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2) (12/112)

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2)

푸딩을 위해 비밀리로 많이 먹기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한 비키는 트레이드마크인 노란 리본 포니테일을 풀고 붉은색 긴 생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모자를 푹 눌러썼다. 오늘만큼은 교복이나 체육복이 아닌 평범한 사복 차림이다.

마족 차림을 한 백발의 어린아이와 지나친 비키는 남들의 눈을 신경 쓴다고 시선을 회피하다가 아이가 얼핏 눈에 익어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착각인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그 자리에 어린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탕!

총구에서 발사된 코르크 총알이 목적지인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을 크게 비껴가며 힘없이 떨어졌다.

열받은 재경이 잽싸게 옆을 더듬어 새로운 총알을 장전하려 들었으나 이미 마지막 발까지 다 쏜 후였다.

“으윽, 이게 다야?”

열 발 중에 단 한 발도 못 맞혔다. 재경이 끄응, 못마땅한 얼굴로 류제에게 차례를 넘겼다. 옆에서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왜 마음처럼 안 되는 거지? 시스템 문제인가?

“짜증 나!”

“처음 해보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맞아, 렌 군. 아빠가 자주 사냥을 데려가 줬던 나도 겨우 세 발 맞혔잖아. 너무 상심하지 마.”

사격 게임을 위해 큰돈을 내고도 상품을 따지 못한 재경에게 두 사람이 괜찮다며 도닥도닥 달래주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재경은 그런 뻔한 말들로는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저 유네도 세 발이나 맞혔다고! 젠장, 원래 대결 스코어도 이랬던가? 나름 박빙이었던 것 아니었나? 재경은 정말 렌 지미는 못하는 것투성이라며 불평했다. 자기 실력이 딱 그 정도까지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투덜거림이다.

참고로 주인공과 유네가 라우라 축제 날 우연히 마주친 삼류 악당 렌 지미와 벌이는 미니 게임에서 렌 지미의 사격 점수는 평균 10발 중 5개 정도를 맞히는 정도로 무난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흥!”

애초부터 사격 게임이 문제야. 결과를 납득 못 한 재경이 미니 게임의 존재부터 부정하고 보았다. 이 짬뽕탕 같은 정체불명 근대 오버 테크놀로지 세계에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데 축제에 사격 게임이 웬 말이냐.

왜 렌 지미는 이딴 거지 같은 게임에 참가해서 주인공하고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거야. 주눅 드는 건 나잖아. 불합리해. 불합리하다고!

“이제 내 차례인가?”

납득 못 해서 오만상을 찌푸리는 재경을 뒤로한 류제가 AK―47을 본떠 만든 사격 총의 기다란 나무 총신을 유연하게 붙잡았다.

미니 게임 튜토리얼처럼 말하는 주인장의 설명대로 총신을 고정해 목표물을 겨눈 류제가 집중해서 코르크 총알을 발사시켰다. 역시 주인공. 한 발도 못 맞혔던 재경과는 달리 단번에 성공했다.

“맞았다!”

“대단해, 류제 군.”

정확하게 무게중심 바깥쪽이 겨냥된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이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연이어 류제는 눈여겨보던 상품이나 유네가 노렸던 인형 몇 개를 겨냥해 총 10발 중 8발을 명중시켰다.

사격 게임의 초심자라고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성적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인장이 감탄하며 짝짝짝 박수를 쳤다.

“이야, 잘하네. 그 체육복 저지를 보아하니 제립학교 학생인가?”

“네. 주말이라 축제를 보러 왔어요.”

“역시나. 나라를 지키느라 늘 수고가 많구나. 자, 이건 서비스다.”

8발을 명중시켜서 총 5개의 상품을 딴 류제에게 간이 상점 사격 게임 주인장이 갓 구운 마시멜로 꼬치를 세 개 더 얹어주었다. 그들이 사격을 하고 있을 때 옆 가게에서 얻어온 것 같다.

류제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손에 가득 상품을 들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또 서비스받았다.”

조촐한 두 사람과 비교되게 이번에도 류제 혼자만 뭔가를 가득 들고 있었다. 따낸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주변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상품들을 쏟아낸 류제가 이걸 어쩐다, 허리에 손을 얹었다.

사격 게임 전까지만 해도 잘만 신나하던 재경은 어차피 자신은 떨거지 삼류 악당에 불과하다는 주제 파악이 되자 기분이 나빠서 표정이 뚱해졌다.

“못 하는 게 도대체 뭐야? 사격 처음 해본다며?”

“그러게. 처음 해봤는데 이게 바로 초심자의 운인가?”

“그런 게 어디 있어!”

나도 초심자란 말야. 내가 노렸을 땐 꿈쩍도 안 하던 가면이 너만 운이 좋아서 훌렁훌렁 넘어가냐? 치사한 자식. 내가 스스로 멋지게 따내고 싶었는데!

재경이 강한 질투심을 표출했다. 이젠 하다 하다 전시된 상품들도 주인을 차별한다. 누가 미연시 주인공 아니랄까 봐 죄다 만능이야. 누구는 하찮은 삼류 악당인데!

기본적인 신체 능력 차이를 납득하지 못한 렌을 더 건들면 삐칠 것 같다. 이제 익숙해진 류제가 토라진 재경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 수법에서 조카 달래주는 삼촌 같은 연륜이 느껴졌다.

“뭐 어때. 땄으면 그만이잖아. 자, 이거 가지고 싶었지?”

“기왕이면 내가 따고 싶었다, 왜. 흥.”

류제가 재경이 노렸던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과 재경 몫의 마시멜로 구이를 넘기자 그가 콧방귀를 뀌며 낚아챘다.

그냥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란 말야. 내가 직접 따서 가지고 싶은 거라고. 둘은 다르단 말이다. 류제, 이 바보야, 그것도 모르나?

“이깟 가면 때문에 내 일주일 용돈을 다 쓰다니. 돈 아까워.”

“렌 군, 일주일 용돈을 너무 적게 잡은 거 아냐?”

“원래 절약할 수 있을 때 절약해야 한다고.”

“원래 이런 게임들이 다 그렇지 뭐. 자, 그러지 말고 한번 써봐.”

류제가 친히 고양이 가면을 재경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응석이 모자란 재경은 여전히 마뜩잖아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렌 지미의 삼류 악역 미니 게임 이벤트는 꽤 쉬웠던 게임이라 박빙의 승부가 될 것 같았는데 이게 뭐야. 괜히 과소비했어.

재경은 집안 사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쓸데없는 소비는 안 하는 편이지만 아직 애라서 그런가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이것저것 전부 시도해 놓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저 사격 게임… 고작 열 발의 코르크 총알 주제에 엄청 비쌌다.

“고마워, 류제 군. 굳이 내 것까지 따줄 필요는 없었는데.”

“에이, 괜찮아. 어차피 난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 겸사겸사지 뭐. 자.”

이번엔 유네가 가지려고 했던 꾸물꾸물 베어 파우치와 피규어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유네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워서 에헤헤 머쓱하게 웃으며 가방 안에 상품을 고이 모셔놓았다.

오전에 신체검사를 하러 가기 전 재경의 작당에 말려든 류제가 눈치를 보다가 유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재경도 어물쩍 유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감도 이벤트고 뭐고 유네에게 이성적으로 별 관심이 없는 류제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유네를 굳이 챙겨준 이유. 작당한 두 사람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재경의 눈빛 신호를 받은 류제가 어줍게 운을 뗐다.

“그리고 유네는 우리 대신 따로 나가야 하는 대회도 있잖아. 그 뇌물이라고 생각해 줘.”

“뇌물? 대회?”

별안간 대회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헤헤 웃던 유네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안 그래도 어벙한 구석이 있는데 입이 야무지지 못하게 벌어졌다. 곧 떠오르는 구석이 있었는지 유네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무…뭐? 뭐어어? 서…설마 그 여장 대회 말하는 거 아니지?!”

“그거 아니면 또 뭐가 있겠어?”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을 써본 재경이 쯧쯔 손을 내저었다. 하회탈처럼 턱이 없는 고양이 가면이 불쑥 등장하자 류제고 유네고 빵 터져서 잠시 웃음을 참는 시간을 가졌다.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웃음보가 터질 것 같다.

“뭐야. 계속 말하라고. 왜 그래?”

잘 나가던 대화가 멈추자 고양이 가면 안에서 재경이 영문을 몰라 했다.

유네는 웃겨서 근질근질거리는 입가를 진정시켰다. 지금 렌 군한테 가면이 어울리네 마네 말을 할 때가 아니야. 여자인 내가 여장 대회에 나가게 생긴 게 더 큰일이라구!

흠흠. 간신히 진정한 유네가 류제한테 따졌다.

“하…하여튼 언제 내가 여장 대회 나가는 걸로 결정이 된 거야? 어째서어?”

“어째서라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 난 거 아니었어?”

“도…도대체 언제 결정이 났는데?”

“어제. 맞지?”

“뭐, 그렇지.”

얼굴에 걸친 가면이 귀찮았던 재경이 옆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시야를 가려서 답답했다. 가면이란 거 재미있기는 한데 쓰는 입장에서는 불편하구나.

“렌 구우운, 렌 군마저 그러지 마.”

“뭐, 어때. 한번 나가 봐. 밑져야 본전이지. 우승 상품이 뭐더라. 꾸물꾸물 베어 한정판 특대 사이즈 인형하고 유명 레스토랑 코스 요리권 3장이었나. 우리가 도와주면 되잖아. 우승해서 같이 비싼 밥이나 공짜로 먹자. 그리고 유네, 너 꾸물꾸물 베어 캐릭터 좋아하잖아. 이때 아니면 구하기 힘들 거라구?”

“으으, 그렇긴 한데…….”

“솔직히 유네 너도 흥미 있었지? 여장도 한번 했었잖아. 원래 한번이 가장 어렵고 두 번부터는 쉬운 법이야.”

꾸물꾸물 베어 캐릭터를 좋아하기는 해. 라우라 축제 한정판 에디션이라는 것도 탐나고. 근데 여자인 내가 여장 대회에 나갈 정도는 아니란 말야. 레스토랑 식사권을 받아도 그런 건 집에 가면 먹을 수 있는데 내가 왜……!

라고 반박하지 못한 유네가 끄으으응, 못 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질 못한 손은 꼼지락꼼지락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나도 여장 대회 자체는 재미있을 것 같아. 흥미는 있어. 그…근데 여자인 내가 여장 대회에 나가면 반칙이잖아. 명백한 룰 위반이라구.

“하지마아안 부끄럽단 말이야.”

“자꾸 빼기는. 걱정 안 해도 내가 대신 대회 출전 신청해 뒀으니까 물러날 구석은 없다. 그만 포기해라, 유네.”

“뭐어?! 렌 군, 너무해!”

“우는소리 해도 어림없어.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그게 바로 렌 지미의 역할인 걸 어떻게 하냐? 비정한 척 했으면서 재경은 은근슬쩍 다시 가면을 써서 유네의 징징거림으로부터 도망쳤다.

렌 지미는 축제에 놀러 나온 주인공들과 마주치고 질투심에 불타올라 내기 사격을 하다가 진 것에 앙심을 품고 유네 몰래 유네를 여장 대회에 출전시켜 버리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단 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유네의 히로인 이벤트로 이어진다. 나한테 따지지 말아 줘. 난 내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 유네의 저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보자니 마음에 찔렸다.

“…어쨌든 미안.”

“렌 군,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나랑 상의도 없이!”

“상의는 했었잖아, 어제.”

“나는 한다고 말 안 했어. 절대 말 안 했다구! 렌 군, 바보! 바보야!”

유네가 투닥투닥 재경을 때리며 칭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도 이미 늦었다니까~”

적당히 튕길 줄만 알았지 이 정도로 싫어할 줄은 몰랐다. 미안한 생각이 찔끔찔끔 양심을 갉아먹어도 이게 렌 지미의 역할인데 어떡하냔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호감도 이벤트를 놓치기라도 해봐. 어디선가 배드 엔딩이 안녕 하고 튀어나온다고.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유네 네 여장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어!

“렌 군, 멍청이. 류제 군도 제멋대로 대마왕! 난 몰라. 잘못되면 내 책임 아냐!”

“잘못될 일이 뭐가 있어, 그냥 대회인데. 평범하게 즐겨.”

“어떻게 즐겨! 그… 다…다른 학생들이 보기라도 하면!”

“괜찮대도. 치어리더 차림 했을 때에도 다들 어울린다고 해줬잖아.”

“그거야……!”

유네는 자기가 여자라는 사실이 비밀인 이상 여장 대회를 거절할 명분들이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져서 속상했다. 속이 타들어가는 그녀가 어쩌질 못하고 재경만 툭탁툭탁 쳐댔다.

싫은 건 아니다. 싫은 건 아닌데 내가 여자라서 거짓말을 한다는 게 꺼려지는 거지. 어떤 여자가 남장하고 여장 대회에 나가냐구!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나중에 배로 갚아줄 거야! 렌 군, 바보! 류제 군도 바보!”

“그래,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혹시 물귀신 작전을 쓰고 싶다면 류제가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류제도 여장 대회 참가할 수 있으니까 나 말고 류제를 노려보렴.

“앗.”

어쩌다 보니 류제까지 팔아먹은 것 같아 고양이 가면을 써서 시선을 외면하는 중이었던 재경은 가면 속 좁은 시야에 모자를 눌러쓴 빨간 머리 소녀가 들어왔다. 잠깐 보였던 그녀가 멀리 사람들을 피해 지나갔다.

저건 분명 비키다. 이다음 호감도 이벤트 당사자인 비키가 지금 내려왔다면… 막 일족의 원수인 화마와 스쳐 지나갔을 때인가?

재경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인상 깊었던 그 장면을 떠올렸다. 사천왕 중 한 명인 화마 샐러맨더의 왕. 새파란 어린애 모습인 주제에 모든 일의 흑막으로 보이는 그놈은 비키네 가문의 원수다.

그 마족이 왜 셀로니아 가문을 기어코 멸족시켰는지는 그의 과거와 관련이 있는데 지금 풀어질 내용은 아니니 당장은 중요하지 않다. 모르는 사이 복선이 깔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렌 군. 내 말 듣고 있어?! 남을 멋대로 팔아넘겨 놓고 왜 또 멍때리고 있는 거야?”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정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유네가 재경이 쓰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멋대로 위로 벗겼다. 샐쭉하게 올려다본 그녀가 자길 보라며 징징거렸다. 반쯤 벗겨진 가면 아래로 보이는 유네의 부루퉁한 얼굴이 단단히 화가 났다.

“어찌 되었건 나가기로 한 거면 서두르자.”

작당은 그와 했으면서 또 유네와 둘이서만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려고 하자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류제가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했다. 웃고 있기는 한데 한쪽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막 좋지는 않은 듯했다.

“어디 보자.”

꼬맹이들 가운데서 어깨동무를 한 류제가 라우라 축제 위원회에서 나눠준 리플릿을 펼쳐보았다. 여장 대회가 열리는 무대가 어디더라.

“여기 아냐?”

“거리가 꽤 있네.”

류제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재경이 눈치채기 전 류제는 두 사람을 들고 가볍게 뛰어올라 전봇대를 누비며 이벤트 장소로 향했다. 양옆에서 허둥지둥 뒤늦게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가뿐히 무시한 류제는 생각만 해도 쪼잔한 질투를 자행했다.

“으으으… 류제, 네 이놈…….”

“류제 군… 말도 없이 그러면 어떻게 해.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미안, 늦을 거 같아서.”

땅에 내려와 두 사람을 안전하게 내려준 류제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위로했다. 높은 곳이 쥐약인 재경은 눈을 질끈 감고 철퍼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류제, 저 나쁜 자식이. 갑자기 뛰어오르다니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야?

“그래도 빠르고 안전하게 잘 도착했잖아.”

“어디가 안전한데!”

길바닥에 주저앉은 재경이 빼액 소리 질렀다. 류제는 다리에 힘이 풀린 재경을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쭈욱 일으켜 세워주었다.

제대로 땅에 서있음을 확인한 재경이 류제의 옷깃을 꾸욱 쥐고 입술을 까뒤집었다.

“다시는 하지 마라. 확 쥐어박을 테다.”

“맞아. 렌 군 높은 곳 무서워하잖아. 류제 군, 장난이 지나쳐.”

“예이, 예이.”

아까 둘이 투닥거릴 땐 언제고 또 둘이서 편먹네. 너무한 감이 있으니 별다른 말은 안 하겠지만 류제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여튼 가끔씩 저러는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재경이 쀼루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류제는 말 잘 듣다가도 가끔 저런 얄미운 짓거리를 하곤 했다. 재경의 볼멘소리와 함께 그들이 여장 대회가 열릴 장소로 향했다.

원작대로라면 사격 게임에서 진 렌 지미의 복수에 당한 유네는 참가자를 격하게 반기는 수상쩍은 무리에 이끌려 강제로 여장 대회에 출전당하게 된다.

“어이고, 여장 대회 참가자분이신가요?”

“네에… 뭐, 그런데요.”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격하게 반겨대는 무리들이 끼어든 그 타이밍 말이다.

“얘들아. 선수분이 들어오셨다! 세 분 모두 출전이신가요?”

“아뇨, 이 애만 합니다.”

“으아아, 그럴 수가. 그래도 예쁘장한 분이라 다행입니다. 드디어 우리 대회에 희망이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전을 결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제의 입장에서는 단지 재미 삼아 출전시킨 건데 별안간 대회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세 사람을 둘러싸고 환영의 인사를 연발하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류제와 유네는 영문을 몰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재경만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역시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슨 일 있나요?”

세 사람을 반기던 여장 대회 관계자들이 과도한 환영 인사가 참가자를 곤란하게 한 것을 알고 뒤늦게 어른스러운 척 헛기침을 했다.

“어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희가 생각한 여장 대회와 분위기가 다르신 분들이 또 대회장을 점령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안 좋은 일까지 터져서… 혹시 명단에 있던 제립학교 학생이신가요?”

“네에, 유네 나르타예요.”

“아까 단체로 뭘 잘못 드셨는지 멀쩡한 참가자 10분이 병원에 실려 가셔서 참가자가 부족한 상태였답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뒤에 두 명도 참여를 부탁할 수 있―”

“아뇨! 안 해요! 절대 안 해!”

“거절합니다!”

권유를 받은 두 사람이 말도 끝나기 전에 거부하며 손으로 엑스 표시를 했다. 유네는 되고 자신들은 안 된다니. 배신감을 느낀 유네가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다.

순박한 눈망울을 보고 죄책감이 든 두 사람이 찔려서 시선을 회피했다.

“역시 그러시군요. 하아, 그럼 일단 대기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의상은 대부분 있지만 마음에 드시는 게 없으시면 건너편에 의상점이 있으니 구매해 오셔도 무방합니다. 대회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니 서둘러서 준비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럼!”

“네, 감사합…….”

대기실까지 안내해 준 담당자가 더 이상 안을 못 보겠다며 밖으로 도망쳤다.

류제도, 유네도, 사실을 알고 있던 재경도 대기실에 보이는 열댓 명의 참가 인원을 보고 사색이 되어 말을 줄였다. 전혀 감사한 얼굴이 아니었다.

“새로운 참가자인가. 하하. 좋은 라이벌이 되겠는걸!”

“홍홍홍, 승리는 이 몸이 되겠지만 말이야.”

“아니. 승리는 내가 가져가겠어⚦”

근육이 우락부락한 호탕한 남자들이 프릴이 살랑거리는 샤랄라한 옷을 입고 세 사람을 반겼다.

팔 한쪽이 죄다 문신으로 덮인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대머리인 주제에 베이스 화장을 과도하게 해서 얼굴만 동동 허옇게 떠있는데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촌스러운 파란색 아이섀도를 눈두덩에 칠해 놨다.

거기에 코끼리도 때려잡을 거대한 몸집과 비교되는 저 이상한 말투. 낯선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살핀 재경은 정신이 오락가락한 건 실은 그가 아닐까 내심 두려웠다.

“하…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까 아찔하네. 유네야, 자신감을 가지렴. 분명 네가 일등 할 거야.”

“내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미안해, 유네.”

“…히이잉……!”

안 그래도 소심하고 낯가림 심한 유네는 저런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열댓 명 다닥다닥 붙어있는 대기실에 죽어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건 유네가 상상했던 여장 대회와는 많이 달랐다. 유네는 평범하게 생긴 애들이 적당히 화장하고 가발 쓰고 치마 입어서 심사를 나가는 줄 알았던 것이다.

사…사람더러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저…전혀 안 어울리잖아. 저게 왜 여자야! 저런 건 여장 아냐, 그냥 수염 난 괴물이라고!

“렌 구우운! 류우제 구우운!! 제발 부탁이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랑 같이 출전해 줘!”

“아… 그건 좀…….”

“미안, 유네.”

불쌍한 유네를 위한 3번 선택지 [어쩔 수 없지. 같이 나가 줄게.]가 아닌 1번 [아… 그건 좀…….]을 단 1초 만에 선택함으로써 류제는 잽싸게 여장 대회 플래그를 끊어내고 도망쳤다.

빠르게 손절한 재경도 뒤돌아보지 않고 대기실 바깥으로 도망갔다. 뭔가 안에서 땀 냄새 같은 게 가득 차서 그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렌 군, 류제 구우운!”

“허허허. 어디, 어여쁜 소년. 여장은 처음이야?”

“이 몸이 한 수 알려 주도록 하죠, 홍홍홍. 그래 봤자 승리는 이 몸의 몫이니까요!”

“우후후,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을 위해… 우리가 친히 당신을 소.녀.로. 만.들.어. 드.릴.게.요……⚦”

“끼야아악! 오지 마아! 나한테 오지 마!”

문 닫힌 대기실 안에서 유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재경과 류제는 대기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며 눈빛 교환을 하며 허억허억 거친 숨을 내뱉었다.

우당탕쿵탕 한바탕 뭔가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뭐가 벌어지는지 죽어도 알고 싶지 않았다.

“우…우리는 밖에서 기다리도록 할까?”

“조…좋은 생각이야.”

재경과 류제가 슬금슬금 밖으로 도망가려는데 갑자기 닫혔던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거기, 너희!”

소스라치게 놀란 두 사람이 손을 꼭 붙잡고 뒤를 돌아보았다. 꼴이 완전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다. 류제는 귀신을 안 무서워했던 것을 떠올리면 류제 안에서 저 괴물이 그 이상으로 무서운 것으로 분류된 모양이다.

“네…네?”

“있지, 저 소년 머릿결이 썩 좋아서 가발을 안 씌우고 꽁지머리를 하나로 길게 땋으려고 하는데 적당한 리본이 없지 뭐니. 너희는 저 소년의 친구지? 하나 사다 줄 수 있어? 아아, 꾸밈욕 생기는 소년은 오랜만이라 불타오르네.”

“리…리본이요?”

“소년의 아름다운 파란 머리에 어울릴 것 같은 리본.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지금 바로 사다 줘.”

탕!

류제가 뭐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수염 자국이 구레나룻부터 턱밑까지 꺼멓게 난 오카마 캐릭터가 몸에 낀 바슬바슬한 발레복을 흩날리며 대기실 안으로 사라졌다.

대기실 문 가운데에 달린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이라는 팻말이 덜컹덜컹 휘청거렸다. 서로 눈치를 살핀 두 사람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렌… 어…어쩌지.”

“어쩌긴… 네가 사가지고 와.”

“나 혼자?”

“그럼 누가 가. 분홍색 이쁜 걸로다가 사 와.”

“같이 가자. 이 정글 같은 곳에 혼자 남아서 뭐 하게.”

“또 아까처럼 냅다 날 들고 날아오를 셈이지? 싫어.”

“이제 안 한다는데도.”

“시이잃어. 그리고 우리 둘 다 가버렸다가 우락부락한 아저씨들 사이에 있을 유네한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스토리상 유네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왠지 저런 털 난 아저씨들 사이에 가녀린 유네만 혼자 내버려 두기엔 걱정이 되었다.

더군다나 암만 여장 대회에 나간다지만 유네는 진짜 남자도 아니고 남장 여자잖아. 저런 아저씨들 사이에 혼자 있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작은 여자애라고!

“그리고 가기 귀찮아. 이게 제일 중요해.”

“…그래, 알았어. 기다리고 있어. 금방 사가지고 올게.”

“갔다 와~ 분홍색이다~! 연한 진달래색이라고!”

재경이 건물 밖으로 나서는 류제에게 안녕 하고 손을 흔들었다.

유네의 호감도를 올려줄 물품은 이걸로 됐다. 상점에 가면 노란색, 파란색, 회색, 하얀색 등 다양한 리본이 있겠지만 분홍색인 리본 제품은 하나뿐일 테니 제대로만 사 오면 호감도는 순조롭게 올라가겠지. 왜 유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리본이 분홍색이냐고? 내가 아냐. 개발자들 맘이지.

“헤헤, 순조롭군.”

재경이 옆으로 돌려놨던 고양이 가면을 바르게 썼다. 대기실 문이 바로 보이는 기둥으로 간 그는 유네가 그 아저씨들 사이에서 잘 해내고 있을까 몰래 숨어서 관찰했다.

그런 재경의 뒤로 어떤 실루엣 하나가 꾸물꾸물 움직였다. 제 키보다 훨씬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던 호호 할머니가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는 재경의 머리통을 호되게 갈겼다.

“볼 게 있고 안 볼 게 있지. 예끼, 못된 놈아. 어찌 변태 같은 짓거리를 하려고 해?”

“아, 깜짝아! 아파! 아, 진짜 뭔데 갑자기… 어?”

난데없이 얻어맞은 재경이 혹이 난 뒤통수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리는데 거기에는 수학여행 갔을 때 만났던 예언자 할머니가 서있었다.

“어어? 할머니가 여기는 왜……?!”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부터 못된 짓만 배워가지고는. 나는 너 같은 변태는 모른다. 아는 척 말거라! 여기서 썩 나가지 못해?”

“뭐가 못된 짓인데요. 친구가 야수들이 가득한 대기실에 붙잡혀 있어서 기다린 거구만. 알지도 못하면서.”

머리를 매만지던 재경이 머리에 쓰고 있던 고양이 가면을 벗었다. 뽕이 들어간 촌스러운 오 대 오 앞머리와 황토색에 가까운 연한 갈색 머리, 대충 생겨먹은 얼굴에 작은 눈동자, 파릇파릇하게 핀 주근깨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순수한 매력을 뽐냈다.

“으응?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맹해 보이는 눈동자에 세상만사 불평 많아 보이는 부루퉁한 입술. 익숙한 얼굴에 오락가락한 기억을 떠올려 보던 그녀가 옛날에 얼핏 마주쳤던 건방진 이레귤러 애송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들고 있던 지팡이로 재경의 이마를 퉁퉁 친 그녀가 반가움을 표현했다.

“맞아, 너도 그놈과 함께 제립학교 출신이었지. 감히 여기까진 무슨 일이냐?”

“아야, 아프거든요? 할머니야말로 여긴 무슨 일인데요? 벼룩시장에서 장사 안 해도 돼요?”

수학여행에서 수상쩍은 예언가로 나온 할머니는 게임 내에 심심할 때마다 등장해 주인공에게 수상쩍은 말을 남기고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렇게 큰 비중도 아니라서 세세한 건 기억 못 했다. 저 할머니가 여기서도 등장했나?

“나야 이 대회의 심사 위원이니 여기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래서 넌? 수상쩍게 뭐 하고 있어? 그놈은 어디에다 내팽개치고?”

“그놈? 류제요?”

“그럼 누굴 말하누. 또 예언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놓은 건 아니겠지?”

“뭘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요. 암것도 안 했거든요? 내가 뭐 어쨌다고.”

머리를 연이어 얻어맞은 재경이 혹이 난 게 아닐까 정수리를 닦았다. 예언자 할머니는 이때다 싶었는지 주머니에서 어떤 낡은 수첩을 꺼내 마른 침을 묻혀 넘겼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첩을 계속 넘겼다.

“어디서 날 속이려 들어? 오늘 예언에서 류제 신리는 유네 나르타, 비키 셀로니아를 제외하면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 없는데. 흥, 이레귤러 주제에 멋대로 행동하긴.”

“이레귤…이 뭔데요. 내가 어디에 있건 할머니가 무슨 상관인데요. 아… 설마.”

번뜩 떠오르는 구석에 손바닥을 마주친 재경이 뜨악한 표정을 숨겼다.

설마 이 할머니도 ‘스토리대로’ 흘러가는 것에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원작 스토리상으로는 렌 지미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으니 할머니가 간섭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몰랐다. 명색이 예언자 할머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다분히 경계심이 발동된 재경이 죄 없는 할머니를 얄짤없이 노려보았다. 예언자 할머니도 지지 않고 눈을 번뜩이며 재경과 눈씨름을 했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둘이서만 살았던 탓인지 나이 지긋한 할머니에게는 함부로 대들지 못하는 재경이 먼저 살벌했던 눈동자를 거두었다.

“그래서 뭐요. 절 벌주러 오신 거예요?”

“예끼, 내가 왜 네놈 벌을 줘. 여기 심사 위원으로 왔다고 했잖아!”

“아, 할머니가 무슨 자격으로 여장 대회 심사 위원을 하는 건데요. 돌팔이 예언가면서!”

“돌팔이 예언이라니. 이 예언은 내 손위 누이가 알려 준 중요한 예언이다. 내 이름 사라 하놋, 그것만으로 이 축제에 오는 이유는 충분하지. 너야말로 왜 여기에 왔냐.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건 너 아니냐!”

“내가 어떻게 움직이건 그건 제 마음이죠.”

재경이 투덜거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내 인간관계에 참견이야. 이 정도는 봐줄 수도 있잖아.

사라 하놋이 흠, 하고 마땅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레귤러,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바보 같은 재경을 손쉽게 떠본 사라가 쯧쯔 혀를 찼다.

“너도 ‘예언’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네 친구의 정체도, 그 미래도.”

“할머니가 무슨 상관인데요. 내가 알든가 말든가.”

“하여튼 저 싹퉁바가지 보소. 길바닥에 확 넘어져서 코나 깨져라.”

할머니가 또다시 지팡이로 재경의 머리를 퉁 때렸다.

사라 하놋이라 소개한 할머니와 재경은 서로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그 목적이 뭔지 몰라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상대방을 관찰했다. 영역 다툼을 하는 고양이들의 날 선 울음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할머니야말로 그런 폭력으로… 아야! 아, 좀! 그만 때려요!”

사라 하놋이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연이어서 지팡이를 휘둘러 재경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예언’을 아는 주제에 내 성을 듣고도 눈치를 못 채? 네가 뭔데 끼어들어 언니의 예언에 훼방을 놓는단 말이냐. 정체가 뭐야. 뭐 하자는 놈이야?!”

“아야, 아파! 아니, 제가 할머니 언니를 어떻게 알아요?”

“뭐라고?! 적어도 어빌리터라면 당연히 알아야지. 로라 하놋. 백 년 전 마왕을 물리친 영웅의 이름이다! 이 축제 이름도 내 언니의 이름에서 따왔는데 그것도 모르나?”

“아야, 학교에서 안 알려 준단 말이에요.”

그 소리에 재경의 이마를 딱딱 때리던 할머니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복잡한 듯이 한숨을 패액 내쉬고 쯧 혀를 찼다.

그녀의 언니와 키아나트리체 높으신 분들의 트러블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 목을 가다듬었다.

“하여튼 언니가 죽기 직전에 남겨 줬던 예언이다. 허투루 되는 건 내가 용서 안 한다. 도대체 왜 저런 애송이가…….”

방해꾼 재경이 마음에 안 찼던 사라 하놋이 마지막으로 한 대 더 때리고는 재경을 지나쳐 건물 바깥으로 향했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사람 머리를 쳐대다가 제 할 말 마쳤다고 가버리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던 재경이 사라를 따라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뭔데요. 예언? 하놋? 왜 혼자서 말하다 혼자서 화내고 난린데요? 기왕 만난 거 할머니가 알고 있는 거나 좀 공유해 봐요.”

“이레귤러한테 해줄 말은 없다. 너야말로 방해하지 말고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아가!”

“가긴 어디로 가요. 몰라요, 그런 거.”

“나도 몰라! 여튼 이 여장 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아니겠지!”

그녀가 손에 든 수첩을 재경에게 냉큼 들이밀었다. 얼핏 본 그 수첩에는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상황과 사건에 대해 나름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오늘 있을 라우라 축제 내용도 재경이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자신이 부정당하자 반발심이 생긴 재경이 샐쭉하게 꿍얼거렸다.

“…이 정도야 뭐 어때요! 같이 축제 온 것일 뿐인데.”

“예언을 엉망으로 만들지 또 몰라. 언니가 무슨 마음으로 희생을 결심한 건지도 모르면서. 이레귤러 애송이가 난입하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그―러―니―까! 제 선에서 다 알아서 한다니까요? 뭐야, 결국 그 예언도 할머니가 한 게 아니라 할머니의 누나가 한 거잖아요. 할머니도 잘 모르는 거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언니는 모든 것을 알았어. 그런데 너는 이 예언과 행동이 맞지 않는 이레귤러다. 네 개입은 어떠한 형태로든 예언을 무너뜨릴 거야.”

“거참, 말 많네. 사람을 악역 취급하다니. 아님 저랑 내기할래요?”

재경이 사라 하놋을 앞질러 가로막았다.

이 호호 할머니가 말야. 아까부터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렌 지미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원래 있는 등장인물인데 예언을 망가뜨리니 뭐니.

나도 막무가내로 개입하는 게 아니라고! 다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좋은 엔딩을 내려고 하는 거란 말야. 겸사겸사 불쌍한 삼류 악역 렌 지미를 위해서 친구도 좀 사귀고. 그런 것일 뿐인데 저주를 퍼붓기는.

“난 배드 엔딩, 특히 전쟁을 막고 싶을 뿐이라고요. 별다른 목적은 없어요.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는 거 빼고.”

“흥, 전쟁이 일어나는 것까지 알고 있다니 어디서 그런 걸 주워들어가지곤. 누구에게서 정보를 받았나. 바른대로 말해라. 안 그랬다간 혼쭐날 줄 알아!”

“할머니야말로 할머니 누나한테 어떻게 예언을 받았는지 먼저 알려 주면 답해 줄게요.”

불성실한 대답이 마땅찮았던 사라 하놋이 재경의 머리통을 또 때렸다. 통, 하고 속이 빈 것같이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난 인정 못 해!”

뭐, 어쩌라는 겨. 입을 비죽거린 재경이 성질 더러운 할머니가 떽떽거리는 걸 군말 없이 받았다.

어디 보자. 할머니네 누나가 마왕을 물리친 영웅이라고 했지. 그 ‘순간 이동’ 어빌리터라면 세라 쌤도 종종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 과거의 영웅 어빌리터가 마왕을 죽이게 된 경위에 대한 이야기는 시크릿 엔딩에 해당하는데 난 아직 그 시크릿 엔딩은 보지 못했다.

각 히로인별 노말 엔딩, 왕녀의 트루 엔딩, 아무와도 맺어지지 않는 모두는 친구 엔딩, 타락 엔딩 등등은 전부 봤지만 시크릿 엔딩을 보기도 전에 일이 생겨서 백 년 전 과거 방면은 완전 문외한이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참 깝깝스럽네. 뭐든 걱정일랑 마쇼. 내가 다 알아서 잘 끝내놓을 테니까. 할머니들은 다 그렇게 걱정이 많아요?”

“무식한 이레귤러야. 너만 없었어도 이런 걱정 없었어!”

“아, 저는 그런 이름이 아니라 렌이라고요. 렌 지미.”

“하찮은 이름 같기는… 렌 지미…….”

사라 하놋이 수첩을 뒤적거리며 예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봤지만 그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혀를 찼다.

“적어도 인류 평화를 위하고는 있으니 머리 좀 그만 때려요.”

그렇다고 보기엔 류제 신리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였다만. 재경이 시원찮았던 그녀가 말을 더 할 것처럼 입가를 실룩거렸지만 저 멍청이 같은 면상에서 사악한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마지못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언니가 죽은 지도 벌써 백 년이나 흘렀다. 아무리 언니가 무엇이든 알고 있었다고 해도 백 년이나 되는 세월 후의 일을 완벽히 예언하기엔 무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쌍한 언니는 안타깝게도 저 이레귤러만큼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시원찮은 재경에게 불평하려는 순간 아까 봤던 접수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사라 하놋을 발견하고 속력을 내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심사 위원님, 여기 계셨군요! 하아,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그녀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녀가 만능 해결사이길 바라는 접수원은 난감한 얼굴로 사라 하놋의 어깨를 붙들었다.

“참가자 10명이 식중독에 걸려서 못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출전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요. 게다가 보셨죠? 매년 빠지지도 않고 나오는 그 괴물들. 이래가지곤 대회를 보러 온 사람들이 무서워하기밖에 더합니까.”

“아아, ‘숙녀’들 말이야? 뭐 어때, 출전하고 싶은 사람 마음이지. 그들도 어엿한 여장 대회 참가자야.”

“그래도 대회를 보러 와주실 분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실 거 아닙니까. 큰일입니다. 이대로라면 참여율이 저조해서 내년부터는 대회를 개최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뭐라고?!”

여장 대회를 내년부터 개최할 수 없다는 말에 사라 하놋이 길길이 날뛰었다. 그걸 본 재경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백 년 전 사람이 언니라면 저 할머니도 백 살은 넘었을 거 같은데 저렇게 점프를 잘하냐. 정정도 하다. 울 할머니보다 나이도 많을 것 같은데. 부럽다, 부러워.

“안 돼! 그것만큼은 안 돼! 이 여장 대회는 라우라 축제의 역사와도 같은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명맥이 끊어져서는 안 돼!”

부글부글 끓는 피를 속이지 못한 그녀가 주먹을 치켜세우며 야망을 표출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하나둘 언니의 흔적이 사라지는 건 내가 못 참아. 그녀는 좋은 수가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번뜩 재경을 붙잡고 버럭 강요했다.

“너, 잔말 말고 대회에 나가라!”

“케에엑, 뭐라고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싫어. 절대로 안 나가!”

“그러지 말고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저 괴물들 보셨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정도라면 분명 나가는 것만으로도 상품을 탈 수 있습니다!”

사라 하놋이 타깃을 잡자 접수원도 편승해서 옳다구나 강하게 밀어붙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두 사람이 이상한 요구를 하며 들러붙자 겁에 질린 재경이 몸을 뒤로 뺐다.

“상품에 관심 없거든요?”

“남자가 되어가지고 패기도 뭐도 없나! 남자 중의 남자라면 마땅히 여장을 해야 하거늘!”

“그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린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난리야? 남자 중의 남자가 왜 여장을 하는데? 털을 삐죽 세운 재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내가 여장을 한다 친다면 저 무서운 사람들보다는 나을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런 거지 절대적인 입장에서는 저 괴물들하고 다를 바가 없다고! 어불성설이야!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귀여운 파란 머리 친구분하고 당신만 나가 준다면 경계심이 낮아진 사람들이 무난하게 모여들 겁니다. 분명 재능이 있어요!”

“아, 그러니까 싫다고요!”

“쯧쯧쯧… 이런 겁쟁이 같으니라고.”

“겁쟁이고 뭐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사나이 자존심이 딸린 일이지!”

재경이 필사적으로 거부하자 풀이 죽은 접수원이 이제 다 망했다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남자 중의 남자가 되고 싶지 않나?”

재경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며 간을 보던 사라 하놋도 이대로 가다가는 여장 대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았다. 일단 그녀의 표정은 심오한 예언가의 그것과 같았다.

“그니까 여장하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데요?”

재경이 그물망처럼 얽어는 끈질긴 설득을 피하려고 고개를 뒤로 쭉 뺐다. 아, 괜히 여기 남는다고 했어. 류제랑 같이 유네의 머리 끈이나 사러 가는 거였는데. 불길하다.

“뭘 모르는군. 아까 그자들을 봤지? 얼마나 남자다운지 봤나?”

“윽… 차림만 그렇지 않다면 그랬던 것 같긴 한데…….”

“그래, 그들은 남자 중의 남자. 상남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왜 여장 대회 같은 곳에 나갔을 것 같나?”

“어…어빌리터를 동경해서?”

“아니, 아니야!”

실은 맞지만 사라 하놋은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저 나이 또래 애들은 이런 말에 약하니 대충 설득하면 충분히 먹힐지도 몰랐다. 생긴 것도 바보처럼 생겼고. 좋아,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니 관심이 생긴 것 같군. 조금만 더 설득한다면 넘어갈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행동이 뭔지 아나.”

“뭐…뭔데요.”

“바로 여장이다. 여장! 여자가 여장을 하나? 아니지. 오로지 남자만 여장을 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행동. 오로지 남자만 할 수 있는 행동. 그것이 바로 여장이다!”

궤변…….

옆에 서있던 접수원이 그런 말로 퍽이나 넘어오겠다고 한숨을 쉬려다가 솔깃해하는 재경을 발견하고 뜨악했다.

세상에, 절대 안 한다고 거부했으면서 저런 말에 넘어올 정도면 얼마나 팔랑귀인 거야?

“여장을 함으로써 너는 남자 중의 남자,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되는 거지. 겁쟁이는 할 수 없는 위대한 도전을 할 생각 없나? 뭐… 너는 꼴을 보아하니 평생 그 축에도 못 낄 것 같긴 하군.”

“뭐라고요?! 하, 날 우습게 봤겠다. 하면 되잖아요!”

겁쟁이 취급당하자 재경이 울컥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나 신재경, 사나이 중의 사나이. 할머니가 그랬어. 난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용감한 사나이라고! 사나이는 두말하지 않는다!

근데 정말 이 세계에서는 남자 중의 남자만 여장을 할 수 있었던 거였나? 그래서 대기실에 저런 사람들이 가득 있었던 거야? 그럼 나도 여장을 하면 저런 상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거야.

“나 신재… 렌 지미. 그까짓 여장,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좋아. 결정했겠다! 안 한다고 번복하기 없기! 한 명 접수 추가!”

“…진짜요? 정말요?”

고작 이런 말로 설득이 됐다고? 접수원은 재경의 사고방식을 이해 못 하겠다며 어처구니없는 시선을 보냈다. 남자 중의 남자라는 타이틀에 꽂혀 있는 재경 몰래 사라 하놋이 접수원에게 쉿, 입단속을 시켰다.

“가거라. 사나이 중의 사나이!”

“두고 봐요. 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니까!”

참가 인원이 늘어나야 좋으니. 괜찮겠지 뭐. 그는 홀라당 속아 넘어간 것도 모르고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 재경이 조금 불쌍해졌다. 하지만 그도 맡은 책임이 있으니 아무 말 없이 그를 데리고 여장 대회를 준비할 새로운 대기실로 향했다.

파란 머리 친구랑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속았다는 걸 알고 마음을 바꿔먹으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일단 격리시켜 놓을 필요가 있었다.

“빨리 안내나 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어떻게 보면 위풍당당한 모습이고, 다르게 본다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겠지만 본인은 모르니까 뭐.

한 건 해낸 사라 하놋이 사악하게 웃었다. 내가 이겼어. 마녀처럼 낄낄거린 그녀가 유치하게 굴었다.

유망한 새 참가자가 추가되었으니 그녀도 예언을 눈으로 확인할 겸 대회 심사 위원 역할을 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갔다.

한편 건너편 상점에서 유네를 위한 리본을 사려고 기웃거리던 류제는 렌이 말한 분홍색 리본을 발견하고 냉큼 집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구매했다.

유네가 여장이라니. 역시 렌은 유네가 여장한 모습을 좋아하는 건가?

“하아, 바보 같아.”

류제는 남자니 여자니 지긋지긋하게 집착하는 머릿속에 질려서 혀를 내둘렀다. 저런 식으로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바보 같았다.

렌은 평범하게 여자를 좋아한다고. 나나 유네같이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하다고 해야 할지.

손에 든 리본을 주머니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류제가 다시 여장 대회가 열리는 무대로 돌아갔다.

근데 왜 렌은 분홍색이라고 콕 집어서 말한 거지? 유네가 이런 리본이 어울릴 거라고 이전부터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그만. 그만! 이런 생각 이제 그만해.

“상대방은 별생각 없을 텐데 남는 건 질투밖에 없네.”

류제가 한탄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포르테는 더 많이 사랑하라 조언했지만 사랑이 아니라 질투만 하다 끝나니 정신력이 못 버텼다.

지친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내가 렌을 포기할 때까지? 류제는 문득 막막해졌다.

복잡한 생각과 함께 무대 아래 건물로 들어오는데 벌써부터 무대 앞에서 사회자가 이런저런 준비를 통해 관객을 모으고 있었다.

혹시라도 늦어서 렌한테 혼날까 류제가 헐레벌떡 대기실로 뛰어갔다. 무대 뒤편 간이 건물 안 그 대기실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류제는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이라는 팻말이 걸린 방을 발견하고 곧바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때 옆문이 먼저 열렸다. 이 옆 대기실에도 누가 있었나. 뭔가 싶었던 류제가 잠시 손을 멈췄다.

“불편해 죽겠네. 아랫도리가 휑하잖아.”

“…레…엔? 너 맞아?”

평소처럼 목덜미가 드러나는 짧은 머리 대신 색이 비슷한 가짜 머리를 붙여서 양 갈래로 묶은 소녀가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문밖으로 나오다가 류제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실수로 뒤에 있던 대기실 문과 부딪혀 버린 재경이 아파서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다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류제의 기척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렌… 너 무…무슨 꼴이야?”

“…시…시끄러. 무슨 소리라도 해봐. 따귀를 때려줄 줄 알아.”

류제의 얼이 빠진 시선을 받고 귓불이 봉숭아 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새빨개진 재경이 보지 말라며 고개를 획 돌렸다.

손은 갈 곳을 잃어서 괜히 다른 팔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며 쭈뼛거린다. 검은 스타킹에 하늘하늘 플랫한 남색 원피스. 그 안에 입은 펄렁한 하얀색 와이셔츠에 빨간 리본이 무척…….

“잘 어울리…네.”

“뭐어? 닥쳐! 네가 참가를 안 하니까 나한테까지 불똥이 튄 거잖아! 속았어. 이건 속은 거야! 뭐가 사나이 중의 사나이야!”

제풀에 못 이겨 성질을 부리는 얼굴은 화장을 했는지 주근깨가 평소보다 연했다. 머리 색과 잘 어울리는 갈색 아이라인과 은은한 화장이 재경의 샐쭉한 눈매를 사랑스러운 고양이처럼 귀엽게 바꿔놓았다.

재경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넋이 나간 류제 때문에 이대로 심장 소리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재경이 괜히 성질을 내어도 정신 나간 류제는 어쩔 줄 몰라 휘청휘청 공중에서 손만 휘저었다. 길 잃은 혜성처럼 방황하던 손이 곧 재경의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뭐…뭐야?! 웃으려면 빨리 웃어. 네 반응이 더 사람 쪽팔리게 하거든?”

새침한 듯 얼굴이 빨개진 재경이 버둥거렸다. 류제한테 이딴 꼴을 보여 주다니. 별 이상한 말에 속아 넘어간 바보라고 한 달은 넘게 놀려댈 거다. 류제의 생각을 지레짐작한 재경은 이제 다 망했다며 눈을 질끈 감았다.

바보 류제는 웃어넘기면 될 걸 가져다가 왜 참는답시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놀릴 거면 빨리 놀려버리고 끝내라. 그리고 난 시원하게 한 대 쳐줄 거다.

“렌―”

“시끄러워!”

웃으라고 한 건 렌이었으면서 이름 한번 불렀다고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는 건 뭔가. 무슨 말도 못 해.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한 류제는 속에서 욕망만 부풀어 고개를 푹 숙였다. 재경이 궁상맞은 볼을 부풀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안다. 잠시 갔다 온 사이에 어울리지도 않는 여장을 왜 했냐는 거지?

재경과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는 류제는 찌르는 듯한 충동이 이성과 맞부딪혔다. 진짜 이대로 그냥 확 껴안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그러다 렌이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하면 어쩌지? 솔직히 반칙이잖아. 이렇게 내 뒤통수를 치다니. 젠장, 귀여워. 여장 대회 절대 안 나간다고 했으면서 이런 깜짝 선물을 주다니.

“야. 뭔데!”

그래, 렌한테 직접 물어보자. 까짓것 물어보면 될 거 아냐. 껴안아도 되냐고. 좀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겠지만 뭐 어때.

“뭐냐고!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숨넘어가게 웃든가 놀리든가 아무거나 해봐!”

“있잖아, 나 혹시 너 한 번만 껴―”

“이제 시간이 없어. 리본이 없지만 어쩔 수 없다. 자, 어서 무대로―”

큰 결심을 한 류제가 대담한 부탁을 하려던 순간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 팻말이 걸린 대기실 문이 쾅, 열렸다.

잠시 문이 쾅 열릴 수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주제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바닷가에서 해적질만 30년 정도 한 것같이 생긴 저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문을 열면 기공파가 생겨 그런 소리가 날 것도 같지만 보다 더 단순하게 생각해 보자.

쾅 소리가 난 이유는 그들이 힘차게 열어젖힌 문이 류제와 시원하게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악!”

“어, 으앗……!”

방심하고 있던 류제가 그 반동으로 앞으로 밀려나 재경을 아래로 깔고 넘어지고 말았다. 졸지에 같이 뒤로 넘어져 버린 재경이 뒤통수를 잡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파아! 류제, 이 자식 뭐 하는 짓이야!”

“미안… 갑자기 뒤에서… 윽!”

바닥에 코를 박을세라 류제가 간신히 땅에 무릎을 대었다. 렌을 깔아뭉개는 건 막았는데 하필이면 붙잡은 곳이 엄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봤자 고작 손이 렌의 가슴을 짓누르고, 땅에 댄 무릎 하나가 렌의 허벅다리 안쪽을 벌리고 있을 뿐이지만 렌에게 마음이 있는 류제의 시선에서 보면 엄밀히 엄한 자세가 맞았다.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은밀하게 드러난 중요 부위가 야했다. 그가 원했던 단순한 허그보다 더 불건전한 자세다.

지레 뜨끔한 류제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미안!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넘어진 것 가지고 호들갑은. 됐으니까, 나 좀 일으켜 세워줘.”

“어라라, 너희들 이런 곳에서 무슨 추태니? 그나저나 내가 의뢰한 리본은 어떻게 됐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에 하늘하늘 발레복을 입고 있는 강인한 남성이 별꼴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추태라는 말을 마음에 담아둔 류제가 땀을 쩔쩔 흘렸다.

“자, 빠…빨리 일어나.”

보통 재경을 들 때 고양이 안듯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들어 올리는 방법을 애용했던 류제지만 지금은 몹쓸 마음 때문에 대충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좋은 렌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어! 류제 군…하고 렌 구우운? 그게 뭐야? 렌 군도 대회에 나가는 거야? 나한테는 말 안 해줬으면서!”

발레복 차림의 근육 몬스터 뒤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유네가 까꿍 고개를 내밀었다.

저 여장 남자들도 여장 대회에 한두 번 나간 게 아닌지 유네는 쳐다보면 얼굴이 절로 붉어질 만큼 예쁘고 앙증맞게 꾸며져 있었다.

아니,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한테 쓰라고! 왜 유네는 저렇게 꾸며 줬으면서 댁은 여전히 근육 몬스터인데?

“아…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넘어지는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재경이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툴툴거렸다. 그 망할 예언자 할머니한테 속았다는 말은 창피해서 하기 싫었다.

“근데 렌 군, 진짜 귀여워~! 진작 한다고 말하지. 나도 같이 옆에서 열심히 꾸며줬을 텐데!”

“뭐?! 귀엽다고? 미친 거 아냐?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

“하지만 진짜로 귀여운걸. 류제 군, 그렇지 않아?”

“아아… 그…그렇네.”

“류제가 동의 못 해서 떨떠름해하잖아!”

재경이 것 보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가짜 양 갈래 머리가 스르르 목 뒤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찰랑거렸다.

흥분해서 상기된 얼굴에 색이 나는 립글로스를 발라 반짝거리는 연분홍빛 입술. 피부는 원래부터 창백하게 질린지라 별 차이 없지만 주근깨가 많이 죽어서인지 보다 깨끗하고 건강하게 빛났다.

거기에 저 고양이 같은 눈꼬리. 말하면 한 대 맞겠지만 렌의 눈꼬리를 너무 잘 살린 것같이 귀여웠다. 아까 썼던 꾸물꾸물 고양이 가면 같아.

떨떠름해한다는 타박을 들은 류제가 고개를 돌렸다. 침묵을 선택한 류제 대신 발레복 근육 몬스터가 쯧쯔 혀를 차며 부정했다.

“흥, 그렇지 않아. 저 못생긴 고양이 같은 친구보다 우리 유네쨔응이 더 귀여운걸. 너희, 내가 부탁한 유네쨔응의 리본은 어쩐 거야? 잘 사 온 거 맞아?”

“여기 있어요. 렌, 이거 말한 거 맞지?”

류제가 엉거주춤 주머니를 뒤져 연한 진달래색 리본을 꺼내 들었다. 콧대를 든 재경이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예뻐라! 자아― 유네쨔응. 잠깐만 들어가서 머리 손질만 다시 할까? 거기 너희들은 잠시만 기다려줘. 빨리 유네쨔응을 예쁘게 꾸며주도록 하자!”

발레복을 입은 그녀(?)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유네를 끌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다.

대기실 거울에 비친 유네가 언뜻 보였다. 남장을 하던 유네가 여장을 하니 원래 그 나이 또래 여자애처럼 귀엽고 깜찍하니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돌았다.

남장하던 유네가 저런 모습을 보이면 여자애라는 게 확 와닿는다니까. 거리감이 드는 기분이야. 유네는 유네일 뿐인데 그래도 뭔가…….

“자, 너희들도 들어오도록 해. 소년도 넘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다 헝클어졌잖아. 이래가지고 공정한 대결을 펼칠 수 있겠어?”

“별로 공정한 대결 따위…….”

“뭐라고?”

억지로 고음을 내던 목소리가 세 옥타브는 낮아진 것처럼 짙게 깔렸다. 저건 못 들어서 되묻는 게 아니다. 반박하지 말라는 협박이 담긴 추임새다.

본능적으로 위계질서를 깨달은 재경이 존댓말로 답했다.

“암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순종적인 대답에 만족했는지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근육 빵빵한 괴물에게 이길 자신이 없었던 재경이 얌전히 꼬리 내려 잠자코 따랐다.

‘숙녀들이 지저귀는 곳’ 대기실에 끌려온 재경은 강제로 거울 앞에 앉혀졌다. 유네도 총총 뛰어가서 제자리에 앉았다. 눈에 활기가 도는 게 친구들이 사준 리본이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다시 봐도 예쁜 리본이야. 유네 네 파란 머리에 정말 잘 어울려 보여!”

“친구가 센스가 있네. 어디서 이런 예쁜 리본을 골랐담⚦”

“허허허허! 거기 잘생긴 소년, 네가 사 온 거야? 이 친구를 잘 관찰했구먼그래!”

“아… 딱히 제가―”

고른 건 아니라고 정정해 주려던 류제는 그렇다고 렌이 골랐다고 말해 주기는 싫었다. 또 둘이서만 묘한 분위기 풍기는 걸 옆에서 보고만 있으라고? 추잡한 질투라는 거 알고 있었지만 류제는 고의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장한 숙녀에게 붙잡혀 강제로 머리 손질을 당하는 중인 재경은 그 부분에서 센스 있게 입을 다무는 류제가 의외라서 거울을 통해 친구를 흘겼다. 입단속 하는 걸 깜박했는데 짜식이 눈치가 많이 늘었네!

“소년도 의외로 양 갈래 머리가 잘 어울린다~ 이 풋풋한 주근깨도 좀 봐.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니.”

“사…사랑스…….”

“팔랑팔랑한 원피스와 그에 맞지 않는 어색한 골격이 참으로 귀엽고만. 그래, 이 갭이야말로 바로 여장의 묘미지.”

“귀…귀엽…….”

평생 듣도 보도 못한 단어들이 여장한 몬스터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자 재경은 견딜 수 없었다. 자신에게 향하기엔 끔찍한 단어들이 재경의 입가에 맴돌았다. 말이 돼? 류제 넌 옆에서 왜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난리야!

재경이 진짜 그렇게 보이나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통해 그와 유네를 비교했다. 유네는 유네대로 긴 속눈썹을 집어 올리고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은은한 화장을 해서 진짜 범접할 수 없이 귀여웠다. 귀엽다는 말의 정의가 눈앞에 현현한 것처럼 귀여웠다.

거기에 짧게 땋은 머리를 류제가 사다 준 분홍 리본으로 예쁘게 묶는데 꽁지머리 하고 다니던 것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원래부터 잘사는 집안 출신이라서 그런가 남들이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데도 차분하게 앉아있는 모습에서 품위까지 느껴졌다.

옷은 블링블링 하늘하늘한 땡땡이 무늬 원피스에 양말은 귀여운 토끼가 그려진 니삭스를 신었는데 유네의 얇실한 다리와 잘 어울렸다. 귀엽다는 건 저걸 보고 말하는 거다.

유네를 보다가 정면에 비친 거울을 보니 초라할 정도로 못생긴 것 같다.

재경은 저들의 빈말을 깨닫고 기분이 훨씬 나빠졌다. 못생겼으면 솔직하게 못생겼다고 하면 되지. 뭐가 귀엽네 사랑스럽네야. 유네가 훨씬 귀엽고 사랑스럽구만. 아니, 솔직히 남장한 여자를 여장시킨 거랑 남자를 여장시킨 거랑 같아? 골격부터가 귀엽지 못한데 내가 유네랑 비교될 리가 없지.

아니, 난 왜 유네랑 나를 진지하게 비교하고 앉았어? 유네는 여자에다가 히로인이고 난 남자에 들러리 악역이라고. 적당히 해라, 신재경!

“끄으으응.”

“어머머, 그렇게 인상 찌푸리지 마. 귀여운 얼굴이 망가지잖아.”

“저기요, 그놈의 귀엽다는 소리 좀 안 하면 안 돼요?”

“왜, 귀엽잖아.”

이번에도 부정하면 한 대 치겠다는 듯이 목소리가 쫙 깔렸다. 재경은 또 찍소리도 못하고 짜져서 입을 다물었다. 재경은 새빨간 남이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냥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젠장, 내가 왜.

그런 재경을 힐끗거리던 유네가 표정 관리를 못 하고 바보처럼 에헤헤 웃었다.

“맞아, 렌 군 귀여워.”

“진짜 유네 너만큼은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유네의 입에서 나온 귀엽다는 말만큼은 참지 못한 재경이 새빨개진 얼굴로 타박했다. 유네는 복잡스러운 재경의 마음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기에 바빴다.

유네는 자신은 진짜 여자라서 여장하는 의미가 없지만 남자인 렌이 여장을 한다니 평소와 다른 모습에 자꾸 시선이 갔다.

게다가 미처 말은 못 했지만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렌이 비밀리에 여장 대회에 나서줄 거라고 생각 못 했던 그녀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섭섭함이 시원하게 날아갔던 것이다.

“헤헤, 그래도 기쁜걸. 렌 군이 같이 여장 대회에 나가 주다니. 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숨긴 거야?”

“…아냐, 그냥 이상한 할머니한테 속은 거야!”

“속았다고?”

옆에 서있던 류제가 그 의미를 되물었다. 재경은 쪽팔려서 사나이 중의 사나이가 되려면 여장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궤변에 속았다고 털어놓지 못하고 속만 앓다 괜히 화를 냈다.

“아무것도 아냐!”

“아니, 왜 성질을 내.”

“자, 끝. 어머어머, 역시 머리가 확 살아. 리본이 예쁘다. 저 친구가 널 아주 잘 봐주었는걸? 남자애한테 이렇게 어울리는 리본을 골라주다니, 어쩜 좋니.”

“네에? 에헤헤, 그런가? 고마워, 류제 군. 렌 군도 고마워.”

“별말씀을.”

삐쳐서 고개를 돌리고 흥흥거리고 있는 재경 대신 류제가 가뿐하게 감사를 받았다.

재경도 머리 손질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남색 원피스를 툭툭 털어냈다. 류제가 몰래 그를 흘겼다. 엉덩이 부분까지 탁탁 착실하게 털어내는 모습은 여전한데 치마를 입고 하니 새삼 묘했다.

“뭘 보냐. 그렇게 웃기냐?”

“어? 아니, 그렇게 입으니까 진짜 여자애 같아서 귀엽… 쿱……!”

이런 꼴이 된 자신을 놀리는 걸로 착각한 재경이 주먹을 내질러 류제의 배를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주먹질로 투닥거려도 진심이 들어간 적이 없었던지라 방심했던 류제가 털썩 주저앉았다. 류제가 아파하건 말건 재경은 쿵쾅쿵쾅 발을 굴러 대기실 바깥으로 나갔다.

류제가 유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리본을 선물해 줌으로써 유네의 호감도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는 대충 일단락됐다. 문제는 내가 전혀 상상도 못 한 여장 대회가 문제지!

“이렇게 된 이상 다 망쳐줄 테다!”

여기저기서 귀엽다는 말로 찔러대자 고슴도치처럼 잔뜩 뿔이 난 재경이 소악당같이 으르렁거렸다. 전부 다 나한테 무슨 앙심이라도 품었나 왜 되지도 않는 빈말이나 하고 그래. 누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아?

“어머머, 간도 크셔라. 어떻게 망치려고 하는 거야? 귀여운 꼬마 고.양.이.야?”

“네가 난리를 치더라도 이 몸이 우승하겠지! 홍홍홍!”

“허허허, 어떻게 망치려고? 한번 알려줘 보렴.”

“한번 화끈하게 망쳐봐, 소년~⚦”

말 한마디 했다고 마족 열댓 마리는 손으로 때려잡을 것처럼 생긴 네 명의 우락부락 ‘숙녀’들이 소스라치게 놀랄 말들만 해댄다. 질겁한 재경이 꾸물꾸물 류제의 옆으로 가서 옷깃을 붙잡았다.

“류제, 저놈들이 날 죽이거든 반드시 복수해 줘.”

“응? 아… 뭐… 그래.”

아직도 배가 아릿아릿한 류제는 말의 내용보다 재경이 우물쭈물 자신의 옷깃을 잡았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몸의 온 신경이 렌이 붙잡고 있는 옷깃에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바람인 건 알지만 렌이 계속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

“선수분들. 입장은 이쪽입니다. 차례는 제비뽑기로 나갑니다. 서둘러서 순서를 정해 주세요,”

아까 재경을 치욕의 구렁텅이에 넣는 데에 일조한 접수원이 다가오는 차례대로 깡통 그릇을 넘겼다. 일단 제일 먼저 도착한 재경이 하나 뽑고, 유네가 하나 뽑은 다음 뒤이어 오는 여장 몬스터들이 하나씩 뽑았다. 유네가 제 번호를 확인하고 울상을 지었다.

“18번째… 에엑… 나 마지막이야. 어쩌지?”

“나랑 바꿔주라, 제발.”

재경은 번호 1이 적힌 종이를 보고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아니, 애초부터 이 여장 대회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1번이라고? 1번은 저 몬스터 중 한 명이 하라고 해. 왜 하필이면 나야!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앗, 1번이십니까? 그럼 서둘러서 가셔야겠는데요.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서.”

“아니, 여장 대회에 무슨 준비가 있어요. 후딱 왔다 갔다 오면 되는 거 아니에요?”

“설명 못 들으셨나요? 간단한 장기 자랑과 함께 매력을 어필하면서 자신의 미를 뽐내시면 됩니다. 거기에 쓰여 있습니다.”

접수원이 류제가 들고 있는 리플릿을 가리켰다. 그걸 처음 듣는 류제가 리플릿을 펼쳐 여장 대회 항목을 찾았다.

“진짜네. 참가자의 장기 자랑이 있다고 되어있어. 어떻게 해, 렌?”

“어떻게 하긴. 빤스런 해야지!”

이 꼴로 다니는 것도 애바인데 재롱까지 부리라고? 재경이 도저히 못 하겠다며 후다닥 치맛자락을 붙들고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하지만 차마 열 걸음도 도망치지 못하고 발레복을 입고 있는 몬스터에게 포획당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뇌마저도 근육으로 되어있을 것 같은 괴물이 씨이익 웃어 보이는데 그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재경이 터벅터벅 제자리로 돌아갔다.

덕분에 재경이 돌아오자 접수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재경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주최 측 억지 때문에 참가하셨겠지만 그래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옆에서 호응도 잘 유도해 드릴게요.”

“잘하라고, 양 갈래 소년. 남자가 되거라!”

“그래요! 남자가 되세요!”

“시끄러워!”

그 말에 속아서 여장을 하게 된 재경이 지금 그 소리가 왜 나오냐며 빼액 소리 질렀다.

접수원이 재경을 어르고 달래며 입장할 선수 대기실로 안내했다. 나머지 선수들은 옆에 있는 다른 대기실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어요. 학생은 무대로 가셔서 응원하시길 바랍니다.”

접수원이 사람 좋은 얼굴로 류제를 막아섰다. 자기가 뭔데 렌의 남자 친구처럼 굴어 불만스러웠지만 류제는 이놈의 질투가 문제라며 간신히 납득했다.

급하게 떠나버린 렌에게는 못 해줬지만 유네에게 잘하라며 응원해준 류제는 밖으로 나와 무대가 잘 보일 만한 좌석을 찾았다.

―아, 아, 마이크 테스트. 안녕하세요! 여러분. 올해에도 돌아온 라우라 축제의 별미, 여장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정말로 대회가 시작되려는 건지 리허설을 마친 사회자가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앉으라며 호객 행위를 시도했다. 너무 뻔뻔하게 굴어서 모르는가 싶었는데 이 대회가 별미라는 걸 알긴 알아서 다행이다.

“어라? 류제잖아. 혼자 이런 곳까지 무슨 일이야?”

“어어, 너희도 여장 대회 보러 온 거야?”

무대 바로 앞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으려던 류제가 그 옆에 앉아있던 같은 반 친구를 발견하고 휘둥그레졌다. 수학여행 때 렌과 같은 조였던 학생들이었다.

아뿔싸, 이걸 어째. 저 세 사람 모두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다. 렌이 알았다간 사달 날 것 같은데…….

“응. 하하. 여장 대회라니 웃기잖아. 오늘은 왜 혼자야? 매일 붙어있는 다른 두 명은 어디다 떼먹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어쩌다 보니? 서어얼마… 그 두 사람이 여기 출전한 건 아니겠지? 유네라면 충분히 설득력 있는데.”

“나는 아무 말 안 할래.”

류제의 말에 줄줄이 앉은 세 명의 엑스트라 친구가 웃겨 죽겠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건 꼭 봐야 한다며 끅끅끅 어깨를 들썩거리며 눈물을 닦아내는 친구도 있었다.

류제는 보지 못했지만 저 멀리 다른 좌석에서는 반에서 날라리 역을 맡은 ‘무게’ 어빌리터와 그 친구들도 있었다. 그녀들도 참가자들을 비웃을 요량으로 깔깔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여장은 키아나트리체의 오래된 풍습 중에 하나죠. 남아를 여아처럼 꾸며서 어빌리티가 개화하도록 비는 의미도 있고, 어빌리터라 착각하게 만들어 마족이 도망가게끔 하게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풍습에서 유래한 라우라 축제 여장 대회! 올해에도 화려하게 개막합니다!

사회자의 기합과 동시에 무대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고 악단이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하나둘 박수를 쳤다.

―올해에도 많은 남성분들께서 이 여장 대회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선수 10명이 식중독으로 입원하는 불미스러운 사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무사히 대회가 열리게 되어 기쁩니다. 일단 소개부터 하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라우라 축제에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는, 사라 님이십니다!

“에헴!”

무대 옆 심사 위원석에 앉아있던 사라 하놋이 지팡이를 탕탕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겸손하게 인사했다. 그녀를 수식하는 호칭 중 ‘로라 하놋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라는 수식은 바라지 않은 지 오래다.

“어?”

수상한 예언자 할머니를 알아본 류제는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저 할머니는 분명히 수학여행에서―

이레귤러, 재앙, 흉측한 집념과 사악한 영혼.

그녀가 내뱉었던 저주스러운 말들이 귀에 맴돌았다. 저 할머니는 그때 그에게 수상쩍은 말을 했었던 벼룩시장 상인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할머니가 했던 말이 와닿는다. 마왕의 부활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재앙이다. 마왕의 흉측한 집념과 사악한 영혼. 그리고 인간에 섞여 있는 이레귤러. 다 자신을 이르는 말이었다.

“류제? 왜 그래? 배 아파?”

“아니. 괜찮아.”

괜한 걱정인가. 제 정체를 들킬까 새하얗게 질린 류제가 자리에 앉는 사라 하놋을 흘겼다. 저 할머니는 뭘 알고 있는 걸까.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던 거지? 내 뭘 알고?

―그럼 첫 번째 선수로… 무려 현재 제립학교 재학 중인 1학년 소년 어빌리터, 렌 지미입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깔깔깔깔! 내가 미쳐. 렌이 여장이라고? 렌이? 푸하하하!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유네는 내가 큭큭큭… 인정하는데… 큭큭… 렌이… 렌이… 크크크 게다가 1번으로…….”

“본인 의사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너무 웃지 마.”

너무할 정도로 웃어대서 류제가 렌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녀들은 알겠다며 웃음을 참아보려 시도했지만 역시 렌이 여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상이 안 되는지 도리질까지 쳐가며 덜덜 떨었다.

“저기 나온다.”

“아, 미치겠네. 이거 평생 놀림감 수준인데, 흐흐흐.”

“우하하! 저게 뭐야. 하하! 양 갈래 머리잖아. 으하하하! 저 화장은 뭐야.”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더 웃겨……! 으하하.”

무대 안쪽에서 엉거주춤 익숙하지 않은 구두를 신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는 재경은 부끄러워 죽겠는지 류제의 자리에서도 새빨간 귓불이 보였다.

무대까지 나오긴 했지만 어쩌지도 못하고 쭈뼛거리던 재경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강제로 무대 가운데로 와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긴장해서 굳어있던 재경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자기소개애? 아까 댁이 다 했잖아! 이 이상 뭘 더 말해? 재경이 사회자를 노려보았지만 능구렁이처럼 웃는 사회자는 어서 하라며 압박을 가했다. 짧은 침묵이 쇠구슬처럼 무겁다. 재경은 에라 모르겠다 마이크를 잡고 빼애액 외쳤다.

―안녕하쉼까!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렌 지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아아!

“으하하! 하하하! 하하하! 나 죽어!”

“으히히히…히히히… 흑…흐흑…흑…….”

“푸흐흡…흡… 크흐흑…흑…….”

웃다 못해 이제 거의 울고 있는 반 친구들은 눈물을 닦아내며 몸을 들썩들썩 경기를 일으켰다. 렌이 무대에서 이걸 보고 더 움츠러들까 걱정이었다. 정작 재경은 긴장해서 앞에 누가 앉았는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우렁찬 자기소개군요. 그럼 렌 지미 학생! 어떤 계기로 여장 대회에 나오게 된 겁니까? 렌 학생은 어빌리터죠?

―넵! 저도 왜 제가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하, 지인에게 떠밀려서 온 건가요? 이것 참 난감하겠군요.

난감한 것치고는 꽤 잘 꾸미지 않았나. 저 양 갈래 머리에 주근깨가 가려진 피부하며, 핏이 안 사는 어색한 원피스, 검은색 스타킹에 구두라니.

“…언니?”

사라 하놋은 그 어색한 모습에서 혈육의 모습을 떠올리고 말을 잃었다. 턱이 절로 벌어져 칠칠치 못하게 침이라도 흐를 것 같다.

지푸라기 같은 연한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모습. 대충 생겨 먹었지만 샐쭉한 눈매에 작은 눈동자가 매력적이다. 그리고 눈가에 차마 가리지 못한 주근깨.

그녀는 늘 시원시원하고 꿍꿍이속 가득한 미소를 지었었지만 저 소년에게는 얼굴에 다 드러나는 불평 가득한 표정이 대신 자리 잡았다.

―렌 지미 군이 준비한 매력 어필 시간입니다. 준비한 장기 자랑은 뭔가요?

장기 자랑까지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재경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무리한 걸 시키는 거 아닌가. 난이도가 난데없이 하드코어잖아.

류제도 렌이 걱정이었다. 저래 보여도 낯도 많이 가리고 모르는 사람에게 가시를 세우는 친구라 사회자한테 험한 말이라도 날릴까 전전긍긍하다.

거기에 장기 자랑이라니. 류제는 렌이 장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상상이 안 갔다. 확실히 요리는 잘했지. 근데 저기서 요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그럼… 그… 노…노래를 하겠습니다.

노래?

“노래? 렌이 노래를 한다고?”

“렌, 크흐흑… 렌이… 흐흐흐… 여장을… 흐흐… 하고… 흐흐흐… 노래를… 크흐흐흑. 이건 신문부에 제보하면 1학년 대토픽감일 거야.”

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 비웃음이 주를 이뤘다. 하기야 렌이 노래를 부르는 걸 들어보질 못했으니 류제도 상상이 안 갔다.

―노래요? 무슨 노래입니까?

―그…그냥 노래인데…….

―반주가 필요합니까? 세션 준비되었나요?

―아뇨… 아마 아무도 모르는 노래일 것 같아서…….

“렌이… 크흑… 무반주로… 여장을… 하고… 노래를… 크흐… 흐하하!”

“영구 보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으하하하.”

“하하하, 히히히히…….”

―하…할머니가 좋아하던 노래인데… 그… 부를 것이 없으니까 그냥 부를게요.

―이야, 자신감이 넘칩니다! 모두 큰 결심을 한 렌 지미 군에게 큰 박수 부탁 바랍니다!

어느새 꽉 찬 좌석에서 연이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부담스러워. 재경은 이러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며 원흉인 사라 하놋을 노려보았다. 왜 저 할머니는 날 이런 나락에다가 추락시켜 놓고 멍때리고 있는 거야?

―흠흠… 그럼.

밑져야 본전이고,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 없지만 할머니가 잘한다 잘한다 했으니 이거라도 불러야지.

재경은 이 노래를 여기서 써먹을 줄은 몰랐다며 세상만사 새옹지마를 새삼 느꼈다. 질질 끌면서 저 불쾌한 시선들에 당하느니 빨리 부르고 무대를 내려가는 게 이득이었다.

―제목은 「비와 당신」입니다.

할머니가 종종 라지카세에서 들었던 노래. 텔레비전에서도 나오면 무조건 채널 고정해서 들었던 노래.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박혀 버린 노래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재경은 무반주에, 익숙하지 않은 이 나라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천천히, 나긋나긋 추억을 떠올리며 감정선을 따라 마지막 가사의 호흡까지 마친 재경이 질끈 감았던 눈을 반쯤 떴다.

그때서야 긴장이 풀렸는지 사람들 얼굴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맨 앞자리에 앉은 류제가 눈에 들어왔다. 눈을 다 가리는 앞머리 때문에 노래가 어땠는지 반응을 모르겠지만 관객석에 류제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상입니다.

재경이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노래가 끝났는데도 반응이 시원찮자 그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쪽팔려서 이대로 증발했으면 좋겠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크게 환호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적당히 맞춰주려고 한 건지 아님 진짜 잘 불러서 그런 건지 재경은 알 수 없었다.

―이야, 잘 부르시네요. 상당한 미성이 돋보이는 무대였습니다.

노래가 끝났다는 것을 안 사회자가 옆으로 다가와 입발림 말을 했다. 상태를 보고 기대를 안 했는데 잘하니까 진심으로 칭찬한 것이었지만 재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 별로……. 그냥 대충 불렀고…….

―모두 우리 렌 지미 군에게 다시금 큰 박수 쳐주세요. 떨렸을 텐데도 좋은 무대를 선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어빌리터, 우리 위대한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를 책임질 제립학교 학생의 역량이라는 걸까요. 기호 1번 렌 지미 군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야아… 잘 부른다. 웃음이 쏙 들어갔네.”

“나 첫 소절 듣고 깜짝 놀랐잖아. 누구 노래지?”

“나도 몰라. 처음 듣는 노래인데. 사람 울컥하게 만드네. 렌 주제에.”

감미로운 노랫소리에 홀린 류제도 렌이 무대 뒤로 빠질 때까지 멍청하게 쳐다만 보고 있었다. 미완성된 목소리지만 매끄러운 음 진행과 깊은 감정표현이 예사가 아니었다.

나도 노래는 잘 안 들어봐서 모르지만 렌이 실력이 상당하다는 건 알겠어. 의외라서 더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렇게 여장한 모습도 귀여워 죽겠는데 저런 모습을 보여주면 내가 다 미치겠잖아. 아까 무리해서라도 껴안아 줄 걸 그랬다.

“후우.”

어쨌든 위기를 극복해 낸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차례는 이걸로 끝이다. 무대 뒤로 돌아가려던 재경이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하는데 돌연 사라 하놋이 심사 위원 자리를 박차고 다가왔다.

성급하게 손을 움직인 그녀는 재경의 하관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관객석 여기저기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마 심사 위원이 재경의 노래에 너무 감격해서 뛰쳐나간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그냥 우연이야!”

“아, 깜짝아! 멍데여. 우여니라니. 나가 저쓰멍 대찌.”

“어째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고작 얼굴만 닮은 거면 모른다. 이 아이가 그녀만이 들었던 로라 하놋의 예언을 알고 있으니까 문제였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누구냐. 아니면 언니는 정말 어빌리티 말고도 마왕처럼 초인적인 힘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걸까. 언니는 저 소년으로 부활한 것인가!

“아냐… 아냐!”

언니는 죽었다. 스물일곱. 내가 열다섯이었던 그해에 왕실 명령에 의한 과도한 어빌리티 사용으로 좋지 않던 몸이 결국 부서져 내려 피를 토하고 눈을 감았다.

그 잘난 ‘힐링 팩터’가 죽음을 부채질했다. 내가 언니의 시체를 닦고 내가 언니의 시체를 화장했다. 저놈이 내 언니일 리가 없어. 더군다나 성별도 완전 반대가 아닌가.

“정체가 뭐야!”

“뭐냐니. 말했잖아요. 렌 지미, 삼류 악당 렌 지민데요.”

“그걸 묻는 게 아냐!”

언니는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알고 이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 하지만 자신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왕을 죽일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능력을 사용한 대가는 가혹하다.

언니는 키아나트리체 왕실에 이용당할 걸 알았음에도 그 넓은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예정했던 날 죽었다. 그런 언니와 저놈이 같을 리가 없어. 절대, 절대로.

“뭐예요, 진짜. 하란 대로 다 해줬드만. 당황스럽네. 진정해요, 할머니.”

“넌 도대체…….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냐.”

언니의 예언에 개입하는 이레귤러의 등장. 그 이레귤러의 정체가 언니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다. 닮은 것일 뿐이야. 저자의 표정을 연기라고 말하기엔 아이처럼 순수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썩 가버려라. 망할 애송이!”

“으악! 아 진짜, 이랬다가 저랬다가 거 할머니 성질머리 더럽다!”

―심사 위원님, 아무리 감동하셨어도 함부로 자리를 이탈하시면 곤란합니다, 하하하. 다른 선수분들도 생각해 주셔야죠.

사라 하놋이 재경의 엉덩짝을 시원하게 걷어찼다. 재경이 저건 무슨 심보냐며 짜증 냈지만 사라 하놋은 이미 사회자의 만류로 심사 위원석으로 돌아간 후였다.

“진짜~ 할머니들은 다 저런가.”

재경이 툴툴 아픈 엉덩이를 매만졌다. 때마침 두 번째 참가자가 호명되었다. 재경은 다음 순서인 거무튀튀 수염 자국을 가진 발레복 근육 몬스터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다가 환호 소리에 질려 후다닥 안쪽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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