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9) (9/112)

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9)

류제가 렌이 있을지도 모르는 학교 건물로 가서 그를 구출해 오는 동안 세라는 미나와 함께 기숙사에 남아 역병 인자에 감염된 학생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바깥과는 ‘봉인 마법’ 때문에 연락이 끊긴 채 아직도 소식이 없다. 거기에 슬렉터까지 먹통이 되었다. 아픈 학생들 사이로 뒤숭숭한 숙덕거림이 쉬쉬 깔렸다.

세라는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며 학생들의 치료에 집중했다. 아무리 두 학생이 걱정되어도 자신이 맡은 일이 있었기에 그것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러던 중 학생에게 주사를 놓아주는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끔찍하게 압축되어 발버둥 치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이 마기는―

세라는 리엔달로니아 계곡에서 느꼈던 이상한 마기를 감지했다.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한 마족의 수도 늘었다. 이제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선생님!”

‘분석’ 어빌리티의 흉내를 내던 미나도 그것을 방패 삼아 세라를 호출했다.

미나는 속으로 인상을 구겼다. 분명 마왕님의 기척이다. 그 미친년. 도와주질 못할망정 방해나 하다니. 또 율폰의 경고를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거겠지. 뭐? 안티 어빌리티를 시험하러 온 거라고? 마왕님을 부활시킬 역할을 맡은 내 공로를 가로챌 속셈인 주제에.

방해꾼의 등장에 미나가 혀를 찼다. 인간들에게는 류제 신리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단 말이다!

“미나, 학생들을 부탁합니다.”

세라가 미나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의 결정에 의해 학생들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세라는 가야만 했다.

“아뇨, 선생님. 저…저도 같이 갈게요. 제 어빌리티라면 분명 마족에게서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기 있어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류제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몰라요. 같은 반 친구가 죽을 수도 있는데 두 다리 뻗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가면 외부에서 도움이 올 때까지 다시 되돌아올 수 없어요. 미나 학생에게는 너무나 위험합니다. 선생님으로서 저는……!”

세라는 류제도 모자라서 미나까지 마족과 얽히게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렇지만 미나는 마가릿을 쥐어뜯기 위해서라도 세라를 따라가야 했다.

그녀가 마왕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더라도 부활의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지금 마왕이 부활했다가는 그들이 세웠던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마가릿을 저지하겠다는 마음은 진심이라서 미나의 눈이 사뭇 진지했다. 정 안되면 세라 밀로니를 세뇌하는 방법도 있었다.

세라는 고민에 빠졌다. 군인도 아닌, 거기에 미성년자인 ‘학생’들을 급하다고 당장 마족과의 전선에 내보내도 되는 것일까.

안 그래도 류제 하나만으로도 죄책감에 짓눌릴 것 같은데 미나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거기에 슬렉터까지 먹통이 되었으니 위험은 배가 되었다.

하지만 ‘힐링’과 ‘탐색’ 어빌리티밖에 쓰지 못하는 그녀는 기간트리카도 없이 마족과 대치해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으으으……!”

“아파. 아파요, 선생님.”

“흐윽… 엄마아…….”

‘역병 마법’의 인자에 감염된 학생들이 손끝부터 점점 번져오는 살이 부서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봉인 마법’의 인자가 학교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외부와의 연락도 차단되었다.

진퇴양난. 여기서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전멸한다면 나는 그 이상으로 학생들을 보호하는 선생님 자격이 없다.

“미나 학생, 절 따라오세요.”

세라가 미나를 이끌고 1층의 사감실로 향했다. 거기에 민간인 보호용 대마족용 일회용 바리케이드가 몇 개 있을 거다. 기간트리카에는 못 미치지만 수동으로 장갑할 수 있는 경비병이 쓰는 파워드 슈트가 몇 개 남았을지도 모른다.

네트워크 무응답이었던 슬렉터는 여전히 어빌리티에 반응하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건가. 왜 또 슬렉터가 먹통이 되었단 말인가. 류제 학생은 ‘강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으니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아도 마족과 어느 정도 대치할 수 있겠지만…….

제발 이 마족의 기가 그때 그것이 아니기를. 모두 무사하기를.

각기 다른 생각과 목적으로 세라와 미나가 운동장으로 합류했을 때 류제는 재경의 노력으로 인간으로 돌아온 후였지만 대신 재경의 상태는 심각했다.

세라는 미나와 류제가 병마의 공격을 방어하는 동안 배에 아이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린 재경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 주변이 ‘역병 마법’의 인자들에 감염되어서 새까맣게 변하고 있었다.

응급처치로 혈액 응고제를 쓴 것은 잘한 일이다. 그래도 그 전까지 혈액 손실과 상처에 의한 쇼크가 위험했다.

자신과 같은 치료 계열 어빌리터가 부족한 군에서는 ‘힐링 팩터’라고 부작용이 심각하지만 순간적으로 초재생을 시킬 수 있는 약물을 사용한다. 그러나 가격대도 상당하고 부작용에 대한 양심은 있는 건지 학교에는 보급되지 않았다.

렌의 상처는 지금 당장 ‘힐링 팩터’를 사용해야 할 정도의 심각한 상처였다. 내 어빌리티로 감당할 수 있을까. 이미 다른 학생들의 ‘역병 마법’ 인자 감염을 막기 위해서 어빌리티를 많이 써버렸는데.

아냐,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말자. 제발 버텨주길. 너는 할 수 있어.

“세라 쌤… 허억.”

“렌 학생.”

재경이 힘겹게 세라를 불렀다. 세라는 이 광경을 본 기억이 있었다. 흑백의 오래된 필터가 덧씌워진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가 학교를 갓 졸업하고 기간트리카 부대에 소속했을 때의 일이다. 소대를 급습한 마족과의 사투 속에서 자신을 제외한 소대원이 모두 전멸했다.

그녀가 그렇게 찾았던 ‘힐링 팩터’는 단면만 깨끗하면 잘린 팔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탁월해서 간부들만 사용이 가능했다.

자신들 같은 말단들은 치료계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세라가 아니라면 비참하게 죽어갔다.

세라도 어빌리티를 한계까지 사용해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앞에 자신의 학교 동창이자, 훈련소 동기이자, 자신과 같은 선생님 지망이었던 친우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도저히 어빌리티를 그만 쓸 수가 없었다.

그때가 아마 그녀가 자신의 ‘대가’를 처절하게 인지한 날일 것이다.

“도망가, 세라…….”

가망이 없는 상처를 치료하는 세라의 손을 붙잡은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충격으로 귀가 먹먹하고 주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 말만큼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런 경험을 다른 학생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두 번 다시 해주고 싶지 않았다. 죽기 위해서 살았다고 말해주기 싫었다.

세라가 정신을 집중해서 재경의 조각난 세포를 이어 붙였다.

“쌤… 그보다…….”

“말하지 마세요!”

재경이 세라에게 귓속말을 하기 위해 허약하게 손짓을 했다. 눈앞이 흐릿하다. 세라는 제발 재경이 하려는 말이 자신더러 도망가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 없어요. 지금 시계탑으로……. 허억, 으윽.”

뭐라 중얼거리던 재경을 향해서 촉수가 세차게 돌격해 왔지만 미나가 아슬아슬하게 바리케이드를 작동시켜 공격을 막았다.

공격의 여파가 무시무시해서 바리케이드 사이로 돌풍이 불어닥쳤다.

“조심하세요, 선생님!”

공격의 여파 때문에 간신히 아물 기미가 보였던 재경의 상처가 다시금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방어전을 계속해 봐야 끝이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다. 세라는 지금이라도 기숙사 지하에 있는 재난대피 등록 시설로 가야 한다고 판단하고 재경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재경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안 돼요. 아직… 아직 남았어.”

“렌 학생…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렌, 어서 가!”

“벌레 새끼 한 마리도 보내주지 않는다. 전부 산 채로 집어삼켜 주마!”

이 상황에서 도망갈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보였다는 생각에 화가 난 마가릿이 새까만 먼지처럼 보이는 깊은 역병 인자를 내뿜으며 그들을 위협했다.

방해다. 방해야! 모조리 다 방해만 된다! 왜 거기서 내 일에 간섭하는 거지, 망할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감히 인간들의 편에 서는 거냐. 왜 마왕님은 각성하지 않는 거냐!

“이게 바로 ‘옵시그나티오’다! 하찮은 인간들아! 너희의 주제를 사무치게 알려 주도록 하지!”

“허억… 헉! 류제, 방어막 뒤로 물러서.”

마가릿이 손바닥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와 함께 보이는 것은 부하 2가 들고 있던 것과 다른 색의 크리스털이다.

재경은 알고 있었다. 저건 마족이 개발한 ‘안티 어빌리티’의 스위치다. 아직 시험 단계라서 사용한다고 해서 어빌리티가 완전히 차단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구역 내에 있으면 능력이 현저하게 깎여 버린다.

젠장… 그래도 세라 쌤이 날 치료해 줄 시간은 좀 달란 말이다! 이거 중간에 주인공들 막 죽는 미연시 아니잖아. 이 장면에 없어야 하는 난 미연시 보정도 못 받아?

어두운 파장이 그들을 덮치자 세라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어빌리티의 빛이 뚝 끊겼다. 어빌리티가 발현되지 않자 세라는 더 이상 재경을 치료할 수 없었다.

세라가 어빌리티를 다시 발현하려 했지만 혈류가 막힌 듯이 당연하게 써왔던 어빌리티를 쓸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어빌리티가 발현된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도망가라는 재경의 메마른 외침에 류제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가 저 이상한 파장이 지나자 어빌리티가 발현되지 않는 것에 일순 공포를 느꼈다. 지금까지 호기롭게 마족과 대치했다지만 어빌리티도, 기간트리카도 없다면 그들은 평범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위험해. 이건 진짜 위험하다.

“세라 쌤, 아직…….”

“렌 학생,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상처가 벌어질지도 몰라요! 제발…제발 부탁드릴게요.”

‘힐링 팩터’. 세라는 그것이 너무 절실했다. 그 약의 부작용의 심각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으나 어빌리티를 발현하지 못한다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실책이 뼈아팠다.

이대로 또다시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아직 어린아이잖아! 누려야 할 것도 누리지 못한 작은 어린애라고!

“세라 선생님……!”

류제도 더 이상 마가릿의 공격을 쳐내지 못하고 미나가 가져온 대마족용 일회성 바리케이드의 뒤에 숨어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남은 바리케이드는 이제 일곱 남짓. 숨어만 있다면 약 십여 분 동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렌 학생… 제가 치료해 드릴 테니 가만히 있어요. 부탁이에요.”

“시계탑에……! 시계탑에 있어요.”

재경이 자신의 말을 끊으려는 세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피가 모자라서 머리가 멍했지만 의지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재경은 이 말을 꼭 하고야 말겠다며 세라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안티 어빌리티’가 시계탑에 설치… 콜록… 허억… 부숴야…….”

안티 어빌리티? 그 말에 세라는 어빌리티 발현이 되지 않는 이유를 납득했다. 렌 학생은 학교에 있을 때 저들이 뭔가를 설치하는 것을 보았고, 그 장소를 알고 있는 듯했다.

시계탑. 거기서 그 장치를 부수기만 하면 렌 학생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건가.

“…우리 반에는 ‘안티 슬렉터’가 설치되어 있어… 미나!”

“어… 어?”

마가릿의 공격에 집중하던 미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인간이 어떻게 ‘러다이트’와 ‘옵시그나티오’를 알고 있는 거지? 설마 마가릿 저 멍청이가!

못마땅해진 미나가 마가릿 대신 렌을 흘겼다. 그녀와 똑같이 방독면을 쓴 채 헉헉거리고 있는 재경이 간곡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맡아줘.”

마족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서큐버스와 페스트는 사이가 나쁘고 미나는 현재 저 마족의 단독행동을 곱게 보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상으로도 류제는 지금 각성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번엔 너라도 이용해야겠어.

재경의 바람이 통했는지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회용 바리케이드 하나를 챙겼다.

미나도 머뭇거리면서 바리케이드를 들었다. 저 정체불명 인간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는 싫지만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하면 내 꼴이 이상하게 되니까. 뭐, 잘됐지. 이걸로 내 손을 쓰지 않고 마가릿을 제압하면 돼.

“알았어. 우리 반에 있다는 거지?”

“류제 학생. 렌을 부탁합니다.”

“네, 반드시 지킬게요.”

“당신도 무사하세요.”

류제와 눈빛을 교환한 세라가 학교를 등진 마가릿이 틈을 보일 기회를 엿보았다. 모 아니면 도다. 치료가 시급한 렌 학생 옆을 지킨다 하더라도 어빌리티가 발현되지 않는 이상 나는 쓸모없는 전력일 뿐이다.

지금 여기서 바리케이드가 다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거나 아니면 렌의 말대로 시계탑과 1학년 8반 교실에 설치되어 있는 마족들의 비밀 병기를 파괴하는 시도라도 하다가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다친 렌을 류제와 둘이서 두는 것은 불안하지만…….

“류제… 아래!”

잠시 멈췄던 재경의 지시가 떨어지자 류제가 날아오는 공격을 날아 차기로 아래로 내리찍었다.

‘강화’ 어빌리티를 완벽히 발현할 수 없는 만큼 위력은 깎였지만 제대로 된 반격기였기 때문에 약간의 틈이 생겼고, 세라와 미나는 각기 하나씩 대마족용 바리케이드를 들고 양옆으로 찢어져 운동장을 빙 돌아 각기 시계탑과 8반 교실로 향했다.

“아무도 여기서 도망칠 수 없어!”

안티 어빌리티가 작동하고 나서 제대로 된 마가릿의 페이즈의 커맨드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우, 좌… 우… 위……!”

재경은 머리가 맹했다. 대신 수십 번 도전했었던 손가락과 오늘을 위해 그 기억을 되새겨서 연습한 재경은 기억을 더듬어 느릿느릿 외쳤다.

“발버둥 치긴. 인간의 몸으로 날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빌리티조차 쓸 수 없다면 더욱더. 네 운명은 정해졌다, 류제 신리!”

“네 뜻대로는 안 돼. 죽어서도 나는 인간으로 죽을 거야.”

류제는 좀처럼 마가릿이 원했던 대로 흔들리지 않았다. 마가릿은 화가 치밀었다. 이게 다 전부 저 머저리가 망쳤다. 저놈이 마왕으로서의 류제 신리를 긍정하는 바람에 심지가 굳건해졌잖아. 저놈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방해야. 저놈이 존재하는 이상 류제 신리는 절대로 마왕으로 각성할 수 없어.

“네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아까 도망간 그년들을 보자니 설마 외부에서 도움이 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이곳은 내 ‘봉인 마법’의 인자들로 뒤덮여 있다. 여기서 어떠한 것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고사하고 들어오는 것조차 쉽지 않을걸!”

“왼쪽… 허억… 위!”

“그리고 이 장막은 네놈들의 어빌리티를 깎지. 인간인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 하찮은 생명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넌 나약해! 추접할 정도로 필사적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 그러니 받아들여라!”

류제는 마가릿의 말을 흘러들었다. 마족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지 마. 렌이 말하는 대로만 움직여.

마가릿의 촉수가 류제를 옭아맸다. 피해야 하는데 도망갈 수가 없다. 마가릿이 속삭였다.

“여차하면 네 눈앞에서 이놈을 죽여 주지……?!”

페이즈 1 종료되자마자 쉬지 않고 시작되는 유혹을 물리치려는 재경이 미나가 두고 간 대마족용 바리케이드를 던져 마가릿을 류제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저 빈사의 사체가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마가릿은 바리케이드의 전류에 맞고 이상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류…제!”

“렌… 조금만 버텨줘. 내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하아… 너나 정신 차려, 이 바보야… 어빌리티가 사라진 게 아냐.”

곧 꺼질 것 같은 격한 숨소리가 안쓰럽다. 류제는 어떻게든 저 마족을 쓰러뜨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어빌리티를 사용하지 못하고 들릴 듯 말 듯 한 렌의 명령에 따라야 하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능력이 사라진 게 아니라니? 지금도 이 정체불명의 장막 때문에 기간트리카 장갑은 고사하고 어빌리티가 발현이 안 되는데.

“평소보다… 야…약해진… 거지. 저 마족이, 콜록……! 멍청하게 힌트를 줬잖아. ‘깎는’다고.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약한 척하지 마. 오른쪽……!”

마가릿의 인정사정없는 공격에 류제가 같이 맞부딪히다가 힘이 부족해 반대편에 처박혔다. 하지만 렌이 한 말 때문일까. 마법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위!”

“‘근력 강화’.”

류제가 재경을 공격하려는 마가릿에게 돌진해서 어퍼컷을 날렸다. 아까보다는 효과가 있는지 마가릿의 턱주가리가 깨져서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끈질긴 마가릿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아래… 우… 좌… 좌… 아래… 허억… 헉…….”

“닥쳐라, 네놈. 어떻게 네까짓 게 여기서 어빌리티를 쓸 수 있는 거야! 네 주제에! 감히!”

마가릿의 고함이 재경에게 향했다. 안티 어빌리티, 그녀가 옵시그나티오라 명명한 파장은 아직 실험 중인 단계라서 어빌리티를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했다.

인간이 ‘어빌리티 척도’로 따지고 있는 능력치를 어느 정도 마이너스시키는 것만이 가능했다. 즉, 세라의 어빌리티 척도가 45라면 현재 옵시그나티오의 능력상으로 거기에 ―50을 하는 정도다.

그렇다는 것은 어빌리티 척도가 어느 정도 높으면 이 옵시그나티오의 장막 속에서도 어빌리티를 발현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마왕의 혼을 품을 류제 신리가 가진 괴물 같은 어빌리티를 제외하면 보통의 어빌리터들은 평균 40에서 50 정도의 척도를 가지고 있으므로 저 하찮은 놈 또한 어빌리티를 발현할 수 없어야 한다.

“네놈… 정체가 뭐야?”

이상해. 이놈은 위험하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부류다. 무슨 능력인 거지? 어떤 능력이기에 나의 정예 부하 두 명의 공격과 나 마족의 사천왕이자 병마의 군주,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의 공격을 모조리 읽는 거야? 인간 주제에! 하찮고 쓸모없는 병신 주제에!

“위…….”

순식간에 지나간 두 번째 페이즈와 연이어 세 번째 페이즈의 마지막 커맨드.

재경은 이제는 시야가 완전히 뿌옇게 되어서 류제가 어디에 있는지, 병마 페스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 망할 미나, 빨리 파괴해 줘. 난 죽고 싶지 않다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느리게 뛰어가는 심장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뿐. 아― 좋지 않은데. 그때도 이랬던 기억이 난다.

“네놈만큼은 내 손으로 죽여 주마!”

“렌!”

마가릿의 촉수에 스친 상처를 붙잡던 류제가 마가릿과 동시에 재경에게로 달려갔다.

어빌리티 척도가 낮아지니 원래는 무난하게 막을 수 있을 정도였던 마가릿의 역병 마법 인자가 류제의 몸을 쉽사리 침투하기 시작했다. 류제의 손도 점점 까맣게 변질되어 갔다.

“안 돼!”

제발. 누군가. 우릴 도와줘!

류제가 강렬히 원하던 그때, 때마침 세라의 노력으로 마가릿이 발동시켰던 옵시그나티오의 장막이 깨지면서 류제의 어빌리티가 돌아왔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어서 말해 줘! 렌! 저놈의 약점을! 핵의 위치를!

하지만 재경은 마가릿의 마지막 커맨드를 드디어 끝냈다는 안도감에 고통이 더해져 더 이상 정신이 버티질 못했는지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까지가 그의 역할이었다.

“손대지 마!”

죽으면 안 돼. 렌! 류제는 그렇게 외치며 최대로 강화한 근력으로 마가릿의 심장을 꿰뚫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이놈이 없으니 핵의 위치를 모르는구나. 하하……. 커헉!”

류제가 찌른 심장에 박힌 손을 붙잡으며 마가릿이 가소롭다며 웃었지만 곧이어 어딘가에서 쏟아지는 수십 개의 창에 촉수를 포함한 전신이 꿰뚫리고 눈을 까뒤집었다.

운동장에 비치는 수십 개의 그림자. 류제가 놀라 위를 쳐다보았다.

왕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있는 왕녀와 그 친위대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슬렉터도 복구되었다. 미나도 그걸 파괴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진동’.”

“네년들이!”

박혀 있는 모든 창이 일제히 진동하면서 마가릿의 신체 파괴를 반복했다.

“왕녀, 여기는 어떻게……?”

“무사한가? 다른 이들의 상태는 어떠하지?”

니냐롯트가 점잖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그녀가 급히 모은 쉰다섯의 친위대원들이 각자의 어빌리티로 멋대로 폭주하는 마가릿을 제압했다.

얕잡아봤던 인간들의 떼거지 습격에 열받은 마가릿이 광기를 표하며 자신의 육체를 연이어 파괴하는 창을 떨쳐 냈다.

그녀가 촉수로 앞에서 알짱거리는 다섯 명의 친위대를 단번에 내팽개쳤다. 그녀들은 버티지 못하고 학교 저 멀리까지 날아가서 균형을 잃었다. 역시 사천왕. 허를 찔렸어도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는다.

쉰다섯 명의 친위대가 전멸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적이었어도 니냐롯트는 그녀들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홀로 차분하게 땅으로 내려왔다.

그녀가 눈으로 좇았던 류제는 이제 더 이상 혼자서만 마족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기절한 렌 지미에게로 빠르게 달려갔다.

“렌… 렌! 정신 차려. 눈을 떠! 곧 있으면 선생님이 올 거야. 빨리 정신 좀 차려봐!”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은 아니겠지.”

“학교를 지켜줘!”

어제 자신에게 찾아와 외쳤던 렌 지미의 목소리가 니냐롯트의 귓가에 짧게 일렁거렸다. 그녀는 렌 지미의 말을 의심했던 어리석음에 한탄하며 꽉 쥔 주먹을 가슴에 대었다. 후회감이 들었다. 내가 조금만 덜 망설였더라면 그가 저렇게까지 다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냐… 늦지 않았어.”

안 늦었다고. 류제가 왕녀의 말을 부인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그는 숨이 점점 옅어지는 렌을 더듬더듬 안아 들었다. 그때서야 류제는 렌의 방독면에 금이 가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싫어. 제발 나한테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잖아. 왜 내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왜 아무 말도 없이 혼자서만 다 감내하려고 하는데.

렌, 너는 살아야 해. 네가 없으면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아. 그런 건 싫어. 그러니 제발 살아줘. 죽으면 안 돼……!

“세라 선생님! 누군가 렌을―”

류제가 재경을 살리려 필사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본래 스토리대로라면 마지막 페이즈가 끝난 직후 마왕을 멋대로 부활시키려고 한 독단적 행동에 화가 난 화마의 군주 율폰과 몽마의 군주 미나의 압박을 느낀 마가릿은 인간들에게 떼거지로 습격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류제에게 ‘다음번에는 반드시 너를 마왕으로 부활시킨다.’라고 선언한 후 악역의 포스를 자랑하며 물러서야 하는 것이 그녀가 맡은 챕터 엔딩 역할이었다.

하지만 재경이 아니었으면 올 리 없었던 왕녀의 친위대가 마가릿이 방심한 틈을 타 핵 위치를 찾아 공격을 감행하는 바람에 마가릿은 고고하게 떠나긴커녕 고작 렌 지미라는 인간 하나 죽이지 못하고 친위대들을 상대하기 위해 추악하게 버둥거렸다.

그녀는 까마귀 떼에게 물어뜯기는 빈사의 맹수 같았다. 마가릿은 이대로 가다간 진심으로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하찮은 것들이! 벌레 새끼들이! 가축보다 못한 인간 따위들이 감히 나 병마 페스트의 왕을,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를! 죄다 머리통을 터뜨려 주고 말겠다!”

“대상의 마기 측정 완료. 등급1의 군주급 마족입니다. 예상 피해 규모는 아가타 전체. 평화를 위해 지금부터 확실하게 배제합니다. 모든 것은 왕녀님을 위해.”

“왕녀님을 위해!”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인간 주제에 어떻게…분명 이곳을 봉인해 두었는데!”

“모든 것은 왕녀님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건 너다, 사악한 마족아. 신성한 키아나트리체의 수도에 발을 내딛다니 용기도 가상하구나!”

마가릿은 이럴 수 없다며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계획대로 이곳에서 마왕을 부활시켜 마족의 군대를 만든 다음 키아나트리체의 왕실을 급습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없도록 학교 전체에 봉인 마법을 둘렀었다.

그렇기에 절대로 외부에서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야 한다. 그런데 저놈들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어떤 수로 알았단 말인가.

실은 니냐롯트의 명령을 받은 친위대들은 학교 전체를 보호하고 있던 대마족 결계가 파괴되고 그 자리를 ‘봉인 마법’ 인자가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학교에 마족이 학교에 침입한 것을 확신했다.

그녀들이 마가릿을 급습하기 위해 인자를 중화시켜 잠입한 사실을 마가릿은 알지 못했다. 마가릿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죽인 경비병에게서 ‘역병 마법’의 인자를 분석하여 학생용 기간트리카에 호흡기 필터를 착용한 것 또한 말이다.

목적을 가지고 싸우는 그들을 뒤로한 류제는 축 늘어진 재경을 들고 세라를 찾아 휘청휘청 시계탑으로 향했다.

상처를 막는다고 피범벅이 된 렌의 손은 금이 간 방독면을 통해 감염되어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치료되다 만 상처는 현재진행형으로 썩어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자꾸만 렌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류제는 불안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죽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이제 다 끝났어. 살 수 있다고. 곧 있으면 세라 선생님이 상처를 다 고쳐줄 거야. 버텨줘. 제발.

차갑게 식어가는 몸을 부여잡으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류제가 세라를 찾아 시계탑으로 날아갔다.

소란은 아무래도 좋다. 저 비열한 마족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쉰다섯의 인간들에게 찢어발겨지고 있든 렌만 무사하면 된다. 선생님… 세라 선생님……!

류제의 아슬아슬한 뒷모습이 니냐롯트는 처량하다고 느꼈다. 이 사태를 예견했던 렌 지미는 자신의 부상까지는 예견하지 못한 것일까.

쓸쓸하게 고개를 돌린 그녀가 재생을 반복하느라 기괴하게 변형이 된 마가릿을 흘겼다. 하늘에서 비가 한 방울 떨어졌다.

게임 오버가 염려되던 중간 보스전은 무사히 끝났다. 그 대신 이번 챕터의 바뀌어버린 엔딩 부분이 미래에 어떤 부작용을 낳을 것인가는 미지수였다.

중간 보스전에서 학교에 절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왕녀와 친위대가 버젓이 마가릿과 대치하고 있고, 안티 슬렉터와 안티 어빌리티로 패배감을 맛보고 무력감에 절망해야 하는 류제는 재경의 부상에 더 신경을 쓰는 바람에 추구하는 욕구의 방향이 틀어졌다.

류제를 절망시키고 유유자적 떠나야 하는 마가릿은 친위대들에게 해부당하듯이 공략당하고 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미친년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하다니.”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옥상에 서서 동족의 아비규환을 지켜보는 미나는 안티 슬렉터의 중요 부품을 손에 든 채 혀를 찼다.

왕녀의 친위대들이 상대하고 있는 저 멍청한 년의 본체가 실은 진작 꼬리를 말고 도망쳤다는 사실에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어야 할까. 류제 신리가 인간들에게 정체를 들키지만 않았다면 미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의 일을 생각해 보면 세라 밀로니는 키아나트리체의 반어빌리터 집단을 염려한 것인지 입이 꽤나 무거워 보였으니까.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겠군.

우리들의 비밀 무기 중 하나는 마가릿의 병신 짓 때문에 인간들 손에 떨어진 것 같고. 죄다 저년 탓이니 저년이 알아서 할 문제겠지만.

“하!”

저 멀리 배아 상태로 바람을 타고 도망가는 마가릿을 발견한 미나가 코웃음을 쳤다. 인간들을 벌레 취급하더니 역으로 당해서는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꼴을 보라지. 같은 마족으로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젠장, 젠장, 젠장! 죽인다! 죽일 테다! 죽여 버릴 거야! 반드시 멸족시켜 버린다!”

마기를 숨기고 인간들의 눈을 피해 높은 상공으로 도망친 마가릿은 아무도 자신을 쫓아오지 않자 그제야 몸을 재생했다.

핵을 둘러싸고 있는 배아의 상태에서 손이 나오고, 발이 나오고, 몸뚱이가 솟아나며, 머리가 자랐다. 광기 어린 머스터드빛 눈동자가 붉은 동공과 함께 번뜩였다.

독 늪의 색의 머리카락이 주르르 자라나서 마가릿은 어느새 처음 봤던 그대로 뿔 달린 여자의 형태에 슈트를 입고 손에 하얀 장갑을 꽉 끼워 넣고 있었다.

“빌어먹을 인간 새끼들. 떼거지로 덤비지 않으면 이길 수조차 없으면서 날 모욕하다니 두고 보자. 하, 플로냐 그 창년……. 감히 날 방해해?”

“네가 날 방해한 거겠지. 광기뿐인 미친년아.”

들으라고 한 소리였는지 마가릿이 얼굴을 비식거리며 뒤를 돌았다. 그녀의 넝마가 된 날개가 바람에 날려 펄럭거렸다.

마가릿이 예상대로 그녀의 뒤에는 안경을 벗은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미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가를 실룩거렸다. 병마의 군주는 언제 봐도 마음에 안 드는 면상이다.

“뭐야, 그 한물간 슈트는. 몇백 년 전에 유행했던 거야? 빨리 뒈져버려, 할망구.”

“시끄러워, 망할 창년아. 내 때는 이런 게 유행이었다고. 너야말로 뭐야, 그 촌스러운 옷은. 애새끼들 흉내 내는 거냐?”

마가릿이 미나가 입고 있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교복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이건 내가 입고 싶어서 입는 게 아니거든? 누구더러 애새끼래?!”

미나가 마가릿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마주치자마자 걸걸한 입담을 나누는 것을 보면 정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마가릿도 미나에게 인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는 창피한 꼴을 보인 게 싫었는지 미나를 아니꼽게 꼬나보았다. 화낼 사람은 자기라며 미나가 빈정거렸다.

“도대체 뭐 하러 온 거야? 시험작 옵시그나티오를 어빌리터들에게 시험하러 온 거야, 아니면 냉큼 뽐내러 온 거야? 얼마나 떠들어댔으면 인간이 ‘안티 슬렉터’니 뭐니 말하고 다녀? 거기에 뭐? 류제 신리까지 멋대로 각성시키려고 해? 내 일을 방해하지 마, 망할 년아. 네 역할은 이걸 개발하는 거야. 넌 오늘 분명히 선을 넘었어. 알아?!”

“네가 제대로 못 하니까 내가 직접 나선 거다, 망할 서큐버스 창년아. 살아남는 방법이라곤 인간을 의태하는 것밖에 없는 썩을 년. 주제에 그 유약한 놈을 아직까지 타락시키지 못했다니. 무능을 스스로 증명하는구나!”

선을 수시로 넘어대는 병마족의 언행에 미나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의 이마에 혈관이 툭 불거졌다.

서큐버스와 페스트의 종족성이 극명하게 대립했다. 여기서 마기를 발하기는 싫었던 미나가 이성적인 척 마가릿을 훈계했다.

“그―러니까 아직 때가 아니라서 부활시키지 않는 거라고! 어중간하게 각성해 봤자 들키면 실패로 돌아가는 걸 왜 모르는 거야?!”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율폰 그 새끼가 그 벌레들하고 손을 잡는다고 했잖아. 그럼 된 거지. 당장에 부활을 시켜도 모자랄 마당에 지지부진하고 있는 건 네놈들이야!”

“류제 신리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건 그 인간들에게도 비밀이라고, 이 미련한 병마족! 깔보던 인간들한테 엉망으로 당하느라 배알도 자존심도 없이 도망친 주제에 헛소리는 작작 좀 해. 안 그래도 여기서 정기 구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너 때문에 마족에 대한 경계가 빡세지면 나도 여기서 류제 신리를 감시하기 힘들다는 거 몰라, 이 빡대가리야?!”

“하! 그럼 여기서 류제 신리를 각성시켜서 인간들을 죄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미친년. 완전히 도돌이표잖아!”

[거기까지.]

참다못해 서로 또 죽고 죽이려는 낌새가 보이자 그들을 만류하기 위해 화마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등장했다.

나라카의 제복을 입고 있는 그는 새하얀 머리칼과 동공처럼 붉은 눈동자. 버펄로를 닮은 커다란 뿔이 언밸런스한 작은 소년의 모습이다. 어려 보여도 이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았다.

[뭐 하는 거냐 마가릿, 플로냐.]

“이 광년이 내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잖아!”

“이 창년이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날 방해하잖아!”

역시 이 둘을 붙여 놓은 건 후회되는 일이군. 율폰은 무뚝뚝한 얼굴로 둘을 흘겼다. 만날 때마다 싸우면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뭐… 마족의 희망이나 다름없는 류제 신리를 그런 식으로 시험했다는 건 전무후무할 일이다. 어땠나, 그는.]

“…흥, 어떨 것도 없어. 협곡에서 봤던 것처럼 흐물흐물 유약하기 짝이 없다. 스스로가 마왕의 부활체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멍청한 인간처럼 동요밖에 하지 못해. 조금만 건드리면 바로 마왕으로 각성하겠지. 다만 그 옆에 있는 자가 방해였다.”

율폰이 마가릿의 편을 들자 매스꺼워하던 미나가 웬일로 맞는 소리를 하는 마가릿의 말을 듣고 한 인간을 떠올렸다. 밀가루 반죽처럼 생겨서는 하찮기로는 땅개미보다 가치 없는 멍청한 인간.

“렌 지미.”

내가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류제 신리의 마왕의 힘을 각성시키려고 했을 때도 방해했었다. 거기에다 꿈에 침입할 수 없다니.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다.

하, 그나저나 마가릿 저년, 결국 류제 신리에게 정체를 까발렸군. 그것도 내가 하려고 했었는데!

[렌 지미라.]

둘 다 그 인간에 대한 방해감을 느끼고 있었다면 반드시 배제해야 하는 대상이다. 율폰은 미나에게 류제 신리를 감시하면서 그자는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한 다음 마가릿에게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이 일로 또다시 어빌리터 측에서 토벌전을 수행한다면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들이 위험하다. 마왕의 자질을 시험한 것은 좋았으나 이건 물밑 작업이 부족한 상황에서 마족의 부흥은커녕 위험만 주는 독단이었다, 마가릿. 러다이트와 옵시그나티오와 류제 신리를 모두 시험하려 했다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처럼 신중했어야지. 그게 네 실착이다.]

“가만히 숨어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

“하여튼 저 관종 또라이 같은 년. 놓고 간 거나 가져가.”

미나가 율폰에게 간신히 빼돌린 안티 슬렉터의 중요 부품을 건넸다.

알라마니 기술관 인간들이 중요 부품 없이 러다이트를 어디까지 파헤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세라 밀로니가 맡기로 한 시계탑의 안티 어빌리티, 시험작 옵시그나티오는 완전히 저들 손에 넘어간 꼴이 되었다.

어찌 되었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일이 우리 짓이라는 것은 들통나게 되겠지. 이게 전부 저 멍텅구리 탓이다.

“율폰, 저 미친년이 싸돌아다니지 않도록 관리 좀 잘해. 또다시 이런 식으로 방해한다면 저년 먼저 죽인다.”

[얼마 없는 동포를 소중히 여기라고. 가지, 병마의 군주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여. 멋대로 행동한 너에겐 벌을 주어야겠군.]

“하―? 내가 네 개냐? 애완동물이야? 펫이냐고! 이거 놓지 못해?! 감히 샐러맨더 주제에―!”

율폰의 환영은 불평하는 마가릿의 뒷덜미를 붙잡아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병(病)과 불(火)의 상성상 불이 더 우위에 있기 때문에 율폰의 마법 앞에서는 마가릿이 쪽을 쓰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마왕의 부활을 고대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인간일 텐데 말야. 오백 년 전부터 느꼈지만 인간들의 아이러니는 참으로 재미있어.]

“흥.”

율폰이 사라지면서 중얼거린 말에 미나는 코웃음을 치며 날개와 뿔을 숨겼다. 유리구슬 같은 분홍빛 눈동자에 붉은 동공이 흉흉하게 빛났다.

류제 신리에게서 마왕님을 각성시켜 부활시키는 건 나야. 율폰도, 마가릿도, 나콜렙시도 그 누구도 아니라고. 이게 몽마이자 업마로서 내가 맡은 업이다.

그녀는 저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를 흘겼다. 거기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왕의 기가 그녀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마가릿의 시건방진 입버릇 덕분에 류제 신리가 자신의 정체를 자각하게 되었다. 과연 저들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인간으로서의 류제 신리와 마왕으로서의 류제 신리.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건 렌 지미다. 내 마법으로 침투할 수 없는 꿈을 꾸는 자. 마왕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인간. 그리고 류제 신리의 정체를 알았어도 동요하지 않은 미지의 존재.

“너를 낮게 본 것이 나의 실수였어.”

천천히 무너뜨려 주마. 류제 신리의 마음을 차지한 너를 이용해 그를 뒤흔들어 주겠다.

가까운 미래를 떠올린 미나가 싸늘하게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그녀는 그곳에서 사라져 있었다.

* * *

거뭇거뭇한 주근깨마저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 영영 깨어나지 않을 인형처럼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눈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몸이 무겁다. 그래도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이제 배가 아프지 않다. 어찌 된 일인지 중간부터 기억이 애매하네. 분명 중간 보스와 마지막 페이즈를 하던 중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던 재경이 눈에 뿌옇게 보이는 천장이 익숙하다는 것을 떠올리고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학교 양호실이다. 나 결국 기절했던 거구나.

그래, 살아있다.

하기야 삼류 악당인 렌 지미는 아직 이 세계에서 죽으면 안 되는 존재니까 당연하지. 그렇다면 중간 보스전은 성공한 건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눈에 초점이 제대로 잡힐 때까지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보던 재경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오후인지 분간이 안 되는 따스한 햇볕이 창문 새로 들어오고 있었다. 양호실 특유의 독한 알코올 냄새가 기분 나빴다. 하지만 역시 살아있다는 감각은 행복했다.

“류제?”

어디 배에 구멍이 난 게 어떻게 메꿔졌나 확인하려고 손을 움직이려던 재경이 그의 손목을 꽉 붙잡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류제를 발견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불편하게도 자고 있네. 지금까지 날 간호해 준 건가? 짜식이 착해 빠져가지곤.

“얌마, 이거 놔. 아프다.”

“으음…….”

재경이 잠자는 류제의 어깨를 몇 번 흔들어 깨웠다. 류제가 뒤척거리는 듯 잠꼬대를 하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렌! 일어났구나!”

잠에서 덜 깬 류제가 감복해서 재경을 껴안았다. 돌연 포옹을 받게 된 재경은 친구끼리 남사스럽다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이까짓 거 가지고 난리 치긴. 재경의 귓불이 스리슬쩍 붉어졌다.

“무거워. 오버하지 마, 짜샤.”

“하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다. 어디 아프지는 않고? 배는 안 고파? 어디 이상한 곳 있어? 불편한 곳이라든가.”

“네가 이렇게 세게 껴안았는데 안 아픈 걸 보면 아주 멀쩡한 것 같다.”

재경이 애죽애죽하게 말하자 류제가 미안하다며 놓아주었다. 자유가 된 재경이 어디 상처 좀 보자며 입고 있던 셔츠를 위로 들쳤다.

역시나 판타지 미연시 세계라고나 할까. 뻥 뚫렸던 뱃가죽이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역병 인자에 감염되었던 손도 전부 원상태로 돌아왔다.

재경이 손바닥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숨도 몰아서 쉬었다 내뱉기도 하면서 몇 번이고 확인해도 몸 상태는 온전한 것이 어제처럼 아프지 않았다.

안심한 재경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아이고.”

“다시는 그런 식으로 무리하지 마. 그때 정말 위험했어. 하물며 상대가 등급1의 마족이었으니 살아난 것도 용한 거라고 그러더라.”

“일어나자마자 또 잔소리하긴. 알았어. 그보다 그 마족은? 어떻게 됐어?”

“네가 기절하기 직전에 왕녀가 군대를 끌고 와서 해치웠어.”

“해치웠다고? 뭐… 다행이다.”

무사히 게임 오버를 피했다는 사실을 실제로 확인받자 재경이 마음을 놓으며 자리에 털썩 누웠다.

내가 부탁하긴 했어도 왕녀가 진짜 와줄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좀 난감해도 덕분에 살았다.

근데 내가 노리려고 했던 건 서술되지 않은 부분에 관련된 건데 왕녀의 군대가 그 마족을 해치웠다고? 이건 좀 스토리가 상당히 바뀐 것 같지 않아? 으음… 모르겠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잘됐으면 땡인 거지.

중간 보스전이 무사히 끝났다니 이번 챕터는 이걸로 만사 오케이다. 다음엔 어디 보자… 세라 쌤 이벤트가 있네.

“어라, 세라 쌤이랑… 다른 사람은? 다들 무사하고? 양호실에 나밖에 안 보여.”

“네 상처가 심해서 병원까지 옮길 정신이 없었어.”

“켁, 부끄럽게.”

재경이 생각도 하기 싫다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누가 알면 또 뭐라고 놀릴 것 같다.

류제의 얼굴에 살짝 불만이 담겼다. 슬쩍 재경의 기색을 살펴보던 류제가 진지한 눈으로 넌지시 말했다.

“저번에도 분명 나랑 불나방처럼 덤벼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않았나?”

“그랬었나? 몰라. 야, 근데 지금이니까 말하는 건데 솔직히 나 아니었으면 완전 큰일 날 뻔했잖아. 완전 영웅인 줄? 푸헤헤헤. 멋지지 않았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다칠 수도 있으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떻게 해.”

“흥, 사나이 체면에 도망이란 없어. 나도 너처럼 마족하고 대치할 수 있다고. 봤잖아.”

“하지만 너 진짜 위험했―”

“너도 걱정도 팔자다. 니가 우리 할머니냐? 틈만 나면 맨날 잔소리만 하게. 좀 다치면 뭐 어때. 우리한텐 세라 쌤도 있고. 그걸 괜히―”

“괜히?”

재경의 자충수 발언을 나지막하게 되묻는 류제에게서 잔잔한 분노가 느껴졌다. 평소와 다른 말투에 재경이 움찔 놀라 순간 입을 다물었다.

재경은 지금은 상처 하나 없이 아무렇지도 않았고 류제가 걱정하는 것이 싫어서 저런 핑계를 댄 거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류제의 입가가 실룩거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맞는 말 아닌가.

걱정이 앞섰던 류제의 눈빛은 재경의 무지를 읽은 후부터 그림자 속에서 노여움의 또아리를 품고 쉭쉭거렸다.

“괜히라고? 네가 지금 멀쩡하고 자시고를 논하는 게 아니잖아. 네가 다쳐서 도대체 몇 사람이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 그런 식으로 몸을 막 굴리는 건 확실히 반성해야 할 부분이야. 알아들었어?”

“나 참, 또 그 잔소리. 결국엔 세라 쌤이 멀쩡하게 고쳐줬잖아! 내가 죽은 것도 아니고. 지금은 멀쩡하고. 그럼 됐지 뭐 그리 진지 빨고 난리야?”

영웅 취급을 받았으면 받았지 일어나자마자 잔소리에 이어서 류제의 불평까지 받아주기는 싫었다. 무슨 개고생을 해서 이뤄낸 승리인데 칭찬받지 못할지언정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거기다 나 이제 막 깨어난 환자거든? 좀 더 정중히 대해 주면 뭐가 덧나나?

류제가 전하려는 말을 렌은 전혀 못 알아들은 구석이었다. 답답해서 눈을 질끈 감은 류제가 미간을 구겼다. 이 심정을 왜 이해를 못 하는 건지 류제도 렌을 이해 못 했다.

“다치면 치료만 하면 끝이야?”

“그럼 더 뭐가 있는데?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

재경도 류제처럼 얼굴을 구겼다. 류제는 렌이 이런 성격임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저 무신경한 말을 넘겨들을 수 없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 심정은 어쩔 것 같은데?”

류제가 말과 함께 올라오는 그때의 절박한 심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목소리는 바보처럼 떨려 왔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 죽어가는 렌. 죄책감.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피 말림. 상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그런데 일어나서 하는 이야기가 선생님이 치료만 해주면 끝이라고? 사람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도대체 뭐 하자는 말이야.

“아까부터 무슨―”

“너 이번에 진짜 죽을 뻔한 거 알아? 방독면에는 금이 가있었지, 배 상처는 마족 때문에 검게 썩어가고 있지, 한시라도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세라 선생님은 보이지 않지, 네 숨은 점점 약해져만 가지. 그걸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은? 시간에 맞추지 못할 뻔한 세라 선생님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은! 넌 왜 매번 이런 식이야? 왜 내 마음은 생각 안 해?!”

류제가 슬픈 목소리로 타박했다. 진심으로 화가 났는지 손에 힘이 들어가서 붙잡힌 어깨가 아팠다. 재경은 놓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류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깊게 가린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눈물에 일렁거리며 동요했다. 다른 건 다 좋다. 렌이 내 불손한 마음을 평생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인정하기 싫었다. 렌은 결국 나의 친구로서의 걱정마저도 바보 같은 것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화를 내고 그래. 결국 무사했으니 됐잖아.”

“무사하기만 한다면 넌 다쳐도 상관없어? 뭐야, 그게! 이상하다고. 그 생각은 진짜 이상한 거야!”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럼 그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는데? 내가 다치고 싶어서 다쳤냐?”

“그러니까 내가 애초부터 그런 위험한 장소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지 말라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도, 저번에 비키와 대결했을 때에도! 결과적으로 무사하면 그게 끝이야? 세라 선생님이 치료해 주면 정말로 그게 다야?”

“그거랑 그때랑 같아? 나 없었으면 너도 마족한테 당했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두고 그냥 가? 결국엔 내 덕분에 마족을 처리할 수 있었던 거잖아. 그렇지 않았으면 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고!”

“그게 무슨 상황이 되었건 너는 결국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그러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나 혼자로도 충분했어. 네가 이렇게 다칠 줄 알았다면, 네가 우리를 이만큼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는 걸 알 바엔 차라리 나 혼자로도 충분했다고!”

류제가 으르렁거리며 재경을 겁박했다. 이가 갈리는 소리가 재경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혼자로도 충분했다니. 공로가 부정당한 재경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너는 내가 이렇게 부탁해도 또 똑같은 이유로 똑같이 다쳐서, 세라 선생님이 치료해 주시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겠지. 멀쩡하면 되었다는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면서.”

“류제, 너…….”

“널 치료해 주면서 세라 선생님이 얼마나 우셨는지 알기나 해?”

“…….”

“너, 거의 사흘 만에 깨어난 거 알아?”

“그게―”

“네가 다쳐서 의식불명인 채 누워만 있는 걸 보고 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건… 그게 그러니까…….”

“네가 친구들 말에 평범하게 감동받고, 울고 그런 것처럼 나도 그래. 나도, 세라 선생님도, 미나도, 네 친구들도 다 네 일에 평범하게 감동받고, 슬퍼하고, 울고 그런다고.”

고개를 푹 숙이던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는 렌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류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너는 도대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류제는 그 길로 양호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갑자기 화를 내던 류제가 제풀에 못 이겨 가버리자 재경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만 끔벅거렸다. 나는 그냥 게임 오버를 막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게 저렇게 화낼 일이야? 나 되게 잘한 거 아냐? 그런데 내가 없어도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은 뭐야.

재경은 뒤늦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류제는 이미 양호실에서 떠난 후였다. 류제의 말이 가시가 되어서 재경은 마냥 꿀꺽 삼킬 수가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멀쩡하게 살아만 있으면 되지. 거기에 게임 오버까지 막아냈잖아. 그 과정에서 내가 다친 건 나도 예상 못 했다고.

내가 아니었으면 진짜 게임 오버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막아준 걸 감사하다고 못할망정 왜 화를 내는 거지?

“뭐야?”

재경은 이번만큼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완벽하게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 진짜, 사람 복잡해지게. 재경은 그냥 류제가 또 잔소리를 한 거라고 치부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까악까악까악.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평화롭다. 재경이 지켜낸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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