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6)
‘환영’을 대응하던 류제는 몸이 점점 둔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반응이 한 박자 늦어졌다. ‘강화’ 어빌리티를 사용해도 움직이는 몸과 생각이 조금씩 엇나가고 있었다.
이게 바로 네 번째 어빌리터의 능력인가. 무슨 어빌리티지? 능력을 모르니 공략법을 찾기 까다로웠다.
“으윽. 이런.”
“괜찮아?”
그때 마찬가지의 이유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던 니냐롯트가 고양이녀의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고양이녀가 그 틈을 타서 왕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근거리 공격을 담당하던 류제와 비키 둘이서 막아냈다.
원래라면 저 고양이녀의 공격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만큼 다루기 쉬운데 미지의 마지막 어빌리티 때문에 몸이 말 같지가 않았다. ‘강화’ 어빌리티가 아니었으면 부스터에 의존하는 것도 힘들었을 거다.
이건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저 고양이의 공격이 방어에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감각을 둔하게 하는 증상을 감당한 채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마비감,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곤란하다.
덩굴 속 어둠, 그에 섞인 환영. 가짜 공격들마저 아프다고 생각될 정도로 감각이 엉망진창이었다. 이러다 지는 것은 사양이다.
우리 팀이 불리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던 류제는 몽롱해지는 감각을 억지로 깨웠다. 어쩌면 고양이녀의 공격이 만능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냐항! 어서 항복하라냥. 그러면 그 애한테 몹쓸 꼴 당하지 않아도 된다냥.”
“정정당당한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치사하게 나서는 너희 팀에게 우리가 항복할 것 같아?”
비키가 고양이녀를 노리는 척 빛이 새어 들어왔던 틈새를 향해 화염구를 날렸다. 짐승형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던 고양이녀는 보기 좋게 피하며 히죽거리다가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고 그 후드득 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본체는 몸을 사렸지만 고양이녀를 표방한 다른 환영들은 마비 독에 중독된 그들에게 혼란을 주었다. 류제가 억지로 강화시킨 몸을 움직이던 찰나 도망가는 고양이녀를 발견하고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비키가 뚫어버린 틈을 메꾸며 다시 자라난 덩굴이 비를 막자 그제야 슬쩍 나타나 다시 눈동자를 비추는 걸 보아하니 그의 생각이 적중했다.
어두운 곳에서 ‘환영’과 협공한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이 덩굴 안은 저 고양이녀가 홀로 근접전을 감당하기에는 좁은 편이었다.
도망갈 수 있는 장소도 한정적인데 근접에 강한 내 어빌리티를 알면서도 굳이 덩굴로 전부를 막아버린 이유는 왕녀가 내리는 비를 얻고 싶다는 것도 있지만 저 고양이를 물에 닿지 않게 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지.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해도 그건 못 버티는 건가.
“저 팀은 근접전 위주인 저 고양이만 공격이 가능한 듯해. 나머지는 전부 보조 역인 독특한 구성이야. 지금 우리 감각을 엉망으로 만드는… ‘마비’ 쪽도 공격보다는 보조밖에 못 하는 것 같아.”
남은 한 명의 어빌리티에 대한 분석을 끝마친 미나가 힘겹게 정보를 전달했다. 이 마비 독은 인간의 몸을 흉내 내고 있는 미나에게도 꽤 버거웠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이런 불쾌한 감각을 선사한 4반의 시드 팀들에게 반드시 끔찍한 악몽을 선사해 주겠다며 미나가 이를 갈았다.
“마비? 디버프 계열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런 능력으로 우리를 농락하다니. 숨지 말고 모습을 드러내서 싸우란 말야!”
“이기면 장땡이냥.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람더러 치사하다니 너무하지 않냥. 우리 능력이 이런데 어쩌라는 말이냥. 이걸로 종합 우승은 우리 차지냥!”
“턱도 없는 소리. 그거 알아? 짐승은 불을 무서워하는 거.”
비키는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덩굴을 없애기 위해 화염구를 날렸다. 하지만 덩굴은 어림도 없을 만큼 빠르게 자라나서 그들을 가두었고, 상황은 원상 복귀가 되었다. 허무했지만 비키는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제 쓸모가 없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마비’ 쪽 말인데.”
어빌리티 쿨타임이 끝난 비키가 고양이를 상대하는 틈을 타 뭔가를 더 알아낸 미나가 디버프계의 치명적인 약점을 이야기했다.
덩굴에 고양이, 마비 독까지 세 개의 어빌리티가 ‘물’이라는 것에 상성으로 얽혀 있었다.
“이야기 할 틈이 있냥!”
“성가시기는.”
비키를 넘어서 그들을 방해하는 고양이녀를 상대하기 위해 그들은 대화를 모두 군용 기간트리카의 무전으로 전환했다. 고양이녀의 환영을 흐트러뜨리며 간단한 작전을 짠 그들이 서로의 역할을 재확인했다.
“위치는 알아냈어?”
“여기서 동남쪽, 약 5미터 떨어진 곳이야. 접근할 수 있겠어?”
“물론. 왕녀님, 다시 한번 부탁할 수 있을까요?”
“집중력이 많이 흐려지긴 했다만 충분히 가능하다.”
비틀거리던 니냐롯트가 눈을 감고 슬픈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파고들어서 억지로 되뇌어본다.
어마마마가 돌아가시고 이상해지신 아바마마. 아바마마는 예전처럼 상냥하게 웃어주시지 않는다. 꿈속에서는 마족들이 쳐들어와 키아나트리체의 모든 것을 파괴한다.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람들이 나를 원망하며 손을 뻗는다. 왜 알고 있었으면서 그들을 지키지 못하였느냐고 피눈물을 흘린다.
니냐롯트가 눈을 뜨자 아까보다 에너지의 양이 다른 강력한 번개가 덩굴을 내려찍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덩굴 돔의 윗부분이 타들어 가서 뿌리를 지키고 있던 ‘만생’ 어빌리터까지 타격이 갔다. 연이어 두 번, 세 번, 네 번.
이대로 끝낼 수 있다면 좋겠다만 그녀가 칠 수 있는 번개는 무한이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 덕분에 덩굴을 뚫고 환한 빛이 들어오자 그 틈을 노린 근거리 공격 역 두 사람이 서로 맡은 바를 확인하고 순식간에 흩어졌다.
비를 가려야 하는 덩굴이 연거푸 번개를 맞아 재생을 따라가지 못하니 상대 팀은 작전 수행에 차질이 생겼다. 물에 약했던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가 정신을 못 차리며 도망을 다녔다.
두 사람은 그동안 궁지에 몰렸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환영과는 구별되는 고양이녀의 움직임을 집어냈다. 류제가 고양이녀 본체를 담당하기로 했다.
고양이는 뒷목을 잡으면 가만히 있지. 라고 뻘생각을 한 류제가 그녀의 뒷목 부분을 잡으려다가 손톱으로 할퀴일 뻔했다.
“어림도 없냐― 히이익!”
다행히 비가 후두두 떨어지는 바람에 고양이녀의 움직임이 굳었다. 버둥거리는 고양이녀의 팔을 뒤로 꺾어 정강이를 짓누른 류제가 성가신 고양이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이건 렌에게서 배운 건데 관절 부분을 누르면 잘 못 움직인다나?
“후냐앙! 이거 놔라냥. 난 지상 최강의 기타리스트란 말이양. 다치지 않게 세심하게 다루라냥!”
“네가 우리를 세심하게 다뤄주지 않았잖아.”
번개 소리가 하나둘 더해 가니 고양이녀를 도왔던 수십 개의 환영들이 흐려졌다. 공기가 순환되고 독이 빗물에 씻겨나가자 감각이 사라졌던 몸에 점점 기운이 돌아왔다. ‘마비 독’이 수용성이라는 것을 발견한 미나 덕분이다.
온 힘을 다해 비를 쏟아낸 왕녀가 뇌전을 연이어 다섯 번째로 후려갈겼다.
“꺄아앗!”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어빌리티를 아껴두고 있던 니냐롯트가 한꺼번에 ‘만생’ 어빌리터의 위로 번개를 내려찍자 상대 팀이 숨어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미나가 분석했던 위치대로였다.
류제네 팀도 4반의 시드 팀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류제네 팀이 ‘덩굴’이라고 알고 있는 ‘만생’ 어빌리터의 두 다리가 반드시 지면에 붙은 상태여야 어빌리티가 발현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녀가 바로 이 계획의 핵심인데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고 말자 당황한 ‘만생’ 어빌리터가 붙잡힌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를 타박했다.
“뭐 하는 거야! 날 제대로 지켜야지!”
“하지만… 비가… 냥……!”
“이렇게 되기 전에 제대로 잘 처리해야 할 거 아냐. 뭘 한 거야?”
“후냐앙.”
제일 싫은 비를 맞으면서 류제 신리를 혼자 상대하다니 그게 가당키나 하는 말이냥. 비키 셀로니아의 화염구도 까다로운데 보통 사람은 수 분 이내로 기절하는 마비 독에 세 번 이상 접촉했는데 멀쩡하게 움직이는 괴물을 어떻게 동시에 처리해.
점심시간에 있었던 댄스 동아리의 공연이라면 모를까 애초부터 토너먼트에 별 관심이 없던 고양이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선방한 거라며 억울해했다.
“윽, 으윽, 읏! 그만!”
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어빌리티 조절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생 어빌리터는 모습이 드러났어도 자리를 유지하며 내리는 비로 수분을 흡수해 상태 수복을 시도했다.
“내 비를 써먹다니 재미있구나.”
하지만 덩굴의 생명력이 다 꺼질 때까지 번개를 내리찍어 몰아붙인 니냐롯트는 마침내 상대 팀의 기간트리카를 명중시켰다.
“꺄악……!”
“이제 네 독은 쓸모없어졌네.”
덩굴 속에 몸을 숨겨 고양이녀가 공격하는 틈을 타 류제네 팀원들에게 디버프를 걸던 ‘마비 독’ 어빌리터는 약점을 눈치채고 만 류제네 조를 얄미워 죽겠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니냐롯트를 앞에 둔 그녀는 지지 않겠다며 눈을 부라리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주변에 있던 독이 빗물에 씻겨 나갔다고 하더라도 몸에 침투한 디버프는 아직 정화되지 않았을 거다.
“어림없지.”
고양이를 처리하고 나서 사각지대로 숨어든 류제는 모습을 드러낸 ‘마비’ 어빌리터가 왕녀를 공격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미끼를 문 사냥감을 습격한 류제가 ‘마비’ 어빌리터를 지면에 처박았다. 덕분에 달려들던 그녀를 아래로 깔고 스노보드 타듯 미끄러져 버렸다.
붙잡힌 그녀가 마지막 발악으로 디버프를 강하게 걸었지만 류제는 미나를 통해 그녀의 어빌리티가 독 계열이라는 것을 파악하자 ‘해독력 강화’로 디버프를 해제해 버렸기 때문에 효과는 미미했다.
“넌 현악기의 적이야!”
“뭐? 여튼 미안.”
류제는 상대방의 슬렉터를 빼앗아 강제로 기간트리카를 장갑 해제시켰다.
“이제 남은 건 너 혼자다.”
고양이, 덩굴, 독 모두 리타이어되고 혼자 남은 ‘환영’ 어빌리터가 비키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했어도 류제처럼 내성을 강화해서 독을 해독할 수 없는 비키와 니냐롯트는 연이은 어빌리티 사용으로 지친 데다가 감각이 둔해진 상태였고, 미나도 그를 표방하고 있었으니 류제네 팀도 당장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류제뿐이었다.
나머지 팀원들과 합류한 류제가 뚜둑, 몸을 풀었다. 저 어빌리터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승리는 우리 거야.”
“하하… 몰락한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님. 자만하지 마시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누가 말해주지 않았나요?”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지. 네깟 게 감히 셀로니아 가문을 입에 올리지 마. 유리함을 독점하기 위해 숨어만 있던 너와 달리 셀로니아 가문은 비겁하지 않아.”
“비겁하다니요. 현명하다고 말해 주세요.”
4반 시드 팀의 ‘환영’ 어빌리터는 삼류 악당 렌 지미처럼 그리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4 대 1. 순식간에 뒤집어진 불리한 상황에도 기죽지 않고 빈정거리는 그녀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제 능력을 폄하하지 말아주세요. 적어도 지금은 제가 당신보다 강하니까.”
“아직도 발악할 셈이야? 혼자 남았는데 그냥 항복하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가 일대에 강한 환영을 난사했다. 아까처럼 모든 사람에게 같은 환영을 보여 주는 능력과 다른 보다 더 악한 능력이었다.
4반 시드 팀인 그들과 붙었던 팀 중에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던 사람이 많았던 이유가 바로 ‘환영’을 보여 주는 저 어빌리티 때문이었다.
‘마비’에 약해진 류제의 팀원들에게 환영은 쉽게 침투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고작 준우승으로 끝낼 수는 없었던 그녀는 상대방이 가장 싫어하는 기억을 건드리는 표독한 짓을 시도했다.
어지러운 시야 속 ‘환영’ 어빌리티를 통해 보이는 것은 비키가 어렸을 적 그녀가 살던 저택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에 숨어있다. 비키는 이 기억을 알고 있었다.
“무…무슨… 싫… 나한테 뭘 보여 주는 거야!”
“비키, 진정해. 이건 환영일 뿐이야!”
맞아, 환영일 뿐이다. 니냐롯트는 눈앞에 보이는 아버지의 절규와 어머니의 시체, 어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도 무덤덤했다. 이미 저 기억은 지금이 아니더라도 그녀를 많이 갉아먹었다.
“모…모두 정신 차려. 이런 환영은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해.”
힘겨운 척 미나가 무전으로 팀원들을 격려했지만 강한 정신계 마법을 사용하는 그녀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마비’ 때문에 몸이 지릿지릿하기는 하지만 움직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은 나빴다.
고작해야 새파랗게 어린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전인데. 미나가 속으로 투덜거렸다. 감히 몽마이자 업마 서큐버스의 왕 이 몸을 정신계 어빌리티로 공격하다니. 용기가 가상하다.
“그만해. 내 머릿속에서 나가!”
“비키, 그만둬!”
그것이 제 팀원마저 공격하자 말리려는 류제가 손을 뻗었다. 그때 류제는 자신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뻗은 손은 추락하는 렌을 향해 있는 채다. 달려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구해야 하는데, 어서 빨리……!
일족이 멸족했던 그때의 기억에 트라우마에 빠진 비키가 난사하는 화염을 미처 피하지 못한 니냐롯트가 추락했다.
―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비키 셀로니아, 갑자기 화염구를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아 식별이 불가능해진 것일까요?
“그럴 수가! 비키 셀로니아, 저 모자란 것이 감히 저하를 다치게 하다니. 당장 끌어 내려서 태형을 내리지 못할까!”
“윽… 시끄러.”
니냐롯트가 비틀거리자 관객석에서 응원하던 루이나 알로이드가 칼을 꺼내 들어 지금 당장 쳐들어가겠다고 난리를 쳤다. 재경은 어련히 잘 해낼 왕녀를 한 살배기 애 취급을 하는 루이나의 팔불출에 질색하며 혀를 찼다.
“그렇게 류제네 팀을 이기게 하고 싶었으면 네가 결승전 상대라도 되지 그랬냐. 괜히 옆 사람 시끄럽게 난리야.”
“거기 형편없이 생긴 놈. 감히 왕녀 저하의 최측근인 내게 뭐라고 불평한 거지? 나에게 하는 비방은 저하에게도 향하는 것. 불경죄를 묻겠다!”
빈정거림을 그 소란 속에 어떻게 들은 건지 루이나가 잘도 재경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잽싸게 세라의 뒤에 붙은 재경이 루이나의 시선에서 도망쳤다.
그런데 뭔가 데자뷔가 느껴진다. 어라, 분명 렌 지미가 왕녀에게 빈정거리자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대신 정의 구현을 한 장면이 있었지.
근데 그 옆에 쌤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세라 쌤이 경기를 보러 오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적어도 렌 지미의 옆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으응?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되었나?
“너, 류제 신리 그 변태와 같이 다니는 열받게 생긴 놈이었지. 내 두 눈에 똑똑히 기억하겠다!”
“6반의 루이나 알로이드지요? 다른 반 학생을 위협하는 행동은 그만두시기 바랍니다.”
“…미…밀로니 선생님? 하지만 제가 섬기는 분은 왕녀 저하. 아무리 존경스러운 밀로니 선생님이라도 다른 사람의 명령은 듣지 않습니다!”
“여기는 학교랍니다, 루이나 학생. 왕궁이 아니라. 친구는 다. 같.이. 친.하.게. 지.내.야.죠?”
웃으면서 화내는 게 주특기인 세라가 루이나에게 무서운 미소를 지었다. 늘 보여 주는 미소처럼 섹시하게 눈매를 꼬는데 전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천하의 루이나가 겁에 질려 꼬리를 말았다.
“좋아요. 착한 학생이라 선생님은 기쁘답니다.”
어찌 되었건 재경은 덕분에 루이나에게 정의 구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기에 렌 지미에게 위험으로 다가올 만한 게 있는지 주변을 점검한 재경이 경기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엔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류제가 이상했다.
그는 또다시 그 감각을 느꼈다. 환영을 한번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온몸이 그때의 그 감각을 되살렸다. 거기에 잡아먹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휘둘렸다.
만약 내가 거기서 렌을 놓쳤다면. 렌이 쓰러지는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울컥, 그의 영혼 속에 있는 다른 기운이 술렁거렸다.
“안 돼, 류제!”
그 기색을 읽은 미나가 외쳤다. 여기서 마기를 보이면 곤란하다. ‘저놈들’에게는 샐러맨더 율폰이 해놓은 말이 있단 말이다. 100년간의 계획이 엉망진창이 될 거야!
인자를 건드린 미나가 꿈에 침범하는 마법으로 류제의 정신을 비집고 들어갔다. 억지로 마왕의 힘을 억누른 그녀가 강제로 마법을 덧씌웠다.
아직 각성하지는 않았어도 자신보다 상위 개체인 마왕의 혼이 담긴 정신에, 하물며 깨어있을 때 강제적으로 침입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도 살짝 버거웠다.
“괜찮아? 류제, 정신이 들어?”
기간트리카 속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린 미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덕분에 류제가 정신을 차렸다.
“미안. 덕분에 정신 차렸어. 왕녀. 넌 어때?”
“멀쩡하다.”
‘환영’ 어빌리터가 보여 주는 환영은 어빌리티를 발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떠올리는 것들이라 니냐롯트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비키의 화염구에 맞았을 때 진작 정신을 차렸다.
니냐롯트는 4반 시드 팀의 전술에 기분이 상했다. 하물며 감정을 매개로 어빌리티가 작동하다 보니 그녀는 슬픔을 적들에게 이용당한 기분이라 몹시 불쾌했다.
“난 절대 지지 않을 거야!”
류제의 팀이 환영을 하나둘 극복하자 마지막 발악을 하는 그녀는 분신을 만들어 어빌리티를 난사했다. 그에 맞서는 니냐롯트가 마지막 번개를 내리찍었다. 환영이면 전류가 통하지 않을 터.
능력치를 수배로 강화한 류제가 기간트리카를 타고 올라오는 미세한 전기, 즉 환영이 아닌 진짜 기간트리카를 확인했다. 미안하지만 이기는 건 우리 팀이야.
경기 종료를 알리는 긴 버저 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결승전의 끝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8반 시드 팀― 승리.
―네― 1학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역시라고나 할까, 4반도 선방했지만 8반의 유망주들을 이기지는 못했군요. 1학년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좋은 시합이었습니다.
―특히나 니냐롯트 왕녀님과 류제 신리의 조합이 괜찮았어요. 이번에는 활약이 저조합니다, 비키 셀로니아. 셀로니아 가문은―
사회자가 뭐라 뭐라 떠들어대건 관심 없었던 류제가 자리에 주저앉은 비키에게 향했다. 환영에 당해 얼이 빠진 비키는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비를 맞고 있었다.
비키가 어떤 종류의 환영을 봤을지 짐작할 수 있었던 류제는 기운이 없는 그녀가 어색했다. 어깨를 한 번 툭 쳐준 그는 말없이 지나쳤다.
승리를 했지만 니냐롯트도 한참을 가만히 서있었다. 비가 천천히 그쳐갔다. 곧 깊은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그대는 잘해냈다.”
마음이 쓰였던 니냐롯트가 비키를 격려했다. 비키가 고개를 들었다. 기간트리카의 헬멧에 가려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과연 그럴까’라고 묻는 것 같았다.
비가 완전히 그치자 니냐롯트가 군용 기간트리카 헬멧을 수동으로 해제했다. 화염구에 맞고 나서 어딘가에 부딪혀서 그런가 그녀가 늘 차고 다니던 비녀가 엉망으로 부서져 있었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 불의의 사고로 부서진 왕녀의 비녀. 그것이 바로 재경이 체육대회 중에서 유일하게 목 빼고 기다리던 왕녀 이벤트의 시작이었다.
장신구로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던 뒷머리가 흐트러진 것을 느낀 니냐롯트가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은 비녀를 집었다. 마비가 여태 풀리지 않아 손에서 느껴져야 할 꺼끌꺼끌한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머리에 걸린 비녀를 조심스레 뽑아내니 곧게 뻗어있어야 할 비녀 한쪽이 썩은 감처럼 매달려 있었다. 아끼던 비녀가 결국 망가지고 말았다.
줄기 하나만 간신히 이어진 동백나무 비녀를 그녀가 눈에 채웠다. 어릴 적 선물 받은 그날부터 하고 다녔던 소중한 비녀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에 늘어나는 예쁜 장신구들은 계속 바뀌어도 이것만큼은 늘 마지막에 머리에 꽂았다.
대기실에 있던 물병을 들어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땀에 젖은 머리를 씻어 내린 류제가 이제 살겠다며 머리를 털었다.
환영의 여파로 자리에 주저앉아 멍때리고 있는 비키도 그렇고 손에 든 뭔가를 가만히 쳐다보는 왕녀도 그렇고.
그가 입을 떼려던 그때, 관계자가 2학년 경기를 위해서 망가진 경기장을 수복해야 하기 때문에 경기가 끝난 학생들은 나가야 한다고 말을 전했다.
이겼지만 둘 다 상당히 지친 거겠지. 특히나 비키는 ‘환영’에서……. 괜찮으려나.
“다음 경기가 있대. 빨리 퇴장하자.”
류제가 비키에게 공지를 전달했다. 그러자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비키가 대기실로 걸어갔다. 옆에서 상태를 봐주던 미나가 더 놀랄 정도였다.
비키는 왼팔에 찬 슬렉터를 만지작거리더니 기간트리카를 장갑 해제하고 류제가 했던 것처럼 시원한 물을 머리에 붓고 정신을 차렸다.
“꾸물거리긴. 먼저 간다? 미나, 나랑 해독하러 가자.”
“아… 응! 류제 너도 빨리 나와.”
붉은 말총머리를 돌린 비키의 초록빛 눈동자는 기죽지 않고 투지로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역시 천하의 비키 셀로니아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 없다며 류제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미나도 비키를 따라갔겠다, 다음은 왕녀 니냐롯트의 차례였다.
“왕녀. 이제 가야 해.”
“…그래, 지금 나가마.”
니냐롯트도 비키처럼 슬렉터 가운데 버튼을 눌려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했다. 군용 기간트리카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몸이 시원하게 드러났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로고가 그려진 분홍 반팔 티셔츠에 짧은 회색 돌핀 팬츠, 그 안에 검은 스판으로 된 기간트리카용 체육복 반바지를 받쳐 입은 그녀는 다른 여학생들처럼 학교의 공식 체육복을 입고 있을 뿐인데 혼자 다른 옷을 입은 것 같았다.
특히나 우수에 젖은 긴 속눈썹은 초승달 나룻배처럼 미려한 곡선으로 뻗어 이슬이 내려앉아 한 폭의 그림을 자아냈다. 누구나 저런 미를 마주한다면 숨이 멎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 때문에 미의식이 조금 엇나가 버린 류제는 요정 같은 왕녀를 보면서도 조금도 이성의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류제는 그녀의 무덤덤한 표정이 쓸쓸함을 담은 것을 언뜻 깨달았다.
그녀에게도 과도한 어빌리티 사용에 대한 ‘대가’가 있었다. 니냐롯트는 결승전 내내 많은 뇌전을 내리찍은 바람에 약간의 탈진 상태였다.
자신을 다잡은 그녀가 망가진 비녀를 손에 꼭 쥐었다. 비틀거리며 대기실로 향하던 니냐롯트는 ‘가시’ 어빌리터가 엉망으로 만든 경기장 바닥 울퉁불퉁한 부분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괜찮아?”
“별것 아니다. 아직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극심한 어지러움이 뒤늦게 동반되었다. 아직 마비 독도 해독이 되지 않아 손끝이 저려왔다. 그녀가 마비감으로 둔해진 손으로 비녀를 붙잡았다. 감각이 없는 손끝이 약간 떨려왔다.
“읏……!”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발을 디딘 왕녀가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거칠거칠한 경기장 바닥에 쓸린 무릎에 상처가 생겼다. 쓸린 상처에 방울방울 피가 고였다.
그럼에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 대기실로 향하려고 하는 왕녀를 보던 류제는 잠시 경기장 주변을 살폈다.
관객석도 곧 있을 2학년의 대결을 위해 사람들이 어수선하게 자리를 이동하는 중이었다. 여장을 한 채 응원 수술을 들며 치어리딩을 하던 유네와 응원 팀도 다른 곳으로 이동 중이다. 평소에는 잘만 보이던 왕녀의 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가. 여기서 내버려 두면 또 친위대 쪽에서 왜 보필하지 않았냐며 치근거리겠지. 하여튼 귀찮다니까.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라는 건지 원.
“걸을 수 있겠어?”
“물론. 아무렇지도 않다.”
말과는 다르게 다리에 다시 힘이 풀린 왕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증상이 심각한 듯 보기 드물게 얼굴을 구긴 왕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렇지 않은 것이 전혀 아니었다. 류제는 왕녀가 마비 독에 유독 심하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바로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데 그 잘난 친위대도 보이질 않았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실례할게.”
‘강화’ 어빌리티 덕분에 혼자만 멀쩡했던 류제가 일어나질 못하는 왕녀를 대신 공주님처럼 안았다.
지금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이긴 하다만 친위대에 의해 또래 남자의 접근이 막혔던 니냐롯트는 류제에게 안겼다고 생각하니 문득 쑥스러웠다. 그건 류제도 마찬가지였는지 덤덤한 척 말을 덧붙였다.
“루이나가 시끄러울 것 같으면 네가 알아서 잘 말해 줘. 걔는 너와 관련된 일이면 앞뒤 보지 않으니까 제일 성가시거든.”
“그녀라면 내가 다치는 것을 보고 졸도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루이나인데. 하아, 여러모로 내 주변 사람들 때문에 그대가 고생이군.”
“요즘엔 그래도 좀 나아.”
“그대가 유명해졌기 때문이겠지. 루이나는 그걸 못마땅히 여기는 것 같다만.”
니냐롯트가 오늘 있었던 농구 경기와 1학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 대결을 떠올렸다.
왕녀의 걱정대로 세라의 비호 아래에 있는 재경을 바득바득 주시하던 루이나는 승리 판결이 나기 직전에 꼬르륵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중이었다. 이유는 경기 막바지에 왕녀가 비키가 난사하는 화염구 공격을 맞고 쓰러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 루이나를 보던 세라와 재경은 아무리 상대가 왕녀라도 저런 팔불출도 없다며 탄식했다.
토너먼트 결승전을 마친 1학년 학생들은 자신의 학년을 응원해야 하는 2학년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며 뒷자리로 물러났다. 담당 반 학생들의 경기를 관전한 세라도 만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친 학생들을 치료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녀도 슬슬 천막으로 돌아가야 했다.
“렌 학생, 선생님은 이제 돌아가야겠군요. 체육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아픈 학생은 없어야 하니까요. 렌 학생은 친구들과 같이 있을 건가요?”
“앗! 아뇨, 같이 가요. 왕녀님 때문이죠?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데.”
“잘 보고 있었네요. 친구들이 걱정되는가 봐요?”
세라가 경기장 관련자들이 다음 경기를 위해 바쁜 사이 왕녀를 안고 통로로 들어가는 류제를 가리켰다.
그런 건 아닌데. 재경은 세라가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서 괜히 미안해졌다. 내가 세라 쌤을 따라가는 건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 때문이란 말야. 어차피 여기까지는 스토리대로 가는 거라 다들 무사하다는 것쯤은 안다. 아주 조오금 상태가 궁금할 뿐이다.
“호호호. 자, 그럼 어서 갑시다. 아차, 이것도 잊지 말고 챙겨야지.”
“아, 쌤. 그거 버리면 안 돼요?”
“안 돼요. 선생님 책상에 예쁘게 놔둘 거예요.”
재경의 투정을 세라가 상냥하게 거절했다. 손에는 재경이 밤을 새워 만든 응원 도구가 들려 있었다.
저걸 교무실에다가 놔둔다고? 진짜?
재경은 창피했다. 귓불만 붉어져서는 상대가 상대인지라 성질도 못 내고 입만 달싹거리는 게 못난이 인형처럼 귀엽다.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잘 만들었는데.”
“벼…별로 부끄러워한 거 아닌데요.”
“그런데 왜 그렇게 불만스러운 얼굴인가요? 선생님 책상에 놔두는 게 싫나요?”
“윽. 딱히 상관없잖아요.”
“그렇죠? 상관없죠? 후후후.”
부끄러워하는 재경을 살금살금 놀려댄 세라는 어쩜 이렇게 놀리는 맛이 있는 성격일까 제 학생이 참으로 깜찍했다.
나잇값 못하고 심술궂게 장난치는 세라에게 당한 재경은 선생님이 저래도 되나 불평했다. 이런 선생님은 처음이다. 그는 세라와 나란히 관객석 통로를 통해 기간트리카 경기장 바깥으로 나갔다.
* * *
왕녀를 품에 안은 류제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지만 무시하고 경기장 바깥으로 나갔다. 보수를 위해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관계자들의 흐름을 거슬러 밖으로 나오니 아침처럼 해가 비쳤다.
몸에 힘이 풀린 니냐롯트는 류제의 품에 푹 안겼다. 그의 어깨와 목에 팔을 두른 그녀의 손에는 망가진 비녀가 들렸다.
미남미녀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루이나 알로이드가 봤더라면 뒷목 잡고 쓰러졌을 전경이었다. 혹시라도 친위대에게 시비를 받기 전에 비가 와서 질척해진 운동장을 가로지른 그는 빨간 십자가가 달린 천막에 도착했다. 안에는 비슷한 타이밍에 나왔던 세라와 재경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렌! 여기서 뭐 해? 내 경기 안 봤어?”
렌을 발견한 류제가 빠른 걸음으로 뛰었다. 심장이 맞닿은 부분에서 류제의 두근거림을 느낀 왕녀는 류제 신리와 렌 지미의 돈독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나오길래 따라 나왔지, 짜샤. 경기 잘 봤다. 덩굴 줄기 때문에 반절은 못 봤지만 이겼으니 잘한 거겠지. 나 같으면 한 방에 나가떨어졌을걸.”
“하아, 정말 고생했지. 없애도 계속 나와서 짜증도 나고.”
“4반 시드 팀은 어땠나요?”
“왕녀가 없었으면 졌을 거예요.”
류제가 니냐롯트를 조심스레 의자에 앉혀 주었다.
여전히 상냥한 자로군. 칭찬이 쑥스러워진 니냐롯트가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내가 감정 조절을 못해 덩굴이 그렇게 자란 것일 텐데 그리 말해주다니 기뻤다.
“수고가 많았다. 무겁지는 않았나?”
“어차피 난 ‘강화’ 어빌리터잖아.”
“그렇겠지. 다행이군. 친위대 일도 있는데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줘서 고맙다.”
“별일 아니었는데, 뭐. 근데 그건 뭐야? 아까부터 들고 있던데.”
“아, 이것 말인가?”
세라가 니냐롯트의 치료 준비를 하는 사이 류제가 왕녀가 쥐고 있던 비녀를 발견했다.
재경은 누가 미연시 주인공 아니랄까 봐 메인 히로인과 그럴싸하게 호감도 이벤트를 진행하는 류제를 보고 입가를 히죽거렸다. 왕녀가 들고 있는 것. 저게 바로 이번 왕녀의 호감도 물품인 ‘망가진 비녀’였다.
“불의의 사고로 망가져 버렸다. 소중했던지라 부러진 이음매가 아쉽구나.”
“고쳐서 쓰는 건 어때?”
“아니, 됐다. 이것도 운명. 이런 것에 의존할 때도 이제 끝났다는 의미겠지.”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바마마께서 나를 돌아봐 주실 리도 없고. 깊게 한숨을 쉰 니냐롯트가 체념하고 류제에게 그 비녀를 넘겼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가 이걸 처리해 줄 수 있는가? 내 손으로 버리기엔 눈에 밟히는구나.”
“버린다고? 아깝다. 그래, 알았―”
“그래류제가고쳐준다니까조금만기다려봐!”
류제가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선택지를 고르기도 전에 재경이 비녀를 가로채서 류제를 끌고 쌩하니 도망갔다.
너무 빨리 말해서 뭐라고 말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만 비녀는 니냐롯트의 손에서 사라져 있었다.
“어머, 렌 학생과 류제 학생은요?”
“…글쎄요.”
고생했을 학생들에게 선생님들이 마시고 있는 비싼 음료수를 선물로 주려고 했던 세라가 이동식 냉장고에서 병을 꺼내 들다 말고 눈을 끔벅거렸다.
그들의 행방을 궁금해할 선생님과 왕녀를 뒤로하고 재경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류제는 이게 대관절 무슨 일인가 영문을 몰랐다. 날치기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재경이 냉큼 저지른 일은 류제의 입장에서는 너무 뜬금없었다.
“저기, 잠깐! 렌, 갑자기 왜 그래?”
“너, 설마 그거 진짜 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본인이 버려달라는데 버려줘야지.”
“이 여자 마음도 모르는 멍청이 같은 녀석!”
멈춰선 재경이 입술을 까뒤집으며 얼굴을 구겼다. 자기도 여자 마음은 개뿔 모르지만 히로인들을 전부 공략해 봐서 알고 있기 때문에 진짜로 ‘버린다’를 고르는 바보 같은 류제의 선택에 속이 터졌다.
혹시나 따라와서 망정이지 개입 안 했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이놈은 내가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면서 호감도 이벤트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할지도 몰라.
“그럼 뭐 어떻게 해.”
“고쳐줘야지, 이 바보야!”
“근데 왕녀는 나한테 버려달라고 부탁했는데.”
“넌 왕녀님 눈에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못 봤냐? 그걸 곧이곧대로 들으면 어떻게 해?! 잔말 말고 고쳐줘!”
재경이 어서 고치라며 류제 손을 이용해 비녀를 억지로 조립했다. 이걸 고쳐줘야 호감도가 상승한단 말이야.
왕녀에게서 비녀를 건네받은 류제가 ‘버린다’, ‘고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고친다’를 선택하면 ‘이상하게 고쳐지고 말았다’라는 메시지가 뜬다.
아이템 창에서는 ‘손재주가 없는 류제가 고친 니냐롯트의 비녀. 망가진 것보다는 낫지만 어수룩하다.’라는 설명이 덧붙인다. 이것만 보면 영 아닌 것 같지만 이 선택지가 맞다.
이어서 왕녀에게 돌아가면 ‘너무 이상하다. 고친 것을 버린다’, ‘그래도 돌려주자.’ 선택지가 뜬다. 둘 중 하나를 또 선택하자면 ‘그래도 돌려주자’ 쪽이 정답이었다.
두 번째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는 류제가 왕녀에게 이 비녀를 고쳐서 돌려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상냥했던 아버지를 바라는 마음을 그만두지 않도록 해준 류제에게 감동해 왕녀의 호감도가 상승하는 구조다.
그래야만 하는 류제는 손에 든 비녀를 재경에게 내밀며 당연한 말을 했다.
“그럼 나보다는 네가 직접 고쳐주면 되잖아. 나는 이런 거 고치는 재주 없어.”
“뭐? 내가?”
“네가 고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네가 고치겠다고 했으면서 왜 나한테 시켜?”
류제가 수상쩍게 쳐다보았다. 호감도 때문이지만 뭐라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재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류제가 렌이 뭐 잘못 먹었나 주춤거렸다.
환영을 극복한 비키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경은 다시 류제를 데리고 8반 교실로 향했다. 우다다 달려가 벌컥 열어젖힌 반에는 재경이 아침에 만들던 응원 도구들의 잔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목공용 풀도 있었다.
“에라이, 나도 몰라. 그거 잘 붙잡고 있어.”
반으로 동강 나려고 하는 비녀 사이에 목공용 풀을 얇게 펴 발라 아귀를 맞춘 재경이 그것을 그대로 류제에게 넘겨주었다.
류제는 얼결에 재경이 넘겨주는 대로 왕녀의 비녀를 꽉 맞물리게 붙잡았다. 재경은 거기에 더해서 바닥에 널브러진 것들을 하나둘 가져오더니 오래돼서 비즈가 없어진 부분이나 색이 바랜 부분을 고치기 시작했다.
류제가 고치나 내가 고치나 호감도 물품만 잘 전달해 주면 장땡이지. 안 그러냐, 이 한정적인 선택지와 스토리대로만 되는 세상아. 불만 없지?
“어때?”
“말끔하네.”
“왕녀님이 좋아하겠지?”
목공풀이 딱 붙은 비녀를 확인하며 재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재경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던 류제는 뭔가가 거슬렸다. 렌의 행동이 거슬렸다기보다는 렌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싫었다.
“왕녀는 왜 신경 쓰는 거야? 이런 것도 고쳐준다고 하고. 그렇게 왕녀와 친해지고 싶어?”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 반 친구니까 그냥 고쳐주는 거지.”
“이상한데. 그러다 친위대한테 당해도 몰라.”
“아니지. 내가 고쳐준다고 한 게 아니라 네가 고쳐준다고 한 거니까 날 엮지 마. 친위대한테 당하는 건 너 혼자서만 해라.”
“뭐어? 그게 무슨 논리야?”
“그러니까~ 원래 네가 고쳐줘야 하는데 내가 그냥 심심해서 도와준 거니까 난 관련 없다고. 이제 됐어. 왕녀님한테 잘 전해 줘.”
“다르지. 나는 그냥 버리려고 했는데?”
“버리면 안 된다니까!”
“왜? 왕녀가 버리라고 했잖아. 고쳐주는 게 더 오지랖 아냐?”
“그거 주고 오면 알아!”
토 달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낸 재경은 제대로 돌려주지 않으면 오늘 있었던 장애물 달리기에서 있었던 일도 용서 안 해줄 거고 다음 달 간식도 죄다 빼앗아 먹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래도 납득을 못 하는 류제가 또 트집을 잡을세라 재경은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가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저 똥고집에 못 이기고 한숨을 내쉰 류제는 렌이 고친 비녀를 넌지시 살펴보았다. 보고 있자니 왕녀가 이 비녀를 늘 하고 다녔던 것 같기도 했다.
달아난 렌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뒤이어 교실 밖을 나가 뒤져봐도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마땅치 않았지만 렌이 시키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저번 수학여행 때 선물을 샀던 것처럼 부끄러워서 류제의 손으로 해결한 건가도 싶었다.
“나 참. 영문을 모르겠네.”
류제는 왕녀의 비녀를 위로 들어 앞뒤로 돌렸다. 부러진 부분이 언뜻 햇빛 사이로 비쳤다. 값비싼 보석들이 비녀 머리부에 장식되어 있었는데 보석 자체도 오래된 것인가 드문드문 생활 상처가 나있었다.
비녀를 주머니에 넣은 류제가 학교 건물 밖으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2학년 준결승전이 시작된 기간트리카 경기장이 시끄러웠다. ‘가시’ 어빌리터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경기장도 금세 수복한 모양이다.
사회자 둘이서 토너먼트 생중계를 하는 소리와 관객들의 환호 소리, 응원 봉을 두드리는 소리가 섞여서 축제의 장이 되었다. 경기가 끝난 자신은 이제 그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1학년은 토너먼트가 종료되었으니 더 이상 시합이 없었다. 이제 정말 체육대회가 끝났구나. 토너먼트에서 1승 하겠다던 렌을 데리고 기간트리카 연습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저 멀리 모이는 노을을 보자니 류제는 오늘 하루가 무척이나 길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렌이 오늘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귀여운 말을 했었지. 체육대회가 끝나서 아쉽겠다.
류제는 몇 달 전만 해도 서투름 때문에 일을 망친 전적이 많은 렌을 지금과 비교했다. 무난하게 인기를 얻어가는 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좋아한다는 감정도 모르면서 무슨 여자 친구야. 그냥 어린애가 어른 따라 하는 그 이상도 아닌 주제에. 여자 친구 사귀면 손잡고 뽀뽀한다는 게 할 수 있는 야한 생각의 끝이면서 쓸데없는 로망이나 가지긴.
투덜투덜. 혹여 이게 왕녀와 잘해 보려고 하는 렌의 수작일지라도 류제는 절대 렌이 고쳐주었다 말하지 않겠다며 심술을 부렸다.
그동안 세라의 치료를 받은 니냐롯트는 마비 독이 풀려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반 학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던 중 그녀는 아까 렌 지미와 함께 사라졌던 류제와 마주쳤다. 다시 나타난 류제는 주머니에서 하나가 된 비녀를 건넸다.
“자.”
비녀를 돌려받은 니냐롯트는 부러졌던 이음매 부분을 확인했다. 망가졌던 비녀가 멀쩡해졌다.
“…렌 지미가 고쳐준 것인가?”
“어떻게 알았어?”
하지도 않은 거짓말이 들통나자 류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게 내려앉은 앞머리에 슬며시 가려졌지만 감정이 훤히 보였다.
“렌 지미가 그대를 끌고 가지 않았나.”
렌 지미는 손재주가 아주 좋고. 수학여행 때 맛본 요리나 오늘 체육대회 응원 도구를 떠올린 니냐롯트는 아주 당연하게 답했다.
류제는 반박할 수 없었다. 하기야 그걸 보면 내가 이렇게 깔끔하게 고쳤다고 생각할 리가 없지. 류제는 거짓말하려던 스스로가 한심해서 깨꼬닥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랬지. 하아, 그랬었어.”
“버려달라고 부탁했는데 고쳐줄 줄은 몰랐다. 왜 이런 수고로움을…….”
“아니… 미련이 남아 보여서. 소중한 거라고 하지 않았어? 버리다니 아깝잖아.”
렌이 했던 말을 그대로 가공한 류제가 대충 둘러댔다.
말대로 니냐롯트는 이 비녀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기껏 포기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운명이다 싶었던 니냐롯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중하게 여겼는데 이걸 내게 준 사람은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서 허탈해졌었다.”
“그게 누군데?”
“나의 아버지.”
“네 아버지라면… 설마 황제 폐하?”
왕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냥 버리려고 했던 게 무려 한 나라의 황제가 딸에게 준 선물이었다는 것을 안 류제가 식겁해져서 이마를 감쌌다.
“그런 걸 남한테 버려달라고 하지 마. 부담스럽잖아!”
“그대는 무신경하니 마음에 담아두지 않을 줄 알았지. 그리 대단한 물건도 아니다. 내가 6살이 되었을 무렵 아바마마와 함께 아가타를 살피러 나섰다가 시장에서 사주신 것이야.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이리도 낡은 것을 아직도 나는 내치지 못하고 있어.”
“내치다니. 폐하와 사이가 안 좋아지기라도 한 거야?”
“아니, 아바마마께서 나를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일 뿐이다.”
“왜? 선물을 사주셨다면서. 아버지로서 자식을 내키지 않아 할 리가.”
니냐롯트가 답하기를 망설였다. 류제는 언뜻 아까 니냐롯트가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앉아있는 관객석을 한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잠깐, 그럼 아까 계속 위를 보던 게 그럼 그… 폐하를 찾기 위해서였어?”
니냐롯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햇빛에 비친 투명한 은색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류제 신리마저 그걸 알아차렸다니. 마음을 숨기지도 못한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씁쓸하게 눈동자를 굴린 그녀는 짙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보고 있었나? 스스럽지만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토너먼트만큼은 보러 오시지 않을까 여겼어. 하지만 역시나 오시지 않은 것 같구나.”
“왜? 너는 왕녀잖아. 아무리 너를 내키지 않아 하셔도 그건…….”
둘 사이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는 류제는 납득이 안 갔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 때문에 ‘나라의 높으신 분’들도 참관하는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도 보러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자기 딸이 준결승전에 참전하는 경기를.
니냐롯트는 부질없는 손동작으로 비녀를 만지작거렸다. 이리저리 돌려 보니 재경이 떨어진 비즈를 덧대어 놓은 부분이 보였다.
보기와는 달리 세심한 자구나. 어찌 이런 것을 발견하고 다 고쳐주었담.
“아바마마는 어마마마의 일 때문에 어빌리터를… 나를 별로 좋아하시지 않아.”
“어마마마라면 왕비님?”
“예전에 승하하셨지. 마족의 일과 얽혔다. 셀로니아가가 멸족한 그즈음이다.”
“그럼 왜 널 미워하시는 건데? 그게 어빌리터인 네 죄는 아니잖아.”
“…어마마마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 어빌리터였었다. 물론 실수였겠지마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바마마는 실망하고 말았지.”
인간에게서 마족을 지키는 어빌리터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니. 그런 사건이 있었음을 몰랐던 류제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수학여행 때까지만 해도 왕녀는 악몽을 꾸었지. 향초를 선물해 준 이후로 악몽이 줄었다고 감사하다 표했어도 그 전까지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악몽이 그 기억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했던 류제가 맞다는 듯 니냐롯트도 그때를 떠올렸다.
“펠노아의 여관에서 그대와 마주쳤을 때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역시 그거랑 연관이 있었구나.”
“그렇다.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아바마마께서는 어마마마를 지키지 못한 어빌리터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되셨다. 나라의 예산을 상당 부분 투자해서 기간트리카 부대를 육성하고 있는데 정작 아바마마께서 가장 사랑하신 어마마마는 지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나도 나이가 먹고 어빌리티를 발현해 버렸지. 아바마마께서 증오해 마지않는 어빌리터가 나는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때 자신을 괴물 보듯이 쳐다보던 그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손은 이후로 다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 않았다.
“나는 아바마마께서 나를 다시 돌아봐 주시기를 원했다. 제립학교에 입학하니 그 부담감이 날이 갈수록 더해졌지. 꿈에서 나는 여전히 무능했다. 무능하고, 무능했어.”
“하지만 왕비님이 돌아가신 게 네 탓이 아니잖아. 내 탓도 아니고, 렌의 탓도 아냐. 모든 어빌리터의 탓도 아닌데 왜 네 탓을 하는 거야?”
“글쎄. 아바마마께서는 그저 슬픔을 탓할 상대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렸을까. 어린 왕녀는 아직 그 이유를 몰랐다.
실제로 키아나트리체의 권력자 중에는 어빌리터들이 자신들을 지배할까 두려워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빌리터들이 전선에 향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원했다.
그녀의 아버지, 키아나트리체의 황제도 그 세력에 몸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세력이 지금 키아나트리체를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나는 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라는 것일까. …응? 류제 신리여.”
돌아봐 주지 않는 그를 위해 노력했건만 이번에도 안 된 것 같아 왕녀는 마음이 꺾였다. 하지만 그녀조차 포기하고 내쳤던 비녀가 다시 수중에 돌아온 의미가 눈에 밟혔다. 아바마마와의 관계가 회복될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가 비녀를 품에 안았다.
“상냥한 마음에 감사를 표하마.”
왕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류제는 렌의 말대로 고쳐주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고친 것은 자신이 아닌 렌이었지만 누가 고쳐줬어도 왕녀는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라의 천막에 숨어 류제가 니냐롯트와 무사히 호감도 이벤트를 치른 장면을 몰래 구경한 재경이 자화자찬했다.
“좋았어! 역시 내가 있으면 문제없다니까.”
“렌 학생,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건가요?”
옆에 쭈그리고 앉은 재경을 세라가 수상쩍은 눈으로 훑어보았다.
갑자기 류제와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니냐롯트가 나가자마자 혼자 쫄래쫄래 기어들어 와서는 손으로 쌍안경을 만들어 스토커처럼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세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수상쩍었다.
“뭐 하시는 걸까요?”
“아…암것도 아닌데요!”
“저기 뭐가 있기에… 류제 학생과 니냐롯트 학생이 있군요. 보기 좋아라. 근데 교내에서는 연애가 금―”
“그럼 쌤, 우리 반이 이겼으니까 파티 열어 주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하세요! 그럼 이따 봐요!”
“렌 학생?”
세라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재경은 후다닥 천막에서 도망갔다. 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렌을 다시 불러 세우려다가 됐겠지 싶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애였다.
* * *
“1학년 종합 우승, 8반. 대표자 앞으로.”
“우하하. 다른 반들은 쪽을 못 쓰는구만?”
“종합 우승이래, 렌 군! 와아!”
“당연하지.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종합 우승 안 했으면 진심으로 뒤집어엎으려고 했다고.”
도도하게 콧대를 높인 비키가 상장을 받으러 조회대로 걸어갔다. 교장 선생님 뒤에 앉은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셀로니아 후작가의 생존자 비키에게 상장을 건네주었다.
“가문의 불행을 극복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군요.”
독수리 모양 지팡이를 짚은 남자가 말했다. 표정 관리를 못 한 비키는 웃는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사진에 찍혔다.
연이어 8반은 청백전에서의 승리,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우승이라는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약조했던 대로 세라가 성대한 뒤풀이를 열어주었다.
가지런하던 책상을 모두 뒤로 민 그들은 세라가 사비를 털어서 사준 음식들과 주전부리, 음료수를 들고 둘러앉았다. 승리로 기분이 좋아진 학생들이 서로에게 공치사를 나누었다.
파티를 준비해 준 세라는 교실에 잠시 얼굴을 비춘 후 선생님들과 뒤풀이를 하러 가서 없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버린 8반 학생들이 언성을 높여 시시덕거렸다.
“너네 다다음 주에 시험인 건 알고 있지? 체육대회 때문에 반 평균 내려가는 건 사양이야. 이제부턴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나 해.”
“비키 님은 이렇게 기쁜 날 왜 그런 재미없는 소리를 하실까. 으하하하! 오늘은 그런 거 다 잊고 먹고 놀자구요!”
“그으래. 시험이라니, 그런 끔찍한 소리로 초 치지 말라고. 생각만 해도 싫어.”
“네가 걱정되니까 하는 소리 아냐. 반 평균 깎아 먹는 게 누굴까? 너라고 너! 바보 렌 지미! 너한테 하는 말이야!”
“안 들려~ 아무것도 안 들려~ 에베베.”
“죽는다 진짜!”
학생들 모두 흥분으로 달아올라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류제는 비키의 잔소리를 피해 엉겨 붙는 렌의 칭얼거림에 묵묵히 도를 닦으며 음료수를 마셨다.
“으헤… 으헤헤. 렌 군… 렌 군! 나 진짜 오늘 괜찮았어?”
“괜찮다니까. 귀여웠다구~”
흥이 과해진 유네도 헤벌레한 상태로 재경에게 들러붙어 여장한 그녀의 모습을 끊임없이 질문해 댔다. 여자인 걸 들키지는 않았는지, 그럼에도 자신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는지 계속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재경도 가드가 낮아져 유네에게도 거리 유지 못하고 엉겨 붙어 해롱거렸다.
니냐롯트는 어릴 적부터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류제가(정확히는 재경이) 고쳐준 비녀가 꽂혀 있었다.
미나는 옆에서 오늘 있었던 경기에 참견하는 친구들을 거부하느라 진땀을 뺐다. 저리 좀 가, 이 망할 인간 놈들아! 라고 미나가 착해 빠진 얼굴 뒤에서 으르렁거렸다.
“오늘 우리 반 정말 멋졌어. 구기 대회부터 시작해서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까지. 내년에도 1등 하면 좋겠다. 그럼 평가 점수가 얼마람.”
“야, 내년에는 우리가 반이 갈리거든?”
“그러면 내년부터는 적이겠네? 하하하. 내년엔 나도 시드 팀에 들어갈 테니까 두고 봐. 아는 선배가 그러는데 2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급성장하는 친구가 많다고 했거든.”
게임상으로는 서술이 미묘한 내년 이야기나 하고 있다니. 속 편한 애들이구만. 재경은 휘적휘적 손을 내저어 앞에 있는 종이컵을 집었다. 류제는 그 잔이 비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마시던 음료수와 바꿔서 넘겨주었다.
“당장 다음 주가 없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응? 뭐라고?”
혼잣말로 웅얼거리는 렌의 말을 듣지 못한 류제가 다시 물었다. 대답하지 않은 재경은 류제가 바꾼 음료수 컵을 홀짝거리며 휘청휘청 눈만 끔벅거렸다.
“난 이제 잘래…….”
밤도 새웠겠다, 오늘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느라 지친 재경이 마침 옆에 있던 류제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생각도 잘 안 되고 몽롱해 죽겠다.
아까 류제한테서 도망간 후에 세라 쌤이 말했던 소화전의 위치도 찾았고, 오늘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로 봤을 때 패턴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파악도 해냈으니까 내가 어시스트한다면 류제가 중간 보스를 해치울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주인공이잖아, 류제 신리. 주인공답게 시원하게 이겨보라고. 오늘도 이겼으니까. 부탁이다, 야.
“…그래도 오늘이 안 갔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 고개를 꾸벅 처박은 재경이 중얼거렸다.
그 문장만큼은 제대로 들은 류제는 렌이 그렇게까지 체육대회를 고대하고 있었구나 단단히 착각했다. 그는 수고했을 렌의 머리칼을 욕심껏 쓰다듬었다. 지금 이 행위를 지적하면 피곤해서 착각했다고 변명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수학여행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왔던 그날, 미나의 방에 등장했던 화마 샐러맨더가 예지한 중간 보스 병마(病魔)의 군주,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학교에 침입하기까지 D―day ―2일.
즐거움에 취한 학생들은 금요일인 내일부터 다음 주 수요일까지 있을 가정의 달 연휴를 맞이하여 집으로 돌아갈 기대를 품었다.
* * *
체육대회라는 감미로운 음료를 마신 후에는 무시무시한 사천왕과의 대전이라는 근육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그 누구도 모르지만 후폭풍은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재경이 유일했다.
그것이 설사 게임 오버가 달린 중간 보스전이라도 재경은 더 먼 미래를 염려해야 했다. 바뀌지 않을 것 같던 스토리도 재경의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다소 발견되니 신중해야 했던 것이다. 안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은 왜 이렇게 큰 걸까.
그래서 나만 이렇게 혼자 끙끙대고 있는 거겠지. 재경은 창문 너머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을 씁쓸하게 응시했다.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그들을 보자니 목구멍에 뭔가 걸린 기분이다.
저 멀리 귀족이나 여타 유명한 가문 학생들이 사는 C동 기숙사 정문 앞에는 본가로 돌아갈 학생들을 위해 마차가 줄지어 서있었다.
비키도 수도 아가타 외곽에 있는 셀로니아 대저택으로 향하기 위해 유모가 보낸 하인들과 함께 마차를 탈 준비를 했다.
재경도 세라에게서 휴일 동안 병상에 있을 할머니께 가보라는 당부를 받았지만 중간 보스를 목전에 두고 학교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마차를 타고 학교를 떠났다. 전부 다 떠났으면 좋겠다. 재경은 내심 그러길 바랐다.
유네도 아빠가 하도 닦달을 해대서 어쩔 수 없이 돌아간다고 나랑 류제한테 조심스레 말했었지. 룸메이트인 류제는 자라난 시설이 멀어 학교에 남아있어야 하니 유네 혼자만 집에 돌아가는 것이 여간 미안했던 모양이다.
뭐 어때. 모르는 게 약이라고 지금이 중간 보스의 위협에서 물러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잖아. 게다가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건 좋은 게 좋은 거다.
유네 걔도 웃기다니까. 아무리 옛날에 호되게 당했다지만 남 눈치를 너무 보는 거 아냐? 집도 부자면서 남장을 한답시고 나나 류제가 쓰는 A동 기숙사를 쓰지를 않나.
유네가 남자든 여자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할 텐데 생각도 많다. 게다가 유네는 성격이 소심해도 다 커버될 만큼 얼굴이 귀엽잖아. 내가 만약에 저런 얼굴로 태어났으면 그냥 세상 후리고 다녔다.
정말 그랬다면 매사 불만 많아 보인다고 거지 같은 중학교 학주한테 불려다 맞을 일은 없었겠지. 여기나 거기나 사람이 모여있으면 세상은 생각보다 외모지상주의라구, 유네야. 그런 면에서 넌 걱정하지 않아도 활짝 필 팔자란다.
가난한 데다가 차림새도 허름하고 준수하지 못한 외모 때문인지 재경은 할머니가 노력했어도 다른 아이들에 비하자면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부족했다.
게다가 동정받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사정을 알고 있었던 선생님이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대해 주면 바로 가시를 세워 공격하기 일쑤였다.
그것 때문에 문제아로 낙인찍혀 불행했던 중학교 3년간을 떠올리면 재경은 학교가 진저리가 났다. 원래 고등학교 안 가려고 했는데 할머니가 친구는 사귀라고 난리를 쳐서…….
그래도 여기서는 안 그래서 좋아. 세라 쌤은 모든 학생들한테 상냥하게 대해 주고, 할머니 말대로 친구들도 제대로 생겼다.
빙의를 해가면서 간신히 얻어낸 건데 재경은 드디어 손에 쥔 보물을 열두 챕터 중 고작 세 번째 챕터 막바지에 등장하는 중간 보스전에서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재경이 손에 든 종이를 꽉 쥐었다. 저번 달 세라가 적어준 렌 지미의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가 형체를 잃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그는 귀족들 궁궐 같은 기숙사 C동에서 나온 왕녀를 발견했다. 종이를 책상에 던지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간 그가 왕녀를 불러 세웠다.
“야……! 저기, 야!”
병마의 난입은 내일이다. 류제는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걸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미래를 알고 있는 그밖에 없었다. 재경은 평화로운 학교생활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야 했다.
거기서 하나 고안해 낸 것이 있었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선택지에 따른 스토리대로 흘러가지만 ‘서술이 없는’ 부분에 한해서는 자유로웠다. 재경이 이용하려고 하는 부분이 여기였다.
“왕녀님, 잠깐! 잠시만 멈춰봐!”
내일 류제는 각성의 위협을 무릅쓰고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서 연습했던 게임의 하드 난이도를 플레이하게 된다.
만일 류제가 무사히 게임을 클리어한다면 두 명의 부하들과 함께 찾아온 마족은 류제에게 좀 더 힘을 키우라며 악당처럼 웃으며 물러난다.
거기서부터는 류제의 이야기 대신 미나와 병마가 공중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화면으로 넘어간다. 한참 둘이 서로 찢어 죽일 듯이 싸우다가 다른 사천왕이 나타나 둘을 말린다.
반면 중간 보스가 알려 준 그의 정체를 듣고 충격에 빠진 류제는 세라 쌤과 이야기해서 알라마니 기술관 쪽에 의뢰하여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왕녀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간 보스의 싸움이 끝나고 나서 그 직후의 일은 서술이 생략된다는 점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파손된 학교의 기물을 정리했는지, 학교에 남아있다 역병 마법에 당한 학생들이 어떻게 치료가 되었는지 게임은 정확히 서술하지 않고 넘어갔다.
“저기 잠깐만!”
“그대는 렌 지미가 아닌가.”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렌 지미. 너에 대한 것은 모두 파악했다. 이분은 네가 감히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시다!”
달리기만큼은 기똥차게 빠른 재경이 헐레벌떡 뛰어와 왕녀의 앞을 가로막자 근거리 이동 능력으로 나타난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칼을 내빼며 가로막았다.
재경은 루이나의 위협에도 겁에 질리지 않고 오히려 방해되는 그녀를 밀치려 들었다.
“너랑은 상관없어. 비켜! 야, 잠깐만… 잠깐만 말을 좀 들어봐!”
“내게 무슨 용무가 있나?”
류제와는 연이 얽혀 몇 번 대화한 적 있지만 그의 친구인 렌 지미와는 한 번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해 본 적 없던 니냐롯트는 귀성길을 가로막은 존재가 다름 아닌 그라는 사실에 놀란 눈초리였다.
친위대들의 극성 때문에 류제 신리를 제외한 남학생들은 웬만해서는 다가오기 꺼려하던데 내게 말을 걸 정도면 무슨 급한 용무인 것 같다.
니냐롯트가 흥미를 보이자 루이나가 안 된다며 끈질기게 그와 왕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왕녀 저하, 선처를 베푸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우민. 이야기를 해봤자 저하의 귀한 시간만 잡아먹는 해충입니다.”
“루이나, 그는 나와 같은 반 학우다.”
“그래도 예외는 없습니다……!”
“잠깐만, 진짜 잠깐만이면 돼.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아. 내 이야기 좀 들어줘!”
“저하께서는 너와 달리 무척 바쁘신 몸이다. 주제 파악하고 저리 꺼져라!”
“잠깐이면 된다고!”
루이나의 막말에도 절대 물러설 수 없었던 재경이 오기를 부렸다. 그의 눈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낀 니냐롯트가 손을 들어 루이나를 제지했다.
“루이나, 잠시 자리를 비켜주련. 다른 이들에게도 그래 달라 일러다오.”
“하지만 왕녀 저하. 저자는 학교에서 소문난…….”
“루이나.”
반발하는 그녀를 니냐롯트가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왕녀에게 버림받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던 루이나는 울먹울먹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친위대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밑져야 본전이었기에 말을 걸었지만 정말 왕녀가 말을 들어줄 줄 몰랐던 재경이 주춤거리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대가 내게 먼저 담소를 나누자 제안한 것은 처음이군. 아직 이야기도 듣지 않았는데 그것이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 내게 무슨 볼일이지?”
“부탁이 있어. 듣고 보면 분명히 헛소리라고 생각할 테지만 무시하지 말고 들어 줘.”
왕녀에게 하는 부탁은 류제가 져서 ‘게임 오버’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대한 보험이었다.
왕녀는 등장인물 중에 가장 권력이 높은 자였다. 암만 임금님과 사이가 그리 좋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조금이나마 있을지도 몰랐다. 재경은 거기에 걸었다.
“내일 오후―”
재경이 말을 이을수록 니냐롯트는 동감을 못하는 얼굴로 일그러졌다. 그럴 줄 알았던 재경도 왕녀에게 이런 부탁하기 싫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부탁이 거절당한다면 재경은 배수의 진을 친 심정으로 중간 보스전에 나서야만 했다.
재경의 부탁이 끝나자 왕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바람에 날리는 황금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답했다.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이 전부인가.”
“…어.”
“기가 막히는군. 그렇게 하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내가 그리 움직여서 부담해야 하는 위험을 그대는 알고 있나?”
“나도 알아. 하지만 분명 내가 장담하건대 그렇게 안 한다면 넌 진짜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왜 말을 할 수가 없지? 이유도 모르는 채 큰 힘을 사용할 수는 없다. 나를 농락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이유라면 내일이 되면 알 수 있어. 부탁이니까 제대로 생각해 줘.”
“할 말이 그게 다라면 나는 이제 출발하겠다. 루이나.”
왕녀가 더 볼일 없다는 듯이 차갑게 고개를 돌리고 고상하게 걸어갔다. 거절당한 재경이 한사코 니냐롯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금세 루이나가 나타나서 재경에게 검코를 들이밀었다.
“대화는 끝이다. 네까짓 해충이 왕녀 저하와 대담한 사실을 평생의 영광으로 삼아라.”
“나도 너한테 이런 부탁 죽어도 싫단 말이야! 왕녀님!”
재경이 왕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친위대의 방해로 여지없이 무산되었다.
재경이 간신히 친위대를 뚫었을 때는 왕녀는 이미 학교에서 빠져나간 후였다. 그녀들에게 쥐어뜯겨 꼴이 엉망이 된 재경이 왕녀가 사라진 길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젠장!”
왕녀가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단언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류제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음알음 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매몰차게 거절하다니.
류제가 부탁했어도 그랬을 거냐! 비녀도 내가 고쳐줬구만. 재경은 왜 자신만 이런 삼류 악역인지 화가 나서 괜히 돌부리를 걷어찼다.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없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끝나지 않기를 빌었어도 체육대회는 끝났고, 중간 보스가 찾아올 시간은 이제 고작해야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왕녀는 내 부탁을 깔끔하게 거절했고, 시간은 째깍째깍 멈추지 않고 흘렀다.
류제가 멋지게 승리할 거라 생각해도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날 밤 재경은 긴장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좌불안석으로 새벽 내내 책상에 앉아 중간 보스전의 페이즈와 패턴을 써놓은 노트를 외우던 재경은 뭔가 더 잊어버린 게 있지 않나 추가로 내용을 보강했다.
“페이즈 1이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으으. 내가 잘 기억하는 거 맞겠지?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서술된 부분’이다. 스토리가 확실하게 정해진 ‘서술된 부분’을 제외해서 어떻게든 공략하면 ‘게임 오버’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왕녀는 그걸 거절했고 이제는 나 혼자서 해봐야 하는데.
오늘의 태양이 동쪽 지평선에서 떠올랐다. 책상에 앉아있던 재경은 주먹을 쥐어 각오를 다졌다. 믿을 것은 자신과 류제밖에 없다.
드디어 오늘이다. 병마 페스트의 왕이 류제를 마왕으로 각성시켜 키아나트리체를 전복하기 위해 빈 학교를 쑥대밭을 내는 날이었다.
* * *
“짜증 나, 끔찍하게 짜증 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 죽여도 돼?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죽여도 되겠지?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큰 소리로 말해, 돼지 새끼야! 아까는 잘도 떠들더니 이젠 꿀꿀대는 소리도 안 들리는군.”
언젠가 재경과 류제가 함께 지나갔던 학교의 정문.
학교 전체를 둘러싼 대마족 결계 때문에 통제실까지 와서 이런 귀찮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게 그녀는 상당히 싫증 난 모양이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계는 백 년 전이나 이백 년 전이나 삼백 년 전이나 변함없이 지긋지긋해. 한시라도 빨리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 못 참겠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참아주세요, 마가릿 님. 어빌리터들은 남겨야 마왕님이 부활하셨을 때 마족이 부흥할 수 있습니다. 마왕님께서 백 년의 공백을 깨고 부활만 하시면 마가릿 님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인간들이 점령한 이 대지를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증오해 마지않는 저 이족보행 돼지들을 전부 가축으로 삼을 수 있답니다. 드디어 마족이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는 날이 온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가릿 님의 공이십니다.”
부하들의 아첨을 들으며 병마(病魔) 페스트의 왕, 그 이름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가 머스터드 색의 눈을 부라렸다.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온 입가는 씰룩거리며 경기하듯 웃고 있고, 눅눅한 늪 같은 머리칼은 의지를 가진 뱀처럼 제멋대로 움직였다.
마족 특유의 붉은 동공에 관자놀이를 타고 난 황소를 닮은 뿔, 눈 밑에 가득한 주근깨와 다크서클, 비대칭으로 들고 있는 날갯죽지와 창호지처럼 찢어진 비막이 기괴하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단어 하나를 마칠 때마다 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경비병‘이었던’ 것을 벽에 처박았다.
언젠가부터 신음이 들리지 않게 된 경비병은 목이 꺾인 채 이마에 피를 줄줄 흘리며 눈깔을 까뒤집고 있었다.
경련하던 몸도 이제 축 늘어지자 마가릿이 고장 난 장난감 대하듯 흥미를 잃었다. 경비병의 안면을 처박았던 손에 힘을 풀자 그 미련 없는 손짓에 시체가 벽에서 미끄러졌다가 바닥에 고꾸라져 목이 꺾였다.
“가축으로도 끔찍해. 가축의 먹이로 내놓아야 해. 왜 우리들은 이런 더러운 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종족 자체를 없애야 내 분노가 풀려. 아아, 기분 나빠!”
그녀는 이 장갑 낀 손으로도 인간을 만졌다는 사실이 끔찍했는지 집도하는 의사처럼 양손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두 부하가 그녀 손에 있는 장갑을 깨끗한 장갑으로 갈아 끼워주었다.
“우리를 방해했던 자는 저 인간으로 마지막입니다, 마가릿 님. 우리 병마족의 지도자시여. 이제 이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대마족 결계가 해제되었습니다.”
“좋아. 정말 좋아. 아주 좋아. 마왕님의 부활체는 어디에 있지? 한시라도 빨리 그 물렁하고 가식적인 마음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려주고 싶구나.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마왕님! 나의 마왕님! 우리들의 마왕님! 마왕님을 부활시키는 건 그 창년이 아니라 바로 나야. 병마 페스트의 왕,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 이 몸이라고!”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경비병의 죽음을 조롱했다.
제립학교 주변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가 꼭대기에서부터 구를 그리며 점멸했다. 하늘을 바라보면 얼핏 빛났던 무지갯빛 망이 사라져간다.
키아나트리체에서 입기엔 오래된 복식을 한 그녀가 제립학교 안으로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침범했다. 재경에겐 그녀의 옷이 장례식 때 입는 새까만 정장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뒤틀린 몸뚱이로 잘만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마왕님이 하찮은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한 지 어언 백 년이 흘렀다. 고명한 마왕님이 느끼기에는 찰나의 순간이었겠지만 그를 받들어 모셨던 마가릿 포티어스 핍스에게 있어서 백 년은 너무 길었다. 눈을 감으면 마왕님의 용안이 생각나고, 눈을 뜨면 인간이 증오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다.
현재 부활을 고대하던 마왕님의 혼이 이 학교에 있었다. 그것도 다시금 인간의 몸에 가둬져서. 왜 항상 마왕님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 거냐, 이 너절한 돼지 새끼들아.
“인간 따위 전부, 모조리, 하나하나 빠트림 없이 죽인다. 여기에 남아있는 인간들을 죽일 거야. 왜냐,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찢어버리고 싶으니까. 그래야 마땅한 존재니까! 그들에게 우리가 느낀 절망감을 선사해 주리라. 마족 주제에 인간들과 작당하는 화마의 군주의 추잡한 계획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어.”
“예, 마가릿 님. 마왕님이 부재하신 지금 마족을 통솔하는 마족의 사천왕이신 당신의 소원대로 가축들을 멸절하시지요. 샐러맨더의 왕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는 당신의 상대가 아닙니다. 마왕님의 오른팔은 명실상부 마가릿 님이십니다. 오직 마가릿 님만이 마왕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계십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렇지. 마왕님의 오른팔은 바로 이 몸이시다. 어서 가거라. 가서 죽여라! 인간을 발견하는 족족 머리통을 뽑아서 죽여 버려라. 오만한 돼지들의 눈깔을 날카로운 이빨로 으깨어 버려라. 나는 정화하리라.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들을 나의 병으로 정화하리라!”
“예, 마가릿 님.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우리들의 군주이시옵니다.”
그녀의 양옆에 선 부하 두 명이 차례로 허리를 굽히며 그녀의 뜻을 따랐다. 험악한 마기를 두른 마가릿이 정문을 따라 길게 난 대로를 걷는 동안 그녀들은 등에 돋은 날개로 천사처럼 날아서 목격자들을 처단했다.
가는 길마다 꽃이 아닌 인간의 피를 뿌린다. 마가릿이 혐오하던 정원은 인간들의 피로 붉게 장식되었다. 이제야 이 정원이 마음에 드는군. 마가릿은 죽은 인간이야말로 좋은 인간이라고 뿌듯해했다.
“류제 신리는 어디냐. 어떤 인간이 마왕님의 영혼을 품고 있는가. 어서 가서 목도하고 구시하며 찰관해야겠다.”
그녀의 희번덕이는 눈이 광기에 휩싸였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지켜본 마왕님의 부활체가 정녕 그 그릇에 어울리는 자인가 그녀는 두 눈으로 똑똑히 시험해 볼 테였다.
서큐버스의 왕, 인간 흉내를 내는 그 음탕한 년은 믿을 수 없다. 샐러맨더의 왕은 냉철한 척하면서도 인간들과 손을 잡는 둥 속이 음흉해서 신용이 가지 않는다. 니켈의 왕은 잠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지.
오직 그녀만이 마왕의 부활을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고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