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6월. 밤하늘 불꽃 수놓은 일상 속에서] (1)
“오늘도 이상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류제 신리 학생. 매번 귀찮지요? 주마다 건강검진을 해야 하다니. 이게 바로 강자가 짊어져야 할 번거로움이라는 것일까요.”
“…하하,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건 이후 매주 토요일마다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 지부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류제는 차트를 넘기는 담당 연구원에게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세라 선생님께서 기술관에 어떻게 말을 꺼내셨는지 모르겠지만 연구원의 말을 들어보면 대충 이례적인 어빌리티 척도를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 혹시 모를 ‘대가’에 유의하도록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한다는 정도로 말을 맞춘 듯하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자세한 결과는 담임 선생님을 통해서 받으면 됩니다.”
오늘도 몸에 별 이상이 없다니 다행이다. 류제가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명한 벌판 지평선에 오렌지빛 구름 떼가 그윽하게 꼈다. 벌써 저녁노을이 지는 시간이다. 렌하고 유네가 기다리겠는걸. 아니면 먼저 저녁을 먹고 있으려나.
“그럼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류제가 성실하게 인사를 하고 진찰실 밖으로 나왔다. 스스로도 방 안이 답답하다 여기고 있었는지 문을 여니 마음이 탁 트여 평온해졌다.
류제는 피를 뽑을 때처럼 제 손을 쥐었다가 펴는 것을 제3자가 보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응시했다. 이번 주도 정상이다.
그건 지금 류제의 심리 상태가 지극히 정상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류제는 자신이 일명 ‘마족화’할 때마다 안에서부터 갉아 먹히는 듯한 불쾌한 감정이 인다는 조건을 단 두 번의 경험만으로 일반화할 수 있었다.
촉매가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강렬한 가능성이 거슬린다. 지금은 정상이지만 혹시라도 다시금 내가 그 유혹에 넘어간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렌이나 다른 애들은?
정말로 그 마족의 말처럼 나는 마왕이라도 되어버리는 건가.
생각만 해도 실소가 터져 나오는 어이없는 결과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는걸.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따위 듣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리가. 갑자기 마왕이네 뭐네 말을 꺼내도 도저히 납득…….
“쯧.”
류제의 입에서 작은 마찰 소리가 퍼졌다. 정체가 뭐가 되었건 다시는 그런 감정을 품고 그런 모습으로 렌의 앞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내 마음이 강해지는 게 우선이겠지. 그 유혹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아야 해.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방황하는 류제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탓하는 말이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내가 마족보다 월등히 강할 것 같나? 내가 마족이었으면 너는 네 손으로 소중한 사람을 해치는 몰골이 되었겠지. 거기서 구경하는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수적으로 우세해? 능력이 많아? 마족이 그런 상식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나? 그런 정신머리로는 바닥에 처박혀 피눈물만 흘려라. 그러기 싫다면 군인이 되기 전까지 왜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깨닫는 게 좋아.”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마족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게 지금 네놈들의 마음가짐이다. 상황에 닥쳐서야 후회하지. 조금만 더 강했으면, 조금만 더 가까이 손을 뻗었으면, 조금만 더 연습했으면. 주어진 힘을 다루지도 못하는 병신들이 뭘 후회하고 있나? 적은 이미 네 가장 소중한 것을 죽이고도 남았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소름 끼치게 웃는 새끼들, 그게 마족이다.”
“근성을 가지고 덤벼라. 온몸으로 부딪혀 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객관적인 정보만 판단해라. 지킬 수 없다면 버려. 버려야 할 것은 냉철하게 쳐내. 너의 어빌리티를 정확히 알아라. 강점, 약점,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 건 네 소중한 것이 될 거다!”
“그런 필사적인 마음이 없다면 너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거다. 나는 그런 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수학여행 당시,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말들이 결정이 되어 밑바닥을 파헤치는 거름망에 남김없이 걸렸다.
그저 어빌리티 척도 하나만 보고 과민 반응한다고 생각한 그녀의 말은 어느 것도 틀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강하다 여겼는데 마족 앞에서는 소중한 친구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 정도로 약했다.
마족은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묘사한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웃으면서 소중한 것들을 손쉽게 앗아간다. 그 기묘한 생명체를 앞에 두고서는 어떠한 시도조차 두려울 정도로 무력한 감정이 앞선다.
조금만 더 강했으면, 조금만 더 손을 뻗었으면, 조금만 더 연습했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녀가 이 말을 처음 꺼냈을 땐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치부했는데 상황이 닥치자 결국 그녀가 말했던 것과 다름없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 나는 내 안일함을 후회했다.
그런데도 렌이 다친 것에 분해 울면서 렌 탓이나 했고. 아니, 그 전에도 렌이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하고 분노해서 무작정 덤벼들기만 했다. 내가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그런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약한 걸까. 어떻게 하면 그녀만큼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걸까.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강함을 가지고 싶다.
꼭 다시 한번 그녀와 만나보고 싶다. 그녀라면 정답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그 일은 그렇게 마무리 지어.”
“네, 중령님.”
양반은 못 된 모양인지 류제가 포르테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무렵 복도 반대편에서 실물의 포르테와 그녀의 보좌 네네 슈만 중위가 다가왔다.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응?”
누군가가 알은척을을 하자 포르테는 귀찮다는 눈빛을 흘겼다가 그게 류제였다는 것을 알고 냉소를 지었다.
아가타 지부의 알라마니 기술관. 호세마타 요새에 있어야 할 그녀들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류제가 절대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인물을 만나는 게임 주인공의 우연한 만남이 과도하다 여길 수 있으니 설명을 덧붙인다면 그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키아나트리체의 최전방에 있는 백장미 부대로서 마족의 연이은 침입으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온 아가타의 치안 허점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재경이 아니라면 정해진 기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류제였기에 그가 여기서 그녀를 만난 것 또한 정해진 스토리의 흐름에 속했다.
“이게 누구신가. 류제 신리―, 마족을 한 마리 해치웠다 들었는데 이제 그 어깨가 어디까지 올라갔으려나?”
“…오랜만입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님.”
“군인도 아닌 주제에 나를 중령이라 부르지 마라, 우매한 것.”
류제를 기억하기로서니 제 어빌리티만 믿고 안일하고 적당적당한 마인드를 가진 오만한 학생으로 인식하고 있는 포르테는 그 건방짐이 어디까지 찌르고 있나 시험하려는 듯 시원하게 도발했다.
그러나 마족을 해치운 것에 자신감을 내세우며 그녀에게 분개할 거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류제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 사이로 씁쓸하면서도 결의 굳은 눈빛만을 보냈다.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표정이다.
한 마리 흑표범같이 좋은 눈이야. 뭔가 깨달은 바라도 있나. 하기야 지금이 그럴 때지.
힐끗 눈동자를 굴려 슬렉터로 시간을 확인한 포르테가 뒤에서 열중쉬어를 하고 있던 네네 슈만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중위, 잠시 자리를 비키게.”
무뚝뚝한 얼굴을 한 네네 슈만이 군화 굽을 맞부딪히며 경례를 한 다음 자리를 비켰다. 단 한마디의 부정이나 이유를 묻는 말은 하지 않는다.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군인이라 더욱 그렇겠지만 망설임 없는 그녀의 대답에서 포르테의 지록위마(指鹿爲馬)마저 납득할 네네 슈만의 충성심이 엿보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손쉽게 사람을 물리자 류제가 당황해서 눈을 끔벅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하지만…….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거 아니었나?
“뭐지?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럴 것 같았다.”
학교를 막 졸업하고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안일하기까지 한 훈련병들의 눈빛이 바뀌게 되는 계기는 몇 없다.
대표적으로 꼽는 게 실제로 마족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이가 갈리도록 뼈저리게 느꼈을 때다.
그럴 때마다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녀에게로 달려오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류제 신리 또한 인간이고 이번 전투로 자신이 몰랐던 분함을 느꼈을 테니 묻고자 하는 게 있겠지.
그것이야말로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이 가진 진화의 힘이다. 그런 태도라면 충분히 조언해 줄 가치가 있었다.
“자리를 옮기지.”
그녀가 앞장서서 걸어갔다. 복도를 지나쳐 한동안 말없이 걷던 그녀가 류제에게 내준 것은 빈 테라스의 나무 의자였다. 포르테가 류제의 맞은편 의자를 밀어 앉으며 물었다.
“뭐가 문제였지? 네가 네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 상대가 네 상식을 벗어난 존재였다는 것? 처음 맛보는 무력감이 치욕스러울 정도로 당혹스러웠나?”
“…다른 문제들도 많지만 지금 필사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오호. 류제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포르테가 흥미로운 눈을 빛냈다. 그리고 다음 류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샐쭉한 고양이처럼 웃었다.
“그… 들라크루아 님처럼 마음이 강해지고 싶습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강해지고 싶다고?”
어떻게 하면 마족을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냐고 물을 줄 알았더니 꽤나 갸륵한 대답이 아닌가.
그 이유를 입에 담아 자신을 설득하라는 듯이 그녀가 턱을 괴었다. 딱히 그 마음을 무시하려는 것으로 보이진 않고,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학생이 어느 정도로 알을 깨고 나왔는지를 보려는 모양이다.
“저번 달에 제립학교에 마족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제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그때 제가 그 마족과 대적했다는 것도요.”
“물론 보고받았다. 너를 향한 윗놈들의 설레발이 아주 시끄러워.”
“그때 그… 들라크루아 님이 말했던… 그런 감정들이 전부 한꺼번에 복받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그러려면 마음이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
“왜 도망치고 싶지 않지? 네가 어빌리터니까?”
그것과 달랐다. 류제는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뭇거리다가 긴장해서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류제를 꿰뚫고 있는 듯이 깊고 아득했다. 그렇다고 초연한 것은 아니다. 끓어오르는 마그마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암막에 가려져 위용을 불태우는 감각.
류제는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다가 정신을 차렸다.
“…마족과 대적했을 때 곁에 있어준 친구가 사경을 헤맸어요.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했을 뿐인데도요.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게 싫었습니다. 다들 저더러 강하다고, 기대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눈앞에 친구를 지키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반대로 멍청하게 있던 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오호라, 그래서?”
“그 친구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약하더라도 그런 중상에도 일어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저는 완전히 얼이 빠져 그 친구를 더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뻔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마음이 더 강해지고 싶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랬더라면 저는 그 애를 제대로 지킬 수 있었을 테니까요.”
“요컨대 너는 그 친구 때문에 강해지고 싶다는 거냐?”
“……네.”
“하하하!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기특하고 대단한 우정이군! 친구라니, 설마 그때 나와 뒤바뀌었던 귀여운 꼬맹이는 아니겠지?”
“…아니……. 그… 맞습니다.”
“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유쾌하군, 유쾌해!”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네네 슈만 중위가 미동도 없이 서있다가 포르테의 크나큰 웃음소리를 듣고 입가를 움찔 떨었다.
귀밑 5센티를 넘지 않는 그녀의 오렌지빛 칼 단발이 잠시 동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을 지속했다.
“농담조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하하! 하하하! 아니, 그 꼬맹이의 덜떨어지고 바보 같은 면상으로 너보다 마음이 강하다고 하니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워서 말이다. 하하하!”
왠지 거짓말을 했다고 놀리는 것 같다. 자존심이 상한 류제가 부루퉁해져서는 테이블 밑에서 손깍지를 끼었다.
포르테는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그러면 되었다.”
“…뭐가 말입니까.”
“마음이 강해지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뭐가 되었다는 겁니까.”
“지키고 싶은 것이 있지 않느냐.”
그녀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노련한 군인의 미소는 누구보다도 듬직하다. 아직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류제에게 그녀는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였다.
“인간을 위해서,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로는 동기가 부족하지. 우리 같은 범인에게는 말이야.”
인류의 최강자라 불리는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어빌리티 척도의 한계점을 넘은 류제더러 범인이라 칭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그녀는 그럼에도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웅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특수한 능력과 별개지. 마음이야말로 타고나는 것이라 노력으로도 되지 않아. 인류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동기는 로라 하놋만 가질 수 있을지도 몰라.”
“로라 하놋?”
“‘순간 이동’ 어빌리터. 백 년 전 스스로의 목숨과 맞바꿔서 마왕을 죽인 영웅. 아이러니하게도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녀가 어떻게 마왕을 죽였고,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배우지 못했지만 포르테의 말을 들은 류제는 불특정 다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그녀야말로 영웅적인 사람이라는 말에 설득되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단 한 명도 지키기 버거운데 그녀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지 않은가.
“물론 나도 그녀 흉내를 내서 당장에라도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나 나라를 위해서라는 위대한 동기보다는 단지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자요?”
“그래, 불특정한 그들이 아닌 특정한 사람들 말이다. 내 남편, 내 아이, 내 부하들…….”
“…….”
“인류를 위해서다, 나라를 위해서다 하지만 말만 거창하지 시작점은 하나다. 그저 단 하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 그를 지키기 위해서 나는 다른 사람들 또한 지킬 수 있다.”
한껏 멋들어진 말을 했던 포르테가 싱긋 웃다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또다시 유쾌하게 테이블을 때렸다.
“그런데, 으하하하! 네가 처음 그 정도로 지키고 싶었던 대상이 그 바보 같은 면상의 꼬맹이라 생각하니 귀엽지 않느냐. 그 나이대엔 보통은 좋아하는 아이를 말할 텐데. 아직은 사랑보다는 우정이라는 건가? 참으로 어리고 귀엽구나.”
“바보 같다뇨.”
렌이 확실히 좀 바보같이 생기기는 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데.
류제가 분개했지만 그렇게 화를 냈다간 자신이 품은 감정이 우정보다는 사랑이라고 시인하는 것 같아 약간의 부정의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포르테는 류제가 품고 있는 마음이 설마 그런 것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지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갈무리했다.
“마족과 전투가 일어나면 우리는 반드시 수많은 동료들을 잃어. 지금처럼 습격이 잦지 않은 때에도 내 부대원들이 달에 두세 명씩 전사하고 말아. 그러다 보면 잊게 되어버린다. 무서워져 버려. 누군가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거나, 사랑하고 싶지 않아.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까.”
“들라크루아 님조차도요?”
“그래, 나조차도. 인간은 본디 평화를 사랑하거든.”
과거 셀로니아 가문의 멸족 사건으로 그녀가 가장 존경했던 셀로니아가의 장군이 전사했을 때 그녀도 그랬다.
그녀만큼은 절대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마족에게 패해 사망했다 들었을 때 그 좌절감과 무력감과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렵다.
“하지만 사랑할 때의 그 충족감이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지. 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무감각하다는 것이 아니야.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는 말이다.”
“더 많이… 말입니까?”
“그래, 그 마음만이 우리의 마음을 강하게 해주지. 복수도, 분노도, 증오도, 욕망도 아니야. 오로지 그것뿐이다. 모든 인류를 사랑한 영웅 로라 하놋이 되지 못하는 우리 같은 범인들은 사람 한 명을 사랑하는 것도 벅차다. 그러니 마음속에 한 사람만 생각하면 돼. 그 사람을 위해 더 많이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그 주변의 것들도 소중해지고 마음은 그만큼 강해지지.”
“만약 제가 그 한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면요?”
“다시 사랑할 한 사람을 만들면 되지.”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돼.”
“그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죠?”
“만약 그 사람이 살아있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해보거라.”
오랜만에 오가는 선문답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포르테는 류제의 반응을 살피며 피식거렸다.
“그걸 극복하지 못하는 한심이는 싫어할 것 아니냐. 그자가 진정으로 내 행복을 바란다면 말이다.”
“…마치 합리화하는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그 상처를 극복해 낼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지.”
“어렵군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야, 무려 나조차도.”
대답이 다 된 것 같자 그녀가 대화의 여운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인도 아닌 까마득한 학교 후배를 위해 여유롭게 담소를 나눌 시간은 로라 하놋을 대신해 인류의 영웅이어야 하는 그녀에게 작은 사치였다.
“시간이 되었군. 난 이제 가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저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주셔서…….”
“아니, 나도 때가 되면 말해 주고 싶었다. 네 말이 조금 의외였어. 보통 내게 상담할 때 마음이 강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니까. 다들 마음이 아닌 몸이 강해지기를 바라거든. 기특하다 생각했다. 내가 너를 오해하고 있었다 싶을 정도야.”
“아닙니다. 저야말로 들라크루아 님에 대해 몰라서 그때 그런 무례를 저질렀잖아요. 들라크루아 님은 정말 강하신 것 같습니다. 왜 친구들이 존경하는지 알 정도로요.”
포르테는 첫걸음마를 뗀 아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류제의 머리를 꾹 눌러 서투르게 쓰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걸어가며 멀어지는 그녀의 발걸음은 인류의 미래를 짊어졌음에도 당차고 굳세다.
“그럼 다음에 또.”
“예, 안녕히 가세요.”
류제가 꾸벅 깊게 인사했다. 그녀는 뒤에서 들려오는 진중한 인사를 가볍게 넘기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음이 강해지고 싶다라. 나조차도 추구하는 데 벅찬 강해지는 법이다.
내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날 강하다 말해 주다니. 다음에 만났을 때도 그리 느껴졌으면 좋겠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한다. 로라 하놋만큼은 아니더라도.
“하하.”
빠르게 성장하는 후배의 모습이 든든하다. 주머니를 뒤져 겸사겸사 배급받은 그것을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에 자랑스러운 미소가 떴다.
곧 복도 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네네 슈만이 그녀의 뒤에 붙어 정확한 평행을 유지하며 이동했다.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유명한 후배 류제 신리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류제는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털어놓을 곳 없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더 많이…….”
작게 읊조린 류제는 그다음으로 렌의 얼굴을 떠올렸다. 바보같이 웃는 모습과 연하게 핀 주근깨가 사랑스럽다.
류제는 어찌할 바 모른 홍당무 같은 얼굴을 앞머리로 금세 가렸다. 의미는 다르더라도 문장의 완성문이 몹시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할 용기.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조언은 방황하는 류제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지만 뭐랄까, 아직 사춘기이고 막 짝사랑을 시작한 그에게 있어서 아직은 어색하고 쑥스러운 말이었다.
같은 시각. 류제가 학교 밖에서 건강검진을 하는 동안 류제가 고민하는 이유이자 결정체인 재경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맞부딪히고 말았다.
재경은 예상치 못한 은밀한 접근을 경계하며 잔뜩 긴장한 어깨를 단단히 움츠렸다. 손에는 이번 달에도 돌아온 호감도 이벤트에 대비하기 위해 사전에 입수한 축제 리플릿을 쥔 채였다.
재경도 류제처럼 중요한 누군가와 대면하는 중이었다.
들라크루아와 류제의 만남이 우연을 빙자한 정해진 스토리였다면, 재경과 그녀의 랑데부는 일어날 수 없는 진짜 우연이었기에 재경이 저만큼 창백하고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런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누구를 상대하나 살펴보려 들어도 그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와 대면하고 있다면 그의 앞에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나? 재경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토끼처럼 놀란 것인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시점을 옮겨 신중하게 주변을 살핀다면 그가 비밀 기지로 쓰고 있는 학교 뒤편 쓰레기장의 옆벽, 지금 재경이 몸을 기댄 그 벽 바로 옆에 있는 창문 안쪽에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한 인영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둘은 말이 없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지런하게 교복을 입고 있는 키아나트리체의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는 팔짱을 끼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의미 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해 질 녘 하늘에 이염된 은빛 눈동자에 검은 나룻배가 떠있었다. 처연하게 아름답다.
“그대의 말에 책임질 수 있는가.”
“책임이고 뭐고 아까 말했잖아. 그러니까 그건 그냥 장난이었다고. 마족이 온 건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야.”
지금껏 아무 말도 없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캐묻는 건데? 중간 보스의 침입으로부터 벌써 한 달이나 지나 왕녀의 힘을 빌렸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던 재경은 제대로 생각해서 변명할 기회를 실시간으로 놓치는 중이었다.
내가 중간 보스 뒤처리를 왕녀에게 부탁했긴 했지만 스토리대로라면 왕녀는 최후반부를 제외하면 렌 지미랑 엮일 일 없으니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 와서!
“그대가 그렇게 답해도 나는 납득하기 어렵군. 그저 장난 때문에 내게 찾아와 그런 부탁을 했단 말인가? 그런데 우연히도 마족이 쳐들어왔고, 그대는 우연히 쳐들어온 마족과 대치하다 부상을 당했고? 사건이 마무리되어도 그대는 그 일을 알아서 함구하고 다녔지. 그런 우연이 있을 수가 있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그렇다니까 몇 번을 말해!”
얼굴에 철판을 깐 재경이 도리어 성을 내자 니냐롯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사건이 중대한지라 렌 지미의 답을 믿기 힘들다. 그의 본 성격이라면 암만 장난이라 치더라도 등급1의 군주급 마족을 물리쳤다는 결과를 내었으니 다 자기 덕이라 뽐내고 다닐 법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에 대해 그 누구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있는 이유는 뭔가. 그 이유를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건가? 어째서?
왕녀의 침묵을 보다 깊은 의심으로 받아들인 재경은 제 양심에 뜨끔뜨끔 찔려 점잖게 있지 못했다. 어떻게든 의심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니냐롯트에게는 빤히 보였다.
“그런 말을 덥석덥석 믿다니 순진하기 짝이 없네. 솔직히 감사하고 있어.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서. 아니었어 봐. 너도나도 다른 의미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겠지, 하하. 그…그럼 볼만했을지도.”
“…….”
“너도 왕녀 주제에 사람 말을 그렇게 믿지 마. 진짜 무슨 일이 안 일어났으면 어쩔 뻔했는데?”
암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말을 내뱉으면서 스스로를 절벽으로 내밀고 있다는 감각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게 말주변이 없는 재경의 최선이었다. 변명을 하느라 마음은 초조하고, 벽 너머에 있는 왕녀는 말이 없다. 상대방이 보이지도 않아 답답해 죽겠다.
혹시 내 대답에 질려서 이대로 가버린 것 아닐까 전전긍긍해진 재경이 창문 사이로 몰래 안을 살피려는데 그때 다시 니냐롯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그대의 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는군.”
그걸 의도한 것이지만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재경은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왕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얼굴에 전부 티가 나서 거짓말이라는 게 바로 들통났을 거다.
“인과관계가 어찌 되었건 그대가 그리 변명한다면 나는 이제부터 그대를 신뢰할 수 없다. 앞으로 그대가 내게 어떤 부탁을 한대도 말이다. 그저 장난에 불과하니. 안 그런가?”
“그…….”
“이런 말을 들을 줄 알았으면 이 대화를 나의 친위대나 류제 신리의 앞에서 해도 상관없을 뻔했어. 혹시 모를 일을 위해 그대를 배려한 일이었는데 쓸데없는 참견이었군. 공연히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
류제 신리와 렌 지미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에도 니냐롯트가 지금까지 말을 아끼고 있었던 이유는 렌 지미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왜인지 찰떡같이 붙어 다니는 류제 신리가 학교에 없고, 지금이 이야기를 꺼낼 기회라고 판단되어서 친위대 몰래 찾아온 그녀였지만 반응이 저러니 뭐라 더 할 말이 없다.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을 억지로 캐내는 취미도 없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왕녀로서 무엇이 렌 지미의 목적인지 주시할 용의는 있었다. 마족이 침입하기 전 무언가를 알았기 때문에 나에게 부탁했다. 이건 렌 지미가 어떤 변명을 하던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렌 지미가 사전에 누군가에서 정보를 받은 것인가, 우연찮게 얻은 것인가, 아니면 이것이 렌 지미의 능력인 것인가는 알 길이 없지만.
“비녀 고쳐줘서 고맙군. 은혜는 갚았다. 이야기는 비밀에 부쳐주지.”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을 마친 니냐롯트는 자리를 피해 또각또각 복도를 지나쳐 걸어갔다.
왕녀가 더 이상 날카로운 질문을 하지 않자 마치 할머니한테 거짓말을 추궁받는 것처럼 표정 관리를 못 했던 재경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결국 이 상황을 모면했을 뿐이지 문제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어쩌지? 이렇게 되면 위험할 때 다시는 왕녀라는 와일드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데. 진짜 이래도 되나?
“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성급하게 왕녀를 불러 세우려던 재경이 창문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왕녀는 벌써 저 멀리 복도 끝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막상 그녀를 불러 세우려고 해도 재경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외침을 터뜨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 망했다!”
재경이 덥수룩한 머리를 휘적거리며 벽에 주르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괜한 의심을 산 건가? 설마 내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아냐, 진짜로 내통하고 있다면 내가 왕녀에게 정보를 주지 않았을 거 아냐. 왕녀는 똑똑하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겠지.
하아… 그래도 이번 일로 왕녀한테 눈에 난 것 같은데. 장난이라고 변명한 건 너무 심했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볼걸.
그래도 아무리 상대가 왕녀라지만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내가 이 세계의 공략을 안다고 어떻게 말을 해. 그렇게 된다면 왕녀는 반드시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를 말해 달라 할 거고 그게 누구 귀로 들어가게 될지 아무도 신뢰 못 한다.
나조차도 뭐가 스토리를 엇나가게 만드는지 모르는데 남까지 흩트려 놓는다고 생각해 봐. 감당 못 해. 진짜로. 그러다가 전쟁 이벤트까지 망가지면 미래가 끝장나는 거야.
“하아… 몰라, 눈앞에 닥친 거나 잘해야지.”
해 질 녘 땅거미가 지니 드디어 시원한 바람이 부는 6월의 어느 날. 왕녀의 예고 없는 접촉과 상관없이 새로운 챕터가 목전에 다가왔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고 왕녀 신경 쓰다가 새로운 호감도 이벤트를 실패하면 곤란했다. 중요한 건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것. 그것만 달성된다면 왕녀의 의심은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번 6월 챕터는 키아나트리체의 축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축제 마지막 날에 비키와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가 있으며 중간 보스 바로 다음 챕터라서 그런지 적당히 평범한 일상을 다루며 완급 조절하는 정도의 위기가 있다.
말하자면 히로인들과 축제에서 노는 평범―하디평범한 여름 축제 미연시 이벤트라는 것이다.
손에 들고 있던 리플릿을 살피며 입을 비죽거리던 재경은 왕녀 생각에 골치가 아파 머리를 무릎에 처박았다.
왕녀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재경은 축제를 즐길 기대감에 푹 젖어있었다. 어차피 여기서도 렌 지미는 하찮은 방해꾼 역할이지만 그래도 역시 축제는 가보고 싶었다.
암만 게임으로 다 경험해 본 이벤트라도 실제로 겪는 것과 화면으로 보는 것은 다르잖아. 그런데 왕녀 때문에 김이 다 빠졌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고 한들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난 바보라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하아, 게임 오버를 피한 건 좋았는데 이게 또 문제네. 당분간은 왕녀 앞에서는 가만히 있어야겠다. 시간이 지나면 그쪽도 관심을 거두고 알아서 수그러들겠지.
“축제라…….”
재경이 살피는 리플릿에는 축제 마지막 날 있는 불꽃놀이에 잘 보이는 붉은 펜으로 서툰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 * *
재경이 기대하고 있는 만큼 축제를 기대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번 챕터의 호감도 이벤트의 주인공이자 츤데레의 정석 캐릭터를 맡고 있는 히로인 비키 셀로니아다.
학교 밖에 나가 자유를 즐길 수 있는 감미로운 주말이 지나고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월요일이 찾아왔다.
학교에 들어와 첫 시험도 치렀겠다, 부담되는 것도 없으니 등교가 홀가분할 법도 하겠건만 누구든 어떤 이유를 대든 월요일은 싫기 마련이다.
하지만 츤데레적인 면모와 더불어 자기 이름처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비키는 모두가 싫어하는 월요일이 마냥 싫지 않은 모양이다.
월요일인 오늘도 그 누구보다 일찍 등교한 그녀는 1학년 8반 교실 가는 길에 놓인 1학년 전용 게시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게시판에는 다음과 같은 선전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1년 만에 돌아온 라우라 축제.
6월 두 번째 주 목, 금, 토, 3일간 펼쳐지는 키아나트리체의 성대한 축제의 밤을 즐기세요!
마족으로 변장해서 마족을 속이는 데에서 유래한 라우라 축제는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다닥다닥 붙여 놓은 다 알고 있는 축제에 대한 정보 중 그녀가 가장 유심히 관찰하는 대목은 바로 좀 더 아래에 있었다.
많이 먹기 대회
메인 디시 부문 : 햄버거 | 우승 상품 : 특A급 소고기 3kg
디저트 부문 : 푸딩 | 우승 상품 : 넬사 고원 목장에서 만든 한정판 고급 푸딩 1상자(30개 입)
“푸딩?”
다들 축제니 뭐니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키고 마족을 멸하겠다는 비장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 비키는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라우라 축제에 눈 돌릴 틈 따위 없었다.
살짝 궁금하기는 해도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앞에서는 관심 없는 척 굴었는데 축제 마지막 날에 무려 푸딩 많이 먹기 대회가 있다지 않나. 그것도 우승 상품이 넬사 고원산 한정판 고급 푸딩이다.
이…이건 진짜 나가는 수밖에 없잖아? 나가야만 하는 거잖아!
“어…어떻게 하지?”
푸딩을 정말 좋아하는 비키는 자꾸만 눈이 돌아가는 포스터를 보며 전전긍긍했다.
제립학교에 다니기 전 로열 스쿨 학생이었을 시절에도 스스로를 몰아붙이느라 축제에 참가한 적이 없었다. 지금껏 잘 무시하고 살았는데 축제에 이런 행사도 있었다니 인생의 절반은 손해 본 기분이었다.
가고 싶어. 우승은 못 하더라도 참가하면 푸…푸딩 많이 먹을 수 있는 거 아냐.
하지만 만약 거기서 아는 사람하고 마주치기라도 하면 치욕스러워서 못 살 거야. 셀로니아 가문의 여식이 많이 먹기 대회라니. 품격이 떨어져도 정도가 있지. 유모가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거라구. 안 돼, 절대 안 돼.
그리고 이제부터 기말고사 준비하지 않으면 왕녀님께 따라잡힐지도 몰라. 이번 중간고사도 겨우겨우 이겼잖아. 나는 공부가 제일 중요해!
하지만… 그…그래도오오…….
“요, 비키! 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동동거리고 있어?”
“비키 양! 좋은 아침이야. 주말 잘 보냈어?”
“오늘도 빨리 왔네. 뭘 보는 거야? 축제……? 아아, 라우라 축제! 벌써 그 시즌이구나. 옛날 생각난다.”
딴 데 정신 팔려 있다가 정곡을 찔린 비키는 뒤통수에 대롱거리던 붉은 말총머리가 놀란 고양이 꼬리처럼 바싹 서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저 바보 삼인방한테 걸릴 줄이야. 잽싸게 포스터에서 눈을 뗀 비키가 들켰을세라 그들을 노려보았다. 새빨개진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녹색 눈동자는 빙글빙글 갈 곳을 잃었다.
“바…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 누가 많이 먹기 대회 같은 것에 나갈 것 같아?!”
“뭐라고?”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지레 찔린 비키는 예의 콧방귀를 뀌고 후다닥 교실로 도망쳐 버렸다.
저걸 보면 재경이 아닌 누구라도 눈치채겠지만 아무래도 이번 챕터의 비키 호감도 이벤트는 이 푸딩 많이 먹기 대회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졸지에 평범한 아침 인사가 바보 같은 생각 취급당해 버린 류제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그가 그 이유를 물으며 도망가는 비키를 손가락질했다.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거지?”
“낸들 아냐.”
재경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데 일가견이 생겨서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거짓말했다.
그러다가도 비키에게 일말의 흥미만 있으면 알 수 있는 호감도 이벤트의 정체를 류제가 눈치챈 건지 아닌지 찔러보고자 그의 옆구리를 살살 찔렀다.
“너는 뭐 짐작 가는 것도 없냐?”
“뭐가?”
“하여튼 둔탱이.”
뭐가? 라니, 나 참. 재경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1번 선택지만 주구장창 골라대는 저 성격에 어떻게 하렘 미연시 주인공 노릇을 한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간다며 고개를 저었다.
비키는 푸딩을 아주 좋아한다. 모르겠으면 저번 비키 호감도 물품이 푸딩이었던 것을 떠올려 보라.
거기에 더불어 아까 비키는 그들이 인사를 하기 전까지 게시판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심도 있게 관찰하고 있었다.
푸딩을 좋아하는 비키. 그렇다면 정답은 저 포스터 안에 있다. 포스터를 잘 살펴보면 축제 마지막 날 있는 많이 먹기 대회에 대한 정보가 기술되어 있고 대회 음식 중에는 비키가 좋아하는 푸딩이 있다.
류제 저 자식은 공부도 잘하면서 왜 이런 단순한 걸 눈치 못 채는 거지? 지금도 나랑 같이 포스터를 훑고 있는 주제에.
“이게 뭔데, 류제 군?”
류제가 비키에게 인사할 때 읽다 말았던 포스터를 마저 살펴보자 옆에 있던 유네가 따라서 내용을 훑었다. 곧 유네는 그 정체를 파악하고 깨달음의 감탄사를 내질렀다.
“뭔가 했더니 라우라 축제 포스터구나! 어렸을 때 많이 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잘 안 가게 됐지. 렌 군이나 류제 군도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많이 갔겠네?”
제립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사정상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유네는 미들 스쿨 재학 당시에는 왕따를 당하느라 가지 않았던 라우라 축제를 떠올려 보았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또래 아이들은 마족 분장을 해서 어른들에게 사탕을 빼앗곤 했었다.
성인들은 마족과 인간의 싸움을 형상화한 차전놀이, 퍼레이드 등의 거대 규모의 쇼에 참가하고 각 지방의 특색 있는 음식을 사 먹는 것으로 마왕이 죽은 날을 기념했다.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축제라 참가하면 시끌벅적 재미있다.
“렌 군이나 류제 군네 동네에서는 어땠어?”
재경과 류제 둘 다에게 물은 것 같은데 어쩐지 유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재경에게만 향해 있었다.
렌 지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는 재경은 난감한 눈동자로 시선을 외면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엔 유네의 호기심은 한번 문 것은 놓지 않는 끈끈이주걱 같았다.
재경은 에라 모르겠다, 적당히 뻐기며 가슴을 펼쳤다.
“뭐,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대단했지.”
“오오, 그러고 보니 렌은 잘사는 동네에서 왔다고 했던가?”
“정말? 렌 군이? 어…어디 지역인데?”
잘사는 상인 집안의 자제였던 유네가 렌의 집이 혹시라도 자기네 집 근처라 자신이 여자였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되는 게 아닐까 사색이 되어서 물었다.
“뭐어? 내가 언제?”
하지만 재경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식으로 곧바로 부정함으로써 유네의 걱정은 돌풍에 날려 사람 뺨만 때린 휴짓조각보다 못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랬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헛것 들은 거 아냐?”
아니,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하니까 자기 입으로 그랬으면서.
류제는 왜 자기가 거짓말쟁이가 돼야 하냐며 표정이 뚱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기 싫어하는 제 성격상 나한테 쉽게 보이지 않으려고 괜히 뻐긴 것 같긴 하다.
류제의 기억은 정확했지만 재경에게 그때 당시의 기억은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한 톨의 먼지로도 남지 않았다. 쯧쯔, 혀를 찬 재경은 헛소리 하지 말라고 류제를 위아래로 훑었다.
“난 평범해. 류제 너네 동네는 여기서 더 멀지 않아? 우리 집은 아가타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던데. 그래도 수도권이더라. 여기랑 비슷했겠지 뭐.”
“하던데? 왜 추측이야?”
“것 참, 말 잘못 한 것 가지고 트집 잡긴. 그것보다 유네가 물어보잖아. 너네 축제는 어땠냐고.”
“어… 응?”
유네는 그녀를 핑계 삼아 말을 돌리는 렌의 질문이 살짝 찔렸다. 유네가 두 사람 모두에게 물어본 건 맞지만 그녀는 주변에 무관심한 류제보다는 쾌활하고 사교성 좋은 렌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낸 건지가 더 궁금했다.
물론 재경이 쾌활하고 사교성 좋다고 생각하는 건 유네 혼자만의 생각이니 따지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자.
유네는 혹시라도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애써 웃으며 손을 내저었는데 류제는 딱히 비밀로 할 여지도 없는 일이라며 턱을 쓰다듬었다.
“우리 마을은 촌이라서 그렇게 규모가 크지는 않았어. 하지만 차전놀이는 굉장했던 걸로 기억해. 수녀 누나가 아이들 하나하나 마족 옷을 만들어 주셨지. 머리에 뿔도 달고, 작은 날개도 달고. 다들 부족한 형편에도 하나둘 십시일반 해주셔서 사탕도 많이 받았던 거 같아. 재밌었지.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르는걸.”
“류제 군 말을 들으니 나도 어릴 적에 사탕 받으러 돌아다닌 거 생각난다. 혼자서 이웃집 초인종을 눌렀을 때 사탕이 한 바구니 나올 때가 제일 좋아. 사탕에 정신이 팔려서 아빠가 뒤에서 몰래 따라오는 줄도 몰랐지. 렌 군은?”
“나는… 평범했다니까.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
라우라 축제를 게임을 통해서만 접해 봤지 뭔지도 모르는 재경은 그렇게 물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뭘 위한 축제인지도 모른다. 미연시 게임에서 축제가 그냥 축제지, 뭐. 누가 그런 거 신경 쓰면서 플레이하냐.
다른 게임에서도 축제는 히로인 이벤트용으로 많이 쓰이고. 일본 배경 게임이면 일본 옷 입는 서비스 신이라든가, 불꽃놀이라든가. 그게 다다. 기억에 남는 건 히로인 이벤트뿐이다.
이 게임에서 축제는 대충 핼러윈을 차용한 축제였던 거 같긴 하다.
“뭔가 렌은 사탕 달라고 협박했을 것 같은걸.”
“안 주면 잡아먹을 거라고 다리를 물고 그런 건 아니지? 렌 군 그랬을 것 같아.”
“뭐어? 평범했다니까. 니들이 생각하는 최선과 최악의 정확히 중간! 그보다 이거 봐. 토요일에 행사가 많아.”
아무래도 좋았을 어렸을 적 이야기보다는 지금 이 포스터를 보면서 비키 호감도 이벤트가 느껴지지 않냐며 재경이 직접 토요일 많이 먹기 대회 행사 부분을 가리켰다.
아니, 왜 이걸 아직도 눈치 못 채는 거야? 중요한 건 이거잖아, 이거! 호감도 이벤트의 총 집합소!
“잘 봐, 4시부터 퍼레이드에 6시에 광장에서 차전놀이를 한대. 주변에 간이 상가를 세우나 본데. 어, 여기 많이 먹기 대회도 있고 무슨 콘테스트도 한다. 비키가 보던 게 이건가?”
재경이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어필해도 비키가 뭘 보고 있든 관심 없던 류제는 그게 뭐 어쨌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치채고 도와주지 않을까 했던 유네도 비키가 뭘 보고 있었는지보다는 행사 내용에 더 눈이 갔는지 일정표에 대해 시시덕거리기 바빴다.
“아, 정말이야. 이거 봐봐, 류제 군! 내가 자란 마을하고 많이 달라. 같은 아가타인데도 라우라 축제는 마을별로 다양한 특징이 있구나.”
“그래?”
신나야 할 대목에서 류제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렌은 항상 이런 이야기에서는 한 발 뺀다니까. 치사하게 혼자서만 아무 말도 안 하려 하고.
유네처럼 렌에 대해 다양한 부분이 궁금했던 류제는 과거를 알려 주지 않으려 선을 긋는 렌의 태도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은 늘 불꽃놀이구나. 멋지지~ 까만 하늘에 예쁜 불꽃이 퍼벙! 류제 군네 고향에서도 불꽃놀이 했어?”
“응, 수녀님하고 신부님하고 다 같이 동산에 올라가서 돗자리를 펴고 봤었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그래?”
화려한 불꽃놀이 이야기에 재경이 귀를 쫑긋했다. 전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는 추석이나 설밖에 모르는 재경에게 라우라 축제의 이국적인 놀이 문화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축제의 단골이라는 불꽃놀이도 텔레비전에서만 봤지 육안으로 본 적 없다.
맞아, 이상하게 다른 게임에서도 축제 하면 불꽃놀이라고 빠짐없이 등장했었다. 근데 이해가 잘 안 가는 게 불꽃놀이를 하면 히로인이 늘 고백을 하더라. 플레이어는 하나같이 못 알아듣고.
그거 분명 알아먹었는데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무리 소리가 크더라도 그 소리를 못 들어? 내가 더 짜증 난다. 나라면 분명 확실하게 들을 수 있을걸.
아아, 나도 축제 때 누가 고백하지 않으려나. 류제의 히로인 호감도 올린다고 내 여자 친구 계획은 진전 하나 없구나.
그러고 보니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에서는 불꽃놀이 할 때 그런 고백 신이 없었네. 뭐… 아직 히로인 호감도가 높지 않을 시점이니까 당연한 건가? 아니면 일종의 클리셰 비틀기? 그때 상황이 고백할 상황이 아니긴 하지.
“렌, 너는 어때?”
“어엉? 뭐가?”
“뭐가? 렌, 너 또 딴생각했지?”
류제가 정신 좀 차리라며 포스터를 쳐다보고 있는 재경의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류제가 시비를 걸자 재경이 하지 말라며 모기 쫓듯 류제의 손을 치웠다.
류제는 치사하게 자기 반응속도가 더 좋다는 것을 이용해서 능숙하게 빠져나갔다. 보리보리쌀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옆에서 자연스럽게 렌을 놀리고 있는 류제나 거기에 낚여서 고양이처럼 캭캭 털을 세우는 렌이나 뭔가 점점 수준이 비슷해지고 있다는 생각에 유네가 헤헤 바보처럼 웃었다. 그러다 그녀는 재경에게 아까 류제와 이야기했던 것을 다시 제안했다.
“렌 군도 같이 가자!”
“그러니까 뭘?!”
“축제 말이야. 토요일에는 수업 없으니까 갈 수 있잖아! 류제 군도 토요일 오후는 괜찮지? 마지막에 셋이서 불꽃놀이 보는 거야.”
“셋이서? 엑!”
축제에 가자는 유네의 제안을 듣다가 방심한 재경이 류제의 검지에 이마 정중앙을 딱 맞고 말았다. 고개가 회까닥 넘어간 재경이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기어코 이겨 보인 류제는 자기가 승리했다며 건방진 브이를 보여주었다. 그게 뭐가 좋다고 활짝 웃는 것이 키도 더 커져서 전보다 고개를 더 올려야 푸른색 눈이 보인다. 짜식이, 잘난 척하기는!
“어때? 응? 가자! 셋이서 놀러 가자!”
“나…나쁠 건 없지만… 나는…….”
“다른 볼일 없는 거 맞지? 또 이 핑계로 숙제 미루지 마.”
“너어는 꼬오옥 옆에서 한마디 더 한다니까!”
이마를 찌른 벌로 재경이 류제의 배를 툭 쳤다.
같이 축제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렌 지미는 어떤 이벤트에서도 훼방만 놓다가 실패하는 삼류 악역이니까 이번 챕터에서도 주인공들 방해만 할 테고.
뒤에서 꼼지락거리다 축제고 뭐고 아무것도 못 즐길 바에야 셋이 축제에 가는 편이 나은 건 당연했다.
또 류제의 옆에 있는 편이 호감도 이벤트에 간섭하기도 쉽고. 나만 따로 가면 왕따당하는 기분이고. 그리고… 그… 불꽃놀이… 혼자서 보면 영 멋이 안 날 것 같은걸. 혼자서 청승맞게시리.
“그럼 렌 군도 가기로 한 거다? 약속했다?”
“흥… 너희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이 형님이 안 간다 했으면 섭섭할 뻔했겠다?”
“응! 섭섭해! 안 가면 안 돼. 렌 군도 꼭 같이 가야 해.”
반짝반짝 눈을 빛낸 유네가 재경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뒤따라가던 류제는 저리 퉁명스럽게 말해도 귓가를 불그스레 물들인 렌을 보면서 선생님이 얼버무렸던 렌 지미의 ‘어떤 사정’을 떠올렸다.
언젠가 스스로 말해 줄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을 품어보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소망을 보자기에 곱게 싸서 감춘 류제는 렌을 뒤따라 비키가 있을 교실로 들어갔다.
축제 이벤트 전까지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는지라 류제가 축제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게 되는 찌뿌둥한 월요일 아침에서부터 화, 수, 목, 그리고 현재 축제 참석을 하루 앞둔 활기찬 금요일 점심시간까지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함께 학교 근처에서 열리는 라우라 축제에 참석하기로 한 남학생 삼인방은 시간이 날 때마다 어디선가 반입되어 들어온 리플릿과 홍보 전단을 살피며 축제에 대한 기대를 키워나갔다.
“으하하, 여기 봐, 여장 콘테스트! 이거 드디어 정보가 떴구나. 이건 어때?”
“어디 보자…….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방 나라카와의 국경선 지방부터 시작된 키아나트리체의 여장 풍습은 사춘기가 되지 않은 남자아이들을 어빌리터 여자아이처럼 꾸며 마족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사적 의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헤에. 그랬었구나. 처음 알았어. 재미있으니까 하는 줄 알았는데.”
“어빌리터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어렸을 때 고아원에서도 어린 남자애들을 종종 여장시켰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애들은 그렇다 치고 다 큰 어른이 여장이라니 좀 심하지 않아? 이거 봐, 15세 이상만 출전 가능. 누구를 위한 대회인 거야?”
“하하! 우락부락한 놈들이 여장이라니. 꼴이 볼만하겠다. 뭐가 되었건 큰 웃음은 보장되겠네. 으하하! 류제~ 너도 나가 보지 그래?”
“…싫어, 차라리 유네를 내보내. 유네는 저번에 여장 한번 했었잖아. 렌, 네가 어울린다고 했었고.”
“에에. 나…나도 별로.”
류제의 심술궂은 발언에 유네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여자가 여장 대회 나가는 건 반칙이라구, 반칙! 조…조금 관심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반칙이야!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그냥 망신으로는 안 끝날지도 몰라.
“왜?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아하하…….”
체육대회 때 여장도 한번 해봤겠다, 배꼽만 달랑 내놓은 꼴로 잘만 돌아다녔으면서 막상 여장 콘테스트는 안 나간다고 하니 류제가 의외라면서 그녀를 훑었다. 당연히 그런 걸 좋아하는 줄로만 알았다.
“잘 생각해 봐, 유네. 우승 상품이 네가 좋아하는 꾸물꾸물 베어 특대 사이즈야. 그것도 라우라 축제 한정판. 거기에 유명 레스토랑 코스 요리 티켓 3장까지 준대. 이거 좋다. 나가서 우승하자. 우리가 도와줄게.”
“그…그건 나도 봤는데… 아, 이거 봐! 준우승 상품은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시리즈다. 이거 렌 군이 가방에 달고 있는 거랑 똑같은 거 아냐? 레…렌 군도 이런 거 좋아하면 렌 군이 나가는 게…….”
꾸물꾸물 베어는 유네가 열쇠고리로 쓰고 있는 곰돌이 캐릭터의 이름이고 꾸물꾸물 고양이는 재경이 가방에 매달아 놓은 못생긴 고양이 캐릭터의 이름이었다.
유네가 가리킨 준우승 상품인 꾸물꾸물 고양이 미드나이트 시리즈에는 잠옷과 침구 세트, 안고 자는 인형이 포함되어 있었다.
“뭐어? 이건 그런 의미로 달고 있는 거 아니거든? 그리고 내가 여장? 여자아앙?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진짜 이해 안 돼. 왜 딱딱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남정네들을 여장을 못 시켜서 안달이냐? 너도나도 다 같이 눈 버리자 이거냐? 나만 당할 수 없다는 거냐?”
재경이 냐, 냐, 냐, 싫다며 책상 주먹을 쾅 내리쳤다. 그 반동으로 재경의 책상 옆에 걸려 있는 책가방과 류제가 수학여행 기념품으로 사준 못생긴 고양이 얼굴 열쇠고리가 짤랑거렸다.
“왜? 바보 렌하고 변태 류제하고 손잡고 나가지 그래? 엄―청 재미있을 것 같은데.”
다른 여학생들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가 산책을 간다며 상당수 돌아오지 않았고, 교실 안에는 학생이 얼마 없어서 소음 걱정 없이 여유롭게 수다를 떨어대는 그들에게 비키가 제 발로 다가왔다.
책상을 따라 길게 반짝이는 햇빛 그림자가 늘어진 창가에서 더운 바람이 들어오자 옆으로 낸 비키의 애교머리가 사르르 흔들렸다.
“공부하는데 시끄럽잖아, 이 바보들아.”
새초롬한 입에서 나온 건 사람을 놀려대는 발칙한 말이다. 가끔 비키는 외롭거나 심심하면 그들에게 시비를 걸러 오곤 했기 때문에 재경이 익숙하다는 듯 비키의 말을 받았다.
“갑자기 뭐야, 비키. 너 보고 싶냐? 내가 여장한 걸 보고 싶냐? 무슨 취향이냐? 변태냐?”
“뭐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바보 취급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야… 렌이 바보인 건 그렇다 쳐도 왜 나는 변태야? 그리고 유네한테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시…시끄러워! 유네는 어울릴 것 같으니까 그렇지!”
비키가 암만 그래도 남자애한테 여장한 모습이 어울린다고 말하기가 그랬는지 얼굴을 붉히며 죄 없는 책상에 손바닥을 쾅 내리쳤다.
류제더러 변태라고 한 말은 뭐라 변명하지 않은 걸 보면 놀리려고 한 말이겠지만 요즘 들어 변태 같은 망상이 뇌리에 떠나지 않고 있던 류제는 지레 찔려서 결국 한마디 더 했다.
“난 지극히 정상이야. 사람을 멋대로 변태 취급하지 마.”
“흥, 변태는 변태네요. 그런데 여장 콘테스트라니, 무슨 바람이 분 거야?”
“기왕 축제에 가는 거 다 참여해서 상품이나 싹쓸이하자는 생각이었지.”
“뭐어?”
상품을 싹쓸이한다는 말에 넬사 고원산 푸딩을 눈독 들이고 있던 비키가 다시금 재경의 책상을 박살 낼 듯이 내리쳤다.
다급해진 그녀가 만만한 재경에게 코를 들이밀었다. 눈동자를 마주 보자니 눈에 이글이글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우악, 깜짝야!”
아니, 쟤는 왜 틈만 나면 저렇게 성질을 내? 사람 간 떨어지게. 재경이 후다닥 몸을 사렸다.
“뭐, 어디 나가기라도 하게?”
“아…아냐! 축제에는 관심 없다고 했잖아! 네가 상품을 싹쓸이한다는 가당찮은 이야기를 하니까 하…한심해서 그런 거 아냐!”
남몰래 푸딩 많이 먹기 대회에 출전하려고 했던 비키가 모르는 척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비키의 행동과 말에 상당한 괴리감이 있어서 유네고 류제고 재경이고 수상쩍은 비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결국 비키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괜한 헛기침을 했다.
“뭐…뭐……. 유…유네 정도면 여장 콘테스트에서 1등 할지도 모르지. 그…그건 렌 네가 상품을 가져가는 건 아니잖아.”
그 시선을 ‘왜 죄 없는 렌한테 큰 소리를 내?’라고 받아들인 비키가 애써 변명했다.
“정정당당하게 둘이서 다 같이 손잡고 나가라고. 그…그래야 공평하잖아. 유네도 나가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공평? 참나. 딱히 우리끼리 내기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나랑 이놈이 하늘하늘하고 흐늘흐늘한 걸 걸쳤다고 상상해 봐. 흑역사만 생성되지. 유네만 나가느니 못할걸.”
유네야 여자애니까 당연히 어울리는 거고, 류제는… 저 몸집으로 여장을 하면 비키 말처럼 진짜 변태처럼 보이겠네. 우락부락한 놈이 하늘하늘 레이스 달린 치마라니.
나는… 말 안 해도 진짜 거울만 봐도 더러울 거 같아. 음, 기각. 내 상상 속에서도 기각이야.
“모두의 눈을 위해서 각하. 유네만 나가는 걸로 결정!”
“나 정말 나가야 하는 거야? 진짜? 진짜루?”
“흥, 뭐야, 재미없게.”
“재미없다니… 아까부터 갈 것처럼 말하네. 비키, 너 축제에 관심 없다 하지 않았어?”
“무… 다…당연하지! 난 너희들하고 다르게 공부하느라 바빠.”
비키가 잘난 척 팔짱을 꼈다. 그 행동은 ‘난 축제에 관심이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명확했다.
얼씨구, 아까부터 줄줄 흐르고 계십니다, 비키 씨. 재경은 것 참 솔직하지 못하다면서 사돈 남 말 하는 생각을 했다.
여장 콘테스트라. 참가자가 어찌 되었건 비키의 ‘푸딩 많이 먹기 대회’에 이어 이 여장 콘테스트는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와 굵은 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류제도~ 축제 당일 선택지에 따라서 여장 콘테스트에 참여하나 안 하나로 나뉠 수 있는데 그때 볼 수 있는 류제의 여장 컨셉 아트가 장난 아니게 웃기다.
물론 나는 삼류 악역이니까~ 여장 대회 같은 건 스토리상으로도 절대 안 나가게 되겠지만.
“푸헤헤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수학 12점인 바보 렌한테 비웃음당하고 싶지 않거든? 이상하게 웃지 마. 기분 나빠.”
“내 수학 성적 이야기는 왜 나와. 축제 관심 없으면 가서 공부나 해, 못난아.”
“내가 왜 못난이야? 못난이는 너야. 그리고 암만 공부하려고 해도 너희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대서 집중이 안 된단 말야.”
예쁘고 도도한 외모에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비키는 못난이라는 재경의 말을 곧바로 반박했다.
축제 이야기에 내심 참견하고 싶었던 비키는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세 사람은 토요일 일정을 잡으면서 점심시간 내내 떠들어댔다.
째깍째깍 시간은 가고 재경 옆에 서있기만 하던 비키도 관심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어디선가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비키는 간간이 많이 먹기 대회에 대해 물어보거나 참견하는 등 높은 관심도를 보이다가도 그에 대해 추궁하면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을 얼버무렸다.
“비키, 있잖아… 그렇게 참견하고 싶으면 차라리 너도 같이 가는 게 어때?”
“무…무슨 소리야! 나는 축제 관심 없대도!”
괜히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다가 지레 찔린 비키는 같이 가자는 말에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는 예비 종이 치고, 제 꼴이 끼워달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걸 깨달은 비키가 ‘난 너네들과 달라!’라며 고개를 치켜들고 도망가 버렸다.
이따금 류제는 비키를 정말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관심도 없으면서 남의 일정에 왜 간섭이지?”
“이 바보야, 진짜 관심이 없겠냐? 있으니까 참견하는 거 아냐.”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부정하는데.”
“비키 양도 참. 솔직하게 말해서 같이 놀면 좋을 텐데. 아쉽다. 아니면 가고 싶은데 다른 바쁜 일이 겹쳤을지도 몰라.”
유네가 그런 말을 하면서 슬쩍 재경을 쳐다보았다. 재경이 ‘왜?’라며 멀뚱히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
렌 군은 옛날보다는 협조적으로 변한 것 같은데 비키 양은 여전하다니까. 그만큼 렌 군은 내가 편해진 거려나. 미들 스쿨 때하고 전혀 달라. 나는 렌 군하고 단짝이거든.
“뭐…뭐야, 왜 사람을 보고 그렇게 웃어?”
“에헤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김빠지긴.”
재경은 툭 튀어나온 오리 입을 실룩거렸다. 유네가 자기를 저런 눈으로 보며 웃으니까 귀엽기도 하고… 뭐랄까, 이상하다. 유네가 남장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자애니까 그런 건가.
그걸 바라보던 류제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괜히 재경의 달아오른 귓바퀴를 붙잡고 꾹꾹 잡아당겼다. 덕분에 뭔가 이상할 것 같았던 재경의 가슴이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았다.
“아야, 아야야. 아파! 갑자기 왜!”
“마음에 안 들었어.”
“뭐라고? 놔! 이 자식. 아야야야!”
놓으라고 외쳐도 놓을 생각 하나 없고 토끼라도 되라는 건지 귀를 쭈욱 잡아당기는데 그렇게 아플 수가 없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 귀를 이렇게 잡아당기다니. 저 자식 잔인한 구석이 있다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렌, 너 중간고사 평균점이 얼마였더라.”
“갑자기 내 시험 점수는 왜?”
“그거 생각하니 울화통이 치밀어 오르네.”
“류…류제 군~ 즐거운 축제 이야기 중에 너무 그러지 마. 렌 군도 열심히 노력한 거잖아.”
왜 비키가 가자마자 류제가 갑자기 렌의 시험 성적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같이 대화를 나누던 유네도 아리송했지만 일단 렌의 귀를 쥐어뜯을 듯이 구는 류제를 말리고 보았다.
“류제구운! 렌 군 귀가 토끼 귀가 되어버려!”
“유네, 나 좀 살려 줘!”
류제는 심술을 부리고도 마음이 안 풀렸다. 또 나만 나쁜 사람 만들지. 물론 지금은 내가 나쁜 사람 맞지만. 저들끼리 시시덕시시덕.
“사람은 이 정도로 안 죽어.”
사람 속도 하나 모르는 애를 어떻게 더 많이 사…사… 좋아하라는 말입니까, 들라크루아 중령님. 그 전에 내 속이 까맣게 타서 없어지겠네.
“수학 12점은 뭐야 12점은! 그게 사람 점수냐? 내가 그렇게 힘들게 숙제시켰는데 비키가 성적 보고 비웃었잖아!”
“야! 3점짜리 4개를 맞춘 걸 칭찬해 달란 말야. 너도 비키도 저번에 실컷 나한테 뭐라고 했으면서 왜 지금 와서 2절, 3절을 해?”
“그것 가지고 부족해! 너 기말고사도 꼴찌 하면 방학 절반은 공부로 때워야 하는 거 몰라? 기말고사는 더 어려울 게 분명한데 어쩌려고 그래?”
“그…그야… 그건 맞지만……. 그게 라우라 축제를 앞둔 상황에서 말할 건 아니잖아야야!”
류제는 이제 양쪽 귀를 붙잡고 원숭이가 그것보단 더 잘 맞겠다고 원숭이가 되어보는 건 어떠냐며 재경의 양쪽 귀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다가 류제의 질투심의 제물이 되어버린 재경은 속으로 물음표를 한 스무 개를 그리면서도 류제가 시험 성적 가지고 뭐라고 하니까 반박하지도 못하고 당하기만 했다.
“류제, 이 짜식. 기고만장해하기는.”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 간신히 류제에게서 도망쳐 복도로 뛰쳐나간 재경은 복도 저편에서 다가오는 왕녀를 발견하고 미간을 움찔거렸다.
이 무슨 머피의 법칙이란 말인가. 귀 아파 죽겠는데 하필이면 지금 왕녀랑 마주치다니.
재경을 지나친 왕녀는 차가운 눈동자를 한번 굴려 쳐다보고는 그대로 교실로 들어갔다. 애써 다른 곳을 보던 재경이 차가운 눈동자에 겁을 집어먹고 침을 꿀꺽 삼켰다.
“…으으.”
껄끄러워. 재경은 하아, 멈추었던 숨을 내뱉으며 휘적휘적 화장실로 향했다.
그때 일 이후로 왕녀와는 전보다 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하기야 왕녀는 입장상 내가 준 정보를 무척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그런 반응이면 짜게 식을 만도 하다.
“후우.”
그래도 남들에게 비밀로 해주겠다니 다행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아, 다음부터는 배수의 진을 친다고 게임 오버 상황이 와도 남에게 함부로 부탁하면 안 되겠어. 될 수 있는 대로 내 선에서 해결해야지 원. 왜 내가 히로인 눈치를 살피고 있어야 하는 건데.
투덜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재경을 지긋이 응시하던 니냐롯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책상에 바르게 앉아 책을 펼쳤다.
니냐롯트는 재경이 들먹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라우라 축제를 즐길 여건이 못 됐다. 사람도 많고 그만큼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에 축제 기간에는 스스로 야외 활동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녀의 친위대를 이끌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만큼의 민폐도 없으니.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만큼 부자유스럽다. 니냐롯트는 그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껄끄러운 생각 없이 시시덕거리는 류제나 유네, 렌 지미, 하물며 비키 셀로니아마저 정말이지 부럽다고 생각했다.
* * *
토요일.
네 번째 챕터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의 배경이 되는 라우라 축제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이날만큼은 주말인지라 직장인은 물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가족들, 제립학교 학생들까지 거리로 방대하게 쏟아져 나왔다. 평소에는 한산했던 거리가 북적북적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번잡스럽다.
이전보다 빨리 검사를 마친 류제가 정문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멀리 다가오는 그들을 발견하고 손을 높게 들었다.
“여기야. 빨리 나왔네.”
“류제 군!”
“류제.”
기숙사에서부터 걸어왔을 그들이 반갑게 합류했다.
제립학교 근처에서 축제가 열리는 장소는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이 바로 올려다 보이는 마을이었다.
저번 달 있었던 마족의 침입 이래로 다시 구축한 철저한 방어 시스템과 대마족용 결계가 하늘을 감싼 모습은 멀리서 보아야 장관이었다. 하늘에 비친 오로라 빛깔 투명한 돔은 축제 배경에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운 장식물이었다.
“우와. 사람 엄청 많아!”
학교에서 나오지 못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이만큼 거리를 뒤바꾸어 놓은 걸까. 저번 주에 내려왔을 때와 전혀 다른 마을 전경이 재경은 턱이 빠질 만큼 신기하기만 했다.
축제를 위해 만들어놓은 간이 상가에 전시해 놓은 상품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족처럼 꾸민 채 와하하 웃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들이며, 보행자들이 흐르는 방향을 놓치면 흩어지기 십상인 북적북적한 거리는 재경에게 있어서 문화 충격 그 자체였다.
“류제, 저거 봐. 저거 보라고!”
재경이 처음 나들이 나온 어린아이처럼 류제의 팔을 뒤흔들며 거리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라우라 축제를 처음 와본 외국인 같은 반응이었다.
류제는 이제 막 축제에 발을 디뎠을 뿐이라며 핀잔해 주려다가 너무 환한 재경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와, 저 가면도 멋지다!”
“그래?”
라우라 축제에 흔히들 파는 뿔 달린 무서운 마족 가면을 가리키며 재경이 류제에게 무리한 공감을 요구했다.
저런 건 우리 촌마을에서도 축제마다 파는 유명한 가면이다. 너무 신기해하는 거 아냐? 아니, 렌네 마을에서는 저런 걸 안 팔았을 수도 있지. 라우라 축제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니까. 으음, 그럴 수 있어.
“저거 봐. 솜사탕이야! 솜사탕 기계야!”
솜사탕도 안 팔았나 보지.
“길거리에서 공연하고 있어!”
버스킹도 안 했나 보지.
“애들한테 사탕을 주고 있어! 으하하하. 저게 뭐야. 저게 마족이라고 꾸민 거야?”
라우라 축제 날에 사탕도 안… 받았나? 에이, 마족 차림을 한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받는 건데.
“옥수수 구이다! 설탕 과자! 빙수인가?!”
“…저기 렌,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하나하나 너무 들뜬 거 아냐? 진정해.”
“나 렌 군이 저렇게 신나하는 거 처음 봐.”
덩달아 들뜬 목소리로 유네가 말했다. 확실히 체육대회 때와는 다르게 게임 오버의 걱정 없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축제 이벤트가 재경에겐 필요했던 것 같다.
삼류 악역이라는 렌 지미의 캐릭터 특성 때문에 주인공 류제와 히로인 유네와 함께하지 못하고 ‘스토리상’이라는 명목하에 혼자서만 축제를 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원인은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변덕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건 내가 이 둘과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이런 게 뭐 대수냐.
잘은 몰라도 오늘의 변덕은 정말 고맙다, 망할 미연시 세계야. 덕분에 나 너무 즐거워!
“으하하, 저 사람 봐. 마족 차림을 한 애들한테 붙잡혔다!”
“오오… 사탕을 뜯어내려는 모양인데?”
축제가 열리는 길거리를 종종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은 마족 분장을 한 채 만만해 보이는 어른을 둘러싸서 사탕 공갈 협박을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웃으며 당연한 듯 여유롭게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개씩 꺼내 주는 사람이 정말 어른스럽다고 느껴진다.
류제의 옷깃을 잡아당긴 재경이 애처럼 칭얼거리듯 조심스레 요구했다.
“우…우리도 사탕을 사놓는 게 좋지 않을까? 우리한테 올지도 모르잖아.”
“응? 아아, 그럴 수도 있겠네.”
라우라 축제 날 마족 차림을 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이유는 ‘이걸 대신 먹고 나는 먹지 말아 주세요.’라는 귀여운 놀이였다.
라우라 축제 기간에만 적용되는 하나의 약속 같은 것이며 그래서 라우라 축제 기간에는 다들 주머니에 사탕 두어 개씩은 들고 다녔다.
지금 그들에게 사탕이 하나도 없으니 아이들을 위해서 한 봉지 사서 들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세 명의 형들이 사탕을 파는 간이 상점에서 사탕 한 봉지를 사는 걸 본 영악한 아이들이 가면을 쓰고 쪼르르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이 계산을 하고 뒤를 돌아보자 아이들이 위풍당당 길을 가로막았다. 곧바로 사탕을 줄 기회가 찾아올 줄 몰랐던 재경이 사탕 봉지를 들고 허둥거렸다.
“사탕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안 자바먹찌~!”
나름 겁을 주려고 한 건지 마족인지 호랑이인지 모를 흉내를 내며 아이들이 꺄르르 웃어댔다.
유네도 받은 기억만 있고 줘본 적이 없어서인지 재경처럼 종잡지 못하는 모양새고, 그중 일찍 철이 들어 고아원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역할을 맡았었던 류제가 재경이 들고 있던 봉지를 뜯어 아이들에게 각각 하나씩 사탕을 주었다.
“사탕을 드릴 테니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부족해. 세 명이잖아. 세 개씩 줘야지!”
“마자마자! 세 개!”
예닐곱으로 보이는 아이가 자랑스레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어째 사탕 욕심 많은 건 어느 동네 아이나 똑같나 보다. 류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재경에게 사탕 봉지를 넘겼다.
“어어…….”
아이들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재경에게로 옮겨갔다. 재경은 사탕 봉지를 쥔 채 멀뚱히 서있다가 사탕을 달라고 손을 쭉 내민 아이들의 시선에 엉겁결에 사탕을 하나씩 내주었다.
사탕을 내주면서 아무 말도 안 하자 류제가 그게 아니라며 재경에게 속삭였다.
“주기 전에 인사말 해야지.”
“뭐…뭘?”
“내가 아까 말했던 거.”
아. 재경이 알겠다며 순순히 류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사…사탕을 드릴 테니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와아아!”
재경에게 사탕을 받은 아이들은 이제 유네의 앞으로 가서 손을 내밀었다. 유네도 류제와 재경이 한 것처럼 똑같이 사탕을 주며 잡아먹지 말아 달라는 말을 했다. 처음 사탕을 주는 유네도 여간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왜 그래?”
렌이 평소와 다르게 우물쭈물하는 분위기자 류제가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아까부터 싱숭생숭해 보이는 게 분위기에 과열되어서 속이라도 안 좋나 걱정이다.
“아니… 암것도 아냐.”
뭔가 핼러윈 같아! 라고 말하지 못한 재경이 상기된 얼굴로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근질근질거리는 입가는 주체가 되지 않았다. 저 애들에게 사탕을 주니 왠지 이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이 확 치밀어 올랐다.
변장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것이 핼러윈과 비슷하다고 치부했지만 재경도 핼러윈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도 원래 세계의 핼러윈이란 바로 이런 기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순수한 즐거움은 오랜만이었다.
“에헤헤, 받는 거하고 주는 거는 기분이 다르구나. 왠지 어른이 된 기분이야.”
“그래? 그런가?”
유네의 사탕까지 받고 다른 사람에게로 와아아 뛰어간 아이들을 지켜본 류제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렌이 그런 감격스러운 얼굴이었던 건가. 나는 몇 년 전부터는 계속 주는 입장이었으니 익숙하지만 렌과 유네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준 것을 계기로 엔진이 잔뜩 달아오른 재경이 칙칙폭폭 피스톤을 가동했다. 신이 난 재경이 기대감 잔뜩 섞인 파이팅을 크게 외쳤다.
“조오아써! 자, 빨리 가자.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면 퍼레이드를 놓칠지도 몰라!”
“아, 응. 유네, 가자.”
어릴 적 할머니와 손을 잡고 어딘가를 구경했던 기억이 겹친 재경이 똑같이 류제를 붙잡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기분이 이상하게 좋았다.
늦은 오후, 저녁을 대비해서 간이 상점에 알록달록한 등이 올라왔다. 어디선가에서 퍼져나온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단 냄새, 짠 냄새, 오징어 타는 냄새, 옥수수 굽는 냄새.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줄을 서서 길을 걸으니 여러 가지 것들이 지나쳐갔다. 내기 사격에서 져서 아쉬워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들,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물건을 내주는 소리, 돈을 받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웃음소리, 들뜬 공기.
“류제, 이거 봐봐!”
“여기 봐. 물총이다! 류제, 우리 저거 사자!”
“장난감이 혼자서 움직인다. 하하하! 유네, 이런 건 어때? 류제, 이거 봐!”
“저기 사람들 왜 줄 서있는 거야? 류제, 왜 줄 서있는지 빨리 확인해 봐.”
“으아아, 내 신발! 신발 벗겨졌어! 안 보여. 찾아줘, 류제!”
“나도 가면 살래! 뭔가 멋있어 보여. 류제, 나 어때?”
“류제, 저거 봐!”
“류제!”
호의 어린 눈동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순수한 시선, 상기된 신뢰의 목소리, 묻어나오는 즐거움. 그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류제를 찾았다.
“렌 군, 정말 즐거워 보여. 보는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기분이야.”
“그러게. 축제 처음 온 사람처럼.”
퍼레이드를 보기 전 가위바위보에 져서 저녁용 핫도그를 사러 간 재경을 기다리며 둘이 같은 의견을 냈다.
자존심도 세고 혼자서 뭘 하는 걸 좋아하는 애라 축제에 같이 가자는 말을 냉큼 수락하다니 의외구나 싶었는데 이만큼 좋아할지는 몰랐다. 같이 가자고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류제 군, 내가 오늘 느꼈던 건데… 렌 군은 실은 라우라 축제에 와보지 못했던 거 아닐까?”
“응? 라우라 축제를?”
“저번에 물어봤을 때도 어물쩍 넘기기도 했고. 평범했다고 말하지만 사정이 있어서 잘 즐기지 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 그냥 내 생각이야! 오늘 렌 군을 보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정이라. 설득력이 있었다. 라우라 축제도 즐기지 못했을 정도면 렌은 우리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걸까.
류제는 그 사소하면서도 신경 쓰이는 비밀이 마음 한구석에 거슬렸다. 렌은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한다. 조금이라도 파헤치려고 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선을 긋는다.
렌이 그랬지. 자기는 다른 사람을 걱정 끼치게 만드는 게 싫다고. 그것도 그 이유 때문일까. 언젠가 그때처럼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줄 날이 올까.
“으하하하. 야, 이것 봐. 제립학교 학생이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고생한다고 서비스로 줬어!”
상가에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등을 등지고 쫄래쫄래 다가오는 재경의 얼굴이 미소로 환했다. 이제 곧 4시, 큰길에서 퍼레이드가 시작될 것이다. 좋아하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류제는 그런 재경이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꽉 껴안아 주고 싶었다.
“류제?”
불러도 답이 없는 류제에게 재경이 왜 그러느냐며 주의를 일깨웠다. 또 쓸데없는 망상이나 하고 있었던 류제가 정신을 차리고 가로수 돌담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경이 봉지를 뒤적거리며 사 온 핫도그를 그들에게 내밀었다.
“기다리는 사람 많았어?”
“그냥저냥. 자, 유네야, 네 거.”
“고마워, 렌 군. 수고했어!”
“뭐 이깟 것쯤이야!”
재경이 덕분에 혼자서 좋은 구경 많이 했다며 히죽 웃었다. 유네 말대로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수고했다는 말에 평소처럼 틱틱거릴 것도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정말 라우라 축제에 와본 적이 없었나? 아니면 그저 축제가 즐거운 것일 뿐인가. 렌이 말해 주지 않는다면 이유는 영영 알 수 없겠지만 저렇게 즐거워하니 왜 그런들 아무렴 어떤가도 싶다.
“가자. 퍼레이드 놓치겠다.”
“정말, 시간에 못 맞추면 어쩌지.”
세 사람은 재경이 사 온 핫도그를 먹으며 퍼레이드가 열리는 큰길가로 향했다. 그곳은 벌써부터 좋은 자리를 맡아놓은 사람들이 깃발을 흔들면서 퍼레이드 시작 전부터 기대의 환호를 내보내고 있었다.
세 사람도 곧 적당한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퍼레이드 맨 앞에서 걸어가는 키아나트리체의 휘장과 거대한 가마, 가마를 호위하듯 열과 행을 맞추어 군인처럼 걸어가는 분장한 사람들. 뒤이어 북을 치고 팡파르를 울리는 사람들이 연이어 등장해 환호를 고조시켰다.
“와하하! 걸어가면서 저글링도 하고 있어! 서커스인가?”
“오오, 멋진데. 사람이 이렇게 몰린 이유가 있구나. 내가 살던 마을하고 차원이 달라.”
“이 마을에 우리 학교가 있어서일 거야. 라우라 축제는 마왕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은 순… 꺄악!”
사람이 북적거리는 바람에 체구가 작고 힘이 약한 유네가 말하다 말고 멋대로 밀려났다. 어이쿠. 류제가 버티지 못하는 유네의 어깨를 껴안고 제 쪽으로 끌었다.
“괜찮아?”
“아… 으…응!”
보호해 주려고 한 행동이겠지만 유네는 류제에게 들러붙어 버린 꼴이 몹시 부끄러웠다. 류제가 조심하라며 유네의 어깨를 다독였다.
“싫겠지만 유네는 작으니까 어쩔 수 없어. 인파에 섞여서 우리 안 잃어버리게 주의해.”
“알았어. 그… 류제 군, 아…앞이 안 보이는데 조…조금만 비켜줄 수 있을까?”
류제의 가슴팍 언저리에 코를 박고 있는 유네가 끙끙거리면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밀착한 것은 별수 없지만서도 역시 부담스럽다.
“유네, 이쪽으로 와. 여기 잘 보인다.”
그걸 느낀 재경이 자신과 류제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유네를 무리하게 빼내서 대로변으로 보내주었다. 숨통이 트이자 유네는 그제야 살겠다고 푸하, 숨을 내쉬었다.
“와아, 살겠다. 정말로 잘 보여. 고마워, 렌 군.”
“흥, 고마우면 이따가 간식거리라도 쏴라.”
“아… 으응. 당연하지!”
이제 좀 살겠다 싶더니 이번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뒷자리에 렌이 떡하니 버텼다. 재경은 유네가 그마저도 불편해할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 못 하는 얼굴로 환호했다. 유네는 배려해 준 렌에게 말도 못 하고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암만 친구라지만 다른 방을 쓰는 렌하고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던 적은 없었다. 뭔가 수학여행 때 옷장에 숨었을 때보다 더 긴장되네. 유네는 볼일 보고픈 어린애처럼 안절부절 발을 굴렀다.
“머…멋지네. 맨 앞에서 보니까 남달라 보여.”
“군대 행진 같이 생기지 않았어? 본 적은 없지만.”
“저 조형물 좀 봐. 기간트리카랑 비슷하게 생겼다.”
“정말이네! 우하하하. 그렇게 생각하니 좀 웃긴데.”
눈에 익은 조형물의 모습에 셋 다 고개를 들어 거대한 위용을 살폈다. 그 뒤로 키아나트리체의 왕실을 나타내는 불사조와 마족을 멸하는 부적 문자가 그려진 휘장들이 연이어 지나갔다.
난생처음 행진을 봐서 흥분한 재경은 대로변으로 고개가 빠져라 들이밀어 지나가는 모든 것을 모조리 기억할 것처럼 관찰했다.
덕분에 재경의 바로 앞에 서있는 유네는 귓가에 재경의 숨소리가 쌔액쌔액 들려 얼굴이 완전 새빨개지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경이 류제의 옷깃을 끌며 외쳤다.
“나 이런 거 처음 봐!”
“어? 뭐라고?”
앞뒤에서 사람들이 환호성과 응원을 보내고 있는 데다가 퍼레이드에서 울려 퍼지는 북소리와 팡파르 소리가 시끄러워서 제대로 듣지 못한 류제가 렌에게 귀를 기울였다.
재경은 신이 나서 류제의 귓가에 입을 대고 더 크게 외쳤다.
“나 이런 거 처음 본다고!”
렌이 활짝 웃었다. 정말 오늘따라 솔직하네. 류제가 슬쩍 붉어진 제 얼굴을 앞머리로 가렸다.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자니 근질근질 기분이 이상하다.
뭐라 답변해 줘야 할까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류제가 재경이 했던 것처럼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손으로 비밀스레 가렸다.
“재미있어?”
“응!”
평소라면 ‘딱히 재미있고 그런 건 아니거든? 그냥 있으니까 보는 거지.’ 하고 귀엽지 않은 대답을 할 텐데. 뭐, 오늘처럼 구는 것도 썩 나쁘지 않고 다음엔 이런 모습 보기 힘들겠지.
류제가 퍽 귀여워진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뭐야, 왜 혼자서만 어른스러운 척이야? 그리고 키 작아지니까 머리 누르지 말라고 했잖아.”
“아하하.”
재경이 하지 말라며 류제의 손을 툭 쳐냈다. 좀 귀엽게 구나 했더니 갑자기 원래대로 돌아오는구나. 류제가 졌다면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바보같이 웃었다. 다음번에 렌이 솔직해지는 순간이 언제일까 궁금해졌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햇님 대신 간이 상점에 달린 붉은 등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은 두 편으로 갈라져 마족의 탈을 쓴 사람과 인간의 탈을 쓴 사람끼리 차전놀이를 하며 가짜 싸움을 하는 시늉을 했다.
[시시하군.]
지나가던 어떤 인간 나부랭이가 준 알사탕 포장 끝부분을 빙글빙글 돌리던 화마(火魔)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무감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깟 쓰레기를 왜 주는지 모르겠다며 그것을 길거리에 휙 버렸다.
“동감이야. 왜 내가 마왕님을 죽인 원수의 이름을 딴 축제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옆에 앉아있던 미나도 그 의견에 찬성했다.
제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과 뿔 달린 은발의 소년이라. 수상쩍은 조합이었지만 서큐버스인 미나가 다루는 ‘악몽 인자’로 이루어진 마법은 생물의 기억에 간섭하는 고등 마법이라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간섭하는 이는 없었다.
“그 사탕은 뭐야. 설마 가서 잡아먹겠다고 말하기라도 한 거야?”
[어떤 인간이 다가와 내 뿔이 멋지다고 하더군. 어처구니가 없어.]
콧방귀를 뀐 율폰이 율폰이 턱을 괴었다. 뿔과 날개만 없다면 평범한 인간 소년 모양새의 환영을 가진 율폰은 말은 그렇게 해도 아주 오랜만에 무지한 인간들의 틈에 껴서 알량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라우라 축제의 좋은 점이란 바로 이런 거겠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가면을 쓰고 마족의 흉내를 내었기에 미나가 일대에 약간의 기억 조작만 해주면 머리가 들어찬 어른들은 마족인 율폰을 똑같은 어린아이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이런 시시한 축제에는 왜 온 건데? 나는 바빠. 오늘 정기를 수집하지 않으면 생활에 곤란하단 말이야.”
[근황 보고를 하러 왔을 뿐이다. 네가 부자유하니 내가 오가야지.]
“하필이면 이날?”
[하필이면 이날.]
율폰이 무뚝뚝하게 답하자 미나가 부루퉁하게 입을 비죽거렸다. 마왕님을 죽인 로라 하놋을 기념하는 날. 마족의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날일 리가 없었다.
“이깟 축제 따위. 로라 하놋은 죽었고, 마왕님은 다시 부활하신다. 최종적으로는 살아남은 우리의 승리야.”
[그 무불통지(無不通知) 무소부지(無所不知) 여자. 500년 동안 만나본 인간 중에 가장 인간 같지 않은 괴물. 그자가 마족을 멸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는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몰라.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것이 그 인간의 손바닥 위일지도.]
미나의 표정이 불쾌해졌다.
마왕이 다시금 인간의 육체 안에 환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세운 부활 계획이 인간에 불과한 로라 하놋의 손바닥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가 암만 잘났어도 고작해야 인간이다. 죽은 지 백 년이나 더 되어 썩어버린 시체란 말이다.
미나는 인간을 과대평가하는 율폰에게 시답잖은 말 하지 말라며 코웃음을 쳤다.
“농담은 집어치워.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인간을 찢어발기고 싶어지니까.”
[흥, 널 대신한 서큐버스는 아직 많이 있다. 마가릿처럼 성에 갇히고 싶은 건가?]
“대마족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서큐버스가 얼마나 된다고. 재미없게 진지하게 받아치지 마. 난 마가릿처럼 대가리 텅텅 빈 미친년이 아니야. 그만큼 짜증 난다고 말하고 있는 거잖아.”
미나가 투덜거리며 멀리 인간들이 지나가는 길가를 응시했다. 붉은 등불이 그들의 동공처럼 강렬하다.
“마가릿은 뭘 하고 있지? 또 쓸데없는 개입으로 내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도록 방치하지 마.”
[그녀가 잃어버린 옵시그나티오를 재개발하는 중이다.]
“감시는 누가 하는데.”
[나콜렙시.]
“내내 잠만 자는 수마가 감시라니, 어불성설이네.”
[어찌 되었건 마가릿은 그녀의 관리하에 있다. 너야말로 마왕의 상태는 어떤가. 그 렌 지미라는 자의 처리는?]
짜증 나는 이름에 미나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렌 지미란 이름을 듣는 것도 싫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인데 제 일인 양 간섭하기는!
“아직도 꿈에 침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그래서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건가? 구차한 변명이군. 사정이 뭐가 되었건 겨울이 끝날 무렵에는 류제 신리는 반드시 마왕으로 각성해야 한다.]
“알고 있어. 나도 내 계획이 있으니까 참견하지 마. 그리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잖아.”
미나가 멀리 보이는 붉은 등 아래로 렌 지미와 류제 신리, 여자인 주제에 남자인 척하는 유네 나르타가 대장 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시시덕거리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지금은 저대로 즐거워하라고 내버려 둘 거야.”
류제 신리의 마음이 향하는 방향과 그것이 다다른 도달점에 있는 자와의 관계를 모를 리 없는 미나는 인간의 마음으로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고 비식거렸다.
“인간의 소망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산산조각이 나기 마련이니까.”
[여전히 악취미군. 이래서 업마들이란.]
“셀로니아가를 불태워 전멸시킨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미나의 그 말을 끝으로 율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율폰이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미나를 흘겼다.
어이쿠, 역린을 자극했군. 미나가 농담이라며 두 손을 들어보이자 율폰이 거만하게 고개를 돌렸다. 화마의 군주의 볼일은 이걸로 끝인가? 미나가 흐릿하게 멀어지는 율폰을 향해 투덜거렸다.
“고작 이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니지?”
[겸사겸사. 축제이니 나도 오랜만에 포식을 즐겨야지.]
율폰이 숱 많은 앞머리에 반절이 가려진 붉은 동공을 빛내며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몇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많은 인간들이 마족 차림을 한 채 한 장소에 모여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작별 인사도 없이 미나에게서 멀어진 율폰이 어슬렁거리며 인적이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이야, 근사한 뿔이구나.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거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지 손에 사탕 바구니를 든 한 아줌마와 그 자녀들이 마주 보며 다가오다가 율폰에게 친절하게 물었다.
오늘은 라우라 축제의 마지막 날. 이 주변 아이들은 사탕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며 마족 분장을 한 채 돌아다닌다.
“어디 보자, 내게도 아직 사탕이 남았단다. 자, 가지고 싶지? 어서 말해 보련.”
그녀의 너그러운 목소리에 율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옆에서는 두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붙잡고 율폰을 쳐다보았다.
아주 짧은 그 순간,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보다 더 빨리 율폰의 으리으리한 무언가와 마주하고 얼어붙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잡아먹어 주지.]
율폰이 씨익 웃었다. 살코기를 물어뜯기 위해 뾰족하게 돋아난 치아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음영 진 눈가에서 붉은 동공만이 새빨갛게 빛났다.
이변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어두운 염화가 세 인간을 덮쳤다. 순식간에 세 명의 인간을 잡아먹은 율폰은 이걸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며 짤막하게 불평했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5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