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7)
휴일을 맞이하여 대다수가 집으로 돌아간 제립학교는 평소와 다르게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 꼭대기에 숨어들었던 재경이 하늘 너머 미세하게 반짝거리는 그물망으로 된 대마족 결계가 빛을 잃고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결전의 시간이 도래했다. 재경은 사다리를 타고 시계탑 밑 학교 옥상으로 내려왔다. 높은 곳은 질색이지만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면 어찌어찌 버틸 만하다. ‘게임 오버’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면 싫어도 뭐든 참아낼 수 있었다.
재경이 옥상 문을 열고 학교 중앙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바로 지금 병마가 학교에 침입했다. 세라 선생님을 제외한 다른 선생님들은 학생들처럼 휴가를 얻어 학교에 없다.
다른 남은 히로인은 기숙사 B동에 미나가 있을 거다. 미나는 마족이니 지금 병마가 찾아왔다는 것을 눈치챘을 거야. 곧 마족의 마법으로 학생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약한 내가 중간 보스와 직접적으로 대면하긴 힘들겠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만들 수는 있어. 학교에 쳐들어온 마족의 핵이 몸속 어디에 있는지도 전부 파악하고 있지.
세라 쌤의 ‘힐링’과 류제의 실력이 있다면 내가 알고 있는 페이즈 패턴 없이도 중간 보스전에서 실패할 확률은 적어. 문제는 걔네들이 들고 올 핸디캡들이다.
재경은 류제가 가진 마왕의 힘을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해 마족들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작동한 안티 슬렉터를 떠올렸다.
그 파장이 발생하면 주변 일정 범위 내에서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못하게 된다. 더불어 시험 동작 중인 안티 어빌리티까지 발동하면 웬만한 어빌리터들은 어빌리티 발현조차 힘들어진다.
중간 보스전은 (부하 1과의 전투) → (핸디캡인 안티 슬렉터 작동) → (부하 2와의 전투) → (핸디캡인 안티 어빌리티 작동) → (중간 보스와의 전투) 식으로 흘러간다.
즉 중간 보스와 가까워질수록 전투가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게임이라는 특성상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게임 세계에 빙의한 재경은 핸디캡이 너무하다 느껴졌다.
게다가 그 전에 학교에 역병 마법을 뿌린 마족들은 류제를 제외한 학교에 남아있는 다른 어빌리터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류제의 어빌리티는 ‘강화’니까 ‘내성 강화’라도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 류제를 노리고서 저지른 일이다.
마족들은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역병 인자를 뿌려 전력을 무력화시키고 학교를 봉쇄한 다음 류제를 자극해 마왕으로 부활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마왕이 부활하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는 마족들은 번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마족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인간들 천지니 제립학교는 하나의 마족들의 둥지가 될 것이다.
제립학교를 지배하고 마왕을 부활시킨 마가릿은 그들을 이끌고 바로 키아나트리체를 전복시킨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사악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둘 수 없지. 재경이 이전에 봐두었던 소화전으로 달려가 주먹으로 세라가 알려 줬던 긴급 알람 중 두 번째 것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 순간 건물 전체에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며 각 반 앞에 있는 소화전 안에서 수십 개의 방독면이 쏟아져 나왔다.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소화전 벨을 누르니 왠지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 같다.
세라의 말을 듣고 조사해 본바 이 버튼은 화재 시가 아닌 다르게 국가안보 위협 긴급 상황 대처에 따른 매뉴얼 12―5 조항에 의거하여 한 곳만 눌려도 모든 건물에 비상벨이 울리며 소화전 옆에서 방독면이 자동으로 사출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이 경고를 들은 선생님들은 그것이 어떤 이유든지 간에 무조건 방독면을 쓰고 학생들에게 재난 알림 방송을 해야 한다. 그만큼 위중한 사항이라 장난으로라도 눌렀다가는 책임을 지고 퇴학당할 수도 있었다.
덜컥, 덜컥, 덜컥. 재경이 달려가는 길을 따라 소화전 옆에서 방독면이 쏟아져 나왔다. 재경이 그중 하나를 집어 얼굴에 썼다.
이걸로 류제랑 세라 쌤도 이상을 느꼈을 거야. 좋아, 나는 부하들이 안티 슬렉터와 안티 어빌리티를 설치해 놓을 장소 근처에 숨어있다가 류제가 그놈들하고 붙기 시작하면 단숨에 박살 내야지.
그들이 저 두 개의 기계를 설치할 장소는 분명 체육대회 전에 학교에 숨어들어 확인했었다. 하나는 아까 내가 올라갔었던 시계탑 안쪽, 나머지 하나는 바로 1학년 8반 교실 안이었다.
그들이 1학년 8반에 안티 슬렉터를 숨긴 것은 그저 게임이라 존재할 수 있는 우연이었지만 재경은 그 의도에서 악독함을 느껴 절로 소름이 끼쳤다.
바로 그때였다.
“뭐야, 뭐야, 뭐야― 왜 인간들이 보이지 않지? 백 년 사이에 다들 뒈져버렸나? 근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인간들이 짖어대는 소리를 바꾸었나? 어울려! 어울린다고! 애앵애앵 울부짖어라.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릿 님. 저 인간들이 만든 축사를 보십시오. 앉을 수 있는 가구가 수십 개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마가릿 님. 우리 병마 페스트의 제일이신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 님의 마기를 느끼고 다들 졸도해서 도망간 듯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입니다.”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서 숨을 장소로 향하던 재경이 들려오는 말소리에 숨을 죽이고 계단 옆 벽 뒤에 몸을 숨겼다. 학교 건물에 침입한 중간 보스와 그 부하 두 명이 복도 저편에서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재경이 숨은 쪽으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이럴 수가……!
“후우… 후… 후.”
재경은 거친 숨소리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저 뿔과 날개. 진짜 마족이었다. 진짜 학교에 침입해 들어왔어. 긴장해서 호흡이 가빠졌는데 방독면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다.
어쩌지, 어떻게 벌써 들어온 거야. 나 스스로도 내가 계획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여서 여유롭다고 생각했는데 중간 보스도 행동이 빠르면 어쩌라는 거야.
이러다간 분명 저 마족들과 마주칠 것이다. 제발 자신을 발견하지 말고 그냥 지나치기를 바라는 재경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제립학교의 보호 아래에 있던 재경은 이 세계에서 마족과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미나는 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마족이란 종족 자체가 실감이 안 갔는데 정말 인간의 모습이 아니구나.
그들이 내뿜는 증오의 기운이 두려울 만큼 느껴졌다. 훔쳐보기만 하는데도 오한이 든다. 그런 존재가 무려 세 명이나.
여간하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도망가면 돼. 학생용이긴 해도 기간트리카는 대마족 병기야. 도망가는 거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리고 비상벨도 눌렸잖아. 곧 선생님들이 나타나 저들의 관심을 돌려줄 거야.
마가릿과 그 부하 두 명이 학교에 침입하면서 죽인 사람들만 해도 두 자릿수가 넘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재경은 제발 무사히 넘어가기를 빌었다.
숨을 삼킨 재경이 다시금 그들이 있던 곳을 살폈다. 그래도 이 거리라면 들키지는 않을 거다.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계단 위로 올라가자.
“마가릿 님, 여기 하찮은 구더기 같은 것이 숨어있습니다만.”
“…! 기간트―”
차마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부하 1이 재경을 무서운 속도로 복도 끝으로 처박았다.
벽에 부딪히기 전에 간신히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었던 재경이 부스터를 작동시켜 창문을 깨고 학교 밖으로 도망쳤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젠장. 들키다니 이건 예정에 없던 건데. 내 임무는 안티 슬렉터와 안티 어빌리티를 파괴하는 거라고. 시도조차 하기 전에 들켜 버리고 말았다.
이건 ‘바꿀 수 없는 범주’에 들어가는 건가? 설마 아까 그걸로 안티 슬렉터의 위치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겠지? 일단 여기서 이탈하고 생각해 보자. 지금은 스토리대로 된다는 것에 걸어본다.
“정말 날파리였던 모양입니다. 손짓 한 번에 힘없이 줄행랑치는 것을 보면.”
그런 재경을 박쥐 날개를 펄럭이며 믿을 수 없는 빠르기로 따라잡은 마가릿의 부하 1은 재경을 다시 학교 건물에 처박았다.
기간트리카의 부스터의 힘을 빌려 도망가던 재경을 완력으로 처박다니 계산하고 싶지 않을 만큼 대단한 힘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고작 중간 보스의 부하 1에 불과했다.
“인간은 항상 몹쓸 잔꾀만 부리지요. 하등한 종족 주제에 아직도 이딴 기계로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하찮기 그지없어요.”
“백 년 전에도, 이백 년 전에도, 삼백 년 전에도 그랬지. 하, 하하하! 그걸 쓸 수 있다니 넌 어빌리터로군? 여기 와서 처음으로 어빌리터와 마주쳤다. 이것 참 기쁜 일이야. 그래도 인간인 건 변함없겠지만. 자아! 자! 내게 어빌리티를 써봐. 날 공격해 보라고!”
마가릿이 벽에 처박힌 재경의 머리를 붙잡았다. 순수한 악력으로 재경의 몸이 들렸다. 도대체가 마족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괴물이란 말인가.
인간이 왜 기간트리카를 만들었을까. 재경은 그 의미를 새삼 깨닫고 말았다. 마족이란 인간의 나약한 몸으로는 전혀 상대가 불가능한 괴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기숙사 A, B, C동 전체에 긴급 알람이 울려 퍼졌다.
마왕이 죽고 마족들의 마지막 발악이 5.22 토벌을 기점으로 사라진 이래 한 번도 울리지 않은 긴급 알람 소리에 세라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펜을 떨어뜨렸다.
사감실 안쪽에 배치된 소화전에서 방독면 다섯 개가 쏟아졌다. 학생의 장난인가?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당시 이 알람에 관해 세라는 누군가에게 설명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렌 지미. 대상이 대상인지라 의심하기 싫어도 그의 존재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옆에서 서류 작업을 하던 부사감이 어처구니없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렌 지미 학생은 이번에도 집에 안 돌아갔죠? 이런 장난을 치면 학교에서도 퇴학당할 수 있는 걸 모르는 건가요? 게다가 렌 지미는 무허가 기간트리카 대결 전적도 있지 않습니까. 나 참. 저 말썽을 누가 말려.”
“설마 일부러 그러진 않았겠죠.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게 틀림없습니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무슨 사고입니까. 담당 선생님이라고 문제아까지 감싸 주지 마세요. 그 애한테도 안 좋은 버릇이 됩니다.”
부사감이 툴툴거리며 어디 보자며 창문을 열었다.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세라가 사감실 안쪽에 쏟아진 방독면을 집었다.
그때 세라의 ‘탐색’ 어빌리티에 강한 마족의 기가 읽혔다. 마족의 기를 읽은 것은 한 달 만이다. 그때는 마족이 아닌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힘으로 류제 신리에게 일어난 이상증상이었고 이건… 이 기는!
“선생님, 창문에서 떨어지세요!”
세라가 황급히 외쳤지만 이미 창문을 타고 들어온 강력한 ‘역병 마법’의 인자들이 부사감의 육체를 오염시켰다.
세라가 들고 있던 방독면을 착용하고 서둘러서 부사감에게 다가갔다. ‘역병 마법’에 오염돼 사지 끝이 검게 변한 부사감은 뒤로 기절해서 뒤로 까무러쳤다. 잠깐의 노출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한 마법 인자다. 상당히 위험한 마족이 근처에 있다.
세라가 사감실에 있는 방송 장비를 이용해서 기숙사 전체 방송을 준비했다. A, B, C동 스위치를 전부 누른 다음 다른 손으로는 방독면을 강하게 조이며 마이크에 대고 급하게 방송을 했다.
―실제 상황입니다. 현재 국가안보 위협 긴급 상황 12―5 조항에 의거하여 소화전에 방독면이 방출되었습니다. 기숙사에 남아계신 학생 여러분은 모두 방독면을 쓰시고 안내받은 재난대피 등록 시설로 가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현재 이상 징후 발생 확인. 이상 징후 발생 확인하였습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이상.
다음으로 세라는 밖에 있는 경비실로 연락을 취했다.
“통신 보안. 여기는 1학년 8반 담임 세라 밀로니. 현재 ‘역병 마법’의 인자 발생 확인했습니다. 공기를 통한 감염으로 확인되며 ‘탐색’ 결과 세 명의 마족이 학교로 침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직
“통신 보안, 통신 보안! ‘역병 마법’의 인자 발생 확인했습니다. 마족이 침입했습니다. 대마족 결계 파손 확인 부탁 바랍니다.”
―지지직
남문, 동문, 북문, 서문의 경비실에 존재하는 대마족 결계 유지 장치를 확인하기 위해 세라가 계속해서 무전을 연결했지만 모든 경비실에서 답변이 없었다. 세라가 급히 부사감이 열었던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흐릿하게 반짝거리던 빛의 그물망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안 돼!”
가장 최악의 가정을 한 세라가 밖으로 뛰쳐나와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부스터를 최대한으로 출력해서 순식간에 동문 경비실에 도착한 그녀는 경비병들이 핏길을 그리며 사망한 것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초목이 빨갛게 뒤덮였다. 동요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처참함에 옛 기억이 떠오른 그녀가 숨을 한껏 들이켰다.
휴일에 학교를 지키던 동문 경비 15명이 전부 사망했다. 대마족 결계 유지 장치는 파괴되었다. 네 개의 유지 장치 중 하나만 정상 작동하여도 결계를 유지할 수 있는데 결계가 파괴되었다는 의미는 서문과 남문, 북문도 전부 같은 상황이라는 뜻이겠지.
세라가 학교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봉인 마법’ 인자가 그녀를 방해했다. 학교를 침입한 마족이 대마족 결계 대신 마족의 봉인 마법을 학교 전체에 둘러서 단 한 인간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술수를 부린 것이다.
외부와의 연결이 끊어졌다. 이 이상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길 원하지 않는데 침입해 들어온 자가 병마족이라니.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였다.
병마족은 인간들의 마을에 광범위한 독 마법을 퍼뜨리고 사람들이 고통받는 틈에 잔인하게 잡아먹는 변태적인 습성을 가진 마족들이 상당수였다.
다른 마족과 비교해서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하며 그들이 쓰는 ‘역병 마법’의 인자가 치명적이라 한시라도 빨리 정화하지 않으면 대량 살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걸 염려한다 하더라도 여기 경비병들은 모두…….
어빌리터만큼은 아니어도 대마족형 전술에 능숙한 자들이었는데 반항도 못 해보고 죽을 정도라면 어느 급의 마족이 침범했는지 헤아리기도 두려웠다.
유독 세 마족 중 하나가 끔찍한 기운을 내고 있기는 한데 그자의 짓인가?
“잠잠하던 그들이 갑자기 왜?”
그 이유를 세라는 짐작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외부에서 구조가 올 때까지 학생들을 지켜야 했다.
군인이 아닌 어린 학생들을 병력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학교에는 다크호스인 류제 신리가 있어. 체육대회 때 쓴 군용 기간트리카도 아직 알라마니 기술관에 반납하지 않았다. 방어전으로 간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세라가 은밀하게 기숙사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안전이 먼저다. 오랜만에 상대하는 마족의 이질적인 생김새를 떠올린 그녀가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반면 재경이 긴급 알람을 울렸을 무렵 아무것도 모르는 채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류제는 건물 전체에 울려 퍼지는 긴급 알람을 듣고 놀라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학교에서 실시하는 소방 훈련을 받지 않았던 류제는 이 사이렌 소리의 의미를 몰랐다. 불이라도 난 건가?
“유네, 이 소리… 아차.”
유네는 어제 집으로 돌아갔었지. 깜박해 버린 류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려도 밖은 평화로워서 긴급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렌은 오늘 하루 종일 조용하네. 이맘때쯤이면 내 방으로 와서 뒹굴거릴 텐데. 겸사겸사 책상에서 일어난 류제가 옆방으로 향했다. 갑자기 들어오면 렌이 싫어하니 류제가 예의상 세 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렌, 오늘 무슨 훈련 한댔나? …어라, 없네.”
방이 텅 비었다. 이상하다. 어딜 간 거지? 나한테는 집에 안 간다고 했는데. 류제가 어리둥절해하며 문을 닫았다.
그때 그처럼 이상함을 느낀 학생이 방에서 나오다가 류제와 눈이 마주쳤다.
“오늘 무슨 훈련 한다고 했었어?”
“글쎄… 선배님들한테 물어봐… 커헉.”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리던 다른 방 남학생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끈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주저앉았다. 놀란 류제가 다가가니 그의 몸에 검은 반점이 육체를 좀먹고 있었다.
“이게 뭐지? 정신 차려! 갑자기 왜 그래?”
―실제 상황입니다. 현재 국가안보 위협 긴급 상황 12―5 조항에 의거하여 소화전에 방독면이 방출되었습니다. 기숙사에 남아계신 학생 여러분은 모두 방독면을 쓰시고 안내받은 재난대피 등록 시설로 가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즉시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현재 이상 징후 발생 확인. 이상 징후 발생 확인하였습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이상.
방독면! 주변을 둘러보던 류제는 사이렌이 울리는 소화전으로 달려가 방독면을 썼다. 다른 하나를 쓰러진 학생에게 씌워 주었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독인가? 체육대회 때 토너먼트 결승전에서 만난 ‘마비’와 비슷한 계열인가? 이 흑색 반점은 뭐지?
“뭐야. 무슨 일이야!”
“실제 상황이래. 방독면 어디에 있어?”
“어떻게 해! 몸이… 내 몸이……!”
방송이 나오자마자 기숙사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놀라 복도로 뛰쳐나왔다. 하나둘 방독면을 쓰는데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학생들이 아까 그 남학생처럼 사지가 흑색으로 물들고 고꾸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모두 침착해. 어서 친구들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
류제가 미처 방독면을 쓰지 못한 학생들에게 하나하나 씌워주며 각 기숙사 지하에 있는 대피 시설로 향하라 지시했다. 학생들도 어빌리티를 사용해서 쓰러진 친구들을 지하로 옮겼다.
“12―5 조항은 병마족의 침략 상황이야. 마족… 마족이 학교에 있나 봐!”
“뭐어?! 서…설마. 지금 선생님들도 얼마 안 계시는데?”
고학년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류제가 몸을 움찔거렸다. 학교에 마족이 침략했다고? 어빌리티를 써서 잽싸게 주변을 훑었지만 렌, 렌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밖에서 산책이라도 하는 중에 변을 당했나? 그 불길한 생각이 들자마자 류제는 바로 3층 기숙사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풀숲에 착지한 그는 렌의 기척을 찾으려고 했다.
내 능력으로는 렌을 찾다가 늦을 수도 있어. 세라 선생님의 ‘탐색’ 어빌리티라면 렌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류제가 세라가 있을 사감실로 뛰어가는데 그때 교직원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세라를 목격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세라는 길에 쓰러진 학생들을 미나와 함께 기숙사 안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세라 선생님! 이게 무슨 일인 거죠?!”
“류제 학생. 그보다 한시라도 빨리 친구들과 지하로 대피하도록 하세요!”
“마족… 병마족이 침입했다고 선배들이 말하던데… 학교에 마족이라니 진짜인가요?”
“병마족의 ‘역병 마법’의 인자가 학교 전체에 퍼졌습니다. 저는 긴급 알람 덕분에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방독면을 썼지만 피해가 크네요.”
“아까 선생님이 방송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선생님이 사이렌을 울린 줄 알았는데요.”
“제가 울린 게 아닙니다. 처음 마족을 목격한 경비병이 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류제. 말하는 중에 미안한데 이 사람 옮기는 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
체육대회 때 줄다리기에서 맞붙었던 고릴라 같은 덩치의 남학생을 질질 끌며 미나가 외쳤다. 류제가 알겠다며 미나 대신 손쉽게 남학생을 들어 지하 대피소까지 옮겨주었다.
신속하게 학생들을 전부 기숙사 안으로 대피시킨 세라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학교의 슬렉터 네트워크를 보았을 때 현재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선생님은 그녀밖에 없는 듯했다.
“미나 학생, ‘분석’은 끝났나요?”
“네! 선생님 말씀대로 등급1의 군주급 병마족의 역병 인자가 확실합니다.”
세라가 등급1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몸을 떨었다. 미나도 걱정스러워하는 얼굴 뒤에서 속으로 혀를 찼다. 마가릿 그 미친년이 드디어 일을 쳤군. 율폰이 언질을 주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방해할 줄은 몰랐는데.
사천왕 중 미나와 마가릿은 종족 특성상 대립하는 관계였다. 미나는 서큐버스로, 인간의 정기로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살아있는 인간이 필요했다. 반대로 마가릿은 페스트로, 인간의 역병 걸린 시체를 먹는 것으로 힘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살아있는 인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천성이 미친년이었던 마가릿을 나콜렙시에게 맡긴 채 율폰과 함께 마족의 부흥 계획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마왕의 부활체를 보더니 갑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선생님, 혹시 렌 보셨어요? 방에도 안 보여서 지금 찾고 있었는데요.”
“렌 학생 말인가요? 아뇨… 여기에는 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학생들과 있는 것 아닐까요?”
“아까 지하에 가봤는데 없었어요. 혹시 선생님의 ‘탐색’ 어빌리티로―”
류제가 말을 끝내는 순간 어딘가에서 폭발음이 났다. 기숙사 지하로 대피하던 학생들이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커다란 충격음이었다.
류제가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마족이 학교를 공격하고 있다. 바로 그때 세라의 슬렉터에 누군가의 기간트리카가 감지되었다.
“학생용 기간트리카가… 이건 우리 반 학생의 것인데!”
류제의 육감이 경고했다. 렌은 기숙사에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무시할 수 없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렌!”
“안 돼요, 류제 학생! 위험합니다. 차라리 제가―”
류제가 어떤 생각인지 단번에 눈치채고 세라가 말렸지만 류제는 고집을 부렸다.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은 여기서 학생들을 보호해 주세요. 제가 학교로 가겠습니다.”
두 번째로 학교에서 뭔가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류제가 답답한 방독면을 벗었다. ‘역병’이라고. 그런 종류는 내 어빌리티로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 류제가 방독면 때문에 흐른 땀을 닦으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푸른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병마족이라면 제가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류제 학생은 마족을 상대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등급1이란 말입니다, 류제 학생! 그 의미를 알고 계십니까? 마왕의 바로 아래 등급입니다!”
“하지만 저기에 렌이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저 마족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 렌이면 어떻게 해요?!”
세라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선생님으로서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그녀는 류제와 렌, 다른 학생들을 두고 수없이 갈등했다.
군에서 배운 대로 행동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방독면 없이도 움직일 수 있는 데다 토너먼트를 관람한 군 간부 사이에서 흘러나온 평가를 들었을 때 류제는 최적의 병력에 해당되었다. 전멸의 위기 앞에서 그녀도 지금 신념을 고집 부릴 때가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세라가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 반환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군용 슬렉터 두 개를 꺼내서 주었다.
“토너먼트용이라 대마족용 미사일은 들어있지 않지만… 학생용 기간트리카보다는 나을 겁니다. 무운을 빕니다.”
세라가 군인에게 하듯 류제에게 경례를 했다. 류제도 교련 시간에 배운 대로 경례를 했다.
류제가 학생용 슬렉터를 벗어 군용 슬렉터를 착용했다. 그가 몸을 풀듯 목을 꺾으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그는 기간트리카가 전신을 감싸기도 전에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재경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 주물럭거리던 마가릿은 재경이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자 재미없다며 운동장에 메다꽂았다.
재경은 힘을 잃고 운동장을 굴렀다. 방독면에 금이 갔다. 마족을 상대하기엔 방어력이 약한 학생용 기간트리카가 전부 파손되었다. 프로텍터도 망가졌다.
도저히 상대가 안 돼. 이건 답이 없어. 재경이 색색거리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했다.
두 부하를 이끈 마가릿은 운동장 한편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재경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인간과 닮은 마족의 얼굴에 괴기스러운 웃음꽃이 피었다. 그 꽃에서는 상대방을 업신여겨 깔보는 자의 향기가 났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이까짓 것이 어빌리터의 힘이라니. 인간은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이 흐를수록 점점 약해지나 보구나! 마녀의 피가 흐려져 가나? 응?”
“인간이란 마족의 지배를 받아야 마땅한 하찮은 존재. 월등한 마족보다 인간이 약한 것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마가릿 님.”
“이런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면 마족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밟아도 발버둥 치지 못하는 벌레를 보자 하니 미물이나 가질 측심조차 들 정도군요, 마가릿 님.”
“밖을 지키고 있던 경비만도 못한 전력이라니.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란 이런 걸 말하는 건가?”
그녀의 광기 어린 폭소가 일대에 찌르듯이 퍼졌다. 재경이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오호. 근성을 보이는구나. 아니, 아니지. 이건 미련한 자의 자살행위다.”
“흥, 너 같은 건 류제가 금방 없애줄 거야.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마귀할멈아.”
“류제? 류제 신리? 하, 하하하! 너 류제 신리를 알고 있나?”
“알고 있지. 내 친구거든, 이 괴물 자식아. 부럽냐?”
“친구? 친구―? 하하하! 소름 끼치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질려버렸어. 충분히 놀아줬으니 이제 죽어라!”
마가릿이 날개 달린 황소처럼 돌진했다. 비뚤어진 날개로 빙글빙글 돌아 기괴하게 손톱을 세운 그녀가 반찬거리도 되지 않는 재경을 몸소 찢어발기기 위해 다가온 찰나,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류제가 마가릿의 손목을 부여잡고 반대 방향으로 내팽개쳤다.
그녀는 매끄럽게 비행해서 되감기를 하듯 두 부하가 서있는 곳의 중앙에 섰다. 재경을 공격하기 바로 전에 서있던 그 장소였다.
“허……!”
정말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재경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멋지게 등장한 류제가 헬멧을 수동으로 해제하고 재경에게 물었다.
“괜찮아?”
구세주란 이런 거구나. 자신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휘광에 재경은 아직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인데도 안심하고 말았다.
류제도 마족의 공격이 렌에게 닿기까지 아슬아슬했다는 생각에 깊게 안도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큰일 날 뻔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여기서 마족과 대치하고 있었다니. 렌은 항상 내 상상을 뛰어넘는다니까.
류제가 넘어진 재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경이 그걸 붙잡고 일어서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잠시 비틀거렸다. 얼마나 버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어빌리티 공격으로는 꼼짝도 안 하던 학생용 기간트리카가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했다.
“어쩌다가 마족하고 마주친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하냐? 학교에 마족들이 쳐들어왔다는 게 중요하지. 어때 류제. 진짜 마족하고 마주친 소감 좀 말해 봐라. 난 진심으로 무서워 죽을 것 같다.”
“소감이나 말하고 있을 때냐.”
류제가 재경의 손목에 차인 학생용 슬렉터를 해제하고 군용 슬렉터를 채워주었다.
시야가 방해되는 방독면이 답답했던 재경이 곧바로 한껏 숨을 참은 다음에 방독면을 벗고 기간트리카를 재장갑했다.
체육대회 토너먼트 예선전에서 딱 한 번 장갑해 본 군용 기간트리카는 여전히 어색했다. 하지만 역시 대마족 병기의 결정체인 군용 기간트리카다. 학생용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착용감이 안정적이었다.
“다른 애들은?”
“지금 대피 중이야. 세라 선생님이 도와주고 계셔. 외부에서 도움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해.”
정면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류제의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했다. 렌에게 얼굴을 확인시켜 준 류제가 슬렉터를 감각으로 조종하여 헬멧을 만들어 씌웠다.
류제는 렌을 죽이려고 했던 녹색 머리 마족이 자신을 봐줬다는 것을 눈치껏 알았다. 세라 선생님께서는 저들이 병마족이라고 했던가. 뿔, 날개, 붉은 동공. 전부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류제의 몸에 자라났던 것들이었다. 마족들을 보자니 인간이 아니게 되었던 감각이 생각나 류제는 불쾌했다.
“학교에 무슨 볼일이지? 전쟁 선포라도 하러 온 거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어. 왕궁은 여기서 더 가야 하거든.”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너군. 너구나! 네가 류제 신리구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물러나 봤더니. 찾고 있던 대상이 제 발로 걸어 나타나자 마가릿이 배를 붙잡고 폭소했다.
류제 신리! 마왕의 부활체! 마족들의 희망! 그 용체에 감복한 그녀의 광기가 어린 눈동자에 황홀함이 얇게 덧씌워졌다. 백 년 만이다. 백 년 만에 마주하는 마왕님이다.
“…마족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알았냐고? 너를 알고 있냐고 묻는 거냐? 당연히! 마땅히! 확실히! 모를 리가 없지. 암. 모를 리가 없어. 우리가 널 찾아다녔으니까.”
류제의 혼잣말에 마가릿이 히죽거리며 답했다. 그녀들이 서있는 운동장 조회대에서 재경과 류제가 재정비를 하고 있는 곳까지의 거리는 적어도 백 미터는 넘었다.
그 먼 거리에서 내 중얼거림을 들었단 말인가? 그리고 나를 찾아다녔다고?
동요하는 눈초리를 숨기지 못한 류제가 마족을 노려보았다. 색색거리며 숨을 고르던 재경이 류제의 등을 퍽 쳐서 정신을 차리게 했다.
“넘어가지 마, 이 바보야. 정신 똑바로 차려. 상대는 마족이라고. 넋 나가면 죽어.”
렌이 웬일로 당연한 소리를 하다니. 흔들릴 뻔한 자신을 다잡은 류제가 마족의 말에 쓸데없이 귀 기울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가릿은 마왕의 부활체와 마주한 이 기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플로냐 그 새끼가 지금까지 뭘 꿈지럭대나 했더니 역―시나! 인간에게 아양이나 떠는 서큐버스 창년 주제에 얼굴을 밝히는구나.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 재주, 그 움직임, 그 몸놀림……! 아주―!”
웃으면서 마족의 광기를 표현할 뿐인데 저 대사 하나하나가 귀에 못 박힐 정도로 강렬했다. 발성 하나 끝내주긴. 대지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감탄사에 두 사람 모두 주춤했다.
“무가치해서 실망스럽기 짝이 없군.”
폭소하던 마가릿의 표정이 서늘하게 식었다. 오만한 자의 찌르는 듯한 살기에 류제도 둔한 재경도 사지가 분해되는 착각이 들었다.
과연 사천왕이라 이건가. 처음 마족을 마주한 거지만 저 마족이 다른 마족들과 급이 다르다는 것만큼은 재경도 알 것 같았다.
병마족의 군주이자 마족 중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마가릿은 마왕의 부활체이지만 하룻강아지 같은 류제와 그보다 못한 재경의 모습에 낙심하고 말았다.
잘못 본 것이라 마음을 달래며 다시 확인하고자 율폰과 약조를 어기면서까지 찾아왔는데 여전히 벌레보다 못할 정도로 약한 모습이라니. 저건 그녀가 백 년이 넘도록 기다리고 원했던 마왕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본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마가릿 님. 그것이 설령 마왕님의 부활체일지언정.”
“그러니 한시라도 마왕님을 저 인간이라는 추악한 껍질에서 탈피시켜야 합니다.”
옆에서 부하들이 달콤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마가릿은 아무리 마왕의 부활체라지만 저딴 시시한 것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싫다.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다.
삐딱하게 선 마가릿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왼쪽에 있던 부하에게 명령했다.
“가서 죽여.”
그 지시와 동시에 류제의 팔과 부하 1의 징그럽게 변이된 손이 맞부딪혔다.
류제는 괴기스러운 인형처럼 목을 꺾으며 공격하는 부하 1의 모습에 질겁하며 배를 발로 차버렸다. 아마 지금껏 사용한 ‘강화’ 어빌리티 중 ‘신체 강화’를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로 이끌어낸 게 아닐까 싶었다.
“류제, 오른쪽!”
골격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던 그녀가 관성을 거스르듯 몸을 꺾어 부메랑처럼 다시 류제에게로 덤벼들었다.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다. 렌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류제는 그녀의 공격을 놓쳐 어딘가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좋았어. 뒤에서 공격을 확인한 재경이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희망이 보였다. 재경은 류제가 받은 첫 공격으로 부하 1의 패턴을 파악했다. 토너먼트 때 확인했던 대로 타이밍에 맞게 입력해야 했던 화살표는 공격을 해야 하는 방향이었다.
확실히, 뭐든지 ‘스토리대로’다. 류제가 내가 알고 있는 패턴대로만 움직인다면 손쉽게 적을 제압할 수 있다는 의미 아닌가. 이건 그들이 가진 이점이었다.
라고 생각하던 재경에게 공격이 쳐들어왔다. 재경은 본능적으로 오른쪽(→) 다음 커맨드였던 위(↑) 커맨드대로 간신히 공격을 쳐냈다.
“렌, 조심해!”
이번에는 류제가 끼어들어 부하 1에게 공격했다. 공격하는 방향은 왼쪽(←). 원래 1 대 1로 붙어야 하는데 2 대 1로 붙으니 공격이 양쪽으로 섞여 들어갔다.
헷갈려 죽겠는데 이 빠르기가 숨이 막혔다. 제3자 시선으로 봤을 때는 파악이 가능했는데 막상 내가 이 야단에 끼어드니 장단 맞추기가 힘들다. 어쩐지 쉽게 넘어갈 수 있겠다 했더니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안 넘어간다 이건가.
아까까지 벌레 새끼만도 못한 움직임으로 당하고 있던 재경이 매끄럽게 공격을 받아내자 부하 1은 놀란 눈치였다.
류제도 렌이 저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라 잠시 한눈팔다가 공격당해서 큰일 날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페이즈 1의 커맨드대로 움직인 끝에 류제가 부하 1의 심장 부분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살이 뚫릴 정도로 과격한 공격을 한 게 처음인지라 앞머리의 틈바구니 사이 옅게 보이는 류제의 푸른 눈동자가 다소 긴장한 듯 굳어있었다.
“류제. 거기가 아니니까 방심하지 마!”
하지만 심장을 공격당했음에도 부하 1은 웃으며 몸을 꿰뚫은 류제의 팔을 붙잡았다. 자폭을 하려는 포자낭처럼 마족의 몸이 부풀었다.
터진다. 류제는 간신히 팔을 빼내서 뒤로 물러났지만 폭발의 파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광범위 공격에 노출된 렌은―
생각을 다 마치기도 전에 폭발에 휘말려 날아가는 재경을 붙잡은 류제가 땅에 붙어 부스터를 켰다. 여파에 밀려나지 않게 자리를 지키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너―”
“가만히 있어!”
폭발에 휘말려 날아가던 재경은 어느 틈에 류제의 밑에 깔려 있었다. 렌을 보호하는 류제의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시야 밖에서 다가오는 위험 물질들을 막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류제가 쳐냈다. 그는 렌을 지키려 필사적이었다.
재경은 류제의 이런 면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기간트리카를 뛰어넘어서 심적으로도 든든했다. 역시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여파가 사라지자 류제는 오감을 강화하여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재경을 적과 가장 멀리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류제를 믿고 있던 재경은 갑자기 내던져지자 정신을 못 차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어지러웠지만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선 재경이 소리치기 전 류제가 외쳤다.
“렌. 너는 기숙사로 돌아가. 여긴 나 혼자서 해볼게!”
“뭐어? 안 돼. 너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실수해서 게임 오버 되면 어쩔 건데? 이제 겨우 부하 1 페이즈 1 종료되었구만! 갈 길이 멀어 죽겠는데 짜식이 분위기 파악 못하네. 세이브 로드가 없어서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니까?
“난 안 가. 이렇게 된 거, 같이 싸울 거야.”
“너 진짜―”
렌을 보낼 유일한 틈이었는데. 하여간 고집 부리긴. 폭발한 마족이 찌덕찌덕하게 터져있다가 살덩이들이 뭉치며 금세 회복하는 걸 보고 류제가 혀를 찼다.
“정말 괴물이군.”
“칭찬 감사합니다.”
마왕의 부활체, 즉 존재 자체는 마왕과 다름없는 류제에게 괴물이라 불린 것이 기뻤는지 부하 1이 기꺼이 웃었다.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고, 육체가 터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도 죽지 않다니. 류제는 앞에 있는 마족이 불멸과 다름없는 존재일까 두려워졌다. 마족이란 위협적인 존재라고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이 정도일 줄이야. 과연 근성으로 밀어붙이고 필사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군.
포르테 들라크루아 그분도 이렇게 말했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라고. 하지만 심장을 꿰뚫어도 살아나는 괴물을 어떻게 없애는데?
고민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무전으로 렌에게서 통신이 왔다.
“류제,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
저번에 했던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도망가랬더니 승부욕은 또 많아요. 이런 상황에서 발동할 일이냐, 그게?
“무슨 이야기 말야?”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터지는 뜬금없는 소리에는 무슨 작전이 들어있을까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양호실에서, 바퀴벌레.”
렌이 자고 있을 때 몰래 뽀뽀하려다가 실패한 그거 말이지. 류제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끄러운 기억을 왜 꺼내냐며 헬멧 속에 뚱한 표정을 감췄다.
내 목소리더러 바퀴벌레가 귀에 들어간 것 같다고 했었다. 어디 가서 목소리 이상하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그게 갑자기 왜?”
그다음에 했던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퍼뜩 깨달을 구석이 안 보이자 재경이 무전 너머로 버럭 외쳤다.
“바퀴벌레는 어떻게 죽이라고 했더라, 이 바보야! 며칠 지났다고 벌써 까먹어!”
“그래, 핵!”
마족을 죽이려면 급소를 찌르는 게 아니라 몸 어딘가에 있는 핵을 파괴해야 한다고 렌이 말했었다. 하지만 전신이 폭발해도 살아있는 마족에게서 핵을 어떻게 찾아? 핵이 정말 존재하기는 해?
“다 됐고 내 말대로만 공격해. 알았지?”
“뭐?”
“온다! 류제, 왼쪽!”
류제가 왼쪽을 바라보자 부하 1이 예닐곱 개의 기괴한 낫이 달린 팔로 류제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류제가 강화한 손날로 팔을 후려쳐서 잘라버렸다.
“위. 왼쪽. 아래!”
신기하게 렌의 말대로 움직이면 저 마족의 공격을 전부 막거나 자신의 공격이 들어갔다.
렌은 싸움을 할 줄 아니 의외로 동체 시력이 좋은 건가? 몸이 그만큼 안 따라주는 거라고 치면 렌이 멀리서 적의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내게 알려 주면…….
“렌!”
류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읽었다는 듯 부하 1이 이번엔 재경에게 덤벼들었다. 패턴을 전부 파악하고 있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재경이 매끄럽게 공격을 흘렸다.
“오호라.”
별것 아닌 줄 알았던 구더기 하나와 실망만 앞섰던 마왕의 부활체가 부하와 여유롭게 대치하자 식었던 마가릿의 광기가 점점 피어올랐다.
그녀는 투사들의 싸움을 구경하는 콜로세움의 관중처럼 조회대에 걸터앉아 팔짱을 끼었다. 옥색 머리칼과 찌그러진 날개가 호기심을 따라 삐죽삐죽 움직여 댔다.
부하 1은 자신의 움직임을 읽는 것 같은 재경의 언행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이 인간은 뭐지? 인간 주제에 어떻게 내 움직임을 읽어내는 거야. 설마 이것도 어빌리티의 일종인가?
마지막으로 류제가 아래(↓) 커맨드를 장식하자 부하 1의 머리가 두 동강 났다. 몸의 회복이 따라가 주지 못했는지 마족이 뒤로 물러나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이걸로 페이즈 2 종료다.
초고도 집중을 하고 있던 재경이 긴장이 풀려 손이 벌벌 떨렸다. 이 떨림에는 기쁨도 포함되어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이 정도라면 ‘게임 오버’를 피할 수 있다고!
“렌, 계속해도 괜찮겠어?”
“이번에는 반드시 핵을 노린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알았어.”
끙끙거리며 동강이 난 머리를 붙이기 위해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꽉 누르고 있던 부하 1이 인상을 불쾌하게 찌푸렸다.
여기서 진다면 마가릿 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전심전력을 펼치기로 한 그녀는 머리가 다 붙었는지 고개를 삐걱거리며 확인했다.
ESC 버튼을 누르면 대기 화면이 뜨며 밥 다 먹고 청소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친절한 게임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지체할 시간을 주지 않고 페이즈 3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부하 1의 마지막 페이즈다.
처음에는 두려움만 가득했던 재경의 눈이 이제 자신감으로 빛났다.
이다음, 그다음에 있을 부하 2와 중간 보스인 병마 페스트와의 대결이 아직 남았지만 그 둘도 충분히 해낼 자신이 생겼다. 괜한 의심 사게 왕녀한테 부탁했을지도.
부하 1이 류제에게 덤벼드는 것을 살핀 재경이 마지막 페이즈의 커맨드를 머리에 되뇌었다.
“위!”
군용 기간트리카의 무전을 통해 류제에게 공격 방향이 전달되었다. ‘강화’ 능력으로 신체 능력과 감각이 상승한 류제가 반응속도 좋게 몸을 움직였다. 재경이 말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공격이 들어갔다.
화가 난 부하 1의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번에도 공격이 읽혔다. 류제 신리가 아니라면 살아있는 인간 따위 알 바 아니지만 날파리가 알짱거리는 느낌은 상당히 불쾌했다.
버러지 같은 인간 주제에 무슨 능력을 펼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당하고만 있었으면서 이제 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유가 뭐야? 뭐냐고!
“나를― 방해―하지 마!”
류제와 대치 중인 그녀가 촉수처럼 팔을 길게 늘어뜨려 멀리 있던 재경을 후려갈겼다. 하지만 그마저도 재경이 가볍게 피하자 자존심이 상한 마족의 움직임이 더욱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재미있어지는군. 인간 주제에 흥미로워!”
제가 자랑하는 부하가 진심으로 나서자 마가릿의 흥분한 동공이 더욱 붉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밀리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유약한 인간들이 역전을 꾀하는 것이 즐겁다. 과연 이래서 마왕의 부활체인가. 옆에 있는 다른 하찮은 인간과 더불어 실망감이 흐려졌다.
“죽어―!”
마가릿에게 실망을 안길 수 없다는 절박감과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밀리고 있다는 짜증, 치욕감 등 부(負)의 감정을 가득 안고 폭주하는 마족이 육체의 껍질을 타파하고 온몸을 괴물처럼 변모했다.
등에는 거북이처럼 포자낭이 솟아나고, 팔은 기괴하게 변질되어 수십 개로 돋아난 촉수가 되었다. 돋아난 뿔이나 날개, 붉은 동공을 제외하면 인간이나 다름없을 줄 알았던 몸이 실은 완전히 괴물이었다.
“류제! 아래, 아래, 위, 오른쪽!”
“깨작깨작 덤비지 말라고, 이 버러지 같은 인간 새끼가!”
몸에 난 기괴한 촉수들을 유도탄처럼 이용한 그녀가 류제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렌의 말을 듣고 움직이던 류제는 [렌이 말을 하고 → 무전으로 연결이 되고 → 말이 들리고 → 피하기]까지의 시간보다 부하 1이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시간이 더 짧아서 순간 움직임이 꼬여버렸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류제가 사정거리 바깥으로 도망을 갔다. 촉수는 유도탄처럼 류제를 따라왔다.
“뭐 하는 거야, 류제! 거기서 그만두면 어떻게 해?!”
“나도 해냈으면 좋겠는데 이게 마음처럼 안 된다고!”
류제가 페이즈 3의 커맨드 도중 이탈하자 재경은 공략 첫 타에 실패할까 전전긍긍한 듯 발을 굴렀다. 그렇다고 류제를 탓할 수도 없는 게 확실히 엄두가 안 날 정도로 공격이 더 빨라진 건 사실이었다.
류제도 반응을 못 할 정도라니. 도중에 이탈하면 커맨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처음부터 되돌아가나? 아니면…….
재경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 부하 1의 공격이 류제에게 집중되는가 했더니 재경에게도 쏟아졌다. 생각할 틈을 아예 주지 않겠다는 목적인 듯하다.
“우악, 우악……! 우아아악!”
암만 최근에 특훈한 덕분에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이 상승했다지만 류제도 상대하기 버거워하는 공격을 재경이 연달아 세 번이나 피한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재경은 아무 생각도 못 하고 다리 사이, 머리 위를 스치는 공격을 피하다가 뒤늦게 부스터를 켜고 도망을 쳤다. 죽는다! 죽어! 나 죽는다! 히이이익!
“류제!”
컨트롤 능력이나 어빌리티가 부족해서 촉수에 어딘가가 꿰뚫릴 것 같은 불안한 움직임을 보인 재경을 지키기 위해 류제가 군용 기간트리카에 딸려있던 나이프를 사출해서 ‘강화’ 어빌리티를 인첸트했다.
군용 나이프를 사용해 촉수를 잘라낸 류제는 도망가는 재경을 들어 저 멀리 던졌다. 두 번째 짐짝 취급에 재경은 죽겠다며 데구루루 구르다가 균형을 잡고 부스터를 켰다.
생각, 생각을 하자. 부하 1의 턴에서 이런 페이즈는 없었다고.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다.
설마……. 한 가정이 재경의 머릿속에 스쳤다.
게임에서는 페이즈 시작 때 주어진 커맨드를 실패하면 하트가 까이는 식이었다. 3개의 하트가 다 까이기 전까지는 다시 똑같은 커맨드로 재도전을 할 수 있었다.
저런 예상치 못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류제의 하트가 하나 줄어들지 않아서 그런 건가? 그러면 류제가 다쳐야지만 커맨드 순서대로 재공략을 할 수 있다는 말이야? 재도전 하려면 전체 체력의 삼 분의 일 정도나 까야 해?
“렌!”
“사지를 잘라내 주마!”
잠깐 방심한 사이에 송곳처럼 날카로운 촉수가 재경의 머리를 노리며 다가왔다. 총에서 발사된 탄도처럼 빨랐다.
공격은 눈으로 보이지만 몸이 피할 수 없는 것을 재경은 직감했다. 재경이 본능적으로 손으로 머리를 막으며 주저앉으려는데 다행히 류제가 제때 와서 군용 나이프로 촉수를 전부 잘라내었다.
힐끗 보이는 시야로 류제는 신들린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십수 개의 촉수를 순식간에 잘라내었다.
“괜찮아?”
“어? 으…응. 고마워, 죽다 살아났네.”
“안심하기는 아직 일러. 역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아니, 그건 안 돼.”
재경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류제가 날 신경 쓴다고 배는 힘들어하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사나이의 자존심도, 미래를 알고 있는 가능성도 모두 포기 못 했다.
“아―하. 하하! 알겠다. 넌 공격을 읽는 이상한 ‘능력’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인간이군? 네가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이 손으로 류제 신리를 각성시킬 수 있다는 거지?”
“각성?”
재경의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타깃을 바꾼다는 소리에 재경이 식은땀을 흘렸다.
“젠장.”
아니, 류제가 체력이 까여야지 다시 커맨드대로 움직일 것 같은데(류제가 체력이 까인다고 해서 커맨드대로 움직일 가능성도 잘 모르겠는데) 공격을 읽을 수 없는 자신을 공격한다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재경은 머릿속이 다 하얘졌다.
“날 각성시킨다니. 무슨 소리야, 그게.”
“개소리지. 마족이 하는 말이야. 흘려들어. 그것보다는 저 마족을 쓰러뜨리는 게 우선이야.”
렌이 당찮은 말은 무시하라며 투덜거렸지만 류제는 저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마족이 그를 아는 것처럼 말한 것도 그렇고 각성이라는 말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들이 말하는 게 혹시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그 일이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재경을 노리는 촉수가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 공격은 모두 류제가 대신 막았다. 렌에게만 오는 공격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류제는 정작 자신에게 향하는 공격 대응에 뒤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류제에게 붙은 재경은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강구했다.
하트는 세 개. 지금 류제가 전체 체력의 삼 분의 일을 잃게 만들어 커맨드가 돌아오는지 확인하는 도박을 하기에는 담보가 목숨이라 다분히 주저되었다.
일단 커맨드는 류제가 크게 다치지 않는 이상 복구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자력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말인데…….
“인간 주제에 감히 날!”
류제가 공격을 쳐낼 수 있는 이유가 그의 ‘강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재경이 그녀의 공격을 읽을 수 있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착각한 마족이 공격을 못 보도록 등에 솟은 포자낭에서 진한 독 안개를 뿜어내었다.
군용 기간트리카의 호흡기 필터 덕분에 중독되는 일은 없었지만 독 안개는 시야를 가렸다.
마가릿 님께서 ‘러다이트’나 ‘옵시그나티오’를 지금 당장 사용하신다면 ‘중독 마법’의 마법 인자가 저들의 유약한 육체를 당장에 찢어놓을 텐데. 그녀는 학교에 설치해 놓은 안티 슬렉터와 안티 어빌리티를 떠올리며 불평했다.
하지만 그녀도 지금 마가릿이 류제를 시험 중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특기인 ‘중독’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를 악물며 감내했다.
순식간에 날아오는 촉수를 류제가 가까스로 쳐냈다. 날아오는 촉수는 잘렸다가도 금세 돋아나서 류제를 공격했다. 무슨 회복이 저렇게 빨라. 인간 맞아? 아, 인간 아니지. 마족이니까.
“어떻게 하지?”
“…방법은 두 가지야.”
가만히 있던 재경이 확고한 목소리로 답했다.
방법이 두 가지나 있다고? 류제가 고개를 돌리려다가 또다시 날아오는 일곱 개의 촉수 공격을 쳐냈다.
“하나는 네 피가 삼 분의 이가 되는 거랑 다른 하나는―”
“뭐? 내가 다치는 거랑 이기는 게 무슨 상관이야.”
“…여튼 다른 하나는 그냥 돌파하는 거야. 류제, 비키랑 기간트리카 연습한 거 기억나? 연막작전?”
“당연히 나지. 설마 너…….”
“그 작전으로 가자.”
아까부터 무슨 자신감인데. 류제는 못마땅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녹색의 독 안개가 껴서 가시거리가 좁아진 이상 렌의 그 ‘동체 시력?’을 믿을 수도 없고, 비키를 상대로 했던 교란 작전이 통할 것 같기도 했다.
마족이 들을세라 재경이 무전을 통해 조심히 작전을 전달했다. 내용은 확실히 비키와 대결했을 때 썼었던 전술의 연장선이다. 체육대회를 위해 합을 맞추었던 것이 지금 도움이 되다니. 류제는 하늘이 도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 가랏! 류제몬!”
“몬?”
부하 1을 커맨드가 아닌 육탄전으로 쓰러뜨리기 위해 출발하는 류제의 엉덩짝을 재경이 시원하게 걷어찼다. 류제는 몬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호에 따라 착실하게 마족이 있는 독 안개로 향했다.
이 독 안개 속에서 그녀를 찾는 것은 쉬웠다. 공격해 오는 촉수를 토대로 위치를 추적하면 되었다. 수비적인 태도로 전환했던 류제가 촉수를 이용해 접근전으로 다가오자 마족이 이제야 재미있게 되었다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진작 이렇게 나왔어야지!”
류제는 그녀의 쾌락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교란을 시도했다. 확실히 렌이 공격 위치를 말해 주지 않으니까 상대하기 버겁다.
하지만 작전대로라면 분명 유효타를 줄 기회가 찾아올 거다. 그래야만 했다. 근데 그걸로 마족을 쓰러뜨리겠다는 건 렌은 마족의 ‘핵’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도박?
뒤이어 소리가 나는 방향을 찾아 날아온 재경이 참전했다. 재경은 류제처럼 공격은 못 하지만 이 독 안개 속에서 마족을 혼란을 줄 목적이었다.
재경은 비키의 말을 기억하고 손에 한 움큼 쥐었던 모래를 마족에게 뿌렸다. 눈은 어떤 생물체에게든 예민한 약점이다. 예상외의 공격에 놀라 마족의 눈알이 찌그러졌다. 시야가 일그러지자 그녀가 촉수를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똑같이 생긴 기간트리카가 양옆을 맴돌며 귀찮게 굴던 중 하나가 공중으로 올라가 독 안개 바깥으로 날아갔다.
“놓칠쏘냐!”
그녀는 모래가 들어간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물질을 털어내었다. 덕분에 하늘로 날아간 한 인간을 잡지 못하고 다른 놈과 대치했다. 이놈이 자신의 촉수를 잘라냈던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흥, 결국 독 안개를 버티지 못한 그 파리 놈을 대피시키고 류제 신리 혼자서만 싸우는 거군. 그 인간은 ‘보는 것’밖에 못하니 보이지 못하게 하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마족이 나이프를 든 인간의 기간트리카를 촉수로 조였다. 인간은 반항하듯 촉수를 잘라냈다. 그녀는 ‘강화’된 나이프를 쥔 손목을 잡아채 조였다.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기계음을 돌리며 발동되었지만 그것도 부족했는지 서서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승리를 확신한 순간 잡힌 손목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벗어나려고 하던 인간이 돌연 촉수를 붙잡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위로 날아올랐던 인간이 마족에게 내려찍기를 시도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는 두 인간을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아니, 이 나이프를 쥔 놈이 그 파리 놈이다. 저 위에 있는 인간이 류제 신리―
“내가 당할 것 같으냐!”
반드시 류제 신리가 자신을 공격한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는 공격 능력이 없는 재경을 내버려 두고 모든 촉수를 류제에게 집중시켰다.
그게 바로 재경이 노리고 있던 바였다. 팔꿈치 관절에 있는 부스터를 최대 출력으로 이끌어낸 재경은 들고 있는 ‘강화’된 군용 나이프로 뒤통수에서부터 마족의 오른쪽 눈까지를 꿰뚫었다.
“어……?”
당연히 류제 신리가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마족은 상종조차 하지 않았던 인간이 ‘핵’을 정확하게 노리자 움직임이 멈추었다. 오른쪽 눈, 그것이 그녀의 핵이 있는 위치였다.
“이럴… 수가! 안 돼, 싫어. 마왕님!”
그녀의 고유 마법인 ‘중독 마법’의 인자가 빠르게 소멸하기 시작했다. 독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서서히 확보되었다.
“오호라. 그 녀석이 굴복했나? 졌어? 패배했구나!”
부하가 죽었는데도 마가릿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마족의 유일한 약점은 그들 몸속 어딘가에 숨겨진 핵이다. 핵만 소멸되면 마족들은 더 이상 살아있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병마족은 육체를 유지하지 못한 채 가글가글 녹아내려 증발했다. 재경이 꽂았던 군용 나이프도 녹은 살점이 엉겨 붙었다가 툭 떨어졌다.
정말이지 게임에서는 미성년자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검열한 게 확실한 거 같다. 우욱, 하고 재경이 헛구역질을 했다.
“괜찮아? 어디 다치지 않았어?”
작전을 지시하다 못해 직접 마족을 죽인 렌의 멘탈이 걱정되어 류제가 내려와 상태를 살폈다.
기간트리카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살점이 치즈처럼 녹는 장면에 충격 먹었을 거다. 나조차도 녹아내린 살덩이가 운동장 모래와 함께 가루가 돼서 날리는 건 보기 껄끄럽다.
류제의 걱정에도 재경은 사나이는 이딴 건 아무렇지도 않다며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런 장면에 정신 팔려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게임 오버’가 걸려 있는걸. 동요할 시간도 부족해.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난 걱정하지 말고 다음 거나 준비해. 너만 믿는다.”
“하지만―”
“온다.”
큰 산을 하나 넘어 조금은 쉬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틈을 주지 않고 다음 차례가 찾아왔다. 부하 2의 첫 번째 페이즈다.
중간 보스인 병마 페스트의 왕은 뭘 하나 했더니 여전히 조회대 꼭대기에 앉아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 마족이 류제를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솔직히 말해서 마족 세 명이 동시에 덤볐으면 공략 시도고 뭐고 그냥 노답일 뻔했다. 마족들이 태생적으로 오만해서 다행이다.
“드디어 내 차례인가. 죽으려면 빨리빨리 뒤지고 내게 차례를 넘겼어야지. 이깟 인간에게 당하다니 마족의 수치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군. 기다리느라 지루해서 눈알 빠지는 줄 알았잖아.”
사악한 미소를 띤 부하 2가 커다란 박쥐 날개를 펄럭거리며 공중에 떴다. 손에는 주먹 크기의 보석이 들려 있었는데 마법의 힘으로 공중에 떠서 천천히 돌고 있었다.
동료가 핵이 파괴되어서 소멸한 것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 그걸 치욕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마족들이란 다들 마음 한구석이 결여되어 있는 놈들뿐인가? 하여튼 미나도 그렇고 저놈들도 그렇고 도통 알 수가 없다니까.
지금 남 생각할 때가 아니다. 부하 1이 처단되었으니 그에 대응하기 위해 안티 슬렉터가 발동될 차례이다.
안티 슬렉터는 수학여행 때 미나가 알라마니 기술관의 관장에게서 빼앗은 S_script 보안 코드를 적용시킨 장치인데 어빌리티와 슬렉터 사이의 신호를 인식하는 어빌리티 인식 센서를 방해해 기간트리카 장갑을 불가능하게 하는 기능을 가졌다. 저게 발동된다는 말은 ‘역병 마법’의 인자가 가득한 주변 공기에 노출된 채 강제로 기간트리카가 장갑이 해제된다는 의미였다.
부하 2가 들고 있는 크리스털은 안티 슬렉터의 발동 스위치다. 본체는 좀 더 크고 1학년 8반 교실에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파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내가 이탈했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이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 내 방독면. 내 방독면 어디 있지?
“렌?”
“잠깐, 잠깐, 잠깐!”
“미천한 인간 새끼들은 땅이나 기어야지 어디서 마족의 영역인 하늘을 넘보고 있어. 주제 파악도 정도껏 해야 추하지 않단다.”
부하 2가 들고 있는 크리스털이 빛나기 전에 재경이 어딘가에다가 던져놓은 방독면을 찾아 부스터를 켜서 달려갔다.
조회대에서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는 저 마족의 사천왕의 ‘역병 마법’의 인자는 몇 번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강력하다.
군용 기간트리카에 정신계 마법은 물론 ‘독 마법’ 필터가 끼워져 있어서 멀쩡했지만 맨몸이라면 숨을 한 번 쉬는 순간부터 손끝이 까맣게 변색되며 정신을 잃을 것이다.
내가 괜히 방독면을 가지고 온 게 아니라고. 아까 저기에 던져 놨었는데 어디로 간 거야?
“그깟 기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미물 주제에 감히 마족과 동등하다 착각하면 곤란해. 자, 어서 가축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렴.”
“류제, 너도 일단 피해!”
“한 번씩 주제 파악을 시켜주지 않으면 저들이 정말 잘난 줄 안다니까.”
그녀가 학교 어딘가에 설치해 놓은 안티 슬렉터, ‘러다이트’를 작동시켰다. 파장이 큰 소리가 구를 그리며 재경과 류제에게 다가왔다. 수학여행 때와도 같은 지진이 운동장 일대에 퍼졌다.
파장이 도달하기 전에 재경이 방독면을 발견했다. 아까 부하 1이 포자낭 폭발을 일으킬 때 폭발에 휩싸여 멀리 굴러간 모양이다. 재경이 방독면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안티 슬렉터의 파장이 재경을 덮쳤다. 굳은 찰흙이 바스러지듯 재경이 장갑하고 있던 군용 기간트리카가 손끝부터 해제되기 시작했다.
“세―이프!”
기관지를 보호하고 있는 헬멧까지 해제되기 직전 재경이 방독면을 얼굴에 씌웠다. 부스터마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재경은 제동을 하지 못하고 그 속력 그대로 데구르르 굴렀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간트리카 긴급 탈출 낙법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래도 온몸이 교통사고 난 것처럼 끔찍하게 아팠다.
“으으윽…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