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8)
렌의 말을 듣고 물러나던 류제도 기간트리카가 강제로 장갑 해제되자 마족을 노려보았다. 마족 앞에서 맨몸이 노출된 것은 상당히 두려운 일이었다.
공중에 떠서 날개를 펄럭이는 마족은 영문 모를 초록빛 크리스털을 들고 류제를 똑같이 내려다보았다.
몇 번이고 장갑을 시도했지만 기미가 안 보였다. 슬렉터가 먹통이 된 건가. 저번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현상과 비슷했다.
세라 선생님이 말씀하셨었지. 그건 슬렉터가 갑자기 사용자의 어빌리티를 인식하지 못하는 일종의 원인 불명의 버그 같았다고. 그게 저자들의 짓이었나?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특성이 맞물린 우연이 아니라?
“이런……!”
재경은 순간적으로 방독면 볼 부분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방독면을 쓴 것까지는 좋았는데 제길, 언제 이렇게. 이래서는 아까처럼 섣부르게 움직임을 시도할 수가 없다. 거기에 어빌리티도 마땅치 않은 그는 기간트리카까지 없으면 평범한 고등학교 1학년에 불과했다.
뭐, 됐어. 첫 번째 마족을 상대하면서 대충 노하우도 알았으니 이번엔 커맨드 이탈 없이 초 스피드로 공략한다.
부하 1은 첫 상대이니 소심하게 공략했는데 이렇게 질질 끈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다. 일단 이기는 게 먼저다. 다른 건 그다음의 문제야.
“류제, 위, 아래, 아래, 좌, 좌, 우, 좌, 아래, 우, 위!”
“죽어라!”
한꺼번에 쏟아지는 지시에 류제가 잠시 주춤거렸지만 곧 감을 잡고 마족의 촉수 공격을 방향대로 쳐냈다.
류제가 촉수를 타고 달려 마족에게 다가갔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았건만 가히 인간의 움직임을 벗어났다. 저것이 바로 ‘강화’ 어빌리티를 가진 류제만이 할 수 있는 마족과의 맨몸 대결이다.
역시 류제. 내가 시키는 대로 전부 해내는 걸 보고 있자니 진짜 내가 플레이어고 류제가 그에 따라 움직이는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자, 무리 없이 두 번째 페이즈다. 이번에도 실수하지 말라고, 류제!
기간트리카도 장갑 해제되었는데도 류제가 공격을 전부 쳐내자 마족이 전술을 바꾸어 류제를 아래로 내리친 다음 자신도 똑같이 땅으로 돌진했다.
“좌, 우, 아래, 위, 위, 아래, 좌, 우!”
창처럼 쏟아지는 촉수를 왼쪽으로 피한 다음 오른쪽을 공격해 촉수를 자른 류제가 다시 아래를 공격해 마족의 목을 노렸다.
마족이 목이 잘려도 재생할 기미가 보이자 류제가 뒤로 물러난 다음 덮쳐 오는 촉수를 위로 쳐냈다.
하나하나 그때그때 알려 줬으면 분명 못 했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라서 재경은 류제의 전투 센스와 말귀를 알아듣는 능력에 감복했다. 괜히 조심한다고 몸 사렸어. 진작 이럴걸.
이 정도면 낙승이다. 중간 보스 공략에 대충 감을 잡았으니 다음 부하 2의 마지막 페이즈도 완전 누워서 떡 먹듯 깰 수 있을 것이다.
“위, 좌, 위, 아래, 우, 아래, 좌, 우!”
재경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격투기 커맨드처럼 류제가 마족을 완전히 죽사발 냈다.
촉수가 아닌 손과 목, 가슴이 한 번씩 잘린 마족은 빠르게 재생을 꾀했지만 재경의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몸이 정지되었다.
“왼쪽 발등!”
“꺄아악!”
핵의 위치가 있는 곳까지 완벽하게 파괴하자 귀가 째질 것 같은 비명을 지른 마족은 아까 소멸한 마족처럼 살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신감 넘치게 늘어뜨렸던 굵고 긴 촉수도, 피막의 날개도, 염소와 닮은 뿔도 전부 물에 희석한 지점토처럼 뚝뚝 떨어져서 운동장 바닥을 더럽혔다. 그것들은 공기에 접촉하자 곧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하아, 하아, 하아……. 후우.”
기간트리카 없이도 부하 2의 세 페이즈 모두 순식간에 끝낸 류제가 땀을 뚝뚝 흘리며 숨을 골랐다. 맨몸으로 이렇게 빨리 움직여 본 적이 처음이었다. 렌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을 거야.
단지 렌이 말을 듣자면 마치 이 마족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게 렌의 어빌리티인가? 다른 애들이 좋아하겠는걸. 나랑도 궁합 잘 맞고.
“렌, 이런 식으로 계속하면 돼?”
숨을 다 고른 그가 고개를 돌려 렌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려고 했다. 순간 류제는 최대치로 강화한 동체 시력에 스치는 기묘한 그림자를 느끼고 그것이 있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류제의 시선이 마가릿이 앉아있던 조회대 꼭대기를 향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만히 그들을 구경하던 마족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았다.
류제가 그녀가 지나친 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뒤에 있던 사람은 렌뿐이다. 심장이 단 한 번 두근거리는 것이 억만큼이나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정말 설마 하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쉽게 뒤를 내주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렌!”
렌이 이 전투에 참전하는 것이 못 미더웠지만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감은 마가릿 앞에서는 끔찍한 자아도취에 불과했다.
“하아. 정말, 아주― 짜증 나는군. 하찮은 벌레 새끼 주제에 내 계획을 방해하지 마.”
방독면 안쪽에서 더운 바람이 끼쳐 고글에 김이 서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재경은 금이 간 방독면 사이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망할…….”
마가릿의 팔이 재경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아파, 아프다. 재경이 고통에 비명을 삼켰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류제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을 줄이야.
재경이 이를 악물고 흐릿한 시야로 마가릿을 노려보았다. 설마 저 마족이 직접 날 노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이건 전혀 ‘스토리대로’가 아니잖아……! 젠장, 젠장, 젠장! 스토리대로라면 내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게 아니니까 이것도 게임에 없는 부분으로―
마가릿은 재경의 눈동자가 흐릿해지자 이제 볼 것 없다며 주르륵 팔을 꺼냈다. 그녀의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피가 얼룩덜룩 묻어나왔다.
사방에 피를 튀긴 재경은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운동장에 재경의 피가 꿀렁꿀렁 옹달샘처럼 터져서 흙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렌이 피투성이가 된 것에 눈이 돌아간 류제가 팔에 묻은 피를 핥는 마가릿에게 야수처럼 덤벼들었다.
그럴 수는 없다. 감히… 마가릿 네가 감히!
갈라진 앞머리 새로 드러나는 동공이 마가릿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차분하고 여유로웠던 푸른 눈동자와 상반되는 분노가 드러났다.
재경을 꿰뚫었던 마가릿의 팔을 일도양단한 류제는 그녀를 운동장 바닥에 드리블을 하듯 처박고 그대로 쫓아가 머리를 짓눌렀다.
그녀는 류제의 반응에 깔깔깔 웃으며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본성을 드러내시는군, 류제― 신리.”
“입 닥쳐!”
소리치는 류제의 입이 일그러졌다. 고른 치아가 짐승처럼 날카로워졌다.
광기, 이 광기. 마가릿이 그렇게 애태우며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다. 이런 대결을 원하고 있었던 거라고. 증오해라. 분노해! 파괴를 바라며 미움만으로 마음을 채워! 우리와 함께했던 날들처럼. 당신이 내게 손을 내밀었던 그때처럼!
“자아―, 자! 나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저 돼지 새끼는 서서히 죽어가겠지. 어떻게 할 테냐?”
류제는 경계해 왔던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히는 감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정도로 앞에 있는 저자가 미웠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서 씹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류제가 증오를 촉매로 한 마기를 받아들이자 신체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검은 손톱, 거대한 악마의 날개, 증오로 얼룩진 붉은 동공, 자라나기 시작하는 용의 뿔.
“이대로 죽여 주마.”
불완전한 육체 변화가 뒤따랐지만 류제는 망설임 없이 손에 쥔 마가릿의 머리통을 짓이겼다. 두부가 으깨지듯 그녀의 머리에서 뇌수가 터져 나왔다.
마가릿은 류제의 손에 의해 머리 절반이 날아갔어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이를 드러내 광기 담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상앗빛 치아가 눈 대신 쾌락을 표했다. 그녀는 류제가 잘랐던 팔을 아무렇지 않게 재생했다. 동시에 류제의 어깻죽지가 꿰뚫렸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약과였다는 듯 마가릿이 재생한 팔은 더 이상 팔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류제가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던 것과는 반대로 류제가 오히려 마가릿에게 당해 버린 꼴이 되었다. 한순간에 사태가 역전되었다.
“죽여 봐, 이 나를. 네 손으로.”
마왕의 휘하에 들어가고 무려 삼백 년이나 죽지 못한 몸이다. 그때까지 어떤 인간도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하물며 마왕님을 죽인 그 버러지 같은 인간 여자도. 그런데 날 죽일 수 있다고 말해? 증오스러운 인간의 손으로? 하!
류제가 망가뜨린 으스러진 머리도 두개골과 핏줄, 신경계, 얼굴 근육, 피부 순서대로 물감 퍼지듯 재생한 마가릿은 둥근 안구를 빙글 돌리며 어깨가 꿰뚫린 류제를 기괴하게 쳐다보았다.
힘이 완전하지 않았던 류제는 마가릿처럼 쉽사리 몸의 상처를 재생하지 못했다.
마가릿은 류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을 내보여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 힘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아는 것처럼 말이다.
“벌써 포기한 건가? 날 죽이겠다 말한 건 허풍인가? 응? 류제 신리.”
“입 닥쳐!”
마가릿은 포효하는 류제를 비웃었다.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한 채 분노에 휩싸여 있으면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쓸모가 없다.
불완전하게나마 힘을 각성한 류제가 마족과 닮은 움직임을 보이면서까지 마가릿에게 덤볐지만 마가릿을 죽일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였다.
“날 죽여 봐. 유약한 인간이여. 말로만 꾸려가지 말고 속히 날 죽여 보란 말이다! 어서!”
저래서야 심연의 끝으로 더 끌어내릴 수가 없겠군. 한심하긴. 마왕의 부활을 위해서는 이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더, 더 강한 염원, 간절함, 분노가 필요했다.
“인간들이란 하찮도록 감정에 휘둘리는군. 고작 가축 인간 하나 죽었다고 뭐 그렇게 분개하지?”
마가릿이 폭소를 터뜨리며 도발했다. 류제의 눈동자에 한층 더 짙은 분노가 깔렸다. 눈을 번뜩인 류제는 꿰뚫린 어깻죽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야수처럼 덤벼댔다.
“닥쳐! 네까짓 마족 주제에 뭘 알아!”
류제가 분노로 일갈하며 주먹을 날렸다. 그것을 이다지도 쉽게 붙잡은 마가릿이 역으로 류제를 억압했다. 십수 번 맞부딪히던 둘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마족에 인간이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인외(人外)의 것들이 치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류제는 마족이나 다름없는 형상이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마음은 인간의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러니 그는 분개하고 복수심에 불타올랐어도 마가릿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사람의 감정도 모르는 마족 주제에 함부로 말하지 마!”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마족 주제에? 업보에서 벗어나지 마라 류제 신리. 너는 인간인가?”
모순을 말하는 류제를 지적한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마가릿이 직접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류제가 인간이 아니라는 증거를 파헤쳤다.
“이 날개, 이 뿔, 이 눈!”
마가릿이 류제의 무른 날갯죽지를 자신의 것처럼 너덜하게 찢어버렸다. 그에 반격하려는 류제의 머리에 난 작은 뿔을 붙잡고 격분하는 류제의 눈동자와 서로 키스할 듯 속눈썹을 가까이 대었다. 류제의 푸른 눈동자에 마가릿의 눈동자가 비쳤다. 붉은 동공이 월식(月蝕)처럼 겹쳐졌다.
“아무리 봐도 나의 동족과 닮았구나.”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낱낱이 펼쳐놓자 류제는 그것에 대해 의식해야만 했다. 날개, 뿔, 붉은 동공. 인간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양새다.
흐려졌던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분노로 잃었던 이성이 마가릿이 던진 의문과 함께 돌아왔다.
동족? 마족과? 저 피도 눈물도 없는 기괴한 생물체와? 아니, 아냐. 난 인간이야. 분명 내겐 마음이 존재해. 저 마족이 나를 희롱하는 거다. 렌의 말을 기억해. 마족의 말이다. 귀담아듣지 마.
“너희 마족이 내게 수작을 부린 거잖아. 난 넘어가지 않아. 저번 리엔달로니아에서도… 이건 네가 건 환각이겠지.”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환각? 환각이라고?”
그럼에도 류제가 운명을 부정하자 마가릿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머스터드색의 눈동자와 가운데에 박힌 새빨간 동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실컷 웃어대던 마가릿이 직접 확인시켜 주었다.
“이 고통도 환각처럼 느껴지나?”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 류제가 자신의 심장을 찌른 마가릿의 팔을 어떻게든 빼려고 버둥거렸다.
불완전하게 각성한 류제로서는 마족 중 가장 강한 공격력을 지닌 마가릿은 버거운 상대였다. 심장이 벌컥벌컥 펌프질을 하며 류제의 체내를 돌던 피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류제의 몸이 수복되었다. 이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화’ 어빌리티의 작용이 아니었다. 힘이 흐르는 느낌이 달랐다. 수면 아래에 비쳐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처럼 회복되는 몸은 그도 모르는 것이었다.
“이것조차 환각처럼 느껴지냐. 류제 신리.”
의문스러운 힘을 보여 주면서도 마가릿은 류제에게 제대로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 전에 궁지로 몰아붙여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심어놓았다.
“넌 나와 같다. 우리는 같아. 받아들여라, 류제 신리!”
“나…난 마족 따위가 아냐!”
“그래. 마족 따위는 아니지. 마족이 자아내진 실이라면 너는 그것을 만드는 물레. 절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저 마거리트(marguerite)가 마거리트인 것처럼, 이 흙이 흙인 것처럼, 내가 마족인 것처럼. 너는 달라. 영혼부터가 달라. 넌 나보다 위대하고, 전능하지. 하지만 너는 아직 인간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
흠모해 마지않는 자를 살피듯 그녀가 상냥한 손짓으로 류제의 턱을 추켜올렸다. 핵을 파괴해 죽였던 마가릿의 부하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강한 촉수가 넝쿨처럼 류제의 몸을 감쌌다.
마가릿이 무지몽매한 류제의 얼굴을 쓸더니 우악스럽게 붙잡아 억지로 돌렸다. 그녀가 억지로 류제의 고개를 돌린 쪽에는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렌이 피를 흘린 채 죽어가고 있었다.
마가릿이 동요하는 류제에게 작게 속삭였다.
“너라면 살릴 수 있어.”
악마의 꼬드김 같은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아까까지 광기와 함께 류제를 몰아붙였던 것이 거짓말인 양 그녀의 말은 인자한 어머니처럼 상냥했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저 버러지는 이제 곧 숨이 끊어지겠지. 하지만 너라면 살릴 수 있어.”
죽어가고 있는 렌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은 굶주린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 건네는 달콤한 사탕수수처럼 솔깃했다. 류제는 그녀에 의해 최면에 걸리듯 피를 흘리며 얼굴을 땅에 처박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렌을 보았다.
살릴 수 있다고? 어떻게?
류제의 마음속 물음에 답변하듯 마가릿이 사랑을 말하는 연인이 되어 귓가에 속삭였다.
“가서 목덜미를 물어.”
그녀가 앙큼하게 류제의 귓바퀴를 물었다. 류제의 귀는 마가릿의 날카로운 짐승 이빨에 뜯겨졌다. 피가 흐르는 류제의 귓바퀴는 다시금 회복되어 자라났다.
“저 생명이 다해 가는 버러지를 고귀한 마족으로 탈바꿈시켜. 동지로 만들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려. 오로지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아아, 류제 신리여. 그것이 부활할 너의 첫 사명이다. 기억해 내. 너의 정체를. 우리의 숙명을.”
그녀가 류제가 외면할 수 없도록 똑똑히 고개를 붙들고 렌을 응시하게 했다. 류제는 죽어가는 렌을 문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우리 마족의 위대한 왕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드려라.”
류제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끔 마가릿이 금기를 속삭이며 류제를 부추겼다.
마족의 왕? 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마왕은 백 년도 전에 어떤 자가 죽였다고 했다. 그런데 죽은 자의 영혼을 내가 가지고 있다고? 거짓말이다. 악마의 속삭임에 불과하다.
“자, 어떻게 할 테냐? 저 인간이 소중하지 않아? 네게는 그럴 힘이 있어. 망설이지 마라. 어서 빨리 우리의 왕이 되어주면 돼! 예전처럼 인간을 죽이고, 증오하고, 저 ‘어빌리터’들을 구제하는 거야.”
“내…내가…….”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어. 이 모습을 봐. 저자가 인간인 채로 살아난들 지금 모습의 널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전혀! 인간이란 혐오로만 이루어진 몰개성한 군중들이다. 다름을 배척하고, 그를 위해 스스로를 숨겨 거짓말만 하며, 가면을 쓴 채 무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벌레같이 하찮은 생명체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부정당하기 전에 입을 닥치게 해.”
맞아, 렌이 내 이런 모습을 좋아해 줄 리가 없다. 그는 지금 끔찍할 정도로 증오스러운 마족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렌은 살아나더라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볼지도 몰랐다.
“어떻게 할 거냐? 너는 어떻게 할 거냐! 이 꼴을 했지만 넌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말했다. 인간임을 고집하면 저 불쌍한 인간을 살릴 수 없어!”
그건 싫다.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이 마족의 말처럼 내가… 내가 렌을…….
“시답잖은 인간 따위 그만둬. 돌아와서 다시 우리를 이끌어.”
“나는 렌을―”
“본능에 몸을 맡겨. 하고 싶은 대로 해. 널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사랑하는 나의 왕. 나의 신. 나의 아버지여!”
“살리고 싶어…….”
“오로지 당신을 위해 나, 병마의 군주. 두 마족의 숭고한 희생의 끝에 그대의 오른팔인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여기까지 도래하였다!”
온 마음이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 들었다. 뭔가가 마음 안에서 꿈틀거렸다. 심연 같은 어두움이 류제에게 말을 건넸다. 류제도 심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류제는 그것에 삼켜질 것 같았다. 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렌이 나를 싫어한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류제는 기꺼이 저 돌아올 수 없는 어둠에 몸을 바칠 수 있었다.
“헛소리하지 마, 망할 마족아. 류제 옆에서 바람이나 잡는 양아치 친구는 나로 족하거든.”
기적처럼 피투성이가 된 재경이 일어섰다. 어디까지 하나 봤는데 듣자 듣자 하니 오글거려서 죽다가도 못 듣겠는 소리나 하고 앉았다.
“뭐 하는 거야, 멍청아. 언제까지 붙잡혀 있을 건데?”
“렌……!”
이 절망적인 상황에 포기하고 있던 류제의 눈에 단번에 희망이 들어찼다. 동시에 그의 마음속 끝도 모르고 차올랐던 어둠이 무저갱으로 가라앉았다.
렌은 살아있다.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무사하다. 그 사실만으로 류제는 악마의 속삭임을 뿌리쳤다.
“젠장, 이걸 쓸 생각은 없었는데.”
재경이 상처 바로 옆에 박은 주사기의 피스톤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체육대회 때 세라가 설명해 준 긴급 상황 대처에 따른 매뉴얼을 연구하던 중 양호실에도 다른 긴급 상황에 따라 사용 가능한 응급 도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재경이 하나 몰래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렌, 괜찮아? 무사한 거야?”
“아직도 살아 있다니 벌레 새끼 주제에 끈질기긴.”
마가릿이 눈을 번득이며 다시금 재경을 죽이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류제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촉수와 그녀의 몸을 잘라냈다.
육고기를 다지듯 사방으로 끈적한 피를 뿌리며 마가릿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어져서 아래로 떨어졌다.
렌이 무사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던 류제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재경에게 다가갔다.
찢어진 날개와 인간이 아닌 마족의 뿔, 붉은 동공을 렌에게 보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 거짓말이라 느껴질 정도로 류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렌만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출혈을 막아주는 약이야. ‘힐링 팩터’보다는 별로지만 쓸 만하지.”
류제의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은 재경이 다 쓴 주사기를 버렸다.
출혈을 막아준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통을 참고 있을 뿐이지. 이미 흘려버린 피도 저 성능 별로인 약으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극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어도 정신력으로만 버티는 중이다.
“하아…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렌이 두 다리로 서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한 류제가 재경을 꽉 끌어안았다. 피 냄새, 퀴퀴한 역병 인자의 냄새가 났지만 살아있다면 되었다. 살아만 있다면.
“안도하고 있을 때냐. 짜식이 내가 없으니까 멋대로 붙잡히고 말야. 진짜 나 없으면 어쩌려구 그러냐?”
“미안… 미안해. 렌… 난…….”
류제의 등에 난 날개가 불에 탄 마른 나뭇가지처럼 숯이 되어 바스라졌다. 이마에 난 뿔도 마찬가지였다. 저 혼자 폭주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류제가 마음을 놓았다.
“시꺼. 수다 떨 시간 없어 바보야. 앞이나 봐.”
재경이 감동의 시간 따위 사치라며 류제를 밀쳤다. 피가 모자라 숨을 헐떡거리며 잘 보이지 않는 앞을 눈살을 찌푸리며 살피는 재경의 눈에 수십 개의 조각으로 분열되었던 마가릿이 다시 회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마족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했지? 짜식이 귀찮게시리. 뭐가 어쨌든 넌 너야.”
류제의 정체는 진작부터 알고 있던 재경은 질척질척 멘탈 회복을 못 하는 류제의 등짝을 쳤다.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어린애가 친 것보다 더 아프지 않았다.
“…응.”
렌의 말이 맞다. 뭐가 어쨌든 나는 나, 류제 신리다. 그를 부정하지 않는 격려에 류제는 한 치의 껄끄러움 없이 마음을 털어냈다.
직소 퍼즐이 맞춰지듯 마가릿이 조각조각 난 몸을 끌어모았다. 입이 형태가 수복되자 그녀가 외쳤다.
“왜? 어째서? 이유가 뭔데!”
마가릿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인간이란 이기적이라 약함에 절망해서 더 큰 힘을 갈구하는데 고작 저런 버러지에게서 더 큰 희망을 얻었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갔다. 다름을 배척해야 하는 인간이 다름을 받아들여 주자 토할 것같이 불쾌했다. 고작 저런 하찮은 인간의 말로 마기가 흩어졌다고? 어째서?
“너희 인간들은 유약한 주제에 어째서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일어나는 거지. 인간에서 탈피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별로. 난 평생 화만 내며 사는 것보단 이대로가 좋아.”
그렇게 답한 재경이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급습에 당하고 나서 방독면에 금이 간 곳에서 인자가 들어왔는지 피 묻은 손끝이 점점 검게 변해 가고 있었다.
순서는 틀렸지만 일단 류제가 각성하는 것까지는 스토리대로였다. 원래는 마가릿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류제가 각성했다가 그걸 ‘탐색’한 세라와 그녀를 보필하던 미나가 다가오고, 세라의 설득과 미나의 부탁으로 류제가 원래대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세라 쌤… 제발 빨리……!
“아―, 됐어. 싫증 나는군.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어. 여기 있는 인간을 모두 죽여 버리면 마왕님도 다시 깨어나시겠지.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류제, 조심해. 지금 나는 도와줄 수 없어.”
“조심해야 할 건 너야, 렌.”
류제가 손에 피와 땀이 흥건한 재경을 흘겼다. 한시라도 빨리 마족을 쓰러뜨리고 렌을 세라 선생님께 데리고 가야 한다. 두 번째 같은 수는 당하지 않으리라.
“이번엔 반드시 죽여줄 테다. 버러지 같은 인간.”
다시 부활한 마가릿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예정에 없던 것이다. 마가릿의 진짜 페이즈 시작은 세라와 미나가 등장하고 ‘안티 어빌리티’가 작동했을 때부터였다. 지금은 재경으로서도 공략 불가다.
“내 학생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마족. 우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겁니다!”
“류제, 괜찮아?”
류제의 각성을 알아차린 세라와 따라온 미나가 ‘안티 어빌리티’가 발동되기 전 류제와 마가릿이 대치하고 있는 운동장에 당도했다.
세라와 미나 둘 다 안티 슬렉터의 영향으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는 못했지만 방독면과 기타 다른 무기들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중이었다.
세라가 사감실을 뒤져 민간인 보호용으로 사용했던 대마족용 일회성 바리케이드를 발동시켜 마가릿의 무자비한 공격을 막았다. 통상 마족의 공격을 다섯 번 정도 막을 수 있는 바리케이드가 순식간에 찢어지며 공격을 튕겨냈다.
“선생님!”
“류제 학생, 괜찮나요? 아까 류제 학생이 있던 곳에서 이전과 같은 기운이 확인되어 급히 달려왔습니다.”
“괜찮아요. 회복했어요. 그것보다 렌이 더 위급해요. 상태를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세라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재경이 안도했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재경의 어깨를 붙잡은 세라가 조심스레 같이 자리에 앉았다.
“렌 학생!”
“…허억… 헉. 후우… 괜…찮아요.”
“복부 상처… 혈액 응고제를 사용했군요. 잘 했습니다. 서둘러서 상처를 치료합시다.”
주변에 떨어진 주사기의 일련번호와 재경의 복부에 뚫린 구멍을 살핀 세라가 지금껏 버틴 게 용하다며 혀를 찼다.
학생이 부상당했는데 이제야 도와주러 올 수 있었다니. 세라는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났다. 지금껏 기숙사에 남아 역병 인자에 노출된 학생들을 치료해 주고 있었지만 정작 전선에 나가 있는 학생들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부족한 헤모글로빈 때문에 재경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내장을 심하게 다쳤다. 잘린 단면도 울퉁불퉁하고 지저분하다. 이 ‘역병 마법’ 인자 속에서 이런 상처라니. 인자에 접촉한 상처와 내장도 시꺼멓게 변색되었다.
응고제로 생명을 몇 분 더 연장했을 뿐이지만 저게 없었더라면 세라와 제시간에 만나지 못해 렌은 정말 위험할 뻔했다.
“류제, 저건 군주급 마족이야. 보통 마족과는 다르니까 조심해!”
대마족용 바리케이드도 무색하게 마가릿이 무자비한 공격을 펼쳤다. 미나가 그에 맞춰 일회용 바리케이드를 던졌다.
공격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렌이 상처 치료를 못 하고 있던 아까보다 나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저 마족에게서 지켜야 할 사람이 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버겁다. 그것도 모두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못하는 상태라니.
그래도 역전의 기회가 보였다. 미나와 함께 공격을 방어하는 와중 렌을 치료하고 있는 세라를 흘긴 류제가 마음을 다그쳤다.
* * *
그들이 마가릿과 대치하기 수십 여분 전, 키아나트리체의 왕궁에서는 렌 지미에게 이상한 부탁을 받은 니냐롯트가 그의 말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손에 든 찻잔이 공중에서 멈춘 채 식어가고 있었다.
“내일,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학교를 지켜줘!”
그녀가 생각하는 중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니냐롯트는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이 이상해졌다.
그 이유는 말할 수 없고? 생각해 볼수록 이상한 부탁이 아닌가. 학교의 보안 관계자도 아니고, 더군다나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자도 아니다. 친위대조차 아니다.
그런데 왜 그자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한 거지? 그자 홀로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챈 건가? 혹시라도 반어빌리터 단체의 반란의 말이라도 흘려들은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니냐롯트는 이대로 티타임을 즐길 수 없었다.
그자가 말하길 이유는 와보면 안다고 했다. 렌 지미가 내 힘이 필요한 이유. 하지만 내가 렌 지미의 말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던가? 그가 무엇이라고 그 중대한 일에 한 나라의 왕녀가 휘둘려야 하지?
물론 그가 첫인상에 비해 괜찮은 자임은 그와 비키 셀로니아와의 관계를 통해서 관찰되는 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그자를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아니,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내가 그를 믿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지 않는가. 나는 그자를 믿고 싶지만 그 이유를 대고 싶을 뿐이다. 나는 대의가 없으면 군대를 움직일 수 없으니.
“내일,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학교를 지켜줘!”
그의 외침이 마음속에서 메아리친다. 지켜달라니. 학교에는 학교를 지키는 대마족 결계와 경비병들이 있다. 그걸 모르는 건가? 아니면 그것이 부족하다는 의미인가.
도대체 왜, 내게 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인지 곤란하다. 나는 왜 이 말을 자꾸만 되새기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렌 지미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표정이 아니었던가. 나에게만이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나는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 그 이유를 만들고 싶어 한다.
“루이나.”
“예, 왕녀 저하.”
니냐롯트의 부름에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바람처럼 등장해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니냐롯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착잡한 눈을 내리깔았다.
“혹여 렌 지미가 했던 말을 신경 쓰고 계시는 것입니까?”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느냐?”
“…아니오. 그저 그자가 저하를 불편하게 했다는 것만이 제가 아는 모든 것입니다.”
루이나는 고개를 저어 애써 부정했다. 그녀는 왕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렌 지미가 싫었다.
“나는 그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까?”
“그럴 필요가 없으십니다. 어차피 왕녀 저하의 권력에 빌붙고 싶어 하는 머저리입니다.”
“그자는 내게 그런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난데없는 부탁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왕녀 저하의 착한 심성을 이용해서 함정에 빠뜨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 아닌가?”
“저하, 저하께서는 그자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으신 것입니까?”
니냐롯트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래, 그렇다. 니냐롯트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렌 지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 정당한 이유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루이나는 정말 어쩔 수 없을 만큼 여리신 분이라며 한숨을 숨겼다.
“그자의 무엇을 믿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감히 말도 섞을 수 없는 그저 볼품없는 평민에 불과한 자를.”
“…그자는 뭔가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루이나.”
“저하…….”
루이나가 니냐롯트가 이어서 말할 단어가 두려운 듯 고개를 숙였다.
니냐롯트가 다소곳하게 손을 모았다. 렌 지미의 부탁대로 섣부르게 군대를 부를 수는 없다. 그녀의 권력이 크고 책임도 큰 만큼 파급력이 강대하다.
혹시라도 잘못되어서 귀족파에게 어떤 식으로 꼬투리를 잡힐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그녀가 이용할 수 있는 병력, 그것은 바로 자신의 친위대뿐이었다.
“나를 도와주련.”
“…저는 언제나 저하의 편입니다.”
루이나가 명을 받들었다. 제가 모시는 자를 위해 루이나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니냐롯트는 그녀에게 미안해서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도 채비를 서둘렀다.
창문 밖 멀리 높게 솟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시계탑 꼭대기가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