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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5) (7/112)

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5)

체육대회 후반부에 접어들자 다른 반 학생들은 토너먼트에서라도 8반을 이겨서 종합 우승을 노린다는 분위기를 내었다. 토너먼트에서 이겨도 점수가 모자란 반들은 청백전 점수를 노리는 듯하다.

재경이 흠뻑 젖은 꼴로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학생들은 어느새 어디를 갔는지 절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류제가 재경에게 포장이 된 간식을 건네주었다.

“벌써 오늘이 거의 다 끝났다니. 너무 싫다.”

“아직 안 끝났어. 가장 중요한 시합이 남았잖아. 오늘이 가는 게 그렇게 아쉬워?”

“아쉬운 게 아니라 싫은 거야.”

재경이 툴툴거리며 간식으로 받은 핫도그 포장을 풀어 첫입으로 냠 먹었다.

체육대회도 체육대회지만 재경은 다른 문제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체육대회가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왕녀의 호감도 이벤트 겸 체육대회가 끝나면 중간 보스전이 있었다. 중간 보스전에는 지금껏 없었던 ‘게임 오버’가 존재했다. 즉 실패하면 게임이 끝나서 다시 로드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 게임이라면 마음 편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을 생각하면 되는데 재경은 과연 이 세계에 세이브와 로드 시스템이 있을 거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미연시의 스토리만 따를 뿐 어떠한 것도 게임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막말로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창에는 히로인 호감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항상 보면 류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새고.

그리고 만약에라도 세이브나 로드를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아니라 류제가 할 수 있겠지. 삼류 악당인 렌 지미가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이브 로드를 할 수 없는데 중간 보스전에서 류제가 ‘게임 오버’를 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세계는 정말로 망하는 거 아냐?

그래도 갑자기 땅이 꺼져 멸망하지는 않을 거다. 게임 오버 되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결말로 이야기가 흘러갈지도 몰랐다.

지금의 호감도 상태대로라면 류제가 타락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겠고 마왕을 부활시킨 마족들이 인간들을 전부 지배하고 죽이려 드는 끔찍한 세상에서 살기 싫으면 어떻게든 중간 보스전에서 최악의 상황인 ‘게임 오버’만큼은 피해야 했다.

나름 대책을 강구하고 있기는 한데 실패하면 짊어지는 ‘게임 오버’라는 리스크가 너무 커서 걱정이었다.

“후…….”

재경이 핫도그를 먹다 말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구나. 바뀌지 않을 게 뻔한데 걱정만 해야 하다니. 성가셔 죽겠네.

“왜 그래?”

“아니, 암것도 아냐. 토너먼트 잘하라고.”

“…어디 안 좋은 건 아니고?”

“짜식이 왜 이렇게 걱정이 많냐. 그렇게 달려댔으니까 좀 지칠 만도 하지.”

재경이 옆에서 앉아 핫도그 포장지를 뜯고 있는 류제에게 쯧쯔 혀를 찼다. 쓸데없는 걱정 많은 것은 재경 그만으로도 족했다.

그때 남학생 네 명이 구기 대회에서 쓰던 배구공으로 축구를 하다가 잘못 차는 바람에 재경에게 공이 획 날아왔다.

“거기, 조심해!”

이 망할 놈의 공은 방심했다 하면 안면으로 날아온다. 재경이 뒤로 물러나며 눈을 질끈 감는데 옆에 있던 류제가 순식간에 손을 뻗어 공을 막았다.

다행히 공을 안면으로 받는 치욕은 없었지만 류제가 실수로 손등으로 얼굴을 쳐버려서 코가 아픈 것은 매한가지였다.

류제의 손에 부딪힌 공이 계단에서 튀어 운동장으로 굴러갔다. 어딘가에서 달려온 남학생이 류제와 재경에게 미안하다고 손짓한 다음 공을 들고 다시 축구를 하러 갔다.

지레 찔린 류제가 렌의 상태를 어색하게 살폈다.

“괜찮아?”

“공 따위 진짜 싫어.”

“미안. 손으로 친 건 고의는 아니었어.”

류제가 공연히 미안해했다. 다행히 아까처럼 코피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재경이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려 완전히 못 먹게 되었다. 재경은 기분이 나빠져 눈가를 실룩거렸다.

이거 렌 지미가 간식을 못 먹는다는 스토리 때문에 일부러 그런 거 맞지? 이 망할 놈의 세계. 이젠 간식도 제대로 못 먹냐?! 재경이 화를 참으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재경이 간식을 못 먹어 아쉬워하는 것 같자 어차피 한 달 치 간식 전부 주기로 했는데 나눠 먹으면 되겠다 생각한 류제가 손에 들고 있던 핫도그를 내밀었다.

“자, 반 줄게.”

“진짜? 난 먹을 거는 거절 안 한다.”

재경이 좋다고 류제가 내미는 핫도그를 와앙 하고 한입에 물었다.

반으로 자르라고 내민 거였는데 반을 냉큼 먹어버리는 재경에 류제가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게 다 입에 들어가?”

“아 드어가이까 머고 이자나.”

우물우물. 재경이 용케도 그걸 먹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류제는 반만 남은 핫도그를 제 입에 냠 넣어 재경처럼 먹었다.

시간이 되자 사라졌던 응원 팀 학생들이 어딘가에서 옹기종기 나타났다. 옷도 바꿔 입은 상태였다.

“어… 저거 봐. 쟤네 뭘 입고 있는 거냐?”

“응? 콜록, 콜록콜록. 뭐… 유네?!”

나라의 높으신 분들도 본다는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준결승, 결승전을 위해 응원 팀 친구들이 대단한 응원이라도 준비해 왔는지 복장부터가 배꼽티에 화려한 치어리더 차림이었다.

거기에 응원 팀의 유일한 남자(?)로 참석한 유네도 억지로 여장(?)을 당해서 늘 했던 꽁지머리가 아닌 짧은 양 갈래 머리에 재경이 만들어준 귀여운 별 모양 머리띠를 한 채 부끄러운 듯이 노란색 응원 수술을 들고 있었다.

유네의 차림에 재경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너네 유네한테 뭐 하는 짓이야?”

“귀엽잖아. 뭐 어때.”

“암만 그래도 억지로 그렇게…….”

유네도 다른 응원 팀 여학생들처럼 짧은 반바지에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안에는 건전한 검은색 스포츠 탑을 입은 채였는데 학교에 와서 이렇게 대놓고 여자처럼 하고 있었던 것이 처음이었던 유네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으… 으… 레…렌 군… 나…난 괜…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는데.”

“뭐야. 유네, 그게 무슨 꼴이야. 하하하. 여장이라니. 웃기다.”

속없는 류제는 남장여자 유네가 여장을 한 것을 보고 웃기다며 히죽거렸다.

다시 말해서 같은 나이 또래 여자애가 여자 옷을 입은 것뿐인데 유네를 완벽하게 남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류제는 남자면서 배꼽티를 입은 유네의 모습이 무척 한심하다고 인지했다는 말이다.

“웃기…….”

암만 사정상 남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스스로 여자라 의심하지 않았던 유네였는데 이 차림으로 류제한테 웃기다는 소리를 듣자 상당히 풀이 죽어버렸다.

혹시 이 차림이 너무 잘 어울려서 여자임을 들키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웃기다니. 웃기다니!

“여…역시 안 하는 게 좋겠지?”

“안 돼. 하기로 했잖아. 이제 와 바꾸는 거 없기!”

“으에엥… 레…렌 군… 나 그렇게 이상해?”

“어어?”

유네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재경을 쳐다보았다. 유네가 남장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재경은 이 차림이 이상하다고 하면 유네가 상처받을 것 같아 얼떨결에 고개를 저었다.

왠지 유네가 여자처럼 입고 있으니 뭔가 유네가 진짜 여자라는 것을 새삼 깨달아서 괜히 괴리감이 생겼다.

“아니, 뭐… 괜찮은데? 어울려. 귀…귀엽네.”

“오올~ 렌, 너 보는 눈이 있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유네한테 화장해 줬는데 당연 그래야지. 유네 넘모 귀엽자너~”

“저…정말이야, 렌 군?”

유네가 울먹거리던 눈망울을 빛냈다. 바보 류제 군은 몰라도 멋진 렌 군이 귀엽다고 하니까 그래도 용기가 났다. 렌 군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이상하지 않고 평범하게 귀여운 거겠지?

은색 응원 수술을 들고 총총총 재경에게 다가가서 에헤헤 웃었다. 가깝게 접근한 유네를 보는 재경의 귓바퀴가 조금 붉어졌다.

“그래?”

남자가 여장한 모습이 귀엽다는 말에 류제가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유네… 또래에 비해서 작고 귀엽긴 하지만 그래 봤자 남자잖아. 렌은 누가 뭐래도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절대로 안 할 것 같은 성격인데. 유네는… 귀여우니까 가능하다는 건가?

비키에 이어 유네까지 재경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자 류제는 친구 하자며 쓰레기장 근처에서 연습하던 렌이 언제부터 반에 완벽히 녹아들었는지 가늠이 안 됐다. 인기를 얻기 위해 이상한 짓을 해오던 렌의 노력이 점점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류제는 렌 앞에서 친구들과 맞춘 응원 동작을 시범해 보이는 유네를 보자니 성에 안 찼다. 렌의 진면모는 나만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점점 모두가 알게 되어간다.

그러다가 모두가 렌을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지금도 그래. 비키도 그렇고. 젠장, 열심히 노력하는 렌은 내가 봐도 귀여운데.

근데 진짜 렌은 유네 정도면 남자도 상관없는 건가? 같은 남자라면 나라도…….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버린 류제가 헛기침을 하며 응원 팀 애들에게 경기장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크흠! 가서 미리 응원 자리를 맡아놓는 게 어때? 다른 반 학생들도 기간트리카 경기장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정말이네? 유네, 그만 노닥거리고 빨리 가자. 안무 잊은 거 아니지?”

“으응. 걱정 마! 렌 군 앞에서도 완벽했어.”

어울린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유네가 총총 뛰며 응원 팀 여학생들을 따라 기간트리카 경기장으로 향했다.

류제도 곧 있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준결승전을 위해 정해진 시간까지 선수실로 입장해야 했기에 가만히 서 있는 렌을 불러 손짓을 했다. 유네가 가는 모습을 보며 눈을 끔벅거리던 렌이 느리게 알았다고 답했다.

“왜 맥 빠지게 서있어?”

“야, 유네도 저렇게 보니까 여자처럼 보이지 않냐?”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유네는 남자잖아. 아무리 그래도 실례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류제가 질투심 섞어서 강하게 부정했다. 다른 애들은 다 몰라도 렌이 같은 남자인 유네한테 관심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싫었다.

류제에게 넌지시 히로인 유네는 남자가 아닌 여자라며 힌트를 주려고 했던 재경이 류제의 융통성 없는 말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뭐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솔직히 좀 귀여웠잖아. 안 그래?”

“전혀. 완전 이상했는데.”

“그래? 야, 류제 너 누가 너한테 미적감… 하아, 아니다.”

“뭐? 당장 이실직고해. 나 흉보려고 했지? 나 참, 응원 팀 애들도 적당히 하라고 해. 유네도 저런 거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왜 굳이 시키는 대로 하는지 몰라.”

구시렁구시렁 류제가 투덜거렸다.

신경 쓰기 귀찮아서 아님 말고 식인 류제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몰라 재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제에게 유네가 남자라는 인식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는 건가.

하기야 둔한 주인공이 유네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게 여름방학 때쯤이니까. 이 스토리대로만 되는 세상은 절대로 그 전까지는 류제가 유네가 여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겠지.

재경은 그런 것의 일종이라고 판단해서 더 따지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것보다 유네가 저런 꼴까지 해줬는데 토너먼트 꼭 이겨라, 짜샤. 준결승에서 누구랑 붙는지는 알아?”

“알아. 저번 수학여행 서바이벌 게임에서 붙은 적 있는 애들이야. 3반의 ‘가시’, ‘소리’, 그리고 본 적 없는 ‘인력’, ‘척력’. 나도 비키 등쌀에 떠밀려 자료 조사 좀 했지.”

“관중석 가슴 떨리게 하지 말고 결승까지는 무난하게 가 인마. 나라의 높으신 분이 보고 있는 경기인 거 알지?”

“당연하지.”

류제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답했다.

웬일이래. 맨날 귀찮다는 반응만 했으면서. 중간 보스전을 앞두고 애가 좀 전투적으로 바뀌었나 모르겠다. 뭐, 좋은 현상이겠지. 재경이 류제에게 잘하라며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준결승에서 붙을 3반 시드 팀 어빌리터들을 조사했다는 류제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경기장 특등석에서 토너먼트 준결승전을 관람하는 내내 류제의 팀은 어렵지 않게 3반 시드 팀을 공략해 나갔다.

그들을 응원하는 전교생의 함성과 몇몇 관계자들의 호응이 기간트리카 대결장에 울려 퍼지니 콜로세움 속 글래디에이터의 싸움을 방불케 했다.

“젠장!”

공중에서 빠른 속도로 부딪히는 공격이 연이어 발생했다. 쌍둥이인 ‘인력’ 어빌리터와 ‘척력’ 어빌리터가 자신들의 어빌리티를 무시하고 치고 들어오는 류제의 공격에 치를 떨며 회피했다.

척도 차이가 심하게 나서 어빌리티인 ‘척력’으로 떨어뜨리려고 해도 류제가 그보다 더한 힘으로 공격해 오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좀 맞으라고!”

서바이벌 때부터 느꼈던 류제에 대한 열등감에 ‘가시’ 어빌리터가 짜증을 내면서 경기장 바닥을 죄다 뾰족하게 만들어 버렸다.

순식간에 경기장 지면에 가시가 차올랐다. 화려한 쇼맨십에 관객들이 환호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비키의 화염구가 가시 어빌리터의 등을 내려찍어 도리어 솟아오른 가시에 자신이 위험할 뻔했다.

“가서 왕녀님을 막아. 번개는 이쪽에서 막을 도리가 없어!”

‘척력’ 어빌리터가 쌍둥이 동생의 말을 듣고 류제를 상대하다 말고 먹구름을 생성하는 왕녀에게 돌진하여 밀어버렸다.

어려서부터 왕실 기간트리카 부대와 대결해 왔던 니냐롯트는 뒤로 밀리자마자 ‘척력’ 어빌리터의 능력 범위 바깥으로 유연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저, 저 괘씸한 년!”

왕녀의 몸에 있는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친히 능지처참을 시행하려는 듯 관객석에 앉아 있는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왕녀를 공격하는 ‘척력’ 어빌리터에게 진심으로 칼을 빼 들어 죽이려 들었다.

옆에서 그나마 이성적인 누군가가 몸부림치는 루이나를 말리는 것 같지만 여간 그 주변이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8반의 강화 어빌리터. 혼자 고립된 3반의 인력 어빌리터를 보기 좋게 제압합니다! 아― 바로 그때! 3반의 소리 어빌리터가 8반의 화염 어빌리터에게 반격 시작합니다! 합이 잘 맞는 협동 공격!

“으윽… 류제. 아직 멀었어?”

‘가시’ 어빌리터는 혼자서 처리 가능하지만 저주파로 불꽃을 꺼뜨릴 수 있는 ‘소리’ 어빌리티는 비키와 상성이 나빴다.

화염구 열 번에 1분간의 쿨타임이 있는 비키에게 있어서 최악인 경우였다. 그리고 지금, 비키가 아홉 발째의 화염구를 날렸다.

“저 소리 어빌리터, 발현할 때는 반드시 움직임을 멈춰. 그리고 가시 쪽은 첨예화할 수 있는 물체의 부피가 한정되어 있나 봐. 가시가 나오는 물체의 표면적을 보면 밑면을 확인했을 때…….”

왕녀와 합심해서 인력, 척력 쌍둥이 어빌리터들과 사투를 벌이는 류제 대신 비키를 도와주러 온 미나가 상대 어빌리터에 대한 분석을 끝마치고 무전을 보냈다.

학생용 기간트리카로는 어림도 없지만 군용 기간트리카는 서로 네트워크로 커넥트되어 있는 상태면 무전이 가능했다.

“짧게 말해! 짧게!”

군용 기간트리카의 AI로 HUD에 표시되는 공격 예측 가능 경로를 정신없이 공략해서 피하고 있는 비키에게 미나가 어떻게든 말을 줄여 보려고 했다.

“하…하여튼 현재 이 경기장에서 가장 크기가 큰 가시는 아래에 솟은 저게 전부라는 의미야. 그리고 비키 님처럼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쿨타임이 걸리는 것 같아. 경기장 바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니 저쪽도 곧 쿨타임이 걸릴 거야.”

그렇게 희망적인 분석은 아니었다. 나도 이제 한 발밖에 안 남았는데. 비키가 가시 어빌리터의 상태를 살피며 뒤를 돌았다. 저 가시 어빌리터는 모든 물체를 첨예하게 만들 수 있는지 자기 군용 기간트리카도 멋대로 뾰족하게 개조해서 치사하게 근접전을 유리하게 바꾸었다.

“드럼의 솔로 타임이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내가 대귀족 비키 셀로니아 영애를 이길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지.”

서바이벌 때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가시와는 다르게 지금 이 경기장에서 만들어내는 가시는 태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오늘따라 ‘가시’ 어빌리터를 상대로 비키가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비키! 가만히 있지 말고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란 말야!”

관객석에서 친구들과 앉아 목이 째져라 응원하고 있는 재경의 목소리가 비키에게 들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재경은 켁켁거리며 시끄럽게 외쳐댔다.

전망 좋은 곳에서는 각 반의 응원 팀들이 각자의 응원을 펼치면서 다 함께 구호를 외치기를 종용했다. 마스코트처럼 가운데에 선 유네는 말만 안 한다면 남자인지 아무도 모를 귀여운 모습으로 응원 수술을 흔들며 ‘플레이! 플레이!’를 외쳐댔다.

―3반― ‘가시’ 어빌리터. 손 옆 날에 가시를 만들어 공격합니다!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 공중전은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주변에 어빌리티를 사용할 물건이 마땅치 않습니다.

마침내 공방전을 하다 먼저 쿨타임이 와버린 ‘가시’ 어빌리터의 쿨타임이 채워지는 동안 보조를 맡은 ‘소리’ 어빌리터가 앞으로 나와 비키를 막았다.

“미나!”

“알았어!”

아까 계획했던 대로 비키가 손에 커다란 화염구를 만들자 소리 어빌리터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어빌리티를 사용하려는 듯했다.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못하니 그때 바로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 미나가 소리 어빌리터를 강하게 붙잡았다.

“저리 가!”

‘소리’ 어빌리터가 일대에 귀에 고통을 주는 음파를 퍼뜨렸다. 미나는 그럼에도 붙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이 정도는 귀에 이상이 가지 않도록 프로텍터가 막아주게 되어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화염구에 대응할 수 있는 ‘소리’ 어빌리터를 그냥 당하게 둘 수는 없었던 ‘가시’ 어빌리터가 비키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비키가 화염구를 전혀 생뚱맞은 곳으로 던졌다.

“멍청한… 꺄아악!”

“나이스, 류제.”

류제가 ‘척력’ 어빌리터의 다리를 붙잡고 시원하게 내던졌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지라 비키의 화염구는 ‘척력’ 어빌리터를 향했다.

날아가는 와중에도 화염구를 맞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어빌리티를 이용해 화염구를 오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보냈다.

“미안해!”

“박자가 엇나가다니. 드러머로서 수치다!”

하지만 그곳에는 ‘가시’ 어빌리터가 있었다. 연이어 적 팀의 부스터가 서로 부딪쳤다. 그러자 기체가 기간트리카 대결 모드인 안전 프로텍터 레벨 1의 프로그래밍에 의거하여 부스터 모드를 종료했다.

경기장 바닥, 자신들이 만든 울퉁불퉁한 지면으로 추락하는 그녀들을 ‘인력’ 어빌리터가 최선을 다해 끌어당겼지만 류제의 저지로 실패했다.

그때, 니냐롯트의 ‘뇌전’ 어빌리티가 발동되었다. 순간 어두컴컴해진 하늘은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멀리서 들리는 번개 소리에 치어리딩을 하던 유네가 겁에 질려 파르르 떨었다.

“설마 관중석까지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안심하세요. 그럴 일은 없답니다.”

“어… 세라 쌤!”

체육대회 내내 천막에서 학생들을 치료해 주던 8반 담임 세라 밀로니가 재경의 옆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등장에 재경이 살갑게 인사했다.

“경기가 막 끝날 모양이군요.”

세라가 막 자리에 앉은 찰나 경기장에 커다란 번개가 내리꽂았다.

세라의 말대로 번개는 관중석에는 전혀 해가 없었다. 기간트리카 대결을 위해 특수 제작된 경기장은 웬만한 공격을 견디는 견고함을 보였다. 기간트리카에 달린 프로텍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공격을 흘려보낸 것이다.

귀청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경기장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낸 번개가 찌르르르 흘러 순식간에 사라졌다.

비키와 미나, 류제의 공격으로 땅에 추락한 ‘가시’ 어빌리터와 ‘척력’ 어빌리터가 번개를 맞고 전투 불능이 되었다.

관중들은 화려한 공격에 환호하며 짧은 시간에 갈린 승패를 입에 오르내렸다.

삐― 경기 종료를 알리는 저음의 소리가 경기장 일대에 울려 퍼졌다.

―8반 시드 팀― 승리.

“와아아!”

천둥소리에 겁에 질려있던 유네가 8반이 승리했다는 소리에 폴짝 뛰며 응원 수술을 흔들었다.

8반의 다른 응원 팀도 정신을 차리고 맞은편에 있는 3반 응원 팀을 보란 듯이 놀려댔다. 그 모습을 보며 세라가 호호호 웃었다.

“양호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서 보러 왔어요. 천막에서는 운동장이 보이지만 기간트리카 경기장은 안 보이잖아요? 당신들이 열심히 하는 거, 전부 눈에 담고 싶은걸.”

“제 달리기하는 건 보러 안 오셨잖아요. 차별이야…….”

“렌 학생이 보러 오지 말라 하지 않았나요?”

그야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이라 재경은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부루퉁하게 입술만 내밀었다.

진짜로 쌤이 안 보러 오실 줄이야. 그 기막힌 역전극과 완벽한 격차의 승리를 못 본 건 아쉽네. 자랑하고 싶었는데. 쌤은 맨날 할머니처럼 시끄럽게 잔소리만 하니까 좀 칭찬도 받고 싶었는걸.

솔직하지 못한 재경이 아닌 척 친구들에게 헹가래를 받은 것을 떠올리며 세라를 몰래 살폈다. 칭찬받고 싶었다는 어린애의 투정에 어른인 세라에게는 저 말썽쟁이 학생이 아쉬워하는 게 빤히 들여다보였다.

세라가 정말 귀여운 애라면서 몰래 쿡쿡 웃었다.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물론 저는 렌 학생의 극렬한 반대에도 렌 학생이 활약을 두 눈에 모두 담았지요. 옆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얼마나 칭찬해 주셨는지 몰라요. 매번 우리 렌 학생이 말썽 피웠다는 소리만 듣다가 이렇게 다시 봤다는 칭찬을 들으니 제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더라니까요.”

“아, 쌤~! 보지 말라고 했는데…….”

“후후후. 그럴 수는 없지요. 렌 학생도 제 소중한 제자인걸요.”

세라가 밑에 점이 있는 쪽의 눈으로 윙크를 했다.

선생님도 그의 역전승을 지켜보았다는 소리에 재경의 얼굴이 살짝 폈다. 초중학생 때 학교 선생님은 자신에게 이런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다.

맨날 문제아 취급하거나 가난하다는 걸 대놓고 교실에서 말해서 애들한테 맨날 동정의 시선이나 받게 하고 말이야. 자기들 사정 아니라고 열받게.

―이어서 10분의 휴식 후에 4반 시드 팀와 8반 시드 팀의 결승전이 있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어서 10분의 휴식 후에 4반 시드 팀과 8반 시드 팀의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이 있겠습니다. 많은 관전 부탁드립니다.

“우리 반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도 결승전까지 올라갔다니, 기쁘네요. 반 친구들이 열심히 하던가요?”

“류제네야 원래 잘하는 애들이잖아요.”

“원래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다들 열심히 노력한 결과지.”

“하지만 류제는 기간트리카 다룬 지 이제 3개월째인데 저렇게 잘하잖아요. 노력도 별로 안 하는데. 저는 엄청 열심히 연습했는데 류제 머리카락도 못 스쳤다구요.”

이 주인공 만능주의. 재경은 빠른 시간 동안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는 기간트리카 대결의 화려함에 자신이 이뤘던 달리기의 역전극이 하찮다고 느껴졌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는 예선전에서 화려하게 져버렸지. 젠장, 저런 류제도 고생하는 게 중간 보스전인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되기나 할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니까요. 렌 학생도 렌 학생대로 잘하는 게 있잖아요? 요리나, 달리기나, 이것저것 만드는 거라든가.”

“만드는 거라니. 그건 별로… 아, 서…설마 쌤 들었어요?”

“응원 도구요? 당연하죠. 학생들이 너무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서 저도 하나 얻어서 쓰는 중인걸요!”

세라가 옆에 두었던 응원 봉을 짜잔, 하고 꺼내 들었다. 재경은 자신이 만든 응원 봉이 어디까지 퍼져있을지 몰라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 귓불은 새빨개져서는 오늘 아침에 괜히 오지랖을 부린 것을 극심하게 후회했다.

“잘 쓸게요, 렌 학생.”

무언의 비명을 지르며 부끄러워하는 렌의 모습이 귀여워 계속 놀려주고 싶던 세라는 제 입장이 선생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애써 씰룩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 출전하는 학생들이 이룬 팀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4반 시드 팀이 가진 어빌리티가 뭐였더라.”

“어… 선생님 알고 계세요? 걔네들 완전 치사해서 시드 팀 어빌리티 공개 안 하던데.”

“저는 선생님이잖아요. 규칙상 당신들껜 말을 못 했죠. ‘수인화’를 할 수 있는 학생이 있네요. 그리고… ‘마비’과 ‘환영’이라니. 굉장한 조합인데요. 거기에 ‘만생(蔓生)―식물의 줄기가 덩굴로 자람’까지. 상당히 궁합이 좋아요. 우리 팀은 ‘화염’, ‘뇌우’, ‘분석’, ‘강화’인가요. 상당한 격전이 될 것 같네요. 우리 반 ‘숙살(肅殺)’이 같은 팀이었다면 유리하겠지만.”

세라는 걱정이 아닌 기대하는 눈빛으로 경기장 안에 있는 류제네 팀, 그리고 결승전 상대인 4반의 시드 팀을 구경했다.

입학하고 고작 3개월인 학생들이 얼마나 성장했을지 그녀는 두 눈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위에 있는 ‘높으신 분’들에게 제립학교 학생들의 노력을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들 따위가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되는 이들이라며.

―잠시 후 1학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이 있을 예정입니다.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결승전을 시작한다는 말에 가만히 비를 맞던 니냐롯트가 넌지시 고개를 들었다. 빗방울이 눈물처럼 광대뼈를 스치며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호되는 답답한 군용 기간트리카를 해제하고 있던 그녀가 까마득한 위를 쳐다보았다.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나라의 고위 공직자가 결승전을 준비하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가 기다리던 자가 있을까 살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늦으시는가 했더니 오시지 않으셨구나. 폐하께서는 나랏일 때문에 늘 바쁘시니까. 왕녀는 이해한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쓸쓸하게 입을 달싹거렸다. 예전보다 더 쌀쌀맞아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바마마께서는 그때 이후로 어빌리터를…….

“왜 그래?”

곧 시작할 결승전을 위해 비키, 미나와 함께 작전을 짜던 류제가 다른 곳에 시선이 팔린 왕녀에게 집중을 요했다. 그 기척에 니냐롯트는 섭섭한 마음을 노련하게 숨기며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그 작전으로 가면 되겠는가?”

하지만 어빌리티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는지 아직 왕녀의 기분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라는 것을 암시하듯 준결승전이 끝날 때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슨 문제가 있나 확인하려 류제가 그녀의 시선이 향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좋은 자리에 거만하게 앉아서 사람을 내리깔 듯 쳐다보는 자들이 시선 끝에 닿았다.

맞아,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토너먼트를 구경하러 온다고 했지.

예선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저자들이 내려다보는 걸 보고 있자니 미래가 달린 대결을 오락거리 취급하는 것 같기는 하다. 사람을 원숭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아까 준결승전에서 만난 ‘가시’ 어빌리터도 쓸데없이 가시를 만드는 데 힘을 남발했지. 쇼맨십이라도 보여 주는 양. 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건가?

알 바 아니었지만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었다. 뭐, 언젠가 상사가 될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은 나쁘지 않겠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류제, 기간트리카 장갑하래.”

“아, 응. 알려 줘서 고마워, 미나.”

“천만에. 하아, 이번에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네. 토너먼트는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경기야.”

지친 미나가 흐물흐물 흘러내리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빌리티 특성상 보조 역밖에 하지 못하는 미나가 상대하기엔 이전 준결승전의 상대가 너무 벅찼던 모양이다.

가볍게 웃은 류제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미나를 북돋아 주었다.

“아냐, 네 분석 덕분에 공략도 쉽게 할 수 있는걸. 이번에도 잘 부탁해. 결승전 상대는 어빌리티를 잘 모르니까 말이야.”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미나가 마지못해 웃으며 군용 슬렉터를 착용했다. 결승전 대결 전 비키가 팀원들을 둥글게 끌어모아 어깨를 다독였다.

“이것만 이기면 종합 우승은 우리 차지야. 지금까지 반을 위해 고생해 준 친구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어. 최선을 다해 이기자.”

“응!”

“파이팅.”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결승전― 1학년 4반 시드 팀 대 1학년 8반 시드 팀. 각 팀은 제자리에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기 시작 1분 전―

아까 ‘가시’ 어빌리터의 화려한 난장으로 울퉁불퉁하게 변한 경기장 바닥 중 그나마 평평한 곳에 발을 디딘 류제네 팀이 경기장 반대편 저 멀리 보이는 4반의 시드 팀을 살폈다.

―경기 시작 30초 전―

토너먼트에서는 경기 시작 전 기간트리카를 미리 장갑해도 무방하며, 경기 시작 전에는 부스터로 발을 공중에 띄우는 것이나 흰색 라인 앞에 서있는 것, 어빌리티를 발현하는 것이 반칙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경기장 곳곳에 솟은 가시 때문에 흰 라인의 경계도 애매해지고 평지도 사라졌지만 두 팀 모두 어찌어찌 흰색 선과 평지를 찾아 자세를 잡았다.

―경기 시작 5초 전― 3, 2, 1― 대결 시작!

삐― 저음의 알람이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관객이 환호성과 동시에 땅에서 솟은 가시 때문에 가려진 시야를 피하기 위해 미나를 제외하고 세 사람 모두 부스터로 공중에 날아올랐다.

대결하는 상대인 4반 시드 팀 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것은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은’ 학생이었다.

그녀는 무방비한 상태로도 아주 가뿐하게 높은 가시 위로 올라왔다. 아무래도 맨몸이다 보니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상태로 공격하는 입장에서 머뭇거려졌다.

“야옹~”

허리를 숙여 가시 위에 자연스럽게 네발로 선 그녀가 고양이처럼 울었다.

늘 끊던 스타트와 다른 양상에 류제가 이상함을 느끼고 자세를 주춤했다. 왜 갑자기 패턴이 바뀌었지? 4반 시드 팀은 항상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덩굴로 경기장을 감쌌는데?

바로 그때 네발로 선 그녀의 동공이 고양이처럼 세로로 찢어지고 송곳니가 길게 생겨났다. 뿅, 하고 나타난 머리 위에 있는 귀는 다름 아닌 고양이 귀였다.

“뭐야?”

“내내 숨기느라 죽는 줄 알았지 뭐냥.”

‘수인화’ 어빌리티 중 ‘고양이 수인화’를 가진 그녀의 몸이 알맞게 변화했다. 수인화 어빌리터를 처음 본 그들이 당황해서 주춤거렸다.

“저건 도대체…….”

설마 저대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고 싸울 생각인가? 왜 덩굴은 안 만드는 거지? 어차피 결승전이니 순서를 바꿔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야단났네. 일이 꼬였다.

“저거 ‘수인화’야! 좀처럼 보기 힘든……. 꺄아악! 시작됐다! 이렇게 갑자기?!”

그들을 동요시키듯 수십 개의 덩굴이 경기장 일대를 쓰나미처럼 덮었다.

모든 관중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는 이 경기장에서 결승전까지 온 팀의 어빌리티가 상당 부분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처럼 느껴져도 사실이었다.

4반 시드 팀은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이와 같은 덩굴로 경기장을 전부 덮어버려서 정보 수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패배한 팀에게 무슨 어빌리티였나 물으려고 해도 다들 기절했거나 패닉 상태에 빠져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베일에 싸인 그대로인 채 결승에서 만났는데 첫째로 드러난 어빌리티가 ‘수인화’라니.

갑자기 비가 그치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덩굴들이 비를 막았다.

“당황하지 마. ‘덩굴’까지는 예상했잖아. 미나!”

“응, 하고 있어!”

덩굴이 생겨나자마자 미나가 정글 속 밀림 안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숨긴 ‘만생’ 어빌리터를 찾기 위해 ‘분석’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척했다.

실제로는 마족의 육감으로 수색하는 거지만 인간인 척하고 있으니 그것을 ‘분석’ 어빌리티라고 포장하기 편했다.

“아냐, 아냐. 너희들 상대는 나양~”

고양이 흉내를 내는 상대 팀원의 슬렉터에서 빛이 발했다. 군용 슬렉터가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티를 읽고 그에 적합하게 기간트리카를 변형시키기 시작했다.

군용 기간트리카는 ‘수인화’에 맞춰서 기간트리카의 부스터에 쓰는 에너지를 줄이는 대신 관절 능력을 최대치로 올리는 식으로 형태가 바뀌었다.

“냐옹. 놀랐냥? 수인화 모드는 처음이냥~”

날카로운 눈에는 고양이 눈이라는 장점과 단점을 보완해 주는 고글이 짜르륵 소리를 내며 눈동자 위치를 좇아 시야를 수정했다.

손끝 장갑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각 손에 네 개씩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짐승처럼 네발로 공격하는 모드. 수인화 어빌리터의 기간트리카 장갑을 처음 본 류제는 그와 전혀 다른 기체 모습에 동요했다.

공격을 앞둔 그녀의 동공이 확장되고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다!”

동체 시력을 강화한 류제가 고양이가 덤벼드는 것을 보자마자 외쳤다. 동시에 금속이 강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밑은 가시, 위는 덩굴. 공중전은 불가능하고 이 좁은 곳에서 날랜 고양이가 능수능란하게 공격을 개시했다.

“젠장, 너무 빠르잖아.”

“그걸 상대하는 게 네 역할이잖아. 제대로 하란 말야, 게으름 피우지 마, 류제 이 바보!”

“바보라고? 아으… 진짜. 말할 틈도 없다.”

고양이녀가 덩굴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인간을 뛰어넘는 속력, 어둠 속에서도 훤한 시야로 공격했지만 류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좀처럼 공격이 먹히지 않자 짜증이 나서 류제를 향해 하악질을 해댔다.

“짜증 나냥!”

그녀가 공격을 멈추자 비키가 잽싸게 화염구를 날렸다. 하지만 니냐롯트가 내리는 비로 습기를 머금은 덩굴은 빠르게 자라나 타기도 전에 새롭게 수복되었다.

불을 본 고양이가 유연하게 공격을 피해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제길, 저쪽은 이쪽 어빌리티를 전부 알고 있다 이건가?”

“유명한 것도 문제야.”

“동감이네.”

‘덩굴―만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지만’ 어빌리티는 사전에 알아냈지만 ‘고양이 수인화’는 이제야 파악했다. 나머지 두 어빌리티는 뭘까 감도 잡히지 않았다.

류제의 팀은 적 팀의 능력을 모르는 반면 셀로니아 가문의 비키와 어마어마한 척도로 전교에 소문난 류제, 이 나라의 왕녀 신분인 니냐롯트는 학교에서 무척 유명한 사람들이라 어빌리티가 소문난 지 오래였다.

“덕분에 친구들하고 열심히 공략했냥.”

고양이 수인화 어빌리터가 어둠을 틈타 이동해서 사방을 주시 중이던 류제 팀원들의 가운데 있던 뾰족한 가시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공격형 어빌리터는 너밖에 없는 건가? 덩굴에 고양이에, 다음은 뭐지?”

“글쎄, 분신 같은 걸까냥.”

고양이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와 똑같이 생긴 짐승형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고양이 수십 마리가 등장하였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길, 사람을 농락하는 것도 아니고.

“비는 고마워양. 덩굴은 물이 많이 필요하냥. 저번에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바람에 혼났단 말양.”

니냐롯트가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단점을 유리하게 써먹다니.

“짐승 따위, 불로 구우면 그만이야!”

비키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며 남은 9발의 화염구를 죄다 고양이들을 향해 난사했다.

뜨거운 화염이 일정한 경로 없이 덩굴줄기에 처박혀 텁텁하게 수증기를 내었다. 수가 늘어난 고양이들은 유연하게 비키의 화염구를 피했다. 화염구를 맞은 분신들은 전부 가짜라 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니냐롯트도 덩굴이 모여있는 곳에 연이어 번개를 내려찍었다. 번개를 내려찍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비를 그치게 해야 해. 니냐롯트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렸다.

그러나 니냐롯트가 번개로 내려찍고, 비키가 화염구를 난사해도 비가 있으면 덩굴들은 끊임없이 자라났다.

“이제 내 쪽에서 갈 거냥.”

덩굴이 뚫렸던 부분이 모두 막히자 수십 개의 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동시에 동공이 커지고, 수십 마리의 거대한 기간트리카 짐승의 공격이 쏟아졌다.

“전부는 못 막으니까 알아서 피해!”

“젠장! 정말 싫어. 미나, 아직 멀었어?”

“찾았어. 근데 접근이 어려워. 저 고양이, 우리를 계속 여기에 묶어둘 셈인 것 같아.”

“이 빌어먹을 능력은 도대체 뭔데? 저 고양이, 어빌리티가 두 개나 되는 거야? 사기잖아!”

“아니, 이건 다른 사람의 능력이야. ‘환영’. 누군가가 그녀를 보조해 주고 있어.”

‘수인화’, ‘덩굴’, 그것에 이은 ‘환영’ 어빌리티. 그들을 속박 중인 왕녀의 ‘뇌우’ 어빌리티. 쿨타임이 온 비키.

지금 당장 저 날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류제뿐이었다.

―아아― 연이어 치는 번개에도 꿈쩍하지 않는 덩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군요, 고양이 양. 1학년 유일의 ‘수인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지요. ‘수인화’의 기간트리카 모드는 역시나 색달라요.

재경이 앉은 곳은 자리가 좋지 못해 비키의 화염과 왕녀의 번개로 잠깐 드러난 덩굴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 미치겠어서 고개를 쭉 내빼고 시야를 좁히다가 결국 안쪽을 살피는 데 실패한 재경이 짜게 식어 관객석 등받이에 푹 기대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아까랑 똑같네, 뭐. 결승전인데 이게 뭐야.”

“그녀들 나름의 전략이겠지요. 우리 반 학생들이 저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궁금하네요. 그렇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아무것도 안 보이면 구경하는 사람만 답답해 미친다고. 재경이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리며 심심함을 달랬다.

호감도 이벤트 비중을 줄이고 히로인들과 친분을 쌓기 위한 챕터인 만큼 구기 대회나 달리기 같은 체육대회 이벤트는 수학여행 때처럼 선택지가 난무하지 않고 텍스트로 일자 진행을 하거나 CG가 지나가는 것이 대다수다.

하지만 이 토너먼트만큼은 보스전의 연습 게임으로 정해진 방향키를 빠른 속도로 입력해서 피하는, 이른바 턴제 키보드 방향키 입력 대결로 이루어졌다.

주인공 팀의 턴이 되면 적 팀에 매칭되는 대결 상대와 누가 누가 더 빨리 방향키를 입력하느냐로 대결하는 형식이다. 준결승은 할 만한데 결승은 상당히 어려웠던 기억이 있었다.

‘고양이 수인화’는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르고 ‘마비’는 주인공의 반응을 느리게 만들고 ‘만생’ 쪽은 방향키를 가려버리지.

‘환영’은 입력해야 하는 방향키 힌트를 겹쳐 버리거나 점점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 ↓ → ↑ ← → ← ↓) 같은 걸 읽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입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봐. 전부 외우지 않으면 불가능하단 말야. 중간 보스전은 저것보다 더 어렵구.

류제가 그걸 잘하고 있나 모르겠네. 경기장 안쪽이 보이지 않자 작은 틈 사이를 찾아보려고 기웃거리던 재경이 뭔가 생각난 듯 반쯤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차, 쌤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재경이 덩굴 안쪽에 보일락 말락 하는 움직임을 살피던 세라를 불렀다. 세라가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화장실 가고 싶나요?”

“아닌데요. 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아이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쌤,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만약에 ‘마비’ 어빌리터처럼 학교에 누군가의 계략으로 치명적인 독이 퍼져나가면 어떻게 해요? 아니면 쟤가 실수로 학교에 어빌리티를 살포해 버리면 그냥 다들 마비되고 마는 건가요?”

“네? 갑자기 그런 뚱딴지같은 질문을 하시다니. 하하, 렌 학생은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아니, 곧 있으면 진짜로 벌어질 일이니까 그렇지. 재경이 중간 보스의 능력을 떠올렸다. 병마는 주변에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역병을 뿌리는 최악의 마족이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연휴에 많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남아있는 학생도 상당수 되니까 말이야. 혹시 모르잖아.

“막을 방도가 없어요? 그럼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당하는 거 아니에요? 만약 그런 마족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그렇지만은 않아요. 제립학교는 마족의 공격 대상이 된 적이 많다고 알고 있어요. 선생님이 학교에 다닐 때에도 한 번이지만 마족이 쳐들어온 적이 있었고요. 하지만 괜찮아요. 렌 학생이 말한 그런 마족에 대한 대비는 되어있으니까요.”

“어떻게요?”

“학교에 소화전이 있지요?”

“네.”

“소화전 긴급 알람이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말 불이 났을 때, 또 하나는 마족이 침입했을 때 울리는 거예요. 언젠가 소방 훈련을 하겠지만 지금 미리 말씀드리자면 마족이 침입했을 때는 학생용 슬렉터로는 정신계 마법과 독 계열 마법을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각 반 앞에 배치된 소화전 비상벨을 누르면 따로 구비하고 있는 방독면이 나옵니다. 기숙사에도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고작 그걸로 막을 수 있어요?”

“물론이죠. 일회용이지만 고성능이에요. 소중한 어빌리터들이 다치면 안 되잖습니까. 아, 혹시 그걸로 장난치실 생각이면 저번처럼 봉사 활동으로 끝나지 않으니 건드리면 안.된.답.니.다?!”

“아, 쌤, 제가 그렇게 생각 없어 보여요?”

“네. 이 말썽꾸러기!”

세라가 너무 상큼하게 말하는 바람에 재경은 조금 찔렸다. 확실히 말해서, 고성능의 방독면은 건들 의사가 100% 생겼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4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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