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3)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서 대패를 했다지만 그렇다고 누구의 말마따나 다른 종목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 패배했기에 비로소 구기 대회와 달리기에 집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늘 그렇듯 침울했다가도 금방 회복하는 재경은 언제 울었냐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배구와 달리기 연습에 집중했다.
더불어 친구들의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을 보면서 꼼꼼하게 중간 보스 전략을 연구하고 학교에 쓸 만한 것이 있을까 몰래 탐사를 다녔다.
이번 챕터 막바지에 등장하는 중간 보스는 마족의 사천왕 중 한 명이자 병마, 페스트라고 불리는 종족이다.
풀 네임은… 뭔진 모르겠지만 여튼 엄청 길다. 병마라는 이름에 걸맞게 게임에서는 일대에 맹독성 역병을 뿌리는 광역기 스킬을 가지고 있다.
그 마족은 맹독의 인상을 주는 썩은 늪색 머리에 렌 지미처럼 볼가에 주근깨가 있고 다크서클이 짙어 굉장히 병약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러나 황소를 닮은 뿔에 날개는 비대칭으로 세우며 허리는 구부정해 가지고는 일그러진 얼굴 속 붉은 동공을 크게 벌려 괴기스럽게 웃고 다녀서 서큐버스 미나가 그 마족을 이른바 ‘미친년’이라고 부른다.
서큐버스한테까지 미친년이라 불릴 정도면 진짜 성격이 얼마나 병맛이라는 거야.
늦은 밤, 몰래 학교로 숨어들어와 슬렉터로 이리저리 빛을 비추던 재경은 병마와 대화할 때 스쳤던 일러스트를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이처럼 중간 보스를 대비해 전략을 생각하는 한편 구기 대회나 달리기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은 재경은 아침마다 열심히 달리기 연습을 한 결과 100미터 13초 01의 기록에서 12초 8까지 줄일 수 있었다.
기록을 경신할 때마다 주변에 구경하는 사람이 늘었다. 재경은 곧 달리기 종목 유망주로 유명세를 탔다.
“와아아! 신기록이야. 대단해, 렌 군!”
“뭐 이 정도쯤이야~ 이것도 안 나오면 그게 사람이냐?”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줄어들었던 자신감을 달리기로 채우고 있는 재경이 유네의 칭찬에 코를 슥슥 닦으며 어깨 뽕을 넣었다.
열심히 해서 느는 것은 달리기밖에 없는 것 같다. 재경은 달리기 종목에서 이기는 건 껌이라며 뿌듯해했다.
“어때?!”
옆 트랙에서 친구에게 기록을 재달라 부탁했던 미나도 굉장한 속도에 여학생들의 환호성을 받았다.
뭐… 서큐버스인 미나에게 홀린 남학생들의 환호성도 섞여 있긴 한데 워낙 성비가 개판이니 그 목소리가 개미처럼 들린 것이 안타깝다.
“13초 05! 대단해. 0.4초나 줄었어.”
재경의 12초 8에는 어림도 없는 기록에 미나가 분해서 이를 앙다물었다. 인간 여자의 몸이란! 마족의 몸으로 돌아가면 얼마든지 이딴 기록 뛰어넘을 수 있는데.
“흐응~ 미나도 의욕 넘치는구나. 우리 반 달리기는 이걸로 안심인걸?”
“저러다 중간에 넘어진다에 한 표.”
옆에서 렌이 재를 뿌리자 반 학생들의 열정에 뿌듯해하던 비키가 그의 정강이를 차서 넘어뜨렸다.
“초 치지 마!”
“아, 왜 때려. 다리는 때리지 마!”
“부정 타잖아.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몰라? 오늘부터 다 같이 이어달리기 연습하기로 했는데 진짜 넘어지면 어떻게 해?”
“그럴 리가 있냐?”
투덜투덜. 재경은 왜 저 서큐버스가 마족을 싫어하는 비키한테까지도 인기가 많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나도 1회차 플레이 할 때 저 미소에 낚이긴 했어도 쟨 마족이라고! 인간의 적이란 말이다.
이후로 계속된 이어달리기 연습 동안 비키에게 바통을 이어받아 마지막 주자로 달리던 재경은 미나 생각으로 계속 툴툴거렸다.
그리고 다가온 수요일, 구기 대회 예선전이 치러지는 날이 되었다. 비키를 비롯해 피구 경기에 나가는 12명의 8반 학생들이 피구 경기장에 섰다.
어떻게든 터치 판정을 줄여 보려고 아직 입기는 이른 짧은 착 달라붙는 기간트리카 전용 체육복 반바지에 티셔츠는 바지 안에다가 밀어 넣고 머리는 죄다 꽉꽉 묶어 잔머리 하나 삐져나오지 않았다.
“1학년 8반, 파이팅!”
“파이팅!”
비키가 구호를 넣자 손을 중심에 넣어 원으로 둘러싸던 선수들이 따라서 구호를 외쳤다. 그들의 승부욕만큼 큰 함성이 일대를 뒤흔들었다.
물론 그녀들의 투지 또한 눈여겨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 당장 재경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1학―년 8반, 파이팅!”
“파이팅!”
“1학―년 8반, 파이팅!”
“파이팅!”
바로 응원 팀들이 구호를 외치면서 두들기고 있는 응원 봉이었다. 그래, 원작에서 렌 지미가 체육대회 전날 엉망으로 만들려다가 실패한 그 응원 봉 말이다.
재경은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는 여학생들의 치열한 피구 시합이 아무래도 좋을 만큼 그 응원 봉이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너무 잘 만들어서? 아니다.
손재주 없던 친구들이 저걸 수작업으로 만들면서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뿌듯해서? 아니다.
저 응원 봉이 렌 지미의 소소한 이벤트와 관련이 있으니까? 아니다. 재경의 썩은 표정이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래, 썩은 표정이다. 재경이 왜 썩은 표정이냐 함은 그녀들이 만든 응원 봉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엄청, 심각하게, 저걸 왜 만들었냐고 물어볼 말도 안 나올 정도로 못 만들어서가 당연하다.
“…야, 저거 설마 완성품이야?”
“이거? 아니, 아직 다 만든 건 아닌데?”
“그렇지?”
그 대답에 재경이 얼굴을 폈다. 역시 그렇지? 암. 그래야 하고말고.
재경은 당연 그래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지 않다면야 저 렌 지미가 망쳐도 망친 것 같지 않을 응원 봉이 무슨 소용이냔 말인가.
너무 못 만들어서 유치원생이 만들었다 해도 믿을 만한 퀄리티의 응원 봉을 렌 지미가 굳이 망칠 필요가 뭐 있어. 만들고 있는 도중이니까 저런 거겠지.
“완전 괜찮지 않아? 밤을 새가며 열심히 만들었다구. 아직 10개 정도는 덜 만들었지만……. 완전 역작이라고 난리 났어. 꺄아악! 비키 님! 비키! 셀로니아! 비키! 셀로니아! 꺄아아아, 멋있어요!”
“역작? 하, 하하. 역작이 무슨 뜻이더라.”
비키가 강한 슛으로 상대 팀을 두 명이나 아웃시키자 아이돌 팬처럼 미친 듯이 응원 봉을―자세히 말하자면 두들기면서 응원하는 막대풍선 같은 거지만.― 휘두르는 응원 팀 여학생의 비명에 재경이 한쪽 입꼬리만 까딱거리며 짧게 웃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너무 어이없어서 정색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다.
역작? 저게? 누가 봐도 똥손인 애가 남의 것 따라 하다가 더럽게 못 만든 괴작 같은데? 저게 보통인가? 보통인 거야? 저런 손재주가 보통인 거냐고 할머니!
8반 응원 봉이 학교 평균 어디쯤에 있는지 비교하기 위해 잽싸게 눈깔을 굴린 재경이 상대 팀 응원 봉을 살폈다. 반짝반짝, 어떻게 넣었는지 형광 빛깔의 스티커까지 넣어서 화려한 것이 딱 봐도 평범하게 잘 만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역시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우리 반 응원 봉 그냥 졸라 못 만든 거잖아. 뭐가 역작이야. 저 똥손이 그럴 줄 알았다!
재경이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옆에 있던 류제의 허리를 툭툭툭 찔렀다. 류제가 왜? 하고 쳐다보자 재경이 몰래 응원 봉을 가리키며 물었다.
“류제… 저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여자애들이 들고 있는 거? 음… 그런가?”
류제는 잘 모르겠다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미온적인 태도였다. 재경은 저 미적감각 0에 수렴하는 놈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쟤는 저 엄청 예쁜 히로인들하고 엮이는 주제에 눈깔이 삐었나, 왜 저 응원 봉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는 거야? 어? 완전 바보 아냐? 이래서 하렘 미연시 주인공이 문제라니까!
재경은 틈만 나면 ‘에, 난닷테?’를 연발해서 히로인들이 보내는 호감도 시그널을 모르는 척하는, 히로인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주인공은 이런 놈이구나 혀를 찼다. 둔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저게 이상한지 모르는 거야?
라고 재경은 툴툴거렸지만 미적감각이 0에 수렴하는 류제는 덕분에 누구에게 눈이 멀어 저것도 나름 매력 있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재경은 저 쪽팔린 응원 봉을 들고 응원을 해야 한다는 상상을 하니 죽어도 싫었다. 저거 봐, 내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니까? 다른 반 애들이 수군거리면서 비웃고 가잖아. 왜 다른 애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거지? 렌 지미가 망쳐놔도 저것보다는 잘 만들 퀄리티를? 지금의 렌 지미인 내가 발로 만들어도 저것보다는 잘 만들겠네.
정말 진지하게 궁금해서 그러는데 쟤네 고등학생 맞아? 미취학 아동 아냐? 암만 이 학교가 예체능 중 ‘체’ 쪽에 집중적으로 쏠려있다 하더라도 그림 좀 잘 그리고 뭐 잘 만드는 애들은 한두 명 있을 거 아냐. 왜 아무도 태클을 안 걸어.
쪽팔려진 재경이 망했다며 얼굴을 쓸었다. 구기 대회랑 달리기 연습한답시고 응원 봉 따윈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저게 저 정도로 망가졌을 줄이야. 저 곰손이 응원단장을 한다고 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어.
피 터지는 여학생들 피구 경기 내내 응원 팀 옆발치서 저걸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까 노려보던 재경은 게임 제작사 측에서 ‘어디~ 렌 지미가 응원 봉을 망쳤는데 더 퀄이 좋아지려면 이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아?(웃음)’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며 저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류제는 렌의 얼굴이 또 불평불만이 가득 들어찬 걸 보고 저 투덜쟁이가 뭐가 불만인지 몰라 멀뚱히 흘겼다. 혹시 목마르나?
못난 응원 봉과 열띤 응원 문구에 격려를 받아 연이어 치러진 여자 배구 예선전도 보기 좋게 통과했다. 덕분에 1학년 8반의 구기 대회는 체육대회 아침에 준결승전을 앞두게 되었다.
이후 시간을 들여 본격적으로 완성된 응원 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후져서 재경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꺄악. 너무 잘 만들었다~”
“내가 한번 하면 잘 한다니까.”
헛소리하지 마, 인마. 진짜로 저걸 들고 내일 내 달리기랑 배구를 응원한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해. 사진으로도 남아봐, 접싯물에 코 박고 싶을 정도로 창피할 거야.
늦은 밤, 다음 날 있을 체육대회를 기다리며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다 악몽을 꾼 것처럼 눈을 번쩍 뜬 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자. 저건 렌 지미가 원래 망쳐 놓으려고 했던 응원 봉이잖아. 그런 거라면 내가 조금~만 손봐 주면 그런대로 볼만하다는 뜻 아니겠어? 그렇지? 그런 의미지? 제발 그런 의미라고 말해 줘!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되는 건 배알이 꼴렸지만 재경은 그 정도로 저 응원 봉으로 응원받기 싫었다. 결국 본래 스토리처럼 응원 봉을 손보기로 결심한 재경이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도구를 챙겨서 나와 살금살금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어차피 렌 지미 손에 바뀌는 거, 보기만 해도 쪽팔린 응원 봉을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린다면 개이득인 거 아니겠어. 암.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 팀끼리 열심히 만들었는데 왜 멋대로 바꿨냐고 신경질을 낼 것은 눈에 빤히 보이지만 욕먹는 한이 있더라도 바꿔야 한다. 아무도 모르게 수정하면 나인지 누가 알겠어?
재경은 슬렉터로 빛을 비추며 어두컴컴한 1학년 8반 교실에 숨어들어 가 꿈지럭꿈지럭 총 23쌍의 응원 봉을 손보았다.
손재주가 좋은 재경은 그녀들이 며칠간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괴작을 단 몇 시간 만에 평범한 응원 봉으로 탈바꿈시켰다.
중간중간 괜찮은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안에 작은 모래들을 넣어서 흔들 때마다 소리가 나게끔 한다거나 위에는 화려하게 제기 같은 걸 붙여서 그럴싸한 모양을 냈다.
말고도 남은 골판지로 만든 부채에 깔끔하고 간단한 응원 문구를 써넣어 더운 날 효율적으로 응원할 수 있게 한다든가, 머리에 쓸 수 있는 귀여운 머리띠를 몇 개 추가로 만들었다.
오랜만에 손을 움직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나게 공작을 한 재경이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도 모르고 만들기에 열중했다.
드디어 도래한 체육대회 아침, 반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우승에 책임감을 가진 비키가 부지런하게도 이른 시간부터 교실에 짐을 두러 왔을 때에도 재경은 눈이 벌게진 채로 응원 도구를 정리하고 있었다.
“렌… 너, 뭐 해?”
“뭐? 우아악! 비…비키, 언제 온 거야? 지금이 몇 신데!”
새벽부터 지금까지 눈이 침침해져라 손을 움직이던 재경이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비키를 보고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어이가 없는 비키는 자세를 바꾸어 한쪽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지금 현재 시각은 아침 7시 45분이고, 등교하기는 이른 시간이지만 그녀의 미래가 달릴 평가 점수가 걸려 있는 체육대회 날이니 비키가 이 시간에 몸을 풀러 온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비키는 오히려 지금 여기서 응원 도구에 손대고 있는 재경이 더 기가 막혔다.
“하…하여튼 다른 애들한테는 내가 지금 왔다는 말 하지 마. 알았지?”
“뭐라고? 어떻게 그래. 지금―”
비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 뒤에서 인영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류제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등장했다.
“왜 그래, 비키. 거기 가만히 서서. 어엇, 렌!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침부터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렌을 발견한 류제가 삿대질하며 잔소리했다. 아침에 깨우러 갔더니 침대는 비었지,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지, 혹시 지금까지 무리했다가 어디선가에서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지.
렌에 한해서는 쓸데없는 걱정만 대왕인 류제는 오늘은 특히 체육대회인 탓에 걱정이 현실처럼 되었을까 렌을 찾는답시고 아침 내내 전전긍긍했다.
도중에 비키를 만나 학교에 먼저 가있는 거 아니냐고 조언을 들어서 이른 시간에 한번 찾아와 봤는데 그게 정답일 줄이야.
류제까지 등장하자 무안해진 재경이 삐죽삐죽 입을 내밀었다.
“엑… 류제 너 맨날 제시간에 오면서 왜 오늘은 이렇게 빨리 오고 난리야.”
“거봐, 내가 학교에 먼저 가있는 거 아니냐고 했지?”
“그렇긴 한데. 그거 응원 팀 애들이 만들던 거 아냐?”
렌이 뭘 하고 있었나 확인하려 다가가던 류제가 그의 손에 들린 잡동사니들을 발견하고 신기한 눈으로 뒤적거렸다.
어제 본 응원 도구가 차원이 다르게 변화했다. 지저분한 부분들이 정리되어서 깔끔하고, 여러 기능들이 더해져서 절로 눈이 갔다. 훨씬 보기 좋았다. 그러고 보니 엊그제 렌이 응원 봉이 이상하네 마네 이야기했었지.
“설마 이것 때문에 학교에 먼저 온 거야?”
“아…아냐! 내가 이래서 몰래 하려고 했던 건데. 다…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아니… 하지만―”
“드디어 체육대회! 빨리 좋은 자리를 선점하러 가자!”
일찍 등교하는 학생들 때문에 복도가 소란스럽다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자기 반 학생일 줄은 몰랐다.
재경은 신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응원단장과 그 무리에 히익 놀라 다리를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 이렇게 연이어 들어와?!
“렌, 너 거기서… 아앗! 우리가 열심히 만든 응원 도구가!”
“뭐? 응원 도구가 왜. 우와, 이게 다 뭐야?”
“나…난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야!”
부끄러웠던 재경이 후다닥 일어나 가장 만만한 류제의 뒤에 숨었다. 주변이 새까맸을 때 왔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까지 되었다니. 옛날에 할머니 도와주던 게 생각나서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게 뭐야? 머리띠네?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는데. 기발하다, 야~ 나 어때?”
다른 응원 팀 여학생이 재경이 만든 응원 문구와 귀여운 오브젝트가 달린 머리띠를 뒤로 묶으며 자랑했다.
청 팀이라 파란색 띠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 위에 작은 별 모양 뿔과 재경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심히 귀여운 문구가 이색적이다.
“귀여워.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아, 그거 아마 레… 아악!”
류제가 뿌듯해하며 렌이 열심히 만들었다고 말해 주려고 하는데 재경이 하지 말라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왜애… 네가 만든 거잖아.”
“시끄러워. 조용히 있어!”
재경은 몰래 만들고 모르는 척 도망갈 셈이었는데 이렇게 죄다 들통날 것 같은 상황이 참을 수 없이 쪽팔려서 이 자리에서 제발 도망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류제는 신나서 리뉴얼된 응원 봉과 여타 응원 도구를 살피는 응원 팀들의 반응에 부끄러워하는 렌이 썩 귀여워 잠시 입을 가리고 큭큭 웃어버렸다.
* * *
퍼버벙! 마른하늘에 시원할 정도로 폭죽이 터졌다. 제립학교 관악대 동아리에서 준비한 청명한 팡파르 소리가 운동장 곳곳에 퍼져나갔다.
안전을 책임지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학생 대표의 선서를 끝으로 교장이 체육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하자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선배들의 등쌀에 밀려 가장 좋은 자리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앞에서 다섯 번째는 좋은 자리를 선점한 8반 학생들이 서로서로 응원 도구를 들어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성적을 위해 전교생이 최선을 다해 준비한 체육대회가 드디어 시작되었다.
“솔직하게 너무 못 만든 것 같아 도와줬다고 말하면 될걸. 너도 참 이상한 놈이야.”
곰손 응원단장이 핀잔하듯이 말했다. 1학년 8반이 차지한 등나무 그늘이 진 계단 자리에서 류제의 무릎을 베고 부족한 잠을 청하던 재경이 몽롱한 눈을 떴다.
“시끄러워… 잠 부족하단 말야. 조용히 해.”
“얘는 항상 고맙다고 말을 하려고 하면 저런 태도라니까. 무슨 삐딱 나무 열매라도 먹었냐?”
“이게 내 성격이다. 참견 마, 짜샤.”
“아침부터 경기도 있으면서 무리하긴. 이유가 뭐가 됐건 지는 건 용서 안 할 테니까 명심하셔. 응원 도구는 감사히 쓰겠다만. 호호.”
“알았다니까. 아직 시간 남았잖아. 나 좀 자게 내버려 둬.”
재경이 시끄러운 참견과 눈 부신 햇살이 싫어 등을 돌려 류제의 배에 얼굴을 박고 쿨 잠을 청했다.
류제는 배에서 느껴지는 렌의 숨결에 목석처럼 바르게 앉아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응원 봉으로 어깨를 두드려 보다가 그걸 본 응원단장이 창백해진 류제의 안색을 살폈다.
“류제, 너 어디 안 좋아?”
“어? 응? 아니, 전혀. 완전 멀쩡해.”
“그래? 그럼 다행인데… 근데 너 앞머리 그래가지고 배구 경기 나갈 수나 있겠어? 자, 머리 끈 빌려줄게.”
“괜찮아. 완전 멀쩡하거든. 난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기는 무슨. 혹시라도 앞머리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 실점하면 비키 님한테 큰소리 듣는 걸로 안 끝날 거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라고 대꾸하려고 했던 류제가 얼떨결에 검정색 고무줄을 건네받았다.
그는 무릎 위에 올라간 길고양이를 쓰다듬듯 무의식적으로 재경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받은 머리 끈을 살폈다. 앞머리를 기르는 데 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뭐, 괜찮겠지. 류제가 양손을 들어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겨 사과 머리로 만들었다. 차마 길이가 닿지 않은 머리칼 몇 개가 류제의 이마에 자연스레 흘러내렸다. 오늘의 하늘처럼 선명하게 드러난 푸른 눈동자가 잔잔하니 예쁘다.
시원해진 시야에 류제가 머쓱해서 콧잔등을 매만졌다. 옆에 있던 같은 반 여학생들이 앞머리를 올린 류제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꺄악 비명을 질렀다.
왜 저러지?
미연시 주인공답게 청량하게 잘생긴 류제는 둔한 속성 탓에 자신이 그 정도로 외모가 출중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늘 앞머리로 가리고 있는 수려한 외모가 활짝 드러나자 득을 본 여학생들이 역시 비할 사람이 없다며 감탄했다. 그 시끄러운 소리가 거슬렸던 재경이 참다못해 일어났다.
“시끄럽다니까! 잠 좀 자자!”
“얘는 곧 있으면 구기 대회가 시작하는데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 이제 일어나지 그래?”
“냅 둬. 응원 도구 손보다가 잠을 못 잤대.”
옆에서 대신 변명해 주자 컨디션 조절을 못 한 렌을 타박하려던 학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그냥 다 떠벌리고 다니는 괘씸한 배려에 재경이 툴툴거리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됐어, 몸이나 풀어야지. 류제야, 나 몸 푸는 거 도와… 오, 웬일로 이마를 다 깠어?”
“이상해?”
“이상하겠냐? 잘생긴 짜식이.”
그래? 재경을 따라 일어서던 류제가 부끄러운 듯이 볼을 긁적거렸다. 렌은 매번 내 얼굴을 보고 잘생겼다고 하더라. 평범하게 생겼는데.
“더 안 자도 되겠어?”
“괜찮아. 배구 끝나고 중간에 자면 돼.”
재경이 헛둘헛둘 가볍게 준비운동을 한 다음 늘 짝을 이루는 류제와 함께 2인 스트레칭을 했다.
9시 45분부터 있을 남자 배구 경기가 머지않았다. 그들이 대강 몸을 다 풀었을 때 체육대회 첫 시합이자 구기 대회의 막을 올리는 청백 팀 대결, 1학년 남자 배구에 출전하는 학생들은 경기장으로 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자!”
얼굴이 비장한 응원단장과 반장 비키를 필두로 응원석으로 향하는 8반 응원 팀의 표정들이 무섭다.
어째 유네도 거기에 전염되어서는 어울리지 않게 근엄한 얼굴로 군악대 걸어가듯 왼발 오른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꼭 이겨!”
“가라. 류제, 렌!”
“청 팀 파이팅!”
안 이기면 몰매 맞을 것 같은 부담스러운 그녀들의 응원을 뒤로한 재경과 류제가 배구 경기장에 들어갔다. 이마에는 청 팀을 상징하는 푸른색 띠가 둘러져 있다.
먼저 와서 경기장을 살피고 있던 청 팀 주장이 두 사람을 반겼다. 예비 선수 없이 딱 6명만 출전하는 남자 배구는 평범한 배구 시합과 룰이 같다.
어빌리티 사용 금지이며, 상대방이 어빌리티를 사용하는지 유무를 판별할 수 있는 선생님이 배구 룰을 숙지하고 심판으로 섰다.
“연습했던 대로만 해. 소문을 들어보면 저쪽도 그리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으니까.”
“알았어.”
“공 안 올 것 알아도 토스 올리면 스파이크하는 시늉이라도 해. 알았지?”
“왜? 체력 아깝게.”
“자꾸 류제한테만 공을 올리면 류제만 집중적으로 마크당하잖아. 공은 가능한 한 골고루 보낼 테니까 방심하지 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은 무조건 받아. 알겠지?”
배구 경험이 있는 청 팀 여학생들과 몇 판 붙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세터이자 주장이 팀원을 격려했다. 솔직히 에이스 류제가 있으니 청 팀이 훨씬 유리하겠지만 역시 고만고만한 실력이라 방심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각 선수, 앞으로.”
나란히 선 청 팀과 백 팀 선수들이 심판의 말에 따라 서로 악수를 했다. 게임에서는 고작 CG 하나로 지나가지만 실제로는 긴 연습 끝에 경기 시작 전 떨림이 존재하는 두근거리는 순간이다.
“청 팀, 이기자!”
“할 수 있다!”
둥글게 원을 말아 파이팅을 한 청 팀이 첫 로테이션 자리를 잡았다. 3전 2선승제. 속공으로 나간다면 빠르게 끝나는 시합이다. 져서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최선을 다해 임하자고 각 팀 학생들이 마음을 다잡았다.
“청 팀, 류제 신리 서브.”
첫 번째 타자로 백 팀의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 류제가 나섰다.
3월에 172였던 키가 5월에 177까지 자라서 다른 남학생들보다 확연히 크고 듬직한 체격이 무척 믿음직스러웠다.
서브 존으로 간 류제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호각 소리가 들리자 공을 띄우고 도움닫기를 해서 강하게 공을 후려쳤다.
탕! 대포 소리를 낸 공이 순식간에 경기장 바닥을 내려찍었다. 점수가 났다는 심판의 호각 소리가 들릴 때까지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서브 에이스.”
“꺄아아악! 류제!”
앞머리를 올리니까 눈앞이 훤한 게 어색하기는 한데 바람에 콧잔등이 간질이지 않으니 썩 나쁘지 않았다.
첫 시작이 좋자 긴장을 털고 상쾌하게 웃은 류제가 팀원들과 하이 파이브를 한 번 한 다음 다시 한번 서브 존에 섰다.
여학생들도 보고 있는데 이번에는 넋 놓고 점수를 줄 수 없었는지 백 팀에서 류제의 서브를 받고 간신히 공을 띄우는 데에 성공했다.
서브로만 십 점 내자며 안도하고 있던 재경이 류제의 초고속 서브를 상대 팀이 받아내자 당황해서는 어버버, 어버버 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다가 스파이크가 날아오자 안면으로 시원하게 공을 받아버렸다.
“크헥!”
“나이스 안면 리시브!”
속도 모르고 응원해 주던 같은 반 여학생들은 저런 소리나 해댄다. 아, 이거 분명 CG에 있던 장면이다. 내 코뼈 부러진 거 아니겠지?
재경의 얼굴을 맞고 날아간 공을 청 팀 주장인 세터가 치기 좋게 띄웠고 류제가 시원하게 스파이크를 날려서 또다시 한 점을 얻었다.
“아자!”
“아자… 으아…….”
시큰시큰 코가 아픈 재경이 박살 난 것 같은 얼굴을 문대며 팀원끼리 하이 파이브를 했다. 쪽팔리기는 했지만 점수를 내서 다행이었다.
계속해서 류제가 서브를 했다. 이번엔 실수를 해서 상대 팀이 공격하기 좋게 공의 띄워져 버렸다. 류제를 빼면 실력이 부족한 청팀은 중구난방으로 움직이다 결국 백 팀에게 한 점 먹히고 말았다.
다음 서브는 백 팀의 차례다. 처음 받는 상대 팀의 서브에 청 팀 모두 긴장을 한 채 서브를 하는 선수와 그 공을 주시했다.
“하앗!”
류제처럼 있는 힘껏 때려 치는 줄 알았는데 그건 페이크고 살짝만 밀어 쳐서 네트 쪽으로 붙은 공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으라차!”
“꺄아악! 렌 웬일이니. 멋지다!”
류제와 함께 열심히 리시브를 연습한 덕분인지 재경이 폼은 안 났어도 온몸을 던져 간신히 가까이 있던 서브 공을 띄우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자 세터가 공을 연결해서 류제의 공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멋졌다고? 나? 나 말한 거 맞지?”
멋지다는 말에 재경이 뒤를 돌아 잘난 척을 했지만 그녀들의 응원은 이미 스파이크에 성공한 류제의 공격으로 이동해 있었다.
입이 한 바가지 나온 재경은 자기도 공격할 수 있다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공 올려준다면서. 류제한테만 가네.
“잘했어, 렌. 연습한 보람이 있네.”
“나도 알아!”
류제가 리시브에 성공한 렌을 챙겨주었지만 이미 마음 상한 재경은 류제를 퉁명스럽게 지나쳤다. 류제가 하이파이브를 해주려고 한 것을 못 본 모양이다. 피곤해 죽겠는데 짜증 나게 말야. 부럽게시리.
류제는 하이 파이브를 받아주지 않은 렌 대신 머쓱하게 든 양손을 서로 부딪쳐서 혼자서 하이 파이브 했다.
류제만 공격수로 이용하니 청 팀이 공격을 할수록 움직임이 읽혀 점점 공격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 점을 파고든 백 팀의 계략으로 다음 턴에서 보기 좋게 청 팀이 한 점 먹었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 재경에게도 스파이크의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초심자의 빤히 읽힌 공격이라 상대방이 리시브를 해버려 다시 청 팀이 한 점 먹혔다.
먹고, 먹히고, 응원하는 애들은 열이 오르고. 로테이션이 돌고 공격과 수비가 반복되었다.
처음에 흔들리는 듯 보였던 재경은 자신이 지금껏 열심히 한 리시브와 스파이크 연습을 살리며 나름대로 선방했다.
긴장해서 안면 리시브를 한 것이나 헛스윙을 한 것을 제외하면 원래 운동신경이 좋았던지라 그가 따낸 점수만 2세트 모두 10점이 넘었다.
“청 팀, 승리!”
“꺄아아! 류제! 신리! 류제! 신리!”
승리했다는 심판의 말에 낯간지럽게 풀 네임을 부르며 환호하는 여학생들이 류제는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다. 다 같이 노력해서 이긴 건데 워낙 류제가 에이스로 정평이 나있어서 청 팀을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류제만 연이어 불렀다.
백 팀은 물론이고 청 팀 남자 배구 팀의 질투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류제는 별 관심이 없는 척 하하 웃었다.
재경도 고생은 다 같이 했는데 좋은 부분만 쏙 골라 먹는 류제가 부러워 심통 난 얼굴로 상대 팀과 악수를 했다. 이겼는데 전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1학년― 남자 배구― 청 팀― 승리.
구기 대회의 시작을 끊은 청백전 남자 배구 경기에서 청 팀이 이겼다며 운동장 전체에 방송이 나가자 다른 학년들의 함성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10분 후에 1, 2, 3학년 여자 배구 준결승전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각 반 학생들 준비 바랍니다.”
―아, 아― 10분 후에 1, 2, 3학년 반별 여자 배구 준결승전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각 반 학생들 준비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남자 배구가 끝나고 반 대항 구기 대회가 시작되려 했다. 예선전에서 떨어진 반들은 고생한 자기네 반 남학생들을 데리고 각기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배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종목이기 때문에 학년 전체가 동시에 준결승전을 치렀다. 세 개의 코트 중에는 준결승에 올라간 8반이 치를 경기장도 있었다.
“1학년 8반 파이팅! 이번 승리도 우리 차지다!”
“방심하지 마!”
8반의 여자 배구 멤버에는 히로인 중 미나 플로리아와 왕녀 니냐롯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니냐롯트는 170 정도로 큰 키에 공수 골고루 잘하고, 미나는 키는 작지만 수비 범위가 넓어서 리베로 겸 선수로 발탁되었다.
지금까지 선수로 뛰다가 구기 대회 응원석으로 와서 반 여학생들 경기하는 것을 보자니 슬슬 실감이 났다. 재경이 응원 팀 친구들이 건네준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어…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3세트까지 갔으면 졌을지도 몰라.”
“배구가 의외로 힘이 든다니까. 두 경기 모두 듀스까지 안 가서 다행이었어. 2세트 때는 좀 아슬아슬했어도 뭐… 이겼으니 망정이지.”
“그래도 나 룰도 몰랐던 것치고는 선방하지 않았냐?”
재경이 헉헉거리던 숨을 고르며 이마를 닦았다. 옆으로 다가왔던 류제가 언제 뚱했냐는 듯 활짝 웃는 재경을 보며 진짜 단순한 애구나 싶었다.
“잘했어, 안면 리시브.”
“안면 리시브는 실수라고!”
“서브하다 네트 친 거는?”
“것도 실수고. 상대 팀도 그런 실수 많이 했잖아. 넌 꼭 한마디 더 하더라? 잔말 말고 칭찬이나 하란 말야.”
“아하하. 그래. 잘 했어. 정말 장하다, 우리 렌.”
놀리는 맛이 있다. 류제는 또 삐지려고 하는 렌의 등을 도닥였다.
재경은 웬일로 앞머리를 넘긴 류제가 괜히 관심 없는 척 인기를 강탈한다고 투덜거렸다. 나도 멋진 모습 보여 주고 싶었는데 류제 자식이 다 빼먹다니. 아주 혼자서 다 해먹어라.
마시던 음료수를 옆에다 둔 재경이 쭈욱 기지개를 켰다. 시합이 끝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피곤이 몰려왔다.
“토너먼트도 빛의 속도로 탈락했는데 이거까지 졌어봐. 나 체육대회 엄청 싫어졌을 거야.”
“아직 달리기 남았잖아. 거기서 활약하면 되지.”
“달리기는 달리기지! 그건 이기는 게 당연한 거잖아!”
“하하하, 그 정도로 자신 있는 거야?”
자겠다며 무릎에 뒤통수를 대는 렌이 눕기 편하도록 자세를 가다듬던 류제가 피식 웃었다.
“응원 도구도 열심히 만들었고.”
“너, 그 이야기 한 번만 더 꺼내면 진짜 때릴 거다?”
“알았어, 알았어.”
놀릴 때 발끈하는 게 귀여워 2절 3절도 하게 된다. 류제는 근질거리는 입을 다물고 유네와 다른 여학생들이 응원 중인 8반 여자 배구 경기를 구경했다.
키가 크기로는 여학생들 중에 제일인 니냐롯트가 블록을 여유롭게 해냈다. 그녀가 블록에 성공하니 같은 반 학생이 응원하는 여학생들보다 그녀의 추종자의 응원 소리가 더 큰 것 같았다.
“꺄아아! 니냐롯트 왕녀님 절 가져요!”
“왕녀님 너무 멋있어… 흑흑흑…….”
“네 이년! 감히 왕녀 저하께서 막으신 공을 집으려고 하다니 무엄하도다!”
역시 추종자. 오늘도 시끄럽다. 류제는 수학여행 때 당했던 그녀들의 끈질긴 스토커스러움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진짜 안 당해 보면 모른다.
“…오늘이 안 지나갔으면 좋겠네.”
“뭐?”
여학생들 함성 소리 때문에 렌이 뭐라고 말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류제가 다시금 물었으나 잔다고 누워서 뒤통수만 보이는 재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눈을 끔벅거리던 류제가 입을 떼려고 했을 때 서브 실수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버린 배구공이 재경의 안면을 강타해 그는 더 이상 그 의미를 물어볼 수 없었다.
“끄아아악! 내 얼굴!”
류제의 무릎을 베고 잘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재경이 죽겠다며 코를 붙잡고 버둥거렸다.
재경의 안면을 시원하게 후려치고 반대편으로 통통 튀어 데구루루 굴러간 공은 경기를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로 돌아갔다. 그걸 본 학생들은 반을 불문하고 폭소하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홈런에 명중이다. 하하!”
“렌 얼굴이 저기서 더 납작해지는 거 아냐?”
“미안. 많이 아팠어?”
“머 하능 지시야! 누니 바레 달령냐?!”
경기장에서 서브 실수를 한 학생이 손을 들어 재경에게 사과했다. 재경은 열받아서 저 가벼운 사과조차 마땅치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다. 분명 일부러야! 아파아아!
“괜찮아?”
“앙 갱차나!”
코맹맹이 소리로 투덜거린 재경이 찔끔 난 눈물을 닦았다. 재경이 얼굴에 공을 박든 박지 않든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으니 시합은 계속되었다.
응원석에 있던 유네가 응원 팀의 눈치를 보다가 헐레벌떡 상태를 살피러 달려왔다.
“렌 군, 어디 봐. 심하게 다쳤어?”
오늘따라 반 친구들의 격려를 위해 응원 팀으로서 엄격, 근엄, 진지한 얼굴을 유지하던 유네가 렌 군 얼굴이 이 이상 망가지면 안 된다며 굳은 얼굴로 상처를 확인했다. 원래라면 울상으로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오늘은 응원한다고 굳은 얼굴이 잘 풀리지 않는 듯 표정이 어색하다.
더 이상 망가지면 안 된다고? 이거 은근 돌려 깐 거 아냐? 라고 재경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유네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양 볼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는 기분은 나쁘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상태를 살피니 코만 뻘게졌지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은 유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조심해. 아프면 바로 세라 선생님께 가, 알았지?”
“나도 아니까 걱정일랑 마셔. 저 공은 나한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왜 이렇게 끈질기게 얼굴을 때리고 난리야.”
“우연이라면 웃기기는 하다. 안면 리시브에 홈런이라.”
“그렇다고 진짜 웃지 마.”
걱정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릿아릿한 코뼈를 만지작거리던 재경이 시합도 아닌데 왜 공에 맞는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졸려서 잊고 있었던 장면 하나를 얼핏 기억해 냈다.
체육대회 연습한다고 까맣게 잊고 있었던 렌 지미의 삼류 악행 말이다.
이 빌어먹을 스토리대로만 진행되는 세상에서 그냥 넘어갈 리 없는 바로 그 악행들! 바로 그 악행들을 자행하다가 안면에 공을 맞고 권선징악당하는 모습이 있지 않았었나?
에이, 설마. 라고 안일하게 넘어가기엔 지금껏 당했던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어디 한번 렌 지미의 삼류 악행을 생각해 보자.
응원 팀이 모두 함께 만든 응원 봉에 손을 대었는가? → 그렇다. 이건 렌 지미의 삼류 악행을 알고 일부러 그런 거다.
손을 대서 퀄리티가 향상되는 바람에 반 아이들이 좋아하였는가? → 그렇다. 창피하지만 이것도 알고 있었지.
배구 경기를 하다가 안면에 공이 박혔는가? → 맞아. 이거 CG에 있던 장면이라구.
여학생 구기 대회에서 안면에 공이 박혔는가? → 지금이 바로 이 시점이다. 근데 이건 렌 지미가 구기 대회를 보면서 야유를 해서 그런 거 아냐?
이게 뭐야! 렌 지미가 구석에서 안면 리시브를 하는 CG는 그렇다고 쳐. 하지만 난 구기 대회 보면서 야유 같은 건 퍼붓지 않았다고. 그런데 왜 공을 맞아야 하냔 말이야!
인과는 아무래도 좋고 무조건 날 때려야 직성이 풀리냐? 으으, 짜증 나.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열받게! 망할 세상, 삼류 악당은 체육대회도 못 즐기게 하려는 거라면 누가 질 줄 알고?
“왜 그래? 아프면 양호실 갈래?”
“그거 좋네. 가서 잠이나 자련다. 흥!”
적어도 양호실이 여기보다는 안전하겠지. 방심하면 내 안면에만 꽂히는 저 공 따위에 누가 가만히 당할쏘냐. 재경이 성큼성큼 발을 굴려 학교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류제가 같이 가줄까? 하고 물었지만 재경은 귀찮게 굴지 말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렌 군, 잠을 못 자서 힘드나 봐.”
“그러게.”
사정을 모르는 두 사람은 그런 재경의 뒷모습을 봤다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다시 재경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살폈다. 원래 이상한 애지만 오늘따라 더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