에도 봤잖아!”
“뭐긴, 그냥 수상한 마녀 같은 할머니라고 생각했죠. 우와, 척도 장난 아니게 높을 거 같은데? 나도 이런 어빌리티 있었으면 좋겠다!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요?”
“안 돼. 용량 초과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재경의 철없는 부탁을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재경은 치사하다며 발을 동동 구르며 끈질기게 졸랐다.
“한 번만요. 네? 아, 할머니 제가 이렇게 부탁하잖아요!”
“중요한 예언을 망쳐버린 네가 뭐 예쁘다고 더 보여줘? 그리고 넌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대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어? 나는 나이가 많으니 함부로 어빌리티를 쓰면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단 말이다.”
“윽…….”
‘대가’라.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목숨이 달렸다는 진지한 이야기에 재경이 시무룩해졌다. 입을 비죽인 그는 그러다 사라가 어빌리티를 썼던 정황을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수학여행 때에도 그렇게 이동한 거예요? 저번 축제 때 갑자기 사라진 것도?”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처에 열린 벼룩시장에서 말이냐? 그때는 공간을 중첩해서 공유하는 중이었지. 이동과는 다른 개념이다. 언니처럼 직접 공간을 뛰어넘는 건 몸에 부담이 커.”
“그럼 저번 달에 류제한테 의미심장한 말 하면서 멋들어지게 사라진 건 뭐예요? 쓸데없는 일에 어빌리티 잘만 썼잖아요. 대가니 뭐니 그럴싸한 말로 거짓말 치다니. 충분히 낭비하고 있구만!”
“예언자로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적당한 신비주의를 가져야 하는 거 몰라? 내가 평범한 할머니면 류제 신리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겠냐 이 말이지.”
그녀가 주제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이레귤러에게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하냐며 투덜거렸다. 로라 하놋처럼 공간을 뛰어넘어 이동하는 건 몸에 부담된다는 말은 사실인지 어빌리티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펼쳐 보인 그녀는 지친 기색이었다.
난 언니처럼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장소로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다. 저 천덕꾸러기 같은 놈. 여기까지 찾아와 준 것도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지.
“어디 쉴 곳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가까이 보이는 정자를 가리켰다. 유네네 저택 정원에는 심심찮게 보였던 시설이었다.
“저기로 좀 가지.”
사라가 뒤뚱뒤뚱 걸어가 나무 의자에 냉큼 앉았다. 어빌리티 사용에 점점 부담이 커지는군. 늙은 몸이 비명을 질렀다.
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대가’를 경계하며 이때까지 어빌리티를 절제하다가 예언에 따라 류제 신리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사용했음에도 나이 때문에 몸이 금방 망가져갔다.
“사족은 빼고 바로 이야기를 해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는 짐작하고 있겠지?”
“제가 망친 비키 이벤… ‘예언’ 때문이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물어볼 게 있는데요. 저기―”
“그것도 있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힘든 걸음을 했겠냐?”
“아, 아니에요! 아야! 내일 있을 유네 이벤트… 예언 때문도 있겠죠. 알고 있으니까… 아, 아파! 때리지 좀 마요!”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반발하는 모습이 괘씸해서 그녀가 기어코 머리통을 한 대 더 때렸다. 재경은 거참 할머니 손 맵다며 맞은 부분을 손바닥으로 삭삭 문질렀다. 사람이 무슨 말을 못 해.
“그럼 진작 좀 찾아와 주지 왜 이렇게 뜸을 들여요? 제가 얼마나 혼자서 마음고생 했는지 알아요?”
“어빌리티 남발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왜?! 그리고 난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냐.”
사라가 마녀처럼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리쳤다.
오지 않는 게 더 매정한 거지. 라고 생각하던 재경은 비키 이벤트를 실패한 날 렌 지미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깨달음의 외침을 옅게 터뜨렸다. 웬일이래. 성격 더러운 깐깐쟁이 할머니일 줄 알았더니. 날 배려해 준 건가?
“내일 유네 나르타의 예언이 나타나는 겸, 비키 셀로니아의 세 번째 예언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찾아왔다. 대출혈 서비스니까 평생 감사하거라.”
“남이 잘난 척하는 거 듣기 싫지만 털어놓을 사람이 없어서 막막했으니까 잘됐네요. 할머니, 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긴 뭘 말이냐. 지금껏 류제 신리의 옆에서 날파리처럼 훼방을 놓고 다닌 주제에 수습이라도 하겠단 말이냐?”
그녀가 퉁명스럽게 빈정거렸다. 예언에 없는 그의 훼방 때문에 류제 신리에 관한 비키 셀로니아의 세 번째 예언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어빌리티를 써서 예언이 실패한 그 장면을 관찰하던 그녀다. 예언이 이루어지는지 항상 하는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그래도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는 있을 거 아녜요. 물론 처음에는 알고 있는 대로만 가니까 재미없어서 멋대로 굴긴 했는데. 아이씨, 후회 중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예언대로라면 애초부터 난 쟤네들하고 친하면 안 되는 사람이고… 그건 또 싫고. 왜 이렇게 된 건지 생각이 복잡해서…….”
그녀가 마땅찮은 눈빛으로 흘기자 재경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갓 태어난 똥꼬발랄 강아지 새끼처럼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닐 때는 언제고 저렇게 풀 죽은 모습을 보이면 쓰나. 그를 나무라려고 했던 사라 하놋은 마음 한편이 짠해졌다.
“…하아, 아이고.”
지금 보니 예언에 대해서 안다는 것만 빼면 그저 흔하디흔한 어린아이가 아닌가. 기고만장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다니다가 일이 틀어질 것 같으니 어찌할 바 모르는.
그래도 자기가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말년에 팔자가 꼬였다며 한숨을 팩 내쉰 그녀는 주머니에서 예언이 적힌 수첩을 꺼냈다.
“나와 함께 예언이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확인해 보자꾸나. 짐작 가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
밑져야 본전으로 슬쩍 떠봤더니 사라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심란했던 재경의 얼굴이 펴졌다. 매번 혼자서 개고생을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조력자다운 조력자가 생긴 기분이었다.
재경이 그녀의 옆자리에 냉큼 주저앉았다. 예언이 적힌 수첩 내용을 살피느라 데 한참 정신이 팔렸던 그녀가 다시 맨 첫 장 첫 번째 예언이 이루어진 날에 있었던 예언을 찾았다.
“3월. 비키 셀로니아의 첫 번째 예언.”
“아, 그거. 비키의 첫 번째 호감… 예언이죠. 펜던트 찾아주는 거.”
“이치에 따르지 않는 비가 내리는 예언의 날, 운명의 아이 중 일족이 멸한 아이가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찾아서 돌려줄지를 선택한다. 그렇게 쓰여있군. 그게 네 말대로 비키 셀로니아의 펜던트였고.”
“윽, 무슨 말을 그렇게 배배 꼬았대. 예언은 그게 다예요? 다른 이야기는 없고?”
“그럼 뭘 더 바라? 백 년 전 사람이 올해 3월 몇 날 몇 시 몇 분에 누가 어떤 것을 어떠한 경유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떠한 연유로 잃어버리게 되니 그걸 찾아 몇 날 몇 시까지 돌려주라. 그렇게 상세하게 예언하겠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라의 예언이 너무 간소했다. 그가 아는 정보와 비교했을 때 양적 차이가 엄청나서 재경은 실망한 기색이었다. 나는 뭘 해도 알고 있는 대로 굴러가는 통에 억울했었는데 예언은 고작 저것뿐이야?
삼류 악역 렌 지미가 비키와 기간트리카 대결을 했다가 지는 거라든가, 삼류 악역 렌 지미가 펜던트를 훔쳐서 나중에 권선징악 당한다든가. 수첩에 그런 말은 없어? 아, 주인공이나 히로인이 아니라 삼류 악역 렌 지미의 일이라서 그런 건가.
“이때는 류제 신리가 잘 돌려주었던 것 같군.”
“고생깨나 했죠. 원래 제가 훔쳐서 숨겼어야 했는데 그러기 싫어서 안 했다가 비키가 멋대로 펜던트를 흘려버렸거든요. 비 엄청 내리는데 오해 사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찾았어요. 그러다 감기나 걸리고, 류제랑은 싸웠지,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나름 뿌듯했죠.”
“네가 훔쳐서 숨겼어야 했다고? 그건 무슨 괴상한 말이냐?”
“대충 제가 그런 역할이에요. 펜던트가 제 발로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녜요.”
사라 하놋은 재경의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정보는 딱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까지였다. 그것이 발생하는 경위는 지식 범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상쩍은 눈빛으로 재경을 흘겼다. 류제 신리의 숨은 조력자인 나처럼 저놈도 맡은 역할이 따로 있었다는 건가.
일단 그렇게 납득한 사라가 다시금 3월의 그날을 떠올렸다.
“이날은 나도 처음 언니의 예언이 실행되는 걸 목격한 날이지. 비키 셀로니아가 잃어버린 펜던트를 영문 모를 꼬맹이가 찾아 몰래 돌려주는 것을 보고 그런가 보다 했더만, 네가 알고 있는 예언에서는 다르다는 말이냐?”
“그렇죠. 원래라면 저는 일단…….”
재경이 입학식 첫날 벌어지는 비키와 자신의 기간트리카 대결과 더불어 비키가 펜던트를 잃어버리게 되는 과정, 류제가 그걸 찾아 돌려주게 되는 원래 경위와 자신이 간섭하는 바람에 바뀌게 된 부분을 설명했다.
비키의 발칙한 태도에 앙심을 품은 렌 지미가 소중한 펜던트를 훔치고, 다음 날 들키는 바람에 주인공에게 혼쭐이 나게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던 재경이 멋대로 스토리를 바꿨다가 개고생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게 본래 네가 알고 있는 세계의 흐름이라는 거냐?”
“그렇죠, 뭐. 저도 그때 할머니처럼 이벤… ‘예언’이 실행되는 걸 처음 봐서 마음껏 날뛰던 때였거든요.”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발 나 자신을 말리고 싶다. 비키와 쓸데없는 일로 싸운 걸 생각하면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손발이 떨리는 창피함에 재경이 허공에 냅다 발길질을 했다. 사라는 저놈이 미쳤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 4월. 일족이 멸한 아이, 자신을 숨기는 아이, 진리를 의심하는 자, 일국의 운명을 짊어진 아이, 그리고 인두겁을 둘러쓴 마족. 이 다섯 사람에 관한 예언이구나.”
“비키, 유네, 세라 쌤, 왕녀님, 그리고 서큐버스 미나네요.”
다음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는 다 함께 수학여행을 갔을 때다. 일뽕 가득한 온천 여관도 가고, 전쟁 관련 떡밥인 포르테 들라크루아도 만나고, 서바이벌도 하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을 뻔한 경험도 하고 그랬지.
“할머니를 처음 만났던 때죠. 아, 그때 이상한 부분이 있었어요.”
“이상한 부분?”
“원래 유네가 잃어버려서 류제가 선물로 줘야 하는 건 꾸물꾸물 베어라고 하는 곰돌이 모양 열쇠고리란 말이에요. 그 전에 제가 여관에서 유네한테 소원 팔찌를 줬는데 유네가 잃어버리는 게 소원 팔찌가 되었더라구요. 그때 물건을 판 게 할머니였잖아요.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예언은 어때요?”
바로 이날 처음으로 멋대로 바뀐 스토리를 발견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이 부분이 저번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실패의 전조 같은 느낌이었다.
사라가 입을 떼자 재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했다.
“어디 보자……. 마왕의 부활체는 운명의 다섯 사람과 나흘간의 여정을 함께한다. 자신을 숨기는 아이. 인간이 마족에게 첫 승리를 거머쥔 펠노아에서 소중한 것이 망가진다. 대신할 것으로 마지막 날 보답할 것.”
“어어, 이것도 물건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어요?”
‘소중한 것’이라는 불확실한 대명사에 재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내 어빌리티로 물건을 확인한 거지. 마침 너희 주변에 벼룩시장도 열렸고.”
“류제가 벼룩시장에 안 들렀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걘 분명 안 들렀을 건데.”
“나는 예언의 순간을 도와주는 거지 너처럼 옆에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선택을 강요하지 않아. 안 들르면 안 들르는 거야!”
“에엑… 그러면 호감… 예언이 안 이루어지잖아요. 할머니는 인류가 멸망해도 상관없는 거예요?”
“예언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류제 신리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하는지다. 그게 언니가 강조한 거였어.”
“맨날 언니, 언니 거리고. 할머니는 할머니 생각도 없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채신머리없이 투덜거리다가 결국 사라 하놋에게 한 대 더 얻어맞은 재경이 도대체 백 년 전 영웅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오리무중이라고 언짢게 불평했다.
인류를 구한 영웅이니 바보인 자신보다 몇 수는 더 내다볼 대단한 사람이겠지만 재경은 그녀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먼 미래를 보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다.
류제의 선택? 그야 중요하긴 한데 해피 엔딩은 정해져 있잖아.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했건 해피 엔딩으로 가는 쪽으로 선택하게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재경의 말을 무시한 사라는 계속해서 수학여행 때 이루어졌던 호감도 이벤트에 관해 말을 늘어놓았다.
“진리를 의심하는 자는 꽃을 보고 싶어 했고, 일국의 운명을 짊어진 아이는 서큐버스 계집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지. 일족이 멸한 아이는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푸딩, 인두겁을 둘러쓴 마족은 너 때문에 아끼던 손수건을 버렸지. 보자 보자 하니 콩알만 한 게 류제 신리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사사건건 끼어들었더구나. 이 이레귤러 놈. 그때부터 네놈이 마음에 안 들었어. 게다가 유네 나르타가 잃어버렸어야 한 게 원래 다른 것이었다니. 나한테 이렇게 뒤통수를 쳤을 줄이야.”
“그죠? 말고도 다른 것도 있어요!”
“자랑하냐?! 칭찬한 거 아니거든?”
예언을 들쑤셔 놓은 주제에 신나서 떠들어 대는 꼴이 괘씸해서 그녀가 지팡이로 재경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재경이 뇌세포 다 죽는다며 엄살을 피우며 버둥거렸다. 이게 몇 대째야. 할머니만 아니면 그냥.
“또 뭐가 있어? 좋은 말로 할 때 바른대로 실토하거라.”
“이미 때렸으면서. 윽. 계…계곡에서 미나 대신 떨어져서 류제의 힘을 대신 각성하게 만든 거랑… 사소한 거지만 이것저것… 아, 5월에는 류제 대신 왕녀님의 비녀를 고쳐주기도 했고… 하지만 류제한테는 자기가 고쳤다고 말하라고 했어요! 마족이 학교에 쳐들어왔을 때 류제가 마족에게 질 가능성을 고려해서 왕녀님 보험을 들기도 했고… 왕녀님한테 의심을 좀 사긴 했지만 어찌어찌 잘 넘어갔어요. 그것 말고도 여러 개…….”
사라 하놋이 수첩에 적어놓은 예언을 보면서 재경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을 전부 지적했다. 아주 종이 한 장 그대로 넘어가는 곳이 없다. 하물며 재경이 이곳에서 그녀와 만나는 것도 원래 예언과 어긋나는 일이라고 한다.
소중한 언니의 예언이 모르는 사이에 엉망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가 타는 속을 꾹 눌렀다.
“그래서? 비키 셀로니아의 세 번째 예언은 왜 실패한 거지? 너도 짐작 가는 게 있는 것 같구만.”
“할머니의 예언에는 어떻게 되어있는데요?”
“6월, 인류가 인류를 축복하는 날. 일족이 멸한 아이가 원수인 화마족의 왕을 보고 분수에 맞지 않는 힘으로 맞서 구축하려 든다. 이에 마족의 부활체는 낙담한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지 선택한다.”
재경은 역시나 그렇다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으로 화마족에 대항하다 실패해서 옷이 탄 비키에게 저지를 벗어주는 등 친절을 베풀지 말지 선택하는 건가.
가설일 뿐이었지만 스토리가 엇나가는 가장 유력한 원인이 재경은 마음에 걸렸다.
목을 막는 가시를 꺼내는 기분으로 재경은 그가 비키의 이벤트를 실패한 이후 걱정하던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전에 병마족이 학교에 쳐들어왔을 때 저도 류제랑 함께 싸웠어요. 원래라면 저도 다른 애들처럼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혹시 몰라 참견했죠. 그러다가 좀 다쳤어요. 하지만 병마족은 무사히 물리쳤고 저도 무사했는데 제가 다친 것 때문에 류제가 화를 내잖아요. 그래서 다퉜죠. 그걸 옆에서 중재해 준 사람이 비키였어요.”
“비키 셀로니아가 너와 류제 신리 사이를 중재했다고? 그래서?”
“비키가 제가 무턱대고 마족한테 덤벼들었다가 다친 걸 보고 깨달은 게 있었나 봐요. 이건 그냥 제 생각일 뿐이지만 비키가 화마족에게 당하고 나서 깨달아야 하는 것을 저 때문에 한 달은 더 일찍 깨달아 버린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비키 셀로니아의 생각이 바뀌게 된 건가. 괘씸한 놈이 선수를 쳤구나.”
재경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생각하면 할수록 이 가정이 가장 들어맞는 것 같았다.
“그게 그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알았더라면 절대 안 하지.”
사라 하놋이 생각에 잠겼다. 소년이 말한 자신의 역할. 렌 지미가 가진 그 역할이란 것이 무엇인지는 로라 하놋의 예언에는 나오지 않아서 모른다.
어찌 되었건 저 소년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그것 때문에 예언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면서 점점 엇나가 결국 비키 셀로니아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그의 의견인 듯하다.
“네 이야기대로라면 결국 다 네 잘못이지 않느냐. 애초부터 역할을 잘 수행했어야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 쟤네들하고 친구가 못 되는걸요. 렌 지미는 이야기를 훼방 놓기만 하는 친구 하나 없는 하찮은 삼류 악당이라고요. 그러기는 싫어.”
“삼류 악당?”
사라 하놋이 별 희한한 역할을 다 보겠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재경은 암만 생각해도 그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친구들인데 그걸 마냥 포기한단 말인가. 눈앞에 캄캄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재경은 다시금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처럼 친구 하나 없는 생활로 돌아가 버티기 싫었다.
“너는 원래 그런 역할인데 저들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서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거냐? 그래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고? 나 참, 무슨 말을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저도 이 세계가 어떻게 돼먹었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 그러고 보니 실패했던 비키 예언처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또 있어요.”
“또 뭔데 그러냐?”
삼류 악당 역할이니 뭐니 들어도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사라가 불길함을 내비쳤다. 재경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의문을 숨김없이 쏟아냈다.
“예언…으로 정해진 이야기가 바뀌는 부분이요. 어떤 부분에서는 강제적으로 예언을 이루려고 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억지로 바꾸는 게 가능하고 이따금 다른 사람들이 멋대로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단 말이죠. 그 기준을 모르겠어요. 이것만 알아도 좋을 텐데”
“기준?”
“네, 예를 들어 제가 맡은 역할대로라면 전 류제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유네를 괴롭혀야 하는데 지금은 유네랑 친구가 되어버려서 원래 제가 당해야 할 것들이 보기 좋게 포장된다든지, 곧 죽어도 스토리… 예언대로 흘러가다가도 히로인이 돌발 행동을 한다든지. 뭘 해도 안 바뀌는 이야기가 있다든지… 전부 뒤죽박죽이에요.”
“흐음, 그러니까 네가 경험해 본 바, 네가 예언을 바꿀 수 있는 경우, 예언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 운명의 아이들이 예언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거냐?”
연륜 많은 사라가 장황한 설명을 듣고도 정확하게 맥을 짚었다. 그녀가 이해한 듯하자 재경은 속에 담아둔 것들을 드디어 전부 털어놓은 기분이었다. 말하기만 했을 뿐인데 짐을 덜어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결국 네가 예언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냐? 네 말만 듣자면 바뀌지 않을 예언을 강제로 바꾸고, 그에 따라 예언의 아이들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재경만 없으면 예언이 제대로 굴러가게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돌려 말해준 사라 하놋의 핀잔에 재경이 꽉 막힌 파열음을 내질렀다.
“윽, 그렇기는 한데.”
속이 후련하다 못해 팩트로 후려 맞는 기분이다. 바퀴가 맞아 잘 돌아가는 세계에 등장한 재경이라는 불규칙 변수가 모든 일을 망치는 원인이 된다는 말을 재경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예언은 예언이고 선택은 선택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어도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간에 중요한 건 류제 신리의 선택이야.”
“하지만 류제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르잖아요. 할머니네 언니가 그런 걸 원하겠어요?”
“나야 모르지. 언니는 늘 속을 모를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언니가 원했던 대로 류제 신리의 선택이 더 중요하다. 예언이 흩트려졌어도 그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그게 맞는 거겠지.”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요, 할머니!”
“너는 그럼 이 사태에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거냐? 소리는 왜 쳐! 귀 안 먹었다!”
사라가 호통 치며 재경의 머리통을 때렸다. 아픈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앞으로도 이야기가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재경은 불안한 눈초리였다. 그녀는 골치 아픈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탄했다.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린 거 아니냐. 예언대로 흘러간다면야 나도 좋겠지만 그렇다고 너를 이 자리에서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너도 네가 맡은 역할이 너무하다 생각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아니겠냐.”
“그게 뭔데요?”
“뭐긴 뭐야. 옆에서 얌전하게 류제 신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거지.”
“그건 싫어요! 뭐야, 그게.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류제가 훌렁훌렁 이상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걸 옆에서 그냥 보고 있으라고요?”
“싫어?”
“당연하죠!”
“그게 싫다면 우리는 너의 역할을 새롭게 재정의할 필요가 있어.”
재정의? 재경이 단어의 의미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멍청이 같은 표정을 보고 화를 참아낸 사라가 방금 떠오른 생각을 차근차근 말했다.
“언니와 너와 내가 알고 있는 미래는 이 세계의 정해진 흐름의 일부분일지도 모르지. 언니는 그걸 읽어냈고 나에게 그걸 알려준 거야. 마왕의 부활체인 류제 신리는 이 세상을 바꿔 쓸 수 있는 가장 척도 높은 자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류제 신리가 어떤 생각을 품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운명이 판가름 나겠지. 그게 류제 신리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언니의 말의 의미일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요?”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하나 더 있다. 류제 신리의 생각 말고도 이 예언의 흐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이나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이 돌아오자 재경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녀 또한 모르는 게 많아 확답할 수 없지만 갈피를 못 잡는 재경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다.
“비키 셀로니아의 예언이 실패한 것, 유네 나르타가 잃어버리는 게 바뀐 것, 흐름이 바뀌게 되는 것. 그건 바로 그들의 생각이 너 때문에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반대로 말하면 운명의 아이들이 정해진 흐름대로 생각할 수 있게끔 한다면 적어도 예언이 실패할 일은 없는 것 아니겠나. 그저 내 생각이다만 그게 지금의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겠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재경이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히로인들의 생각. 나 때문에 생각이 변한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벤트가 이루어지는 그때 주인공들을 게임상에서 했던 생각을 똑같이 하게끔 유도하여 실패 확률을 줄이면 된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 네가 곁에서 중구난방 난리를 쳐댔는데 예언이 여태 멀쩡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만 그게 만약 네 어빌―”
“할머니, 진짜 대박 천재 아니에요?”
감격한 재경이 사라의 손을 맞잡고 외쳤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영 쓴소리를 못 하게 만든다. 말이 끊긴 사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가를 비죽거렸다.
“칭찬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게 만드는 것도 몹쓸 재주구만.”
“난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외관적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잘 컨트롤한다면……!”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것만 유념한다면 네가 지금 그들의 친구 위치를 고수하면서도 예언을 망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새로운 네 역할이다. 잘 할 수 있겠느냐?”
“당근이죠. 고마워요, 할머니!”
재경이 사라를 꽉 껴안았다. 늙고 차가운 살덩이가 열기 품은 온도에 닿아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빌어먹을 꼬마! 이거 놔라. 뼈 부러진다.”
“진짜 땡큐땡큐! 속이 다 시원하다. 할머니가 없었으면 아직도 혼자서 끙끙거리며 갈피를 못 잡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떠받들어 준다고 누가 좋아할 줄 알아?”
사라 하놋이 공연히 투덜거렸다. 괴팍한 할머니로 알려져 늘 홀로 모든 것을 감내했던 그녀는 소년의 온기가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럼 그걸 토대로 이번 유네 나르타의 세 번째 예언도 잘 연구해 봐라. 이번에도 언니의 예언을 엉망으로 만든다면 아주 엉덩짝을 차줄 테니 뒤 조심해라!”
“알았다니까요! 우하하하!”
“렌, 여기서 뭐 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가가대소하고 있는데 풀숲이 술렁거리더니 류제가 돌연 얼굴을 드러냈다.
분명 말소리는 두 사람분이었는데 정자에 앉아있는 건 렌 혼자다. 재경이 웃다가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사라 하놋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아냐!”
전매특허인 구렁이 담 넘어가기 수법으로 재경이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에는 쌓여왔던 근심이 사라져 있었다.
슬그머니 나가는 꼴이 수상쩍게 보였지만 다른 데도 아니고 유네네 집이니 곧 돌아오겠지 싶어서 침대에 누워 기다리던 류제는 렌이 하도 돌아오지 않아 찾으러 나왔던 차였다.
그런데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는 건지. 정자? 용케 이런 데를 발견했네. 근데 분명 어떤 할머니가 렌하고 대화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왜 아무도 없지?
류제가 혹시 도둑이라도 들었나 기웃기웃 정자 안을 살폈지만 밝게 들뜬 얼굴을 한 렌 말고는 맑은 달빛과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밖에 없었다.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것보다 이 시간에 안 자고 왜 나온 거야? 내일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알기나 해?”
류제가 또 말을 돌리는 재경을 째려보았다. 렌은 여전히 시치미를 뗀다. 이런 시간에 굳이 밖에 나와서 꾸물거리는 걸 보니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물어봐도 끝까지 모르쇠 할 거 같다.
반문하는 말부터가 가장 마음에 안 든다. 시간이 늦었으니 지금은 그냥 넘어간다며 류제가 불만스럽게 눈가를 실룩거렸다.
“이 시간에 뭐 하는 거냐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렇게 중요한 날이면 너도 서성거리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잠이나 자.”
“그러려고 했거든? 또 잔소리하긴. 하지만 봐줬다! 난 지금 기분이 좋으니까!”
“누구랑 이야기했기에 그렇게 기분이 좋아?”
“아무도!”
신이 난 재경이 쾌활하게 뜀박질을 했다. 안 낚이는군. 류제가 싱글벙글 웃는 렌을 힐긋거리며 혀를 찼다.
뭔지 몰라도 아까 한숨을 팩 내쉬는 걸 봐서 무슨 일 있었나 걱정했더니……. 기분 안 좋은 것보다는 나은가. 하아, 알 수 없는 애라니까. 류제가 베개에 눌려 덥수룩해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오밤중에 산책을 하러 나간 렌을 찾느라 쥐 잡듯 돌아다닌 통에 잠이 다 깨버린 류제는 그냥 내버려 두고 잘 걸 그랬다고 침대에 누워 후회했다.
사라 하놋 덕분에 내일 있을 일에 대해 한시름 던 재경은 류제 옆에서 태평하게 코를 골았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잠결에 뒤척거리다가 류제의 영역에 무방비하게 침입해서 그렇지.
“하아.”
말은 못 하겠고, 잠은 안 오고, 시간은 가고. 가슴은 두근거리지, 조용하니까 이상한 상상만 하게 되지.
류제는 한 침대를 쓸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견디다 못해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바로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정통으로 내려오는 교가다.
“강건한 산줄기~ 기상을 본받아~ 우리 함께~ 나아가자~”
의례만 아니면 부를 일 없는 교가를 여기에다가 써먹을 줄이야. 류제가 노래를 부르면서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려 애썼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나 혼자 도 닦을 줄 알았다고. 이쪽으로 붙지 마. 제발 네 자리로 돌아가! 아니면 진짜 혼낸다?!
꾸물꾸물 몸을 움직여 최대한 모서리 부분에 붙은 류제가 옆에서 침대의 8할을 혼자서 다 쓴 채 색색 잠든 재경을 원망하며 교가의 2절을 불렀다.
류제는 지금껏 쓸모없다고 치부했던 교가에게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