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3) (13/112)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3)

무대 인사가 끝난 다음 사회자에게 상품을 받고 내려온 유네와 재경이 터덜터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재경은 도통 납득을 못하겠다며 손에 들린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시리즈’ 상품 상자를 응시했다.

준우승? 내가? 내 뒤로 그 몬스터가 불 쇼랑 놀라서 눈이 절로 튀어나올 차력 쇼를 했는데 무반주로 노래 부른 내가 준우승이라고? 말이 돼? 내 생에 첫 상장이 여장 대회 준우승이라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돼!

“우리 둘 다 좋은 성적이 나와서 다행이야. 렌 군이 노래를 잘 부를 줄 몰랐어. 대기실에서 들었을 때는 진짜 놀랐거든. 직접 못 들은 게 아쉽다. 난 틀림없이 렌 군이 1등 할 거라고 생각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날 띄우려고 하지 마아!”

그때만 생각하면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던 재경이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선물 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유네도 들었다고? 다 망했어. 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데에서 노래를 불렀지? 들뜬 것도 정도가 있지. 회상하려 시도만 해도 하늘이 노래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으엇차, 조심해. 수고했어. 거봐, 우리 말대로 1등 했지?”

대회가 끝나고 친구들이 있을 대기실로 향하던 류제가 재경이 부끄러워서 휘청거리자 손으로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혹시라도 넘어질까 지레짐작한 것인지 류제가 그대로 재경을 바르게 세워주었다. 류제의 품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에 재경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류제 너 이 자식, 어디 갔었던 거야! 왜 여태 안 보여?”

“어디긴……. 렌, 너도 수고했어. 노래 잘 부르던걸?”

“그 이야기 하지 마. 내 머리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거야? 다른 애들도 잘 부른다고 했는걸.”

“다른 애들?”

거슬리는 단어를 콕 집어 물은 재경이 류제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옷도 안 갈아입고 화장도 지우지 않은 탓인지 그 시선을 느끼니 괜히 마음이 술렁거렸다. 류제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아까 만났어.”

의연한 척 한 손으로 재경의 허리를 감싸 안은 류제가 친히 몸을 빙그르르 돌려 주었다.

덕분에 뒤에 있던 사람을 볼 수 있게 된 재경은 입을 틀어막고 낄낄거리는 반 친구를 발견하고 얼굴이 토마토처럼 잘 익었다.

“푸하하! 렌! 공연 잘 봤어! 노래 잘… 크흐흐 부르더라.”

“진짜 예상외다. 하하하, 렌이 여장에 무반주 노래라니. 다음 학교 축제 때 기대할게!”

“으하하, 그것도 준우승을 거머쥘 정도로 대단… 으하하. 또 떠올랐다. 앗,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잊고 있었네. 유네도 우승 축하해! 유네는 귀여우니까 당연하겠지만.”

“앗… 고…고마워. 헤헤.”

여자가 여장 대회에서 여장으로 우승했다는 것을 축하받은 기분은 괜시리 찝찝했다. 다들 내 성별에 속고 있으니 당연하겠지만, 하아. 유네는 어찌 되었건 들키지 않고 잘 끝나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왜, 왜, 왜 데리고 온 거야! 빨리 내쫓아!! 저리로 내쫓아 버려!”

그녀들의 등장에 기겁한 재경이 류제의 몸을 바리케이드로 썼다. 의도치 않았겠지만 그렇게 되니 마주 보고 껴안는 자세가 되어버렸다. 재경은 그저 부끄러워서 류제를 방패막이 삼았을 뿐이지만, 뭐… 보는 사람이나 느끼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게 보였다.

“꼭 널 가까이서 보고 싶대서… 그만.”

“이 멍청이! 망했어. 내일이면 학교 전체에 소문이 다 퍼질 거야!”

“우후후, 물론이지. 게다가 이거 봐. 사진도 팔더라고. 내가 매상에 도움을 좀 줬다. 감사해라.”

그녀가 아까 산 재경의 여장 사진 시리즈를 포커 게임 하듯 주르르 펼쳐 잡았다. 종류도 다양했다. 노래 부르고 있는 사진, 무대에서 뻘쭘하게 손을 매만지고 있는 사진, 어째서인지 대기실에서 쉬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안 그래도 거울 볼 때마다 수치스럽다 생각하는데 객관적인 시선에서 찍힌 사진이 존재한다니 참을 수 없었던 재경이 와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그 사진을 빼앗으려 들었다.

“내놔! 내놓으라고! 진짜 그만둬. 나 학교 못 다녀!”

“후하하. 귀여운데 뭐. 뺏어봐라~ 렌한테는 절대 안 빼앗길 거다.”

“류제에에! 내 일생일대 소원이다. 제발 저 사진 좀 빼앗아줘.”

“어어, 그럴 수는 없어.”

“왜! 이 치사한 놈아. 내가 고통받는 게 그렇게 보고 싶냐?”

“포기하시지. 류제는 우리 편이니까. 왜냐면 류제도 아까―”

“와아아악!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쉬이잇!”

류제도 아까 렌의 여장 사진을 몇 장 사 가는 걸 봤던 친구들이 그새를 못 참고 폭로하려 들었다. 류제가 날쌔게 그들의 싼 입을 막았다. 허둥지둥 움직이는 류제의 주머니 속에 재경의 사진이 잔뜩 들어있었다.

“내놔!”

“싫어!”

저쪽에서 사진을 뺏고 빼앗기는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유네와 다른 친구는 다른 나라에 있는 듯 평화롭게 사진을 구경했다.

“어디. 와아, 렌 군이다. 이렇게 봐도 귀여워~”

“유네 것도 있어. 귀엽지? 진짜 여자애 같아.”

그 말에 뜨끔한 유네가 땀을 뻘뻘 흘렸다. 그야 진짜 여자애니까. 유네는 말로만이라도 고맙다며 애써 얼버무렸다.

그러는 사이 사진을 가지고 한바탕 말썽이 생겼던 친구들의 육탄전이 조용해졌다. 결과, 완벽하게 재경의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류제, 이 배신자.”

“기…기념으로 산 것일 뿐이야. 그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

“기념으로 왜 그런 걸 사. 돈 낭비하지 마! 내 눈앞에 보이기만 해봐라.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비키한테 부탁해서 죄다 불태워버릴 테니까. 알아들었어?!”

“알았어. 혼자만 보면 되지?”

“호…혼자서도 보지 마! 그런 걸 왜!”

남의 여장 사진을 왜 본다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재경이 그런 파렴치한 짓거리 따위 했다간 평생 절교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류제는 애초부터 남들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고, 같은 반 친구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재경이 그럴 배짱도 없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기에 말로만 예예 거리면서 웃어넘겼다.

“덕분에 오랜만에 재미있는 구경 했네. 종종 노래 불러줘. 다른 건 몰라도 노래 잘 부른다는 말은 거짓말 아냐.”

“맞아맞아. 진짜 깜짝 놀랐어. 렌한테 그런 재주가 있었다니.”

“노래는 의외지. 솔직히 요리를 잘하는 것도 몰랐는데.”

“짜식들이 사람을 완전 내추럴 본 깍두기로 보네.”

재경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선 잘해야 하는 일이 따로 있단 말이야.

“우리는 이제 가봐야겠다. 이다음 사격 대회에 나갈 거거든. 그럼 내일 봐. 재미있었어!”

“안녕!”

“잘 가!”

선약이 잡혀 있는 반 친구들을 향해 유네가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언제 받은 건지 그녀의 손에도 재경의 여장 사진이 몇 장 들려 있었다.

“우리도 그만 가자. 설마 렌, 너 그대로 갈 생각은 아니지?”

류제가 여장을 한 재경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갈아입을 거야, 짜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세상 끔찍한 이야기나 늘어놓는다. 재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흉포한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

“에… 렌 군, 그 모습 정말 어울리는데. 그대로 가도 괜찮지 않아? 모처럼 치마 입은 게 아…아쉬운걸.”

그러자 몰래 재경의 여장 사진을 구경하던 유네가 허둥지둥 사진을 숨기며 옷을 갈아입겠다는 재경을 붙들고 말렸다.

“너도 류제 닮아가냐? 옆에서 류제 심술이나 거들긴! 쓸데없이 그런 거 배우지 마. 떽!”

유네의 말도 안 되는 의견을 묵살한 재경이 엑스 자를 만들어 고개를 저었다. 수상한 할머니의 이상한 논리에 속아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리긴 했어도 귀엽니 사랑스럽니 거짓말투성이인 어떤 사탕발림에도 재경은 넘어가지 않을 거라 맹세했다.

“진짜로 갈아입을 거야?”

“당연하지!”

그의 반대는 견고했다.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가 포함되어 있는 여장 대회 이벤트를 성공리(?)에 마친 건 좋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잖아. 이 꼴로 돌아다니다가 또 아는 사람들하고 마주치기라도 해봐.

특히 다음 이벤트에서 볼 비키. 놀릴 거 생각하면 쪽팔려서 얼굴 들고 못 다닐 거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내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볼걸. 그게 제일 싫어!

“한시라도 빨리 벗어던질 테다!”

재경이 쾅쾅 발을 구르며 옷을 벗어둔 대기실로 향했다. 류제와 유네는 렌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니 아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재경의 의견이 강고하니 어쩔 수 없다. 유네와 류제도 재경을 따라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 대기실로 들어갔다.

“켁……!”

“어.서. 오.렴⚦”

여장 대회가 끝난 대기실에는 처음 출전한 유네와 재경에게 우승과 준우승을 빼앗긴 ‘숙녀’들이 이글이글 불꽃과도 같은 기를 내뿜었다.

먼저 대기실에 돌아와 있었던 주제에 옷도 안 갈아입고 뭘 했는지 우람한 그녀들은 여전히 숙녀 차림으로 승리를 거머쥔 두 사람에게 질투 섞인 강력한 뽀뽀 세례와 끔찍한 볼 부비부비의 형벌을 내렸다. 샤프심 같은 수염 자국이 아팠다.

“잘 가, 유네쨔응! 흑흑, 오늘 너무 귀여웠어. 나중에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편지할게!”

“사랑스러운 양 갈래 소년도 잘 가렴. 다음번엔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사…사랑스……. 끄으응. 져도 상관없었는데.”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겨우겨우 화장도 지우고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재경과 유네는 류제와 함께 몬스터… 아니 그들을 도와준 숙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콘테스트를 떠났다.

재경은 저 끔찍한 그녀(?)들과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 진절머리를 떨었다. 옆에서 재경의 마음도 모르고 류제가 피식 웃었다.

“인기 많네.”

“류제, 너 지금 네 일 아니라고 막말하지?”

“생김새는 좀 무서웠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었어.”

유네가 여장 숙녀들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그건 유네만의 의견인 것 같다.

그 할머니가 날 꼬시려고 했던 말은 다 거짓부렁이라고 치면 저 몬스터들은 왜 여장 대회에 나간 걸까. 재경은 정말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여장 대회를 떠나는 그들의 뒤로 사라 하놋이 의미심장한 오라와 함께 등장했다. 세 사람은 그녀가 등장했는지 짐작도 못 한 얼굴로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녀가 지팡이를 탕, 바닥에 크게 굴렀다. 아까 재경을 다룰 때와는 다른 진지한 점술가의 얼굴이 그들을 응시했다.

“잠깐!”

꾸리꾸리한 수상한 이펙트와 함께 돌연 찾아와서 주인공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역할을 맡은 그녀는 그에 걸맞은 포스로 류제 신리를 불러 세웠다.

노쇠한 할머니의 우렁찬 목소리에 그들이 순서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무슨―”

재경은 저 못된 심보를 가진 할머니가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할까 싶다가도 게임상에서 수상한 할머니가 등장하는 때가 지금도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아아, 그래. 저 할머니와 류제와의 재회가 이번 챕터에서 서술되었으니 그녀가 역할에 맞게 류제를 불러 세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은……!”

류제가 곧바로 그녀의 존재를 의식했다. 수학여행 세 번째 날, 재앙이니 뭐니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사라 하놋에게 그는 묻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다.

류제는 등급1의 병마족과의 싸움에서 얻은 정보로 자신이 마왕의 부활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마음속 깊이 품었다. 그렇기에 이전에 만났을 무렵부터 미래를 암시했던 그녀와의 접촉을 무의미하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러나 시크릿 엔딩을 보지 않는 한 절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주의 캐릭터인 사라 하놋은 류제의 질문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 제 말만 던졌다.

“류제 신리, 선택을 신중히 하라는 내 충고를 기억하라. 그리고 너.”

사라 하놋 입장에서는 로라 하놋의 예언을 해치는 이레귤러였던 재경을 향해 지팡이로 가리켰다. 둘러쓴 후드 안쪽에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번뜩였다.

“너에 대한 평가는 잠정 보류하도록 하지.”

사라 하놋의 얼굴은 돌을 던져도 흔들리지 않는 호수처럼 진지했다.

저 할머니, 또 연기한다. 저 할머니는 내 어디가 그렇게 불만일까. 자기에게 죄가 없다고 여긴 재경은 못마땅했다.

그래도 내가 삼류 악당이라고 무시하거나 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진짜 삼류 악당 입장을 생각하면 입술이 절로 주욱 나왔다.

“렌 군? 류제 군? 저 할머니 알고 있어?”

“잠시만,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할머님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저는―”

류제가 포기하지 않고 사라 하놋에게 못다 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제 말을 마친 사라 하놋은 요지경 속 거울의 세계처럼 갈라진 공간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실마리를 눈앞에서 놓쳐 버리자 류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무했다.

“어어! 사라졌어.”

돌연 등장한 할머니가 여장 대회 심사 위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유네는 그녀가 상상도 못 할 방법으로 사라지자 일순 감탄사를 내질렀다.

설마 ‘순간 이동’인가? 아니면 또 다른 공간 이동 어빌리터? 어찌 되었건 수상쩍은 할머니다. 혹시 류제 군이랑 렌 군은 저 할머니를 알고 있나? 나…나만 지금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거 아니지? 그렇지?

“뭐야, 시시하게.”

침묵 속에서 제일 먼저 운을 뗀 것은 재경이었다. 이게 다야? 저 두 문장을 말하기 위해 이 챕터에 나온 거였어? 그가 재미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재경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류제는 착잡한 눈으로 그녀가 있었던 곳을 훑었다. 분명 그 할머니는 뭔가 알고 있다.

“누구였을까. 류제 군, 혹시 아는 사이였어? 왜 우리한테 말을 걸었을까?”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몰라. 렌, 저 할머니 분명 그때 벼룩시장에서 만나본―”

“나 참, 사람을 갑자기 불러 세우더니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만 하긴.”

의도적으로 말을 끊은 재경이 이 이상 더 볼 게 뭐가 있냐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또 저런 수상쩍은 발언을 하기 위해 류제의 눈앞에 이따금 출몰할 거다.

재경은 그때 또다시 만나길 기약하며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시리즈’가 든 쇼핑백을 들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렌 군! 같이 가!”

우승 상품으로 받은 커다란 곰 인형을 들고 유네가 그 뒤를 이었다.

재경이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 류제도 주저하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류제의 시선은 이제 재경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저번 수학여행 때 저 수상쩍은 할머니에게 먼저 다가간 사람은 렌이었다. 이상하다. 렌은 저 할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건가? 그리고 평가 보류? 그건 나에 대한 건가? 아니면 렌? 모르겠다. 모두 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생각이 복잡해진 류제가 작게 눈을 내리깔았다. 선택을 신중하게 하라니. 무슨 선택?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 나는 나. 인간인 류제 신리다. 내 자신의 정체를 확언할 수 없을지언정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래, 그래야만 해. 저 할머니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렌 군! 기다려!”

수상쩍은 할머니가 등장해서 기묘한 경고를 날렸든 간에 그게 그들이 라우라 축제를 두고 기숙사로 돌아갈 이유는 되지 않았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불꽃놀이도 보지 못했고, 아직 많이 먹기 대회에서부터 보게 될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가 남은 상태다.

모처럼 축제에 왔는데 귀찮은 게 싫어 예언자 할머니에 관한 생각을 휘발성 메모리로 날려 버린 재경이 리플릿을 살피며 이다음 비키의 이벤트가 시작되는 ‘많이 먹기 대회’가 열리는 장소 위치를 찾았다.

“꺄하하!”

“사탕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아직 사탕 사냥이 끝나지 않은 아이들이 마족 흉내를 내며 뛰어다녔다.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시끄럽다. 헬륨 풍선을 들고 뛰어가는 어른들도 라우라 축제를 어린아이들보다 즐기는 중이었다.

사람이 실종되었다며 치안 지구대원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는 누군가도 있었지만 그건 아직 저 세 사람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렌 군, 걸음이 너무 빨라. 천천히 가줘.”

“너희들이 거북이처럼 느린 거야. 근데 유네, 그 꼴로 잘도 뛰어오네. 인형이 너무 크지 않아? 네가 인형을 들고 있는 게 아니라 인형이 널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야.”

거의 자기 키만 한 인형을 들고 쫄래쫄래 다가온 유네는 앞이 보이지 않아 꾸물꾸물 베어 옆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재경이 여장 대회 상품으로 받은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시리즈는 작은 담요와 꾸물꾸물 고양이 잠옷, 건전지로 돌아가는 작은 취침 등 부피가 크지 않은 것들이라 쇼핑백 안에 전부 들어갔는데 유네는 받은 인형이 너무 커서 불꽃놀이 전까지 들고 다니기에 곤란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별달리 보관할 곳도 없고. 렌 군이 걱정할 정도로 무겁지는 않아.”

소중한 추억거리가 될 상품을 안은 유네가 바보처럼 웃었다. 재경은 그럼 상관없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불꽃놀이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애매하네. 그동안 뭐 할지 생각해 봤어?”

뒤이어 오던 류제가 재경과 유네 가운데에 끼어들어 깊게 어깨동무를 했다. 류제의 몸무게 때문에 어깨가 꾸욱 눌린 둘은 어쩔 수 없이 허리가 푹 숙여졌다.

“끄응. 류제 군……!”

“무거워 류제. 너 이러다가 아까처럼 또 냅다 예고도 없이 들고 날아오르면 절교할 거다. 절교!”

아까 전 여장 대회가 열리는 무대로 향할 때 류제가 했던 만행이 머릿속에 스친 재경이 기겁했다.

“듣고 있냐고! 야, 류제!”

알라마니 기술관처럼 마천루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아?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그 반발이 거참 시끄럽다. 고개를 꺾은 류제가 렌의 있는 방향에 달린 귀를 멀리 떨어뜨렸다.

“깐깐하긴. 그렇게 하면 사람 많은 곳에서도 빨리 이동할 수 있어서 편한데.”

“단점이 엄청나잖아!”

“맞아, 류제 군!”

둘 다 시끄럽게 반박하자 류제는 애초부터 그럴 생각 없었다며 두 손을 들어 무고함을 표했다.

그 대신 류제는 끙끙거리며 인형을 옮기는 유네에게서 인형을 대신 들어 옆구리에 끼었다. 내심 무거웠던 유네가 고맙다고 인사했다.

“천만에. 이 근방에 다른 볼거리가 있나 찾아봐야겠는걸.”

류제가 볼거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쩌면 사격 대회에 출전한다던 친구들의 경기를 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러나 재경은 이때다 싶어서 류제에게 리플릿을 들이밀어 제 의견을 어필했다.

“여기 어때? 여기서도 뭘 하는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라우라 축제 위원장 배 많이 먹기 대회?”

“정말이야. 여기서 가까워. 류제 군, 한번 가보자! 재미있을 것 같아.”

퍼레이드, 차전놀이, 여장 대회에 이어 새로운 볼거리가 쉬지 않고 등장했다. 라우라 축제를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한 유네가 신이 나서 호기심을 보였다.

류제는 남이 많이 먹는 거 봐서 뭐 하냐는 생각이었지만 불꽃놀이 전까지는 할 일도 없으니 괜찮겠지 싶어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많이 먹기 대회가 열리는 장소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세 사람이 많이 먹기 대회 회장을 찾은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구름처럼 모여 원을 만든 사람들이 회장에서 환호성을 질러댔다.

구경꾼들의 한가운데서는 다섯 명의 참가자들이 입 안에 햄버거를 욱여넣고 있었다. 중간에서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자리를 오가며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생중계를 했다.

―어마어마한 빠르기입니다. 성적이 가장 부진한 8번 참가자가 50개를 초과한 지금! 약 5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헐, 들었어? 50개래. 설마 그걸 다 먹은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많이 먹기 대회니까. 근데 거의 다 끝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이게 메인 디시 부문이래. 이다음에 바로 후식 부문 대회가 있대나. 그것도 보자.”

재경이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와 관련될 대회 종목을 류제의 뇌리에 박아 넣었다. 관심을 보인 류제가 재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부분을 세심하게 살폈다. 확실히 그랬다.

“좋아.”

류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꽃놀이 전까지 시간 때우기용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조아써! 재경이 잘 따라오는 류제 몰래 혼자 파이팅을 했다.

―마지막 스퍼트! 한꺼번에 전부 밀어 넣고 있는 오른쪽 선수. 과연 역전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70개 돌파입니다!

“와아, 햄버거를 70개를 먹은 거야? 나는 한 개 먹기도 벅찬데 어떻게 그러지?”

“우웩… 생각만 해도 토 나와. 위장이 고무로 되어있나?”

“그러게. 심지어 저 사람은 되게 말랐어.”

류제가 다양한 체구의 사람들이 골고루 분포한 대회장을 가리켰다. 햄버거를 빠르게 해치우고 있는 어떤 사람은 재경보다 빼빼 마른 팔뚝을 가졌다. 그걸 보고 있자니 식도에 음식 전용 포털이 달린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이 절로 떠올랐다.

―이제 남은 시간은 약 3분! 6번 참가자가 햄버거를 알약 삼키듯 꿀꺽꿀꺽 삼키고 있습니다. 반면 초반 스퍼트를 냈던 3번 선수, 만복감에 패배한 것인가. 햄버거를 든 손을 주저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가장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던 사람이 1초에 하나씩 햄버거를 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 1등을 하던 참가자가 주저하고 있는 틈을 타서 2등이 치고 올라왔다.

많이 먹기 대회라고 해서 안일하게 보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간트리카 대결처럼 경쟁이 치열했다.

“어마어마하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잘 안 보여. 내 키가 딱 10센티만 더 컸으면 보였을 텐데 말이지. 류제 너는 보이냐?”

“나도 잘… 우앗, 밀지 마세요.”

남들이 지나쳐 가기엔 무시 못 할 만큼 커다란 인형을 들고 있던 류제는 뒤에 있던 사람이 옆구리에 낀 인형을 치고 지나가자 휘청거려 넘어질 뻔했다.

그 반동으로 앞에 서있던 모자를 쓴 붉은 머리 여자애의 등을 쳐버리고 만 류제가 실수를 직감했다. 잘 눌러썼던 모자가 붙잡을 새도 없이 훌렁 벗겨졌다.

“꺅! 당신 뭐 하는 거야! 눈 제대로 달고 있는 것 맞―”

“죄송합니다… 어?”

가만히 있는 사람을 갑자기 밀지를 않나, 예의 없는 뒷사람에게 화가 난 비키는 늘 하나로 높게 묶었던 포니테일을 긴 생머리로 풀어서 색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 바보 같은 류제의 면상이 가득 들어왔다. 류제의 목소리에 의심이 품어졌다.

“비키?”

“아… 으…….”

머리를 길게 풀긴 했지만 샐쭉한 눈매 속 봄빛의 잔디처럼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라든가 타고난 붉은 머리카락은 그녀가 비키 셀로니아라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앞을 보고 있던 유네마저도 비키를 알아보고 반가워서 알은체를 했다.

“앗… 비키 양? 비키 양 맞지? 비키 양도 놀러 온 거야?”

누구보다도 셀로니아 가문의 부활을 꿈꾸는 문무 겸비 귀족가 영애인 그녀는 어린애처럼 푸딩에 정신이 팔려 남몰래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려다가 제일 들키고 싶지 않았던 세 사람에게 발각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축제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어?”

눈치 없는 류제는 비키가 변명할 거리를 생각할 새도 없이 돌직구를 날렸다.

비밀로 해오던 속셈이 예고도 없이 전부 까발려지고 말았다. 모자를 푹 눌러쓴 비키가 준비했던 핑계를 대었다.

“그…그…그…그냥 어…어…어쩌다 보니 우…우연히 지나가다가 보게 된 것뿐이야! 생각 없이 놀러 온 너…너…너희랑 똑같은 취급하지 말아 줄래!”

얼마나 당황했는지 해명하는 목소리에서 삑사리까지 나왔다. 그마저도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이유는 손에 가면이니 탕후루니 기념품으로 산 여러 가지 축제 상품들이 들려있기 때문일까. 손목에 슬렉터와 함께 차인 많이 먹기 대회 참가자 표식이 정점이었다.

류제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이 정말 우연일지 의심스러워 비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비키가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도리어 화를 냈다.

“왜 날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나…나는 뭐 축제 오면 안 되냐?”

“뭐야, 결국 놀러 왔을 거면 같이 놀면 좋았잖아. 아까 렌이랑 유네 여장 대회 나가서 우승도 했었는데.”

“뭐어?! 정말? 유네만 나간다며?”

“류제, 너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갑자기 주제가 비키에서 여장 대회로 급커브를 돌자 재경이 기겁하며 류제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장했었다는 사실을 비키에게만큼은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재경이 류제만 신경 쓰는 사이 복병처럼 에헤헤 웃어 보인 유네가 정말로 그렇다며 아까 친구들에게서 받은 재경의 여장 사진을 비키에게 자랑스레 보여 주었다.

“와아악! 유네, 뭐 하는 짓이야!”

재경이 한발 늦게 유네를 막으려 들었지만 이미 비키가 재경의 여장 사진을 본 후였다. 식겁한 재경이 잽싸게 사진을 빼돌렸다. 사진을 잘 보고 있던 비키가 아쉬운 듯이 감탄사를 흘렸다.

“앗……!”

“유네, 이 배신자. 그걸 보여 주면 어떻게 하냐!”

“뭐어야. 렌, 너 절대 안 나간다고 호언장담했을 땐 언제고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을 바꾸었대? 내가 정정당당하게 상품을 쟁취하래서 그런 거야?”

“그런 거 아냐!”

축제에 관심 없다는 거짓말을 들켜서 어찌할 바 몰라 하던 게 바로 몇 초 전인데 비키는 재경의 여장 사진을 보고 도리어 기고만장해져서 악동 같은 얼굴을 했다.

입꼬리가 씰룩씰룩, 대폭소하기 1초 전 같은 표정으로 킥킥거리는데 재경은 그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비키에게 놀림만 당하겠다 싶던 재경이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삿대질하며 폭로했다.

“너야말로 축제 관심 없다고 했으면서 뭐야, 그 손목에 있는 건! 이 대회 출전자 표식이잖아!”

“아니… 이…이건…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어…어쩔 수 없었어! 절대 내 의지가……!”

“뭐가 어쩔 수가 없어! 상품인 넬사 고원산 푸딩이 먹고 싶었을 뿐이잖아. 이 푸딩순아!”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 아니란 말야. 진짜로!”

다시 역전당한 비키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부정하며 주먹 쥔 양팔을 버둥거렸다. 거짓말은 잘 못하는 비키의 얼굴은 부끄러움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비키가 뭘 하건 별 관심 없던 류제나 별생각 없었던 유네도 재경의 잇단 폭로를 듣고 비키의 왼쪽 손목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라우라 축제 위원장 배 많이 먹기 대회 디저트 부문 출전자 no. 05’

“정말이네! 비키 양, 진짜 많이 먹기 대회에 출전하는 거야?”

“많이 먹기 대회라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기분전환치고는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아냐?”

“사…사람이 살다 보면 그…그럴 수도 있지.”

비키는 결국 푸딩을 먹기 위해 대회에 출전한다는 걸 인정하고 말았다. 비키는 억울했다. 저번 주 내내 저 삼인방을 염탐하며 이동 경로를 전부 꿰차고 있었는데 왜 이쪽으로 온 거야. 여기 올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잘만 하면 안 들킬 수 있었는데!

“너희들이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볼일 없으면 어서 다른 곳으로 가버려.”

“불꽃놀이 전까지 딱히 놀 게 없어서 이거나 구경하기로 했지. 너 이다음에 바로 출전한다고? 그럼 그거 구경하면 되겠다.”

“싫어! 보지 마! 당장 사라지라고!”

지금 햄버거를 무지하게 먹고 있는 사람들처럼 양 볼에 와구와구 푸딩을 넣고 꿀꺽꿀꺽 삼키며 교양 없이 음식을 먹는 꼴을 비키는 죽어도 저 세 명 앞에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저 세 명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이렇게 변장까지 하고 온 거다. 어쩌다 탄로가 난 건지 비키는 괜히 열받았다.

―승리는 1번 참가자! 무시무시한 역전극이었습니다! 상품 수여와 추첨은 다음 디저트 부문 대회와 한꺼번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인 디시 부문 많이 먹기 대회가 끝났습니다. 선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거기, 선수의 지인분들! 선수분 부축 좀 해주세요. 약 10분 후부터 디저트 부문의 대회를 시작할 예정이니 출전하시는 선수분들께서는 곧바로 제 왼쪽에 있는 천막, 선수 대기실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앗… 가야 하는데……!”

비키는 선수들이 모여야 한다는 소리에 허둥지둥 발을 굴렀다.

류제가 밀어서 떨어져 버린 모자를 툭툭 턴 비키가 얼굴을 가릴 수 있도록 푹 눌러썼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군것질거리들을 얄미운 재경에게 억지로 떠넘겼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이판사판이야. 내가 여기 나갔다는 거 누구한테 말하기라도 하면 내 화염으로 육포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예이.”

귀찮았던 류제가 대충 답하자 비키는 고개를 팩 돌려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곧 총총 뛰어서 천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폭풍우가 쓸고 지나간 기분이다. 유네가 헤에, 신기하다며 비키의 뒷모습을 좇았다.

“비키 양도 의외네. 이런 행사는 절대 참여 안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비밀로 한 건가?”

“그만큼 푸딩을 좋아하는 거겠지.”

“그런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류제가 저번 수학여행 때 렌이 비키에게 사주라고 했던 넬사 고원산 푸딩을 떠올렸다.

비키가 직접 말한 적도 없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아서는 잘도 떠든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렌은 이상한 데에서 예리하단 말이야.

“여기는 잘 안 보이니까 맨 앞으로 가자. 감히 날 놀려? 나도 놀려주고 말겠어!”

재경은 구경거리가 되어 푸딩을 먹을 비키를 놀릴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눈동자를 굴려 재경을 보던 류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이익 아까 비키가 재경의 여장 사진을 보고 웃었던 것처럼 소악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아악!”

“꺄아악!”

앞에 사람이 많으니 헤쳐나가는 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 류제는 왼쪽에는 커다란 꾸물꾸물 베어 인형과 유네, 오른쪽에는 재경을 순식간에 감싸 안고 크게 점프를 했다.

가볍게 점프한 주제에 적어도 10미터는 높게 날아올라 선 류제는 단번에 재경이 그리던 맨 앞으로 착지했다.

그 짧은 과정 동안 기괴한 비명을 지르느라 난리였던 유네와 재경은 거의 우는 얼굴로 류제의 허리춤을 부들부들 붙들었다.

사람들은 류제를 보며 남자 어빌리터라며 신기한 듯이 수군거리며 구경했다. 류제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자, 맨 앞 도착.”

“너, 너, 너……! 류제, 너 이 자식아. 내가 그거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했지!”

“앞으로 가고 싶다며. 이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아서.”

“뭐가 그 방법밖에 없어 진짜! 그냥 심술부린 거잖아! 아까부터 뭐가 마음에 안 든 거야?”

“맞아, 맞아!”

마음에 안 든 건 아닌데. 반응이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지. 변명이 안 먹히자 입을 다문 류제가 모르는 척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찌 되었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편한 방법으로 앞자리에 왔으니 된 거 아닌가. 그에 따른 기회비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될 거 아냐.

“두고 봐.”

재경은 류제의 생각에 절대 동의 못 했다.

어차피 류제는 이번 미니 게임에 강제로 출전하게 된다. 이기면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긴 생머리 사복 차림 비키의 일러스트뿐이지만 앙심을 품은 재경은 자신의 여장 모습을 잔뜩 놀려대고 심술궂은 짓거리나 하는 류제가 강제로 출전당해 당황한 모습을 고대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라우라 축제 위원장 배 많이 먹기 대회. 디저트 부문 이제 곧 시작합니다! 자리 고정, 시선 고정! 보십시오. 위원회에서 직접 조달해 온 엄청난 양의 푸딩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명물 푸딩 가게, 사거리 과자점에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맨 앞이라 탁 트인 시야, 누군가가 오른쪽 천막에서 서빙카트를 밀고 나왔다. 유네 키 정도 높이의 서빙카트에 노란색 푸딩이 당당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탄성 작용을 하며 출렁거리는 푸딩의 자태를 비키가 봤더라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침을 뚝뚝 흘렸을 것이다.

―경기를 위한 5개의 카트가 나오고 있습니다! 과연 출전자 5명은 저 푸딩을 전부 먹을 수 있을까요? 1번부터 5번까지의 출전자 중 이길 것 같은 사람에게 응모권을 걸어주세요! 추첨을 통해 수많은 선물을 전달해 드립니다! 승리한 선수에게는 걸린 응모권에 비례하여 상금이 올라갑니다. 그러면 잠시… 네?

우렁찬 목소리로 사회를 보고 있는 사람에게 갑자기 중지하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일까. 맨 앞자리에서 그 광경을 생생하게 관람하던 유네는 시작도 하기 전에 대회가 끝나는 게 아닌가 비키를 염려했다.

사회자는 위원회 관계자가 소곤소곤 뭐라고 귓속말을 하자 마이크를 떨어뜨려 놓고 ‘그럼 어떻게 하죠?’라며 미간에 걱정을 써 붙여 놓았다.

그는 관계자와 잠시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한 명의 참가자가 식중독에 걸려서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전 자격을 다른 분께 양도하겠다는 의견을 내셨다고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 중 지금이라도 참가를 원하시는 분이 있으실까요? 지금 바로 제게 뛰어와 주세요!

“여기도 식중독으로 고생이네. 여장 대회도 식중독 때문에 10명이 참가 못 했다고 했나?”

“단체로 뭘 먹은 거야, 도대체.”

“그러게. 그런데 푸딩 정도면 난이도가 낮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도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오호~”

류제가 그냥 하는 말을 들은 재경이 소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그렇게 말했겠다 이거지.

재경이 류제의 허리를 냉큼 붙잡고 앞으로 밀었다. 다른 쪽 손으로는 류제의 손목을 붙잡아서 강제로 손을 들게 만들었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끙차끙차 뒤꿈치를 든 꼴이 참 귀엽다.

“아저씨! 얘가 나가겠대요!”

“뭐어? 내가 왜?”

몸짓이 귀여워서 정신이 나가 있던 류제가 기겁하며 손을 털어냈다. 자승자박. 편법을 부린 류제의 농간으로 맨 앞줄에 서있는 그들은 조금만 앞서 나가도 바로 사회자의 눈에 띌 수 있었다.

선수가 없어 시합을 걱정하던 사회자가 류제와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재경을 발견하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괜찮겠습니까?

시간이 시간이라 사람들이 저녁을 먹은 후인 데다 노상에서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많이 팔기 때문에 배고픈 출전자를 찾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위원회 측은 지원자를 곧바로 투입시키라고 사회자에게 OK 사인을 내렸다.

―여기 용감한 학생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박수 부탁드립니다. 저쪽으로 가셔서 성함과 소속을 서명해 주세요.

“네에? 아니… 저는…….”

“나랑 유네는 여장 대회까지 나갔잖아. 치사하게 너만 아무것도 안 할 생각은 아니겠지~”

류제의 등에 매달린 재경이 키킥킥 웃으면서 속삭거렸다.

여기서도 본래 이야기의 삼류 악당 렌 지미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아까 사격 게임에서 류제에게 패배한 렌 지미는 유네를 강제로 여장 대회에 출전시키고 나서 그 꼴을 구경하다가 유네가 우승을 하자 투덜거리면서 떠난다.

할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던 렌 지미는 아까처럼 우연히 손목에 출전자 표식을 달고 있는 비키를 발견한다.

늘 고귀한 척 튕겨대는 츤데레 귀족이 무려 많이 먹기 대회에 나가다니. 비키와 앙숙 관계인 렌 지미는 비키를 협박할 셈으로 접근하지만 그 과정에서 또다시 주인공인 류제 신리와 마주치고 처참하게 권선징악을 당한다.

그러다가 주인공이 비키를 따라 얼결에 많이 먹기 대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그래도 갑자기 나가는 건 아니지.”

“나도 여장 대회 갑자기 나갔거든?”

“와아, 류제 군이 나가는 거야? 그럼 인형은 내가 들고 있을게! 파이팅!”

쥐어박으면 못처럼 땅에 박힐 것 같은 조막만 한 둘이서 ‘나가라!’, ‘나가라!’ 하고 얼굴로 말하고 있는데 이걸 단호하게 거부하기엔 양심이 찔렸다.

나만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역시 그렇기는 한데. 하아, 어쩔 수 없지. 적당히 맞춰주도록 할까?

“기대는 하지 마.”

“사나이라면 적어도 대회에 나가서 상은 타 와야지. 내 맘 알지?”

윙크를 못하는 렌이 한쪽 눈을 감으려다 양쪽 눈을 감았다. 나 참. 저는 여장 대회 나가서 준우승했다며 뻗댄다.

쟤 아까까지 여장 대회에서 준우승했다고 짜증 내던 애 맞아? 저 집념에 진 류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비키가 있을 천막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그곳에 서있던 접수원이 류제에게 손짓했다. 그가 다가가니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써요.”

사람을 보지도 않고 건방진 말투로 빈칸을 채우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펜을 받은 류제가 말없이 종이에 이름과 소속을 썼다.

이름: 류제 신리

소속: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이렇게 쓰면 되겠지? 스펠링이 틀렸는지 한 번 더 읽어 확인한 류제가 펜과 종이를 접수원에게 돌려주었다.

고작 이름과 소속을 쓴 것일 뿐인데 그 짧은 시간에 류제를 바라보는 접수원의 시선이 바뀌어 있었다.

그녀와 같은 평민 비어빌리터에게 있어서 어빌리터는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동경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공손하게 어투를 바꾼 접수원이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 적을 류제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이러려고 한 건 아니라서 류제가 겸연쩍게 그녀를 따라갔다.

어빌리터는 귀족과 비슷한 취급이니까. 보통은 대놓고 그렇게 대하지는 않지만 저분은 좀 노골적이네.

어빌리티가 발현되기 전까지는 저 사람처럼 평범했던 류제는 가끔 학교를 나가면 받곤 하는 이 기묘한 시선이 거슬렸다.

천막에 들어선 접수원이 서랍을 뒤지더니 류제의 손목에 비키의 것과 똑같은 띠를 둘러주었다.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참가 번호였다.

“부를 때 나오시면 됩니다.”

‘no. 04’가 적힌 띠를 받자 류제는 결국 이 이상한 대회에 나가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의욕도 없이 날림으로 나가도 되는 것인가 부담감이 든다. 대충 한다고 욕먹는 건 아니겠지?

“뭐야, 류제.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천막 안에서 신분을 속이고 심기일전하던 비키가 소스라치며 짜증을 냈다. 그녀를 놀리기 위해 천막에 들어온 거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류제는 자기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라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식중독 때문에 선수가 부족하다고 그러더라고. 렌이 그걸 듣고 나한테 출전하라고 억지로 시켰어. 자기는 여장 대회 나갔다고 그러면서.”

“시킨다고 그대로 하다니 바보 아냐?”

“내 말이 그 말이야.”

뼈를 때리는 바보라는 말을 류제는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싫다면 그냥 거절하면 될 걸 렌이 나가랬다고 넙죽 나가다니 꼭두각시처럼 의지도 없는 바보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키는 대로 하는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게 문제다. 그게 제일 바보 같다.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된다고 수녀 누나가 그랬는데. 맞는 말 같아서 울컥한다.

“뭐야, 재미없게 왜 순순히 인정하고 그래?”

“바보라고 한 건 너잖아. 내가 뭐라고 하길 기대한 거야?”

“뭐가 되었건 바보처럼 바보라고 인정하는 건 아니었어.”

흥흥거린 비키가 모자를 꾹 눌렀다. 부정 안 하면 내 입장이 뭐가 되냔 말야. 못된 이야기나 하는 나쁜 사람이 된 거 같잖아.

왠지 미안해진 비키는 출전하기는 했지만 이길 의욕 따위 없어 보이는 류제를 힐긋 살폈다.

가끔 급식을 같이 먹는지라 비키는 류제가 꽤 대식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인가. 그래도 넬사 고원산 푸딩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떠밀려서 나온 거면 어차피 우승할 마음도 없지? 그럴 거면 차라리 나보다 더 적게 먹도록 해. 알았어?”

“렌이 우승하라고 하던데.”

“렌이 죽으라고 하면 죽을 거야?”

비키가 어이가 없다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어차피 이 대회에 관심은커녕 아무 생각 없으면서 렌이 하란다고 하다니 진짜 바보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우승을 노리고 있는 내게 양보할 것이지. 뭐가 아쉬워서 그래?

류제는 그럴 정도는 아니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하게. 걱정 안 해도 꾸역꾸역 먹을 생각은 없어. 난 너처럼 푸딩에 미친―”

“누가 푸딩에 미쳤다는 거야! 말 다 했어?!”

류제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비키가 닥치라며 류제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으악, 하고 류제가 따끔한 정강이를 붙잡고 깽깽이 발을 뛰었다.

“아프잖아!”

“난 그냥 평범하게 푸딩을 좋아하는 것일 뿐이야! 평범한 거라고!”

지레 찔린 비키가 새빨개진 얼굴로 반박했지만 그 누가 푸딩을 좋아한다고 제 체면을 깎아내리면서까지 이런 대회에 참석할까를 따져보면 류제는 비키가 푸딩을 좋아한다기보단 거기에 미친 거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잠깐만. 이런 논리라면 렌이 나가랬다고 나가 버린 난 뭐가 되는 거야?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좋아하는 거야! 미치지 않았어! 됐지?”

“흥! 당연하지!”

자신의 내면과 극적인 타협을 끝낸 류제가 주장을 철회하자 비키가 비로소 폭력을 멈추었다.

늘 방어 본능으로 작용하는 ‘강화’ 어빌리티 때문에 딱히 맞아도 고통스럽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영 류제가 비키에게 쪽을 못 쓰는 것처럼 보였다.

류제는 왜 자기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몰라 입을 비죽였다. 난 저런 막무가내 성격에 약한 건가. 분하다.

“선수분들. 모두 준비되셨나요?”

사회자가 불쑥 천막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비키가 다소곳한 척 연기했다. 이때다 싶었던 류제는 비키를 내숭 떠는 폭력녀라고 한마디 해주려다가 사회자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툭툭 털었다. 그도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든 비키 옆에 바르게 섰다.

“바로 진행 들어가겠습니다. 푸딩의 개수를 세야 하기 때문에 각기 번호에 맞는 트레이에서만 푸딩을 집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부정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먹어도 카운트가 되지 않고요. 제한 시간 15분입니다. 그럼 저를 따라와 주세요.”

사회자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비키는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라며 류제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길 생각 별로 없었던 류제지만 왠지 비키가 저러니까 오기가 생겼다. 이런 대회에서 비키한테 이기기엔 모양이 안 살기는 해도 렌이 이기라고 했으니까 이길 거다. 누가 봐줄 줄 알아? 넬사 고원산 푸딩은 내 거다!

“뭐야, 그 눈은. 날 도와주지 않겠다는 거야?”

“나는 상관없는데 지체 높은 셀로니아가의 영애가 승부조작을 하려고 하다니. 정정당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고…고작 많이 먹기 대회잖아!”

안 그래도 대귀족 셀로니아 가문의 지체 높은 영애가 창피도 모르고 이런 대회에 참가했다는 것도 부끄러운데 이기려고 수단 방법 안 가리려고 했던 것에 정곡을 찔린 비키가 합리화를 했다.

류제는 그런 비키를 향해 일부러 비웃음을 날렸다.

“오호, 셀로니아 가문은 승부에 급을 나눈단 말이지?”

“뭐라고? 아니야! 으으윽. 두고 봐. 네 도움 따위 없어도 내가 반드시 이길 거니까! 어…어차피 너 같은 거 도움도 안 돼!”

아까는 도와 달랬으면서 이제 와 딴소리를 한다. 류제는 사람에게 삿대질하는 비키의 손을 꾸역꾸역 치웠다. 너무하네.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사람인데.

“그건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

류제가 두고 보자며 팔짱을 끼고 거만한 시선으로 비키를 내려다보았다. 승부욕에 불타오른 비키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둘의 시선에서 파스스 불꽃이 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류제는 죽을힘을 다해 푸딩을 먹을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재경의 말을 빌리자면 한창 이유 모를 심술이 돋아있는 류제가 그냥 비키에게 심술을 부린 것일 뿐이었다.

―디저트 부문, 푸딩 많이 먹기 대회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선수들 입장합니다!

no. 04와 no. 05번인 류제와 비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천막을 치고 나온 후 옆 테이블에 앉아 서로를 노려보았다.

류제와의 80번의 기간트리카 대결 중 3무 38승 39패의 기록을 가진 비키는 이 대회에서 지면 승패 수가 류제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급박하게 덮쳤다. 누가 뭐래도 반드시 내가 이길 거다.

그들의 앞에 푸딩이 잔뜩 실린 트레이가 고정되었다.

―많이 먹기 대회의 룰은 단순 그 자체. 15분간 가장 많이 먹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시작과 동시에 관객분들은 응모권을 각 선수의 이름이 적힌 상자 안에 넣으실 수 있습니다. 누가 아름다운 맛으로 유명한 넬사 고원산 푸딩을 쟁취할 것인가. 보석처럼 아름다운 푸딩을 원하는 선수분들, 제자리 준비하시고―

비키가 눈앞에 있는 트레이에 손을 뻗을 준비를 했다. 류제도 나름 진지하게 비키 흉내를 내었다.

―시작!

사회자의 스타트 신호와 함께 응원하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거기에는 맨 앞에서 응원하는 렌과 유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류제 군, 잘한다! 스타트가 좋아! 비키 양도 파이팅!”

“이 자식… 설마 치사하게 어빌리티를 쓴 건 아니겠지?”

“에이, 류제 군은 그래도 반칙을 쓰는 사람은 아닌걸.”

인간이 아닌 것처럼 빠르지는 않은 걸 보면 양심은 남아있는 것 같다. 별 관심 없어 보이더니 의외로 열심히 노력하네. 웬일이야. 이런 이벤트에는 매사 의욕 없으면서.

재경은 잘만 하면 비키가 분해하는 CG 장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no. 04번 선수, 과연 식욕 왕성한 청소년입니다! 먹는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옆에 있는 05번 선수도 그에 뒤처지지 않아요. 접시가 초 단위로 쌓이고 있다는 착각이 듭니다!

“저건 이제 더 이상 먹는 게 아니라 마시는 거 아냐? 비키 쟤도 진짜 장난 아닌데.”

“류제 군도 의외로 많이 먹잖아. 승산이 있을지도 몰라.”

한창 자라나는 성장기 청소년을 얕보면 큰일 난다. 특히나 류제는 이번 달에 드디어 신장 180을 찍었고 진행형으로 키가 쑥쑥 자라는 중이었다.

게다가 ‘강화’ 어빌리티까지 사용하면 재경 같은 평범한 사람과 몸이 필요로 하는 열량 자체가 달랐다. 그에 따라 식욕도 남달랐다.

어빌리티로 따지고 본다면 비키도 만만치 않았다. 비키는 재경과 엇비슷한 신장이었지만 ‘화염’ 어빌리티를 사용하기 위해 몸이 소모하는 열량이 어마어마했고, 평소에도 운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많이 먹는 데에는 자신 있었다.

지체 높은 셀로니아가의 영애인 비키는 그에 걸맞은 이름으로 나흘은 굶은 개처럼 푸딩을 집어넣는 다른 누구보다도 교양 있고 깔끔한 자세로 푸딩을 해치워 나갔다.

승패를 알 수 없는 빠르기. 우위는 비키가 선점하고 있었다. 노력하는 자, 즐기는 자를 따라올 수 없다더니 오기로 나선 류제보다 비키는 이 푸딩을 먹는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는 비키의 천국이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식감. 포근한 풍미. 모든 푸딩의 아름다움이 비키를 기쁘게 했다.

“비키 저 표정 좀 봐. 되게 좋아한다. 진짜 멍청이 같아.”

“엄청 빨리 먹고 있는데도 자세가 굉장히 안정적이야. 과연 비키 양. 역시 귀족 영애!”

“아, 나 어디서 들어본 거 같아.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갭… 뭐더라?”

“갭? 성격이랑 얼굴이 차이가 있다고?”

“대충 그런 의미의 단어가 있었던 거 같은데. 모르겠다.”

아마 재경이 말하고 싶은 건 갭모에일 테지만 잘 쓰지 않는 단어라 기억에서 흐릿했다. 재경은 비키의 성격을 서술한 위키 글 중 많이 먹기 대회 미니 게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먹보 속성 갭모에를 읽은 기억이 얼핏 났다.

저런 게 뭔가 좋은 건가?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던데. 여튼 비키가 푸딩을 엄청 빨리 먹을 수 있다는 건 신기했다.

―no. 05번 선수, 가볍게 50개 돌파! 그에 뒤따르는 no. 04번 선수! 아아, 하지만 처음처럼 스피드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지지 않는 no. 01! 무섭게 추격하는 중입니다!

비키와 다르게 푸딩을 그만큼 좋아하는 편이 아닌 류제는 평생 먹을 분의 푸딩을 한꺼번에 위장에 밀어 넣으려니 느끼하고 물려서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억지로 노력하면 더 먹을 수는 있지만 굳이 이 느끼한 디저트를 더 이상 맛보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류제 군은… 지금 좀 질린 거 같은데.”

“앗, 정말이다. 저 표정, 싫어하는 반찬 나왔을 때와 비슷해.”

푸딩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 류제는 그래도 2위를 꾸준하게 유지했다.

“아아앗! 역전 당했어.”

그러다 류제의 뒤를 쫓고 있던 1번 참가자가 류제를 추월했다. 이제 푸딩이 싫어진 류제가 잠시 푸딩으로 향하는 손을 주춤거렸다.

비키에게 밀리는 건 몰라도 다른 생판 모르는 남에게 밀리는 건 용서할 수 없었던 재경이 꽤액 소리쳤다. 그가 렌의 귀에 닿도록 목이 째져라 응원을 날렸다.

“류제, 이겨라! 뭐 하는 거야! 빨랑빨랑 위 속에 꿀떡꿀떡 집어넣으란 말야!”

“비키 양도 파이팅! 잘한다!”

그 목소리는 귀신같이 들은 류제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지만 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다디단 푸딩에서 더 이상 아무런 맛이 안 느껴지는데 비키는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여전히 황홀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다 음미하고 앉았다.

눈동자를 굴려 비키를 힐긋거린 류제는 진짜 푸딩에 미쳤다며 혀를 내둘렀다. 우웩.

―10분 경과! 중간 결산의 시간입니다! no. 01 72개, no. 02 68개, no. 03 66개, no. 04 70개, no. 05 85개! 압도적인 격차를 보이는 no. 05, 빨간 머리의 귀여운 소녀! 달뜬 얼굴로 푸딩을 흡입 중! 앗, 말하는 순간 no. 04번 선수, 다시 2위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오오오. 류제 이 자식, 하면 되잖아!”

“그래도 얼굴은 정말 질린 얼굴이다. 진짜 먹기 싫은가 봐.”

“짜샤! 사나이는 근성이다, 근성! 근성으로 밀어붙여!”

재경의 응원에 류제는 힘을 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잠시 현실 자각의 시간―줄여서 현자 타임이 왔었던 류제는 ‘그래, 렌 때문에 한다.’라며 위장을 독려했다.

―남은 시간 약 1분 남짓. 벌어지는 격차! 줄어드는 접점!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투표수도 박빙입니다!

“좀 더 빨리 먹어봐! 이 바보야!”

그렇게 말해도 이 이상 빨리 움직이려면 어빌리티를 사용해야 한다고. 기대하고 있는 건 알겠지만 이제 무리다. 못 해. 더 이상 못 먹어!

재경은 마지막까지 힘을 내라며 큰 소리로 응원을 날렸다. 가속도가 붙어 점점 격차가 줄어드는 가운데, 류제가 마지막 한 개의 푸딩을 집었다.

―남은 시간 5, 4, 3, 2, 1! 시합 종료!

시합 종료라는 말에 류제가 손에 든 푸딩을 내팽개쳤다. 더 먹으면 위가 터져서 죽을 것 같다.

의자에 기댄 류제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건 고문이다. 식고문. 이런 비인도적인 대회를 왜 하는 거야?

그는 당장 누가 배를 찌르기라도 하면 소화되지 않은 푸딩이 목구멍에서 분수처럼 울컥울컥 솟아 나올 것 같아 기분 나빴다.

“흥, 한심하긴.”

류제가 약한 모습을 보이자 비키가 기고만장한 얼굴로 비웃었다. 그러면서 준비해 온 손수건으로 도도하게 입가를 닦는다. 누가 보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줄 알겠다.

먹느라 정신없어서 몇 개를 먹었는지 기억 안 나지만 트레이를 보면 내가 비키보다는 적게 먹은 건 확실하다. 그런데 왜 비키 쟨 저렇게 멀쩡해. 왜 아직도 푸딩이 부족해 보이는 얼굴이냐고.

류제는 어떤 논리를 갖다 붙여 봐도 비키의 위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 대식가도 아니면서.

―선수분들께서는 푸딩에서 손을 떼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시합이 종료되자 어디에 있었는지도 모를 심사 위원이 수첩을 쥐고 등장했다. 그들은 선수들이 푸딩을 집었던 트레이를 오가며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확인했다.

부정행위에 대한 검사가 끝나자 심사 위원들은 선수들이 먹은 푸딩의 개수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알라마니 기술관의 연구진 같은 포스다. 이런 걸 보고 쓸데없이 진지하다고 말하는 거다.

―자아, 심사 위원이 승패를 가르고 있습니다. 15분간 고생한 선수들은 푸딩으로 배가 꽉 차 보입니다. 어떠셨습니까! 우리 마을의 자랑, 사거리 과자점의 푸딩은? 맛있으셨습니까? 별로였습니까?

심사 위원들에게서 결과가 나오는 사이 선수들에게 인터뷰를 할 생각인지 사회자가 무턱대고 우승 후보가 확실한 비키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별안간 호기심의 타깃이 되자 혀끝이 굳어버린 비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답변을 더듬거렸다.

“아…안정적인 맛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풍미가 깊지만 먹어도 질리지 않는… 그런…….”

―no. 05번, 빅토리아 선수, 역시 푸딩 마니아! 맛을 잘 알아요. 마니아가 아니고서야 그런 빠르기로 푸딩을 음미하지는 못하죠. 대회 내내 행복한 얼굴이라 제가 다 뿌듯하더군요.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에… 네에… 아하하.”

개구리에 돌 던지듯 칭찬으로 던진 말이 비키에게 직구로 날아와 꽂혔다. 왜인지 비키는 아까 류제가 푸딩에 미친 거 아니냐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류제는 배부른 와중 사회자의 칭찬에 대한 비키의 반응이 웃겨서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미쳤다고 했을 땐 뭐라고 했으면서 사람들 앞이라고 내숭 떠는 것 좀 봐. 그리고 빅토리아? 빅토리아라고? 무슨 가명을 대는 거야, 하하하.

그걸 본 사회자가 옳다구나 다음 타깃으로 류제를 잡았다.

―no. 04번의 류제 신리 선수! 몹시 즐거워 보입니다. 우연찮게 출전하게 되었는데 꽤나 좋은 성적을 얻은 것 같아요. 평소에도 푸딩을 좋아하십니까?

비키를 비웃은 벌이 돌아온 것인가 이번엔 류제 앞으로 마이크가 내밀어졌다. 망했다는 표정을 어색하게 숨긴 류제가 당혹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이번엔 비키가 모자챙을 푹 누르고 킥킥 류제를 비웃었다. 류제는 이대로 비키에게 질 수 없다며 억지로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제 옆에 앉은 빅.토.리.아.보단 덜 좋아합니다.”

“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예? 아하하. 류제 신리 선수, 능글맞아요. 선수가 그 선수가 아닌 것 같은데~ 여자를 꼬시는 방법이 예사가 아닙니다. 어떠십니까, 빅토리아 선수. 류제 선수라면 괜찮은 남자 친구감 아닙니까? 둘이 비슷한 나이 또래지요?

“싫어요! 끄…끔찍한 소리 하지 마세요!”

비키가 어림도 없다며 책상을 쾅 내리쳤다. 시뻘게진 얼굴은 화가 난 건지 부끄러운 건지 판단하기 애매했지만 류제가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니 오한이 들었다.

그녀가 온몸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삭삭 쓸었다. 비키의 반응을 본 사람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입니다, 농담. 그래도 류제 신리 선수의 스펙도 나쁘지 않아요~ 무려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재학생이라고 합니다. 제립학교 학생이라면 출셋길이 튼튼하다구요! 관심이 있다면 나중에 대시해도 돼요. 제가 잘될 거라 장담합니다. 자, 이어서 no. 03번 선수! 이번에 세 번째 출전이라고―

사회자가 사람 좋게 웃으며 다음 선수로 인터뷰를 넘겼다.

아무리 입발림 말이라지만 사회자가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스펙이라고 말하자 비키는 울화통이 터졌다.

나도 제립학교 학생이라고! 소속에 그걸 적지 않아서 그렇지. 누굴 뭐로 보는 거야. 그리고 난 귀족이야, 귀족! 저 얼빵한 바보와 다른 고귀한 신분!

억울한 비키가 꽉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시할 거야, 빅토리아?”

“닥쳐! 류제!”

류제가 한술 더 뜨자 비키가 날카롭게 속삭였다. 죄 없는 이는 바득바득 갈리는 중이다. 바보, 류제! 저 약 오르는 표정 좀 봐. 날 놀릴 건수 하나 잡았다 이거지?

비키는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류제의 시선이 참을 수 없이 열 받았다. 누가 누구한테 대시야. 저 바보에 변태에 둔하기까지 한 류제 신리한테 내가? 농담이라도 집어치워. 내가 한참은 아깝다구!

“나중에라도 마음 바꾸지 마라. 곤란하니까.”

“그럴 일 없네요! 여기서 한마디만 더 꺼내 봐. 육포로 만들어 버린다?!”

“어허, 누가 순순히 당해 준대? 저 아저씨가 말을 걸 땐 얌전한 척하더니. 여기서 네가 폭력적인 여자란 걸 밝혀 버릴 생각이야?”

“누가 폭력적이라는 거야?! 으으, 너 이따가 두고 보자!”

“난 두고 안 볼 건데.”

오랜만에 건수 잡은 류제가 계속 놀려 먹었지만 얌전한 척하고 있는 비키는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류제에게 큰 소리로 외칠 수 없어서 간신히 화를 참았다.

후련해진 류제는 이제야 슬슬 심술이 풀린다며 태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선수들을 인터뷰한 끝에 사회자는 남은 푸딩들을 관객들에게 무료로 시식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관객석에서 응원하던 두 사람도 트레이에서 하나씩 집어 입가심으로 푸딩을 맛보았다. 류제가 쉽게 질려 했던 것처럼 여러 번 먹기엔 달았지만 맛은 있었다.

―승부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혼자서만 몰래 엿보도록 하죠. 오오오, 아주 박빙입니다. 미세한 차이로 승패가 갈렸습니다. 과연 누가 넬사 고원산 푸딩을 거머쥘 것인가……!

사회자의 신호와 함께 드럼이 두구두구 울려댔다. 사회자는 자기가 끌 수 있는 대로 시간을 끌면서 기대감과 고조감을 멋대로 가지고 놀더니 관객이 슬슬 짜증이 날 무렵에 큰 소리로 외쳤다.

―총 103개로 no. 05번… 빅토리아 선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이겼다는 말에 좋아서 비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키의 자리에 폭죽이 펑펑 튀어서 그녀가 쓰고 있던 모자 위에 눈꽃처럼 얹혔다.

사회자가 축하한다며 비키에게 넬사 고원산 푸딩이 고급스럽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넘겼다. 관객석에서 비키를 축하하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헤헤…….”

비키가 남모르게 히죽 웃었다. 드디어 넬사 고원산 푸딩이 내 거야. 결국 내 손에 들어올 거면서 일주일이나 기다리게 하다니. 역시 나야! 셀로니아 가문은 어떤 것에도 1등만 해야 한다니까.

―2등과의 격차는 고작 5개. no. 04번 류제 선수도 수고하셨습니다. 3등은 no. 01번, 4등은 no. 03번, 5등은 no. 02번이 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빅토리아 선수. 혹시 속이 더부룩하시면 대기실에서 소화제를 하나씩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지금부터 추첨을 통해 선물을 증정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우선 5번 빅토리아 양에게 투표하신 모든 분들께는 사거리 과자점의 쿠키를 하나씩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응모를 통해 위원회 측에서 준비한…….

승부도 갈렸겠다, 사회자가 떠들어대는 건 이제 관심 없다. 류제는 드디어 끝났구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아래로 내려가도 되겠지.

“우승하다니 좋겠네. 으으, 배불러. 당분간 푸딩은 쳐다도 보기 싫다. 다시는 안 먹어.”

“당연하지. 하나 달라고 해도 절대 안 줄 거야.”

“줘도 안 먹을 거니까 걱정 마.”

푸딩을 받았는데 안 먹는다고? 류제의 답도 믿을 수 없는 비키가 상자를 그 누구보다 소중한 듯이 끌어안았다. 목적을 달성한 게 기쁜지 비키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뿌듯함 반, 부끄러움 반 섞인 얼굴로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얼굴은 모자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걸 보고 있자니 류제는 굳이 끈덕지게 이기지 않아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문제는 렌한테 무슨 소리를 들을지 걱정이란 건데. 나중에 푸딩이라도 하나 사줄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며 한 소리 할 렌을 떠올린 류제가 관객석에서 유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재경을 흘겼다.

“뭐어야, 결국 비키가 우승했잖아. 나 류제한테 응모권 넣었단 말이야.”

“에헤헤, 나는 비키 양한테 넣었지롱. 당첨되었으면 좋겠다.”

류제에게 걸었던 재경과 비키에게 건 유네 두 사람도 은밀하게 경쟁했던 내기의 승패가 갈렸다.

재경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낸 류제가 못마땅했지만 고작 5개 차이로 진 걸 생각하면 선처 못할 것도 없었다. 아량 넓은 내가 참는다. 나도 비키한테 투표할걸!

하기야 이 미니 게임, 고작 일러스트를 얻는 것에 비해 어려운 축에 속했다. 중간 보스 때 있었던 미니 게임과 더불어 최악의 난이도의 게임으로 나만의 세 손가락 순위권에 버젓이 있었다고.

어차피 이건 이기나 지나 스토리 진행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도 1회차 땐 적당히 넘어갔다가 2회차 때 일러스트 모으느라 죽어라 노력했었지. 도전 과제 달성할 거 아니면 일러스트는 쓸모없다고.

―마지막으로 78번!

“히잉… 내 거 안 나왔다. 분명 당첨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키에게 응모한 사람들 중 몇 명을 추려 비키와 똑같은 넬사 고원산 푸딩을 준다. 내심 기대했지만 유네의 번호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시무룩한 유네가 오늘은 운이 없다고 칭얼거렸다.

“뭐가 운이 없어. 비키가 우승할 걸 맞힌 것도 운이 좋은 거지.”

“그런가? 여튼 우리도 쿠키 받으러 가자. 쿠키는 비키 양한테 응모한 사람한테 전부 준대. 하나 가지고 다 같이 나눠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쿠키 하나 가지고 누구 입에 풀칠을 하게? 너나 먹어라.”

“그래도…….”

“어쨌든 같이 가주기는 할게.”

유네가 들고 있던 특대형 꾸물꾸물 베어를 어느새 들어준 재경이 그녀와 함께 쫄랑쫄랑 쿠키를 나눠주는 곳으로 갔다.

우승자 비키에게 건 사람들이 쿠키를 받기 위해 줄을 길게 섰다. 비키와 류제가 사회자에게 시달리며 대회를 마무리 짓는 동안 두 사람은 태평하게 쿠키를 받았다.

유네가 받은 손바닥만 한 쿠키는 생각보다 컸다. 눈을 반짝이던 유네가 서투른 솜씨로 쿠키를 반으로 갈랐다.

“자.”

“땡큐.”

“헤헤, 반달 같다.”

안 먹는다고 했던 재경이 쿠키의 반쪽을 군말 없이 받자 유네가 다른 반쪽 부분을 하늘에 띄워보았다. 유네 말처럼 까만 하늘에 뜬 반쪽짜리 쿠키가 반달같이 생겼다.

“뭐야, 누구는 억지로 나가서 푸딩이나 퍼먹고 왔는데 너네는 쿠키나 먹고 있냐?”

푸딩을 과식해서 속이 안 좋은지 창백한 인상으로 돌아온 류제가 재경 뒤에 스윽 나타나 목을 감싸 안았다.

“류제 군! 많이 먹느라 수고했어.”

“얌마, 근성이 없잖아!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넬사 고원산 푸딩은 우리 게 됐을 거라고.”

재경은 류제 주제에 비키한테 졌다며 팔꿈치로 류제의 배를 찔렀다.

“우으윽! 갑자기 배 치지 마…….”

흐물흐물한 푸딩으로 배가 꽉 찬 상태였던 류제는 재경이 팔꿈치로 위가 있는 부분을 찔러버리자 헛구역질을 했다. 그래도 렌이 멈추지 않자 류제가 재경의 얼굴을 한 손으로 꾹 잡았다.

덕분에 재경의 얼굴이 밀가루 반죽처럼 찌그러졌다. 재경이 그만두라고 우푸푸 발버둥을 쳤다.

“준비도 없이 나간 것치곤 잘한 거라고… 그리고 비키 걔는 역시 푸딩에 미―”

“누가 푸딩에 미쳤다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승리의 넬사 고원산 푸딩 상자를 들고 돌아온 비키가 위풍당당 그들에게 소리쳤다. 그녀의 뒤에서 무대 조명의 휘광이 화려하게 비쳤다.

“몇 번이고 말하는데, 나는 절대 푸딩에 미친 게 아냐!”

“어라, 이게 누구야. 빅토리아 씨가 오셨잖아.”

“빅토리아래… 푸하하! 난 또 비키라도 온 줄 알았네. 빅토리아……! 히히히!”

“비키 양, 대회 나가려고 가명까지 썼을 줄이야. 사회자 아저씨가 빅토리아라고 했을 때 진짜 놀랐어.”

“시끄러. 그렇다고 이런 대회에 나서는데 셀로니아 가문이라고 냅다 쓸 수는 없잖아!”

제 발 저려 큰소리친 비키가 가명을 쓴 이유를 변명했다. 자기도 많이 먹기 대회에 이렇게까지 해서 나갔다는 것이 많이 창피한 모양이다.

“흥. 어차피 내가 승리했어. 놀려대도 하나도 안 부끄러워.”

그들이 계속 비웃자 비키는 틈을 보이지 않겠다고 의연한 척을 했다. 진짜 부끄럽지 않았으면 가명을 쓰지 않았어야 했다는 반론은 절대 듣지 않을 표정이다.

“비키 양은 배 안 불러?”

류제는 푸딩을 먹고 배가 불러서 죽을상인데 그것보다 더 많이 먹은 비키는 멀쩡하자 유네가 궁금해서 물었다.

“푸딩은 언제나 예외야. 숙녀는 배에 디저트를 넣을 공간은 따로 마련해 두거든.”

“그걸 자랑이라고.”

류제는 그게 무슨 숙녀냐고 투덜거렸다. 숙녀가 아니라 먹보다, 먹보. 숙녀란 키아나트리체 국어사전에 의하면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현명한 여자를 뜻한다고. 왜 다들 숙녀라는 단어를 이상하게 쓰는 거지?

“숙녀라고 하지 마. 안 좋은 추억이 다시 떠오르려고 하잖아.”

“아아, 그 ‘숙녀’분들?”

세 사람이 동시에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 대기실 안의 그녀(?)들을 떠올렸다.

육각형의 얼굴에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 수북하게 난 털 위로 입은 끔찍한 발레복, 끔찍한 화장. 류제는 갑자기 비위가 상해서 다시금 헛구역질을 할 뻔했다.

멀쩡했던 세 사람이 동시에 몸서리치자 그들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비키가 혼자서 어리둥절했다.

“뭔데. 왜 너네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까 여장 대회 했을 때 나머지 참가자분들이 장난 아니었거든. 그 사람들도 스스로를 ‘숙녀’라고 부르더라고. 그게 생각나서.”

“비키 양은 보지 못했으니 잘 모르겠다. 내가 보여 줄게. 여기, 이 사람들.”

유네가 아까 비키에게 보여 줬던 사진 중 그녀들이 찍힌 부분을 가리켜 주었다. 유심히 그 부분을 살펴보던 비키는 그 ‘숙녀’가 자신이 생각하던 ‘숙녀’가 아님을 알고 성질을 내었다. 또 날 놀렸어!

“어디에 뭘 비비고 있어?! 내가 말한 숙녀는 이런 게 아냐!”

“아악! 왜 나한테 화풀이야? 누가 뭐래? 나도 피해자라고. 그리고 유네 너 말야. 내가 그 사진 보여 주지 말라고 했잖아! 왜 자꾸 보여 주는 거야?”

재경이 역정을 내는 비키와 구세대 사진 셰어링 방식으로 여장 사진을 자랑하는 유네에게 맞받아쳤다. 자꾸만 노출되는 여장 사진에 안 되겠다 싶었는지 재경이 유네에게서 그 저주스러운 사진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유네는 절대 안 된다며 재경에게서부터 안전하게 사진을 지키며 도리질쳤다.

갹갹갹. 평소와 다름없는 광경이다. 류제는 또 시작했다며 깨꼬닥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까 렌이 신나서 엄청 순진하게 굴었을 때가 좋았는데.

유네에 이어 비키까지 합류하다니 이건 단둘이 노는 거랑 너무 거리가 멀잖아. 하아, 언제쯤이면 다시 렌과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너무 큰 욕심을 부려버린 류제는 낙담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너무 많이 먹어서 지쳐버렸으니 어디 앉아있을 곳 없을까 무거운 배를 이끌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뒤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에 류제가 일순 고개를 돌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체(流體)와도 같은 것이 사냥감을 덮치는 듯한 움직임이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류제가 손짓을 하며 아직도 싸우는 세 사람을 불렀다.

“저기에서 뭐가 타오르지 않았어?”

류제가 혼자서 수상한 무언가를 발견한 가운데 재경은 유네에게서 여장 사진을 빼앗으려고 하고 있고, 유네는 그런 재경에게서 사진을 지키는 중이며, 비키는 재경의 뒤에서 유네의 여장 사진이 빼앗기지 않도록 붙들고 있느라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은 류제가 뭐라고 하건 못 들었다는 듯 갹갹거리면서 저들끼리 쓸데없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놔! 내놓으라고! 당장 찢어버릴 거야!”

“싫어어~, 렌 군 너무해!”

“저건 유네 소유잖아. 네가 뭔데 멋대로 처분하려고 해?”

“저 사진이 내 여장 사진만 아니었어도 나도 이렇게까지 안 해! 젠장, 빨리 저거 태워 버리라고, 비키~!”

“내…내가 왜!”

“하아.”

진짜 못 말리겠다. 다들 관심 없을 것 같으니 나 혼자 확인하지 뭐. 요 앞 덤불만 보는 거고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자기만 빼고 셋이서만 사이좋은 모습이 불만스러웠지만 류제는 고아원에 있을 때부터 뭐든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남들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는 일임을 알았다.

마녀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수풀 뒤를 살핀 류제는 그곳에 아무것도 없자 어리둥절해졌다. 불꽃 같은 것이 소리 없이 일렁였던 게 착각인가도 싶었지만 분명히 사람 기척이 있었다. 류제가 제 어빌리티를 걸고 하는 말이었다.

어린애가 몰래 소피라도 봤나? 혼자 납득하고 어깨를 으쓱하던 류제는 재경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작은 지갑을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분실물인가?”

막 떨어뜨렸는지 흙먼지 하나 묻지 않은 지갑은 주인이 버렸다고 하기엔 꽤나 고가의 물건으로 보였다. 비키가 사용하고 있는 화려한 여성용 지갑과 닮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류제가 고민하고 있을 때 호감도 이벤트 진행해야 하는데 멋대로 사라져버린 류제를 찾던 재경이 등장해 뒤에서 몸통 박치기를 했다.

“혼자서 뭐 하는 거야!”

“으악!”

재경의 무게 때문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으나 이번에는 호락호락하게 넘어지지 않은 류제가 고집스럽게 버티고 섰다. 그 복수를 위해 양손으로 재경의 관자놀이를 붙잡은 류제가 ‘서울 구경’ 시켜주듯 쭉 들어 올렸다.

“갑자기 뒤에서 덮치지 마. 위험하잖아. 애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야?”

“아파. 아프다고! 내려줘! 네가 갑자기 사라지니까 그렇지.”

“나는 분명 불렀거든? 장난질한다고 못 들은 건 너희들이야.”

“장난질 아냐. 내 평판이 달린 중대한 일이었다고!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빨리 내려줘!”

재경이 아파서 발버둥 치자 류제는 오늘만 봐준다고 도로 땅 위에 올려주었다. 류제는 자기만 쏙 따돌린 쓸데없는 말다툼이 못마땅했다.

“평판이 달려도 말이지. 유네만 그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잖아.”

“윽!”

맞는 말이라 재경이 반박을 못 했다.

어차피 아까 만난 반 친구들이 렌의 여장 사진 잔뜩 사 갔다. 좋으나 싫으나 다음 주부터는 렌의 여장 사진이 반에 나돌게 되어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유네 것을 빼앗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사진이라면 많이 가지고 있는걸. 다른 애들한테 보여 주진 않을 거지만.

“으이씨… 분명히 엄청나게 놀려댈 거야. 괜히 나갔어. 다 그 이상한 할머니한테 속아서……!”

“포기해. 한 한 달 후면 사그라질 거야.”

“그 말은 내가 한 달이나 고통받는다는 거잖아. 싫어!”

그만큼 반 애들이 널 좋아한다는 뜻 아닐까. 류제는 절망하는 렌에게 그렇게 말해 주고 싶다가도 도량이 부족해서 입을 다물었다.

앞서서 달려간 재경에 이어 나머지 두 사람도 류제가 서있던 수풀에 도착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곳까지 와서 번거롭게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그들이 수풀을 기웃거렸다.

“뭐 하는 거야?”

“이상한 게 있는 것 같아서 와봤더니 이게 떨어져 있어서 보는 중이었어.”

류제가 들고 있던 지갑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재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가를 꿈틀거렸다.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류제가 먼저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를 진행시켰을 줄이야.

류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물건을 확인한 비키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게 뭐야? 지갑?”

“꽤 비싼 거 같은데 떨어져 있더라고. 흙도 별로 안 묻은 걸 보면 분실한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아. 누가 잃어버린 거 같은데 분실물 센터에 맡겨야 하나?”

“아님 이 근방에서 찾고 있을 수도 있겠다.”

“잊어버린 사람이 있나 찾아보다 정 안되면 분실물 센터로 가자.”

“게으름뱅이 류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좋은 생각이야. 어쩌다가 그런 착한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근데 비키, 너 많이 먹기 대회에만 참가하는 거 아니었어? 기숙사로 안 돌아가 봐도 돼?”

지갑 주인 찾아주는 것까지 비키가 자연스럽게 동참하자 류제가 눈치없는 척 물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비키는 찔려서 류제를 흘겨보았다. 아무렴 어때. 그녀는 특기인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흥! 기왕 내려온 거 불꽃놀이까지 보고 가면 좋잖아. 왜 트집이야?”

“아니, 네가 그렇게 말… 아니다.”

류제가 꼬치꼬치 따지려고 드니 비키의 머리카락이 일렁일렁 화염처럼 불타올랐다. 아까는 모르는 사람이 보고 있다고 꾹 참은 것 같은데 지금은 안 참을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말을 꺼냈다가 진짜 때릴 것 같기에 류제가 현명하게 말을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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