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4) (14/112)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4)

심성이 착한 네 사람은 지갑 주인을 찾기 위해 수풀 주변을 살폈다. 분명 주인이 이 근처에 있을 거라고 류제는 안일하게 생각했지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재경은 저 지갑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해 묵언 수행을 했다.

오기가 생긴 류제는 푸딩을 소화시킬 겸 가로등 높은 곳까지 뛰었으나 분실물을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뭔가를 발견했을까 아래에 있던 비키가 크게 외쳤다.

“뭔가 보여?”

“아니, 별일 없어 보이는데… 아, 저기 치안대원분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

“한번 가보자. 어디 쪽인데?”

류제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알려 주었다. 재경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시선을 옮겼다. 류제가 가리킨 곳 저 멀리서 팔짱을 끼고 설명하는 치안대원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부부가 있었다.

혹시라도 저 부부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곤란해하고 있을까 류제가 먼저 헐레벌떡 다가갔다.

“저기요! 혹시 지갑 잃어버리셨나요? 아까 저쪽 풀숲에서 찾았는데.”

“그건 분실물 센터로 가져가거라.”

심각한 사안인지 치안대원이 손으로 다가오는 류제를 막아섰다.

어라, 이게 아닌가. 빨리 일을 해결하고 싶었던 류제가 들고 있던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한탄한 치안대원은 이건 분실물 사건이 아니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데 류제가 들고 온 물건을 본 부부가 놀라 치안대원을 밀쳤다.

“이…이건 우리 딸아이의……!”

“치안대원님. 이건 우…우리 애 겁니다. 확실해요! 여기… 이 부분에 딸아이 이니셜이 있지 않습니까! 이걸 어디서 발견하신 겁니까? 예?”

류제가 내민 지갑을 보고 좌절할 듯이 사람의 어깨를 붙잡아 대는 부부 때문에 류제가 뒷걸음질을 쳤다. 단순 분실물이 아닌 건가?

“많이 먹기 대회가 열렸던 회장 근처 풀숲에서 발견…했는데요.”

“많이 먹기 대회? 아아, 맞아요! 분명 아이가 사라지기 전에 그쪽을 지나왔습니다. 설마 그 아이… 우리한테 말도 안 하고 거기로 간 건가?”

“혹시 오늘 이렇게 생긴 애를 본 적이 없습니까?”

지갑 주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자가 작은 사진 하나를 보여 주었다. 류제 또래보다 조금 더 어린 미들스쿨 정도에 말괄량이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였다.

류제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봤냐고 뒤따라온 다른 친구들에게 사진을 넘겨보았지만 다들 모르겠다며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하아, 실마리가 보여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축제라 그런가 여기저기서 실종 신고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오는지 원. 혹시 모르니 미아 센터에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치안대원이 한시름 놓았다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는 손목에 찬 슬렉터와 비슷하게 생긴 기계로 본부에 연락해서 소녀가 미아 센터에 있는지 물었다.

아아, 저거 경비병 아저씨들이 쓰는 거랑 똑같은 거다. 치안대도 저걸 쓰는구나.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현대적이라고 새로운 발견을 한 재경이 태연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아니, 지금 저 치안대원 아저씨가 무슨 통신을 사용하건 중요하지 않다.

재경은 안쓰러워졌다. 축제에도 일을 하는 치안대원이 불쌍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갑자기 실종된 소녀의 행방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임과 동시에 류제와 화마 샐러맨더의 왕의 첫 번째 조우 이벤트이기도 했다.

아마 그 소녀는 화마와 우연찮게 마주하고 기적적으로 도망가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진작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내 힘 가지고는 절대 화마를 막을 수 없을 것이기에 어떤 개입도 하지 못했다.

“왜? 걱정돼? 너무 마음 쓰지 마. 무사할 거야.”

“…그러겠지.”

일면식 없는 타인의 실종 사건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재경에게 류제가 걱정 말라며 어깨를 도닥였다. 재경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화마를 막지 못한 건 내 잘못은 아냐. 내 잘못은 아닌데 그저 알고 있다는 책임감이 이상하게 무거워서 그렇다.

“센터에 없다고 하는데요. 일단 지갑이 발견되었으니 그 근처에서 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 그 주변을 찾아보도록 하죠.”

“도와드려도 될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지금 일손이 무척 부족해서 말이다. 하아, 이런 애들 손까지 빌려야 하다니. 말세다, 말세.”

오랜만에 받는 애 취급에 멀뚱해진 네 사람은 류제가 아가타 기간트리카 체육복 저지를 입고 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안대원을 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들은 실종된 소녀를 찾기 위해 지갑이 발견된 장소로 돌아갔다. 치안대원과 소녀의 부모는 많이 먹기 대회장 근처에 목격자가 있는지 조사했다.

류제를 비롯한 나머지 세 사람은 학교에서 배운 것을 이용해 단서를 토대로 실종자를 찾았다. 그러나 소녀를 추적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는 현재 덤불 속에 떨어져 있던 지갑뿐이었다.

실종된 소녀가 금방 발견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답답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 덤불은 주변에 비해 어둡고 인기척이 드물어서 소녀를 본 목격자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곳에 남은 거친 발자국은 과연 소녀의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탄 냄새…….”

오감을 높여 주변을 살피던 류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집중하지 않는다면 주변에 있는 간이 상가에서 파는 오징어구이 냄새나 군옥수수 냄새에 가려질 수 있을 정도로 은은하게 풀이 타는 냄새가 났다.

어빌리티를 이용해 어두운 덤불 속에서 작게 그을린 자국을 발견한 류제가 허리를 숙였다. 흙인 줄 알았더니 냄새조차 남김없이 타버린 새까만 재가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따라 떨어져 있었다.

불? 이런 곳에? 아까 그게 잘못 본 게 아니라는 건가?

여기는 산에 인접한 곳이라 조금만 들어가도 초목이 무성하다. 여름이 다가와서 나무들이 물을 머금어 쉽게 불이 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로 강력한 화염에 휩싸였는데 이곳만 탔다고?

어린애들이 몰래 스파클러를 가지고 놀다가 불을 냈다면 그 흔적이 분명 남았을 텐데 발화의 시작점이 불분명했다.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확실히 보통의 화재는 아니다.

류제는 이와 비슷한 불꽃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맞아, 이건 비키의 ‘화염’ 어빌리티가 불을 낸 것과 비슷했다. 발화점이 없어도 어빌리티로 광범위한 불을 컨트롤할 수 있으니 이런 모양이 가능하지.

“비키… 비키! 빅토리아? 너 여기서 오늘 화염구라도 날렸어?”

“빅토리아라고 하지 말랬지!”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건만 가명 쓴 거 가지고 지긋지긋하게도 놀려댄다.

그러나 빅토리아라는 가명이 가지는 이목을 끄는 힘 하나는 끝장났는지 류제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던 비키가 당장에 달려왔다.

“뭔데!”

“탄 자국이 있어. 이거 봐, 네 어빌리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혹시 네 짓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왜 거기에다가 불을 내는데?”

“아니… 푸딩 많이 먹기 대회 나가기 전에 식전 운동이라도 한 줄 알았지. 아님 말고. 그런데 잘 봐, 범위도 이상하고 화재의 원인이라 부를 것도 없어. 오해할 만도 하지 않아?”

류제가 슬렉터로 플래시를 비춰서 탄 부분을 직접 보여 주었다. 푸른 잎으로 빛나던 잡초들이 말라비틀어진 미라처럼 생기를 잃었다. 류제가 발로 툭 차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마른 잔디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범죄를 의심받았던 비키도 류제의 말이 그럴싸해서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 정도 불이면 큰 화재로 번져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그냥 소화되었지. 이건… 화염계 어빌리터의 짓인가?”

“지갑은 이 근처에서 발견됐잖아. 설마 그 소녀가 갑자기 어빌리티에 눈을 뜬 거 아냐?”

“그런데 왜 사라져? 발자국을 봐. 허둥지둥 사라진 흔적이잖아. 이건 도망간 거야.”

“뭔가에 쫓기고 있다, 라…….”

이 축제의 현장 속에서 무엇을 보고 도망간 것일까. 잘 모르겠다. 렌마저 싱글벙글 웃게 만드는 축제에서 수상쩍은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에게서 도망갔다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비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큰 장난을 당해서 도망쳤다거나. 이거 잘 하면 징계감인데.”

“일단 그게 가장 유력하네.”

땡땡. 틀렸지롱. 몰래 둘의 호감도 이벤트의 대사를 훔쳐 듣고 있던 재경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장에 말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어떻게 알았냐며 추궁당할 것이 싫다. 류제라면 몰라도 예리한 비키까지 있잖아. 귀찮아질 게 뻔해.

재경이 근질근질한 주둥이를 때려가며 대강대강 주변을 찾는 시늉을 했다.

으으, 저번 병마와의 싸움에서 내가 커맨드를 남발하지만 않았어도 의심을 덜 샀을 텐데. 아무리 류제가 둔탱이라도 너무 대놓고 힌트를 주면 의심할 것 같다. 왕녀 일도 있고 자중하자.

“빨리 지도 찾아라, 유네…….”

재경이 어서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를 끝내고 불꽃놀이를 보고 싶어서 괜히 땅을 푹푹 파댔다.

유네가 발견하게 되는 실종된 소녀의 비밀 장소가 그려진 지도야! 늘 그렇듯 어서 말 같지도 않은 우연으로 등장하라고!

“렌 군, 류제 군, 비키 양! 이 이니셜… 이것도 그냥 쓰레기…려나?”

유네가 바람에 날려서 멀쩡한 수풀 어딘가에 걸려 있던 종이를 발견하고 펼쳐보았다.

단순히 종이만 살피면 그저 낙서가 그려진 쓰레기라고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네가 그 종이를 기어코 그들에게 보여 주려고 한 이유는 그 종이에 작은 메모, 약도와 소녀의 이니셜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풀에 있던 탄 자국에 대해 토론하던 두 사람이 유네의 외침을 듣고 황급히 다가왔다. 유네가 보여 주는 지도를 살피던 그들이 이니셜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지갑에 있던 거하고 똑같잖아.”

“그렇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필체가 좀 달라서 혹시나 했어.”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대충 알 것 같은데.”

류제가 지도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옆에서 욕심 많은 비키가 저도 보겠다며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내 생각인데… 그 여자애가 오늘 이 지도를 가지고 나온 거라면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실은 부모님 몰래 여기로 가려고 했는데 그 도중에 괴한과 마주치고 도망친 것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여기 ‘비밀 장소’라고 쓰여 있는 이곳에 숨으러 갔을지도 몰라.”

유네가 그럴싸한 추리를 던졌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시선들이 유네에게 꽂혔다. 유네는 그 관심들이 부담스러워 제 의견을 한 단계 격하시켰다.

“그…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마…망상 같은 건데…….”

“왜, 그럴싸한데. 지금 단서는 이것뿐이고… 이니셜이 같으니 밑져야 본전이지. 그럼 이 지도에 표시된 곳 주변 일대를 찾아보도록 하자. 렌!”

“어어.”

짜져있던 재경이 류제의 부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까지는 순조롭다. 재경이 이번 호감도 이벤트의 순서를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괴한에게서 도망친 거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수상쩍은 약도가 그려진 종이를 토대로 움직였다.

여기서 무시해도 되는 가벼운 미니 게임 하나가 발생하는데 그냥 지도에 그려진 대로 이동만 하면 되는 쉬운 게임이라 재경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도 류제는 척척 이동해서 금세 지도에 표시된 곳을 찾았다.

그들이 서투르게 그려진 지도를 보고 찾아간 장소는 지갑이 발견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이라도 아리송할 만큼 외진 곳이었다.

소녀를 구하게 되면 선택지에 따라 알게 될 내용인데 소녀가 이 지도를 가지고 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어릴 적 라우라 축제 날 그 비밀 장소에서 소녀는 그녀가 좋아했던 사람과 나중에 열어보자며 타임캡슐을 묻어두었다.

오늘이 딱 약속했던 날. 그녀는 부모님 몰래 타임캡슐을 파보려고 부모님이 한눈판 사이 도망쳤다.

물론 좋아했던 사람은 몇 년 전 다른 도시로 떠나버려 이제 볼 수 없지만 그녀는 그 추억만큼은 되새기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화마가 인간 사냥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해 버린 소녀는 목숨이 달린 숨바꼭질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지갑과 약도를 분실했다. 지갑은 이런 루트를 따라 류제가 발견하게 된다.

그 덕분에 극적으로 류제에게 구출되지만 단역 캐릭터치고는 사연이 구구절절해서 재경은 어쩔 수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과 관련 없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류제는 대충대충 대사를 넘길 테니 아마 이 사연을 알 사람은 재경밖에 없을 듯하다.

“찾았다.”

“꺄아……흐읍!”

약도에 표시된 장소 주변을 뒤지던 중 인기척을 느끼고 나무판자로 대강 만들어진 피난처를 들어 올린 류제가 비명 소리를 듣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청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는데 비명을 지르다니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역이었다. 류제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으으윽… 내 귀!”

“흡… 흐윽… 흐으으윽.”

그녀는 살려 달라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자신의 입을 막은 것이 마족이 아닌 인간인 류제라는 것을 알고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찾았어?! 어디야?”

소녀가 울부짖는 소리에 비키가 부리나케 달려와 류제를 밀쳤다. 덕분에 류제의 손에 막혔던 소녀의 입에서 설움이 터져 나왔다. 두려움에 젖은 울음소리가 비키의 귓가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흐윽… 흑. 으허어엉…….”

“하아, 늦지 않게 찾아서 다행이야.”

“내 귀는 전혀 안 다행인데.”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이런 식으로 호되게 당해 놓고 또다시 방심하다니. 청각을 보통의 상태로 되돌린 류제가 아직도 귓가가 징징거리는지 어지러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래? 찾았어? 찾은 거 맞지?”

“응, 겁에 질린 것 같긴 한데 무사해.”

소식을 들은 유네와 재경도 소녀가 있던 곳에 삼삼오오 모였다. 소녀는 여전히 겁에 질린 채였다. 어린 소녀를 둘러싼 그들이 어떻게든 소녀를 달래기 위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재경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소녀의 안전을 확인한 가운데 어린 막냇동생을 달래준 경험이 많은 류제가 나서려는데 그 전에 가장 앞장서 있던 비키가 대표로 나섰다.

여기까지 도망친 이유가 뭔지 몰라도 목숨을 위협하는 무엇인가에게서 도망쳐 숨는 공포는 비키에게도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기에 그녀는 소녀의 두려움에 크게 공감했다.

여기서 나까지 동요하면 안 돼. 침착한 듯 단호한 표정으로 비키가 공포에 질린 소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정신 차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설명할 수 있어?”

“마…마족이… 마족이 절……!”

“마족?!”

“마족이 널 공격했다고?”

“으흑… 네…네에.”

그녀가 횡설수설 말했다. 초점이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회상한 기억 속 돌아본 악마를 떠올렸다. 두려움에 잠식된 정신이 온전치 않았지만 절대 그 광경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주도한 5.22 마족 대토벌전 이후 마족들이 나라카로 물러가 몸을 사린다고는 하나 그들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건재했다.

저번 등급1 마족의 학교 침입 사건을 떠올려보라. 그들이 인간들이 모여 즐기는 라우라 축제를 노리지 않을 거라는 단언은 할 수 없다.

마족. 그 불의 흔적은 어빌리터가 아니라 마족의 것인가. 그렇다면……!

비키가 류제에게 눈짓을 했다. 류제도 그 무언의 신호를 읽었다.

여기서 마족이 나타나면 당장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전투에 충분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비키 둘뿐일 터.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질지 모른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네 말대로 정말 마족이 있다면 위험해. 부모님께 돌아가자.”

“두 분 모두 널 걱정하고 계셔.”

“아…안 돼요!”

이곳을 떠난다는 말에 그녀가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려는 류제의 팔을 붙잡고 버텼다. 류제가 달래보아도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

그녀에게는 이 장소가 철옹성이었다. 그녀는 이 외지고 꿉꿉한 비밀장소가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며 고집을 부려 몸을 웅크렸다. 그녀가 돌아갈 곳이 부모님의 곁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주변에 아직도 그 마족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분장한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새빨간 눈으로 절 잡아먹겠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잡아먹었으니까 분명 여기서 벗어나면 저도 똑같이……!”

“마족이 너한테 그렇게 말한 거야?”

“네에… 저더러 도…도망가라고 했어요. 잘 도망가면 놓아 주겠다고. 그래서… 흑……!”

“그 마족이 어떻게 생겼는데?”

먹는 게 아니라면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는 마족이 이 소녀에게 직접 그리 말했다고? 비키가 류제를 밀치고 소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불을 쓰는 마족. 지금 인간에게 섞여서 인간 사냥을 하고 있는 마족은 ‘연소 인자’를 다루는 화마족일 것이다.

뼛속 깊이 사악한 마족 주제에 자비를 베풀었을 리가 없다. 소녀를 놓아준 건 여흥에 불과하겠지. 작은 희망을 쥐여 주고 나서 지독하다 원망이 나오게 고문한 다음 절망한 인간을 가차 없이 잡아먹어 버리는 잔인한 계략일 게 뻔하다. 마족이란 그런 놈들이었다.

“그 마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냐고!”

화마족이 그렇게 많겠냐만 그래도 비키는 알아야 했다.

그녀는 어릴 적 홀로 셀로니아가 대저택에 있던 비밀 공간에 숨어 있을 때,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와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마족을 목격했다.

어두운 불꽃이 저택을 집어삼킨다. 떠오르는 기억 속의 그 웃음은 끔찍할 정도로 증오스럽다.

“거대한 뿔에… 날개에, …새까만 불꽃으로 사…사람을 집어삼켰어요.”

소녀의 기억 속 그는 손에서 마그마보다 더 검붉은 염화를 뿜으며 소름 끼치게 웃고 있었다.

그녀는 그 괴물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를 비웃듯이 낄낄거리는 시퍼렇게 빛나는 짐승의 송곳니가 어둠 속에 도사려 곧바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렸다.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건 자신의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분명 저도 찾아내서 죽일 거예요. 싫어… 싫다고!”

“머리 색은?! 눈 색은? 겉모습은! 말해 줘. 어서 대답해! 중요한 거라고!”

“비키 양, 너무 윽박지르지 마.”

유네가 나서서 말릴 정도로 비키가 소녀를 몰아붙였다. 소녀는 발작하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가장 진정해야 하는 비키는 흥분한 것 같고, 류제는 다시금 패닉에 빠진 소녀를 보며 이걸 어째야 할까 허리에 손을 얹었다.

“비키, 진정해. 애가 더 겁먹었잖아. 걱정 마, 우리가 지켜줄게. 어서 여기서 내려가자.”

“안 돼요. 전부 죽을 거야. 만약에 진짜 그 마족이 절 찾아낸다면…….”

그녀는 적어도 죽는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보기 싫다며 눈을 질끈 감고 더욱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류제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겸 그녀를 달래줄 목적으로 좋은 말을 꺼냈다.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걱정 마. 네가 안전하게 내려가야 마족을 막든 뭐라도 하지.”

“뭘 어떻게 하는데요?! 어차피 우리들은 인간인데! 마족 앞에서는 아무것도 못 해!”

말과 글과 그림으로만 보았던 마족을 태어나 처음으로 직접 보게 된 충격이 몹시도 큰 모양이었다. 그것도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을 염화로 순식간에 우적우적 씹어 먹는 괴이함이란.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 따위는 반항도 못 하고 허무하게 잡아먹히고 말 텐데. 울음을 터뜨린 그녀가 인간의 무능함을 긍정하자 자존심이 상한 비키가 왼손에 차인 슬렉터를 보여 주었다.

“우린 어빌리터야. 그러니까 어서 답해! 그 마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어?”

“비키, 너무 몰아붙이지 말라니까. 안심해, 들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다 어빌리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테니까 빨리 내려가자.”

“마…맞아! 우리가 지켜줄게!”

류제나 비키와는 다르게 마족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었던 유네도 소녀를 달래 준답시고 용기 내서 외쳤다.

유네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관자놀이에 식은땀을 또르르 흘렸다. 별거 아닌 말인데 이토록 책임감이 따를 줄이야.

유네는 저 소녀의 목숨, 그녀의 부모님의 목숨, 아까 그녀를 찾는데 일조했던 치안대원이 떠오르자 그들의 목숨을 동시에 짊어진 것처럼 등이 무거워졌다.

비키 양이나 류제 군은 이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으으…….”

작디작은 유네의 말에 용기를 얻은 소녀는 류제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일어섰다. 다리가 거의 풀렸는지 소녀는 비틀비틀 걸으면서도 자꾸 고꾸라지려고 했다.

류제는 뒤에 있던 재경과 함께 끙끙거리며 소녀를 부축했다.

아까부터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사건을 관망하던 재경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는지 류제가 슬쩍 그의 상태를 살폈다. 마족에게 크게 다친 적이 있으니 아닌 척 겁먹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괜찮아?”

“난 멀쩡해, 짜샤.”

그렇게 말하는 재경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곧 마족이 등장하며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벌어진다. 재경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대한 달이 그를 감시하듯 내려다보았다.

소녀를 데리고 산을 내려가려는 순간 옴싹 류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 달 전 마족과 처음 대면한 그날이 떠오르는 감각이다.

빠르게 고개를 돌린 류제가 날카로운 무언가를 던졌다. 팍, 뭔가에 맞은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류제!”

[오호라.]

류제의 이상행동에 놀라 다들 뒤를 돌아보았다. 류제가 렌을 공부시키느라 체육복 저지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고 있던 연필은 율폰의 몸을 통과해 뒤에 있는 나무에 꽂혔다.

그들이 주시한 곳엔 유네보다 작은 소년이 서있었다. 그 소년이 평범한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거대한 뿔과 날개가 그의 존재감만큼이나 흐릿하게 실존하다는 것이다.

류제는 마족이 학교를 쳐들어왔던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드러나지 않는 마기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류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히이익! 어…어쩌지. 날 찾아버렸어. 엄마… 아빠….”

“렌, 유네, 이 애를 부탁할게.”

“아, 응. 맡겨 둬.”

“알았어.”

소녀의 보호를 두 사람에게 맡긴 비키와 류제가 마족을 경계하며 뒤를 가렸다. 상대적으로 약한 소녀와 유네, 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역시 너는……!”

두 진영의 대치는 침묵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인간 사냥에 나서서 포식을 즐기던 율폰이 소녀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둔 것은 비키의 예상대로 사냥감을 쫓는 재미 때문이다.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자비라는 개념보다는 놀이에 불과한 행동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저들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율폰 또한 예측하지 못한 듯하다.

대회장 근처에서 그들을 발견하고 시선을 흘겼었던 율폰이 짧게 웃었다. 이것 또한 운명이라는 건가.

[흥미롭군.]

“그때 그 화마족!”

어릴 적 비극이 선명한 비키는 기억 속 마족이 등장하자 눈을 날카롭게 떴다. 그녀는 냉정히 인지와 판단 과정을 거쳤다. 무표정인 율폰을 노려보는 그녀의 마음에 정당한 분노가 들어찼다.

“잊지 않았어. 절대 잊을 수 없어. 셀로니아 가문의 원수. 어째서 다시 나타난 거지?!”

[류제 신리.]

비키가 십여 년간 품어온 복수심을 갈며 표출하려던 찰나에 율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신이 멸족시킨 가문에서 살아남은 비키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류제의 이름이었다.

비키는 율폰에게 무시당했다는 것과 저 마족이 그녀보다 류제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감에 휩싸였다.

반대로 저 마족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류제는 심장이 찌부러질 것 같았다. 그때 쓰러뜨린 등급1의 병마족도 그랬다. 날 알고 있었어. 정말로 난…….

[이렇게 마주한 건 처음인가.]

“내 말을 무시하지 마. 너야. 분명히 너야! 네가 우리 가족을 전부 죽였어. 그렇지?! 대답해! 맞다고 대답해!”

마족이 류제의 이름을 알고 있건 말건 비키는 치욕감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화마에게 불도그처럼 으르렁거렸다.

“뻔뻔스럽게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서 또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용서 못 해. 이번에야말로 널 배제하겠다!”

“비키!”

“비키 양!”

타오르는 복수심으로 흥분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마족에게 돌진하는 비키를 향해 류제와 유네가 동시다발적으로 외쳤다.

비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붉은색 긴 생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달려가 곧바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못 이겨 흙바닥에 떨어졌다. 덤벼드는 비키의 얼굴을 본 불꽃이 흔들거렸다.

“반드시 없애 버리겠어!”

[한심하군.]

그러나 마족 중에서 마왕 다음으로 강한 사천왕 율폰을 고작 17살인 비키가 상대하기엔 힘도 경험도 턱없이 부족했다.

화마는 예의 비웃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몸에서 검붉은 화염으로 한 마리의 광견(狂犬)을 만들어냈다. 그 광견은 비키의 머리통을 집어삼킬 듯이 거대하게 꿈틀거렸다.

“비키, 성급하게 다가가지 마. 위험하다고!”

저 마족이 학교를 쳐들어온 미치광이 병마와 동급임을 직감으로 알아챈 류제가 앞뒤 가리지 않고 마족에게 덤벼드는 비키에게 끼어들어 다른 쪽으로 내던졌다.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방해하지 마!”

감히 공격을 막아서자 비키가 오히려 류제에게 역정을 냈다.

왜 날 막는 거야?! 피아 식별 안 되는 건가? 저 마족을 배제해야 한단 말야. 우리 가족의 원수. 반드시 죽인다!

“방해하는 건 너야. 진정해! 지금은 너 혼자 뛰쳐나가서 공격할 때가 아니야. 이건 기간트리카 대결이 아니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뭘 배웠는지 잊어버린 거야?!”

순간적으로 복수심에 마음이 먹혔던 비키는 류제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 차가운 얼음물이 부어진 것 같았다.

[벌써 끝인가.]

화마가 재미없다는 듯 만들어낸 화광견을 검붉은 염화 속에 집어넣었다.

젠장, 류제의 말이 옳다. 암만 어빌리터라도 1대 1로 마족에게 덤비는 것은 렌 같은 바보나 할 정도로 무모한 짓이다.

괜히 기간트리카 부대가 팀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야. 하물며 저 류제조차 병마와 상대할 때 렌하고 같이 움직였잖아. 뒤에서 세라 선생님하고 미나가 도와주기까지 했다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상대하려 하면 안 돼. 가족을 죽인 원수일지언정 여기서 내가 오만하게 덤벼들어 무리했다간 복수는커녕 그대로 당하기만 할 거야. 그럼 친구들에게 걱정을 끼치게 되겠지.

저번 달에 류제와 렌이 왜 싸웠고 내가 렌한테 뭐라고 조언해 줬는데. 조언해 준 내가 똑같은 실수를 벌이면 얼마나 꼴사나워.

[어리석은 인간이여. 현명한 판단이군. 나도 여기서 큰 소란을 내고 싶지 않았거든.]

“혼란을 틈타 사람을 잡아먹은 주제에 소란을 내고 싶지 않다고? 뻔한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는군.”

[그러니까 조용히 잡아먹은 거잖아. 하하.]

율폰이 사악하게 웃으며 도발했다. 아무런 반항조차 못 하고 죽는 인간이란 참으로 무력하고 한심하다.

류제는 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대치 상황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상대는 학교에서 대치했던 마족과 최대 동급.

전장은 불에 유리한 숲 지형.

전력이 되는 비키.

비키와 어빌리티 상성이 좋은 유네.

마족과의 싸움 경험이 있고 왜인지는 모르게 공격을 읽었던 렌.

지켜야 하는 소녀.

승산이 있나?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겠다며 율폰이 피식 웃었다.

[정말로 공격하고 싶어지잖아.]

그 말과 동시에 율폰이 숨겼던 마기를 드러냈다. 짓눌릴 것 같은 끔찍한 살기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를 덮쳤다.

마족과 진짜로 조우하게 될지 몰랐던 유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었다. 이게 마족. 저번 달에 이런 괴물을 상대로 렌 군하고 류제 군이……!

재경도 병마 페스트의 왕과는 다른 케케묵은 살기에 떨리는 이를 악물었다. 스토리상 화마는 여기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물러난다.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 괜찮아. 이건 그냥 비키 호감도 이벤트 중에 나타나는 한 장면일 뿐이야.

여기서도 가족이 살해당하는 것과 같은 장면을 반복하기 싫었던 비키가 무모하게 화마에게 덤벼들고, 그 반동으로 비키의 사복이 타버려서 화마가 사라지고 난 후 류제가 체육복 저지를 빌려주는 것. 그 흐름 중 한 장면일 뿐이다.

“렌, 여자애를 데리고 유네랑 내려가!”

끔찍한 살기에 소녀는 결국 기절했다. 류제가 재경에게 외쳤다. 재경은 류제의 말을 들었지만 마기에 압도당해서 좀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재경의 시선이 마족을 주목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류제가 다시금 외쳤다.

“렌!”

[네가 렌 지미군.]

대답을 않는 재경을 류제가 독촉하려던 때 율폰이 산불이 퍼지는 흐름처럼 빠르게 다가와 재경을 마주 보았다.

저 멀리서만 있을 거라 여겼던 마족이 손이 닿을 만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재경은 데자뷔를 느꼈다. 뱃가죽이 쓸데없이 아파 오는 건 그저 환상통에 불과한데도 재경은 은연중에 손으로 구멍이 났던 곳을 막았다.

[생각보다 하찮은 존재감인데. 네가 그…….]

말을 줄인 율폰은 겁에 질려 버둥거리는 개미를 응시하는 어린아이처럼 흥미로운 시선으로 재경의 전신을 훑었다.

아니, 재경과 마주한 거리 위치상 율폰의 눈은 절대 재경의 전신을 훑을 수 없었다. 율폰은 재경의 코앞에서 너그러운 손짓으로 재경의 목을 훑었으니까.

재경은 발가벗겨진 채 율폰에게 샅샅이 관찰당한 다음 그대로 짓눌려 터질 것 같은 감각에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자비로운 손길에 힘이 더해져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렌에게 손대지 마!”

비키에게는 진정하라고 한 주제에 율폰이 재경을 죽이려고 하자 비키보다 더한 분노를 보인 류제가 화마의 군주에게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류제의 공격은 율폰에게 확실하게 먹혀들었지만 실체를 공격하는 감각은 없었다. 환영. 거기 서있는 것은 율폰의 환영이었다. 계속 그래왔듯 그것은 율폰의 진실한 육체가 아니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율폰이 무엇을 보고 있느냐며 가소롭게 웃었다. 류제의 동공이 흐릿하게 붉어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로지 율폰만 그것을 목격했다.

과연, 그 서큐버스가 한 말의 의미가 이것인가.

[어리석군.]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율폰이 류제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비키가 재경을 뒤로 물리고 손에 불꽃을 두른 채 적을 겨냥했다.

율폰은 그런 비키를 흘기더니 무시하며 스스스 오갔던 불길처럼 사라져 다른 곳에 환영을 만들었다.

[흥이 식었어.]

“거기 서!”

정말로 서면 어쩌려고. 재경이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키가 불구대천 원수인 율폰에게 외쳤지만 율폰은 다행스럽게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바람 앞에 있는 등불처럼 스산하게 흔들거리며 손가락으로 류제를 가리켰다.

[네 운명에 마주해라, 류제 신리.]

“기다려! 거기 서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이 귀머거리야!”

비키가 덤벼들었지만 율폰을 이루고 있던 불꽃은 꺼진 후였다. 어디로 갔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가 사라지자 그들의 마음을 좀먹던 마기 또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존재하지 않는다. 원래부터 실존하지 않은 환영이었지만 두려움이 만들어낸 가시덩굴이 그제야 발목에서 풀려난 감각이 들었다.

“하아……!”

코앞까지 다가왔던 율폰의 마기에 짓눌렸던 재경이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목에는 율폰 때문에 불그죽죽하게 손자국이 나있었다.

히로인 이벤트고 뭐고 이런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젠장.

“렌! 괜찮아? 다친 데는― 제길. 젠장! 그 마족이!”

“나…난 멀쩡해. 그냥 안도해서 그래.”

어질어질한 와중 재경이 손을 흔들며 류제를 안심시켰다.

비키도 주변에 마기가 느껴지지 않자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고 류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녀는 다분히 화가 난 듯했다.

“이 바보 류제! 거기서 갑자기 덤벼들면 어떻게 해? 렌이 더 위험해질 뻔했잖아!”

“그럼 어쩌란 말야. 죽치고 거기서 가만히 있으라고? 렌이 죽을 뻔한 거 못 봤어?!”

“나더러 진정하라고 한 건 너였으면서 네가 더 이성을 못 찾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아까 너 마족을 공격할 때 앞뒤 안 보고 렌까지 같이 공격했어!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렌을 다치게 했을 거라고!”

비키가 역으로 류제에게 화를 냈다.

류제가 율폰이 환영이라는 것을 모르고 덤벼들다가 그의 공격이 율폰을 그대로 통과해서 오히려 그 앞에 있던 재경을 덮쳤었다. 그걸 막은 게 비키였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재경은 괴리감을 느꼈다. 어라, 이상하다. 이건 기억에 없는 장면이다.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벗어나니 그제야 재경은 사태의 심각성이 인지되었다.

화마의 군주와 마주하고 난 뒤 앞뒤 가리지 않고 복수감에 이를 갈며 분노해야 할 사람은 비키였다. 류제가 아니었다.

“진짜, 이 바보 류제! 내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

비키여야만 했다. 그게 바로 류제가 비키에게 체육복 저지를 벗어주는 호감도 이벤트의 결과를 낳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화마의 공격에 불탔어야 했던 비키의 사복은 그을음 하나 없었다.

자신이 오히려 렌을 위험에 빠뜨리려 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었던 류제는 공격이 섣불렀던 것을 인정했다.

“그 마족이 실체가 없을 줄 몰랐어. 고마워, 덕분에 렌이 무사하네.”

부끄럽지만 비키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던 게 맞다. 단지 감히 렌을 공격하려 했던 마족이 용서가 안 돼서 그렇다. 류제가 풀이 죽었다. 실수는 물론이거니와 또 솟아오르는 검은 마음에 순간 잠식당할 뻔했다.

류제는 이제는 잠잠해진 증오를 기억 속에서 지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뭘 하자는 건지. 마음부터 강해지겠다고 했으면서.

“일어설 수 있겠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이런 건 아무것도 아냐.”

류제가 그럼 그만 앉아있고 어서 일어나라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재경은 류제의 도움을 받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땅에 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었다.

재경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직 호감도 이벤트가 안 일어났다고 단언하지 말자. 지금까지의 경험을 따지고 보면 분명 호감도 이벤트는 강제성을 띠고 있는 이벤트다. 내가 곧 죽어도 다르게 하려고 해도 마음대로 벌어졌었잖아.

비키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를 떠올려 보라고. 이것도 그냥 약간의 착오로 생긴 일이라 곧 있으면 비키의 옷이 불타든가 어쩌든가 해서 류제가 저지를 벗어―

“렌, 이거 입어.”

“어……? 뭐?”

목을 쓰다듬으며 심각하게 고민 중이던 재경을 쳐다보던 류제가 입고 있던 저지를 비키가 아닌 재경에게 넘겼다.

류제의 시선은 재경의 목에 가있었다. 목선을 따라 저주받은 나뭇가지처럼 마족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다. 그것이 재경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류제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세라 선생님께 치료해 달라 하기 전까지는 가리고 있어.”

또 류제가 과민 반응하는 건가 재경이 제 목의 상태를 살피려고 했지만 요괴가 아닌 이상 사람이 스스로 목을 관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래. 그리고 그 저지는 내가 아니라 비키한테…….”

“나? 내가 왜? 고집부리지 말고 류제 말대로 입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기다려도 옷이 강제로 불타기는커녕 싹싹하기만 한 비키가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작은 손거울을 재경에게 던져주었다.

재경은 뭐 이런 걸 다 들고 다니냐며 거울로 목을 살폈다. 목에는 귀신처럼 손자국이 나있었다.

“으악, 이게 뭐야!”

“봤지? 군말하지 말고 가려.”

“아니, 이건 내가 입는 게 아니야. 뭔가 잘못되어. 어째서 비키가…….”

생각했던 것보다 징그럽게 멍이 들었다는 건 알겠다. 근데 류제의 저지는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물품이란 말이야. 이게 왜 나한테 온 거냐고!

그리고 내가 정말로 이걸 입어버리면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잖아. 안 돼, 아무것도 안 했는데 허무하게 실패라니. 입을 수 없어.

이걸 강제로라도 비키에게 입히면 호감도가 오른 걸로 쳐주나?

“류제 군! 비키 양! 이 아이 안 일어나. 업고 내려가야 할 거 같은데?”

“알았어. 잠깐만. 렌, 하아… 왜 그러고 있어.”

재경이 체육복 저지를 들고 어영부영 눈치를 보자 보다 못한 류제가 저지를 빼앗았다. 설마 류제가 정신을 차리고 저지를 극적으로 비키에게 주려는 건가 재경이 기대했다.

류제는 렌이 뭐라 반항하기도 전에 저지로 몸을 감싸고 지퍼를 쑤욱 올려주었다. 재경은 걸어 다니는 통나무 꼴이 되었다.

“답답해도 좀만 참아. 멍이 보이는 것보단 낫잖아.”

재경을 달래준 류제가 풀 죽지 말라고 어깨를 툭 쳐주고 소녀를 업기 위해 유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류제가 쭈그려 앉고 유네와 비키가 축 늘어진 소녀를 등에 얹어주었다. 재경은 자신에게 걸쳐진 저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입어버렸다.

재경은 마지못해 꿈틀거리며 소매에 팔을 집어넣었다. 이제 체격 차이가 상당해져서 류제의 저지는 재경이 입기에 손 하나는 컸다.

실패했다.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는 대실패였다. 그들이 이번 전투에서 무엇을 놓쳤는지 재경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소녀를 찾는다는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산을 내려갔다. 재경도 어쩔 수 없이 터덜터덜 산을 내려갔다.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허청허청 위태롭게도 걸어간다. 재경이 소녀를 업고 있는 류제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설마 다시 나타나지는 않겠지? 마족이 하나 더 있다든가.”

재경과 함께 걸어가던 유네가 걱정스레 주변을 경계했다. 아까 마족을 마주해서 그런가 산 전체가 흉흉해진 기분이다.

마족은 수가 적어 여러 명씩 몰려다니지는 않지만 짝을 지어서 인간을 덮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저번 학교 침입 사건 때 총 세 마족이 오지 않았나. 마족이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존재였다.

“…그놈은 그때도 혼자였어. 무리 중에서도 혼자. 그러니 오지 않을 거야.”

비키가 낮게 읊조렸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그날의 광경은 뇌리에 박혀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복수하겠다 이를 갈고 있었는데 무시당한 충격이 크다. 역시 류제가 마족들 사이에서 나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건가.

“다음번에는 반드시 복수하겠어. 날 다시는 무시하지 못하게 해줄 거야.”

비키가 낮게 중얼거렸다. 무거운 이야기에 유네가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뒤에서 류제의 커다란 저지를 입은 채 손 길이가 모자라 손모가지 부분만 덜렁덜렁 흔들던 재경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리다가 물었다.

“용케도 안 덤벼들었네. 네 원수라며?”

“…맞아, 우연일지라도 이렇게 마주쳤는데 가족들을 떠올리니 뭐라도 하고 싶긴 했어.”

“근데 어떻게 참은 거야? 나라면 반드시 공격해서 한 대라도 때렸을 텐데.”

재경은 호감도 이벤트가 왜 실패했는지 알고 싶었다.

비키는 복수심에 불타 이성을 잃고 마족에게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가 옷이 타고, 도저히 그 모양으로 내려갈 수 없어 류제에게 저지를 빌려 입는다.

비키는 십여 년 만에 만난 원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하면서도 류제에게 등을 기댈 수 있는 것이 안심이 된다.

복수심 때문에 이성을 잃고 동료를 무시한 채 혼자서만 무모하게 덤벼들고 말았던 비키는 이성적인 류제의 판단력에 도움을 받은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동료의 소중함과 목숨의 소중함을 류제가 상기시켜 줌으로써 호감도가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 깨달았어야 했을 감상 전반을 비키는 간접적으로 경험해서 알고 있었다.

“나 혼자서 무리한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그놈은 등급1… 마족 분파의 군주급 존재라고. 난 내 주제 파악 정도는 제대로 하고 있어. 바보 렌처럼 무모하지 않아.”

“내가 뭐가 무모하다는 거야? 난 아무것도 안 했거든?”

“넌 그렇게 고생했으면서 배우는 게 없어? 저번에 겁도 없이 마족에게 덤볐다가 다쳤잖아. 그래서 류제랑 다퉜으면서 기억력 나쁘네.”

비키가 그것도 잊어버렸냐며 핀잔하고는 도도하게 걸어갔다. 이유를 들은 재경은 혼란스러웠다.

나 때문인가? 내가 한 달 전에 미리 ‘마족에게 앞뒤 가리지 않고 덤볐다가 다쳤기’ 때문에 비키가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경계를 한 거야?

그럼 내가 중간 보스전에서 다치지 않았으면 호감도 이벤트는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는 의미야? 그게 무슨…….

도대체 뭐지. 왜 어떤 건 스토리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리고 어떤 건 멋대로 스토리가 바뀌는 건지 기준을 모르겠다.

내가 뭘 하려고 하건 내 감정 따위 무시했었잖아. 이벤트라는 형태만 이루어지면 상관없는 거 아니었냐고.

“렌 군, 괜찮아?”

“아, 어…….”

평소라면 도발하는 비키에게 지지 않고 덤벼들었을 텐데 마족에게 공격당한 충격이 컸던 걸까, 유네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재경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지금 이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는 외로운 긴급사태에 한 가지의 징조가 있었다면 아마 수학여행 때 유네의 호감도 물품이었던 ‘곰돌이 모양 열쇠고리’가 ‘소원 팔찌’로 바뀐 일일 것이다.

일단 당장 생각나는 건 이것밖에 없다. 이 두 개가 무슨 공통점이 있지? 딱히 내가 바꾸려고 노력한 게 아니라 히로인들이 멋대로 행동을 바꾼 거잖아. 이걸 날더러 어떻게…….

재경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번뜩였다. 설마 삼류 악당 ‘렌 지미’가 히로인들과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친구가 되었기 때문에 스토리가 조금씩 뒤틀리고 있는 건가?

렌 지미가 히로인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생겨나는 스토리 변경은… 가능하다는 거야?

왜?

“렌 군, 진짜 괜찮은 거지?”

“유네… 너 그거 왜 아직도 하고 다니는 거야?”

재경이 유네의 왼쪽 팔목을 가리켰다.

“어? 이거?”

유네가 슬렉터에 함께 차인 낡은 소원 팔찌를 들어보며 물었다. 갑자기 이상한 걸 물어본다며 창피해하던 유네가 어색하게 볼을 긁었다.

“렌 군이 선물로 준 거잖아. 그리고 소원 팔찌니까 끊어질 때까지 하고 다녀야지. 헤헤.”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 너무해. 렌 군이 준 걸 소중하게 여기고 싶은걸.”

유네가 제 마음을 무시하는 재경에게 뿔이 나 툴툴거렸다. 재경이 알았다며 덜렁덜렁 손이 부족한 저지를 흔들었다.

“찾았습니까?”

“네. 여기 있어요!”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아보겠다고 커다란 곰 인형과 여장 대회 준우승 상품이 든 쇼핑백, 푸딩 세트를 맡기는 바람에 자리에서 꼼짝도 못 한 채 부모님과 함께 그들을 기다렸던 치안대원이 저 멀리서 내려오는 그들을 반겼다.

그녀의 부모님은 류제의 등에 업혀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딸을 발견하고 엉엉 울면서 기절한 소녀의 등짝을 때려댔다.

“세상에, 신이시여! 이 기지배는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 이상한 장소는 왜 간 건지. 어휴… 이 꼴 좀 봐… 흑…….”

부모의 감격이 더 감격스러웠던 류제가 기절해서 쿨쿨 자고 있는 소녀를 넘겼다.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딸이 정신을 못 차리자 그들이 딸을 꼭 껴안고 부둥거렸다.

눈물겨운 가족 상봉의 순간이다. 부모님이 없어도 부모만큼 자신들을 사랑해 주던 존재가 떠오른 류제와 비키는 뿌듯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저 소녀는 왜 그런 장소까지 갔던 건지 아니?”

내내 기다렸던 치안대원이 소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자초지종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류제가 저 소녀가 마족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그 장소로 가게 되었다는 것과 마족이 라우라 축제를 방패 삼아 인간 사냥에 나섰다는 사실을 속삭거렸다.

마족이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자 치안대원의 얼굴이 그 옛날 호환 마마를 본 듯이 창백해졌다.

“무…무슨… 뭐라고? 마…마족이?”

“네, 저희도 놀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지금은 기척도 없고 말 그대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애초부터 실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마족이란 늘 그런 식이니까.”

“너희도 간신히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하지만 어떻게 마족과 상대할 수 있었던 거지? 너넨 그냥 어린아이… 아아아! 제립학교!”

그때서야 치안대원의 눈에 재경이 입은 류제의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체육복 저지가 들어왔다.

마냥 라우라 축제를 즐기러 온 어린아이들인 줄 알았더니 제립학교 학생이었다니. 다시 보인 치안대원은 그들이 사뭇 어른스러워 보였다. 행동이 뭔가 남다르긴 했다 싶더니 어빌리터들이었구나.

“마족이라… 큰일인걸. 다른 실종 사건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려 제립학교 학생들인 어빌리터들에게서 마족을 보았다는 말을 들으니 치안대원은 걱정부터 앞섰다. 그는 곧 슬렉터와 비슷하게 생긴 통신기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취한 후 류제에게 말했다.

“일단 당장 마족이 나타났다 공표를 하면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할 거야. 그럼 더 마족이 좋아할 상황이 만들어질 거고. 조용히 처리해야 하겠지. 내가 인근 기간트리카 부대와 제립학교 측에 연락하겠어. 어떤 마족이었는지 기억하니?”

“…과거 셀로니아가를 습격했던 등급1의 화마족입니다.”

“자세하게 알고 있구나. 내가 보고하마.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 너희는 마저 저분들의 감사 인사를 마저 받아주렴.”

치안대원이 고생한 그들의 등을 밀었다. 떠밀려서 걸어가자 그들의 앞에는 소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이마를 땅에 박을 듯이 깊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리 애를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한 것일 뿐인데요.”

“그래도… 근데 이 애는 왜 그런 곳까지 갔는지 아시나요?”

“아뇨, 금방 기절해 버려서 저희도 잘…….”

류제도 모르겠다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다른 친구들도 전혀 경위를 알 수가 없었다. 재경의 걱정대로 류제가 소녀를 발견하고 질문할 때 소녀의 구구절절한 사정은 스킵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저 꼼꼼하지 못한 놈. 넌 도전과제 깨는 재미도 없더냐. 재경이 작게 불평했다.

“사춘기니까 그런 걸까요. 최근에 괜히 꿍얼거리더니. 집에 돌아가서 크게 혼내야겠습니다. 다른 실종된 사람들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까 실종자 리스트를 보니까 꽤나 많던데. 이 좋은 날에 무슨 봉변이야.”

“…그러게요.”

“그럼 우리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학생들 앞에 좋은 일 있기 바랍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자식을 업은 부모는 연신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멀리 사라졌다.

왠지 뿌듯하다가도 실종자 이야기를 들으니 찝찝하다. 그야 소녀는 살았지만 다른 연고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화마에게 잡아먹혔을 테니까 말이다.

보고를 마친 치안대원이 다가왔다. 좋은 마음에 좋은 일을 한 건데 다들 끝내 표정이 펴지지 못했다.

“아직 어린데 많은 일을 해줬구나. 나도 너희에게 고맙다. 너희 덕분에 희생자가 줄어든 거라고 생각해 주렴.”

“마족이 왜 이런 곳까지 왔을지 모르겠네요. 무섭게.”

“기간트리카 부대가 일대에 순찰을 돌 테니 여긴 안전할 거다. 협회에게 말해서 축제를 조금 빨리 종료하라고 해야겠어.”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겠죠?”

“마족이 마음만 먹었다면 이곳을 쑥대밭을 냈을 테니 공격 의사는 적은 것 같구나. 그것보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된단다. 전망대로 가면 불꽃놀이가 잘 보여. 너희는 걱정 말고 학교로 돌아가거라. 지금부터는 어른들의 몫이니까.”

그들은 뒤처리를 한다고 고생할 치안대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침묵을 지키며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네의 손에는 커다란 꾸물꾸물 베어 인형이, 재경의 손에는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세트가 들어가 있는 쇼핑백이, 비키의 손에는 넬사 고원산 푸딩이 담긴 상자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현실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몸은 붕 떠있는 기분이었다.

“불꽃놀이 시작한다. 우리가 산에 오래 있었나 봐.”

“그러게, 시간이 벌써 그렇게…….”

그들이 전망대에 도착하기 전에 폭죽이 터졌다. 멀리서 화약 터지는 냄새가 흘러왔다.

화마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펑펑 터져대는 불꽃을 보아도 신나지 않았다. 특히나 불꽃놀이를 제일 기대했던 재경의 표정이 가장 어두웠다.

“우리만의 애도의 꽃이라고 생각하자.”

하늘을 향해 작게 묵념을 한 그들은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화려한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불꽃이 피고 지듯, 생명도 피고 진다. 그들은 죽는 순간 아름다웠을까. 재경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못한 채로 스러져 간 게 아닐까.

6월 마을 축제 챕터는 이걸로 끝이다. 신나는 축제 이벤트니까 암만 화마와 마주치더라도 불꽃놀이를 보면 다시 신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게임에서 보는 스토리와 여기서 직접 느끼는 이야기의 차이는 하늘과 땅끝 정도로 멀었다.

화마와 마주친다는 것의 의미를 왜 난 더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번 달에도 마족과 마주쳤으면서.

“…그래도 그 소녀라도 지켜서 다행이야.”

무력감을 곱씹는 도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맞다, 이 이벤트는 마족에게 죽을 뻔한 소녀를 구하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구나. 누군가가 생각했다.

“저지…….”

재경이 자신이 입고 있는 류제의 저지를 무표정으로 훑었다. 나는 처음으로 호감도를 올리는 데 실패했다. 다음 달은 방학과 유네에 대한 이야기이다.

재경은 하늘에 번쩍이는 불꽃을 멍하니 쳐다보는 유네를 흘겼다. 가장 만만한 히로인이 비키와 유네였는데 비키 루트는 오늘의 호감도 이벤트가 실패함으로써 확률이 줄어들었다. 그러니 다음번 이벤트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괜히 걱정하지 마. 이거 하나 실패했다고 해서 딱히 배드 엔딩이 확정인 것은 아니잖아. 난 총 25가지 호감도 이벤트 중 딱 한 번 실패한 거야.

처음 공략했을 때도 잘 몰라서 실패 많이 했고. 그때도 완전히 루트가 망하지는 않았어. 지금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나쁜 상황이라 할 수 없고. 빙의한 이후 지금까지 꽤 운도 좋은 편이었잖아.

“저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까?”

“몰라도 되도록 하는 게 어빌리터의 숙명이겠지.”

비키가 결의에 찬 얼굴로 답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삼류 악역인 내가 히로인들하고 친해진 바람에 그런 거겠지. 아무리 가정이지만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 하겠다.

그럼 나는 다음 유네 이벤트를 실패하지 않으려면 뭘 하면 되지? 그걸 의식해 버린 이상 호감도 이벤트 개입도 방조도 어렵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아까 그 마족에 대한 거?”

“…네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저번 병마의 침입 사건으로 류제가 마왕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재경은 이제 공식적으로 아는 척을 할 수 있었다.

정곡을 찔리자 류제는 머쓱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재경의 반격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싶어서 눈동자를 굴리다가 괜히 사과의 말을 꺼냈다.

“저지 커서 불편하지? 제대로 못 지켜줘서 미안해.”

“딱히 네가 안 지켜줘도 돼. 나 혼자서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재경은 또 강한 척을 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을 못 버티는 성격임을 고백받았던 류제는 그가 실은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지레짐작하고 어깨를 도닥였다. 재경은 그 도닥거림에 힘을 얻기는커녕 진이 빠졌다.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안 담아.”

아까부터 렌의 상태가 이상한 것은 역시 화마에게 살해당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대했던 불꽃놀이를 보면서도 침울해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류제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어땠어?”

“뭐가.”

“축제. 신나 했었는데 마족 때문에 풀 죽은 거 같아서.”

“…그냥, 그저 그랬어.”

재경이 들고 있는 여장 대회 준우승 상품을 짐짓 끌어안았다.

그래. 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마족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더라면 이런 찝찝한 기분을 시원하게 던질 수 있었을 거다. 그럼 저 불꽃놀이도 마음의 위안이 될 수 있었겠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틀어진 게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호감도 이벤트가 죄다 우연으로 성공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아무래도 쓸모없는 사람 같잖아. 오히려 이 세계를 망치는 것 같아.

재경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류제가 저지 소매 아래에 있는 재경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내가―”

그때 라우라 축제 위원회에서 준비한 가장 큰 폭죽이 터졌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소리다.

류제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건 알았는데 커다란 폭죽에 잠시 한눈을 판 재경의 눈동자에 꽃이 피었다. 가장 큰 꽃이 하늘 스케치북을 한가득 채웠다. 마음이 찌부러질 정도로 장관이었다.

할머니한테 보여 주고 싶다.

“…게.”

“응? 뭐라고? 폭죽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뒤늦게 류제를 쳐다본 재경이 되물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다시 돌아오는 답은 늘 정해져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류제가 부끄러워하며 열없게 웃었다.

“재미없는 짜식.”

류제의 마음을 짐작조차 못 하는 재경은 싱겁다며 피식 류제를 따라 웃었다. 짜식이 미연시 주인공이면서 마음 약해가지고 어떻게 살려나 몰라. 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재경이 류제의 허리를 툭 치고는 오늘 남은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축제 리플릿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정말 라우라 축제가 끝나는구나. 다음에는 행복한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

“비키 양,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오기 잘한 거 같아?”

괜히 그들에게 일주일 내내 꼬임당하는 바람에 공부하다 말고 축제를 보러 내려왔다가 마음만 불편해지고 올라가는 게 아닐까 유네가 걱정스러웠다.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비키는 옛날의 그 참혹한 비극을 떠올렸다.

“뭐… 그러네. 그래도 좋은 일도 했고, 푸딩도 받았으니 됐어.”

“다행이다. 렌 군은 이제 괜찮아? 불꽃놀이 엄청 보고 싶어 했잖아.”

“벼…별로 그런 건 아냐. 그냥 실제로는 어떤가 궁금해서 그랬지.”

그깟 불꽃놀이가 뭐라고 기대했던 감정이 창피했던 재경이 불꽃놀이 글자에 동그라미 표시를 해놓았던 리플릿을 화들짝 접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불꽃놀이를 제일 기대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지. 내가 그렇게 알기 쉬웠나. 귓불을 붉혔다.

전망대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사그라지는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공중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저 불꽃만큼이나 덧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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