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5) (15/112)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5)

초여름 밤의 축제가 막을 내렸다.

불꽃놀이도 끝나고, 기숙사 통금 시간도 가까워졌다. 그들은 축제의 마무리 인사가 끝나갈 무렵 자리를 떴다. 사복을 입은 인근 기간트리카 부대의 부대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을 주변을 순찰하고 있는 것을 몇 번 마주친 그들은 남 일 같지 않은 마음에 한사코 그들을 뒤돌아보았다.

“여어, 꼬마들. 라우라 축제 갔다 온 거지?”

자주 가는 상가를 지나 학교 정문에 다다르니 오늘도 열심히 학교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이 그들에게 알은척을 했다.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 류제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네,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오늘 몰래 이상한 거 가지고 들어온 거 아니지? 그 쇼핑백 수상한데~”

“아니거든요?! 사람을 뭐로 보는 건데요!”

장난스러운 도발에 재경이 하악질을 하며 반발했다. 그들은 바로 재경이 입학식 전날 기숙사로 들어오면서 만났던 경비병들이었다. 그들은 짓궂게도 그때 렌 지미가 19금 야릇한 잡지를 가져온 걸 들켜서 된통 혼난 걸 지금까지 우려먹어댔다.

그들이 놀릴 때마다 영문을 몰라 하는 비키와 유네에게 설명할 수가 없어서 재경은 경비병의 장난에 무안해서 죽을 것 같았다. 류제 저 바보 같으니! 같이 아니라고 부정해 주지 못할망정 따라서 웃기나 하고.

“소식 들었어? 마을에 마족이 돌아다녔었다며?”

“이야, 무서워, 무서워. 무슨 짓을 벌이려고 했던 걸까. 너희들도 된통 당하기 전에 빨리 학교로 들어가라. 인류를 지켜야 할 너희를 지키는 게 우리들의 사명이니까, 하하하. 귀찮게 굴면 안 돼.”

“저번에는 비번이라 무사히 넘겼는데 하필이면 오늘이야. 별일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물론 난 살아남겠지만!”

운 좋은 경비병이 호탕하게 웃었다. 저번 달에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는데도 침울하지 않은 건 그들이 어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일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수고하세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경비병이 별다른 검문 없이 그들을 들여보내 주며 손을 흔들었다.

재경은 혹시라도 경비병이 쇼핑백 안에 있는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세트를 뒤지고 놀릴까 걱정했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끌어안았던 쇼핑백을 얌전히 손에 들었다.

“비키 양, 잘 가! 오늘 재미있었어.”

“학교에서 내가 많이 먹기 대회 나갔다는 말 입도 뻥긋하지 마. 특히 너, 렌! 네가 제일 문제야.”

“너야말로 내가 여장 대회 나갔다는 거 말하기만 해봐!”

“렌 군… 여장 대회 나간 건 이미 소문 다 났을걸.”

“싫어. 그런 꿈도 희망도 없는 말 그만둬!”

“흥. 그럼 난 가서 다시 공부하겠어. 월요일 숙제나 잊지 말고 제출해. 이 늑장꾸러기야.”

“으으윽! 이대로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뭐.라.고?”

숙제를 잊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축제에 간 건데 그대로 잊어버리려고 했다는 몹쓸 소리에 류제가 재경의 귀를 붙잡고 주욱 잡아당겼다.

재경이 아프다고 발버둥을 치는 사이에 비키가 홀로 C동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녀의 입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 끝내놓은 거 아니었어?”

“아~ 내일 일요일이잖아. 내일 하려고 했지.”

“약속한 거다? 유네, 너도 숙제 보여 주지 말고.”

“에에,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유네, 네가 자꾸 그러니까 얘가 나태해지는 거잖아. 저번 중간고사 성적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마족을 만났을 땐 한껏 진지하더니 잔소리꾼 류제가 다시 돌아왔다. 재경이 알았다며 귀를 잡아당기는 류제를 붙잡고 버둥거렸다. 손바닥이 저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해 펄렁거리는 게 귀엽다.

류제는 그것 때문에라도 일부러 재경의 귀를 놓지 않고 괴롭혔다.

“렌 학생, 지금 돌아온 건가요?”

C동 앞에서 헤어진 비키를 뒤로하고 그들도 통금 시간에 맞춰서 A동 기숙사로 들어오는데 사감실 앞에서 기다리던 세라가 눈 밑 점을 살갑게 구기며 학생들을 반겼다.

휴일인데도 섹시한 키아나트리체식 정장 차림에 정돈된 머리가 단정하니 아름답다.

세라가 싱긋 웃자 류제가 슬슬 눈치를 보며 재경의 귀를 놓았다. 재경이 세라에게 달려가 일러바쳤다.

“쌤~ 류제가 괴롭혀요.”

“네가 자꾸 숙제를 안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난 안 한다고는 안 했어!”

“호호호.”

세라가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고 노는 학생들을 보며 귀엽다며 웃음 지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그 웃음에서 숨어있는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 특히나 재경을 보고 있는 시선이 그랬다.

“렌 학생, 잠시 시간 괜찮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주인공과 히로인들에 대한 건 알아도 렌 지미에 대한 이야기는 모르는 재경은 마을 축제 챕터는 불꽃놀이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렌 지미한테 또 다른 일이 있었나?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 맞다. 선생님, 렌이 다쳐서 멍이 들었는데 치료해 주실 수 있나요?”

“네에? 또 어디를 다쳤을까요. 심한 건 아니겠죠?”

“목에 멍이 들어서요. 소식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아까 마족이랑 마주친 게 저희들이라…….”

“아아, 제립학교 학생들이 얽혔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당신들이었군요. 다친 건 고사하고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요즘 들어 조용하던 마족이 왜 이리 극성일까요. 위급사항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세라가 멀쩡해 보이는 그들을 살피며 씁쓸하게 웃었다. 평소라면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잔소리를 했을 텐데 오늘따라 그녀는 침착했다. 도리어 재경을 향한 눈빛에 연민이 깃들기까지 했다.

“인근 기간트리카 부대와 마을 치안대들이 일대를 순찰하고 있으니 이상이 생긴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학교 경계도 올렸으니 저번처럼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류제 학생과 유네 학생은 먼저 올라가도록 하세요. 렌 학생, 렌 학생은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먼저 가있어라, 짜샤. 후딱 치료하고 방에 놀러 갈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유네와 류제는 세라가 올려보내자 어깨를 으쓱이고는 계단을 올랐다.

류제는 세라와 함께 사감실로 들어가는 렌의 뒷모습에 왠지 모를 가련함을 느끼고 다시금 다짐했다.

* * *

세라와 이야기를 끝내고 곧 돌아올 줄 알았던 렌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방으로 놀러 온다고 했는데 소등 방송이 들릴 때까지 감감무소식이다.

오늘은 그냥 자려는 모양인가 싶기도 하고, 괜히 숙제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류제가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이 벽 너머에 있을 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다음 날 일요일 아침, 늦은 아침밥을 먹기 위해 렌의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아직까지 자고 있나 류제가 문을 열어보았는데 렌이 가지고 있던 여장 대회 준우승 상품만 쇼핑백에서 쏟아져 나와 넘어져 있을 뿐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렌?”

혹시나 하고 불러보지만 텅 빈 방에서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다.

어디 갔나. 설마 숙제하기 싫어서 도망간 건 아니겠고. 류제는 이따금 말도 없이 사라지는 렌을 자주 봤던지라 그러려니 넘기며 유네와 둘이서만 아침을 먹으러 떠났다.

곧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월요일 아침까지 렌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스러운 와중 류제가 A동 기숙사 아침 운동에서 만난 세라에게 렌이 없어졌다며 물었다. 세라는 사정은 곧 알게 될 거라고 답을 회피했다.

“어어, 뭐야. 렌은?”

등교를 하니 축제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다가와 자리에 없는 렌을 찾았다. 손에는 렌의 여장 사진이 잔뜩 들려 있는 채였다. 렌이 염려했던 대로 그들은 렌을 놀릴 생각이 가득인 것 같았다.

“렌 군, 어제부터 안 보이던데.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에이, 뭐야. 도망간 건가? 반응을 좀 보려고 했더니. 그럼 마음대로 뿌려 버려야지~”

그녀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걸 좀 보라며 다른 친구들에게 사진을 돌렸다. 결국 렌의 여장 사진은 다른 히로인들을 포함해 8반의 거의 모든 학생이 돌려 보았다.

만약 렌이 있었더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전경이었지만 사진의 주인공이 없는 걸 어쩌나. 류제도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사진 몇 장을 몰래 살폈다.

“우하하! 이게 뭐야. 하하하! 이거 저번 주 라우라 축제 때야? 렌이 여장… 흐흐흐, 여장……! 나도 보러 갈걸!”

“렌 어디 있어? 부끄러워서 숨은 거야? 푸하하.”

“너희들이 직접 봤어야 했어. 거기에다가 무반주로 노래 부르는데 꽤 잘 불러서 더 웃겨.”

그녀들은 그 성격 더럽고 순진하기만 한 바보가 여장을 한 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돌려 보며 아침 조회 시간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니냐롯트도 아닌 척 몰래 사진을 구경했다. 양 갈래 머리에 귀여운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녀는 렌과 이 사진과 비교하고 싶어서 남몰래 미어캣처럼 고개를 돌렸다.

“렌 아직도 학교 안 왔어?”

돌고 돌아 자기 손에 들어온 사진을 든 비키가 창가 자리로 와서 물었다. 늘 류제, 렌, 유네 순서대로 앉아있는 자리의 한가운데가 텅 비었다.

“어제부터 안 보여. 설마 그 여장 사진 때문에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에이… 류제 군도 참. 렌 군이 그 정도로 창피해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근데 저런 반응 보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네.”

류제가 배꼽을 잡고 요란하게 웃고 있는 반 친구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정도로 파격적인 반응일 줄 몰랐다.

그나저나 곧 종이 치는데 오늘 이 교실의 주인공은 좀처럼 등장할 생각을 않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나? 세라 선생님은 뭔가 알고 계시는 것 같던데.

결국 렌은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고 1교시 시작 전 아침 조회 시간이 되었다. 세라가 시간에 맞춰 교실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발랄하게 웃고 떠드는 학생들이 귀여웠지만 그녀가 으레 교탁을 치며 그녀들을 진정시켰다.

“오늘도 활기차십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요?”

“선생님, 이거 보셨어요? 렌이 이번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대요. 푸하하!”

“게다가 무반주 노래까지 불렀대요.”

“세라 선생님, 렌이 아직도 학교에 안 온 이유는 분명 이것 때문일걸요?”

그녀들이 가장 반응이 좋은 사진 몇 개를 골라서 세라에게 보여 주었다. 세라는 렌의 부끄러워하는 여장 사진을 보고 푸흐, 하고 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축제 때 뭘 하고 놀았을까 궁금했더니 이런 앙큼한 짓을 했을 줄이야.

“귀여워라. 저도 한번 꼭 실물로 보고 싶네요.”

“선생님, 렌 오늘 안 오면 강제로 시켜버리는 건 어때요?”

“맞아, 렌 주제에 감히 지각이라니!”

여장 사진 덕분에 인기인이 되어버린 렌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재미있는 반응을 보일까. 세라가 오지 않은 렌의 빈자리를 살피며 씁쓸하게 웃었다.

“…렌 학생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오늘부터 일주일간 학교를 오지 않을 예정이니 그건 불가능하겠네요. 모두들 양해 부탁할게요.”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니. 그들이 우스갯소리로 렌이 여장 사진이 잠잠해질 동안 수업 째고 도망간 거 아니냐고 농담해도 세라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 축제 때 있었던 마족의 움직임을 경고하며 당분간 아가타 전역의 경계가 강해질 거라는 공지를 내렸다.

개인적인 사정이라. 류제는 언젠가 세라가 지나치듯 말했던 렌의 어떤 사정이 가장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렌에 관해서는 학교생활 말고 아는 바가 없으니 그 사정이 무엇일까 류제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럼… 부모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거나?”

“에이, 그건 아닐걸?”

렌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지 이제 사흘째가 되었다. 재경과 줄곧 어울리곤 했던 같은 반 친구들은 놀릴 맛이 나는 렌이 없으니 여간 입과 손이 근질거리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새를 못 참은 학생들은 감히 일주일이나 학교를 빠진 렌을 탓하며 교실 뒤 자유 게시판에 여장 사진을 잔뜩 붙여 놓았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유네와 류제에게 렌이 언제 돌아오나 물어보며 추측하는 게 그들의 점심시간 일과였다.

“왜 아니야. 세라 선생님이 일주일이나 빠지게 해줬으면 그럴 수도 있지.”

“그야…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렌은 부모님 안 계시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자신조차 몰랐던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자 류제가 놀라 되물었다. 렌의 ‘개인적인 사정’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어봐도 늘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일갈하잖아. 가장 친한 나한테도 그런 이야기 안 했다고.

“잠깐 지나가듯 이야기했었어. 수학여행 요리대회 때였나? 내가 요리 잘하니까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고 물었는데 나한테 부모님이 계셨으면 요리를 잘했겠냐고 투덜거렸거든. 근데 이렇게 놓고 보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네.”

“그래? 그때 렌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나?”

“몰라, 기억 안 나. 배고파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렌이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했다고? 진짜?”

류제는 늘 곁에 붙어있었던 자신보다 그녀들이 더 렌을 잘 아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렌이 부모님이 안 계셨다고? 그걸 흘러가듯 말했다고? 나한테는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나도 꼬치꼬치 캐물은 게 아니라서 잘 몰라. 근데 그게 뭐. 여기 부모님 안 계시는 애들 몇 있잖아. 그게 이상한 일인가?”

“요지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일주일이나 쉬어야 하는 개인적인 사정이 뭐냐는 거지.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게 아니라 아프셔서 병문안을 간 게 제일 유력한데.”

“하지만 렌 저번 연휴에도 집에 안 갔었잖아.”

“맞네. 흐음… 뭘까. 이런 찝찝한 기분으로는 렌을 실컷 놀릴 수가 없잖아. 류제, 너는 뭐 들은 거 없어?”

“글쎄… 전혀 없는데.”

“류제가 모를 정도라면 정말 오리무중이네. 뭐 일주일 후에는 돌아온다잖아. 그때 물어보면 되겠지. 렌 주제에 우울해하고 있으면 절대 용서 못 해. 실컷 놀려주고 말 테다.”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류제는 날이 갈수록 렌에게 관심이 멀어지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하루가 갈수록 커져 가는 렌의 빈자리를 느꼈다.

렌이 보고 싶다. 입학식 전날 처음 만나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 렌이 옆에 있는 게 어느새 당연했다. 그런데 학교 가는 내내 렌이 보이지 않으니 이대로 렌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류제의 근심을 덮쳤다.

혹시라도 렌 본인에게 무슨 일 생긴 게 아닐까. 아님 어빌리티 부적격자로 학교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거나,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경고를 받았거나. 아니면 사정으로 인해 학교를 나오게 생겼다거나.

류제의 속에는 점점 쓸데없는 근심거리만 늘어갔다.

* * *

금요일 점심시간. 라우라 축제를 배회하던 마족이 물러났다고 판단해 학교의 보안이 한 단계 내려갔을 때.

렌이 학교를 나오지 않는 내내 전전긍긍해하는 류제를 불러 세운 것은 세라였다.

“류제 학생,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당연히…….”

씁쓸하게 웃는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라도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던 마왕과 관련된 일일까 류제가 넙죽 그녀의 부탁을 승낙했다.

류제와 같이 밥을 먹으려고 했던 유네는 분위기를 읽고 다른 친구들과 먼저 점심을 먹겠다며 눈치껏 교실 밖으로 나갔다.

모든 학생이 점심을 먹으러 간 빈 교실. 초여름의 긴 해가 창밖에서 게으르게 늘어졌다. 류제는 친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세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제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다고 결과가 나왔습니까?”

“네? 호호, 아닙니다. 저번 주 검사 결과는 정상이에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른 게 아닙니다.”

그래, 만일 그랬더라면 세라 선생님이 이런 장소를 택하지 않았겠지. 류제는 그럼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걸까 갸우뚱하다가 언뜻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이 정답이라는 양 세라가 첫말을 늘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렌 학생 말입니다만……. 저번 주 일요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세라는 그때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연락을 받았을 때는 렌이 기숙사에 돌아오기 십여 분 전이었다.

어빌리터가 어빌리티를 발현하게 되면 어빌리터와 관련된 모든 일가친척을 나라에서 직접 관리한다.

현재 등록되어 있는 렌 지미의 유일한 보호자가 사망했다는 일방적인 나라의 통보가 잔인해서 세라의 머리가 텅 빌 정도였다.

세라는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이 안타까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짧은 시간 동안 깊게 고민했다. 렌은 할머니를 보러 가라는 그녀의 조언을 좀처럼 따르지 않았지만 왜 그 전까지 찾아가지 않았냐며 그를 탓하기엔 너무나 작고 어린 아이다.

그녀는 라우라 축제에서 놀다 기숙사로 돌아와 같은 반 친구들과 장난치며 노는 렌을 불렀다.

친구들을 보내고 목에 있던 상처를 치유하는데 누군가가 그의 목숨줄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 같은 멍이 구슬펐다.

“렌 학생, 굉장히 슬픈 소식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렌에게 그의 할머니가 좀 전에 숨을 거두었다는 비정한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보다 그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나쁜 소식이 들려올 줄 몰랐다는 듯 샐쭉한 고양이 같은 눈을 크게 키웠지만 그는 곧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째깍째깍 흐르는 초침이 수백 번 들려왔을 무렵 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라고 내뱉어진 답은 너무나 많은 단어들이 응축되어 있어서 세라는 이 아이가 과연 죽음에 대하여 얼마큼이나 많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밖에 없었다.

통보에 대해 되묻지도, 부정하지도 않고 납득한다. 죽은 자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그 나이에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임시 보호자이자 호위로서 그녀는 렌을 데리고 그의 할머니가 임종한 병원으로 향했다. 연고 없던 시체는 렌 지미로 인해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었다.

하얀 천이 덮인 죽은 이의 얼굴을 렌은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렌 말고 그녀를 찾은 이는 없었다. 그의 부모는 오래전 사망했다고 한다. 기록된 가족도 없다. 오로지 할머니만이 그와 연결된 유일한 가족이다. 가족이었다.

떠들썩하게 사람들이 지나가며 불 꺼진 육신을 나르고, 관계자가 그의 신원을 책임질 기관을 학교로 옮기는 절차를 받았다.

침대가 치워지고 장례가 치러지고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런 것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흔한 눈물 한 방울, 작은 감정 조각 하나 내비치지 않은 채로.

안타깝지만 많은 것에 얽매여있던 세라는 그런 그를 두고 학교로 돌아가야만 했다.

“렌 학생, 선생님은 이제 가봐야 합니다. 제가 일주일간 결석 처리를 해드릴 테니 그동안 정리를 끝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시간이 나면 저도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지금부터 홀로 남겨져도 괜찮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익숙해 보이기까지 했다.

세라는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의연함이 어색했다. 원체 감정이 풍부한 아이라서 그런 건가. 슬픈 기색마저도 할머니의 육신을 따라 불에 타서 사라진 것처럼 흐릿했다.

맡은 일이 많은 세라는 렌을 홀로 두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책임지고 있는 모든 일에 손을 놓는 것은 세라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으면 근처 치안대원에게 부탁해서 학교에 연락하라며 렌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렌의 손은 그녀가 떠날 때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

처음 와보는 아가타 서쪽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 지하철에서 내린 류제는 손에 들린 주소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에서 보통 사람 걸음으로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어야 있는 장소를 향해 걸어가면 두런두런 한 가족이 알맞게 살 만한 평범한 2층짜리 작은 집이 있었다.

도저히 시간을 내지 못한 세라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렌을 도와주러 온 류제는 이 장소가 맞나 몇 번이고 종이에 적힌 주소와 팻말을 확인했다.

“렌 학생이 기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아마 많이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부러 조퇴까지 시켜주면서 부탁받은 일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류제는 이곳에 발을 들이민다면 알아서는 안 되는 렌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칠 것 같아 머뭇거려지면서도 기대가 되었다. 몹쓸 정신머리다.

2층짜리 낡은 집은 군데군데 낡고 바람 잘 나게 삐걱거렸지만 그곳에 살았던 상냥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기분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류제는 문득 마당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멜로디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부르는 허밍은 분명 렌이 여장 대회에서 불렀던 노래와 비슷했다.

류제는 음이 이끄는 대로 낡은 쪽문을 밀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금기의 땅이라 여겼지만 막상 발을 디디니 평범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다. 텃밭 하나는 겨우 가꿀 작은 마당이 2층짜리 집을 둘러싸고 잔디만 무성하다.

그가 그렇게 기다리던 렌은 그곳에 있었다. 세 개의 무덤. 그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무덤 앞에 앉아있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봤던 렌의 등 중 가장 초라하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류제는 그 어깨를 한번 두드리면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날아가 버릴까 울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가만히 서있었다.

류제가 온 줄도 모르는 렌은 무덤 앞에서 의미 없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이 바람에 옅게 흔들거렸다.

“렌.”

류제가 주저하며 그를 불렀다. 그들 사이에 투명한 막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렌은 노래를 멈췄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한 듯한 얼굴에는 슬픔도, 기쁨도, 노여움도, 즐거움도 없었다.

“우리 할머니가 좋아하던 노래야.”

렌이 나긋하게 말했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지 새파랗게 마른 입술과 지독히도 내려앉은 눈 그늘이 초췌했다.

“보통 이런 날엔 비가 오는데.”

렌의 말에 류제가 하늘을 살폈다. 빌어먹게도 청명한 하늘과 따스한 뭉게구름이 렌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늘하늘, 늦게 핀 봄꽃이 잡초 사이에서 흔들렸다.

“울 엄마 아빠가 보고 싶으면 할머니는 맨날 이 노래를 들었어.”

그립지 않다고 말해도, 보고 싶은 마음도 없다고 말해도, 사랑한 것도 잊혀 간다고 말해도 할머니는 이 노래를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돌아오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기억만이 남아 오래전 떠난 이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떠올린다.

“여기서도 나는 혼자야. 원래 그랬지만.”

부모님도, 할머니도 없이. 세상 속에 툭 던져진 기분은 익숙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그랬다.

평범한 어느 날. 겨울방학 알바 구한다고 밖을 싸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곧 이사 가는 옆집 아저씨가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전해 줬다.

뺑소니가 어쩌고저쩌고 말해도 재경은 그런 건 하나도 모르겠고 할머니가 무사한지만 알고 싶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찰 때까지 허겁지겁 병원에 달려갔을 때는 이미 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였다.

늙고 마른 팔다리에 서슬 퍼런 멍 자국이 쇠스랑이 되어 재경의 마음을 긁었다. 망가진 마음은 수렁 속에 풍덩.

아침에 활기차게 나눈 작별 인사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이렇게 헤어질 거라고 말 안 했으면서.

안 간다는 고등학교 교복 산다고 매일 고생한 할머니. 재경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잔혹한 세상 속에 홀로 내팽개쳐졌다.

재경에게는 할머니밖에 없었는데 할머니가 죽으니 지금껏 일면식도 없던 일가친척들이 함부로 다가와 그를 동정했다.

조촐하게 마련된 장례식장에선 누가 얼마를 가져가네, 저놈의 신변을 누가 맡네 난장판이 벌어졌다.

할머니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것도 토할 것같이 무서운데 사람들은 재경을 떠맡기 싫으면서 할머니의 흔적을 나누겠다 발버둥이었다.

따로 마련된 유서는 없다. 할머니와 둘뿐이었던 집은 고모의 소유가 되었다. 고모는 낡고 오래된 집을 재개발 건설사에 넘긴다고 했다.

집을 잃은 재경은 어디로 가야 하나. 이름도 모르는 먼 친척에게로 간댄다. 재경은 싫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죽기 전까지 할머니는 친구 많이 사귀라고 매번 잔소리를 했다. 내가 혼자 남을 걸 걱정한 걸까. 잔소리에 못 이겨 할머니랑 고등학교 가기로 약속했는데.

약속, 했었는데. 놀림 안 당하게 비싼 교복 사준다고 했으면서.

부모님의 보살핌은 받아보지 못했지만 그에 모자라지 않게끔 자신을 사랑해 준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그 어디에도 없다.

꼴사나운 눈물도 필요 없다. 이 무덤은 할머니의 무덤이 아니야. 렌 지미의 할머니지. 무덤을 보고도 아무런 감정 없지만 다만 할머니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잠 못 이루었을 뿐이다.

“왜 온 거야?”

할 말을 잃은 재경이 뒤늦게 류제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물었다.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지만 여기까지 와줬는데 친구로서 물어는 봐야 할 것 같았다.

“세라 선생님이… 도와주라고 해서 왔어. 걱정되기도 하고.”

도움이라. 재경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렌 지미의 할머니의 무덤을 응시했다. 일주일 동안 고생을 한 건지 벗을 겨를이 없던 류제의 저지에 흙이 묻어있었다.

재경은 후회하고 있었다. 저번 달에 선생님이 병문안을 가라고 했을 때 갔으면 살아생전에 혈육의 얼굴은 한 번 보지 않았을까?

나 때문에 이야기가 흐트러지는 것보단 할머니 얼굴을 보는 게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류제와 싸우지도 않았을 거고,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사라지지 않았겠지. 나도 이렇게 마음 찝찝하지 않았을 거고 렌 지미의 할머니도 행복했을 거야.

다 가정일 뿐이지만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은 멈출 수 없었다.

“한심해.”

그 수상한 할머니가 말한 게 맞았어. 내가 멋대로 개입하니까 이렇게 되는 거다. 난 모든 걸 망치기만 해. 그런데도 잘난 듯이 스토리를 바꾸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나한테는 할머니밖에 없었는데. 끝까지 얼굴 보지도 못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렌 지미처럼 굴고 싶지는 않다. 나도 친구를 가지고 싶어. 할머니가 친구 많이 만들라고 했어. 할머니가 없으면 난 혼자란 말이야.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혼자는 이제 싫어.

“부모님은?”

류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세라에게 렌의 부모님은 어릴 적 돌아가셨다고 들었지만 류제는 렌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 마음 약해진 틈을 탄 것이 교활하다 생각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영영 렌의 마음속에 봉인된 채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류제는 성큼 들어서면 안 되는 영역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재경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얼굴도 기억 안 나. 근데 할머니는 영웅이었다고 그랬어. 뉴스에도 나왔대. 웃기지도 않아.”

영웅? 류제는 그런 것치곤 초라한 다른 두 개의 무덤을 흘겼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다 죽었다나. 바보 아냐?”

부모님이라. 살아생전에 본 기억은 없다. 이건 할머니가 언젠가 말해 준 이야기였다. 재경은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하고 나서 육아에 허덕였던 부모님이 젖을 막 뗀 재경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둘이서만 여행을 갔다.

오랜만에 여행을 즐기고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어두컴컴한 도로 위 사고가 나 정차한 차를 보았다. 마음 여렸던 그들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사람을 구해 주었다.

그러다 세워둔 위험 표지판을 못 본 음주 운전 차량이 그대로 돌진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대신 그들이 구해 준 사람은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뭐가 영웅이야. 왜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하는 바람에 나랑 할머니가 고통받아야 하는데? 절대 이해 못 해. 나보다 그 사람들이 더 중요했던 거야? 그냥 내버려 두고 갔으면 평범하게 살았을 거 아냐.”

그래서 남겨진 내가 얻은 교훈은 뭐야. 우리 엄마 아빠가 얻은 게 뭐냐고. 도움받은 사람이 울 할머니한테 인사나 온 줄 알아? 울 부모님을 죽인 그 운전자가 벌이나 제대로 받은 줄 아냐고.

아무것도 없어. 할머니와 나만 죽어라 힘들었지.

“용서 못 해.”

그렇게 허무하게 가는 게 어디 있어. 나는 아무래도 좋았던 거야? 있지, 할머니도 이런 심정이었어? 그래서 노래를 들었던 거야? 나는 그런 거 절대 못 버텨. 용서 안 해.

“렌…….”

“할머니도 좋지만 그래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때 좀 이기적이게 굴어서 못 본 척하고 넘어갔으면 어땠을까.”

그럼 나도 평범한 애들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었을까. 혼자가 되는 기분을 모르지 않았을까. 뒤늦게 원망해도 변하는 건 없으니 허망할 뿐이다. 부모님과의 추억은 하나 없고 미화된 기억만이 전승된다. 재경은 그것이 원망스러웠다.

류제는 어떤 말로 위로를 꺼내야 할지 머뭇거려졌다. 비밀을 들춘 벌이겠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전부 가식이 되어버릴 것같이 무섭다.

렌은 저렇게 침착한데 내 마음이 더 술렁거리는 건 내가 렌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언젠가 렌이 비키에게 못된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한창 비키와 친해지고 싶어 앞을 알짱거렸지만 거절당해 자존심이 상한 렌이 비키를 탓하며 내 앞에서 못된 말을 했었다.

“뭐, 비키한테 갈 거면 너도 조심해라. 매번 가문의 복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말이 안 통해. 역시 부모 없이 자라면 성격이 삐뚤어진다니까. 겁나 열받아.”

이 말 때문에 나도 상처받았고, 비키도 렌이 한 말을 들었더라면 지금처럼 쉽게 렌과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을 거다.

그때는 렌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저 말은 렌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렌은 비키에게 공감했던 거다. 사람의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기억. 그러지 말았으면 했던 걸까.

하지만 지금 렌은 달랐다. 욱하는 기질이 남아있고 여전히 사고가 비뚤어지긴 했어도 다른 사람의 말에 납득하고, 스스로 변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그때 체육 창고에서 내게 고백했던 거다.

류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저 뒷모습에 스친 마른 눈가를 기억했다.

렌은 내게 남에게 걱정 끼치는 게 싫다고 했다. 우는 것조차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거다. 그래서 늘 숨어서 눈물을 훔친다. 지금처럼.

“이제 됐어. 학교로 돌아갈래.”

위로하고 싶어 손을 뻗으려는 류제를 무시한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먼지를 털었다. 무덤에 구름 그림자가 졌다.

생판 모르는 남의 무덤 앞에서 무슨 추태야. 괜히 옛날 생각만 나서.

“도와주러 왔댔지? 그럼 와서 이것 좀 날라줘.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터덜터덜 재경이 무뚝뚝한 어투로 류제를 지나쳐 2층집 현관을 열었다. 이래가지고 방범은 제대로 되려나 모를 정도로 낡은 나무 문이 열렸다.

먼지를 내리는 어두운 내부. 신발장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렌과 할머니가 둘이서만 찍었던 사진. 할머니는 장난스러운 렌과는 다르게 검은 머리에 새치가 내려앉은 점잖은 노인이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그곳에는 렌이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상자가 있었다. 할머니가 쓰던 물건들일 것이다.

“밖에다가 내놓으면 알아서 가져간대. 무거워서 나중에 하려고 했거든. 들어줘.”

“알았어.”

류제가 커다란 상자 두 개를 가뿐하게 들었다. 재경이 그걸 보고 류제는 이럴 때 써먹어야 한다며 비식거렸다. 전혀 웃기지 않았다.

류제는 계단을 내려가며 얼핏 렌의 방으로 보이는 곳을 흘겼다. 문 안쪽에는 이불도 하나 없는 침대가 차갑게 비어있었다.

렌은 자기는 한 걸까. 외롭지 않았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추측할 새도 없이 잠깐의 방문이 끝난 그는 집 밖으로 나왔다.

류제가 상자를 내려놓자 재경이 선을 닫았다. 다시는 들어가지 않을 듯이 단단히 자물쇠로 문을 잠갔다. 그 열쇠는 저지에 딸린 호주머니에 들어갔다.

“네가 챙겨갈 짐은 없어?”

“응.”

간단하게 답한 렌이 앞장서 걸어 나갔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덮칠 것처럼 필사적이다.

밀치면 그대로 쓰러질 것같이 위태롭다 생각하는 건 류제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잠깐 방문했던 류제가 도리어 저 작은 집을 돌아보며 떠나는 아쉬움을 표했다.

야옹.

무너져 내려가는 돌담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울었다.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호랑이 무늬에 황토색 지저분한 털을 가진 고양이. 렌과 닮은 꾸물꾸물 고양이 캐릭터와 비슷하게 생겼다.

“뭐 해, 가자.”

“아, 응.”

렌은 홀로 집을 지키게 될 도둑고양이에게 관심 주지 않았다. 렌을 닮은 고양이에게 한눈을 팔았던 류제가 뜀박질을 해서 렌의 곁에 섰다. 류제는 렌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기엔 이 동네는 멀고 후미졌다. 한참을 걸었을까. 앞에서 낡은 마차 한 대가 좁은 길 한가운데에 서서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이놈의 동네는 무슨 놈의 고양이들 천지인지.”

“무슨 일이신데요?”

앞에서 뻐끔뻐끔 담배를 태우던 마차 주인이 좁은 길을 지나가던 류제의 물음에 담배로 앞에 있는 무언가를 가리켰다.

아까 봤던 도둑고양이와 같은 키아나트리체 쇼트 헤어다. 마차에 치여 죽은 듯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납작 붙어있었다.

“일진 안 좋게, 원. 이런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기분만 잡쳤잖아.”

귀찮다는 듯 다 피운 담배를 던진 마부가 마차에 올라탔다. 고양이 사체를 모른 척하듯 그대로 말을 몰아 사라졌다.

죽은 고양이는 울음이 없다. 이대로 길바닥에서 말라붙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류제는 잔인하지 못했다. 류제가 고개를 들어 뭐라 말하기 전 렌도 죽은 고양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묻어주자.”

먼저 제안을 한 것은 렌이었다. 렌이 먼저 죽은 고양이를 들고 옆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사람 한 명 돌아다니지 않는 마을은 흉흉하니 아이들이 뛰노는 공터조차 잡초만 무성했다.

땅을 파던 렌이 물었다.

“있지, 류제.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천국에 가지 않을까?”

류제의 말에 재경은 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묻어준 그들은 근처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하철을 타고 환승할 역으로 향한다.

약 한 시간 반. 시간을 기다리면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렌도 그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라 붐비는 지하철에 자리가 없다.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에 환승을 한 두 사람은 간신히 열차에 올라탔다.

“윽… 미안.”

뒷사람이 밀치자 어쩔 수 없이 렌에게 붙어버린 류제가 사과했지만 렌은 괜찮다는 말조차 털어놓지 않았다.

류제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는 렌은 흔들리는 열차가 싫은가 류제와 가깝게 붙어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한가 류제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니, 둘 다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환경 속 세상에 짓눌릴 것처럼 서있지만 그의 앞에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안도가 되었나, 죽은 할머니가 보고 싶은가, 아니면 마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가 불쌍해서일까.

렌의 흐느낌을 느낀 류제가 손잡이를 잡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억눌려진 울음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퀴 소리가 시끄러운 지하철 안, 구석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있는 렌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건 그와 살을 맞댄 류제밖에 없다.

왜 지금까지 울지 않았나 의문을 표할 것도 없이 렌은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류제의 교복은 재경의 눈물로 얼룩이 졌지만 렌이 내게 기댈 수만 있다면 그깟 거 어떠냐 싶었다.

류제가 살며시 손을 들어 렌의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더욱 깊게 기대도록 했다. 그 손길에 재경은 마음이 놓여 속에 남은 모든 눈물을 털어내듯 울었다.

“정말 평생 지켜줄 거지?”

훌쩍거리며 필사적으로 붙잡는 억눌린 목소리는 마치 홀로 남겨지게 된다면 그 고양이처럼 세상에 내팽개쳐진 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설마 불꽃놀이 때 렌이 자신의 말을 들었을 줄은 몰랐던 류제가 잠시 동요했다.

사랑이 고팠던 넌 혼자 남을 것이 무서운 거구나.

그는 말 대신 그를 떨쳐 내지 않는 것으로 답을 표했다.

한 시간 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재경은 제풀에 지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잠든 렌을 업은 채 걸어가는 류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절대 들리지 않을 장막을 엿본 기분은 상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는 안 한다.

저지를 빌려준 주인에게 업혀서는 죽은 듯이 잠든 렌을 온몸으로 느낀 류제가 천천히 학교로 향했다.

눈을 뜨게 되면 렌은 아마도 오늘 일을 평생 모른 척할 거다. 입 밖으로 꺼내는 일도 없을 거다. 하지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건 싫어도 기억하게 되겠지.

그러면 되었다. 된 거다. 나만이라도 그의 외로움을 알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렌이 알면.

류제가 문득 해가 지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달콤한 오렌지 주스 같은 노을이 구름과 함께 진다.

더 많이 사랑할 용기.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말했던 건 이런 의미였을까.

내가 지켜줄게. 평생 네 곁에 있어줄게. 그러니 걱정하지 마.

그러나 그 마음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의 어두운 마음 또한 커져 간다는 반동을 아직 모르는 류제는 몇 번이고 자기만족으로 다짐하기만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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