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4)
재경이 양호실에 피난을 가서 쿨쿨 잠을 자는 사이 8반 여자 배구 팀은 순조롭게 결승전에 올라갔다. 이어 치러진 여자 피구 준결승전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연이은 승리에 1학년 8반 학생들은 이대로라면 예정대로 반 종합 우승을 거둘 것이라 서로 확신했다.
구기 대회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 그사이 휴식을 위한 점심시간이 있었다. 학생들은 식사를 위해 구기 대회 경기장에서 각 반의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어디 보자. 등나무 계단 아래에 걸터앉은 류제가 일정표를 꼼꼼하게 읽었다. 점심을 먹고 충분히 쉰 다음 구기 대회 결승전과 청백 팀 남자 농구전을 치르고 이어서 줄다리기, 줄넘기, 달리기 시합이 있었다.
달리기는 남자 100미터, 여자 100미터, 장애물 달리기, 달리기의 꽃 장거리 이어달리기가 있었다. 달리기 시합이 끝나면 비로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준결승전이 시작된다.
“일정이 빡빡하네.”
“그러게. 응원 겸 점심시간에 댄스 동아리에서 공연을 해준대. 저기서 하나 봐!”
유네가 운동장 가운데서 공연 준비를 도와주는 선생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배구할 때 묶었던 앞머리를 다시 푼 류제가 얼핏 보이는 눈동자를 굴려 유네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유네의 말대로 흙을 다듬는 중인 선생님들이 운동장 가운데서 삼삼오오 모여 고생하는 중이었다.
“오오… 본격적이네. 신기하다.”
“류제 군네 미들 스쿨은 저런 거 안 했어?”
“우리는 뭐, 깡촌이라서 체육대회라기보단 어르신들 축제였지.”
반면 이곳은 6시에 있는 폐회식 이전까지 학생들을 위한 스케줄이 꽉꽉 들어찼다. 나도 농구랑 달리기,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가 남았지. 줄다리기는 다 같이 하는 거니 제외시킨다면… 하아, 많기도 많다.
저 멀리서는 벌써부터 단체 줄넘기 연습을 한다고 줄을 돌리며 폴짝폴짝 뛰는 학생들이 있었다. 수돗가 근처에서는 물장난을 한다고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온몸을 흠뻑 적신 채 노는 중이다.
날은 체육대회 하기에 적당히 선선하니 좋았다. 무사태평하니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류제 군. 점심 왔다.”
“비키는 오늘도 고생하네. 메뉴는 뭘까?”
“모두 차례대로 줄 서!”
세라에게 할당량을 받아온 반장 비키가 힘들여서 옮긴 상자를 활짝 열었다.
그녀가 꺼내 든 것은 포장된 수제 햄버거, 컵밥, 샐러드와 목이 막히지 않게 마시는 이온 음료수였다. 기숙사 식당 영양사와 조리사들이 체육대회를 위해 아침부터 공을 들여 만든 야외 도시락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열심히 몸을 움직였던 학생들이 배가 고파 허둥지둥 제 몫을 들고 갔다.
계단에 앉아있던 류제도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양호실에 가서 렌을 불러올게.”
“같이 갈까?”
“됐어. 대신 내 거랑 렌 몫도 좀 챙겨줘.”
“으응!”
유네가 알겠다며 맡겨만 달라 가슴을 쳤다. 응원을 하겠다고 오늘따라 활기 넘치는 듯해서 보기 좋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쉬엄쉬엄 건물 안으로 들어간 류제가 텅 빈 복도를 둘러보았다. 그의 뒤로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큰 소리로 닫혔다. 학생들이 모두 운동장에 나가 있어 건물 자체는 무척 조용했다.
이따금 학교 반대편 복도에서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는 들렸지만 그때뿐, 다시 주변은 금세 고요함을 되찾았다.
열린 창문 바깥으로 학생들의 고양된 웃음소리와 수다 소리만 들린다. 원래 학업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학교 건물이었지만 오늘 주인공은 운동장이다.
그래서인가 이곳을 거닐고 있으려니 체육대회와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렌은 이런 곳에서 자고 있단 말이지.
밥때는 귀신같이 챙기는 주제에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렌은 아직까지 양호실에서 자고 있나 싶다.
틈만 나면 다치고 기절하는 렌 담당으로 꼬박꼬박 양호실을 다니는 류제는 덕분에 길을 헷갈리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를 찾았다.
작게 문을 두드리지만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양호 선생님이 따로 부스를 만들어 운동장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렌은 하도 많이 다쳐서 양호실 비상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꿰고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류제가 양호실 창가 제일 안쪽에 숨겨진 비상 열쇠를 집어 양호실 문을 땄다.
알코올 냄새가 풍기는 익숙한 전경. 류제는 살금살금 하얀 천막이 쳐진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안으로 검은 인영이 세상모르고 쿨쿨 잠자고 있다.
“렌… 일어나. 점심 왔어.”
둘뿐인 공간. 바람에 펄럭거리는 새하얀 커튼. 류제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을 깨우기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침대 맞은편 의자에 삐그덕 앉은 그가 가만히 렌을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라니까.”
천막을 걷으니 렌이 밤을 새워서 응원 도구를 만든다고 완전 곯아떨어져 있었다. 저 컨디션으로 배구를 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렌은 자주 양호실에 실려 오지만 체력만큼은 정말 좋았다.
아직 렌한테는 달리기가 남아있으니까 좀 더 체력을 보충하면 좋겠지. 하여튼 웃긴… 짜식, 맨날 무리만 하고.
렌의 말투를 흉내 낸 류제가 잠자는 공주의 볼을 쿡쿡 찔렀다. 잠을 방해받는 것이 싫었는지 렌이 오만상을 찌푸리고 몸을 뒤척거렸다.
렌은 체력은 좋지만 아침에는 약한지 룸메이트가 없는 렌을 위해 류제가 아침에 깨우러 와줄 때도 정신을 못 차렸다.
덕분에 렌의 잠버릇을 꿰고 있는 류제는 지금은 못 일어나는 타이밍임을 짐작하고 괘씸한 마음을 품었다.
의자에서 슬슬 일어난 류제가 한쪽 다리를 침대 가로 올려놓고 기댔다. 긴 앞머리는 얼굴에 장막을 쳐서 표정을 가렸다. 입술과 입술 사이가 느릿하게 벌어졌다.
그가 렌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이 감미롭게 속삭였다.
“안 일어날 거야?”
“우아악!”
귀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나자 본능적으로 발버둥을 친 재경이 무드고 뭐고 류제의 이마를 제 머리통으로 시원하게 받아치고 말았다. 가까이 붙었던 남정네 머리 두 개가 당구공 부딪히듯 충돌했다.
“아파라……!”
“으으… 뭐야. 뭔데?”
잠에서 덜 깨 여기가 어딘지 헷갈렸던 재경이 바퀴벌레가 날갯짓을 하면서 귓가를 스친 게 아닐까 하고 질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이 덜 깨서 이마는 왜 아프며,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은 뭐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니 류제가 침대 아래에서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류우제?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아니, 좀… 풀이 죽었다고나 할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이마가 아플 뿐. 류제가 찔끔 나오는 눈물을 닦았다.
것보다 재경은 벽이나 천장 등을 살피며 자신의 귀를 스쳤던 벌레를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봤어? 바퀴벌레였어? 뭐야, 그거?!”
“뭐가.”
“내 귓가에 있던 이상한 거! 으으, 소름 끼쳐. 아니, 이런 곳에도 바퀴벌레가 다 있냐?!”
“잘못 본 거 아냐?”
“아냐. 확실해!”
내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단 말이지. 재경은 할머니랑 둘이서 살던 낡은 집에서 심심찮게 발견했던 바퀴벌레를 떠올리니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 끔찍하다. 자고 있는데 몸에 기어오르거나, 귓가에 슬슬 기어 다니고, 날아다니고……!
재경이 떠올리기도 싫다며 온몸을 붙잡고 부르르 떨었다. 범인 류제는 찔려서 입을 다물었다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는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는 못 봤는데. 밖에서 바람 불어서 착각한 거 아냐? 것보다 지금 점심시간이야. 비키가 햄버거랑 음료수 배분해 주고 있어. 일부러 깨우러 왔더니 바퀴벌레는 무슨 헛소리야.”
“진짜 못 봤어? 이상하다. 분명 그때 그 감각이었는데.”
재경이 류제를 신용 못하는 듯한 말투로 이불을 들춰가며 샅샅이 뒤졌다. 침대에는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가 다리를 땅으로 내렸다. 혹시라도 신발 안에 들어갔을까 꼼꼼히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은 재경이 마지막 확인으로 침대 아래를 두리번거렸다. 역시 바퀴벌레는커녕 새까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착각이라니 다행이다. 나 몇 시간이나 잔 거야. 으하아암. 완전 푹 잤다.”
“두 시간 좀 넘었을걸.”
“여자애들 배구는? 피구도 끝났나?”
“둘 다 이겼어. 비키가 연달아 다섯 명이나 죽였거든.”
눈에 불을 켠 채 상대 팀을 사냥하는 게 아주 신나 보였지. 류제가 역시 승부욕 오른 여학생들은 아무리 봐도 무섭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얼… 대단한데. 이대로라면 진짜 우리 반이 종합 우승 할지도 모르겠네.”
“그럴지도 모르지. 토너먼트만 잘 끝내면.”
류제가 아직도 아픈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그걸 본 재경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인상을 썼다.
“류제 넌 왜 나한테 찰싹 붙어있던 거야? 벌레 잡으려고 한 거 아니었어? 만약이라도 절대로 내 귓방망이에다가 바퀴벌레 사체를 만드는 짓거리는 하지 마라… 죽빵을 날려줄 테다.”
재경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할머니가 바퀴벌레 잡는다고 낡은 책으로 귓방망이를 후려쳤었는데 바퀴벌레가 귓가에서 찍 죽는 감각이 얼마나 싫은지 아무도 모를 거다.
류제는 뜨끔했지만 유연하게 빠져나왔다.
“깨우려고 한 거지. 계속 불렀는데 안 일어나서. 바퀴벌레는 무슨.”
“깨웠다고? 못 들었어. 나 진짜 피곤했나 보구나.”
그럴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인 재경이 류제를 뒤로하고 양호실에서 먼저 나왔다. 류제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에 성공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양호실 문을 잠갔다.
“벌써 점심시간이구나. 왜 오늘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걸까. 괜히 밤을 새워가지고. 아으.”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그런 거지. 그렇게 아쉬워?”
“그런 의미 아냐. 근데 류제, 너 그거 알아?”
앞서가던 재경이 뒤를 돌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렁설렁 걸어오던 류제가 재경과 눈이 마주치자 뭘 아느냐며 눈을 끔벅거렸다.
“바퀴벌레는 머리를 잘라도 일주일을 산대.”
“으윽… 아직도 바퀴벌레가 신경 쓰이는 거야? 이제 그 이야기 그만하면 안 돼?”
마음에 상처가 생기니까. 류제가 꿍얼거렸다. 재경은 이 기회에 알려 줘야겠다며 단단히 일렀다.
“됐으니까 들어, 이 바보야. 그거 알아? 바퀴벌레처럼 마족들도 심장을 파괴해도 재생할 수 있다나. 엄청나지 않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게.”
가끔 생뚱맞은 이야기를 한다만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영문을 모르겠던 류제가 성큼성큼 걸어 앞서가는 재경을 따라잡으며 물었다.
“자다가 꿈이라도 꾼 거야? 바퀴벌레 꿈? 마족 꿈?”
“꿈이 아니라 바퀴벌레 하니까 생각난 거야, 짜샤. 여튼 그래서 마족을 죽이려면 체내에 숨겨 놓은 핵을 파괴해야 한다더라.”
“어어, 그건 아직 안 배운 내용이잖아. 무슨 책이라도 읽었어?”
“암요, 내가 최근에 마족에 대해서 공부 좀 했지. 명심해라 류제, 심장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할 거면 바퀴벌레를 죽일 때처럼 꽉! 하고 전신… 으윽! 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말야.”
“역시 잠이 덜 깼구나, 너.”
“얌마, 친구의 소중한 조언을 아무렇게나 흘려들을래?”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우리가 마족을 상대하려면 아직도 멀었거든?”
“좀 귀담아들어. 근래가 될지 누가 알아?”
재경이 팔꿈치로 류제의 옆구리를 퍽퍽 쳐댔다. 분명 헛소리일 게 뻔했기에 귀찮아진 류제가 알았다며 대충 답했다. 속삭이는 소리를 바퀴벌레 날갯짓 소리하고 헷갈리더니 이상한 소리나 하고 앉았어. 내 목소리가 바퀴벌레 소리냐.
자존감이 떨어진 류제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그도 렌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머리로는 알았다. 하지만 요즘 들어 행동이 절제되지 않아서 이 모양이다.
괜히 수학여행 갔다 와서 뽀… 그런 걸 해버리니까 그런 거잖아. 나도 참 대담하지. 다음부터는 안 해야지. 절대로 안 해.
라고 생각해도 기회가 된다면 이번처럼 슬쩍 손이 갈 것 같아 걱정이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변태 같은 사람이 되었는지 류제도 몰랐다.
양호실에 피난을 간 덕분에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재경은 유네가 챙겨준 점심으로 늦게나마 식사를 했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친구들을 따라 댄스 동아리의 공연을 보러 가려고 햄버거 두 입째 먹는 순간 여학생들이 수돗가에서 물놀이를 하다 튄 물에 전신이 흠뻑 젖고 말았다. 렌 지미의 불행에 방심한 탓이다.
투 헤드샷에 원 물벼락이라니.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것도 렌 지미가 겪어야 하는 불행 중 하나인가!
“으아아! 이 빌어먹을 세상아. 나한테 무슨 원수라도 졌냐!”
재경은 괜히 애꿎은 하늘을 향해 빼액 소리치며 성질머리를 풀어냈다. 참다못해 수돗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달려든 재경은 너네도 밥 먹다가 한번 물벼락 당해 보라며 수돗물을 틀어 그녀들에게 똑같이 물을 뿌렸다.
물장난을 친다고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인 그녀들에게 살짝 젖은 재경이 덤벼봤자 그 시점에서 재경의 패배가 예상되었건만 재경은 굴하지 않고 공격을 시도했다.
“받아라!”
“우하하!”
“호스를 쓰는 건 반칙이지! 차가워. 하하하!”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즐거운 그 나이대의 애들답게 재경의 복수전은 어느새 규칙이 있는 장난으로 변해 버린 모양이었다.
밥 먹다가 말고 물장난에 빠져 신나게 놀아버린 재경은 체육복이 흠뻑 젖어버렸다. 그 꼴로 댄스 동아리 공연을 보고 돌아온 류제와 유네를 반겼다.
뒤따라오는가 싶더니 안 보여서 뭐 하나 했는데 혼자서 모르는 친구들하고 물놀이를 할 줄이야.
류제가 푹 젖은 재경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유네가 친구들 땀 닦으라고 가지고 있던 수건을 재경에게 건네주었다.
“렌 군, 완전 다 젖어버렸네.”
“너 달리기 시합 있잖아.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때까지 마르겠지 뭐. 시간도 많이 남았고. 아, 오랜만에 물놀이하니까 재미있었다!”
잠이 확 깰 때까지 신나게 놀았는지 재경이 장난꾸러기처럼 낄낄거렸다. 재미있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류제가 진짜 어쩔 수 없는 애라며 이마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재경이 수건으로 머리를 다 말렸을 무렵, 점심시간이 끝나고 있을 구기 대회를 위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1시 20분까지 여자 배구― 여자 피구― 결승전에 참가하는 인원은― 경기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1학년 3반― 1학년 8반― 2학년 1반― 2학년 7반― 3학년 5반― 3학년 8반―
“구기 대회 결승전 시작하나 보다. 렌 군도 류제 군도 우리랑 응원하게 자리 잡으러 가자!”
“유네, 오늘 엄청 신났구나?”
“에… 그래 보여? 나야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도 떨어지고 해봤자 응원밖에 못 하니까 응원이라도 열심히 하고 싶어서. 렌 군이 응원 도구 열심히 만들어 주기도 했고. 이것 봐!”
“시…시끄러워!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별로 열심히 만든 거 아니거든?!”
티셔츠에 고인 물을 짜던 재경이 수치스러워 죽겠다고 빽 소리쳤다. 아주 대대손손 자랑하지 그러냐!
하지만 유네는 정말로 대대손손 자랑하려는 모양인지 재경이 만들어준 머리띠와 부채로 중무장 하는 중이었다. 별이 두 개 뿅 나와 있는 머리띠는 앙증맞고 귀여운 유네한테 잘 어울렸다.
“이거 봐. 렌 군 스페셜이야~”
유네는 다른 여학생들이 귀엽다고 했다며 짠 부채를 빼 들며 부채질을 했다.
“젠장… 괜히 만들었어.”
재경이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렌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유네는 서운했다. 다들 멋지다고 칭찬해 줬는데. 렌 군도 참, 또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니까.
자리를 옮겨 아침에 배구 경기를 했던 경기장으로 이동한 류제와 유네, 재경을 비롯한 1학년 8반 학생들은 결승전 응원을 위해 경기장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했다.
응원 팀에게 억지로 응원 봉을 건네받은 재경은 아무래도 자기가 만든 것이라 그런지 의식되어서 들고 다니기 창피했다.
“배구도 피구도 두 종목 다 이겼으면 좋겠다.”
“그러게. 그럼 비키도 좀 잠잠해지려나?”
“토너먼트 끝나기 전까지는 어림도 없을걸.”
“8반 이겨라! 화이티잉!”
신난 유네가 경기 시작도 전인데 응원 봉을 힘차게 두들기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탕탕탕, 힘차게도 쳐대서 옆에 있던 사람이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재경의 귓불이 단계적으로 새빨개졌다.
“1학년 8반 대 1학년 3반. 배구 결승전. 응원하시는 분들 모두 안전을 위해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주시고 선수들 모두 자리에 서주세요.”
아침과 마찬가지로 나냐롯트와 미나를 포함한 6명의 학생들이 배구 코트에 섰다. 네트를 기점으로 반대편에 선 3반 학생들도 지지 않겠다는 얼굴로 신경전을 벌였다.
3반과 8반의 응원전의 기선 제압도 장난 아니지만 8반 반대편에 서있는 3반의 응원 팀과 그 근방에 서있는 왕녀의 친위대도 서로 으르렁대느라 살벌했다.
“선공, 3반.”
동전 돌리기의 결과로 앞면이 나왔다. 8반은 수비로 시작이었다.
그에 따라 3반의 첫 번째 서브 선수가 나왔다. 친구들의 닦달에 못 이겨 마음을 비우고 무심한 척 응원 봉을 두들기던 재경이 류제 뒤에 사샥 숨었다.
류제가 왜? 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재경의 눈은 오로지 저 공에만 가있었다. 젠장, 렌 지미는 체육대회 내내 공만 죽어라 맞는단 말야. 안 맞게 조심해야지. 바보도 아니고 세 번은 내가 안 맞는다, 세 번은.
“하앗!”
네트 너머로 강력한 서브가 들어왔다. 8반은 몸을 날린 리베로 미나 덕분에 공을 받아냈다.
그를 기점으로 두 팀 모두 운으로 결승까지 올라온 것이 아니라는 듯 속전속결의 빠른 경기가 이루어졌다.
재경은 공이 이쪽으로 날아올 때마다 움찔움찔 떨며 류제의 뒤에 숨었다. 류제는 제 티셔츠를 늘리는 렌이 조금 무겁다고 생각했다.
점수 판이 넘어갔다. 22대 21. 8반이 뒤처지고 있는 듀스다. 지쳤는지 숨을 헉헉거리는 학생들은 힘들어 보였다.
건너편에서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는 저하께서 지쳐 하신다면서 쉬는 시간을 달라고 생떼를 썼다가 서브를 준비하러 가던 니냐롯트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흡!”
니냐롯트가 큰 키를 이용하여 유연하게 서브를 넣었다. 노리는 위치는 리시브가 허술한 오른쪽 윙 스파이커의 왼쪽. 꺾이면서 들어간 서브는 깔끔하게 빈 곳을 노렸으나 예상한 모양인지 공이 완벽하게 떴다.
“블록 준비!”
“잡아, 스파이커 위치 잡아!”
“공 잘 봐!”
스파이커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한껏 높은 위치로 토스를 올리는 줄 알았던 상대 팀 세터가 강력한 페이크를 넣어 토스를 올리지 않고 2단 패스 페인트를 했다. 8반은 순식간에 허를 찔렸다.
네트를 넘어오는 배구공과 가장 가까이 있던 선수가 공을 받으려고 몸을 굴렸다. 간신히 떠오른 공은 다른 선수의 팔에 끝내 닿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세트를 종료한다는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1세트를 내주다니. 분하다. 아까워서 다들 혀를 차댔다. 뒤처진 듀스 상태인데 상대 팀 세터가 여유롭게 2단 패스 페인트를 시도해 성공하자 농락당한 기분에 8반 배구 선수들이 그 장면을 곱씹었다.
왕녀도 눈앞에서 당한 페인트에 썩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지 네트를 언짢게 흘기다가 몸을 돌렸다.
2세트 시작 전 선수들에게 5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까지 공만 날아온다 싶으면 류제 뒤에 재빨리 숨기 바빴던 재경이 안도하며 비 오는 날 달팽이처럼 고개를 뺐다.
공을 피하려는 렌에게 시달리다가 드디어 등 뒤가 가벼워진 류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슬며시 물었다.
“렌, 너 간 떨리는 경기 잘 못 보는 편이야?”
“아니, 완전 잘 보는데. 넌 저게 간 떨리냐?”
“어어… 그래……?”
혹시 렌이 내 뒤에 숨어서 저러는 이유가 이 경기가 결승전이라 긴장돼서 못 보는 건가 추측해 봤는데 저 시큰둥한 말을 듣자 하니 긴장되는 건 아닌 것 같고. 그게 아니라면 왜 저러는지 몰라 류제는 어리둥절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경기 때에도 그러려나 내심 기대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반대편에서 3반 아이들과 왕녀의 친위대끼리 싸움이 붙은 모양이다.
서로 상대방에게 제대로 기분 상한 듯 진영을 가른 채 말다툼을 하는데 가운데서는 3반의 어떤 학생과 친위대장 루이나가 치고받고 싸우는 중이었다. 경기 결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로 좋지 못한 곳을 건드려 시비가 붙었던 것 같다.
“에이잇! 뭐야, 이 공은!”
싸우다가 옆으로 굴러온 여분의 공이 루이나의 발에 얽히자 그녀가 귀찮아 죽겠다며 발로 뻥 차버렸다.
그 공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유네가 열심히 부쳐주고 있는 부채로 바람을 쐬고 있는 재경의 뒤통수로 날아가 빠악 후려갈겼다.
“끄아악!”
“으아아! 렌 군. 렌구운!”
“레…렌? 괜찮아?”
또야? 류제가 이번에도 머리에 공을 맞은 렌의 불행에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달려갔다. 재경은 아파 죽겠다며 자리에 푹 수그리고 앉아 고통을 인내했다.
“으아아, 짜증 나. 짜증 난다고! 그렇게 조심했는데 이게 뭐야! 됐어. 응원 같은 거 안 해!”
이 기막힌 우연 때문에 화를 낼 대상이 없는데 분을 풀고 싶은 재경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류제를 지나쳐 경기장 바깥쪽으로 가버렸다. 여기서 열심히 응원해 봤자 어떻게 해서든 공만 맞을 텐데 내가 왜 여기서 고통받아야 하는데!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루이나가 찬 공을 맞고 재경이 불쾌한 눈치자 하찮은 남자 따위 공을 맞든 말든 안중에도 없던 루이나 알로이드를 혼내러 니냐롯트가 뚜벅뚜벅 출동했다.
화난 니냐롯트가 입을 꾹 다문 채 루이나를 압박했다.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던 루이나는 왕녀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와…왕녀 저하?”
“섣부르게 행동하지 말라 이르지 않았던가?”
“예? 아니… 그…그것이……!”
“왜 그대의 행동에 상처받는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냐!”
“하지만 저는 왕녀 저하를 위해…….”
“그대의 자만하는 행동에 나를 변명으로 대지 말거라!”
단단히 화가 난 왕녀는 학기 초 기숙사 식당에서 시끄럽게 굴었던 비키와 재경에게 그랬듯 루이나와 주변의 학생들에게 으르렁 화를 냈다. 동시에 날씨가 꾸물꾸물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친위대들이 혹여 체육대회 한창일 이때 비가 내릴까 옆에서 니냐롯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쪼르르 달려와 어르고 달랬다.
니냐롯트를 위해서 3반 학생과 싸웠던 루이나는 툭 건드려진 미모사처럼 꼴좋게 푹 수그러들었다.
우르릉― 구름이 술렁거렸다. 왕녀의 어빌리티가 한창 발현되던 그때 류제가 어디론가 도망가는 렌을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으려고 했다.
심판을 맡았던 선생님도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하다가 어수선한 분위기와 비가 내릴 낌새를 눈치채고 학생들을 말리러 달려갔다.
그때 선생님이 툭 치고 간 수레가 우연찮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류제가 불러 세워서 뒤돌던 재경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류제가 불러 뒤를 돌다 수레를 못 본 재경이 수레를 밟고 시원하게 미끄러져 넘어져 버렸다.
“꽥!”
“괘…괜찮아?”
“아니, 열받아.”
땅에 얼굴이 처박히는 연이은 불행에 재경은 재기 불능이 되었다. 고양이를 드는 것처럼 재경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류제가 쭈욱 일으켜 땅에 세워주었다.
류제는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렌이 이 불공평한 세상에 분노해서 잔뜩 불만이 생겼다는 걸 알고 난감해졌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부딪히고 다치는지 원. 그것 때문에 짜증 나서 도망친 건가.
“코피 난다.”
어찌 되었건 일단 코피를 멈추는 게 우선이었다.
“세라 선생님께 가자.”
“됐어, 혼자 갈 거야. 넌 저기서 애들 응원이나 해.”
“그러다 또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류제가 말을 마치자마자 콰앙! 하고 시원하게 번개가 쳤다. 결국 왕녀가 화를 참지 못한 듯하다.
이크. 성난 하늘을 쳐다보던 류제가 재경이 방심하고 있는 사이 손목을 붙잡고 성큼성큼 앞장섰다.
“아, 괜찮다니까?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았어. 빨리 와.”
“알긴 뭘 알아? 하나도 모르잖아!”
또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말을 더 들어줄 것 없다며 류제가 억지로 재경을 끌고 빨간 십자가가 그려진 천막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알코올 냄새가 났다. 세라를 발견한 류제가 그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 류제 학생…하고 렌 학생. 무슨 일이죠?”
“렌이 넘어져서 코피가 나서요.”
“잠자코 넘어가나 했더니 오늘도 어김없네요. 제발 조심해 주세요. 걱정됩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꾸 공이 날아오는 건데요.”
“렌 학생도 참. 그렇게 따지면 걷는 것도 땅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랍니다.”
세라가 재경의 궤변을 못 들어 주겠다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재경은 억울했다. 그때 다시금 니냐롯트의 벼락이 쾅, 하고 내려쳤다. 피를 닦기 위해 티슈를 꺼내 들던 세라가 멈칫했다.
“니냐롯트 학생이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요?”
“6반의 루이나 알로이드가 또 선을 넘었거든요.”
연이어 두어 번 우르르 쾅쾅거린 번개는 곧 수그러들었다. 다른 학생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왕녀의 기분이 풀린 듯하다. 뇌우 특유의 우글우글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구름도 곧 걷힐 모양이다.
세라는 학생들이 모두 열심히 준비한 체육대회인데 혹시라도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디 상처를 봅시다.”
그녀가 재경에게 앉으라며 손짓을 했다. 재경이 머뭇거리며 환자석에 앉자 세라가 오늘 하루 열심히 고생한 재경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손끝을 콧망울에 대서 어빌리티를 발현했다.
양호 선생님과 함께 학생들의 상처 치료에 힘쓰고 있는 그녀 덕분에 재경의 코에서 줄줄 흘렀던 코피가 순식간에 멈췄다.
“자, 끝입니다. 여기 이 티슈로 피를 닦으세요. 다음부터 꼭 조심하도록 하시구요.”
“네에… 제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할게요.”
“공이 렌 학생에게 날아오지 못하도록 하면 되지요. 우리 반은 분위기가 어떤가요? 열심히 경기 중인가요? 지금은… 어디 보자, 배구 결승전이겠네요.”
언제 긴급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계속 여기에 앉아 있어야 하니 반의 상황을 반장인 비키나 방송으로만 듣고 있는 세라가 스케줄 표를 확인하면서 물었다. 류제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열심히 해주세요. 소문이 자자한 렌 학생의 달리기는 선생님도 어떻게든 볼 테니까요.”
“으윽. 굳이 안 봐도 돼요. 부담스러운데. 그냥 이긴다고만 아세요.”
피가 묻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린 재경이 싫다며 칭얼거렸다. 세라는 괘씸한 소리를 하는 재경의 귓바퀴를 콱 붙잡아 가볍게 당겼다.
“기.대.할.게.요?”
수용하기엔 과분한 기대가 등에 얹은 짐처럼 느껴졌다. 재경이 마지못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에 만족한 세라가 귀를 놓아주었다. 재경은 마음에도 없이 꿍한 표정을 지었다.
“가자 류제. 쌤, 저희 갈게요. 뭐 해?”
잠시 휴지통을 보고 있던 류제가 퍼뜩 놀라 정신을 차리고 세라에게 인사했다.
“아… 응! 감사합니다, 선생님.”
“뭘요. 학생들을 치료하기 위해 이 천막이 있는걸요. 아프시면 주저하지 말고 빨리 찾아와 주세요. 참, 류제 학생. 당신은 괜찮아요?”
수학여행 때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세라가 류제에게 물었다. 최근에도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처럼 마족화가 일어난 전조가 있었냐는 물음에 류제가 고개를 저었다. 세라는 다행이라며 싱긋 웃었다.
야외용 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드는 세라의 배웅을 받으며 두 사람이 천막에서 나왔다. 아직 크게 다친 사람은 없는지 어빌리티를 남용한 ‘대가’가 오지 않은 세라의 컨디션이 괜찮아 보였다.
고통이 사라져 멀쩡해진 코의 감각이 묘해서 재경이 손으로 찡긋찡긋 코끝을 조이다가 뗐다. 선생님에게서 멀어지자 류제도 세라처럼 재경의 귀에 못이 박혀라 잔소리를 해댔다.
“앞으로 조심해. 또 다치지 말고.”
“야, 공 맞은 게 내 잘못이냐? 날아온 공 잘못이지.”
“아까 수레 밟고 넘어진 건?”
“그건 네가 갑자기 부르니까 앞을 못 본 거잖아! 따지고 보면 네 잘못이야. 아으, 됐어. 이제 공은 그만 맞고 싶어.”
제발 부탁이니 망할 게임 제작사야 가여운 렌 지미 좀 그만 괴롭혀라. 암만 삼류 악당에 엑스트라라도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공을 맞는 건 너무한 처사 아니냐.
재경이 진짜 싫어 죽겠다고 징징거리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민하던 류제가 오랜만에 선심을 썼다.
“이번에 공 날아오면 내가 받아줄게. 그럼 되지?”
“니가? 흥,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난 안 말려.”
“어쭈? 날 무시한다 이거지? 내기할까?”
재경이 무시하자 이상한 곳에서 승부욕이 불타오른 류제가 두고 보자며 눈을 빛냈다. 재경이 얘 뭐냐며 흘겼다. 어차피 렌 지미가 공 맞는 건 스토리대로라 쟤도 어쩌지 못할 텐데 뭐. 짜식이 호기 부리긴.
대가 없는 내기를 한 그들이 경기장으로 돌아갔을 때 여자 배구 결승전 2세트는 이미 시작한 후였다. 그러나 왕녀의 컨디션이 꽤나 최악이 되었는지 류제와 재경이 응원석에 서자마자 그녀가 블록 실패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왕녀를 응원하던 학생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왕녀의 컨디션 난조가 다 제 탓이라고 생각하는 루이나는 응원석에 서서 발만 동동 굴렀다.
결론만 말하자면 8반은 우승하지 못했다. 2―0. 처참한 패배다.
몇몇 열심히 연습한 8반의 에이스 배구 선수들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착한 반 친구들은 2등이라도 잘한 거라며 선수들을 다독였다. 여자 배구 결승전에서 8반은 처음으로 패퇴했다.
그 복수심으로 불타오른 덕분인지 비키를 필두로 한 피구 결승전은 화끈하게 승리를 갈취했다. 그때쯤엔 왕녀의 기분이 전부 풀려 다시 화창하게 해가 났다.
배구는 2등에 머물렀어도 구기 대회에서 피구와 배구 둘 다 결승전에 진출한 반은 8반뿐이라 8반은 여전히 종합 우승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피구 경기가 끝나자 선생님들이 3등분 된 경기장에 각기 농구 골대를 두 개씩 두고 그 사이에 석회 가루로 새롭게 경기장을 그렸다.
구기 대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청백 팀 남자 농구전은 이벤트성이 짙은 경기였던지라 1, 2, 3학년 할 것 없이 전교생이 경기장에 몰려들어 자신의 학년 남학생들을 응원했다.
특히나 고학년들 사이에서 1학년의 류제 신리가 아주 유명해서 2, 3학년 여학생들이 1학년이 대결하는 응원석 중간에 끼어들어 고함을 질러대는 바람에 재경은 귀가 먹을 것 같았다.
“뭐야. 지들이 뭔데 류제한테 친한 척인데!”
자리를 빼앗긴 응원단장이 투덜거렸다. 선배라서 감히 앞에서는 큰소리 못 치고 얼굴엔 불평이 가득했다.
남의 학년 경기에 참견하는 선배들의 만행이 싫어 1학년이 볼멘소리를 했어도 경기는 호각 소리와 함께 차질 없이 시작되었다.
초장부터 류제에게 기선 제압을 한 1학년 백 팀 학생이 런앤건을 시도하며 거침없이 공격해 나갔다.
골을 넣으려는 끝에 류제가 마침내 공을 빼앗자 여기저기서 함성이 들려왔다. 류제는 기선 제압은 이쪽도 할 수 있다는 듯이 자유자재로 수비를 뚫고 첫 골 기념 덩크슛을 넣었다.
“꺄아악! 류제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멋지다!”
청 팀 여학생들은 아주 신났다. 아니, 류제의 경기에 백 팀 학생들도 신난 것 같다.
그 사이에 껴서 죽을상으로 류제를 응원하던 재경은 질투심으로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주 자기만 인기 절정이지. 미연시 주인공 같으니라고. 부러워 죽겠네!
그래도 저렇게 땀 흘리며 경기하는데 지라고 할 수도 없고 재경도 눈을 질끈 감고 응원에 동참했다.
“류제! 지면 일주일 치 간식은 내가 먹을 줄 알아!”
최선을 다해서 외친 건데 옆에서 비키가 그게 무슨 응원이냐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지적했다. 재경이 왜 또 와서 성가시게 구냐고 비키와 투닥거리느라 잠시 경기장에서 눈을 뗐다.
그러나 그것 또한 ‘주인공이나 히로인에게 비방하는 삼류 악당 렌 지미의 악행’으로 인식한 것인지 완벽한 우연을 거쳐서 이번에도 공이―이번엔 배구공이 아닌 농구공이다.― 재경을 향해 튀어왔다.
“으앗!”
공이 다가오는 싸한 공기를 느낀 재경이 뒤늦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분명 맞을 줄 알았는데 그 빌어먹을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자 재경이 가린 손 바깥으로 눈을 흘겼다.
아까 걸었던 내기를 기억하는 류제가 한 손으로 농구공을 감싸는 장면이 느리게 지나갔다. 여유롭게 뒤를 돈 류제가 재경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어주고는 다른 곳으로 드리블을 하며 이동했다.
깜짝 놀란 재경이 뒤로 주춤하면서 손을 거두었다. 누가 미연시 주인공 아니랄까 봐.
“짜식이, 쓸데없이 멋지기는.”
재경이 체육대회 내내 둥그런 물체에 아주 진절머리가 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비키는 좀 아슬아슬하게 패스를 받은 것뿐인데 뭐가 멋지냐며 상기된 얼굴로 비꼬았다.
농구 경기가 계속되었다.
재경이 동경을 담아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나 비키가 아닌 척 류제의 경기 장악력에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우리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주인공은 경기장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훌륭하게 3점 슛을 넣었다. 남은 시간 고작 2초 만의 일이었다.
재경은 멋지기도 하고 질투 나기도 해서 복잡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남은 2초로 백 팀은 역전하지 못했다.
심판의 호각 소리와 동시에 경기가 종료되었다. 큰 점수 차를 벌리며 승리한 1학년 청 팀 남자 농구 선수들이 서로 하이 파이브를 하며 고생했다고 어깨를 다독였다.
거기에는 재경더러 리시브 못한다고 깐 다른 반 남학생도 있었다. 나한테는 겁나 뭐라고 했으면서. 저 류제한테만 친절한 놈. 왜 류제만 잘해 주냐? 류제가 주인공이라서냐?
재경은 자신도 저기에 있었으면 저들처럼 여자애들한테 큰 인기를 받을 수 있었을 거라 상상했다.
곧이어 청 팀의 승리를 확정 짓는 방송부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남자 농구― 1학년― 청백전― 청 팀― 승리.
“꺄아아아악!”
1학년은 청 팀이 승리했다는 말에 모든 청 팀 학생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농구 선수로 출전한 청 팀 남학생들은 스타가 되어서 반으로 돌아왔다. 학교에 몇 안 되는 남학생들인 데다가 농구하는 멋진 모습에 다른 여학생들 모두 콩깍지가 껴도 제대로 낀 듯하다.
그걸 보자니 키만 크다고 농구 팀에 들어간 주제에 전교생의 환호를 받는 것이 질투 나서 재경이 말도 안 되는 주작질을 했다.
“나도 나갔으면 잘했을 텐데.”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제대로 하라고 저기에 너보다 키 작은 사람은 없는 거 몰라?”
“시꺼. 농구가 키로 하는 거냐?”
“키로 하는 거야, 이 바보. 농구 골대가 저렇게 높은데. 네 키에 골이 들어갈 거 같아?”
비키가 손가락으로 높은 농구 골대를 가리켰다. 빈말로라도 격려해 주지 못할지언정 비키의 잔인한 팩트 폭력에 반박을 못 한 재경이 으르렁 이만 보였다.
옛날 같았으면 키가 작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바로 못된 소리로 되갚아 줄 성질머리인데 여기 있는 동안 조금은 성장한 모양인지 그래도 비키에게 상처 줄 만한 소리는 안 한다.
“무시하지 마. 성장기니까 곧 자라. 그때 되면 두고 보자. 내가 반드시 널 아래로 깔봐줄 테다.”
“흐응~ 과연 그럴까? 3월이나 지금이나 나랑 별 차이 없으면서. 아니, 오히려 줄어든 거 아냐?”
“아주 악담을 해라, 어? 이 짜식. 너 그거 내놔. 내가 만든 거 쓰지 마!”
“싫거든?”
비키가 손에 든 응원 봉으로 키가 못 자라도록 재경의 머리를 통통 내리치며 놀렸다. 재경도 똑같이 되갚아 주고 싶었지만 재경의 손은 응원 봉이 없이 텅 비어있었다. 들고 다니기 싫어서 어딘가에 두고 온 것을 그대로 잊어버린 모양이다.
비키한테 복수하지 못한 재경이 열받아서 비키의 응원 봉을 빼앗아 똑같이 머리를 통통 쳤다. 비키가 아프다고 하지 말라 역으로 눈을 세모지게 떴다.
“하지 마!”
“너야말로 키 작아지니까 머리 치지 말라고!”
“과연 키가 클까? 나중에는 내가 더 커지는 거 아냐?”
재경과 엇비슷한 키였던 비키가 오호호~ 하고 귀족 아가씨들이 웃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어 건방지게 웃어댔다.
재경이 아니라면서 빼액 소리치고 있을 때 우승을 축하한다고 다른 친구들에게 붙잡혀 있다가 드디어 탈출한 류제가 돌아왔다.
아까 공을 맞을 뻔한 렌이 신경 쓰여서 빨리 복귀했더니 비키와 렌 둘이서 아주 번갈아 가며 응원 봉으로 서로의 머리를 쳐대기만 하니 류제는 어이가 없었다.
“둘이 뭐 해?”
“류제! 들어 봐. 비키 저 짜식이 자꾸 나한테 악담을 하잖아.”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인걸!”
비키가 자신은 죄가 없다며 모르는 척을 했다. 신나게 놀려댔던 주제에 이제 와 발뺌을 하다니. 재경이 공룡 흉내를 내며 덤벼들려고 하는 것을 류제가 자연스레 허리를 감아 막았다.
장난도 심해지면 싸움이 된다고 류제가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구기 대회 정리하고 곧 줄다리기 한다던데. 저쪽에서 선생님이 반장들 부르더라.”
“흥, 줄다리기도 반드시 이길 거니까 명심하고나 있어. 난 간다.”
“비키, 이 짜샤! 너, 키 이야기 취소 안 해?”
“크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 생각해 볼 테니까.”
비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획 돌려 류제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승리에 집착하는 비키는 절대 안 진다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줄다리기는 시작부터 상대가 좋지 못했다. 1학년 8반과 첫판부터 붙을 1학년 2반에는 다크호스로 부상한 엄청난 거구의 남학생이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만화에서나 볼법한 실눈 골렘 같은 놈 말이다.
줄을 가운데로 두고 키 순서대로 2열 종대로 서서 서로 대치하는데 8반 학생들은 모두 맨 뒤에 있는 거구의 남학생에 경악했다.
“저거 완전 반칙 아냐?”
어빌리티를 쓰지 않으면 신체 능력은 평범한 학생들이었던 그녀들과 거구의 남학생은 전력 차이가 엄청나게 났다.
지면 어쩌지? 겁에 질린 표정이었던 유네가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했다.
“아냐, 우리한테도 류제 군이 있잖아!”
“아무리 류제라도 저건 무리지.”
어빌리티를 쓰지 않으면 류제라도 평범한 인간인데 저런 거구에게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라고 유네 주변에 있던 모든 여학생이 생각했다.
그중 유네와 사이가 안 좋은 ‘무게’ 어빌리티 소녀도 표정이 뚱했다. 순수한 거야, 바보인 거야. 아, 짜증 나. 왜 이딴 멍청한 경기는 필참인 거야? 재수 없게. 햇빛 실화냐? 손톱 망가지면 어떻게 하지. 이따 선크림 덧발라야겠다.
동상이몽인지 이심전심인지 그녀들의 걱정에도 경기는 시작되었다. 가운데에 묶인 선의 위치를 확인한 심판 선생님이 깃발을 들며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각을 불었다.
두 반 모두가 동시에 줄을 당기며 치열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끄으응!”
“바보야. 박자에 맞춰서 당겨야지!”
“힘 풀지 마. 계속 당겨! 힘 풀면 진다!”
얼핏 보기엔 막상막하로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밖에서 보면 8반이 다소 딸려가는 느낌이 강했다. 역시나 2반 거구의 남학생이 한 여학생에 비해 몇 배는 넘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줄다리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승패가 결정 나는 시합이다. 힘겨루기를 계속할수록 양쪽 모두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특히 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8반은 ‘영차’의 ‘차’ 부분에서 미는 힘이 부족한 바람에 덜컹거리며 2반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우아악!”
류제의 사선 방향 쪽에 있던 재경은 딸려가다 못해 거의 넘어질 것 같이 흔들렸다. 그걸 목격한 류제가 렌이 저대로 넘어지면 큰일 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어빌리티를 사용해서 시원하게 줄을 당겨버리고 말았다.
“어어어?!”
“우아앗!”
“엄마야!”
재경이 앞쪽으로 쏠려 넘어지기 전에 훅 당긴 류제의 힘 때문에 8반은 물론이고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던 학생들 모두가 끌려와 우당탕쿵탕 서로 얽히고설키며 넘어졌다.
그 와중에도 본분을 잊지 않은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깃발을 들어 승패를 나누었다.
“1학년 8반, 반칙패. 승리, 1학년 2반.”
“네에?!”
류제 때문에 뒤로 발라당 넘어졌던 8반 학생들이 기적의 역전승을 한 것이라 착각했다가 반칙패라는 이야기를 듣자 실망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반면 앞으로 넘어졌던 2반 학생들은 이겼다는 말에 신나서 서로서로 먼저 일어나려고 했다가 다리가 꼬여 다시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뭐야? 왜요? 우리가 이겼잖아요.”
“8반에서 어빌리티를 사용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따지려 들었던 비키가 반칙이라는 선생님의 말에 엉거주춤 일어서고 있는 학생들을 흘겨보았다. 추릴 것도 없었다.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8반의 어빌리터는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류제, 너 뭐 하는 짓이야?!”
“으악, 미안. 미안해. 거의 무의식적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어빌리티를 쓰는 게 어디 있어! 컨트롤도 제대로 못 해?! 이래가지고 어떻게 토너먼트 나갈래?!”
“비키, 너무 그러지 마. 류제도 열심히 하려다가 실수한 거잖아? 그리고 우리… 암만 생각해도 2반한테 딸려가고 있었구. 그대로 갔다간 그냥 졌을 거야.”
불만스러운 비키가 류제의 이마를 콕콕 찍으며 타박하니 미나가 편을 들며 류제의 팔에 친근한 척 팔짱을 끼었다.
“어차피 질 거였으면 어빌리티로 시원하게 밀어붙이는 게 낫지. 반칙패지만! 하하!”
옆에 서있던 응원단장도 미나의 말이 맞다며 호쾌하게 편을 들었다.
따지고 보니 반박할 수 없어 비키도 그 논리에 점점 설득당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든 진 것은 너무 분했다.
겨우 일어나서 상황을 파악하던 재경도 류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언쟁을 발견하고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다가갔다.
“뭔데. 우리 왜 넘어진 거야?”
“류제가 어빌리티를 써버렸대.”
“뭐어?”
재경이 비키처럼 류제한테 왜 그랬냐며 따졌다. 덕분에 야채튀김처럼 넘어져 버리지 않았는가.
류제는 그 원인이 렌한테 있다며 변명하지도 못하고 연신 비키와 친구들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넘어져 버린 2반에게도 미안하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과했다.
거기에 왕녀가 넘어진 것에 대해 화난 친위대에게 사과까지. 렌 때문에 이루어진 한 번의 실수로 류제의 머리가 쉼 없이 바빴다.
비록 첫판에 패배했지만 결과적으로 2반은 같은 청 팀이었고, 2반이 제일 강해서 패배했다고 변명할 수라도 있게 8반 학생들은 남은 줄다리기 시합 내내 2반을 응원했다. 결국 8반의 바람대로 줄다리기는 2반이 1등을 해서 8반은 겨우 면목을 세웠다.
줄다리기 다음 종목은 단체 줄넘기 시합이 있었다.
비키와 줄 돌리는 사람 포함 8명의 선수들이 연습한 대로 폴짝폴짝 토끼처럼 뛰며 몸을 풀었다. 비키는 이번엔 반드시 이기겠다며 피구 시합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기운을 다시 끌어냈다.
저 호기에도 재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단체 줄넘기 CG는 똑똑히 기억나는데 그 자존심 센 비키가 줄에 걸려 넘어지려고 하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 비키. 하지만 난 사실을 말해 줄 수 없구나. 어차피 말해 봤자 바뀌지도 않을 거고, 아까 나한테 키 안 큰다고 말한 복수다.
재경의 예언(?)대로 줄넘기 29개째에 비키가 줄넘기 줄에 걸리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며 화려하게 넘어졌다.
그 덕분에 8반의 줄넘기는 4위로 무난하다면 무난하고 못했다면 못한 등수가 되었다. 비키가 결과를 보고 자존심이 상해 혼자서 돌멩이를 찼다.
“괜찮아, 비키? 네 키가 너무 커서 줄에 부딪혔나 보다, 야.”
재경이 킬킬 웃으며 굳이 가서 비키의 비위를 건드렸다. 분에 못 이겨 부루퉁하던 비키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고개를 팩 돌린 그녀가 재경을 무시했다.
비키는 그대로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천막으로 향했다. 뒤에 달리기 시합이 있다 보니 세라에게 넘어진 다리를 치료받으려고 그런가 보다.
류제가 둘이 또 싸울까 재경을 붙잡아 말렸다.
“너무 그러지 마. 반장으로서 우승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더라.”
“줄넘기가 뭐 그리 중요하냐? 점수도 작잖아. 우리한테는 아직 달리기가 남았다고. 선택과 집중. 것도 모르냐?”
재경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쫙 펴며 자신을 가리켰다. 체육대회에서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다음으로 가장 점수가 큰 것은 장거리 이어달리기였다.
이미 구기 대회에서 여자 배구 2등에 여자 피구 1등을 이루었다. 거기에 재경 홀로 출전하는 남자 100미터까지 더하면 재경은 달리기에서 확실히 격차를 벌릴 수 있다 자부했다.
류제를 포함한 8반 시드 팀이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까지 말끔하게 승리하면 1학년 종합 우승은 당연 두말할 것도 없이 8반이었다. 고로 비키의 걱정은 괜한 걱정이었다.
“자기도 토너먼트 예선에서 탈락했을 때 저랬으면서.”
“어엉? 중얼거리지 마. 잘 안 들리니까.”
“네 달리기 기대한다고 말했어.”
“짜식이~ 조금만 기다려봐라. 히히.”
자만하는 렌이 일을 망치는 걸 종종 봐서 그런지 류제는 영 렌의 자신감에 신용이 가지 않았다. 항상 잘났다는 듯이 굴면서 매번 실패하니까 그렇지. 류제는 저러다 렌이 전교생 앞에서 추잡하게 넘어질까 봐 걱정만 앞섰다.
그러나 팔불출 류제의 걱정이 부질없게도 곧이어 치러진 남자 100미터전은 재경의 압승으로 끝났다.
100미터 달리기는 각 반 8명의 출전 선수를 청백 팀 기준 4명씩 나눠서 예선전을 뛰게 한 다음에 각기 팀의 1, 2등을 다시 트랙에 세워 등수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두 번의 달리기 모두 재경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압도적일 정도로 굉장히 빨라서 생중계를 하던 방송부 학생도 놀랐는지 집중 보도를 했다.
―1학년 8반, 렌 지미― 빠릅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얕보면 안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순식간에 격차를 벌리고 1등을 쟁취합니다! 놀랄 만한 빠르깁니다. 렌 지미 선수, 장거리 이어달리기에도 출전한다고 하니 모두 주목해 주세요!
“하!”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을 미처 듣지 못했는지 남자 100미터에서 1등을 한 재경이 브이를 그리며 위풍당당 8반 응원석으로 돌아왔다.
전심전력으로 달린 탓에 지친 듯이 땀을 닦는 그에게 유네가 보송보송한 새로운 수건을 건네주었다.
“렌 군, 완전 멋있어. 역시 달리기 1등 할 줄 알았다니까!”
“멋지네~ 유망주!”
재경이 등나무 그늘이 진 계단에 걸터앉자 옆에서는 유네가 팔랑팔랑 시원하게 부채질을 해주고, 응원단장이 잘했다며 칭찬하면서 재경의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들쑤시며 쓰다듬었다. 재경은 키 작아진다고 누르지 말라고 빼액 화를 냈다.
무슨 생각인지 좀 땀이 식자 자리에서 일어난 재경이 비키에게 향했다.
“봤냐? 우리 반이 점수 따라잡는 건 순식간이라니까. 줄넘기 따위는 달리기랑 비교하면 점수도 안 돼!”
재경이 새침하게 앉은 비키에게 심술궂게 말했다. 비키는 재경의 달리기 실력에 새삼 감탄했지만 아닌 척 고개를 획 돌려 시선을 회피했다.
“흥, 뭐래. 알고 있거든?”
자신 때문에 줄넘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던지라 비키는 재경 나름의 위로가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아닌 척 고깝게 따졌다.
“그리고 당연히 이겨야 하는 거 아냐? 8반에서 제일 빠른 건 학교에서 제일 빨라야 한다는 거 몰라?”
“아니지, 말은 똑바로 해라. 내가 8반이기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8반이 이긴 것이다!”
음하하하! 재경이 거만하게 웃었다.
바로 그때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여자 100미터 달리기의 결과가 나왔다. 8반 대표로 참가한 미나는 아쉽게도 2위에 그쳤다.
“으으윽!”
인간의 육체 따위. 내가 지다니 믿을 수 없어. 미나는 렌 지미는 물론이고 어째서 자신보다 더 빠른 사람이 있을 수 있냐며 진구에게 당한 퉁퉁이 같은 표정으로 등나무 아래 8반 응원석으로 향했다.
“미나 잘했어. 수고했어.”
“맞아. 2위라니, 대단한 거야.”
“고마워… 흑… 나 배구도 2등 하고… 달리기도 결국… 미안해, 정말 미안해. 최선을 다했는데…….”
“아냐. 진짜 잘했어!”
미나는 스트레스를 풀 겸 이 망할 인간들이 빨리 자기 좀 떠받들라며 풀 죽은 듯 우는 척을 했다. 그러자 마음씨 착한 반 친구들이 미나의 청초하고 순수한 눈물에 속아서 울지 말라고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미나는 속으로 인간을 놀리는 게 바로 이 맛이라며 하하 사악하게 웃었다. 재경은 저 서큐버스가 무슨 개수작을 부린다며 그쪽을 흘겼다.
나머지 2, 3학년 100미터 달리기가 끝나고 이어서 장애물 달리기가 목전으로 다가왔다. 선생님들의 손으로 트랙에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설치되었다.
장애물 달리기는 고전적으로 밀가루 담긴 쟁반에서 입으로 사탕을 집어 먹어야 하는 장애물과 공중에 떠있는 빵을 입으로만 집어서 먹어야 하는 장애물, 연이어 있는 허들과 그물망이라는 진짜 장애물을 넘어서 마지막 미션으로 아무 종이나 집어 적힌 물건을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1등이었다.
장애물 달리기에 출전하는 선수는 렌이 장거리 이어달리기를 위해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다음으로 빠른 류제가 발탁되었다.
류제는 어차피 뛸 거 얼굴이 밀가루 범벅이 된 것도 좋고, 공중에 떠있는 빵을 먹은 것도 좋았다.
뒤에서 달려오던 여학생이 허들 하나를 우당탕 넘어뜨려서 식겁하긴 했지만 신체 조건이 뛰어나서 무난하게 넘겼다. 유격 자세로 이동해야 하는 그물망도 괜찮게 통과했다.
그러나 지금 손에 든 쪽지의 글씨를 읽고 있자니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생각하면 할수록 땀이 절로 흘렀다.
뭐? 누구? 이거 체인지 가능하……. 진짜? 노 체인지? 오 마이 갓.
류제가 미션이 적힌 종이를 보며 달리다가 점점 걸음을 멈춰 가만히 섰다. 트랙 너머에서 응원하던 8반 학생들이 왜 그러냐며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류제의 귀에 차마 들어가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
이 무슨 악질적인 괴롭힘이냔 말이냐.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게 이 종이는 류제가 스스로 고른 것이었다.
어차피 펼치기 전까지 안에 든 내용을 몰랐을 테지만 류제는 좀 더 신중하게 골랐어야 했나 후회스러웠다. 저주받은 손이 정말인지 너무하다. 류제가 속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뭐 하는 거야! 류제, 달려!”
류제를 응원하던 학생들이 트랙 바로 주변까지 나와서 목이 째져라 외쳤다. 하지만 류제는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자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마지막 미션이 뭐라서 멍청하게 서있기만 하는 건지 재경이 점점 야차처럼 변해 가는 비키의 눈치를 살피며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7반 학생 한 명이 자기네 반 선수의 쪽지를 확인하고 물건이 있는 곳의 힌트를 알려 주는 것을 선생님이 제재하지 않자 저 정도는 반칙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재경이 후다닥 류제 쪽으로 뛰어갔다.
“류제! 가만히 뭐 하는 거야. 뭐가 나왔는데 그래? 이상한 거라도 나왔어?”
“어…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적힌 종이를 뚫어져라 살피다가 재경이 불쑥 고개를 내밀자 류제가 기합 들어간 투수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후다닥 종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재경이 뭐 하냐며 류제를 이상한 놈 보듯이 위아래로 훑었다.
‘좋아하는 사람’ 쪽지와 렌을 왔다 갔다 보자니 류제는 별다른 변명이 생각이 안 나서 동공이 절로 떨렸다.
“아…아니… 그냥… 아…아무…것도…….”
“비키 지금 엄청 짜증 내는 중이거든? 답답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뭐 찾는 시늉이라도 해봐. 내가 도와줄게.”
재경이 저 멀리 불꽃과도 같은 색의 머리를 으르렁 이글거리고 있는 비키를 가리켰다.
이런… 비키는 종합 우승을 원했었지. 쪽지의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 까먹을 뻔했다.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류제가 비키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재경은 류제의 안색을 보고 이어달리기에서 뭐 다른 이벤트가 있었나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없었다.
“뭐야, 찾기 어려운 거야?”
“아니… 좀 애매한 건데.”
“애매? 그래서 뭔데. 아까 딴 반 학생도 다 보여 주더라. 괜찮으니까 나한테도 보여 줘봐.”
재경이 류제가 위로 올린 종이의 글씨가 보이지 않아 눈썹과 눈 사이를 좁히다가 에잇, 손을 뻗었다. 하지만 종이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류제가 여유롭게 손을 뒤로 뺐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재경이 다시 손을 뻗었지만 종이는 그만큼 더 멀어졌다. 렌의 눈초리는 점점 이상해져 가지, 렌한테 이런 종이 보여 줬다가는 또 한동안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들들 볶을 테지.
이걸 어떻게 말해 줘야 하나 난감하던 그때 7반에서 먼저 물품을 찾았는지 배식판을 들고 골인 라인으로 달려갔다. 7반이 골인 라인이 가까워질수록 비키의 눈초리는 점점 더 살벌해져 갔다.
“에라, 나도 몰라.”
“야, 류제 뭘 찾는… 우아악!”
종이를 쥐지 않은 손으로 재경의 손목을 낚아챈 류제가 7반보다 먼저 골인 라인으로 달려갔다. 재경은 뭔지 모르겠지만 류제가 뛰니까 열심히 뛰었다.
찾는다는 게 사람이라서 애매했던 걸까? 과연 누구를 찾는 미션이었을지 궁금하다. 혹시라도 제~일 친한 친구라든가? 에헤이, 류제한테 제일 친한 친구가 나긴 나지. 재경이 쪽지에 적힌 내용을 실실 웃으며 기대했다.
둘 다 부리나케 달려간 결과 아슬아슬했지만 류제가 7반보다 먼저 골인 라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종목이라도 오로지 1등만을 원하는 비키는 류제의 우승이 확정 나고 나서야 분노를 거두고 얼굴에 만족이라는 단어를 띠었다.
“와아아!”
친구들의 환호성 소리를 듣고 류제가 안도했다.
하지만 경기가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윽고 장애물 달리기에 참여했던 모든 선수들이 골인 라인으로 들어오고 종이에 적힌 물품을 제대로 가져온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시간이 남았던 것이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심판 선생님의 눈을 피한 류제는 왼손에 든 구깃구깃한 종이를 패닉 상태로 힐끗거렸다.
옆에서는 렌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류제는 영원히 이다음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1학년 8반 류제 신리 학생, 무슨 미션이었나요?”
“그…그러니까…….”
학교의 유명 인사 류제 신리를 취재하기 위해 방송부에서도 직접 나와 류제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류제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옆에 서있는 렌은 어서 말하라며 옆구리를 쑤신다.
난 도저히 못 보여 줘. 절대 못 보여 준다고!
류제는 차마 손에 쥔 미션지를 선생님에게 전하지 못하고 입 속에 냉큼 넣어 우물우물 씹어버렸다.
방송부 학생들이 놀라 마이크에 대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아아, 돌발 행동! 류제 신리 학생! 미션지를 먹다니요!”
“알면 곤란한 미션이라도 들어있었나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종이를 입에 넣은 류제는 우물우물 염소처럼 입을 다물고 종이를 씹었다.
힐끗 아무 말도 없는 렌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살짝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재경이 류제에게 생선 대가리 카레를 보는 어느 인물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다소 경멸이 섞인 영문 모를 시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류제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실시간으로 등에 땀이 줄줄줄 흘렀다. 경기에서 질까 봐 앞뒤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달린 혹독한 대가다.
심판 선생님도 왜 류제가 저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반칙 방지를 위해 학생들이 가져간 쪽지를 확인해서 수첩에 써놓았던 심판 선생님이 류제의 미션은 여기에도 써있다며 보여 주며 수첩을 넘겼다.
그런 수가 남아있었다니. 아…안 돼! 기껏 종이를 없앴는데!
“어디 보자, 류제 신리 학생은―”
류제는 선생님에게 말하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는 눈초리를 필사적으로 보냈다.
하지만 체육대회 때문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만 하느라 피곤했던 선생님은 류제의 간절한 부탁을 보지 못한 채 그 내용이 여기 있다며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류제는 절망했다. 망했다. 망했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뻔뻔하게 나갈걸 그랬어. 농담하는 것처럼. 류제가 이제 다 끝났다고 종말이라도 오는 양 눈을 질끈 감았다.
“으응… 못생긴 사람 찾기?”
하지만 하늘이 그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연이어서 미션지를 들고 오는 학생들을 확인하느라 류제의 것을 대충 확인하고 휘갈겨 적었던 선생님이 자신의 글씨를 못 알아보고 미션지 내용을 잘못 말하고 말았다. 휘갈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글자가 흐트러졌는데 그게 ‘못생긴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종이를 씹어 먹었던 류제의 행동을 멋대로 납득한 방송부 학생이 서로 맞장구를 치며 재경을 위로했다.
“아아, 류제 학생, 어려운 선택을 하셨네요. 승리를 위해서 친구를 데리고 오다니. 게다가 1학년 남자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을 거머쥔 렌 지미 학생을. 친구, 못생겼다는 말에 너무 상처받지 말아요!”
“아니… 에…….”
“류제 학생, 친구가 상처받을까 봐 쪽지를 보여 주기 미안했군요. 저는 상냥한 마음씨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마음에 들면 어쩌려구요. 우리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는 연애 금지랍니다!”
“에이, 그냥 해본 소리예요. 자, 다음 학생의 미션지를 살펴볼까요?”
점점 느껴지는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망가듯 방송부 학생들과 심판 선생님이 다음 학생에게로 향했다. 류제는 우물거리고 있는 종이를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옆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심상찮은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렌이 노려보고 있겠지.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류제가 창백한 미소로 이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하하… 렌, 그게 아니라―”
“에라이, 플라잉 니킥이나 먹어라!”
무슨 미션일까 잔뜩 기대했는데 내용이 저따위니 자존심이 상한 재경이 류제를 향해 돌진해 니킥을 먹였다. 류제는 제 죄를 알아서 평소라면 가볍게 피했을 법한 재경의 니킥을 맞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화난 재경이 바락바락 성질을 내며 발로 류제의 옆구리를 퍽퍽 차댔다.
내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류제는 그래도 렌이 쪽지의 진짜 내용을 알지 못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았으면… 어떻게든 장난으로 무마하면 되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되는 건 싫었다.
재경의 분노의 발길질로 류제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그래도 1등을 거머쥐었기에 친구들은 금의환향하는 류제를 신이 나서 반겨주었다.
특히나 방송부 공인으로 못생긴 사람 인증을 받은 재경은 친구들에게 귀에서 피가 나도록 놀림을 받았다.
“푸하하! 이건 진짜 안 웃을 수가 없다… 하하!”
“류제, 너 은근히 잔인한… 흐흐흐… 구석이… 하하하하! 있네. 하하하!”
“진짜… 흐흐. 왜 멈춰 서있나 했더니 흐흐흐… 하하하하.”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픈지 그녀들이 포복절도를 했다.
유네는 그렇지 않다며 멋있다며 옆에서 재경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연민처럼 느껴진 재경은 그 이야기 꺼내지도 말라며 불 뿜는 공룡처럼 성질을 냈다.
“난 못생긴 게 아냐! 좀 매력적으로 생긴 거라고!”
“알아! 알지. 정말 고의는 아니었어. 급해서 그만.”
“자랑이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날 그런 식으로 취급할 수가 있냐?!”
“렌~ 진짜 미안하다니까. 이렇게 사과할게.”
“시끄러워. 대신 1주일 치 간식 나한테 상납해라! 이건 친구라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알았어. 줄게, 주고말고. 됐지? 응?”
“레…렌 군! 내 것도 줄까?”
유네와 류제가 ‘못생긴 사람’ 사건으로 격분한 재경을 달래고 있는 동안 니냐롯트는 저 멀리 구석에서 다음에 있을 장거리 이어달리기에 출전하기 위해 몸을 풀었다.
높은 운동장 조회대에 황제의 최측근이 오가는 것이 보였다. 이 달리기를 마지막으로 곧 있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준결승전을 관람하기 위해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는 듯했다.
아바마마께 좋은 모습 보여 드려야만 해.
저번 티타임 때 배구와 달리기에 출전한다 유모에게 언질을 주었으니 아바마마께서 듣고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배구는 준결승에 그쳤지만 이어달리기만큼은 확실하게 1등을 쟁취해야 한다. 나는 그 첫 번째 주자야. 실패하면 안 돼. 아바마마께서 실망하시면…….
긴장한 왕녀의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에 그림자가 졌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도 물론이거니와 모든 것도 실패해서는 아니 되었다. 달리기도 배구처럼 동요해서 팀원들에게 걱정을 끼쳐서도 안 돼.
―다음은― 400미터 장거리 이어달리기가 있겠습니다. 1학년 1, 2, 3, 4반 이어달리기에 출전하시는 선수들은 지시에 따라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벤트성 장애물 달리기가 끝나자 다음에 있을 장거리 이어달리기를 위해 트랙에서 장애물이 치워지고 새롭게 재정비되었다.
재경도 류제 때문에 화나긴 했어도 충분히 쉬어서 체력이 돌아왔다. 수분 보충도 끝났다.
8반의 응원석 바깥에서 스타트 총소리와 함께 1학년 1조의 이어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승패는 늘 그랬듯 한순간에 판가름 났다.
“가자! 류제, 렌, 왕녀님.”
2조 8반의 세 번째 주자인 비키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팔을 걷어붙였다.
장거리 이어달리기는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전 마지막 종목이다. 8반에서 이어달리기에 출전하는 사람은 니냐롯트, 류제, 비키, 렌 총 네 명이다.
비키는 생각했다. 그래… 나만 이 대회에 출전한 게 아니잖아. 좀 바보 같지만 렌의 생각처럼 체육대회에서 점수를 내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 8반의 모든 친구들이니까.
응원부터 구기 대회, 달리기, 그리고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까지. 뭐 하나 함께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걸 생각하면 부담감도 덜해졌다.
―1학년 1조 이어달리기가 끝났습니다. 2조 5, 6, 7, 8반 이어달리기에 출전하시는 선수들은 지시에 따라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주자, 세 번째 주자는 이쪽으로. 두 번째 주자, 네 번째 주자는 저쪽으로 가주세요.”
안내하는 선생님을 따라 니냐롯트와 비키, 류제와 재경으로 나누어져서 이동했다.
바통을 받으면서 달려가는 연습은 충분히 했다. 이다음은 긴장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리는 일만 남았다.
“류제, 잘 달려라.”
“문제없어. 걱정 마. 렌 너도 파이팅.”
“…나도~ 못생긴 얼굴~ 휘날리면서~ 잘 달릴게.”
“으윽… 그러지 마. 진짜 미안하다는데도.”
두 번째 주자인 류제가 라인에 서서 대기하다가 재경의 빈정거림에 부대껴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재경은 그래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잔뜩 토라진 입술만 명란젓처럼 내밀어 툴툴거렸다.
“내가 한 달 치 간식 줄게. 됐지?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진짜야. 그러니까 이만 용서해 줘. 응?”
“이 짜식이~ 그런 걸로 내 기분이 풀릴 줄 알았다면~ 날 아주 잘 아는데 그래?”
한 달 치 간식을 넘겨준다는 소리에 재경이 호쾌하게 웃어넘겼다. 류제는 렌이 정말 단순한 건지 복잡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음이 풀린 것 같으니 안도했다.
우연의 연속으로 잘 무마되기는 했는데 확실히 그 쪽지 내용 그대로 들킨 것보다는 플라잉 니킥 한 방에 발길질 여러 번, 한 달 치 간식을 내주는 것이 훨씬 대가가 싸게 먹힌 걸지도 몰랐다.
곧 심판 선생님이 두 번째 주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번째 주자, 제자리 대기합니다. 코스 안쪽 라인 침범, 선수 밀치기 모두 반칙입니다. 바통 존은 20미터 내외입니다. 복창합니다.”
“코스 안쪽 라인 침범, 선수 밀치기 모두 반칙입니다. 바통 존은 20미터 내외입니다.”
학생들에게 규칙을 정확하게 알려 준 선생님이 스타트 라인 쪽에 있는 다른 심판 선생님과 슬렉터를 이용해 신호를 주고받고 확인 사항을 전달했다.
멀리서 같은 반 친구들의 응원 소리가 들려왔다. 달리는 거야 쉽지만 바통을 주고받는 것은 언제나 어려웠다. 니냐롯트가 스타트를 잘 끊어줘야 할 텐데. 류제가 힐끗 스타트 라인에서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왕녀 니냐롯트를 흘겼다.
탕!
총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같은 반 친구들의 응원 소리와 왕녀의 친위대의 불과 같은 응원이 뒤섞였다.
왕녀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자 류제가 슬슬 시동을 걸었다. 바통 존이 가까워졌을 때 류제도 점점 속력을 높여 뛰었다.
긴 다리를 이용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니냐롯트가 류제를 향해 바통을 내밀었다.
“류제!”
“…받았어!”
연습한 대로 무사히 바통을 넘겨받은 류제가 전심전력으로 달렸다. 줄다리기를 할 때처럼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쓰지 않기 위해 억제하면서 니냐롯트가 끊은 1등의 라인을 유지했다.
류제의 100미터 달리기 기록처럼 12초가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바통 라인이 다가오자 류제가 붉은 머리 포니테일을 흩날리며 달려가기 시작하는 비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키!”
긴장을 했는지 약간 움찔한 탓에 비키가 바통을 잡지 못했다. 속도를 늦춰 간신히 바통을 넘겨받은 비키가 뒤이어 쫓아오는 다른 반 학생들을 의식하며 빠르게 뛰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주자 라인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경은 옆에 서 있는 왕녀가 자꾸만 운동장 가장자리의 가운데에 있는 조회대를 쳐다보는 것을 몰래 흘겼다.
이때부터 나오는구나, 왕녀의 이야기가. 재경은 그녀가 오기를 기대했을 사람이 조회대에 없다는 것을 알고 쯧쯔 혀를 찼다.
네 번째 주자들이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비키가 2등에게 추월당하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재경도 슬슬 스피드를 내려고 뒤로 손을 쭉 내빼고 달릴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꺄악!”
마지막 바통 라인에서 조급해진 다른 반 학생이 실수로 비키의 어깨를 쳐버렸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잡지 못한 비키가 넘어져 버린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다.
비키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넘어져 버렸다. 망쳤어. 이래 가지고는 분명 3등도 어려워. 그럼 본선에 진출을 못 한단 말야. 이게 다 나 때문에……!
그녀의 눈에 손에서 튕겨져 나가는 바통이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래서는 질 것이 뻔했다.
그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것은 마지막 주자 재경이었다. 4등에게 거의 따라잡힌 3등이 되어버린 채 바통을 넘겨받은 재경은 이를 악물고 몸을 수그렸다.
본선에서 쓰려고 했던 필살기를 여기서 쓰게 될 줄이야. 그의 팔다리가 점점 더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역시 렌 지미 학생. 정말 빠릅니다! 순식간에 2등을 제치고 선두를 향해 달려갑니다! 말도 안 되는 걸 짧은 시간에 해냅니다. 8반 학생, 환호하고 있네요! 본선 진출은 확정이에요!
―자그마한 전차 같군요.
연습 때도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던 재경은 이만큼 숨이 턱 끝까지 닿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 당장 추월하고 싶은 것이 눈앞에 잡힐 듯 말 듯 하니 그의 승부욕을 짜릿하게 자극했다.
솔직히 100미터 달리기는 너무 껌이었지. 이 정도 핸디캡이 있어야 나 신재경하고 달리기 시합을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재경은 2등으로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는데도 기어코 앞에 있는 선수를 추월해 1등을 쟁취했다. 간발의 차였다.
아직 1조와 2조 1, 2등을 모아 치르는 결승 경기가 남았지만 렌 지미의 추월전이 임팩트가 너무 강렬해서 다들 지금 경기가 본선인 양 탄성만 내질렀다.
어빌리티 쓴 거 아냐? 라며 옆에서 누군가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재경과 달리기 기록에서 이기고 싶었던 미나는 저 실력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진짜 렌 오늘 너무 장난 아닌 거 아냐?”
“렌 주제에 저렇게 빨라도 돼? 왜 저렇게 멋있지?”
“이걸로 비키 님도 넘어진 걸 마음에 두지 않으실 거야. 안심하고 본선 진출이네. 렌만 있으면 달리기는 그냥 1등 확정인데. 멋지다 렌! 오늘 멋지다는 말 다 들어라! 멋진 못생긴 렌!”
응원 봉을 두드리는 그녀들이 악담을 하는지 응원을 하는지, 찌릿 노려본 재경이 죽을 것처럼 헉헉거리면서 땅에 주저앉아 물을 찾았다.
아직 경기가 하나 남았는데 이렇게 무리하면 다음번에는 속도가 나오기 힘들었지만 누군가를 따라잡아 제치는 것은 꽤나 즐거웠다.
―2학년 1, 2, 3, 4반 이어달리기에 출전하시는 선수들은 모두 지시에 따라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2학년들의 예선전 경기였다. 지친 재경이 체력을 보존하려고 어찌어찌 8반의 응원석으로 향하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비키를 발견하고 씨익 브이를 그렸다.
“나 개쩔지 않냐?”
시답잖은 비키는 실수를 떠올리기 싫었다. 거기서 넘어지다니. 렌만 잘난 듯이 지적했는데 혼자 실수한 게 너무 부끄러웠다. 다음번엔 반드시 실수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너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머…….”
“어? 뭐라고?”
“멋있…더라. 흥! 주제에 달리기는 잘해서!”
비키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앞 문장을 중얼거리다가 도저히 못 버텼는지 붉어진 고개를 팩 돌려 성큼성큼 응원석으로 향했다. 어째 팔다리가 모두 같은 쪽이 움직였다.
재경은 비키가 웅얼웅얼 뭔 소리를 한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와 같은 쓸데없는 시비일 거라고 생각하며 기껏 이겨도 불만이라고 툴툴거렸다.
반면 그 뒤에서 렌에게 줄 물을 가져오던 류제는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충격 받은 그가 들고 있던 물통을 떨어뜨렸다.
뭐…뭐…뭐라고? 멋있다고? 지금 비키 쟤가 렌한테 멋있다고 그런 거야? 얼굴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둘인데 비키가 렌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류제는 자기가 우연찮게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물론 비키 눈에는 넘어진 실수를 극복하고 1등을 차지한 렌이 멋지게 보일 수도 있지. 그럴 수는 있는데 류제는 왜 그 말이 충격인지 스스로도 충격이었다.
“야, 뭐 해?”
“아, 물.”
정신을 차린 류제가 실수로 떨어뜨린 물병을 주워 흙을 털었다. 이건 수고한 렌의 몫이었다.
재경은 고맙다며 넘겨받은 물을 꿀꺽꿀꺽 시원하게 들이켰다. 물병을 반쯤 비운 재경이 류제에게 너도 마시라며 물병을 도로 건네주었다.
“아, 힘들어. 너무 전력으로 뛰었네. 야, 그래도 나 완전 멋지지 않았냐? 비키 쟤는 왜 이겨도 저래 시비래.”
재경이 칭찬 받고 싶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가슴을 디밀었다. 그 얼굴을 보자니 류제는 갑자기 목이 타서 남은 물을 전부 벌컥벌컥 들이켜 버렸다.
다행히 렌은 비키의 말을 제대로 못 들은 듯하다. 맞아, 렌은 늘 인기 있고 싶어 했지. 그 노력으로 비키한테서 멋있다는 말을 들은 거면 축하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마…만약 이걸 계기로 비키가 렌을 좋아하기라도 하면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은 렌은 비키랑……. 에이, 말도 안 돼. 비키가 렌이랑 왜 사귀어. 비키가 렌을 좋아하다니 말도 안 되지. 아까도 엄청 싸웠는데.
류제가 다 먹은 물병을 손으로 으드득 구겼다. 쓰레기통에 버려야지. 류제가 내려앉은 앞머리 사이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살짝 으스스해 재경이 류제를 툭툭 치며 눈치를 살폈다.
“뭐 해, 나 멋있었냐니까?”
“응. 멋있었어.”
아까부터 표정이 나빠 보여 걱정했는데 류제는 평소와 똑같이 머쓱하게 웃었다. 잘못 본 건가?
1등 하느라 수고했다며 재경의 어깨를 붙잡은 그는 이어달리기 본선 전까지 휴식을 취하러 8반의 응원석으로 향했다.
이후에 치러진 1학년 장거리 이어달리기 본선에서는 재경이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부담감을 던 비키가 실수를 하지 않아 8반의 압도적인 격차로 이겼다. 예선전이 더 긴장감 넘칠 정도였다.
마지막 주자 렌이 이어달리기에서 큰 지분으로 1등을 차지하자 같은 반 학생들이 축하를 해주러 우르르 몰려나왔다. 친구들이 잘했다며 지친 재경에게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었다.
재경은 옛날 중학생 때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애들이 지금처럼 좋아했었다. 유일하게 행복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자니 그때와 지금이 오버랩되는 것 같았다. 재경이 순수하게 웃었다. 그는 지금이 정말 좋았다.
현재까지 좋은 성적으로 1학년 종합 우승을 달리고 있는 8반은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만 승리하면 확고한 점수로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체육대회 전부터 했던 연습도 그렇고 당일 아침부터 응원 도구 개선하랴, 배구 시합 하랴, 안면에 공 받으랴, 넘어지랴, 달리기하랴 고생깨나 했는데 결과가 좋게 나온 것을 보니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한 시간을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그건 물론 다른 친구들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