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5. [7월. 그인 그녀와 그와 나] (1)
몽롱하다.
나는 분명 앞을 보고 있는데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닌 수동적인 감각이 껄끄럽다. 내 것이 아닌 육체는 어딘가에 기대어 누워있나 막연하게 시점이 낮았다. 커다란 몸이 어울리지 않게 가라앉은 상태를 보아하니 꽤나 거만하게 앉아있는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지. 나는 도대체 누구지. 모든 시야가 생소해서 도통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때 존재했던 증오는 긴 시간 속에 침체되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과 지루함만이 남은 너는 왜 존재하는 걸까.]
누군가 말했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었나? 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내리자 나른하게 기댄 내 다리에 어떤 여자가 살을 붙이고 앉아있었다. 오만한 입꼬리가 보였다.
오호라, 이 발칙한 것을 봐라. 그녀는 감히 나를 제압하려는 과감한 자세를 취했다.
볼을 뒤덮은 옅은 주근깨. 선 얇은 고양이 눈. 칙칙한 지푸라기 빛깔의 양 갈래 묶음 머리. 낭창한 몸을 뒤덮는 검은 로브. 그 안은 얇실한 신체가 보일 듯 말 듯 아찔하다.
아, 나는 이 사람 알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름이… 렌…이었던가?
어라, 이상하다. 렌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머리도 짧고 저런 양 갈래 머리는 안 해. 아, 했었지. 했었던 적은 있었어.
으음, 그래도 아냐. 렌은 저런 자신감 가득 들어찬 오만방자한 얼굴은 하지 않아. 늘 불평불만 가득 찬 찌푸린 얼굴이잖아. 그 얼굴이 볼수록 귀여워서 좋다.
그럼 저자는 렌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인가?
[후회하니? 천 년 전 인간들에게 용서 못 할 증오를 내보였던 것이.]
전혀.
내가 말했다. 내 스스로 놀랄 정도로 공격적인 억양으로 양 갈래 머리를 한 여자 렌한테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그녀가 내가 불쌍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차분히 나를 쓰다듬는 손길이 상냥하다. 나를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다리에서 느껴지는 탐스러운 허벅지의 촉감이 좋다. 내가 기뻐하자 그녀는 맨다리로 내 몸에 올라탔다. 나는 알았다. 그녀는 분명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감히 내보이는 상냥한 눈웃음이 그걸 말해준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 없겠지. 너와 같은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잠시만.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데. 렌을 닮은 여자가 내 위에 올라탄다고? 렌이 여자?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더라? 뭐든 굉장히 지루하고 따분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저 익숙한 렌의 얼굴이 반갑다. 좀 더 다가와 줘. 하지만 일순 괘씸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감히 인간 주제에. 어, 나도 인간인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거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네게 말해줄 수 있어. 이건 순전히 너의 공이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공치사는 초면에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공이라니? 내가 뭔가를 했던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야 이렇게 지루한걸.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재미없는 거겠지.
[네까짓 게 뭘 안다고? 하하, 그렇지.]
그녀가 따스하게 웃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웃어주는 모양새가 렌하고 쏙 빼다박았다. 너무 예뻐서 혼이 나갈 것 같다.
나도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게 흥미가 있다. 너는 누구야? 인간 주제에 왜 내게 다가오는 거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거든.]
그녀가 웃으며 내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 죽을 듯이 아팠다.
류제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정신이 작은 통로에 빨려 들어가듯 좁혀지다 터졌다. 심장이 멎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먹먹했던 귀에서 들려오는 건 아침 참새 소리. 악몽을 꿔서 온몸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된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두근두근 뛰어대는 심장이 아프다. 꿈이라지만 진짜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생생해서 무섭기까지 하다. 뭐지?
그가 꿈속에서 찔렸던 가슴을 더듬었지만 당연하게도 심장에 구멍 따윈 나지 않았다. 그 대신 벌렁벌렁 놀란 심장이 생을 증명하듯 우렁차게 뛰어대고 있었다.
베란다 밖에서는 현실을 알리는 새소리가 짹짹거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다. 식은땀을 닦던 류제는 새벽녘부터 깨달은 게 있었다.
생생한 개꿈이구나.
“류…류제 군, 일어났네. 아직 기상 방송 전인데.”
“어, 유네. 일어났었구나. 좋은 아침이야. 뭐 해?”
류제가 자는 틈을 타 체육복으로 갈아입다가 류제가 번쩍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이불 속으로 점프했던 유네가 류제의 아침 인사를 들으며 하하 웃었다. 이마에는 갓 꿈에서 깬 류제처럼 식은땀이 흥건했다.
“추…추워서.”
“춥다고? 여름인데? 감기라도 걸린 거 아냐? 으으, 땀 좀 봐. 아침 운동 끝나고 샤워나 해야지.”
“아하… 아하하.”
유네의 속없는 웃음이 기숙사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제가 손으로 땀을 식히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입고 있던 젖은 옷도 벗어서 침대에 던졌다.
유네도 더워서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이불을 벗어 던지고 싶었지만 상체가 알몸인지라 이불을 벗는다면 류제에게 여자란 것을 들킬지도 몰랐다.
아니… 이런 말 하기 싫지만 둔한 류제 군이라면 정면으로 보고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한다.
과연 그게 가슴이 납작해서일까, 류제 군이 나한테 별 관심이 없어서일까. 유네는 찔끔 눈물이 났다. 남장은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어느 쪽이든 비참했다.
유네의 이불 아래서 어떤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류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커튼을 걷었다. 계절이 바뀌려는 듯 날이 지날수록 아침 해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이상한 꿈을 꿨어.”
“꿈? 악몽을 꿔서 갑자기 일어난 거야?”
“여자가 된 렌이 내 몸에 올라타서 영문 모를 소리를 하다가 날 찌르잖아. 깜짝 놀랐네.”
잠에서 덜 깨서 꿈 내용을 주절주절 말하던 류제가 배를 긁적이다가 아, 짧은 감탄사를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바르게 근육 잡힌 단단한 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하다.
“딱히 야한 꿈은 아냐.”
“렌 군이 여장했던 게 기억에 남은 모양이네.”
“개꿈도 가지가지지. 오늘같이 중요한 날에 하필이면 그런 이상한 꿈을 꾸다니.”
오늘은 다름 아닌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수학 시험과 세계사 시험, 8반과 7반이 서로를 상대하는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 실기시험이 있었다.
그 시작을 여장한 렌한테 심장을 찔리는 개꿈과 함께하다니. 욕구불만인가? 찝찝해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람.
“분명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걸 거야. 시험 끝나면 여름방학이니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
“내 가장 큰 시름은 렌의 기말고사 성적인데.”
“에이, 렌 군도 우리들하고 같이 열심히 공부했잖아. 분명 잘 볼 거야.”
“그거야 성적 나오면 또 모르지.”
어제 내내 열심히 수학 개념 설명을 해주었건만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했던 렌을 떠올린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문제다. 어제 공부하다 말고 렌의 여장 사진을 복습하니까 그런 개꿈을 꾼 거다. 반성하자 반성.
“빨리 방학이나 왔으면 좋겠네.”
시원하게 기지개를 켠 류제가 어슬렁어슬렁 화장실로 들어갔다. 밤잠을 자는 동안 텁텁해진 이를 닦고 먼지 쌓인 얼굴을 씻기 위해서였다.
그 틈을 타 유네가 이불을 벗어 던지고 가슴 붕대를 감은 다음 민소매 티를 얼굴에 쑤셔 넣었다.
“유네, 내 서랍에서 수건 좀 꺼내줄래?”
“으아앗! 으…으응!”
민소매 티를 입던 유네가 화들짝 놀라 손을 가슴으로 모았다. 설마 들킨 건 아닐까 걱정되지만 앞머리가 까뒤집혀진 채 맹한 눈을 한 류제는 명백하게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네가 살금살금 겁에 질린 햄스터처럼 움직이며 류제의 옷장에서 수건을 꺼냈다.
“자.”
“고마워. 아직도 잠에서 덜 깼나 봐. 깜박했다.”
칫솔을 물고 있는 류제가 치카치카 이를 닦으며 수건을 건네받았다.
류제는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이는 유네의 체구를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꿈속에서 나왔던 여자 렌과 왠지 비교되었다. 적어도 그 렌은 손목을 잡는다고 부러질 것처럼 생기지는 않았다.
“오…왜?”
평소에는 별반 관심 없었으면서 오늘따라 시선이 끈질기다. 아무리 민소매 티를 입었다지만 모르는 사이에 압박붕대가 비쳐 보일지도 몰랐다.
설마 의심을 샀나? 저렇게 둔한 류제 군한테? 유네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피자 류제가 이를 닦다 말고 유네의 몸을 지적했다.
“좀 많이 먹어야겠다. 근육이 있어야 다른 반한테 이기지.”
늘 다른 학생들과 같은 수준의 훈련을 소화하고 있지만 유네는 좀처럼 체력이나 근력이 늘지 않는 체질이었다. ‘바람’ 어빌리티와 비호전적인 성격까지 더불어 뼛속까지 보조 역이라나.
별안간의 돌직구에 유네의 머릿속에서 커다란 징 소리가 들리는 동안 류제는 할 말만 마치고 화장실로 들어가 와글와글 입을 헹구었다.
기껏 내 몸을 보면서 한다는 게 근육을 키우라는 말이라니. 유네는 심정이 복잡해졌다. 같은 방을 쓴 지 어언 5개월째. 옷을 갈아입는 중 류제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던 첫날부터 충분히 의심을 품을 정황이 몇 번이나 있었지만 류제는 아직도 유네가 여자라는 사실을 눈치챌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비밀이 지켜지고 있다는 건 좋지만 사춘기 소녀로서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난… 역시 그런 매력은 없는 거야.”
유네가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어렸을 적에도 남자애들이 날더러 귀엽다고만 했었지. 매번 마스코트 다루듯이 굴고.
남장 같은 거 하지 말 걸 그랬다고 가끔 후회감이 든다. 하지만 막상 여자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무섭다. 남장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난 또 그때처럼…….
유네가 고개를 저으며 마저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곧 기상 방송이 기숙사 전체에 울렸다. 세수를 마친 류제가 아침 운동을 위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다음 타자로 화장실에 들어간 유네가 세안하는 동안 류제는 감감무소식인 렌을 깨우기 위해 옆방 문을 두드렸다.
“렌?”
이럴 줄 알았다. 오늘도 반응이 없다.
류제가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성큼성큼 왼쪽 침대로 향했다. 매일 있는 일처럼 익숙하다. 역시나 기상 방송이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침대 위에 커다란 굼벵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어나, 렌! 아침이야.”
“으으으… 5분만…….”
“지금 바로 기숙사 운동장으로 가야 하니까 어서 일어나.”
류제가 이불 속에서 꿈지럭거리는 재경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재경은 졸려 죽겠다며 얼굴을 찌푸린 채 꾸벅꾸벅 졸았다.
조금이라도 더 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재경은 류제가 끌어내면 족족 다시 이불 속에 기어 들어갔다. 오기가 생긴 류제가 어림도 없다며 재경의 새로운 잠옷, 여장 대회 준우승 상품으로 받은 꾸물꾸물 고양이 동물 잠옷 지퍼를 내렸다. 그 대신 재경에게 널브러진 체육복을 던져주었다.
“빨리 갈아입어.”
“이 할머니 같은 놈…….”
비몽사몽 웅얼거린 재경이 고양이 옷을 탈피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재경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류제는 오늘 있을 시험을 위해 렌이 공부했을 책상을 검사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시험 대비를 위해서 류제가 숙제로 내준 수학 문제가 연필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결국 다 안 풀었잖아! 방에서 푼다고 했으면서.”
“모르겠는데 어떻게 풀어.”
“결국 도망간 거였다 이거지.”
“그럴 수도 있지…….”
으하아암. 늘어지게 하품을 한 재경이 체육복 바지와 티셔츠를 동시에 숙숙 입었다. 학교에서 훈련을 그렇게 시켜댄 결과 보잘것없던 재경의 몸에도 적당히 잡힌 마른 근육이 배에 슬며시 나타났다가 가려졌다.
“왜, 이 잔소리 대마왕아.”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던 류제가 아닌 척 고개를 획 돌렸다.
“오늘 시험 어쩌나 걱정돼서 그렇지.”
“괜찮아. 다 어련히 되게 돼있어.”
“뭐가 괜찮아! 이대로 가다간 분명 보충수업 확정일걸. 옷 좀 제대로 입고! 뒤가 까졌잖아.”
류제가 손수 뒤집힌 옷자락을 펴주었다. 난 또 왜 렌하고 꿈에 나온 렌을 비교하고 앉았어? 부질없는 망상을 지우듯 고개를 털어낸 류제가 옷을 다 갈아입은 렌을 이끌고 억지로 신발을 신겼다.
“오늘 세계사 시험도 있는 거 알지? 너 수학하고 세계사 둘 다 쥐약이잖아. 도표는 외웠어?”
“그런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보다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 시험이 더 중요해. 유네, 좋은 아침.”
류제의 시끄러운 잔소리와 함께 방 밖으로 나서니 평소처럼 유네가 복도에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실몽실 잠에서 덜 깬 렌을 본 유네가 반갑게 인사했다.
“렌 군, 좋은 아침! 공부 열심히 했어?”
“했으면 류제가 나한테 잔소리를 하고 있겠냐?”
“자랑이다!”
류제가 할머니처럼 떽떽거렸다. 하여튼 끈질긴 자식. 재경이 아침부터 기운도 좋다며 귀를 막았다. 이것들은 아침잠도 없나. 매일 질리지도 않고 정시에 일어나네. 시험 마지막 날인데 좀 지각해도 될 걸 갖다가.
익숙해 보이는 행동들을 보고 짐작했겠지만 그들의 아침 기상 풍경은 항상 이랬다. 방에서 나와 운동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매일 시답잖은 수다를 떠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오늘은 앞장서 계단을 내려가던 유네가 먼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렌 군, 들었어? 류제 군이 오늘 이상한 꿈을 꿨대.”
“으응? 이상한 꿈? 뭔데.”
“그게, 신기하게도 렌 군이 여자였―”
“유네, 쉬잇! 그거 말하면…….”
잠결에 제 입으로 말한 내용이지만 유네가 렌에게 순식간에 일러바칠 줄 몰랐던 류제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원망하며 유네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네는 그게 뭐 나쁜 일인가 입이 막힌 채로 눈을 끔벅거렸다.
귀는 또 좋아서 그걸 기어코 들어버린 재경은 썩은 표정을 지으면서 혀를 찼다. 저 표정은 분명 상대방을 경멸하는 표정이다.
“류제, 너도 개꿈을 꾸는구나. 내가 여자라니. 유네가 여자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 있네. 너, 내 여장 사진 좋은 말로 할 때 버려라. 어엉?”
그 협박에 다른 두 사람이 동시에 뜨끔했다. 이게 다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 때문이라며 재경이 치를 떨었다.
아직도 심심하면 여학생들의 손을 거친 여장 사진이 교실을 돌아다녔다. 잘 나온 사진 하나는 교실 뒤 자유 게시판에 붙어있기까지 했다. 무슨 짓거리를 해놓은 건지 몰래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약이 오른 재경이 그 사진에다 검게 낙서를 해놓긴 했지만 그 사진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였다. 젠장할,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그런 거나 계속 보니까 개꿈을 꾼 거 아냐. 그게 그렇게 웃기냐?”
불건전한 꿈을 꾼 거라고 오해하면 어쩌나 싶었던 류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투덜거림을 듣고 역시 턱도 없는 소리였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불건전한 생각은 나만 하는 거구나. 그야 그렇겠지만. 그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을 다른 애들한테 보여준 적 한 번도 없어.”
“그렇다고 용서가 될 줄 알아?! 내가 잠시 학교에 안 나오는 사이에 사진이 나돌든가 말든가 방치했잖아! 세상에, 내 여장 사진을 3학년 선배들도 가지고 있더라?! 도대체 왜?! 어째서?”
재경이 인간들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복도 한가운데에서 큰 소리로 토로했다.
가끔 엄청 무서운 누나들이 불러서 머리에다가 이상한 핀을 꽂아주고 간다. 뭐 하자는 거냐며 짜증을 내도 킥킥거리기만 한다. 내가 뭐 장난감이야 뭐야? 이대로 가다가는 위에 구멍이 나서 못 산다. 두고 봐! 어떻게든 복수해 줄 거니까.
“A동 기숙사생, 신속하게 집합합니다! 렌 학생, 오늘도 목소리가 우렁차군요. 잽싸게 뛰어오세요!”
멀리서 재경의 목소리를 들은 세라가 호루라기를 불며 그들을 독촉했다. 재경이 세상에 대한 불공평함에 불평을 늘어놓아도 하루 일과의 시작인 기숙사 아침 운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운동을 끝내고 아침을 먹는 등 기숙사 아침 일과가 끝나면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학교로 등교했다.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하느라 교실은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재경이 끔찍하게 싫어했던 기말고사 마지막 날 스케줄은 아래와 같았다.
―오전 9시부터 9시 50분까지 수학 시험
―11시부터 11시 50분까지 세계사 시험
―점심시간
―2시부터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 실기시험
시간이 되자 시험지를 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고 순식간에 수학 시험 하나가 지나갔다. 현재는 막 한차례 기호와 숫자로 이루어진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답답해 미치겠는 류제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좌절하는 재경에게 침을 튀겨가며 해답 풀이를 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x―y+3)(4x―2y―1)≤0을 만족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그래프를 그려보면 범위가 이렇게… 렌! 좀 들어!”
“몰라, 모른다고! 이제 싫어! 수학 따윈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어! 어차피 수학 시험은 망했어. 이제 와 되짚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날 내버려 둬.”
“소용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봐, 이 문제 분명 어제 내가 풀어줬던 거지? 못 푼 건 네가 그대로 잊어버려서 그런 거 아냐. 복습이 얼마나 중요한데.”
1학년 8반 교실에 걸려 있는 시계의 시침이 10, 분침이 1을 가리키는 가운데 째깍째깍 초침이 60진법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수학 시험에서 총 25문제 중 7문제를 풀고 그대로 리타이어한 재경은 무한 반복되는 류제의 잔소리가 시끄러워 당장에라도 귀를 막고 싶었다.
“복습이고 뭐고, 모르겠으니까 못 푼 거지. 이미 늦었어. 과거는 돌아오지 않아. 아, 그래! 이제 세계사 시험이잖아. 수학은 집어치우고 세계사 공부를 하자.”
“가방 안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주제에 세계사 공부는 무슨. 잔소리 듣기 싫다고 핑계 대긴.”
“윽, 어떻게 알았지.”
“너무 그러지 마, 류제 군. 렌 군 중간고사 수학 점수는 12점이었는데 지금은 가채점하니 20점은 넘어. 정답만 바르게 썼으면 무려 20점이야.”
“무.우.려?”
류제가 절대 렌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골라 뚝뚝 끊어 빈정거렸다. 누가 보면 수학 시험이 50점 만점인 줄 알겠네.
100점 만점인 시험에서 20점을 맞은 것 가지고는 턱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위로 겸 렌에게 응원을 해주려던 유네는 우물쭈물 아무런 반박도 못 했다.
천사 유네를 물리친 대마왕 류제는 거 보라며 재경에게 잔소리를 이어나갔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폭주 기관차 같았다.
“이 점수 가지고는 여름방학 보충은 확정일걸. 어쩌려고 그래? 혼자만 방학 없고 싶어?”
“으으, 보충 소리 하지 마. 열심히 외면하는 중이었는데.”
“외면? 난 분명히 말했어. 공부 안 한 건 너다?”
“이 짜식이… 난 최선을 다해서 한 거야. 내 생애 가장 열심히 공부한 거라고. 암것도 모르면서…….”
초등학교 중학교 수학도 제대로 모르는데 갑자기 고등학교 수학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고 변명하지 못한 재경이 결국 책상에 엎드려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류제의 말을 들을수록 자존심이 상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중간고사 때는 4문제밖에 못 풀었었는데 기말고사에서 7문제나 푼 건 거의 2배나 실력이 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되나. 자기는 다 맞았다 이거지. 쩨쩨한 자식.
“세계사 시험 치고 지금이랑 같은 변명 할 거지?”
“젠장, 나를 너무 잘 알아.”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한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난 다섯 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살았었다고. 이 정체불명의 미연시 세계의 역사 따위 알 게 뭐야. 그러니까 당연히 약할 수밖에 없는걸.
으으, 이렇게 변명하면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다는 걸 전부 변명할 수 있는데.
“그럴 줄 알았다. 자, 이거라도 보고 빨리 외워. 이제 1시간도 안 남았어.”
“으으으…….”
“보충은 수학으로 족하다는 일념으로 집중해.”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재경의 머리를 손수 정리한 속성 암기 공책으로 때린 류제가 공책을 책상 위에 던져주었다.
류제도 지금부터 2교시 시험 시작 전까지 세계사 공부를 해야겠다며 등을 돌려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교실도 조용해질 분위기자 유네도 자기 자리로 돌아가 막바지 세계사 요약 공부에 나섰다.
“세상에서 시험이 제일 싫어.”
우는소리를 지껄인 재경이 류제가 준 공책을 별수 없이 펼쳤다. 영문 모를 소리들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줄 공책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앞날이 캄캄하니 공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막상 펼치면 하기 싫다. 아는 것도 없고, 이것보다는 배드 엔딩을 막는 게 더 중요한데 그것도 막상 자신이 끼어들면 엉망진창이 된다는 게 떠올라 기가 죽었다.
난 뭘 해나가고 있기는 한 걸까? 제발 누가 나한테 이런 외계 주문보다는 앞으로 다가오는 호감도 이벤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힌트라도 좋다. 막막해서 도저히 수가 안 보였다.
어쨌든 뒤늦게 류제의 필살 세계사 요약 노트를 훑은 재경이지만 시험 전에 무작정 앞 글자만 따서 외운다고 해서 시험이 쉬워질 리가 없었다.
인류의 멸망을 건 중대사 대신 세계사 시험이란 전쟁을 목전에 둔 재경은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는 기분으로 글자를 읽었다.
으으… 그러니까 스탈라 조약으로 키아나트리체와 미노타 국경에 기간트리카 부대를 놓지 않는 비어빌리터 지대를 처음 만들었고……? 근데 미노타가 어디야. 어느 나라야? 으음… 류제가 중요하다고 표시해 놨네. 그래, 이것만 외우자. 스탈라 조약. 스탈라 조약. 스탈라 조약.
“책상 위를 깨끗하게 비우고 필기구만 올려놓으세요!”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세계사 시험 감독 선생님이 교탁을 탕탕 두들겼다. 세계사 시험은 기말고사 마지막 필기시험이라 학생들은 제발 빨리 치고 끝났으면 좋겠다고 책을 집어넣으며 구시렁거렸다.
재경은 중요한 부분 앞 글자만 따서 외운 것을 써먹기도 전에 잊어버릴세라 시험지를 받자마자 후다닥 휘갈겨 적었다.
오지선다 문항이 총 25개, 단답형 서술형이 3개, 논술형 서술형이 2개로 총 30문항인 세계사 시험은 문제를 읽을수록 시야가 창백해질 정도로 난이도가 높았다. 물론 재경의 기준이다.
[문 15.]
[키아나트리체와 미노타 국경 사이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조약으로, 양 국가의 국경 사이 약 5km 구간에는 기간트리카 부대를 배치할 수 없게끔 서명한 조약의 이름은 스탈라 조약이다. 이 스탈라 조약이 체결된 연도에 일어난 사건을 바르게 서술하고 있는 학생을 고르시오. (2점)]
① 니아 : “펠노아에서 최초로 인간들이 마족에게 승리했어.”
② 드리트미 :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주도로 5.22 토벌이 일어났어.”
③ 유가사 : “마왕의 소멸로 인해 많은 마족이 폭주해 인계가 큰 피해를 입었어.”
④ 실씨 : “대마족 인류 연합이 키아나트리체 가트 의회에서 결성되었어.”
⑤ 나나베테 : “미노타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긴급 구휼 정책에 들어갔어.”
이게 뭐야. 말도 안 돼. 스탈라 조약밖에 안 외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올 수가 있지?
[키아나트리체와 미노타 국경 사이의 마찰을 해결하기 위해 생긴 조약으로, 양 국가의 국경 사이 약 5km 구간에는 기간트리카 부대를 배치할 수 없게끔 서명한 조약의 이름은?]까지만 나오면 되잖아.
니아고 드리트미고 유가사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너네 학생 맞아?! 어디 어디 대학교 박사가 아니라?
재경이 무언의 비명을 지르면서 찍기의 신이 내리길 기도하는 동안 류제는 막히는 부분 없이 무난하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재경이 고민하고 있는 [문 15.]의 답은 ④다.
알기 쉽게 시간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4월 수학여행 첫날 머물렀던 펠노아에서 오래전 인간들이 최초로 마족에게 승리했다.
그 이후 수많은 경험을 통해 기간트리카를 개발한 인류는 마족이라는 커다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스탈라 조약을 체결해 국가 간 전쟁을 없애고 모든 병력을 마족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대마족 인류 연합이고 그 대표가 이 나라, 제국 키아나트리체다.
음, 배운 대로군. 이 정도는 렌도 맞출 수 있겠는걸.
뒤에서 아비규환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류제는 이번 세계사 시험은 난이도가 괜찮다면서 술술 답안지에 마킹을 했다.
마지막 서술형 문제.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시간은 15분 정도 남았고 기억했던 것이 생각이 나지 않아 류제가 연필을 잠시 멈추었다.
뭐였더라. 긴 앞머리를 쓸어 넘긴 류제가 그대로 책상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었다.
시험지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가 멍청하다.
“후회하니?”
그녀가 말했다. 후회? 뭘 후회한다는 거야. 렌처럼 생겨가지고 괘씸하게 말하긴. 아아, 이제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꿈이란 것이 원래 그렇지만 류제는 그녀가 점점 잊혀져가는 것이 내심 아쉬웠다. 류제는 서술형 답안을 쓰다 말고 시험지 옆에다가 깨작깨작 낙서를 했다.
렌처럼 이런 눈에다가 주근깨도 똑같았다. 저번 여장 대회 때 했던 양 갈래 머리를 하고 당당한 입꼬리가 매력적이다.
“종료 2분 전!”
으아아,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시험 때문에 칠판 앞에 옮겨둔 시계를 부리나케 살핀 류제가 서둘러 마지막 서술형 답안지를 작성했다.
그가 문장을 깔끔하게 정돈하자마자 시험 종료를 안내하는 종이 쳤다. 그 때문에 그가 삐뚤빼뚤 그린 낙서는 지우지 못한 채로 맨 뒷사람에게 걷어져서 감독 선생님에게로 향했다.
“아싸! 드디어 시험 끝났다!”
“하아. 기뻐하긴 일러. 아직 기간트리카 실기시험 남았는걸.”
“필기가 끝난 게 어디야. 드디어 짐을 덜었네.”
시험지가 걷어지자 학생들이 살겠다며 즐겁게 조잘거렸다. 논란이 있을 것 같던 몇 번의 답이 뭐네 언쟁도 오갔다.
어떤 학생들은 답안을 맞춰보는 것은 뒤로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 있을 7반과의 반 대항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 실기시험을 위해서 전략을 짰다.
일단 류제와 같은 조가 되면 이길 수 있겠지만 활약할 기회가 없어지니 점수가 짜다는 것. 렌이나 유네 같은 못하는 애들하고 같은 조가 되면 캐리해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나 80%의 확률로 경기에서 진다며 그녀들은 시험이 아니라 복불복 게임이라고 제멋대로 수다를 떨었다.
“으으, 망했어. 그런 문제가 나올 줄이야.”
“괜찮아, 렌 군. 분명 찍은 거 다 맞았을 거야.”
마지막 논술형 서술형 문제의 답으로 ‘오늘 아침에 토르티야가 나와서 맛있었습니다.’라고 쓰고 제출한 재경은 분명 세계사 시험도 30점이 간당간당할 거라며 책상에 머리를 처박았다.
“네가 준 공책에서 마지막으로 외운 단어가 스탈 조약이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더라. 결국 마지막까지 아는 게 하나도 안 나왔어.”
“스탈이 아니라 스탈라. 스탈라 조약이야 바보야. 외우려면 똑바로 외우든가.”
어느새 옆에 온 비키가 가증스럽게 콧방귀를 뀌어댔다. 풀죽은 재경이 비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쟤는 맨날 흥흥거리면 코 안 나오나.
“뭐야, 잘 봤다고 생색내냐?”
“생색이고 뭐고, 당연히 바보 렌보다야 잘 봤겠지.”
“젠자앙,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두고 봐, 나중에 학교 졸업하면 절대 공부 같은 거 안 할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기는. 졸업하고 훈련병이 되면 공부할 게 더 많다는 거 몰라?”
“그럼 졸업하고 군인 안 하면 되지.”
“하기야 약한 렌이 군에 들어가 봤자 뒤처지기만 하겠지. 시골 마을 경비병 같은 거나 되지 그래?”
고작 회관에 한두 명 어빌리터를 배치해 놓는 작디작은 시골 마을로 가라는 이야기에 재경이 비키에게 메롱 혀를 내밀었다. 그러긴 싫다.
“수학이나 세계사 따위 뭐 그리 중요하다고. 난 기간트리카 실기시험만 잘 치면 돼. 어차피 어빌리터한테 그게 제일 중요하잖아.”
“과연 3학년에 올라가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아, 류제 너 이번 평균 계산해 봤어? 몇 점이야?”
“역시 빅토리아. 시험 끝나자마자 바로 평균 계산을 하다니. 승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기세네.”
“다.악.치.어.”
빅토리아라는 말에 울컥한 비키가 류제의 멱살을 채서 소곤거렸다. 사람 하나 죽일 기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서 류제가 알았으니 진정하라며 두 손을 들어 항복을 표했다.
“평균은…한 94 정도. 서술형에서 부분 점수가 있으면 올라갈 수도 있고.”
“흐음~”
잠시 눈알을 굴리던 비키가 자기가 이겼다며 기고만장해서 흔쾌히 류제의 멱살을 놓았다. 옆에 있던 유네는 자기가 더 신나서 손을 마주쳤다.
“비키 양은 이번에도 전교 1등일까? 공부 엄청 열심히 했으니까 분명 그럴 거야.”
“뭐, 평범하지.”
“젠체하기는.”
재경이 똑똑한 비키가 부러워서 입을 비죽거렸다. 옆에서 착한 유네가 다음번에 잘 보면 된다고 재경을 위로했다.
시험 결과 때문에 마음 상한 재경이 자기는 매번 꼴찌나 도맡아서 할 거라며 징징거렸다. 재경에게 공부를 가르쳤던 류제와 비키가 그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동시에 말하자마자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사이좋은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반에서 삼류 악당 렌 지미만큼이나 막 나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게’ 어빌리터 소녀였다.
수학여행 때 유네와 같은 조였고 별 이유 없이 유네를 싫어해서 주도적으로 괴롭혔었던 양아치 소녀는 네일이 잔뜩 붙어있는 손으로 한 개의 사진을 잡고 팔랑거렸다.
“그렇단 말이지.”
벽에 등을 기댄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진은 라우라 축제 때 유네의 여장 사진이었다.
사진을 주머니 안에 넣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친구들과 시험 끝나고 어디서 놀 것인가로 수다를 떠들어댔다.
* * *
마지막 필기시험인 세계사 시험도 끝났겠다, 이제 남은 과목은 재경이 그렇게 기다려 마지않던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 실기시험뿐이다.
오후 2시가 되자 점심을 먹고 충분히 몸을 달군 1학년 학생들이 실기시험을 위해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원래 사용하고 있던 기간트리카 경기장을 4등분 해서 만든 4개의 임시 경기장마다 1학년 1반부터 8반까지 각 두 반씩 반 대항전 시험이 치러진다. 3시부터는 2학년이, 4시부터는 3학년이 시험을 실시할 것이다.
“이번 기간트리카 모의 반 대항전은 예고했던 대로 짧은 시간 내에 상대 팀의 어빌리티를 인지해서 전략을 세우고 쓰러뜨리는 시험입니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어떤 승부도 이길 수 있다고 했죠? 제군들 모두 전략을 잘 짰을 것이라 믿습니다. 여름방학이 코앞인데 같은 학년 친구들의 어빌리티를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요. 긴장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움직이세요.”
“네!”
“각 반에서 총 6개의 조가 나와 반별로 6번의 대결을 할 겁니다. 심판은 저와 7반 담임 선생님입니다. 승리한 반이 추가 점수를 받고 점수는 팀 점수와 개인 점수가 있습니다. 지더라도 활약에 따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 파이팅하시고, 시합을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1조 앞으로!”
세라가 확성기를 들고 우렁차게 외쳤다.
7반과 8반이 대결하는 2사분면의 경기장, 각 반의 1조로 뽑힌 학생들이 자랑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각 반의 조 편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대결 전까지 비공개이며 경기 시작 전에서야 순서대로 조원이 공개되었다. 그렇기에 조 순서에 따라 전략적 심리전이 작용하고 약간의 운이 따랐다.
각 반의 1조가 앞으로 나가자 그때서야 경기장 문이 열렸다. 반대편에 서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8반의 1조 대장이 상대 팀원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흐음. 뭐, 적당히 예상대로인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있네.”
상대 팀의 어빌리티를 짐작하고 보조, 원거리, 근거리 공격, 버퍼 포지션을 확인하면 사전에 공략했던 대로 전투 포메이션을 정한다. 전략을 짜기까지 정해진 시간은 약 5분.
간보기용으로 1조로 뽑힌 재경과 나머지 평범한 어빌리티 척도를 가진 학생 3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7반 1조를 응시했다. 멀어서 잘 안 보였다.
7반도 반대편에서 그들을 탐색했다.
“뭐야, 8반 1조가 렌 지미잖아?”
“뭐어? 그 바보? 우릴 뭐로 보는 거야. 적어도 왕녀님이 나왔으면 좋았을걸. 에라이 퉤.”
“하하하, 장애물 달리기 생각났다. 렌 지미야 껌이지. 감히 장애물 달리기 1등을 빼앗다니. 그때의 복수를 해주마.”
“그 이야기 꺼내지 마. 생각만 해도 웃겨 죽을 것 같아. 기간트리카 타다가 배탈 나기 싫어.”
체육대회 때 류제가 출전했던 장애물 달리기 종목 중 마지막 ‘쪽지에 적힌 물건 가져오기’ 장애물에서 달리기가 빠른 렌을 들고 냅다 달리는 바람에 1등을 놓쳤던 7반은 렌 지미 때문에 어이없게 패한 것에 아주 조금 앙심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심리전으로 도발하려는 듯 손가락으로 재경을 가리키고 자신들의 얼굴을 까딱까딱 손짓했다. 인류 공통 보디랭귀지로 너 얼굴 못생겼다는 뜻이다.
그걸 본 재경이네 조원이 재경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저 보디랭귀지를 굳이 해석해 주었다.
“렌, 쟤네들이 너 못생겼대.”
“아앙? 뭐라고? 나는 못생긴 게 아니라 매력적으로 생긴 거야! 그렇게 전해줘.”
“우하하. 맞아, 렌 여장은 의외로 괜찮잖아? 으하하하.”
“왜 너도 웃냐? 같이 화내라? 엉?”
믿음이 가야 할 조원이 상대 팀 도발에 같이 화내주지 않고 함께 놀려대기나 한다. 시합 전에 팀원에게 성질을 낼 수도 없고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재경이 부루퉁한 입술만 실룩거렸다.
하여튼 여기서나 거기서나 날 안 걸고넘어지는 일이 없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흥!”
어쨌든 승부는 곧 시작이다. 감히 날 도발한 건 승부 때 되갚아 줄 테다.
작전을 짜며 상대 팀의 어빌리터를 확인한 1조의 대장이 7반 복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 끝에 지시를 내렸다.
“포메이션 C. 렌, 잘할 수 있지?”
“C? 으… C는 싫은데. 얘 뒤꽁무니만 쫓아다녀야 하잖아. 나도 활약하고 싶어.”
재경이 버퍼 포지션인 학생을 가리키며 불평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잔말 말고 따르라는 조원들의 날 선 눈매가 무섭다.
재경은 여기는 고집 센 애들만 모였다고 불평하며 바닥을 찼다. 나도 화려하게 눈에 띄고 싶단 말야. 그런 찌끄레기 같은 포지션 싫어.
“제자리 준비.”
경기장 바깥 가운데 라인에 선 선생님 두 분이 깃발을 들었다.
첫 스타트는 승부의 흐름을 가져올 수 있기에 어떤 대결이 펼쳐질지가 중요하다. 설사 지더라도 최선을 다했다면 분할지언정 불만 따윈 (결과에 따라 살짝 불평하겠지만)없다. 두 팀 모두 눈에서 승부욕이 타올랐다.
“승부 시작!”
선생님이 동시에 깃발을 내렸다. 학생들은 스타트 라인에서 출발해 자기 자리를 찾아 달리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포메이션 C, 재경의 팀처럼 ‘저격’ 원거리 공격 하나, 재경과 ‘암석화’ 근거리 공격 둘에 ‘광각화’ 버퍼 한 명이 있는 조가 공격 셋에 보조 하나를 가진 상대 팀과 대결할 경우의 포지션이었다.
“가자!”
지상 근거리 공격을 담당하는 재경이 버퍼를 호위하고 ‘저격’ 어빌리터인 원거리 공격 포지션이 곧바로 하늘로 올라가 상대 팀 보조를 처리한다.
‘암석화’를 할 수 있는 다른 8반 1조 대장이 탱커를 맡아 상대 팀 돌진기를 가지고 있는 공격 포지션을 포함한 세 명의 어빌리터를 동시에 상대하며 육탄전을 벌였다.
그게 재경이네 조가 세운 포메이션 C 전략이다.
물 흐르듯이 기류를 잡은 스타트는 꽤 좋았다. ‘암석화’ 어빌리티를 가진 재경이네 1조 대장이 성공적으로 세 명의 딜러를 붙잡았던 것이다.
“좋았어!”
“버프 들어갈게!”
재경이네 팀 버퍼가 팀 전원에게 동시 버프를 걸었다. ‘광각화’란 말 그대로 인간이 볼 수 없는 곳까지 시야가 넓어지는 버프다. 제한 시간은 약 5분. 쿨타임 5분이다. 그들은 버프가 주어지는 5분 내로 상대 팀 ‘돌진’ 어빌리터를 처리해야 승률이 있었다.
하지만 저쪽 팀에서도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듯 ‘암석화’ 어빌리터에게 붙잡히자마자 문제의 돌진기를 가진 어빌리터가 그녀를 방해했다.
강한 힘에 견디지 못한 ‘암석화’ 어빌리터가 잠시 기우뚱거리자 파편이 흩어지듯 ‘돌진’ 어빌리터를 붙잡는 대신 두 명의 어빌리터가 도망갔다.
그들은 각기 방향으로 쏘아지듯 8반의 다른 조원을 습격했다. 노리는 건 재경이네 조의 원거리 공격 포지션인 ‘저격’ 어빌리터, 지상 근거리 공격 포지션 렌, 재경이 지켜야 하는 ‘광각화’ 버퍼.
“젠장, 놓쳤다! 미안!”
“괜찮아. 범위 내야!”
원거리 공격을 맡은 재경이네 조 ‘저격’ 어빌리터가 거리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괜찮다며 빠르게 공중을 가르고 상대 팀을 ‘저격’해 나갔다.
미쳐 날뛰는 파리처럼 그녀들은 새파란 하늘 위를 질주하며 공격을 피하고 접근하고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꼬리처럼 비행기구름이 그녀 뒤를 따랐다.
“뭐야?!”
‘광각화’로 강화된 ‘저격’ 어빌리터의 시야의 바깥에서 갑자기 허를 찌른 공격이 들어왔다.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상대 팀 근접 공격 어빌리터의 뒤에서 날아온 원거리 공격이었다.
그녀의 ‘광각화’ 버프와 시야를 동기화하고 있던 프로텍터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공격이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
공격의 정체는 재경과 대치하는 다른 상대 팀 딜러의 멋진 제구. 그녀들이 걱정하던 7반 1조 예상외의 복병이었다.
시야가 좁아진 그 짧은 틈을 타 그녀와 대치하던 근거리 공격 어빌리터가 그녀를 라인 바깥으로 시원하게 걷어찼다.
“라인 아웃.”
“짜증 나게!”
지정된 경기장 선 바깥으로 나가는 바람에 탈락한 ‘저격’ 어빌리터가 땅으로 내려와 고함을 지르며 장갑을 해제했다.
잘할 수 있었는데 예상 가능했던 공격을 순간적으로 못 읽은 것이 열받는다. 그녀가 옆에 있던 기둥을 시원하게 발로 찼다. 누가 ‘무게’ 어빌리터의 친구 아니랄까 봐 은근 자존심이 강했다.
“렌! 포메이션 B로 전환!”
“알았어!”
믿을 만한 원거리 공격 어빌리터를 잃자 ‘암석화’ 어빌리터인 재경이네 조 대장이 포메이션 전환을 지시했다.
포메이션 B, 이건 버퍼가 다른 조원의 보호를 받지 않고 기간트리카를 이용해 스스로 싸우는 방식으로 전환하고 나머지 공격 어빌리터가 상대 팀에게 총공격을 가할 때 쓰는 굉장히 공격적인 포지션이다.
“고작해야 시야각만 넓혀주는 버퍼에 어빌리티 활용도 제대로 못 하는 너, 탱킹 능력만 뛰어난 근거리 공격수만 모인 오합지졸이 강할까, 우리 팀이 더 강할까?”
포지션이 전환되자 재경과 겨루던 상대 팀 어빌리터가 재경에게 비아냥거렸다. 재경이네 ‘저격’ 어빌리터를 탈락시키는 데 일조했던 7반의 복병이었다.
“끝나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이 멍충아.”
“모른다고? 우리가 이기니까 잘 새겨들어!”
어빌리티를 제외하면 싸움의 ‘테크닉’적으로는 우위에 있었던 재경이 절대 안 질 거라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가 수학도, 제2외국어도, 세계사도 포기하면서까지 분석하던 과목이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 시험이다. 이것만큼은 잘 볼 거다. 잘 봐야만 한다! 이것마저 낙제할 수는 없어! 류제한테 죽을 거야!
“웃기지 마. 난 이 과목에 사활을 걸었단 말이다!”
재경은 기간트리카 실기시험까지 망하면 여름방학은 없을 거라는 어마어마한 동기에 불타올랐다. 이것까지 지면 류제가 뭐라고 잔소리를 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신재경. 잘 생각해라. 이놈은 류제와 어빌리티가 비슷하다. 저 복병의 어빌리티는 자신의 육체의 컨트롤 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능력이다. 강화계 어빌리터 특유의 익숙한 몸놀림. 하지만 류제보다는 못한다.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네까짓 게 내 상대가 될 거라고 생각해?”
“흥! 해보지 않고는 모르지.”
다른 반이라 재경과 기간트리카 대결을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아직 그가 가진 가장 무서운 장점을 모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상승한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과 빙의하기 전 매일 개판 오 분 전처럼 싸웠던 그 끈덕짐, 한 놈만 팬다는 집념, 다년간의 패싸움으로 생긴 직감이 드디어 시너지를 내서 재경은 요즘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컨트롤이 좋아도 안 맞으면 그만이야.”
재경이 류제와 비키 등 학교에서 톱을 달리는 강한 친구들과 대결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병마와의 싸움도 기억했다.
‘이걸 맞으면 난 (류제한테 잔소리를 들어서) 죽는다.’라는 걸 인식한 필사적인 움직임. 버프 덕분에 넓어진 시야. 저 학생은 경험해 본 적 없는 더러운 싸움법. 분명 류제한테도 통했었다.
“잡았다.”
“윽!”
재경의 추잡스러운 농간에 순식간에 뒤를 잡힌 그녀가 어빌리터를 써서 재경에게서 벗어나려는 순간 재경이 그녀의 판정기를 때렸다. 마침 ‘광각화’ 버프가 끝났다.
“좋, 우와악!”
지정된 일정 범위를 류제보다 빠른 속력으로 ‘돌진’할 수 있는 상대 팀 어빌리터가 팀원을 구하기 위해 그대로 돌진해 재경을 날려버렸다.
이긴다는 생각에 방심했던 재경이 균형을 잃고 구슬에 맞은 진자처럼 그녀의 운동에너지를 대신 받아 경기장 바깥으로 날아가 버렸다.
“젠장, 렌!”
‘돌진’ 어빌리터와 힘겨루기를 하던 ‘암석화’ 어빌리터는 자신이 그녀를 놓치는 바람에 렌이 탈락했다고 생각해서 분했다.
딜러가 둘이나 빠지자 결과는 당연했다. 아무리 탱킹력이 좋은 ‘암석화’ 어빌리티라도 몰매에는 장사 없었다.
공격 능력이 없는 버퍼라도 싸울 수 있도록 세라에게 ‘기간트리카를 이용해서 싸우는 방법’을 배운 ‘광각화’ 어빌리터였지만 5분간의 쿨타임 동안은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약간의 시간만 벌었다손 뿐이지 결국엔 두 사람도 7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승리, 1학년 7반.”
“으아아아! 되는 일이 없어.”
승부가 나자 곧바로 시합이 종료되었다. 재경은 승리한 7반 1조의 기고만장한 표정이 눈꼴시어서 쀼루퉁한 표정으로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두 팀 모두 잘 싸웠습니다. 악수.”
“…흥!”
재경은 자신이 탈락시킨 학생을 노려보며 악수를 했다. 그녀도 기껏해야 렌 지미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불쾌해서 얼굴을 들썩거렸다. 둘 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악수를 끝낸 그들은 다시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대기실로 들어가자 다음에 나갈 2조 조원을 가리기 위해 문이 자동으로 내려갔다.
“움직임이 좋던걸. 저 애, 듣기로는 1대1에서는 까다로운 상대라고 하던데.”
“그러면 뭐 해. 한순간에 경기장 바깥으로 튕겨 나가서 데굴데굴 굴렀는데. 쪽팔려.”
시합을 마치고 돌아온 재경을 반겨준 류제가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하지만 재경은 움직임이 좋았거나 나빴거나 관계없이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지면 나 이번 기말 완전히 망한 거라고. 으으, 어쩌지? 보충이 4개라고? 믿을 수 없어……!
“그렇게 말해도 진 건 진 거야. 저 돌진기는 직선운동이기 때문에 집중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걸. 그런데 판정기를 때리는 데 정신이 팔려 주변을 못 살핀 게 바보지. 기껏 ‘광각화’ 버프도 받았으면서.”
“뭐야. 비키. 굳이 와서 내게 패배 원인을 짚어줘야 마음이 편하냐? 나도 알거든? 때마침 버프가 끝났단 말이야. 날더러 어쩌라고.”
“알면 고쳐, 바보야. 바보처럼 수읽기에서도 진 주제에 변명하긴. 다음부턴 주의해.”
재경의 기간트리카 스승을 자처하는 비키가 검지로 재경의 이마를 툭툭 찔렀다. 승리에 목숨을 건 비키가 핀잔을 할지언정 화는 안 내는 걸 보면 이 정도 패배는 예상 내였던 모양이다.
재경은 자존심이 상해서 따끔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입을 비죽거렸다. 이래놓고 네가 지면 두고 보자.
“2조, 앞으로.”
“렌 군, 수고했어. 나도 힘낼게. 응원해 줘!”
“잘해라. 필살기 꼭 성공하고.”
“응! 연습 열심히 했으니까 분명 성공할 거야.”
2조인 유네와 비키가 다음 대결을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시간이 되자 경기장 문이 열렸다. 상대 팀을 파악할 때까지의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뛰어난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으로 유명한 귀족 셀로니아 가문의 여식, 체육대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1위 팀이기도 했던 비키 셀로니아가 포함되어 있는 8반의 2조가 출격한다.
비키가 포함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2조는 8반 정예 팀이었다. 여기서도 지면 8반의 명예가 상당히 실추될지도 모른다.
책임감을 비장하게 업은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재경이 질투심을 내비쳤다. 나도 이기고 싶었다.
“두고 봐. 누가 뭐래도 다음엔 꼭 이길 거야.”
“성적이라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물론 이긴 반이 추가 점수를 받지만 지더라도 활약한다면 나쁘지 않은 점수를 준다고 그랬어. 네 컨트롤 능력도 전보다 괜찮았고.”
류제가 위로해 준답시고 마실 물을 건넸다.
확실히 재경의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은 빠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특히나 중간고사 때 보여줬던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 실력보다 지금이 훨씬 좋았다. 이제 반에서 친구들과 랜덤으로 붙어도 무난하게 이겨서 토너먼트로 중상위는 할 정도다.
아까 7반의 육체 컨트롤 능력을 강화하는 어빌리터와 붙었을 때도 한순간에 떨어져 나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해서 다른 학생들도 놀란 듯했다.
저 어빌리터는 민첩성이 뛰어난 데다 움직임도 효율적이고 융통성 있는 동시 공격이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들어오는 타입이라 다른 친구들 말로는 상대하기 깐깐하다고 했다. 그런 상대를 1대 1로 이긴 거면 충분히 잘했다.
“뭐… 렌이 ‘광각화’의 쿨타임이나 ‘돌진’ 어빌리터를 간과한 건 뼈아픈 실책이지만 짜증 나는 애를 처리한 건 예상외로 잘 해서 놀랐어.”
2조를 구경하는 재경의 옆으로 그의 조원들이 줄줄이 섰다. 재경은 괘씸한 소리를 한다고 조원들에게 투덜거렸다.
“왜 예상외냐. 그러면서 왜 나한테 그놈을 맡겼냐?”
“그야 시간 끌기는 할 줄 알았으니까. 네가 시간 끌면 내가 ‘돌진’ 어빌리터를 처리하고 곧바로 도와주러 가려고 했지.”
“도와줄 필요도 없이 조금만 더 집중했으면 역전 가능했는데.”
“됐어. 이미 승패 갈렸는데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저쪽은 렌한테 당했다고 이를 갈고 있을걸? 꼬시다.”
‘저격’ 어빌리터가 입가를 비죽거리며 자신이 라인 아웃 판정패를 당하는 데 일조한 7반의 다크호스를 향해 빈정거렸다.
다음번엔 우리 반이 이긴다. 그녀의 시선은 그녀의 친구인 ‘무게’ 어빌리터와 승리를 향한 탐욕이 일렁이는 믿음직스러운 반장 비키, 탐탁지 못한 유네 나르타를 향했다.
“어떤 상대가 나오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일망타진 작전으로 간다.”
“흥, 귀찮아.”
“뭐라고?”
비키가 ‘무게’ 어빌리터를 흘겼다. 사이에 낀 유네가 발을 동동 구르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그…그래도 기말시험이잖아. 잘해보자!”
학급의 모든 일에 비협조적이었던 ‘무게’ 어빌리터는 그러거나 말거나 손톱에 예쁘게 붙은 비즈를 만지작거렸다. 고작 세 명 가지고 뭘 어쩌겠다고. 자기가 강하다고 과신하는 거야 뭐야. 진심 싫어.
8반의 2조는 시합 전부터 삐걱거리는 이 세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8반은 학생이 23명이었기 때문에 4명씩 조를 짜면 3명이 한 조가 되는 경우가 반드시 생겼다. 이번엔 비키네 2조가 그 핸디캡을 도맡았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수학여행 서바이벌 게임에서 알았다시피 ‘무게’ 어빌리터인 그녀와 ‘바람’ 어빌리터인 유네는 상성이 좋았다.
거기에 비키 셀로니아의 ‘화염’까지 더하면 보조 한 명으로 효율적이게 공격을 할 수 있는 4명과 붙어도 공격력이 떨어지지 않는 좋은 팀이 탄생했다.
문제는 ‘무게’ 어빌리터인 그녀가 딱히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는 것과 옆에 있는 유네 나르타에 대한 기묘한 진실을 눈치챈 껄끄러움에 있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작은 체구로 남자 체육복을 입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유네 나르타를 보면서 괜히 거슬려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저런 류의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어찌 되었건 잘나신 귀족 영애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으니 대충이지만 하는 시늉은 할 거다. 그녀는 귀찮게 날파리처럼 주변을 알짱거리는 유네의 손을 쳐냈다.
아니꼬운 얼굴로 시선을 외면한 그녀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그녀는 이전부터 그래왔던 대로 미끼 노릇만 하면 되는 거다.
“제자리 준비. 승부 시작!”
구령이 떨어지자마자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 반의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두 사람의 몫을 해내야 하는 비키 셀로니아를 버리는 패인 유네 나르타와 같은 조에 넣다니. 게다가 3명이서 한 팀?
생각하지 못한 생소한 조합에 7반 학생들이 8반은 무슨 생각이냐며 서로에게 물었다. 게다가 승부가 시작되었는데도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는 ‘무게’ 어빌리터는 7반을 무시하는 듯 불성실하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기 너, 다쳐도 모른다!”
친절하게 경고하며 들이닥치는 공격에도 그녀는 못마땅한 듯 딴짓만 했다.
승부 시작 신호가 떨어진 후 자의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건 아웃이 아니다. 7반 근거리 공격 어빌리터가 날카로운 할퀴기 공격을 시도했다.
그녀의 손톱이 ‘무게’ 어빌리터에게 닿으려고 하는 순간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무게’ 어빌리터는 어느새 그녀의 등 뒤에 있었다.
“무게가 자유자재라는 건 뚱돼지인 너랑 속도가 다르다는 거야. 진심 멧돼지도 아니고 매번 걸려들어서 무턱대고 돌진한다니까.”
깃털처럼 가벼운 그녀는 닿기조차 가혹하다는 듯 매끄럽고 유연하게 공격을 회피했다.
그녀가 무게를 증가시켜 상대방의 텅 빈 등을 공격했다. 판정기에 표시가 뜨고 곧바로 한 명이 탈락, 순식간에 7반은 4명이라는 우위를 잃어버렸다.
“저 바보. 뭐 하는 거야?!”
친구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도 않은 상대를 공격하다 곧바로 탈락하자 다른 팀원이 대신 덤벼들었다.
하지만 ‘무게’ 어빌리터는 곧바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대방은 위로 상승하는 기류를 느끼고 서둘러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뒤졌다.
“기간트리카 장갑.”
유네의 바람으로 가볍게 위로 떠오른 그녀는 상대방이 고개를 위로 드는 틈에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그녀가 지금껏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았던 이유는 적을 방심시키려는 이유도 있지만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면 몸에 ‘무게’가 추가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게가 무거우면 유네의 ‘바람’에 풍선처럼 뜰 수 없다. 그녀가 유네의 ‘바람’에 의해 공중으로 뜨는 속도는 기간트리카 부스터보다 빨랐다.
그렇다면 1톤이 넘어가는 무게로 부스터와 함께 떨어지는 속력은 어떨까.
“뭐 하는 거야, 빨리 거기서 비켜!”
상대 팀원이 ‘무게’ 어빌리터가 있던 곳에서 간발의 차로 벗어났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채 무게를 늘려 돌진했던 그녀의 공격이 굉음과 함께 경기장을 찢어놓았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고 생각했으나 ‘무게’ 어빌리터를 상대하는 그녀에게 몰아치는 공격은 하나가 아니었다. 먼지 구덩이 사이로 비키의 화염구가 터지며 전신을 덮쳤다. 판정기가 반응해서 아웃 표시가 났다.
“둘 남았나.”
수적인 우위를 점했어도 진지함을 버리지 않은 비키가 7반의 인원을 살폈다.
고작 세 명으로 네 사람을 압도하다니. 남은 7반 2조의 두 팀원이 뭐 이런 애들이 다 있냐며 불편한 기색을 표했다. 재능과 능력의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크흡!”
비키는 발군의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애초부터 제압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다.
하지만 팀원이 별 능력 없는 떨거지들이라 비키 셀로니아가 그들을 단독 상대하는 거나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반전이…….
“아― 진심 귀찮아.”
땅에 내려온 ‘무게’ 어빌리터가 기간트리카 부스터를 켰다. 그녀가 아까 재경이 당했던 ‘돌격’ 어빌리터를 흉내 내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무게’ 어빌리터는 자신의 무게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기에 기간트리카의 부스터로 방향 전환을 빠르게 하는 드리프트가 가능했다.
그녀는 양 떼를 모는 것처럼 상대 팀 두 명을 경기장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은 ‘무게’ 어빌리터가 그들을 공격하면 바로 되받아쳐 탈락시킬 수 있도록 등을 맞대고 틈을 노렸다. 작전대로 유네 나르타를 공략한다. 이기기 위해서 약한 적부터 차근차근 공략하는 것도 좋은 병법이었다.
“할 수 있지?”
“당연하지”
결정된 승리란 없다. 그녀들은 ‘바람’으로 ‘무게’ 어빌리터를 보조하고 있는 유네를 흘겼다.
비키의 화염 공격을 방어하던 그녀들은 비키가 10번째 화염구를 만드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팀원이 유네를 기습했다.
유네의 판정기가 손에 닿으려 했을 때 그녀는 남아있는 팀원을 향하는 게 아닌 유네 쪽으로 날아오는 화염구에 이상함을 느꼈다.
뒤늦게 그 공격이 자신을 노린 것임을 알고 움직임을 멈추려 했지만 ‘무게’ 어빌리터가 뒤에서 돌진해 그녀를 밀치는 바람에 정면으로 다가오는 화염에게서 도망갈 수 없게 되었다.
“유네!”
실전에서 써보는 건 처음이지만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는 감이 왔다. 비키가 미리 만들어놨던 화염구와 유네의 돌풍이 만나 화염의 폭풍우를 만들어냈다.
“칫!”
뭔가 다른 공격이 들어올 거라는 걸 예상하던 한 팀원이 다른 팀원 뒤에 숨어 공격을 피해냈다.
그녀는 공격을 피하기 위해 돌풍 바깥으로 잠시 몸을 날리고 돌풍이 자신을 끌어들이는 힘을 이용해 유네에게로 돌진했다.
“그렇게는 안 둬― 윽, 유네!”
“비…비키 양!”
그 공격이 닿기 전, 유네를 지키려던 비키는 지레 겁먹은 유네가 화염 돌풍을 잘못 컨트롤하는 바람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화염계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지만 폭풍이 되어버린 매서운 불길은 비키에게도 벅찼다. 지금 유네를 지킬 수 있는 건 한 명뿐인데…….
“멍청하게 있지 마.”
유네를 향해 하는 말인지, 비키를 향해 하는 말인지 유네에게 몸통을 박친 ‘무게’ 어빌리터가 그녀를 피신시켰다.
유네를 향한 7반의 최후의 공격이 빗나갔다. 그 틈을 타 비키가 마지막 남은 한 조원을 탈락시켰다.
“아야야.”
‘무게’ 어빌리터는 자기가 밀치는 바람에 넘어져서 구른 유네를 보면서도 손을 내밀어 준다는 상냥한 행위는 안 하고 싶은지 시합 종료를 확인하고 앞서서 가버렸다.
“뭐야, 쟤!”
다른 친구들한테는 안 그러면서 유독 유네한테만 냉정한 모습이다. 보다 못한 비키가 유네를 일으켜 세운 후 그녀에게 뭐라 따지려고 들었지만 유네가 나서서 말렸다.
“비…비키 양 괜찮아! 날 지켜주려다가 그런 거잖아.”
“그래도 저 태도가 짜증 나잖아!”
결과는 상관없이 빨리 쉬고 싶다는 듯 경기장 중앙으로 향하는 ‘무게’ 어빌리터를 비키는 못마땅했다.
고민하던 비키는 결국 단념했다. 내가 여기서 유네 편을 들어버리면 반발심으로 더 유네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 비키는 아니꼬운 눈가를 실룩거렸다.
호루라기 소리에 풀 죽은 유네도 비키와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으…….”
뭔가를 암시한 유네의 눈동자가 동요했다. 제발 그녀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까 부딪혔을 때 ‘무게’ 어빌리터의 손이 유네의 가슴팍에 닿았기 때문이다. 암만 류제도 몰라보는 납작쿵 가슴이라지만 남자의 딱딱한 가슴과는 다른 느낌이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