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5. [7월. 그인 그녀와 그와 나] (2) (17/112)

챕터 5. [7월. 그인 그녀와 그와 나] (2)

2조의 낙승에 8반은 승세를 탔다. 그 기세를 타서 3조가 연이어 이기기는 했으나 4조에서 패배하고, 5조에서 승리한 지금 7반과 8반의 스코어는 2 대 3이다.

8반이 한 번만 더 이기면 승리를 하는 현재, 드디어 다크호스 류제의 차례가 되었다.

“6조 앞으로.”

“류제 신리가 아직 남아있었다니.”

“왕녀님도 벅찼는데, 젠장.”

류제가 몸을 풀며 등장하자 7반 6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류제 신리는 1대 1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그 흔한 어빌리티의 상성이란 게 없었다.

류제의 강함을 설명하기 위해 간략하게 류제의 활약을 서술하자면 승부가 시작되자마자 7반의 조원 하나를 탈락시킨 류제는 연이어 들어오는 공격을 모조리 회피한 후에 여유롭게 둘, 셋, 넷을 손쉽게 탈락시켰다. 일기당천의 류제 덕분에 경기 시작 1분 만에 상황이 종료되었다.

같이 전략을 짰던 류제네 같은 조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럴 줄은 알았는데 진짜 저러니까 얼이 빠졌다.

“야, 류제. 너만 활약하면 우리 점수는 어쩌라는 거야!”

“미안.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병마의 군주와 겨루고 나서 부쩍 승부욕이 강해진 류제가 적당히 하지 못하고 상대 팀이고 자기 팀이고 애들 마음을 뚝뚝 부러뜨려 놓았다.

재경은 아무것도 못 하고 바로 지는 그 무력한 기분을 단골 연습 상대를 통해서 충분히 겪어봤기에 격하게 공감했다.

쯧쯔 혀를 차던 재경은 혼자 있던 유네에게 ‘무게’ 어빌리터가 먼저 다가오자 긴장해서 바싹 털을 세웠다.

그녀가 유네의 안 좋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이번 챕터가 시작된다. 저건 분명 그 신호임이 틀림없었다.

참견할까? 도 싶지만 바로 저번 달에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를 통으로 말아먹은 전적이 있으니 함부로 개입하기 꺼려진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재경이 머뭇거렸다.

“우리 반이 이겼다! 이제 기말고사 끝이다!”

“류제 때문에 실기시험 망쳤어.”

“선생님도 그걸 고려해 주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잖아. 벌로 어서 앞머리를 까도록 해. 상처받은 우리 심신을 위로해야겠어.”

조원들에게 활약할 기회를 주지 않은 류제는 미안해서 반성하다가 앞머리를 넘기라는 말에 싫다며 정색했다. 귀찮다.

그것보다 아까부터 조용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렌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류제가 시끌벅적 떠들어대는 친구들을 무시하고 딴청을 부렸다.

곧 뭔가를 멀리서 누군가를 쳐다보는 렌이 눈에 들어왔다. 뭘 보고 있는 거지? 류제가 그의 시선대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신 똑바로 해.”

시선이 도착한 곳에는 유네와 ‘무게’ 어빌리터가 있었다. 그녀는 유네에게 가지고 있던 여장 사진을 억지로 떠밀었다. 유네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재경의 여장 사진이 온 학교에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남자로 알려진 유네의 여장 사진도 그만큼 많이 퍼져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오히려 극소수의 마니아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재경의 여장 사진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 유네의 여장 사진이었다. 남자면서 여자처럼 귀엽고 깜찍하다는 게 희귀성이 있기 때문일까.

저번에 우연찮게 라우라 축제 여장 콘테스트를 간 ‘무게’ 어빌리터는 장난삼아 유네의 여장 사진을 샀다가 이 사진을 본 지인에게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 애, 유네 나르타 아냐? 여장 콘테스트? 무슨 소리야. 얘 여자야. 나랑 같은 미들스쿨이었어. 집도 부자에 마을 유일한 어빌리터라 꽤 유명했지. 완전 공주님이었다니까.”

아까 공격에서 유네와의 접촉은 그녀가 의도한 것이었다. 의혹을 밝히기 위한 확실한 검사. 그녀는 비밀을 알아냈다고 경고해 주기 위해 유네를 호출한 것이다.

“유네 같은 어빌리터한테 구해지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하하하! 진짜 싫어.”

여자라는 진실이 소문날지도 모른다는 섣부른 걱정에 유네는 행복하지 못했던 미들스쿨 때의 기억에 덮쳐졌다. 깔깔거리는 고음의 비웃는 웃음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유네는 위축되었다.

지금 친구들하고 그런 관계가 되고 싶지 않다. 남장을 하고 있는 지금이 행복해. 하지만 역시 비밀을 간직한 채 정체를 숨기고 친구들과 마주하는 건 항상 죄책감을 동반했다.

‘무게’ 어빌리터를 상대하는 유네의 낯빛이 좋지 않자 웬일로 류제가 직접 나섰다.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기 귀찮아하는 주제에 렌이 나서는 것보다 자기가 나서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스쳐 지나가는 류제와 ‘무게’ 어빌리터의 눈에서 잠시 스파크가 튀었다.

“흥.”

곧 ‘무게’ 어빌리터는 류제를 무시하고 제 친구들이 있는 곳에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류제가 유네에게 걸어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애가 또 시비 건 거야?”

“아… 류제 군.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아까… 기간트리카 대결 때문에 그래.”

“그래? 오늘 비키랑 같이 꽤 좋은 장면 보여줬잖아. 너도 괜히 풀 죽지 마.”

“으응. 고마워”

유네에게 친근하게 어깨동무를 한 류제가 걱정 말라며 살갑게 격려해 주었다.

오늘따라 류제의 온기가 불편하다. 유네는 걱정이 들었다. 만약 내가 여자란 걸 알아도 류제 군은 지금처럼 날 편하게 대해줄까. 렌 군은? 다른 친구들은? 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그…그 애가 그랬지. 나한테 처신 똑바로 하라고 한 의미는…….

서…설마 거짓말한 걸 들키기 싫다면 시…시키는 대로 하라는 건가? 하지만 곧 여름방학인데?

유네가 설마 그때처럼 되는 건가, 하고 겁에 질려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류제는 다른 친구들이 유네를 괴롭힐 때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면서 오늘따라 간섭하지 않는 렌이 수상했다.

렌은 어느새 다른 친구들하고 오늘 있었던 승부에 대해 낄낄거리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에게 말을 걸려는데 채점을 마친 세라가 학생들을 집합시켰다.

“류제 군, 우리도 가자.”

“아, 응.”

어깨동무를 푼 류제가 유네의 뒤를 따랐다.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유네를 신경 썼던 주제에 왜? 안 좋은 이유라도 있나? 다른 것들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렌 한정으로는 걱정도 팔자인 류제다.

재경은 자신이 참견할 것도 없이 류제가 알아서 유네에게 다가가자 스토리가 평범하게 진행되어서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쟁 패배 이벤트니 인류의 멸망이니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미래니까 끙끙 앓는 것도 혼자서만 해야 할 일이다.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실패를 겪은 후 원인이 밝혀지기 전까지 이벤트에 괜히 간섭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재경은 먹지도 못할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이유라도 알면 더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 * *

재경이 이번 챕터를 위해 뭘 준비하건 하지 않건 시간은 흘러간다. 다가오는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일주일이 흘렀다.

재경이 고대하던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류제가 어떤 잔소리를 늘어놓을까가 두렵던 재경의 종합 성적도 나왔다.

재경의 성적은 망했다고 생각했던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 점수가 반에서 중상위 정도로 제일 괜찮았고 필기는 대부분 50점대로 고만고만한 성적이지만 역시나 가장 못 본 과목은 21점인 수학이었다.

다음으로 못 본 건 25점인 제2외국어. 그다음은 역대급 쉬운 난이도를 보여주었던 29점 세계사다.

다른 건 몰라도 세계사만큼은 친구들하고 비교해 봤을 때 맞은 것도 많았고 괜찮겠지 했는데 이 모양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재경은 자신의 석차가 적힌 성적표를 떠올리며 눈가를 실룩거렸다.

수학 : 182/182

제2외국어(텐마이어어(語)) : 50/57

세계사 : 180/182

“우려하던 사태다…….”

“그러게 공부 좀 하라고 할 때 하지.”

공을 차던 류제가 재경의 중얼거림을 듣고 차갑게 핀잔했다. 방학을 한 기념으로 류제와 재경은 체육대회 때 친해졌던 청팀 남학생들과 간단하게 족구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재경은 드디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옆에서 재경의 대단한 성적을 전해 들은 다른 남학생이 피식 웃으며 날아오는 공을 받았다.

“보충수업을 3개나 받아야 하는 건 우리 학교에서 렌 지미 네가 유일할 거다. 어떻게 중간 기말 평균 30점 아래가 3개나 나올 수 있지?”

“하하하. 유례없는 제립학교 레전드 바보의 탄생 아냐?”

“진짜? 그 정도야? 나만 받는 거야? 정말?”

“30점 밑으로는 모두 보충수업 받는댔으니 혹시 모르지, 으하하. 여기서 한 과목이라도 30점 밑인 사람?”

“난 중간고사 때 잘 봐서 무사히 통과지롱.”

“야, 너무 놀리지 마. 나도 한 과목 들어야 한단 말야. 괜히 찔리네.”

상대 팀 누군가가 공을 차며 투덜거렸다. 그래 봤자 그는 망친 한 개의 과목만 보충수업을 듣는다. 재경은 8월부터 월화수목 3과목씩 보충수업을 들어야 할 판이었다.

“짜증 나!”

재경이 신경질적으로 공을 뻥 찼다. 시원하게 날아간 공은 보기 좋게 파울이 되었다.

이놈의 학교는 왜들 엘리트밖에 없는지. 안 그래도 혼자만 못생긴 것 같아 배알이 꼴리는데 공부도 제일 못하니까 열등감이 절로 생겨났다.

“여기까지 할까?”

“정리하고 들어가자.”

어느덧 어둑어둑 해가 졌다. 내일 당장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고 하니 이제 기숙사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으… 더워. 찝찝해 죽겠네. 여름이긴 여름이야.”

“…그럼 방에 돌아가기 전에 목욕이나 할까?”

“오, 좋아. 찬성.”

“이번 달부터 목욕탕 이용 시간 바뀌었지 않나?”

“어. 지금쯤이면 들어가도 될걸.”

류제가 슬렉터로 현재 시간을 살폈다.

같이 족구를 한 다른 반 친구들은 저들끼리 잠시 담임 선생님께 볼일이 있다고 해서 잠깐 헤어졌다. 여름에 족구를 했더니 땀범벅이 된 류제와 재경은 A동 기숙사 공동 목욕탕으로 향했다.

“…크흠.”

류제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학교에 얼마 없는 남자끼리고 친한 친구인데 목욕을 같이 가는 게 뭐 대수라고.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은 류제가 부끄러운 마음을 숨겼다.

힐끗 보자니 렌은 같이 목욕을 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나만 흑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

그야 그렇겠지. 류제는 죄책감이 들었다. 아니, 흑심이 아니다. 이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야. 아무렇지 않은 일! 목욕은 자주 같이 했잖아. 매번 이러면 어떻게 해?

“보충 어떻게 하지. 진짜 나만 듣는 거 아니겠지?”

“글쎄. 과목 평균 30점 이하인 애들이 있나 반마다 물어보지 그래? 제2외국어랑 세계사는 전교 꼴등 아니잖아? 그럼 같이 들을 사람은 존재하는 거겠지. 힘내.”

“그래도 나처럼 3과목이나 듣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모르는 애들은 안 친해서 싫은데.”

“네가 하라는 필기시험 공부는 안 하고 기간트리카만 붙잡고 있으니까 그런 거잖아. 반성해.”

“그래도 그 점수가 제일 좋았잖아.”

“그거야……. 크흠.”

재경이 바지를 벗자 류제가 허둥지둥 고개를 돌려 목욕탕 문을 열었다. 어떻게든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힘들어 보였다.

보충 듣기 싫었으면 공부하라고 말했을 때 들었어야지.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류제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안 되겠다. 2학기부터는 좀 더 빡빡하게 굴려야겠어. 게다가 2학기 때부터는 S_script 언어 코딩을 배우잖아. 렌은 기간트리카 컨트롤을 제외한 기계 다루는 것에 완전 쥐약일걸? 선배들도 생소한 개념이라고 엄청 어렵다고 하던데. 큰일이다, 정말.

“어쨌든 난 방학 때 계속 학교에 있을 거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내 방에 와서 물어봐. 보충 끝나고 보는 추가시험은 농담 아니고 진짜 잘 봐야 하는 거 알지? 그거 못 보면 2학기 못 올라갈 수도 있댔어.”

“시끄러. 아…알아서 잘할 거야……. 어?”

재경이 갑자기 서두르는 류제를 뒤따라서 축축한 타일 바닥을 걸어가는데 먼저 탕에 들어가 있는 사람을 얼핏 보고 몸이 굳었다.

수증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보기 드문 파란색 머리. 망친 성적과 보충수업을 듣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두둥 북소리와 함께 보이는 유네의 창백한 얼굴에 재경도 똑같이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여기는 목욕탕. 나도 알몸. 류제도 알몸. 유네도 알몸.

아차.

아차차.

아차차차!

오늘이 그 이벤트가 뜨는 날이었구나!

이 사건의 중대사를 모르는 류제는 웬일로 목욕탕에서 유네와 마주쳤다며 반갑게 인사나 해댔다.

“유네. 안 보이나 했더니 와서 목욕하고 있었구나. 언제 왔어?”

“아…아…안…안…안녕…….”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네. 이젠 족구도 못 하겠어.”

류제가 아무 자리에 앉아 샤워기로 땀을 씻어냈다. 검은 머리칼이 미역처럼 부드럽게 녹아 그의 얼굴에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물먹은 머리카락이 귀찮아서 류제가 앞머리를 넘겼다. 왜 같은 반 여자애들이 틈만 나면 앞머리를 까라고 하는지 공감할 정도로 감탄이 나오는 얼굴에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혔다.

그런 잘생긴 얼굴이 쁩,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 옆에 알몸인 렌이 스산하게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레…레…렌? 거기서 뭐 해?”

“어… 그… 저…저… 류제, 나…나…나는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좀 이따가 목욕할래. 머…먼저 나간다.”

“뭐? 옷 다 벗어놓고 갑자기…….”

‘옷 다 벗어놓고’라는 대목에서 슬그머니 렌의 알몸을 살피던 류제가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폭포수처럼 찬물을 틀었다.

“우앗, 차거! 뭐 하는 거야?”

류제가 미친 짓을 하자 재경이 몸을 소스라치게 움츠렸다. 살갗에 닿는 물방울이 너무 차가워서 소름이 절로 돋았다. 안 그래도 유네가 목욕하고 있을 거라는 걸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도 소름이 돋는데 얘까지 왜 이래.

“…여…여튼 난 간다.”

“그래. 이따 방에서 봐.”

찬물을 맞으며 류제가 답했다. 재경은 슬금슬금 앞을 가리며 탈의실 문으로 향했다. 재경은 여자인 유네와 목욕탕에서 알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었다.

이 이벤트는 그거다. 남장여자가 있는 남성향 하렘 미연시에서 흔히들 발생하는 그런 무지를 빙자한 변태 이벤트란 말이다.

난 못 해. 유네가 여자란 걸 모르면 몰라도 나는 알고 있잖아. 이건 하라고 떠밀어도 죽어도 간섭 못 해. 부끄러워서 뭔가가 폭발할 거야!

“덥다. 어우, 숨 막혀.”

“선생님 어디로 가셨담. 선물은 나중에 드려야겠지?”

“으엇……?!”

“뭐야, 벌써 나가는 거냐?”

재경이 폭주하는 심장을 붙들고 후퇴하려고 했더니 이번엔 같이 족구를 했던 다른 반 남학생들이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왔다.

류제나 렌이라면 몰라도 잘 모르는 다른 반 학생들까지 들어오자 유네와 재경의 안색이 시체처럼 차가워졌다.

‘유네, 이 바보! 왜 이런 시간에 온 거야!’

‘조…족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단 말이야……!’

극적으로 마음속 대화를 나눈 둘은 서로 뭔가 통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현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훑었다.

“렌, 너 거기서 뭐 하냐? 벌써 다 씻었어?”

아…아무리 이것도 이벤트 중 하나라지만 내가 저대로 유네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유네가 여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젠자앙, 나도 이런 꼴로 부끄러운데. 어쩌지. 어쩌지?! 류제는 몰라도 다른 애들은……!

“렌, 너 거기서 서서 뭐 해? 나중에 씻는다며? 난 탕에 먼저 들어간다?”

“아… 뭐?! 벌써? 잠깐만!”

찬물로 땀을 씻은 류제가 알몸인 렌을 피해 유네가 들어가 있는 짙은 갈색의 약초탕으로 향했다.

수학여행 첫날 즐겼던 펠노아의 온천에서는 렌이 비누를 밟아 넘어지는 바람에 서로의 완전한 알몸을 보지는 않았는데 눈앞에서 대놓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매력적인 신체는 안 보려고 해도 슬그머니 눈길이 갔다.

유네는 생생한 그것에 질색해서 눈을 감았다.

“히이이익……!”

“탕 온도는 어때?”

“그…그…그…럭저럭…….”

자신에게는 없는 ‘그것’이 위용을 과시하며 다가왔다.

남장을 하면서 남자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연구했던 유네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 지식이지만 그걸 직접 보니 류제에게 절로 미안해졌다.

유네는 최대한 욕탕 구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미안해. 미안해, 류제 군! 봐버려서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냐……!

“으아… 좋다. 이열치열이라고 역시 더운 날엔 찬물보다는 뜨거운 탕이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재경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류제를 따라 욕탕으로 뛰어가 다이빙을 했다.

“우앗!”

“아뜨… 뜨거!”

적어도 다른 반 남학생들한테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물론 쟤네들도 유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유네의 알몸을 보는 것이 고의는 아니겠지만 재경은 싫었다. 나중에 말이 나돌 거 생각하면 내가 부끄러운 것보다 그게 더 싫었다.

“제대로 씻고 들어오는 거 맞아?”

뜨거운 탕 속에 담가둔 손을 꺼낸 류제가 거치적거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재경이 슬슬 눈치를 보며 류제의 맞은편 다른 쪽 모서리로 향하며 말했다.

“제…제대로 씻었어.”

라고 답하며 유네처럼 쭈그려 앉아 다리를 끌어안는 재경의 몸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어쩌지.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유네의 나체는 둘째 치고 또 개입해 버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해진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가 더 큰 문제였다.

“…….”

“…….”

“…….”

덕분에 원작에 없는 욕탕 속 기묘한 알몸 트라이앵글이 극적으로 생성되었다. 재경의 눈치를 보는 류제, 유네의 눈치를 보는 재경, 둘의 눈치를 보는 유네.

탕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이상스러운 침묵을 유지하지만 세 사람 다 머릿속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침묵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 상황의 웃음 포인트다.

‘누가 무슨 말이라도 해봐! 류제, 이 눈치 없는 자식. 잘만 떠들다가 왜 입을 다물어?’

‘렌 군하고 류제 군 언제 나가려나……. 나 어떻게 하지. 큰일 났다… 진짜로 큰일 났어!’

‘뭐야 렌. 아까 나한텐 목욕 나중에 한다고 했는데.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근데 왜 저렇게 수줍게 앉아있는 거야?’

세 사람은 신경 쓰이는 상대방의 가려진 은밀한 곳을 슬쩍 보려다 고개를 획 돌렸다. 탕의 온도 때문인지 열이 올라서인지 모두 얼굴이 새빨갛다.

흠흠, 류제가 헛기침을 몇 번 하다가 등을 돌려 가장자리에 팔을 기댔다.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유네에게 있어서는 다행하게도 뒤늦게 들어온 다른 남학생들은 이 더운 날 뜨거운 목욕탕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샤워를 마치고 냉탕에서 수영을 하거나 다른 미지근한 탕에 들어가서 잠시 몸만 덥히다가 몸을 닦았다. 그들이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먼저 목욕탕을 나서며 말했다.

“이런 더운 날에 잘도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 있네.”

“우린 먼저 간다~”

“너희는 좀 더 있다 갈 거냐? 방학 잘 보내라! 보충 잘 듣고. 다음 학기에 보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목욕탕 안에서 공명했다. 이제 욕탕에 남은 사람은 류제와 유네와 재경, 세 사람밖에 없다.

구석에 짜져있던 재경은 혹시 또 쓸데없는 짓을 안 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재경이 말하지 않자 침묵이 이어졌다. 이상하다. 왜 류제가 아직까지 아무런 말도 없지? 슬슬 유네의 이벤트에 관련된 대화가 이루어지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설마 또 나 때문에 진행이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으아, 조금만 기다리면 어련히 알아서 될 걸 가지고 내가 어쩌자고 여기에 끼어들어서는. 유네 때문에 부끄러워서 꼼짝도 못 하겠고.

류제는 무슨 생각인 거야? 재경이 마주 보고 앉은 류제를 흘겼다.

류제도 류제 나름대로 고역이었다. 렌 때문에 일어날 수 없잖아. 젠장, 이 꼴로 일어섰다간 변태라고 생각할 거야. 으으, 얼굴에 쏠리는 피가 전부 하반신으로 가는 것 같아. 냉탕에서 몸을 식히고 싶어.

렌은 언제까지 있을 셈이지? 유네는 덥지도 않나, 아까부터 계속 욕탕에 있었으면서. 둘 다 좀 제발 나가라.

렌 군하고 류제 군 언제쯤에 나가려나. 나 이 상황에서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류제 군이라면 몰라도 렌 군은 의외로 날카로우니까 앞을 가린대도 눈치챌지도 몰라. 그리고 둘 앞에서 맨몸으로 일어날 용기도 없고.

이 생각들 때문에 한여름에 더워 죽겠는데 욕탕에서 몸을 강제적으로 불리고 있는 세 사람은 어서 상대방이 뭐라도 하기만을 빌었다.

언제쯤 류제가 입을 여나 재경은 그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발, 나 또 틀어질까 불안하단 말야. 무슨 말이라도 해줘.

그 시선이 부끄러웠던 류제가 어떻게든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고 싶어 재경이 그렇게 기다려 마지않던 말을 꺼내 들었다.

“그…그러고 보니 유네, 넌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었나?”

“아… 으…응! 이제 짐 정리 하려고. 류제 군은?”

“나는 고아원이 멀어서 안 가려고. 가는 데도 일이고 괜히 가서 바쁘신데 폐 끼치고 싶지 않아.”

“렌 군은?”

“나도 뭐… 에이 류제. 그래도 오랜만에 볼 텐데 당일치기로 얼굴 비쳐 드려라.”

가만히 듣고 있던 재경이 작게 핀잔했다.

가는 데 지하철 타고 기차 타고 마차 타고 1박 2일인데 당일치기로 가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네. 류제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젓다가 아차, 숨을 들이켰다.

맞다, 렌은 방학 때 갈 곳이 없구나.

한 달 전 다녀왔던 렌의 생가가 류제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날카롭게 찌르는 햇빛이 눈부시고 잡초가 무성한 빈 2층집. 그곳에 홀로 서있던 렌.

실수한 류제가 난감해했다. 그 표정을 읽은 재경이 옅게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인지 뻔히 보였지만 동정은 죽어도 싫었다.

렌 지미의 가정사에 대해서 모르는 유네가 재경에게도 물었다.

“렌 군도 집에 안 돌아갈 거야?”

“켁. 유네, 너 내 보충수업 스케줄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냐?”

“아… 그렇구나. 미안해.”

재경이 8월 달부터 빡빡해지는 일정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세상에, 학기보다 더 빡빡한 방학이라니 이게 말이냐 방구냐.

보충수업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깜박했던 유네가 미안해져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 정도로 빠듯해?”

류제는 괜히 알은척하지 않으려고 딴 곳을 쳐다보았다. 렌은 항상 저런 식으로 자기 이야기를 빠져나가곤 했다.

“내 여름방학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너무해. 참나. 나는 방학도 즐기지도 말라는 거냐고! 나도 다른 애들처럼 바다에 놀러 가거나 친구 집 놀러 가거나 하고 싶은데!”

보충 생각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재경이 뿔이 나서 툴툴거리다가 제 무덤을 팠다는 생각에 주륵 미끄러졌다. 그가 물속에서 부글부글 거품을 냈다.

젠장. 제발 나야,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좀 있자. 설마 한 번도 방학 때 친구들하고 놀러 가본 적 없다는 티 낸 거 아니겠지? 으으, 부끄러워.

“친구 집을 놀러 가? 하기야 그런 기회는 이때밖에 없겠네. 나도 친구 집에 놀러 가본 적 없어서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긴 하다.”

재경이 부끄러워하자 류제가 자기도 그런다며 편을 들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재경이 내심 안도했다.

그렇지? 나만 그런 거 아니지? 잠깐, 근데 이거 너무 자연스럽게 이벤트 대화로 연결되는데? 이건 역시 내가 뭘 해도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부류인가?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난 학교 입학할 때까지 내 또래 애들하고 친해지지 못했거든.”

“에에, 진짜? 류제 군은 잘생겼으니 인기 많을 거 같은데.”

“그렇지도 않아. 평범했어. 그래서 렌이랑 처음 만났을 때 반가워서 대뜸 친구하자고 말했지. 그렇지?”

“아아, 어쩐지 적극적이더라.”

“그렇지 뭐. 같은 반이 될 줄은 몰랐지만. 타지에 혼자 있으려니 무서웠거든.”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던 류제가 흘러내린 앞머리를 다시 올렸다. 나중에 사회인이 되어서 무스로 올백을 한다면 저런 느낌이 날 것 같았다.

“그럼… 둘 다 이번 여름방학 때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응? 정말?”

유네가 배시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 모두 친구 집에 놀러 가본 적 없다니. 유네는 퍼블릭 프라이머리 스쿨 학생 땐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던 기억이 있었다.

친구 부모님들도 친절했고 좋은 경험이었어. 우리 가족 말고 다른 가족을 보는 것도 신기했고. 분명 우리 집에 오면 둘 다 나처럼 즐거운 경험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 거야.

“윽… 난 됐어. 보충도 있고. 피곤해.”

재경은 응이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획 고개를 돌렸다. 유네가 나까지 집에 초대하다니. 원래 유네네 집은 주인공인 류제만 가야 하는 거라고. 뭐, 내가 이 자리에 있으니까 나까지 초대된 게 당연한 거겠지만 호감도 이벤트에 개입했다가 망치는 건 비키 걸로 충분하다.

재경이 거부하자 류제와 유네는 서로 잘못 들었나 싶었다. 노는 건 곧 죽어도 하려고 하면서 웬일이래. 게다가 무조건 3명이서 같이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렌이 빠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같은 마음으로 재경을 설득했다.

“보충은 8월부터 시작 아냐? 그 전에 갔다 오지 않으면 정말 여름휴가는 없을지도 몰라.”

“맞아 맞아. 여름방학에 놀러 가고 싶다고 말한 건 렌 군이었잖아. 같이 가자! 응?”

유네가 열 때문에 빨개진 얼굴로 제발 그래달라며 재경의 어깨를 붙들고 몸을 들이밀었다. 유네의 적극적인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재경이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아…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좀 떨어져!”

재경이 얼결에 손으로 유네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렸다. 아파서 턱을 붙잡고 있는 유네에게 재경이 뒤늦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아냐, 괜찮아. 그… 들이대서 미안.”

흥분해서 잠시 알몸인 걸 잊어버렸다고 유네가 반성했다. 평소처럼 하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다. 하…하지만 렌 군이 안 온다고 하니까 섭섭했는걸.

유네가 입을 병아리처럼 삐죽삐죽거리다가 슬쩍 눈치를 살폈다.

“그럼 렌 군도 허락한 거지? 같이 가는 거다?”

“으으…….”

“며칠 정도 묵을 수 있어? 당일치기면 힘들 텐데.”

“부탁하면 2박 3일은 있을 수 있을 거야. 기껏 놀러 왔는데 하룻밤 만에 가버리면 아쉽고. 게다가 여름방학 내내 얼굴도 못 보잖아.”

“그렇긴 하네. 부모님께 실례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

“그…그렇지는 않아.”

오히려 좋아하실걸, 친구 생겼다고. 아빠는 좀 싫어하려나. 유네가 극성인 아빠를 떠올리며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가 적당히 말려주시니까 괜찮겠지 뭐.

“…….”

“…….”

“…….”

그렇게 목욕탕 알몸 회의를 통해 세 사람 모두 방학 때 유네네 집에 놀러 가는 의안이 가결되었다. 이제 이런 화목한 분위기를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다시금 찾아온 침묵의 눈치 게임 시간에 셋 다 말을 잃었다.

류제는 이제 좀 진정되나 싶었더니 갑자기 다가온 유네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렌을 의식하고 다시 하반신에 반응이 왔다.

재경은 이렇게 된 이상 유네의 세 번째 호감도 이벤트에 끼어들 수밖에 없게 되어 난감했지만 역시 유네네 집에 놀러 가는 것은 좋아서 그 모순을 견디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집에 놀러 오기로 약조도 했겠다, 이제 파할 타이밍인데 유네는 이 둘을 뚫고 어떻게 들키지 않고 밖으로 나갈까 걱정이었다.

“류제, 슬슬… 나가지 않을래?”

먼저 항복한 건 재경이었다. 재경은 너무 더워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 한계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현기증까지 난다.

류제는 뻘게진 재경의 얼굴을 외면하며 턱을 물 아래로 푹 눌렀다.

“아… 나…나는 조금만 더 있다가 갈래. 렌, 네가 가고 싶으면 먼저 가지 그래?”

“그럼 나도 조금만 더 있다가 갈래. 유…유네 너 안 어지러워?”

“으응. 나…나도 조금만 더 있다가…….”

제발 누가 한 명만 먼저 나가줘! 셋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무는 트라이앵글을 깨뜨리지 못하며 뜨거운 욕조 속에서 벌칙 게임 중이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뜨거워서 시야가 한들거렸던 재경이 비틀비틀 물속을 걸어 만만한 류제에게로 다가왔다.

“렌? 갑자기 왜?”

“이게 다 네가 눈치가 없어서 그래!”

“뭐? 무스… 으악!”

재경이 류제의 머리를 붙잡고 뜨거운 물 속에다가 처넣었다. 네가 먼저 안 나가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더워! 현기증 나! 또 이벤트에 간섭하게 생겼고! 다 류제 네 탓이야! 네가 제대로만 했으면 내가 이런 고생 안 하지.

류제는 뜨겁고 숨 막혀 죽겠다고 손을 버둥거려 재경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둘 다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그 틈을 타 유네가 머리에 쓰고 있던 수건을 들고 욕탕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난 이제 나갈게!”

혹시 몰라 수건으로 몸 앞부분을 전부 가리고 헐레벌떡 뛰어가던 유네가 우당탕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졌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시간이 부족하다. 그녀가 다시 일어나 머쓱하게 에헤헤 웃고 다시 후다닥 뛰쳐나갔다.

유네가 나가자 안도하는 바람에 재경은 잠시 방심했다. 때를 놓치지 않은 류제가 복수한답시고 재경의 어깨를 붙잡고 넘어뜨렸다. 사람이 기껏 참고 있는데 왜 내가 물속에 처박혀서 렌의 사타구니를 봐야 하는데?

“끄악! 어푸! 뜨거! 류제! 뜨겁다고!”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항복, 항복! 그만해!”

재경이 졌다며 두 손 두 발 들었다. 류제가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장난을 치느라 몰랐는데 아까까지 분명 있었던 유네가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라, 유네는?”

“몰라. 아까 나가던데.”

재경이 혀를 내밀며 답했다. 그래? 하고 답하며 류제가 다시 몸을 욕탕에 푹 담갔다. 이래가지고는 렌이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밖에 못 나간다.

더워서 머리끝까지 피가 몰린 재경은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서 토할 것 같았다.

온몸이 새빨개진 재경은 유네도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야겠다며 첨벙첨벙 물속을 걸었다. 그러다 기립성 빈혈로 인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뻔했다.

“하아, 조심하라니까.”

언제나 렌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류제가 곁에 있었기에 그런 볼썽사나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유롭게 렌을 받쳐 든 류제가 그를 허리에 둘러매고 목욕탕을 빠져나왔다. 렌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시원한 물로 몸을 좀 식히려고 했는데 렌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뭐… 기절해서 다행이지.”

류제는 주체를 못 하는 제 아랫도리를 보고 한숨을 팩 내쉬었다.

게다가 맨몸으로 밀착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류제는 이게 진짜 벌칙 게임이라며 착잡해했다. 눕혀놓고 얼음찜질에 부채질이나 해줘야겠다.

* * *

키아나트리체가 위치한 북반구의 7월은 누가 뭐래도 여름이었다. 정오도 아닌데 쨍쨍한 햇빛이 벌겋게 타오른 피부를 콕콕 찔렀다.

반팔을 입어도 땀이 지도를 그릴 정도로 높은 기온이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지만 오늘따라 제립학교 기숙사 앞은 마차 수십 대로 문전성시였다. 방학을 맞이해서 학교에서 불러준 마차나 본가 소유의 마차에 학생들이 짐을 실어 학교를 빠져나가느라 기숙사가 시장통에라도 온 듯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다들 더위 때문에 힘들어서 언성이 높아졌지만 개중에서 가장 큰 소리는 마주치기만 하면 시작되는 렌과 비키의 익숙한 말다툼이었다.

“이 비키 셀로니아 님께서 작별 인사 기념으로 여름방학 동안 네 바보 같은 머리에 한 톨의 지식이 더 쌓이길 빌어줄게. 제발 2학기 때는 새로 태어나길 바란다, 이 바보야.”

“너어는 꼭 사람 부아 치밀게 말하더라. 굳이 빌어준다면 기적적으로 보충을 안 들어도 되게 빌어달란 말이야. 센스도 없어.”

“부아? 흥,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그럼 잘 있어. 네 얼굴은 지긋지긋하니까 가능한 한 여름방학 끝나고나 보자고, 레… 약으로도 못 고치는 바보 렌.”

“뭐라고? 내 이름 앞에 이상한 수식어 붙이지 마, 이 악담가!”

“내가 왜 악담가야! 걱정해 줬더니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악담을 듣는 게 소원이라면 더 악담을 퍼부어 주지. 바보! 멍청이! 문명인이 되다 만 야만인! 평생소원이 누룽지인 렌 지미!”

“뭐? 그게 무슨 뜻인데?”

비키가 마지막에 말한 속담의 뜻을 말해 주지 않고 메롱, 혀를 내밀었다.

젠체하는 그녀는 약 올라서 얼굴에 핏줄이 올라온 렌이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비키는 유모가 열어주는 마차에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재경이 거기 서라며 마차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마부가 채찍질을 하자 마차는 출발하고 재경이 뒤집어쓴 건 모래 먼지밖에 없었다.

멀어져 가는 렌을 상상하며 비키가 흥, 고개를 치켜들었다.

“…푸흐흐, 바보.”

놀리는 보람이 있기는. 끝까지 도도한 표정이었던 비키가 억울해하던 렌의 얼굴을 떠올리고 흩트려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기에 누가 공부를 안 하래. 방학 내내 학교에 짱박혀 보충이나 들으라지. 꼴좋다.

“어머나, 아가씨께서 그렇게 웃으시는 모습 참으로 오랜만에 봅니다. 학교생활이 즐거우신가요?”

“무…뭐? 벼…별로 그런 거 아냐. 그냥 아까 걔가 너무 바보 같아서…….”

유모 앞에서 어린애처럼 철없이 웃어버렸다는 생각에 비키가 곧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쀼루퉁한 얼굴에 쑥스러움이 번졌다.

유모는 저택에서 외롭게 생활했던 비키가 드디어 친구들과 제대로 사귀고 다니는 것 같아 뿌듯했다. 특히나 면학에 방해된다고 이성에 대해서는 안중에 두지 않는 그녀였는데 아까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은 암만 보아도 또래 남자애가 아니었는가.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유…유모, 갑자기 왜 울어?”

“돌아가선 마님이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것 같아서……. 흑흑.”

감동한 유모가 청승맞게 줄줄 눈물을 흘렸다. 비키가 어쩔 줄 몰라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유모가 보았을 때 더 이상 철이 들 것도 없어 보이던 비키도 1학기가 끝나고 보니 전보다 더 성장했던 것이다.

비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며 다정하게 유모를 달래주었다.

“비키 짜식~ 끝까지 그렇게 나오다니 두고 보자!”

“아하하, 비키 양은 렌 군을 정말 좋아하는 거 같아.”

“뭐어?! 그럴 리가 없잖아!”

재경이 저 짜증 나는 태도를 보라며 멀어져 가는 셀로니아가의 마차를 손가락질했다.

유네의 짐을 싣는 것을 도와주던 류제가 움찔 놀라 상자를 떨어뜨렸다. 유네의 짐들이 거꾸로 뒤집혀 쏟아져 나왔다.

류제가 서슬 퍼런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돌린 것도 모르고 유네가 손가락을 짚으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조목조목 댔다.

“하지만 렌 군한테는 기간트리카도 종종 알려주고 자주 말 걸러 오잖아. 기말고사 때에는 류제 군하고 같이 렌 군 단독 과외도 해줬고. 아직 비키 양 어려워하는 친구들도 많은데 렌 군은 특별한 거라고. 학기 초에 사이 안 좋았던 게 거짓말 같네.”

“그야 이 녀석이 바보니까 그렇지. 3과목이나 낙제점이잖아. 반장인 비키가 다른 반 애들 보기 얼마나 민망하겠어?”

류제가 짐을 나르다 말고 렌에게 어깨동무로 밀착하며 직접 반박하고 나섰다. 절대 그럴 일 없다. 그럴 일 없게 만들 거다. 화창하게 웃고 있는 류제의 얼굴에서 검은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지금 비키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리도 출발하려면 짐 실어야지. 수다 떨 시간 없어.”

말을 돌리려고 오기를 부리니 유네가 어떤 착각을 했는지 미안한 눈초리로 살피다 결국 사과했다.

“류제 군, 괜히 바쁘게 해서 미안해. 힘들지?”

“…아냐. 어차피 돌아가는 김이잖아. 렌! 너도 이제 수다 그만 떨고 어서 짐이나 옮겨!”

“더운데 좀 쉬면 안 되냐. 하여튼 융통성 없어.”

괜히 유네에게 죄책감만 씌워버린 류제가 도망가려는 재경을 붙잡고 질질 끌었다.

그들의 대화로 유추할 수 있듯 유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오늘이 바로 유네의 집에 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빠도 참…….”

유네는 집으로 돌아가는 날 겸사겸사 친구들이 놀러 가도 되냐는 편지 답장에 당장 그놈들 얼굴이나 보자며 입에서 불을 뿜었던 그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엄마도 그렇다. 따로 오면 길을 모를 수도 있으니 같이 오라고 할 건 뭐야. 분명 렌 군하고 류제 군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시험해 볼 기회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어. 설마 그러다가 내 친구들한테 너무한 짓을 하는 건 아니겠지?

“A동 학생들! 학교 나가기 전에 제게 퇴사 확인받아 주세요.”

세라가 잊어버리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방학식 이후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A동 사감 세라는 떠나는 학생들을 재확인하며 세워진 마차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세라 선생님은 오늘도 바쁘시네. 믿음직스럽고 멋진 세라 선생님. 나도 나중에 세라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아차! 나도 퇴사 확인 해야 하는데!”

생각 없이 짐을 나르던 유네가 잊고 있던 일을 깨닫고 우다다 세라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세라 선생님! 수고하시네요. 저도 오늘 나가요.”

유네가 손을 흔들며 세라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유네를 발견한 세라가 반갑다며 가볍게 인사했다.

“유네 학생도 집으로 돌아가시는군요. 여기에 사인 부탁드립니다. 류제 학생과 렌 학생은 기숙사에 남는다고 했던가요?”

“네, 류제 군은 고향이 멀고 렌 군은 보충수업 받아야 한대요. 오늘은 둘 다 저희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그래도 되죠?”

“어머나, 그렇군요. 재미있게 노시고 사고 없이 무사히 귀환하시길 빈다고 전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방학 동안 고향에 안 내려가시나요?”

“선생님은 방학이 되어도 학교에서 일이 많답니다. 군사훈련도 있고…….”

“아아, 그러시군요. 일이 많다니 아쉬워요. 선생님도 푹 쉬셨으면 좋겠어요. 바쁘신데 제가 괜히 붙잡고 있는 건 아니죠?”

유네가 버려진 햄스터 같은 불쌍한 얼굴로 눈을 글썽거리자 세라가 아니라며 귀여운 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유네 학생이 그렇게 말해줘서 힘이 나네요. 방학 동안 집에서 푹 쉬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2학기 때 봅시다.”

“네. 선생님, 2학기 때 봬요!”

유네가 혹시라도 바쁜데 방해될까 꾸벅 인사하고 사라졌다. 세라도 유네에게 손을 흔들어주다 곧 다른 학생들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류제 학생과 렌 학생은 기숙사에 남는다라. 렌 학생은 최근 유일한 가족을 잃었는데 집에 홀로 남아있기 싫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야. 류제 학생하고 옆방이기도 하고 둘 다 학교 들어올 때부터 성인용 잡지로 얽힌 절친이니, 후훗. 내가 신경을 좀 덜 써도 되겠어. 더군다나 저 나이 또래는 어른보다는 제 또래 친구들이 제일이잖아?

“푸흡…….”

세라가 류제의 세계사 시험지를 채점하다가 발견한 낙서를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모범생 류제가 웬일로 시험지에 낙서를 했다 싶었더니 렌이 여장했던 걸 삐뚤빼뚤 구석에다가 그려놓지를 않았던가. 너무 웃어버리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선생님이 어리둥절해하셨지.

“귀여워라.”

저 우정이 오래갔으면 좋으련만.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들어가면 친우들과 떨어지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뜸해지곤 했다. 그렇게 소식이 끊겼던 친구가 주검으로 돌아오곤 해서 세라는 씁쓸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저런 귀여운 애들이 졸업해서 군에 들어간다니, 죄를 짓는 기분이다. 렌 학생이 공부만 잘했으면 군이 아니라 연구직 쪽도 생각해 볼 법한데.

나도 소대가 전멸한 사건이 있고 나서는 군에 있기 싫어서 의무 복무 기간 이후에 교직으로 전환했지. 거기에 친우라고 하기엔 나와 네네 슈만은 처음부터 안 맞았고.

세라는 이번 분기 군사훈련에서 백장미 부대 백업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 안 맞는 사람과 좀처럼 안 어울릴 수가 없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쌤, 안녕! 나중에 봐요!”

학교를 떠나는 마차 중에서 나르타 가문의 마차가 가장 요란스럽게 출발했다. 위험하게 창문 너머로 너도나도 세라에게 인사하는 세 명의 말썽꾸러기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세라가 손을 흔들었다.

더운 날 학생들을 통솔하는 게 힘들어도 귀여운 제자들의 저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출발이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네네 집이라니. 두근거리는데.”

“그…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 아, 맞다. 아까 세라 선생님께서 잘 놀다 무사히 귀환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

“나 참, 세라 쌤은 매번 걱정도 팔자라니까. 괜한 걱정이 많으면 흰머리 생긴다고, 할머니처럼.”

“네가 틈만 나면 다치니까 그렇지.”

“으윽, 잔소리쟁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눈초리 보내지 마.”

류제가 눈을 내리깔자 재경이 시선을 회피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유네가 하하하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잠시 생각을 하던 류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렌이 보충 듣는 거 가지고는 뭐라고 안 하셨어?”

“으음. 따로 말씀은 안 하셨어.”

“하아. 설마 세라 선생님마저도 포기하신 건가. 정말 걱정이다.”

왠지 렌의 2학기 진급 문제를 자기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류제가 이마를 쳤다. 유네는 그나마 기운을 차린 렌이 또 성적으로 풀이 죽을까 봐 애써 좋은 말을 해주려고 했다.

“그래도 2학기부터는 실전 수업이 늘어나서 렌 군한테는 다행이겠다. 호신술 수업도 있다던데. 렌 군, 운동신경 좋잖아.”

“거기에 엄청 어렵다고 소문난 S_script 수업도 추가로 들어가지.”

“호신술은 좋지만 그건 전혀 좋지 않아.”

“우선 2학기에 올라갈 수 있느냐가 문제지만.”

류제가 옆에서 자꾸 초를 치자 재경이 입술을 오므리며 작게 툴툴거렸다.

미연시 세계에 빙의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태어나기로 결심한 재경이다. 고교 데뷔 출발선인 1학년 1학기는 친구를 사귀는 데에서는 선방했지만 성적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안 그래도 1학기 수업 내용 따라가는 것도 어려운데 2학기 때엔 더 어려운 수업이 기다리고 있다니 착잡하기 짝이 없다.

“그런 딱딱한 이야기 그만하고 바깥 풍경을 좀 봐. 얼마나 좋냐? 오오. 마차를 타고 학교를 나가다니 기분이 생소한데.”

“또 그렇게 도망가지? 하여튼 못살아.”

“시끄러워. 뭐 어때서. 빨리 바깥이나 좀 봐. 시원하다구.”

“생소하긴 하다. 나랑 넌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으니까.”

“우리 집은 학교에서 그렇게 멀지 않아서 지하철 타기 애매하거든. 마차가 더 빨라. 한 30분 정도면 도착할 거야.”

유네가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차가 학교를 빠져나가 대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신기해서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던 재경이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손을 들어 답변했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문제는…….”

재경이 같이 창밖을 보는 유네를 힐끗거렸다. 문제는 이번에 있을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다. 유네네 집에서 같이 놀기는 하되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에만 개입 안 하면 되겠지? 옆에서 지켜보는 것까지는 괜찮았잖아.

류제가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했는지 확인을 해야 하니까 나도 같이 초대된 건 여러모로 잘된 거겠지. 암, 내가 선만 잘 지키면 뭔들 나쁘겠어. 거기에 비키 이벤트가 실패한 이유를 알게 되면 금상천화다.

재경이 정신 승리를 자처하는 동안 마차는 달리고 달려 커다란 대교를 건넜다. 덜그럭 덜그럭 바퀴 소리가 소란스럽다.

유네의 본가는 아가타 강 건너편 부자 마을에 있었다. 제립학교 근처 마을들도 왕실의 지원을 받아 위용이 대단했는데 이쪽 내추럴 본 동네 부자 마을은 위용도 위용이지만 미관도 조화롭고 여유로워서 전체적으로 부유하고 안목 높은 사람들이 조경에 돈 바른 티가 났다.

“이제 곧 도착이야. 저기만 지나면 돼.”

대교를 건넌 마차가 유네네 동네에 들어섰다. 이른바 ‘강북 지역’이라고들 불리는 곳에 재경도 류제도 처음 발을 내디뎠다.

“오오!”

확실히 렌 지미의 집이 있는 서민 중의 서민들이 사는 강서 지역하고 분위기가 달랐다. 류제가 살던 시골 깡촌하고는 더욱더 달랐다. 신난 개처럼 마차 바람을 즐기던 재경의 뒤에서 류제가 연이어 감탄사를 내뱉었다. 무덤덤하게 경치를 감상하다가도 신기한 건축물을 지나치면 눈으로 좇게 되었다.

“여자애들이 유네더러 부자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놀리려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깨끗하게 손질된 가로수들과 가지런한 잔디, 멋을 뽐내는 건축물들과 여유로운 마을 분위기가 품격 있다. 흥분한 재경이 위험하게 창문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역시 유네. 부잣집 딸내미!

“저기가 우리 집이야.”

“어디… 크다! 쩔어!”

“에이, 그 정도는 아냐.”

유네가 겸손하게 대꾸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에는 한눈에 담기 어려운 훌륭한 대저택이 있었다. 옛날 중세 귀족이 살던 궁궐 같은 집이다.

유네가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던 재경도 입이 절로 벌어졌다. 게임에서 배경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정말 다르구나. 부자 히로인이란 진짜 장난 없네. 평민인 유네가 이 정도면 귀족인 비키나 왕녀는 어느 정도라는 거지.

“부러운 짜식!”

“유네가 부러운데 왜 나를 때려?”

재경은 이런 잘난 애들하고만 엮이는 주인공 류제가 질투 나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재경이 류제와 엮을 히로인 중 제일 염두하고 있는 히로인이 유네다. 유네랑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으니 재경은 이렇게 참하고 귀엽고 잘난 유네와 이어질 류제가 부러웠다.

고생하는 건 언제나 나인데 류제만 좋은 거 독차지하고. 누구는 지금 세계의 평화를 고민하느라 여자 친구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제기랄.

“유네! 오느라 수고했어. 어서 오렴.”

“어…엄마, 아빠! 오랜만이에요.”

키가 작은 순서대로 마차에서 내리니 마중을 나온 수많은 사용인들 가운데로 유네의 부모님이 그들을 반겼다.

쭈뼛쭈뼛 서있던 재경과 류제는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부리나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류제 신리입니다.”

“아… 그… 렌… 지미라고 하는데요…….”

“오호호, 우리 유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자, 그렇게 서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서둘러서 실었던 짐을 빼려고 했더니 어느새 유네네 집 사용인들이 알아서 마차에서 짐을 내려 줄지어서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나 부잣집. 류제도 재경도 뻑적지근해져서는 갈 곳 잃은 손을 다시 원래 자리에 두었다. 재경이 류제에게 몰래 속삭였다.

“신기할세.”

“저분들이 유네네 부모님인가 봐.”

“그러게. 닮았다.”

기품 있게 걸어가는 유네의 어머니는 얇실하고 키가 큰, 조금 엄한 인상이지만 유네처럼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유네의 옆에서 뒷짐을 진 채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네의 아버지는 키가 재경보다 작고 멋들어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는 덩치 큰 아저씨였다.

“감히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감히 우리 유네 뒤꽁무니를 따라……! 아빠는 절대 용납 못 한다!”

유네를 애지중지 누구보다 귀하게 키운 딸 바보인 그가 지팡이를 쿵쿵거리며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유네가 친구들 몰래 속삭이며 토라진 아빠를 달랬다.

“아빠~ 그…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오라고 한 건 아빠면서.”

“하지만 아빠는 마음에 안 들어!”

남장을 하고 있으니 친구를 집에 초대한다면야 당연 남자애들을 데리고 오겠지만 그는 귀한 딸내미가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들을 데리고 집에 들어오자 그게 그저 싫은 모양이었다. 그의 눈엔 아직도 저렇게 작은데 집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훨훨 날아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일까.

“집이 어수선하기는 한데 편히들 쉬다 가길 바라요. 유네야, 친구들이 머물 방을 안내해 주겠니? 짐을 풀고 나서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껏 이야기꽃을 피워보자꾸나.”

“응, 알았어요.”

호호호 웃으며 손을 흔든 유네의 엄마는 아직도 투덜거리는 유네의 아빠의 배를 꾸욱 누르면서 분위기 싸해지게 만들지 말고 웃으라고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부모님께서 참 친절하시네.”

“렌 군하고 류제 군 온다고 기대 많이 하셨거든, 헤헤. 다행히 두 분 다 기분 좋아 보이셔.”

“흐음. 유네네 집은 이런 느낌인가. 우리 집이랑 너무 달라서 기분이 이상한걸.”

“그…그냥 평범한 집이야. 특별할 건 없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할까 유네가 지레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한 말이 이상하다는 건 알았는지 웃는 낯이 난감해 보였다.

재경의 입술이 삐죽해졌다. 이게 특별한 게 아니라면 뭐가 특별한 거냐고. 그렇다고 우리 집이 특별한 거라고는 말하지 마. 열등감 드니까.

재경이 질투 어린 눈동자로 어디 흠잡을 데는 없나 유네네 집 안 곳곳을 살폈다.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 알알이 박힌 유리 보석으로 여름철 싱그러운 포도처럼 늘어진 샹들리에, 푹신푹신한 양탄자. 어딜 둘러봐도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궁전 같다.

나랑 할머니가 살던 곳하고도 너무 차이 나는데. 부럽다. 나도 이런 데에서 살고 싶다. 류제가 유네랑 이어지면 나도 여기에서 눌러살 수 있으려나. 그랬으면 좋겠다. 유네는 착하니까 부탁하면 창고 정도는 비워줄지도 몰라.

“손님방은 이쪽이야. 내 방하고 옆에 붙어있어.”

재경이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동안 유네가 계단을 오르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데이터에 없는 가구들을 구경하느라 뇌가 정지된 렌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뒤따라간 류제도 낯선 집을 조심스레 둘러보았다.

“와, 그림이 걸려있네.”

회오리처럼 올라가는 계단 옆 벽면에 걸린 초상화를 비롯한 값비싼 그림들을 발견한 류제가 심미적 호기심을 보였다.

이상하게도 개중 몇 개가 천에 가려져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가려진 초상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왜 가려놓은 거야?”

“응? 아아… 그… 사…사정이 있어서. 별거 아냐.”

“그렇구나.”

류제가 순순히 납득하자 유네가 몰래 안도했다. 류제가 가리킨 그 초상화에는 유네의 어렸을 적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여자인 그 모습을 상상한 유네가 왜 저렇게 수상쩍게 가려놨나며 머리를 싸맸다. 저럴 거면 차라리 창고에 치워놓지. 보이느니만 못하잖아.

“하아…….”

보나 마나 아빠가 극구 반대했겠지, 뭐. 딸의 초상화가 먼지 쌓인 창고에 절대 들어가서는 안 된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아빠를 떠올리면 나를 위해 노력해 준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자, 이 방이야. 둘이서 같이 쓰면 돼.”

2층에 올라간 그들에게 유네가 안내해 준 방은 1학년 8반 교실보다도 커 보이는 손님방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가구는 두 사람이 같이 자야 하는 침대다. 방 가운데에 놓여있는 귀족풍 침대가 으리으리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류제 키의 세 배는 높은 천장에는 여름이라고 펜이 공기를 순환시켜 방을 선선하게 유지시켰다. 손님용 옷장에, 서재에, 책상에, 하나같이 장인들의 손을 탄 가구들이 들어찼다. 보통 가정의 집이라면 손님에게 내놓기 쉽지 않은 방임에 틀림없었다.

“진짜 짱이다! 쩐다. 나 짐 풀어도 돼? 되는 거 맞지?”

“응, 천천히 해. 난 부모님께 점심 어떻게 할 건지 여쭤보고 올게. 화장실은 방 안에 있을 거야. 목욕탕은 공동 목욕탕인데 1층에 있어. 나중에 쓰려면 써.”

“자…잠깐만, 유네. 침대가 하나밖에 없는데?”

“응? 두 명이 자기에 충분히 넓지 않아? 그래서 일부러 언… 누나들한테 말 안 했는데?”

렌은 멋진 손님방에 홀라당 빠져서 유네를 뿌듯하게 한 반면 침대를 콕 집어 지적하는 류제는 뭐라도 잘못 먹은 양 식겁한 얼굴이었다.

유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대가 하나인 게 뭐가 문제라도 있나? 같은 남자끼리인데.

“아하, 류제 군, 혹시 다른 사람이랑 자는 거 불편해? 그럼 밥 먹는 동안 침대를 하나 더 옮겨달라고 할까? 아니면 둘이 다른 방을 써도 돼. 내가 다른 방 써도 되나 여쭤볼게.”

“에이, 됐어. 어차피 하루 이틀 있을 건데 굳이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지. 야, 류제. 곱게 자랐다고 아주 뻐기네. 그렇게 이 침대를 혼자 쓰고 싶냐?”

“아…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네가 불편할까 봐 그렇지.”

“우리 기숙사 침대의 세 배… 아니 네 배는 더 큰 거 같은데 불편은 무슨. 그거야말로 괜한 걱정이다. 짜식이, 완전히 빠져가지고.”

배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것 같은 재경이 높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풍덩 다이빙했다. 침대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만화처럼 띠용~ 하고 몸이 튀어 오를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지금껏 누워봤던 침대 중에 제일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웠다.

양호실 침대는 침대라고 칠 수 없고, 할머니랑 나는 바닥에서 요 깔고 잤으니까 그래봤자 비교 대상은 기숙사 침대밖에 없지만.

렌이 만족해하자 더 이상 태클을 걸 수 없어진 류제가 졌다며 단념했다.

“알았어. 괜한 이야기 해서 미안해, 유네. 그냥 이대로 쓸게.”

“아하하, 아니야.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줘. 내가 초대했는걸. 난 렌 군과 류제 군이 우리 집에 있으면서 계속 즐거웠으면 좋겠어. 헤헤, 나 좀 들떴을지도.”

유네가 쑥스러운 듯이 웃고는 부모님과 점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방에서 사라졌다.

유네가 떠나기 전까지 머리를 쥐어뜯던 류제는 또 나 혼자서 오밤중에 도를 닦아야 하냐며 저 불길함 덩어리를 흘겼다. 침대 위에서 고양이가 영역 표시를 하듯 몸을 부비고 있는 렌이 사랑스러운 소악마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일 거다.

설마 같은 침대를 쓰게 될 줄이야.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등에 멨던 가방을 벗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짐 풀어. 손님인데 짐을 엉망으로 두면 실례잖아.”

“그래봤자 옷하고 세면도구뿐인걸. 좀만 쉬자. 내 평생 이런 좋은 침대에 언제 또 누워보겠냐?”

“밤에 잘 때 누우면 되지. 그러다 잠들면 저녁까지 잔다. 저녁엔 바비큐 파티 하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잠들어도 안 깨워줄 거야.”

“알았어, 일어나면 될 거 아냐. 깐깐한 놈.”

재경이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났다. 깐깐하다는 단어에 불만을 품고 노려보는 류제의 시선을 무시한 재경은 침대에 뛰어들기 전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가방을 열어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바닥에 털어놓았다.

유네가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챙겨오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가방에 든 것도 별로 없는데. 재경은 문득 류제만을 위해 준비되었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공간에 그가 있어도 되는 건가 마음이 흔들렸다. 이러다가 또 비키처럼―

“뭐 해?”

“암것도 아니야.”

재경이 도리질을 치며 헛된 생각을 날려버렸다. 아직 해피 엔딩 분기는 많이 남았다. 괜찮아. 류제가 제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메롱이다, 흥.”

재경이 쏟아진 옷들을 개서 옷장에 넣어두었다. 내 옷이 남의 집 옷장에 들어가니 빼도 박도 못하게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에 개입한 기분이다.

옆에서 같이 짐을 정리하던 류제가 호기심에 침대에 주저앉아 보았다. 푹신푹신하니 엉덩이가 편안하다. 스프링 소리가 나는 A동 기숙사 침대하고 천지 차이였다. 정말이지 예상외로 엄청난 집이었다.

“유네가 없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같은 반 애들이 마냥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구나. 이런 집에서 사는 애가 왜 우리처럼 A동 기숙사를 쓰지? 뭐, 남학생은 전부 A동을 쓰긴 하지만. 유네라면 왠지 여자라고 속이고 C동 기숙사를 써도 될 것 같은데, 하하.”

류제가 우스갯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눈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주제에 이런 가끔씩 예리하다. 그 점이 기특해서 재경이 짝짜꿍을 맞춰주었다.

“덕분에 유네랑 친해져서 이런 데에서 자고 좋지 뭐. 어른이 되어도 친구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줄지도 몰라. 근데 유네가 점점 더 예뻐지면 어쩌지. 난 쭈구리 되는 거 아냐?”

“어라, 나한테 실없는 소리 한다고 할 줄 알았더니 네가 한술 더 뜨네. 하기야 유네의 여장은 진짜 여자 같기는 해. 너도 유네 여장 보고 매번 귀엽다고 했었잖아.”

남자애를 굳이 여장시키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류제가 쩝 입맛을 다셨다. 렌은 유네가 여장한 모습에 거부감이 없는 것 같고.

렌은 그 정도로 귀여우면 남자라도 OK인가? 그럼 나도 귀엽게……. 에이, 무슨 생각이야. 류제가 자기가 생각해도 상상한 모습이 더러워서 엑스 자를 그었다.

“야, 류제. 혹시 유네가 진짜 여자면 어떨 것 같아?”

슬쩍 방 바깥을 살피다가 아직 유네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한 재경이 본격적으로 류제를 떠보았다.

렌 앞에서 귀엽게 여장한 자신을 애써 휘휘 내저은 류제가 망상도 지나치다고 하하하 억지로 웃었다.

“일단 반 여자애들이 난리 날걸. 미소년 좋아하는 유네의 팬들 많았잖아.”

“바보야, 그런 거 말고 그냥 네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본 거야.”

“음, 아무래도 같은 방을 못 쓰겠지. 무슨 쓸데없는 상상을 하게 하는 거야. 아무리 귀엽게 생겼어도 유네는 남자라고. 내가 지금까지 같은 방을 써서 알아. 설마 렌, 너 여자 친구를 못 구하니까 이제 남자애한테 흥미가 생긴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서로 이때다 싶어서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냉정하기만 하다. 하하 웃는 상이었던 류제의 눈에 자그마하게 실망한 음영이 졌다.

재경도 이 꽉 막힌 답답이가 이번 이벤트로 유네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걱정이었다. 뭐야, 그게. 남자애한테 흥미가 있냐니. 류제한테 유네는 그 정도일 뿐인가.

설마 하는데 류제 너 정체를 밝힌 유네를 거부하거나 그런 선택지를 고르면 진짜 죽는다. 내가 드리프트로 핸들을 꺾어주겠어.

“그냥 재미로 가정해 보는 거지. 남자애한테 흥미가 생겼다니 뭐니 진지하게 굴기는.”

“무례하잖아. 그런 건 상대방한테 실례야.”

“됐다. 너한테 뭘 바라냐. 상상력 포용력 둘 다 부족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러다 너 자라서 꽉 막힌 꼰대가 되어버린다.”

이 눈치 없는 답답이한테 내가 뭘 바라. 재경이 류제를 철 덜 든 어린아이 대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아주 사람 꽉 막혀서 두 손 두 발 다 들어 보일 모양새에 류제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상상력 포용력 둘 다 부족한 놈이 누구인데. 류제가 재경의 머리통을 붙잡고 짤짤 흔들었다. 재경의 몸이 목 아래로 진자처럼 대롱대롱 흔들렸다.

“렌 군, 류제 군, 뭐 하는 거야. 하하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부모님과 모종의 작전을 짠 다음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고 돌아온 유네가 잘만 정리하고 있을 줄 알았던 두 사람이 또 시답잖은 일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류제 때문에 두개골이 계란처럼 두 조각이 날 것 같았던 재경이 유네한테 소리쳤다.

“웃지만 말고 살려줘! 으악! 이거 놔! 놓으라고!”

“시끄러워! 내 상상력하고 포용력에게 사과해!”

“하지만 사실이잖… 아야!”

내 상상력이 빈약했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지. 내 포용력이 부족했다면 널 좋아하지도 않아! 꽉 막힌 건 너라고! 류제는 애꿎은 재경에게 화풀이를 했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6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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