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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2) (109/112)

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2)

체육대회 때 주인공과 각 히로인별로 최종적으로 정해진 종목은 다음과 같았다.

류제 신리 : 남자 농구, 남자 배구, 장애물 달리기, 장거리 이어달리기.

비키 셀로니아 : 여자 피구, 줄넘기, 장거리 이어달리기.

유네 나르타 : (불쌍하지만 유네는 심각한 몸치다. 응원을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미나 플로리아 : 여자 배구, 100미터 달리기.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 여자 배구, 장거리 이어달리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체육대회 내내 감초 역을 할 우리의 불쌍한 렌 지미, 재경이 나가는 종목은 다음과 같았다.

렌 지미 : 남자 배구, 100미터 달리기, 장거리 이어달리기.

으와아, 나 세 종목이나 나가는 거야? 학생 전원이 참가하는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까지 포함하면 네 개네? 거기에 줄다리기 같은 것까지 끼면…다음 주까지 완전 빡센 여정이 될 것 같은데.

신경 써야 할 구석이 많아지자 재경이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새로 궁둥이를 들썩거렸다.

젠장… 그래도 기쁘다. 난 중학교 2학년 때를 빼면 체육대회 매번 땡땡이쳤단 말이야.

초등학생 때는 같은 반 애들 부모님 보러 오시는 거 보기 싫어서 안 갔고, 중학교로 올라가서는 보통 상급생하고 싸움질하다가 선생님한테 걸려서 벌 받는다고 안 갔던 거 같다.

그래서 이렇게 본격적으로 준비해서 나가는 건 처음인데. 젠자앙. 못 참겠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잖아!

“응원을 맡은 응원 팀은 응원복과 응원 봉, 응원 구호를 체육대회 전까지 만들어 줘. 응원 점수도 크다는 걸 잊지 말고!”

“물론이지. 맡겨 둬.”

라고 자신 있게 외친 학생은 수학여행 때 기차 안에서 손재주가 지극히도 없음을 재경 앞에서 증명한 수학여행 5조 조원이었다. 소원 팔찌 만들면서 재경이 곰손이라고 놀렸던 바로 그 학생이다.

재경은 사뭇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쟤가 응원단장이라고? 응원 부문은 시작도 하기 전에 그냥 망한 거 아냐?

“남학생이 많으니 우리는 다른 반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고, 충분히 1등을 차지할 수 있어. 세라 선생님께서 1등을 하면 파티를 열어주신다 약조하셨으니까 후회 남지 않도록 다들 열심히 해보자!”

파티 이야기 덕분에 반의 사기가 한층 더 달아올랐다.

파티라. 캠프파이어와는 다른 기분일까. 중간 보스니 응원 봉이니 배구니 걱정은 저리 치워두고, 재경도 격양된 눈으로 렌 지미의 이름이 적힌 칠판을 뿌듯하게 쳐다보았다.

“연습은 오늘부터 해도 상관없어. 아니, 오늘부터 하도록 해! 남학생들 청 팀 구기 대회 연습은 내일 아침에 강당에서 논의한다고 했고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니까 헷갈리지 마. 기간트리카 대결 연습장은 오늘 수업 끝난 후부터 쭉 오픈이라 거기서 연습하면 대결할 때 따로 허락 안 맡아도 돼.”

“구기 대회 예선전은?”

“여자 구기 대회 예선전은 다음 주 수요일부터야. 다음 날인 목요일이 체육대회인 거 알지? 금요일부터 그다음 주 화요일까지 가정의 달 휴일이니까 기왕 오랜만에 본가에 가는 거 1등 했다고 자랑하자. 그럼 이상, 오늘 자 회의 종료!”

비키의 일정 공지를 마지막으로 학급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나면 기숙사로 돌아가서 낮잠이나 자겠다고 했던 재경의 눈이 또랑또랑해졌다.

종례는 아까 했으니 학생들은 교과서가 든 가방을 싸 들고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려는데 눈에 쌍심지가 켜진 재경이 삼총사 중 나머지 둘을 불러 세웠다. 복습할 교과서를 챙겨서 기숙사로 돌아가 수학 숙제를 하려던 두 사람은 무슨 일이냐며 차례로 고개를 돌렸다.

“유네야,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나랑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시합 연습하자. 류제, 넌 연습 상대 좀 돼줘.”

“정말? 웬일이야. 난 딱히 상관없어.”

“역시 렌 군이야. 마음 단단히 먹었구나? 좋아. 오늘 1승 한 기세를 몰아 우리 팀도 토너먼트 1승을 노리자.”

“유네 이 짜식. 오늘따라 마음이 잘 통하는데? 아차, 류제 너는 이따 저녁 먹고 나서도 시간 내서 배구 좀 알려 줘. 비키 짜식이 멋대로 멤버로 넣었지만 나 진짜 배구를 하나도 모른단 말야. 룰도 모르는데 배구를 어떻게 해. 응? 가르쳐 주는 거다?”

“알았어. 나도 잘 모르지만 공 받는 거 정도라면야. 대신 수학 숙제는 네 힘으로 해.”

“뭐? 그런 게 어디 있어! 류제, 이 잔인한 놈. 쩨쩨. 치사빤스에 밴댕이 소갈딱지!”

“뭐라고? 잘 안 들려~”

류제가 이번엔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가겠다며 귀를 막고 아아 안 들리는 척을 했다. 매번 제각각 변명을 대며 숙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베끼면 실력이 하나도 안 늘잖아. 숙제도 저런 열정적인 눈으로 하면 좀 좋아.

“걱정 마, 렌 군! 내가 보여 줄게. 지금 수학 숙제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유네, 다 들리거든?”

대신 숙제를 보여 준다는 말에 막았던 귀를 푼 류제가 자기 몰래 속삭이던 유네를 찌릿 노려보았다. 착한 유네의 말에 솔깃했다가 곧바로 류제에게 저지당하자 재경이 너무하다며 입이 한가득 나왔다.

“거짓말쟁이. 안 들린다면서. 야, 유네 말마따나 지금 수학 숙제가 중요하냐? 평가 점수가 걸린 체육대회가 중요하지.”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체육대회 연습 끝에 수학 숙제를 스스로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자, 기간트리카 연습한다며? 늦기 전에 연습장으로 가자.”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재경이 축 늘어져 기운 빠지는 걸음을 걸었다. 누가 마왕의 영혼 아니랄까 봐 숙제에 한해선 매정할 정도로 사악한 류제는 못된 말만 해댔다. 하지만 착한 유네는 어떻게 해서든 나한테 수학 숙제를 보여 줄 거다.

재경이 슬쩍 눈치를 봐서 유네한테만 쓰는 숙제용 수신호를 보냈다. 유네가 몰래 OK 사인을 주자 재경과 유네가 좋다고 하이 파이브를 했다.

가방을 마저 챙기다가 그 수상쩍은 커뮤니케이션을 목격한 류제가 앞머리로 가린 눈으로 두 사람을 흘겼다.

“또 둘이 작당했지?”

“아…아니? 아닌데? 류…류제 군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난 잘 모…모르겠어.”

“맞아, 이 의심병 말기 환자야. 작당 같은 거 안 했거든요~”

재경이 비열한 표정으로 비아냥거리자 심기가 거슬린 류제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또 둘이서 모르는 척 짜고 친다. 류제는 매번 숙제할 때마다 자기만 나쁜 놈 된다고 토라졌다.

이런 악역 취급이 너무해서 그네들이 하던 말대로 진짜 나쁜 놈이 되기로 결심한 류제는 유네와 재경을 상대로 꽤나 진지하게 기간트리카를 연습시켜 주었다. 아니, 완전 가지고 놀아주었다.

메다꽂고, 던지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눌러서 제압하고, 발로 차고, 신장 차이를 이용해 팔을 쭉 뻗어 유네와 재경의 얼굴을 양손으로 동시에 막는 기행을 펼쳤지만 두 사람 다 그 상태로 열심히 주먹질을 해도 류제의 기간트리카 근처도 닿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덤볐다가 족족 농락당하고 실패하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두 사람은 절망한 포즈로 잠시 이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 그들의 옆에서 지친 숨도 내쉬지 않는 류제가 벌써 포기냐며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섰다.

“어서 일어나. 토너먼트에서 1승은 거둔다며? 이래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이 악마…….”

“나는 의심병 말기 환자에 쩨쩨하고 치사한 데다 밴댕이 소갈딱지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라서 잘 모르겠다.”

“류제 군… 내가 잘못했어. 도저히 못하겠어.”

벌써 두 시간째. 1승을 하겠다며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매 날갯죽지처럼 뚝뚝 부러지고 있었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단 한 대도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은 류제가 어디 계속해 보라며 활짝 웃었다.

이 사디스트. 마왕의 영혼 같으니라고! 재경은 더 이상 못 해먹겠다며 장갑을 해제시키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 번만이라도 이기게 해주면 어디 덧나나!”

“렌한테 승리는 중요한 의미잖아? 편법은 좋지 않아.”

“편법이 아니라 류제 군이 너무할 정도로 강한 거라구. 도저히 못 이기겠어. 질 거야, 렌 군. 우린 질 거라고. 예선전에서 한 대도 못 때리고 질 게 분명해… 으아앙.”

유네도 몸과 마음이 힘들어서 재경의 옆에 주저앉았다. 손가락으로 슬렉터 어딘가를 꾹꾹 누르니 유네의 다리 측면을 따라 만들어진 외골격이 분리되고 발과 무릎, 허리에 달린 부스터가 접혀 사라졌다.

머리에 블루투스 헤드셋처럼 생긴 프로텍터도 스르르 말려 들어가며 소실되었다. 가슴팍의 보호대와 관절 부분에 있는 보호대도 마찬가지다.

답답할 정도로 외부와 격리되는 군용 기간트리카와는 다르게 머리는 물론 전신을 완전히 덮지 않는 학생용 기간트리카는 통풍이 잘돼서 지금처럼 지치고 더울 때만큼은 장점이 있었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그래, 포기다, 포기! 젠장. 내가 너 나중에 한 번은 꼭 이긴다. 두고 봐라.”

“기대할게, 하하하. 언제쯤일까~”

“류제 군은 치사하게 정말 이럴 때만 사악해.”

“사악하다니. 이기고 싶다고 해서 도와주는 거잖아. 그럼 토너먼트 연습은 오늘로 끝이야? 안 도와줘도 돼?”

“시꺼! 내일도 할 거야!”

“뭐어? 렌 군, 진심이야?”

“그럼 진심이지, 거짓말이겠냐?”

재경이 이대로 질 수 없다며 기어코 지친 다리를 일으켰다. 기간트리카 대결을 연습하는 이유는 토너먼트를 준비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혹시 모를 중간 보스와의 대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 주 목요일에 체육대회가 끝나고 금요일부터 수요일까지가 가정의 달 연휴인데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거의 다 고향으로 돌아간 틈을 타 그 정신 나간 또라이가 학교에 침입해 온단 말이지.

그때 학교에 있을 류제와 미나, 세라 쌤 그리고 스토리엔 없겠지만 나까지 더하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거다.

미나랑 그 마족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데다 중간 보스 스토리에서도 미나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니 배신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내게는 특훈만이 살길이다!”

“에에… 진짜로?”

류제와 대결하고 나서 갈대처럼 부러진 자존심 때문에 금방 의욕이 죽은 유네는 싫다며 머리를 무릎에 박았다. 재경은 약한 소리 하지 말라며 유네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그런고로 류제, 기숙사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부탁해.”

“진짜? 안 한다며.”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하려고 했던 류제가 의외라며 눈을 말똥거렸다. 아까 포기했다고 하지 않았나. 본받을 만한 근성이 만족스러워서 활짝 웃은 류제는 역시 렌이라며 칭찬했다. 그가 어디 다시 덤벼보라고 손짓을 했다.

재경이 맞받아쳐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자 유네는 이제 너무 지치고 배가 고파서 손 하나 까딱하기도 싫었지만 칭얼거리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뭐, 결과는 말 안 해도 뻔하게 재경과 유네의 대패였으나 그들의 끈기와 노력만큼은 높게 사주도록 하자.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지친 몸으로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재경은 쉴 틈도 없이 빈터에서 류제에게 배구 리시브를 배웠다.

어설픈 배구 연습이 끝나고 녹초가 된 재경과 목욕을 즐긴 류제는 그대로 잠이 들려는 렌을 억지로 깨워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충만한 하루를 보냈기에 그대로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류제는 어림도 없다며 재경의 앞에 수학 숙제를 펼쳐놓았다. 치사하게 유네가 수학 숙제를 보여 주지 못하도록 옆에서 눈을 부라리며 감시하는 건 덤이다. 결국 재경은 퀭한 눈으로 수학 문제를 깨작깨작 스스로 풀어야 했다.

다음 날도 류제는 잠도 없는지 강제로 수학 숙제를 하느라 늦게 잔 재경을 새벽같이 이끌고 아침 기상 운동을 하러 활기차게 움직였다.

헛둘, 헛둘. 기숙사 사감 세라 밀로니를 필두로 기숙사 A동 학생들이 운동장을 돌았다. 잠에 취한 재경이 하마처럼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스트레칭을 겸한 마무리 운동 후에 오랜만에 달리기 연습을 한다고 간단한 100미터 트랙을 만든 재경이 류제에게 시간 측정을 부탁했다.

“제자리 준비― 출발!”

신호와 함께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에서 땅을 박찬 재경이 급조한 트랙을 따라 전력 질주를 했다.

달리기가 자신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구경을 하던 학생들도 감탄을 내뱉을 만큼 재경은 정말 빨랐다.

재경이 이 세계에 와서 전력으로 달려본 적이 얼마 없으니 그를 쳐다보는 눈들이 이제야 비로소 그 빠르기를 실감했다.

“레…렌 군, 대단해!”

“몇 초야?”

“어… 13초 01.”

“으아아! 역시 안 달리니까 속도가 줄었잖아. 젠장, 이래선 안 돼. 달리기도 특훈이다.”

승리를 갈망하는 재경이 아자! 하고 하늘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저게 준 거라고? 기숙사 B동 학생들과 아침 운동을 하다가 옆에서 우연히 그 소리를 들은 미나가 울컥했다.

아무리 인간의 육체를 흉내 내고 있다지만 나는 마족이야. 마족의 우월한 신체 능력이 그깟 인간한테 뒤처질 리가 없잖아.

그녀가 이를 바득바득 가는 것을 보니 재경의 투지는 어째 경쟁심을 불태우는 연쇄 작용이 있나 보다.

아침부터 달리기로 기를 빼는 바람에 배가 고파 허겁지겁 아침을 먹고 먼저 등교를 한 재경은 류제와 함께 남자 청 팀 구기 대회 연습을 위해 강당으로 모여 연습 일정과 포지션을 정했다.

배구를 할 줄 모르는 재경은 한탄이 나올 정도로 리시브가 개똥망이기 때문에 그 체력으로 공격이나 하라고 윙 스파이커 자리를 맡았고, 류제는 키가 크기 때문에 블록 위주의 수비와 마찬가지로 스파이커를 할 것 같다.

포지션도 정해졌겠다, 아침 내내 리시브 연습한다고 죽어라 공을 받고 공을 때린 재경은 피곤해서 수업 시간 내내 꾸벅꾸벅 졸다가 체육대회에 정신이 팔려서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수학 선생에게 된통 혼이 났다.

점심시간에는 류제가 청 팀끼리 농구 연습을 하는 것을 질투의 눈으로 흘기며 그 옆에서 류제를 제외한 배구 팀과 리시브 연습을 했다.

농구장 저편에서는 여학생들이 소문의 류제를 보러 왔다고 쓸데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인기 아이돌이라도 보는 듯한 비명 소리에 재경은 질투가 솟았다. 평정심이 흔들리니 리시브한 공도 마음처럼 뜨지 않았다.

“제대로 봐. 또 공이 이상한 방향으로 갔잖아.”

“어떻게 사람이 한 번에 잘하냐? 좀 실수할 수도 있지!”

“류제는 몇 번 하더니 금방 잘하던데.”

“야, 비교해도 하필 류제냐? 비교할 걸 비교해!”

재경이 못 해먹겠다며 리시브 받던 공을 강스파이크로 내려쳤다. 그와 동시에 류제가 농구 골대에 시원하게 덩크슛을 넣었다. 여학생들이 류제를 향해 멋지다며 환호했다. 재경은 못 들어 주겠다며 여학생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멋지면 너네도 가서 농구 연습이나 하든가! 연습 방해되니까 저리 가. 망할!”

“꺄아악. 못난이 인형이 괴롭힌다!”

“뭐래. 8반 공식 바보 렌 지미 주제에. 우리 청 팀 에이스 류제 발목이나 잡지 마.”

구경 온 여학생들은 재경의 으름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혀를 내밀거나 쉬파리 쫓아내듯 손을 내젓고 류제를 구경하기 일쑤다.

성비가 심각하게 엇나간 학교에 따뜻한 봄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이성이 고팠던 그들은 능력이고 얼굴이고 학교 최정상인 류제가 농구를 한다는 눈 호강 시간이 몹시 소중했다.

“치잇!”

류제가 인기가 많아지자 질투에 눈이 먼 재경이 날아오는 공을 짜증스럽게 때리려다가 안면으로 화려하게 리시브를 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어제처럼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또다시 배구 연습, 아침에는 달리기 연습. 배구, 기간트리카, 달리기, 달리기, 배구…….

매일매일 정신 나간 강도로 몸을 움직인 재경은 체육대회 오기도 전에 몸살이 날 것 같았지만 토너먼트에서 한 번이라도 이기겠다는 근성 하나만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하교 시간이 훨씬 지난 노을 진 운동장에서는 체육대회 연습이 한창이었다. 늘 모이던 멤버에서 오늘은 한 사람이 빠져 기간트리카 연습은 류제와 재경 둘뿐이다.

유네는 응원 팀의 회의가 있다고 도망가서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끝났을 텐데 안 오는 걸 보면 하기 싫어서 땡땡이를 치는 것이 분명했다.

류제가 기간트리카 대결을 연이어 하느라 지쳐 주저앉은 재경에게 음료수를 한 캔 뽑아 던져주었다. 재경이 날쌔게 시원한 음료수를 받아 뚜껑을 땄다.

“감사요.”

“괜찮아?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너 좀 잘났다고 나 무시하지 마라.”

맨날 무리하다가 다치니까 그렇지. 재경의 핀잔이 류제는 억울했다. 저래놓고 저녁 먹고 리시브 연습하면 완전 뻗어서 잔다. 아침에는 죽어라 깨워도 잘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젠체하기는.

“힘들면 오늘은 슬슬 마무리할까?”

“아니, 한 번 더 해. 유네가 없으니까 뭔가 집중이 더 잘되는 거 같아.”

“…그거 유네 앞에서는 말하지 마.”

한 번 더 붙는다는 말에 류제가 다시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솔직히 렌이랑 붙을 때는 기간트리카는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진짜 안 한 채로 하면 엄청 상처받겠지?

라고 눈을 굴리는 것이 참 가증스럽다.

“잠깐. 거기, 바보 두 사람. 나도 좀 끼워줘.”

“비키?”

언제나 멀리서 그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비키가 오늘만큼은 류제에게 끼어들었다. 볼 때마다 렌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류제에게 당하고만 있는 것이 배알 꼴렸던 그녀가 보다 못해 나선 것이다.

“류제, 이 가르치는 재주라곤 개미 눈곱만치도 없는 놈아. 무턱대고 덤비라 하지 말고 대결에서 머리 쓰는 법을 알려 줘야지.”

“머리 쓰는 거? 하지만 렌은 머리가―”

“뭐야? 야, 나도 머리 쓰고 있거든?!”

쓰라는 머리는 안 쓰고 저돌적으로 덤벼들기만 한다는 뉘앙스에 재경이 지레 찔려서 분개했다. 그러나 비키는 그런 변명은 안 통한다며 잘한 것 없는 두 사람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공중전도 못하는 주제에 주변 지형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바보. 토너먼트에서는 기간트리카끼리 부딪치는 게 능사가 아니거든? 어빌리티도 불명이면서 앞뒤 안 가리고 덤비지 말고 전략을 짜야지. 류제 넌 그런 걸 알려주질 못할망정 매번 애 기를 죽여 놓고 똑같이 굴면 어떻게 해? 그건 나라도 풀 죽겠네. 눈높이에 맞춰줘야 할 거 아냐!”

“비키, 너 보고 있었어? 언제부터?”

“하…하교할 때 어쩔 수 없이 본 거야. 저리 비켜, 이 무능한 류제 같으니. 내가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 렌하고 같이 덤벼 봐.”

“뭐어? 아무리 요즘 비키 네가 날 이긴 전적이 많다지만 그건 조금…….”

“대신 렌처럼 어빌리티 쓰지 마. 네가 감정이입을 해야 렌한테 더 잘 알려 주겠지.”

촌철살인을 한 비키가 류제의 방식이 웃기지도 않는다며 가방을 던져놓았다. 보다 못해 참견한다는 말이 사실인지 작정하고 와서 옷도 심지어 체육복이다.

“기간트리카, 장갑!”

그녀가 외치자 슬렉터에서 외골격을 만들어 그녀의 관절과 치명상의 위험이 있는 부분을 보호했다.

고정된 허리의 엔진에는 작은 날개와 부스터가 철컥, 아래로 내려온다. 머리에는 프로텍터가 부착되어 낮게 기동하는 소리를 내었다.

붉은 포니테일 머리칼을 시원한 바람과 함께 휘날린 그녀는 어디 실력을 보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까딱였다.

“정말 괜찮겠어?”

“덤비기나 해.”

문답 무용으로 비키가 뚜둑, 목을 꺾었다. 비키는 마땅한 공격 어빌리티 없이 어빌리터에게 덤비는 건 어빌리터끼리 싸우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류제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지만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숨겨둔 필살기 하나 없이 거대한 적에게 맨몸으로 덤비는 것과 같았다. 방심시킬 기회도, 그로 인한 승리의 이점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다.

특히나 ‘힐링’, ‘분석’, ‘탐색’, ‘방호’ 등 보조 계열의 어빌리티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유로 제일 먼저 적의 타깃이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래서 세라 선생님께서도 보조를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도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렌 지미는 어빌리티를 모르지만 입장은 보조 계열의 어빌리터들과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그네들보다 근접전에서 뛰어나다는 것이 렌 지미의 장점이다.

그 장점을 류제 신리 저 멍텅구리가 힘으로 꺾어서 죽여 놓고 있잖아.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해서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니까.

학기 초 큰 다툼 이후 렌과 화해하고 나서부터 렌의 서투른 기간트리카 컨트롤에 관해 은근슬쩍 조언해 주던 비키는 재경의 성장을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셀로니아 가문의 부흥을 위해 바쁜 와중에도 내가 힘들여서 계속 신경 써주고 있었는데 저 변태 바보 류제가 전부 망쳐놓았다. 렌도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실실거렸다.

“드디어 비키와 재대결인가. 헤헤, 내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보여 주지. 기대하라고, 비키~”

“어빌리티를 쓰지 않고… 흠. 간다!”

“코를 납작하게 해주지.”

덤비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비키의 신호를 기점으로 류제와 재경이 동시에 돌진했다.

어빌리티를 쓰지 않고 대결하는 것은 처음이라 류제는 저도 모르게 어빌리티를 쓰려는 주먹을 의식하며 비키에게 공격을 가했다.

‘강화’ 어빌리티 없이 적을 공격하는 것에 있어서 어디까지 힘을 줘야 하는지 가늠하기 헷갈렸던 류제가 섣불리 공격했다가 비키에게 쉽게 주먹을 봉쇄당하고 ‘화염’ 어빌리티로 역공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불꽃이 바로 눈앞에서 등장하자 주춤한 류제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기 전에 비키에게 손이 잡혀 있어 뺄 수가 없었다.

그때 능숙하게 사각지대에서 등장한 재경이 비키의 얼굴에 발차기를 날렸다. 놀란 비키의 손에 힘이 풀렸고 류제는 간신히 비키의 화염 공격을 피했다.

젠장, 어빌리티를 안 쓰니까 도통 어디까지 공격을 맞아줄 수 있는지 모르겠네. 프로텍터 때문에 이 정도의 공격은 먹혀 들어가질 않아 답답하다. 렌은 항상 이런 기분을 맛보는 건가?

류제의 생각을 읽은 비키가 한쪽 입꼬리로만 웃으며 도발했다.

“어렵지?”

“아니, 할 만해.”

“뭐 하는 거야. 류제 이 자식 엄청 빼네. 그 정도 불꽃은 안 위험하거든? 겁쟁이냐?”

젠체하던 류제가 겁쟁이 아니라며 버럭 발뺌했다.

다른 친구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격차로 이겨왔던 류제와는 다르게 다양한 어빌리티를 가진 친구들에게 하도 많이 부딪히고, 맞아보고, 자빠졌던 재경은 어느 정도의 공격까지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맞아줄 수 있는지를 무의식중으로 쌓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재경의 눈에는 어빌리티를 봉인했다고는 하나 저 정도의 공격에 몸을 사리는 류제가 겁쟁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빌리티를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려.”

“이제 내 기분을 알겠냐, 이 잘난 척쟁이야!”

“잘난 척 안 했거든?”

그냥 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류제는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회피했다.

그 틈에 비키가 커다란 화염구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달려들었다.

“한눈팔 정신이 있나 보지?”

“우앗!”

이건 딱 봐도 맞으면 위험한 수준이라 재경과 류제가 동시에 그 자리에서 빠르게 피했다. 마그마처럼 뜨거운 화염구는 땅을 뜨겁게 달궈 시뻘겋게 녹였다.

뜨거워서 땅에 발을 댈 수 없었던 재경이 부스터로 아주 공중으로 떴다. 지상으로부터 1m, 재경이 현재 컨트롤 할 수 있는 공중전 최대 높이였다.

이 행위가 류제처럼 고작 사람을 패배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비키가 제 행동에 설명을 덧붙였다.

“불은 흙과 상성이 좋아. 이게 바로 지형을 이용한다는 의미다, 이 바보들아.”

점점 식고 있는 모랫바닥은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아 비키가 서있는 모습이 보다 압도적이게 보였다.

강화 어빌리티로 몸을 보호하면 저런 공격은 쉽게 막을 수 있는데. 재경을 따라 공중에 뜬 류제는 파훼법을 시도할 수가 없어 더 분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작전을 짜기 위해 류제가 재경에게로 다가가는데 재경이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셈을 하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비키는 저 화염구 때문에 웬만해선 근접전으로 다가갈 수가 없는데. 이제 두 발인가?”

“두 발?”

“그래, 두 발.”

재경이 비키가 사용한 화염구의 개수를 말해 주었다. 류제는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경은 설마 비키랑 그만큼 싸웠으면서 아직도 모르냐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비키는 화염구 공격을 열 번을 하면 1분간 어빌리티 사용을 못 하잖아?”

“뭐? 정말?”

“설마 지금까지 모르고 싸운 거야?”

처음 듣는다는 류제의 순진한 얼굴에 재경이 경악해서 되물었다.

전혀 몰랐다. 류제는 그런 적이 있었나 기억을 떠올리며 뒤따르는 비키의 공격을 피해 더 높게 올라갔다.

이걸로 세 번째다. 렌의 말이 사실이라면 비키에게 남은 화염구는 총 일곱 발이다. 아니, 진짜 맞기는 한 거야? 나도 모르는 걸 렌은 어떻게 아는데?

“우악, 류제, 이 배신자!”

고소공포증이 있는 재경에게 공중으로 도망가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 똑같았다.

재경은 뭐가 되었건 공중보다는 낫겠다 싶어서, 에라 모르겠다 닥치는 대로 돌격해서 아슬아슬하게 비키가 발사하는 화염 공격을 피했다.

그가 접근하자 비키가 재경과 똑같은 스피드로 뒤로 물러났다. 역시 많이 늘었어. 3월 달에는 하나도 못 피했는데.

넷, 다섯, 여섯, 일곱. 이제 세 발 남았다. 뒤로 물러서며 공격을 계속하던 비키를 따라잡은 재경이 옆을 힐끗 쳐다보았다. 시선 공격에 낚인 비키가 한눈팔린 틈을 타 재경이 비키의 팔꿈치를 꽉 붙잡았다. 어빌리티는 없지만 기간트리카가 더해진 순수 근력으로 따지자면 재경이 더 우위였다.

비키가 놓으라고 여덟 번째 화염구를 발사하려는 찰나 류제가 기습 공격으로 공중에서 부스터를 아래로 향하며 비키에게 발을 내리찍었다.

꽤나 높은 곳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졌기에 위험하다 판단한 비키가 그 화염구를 자신의 몸 주변 반경으로 폭탄처럼 넓게 퍼트렸다.

“류제, 이 짜식 뭐 하는 거야!”

“앗 뜨거!”

어찌어찌 둘이서 한 합동 공격이 먹혀들어 간 것 같은데 화염 공격에 눈이 먼 류제가 공격한 것은 비키가 아니라 비키의 손에 밀쳐진 재경이었다.

류제에게 맞고 운동장을 데굴데굴 굴러 미끄러진 재경과는 달리 비키는 상처 하나 없이 유유히 뜨겁게 달궈진 땅덩이 안에서 팔짱을 끼었다.

공격 미스다. 류제가 그의 공격 때문에 땅에 처박힌 재경을 살피러 달려갔다.

“렌, 미안. 괜찮아?”

“너 같으면 괜찮겠냐?!”

“어때, 어빌리티가 없으니까 생각처럼 안 되지?”

“그야 그건 당연한 거잖아.”

“당연해서 날 공격한 거냐?”

프로텍터로 간신히 부상을 면한 재경이 류제가 일으켜 주는 손을 거칠게 붙잡고 일어났다.

공격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아군을 공격하면 무슨 소용이야. 재경이 무능한 류제 때문에 열받아서 일어나자마자 류제의 정강이를 팍 찼다.

맞은 부위를 슬쩍 쓰다듬은 류제가 괜히 따졌다.

“아까 건 내 잘못보다는 비키가 잘 피한 거잖아. 그럼 넌 이 상황에서 어떻게 공격할 건데?”

“맞아, 그걸 생각해야지. 너희 둘 다 그것도 없이 무턱대고 덤비지 좀 마. 전략을 짜보라고. 여기서 어떻게 할 건데?”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친 비키가 그들에게 충고했다.

“잠깐, 유도 심문이야? 그걸 비키 너한테 말해 주면 어떻게 이겨?”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뭐야, 류제, 너 무슨 생각 있었어?”

재경의 얼굴이 호기심이 어렸다. 류제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비키의 도발을 받아준 것이기 때문에 재경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애써 못 본 척하며 말을 돌렸다.

“그냥… 아, 비키 쿨타임 이야기는 진짜야?”

류제가 비키가 듣지 못하도록 속삭였다. 재경은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똑같이 속닥속닥 류제에게 답했다.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으면서 비키랑 싸울 수 있었다는 것도 놀랍다.”

“으윽… 너는 어떻게 알았는데?”

“싸우다 보면 알지 뭐. 그게 아니라면 왜 비키가 애초부터 화염 난사 안 하겠냐?”

보기드문 우문현답에 류제가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류제는 비키가 화염구 10발을 다 쓰기도 전에 승부를 내거나 승부가 나거나 했으니 비키가 화염구 10발 이상 쓰게 만들 정도로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재경이 아는 정보를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류제가 말하는 것에 뭔가 있는 것 같아 기대했더니 생각보다 별생각 없었다. 어빌리티 못 쓴다고 도움 하나 안 되긴.

재경이 툴툴거리던 찰나 잠시 아까 전 상황에 더해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류제에게 손짓을 했다.

“…야, 나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뭔데?”

“아까 네가 했던 공중 공격에서…….”

속닥속닥. 둘이서 뭔가를 생각하고 이용할 모양새에 비키가 저 바보들이 드디어 머리를 굴린다고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깨닫는 게 늦잖아. 사람 귀찮게 하기는.

“진짜?”

“일단 시도는 해보자는 거지! 할 수 있어? 못 한다고 하지 마라.”

“할 수 있기는… 한데 위험하지 않아?”

“다치면 세라 쌤한테 고쳐달라 하면 되지. 별 게 다 걱정이다.”

재경이 문제 있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 발상이 마음에 안 드는 건데. 류제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재경의 자신 있는 눈빛에 져서 결국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자존심 뚝뚝 부러뜨린 것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서 재경의 전술에 따박따박 반박하기 미안했다.

유네는 워낙 몸치고 ‘바람’ 어빌리티로 공격보다는 보조역만 하려고 해서 재경이 말해 준 작전을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기간트리카를 잘 다루는 류제한테 맡긴다면 안심이다. 재경은 어디 한번 이 작전이 통하는지 해보자며 류제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자, 다시 간다!”

“좋았어.”

재경이 오른쪽으로 꺾으며 달려가자 류제도 왼쪽으로 꺾어 비키에게 돌진했다.

“뭔가 생각하는가 했더니. 똑같은 수엔 원숭이도 안 당한다고!”

그들이 무슨 작전을 펼칠지 모르기 때문에 비키가 빠르게 물러났다.

재경이 달려오는 위치는 파악했는데 왼쪽으로 간 류제가 보이지 않자 비키는 힐끗 위를 쳐다보았다. 류제가 내 위를 선점하고 렌이 나를 붙잡으려고 하는 아까와 같은 포메이션이다.

자신 있는 근접전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비키는 아까처럼 화염구를 난사해서 재경을 방해할 수도 없고 공중으로 올라가자니 류제가 방해할 것 같아 아주 잠깐 망설였다.

쿨타임만 없었어도 머뭇거리지 않았을 그 찰나의 순간에 재경이 아까처럼 비키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여기까지는 아까와 똑같다.

비키는 오로지 손에서만 화염구를 생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근접전에서 손의 위치만 엇나가게 한다면 화염구에 맞을 확률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이거 놔!”

발사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는 화염구로 재경을 위협한 비키가 그걸로 그의 기간트리카 기체를 짓눌렀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재경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승리를 바라는 재경이 온몸으로 비키의 손을 저지했다. 그 과정에서 프로텍터에 차마 보호되지 못한 재경의 팔이 뜨겁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뜨거!”

살이 타는 냄새에 놀란 비키가 서둘러 화염구를 거두었다가 위에서 류제가 내려찍기 공격을 하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서 재경을 뿌리치려고 했다.

재경은 손을 내치려고 하는 비키에게 달라붙어 류제에게 역전의 기회를 주었다.

비키가 안 되겠다 싶어 커다란 화염구를 주변 일대에 폭발시켰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재경은 버티지 못하고 붙잡았던 비키의 손을 놓쳤다.

분명 류제가 내려찍기로 공격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퍼져나가는 화염 사이로는 기간트리카가 고속 이동할 때 느껴지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격에 실패했나? 라고 생각한 그때 비키에게 검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비키는 단연 류제가 공격했을 줄 알고 가볍게 피하려다가 순식간에 자신을 옭아매는 감각에 잘못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류제가 아니라 렌이 상대를 제압할 때 자주 쓰는 기술이었다.

“윽!”

아직 이 기술의 파훼법을 연구하지 못한 비키는 뒤로 향한 허리 쪽 부스터를 앞으로 바꾸어 렌 지미를 떨구려고 했다.

그때 등장한 류제가 이번엔 뒤에서 비키를 옭아맸다. 그 틈을 타 재경이 비키를 자빠트려 움직일 수 없도록 손을 뒤로 꺾어 제압에 성공했다.

“하하, 성공했다!”

“…류제가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깜박 속았네.”

“그렇게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거지. 좋은 공부가 되었다구, 비키.”

“흥, 알았으면 내려와. 언제까지 숙녀 몸 위에 올라가 있을 셈이야?”

“뭐어? 야, 이건 그냥 승부―”

라고! 뒤늦게 당황한 재경이 손을 놓고 뒤로 바퀴벌레처럼 사샤샥 물러났다. 퉁명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한 비키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어빌리티 없이 싸우니까 어때?”

“완전 눈치싸움이구나 싶네.”

“그지? 류제 너도 드디어 알아줬구나! 아무도 공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나름 열심히 싸우고 있는 거라고. 내가 맨날 지는 건 그냥 너네가 너무 넘사벽이라 그런 거야!”

류제가 재경이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는지 납득해 주었다. 드디어 악마 류제에게 패대기 당하지 않아도 되는 재경이 정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 주는 사람 얼마 없었는데 가장 친한 류제가 이해해 주니 이제 연습할 때 무조건 힘으로만 꺾으려고 안 할지도 모른다는 게 제일 좋았다.

비키는 아직 멀었다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나 같았으면 너처럼 몸을 던져 다치는 것보단 눈에 흙먼지 같은 걸로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거야. 거기에 공중전을 못하는 바보 때문에 탁 트인 장소라는 점도 이용 못 하다니. 아직도 멀었어.”

“야, 그 정도면 선방한 거지. 뭘 더 바라냐? 그리고 흙먼지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뭐? 다쳤어?”

재경이 무리해서 비키를 저지하느라 팔에 화상을 입었다는 것을 몰랐던 류제가 렌의 몸을 훑었다. 안 들켰을 거라고 생각하고 다친 팔을 몰래 뒤로 감추고 있던 재경이 지레 찔려서 몸을 움찔거렸다.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한 재경이 이게 뭐 별일이냐며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사나이가 말야, 싸우다 보면 이 정도는 다칠 수 있지.”

“그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암만 연습이라지만 비키, 너도 너무 심한 거 아냐?”

“그 상황에서 어떻게 적당히 해? 나도 너한테 큰일 나기 직전이었는데.”

“하지만……. 이리 손 줘!”

재경이 주춤하자 류제가 억지로 숨긴 손을 뺐다.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 보니 팔 일부분이 살이 타서 시뻘겋게 익어있었다. 진피까지 손상이 미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화가 치밀었다.

류제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또 징글징글한 잔소리를 들을 징조에 재경이 망했다고 식은땀을 흘렸다. 예상이 맞았는지 곧 류제에게서 호랑이 호통치는 소리가 버럭 튀어나왔다.

“뭐가 별거 아냐! 심하게 다쳤잖아!”

“우이씨. 이겼으면 장땡이지. 시시콜콜 따지지 마.”

“지금 이기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데?”

“시끄러워! 둘 다 싸우지 말고 더 덧나기 전에 빨리 세라 선생님께 가자.”

“그래! 우리한텐 세라 쌤이 있잖아. 류제 멍청아!”

“렌, 너 자꾸…….”

마음에 안 들어서 얼굴을 왕창 구기던 류제가 식식거리다가 결국 열불 터지는 속내를 참고 이를 악물었다. 기숙사로 가기 위해 류제가 커다란 돌계단 근처에 두었던 자신의 가방과 렌의 가방을 들었다. 비키도 옆에 두었던 제 가방을 들었다.

류제는 팔에 난 화상에 재경이 탈나기 전에 세라가 있을 A동 사감실로 향했다. 재경은 괜히 미안해서 중얼중얼 변명하며 류제에게 질질 끌려갔다. 비키도 그 뒤를 따라 종종걸음을 걸었다.

재경과 류제가 비키와 기간트리카 대결 연습을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모습을 지켜보던 자는 모두 세 명이었다.

하굣길 둔덕, 조회대 쪽 대로, 학교 옥상. 각기 다른 방향, 다른 시선에서 바라보는 류제와 렌, 그리고 비키의 모습이 있었다.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그녀의 시선으로 보는 그들은 친구들과 행복을 나누는 아름다운 청춘의 현장처럼 보였다. 자신은 누릴 수가 없는 순수한 교우 관계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대화가 니냐롯트는 부러웠다.

멀리서 보는 것이지만 오늘도 렌 지미는 시끄럽다. 렌 지미는 아둔하며 형편없는 기간트리카 조종 실력을 가졌지만 의외로 요리도 잘하고 싹싹한 편이다. 가끔 미련할 정도로 용기 있는 행동을 할 때도 있고.

어디든지 소란을 몰고 다니는 시끄러운 아이지만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이란 저자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차분하고 매사에 무관심한 류제 신리. 보기와는 다르게 상냥한 자다. 내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더니 잘못을 한 내게 도리어 선물을 주지 않았나. 그의 넓은 마음은 천성인지 주변의 탓인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전보다 그와 거리가 가까워진 것 같아 기쁘다. 류제 신리를 싫어하는 루이나에겐 미안한 일이다.

십수 년 전 마족의 셀로니아 영지 침략으로 멸족한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느라 신경이 날카로웠던 비키 셀로니아는 요즘 들어 성격이 많이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가시나무 같던 비키 셀로니아가 저렇게 바뀌기 시작한 것이 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였으니 누군가가 그녀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이 틀림없다.

그녀를 바꾸는 자는 누구였을까. 서로 티격거리는 렌 지미? 혹은 모두에게 친절하나 방관자적인 성격에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류제 신리?

누가 되었건 그녀는 학교생활을 하며 좋은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 거겠지.

둔덕에서 가방을 든 채 체육대회를 위해 기간트리카 연습을 하던 그들을 호기심 있게 살피던 왕녀는 그들이 기숙사로 향하는 것을 보고 평행이동을 하듯 저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들처럼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바마마께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어. 그러면 다시 그 차가운 눈을 거두고 나를 어여뻐 여겨 주실지도 몰라.

내가 기댈 수 없을 정도로 모자라기 때문에 아바마마께서 나를 내치시는 거다. 어마마마께서 그런 식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아바마마께선 너무나 냉혹해지셨으니까.

내가 아바마마께 조금이라도 웃음을 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니냐롯트가 C동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목 그 정반대 편에는 유네가 응원 팀 친구들과 회의를 마치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며 학교를 나섰다.

오늘은 기간트리카 연습을 나가지 않고 응원 팀 친구들과 같이 기숙사로 돌아가던 유네는 운동장 전체에 바락바락 울려대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유네를 따라 다른 응원 팀 친구들도 시선을 향했다.

“앗, 렌하고 류제 아냐? 비키 님도 있어.”

“렌 군하고 류제 군, 같이 기간트리카 연습이라도 했나 봐.”

“하기야 렌 쟤는 엄청 약한 주제에 승부 욕심은 많으니까.”

“아냐~ 약하다고 말하기도 그래. 요즘엔 나도 까딱하면 위험할 정도던데? 근접전 실력이 엄청 늘었어.”

“그래? 나중에 한번 붙어 봐야겠네.”

“그래도 렌 지미는 렌 지미지만~ 하하하! 렌은 우리 귀~여운 유네한테도 지잖아.”

유쾌하게 웃은 그녀들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유네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렌 군 저번에 모의 대결 팀전에서 우리 팀한테 이겼어.”

“그건 팀전이잖아. 개인전은 역시 렌이 불리하겠지.”

척도도 엄청 작은 데다 무려 어빌리티 불명인걸! 흉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들을 꺼내 들던 그녀들은 그래도 렌이 놀리는 맛이 있고 의외로 착한 면이 있다며 칭찬인지 괴롭힘인지 모르겠을 말을 꺼냈다.

“츤데레 수?”

“강아지 공?”

“와안전 취저 아니냐? 으으… 렌이 좀만 더~ 뭐랄까 얼굴이 됐으면 엮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왜 렌은 우리 유네처럼 귀엽지 않은 걸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유네가 자신을 와락 껴안는 친구들의 행동에 당황해서 얼음이 되었다.

것보다 렌 군 오늘 나 없이도 열심히 연습했나 보네. 힘들어서 땡땡이치려고 했던 내 모습이 좀 초라해지는걸. 나도 내일부터는 다시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비키 양하고 어빌리티 콜라보 연습도 해야 하고.

“좋아, 나도 렌 군처럼 열심히 해야지!”

“유네 너도 류제의 오른쪽 자리를 노려보겠다고?”

“류제X유네야?”

“으응? 에헤헤, 따지고 보면 나는 렌 군하고 같은 팀이니까 렌 군의 오른팔을 해야지.”

“어머머, 유네 너무 장하다. 너희들도 암만 그래도 그렇지 본인 앞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마!”

“에이! 진짜도 아니고 그냥 장난인데 뭐.”

그런 말이라니? 그녀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요즘 류제에게 자존심이 뚝뚝 꺾여 힘들었던 유네는 내일부터 마음을 다잡고 다시 기간트리카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유네를 비추고 있는 카메라를 하늘 위로 주욱 올리면 학교 옥상에서 위험하게 난간 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걸터앉아 운동장 전경을 무료하게 응시하는 미나의 모습이 보였다.

미나는 기숙사로 향하는 세 인영을 보며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정체불명의 렌 지미였다.

렌 지미. 어떤 어빌리티를 가진 거지? 꿈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건 분명 정신계 어빌리티와 관련이 클 것이다. 뭐지? 뭐든 저놈에게 지옥을 맛보게 하지 않으면 내 자존심이 절대 용서 못 한다.

두고 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너를 괴롭혀 줄 테니까. 하찮은 인간 주제에 나를 도발한 걸 아주 크게 후회하게 될 거야.

그녀는 바람에 살랑대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복 치마가 아슬아슬하게 바람에 흔들렸다.

구역질 나는 인간들은 그저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보자니 개미 떼 같은 인간들이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들 같았다.

운동장 곳곳에서 연습하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 그녀는 역겹다고 생각하며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옥상에서 사라졌다.

“도―대―체―가! 렌 지미 학생. 이게 몇 번째인가요? 조금은 반성하는가 싶더니 또 다쳐서 돌아오고!”

치료를 위해 세라 밀로니를 찾아 A동 기숙사 사감실을 방문한 세 사람은 선생님의 울화 터진 잔소리에 할 말을 잃고 입만 달싹거렸다.

비키와 류제는 선생님의 박력에 도망치듯 반쯤 뒤로 물러섰지만 재경은 팔을 붙잡힌 채 욕받이 무녀처럼 선생님의 고함을 견뎌야 했다.

“연습하다 다쳤다니까 뭐라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제발 무리하지 말고 몸을 사려주세요. 다른 학생이면 몰라도 렌 학생 당신은 어빌리티를 사용하지 못하잖습니까!”

“하지만 쌤, 그래도 이기려면―”

“예! 이기려면 이 정도의 상처는 아무렇지 않다고요!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이런 식이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몸을 사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실전에서 필요한 법이랍니다! 그리고 비키 학생, 당신도! 아무리 연습이라도 어떻게 친구한테―”

또다시 세라의 지옥과도 같은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재경이 치료받는 내내 귀가 찢어져라 설교를 들은 그들은 무려 한 시간 동안 했던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또 들은 후에야 사감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너무 긴 사설을 듣는 바람에 고장 난 로봇처럼 되어버린 비키와 재경은 3월 달에 겪었던 익숙한 풍경에 질려 사감실에서 나오자마자 서로를 째려보았다.

“네 탓이야.”

“비키, 네 잘못이거든?”

“네가 무리하게 내 손을 잡으니까 그런 거잖아!”

“그럼 어떻게 하냐? 작전대로 하려면 어쩔 수 없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흙먼지를 사용하는 게 나았다고 했지!”

“세라 쌤이 고쳐줄 걸 뻔히 아니까 시도한 거거든? 나도 진짜 위험했으면 안 했어!”

“결국 그래서 세라 선생님께 혼나고도 그런 변명이야?!”

“내 생각엔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는 게 나을 것 같아.”

뒤에서 조용히 있던 류제가 참다못해 팔로 재경의 목을 꽉 조여왔다. 그는 그 상태로 재경을 질질 끌며 A동 5층으로 올라갔다.

“야, 류제! 잠깐, 이거 놓고 말해. 아차, 비키, 잘 들어가. 아니, 내가 다치려고 한 건 아닌데……. 이 할머니 같은 놈아! 또 잔소리 시작이냐?”

고오오. 화가 났다는 오라를 내뿜는 류제와 그에 맞춰 버둥버둥 끌려가는 렌의 모양새를 보아하니 선생님에 이어 방에서 2차전에 들어갈 것 같다.

“…하아아.”

계단을 오르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사감실 앞에 서있던 비키는 상처가 얕아 십년감수했다며 안도했다.

이걸로 류제가 렌 지미를 가르칠 때 뭔가 깨달은 바가 있었으면 좋겠네. 적어도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몸을 던지는 건 안 하는 게 낫다는 건 몇 번이고 강조해 줬으면 좋겠다.

비키는 하여튼 뭘 해도 렌 지미는 렌 지미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주말이 지나고 토너먼트를 준비하던 학생들이 학수고대하던 월요일 아침,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이 찾아왔다.

1, 2, 3학년 포함 총 약 150개의 팀 중 시드를 제외한 120여 개 팀의 예선전을 치러야 하는데 체육대회 당일인 목요일 전까지 수업과 병행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위에서 1교시와 5, 6교시를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으로 배치하라는 통지가 내려왔다.

선생님들은 이에 따라 예선전을 치르는 팀이 아닌 학생들은 자신의 경기가 있을 때까지 반에서 자습하라 공고를 내렸지만 다른 반과 하는 군용 기간트리카 대결에 들뜬 학생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따를 리가 없었다.

교무실 바깥으로 친구들 응원 간다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여학생들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을 하다가 언뜻 고개를 든 세라가 잠시 닫힌 문밖을 쳐다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가 열심히 업무를 보고 있는 책상에는 류제가 수학여행 마지막 날 선물해 준 프리저브드 플라워가 유리병에 둥둥 떠있었다.

“학생들에게는 큰 축제이긴 한가 보네요.”

“맞죠. 우리 같은 일개 교사에게는 높으신 분들이 학교에 찾아오는 부담스러운 행사인데 말이죠. 학생들은 정말이지 순수하다니까요. 어른들의 세계란~”

옆에 앉아있던 다른 교사가 산더미 같은 서류에 질렸다며 푹 늘어졌다. 어제도 야근, 오늘도 야근. 체육대회인 목요일까지 야근 확정이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체육대회는 단순히 제 기량을 뽐내는 즐거운 축제일지도 모르겠지만 행사 준비부터 인력 배치, 스케줄 확인, 보안, 브로슈어 준비부터 인쇄까지. 교사들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그 책임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1교시랑 5교시에 수업이 없는 게 다행이네요. 수업이 있으면 이 일을 어떻게 다 끝내요.”

“그러게요. 밖에서 예선전 심판 맡으신 다른 선생님들은 어떠시겠어요. 그동안 밀려있는 일 생각하면 반송장일걸요.”

“하아… 남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저도 오후에는 양호 선생님과 교대해서 다친 학생들을 봐줘야 해요. 학생들이 무리하게 덤볐다가 크게 부상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며칠 전 비키 셀로니아와 연습 대결을 하다가 화상을 입고 온 렌 지미를 떠올리며 세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선생님이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그게 용감한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

“학생들한테는 특히나 중요한 행사잖아요. 무리를 해서라도 이기고 싶을 때가 있을 텐데 무리할 때는 무리해야죠.”

“그래도… 그러다 정말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저도 고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는데 하물며 신체 부위가 절단이라도 나면…….”

“아, 있었다, 그런 사고. 내 어릴 적 기간트리카가 불안정했을 때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게 다쳤었어. 팔이 절단 나서 큰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해야 하는 바람에 1년간 휴학을 했었는데. 지금은 뭐 하고 지내려나.”

“그렇겠네요. 지금이야 발전된 기간트리카와 프로텍터로 확실하게 보호를 하지만 당시에는 시설이 보다 열악했으니까요. 게다가 ‘힐링 팩터’ 문제도 있고.”

세라, 그녀보다 마흔 살은 더 많은 노년의 선생님이 시퍼렇게 바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S_script 언어를 개발하기 전에는 공격을 막아주는 프로텍터가 명실불부라 학생들끼리 연습으로 대결하는 데에도 제재가 심했다.

하드웨어는 물론 소프트웨어적으로도 불안정해서 부스터가 중도에 터지다 말아 추락해서 뼈가 부러지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부스터가 급발진을 해서 대결을 하던 학생이 건물에 끔찍하게 처박힌 경우도 종종 있었다. 노년의 선생님이 살았던 시대는 그런 사고가 흔했다.

“그래도 마족들에게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학생들이 투지를 불태웠지. 그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에 불과했을 텐데 무섭지도 않았나. 어후, 나도 참. 늙은이처럼 옛날 생각을…….”

“친구들과 가족들을 지키고 싶다는 건 누구나 똑같으니까요. 특히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때는 워낙 하루 만에 마을 하나가 사라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잖습니까.”

“그렇지.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5.22 토벌 전까지 그나마 안전하다던 키아나트리체도 난리도 아니었거든. 셀로니아가 학살 사건도 그때쯤이었나. 마왕이 진작 죽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그 비극을 되풀이할 뻔했어.”

지금은 그 노력 끝에 마족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잖아. 다 우리가 고생한 덕이야. 평화는 행복이야, 암. 아무리 윗분들이 불평해도 말야.

그녀가 호호 웃으며 이제는 정말 마족들의 억압에서 인간들이 승리했다며 기뻐했다. 그러자 옆에서 걱정 많은 선생님 한 명이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하지만 수학여행 때 있었던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지진 사건도 그렇고 아직 마족 측에서 불손한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상부에서 경고했잖아요. 진짜인지 아니면 전처럼 불안함을 조장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맞아요. 그걸로 또 왕궁에서 대대적인 발표를 했다고 들었어요. 사람들이 또다시 불안에 떨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아, 그래도 마족들이 쳐들어오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키아나트리체를 실질적으로 쥐락펴락하는 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어빌리터를 어떤 식으로 취급하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세라는 껍데기만 그럴싸하지 결국 어빌리터들은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병기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금 의식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 그걸 자기 스스로 깨달아서가 아니라 남의 강요에 의해 말하면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 라고 의심이 든다.

“가끔씩은 인류의 위기를 너무 어빌리터들에게만 덧씌우는 기분이 듭니다.”

“그야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이겠지.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인간을 지키겠어?”

노년의 선생님이 병에서 따뜻한 차를 따라 호록 마셨다.

맞는 말이다. 어빌리터가 아니라면 누가 마족에게서 인간을 지킬까. 그러나 그 책임감을 어린 학생들이 느끼기엔 버거운 것이 아니냐는 것이 세라의 생각이었다.

이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자체도 원래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가 강한 기간트리카 병사를 배출해 냈다는 것을 높으신 분께 보여 주기 위한 일종의 보고서였으니까.

마족들이 수그러든 지금, 전통이 아니라면 굳이 필요한 종목일까도 미심쩍다.

“밀로니 선생님네 반도 오늘 예선전에 나서나요?”

무거운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침울해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 주제를 바꿔보고자 동료 선생님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세라가 오늘 누가 나가나 책상에 예쁘게 붙여 놓은 자기 반 예선전 시간표를 살폈다.

“네, 제일 말썽꾼인 학생의 조가 나서는데… 하아, 지금쯤 끝났겠군요. 승패는 상관없이 어디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말만 들어도 누군지 알겠네. 렌 지미 학생 말입니까?”

“아주 유명인이 다 됐군요, 하하.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세라가 어느새 학교 선생님들한테 전부 알려진 이름에 낙담한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세라의 속도 모르고 다른 선생님이 이때다 싶었는지 학교에서 자행되는 렌의 횡포에 험담을 늘어놓고 보았다.

“유망주인 류제 신리, 그 학생과 쌍으로 다니지 않아요? 나라에서 주목하는 학생과 함께 다니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 없지요. 그리고 워낙… 말썽쟁이잖아. 못―생긴 고양이처럼 생겨가지고. 학교를 뒤집어 놓는 말썽이란 말썽을 아주…….”

“공감합니다. 숙제는 매번 다른 사람 것을 베껴서 하나하나 검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니까요. 제 세계사 수업은 늘~ 쪽지 시험 점수가 엉망이에요. 저번에 미노타를 마노티라고 쓴 거 있죠? 열 살짜리 애도 그런 실수는 안 할 거예요.”

“수업 듣기 싫다고 땡땡이를 치러 가지 않나.”

“수업 종 치자마자 급식 먹겠다고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코가 깨지지 않나.”

“친구들하고 큰 소리로 투닥거리기 일쑤고 수업 시간엔 잠만 자고! 나 참, 그래가지고 어디 졸업 후에 군에 들어가서 잘 지내려나. 세라 선생님, 어떻게 좀 해봐요. 관심 병사라도 되면 어떻게 해.”

세라가 선생님들의 단체 민원에 억지로 웃으며 식은땀을 쪽 뺐다.

그래도 렌 학생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평판이 이렇게 갈릴 줄이야. 그녀는 학년이 올라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렌 학생을 보호하며 그를 나무라는 선생님들을 만류했다.

다른 선생님들도 렌이 무조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애정을 가지고 하는 소리였는지 그런 렌 지미가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에 출전했다고 하니 실속 없는 추측을 시도했다.

“그런 문제아가 기간트리카 예선전이라… 결과가 궁금하긴 하네요.”

“설마 이겼을까요?”

“이겼으면 제립학교 대 토픽감인데. 그래도 렌 학생이 요즘에 류제 학생이나 다른 친구들하고 열심히 연습하는 모양이더라고요. 머리 쓰는 것 말고 몸 쓰는 건 아주 열심히 하지.”

“류제 신리 학생과 연습하는 거라면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아요? 1대1 과외처럼 유능한 교사가 직접 가르친 건데 과연 어떻게 됐을까요?”

그 소리에 교무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렌 지미의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예선전 결과에 대해 모락모락 상상했다.

상상이 끝나기도 전에 1학년 교무실 문을 박차고 등장한 교감이 새로운 일감을 가져다주자 그녀들이 부리나케 멈췄던 손을 움직였다.

과연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팀이 편성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기간트리카를 연습했던 재경이 그렇게 고대하던 1승을 거두었을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학교 밖으로 나와 운동장의 한편에 있는 토너먼트 예선전 경기장으로 가보자.

철망이 쳐진 경기장 일대 응원석에는 응원하러 온 친구들이 환호하고 있고, 방금 막 경기장에서 나온 팀이 승패가 갈린 채 다른 출구로 나가는 중이었다. 거기엔 재경의 팀도 있었다.

“젠자앙. 열심히 했는데!”

“미…미안해애… 렌 군… 흐윽… 내가 더 잘했으면 이겼을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다 질 거라고 예상했잖아? 우린 버리는 카드고. 뭐 그리 과민반응이야.”

4명이서 한 팀인 다른 팀과 다르게 떨거지라 3명이서 한 팀이었던 그들 중 가장 토너먼트에 회의적이었던 팀원이 그게 그리 별일이냐며 시큰둥하게 굴었다.

버퍼 계열 중에 ‘숙살(肅殺―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임)’이라는 살짝 쓰기 애매한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던 그녀였기에 팀 운이 나쁘면 지기 다반사라 승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듯했다.

“평가 점수는 종합 우승으로 따면 돼. 그런고로 난 구기 대회 연습하러 먼저 간다.”

“아, 야! 진짜 가냐?”

“렌 군… 역시 내가 제대로 못 해서… 으흐윽…….”

대결 도중 이따금씩 실수를 했던 유네가 분명 그것 때문에 졌다며 몇 번이고 사과했다. 유유히 떠나는 팀원 여학생을 붙잡으려다가 도리어 유네에게 붙잡혀버린 재경이 쩔쩔매며 늘어나는 티셔츠를 붙잡았다.

재경이 생각하기에 유네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경기 초반부, 재경이 공중전을 못 한다는 약점이 들통나고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을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유네의 바람 어빌리티를 이용해 적 팀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만든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되니 근접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재경 혼자뿐이라 적 팀 4명을 홀로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아주 치명적이었다. 거기서 저지른 유네의 실수는 재경의 지시를 믿고 따른 죄밖에 없었다.

“으허어엉…….”

“돼…됐어, 팀 운이 안 좋았을 뿐이야. 그리고 군용 기간트리카 진짜 답답하잖아. 얼굴도 전부 가려지고, 어색하고. 젠장, 누가 누구고 누가 어떤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지 헷갈리지만 않았으면 내가 이겼어!”

유네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 과정에서 후회를 곱씹은 듯 재경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팔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국 한 명도 리타이어 못 시키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시간을 내서 연습을 도와주던 비키와 류제를 볼 낯이 없었다.

분명 나한테 실망했을 거야. 오늘 응원 팀 애들이 유네 응원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때다 싶어 나한테 한 소리 하겠지. 덕분에 종합 우승에서 멀어졌다고.

“렌!”

멀리서 응원 팀과 같이 응원을 왔던 류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재경은 통쾌한 승리를 기대했을 류제의 반응이 걱정돼 어쩔 줄 몰라 도망갈 곳을 찾다가 유네의 등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류제가 속도를 줄이고 그들의 앞에 멈춰 섰다. 재경이 류제의 안색을 힐끗거리며 물었다.

“…봤어? 엄청 한심했냐?”

“아까웠어. 한 명은 완벽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진짜?”

“아냐, 류제 군. 내가 잘못해서 우리 팀이… 으허엉.”

아까웠다는 말에 유네가 멈췄던 눈물을 줄줄 흘렸다.

렌이 방과 후에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유네도 봐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질 줄이야. 유네는 그게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아 렌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아냐, 수적으로도 밀렸잖아. 세 명이서 이 정도로 한 거면 선방한 거지. 잘했어.”

우는 유네와 유네 뒤에서 풀이 죽은 재경을 끌어온 류제가 두 사람을 넓은 가슴팍에 꽉 안아 위로해 주었다. 곁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봤는데 졌다고 해서 그동안 고생한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진 건 훌훌 털어버리고 가서 다른 팀들 응원하자. 다들 응원석에서 기다리고 있어.”

“분명 놀리겠지? 으으.”

“아냐… 렌 군… 내가 잘못한 거 다들 알 거야… 흐으으윽… 렌 군은 아무런 잘못도 없어…….”

“거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참패한 두 사람을 양옆에 낀 류제가 그들을 질질 끌며 응원석으로 향했다. 걸음이 무거운 렌은 굉장히 자존심 이 상했을 게 분명했다. 경기장에서 나왔을 때 류제가 졌다고 비아냥거렸더라면 유네처럼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지금은 건들면 안 되겠네. 류제는 응원석에 있을 친구들이 괜한 말을 안 하길 빌며 묵묵히 걸었다.

“뭐―야, 저 싸가지 기집애. 비웃는 거 봤어?!”

“2반 짜식들이… 감히 8반을 무시해? 4명이서 3명을 이기면 그렇게 좋냐?”

“누가 토너먼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지 두고 보자!”

“앗, 류제 돌아왔다.”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니 류제와 양팔에 낀 쪼그마한 것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다른 건 다 됐고 대결에서 져서 마음 상했을 귀여운 유네부터 찾았다.

“유네에~ 잘 싸웠어. 완전 멋졌어!”

“맞아, 그 정도면 잘한 거야. 울지 마. 우쭈쭈…….”

“다른 종목에서 선방하면 되는 거야. 렌, 너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말고도 아직 종목이 남았잖아. 거기서 잘하면 되지. 마음 쓰지 마.”

훌쩍이면서 돌아오는 유네와 뚱한 표정인 재경에게 친구들이 평범하게 위로했다. 평소처럼 왜 이렇게 못 하냐며 타박할 줄 알았던 친구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평범했다. 생소했던 재경이 뒤로 주춤거렸다.

“너네… 뭐 잘못 먹었냐?”

“뭐라고오?”

“아니,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냐? 소름 돋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반사적으로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재경이 그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들은 늘 까불까불한 렌이 좀 풀 죽은 것 같아서 어르고 달래 주려던 좋은 마음이었다가 이마에 핏줄이 하나 툭 불거졌다.

“기껏 응원하러 와준 친구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니들이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지! 이런 말 듣기 싫으면 평소 행실을 제대로 했으면 될 거 아냐. 그리고 내 응원이 아니라 유네 응원 온 거면서!”

“그게 니가 할 말이냐, 레엔! 니 뜻이 그렇다면 느낀 점을 필터 없이 죄다 말해 줄 테다!”

“으윽, 싫어. 하지 마!”

재경은 비참하게 얻어맞는 모습을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귓불부터 얼굴까지 다 시뻘게졌다.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했는데 이게 무슨 창피야.

응원석에서 자신의 대결을 본 소감을 듣고 싶지 않아 애써 귀를 막고 있으려는데 그녀가 재경에게 음료수병 하나를 던져주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 싸웠으니까 너나 풀 죽는 둥 안 하던 짓 좀 하지 마. 기분 나쁘니까.”

잘 싸웠다는 칭찬을 들은 재경이 받은 음료수를 멀뚱하게 쳐다보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친구들은 반의 아이돌인 유네를 둘러싸서 깔깔거리면서 놀고 있었다.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들은 류제가 재경의 어깨를 다독였다.

“거봐, 내가 잘 싸웠다고 했잖아. 진 거랑 관계없다고.”

“…진 게 진 거지 뭐.”

“어디 가?”

“화장실 갈 거야.”

“같이 가줄까?”

“됐어, 애도 아니고. 남자끼리 화장실을 왜 같이 가.”

음료수병을 든 재경이 매몰차게 돌아 응원석을 빠져나갔다.

걱정한 것과는 달리 평범하게 격려받았는데 저런 차가운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류제는 평소와 다른 렌의 모습에 어디선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화장실을 가는 척 사람이 없는 외진 곳으로 달려가 땀을 닦듯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은 재경이 숨을 죽여 훌쩍거림을 멈추려고 애썼다.

분명 다들 기대하고 있는 체육대회니까 조금이라도 성적을 내지 못하면 쓴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친구들이 저렇게 말해 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젠장…….”

주변에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얼마나 없었으면 고작 이걸로 미움받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재경은 이 세계가 마음에 들었다. 더 이상 원래 세계에서처럼 되는 게 싫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싶은 재경은 자신이 바라고 바라던 평범함의 축에 다다르자 무척 기뻤다.

렌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따라온 류제는 차분하게 가라앉힌 눈으로 벽 뒤에 숨어 그 흐느낌을 조심스레 훔쳐 들었다.

짜증 날 정도로 멋대로 흘러나오는 울음이 멈출 때까지 후미진 곳에서 눈물을 닦던 재경은 이 창피한 모습을 누가 볼세라 수돗가로 뛰어가 머리를 적셨다.

정수리서부터 턱 끝까지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시원한 수돗물과 함께 눈물 자국도 따라 흘러 사라졌다. 혹시라도 남을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재경이 눈을 벅벅 비볐다.

이전까지는 할머니를 제외한 주변 사람을 믿지 않았던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드높게 세웠던 장벽이 외풍에 바스러지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런 걸로 눈물이 나오다니 나도 다 빠져가지고. 진정한 사나이는 눈물 같은 거 안 흘려. 할머니가 그랬잖아. 사나이는 혼자서도 뭐든 잘해 낼 수 있어야 해. 근데 왜 자꾸 난…….

“자, 수건.”

“뭐… 아… 고마워.”

어느새 등장한 류제가 근처 샤워실에서 가져온 수건을 건네주었다. 물에 젖은 머리를 개처럼 부르르 털던 재경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수건을 받고 머리를 아무렇게나 닦았다.

힐끗. 앞머리 때문에 표정이 안 보이는 류제의 표정을 살피던 재경이 혹시 봤을까 봐 서투르게 에둘러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무 안 오기에 어디 다쳤나 싶어서 찾아봤어.”

우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단 소리를 했다간 삐쳐서 체육대회 내내 말 한 마디도 안 할 것 같아 류제도 서투르게 변명했다.

“그래?”

안심한 재경이 머리를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흐른 물이 재경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울어서 눈가가 빨개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렌이 그런 얼굴로 끔벅거리며 쳐다보니 류제는 마음이 화살로 푹 찔리는 같았다. 속으로 맙소사를 연발한 그는 재경의 손에 들린 수건을 다시 빼앗아 머리를 억지로 말려주었다.

“악! 뭐야! 뭐 하냐고!”

“덜 말리면 감기 걸려.”

고아원에서 어린 동생들에게 해주는 것처럼 머리털을 능숙하게 말려준 류제가 개털처럼 부스스 떠오른 재경의 머리 말고도 젖은 얼굴까지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으억, 억, 으악!”

덕분에 얼굴이 회오리 반죽이 된 재경은 류제가 다 닦았다며 손을 떼자 입을 하마처럼 벌려 얼굴 근육을 풀었다. 젖은 개털처럼 물기 촉촉한 앞머리는 원래 캐릭터처럼 오 대 오로 정리했다.

“나 어린애 아니거든?”

“물이 뚝뚝 흐르는데 그냥 가려고 했잖아.”

“아니야. 제대로 말리려고 했어. 니가 갑자기 수건을 빼앗지 않았냐?”

순간 심장이 철렁거려서 그 감정에게서 도망가려고 그랬다는 건 죽어도 말 못 하겠다. 뜨끔한 류제가 변명을 못 해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뒤에서 렌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밀었다.

“됐어. 그보다 애들이 기다리는 중이야. 다른 팀 경기가 곧 시작된대.”

“벌써? 서둘러야겠네. 아, 류제 너네 팀은 시드(seed)라 16강부터였나?”

“그렇지. 수요일 경기일걸?”

“젠장, 나도 거기서 실수만 안 했어도 16강쯤은 갔을 텐데!”

“예, 예. 이미 지나간 거 곱씹지 말고 다른 애들 경기나 보자.”

기운을 회복한 재경이 류제와 함께 응원석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응원석에 도착할 무렵, 새로운 두 팀이 경기를 시작한다는 거대한 알람이 학교 전체를 울렸다.

곧 방송부 마이크에서 경기 준비 안내 음성이 기계적으로 울려 퍼졌다.

―기간트리카 장갑 준비.

―…….

―시합 시작.

신호와 동시에 응원석에서는 친구나 반을 응원하는 학생들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힘내라! 지면 안 돼!”

“아, 저 반칙! 저거 반칙 아냐? 기간트리카 장갑도 안 했는데 공격했잖아!”

“정신 차려! 이길 수 있어!”

“당장 일어나서 쓴맛을 보여 주라고!”

“모, 모두들 힘내! 파이팅!”

시합에 나간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목청이 터져라 응원하고 있는 그녀들은 류제와 재경이 돌아온 줄도 모른 채 시합에 열중했다.

재경도 곧 자리에 앉아 안전 때문에 쳐진 철망 너머로 경기장 안쪽을 구경했다. 팀을 구별하기 위해 색을 넣은 것 말고는 군용 기간트리카로 죄다 얼굴부터 다리까지 가려져 있어 누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오로지 사용하는 어빌리티로만 상대방을 구별해야 하는데, 쟤들은 잘도 알아보는구나.

“야, 야! 거기서 그렇게 나오면 안 되지!”

“아으으. 그걸 못 맞히냐?”

“피해, 피해, 피하라고!”

월드컵 때 축구 생중계 보는 기분이다. 재경은 저는 안 그럴 줄 알고 친구들더러 아직 어리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야아아! 거기서 그렇게 나오면! 아오, 저건 나도 피할 수 있는 건데!”

류제는 앉은 지 오 분도 안 돼서 버럭버럭 손가락질을 하며 훈수를 두는 재경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울었던 애가 맞나 싶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끈질긴 공방이 끝나고 경기의 결과가 나왔다. 간신히 8반이 승리해서 아까 재경의 팀이 2반에게 패배한 것에 대한 면목을 세웠다.

“대단했어. 기간트리카 대결이란 건 멀리서 보면 정말 멋지더라. 진 팀도 엄청나던데.”

“걔 의외로 반사 신경이 대단했구나. 그걸 피했다고? 진짜? 어쩐지 내가 공격할 때 잘 안 맞더라니.”

예선전이 끝나고 경기장에서 나온 재경은 지금껏 자신이 연습해 왔던 기간트리카 컨트롤은 진짜 초급 중의 초급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같은 팀이었던 유네와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문화 충격을 먹은 듯한 그들의 눈동자에는 과연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했던 게 뭘까 하는 심오한 자아 성찰과 회의감이 빙글빙글 돌았다.

“렌하고 유네가 그 정도 했으면 잘한 거지! 언제까지 그거 가지고 꿍해 있을 건데?”

“날더러 잘 싸웠다며?! 저거랑 완전 비교되잖아. 쪽팔리게.”

“딴에는 잘 싸웠다는 거지, 아니면 진 애한테 왤케 못 싸웠냐고 말하리?”

“아니, 그…렇기는 하지만!”

내 울음은 뭐였던 거야? 내 감동 돌려내 이 망할……! 망할 짜식들아!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던 재경이 물어내라며 방방 뛰었다.

“렌 주제에 그 정도 했으면 선방이지 뭘 그렇게 의식하고 난리야? 다들 예상한 거 아냐?”

“맞아, 맞아. 시드 팀들 붙는 거 보면 기겁하겠네.”

일반 팀들도 저렇게 잘하는데 시드? 재경은 그들의 실력을 가늠이 안 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하기야 나랑 유네랑 열심히 덤볐는데 류제 털끝 하나도 스치지 못한 거 생각하면…….

재경이 힐끗 류제를 쳐다보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연시 주인공이란.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시무룩해하지 마. 늘 거야.”

이래가지고 내가 중간 보스랑 겨룰 수나 있을까 걱정인데 당사자인 류제는 속 편한 소리만 해댄다.

재경은 키 작아진다고 머리 쓰다듬지 말라고 으르렁거리며 손에 든 음료수병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음이 급해서 속이 다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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