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5월. 손을 뻗는 검은 마수는 어디로 향하나]
“수고했네, 세라 밀로니 중위. 등급1의 마족을 학생들을 지휘해 소멸시키다니. 마족과의 전투에서 어빌리터가 죽지 않은 건 전례 없는 일이야. 아주 놀라워. 다른 건 몰라도 학생들은 우리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다. 잘 지켰어.”
“중위가 처음 교직으로 전환한다고 들었을 때 군에 유능한 힐러가 결여되는 게 아닐까 심려하고 있었다만 오늘날의 결과를 보니 중위의 교육열과 가르침에 감복스럽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황금빛 높은 첨탑이 위세를 자랑하는 키아나트리체의 궁궐 안. 나라의 높으신 분들 밑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세라가 더욱 고개를 숙이며 격식 있게 답했다.
자신의 반에 어빌리티 척도 99 이상인 학생 류제 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래로부터 저들은 간간이 그녀를 불러서 그의 상태를 보고하게끔 했다.
오늘 그녀가 호출된 이유는 며칠 전에 있었던 마족의 침입을 류제 신리가 저지했다는 사실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다.
“5월은 가정의 달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가족과 함께 행복해야 할 때 키아나트리체는 두려움에 젖어야 했을지도 몰라. 류제 신리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군. 키아나트리체의 새로운 천금칠보가 아닌가.”
“장래 좋은 군인이 되어서 우리 키아나트리체를 지켜주겠어. 밀로니 중위, 현 담임인 그대의 책임이 크다.”
마왕이 죽은 이래로 마족은 이미 쇠퇴기를 맞고 있고, 토벌 이후로는 옛날처럼 습격이 잦은 것도 아니다.
등급1의 최상위 마족이 고작 학생들뿐인 학교에 침입했다는 의미는 오히려 마족들이 급박한 상황에 몰려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저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를 원하는구나.
새로운 세대인 류제 신리가 포르테 들라크루아처럼 평화의 상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마족이 필요하겠지. 공동으로 두려워할 대상만 건재하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거니까.
“대답은?”
“명심불망하겠나이다.”
세라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자신과 같은 일개 중위에 선생님이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키아나트리체가 건국되기 전부터 거두어지지 않는 뼛속 깊은 전시 상황에서 군인인 그녀는 그저 윗사람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중위이며, 저들은 장성의 계급이다. 어빌리터는 절대 이 계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좋아.”
그들이 만족스레 답했다. 높으신 분들은 마족이 건재하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거다. 이번 마족의 제립학교 침략 건은 선전으로 쓸 좋은 먹잇감이었다.
세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던 반 학생, 렌 지미를 떠올렸다. 암만 어빌리터라지만 군인도 아니라 그냥 학생이다. 학생일 뿐이다. 학생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기말이 아니라고. 세라는 불편한 감정을 능숙하게 억눌렀다.
“3년 후가 기대되는군.”
“제2의 포르테 들라크루아, 나아가 제2의 영웅을 위해.”
그들은 들고 있던 와인 잔으로 건배했다. 전장에 나가긴커녕 앉은 자리에서 공만 가로채는 주제에. 무표정이었던 세라의 입가가 짧게 실룩거렸다.
하지만 이 세계에 마족이 실존하는 것은 사실이며, 그 마족이 며칠 전에 자신의 학생을 죽일 뻔한 것도 사실이다. 마족이 존재하는 한 어빌리터들은 인간을 대표해 마족과 싸워야 한다. 옛날부터 그래왔듯. 큰 힘에는 큰 책임이 있기 마련이니.
“마지막으로 묻지. 마족이 사용했던 무기에 관해 분석이 끝났다고 들었다. 그대도 소식을 들었나?”
“예. 어빌리티를 인식하는 슬렉터 센서를 방해하는 파장을 내는 기계, 가칭 ‘안티 슬렉터와 어빌리티와 드라코니스 입자 사이를 방해하는 기계, 가칭 ‘안티 어빌리티’임을 확인했습니다.”
“그 기계들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지진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지?”
“네, 현재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기술관장이 ‘안티 슬렉터’에서 S_script의 치명적인 보안상의 결함을 발견하고 강화하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역시 우리가 뽑은 관장입니다. 대단해요. 이대로라면 마족들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요.”
가면을 쓴 백작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복? 말만 저런 식이지 마족이 없으면 정작 곤란한 주제에. 세라는 속으로 하는 불평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류제 신리를 잘 부탁하네, 밀로니 중위.”
“예. 맡겨주십시오.”
“장래 나라의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척도가 큰 어빌리터들은 어릴 적부터 관리를 해야 오래 살지요. 우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지요? 세라 밀로니.”
“전부 우리 인간을, 키아나트리체를 위해서다.”
“늘 유념하고 있습니다.”
“이제 물러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고 들었어. 시간 잡아먹어서 미안하군.”
그들의 명령에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자리를 비켰다. 전시 상황답지 않게 높은 천장과 화려한 장식품이 사치스럽다. 그녀가 문 쪽으로 다가가자 시종들이 친히 문을 열어주었다.
인상을 구긴 세라는 음험함이 느껴지는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빌리터도 인간이다. 살고 싶어 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같은 인간인데 왜 어빌리터만 인간 병기 취급인가. 왜 어빌리터만 마족의 고기 방패가 되어야 하는가.
힘이 있기에 책임이 있다. 정작 힘 있는 자들은 나라의 높으신 분들인데 왜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할까. 대신 책임을 져주는 만큼 그만한 대가가 돌아오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의문만이 몇 년째인가. 반기를 들 용기도 없으면서. 세라는 그럼에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또각또각 문밖으로 사라졌다. 세라가 나가자 시종들도 인사를 드리고 문밖으로 물러났다.
황금으로 도금된 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그 장소는 오로지 그들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고 흉흉한 기색을 내뱉었다.
“…키아나트리체에 또 하나의 병기가 생겨났군.”
“말을 잘 듣는 좋은 장기말이 되어야 할 텐데요.”
“그래. 황제의 말, 전방의 괴물, 포르테 들라크루아처럼.”
그들이 가면을 벗어서 아래에 내던졌다.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충실한 개. 그들은 그런 장기말이 몇 개고 더 필요했다.
“마족에 대한 경각심을 잊게 해서는 안 돼. 마족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잊어버리지 않도록 반복해서 공포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아직 평화는 도래하지 않았다. 류제 신리라는 희망이 키아나트리체에 존재해야 한다.”
우리들의 권력을 위해서. 그들은 하지 않아도 될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띤 미소만이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그럼, 예정대로 마왕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죠.”
“때가 되었는데 왜 오시지 않는 거요. 나는 아주 분주한 사람인데.”
[재촉하지 않아도 나는 여기에 있다.]
백작 부인이 앉은 의자의 뒤. 화마(火魔) 샐러맨더,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미나처럼 인간에 의태한 것도,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족 본연의 모습 그대로 버펄로를 닮은 뿔과 검은 비막의 날개를 펼친 채였다.
그들은 율폰의 모습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저들끼리만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숙덕숙덕.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가식이 가미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 * *
“사랑스러운 내 딸. 아빠랑 약속하는 거야. 아빠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나오면 안 돼.”
하지만 아빠……! 나…나도…….
“걱정 말렴.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오빠도 언니도, 삼촌도 고모도 무사할 거란다. 자, 우리 똑똑한 비키는 숫자를 몇까지 셀 수 있지? 천천히 100까지만 세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거야.”
“아가씨,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속이라도 안 좋으신 겝니까?”
“아… 유모. 아니야. 그냥 딴생각하다가.”
비키가 유모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내내 덜걱거렸던 마차가 멈췄다는 것도 몰랐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 때 본 환영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았다. 극복하기는 아직 힘든, 실로 오랜만에 돌이켜 보는 과거였다.
“학교로 돌아가시면 또 언제 댁으로 돌아오실까요.”
“여름방학 때쯤이려나. 걱정하지 마, 난 잘 해내고 있으니까.”
“소인은 그래도 늘 아가씨 걱정에 눈물만 흘립니다.”
“걱정하지 말래도. 나야 건강 빼면 시체인걸.”
비키가 씁쓸한 감정을 숨기고 어색하게 웃었다. 일족이 멸족당하는 그날 휴가를 가느라 홀로만 살아남았던 유모는 늘 비키에게 죄책감을 가졌다.
비키에게는 이제 유모밖에 없었다. 비키는 유모라도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죄가 아닌데. 하지만 유모가 느낄 감정 또한 나도 느끼고 있으니 괜한 걱정이라 불평할 수도 없었다.
“그럼 이제 가볼게. 편지할 테니 너무 외로워하지 마.”
“늘 건강하세요. 아가씨”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든 유모가 비키에게 작별 인사했다. 유모의 양옆으로 선 두 명의 메이드도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비키는 짐을 들고 C동 기숙사로 들어갔다. 유모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비키가 보이지 않자 훌쩍거리며 마차를 타고 학교 밖으로 사라졌다.
연휴의 마지막 날인 수요일 늦은 아침. 저녁 7시까지 복귀지만 비키는 공부를 하기 위해 보다 일찍 학교로 돌아왔다.
“체육대회도 끝났으니 정신 차려야 해. 다음 주부터 중간고사 시작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비키 셀로니아. 일족의 부흥은 내 손에 달렸어.”
난 반드시 1등을 차지할 거야. 셀로니아 가문은 무조건 1등을 해야 해. 기숙사 짐을 푼 비키가 으레 하는 정신통일로 제 뺨을 두드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는 그녀는 손에 가득 교과서와 공책을 들고 곧바로 제립학교 공용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문을 열자 휴가 내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학생들이 소수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수가 적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슬슬 공부할 사람들이 늘어날 법도 한데 고작해야 6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책상에 한 사람이 겨우 듬성듬성 앉아있는 수준이었다.
그중 눈에 익은 1학년 8반의 남학생 세 사람도 구석에 앉아있었다. 류제 신리, 유네 나르타, 렌 지미. 괴상한 조합이지만 늘 같이 다니는 삼인방이다.
저 세 명이 함께 모여서 공부를 한다고? 류제 신리라면 몰라도 렌 지미가 연휴 날 중간고사를 대비해서 공부를 한단 말이야? 렌 지미가? 그 바보가? 말도 안 돼. 뭘 잘못 먹은 게 틀림없어.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아… 비키 양!”
냉랭한 분위기 속 중간에 껴서 쩔쩔매던 유네가 쇳소리로 속삭거리며 격렬하게 비키를 반겼다. 수업 시간 때 어빌리티 콤비를 짜기는 했어도 반색할 만큼 친하진 않았던지라 유네의 환대가 어색했던 비키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렌뿐만 아니라 유네 나르타까지 이상한데? 뭐야, 휴일동안 무슨 일이야?
“저기 렌 군. 류제 군! 비…비키 양이 왔어. 인사해.”
비 오는 날 같이 축 처진 분위기 속에 유네만 밝게 웃었다. 유네의 옆자리에서 지루한 듯 공책만 깨작거리고 있던 재경이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아… 비키, 안녕.”
렌의 성격대로라면 여기가 도서관인 것도 잊은 채 시끄럽게 인사해야 하는데 오늘따라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비키가 오거나 말거나 공부에 집중하던 류제는 눈동자만 굴려 슬쩍 쳐다봤다가 무시하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가 이상했다.
“아하하. 비…비키 양도 공부하러 온 거야? 우리랑 같이 공부할래?”
“나야 뭐 상관없는데…….”
분위기가 왜 저래? 저 두 사람은 아주 죽고 못 사는 것처럼 굴더니. 비키는 어리둥절했지만 같이 공부하는 게 나쁠 것 없다 싶어 류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류제 비키
――――――
책상
――――――
유네 재경
류제랑 바보 렌이 대각선으로 떨어져서 앉은 걸 보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분명한데. 말없이 책을 펼친 비키가 공부하는 척하면서 묘한 공기를 살폈다.
내내 눈치만 보던 유네는 비키가 왔으니 차갑게 언 분위기가 순환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분위기는 풀리지 않고 침묵이 변함없이 이어졌다. 포기한 유네는 시무룩해져서는 읽히지도 않는 책을 읽었다.
렌은 공부를 하는 건지 낙서를 하는 건지 깨작깨작 의미 없이 연필만 움직였다.
류제는 시험에 나오는 부분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딴짓을 하는 렌에게 잔소리를 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네가 비키에게 도와달라고 무언의 요청을 보냈다. 하아, 한숨을 내쉰 비키가 연필을 내려놓고 류제를 떠보았다.
별로 유네를 도와주려는 건 아니다. 렌과 류제가 싸운 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반장으로서 내버려 둘 수 없을 뿐이다.
“언제부터 와서 공부했던 거야? 휴일에 사람도 없는데 부지런하네.”
“아침.”
류제가 짧게 답했다. 정말로 그것만 묻는 것이 아니었는데 정말 그것만 답하자 비키는 기분이 팍 상했다.
류제 신리가 아무리 남 일에 무관심하다고 해도 렌 지미처럼 단순 무식한 애도 아닌데 내가 정말 저게 궁금해서 물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테지. 렌한테 화가 난 건 둘째 치고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는 거야. 이 비키 셀로니아에게 건방지기는.
눈가를 실룩거리는 비키에게 유네가 대신 상세하게 답해 주었다.
“우리도 온 지 얼마 안 됐어. 나는 잘 모르는데 사람이 없는 건 그… 연휴 동안 학교에 무슨 일이 있었다나 봐. 그래서 다들 병원에 있다고…….”
“병원? 단체로 식중독이라도 걸린 거야? 병원은 왜?”
“그… 나도 자세히는 모르고… 학교에 남아있었던 레…렌 군이랑 류제 군이 안대.”
능숙하게 주제를 전환한 유네가 둘 중 한 명이 운이라도 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류제는 답해 주긴커녕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며 공부에만 집중했고, 렌은 그런 류제를 언짢게 흘기다가 깨작깨작 낙서만 해댔다.
“저…저기, 렌 군… 그 이야기 비키 양에게도 해주는 게 좋지 않으려나.”
낙서하던 재경이 잠시 손을 멈췄다. 괸 턱을 들어 앞에 앉은 비키를 슬쩍 흘긴 재경은 낮게 한숨을 쉬고 짧게 설명했다.
“토요일에 학교에 마족이 침입했었어.”
“뭐?!”
상상도 못 한 말에 아연실색한 비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덕분에 공부하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큰 소리를 낸 비키에게로 쏠렸다. 비키는 그런 시선을 의식할 여유도 없이 질문을 몰아붙였다.
“마족? 마족이라고? 학교에 마족이 들어왔단 말이야? 대마족 결계는? 선생님들은? 부상자는? 사망자는……?! 어떻게 된 거야?!”
“비키, 여기 도서관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 학교에 마족이 쳐들어왔다는데!”
류제의 냉정한 말에 비키가 버럭 반박했다. 숨이 찬 그녀가 입을 다물 때까지 아무도 그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공부를 방해받은 학생들은 비키의 반응에 그러려니 흘기며 다시 제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에 마족이 침입했었는데 태평하게 공부나 하다니. 비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기는 급식실에서 좀 떠들기로서니 야만인이니 뭐니 그랬던 주제에 부끄럽게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굴고 난리야. 렌이 툴툴거렸다.
“마족은 격퇴했고, 학생들은 아무도 안 죽었어. 세라 쌤이 그러는데 병원에 있는 사람들도 오늘 내로 학교로 돌아온대.”
“하지만……!”
비키가 말을 이으려다가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심정은 복잡했지만 열을 내봤자 빨리 답해 줄 상황이 아닌 것 같다. 류제와 렌 사이도 뭔가 이상한 것 같고. 도대체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류제는 뭐 때문인지 아까보다 기분이 더 상한 것 같았다. 앞머리로 가린 눈 사이로 재경을 노려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책상을 정리했다.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돼. 난 방에서 공부할래.”
“아, 류…류제 군!”
유네가 뒤늦게 불러 세웠지만 류제는 가방을 챙기고 의자를 밀어 넣었다. 그때 잠시 류제가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류제가 먼저 고개를 돌려 도서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야, 쟤.”
“낸들 아냐. 어제부터 혼자서 저 난리야.”
재경이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저 태도를 보자니 내가 잘못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잖아.
칫, 내가 왜 이런 마음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하여간 뭐든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비키는 그런 재경의 마음도 모르고 평소처럼 재경만 탓했다.
“뭐든 또 바보 같은 렌이 류제한테 무슨 실수라도 한 거겠지. 가서 사과나 해. 고집부리지 말고.”
“나는 아무 잘못 안 했어!”
그제야 재경이 평소처럼 큰 소리로 불평했다. 지금껏 류제에게 분위기가 억눌려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태도에 비키는 류제가 렌에게 일방적으로 화가 났음을 은연중 깨달았다.
“무슨 일인데 그래. 학교에 마족이 침입했다지 않나, 너랑 류제가 싸웠다지 않나. 설명을 해줘야 누구 잘못인지 알 거 아냐.”
“그…그래, 나도 오늘 류제 군 눈치 본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싸웠는지 설명 안 해줬잖아. 둘 다 이러면 나는… 나는……!”
두 사람의 눈이 재경에게로 몰렸다.
울먹거리고 있는 유네는 어제저녁에 일찍 학교로 돌아왔었다. 이유는 그냥 학교에 남아있을 류제나 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봐서다.
며칠 만에 만난 친구들이 반가워서 같이 저녁 급식을 먹으러 가려는데 둘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하지. 유네가 아니었다면 그 둘은 같이 밥을 먹지도 않았을 것 같았다.
오늘은 어떻게든 화해시켜 보겠다고 아침부터 도서관에 끌고 나왔는데 비키가 올 때까지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사이에 낀 유네만 어찌할 바를 몰라서 지금까지 전전긍긍 난리가 났었던 것이다.
비키도 그렇고 유네마저 억울하게 쳐다보자 화를 낸 건 류제인데 독박 쓴 기분이었던 재경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재경은 비키와 유네에게 며칠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대강 설명해 주었다. 재경이 묘사한 마족의 침입은 다음과 같았다.
그러니까 저번 주 토요일, 학교에 마족이 갑자기 침입했는데 어쩌다 보니 류제와 자신이 마족과 대치하게 되었고 마족이 치사하게 이상한 기계를 써서 류제와 자신이 우위에서 밀리게 되었다. 마침 제때 도착한 왕녀와 그 군대의 도움으로 마족을 퇴치했으며 학교에 갇혀 인자에 감염되었던 학생들은 전부 병원으로 호송되어 무사히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를 류제가 들었다면 중간에 있었던 일을 생략하지 말라고 화를 냈을 거다.
마족의 두려움을 알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한 내용이 있을 것 같던 비키는 썩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는지 부족함을 느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치는데 네가 마족과 싸운 데다 상처 하나 없다고? 말도 안 돼.”
“아앙? 뭐시야?”
나는 뭐 무사하면 안 되냐? 재경이 입술을 까뒤집고 버럭 짜증을 냈다. 부담스럽게 눈이 부라려진 얼굴이 들이밀자 비키가 저리 가라고 손으로 밀었다.
비키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수상한 부분을 콕 짚었다고 볼 수 있었다.
“숨기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봐.”
“바른대로 말하고 뭐고…….”
무사했던 건 아니었지만 무사한 걸로 치면 되지 꼭 트집을 잡고 난리야. 약점을 들키기 싫은 양아치 같은 표정을 지었던 재경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나도 다치기는 했어. 따지고 보면 류제도 다쳤고. 겁나 강한 마족이라서 어쩔 수 없었지. 근데 뭐 지금은 무사하잖아.”
“네 이야기만 들어보면 왜 류제가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오히려 렌 지미 주제에 마족과 대치해서 살아남은 것에 칭찬해 줘야 할 수준인걸. 정말로 그게 다야?”
“마…맞아. 중간에 류제 군이 화난 이유가 분명 있을 거야. 뭐 기억나는 거 없어?”
“우이쒸, 말 다 했냐? 내 주제에 살아남은 걸 칭찬한다고? 흥, 이유는 무슨. 내가 다쳐서 좀 치료받다가 어제 깨어났었는데 류제가 옆에 있더라고. 이런저런 이야기 잘 하다가 갑자기 혼자서 화를 내잖아. 그때부터 저 상태야.”
“류제 군이 이야기를 하다가 화를 냈다고?”
“어제 일어났다고? 마족의 침입은 토요일이라며.”
말실수를 한 재경이 아뿔싸 입을 막았다. 이놈의 싼 입이 문제다.
류제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도 저 둘이 비슷한 이유로 화를 낼 것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재경은 사흘간 의식불명이었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근데 바보같이 내 입으로 말해서 들킬 줄이야.
비키는 일족이 전멸한 날을 떠올렸다. 과연 그 말만 쏙 빼놓고 말했단 말이지?
“똑바로 말해 봐. 어디를 어떻게 다쳤었는데?”
“오버하기는. 그냥 좀 스쳤어.”
“그러니까 어디를?!”
“…배를 좀.”
일순 스치는 그 끔찍한 고통에 재경이 다쳤던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배에 아이 손바닥만 한 구멍이 나서 피가 줄줄 흘렀었다.
휴지가 먹물을 빨아들이듯 손발이 까맣게 물들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기분. 생각만 해도 싫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비키나 유네의 표정이 걱정스레 바뀌는 것이 더 싫었다. 별것 아닌 양 거드름을 피운 재경이 뭐가 문제냐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래도 지금은 멀쩡하잖아. 그럼 됐지.”
“그럼 너 일, 월, 화……. 사흘간 의식불명이었다는 거야?”
“몰라.”
“그…그럼 류제 군은? 류제 군도 다쳤다며.”
겁에 질려 손을 모은 유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재경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했다. 미연시 주인공이 의식불명이나 되겠냐? 하물며 마왕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류제가.
“금방 치유했겠지, ‘강화’ 능력으로. 일단 내 말 먼저 들어봐 봐. 내가 다쳐서 세라 쌤한테 고쳐진 거나 걔가 다쳐서 스스로 치료한 거나 어쨌건 결과는 똑같잖아. 근데 왜 걔는 내가 다친 것만 가지고 화를 내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 아니야. 안 그래?”
“안 그래? 는 무슨. 네가 이런 헛소리나 하니까 류제가 화를 내지.”
“왜 헛소리인데?”
“너는 뒤도 없이 행동하잖아. 그때 미나를 구한답시고 뛰어든 것도 있고. 류제야 믿는 구석이 있지만 넌 아니니까.”
“나도 제대로 믿는 구석 제대로 있거든? 글구 내가 뭐 원해서 다쳤냐? 나는 뭐 경비병 아저씨들 살해당하고 다른 애들 다친 거 마음에 안 두고 있었던 줄 알아? 마족이랑 대치할 때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데! 그런데 류제는 상처받을 사람은 생각 안 하느니 뭐니 그런 형편 좋은 소리만 늘어놓잖아!”
“나야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나한테 따지지 마, 바보. 예컨대 류제는 네 부상 문제로 화가 났다는 거네.”
“나도 몰라! 그런 거겠지!”
친구와 싸운다 함은 물리적으로 치고받는 것밖에 생각 안 했던 재경은 이런 쓸데없는 감정싸움이 싫증 났다.
말싸움은 한 번으로 족하지 또 냉전이야? 내가 왜 내가 다친 것 때문에 류제랑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건데? 이해가 안 가!
“류제가 화내기 전에 네가 류제한테 뭐라고 말했었는데?”
“아까 말해 줬잖아. 이제 멀쩡하다고. 쓸데없이 진지 빨지 말라고 했지.”
“우와, 너 진짜 사람 마음 모르는구나.”
걱정해 준 사람한테 저런 심한 말을 했었다니. 렌 저 녀석 가끔 보면 굉장히 냉정하다니까. 경악한 비키가 입을 막았다. 그러자 재경이 불만스레 볼을 부풀었다.
“뭐어야, 비키 너도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러니까 넌 다쳐서 사흘 만에 일어난 주제에 널 걱정하는 류제한테 ‘진지 빨지 말라’고 말하고 세라 선생님이 없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처랑 류제가 제 능력으로 치료한 걸 비교하면서 오히려 큰 소리를 냈다는 거야?”
“아냐, 류제 앞에서는 비교 같은 건 안 했어. 그리고 솔직히 마족을 물리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는데 그걸 내 탓으로 몰아가면서 괜히 나를…….”
“괜히?”
비키가 반문했다. 아차. 데자뷔처럼 비키가 류제와 똑같이 반문하자 재경이 뜨끔했다.
왠지 비키에게서 류제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올 것 같았다. 비키와도 싸우게 될까 봐 재경이 이번에는 자진해서 입을 다물고 슬쩍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냐?”
“하아, 류제도 이런 애와 친구라니 진짜 불쌍하네.”
“그러니까 왜? 뭐가 잘못됐는데?”
상황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들은 대로만 따지자면 비키는 사건의 경중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렌은 다쳐도 세라 쌤이 치료해 주면 그만이라는 태도고, 류제는 애초부터 다칠만한 행동을 왜 하냐는 식인 거 같은데. 하기야 렌은 저번에 2 대 1 모의 대결 했을 때 화상을 입었던 걸 보면 치료 가능한 상처 하나둘쯤은 그냥 넘어가는 경향이 짙으니까. 거기에 류제가 화 난 건가?
근데 따지고 보면 렌의 말도 틀린 건 아니란 말야. 렌이 마족과 대치했을 정도라면 학교에 인력이 그만큼 부족했다는 뜻이고 렌 지미는 마족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게 용하다고 칭찬해 줘야 하는 수준이니.
“흠. 내 생각엔 둘 사이에 저울질이 잘못된 거 같아.”
저울? 재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를 사귀는 데 저울질이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값어치 같은 걸 매기나?
비키는 자기도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성향인지라 렌에게 무슨 조언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네가 류제를 생각하는 정도와 류제가 너를 생각하는 정도의 균형이 틀어진 같다는 소리야.”
“균형?”
균형이 틀어졌다고? 뭐야 그게. 그러니까, 류제가 나를 생각하는 정도하고 내가 류제를 생각하는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야?
내가 얼마나 류제를 신경 쓰고 있는데. 류제가 날 들들 볶는 걸 보면 류제도 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 거란 말이야. 그럼 내가 류제를 덜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아니면 반대로 류제가 나를 무시해서…….
“잘 모르겠어. 머리 아파.”
“때 봐서 류제한테 사과해. 반 분위기 흐리지 말고.”
“진짜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거냐? 그런 거야?”
“레…렌 군……!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 나 전혀 몰랐어. 렌 군이 지금 무사해서 그런가보다 넘어갔는데 렌 군이 그렇게 심하게 다쳤었다니. 나…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집에서 과자 먹고 있었는데에에.”
“아… 너…넌 왜 울어?! 뭐, 다 지나간 일 가지고 왜 이래?”
비키와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유네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어버렸다.
렌 지미는 여기서도 왜 유네가 우는지 몰라 당황해서 쩔쩔맸다. 아, 여기도 균형이 무너진 관계구나. 비키는 쯧, 혀를 찼다. 그게 아니라면 저 렌 지미의 사고방식 자체가 평범한 사람이 이해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있을지도 몰랐다.
바보. 냉정한 척하려고 했던 비키도 남몰래 입을 앙다물었다. 마족도 그렇고 저 바보들도 그렇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 * *
나랑 류제의 관계의 균형이 틀어져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를 알 수 없다. 교실 책상에 턱을 괸 재경이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연휴가 끝났다. 학생들이 모두 학교로 돌아왔다.
마족과의 사투의 목격자는 없지만 ‘역병 마법’에 당했던 자가 적지는 않았던 터라 학교 교실에서는 연휴에 있었던 흉흉한 일에 대한 소문이 슬금슬금 나돌기 시작했다. 누가 다쳤다니, 누가 죽었다니. 이상한 괴담이 살에 살을 붙여서 학교 분위기를 해쳤다.
어차피 공고가 붙은 후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들 소문이고, 그것보다는 곧 중간고사가 시작하는데 아직까지 류제랑 한마디도 못 해본 것이 재경에게 더 큰 문제였다.
사내자식이 속 좁게 쩨쩨하게 굴긴. 재경은 어서 류제랑 화해하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했다.
이제 중간고사가 오면 세라 선생님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대로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거야? 류제, 너는 나랑 이대로 지내도 상관없다는 거냐?
생각해 보니 저번 3월 비키 호감도 이벤트 때 싸웠을 때는 류제가 사과할 타이밍을 잡아줬었지. 덕분에 다음 날 바로 화해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류제가 날 피하니까 너무 답답했다.
그럼 언제까지고 이런 상태인가? 싫은데. 재경이 앞자리에서 자습 중인 류제의 뒷모습을 흘겼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지 사과를 하든가 말든가 하지. 비키는 저울이니 균형이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나 해대고. 유네는 옆에서 눈치나 보고 있고. 바보같이 나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에이씨, 귀찮아. 뭐든 좋으니까 사과하자. 그냥 사과해 버리는 거야.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근데 류제는 계속 내 말 무시하고 있는걸. 사과를 한다고 해도 만약 류제가 사과를 안 받아준다면 어쩌지.
“자, 제군들 잠시 집중해 주세요.”
아침 수업 시간 전, 조례 시간에 교사 회의가 끝나고 반으로 돌아온 세라가 교탁을 쳐서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휴일은 잘 지내셨는지요?”
세라의 상투적인 인사에도 학생들은 웅얼웅얼 대답하기를 저어했다. 휴일에 마족이 학교에 침입했었다는 소문 때문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시험이 늦춰진다 뭐다 소리가 있던데 학생들은 그것보다는 사건 경위에 대한 진실이 알고 싶었다.
세라는 학생들의 반응이 당연하다 여기며 낮게 한숨지었다. 그녀가 잠시 창가 뒤쪽에 앉은 렌과 류제, 그 옆줄에 있는 미나를 살폈다.
“휴일 동안 학교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건 제군들 모두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 거봐. 내 말 맞지?”
“역시 사실이었나 봐.”
“그럼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학교는? 시험은?”
“너무 무서워. 또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
“학교에 마족이 쳐들어오다니 무서울 만도 하지요. 하지만 제군들, 그건 반대로 등급1의 최상의 마족을 학교에서 방어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멋지게 마족을 방어해 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마족과… 아니, 그러니 걱정…….”
회의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공지해야 할 내용이 정해져 내려왔지만 세라는 차마 ‘제군들은 마족과 싸우는 자가 될 이들이니 마족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공고를 내릴 수 없었다. 언제든 죽음을 각오하라는 건 어린학생들에게 너무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마시고 중간고사 준비에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족이 다시 쳐들어오면 선생님들이 당신들을 지킬 테니 염려치 마세요. 자세한 공지는 1학년 게시판에 붙을 내용을 참고해 주세요. 거기에 쓰인 내용이지만 특히 마족 침입에 관련해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1학년들도 곧 있을 소방 훈련을 하게 되니 거기서 배울 내용을 꼭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내뱉는 세라는 씁쓸했다. 자신의 반에는 세 명이나 마족과의 싸움에 말려들었고 그중 한 명은 크게 다치기까지 했다. 지금은 무사해서 다행이지만 혹여 큰일이라도 났으면 세라는 큰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자아, 어두운 이야기는 당신들에게 걱정만 안겨 주지요.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시험공부는 열심히 했나요?”
“선생님, 그럼 중간고사는 미뤄지는 게 아닌가요?”
“중간고사는 예정했던 대로 치러집니다.”
몇몇 철없는 학생들이 싫다며 아양을 떨었다. 학교에 마족이 침입했었는데 시험은 그대로 치른다니. 내심 시험이 취소되기를 바랐던 그들은 이럴 수 없다고 칭얼거렸다. 우리가 무슨 공부하는 기계냐?! 라고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공지했던 대로 제가 맡은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은 중간시험으로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준비를 하면서 열심히 연습하셨으리라 믿어도 되겠죠?”
“선생니이임~ 모의 대전은 일주일 뒤로 미뤄주시면 안 돼요?”
“안 돼요!”
허리에 손을 올린 세라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얼굴은 웃는 낯이었지만 학생들의 칭얼거림이 과도했는지 이마에 살짝 핏줄이 불거졌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너무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겠지. 잠시 고민하던 세라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손바닥을 짝 마주쳤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다른 반 선생님들도 공약을 걸었던데 우리 반도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겠죠. 한 과목이라도 좋으니 만점을 받아서 시험지를 가지고 온다면 선생님이 재미있는 선물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때요, 의욕이 솟나요?”
“와아! 정말요? 뭐 주실 건데요?”
“그건 비밀입니다. 미리 알면 재미가 없잖아요. 다른 이야기가 없다면 조례는 이대로 끝내겠습니다. 그럼 이상. 제군들 모두 힘내시기 바랍니다.”
가식적으로 웃은 세라는 학생들의 인사를 받고 교실을 나섰다. 제립학교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한 이야기는 묻어질 것이다. 마족을 해치운 공치사는 뒤로 하고 지금은 학생들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억누르는 게 우선이었다.
마족이 침범하고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학교생활은 계속된다. 불만도, 위기의식도, 두려움도 꾹꾹 눌러 담아 봉인한 채로. 분명 이런 건 정상이 아냐.
잠시 문 앞에 멈춰 섰던 세라가 다시 또각또각 수업이 있는 교실로 향했다.
* * *
전교생이 달아올랐던 체육대회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올수록 학교는 정숙으로 가라앉았다.
히로인 세라 밀로니의 호감도 이벤트의 전조 말고는 따분한 수업과 시험을 위한 자습이 반복되었다.
재경은 중간고사 전까지는 류제와 화해하고 싶어서 우물우물 곁에서 머뭇거렸으나 류제는 그런 재경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재경은 류제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고 말았다.
체육대회가 지나고부터 류제가 영 날이 서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같은 반 학생들이 반대로 재경에게 화살을 돌렸다. 마치 모두가 재경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였다. 억울한 재경은 자기도 이제 모르겠다며 사과고 뭐고 빼액 소리를 질렀다.
니냐롯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렌 지미와 심상찮은 분위기를 내는 류제 신리를 멀리서 흘겼다.
그녀는 나름대로 이 사건에 관해 렌 지미에게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어떻게 마족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았나, 상처는 어떤가, 류제 신리와는 왜 사이가 틀어진 건가.
아직은 그녀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닌 듯하다. 여기는 듣는 귀가 너무 많다. 고민하는 저들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를 안겨 주면 곤란하겠지. 빨리 사이를 회복했으면 좋겠군.
고개를 돌린 니냐롯트는 친위대를 끌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른 친구들과 이유는 달라도 류제와 재경의 싸움으로 미나도 전전긍긍하는 중이었다. 렌 지미를 이용해 류제 신리를 마왕으로 부활시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계획을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렌 지미를 괴롭히려고 했던 당위성을 잃어버리게 될 위기에 처한 미나도 다른 이들처럼 류제와 렌의 사이가 다시 회복하기를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짜증 나지만 어쩔 수 없다.
기간트리카 수업 중간시험인 기간트리카 모의 대전을 치르던 중 스리슬쩍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던 미나가 시험을 치르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류제에게 다가갔다.
“친구들이 렌하고 싸웠다고 하던데 아직도 화해 안 한 거야?”
“아무래도 좋잖아, 그런 건. 남의 교우 관계에 왜 다들 오지랖일까?”
모의 대전을 구경 중이었던 류제가 뚱하게 앉아서 턱을 괴었다. 시선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다른 친구들과 깔깔거리면서 놀고 있는 렌을 향해 있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잘도 웃으면서 장난치는구나. 나는 죽을 거 같은데.
“왜 싸운 거야?”
“그게 왜 궁금한데?”
“그야…….”
널 마왕으로 타락시키기 위해서는 렌 지미가 필요한데 지금 관계가 소원해지면 렌 지미를 괴롭힐 명분이 없잖아.
…라고 말하지 못한 미나가 사람 좋은 표정을 했다. 머쓱함을 참지 못하고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긴 그녀는 청초하면서도 곤란한 듯이 웃었다. 남자라면 이걸 보고 껌벅 죽었다.
“친구가 갑자기 관계가 소원해졌으니 당연 궁금하지. 둘이 사이좋았잖아. 그런 일이 있었으니 반 친구로서 걱정도 되고.”
과연 나랑 렌은 사이가 좋았던 걸까. 류제는 말다툼을 했을 때 느껴졌던 다소의 거리감이 마음에 서운했다.
나는 렌을 이만큼이나 생각하고 있는데 렌이 스스로의 가치를 폄하하며 말하는 건 정말이지 불쾌했다. 그것 말고도 생각할 것투성이라 류제는 골치가 아파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와, 렌, 기간트리카 컨트롤 많이 늘었다!”
“여전히 공중전은 서툴지만… 잘하는데? 언제 저만큼 는 거야?”
기간트리카 대결장 근처를 서성이며 구경하던 학생들이 재경의 모의 대전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귀가 쫑긋해진 류제가 아닌 척 눈동자를 흘기며 다른 학생과 대전을 치르는 렌을 관찰했다. 확실히 세세한 컨트롤이나 움직임이 좋아졌다. 그때 마족과의 전투에서 겪었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걸까.
“이대로라면 렌의 성적은 중위권 정도려나. 나도 분발해야겠는걸.”
“분명 꼴찌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야.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보다 보면 노력파라니까.”
그렇다고 해서 상대도 안 되는 마족에게 덤벼들다가 죽을 뻔한 주제에 고치면 장땡이라는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라고. 류제가 일그러진 개구리 같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물론 마족과의 대치 때 렌이 정체불명의 어빌리티를 발현해 공격 패턴을 파악해 준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렌이 없었더라면 좀 더 집중해서 마족과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렌은 다치지 않았겠지. 나도 이상한 힘에 잡아먹히지 않았을 거고. 그건 그냥 내 욕심일까?
“다음―, 미나 플로리아. 유네 나르타.”
“벌써 내 차례네. 류제, 내가 참견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지만 친구로서 하는 말이야.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빨리 렌하고 화해해. 영영 그렇게 지낼 건 아니지?”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걱정 말고 가서 시험이나 쳐.”
“그래, 그랬으면 좋겠네.”
살갑게 웃은 미나가 옆자리를 비켰다.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리니 청초한 얼굴이 심보 못되게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제는 여전히 꿍해져서는 기간트리카 대결장에서 나와 친구들하고 하이 파이브를 하는 렌을 노려보았다.
안다. 나도 알아. 렌이 전보다는 많이 강해졌다는 거. 나와 함께 마족과 대적해서 큰일을 해냈다는 거. 근데 내가 싫은 걸 어떻게 해.
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건 내 욕심인가? 내가 렌의 앞길을 막고 있는 건가? 하지만 역시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다친 렌도, 상처를 우습게 보는 모습도. 그런 게 정상은 아니잖아.
이상 징후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류제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번뜩 들었다. 바로 그때 재경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 우앗!”
자기 차례의 모의 대전이 끝났지만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지 않고 비키와 모의 대전에서 있었던 공격의 방어 방법을 시연하던 재경이 순식간에 옆으로 날아갔다. 부스터 급발진이다.
재경이 부스터를 끄려고 노력했지만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전에 어딘가에 부딪힐 것만 같았다.
“렌!”
비키가 도와주기 위해 재경을 황급히 쫓아갔다. 하지만 그 전에 재경의 기간트리카 장갑이 거짓말처럼 해제되었다.
언제 온 건지 재경의 왼쪽 손목을 붙잡은 류제가 슬렉터를 조종해 외부적으로 기간트리카 장갑을 강제 해제했다. 급발진해서 날아가던 재경은 류제의 품에 감싸져 안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다.
재경은 자신을 받쳐주는 넓은 품에 일순 안도했다. 우아, 살았다. 죽는 줄 알았네!
“…류제?”
도대체 누가 나서서 도와줬나 봤더니 다름 아닌 류제다. 재경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류제는 그대로 양손을 놓고 재경을 피해 자리를 떠났다.
뒤늦게 달려온 비키가 멍때리고 있는 재경을 불렀다.
“뭐야, 왜 혼자서 시범을 보이다 날아가고 난리야?”
“내 잘못이냐?! 부스터가 갑자기 이상해진 게 잘못이지!”
“슬렉터 망가진 거 아냐? 가서 교환해.”
“그래야겠다.”
마족이랑 싸우면서 망가졌었나. 머리를 긁적거리던 재경이 류제가 붙잡았던 손목을 살폈다. 슬렉터가 정상적으로 종료되어 있었다.
또 류제한테 도움을 받았다. 근데 우리 지금 냉전 중 아니던가?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랬다가 저랬다가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류제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재경이 둘 중 하나만 해달라고 툴툴거렸다. 비키가 멀리 제 할 일을 하러 사라지는 류제를 향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도 류제랑 화해 안 했어?”
“내 잘못 아니다. 류제가 나랑 말을 안 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너희 둘 진짜 답답하게도 군다. 지금 널 도와준 걸 보면 류제도 화난 것 같진 않은데. 좀 더 몰아붙여 보지 그래?”
“몰아붙이긴 무슨.”
원래 둘이 죽고 못 사는 정도로 붙어 다녔으니 지금쯤 되면 적당히 화해할 줄 알았는데.
류제도 어지간하면 용서해 줄 줄 알고 내버려 뒀더니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렌은 바보라서 화를 내는 것보다는 타이르는 편이 더 잘 먹힐 텐데.
“그럼 이대로 현상 유지할 거야?”
“나도 몰라. 류제가 그러고 싶다면 그런 거겠지, 뭐.”
“류제 말고 너 말이야, 너.”
나? 재경이 별소리를 다 듣는다며 갸웃거렸다.
미연시의 주인공은 류제고 자신은 애초부터 주인공과 사이가 나쁜 삼류 악역이다. 화해하고 뭐고 나한테 선택권이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이대로 류제랑 사이 안 좋아지고 싶은 거냐고.”
“…당연히 아니지.”
재경이 이젠 자기도 모르겠다며 근처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렌도 영 아무 생각 없는 건 아닌 것 같자 좀 도와줄까 싶었던 비키도 조금 떨어진 옆에 다리를 오므리고 앉았다.
생각을 하느라 침묵을 유지하던 재경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류제는 왜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걸까.”
“네가 헛소리를 해서 그런 거 아냐?”
“그래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재경은 자신이 분명 전투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고, 게임 오버도 빗나가게 했으며, 그 위대한 계획 중에 다칠 것도 예상하고 혈액 응고제도 가지고 와서 세라 선생님이 등장할 때까지 체력을 보존해 목숨을 지켜냈다.
중간 보스전을 무사히 끝낸 건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해 줘야 하는 일인데 류제는 화를 냈다.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면서.
뭐긴 뭐야, 친구잖아.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게임 오버를 막아준 거지. 친구 아니었어도 내가 죽기 싫으니 도와줬을 것 같긴 하지만……. 몰라, 그거랑 그거랑은 달라.
비키는 아직도 정답을 도출해 내지 못한 렌이 답답해서 혀를 찼다. 감정이입을 한 듯 말투가 거셌다.
“바보 아냐? 그 정도는 조금만 생각해도 바로 나오잖아.”
“모르겠는 걸 어떻게 해!”
“왜 몰라! 너 친구도 많으면서 진짜 답답하다!”
신분 차이도 있고, 아직도 살갑게 구는 것에 서툰 비키는 자신에 비해 친구를 많이 만든 재경을 조금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런 자신도 알겠는 걸 저 바보가 모르다니 나도 좀 열받네.
비키의 말에 공연히 몸을 떤 재경은 딴 곳을 쳐다보았다. 복잡한 얼굴로 입을 앙다물었던 그는 비키처럼 다리를 모아 그 사이에 얼굴을 감췄다.
“나도… 친구가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잘 모르는 걸 어떻게 해.”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를 못한 비키가 되묻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재경의 귓바퀴가 새빨개졌다. 아무도 눈치 못 챈다면 그냥 묻어갈 생각이었는데 이런 데에서 들통이 날 줄이야. 역시 티가 나는 건가?
“그러니까… 나도 학교 들어오기 전까지는 치…친구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른다, 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재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들짝 놀란 비키는 빨간 말총머리가 안테나처럼 삐죽 솟는 기분이었다.
재경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멀뚱멀뚱 비키와 눈이 마주친 재경은 어영부영 고개를 돌려 무릎이 닳아져라 쳐다보았다.
“…쳐다보지 마. 비웃지 마.”
“안 보면 대화를 어떻게 해? 그리고 안 웃었어. 좀 웃기기는 해도.”
“그게 비웃은 거지.”
“달라. 실천으로 옮기지는 않았잖아.”
“아니야, 같아.”
“나 참, 말장난은 여기까지 해. 그러니까 너도 친구가 없어봐서 류제가 왜 네 말에 화가 난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거야?”
재경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앞에 기간트리카 대결장에서 미나와 유네가 모의 대전을 치르고 있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다.
운동장에 바람이 불었다. 모래바람과 함께 위에서 나뭇잎이 박수 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바로 저번 주에 마족이 쳐들어왔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학교는 평화로웠다.
비키는 하여튼 렌 지미는 독특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지지부진 끌다니 참 렌 지미답다.
“너한텐 소중한 사람도 없었어? 가족이라든가, 형제라든가 있었을 거 아냐.”
“있었지.”
“그럼 그 사람이 류제라고 생각을 해봐. 그 사람이 다치고 의식불명이 되었다면 싫잖아.”
“당연히 싫지!”
할머니를 떠올린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소리 하고 있어. 생각하기도 싫은데. 재경이 미쳤냐는 듯이 쳐다보자 비키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다친 걸 가지곤 시큰둥하게 굴었으면서 왜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곧 비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재경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 두 개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데.”
“류제하고 네 가족이?”
“내가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는 거하고 류제가 날 생각하는 거하고 어떻게 같냔 말이야. 말이 안 되잖아.”
“뭐… 그렇게 따지자니 좀 오버기는 하네. 근데 류제가 저 정도로 화가 났다는 건 류제가 널 그만큼 생각한다는 거라고 생각해.”
“할머니처럼 잔소리는 했다만.”
재경이 자신에게 화를 내던 류제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잘 기억 못 하는 재경은 류제가 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할머니도 내가 아프거나 다치면 잔소리 엄청 하고 남몰래 울었었지. 그것 때문에라도 더 아무렇지 않은 척했었는데.
원래 세계에서는 그의 옆에 있어준 사람이 고작해야 할머니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가에 대한 생각이 재경에게는 부족했다.
그러니 화가 난 류제가 몰아붙이는 것도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그 정도로 걱정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너무 이상스러웠다.
“그게 어렵다면 반대로 류제가 너처럼 다쳤다고 생각해 봐.”
“류제는 ‘강화’ 어빌리티로 쉽게 치유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게 안 되었을 때를 가정하면 되지.”
“하지만 류제는…….”
류제는 주인공이라서 그러지도 않을 텐데. 재경이 잘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류제가 타락 루트로 갔을 때를 가정해야 하나. 그럼 좀 싫을 것 같기도 하다. 배드 엔딩이잖아.
배드 엔딩. 나는 중간 보스전에서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어. 렌 지미의 삼류 악행은 마지막 챕터까지 이어지니까 말이야.
스토리의 큰 줄기를 일정 부분 차지하고 있는 렌 지미를 이 세계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거든. 근데 류제는 그걸 몰랐고 나는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긴 게 아닐까? 류제는 내가 믿는 구석이 세라 쌤이라고만 생각하는 거지.
난 이 세계가 좋아. 친구들도 많이 생겼고. 여기 있다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잖아. 내가 중간 보스전에 개입한 건 그저 이 세계가 배드 엔딩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인데.
“뭐야, 무슨 말을 해봐.”
“지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중이니까 잠자코 있어봐.”
“…흥, 뭐래. 혼자서 잘해 봐라.”
비키는 이제 더 볼일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손으로 방치된 라인기를 가리켰다.
“모의 대전 시험 끝나고 저것 좀 비품 창고에 가져다 놔줘. 선생님께 호출당해서 시간 없거든.”
“뭐어? 내가 왜!”
“왜긴 왜야.”
비키가 당연하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얹고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상담해 줬잖아.”
왜 저래? 재경은 비키의 안 하던 행동에 불길함을 느끼고 오한에 떨었다. 재경이 멀어지는 비키에게 뒤늦게 싫다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귀찮은 일 떠넘기지 말라고!”
그렇게 말은 했어도 튕기기 장인인 재경은 비키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어있었다. 재경은 투덜거리면서도 비키가 부탁했던 라인기를 질질 끌고 운동장 구석에 있던 비품 창고로 향했다.
다른 애들은 치사하게 모의 대전 시험 마치자마자 중간고사 공부하겠다고 돌아갔다. 재경은 비키가 쩨쩨한 구석이 있다고 불만을 늘어놓으며 비품 창고 문을 열었다.
“귀찮게~! 내가 왜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비키, 그 짜식. 사람 부려먹는 데 아주 도사라니까.”
입을 조잘거린 재경이 라인기를 체육 창고 안쪽 줄지어 비치된 같은 라인기 쪽에 밀어 넣어 바르게 세워놓았다. 음, 열을 맞춰 줄지어 서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때, 부스럭부스럭 비품 창고 안쪽 공이 놓여 있는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재경의 눈이 땡그래졌다. 으아악! 귀신이라면 질색이야!
“뭐…뭐야?!”
사람인지 귀신인지 서둘러서 정체를 확인하니 거기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류제였다.
류제는 비키의 부탁대로 체육대회 때 썼던 공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렌이 들어와서 놀란 건 류제도 매한가지였는지 표정에서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서로 얼굴을 알아보자 창고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어색해……! 원래 류제랑 이렇게 어색한 사이였나? 재경이 어줍게 류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약속된 것이라는 듯 뒤에서 비품 창고 문이 쾅, 닫혔다. 바람 때문에 닫힌 것 같다.
아직은 류제와 단둘이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재경이 후다닥 창고 밖으로 도망가려다가 문이 열리지 않자 당황해서 공회전하는 손잡이를 억지로 밀었다.
“…어?! 이게 왜 갑자기……!”
싫어! 이 어색한 공기 속에 나랑 류제만 남겨 두지 말아줘! 난 지금 류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이렇게 난데없다니 마음의 준비는 언제 해. 세상에 이런 우연이 어디에 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류제는 창고 밖에서 들려오는 두 개의 발소리와 시시덕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비품 창고의 문을 닫은 사람이 비키와 유네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류제가 쩝, 입맛을 다셨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저 둘이 합심해서 이런 술수를 쓸 정도면 주변에서 여간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닌 모양이네. 졌다, 졌어.
“하아.”
어차피 오늘 중으로 내가 먼저 사과하려고 했었고. 괜찮겠지. 류제가 비품 창고의 문을 열려고 하는 렌에게로 다가왔다.
류제가 접근할수록 재경은 야생동물이 덮쳐 오는 것처럼 사색이 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어… 저… 그……. 왜…왜?”
긴장했는지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다. 류제는 바보처럼 너무 질질 끌긴 했다며 반성했다. 렌은 사과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니까. 옆에서 전전긍긍하면서 내 눈치를 보며 알짱거렸던 건 좋았지만 나도 그만큼 화가 났던 데다 여러모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고. 미안하게 됐어.
“잠깐 이야기 좀 해.”
“이…이야기?!”
주먹으로 비품 창고 문을 쳐 앞길을 막은 류제가 낮게 읊조렸다. 화해를 하려는 게 아니라 잘못하면 한 대 칠 기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류제가 저렇게 나오니 재경이 다른 사람 대하듯 버릇없이 굴지도 못하고 뻘쭘하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 이…이야기가 뭔데?”
“여기서 이런 말 하긴 그래도 역시 그때 내가 좀 심했던 거 같아서.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미안해.”
“뭐어어?!”
이렇게 갑자기?! 그게 사과하고 싶었던 사람의 태도였냐? 사람이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 일쑤지, 괜히 노려보기나 하지. 지금도 봐. 난 완전 2차전 하자는 건 줄 알았다니까? 전―혀 사과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지금껏 쌓인 것이 많았는지 재경은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져서 김이 날 것 같은 얼굴로 류제를 노려보았다. 류제는 짧게 웃으며 미안함을 표현하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재경은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도리어 화를 내었다.
“이제 와서 뭐야! 사람 잔뜩 무시했던 주제에! 옆에서 애들은 내가 잘못했다고 난리고, 난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고. 아니, 오히려 잘한 거 아니냐고 말해 주고 싶고!”
“아… 그러니까, 나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어.”
“생각은 무슨 생각!”
“그냥 이러저러한……. 싸운 것도 있지만 그때 그 마족이 했던 말도 신경 쓰여서.”
류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짧은 감탄사를 내지른 재경이 잊고 있던 어떤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 마족이 류제에게 정체를 누설해 줬었지. 나도 그때 목격하는 바람에 어찌저찌 류제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로 되어있고.
일어나자마자 류제랑 다투는 바람에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류제는 나랑 싸운 거 말고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나 보다.
“한 달 전부터 몸 상태가 이상해져서… 거기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 마족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서 말이야. 혹시… 들었어?”
자신이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마족에게서 들었냐는 물음에 재경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는데 네가 날 긍정해 줘서 기뻤어. 정말… 그… 뭐랄까, 네가 진짜 날 생각해 줬다는 게 느껴져서. 그래서 네가 상처 때문에 기절했을 때 내 무력감에 스스로한테 화가 났었어.”
“…그래서? 나한테 화풀이를 했겠다?”
“물론 네가 네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점에 열받은 건 사실이야. 너는 전부터 계속 그랬으니까. 하지만 역시… 내 욕심만 부리는 바람에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싶어서 후회했어. 네 공로를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었어.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그럼 내가 없는 게 나았다니 뭐니 그런 말은 철회하는 거냐?”
“그야……, 솔직히 내 욕심이라도……. 하아, 알았어. 철회할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렌이 위험한 곳에 한 발짝이라도 들이밀지 않았으면 하는 게 류제의 바람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위험에 처한다니 차라리 대신해주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류제가 결국 말하고 말았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번만큼은 공로를 치하해 줄까. 함부로 칭찬해 줬다가 더한 불나방이 되어 돌아오면 어쩌지.
“그래도 놀랐어.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
“능력?”
“마족의 공격을 읽고 핵의 위치를 파악한 거 말야.”
“아아. 그건 그냥 우연이야, 우연. 다른 사람들한테는 쓸데없이 말하지 마.”
“우연이라고?”
잘난 척 뽐낼 줄 알았더니 겸손을 떤다. 어쩐지 같은 반 친구들에게도 아무 말 없더니 류제가 의외라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손을 내저어 둘러댄 재경이 사실을 숨겼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말은 이렇게 해도 난 아직도 내 어빌리티가 뭔지 모르겠는걸.”
“하지만 그때 분명 네가 마족의 공격을 읽어서 알려 줬었잖아. 그게 네 어빌리티 아냐?”
“그때는… 음… 아, 그래. 머릿속에 파악! 하고 스쳤다고 치자. 지금은 그런 거 전혀 없다고.”
패턴 같은 건 중간 보스전에서만 쓸 수 있는 거잖아. 어빌리티일 리가 없지. 재경이 뒷말을 삼켰다. 류제는 렌의 단어 선택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도 그게 뭔가 네 어빌리티의 힌트가 되지 않을까?”
“그래?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이건 어빌리티가 아니라 그냥 몇 날 며칠 중간 보스전 깬다고 공부는 안 하고 쓰잘데기없는 것만 달달 외운다며 할머니한테 등짝을 맞아가며 패턴을 외웠고, 그걸 혹시 몰라 빙의한 바로 그날 공책에 옮겨 적었던 덕분에 깰 수 있었던 거지만.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재경은 그냥 류제가 저대로 오해하게 내버려 뒀다. 류제는 차라리 그게 어빌리티라면 안심하겠다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럼 그걸 잘 갈고 닦으면 웬만한 공격은 다 막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내 어빌리티가 맞다면 그러겠지.?”
절대 아니겠지만. 재경은 단언할 수 있었다.
“뭐든 마족은 그냥 네가 해치운 걸로 해둬. 난 그냥 근처에 있다가 얽힌 걸로 하고. 알았지”
“말 안 할 거야? 세라 선생님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차피 믿지도 않을 것 같고 뭐.”
그보다 이 창고 문, 바람에 닫힌 줄 알았는데 왜 안 열리는지 모르겠다.
재경이 이런 곳에 짱박혀 있기 싫다고 열어달라고 류제를 보챘다. 류제가 눈을 끔벅거리다가 그럴 수는 없다고 답했다.
“왜?!”
“학교 비품이잖아. 망가뜨리면 안 돼.”
고지식하긴. 재경은 기가 막혔다.
류제는 저 붕어 입 표정이 정말 반갑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재경도 류제의 웃는 모습이 반갑다고 느꼈다.
류제가 창문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탈출구를 찾으러 가려는데 재경이 옷깃을 붙잡았다. 이런 말 하기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도 할 말이 있어.”
류제가 그를 쳐다보았다. 재경은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는 사람처럼 귓불을 새빨갛게 붉히며 류제를 올려다보았다. 급습에 당한 류제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쿵쾅 나대기 시작했다.
“비키가 말하는데… 나도 잘못했다고 그러더라고. 그… 내가…….”
류제가 멈춰 서자 붙잡았던 옷자락을 놓은 재경이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 꼼지락거렸다. 아까 전까지는 생각했던 게 많았는데 막상 말하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경은 뭐라도 좋으니 심정을 제대로 말해 주고 싶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을 크게 외쳤다.
“나는 누가 내 걱정을 하는 게 제일 싫어!”
“…어… 뭐?”
“그러니까, 나는 누가 내 걱정을 하는 게 싫다고.”
재경이 알아들었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류제는 이거 뭐 다시 싸우자는 건가 헷갈려서 멍청하게 섰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라는 건가?
“그러니까… 그게 나는 누가 내 걱정을 해서 날 신경 쓰는 게 부담스럽고 미안해서 싫어. 그러니까…그…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거야.”
“어… 왜?”
“그러니까 말했잖아!”
“아니… 잘 이해가 안 가서. 왜 그게 미안한데?”
“걱정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게 당연하잖아!”
재경은 그가 다치거나 사고를 치면 할머니가 몰래 눈물을 훔쳤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버럭 외쳤다.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척하면 척 알아들을 것이지 끝까지 말하게 하고 난리야!
“실은 나도 다치는 거 싫었어.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이미 다친 거. 근데 아프다고 하면 걱정할 거 아냐. 난 그게 더 싫어. 또…”
“…….”
“여튼, 여튼 그때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아마도 그것 때문이야.”
할머니한테 늘 비밀로 했던 버릇 때문에 아파도 의연한 척 굴었던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어버렸던 걸까.
거기에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고, 이 세계가 스토리대로 굴러간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게임 오버만 피하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너무 크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류제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 그 부분에 대해선 그가 너무 무심하게 굴기는 했다.
“비…비키가 그러는데 관계의 저울이라는 게 있는데 걔가 말하길 우리 사이가 그게 불균형하다고 했어.”
설마 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비키가 눈치챘나 류제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렌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근데 내 짧은 생각엔 불균형이 아니라 내가 쓰는 저울과 네가 쓰는 저울이 달라서 우리가 싸운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나는… 그… 저울이 좀 구식이라서… 네가 무턱대고 화를 내면 나도 잘 모르…은단 말야. 난 성질도 욱해서 남이 화내면 같이 화내 버리고. 그러니까 그… 다음번엔 좋게 말로 해줬으면 좋겠어.”
“선처할게.”
웬일로 장한 소리를 한다. 마음에 드는 사과에 류제가 활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재경은 류제한테 키 작아진다고 하지 말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입을 앙다문 채 귓불만 붉혔다. 부끄러워서 시선을 어디에도 못 두고 있는 게 뭐 이리 귀여울까.
“그…그럼 우리 이제 화해한 거다?”
“알았어, 알았어. 그보다 먼저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인데.”
화해했다는 말에 일그러졌던 재경의 얼굴이 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싸움은 길고 화해의 순간은 짧은 것 같다.
류제가 뒤에 있는 문을 혹시나 하고 열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잘만 미끄러지며 열렸다. 어느 틈에. 류제는 그녀들이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었을지 몰라 김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열렸네?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안 열렸는데?”
“착각한 거 아냐?”
“안 했어! 날 뭐로 보는 거야?”
“하하, 렌은 렌이지. 나랑 싸웠다고 중간고사 공부는 손도 안 댄 렌.”
“화해하자마자 바로 잔소리 하다니. 너무한 자식.”
“슬렉터도 바로바로 관리하고. 거봐, 아까도 또 큰일 날 뻔했잖아.”
“으아아. 시끄러워! 그건 내 잘못 아냐……!”
재경이 질색하며 귀를 막았다. 하지만 내심 오랜만에 볶이는 류제의 잔소리가 반가웠다. 마치 오랜만에 할머니의 잔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 * *
“…아직까지는 그때처럼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고요.”
“네, 저도 의심하고 있지만……. 그 마족의 말이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걱정으로 잠을 잘 못 자겠어요.”
상담실 안 세라와 마주 보고 앉은 류제가 착잡한 듯이 말했다. 그녀의 책상에는 중간고사 전교 등수가 나온 종이와 류제의 만점짜리 시험지가 놓여 있었다.
류제의 만점짜리 시험지. 바로 세라가 시험 전에 대놓고 공지했던 세라 밀로니의 두 번째 호감도 물품이었다.
렌에게 들들 볶여서 시험지를 하나 가지고 보여 드리다가 졸지에 이런 상담까지 하게 되었다. 적당한 계기가 되었으니 뭐 상관없나.
류제가 무심한 표정으로 제 만점짜리 시험지를 흘겼다. 그 아래에 있는 종이에 첫 번째 등수로 비키가 있었다. 자신은 한 10등 언저리인 것 같다. 렌은 몇 등일까. 제발 꼴등만 아니어라.
“마왕이라.”
세라가 두려운 단어를 입에 담았다. 그 존재까지 들먹일 정도라면 마족의 침입 때에도 느껴졌던 류제의 마기를 그대로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한 번이 끝이 아니라 두 번이나 마기가 발현했다. 거기에 그 마족이 제 입으로 류제가 마왕의 부활체라고 말했다니.
“마족이란 사람을 농락하며 괴롭히는 것이 취미인지라 그것이 그 마족의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역시 사실일 경우가 가장 걱정되네요.”
“…만약 사실이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선생님?”
류제는 렌과 멀어져야만 하는 운명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비밀로 하려고 했으나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준 세라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세라는 난감한 듯 드물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이라면 당신은 분명 당국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겠죠.”
“선생님… 저는……!”
류제가 반박하려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세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마족의 말이 사실일 경우 자신의 소중한 제자를 인류를 위해 처단해야 하는가, 아니면 소중한 제자를 위해 그 사실을 숨겨 줄 것인가.
학생을 위하고 싶은 그녀가 하기엔 어려운 결정이었다.
세라는 뭐든지 간에 지금 당장 확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진실이라면 이건 생각보다 더 촌각을 다투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세라는 이 결정을 잠정적으로 유보하고 싶었다. 진실이 아닐 케이스에 대한 류제의 위험부담도 컸다.
“제가 알라마니 기술관 쪽 사람을 한 명 섭외하겠습니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으로 하지요. 류제 학생은 키아나트리체에서도 주목하는 어빌리터입니다. 몸 상태를 점검하는 건 당연하니 그렇게 둘러대면 될 겁니다.”
“그럼 만약 제가 건강검진을 하는 중에 갑자기 몸이 변화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좋은 꼴을 보지 못하겠지요. 이 정도의 족쇄만이 제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 같습니다. 류제 학생,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요?”
세라도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이 미안한지 표정이 끝끝내 밝지 못했다.
류제는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자신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렌은 내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날더러 류제 신리라고 했어. 그러면 나는 족해.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목숨 줄 속에서도 그를 긍정해 준 렌을 떠올리니 흔들렸던 표정이 굳건해졌다.
류제의 다짐을 본 세라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정표에 메모를 하며 알라마니 기술관 아가타지부 쪽 지인에게 매주 토요일 그의 정기검진을 맡기겠다고 전달했다.
“저도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제가 마왕의 부활체라니. 말도 안 돼요.”
“허황된 말이니 그리 염려치 마세요. 그리고 저번에 제가 말했었죠. 류제 학생은 인간입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잖아요. 그러면 돼요. 그러면 충분합니다.”
류제가 다시는 그런 감정에 잡아먹히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상담을 진행하던 세라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요즘 렌 지미 학생과 어떠냐며 주제를 돌렸다.
렌이 그의 괴이한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실이나 병마의 군주와 싸울 때 이상한 능력을 보였다는 말은 하지 않은 류제는 중간고사를 망친 렌이 그런 주제에 세라 선생님이 주실 선물만 탐낸다고 지적했다. 류제는 재경이 세라의 호감도 이벤트에 집착하는 것을 그렇게 해석한 듯했다.
세라는 선물은 미노타에서 사 온 사탕이었다며 서랍에서 새 사탕 봉지 몇 개를 류제에게 전해 주었다. 알록달록 신기한 맛이 나는 사탕이 잔뜩 들어있는 봉지가 류제의 손에 들렸다.
창문 밖에는 그 말을 가만히 엿듣던 미나가 있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 의뢰라. 세라 밀로니, 머리를 썼군.
하지만 이용하기 편한 세라 밀로니나 꿈속에 들어가 기억을 왜곡할 수 없는 렌 지미를 제외하고서라도 류제 신리가 마왕이라는 것을 들키면 곤란하다.
세라 밀로니. 류제 신리의 정체가 절대 외부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는 것을 몸소 알고 있기를 바라지. 정 안 되면 내가 나서면 되는 일이다. 수학여행 때처럼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을 조종해도 되고.
미나는 마가릿이 저질러놓은 일이 나름대로 잘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미풍이 불어닥쳤다. 세라에게 작별 인사를 한 류제는 손에 가득 사탕 봉지를 들고 상담실에서 나왔다. 가지고 가면 렌이 좋아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