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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1) (108/112)

챕터 3. [5월. 삼류 악역 말고 진짜 악역 중간 보스는 말 그대로 중간부터 등장하잖아?] (1)

햇빛이 융단처럼 늘어진 나른한 5월의 오후는 평화롭다.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봄, 꽃의 계절이 수레바퀴처럼 차례를 찾아 돌아왔다.

기숙사 뒤편 산책로에는 5월의 여왕 붉은 장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날이 따뜻해져서인가 점심시간이 되면 교내 곳곳 꽃이 핀 정원에서 친구들과 산책을 하는 여학생들이 늘었다.

건물 구석에서는 성장기로 몸이 근질근질한 남학생들이 이따금 공으로 장난질을 쳤다.

그들 중에는 연애 금지인 학교 규정을 무시하고 선생님들 몰래 연애를 시작한 학생 커플들도 넌지시 보였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이다.

학교 내에서 은밀하게 발산되는 열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아직 5월인데도 슬슬 교복을 하복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키아나트리체에 돌아온 5월의 정오는 초여름처럼 더웠다.

밤낮의 일교차 때문에 게시판에는 학생들에게 감기를 조심하라는 공고가 붙었다.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학생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의 연속과 심심할 때마다 실시하는 쪽지 시험, 몰아붙이는 과제들이 감기보다 더 힘들다고 공고를 향해 불평했다. 많은 학업량으로 지친 성장기 학생들은 다른 즐거운 일이 없을까 좀이 쑤시는 모양새였다.

그렇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5월의 축제, 나라의 높으신 분들도 와서 참관한다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체육대회는 학생들의 몸을 풀어줄 좋은 이벤트였다.

하늘하늘 운동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창가를 통해 들어와 1학년 8반의 커튼을 유명 배우의 치맛자락처럼 부풀렸다.

담임인 세라 밀로니의 기간트리카 이론 수업 시간. 시원한 바람에도 정숙을 지킨 학생들이 세라의 수업에 집중했다.

마족에게 멸족한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는 목적을 가진 우등생 비키는 선생님의 사소한 농담거리도 메모할 정도의 대단한 학구열을 내비쳤다.

수학여행 캠프파이어 때 류제가 선물해 준 향초를 쓴 이래로 악몽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 니냐롯트도 피곤한 기색 없이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수업을 듣는 중이었다.

마족 주제에 정체를 숨기고 기간트리카 수업을 듣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미나는 차분하게 앉아서 성실한 학생을 흉내내며 필요한 부분을 필기하고 있었다.

유네는 수업을 잘 듣다가 좀 전에 먹은 점심 때문에 몸이 나른한지 길게 하품을 한다. 몽실몽실 따사로운 햇살이 사람을 졸리게 만들었다.

세라가 칠판에 필기하는 소리가 백색소음 자장가 같다. 재경은 명란젓처럼 튀어나온 오리입 위에 연필을 올려서 재주껏 까딱거리며 딴짓을 했다. 수업 내용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지루한 재경은 고개를 드는 것도 귀찮아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 흐리멍덩한 시선은 칠판을 보고 있는 건지, 앞자리에 있는 류제의 등짝을 보고 있는 건지 애매모호하다.

짜식이, 열심히 필기하네.

라고 생각한 걸 보면 열심히 움직이는 류제의 팔꿈치를 쳐다본 것 같기는 하다.

재경의 앞자리에 앉아있는 류제는 재경의 생각과 달리 세라의 이론 수업을 듣는 척 공책에 깨작깨작 낙서를 하고 있었다. 춘곤증은 범생이인 류제마저도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하게 만들었다.

음… 좀 닮은 것 같으면서도 안 닮은 것 같다. 뭐가 문제지? 류제가 자신이 그린 역작의 낙서를 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가 부족한 기분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이리저리 고쳐보던 류제는 깨달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낙서 위에 또 다른 낙서를 추가했다. 렌은 맨날 눈썹을 이렇게 찡그리고 있지. 불평불만 많은 표정이고. 좋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떠냐.

오, 이건 나름 똑같은데. 하하. 보여 주면 화내려나?

만족한 류제가 뿌듯해했다. 그러다가 수업 시간에 딴짓을 한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누가 볼세라 후다닥 공책을 넘겼다.

얼핏 부는 바람에 류제의 앞머리가 슬쩍 들렸다. 구름이 비친 푸른 눈동자가 5월의 하늘처럼 청명했다.

수학여행 때 불의의 사건으로 터져버린 교복은 한 치수 더 커진 사이즈로 새로 받은지라 전보다 헐렁해졌다.

3월에는 재경과 엇비슷했던 키는 이제 아세미 손 한 뼘 조금 못 될 정도로 차이가 났다. 아직도 마른 작대기 같은 재경과 다르게 류제는 팔도 다리도 두꺼워졌다. 얼굴에는 앳된 모습이 남아있지만 전보다는 선이 굵어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몸은 성숙해지는 중이었다.

반면에 3월이나 5월이나 키는 쥐뿔도 자라지 않고 류제가 그린 낙서처럼 생긴 재경은 춘곤증 때문에 꾸벅꾸벅 조느라 바빴다. 등이 넓어진 앞자리 류제를 방패막이 삼아 턱을 괸 재경의 손이 조는 머리를 따라 휘청휘청 흔들렸다.

세라는 그런 재경을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수업 내용은 어빌리티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어빌리티일 경우 상응하는 대가가 커집니다. 대표적으로 백여 년 전 존재했던 척도 95의 ‘순간 이동’ 어빌리터가 그 예죠. 대가에 대해서 처음 이론을 내세운 사람이 한스테데 박사인데 그는 생전에 여러 어빌리터들을 모아 통계를 만들었습니다. 나이, 직업, 성별을 막론하고 일생을 바쳐 어빌리터를 연구한 결과 그는 하나의 그래프를 완성했습니다.”

그녀가 칠판에 도표를 그렸다. 딱, 따닥, 딱. 분필이 몇 번 마찰하자 가벼운 선이 그려졌다.

X축은 어빌리티 척도, Y축은 수명이다. 어빌리티 척도가 높아질수록, 평균 수명이 낮아졌다.

“이것이 한스테데 그래프입니다. 제군들은 ‘어빌리티가 세상을 바꾸는 정도’를 나타내는 어빌리티 척도를 측정하는 목적이 어빌리터의 힘을 수치화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어빌리터들이 겪어야 할 대가를 알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그 말에 오늘도 쓸데없이 어빌리티를 남발한 몇몇 학생들의 안색이 나빠졌다. 당장 어빌리티로 선생님 몰래 친구에게 쪽지를 보내려던 학생도 손을 멈추었다.

“척도 80 아래의 어빌리터들이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는 보통 식욕 부진, 피로, 능력의 긴 쿨타임, 탈진 정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80 이상부터는 과부하가 생겨 육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종종 목격됩니다. 척도 95였던 ‘순간 이동’ 어빌리터의 대가는 수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죠.”

그 말을 들은 류제의 손이 멈칫했다. 필기를 하던 샤프가 종이와 불협화음을 내며 미동이 없었다.

류제의 어빌리티가 90은커녕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반 학생들이 서로 수군거렸다. 세라가 그걸 의식했는지 학생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녀의 선택이었습니다. 대가를 내서라도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그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로 결심했죠. 대가가 수명이었다는 것도 한 예시일 뿐입니다. 척도 90 이상의 어빌리터들의 수명이 낮은 이유는 수도 적거니와 크나큰 대가를 낼 만큼 무리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키아나트리체는 이전과는 다르게 마족과 격렬한 전투가 오가지 않았다. 그건 그만큼 어빌리티를 쥐어짜 낼 필요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다.

세라가 분필을 들어 그녀가 그린 그래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 한스테데 그래프를 세세하게 파고들어 각 척도별 어빌리티 사용 횟수로 나누면 모든 어빌리터는 어빌리티를 많이 사용할수록 수명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즉, 무리하게 어빌리티를 사용하면 몸에 과부하가 걸리는 건 모든 어빌리터들이 똑같다는 의미입니다.”

류제는 그 말을 듣고도 안도하지 못했다. 눈에 들어온 그래프가 뇌리에서 가시질 않았다.

대가라. 어빌리티를 사용한 대가에 대해 류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대가를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때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있었던 그 불쾌한 감정이 나의 대가일까?

잠시 펜을 내려둔 류제가 제 손등을 살폈다. 생각에 빠졌던 그는 조심스레 주먹을 쥐었다.

“한스테데 박사의 기록을 살피면 척도가 높은 사람들이 내는 대가는 낮은 사람들보다 다양했다고 합니다. 그 대가가 기억이었던 사람, 시력이었던 사람, 대가가 없었던 사람 등등. 그러니 학생 때는 무리하지 말고 자신의 대가가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여 어빌리티를 남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라 선생님의 대가는 뭔가요?”

“선생님도 척도가 높지 않기에 다른 어빌리터처럼 탈진에 걸립니다. 그 상태에서 무리하면 며칠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전장에서 이런 상태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노출되죠. 그러니 어빌리티를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알겠죠?”

“네.”

학생들이 제각기 각오로 대답했다.

재경은 자신의 척도는 땅을 길 정도로 낮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몽롱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렌 지미는 삼류 악당이고. 중요한 건 주인공 류제의 대가가 아닐까.

류제의 대가는 딱히 없지만 따지자면 마왕의 영혼 그 자체다. 어떻게 아냐고? 위키에서 봤다. 세계를 한번 다시 쓸 정도로 척도가 높은 대신 마왕을 부활시킬 정도의 위험을 떠안고 있는 것이 대가에 가깝다고 쓰여 있었지.

‘강화’ 어빌리티로 세계를 다시 쓰는 것이 타락 루트로 가면 마왕으로서 다시 쓰는 것임을 암시하는 거라나 뭐라나.

쿨쿨. 지루한 수업 끝에 잠시 잠이 든 재경 대신 그가 읽었던 위키의 내용을 덧붙이자면 류제의 마왕으로서의 능력은 모든 마족들의 절대적 복종과 생식능력이 없는 마족들 대신 특정 인간을 마족으로 만드는 번식력이다.

그렇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류제를 제외한 모든 마족이 성적 행위를 모른다는 소리는 아니다. 생식능력이 없다는 2세를 만들지 못한다는 의미다. 그들의 종족에 서큐버스가 있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각기의 번식력은 없는데 마왕이 인간을 마족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보면 이 세계의 마족의 번식은 뱀파이어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번식능력이 없는 일반 마족들이 인간을 잡아먹지 않고 목덜미를 물어 전환해 버리면 인간은 마족의 수족이 된다. 그런 인간들을 지칭하는 말이 이성이 없는 시체인 구울이었다.

반대로 마왕이 물면 진짜 마족이 되어버린다. 마왕이 죽고 토벌로 수가 급격하게 감소했던 마족이 마왕의 부활을 필사적으로 꾀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유일하게 종족을 번식시킬 수 있는 왕이자 주체니 어떻게든 부활시켜야 마족 자체가 다시 부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은 그걸 모른다는 설정이다.

말고도 마왕에게는 상대방을 복종시키는 음문이라든가, 세뇌나 최면이라든가 별 중2병스러운 능력이 많지만 뭐 미나 쪽 루트로만 안 가면 나올 일 없다.

암, 내가 얼마나 호감도를 잘 다루고 있는데. 고럼, 고럼.

졸면서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던 재경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아악!”

우렁찬 고함 소리에 수업하던 세라가 놀라 분필을 떨어뜨렸다.

발표하듯 자랑스럽게 일어난 재경이 덜 깬 눈을 끔벅거리다가 세라와 눈이 마주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된 채 혼자만 멀뚱하게 서있었다.

“…렌 학생? 수업 시간에 뭐~ 하는 걸.까.요? 혹시 졸다가 꿈이라도 꾼 건.가.요?”

“아하하. 하하!”

“렌, 저 바보.”

“아…아니… 그…….”

재경 덕분에 마족들을 방위하는 어빌리터들의 숙명을 논하던 진지한 분위기가 뚝 끊겼다. 학생들이 렌 지미의 바보 같은 행동에 다 함께 폭소를 터뜨렸다.

재경은 무안해서 당장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으아아아, 왜 그랬지. 귓불만 엄청 새빨개져서 딴청을 피우는 재경을 보며 세라가 정말 못 말린다며 한숨을 쉬었다.

덕분에 졸던 다른 학생들이 잠에서 깬 것에 감사해야 할까. 세라가 쯧쯧 혀를 차며 5월의 춘곤증을 단번에 깨울 마법의 문장을 말했다.

“다들 밥 먹고 몸 뜨시겠다 렌 학생 말고도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있는데, 시간이 되었으니 운동장으로 나가서 기간트리카 심화 운용에 대해 배워보도록 하죠. 오늘은 다음 주에 있을 체육대회 학년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 나갈 팀을 짜도록 하겠습니다.”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춘곤증 초기 증상에 괴로워하던 8반 학생들은 사람 축축 처지게 만드는 나른한 날씨 때문에라도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이 반가웠다. 게다가 그들이 기다려 마지않는 체육대회의 꽃,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팀도 짠다지 않나.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을 위해 학생들이 전원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기간트리카 대결장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재경도 언제 졸았냐는 듯 제일 먼저 기간트리카 대결장 옆 응달진 곳에 섰다. 졸았던 주제에 달리기는 세상 빠르다.

“난 오늘 반드시 1승을 따낸다!”

재경이 자신 있게 외쳤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승리를 따낸 적 없는 재경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내뱉자 옆에 서있던 비키와 류제가 나란히 돌직구를 날렸다.

“뭐래, 자기 어빌리티도 뭔지 모르는 주제에.”

“렌, 너 이제 공중전은 괜찮아? 높은 곳 싫어하잖아.”

“너희는 꼭 사람이 가오 잡을 때 옆에서 초를 치더라?”

분한 재경이 화난 종잇장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슬슬 기간트리카에 적응하고 싶지만 마음은 따라주질 않고 혼자 뒤처지는 기분에 조바심 나 죽겠는데 옆에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람 풀 죽게 만들다니. 쟤네들이야말로 사악한 악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팀원들한테도 민폐야. 뭐, 입학식 날 나한테 덤빈 그 용기는 가상하다고 쳐주지.”

“뭐라고? 기억 왜곡시키지 마라. 네가 덤빈 거야, 그거.”

“아, 아냐. 달라. 그건 네가……!”

비키가 지레 찔려서 울컥하려는 순간 세라가 집중하라며 쇠로 된 얇은 기둥을 탕탕 쳤다.

“밖으로 나오니 다들 활기가 넘치시네요. 보기 좋습니다.”

세라가 조용히 하고 모이라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 말했다. 억울해서 잔뜩 볼을 부풀린 비키가 고개를 획 돌렸다.

비키 쟤는 꼭 내가 기간트리카만 연습하려고 하면 옆에 와서 시비더라. 재경도 참 이해할 수가 없다며 미간에 불평불만을 담았다. 그 모습이 아까 공책에 낙서했던 모습과 똑같아서 류제가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힉힉거리는 류제가 수상했다. 재경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고개를 숙인 류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흔들었다.

“모두 줄을 맞춰 서서 준비운동을 합시다. 비키 학생?”

운동장에 나온 것만으로도 잠에서 깨 떠들썩해진 분위기를 정리한 세라가 비키를 호출했다.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기 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바로 준비운동이다. 기간트리카가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외골격 슈트라고 해도 수업을 듣느라 굳은 몸으로 실전에 나서는 것보다는 스트레칭을 해서 적당히 긴장한 몸으로 바꿔주는 것이 좋은 움직임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무릎 풀어주기.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반장인 비키가 스트레칭 명칭과 구호를 외치면 학생들이 따라서 여덟까지 반복한다. 세라는 옆에서 호루라기를 불며 제대로 몸을 풀고 있나 살피며 세세하게 학생들을 지도했다.

“으갸갹. 류제, 높아. 너무 높다고!”

짝과 둘이서 등을 맞대고 서로의 팔을 교차한 채 상대방의 허리를 들어 스트레칭을 해주는 동작을 하다가 류제가 허리를 너무 숙이자 허리가 꺾여선 안 되는 곳까지 꺾인 재경이 발버둥 쳤다.

구호가 끝나자 허리를 편 류제가 재경을 땅에 내려놓았다. 재경이 이번에는 자기 차례라며 열심히 류제를 들어 올렸다.

“끄으윽… 무거…….”

“렌, 무리하지 않아도 돼.”

스트레칭 시간이라 어빌리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류제는 쉽게 들어 올렸는데 나는 꼴사납게 힘이 들다니. 구호가 끝나자 재경이 헥헥거리며 류제를 내려놓았다. 얼굴은 피가 몰려서 홍당무가 되어있었다.

“짜식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살쪘냐?”

“그래? 그런가?”

살은 쪘지만 그 이유는 무섭게 성장하는 키 때문이다. 류제는 살쪘냐고 물어보는 재경의 물음에 확실히 요즘 너무 많이 먹기는 한다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특히 시도 때도 없이 배가 고파져서 난리였다. 밥 먹을 때 아침저녁으로 세 번은 더 떠서 먹는 것 같다. 그게 다 살로 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는 하다.

운동 열심히 해야겠네. 류제가 허리 부서지겠다며 할머니처럼 등을 두드리는 렌을 보며 반성했다.

이번엔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상태에서 등을 배꼽 안쪽으로 굽힌 다음 무릎을 펴 손을 바닥에 대는 스트레칭 동작이다.

짝이 등을 눌러주면 그대로 쭈욱 종아리 근육을 풀어주고 유연성을 늘려 나가면 된다.

“으으윽… 류제, 무겁다고 했잖아!”

“으아, 내가 너무 세게 눌렀나?”

등을 눌러주던 류제가 렌이 힘든지 모르고 압박을 주었다는 생각에 힘을 풀었다. 렌은 딱딱해 보이는데 생각보다 유연해서 스트레칭할 때 저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된다.

이번엔 류제 차례. 재경이 이번에 복수한다고 초등학생 철봉에 올라가듯 류제의 등에 매달렸다.

키는 한 뼘도 차이 안 나는데 왜 다리는 한 뼘 이상 차이 나는지 스트레칭해 줄 때마다 자존심 상한다. 젠장, 미연시 주인공이란!

이라고 따지기엔 미의 기준이 상향 평준화된 게임 세상이라 히로인들도 모두 미녀에 다리도 길고 늘씬하고 몸매 좋다.

유네야 늘씬하고 이쁘기보단 덜 자란 애처럼 생기긴 했지만 멍멍이처럼 귀여운 게 모든 걸 커버한다. 엑스트라 학생들도 말만 엑스트라지 전부 다 평범하게 예뻤다. 이 학교에서 못생기고 키 작고 성격 더러운 건 삼류 악역인 렌 지미뿐인 것 같다.

“어딜 가나 세상은 참 불공평해!”

눌러주는 힘으로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힘이 훅 들어오자 류제의 얼굴이 밑으로 푹 꺼졌다. 뭐가 불공평한데? 땅밖에 보이지 않는 류제는 렌의 혼잣말에 영문을 몰랐다.

마무리로 손과 발을 털면 준비운동은 끝이다.

세라가 학생들을 가까이 모았다. 세상의 불공평함을 오늘에야말로 극복하고 기필코 1승을 따내겠다는 재경의 말이 빈말이 아닌지 오늘따라 눈에 불이 켜졌다. 그 투지에 옆에 선 류제에게도 열기가 느껴졌다.

“오늘 실습은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상태에서 팀원과 힘을 합쳐 어빌리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이 아까 말했던 어빌리티의 대가 기억하시죠?”

“네!”

“어빌리티를 마구 남발한다고 해서 실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적에게 나의 어빌리티가 알려지면 약점을 잡히기 쉽죠. 어빌리티는 제때, 중요한 순간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타이밍에 사용해야 합니다. 수학여행지에서 만난 들라크루아 중령님을 떠올려 보세요. 그분은 효율적으로 어빌리티를 운용하기로 유명하시답니다. 그러니 척도 차이가 났지만 류제 학생을 압도할 수 있었던 거죠. 몰랐던 학생들은 그분의 어빌리티가 ‘기압’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어빌리티를 은밀하게 사용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아픈 추억이 떠오르자 류제가 부끄럽다며 눈을 가렸다. 재경이 그걸 보고 놀린답시고 팔꿈치로 류제의 허리를 쿡쿡 쑤시며 웃었다. 류제는 하지 말라고 똑같이 재경의 허리를 툭 쳤다.

“당신들은 아직 어리니 그게 당연한 겁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어빌리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라도 그 요령을 배워나가면 당신들도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자, 수업 시작 전에 일단 공격형, 보조형 어빌리티를 나누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학생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어빌리티의 특성대로 공격형과 보조형으로 나누었다.

그중 능력을 공격형과 보조형으로 다 쓸 수 있는 류제나, 자기 어빌리티를 아직도 파악 못 하고 있는 재경이 어디로 가야 할지 헤매자 세라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류제 학생은 공격형으로, 렌 학생은 보조형으로 가주세요.”

공격형으로 가고 싶었던 재경은 투덜거리며 유네가 있는 보조형 어빌리터들에게 향했다. 공격형으로 가는 류제가 부럽다. 나도 내 어빌리티를 모르는데 내가 보조형인지 공격형인지 세라 쌤이 어떻게 아냔 말이지. 실은 필사의 한 방을 가지고 있는 엄청난 능력자일 수도 있는데. 투덜투덜.

“공격형 어빌리터들은 근접형과 원거리형으로 나누어 주세요. 보조형은 공격이 가능한 보조형과 그렇지 않은 버퍼 계열 보조형으로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렌 학생은 공격이 가능한 보조형으로 들어가 주세요.”

토라졌던 재경의 얼굴이 금세 펴졌다. 그나마 공격이 가능한 곳에 들어갔다는 게 재경의 마지막 자존심을 살렸다.

“공격이 가능한 보조형 어빌리터도 상황에 따라 공격형 어빌리터가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공격이 가능한 보조형 학생은 공격을 담당하고, 근접 공격형 어빌리터들은 원거리 공격을, 원거리 공격형 어빌리터들은 보조를, 그리고 다른 보조형 어빌리터들은 공격을 하면서 버프를 넣는 연습을 하겠습니다. 수업 후반부에 이 네 포지션으로 팀을 짜서 모의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각각 개인 연습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세라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모든 학생이 질겁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껏 연습했던 포지션이 완전 뒤죽박죽이 되지 않는가.

원거리 공격이 주특기인 비키는 화염구로 뭘 어떻게 보조를 해야 하냐는 표정이었다. 신체를 강화해서 근거리 공격을 주로 하는 류제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이 야단법석 가운데 오로지 재경만 공격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말에 신이 났다. 재경과 같은 포지션이었던 유네는 반대로 보조가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고정관념이 있으면 그만큼 비효율적인 공격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자~ 제군들 모두 힘내시길!”

짝짝. 세라가 환하게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말은 쉽지 학생들은 이걸 어떻게 하냐며 패닉 상태로 술렁거렸다.

어디 보자. 세라는 1승을 거둘 기념비적인 날이 찾아왔다고 신나게 떠들어대며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는 렌 지미를 너그럽게 응시했다.

정체불명의 어빌리티를 가진 기묘한 학생. 그 척도는 뒤죽박죽에 스스로도 능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반에 척도 90을 넘기는 학생이 둘이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 가는 일이었다.

류제의 대가가 무엇일지는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가면 된다. 문제는 렌 지미다. 저번 신체검사 때를 생각해 보면 무의식적으로 어빌리티를 쓰는 것 같은데 정도를 주체하지 못한다면 혹여나 돌아오는 대가가 클까 걱정이었다.

“학생들 모두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잘 돌아가나 확인해 주세요. 어빌리티를 무리해서 사용하지 않도록 합니다. 렌 학생도 마찬가지예요.”

“쌤, 그보다 전 어빌리티가 뭔지 모르는데요.”

“나중에 알 수도 있잖아요. 우리 용감한 렌 학생이 뽐내고 다니는 것처럼 류제 학생을 넘어서는 엄청 대단한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세라가 싱긋 웃었다. 그 말에 어빌리티 발현에 자신감이 생긴 재경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순수한 아이야. 군에 들어가기엔 그 심성이 너무나 아까울 정도다. 씁쓸해진 그녀는 어빌리티 운용에 힘쓰는 학생들을 보며 낮게 한숨지었다. 그래 봤자 제립학교에서 그녀가 가르치는 건 미래의 군인을 키우는 행위임은 바뀌지 않았다.

포지션이 뒤죽박죽 바뀐 상태에서 팀전을 하기 위해 학생들은 자신의 어빌리티를 기간트리카와 함께 활용하는 여러 시도를 했다.

그 고민을 이어갈수록 어빌리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스스로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그 한계를 하나하나 극복할수록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이 수업의 취지였다.

‘강화’ 어빌리티로 원거리 공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던 류제는 주변의 것들을 이용하는 건 어떨까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애초부터 ‘강화’ 어빌리티는 어떤 것을 어디까지 ‘강화’할 수 있는지 애매한 어빌리티다. 제립학교에 입학하기 몇 달 전 어빌리티가 발현돼서 그게 ‘강화’라고는 알았는데 제일 만만한 게 육체니까 스스로의 육체만 ‘강화’했었다.

생각해 보니 물건을 ‘강화’해 보려고 하지 않았네. 하기야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상태에서는 그다지 쓸 필요도 없었으니까.

무생물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의 몸을 제외한 다른 생명체에게 ‘강화’ 어빌리티를 걸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그게 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히 시달렸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게 가능하면 너무 만능이잖아, 이 어빌리티. 보조도, 버프도, 근거리는 물론 내 몸처럼 똑같이 남을 강화할 수 있다니. 학교에서 날 무슨 취급을 할지 생각만 해도 귀찮은 일이야.

“흐음.”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류제는 이렇게 생각만 해봐야 뭐 하겠냐며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밑에 있던 돌멩이를 주워 다양한 실험을 했다.

애초부터 ‘강화’ 어빌리티의 원리가 뭘까. 이따금 신경 쓰였지만 능력을 사용하는 데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서 머리 한구석에 구겨 넣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대결로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라 현재에 이르렀다.

“‘강화’.”

류제가 주워 든 돌멩이에게 어빌리티를 걸었다.

‘강화’는 ‘세력이나 힘을 더 강하고 튼튼하게 함.’이라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돌의 무엇을 강화한다 말하지 않고 그냥 강화해 본다면 어떨까. 더 튼튼해지나?

작아서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았던 돌멩이의 무게가 쇳덩이를 든 것처럼 무거워졌다.

같은 부피를 유지하면서 보다 단단해지려면 무게가 무거워지는군. 류제가 납득하며 걸었던 어빌리티를 해제시켰다.

“압력 내성 ‘강화’.”

이번엔 무게가 무거워지지 않았다. 강도를 강화시킨 게 아니라 돌멩이 그 자체가 견딜 수 있는 압력에 대한 내성을 강화하였으니 류제가 짓누르듯 돌멩이를 깨부수는 데 상당한 힘이 들어갔다.

“…회복력 ‘강화’.”

라고 해봐도 이미 부서진 돌멩이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물건에 애초부터 없는 성질이면 ‘강화’해도 아무런 작용이 없는 듯하다. 0에 10을 곱해 봤자 답은 0인 것처럼.

류제가 어빌리티를 연구하며 원거리 공격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작은 화염구를 하나 띄운 비키는 보조할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팔짱을 끼고 그것만 노려보고 있었다. 불로 보조를 하라고? 뭘 어떻게? 난 공격이 더 좋은데.

이런 식으로 다른 학생들은 진지하게 어빌리티에 대해 고민 중인데 제 어빌리티를 모르는 재경은 오늘은 1승을 거둔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부스터를 통제하는 연습을 했다.

재경을 제외한 곳곳에서 생각이 막힌 학생들의 탄식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어빌리티 연구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류제는 방향을 잘 맞춰서 가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학생들이 수업을 어려워하는 것 같자 지켜보던 세라가 집중하라며 호루라기를 불었다.

“힌트를 드리자면 개인 연습이라고 했지만 다른 학생들과 힘을 합쳐서 연습을 해도 된답니다. 상성이 맞는 어빌리티끼리 만나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내니까요.”

화염구를 앞에 두고 뚫어져라 쳐다보던 비키가 그 말에 문득 ‘바람’ 어빌리터인 유네를 떠올렸다. 바람과 화염. 괜찮은 조합이 아닌가. 보조하는 척 공격할 수도 있고.

하지만 친하지 않은 유네에게 먼저 말을 건넬 정도로 비키는 사교성이 좋지 못했다. 유약한 바람으로 어떻게든 공격을 해보려는 유네를 찾아온 비키가 말을 걸락말락 주춤거렸다.

그러다 성과를 보이고 있는 류제나 다른 학생들을 보고 질 수 없다 생각한 그녀는 유네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호출했다. 그 시선을 느낀 유네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비키 양? 무…무슨 일이야?”

“너…나랑 같이 어빌리티 조합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 괜찮으면 같이 하지 않을래!?”

“우앗. 나라도 괜찮다면…야.”

비키의 박력에 유네가 얼결에 승낙했다. 세라의 조언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던 학생들도 이 두 사람처럼 상성이 맞는 친구들을 찾아 어빌리티를 실험해 보기 시작했다.

비키와 유네의 어빌리티 조합은 유네가 공격하는 방향대로 불꽃을 조절하는 새로운 공격 형태를 만들었다. 유네의 ‘바람’이라는 공기의 이동 정도를 조절하는 어빌리티를 개량하면 강도도 세질 것 같다.

유네와 비키가 잘되었다며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고 기뻐했다. 그러다가도 비키는 자기가 철딱서니 없이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이 부끄러워 금세 도도한 얼굴로 돌아왔다.

힌트 덕분에 순조롭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결실을 맺고 있을 때 시간을 살핀 세라가 다시금 호루라기를 불어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시간이 되었으니 모의 대결을 할 팀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의 바뀐 포지션, 잘 기억하고 있죠? 호명하는 대로 앞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된 학생들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선생님의 호명을 기다렸다.

평소와 전혀 다른 조합으로 팀이 꾸려졌다. 각기 바뀐 포지션의 원거리, 근거리, 버퍼, 보조 4명씩 팀이 되었다. 3명이 되는 한 조는 다른 조와 조원을 한 명 공유해서 대결하기로 했다.

1승. 드디어 1승이다! 재경은 차례가 돌아오기를 간식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열심히 기다렸다.

매번 지기만 하는 재경이 오늘따라 자신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5월 체육대회 챕터가 바로 체육대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팀을 짜는 오늘, 이 렌 지미가 기간트리카 대결에 승리하여 거만하게 웃는 것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거만하게 웃는 게 뭐 어때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못 이겨보다가 승리하면 좀 거만하게 웃을 수도 있지. 어쨌든 나는 승리를 쟁취한다! 스토리대로 되니까 이런 게 좋구만.

“다음, 렌 지미!”

드디어 재경의 팀전이 찾아왔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팀원들은 기분이 좋아 실실 쪼개는 재경에게 뭐가 그렇게 좋냐고 핀잔했다.

“반드시 이긴다니까 그러네.”

경험이 담긴 호언장담이 무시당해도 기죽지 않은 재경은 대결장에서 나오는 류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뭔가 했더니 그걸로 자신을 가리켰다. 오늘은 꼭 이기니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는 의미다.

빨강 팀 재경의 상대 팀은 유네가 들어간 무난한 팀이었다. 재경의 팀은 악역답게 약한 어빌리티를 치졸하게 운용하기로 악명 높은 학생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무렴 어떠냐. 이기면 장땡이지. 이게 바로 삼류 악역의 효과다. 하하하!

“제자리 준비, 대결 시작!”

학생들이 모두 제각각 위치를 잡았다. 단단히 벼르며 대기하던 그들에게 세라의 구호가 떨어졌다.

“기간트리카 장갑!”

“장갑!”

그와 동시에 재경의 팀원 중 포지션 바꾸기를 해서 보조로 물러난 원거리 공격수가 땅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흙먼지를 뿌렸다.

시야가 가려지자 유네가 바람으로 먼지를 흩어지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위력이 작아 흙먼지를 더욱 주변에 뿌리는 꼴이 되었다.

“우아아,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미…미안. 다들 미안해!”

한때 수학여행에서 유네와 척을 졌었던 ‘무게’ 어빌리터 소녀도 악역답게 재경의 팀이었다. 공격이 가능한 보조 역에서 근접 공격으로 바뀐 그녀는 작전대로 부스터로 위로 올라가 다른 팀원의 신호를 기다렸다.

흙먼지로 시야가 가려지자 피아식별이 불가능했던 적 팀원 몇몇이 그녀처럼 부스터를 수직으로 바꾸어 위로 상승했다. 그때를 기다린 그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적 팀의 팀원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고 목을 졸랐다.

“앞이 안 보인다고 위로 올라오다니. 진심 어이없어.”

‘무게’ 어빌리티는 공중에서 큰 장점이 된다. 부스터를 끈 그녀는 상대방 부스터가 견디지 못할 만큼 무거운 무게로 상대방을 땅에 메다꽂았다. 땅에 금이 갈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낮은 바람이 대결장을 스쳤다.

잠시 흙먼지가 거둬진 사이 재경은 적 팀이 틈이 보일 때 부스터를 꺾어 땅에 있던 파랑 팀 중 한 명에게 달려들었다.

팀원이 ‘무게’ 어빌리티로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재경은 상대 팀의 버퍼, ‘방호’ 어빌리터를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적 팀원이 비틀거리자 때를 놓치지 않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재경이 적의 양손을 붙잡고 눌러 강하게 억눌렀다. 버프를 걸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다.

“이익, 내려와. 내려오라고!”

재경도 5월이 되자 훈련의 결과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어도 날파리처럼 공중을 돌아다니던 예전보다 발전했다.

하지만 높은 곳은 여전히 무서워해서 지금처럼 지상 근접전에서 강세를 보였다. 어빌리티는 모르고 할 줄 아는 게 싸움뿐이니 기간트리카 대결도 이렇게밖에 못했다. 안타까운 한계였다.

어디 보자. 유네는 다른 애가 맡기로 했고, 저쪽도 제압한 모양이네.

재경이 있는 빨강 팀의 승리가 확실했다. 흙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유네네 파랑 팀 네 명 모두 전투 불능임을 확인한 세라가 호루라기를 불고 손을 들었다.

“승자, 빨강 팀.”

“아자아아!”

재경이 승리의 기쁨을 포효했다.

체육대회 챕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장면은 본래 유네의 팀에게 승리한 삼류 악당 렌 지미가 내 힘은 류제 네까짓 것과 비교가 안 된다며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서 우리 반의 에이스는 자신이 될 거라고 자만하는 장면으로 연결되었다.

늘 그렇듯 삼류 악당 렌 지미가 주인공과 히로인들의 일에 일일이 트집을 잡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장면이다.

하지만 그걸 다 제쳐둔 재경은 대결에서 이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서 파란 팀으로 달려가 유네를 안고 펄쩍펄쩍 뛰었다. 계속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고!”

“오버하기는.”

“유네야, 이겼어, 이겼다고! 우리 팀이 이겼어!”

“으아아… 축하해, 렌 군. 으아, 으아아……!”

“내가 이긴다고 했지! 했잖아! 우하하하!”

그 대상이 약한 유네라서 찔리긴 하지만(유네한테도 맨날 지기만 했으니) 이긴 건 기쁘다. 바뀐 포지션이 익숙하지 않아서 생긴 우연이라도 너무 행복했다.

세라가 흥분한 재경을 진정시키며 모의 대결을 마친 학생들을 끌어모았다.

“이로써 모든 팀이 대결을 마쳤습니다. 포지션을 바꾼 경험이 어떠셨나요?”

“너무 어려워요.”

“완전 최고!”

“그건 너만 그런 거지.”

“하하하. 우리 렌 학생이 이겨서 기분이 좋은 모양입니다. 어려웠어도 자신의 어빌리티에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나요?”

세라의 말에 학생들은 우물우물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발견한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포지션을 바꾼 수업이 아직 초반이므로 서두를 필요 없었다.

“다음 시간에는 자신의 어빌리티가 가진 가능성을 발견해 보도록 합시다. 그런고로 다음 주 이 시간까지 각자 어빌리티의 단점과 그 극복을 위한 대처에 대한 리포트 5장을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에에?”

“안 돼요, 선생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쌤, 저는 어빌리티 뭔지 모르는데요. 안 써도 되죠?”

“그럼 어빌리티 불명이라는 단점을 어떻게 극복해서 기간트리카를 운용할 것인지 써오면 되겠네요, 호호호. 제군들 모두 즐거워하시니 저는 기쁩니다. 그럼 남은 시간동안 체육대회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에 나갈 조를 짜보도록 하겠습니다.”

볼멘소리를 일축한 세라가 드디어 이 시간이 왔노라며 박수를 짝, 쳤다. 학생들은 리포트 이야기에 불평하다가도 팀을 짠다는 말에 눈을 빛냈다.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수학여행에서 했던 서바이벌 게임은 체육대회의 꽃 기간트리카 토너먼트의 연습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살벌하고 명예로운 학생들의 대전이다.

실전처럼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싸우며 반별로 3~4인 짝을 지어서 팀을 만든다. 전교생이 참여하며 체육대회 전까지 학년별로 예선전이 치러지고 체육대회 날 나라의 높으신 분들 앞에서 준결승과 결승전을 치른다.

토너먼트에서 1위를 한 팀이 속한 반은 체육대회에서 큰 점수를 얻어가며 1위를 한 팀은 상당한 금액의 상금과 순금으로 만들어진 메달이 수여된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다. 1위를 한 팀원들에게 평가 점수 10점이 더해지는데 이 평가 점수가 학교 졸업 후 군인이 될 때 진급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는 출세를 원하는 학생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치열한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토너먼트는 4명씩 짝을 짓다 보니 보통 반에서 여섯 팀이 나온다. 1학년 48개 팀 중 8개의 시드 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은 학년별로 무작위로 붙어 예선전을 치른다.

그때 같은 반 팀과 붙게 되는 경우도 많아서 주로 주력이 되는 시드 팀 한 팀만 정예로 내보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수학여행 서바이벌 게임에서 8반의 위력을 맛본 다른 반 선생님들이 주력 팀에 집중하는 편성을 꾀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세라도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토너먼트에 나가는 것은 학생들이니 학생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그녀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세라가 학생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그들도 다른 반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그게 저희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아요? 체육대회에서 1등 한 반도 평가 점수 5점씩 주는데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점수가 체육대회 점수 중 가장 크잖아요.”

“그렇죠. 다른 분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이신가요?”

“네.”

어차피 반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결정되어 있으니 되지도 않는 욕심을 부릴 바엔 그에 업혀 평가 점수 5점을 버는 것이 낫다는 게 학생들의 선택이었다.

1학년 8반의 시드 팀은 수학여행 서바이벌에서 한 명도 낙오되지 않은 미나, 비키와 류제, 니냐롯트가 선정되었다.

토너먼트는 서바이벌이 아닌 오픈 포지션에서 공격 위주라 보조형들은 버퍼가 아닌 이상 시드 팀에서 빼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버퍼가 아닌 보조였던 미나를 주력 팀에 넣어야 할까 잠시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1학년 학생들은 아직 다른 반의 어빌리티를 서로 잘 모르니 ‘분석’은 다른 팀 어빌리티 판별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유지하게 되었다.

뭐든 히로인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같은 팀이어야 하겠지. 재경이 가자미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우리 반의 시드 팀은 류제 신리,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비키 셀로니아, 미나 플로리아 학생으로 결정하겠습니다.”

주력 팀에 별생각 없던 재경은 그러면 그렇다며 심드렁하게 박수를 쳤다. 어차피 렌 지미는 에이스 집단에 못 들어가는 거 알고 있어서 별 타격도 없다.

암만 렌 지미가 원작에서는 주인공을 질투하고 토너먼트에 나가기 전 류제에게 되지도 않는 라이벌 선언을 하고 다녔다지만 주제를 아는 재경은 그럴 마음이 추호도 들지 않았다.

“물론 시드 팀만 결승전을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당신들도 노력해서 많은 승리를, 많은 경험을 하도록 노력하세요. 알겠죠? 당신들은 약하지 않아요. 다만 스스로를 잘 모를 뿐입니다.”

논의 끝에 시드 팀을 제외한 다른 팀들도 정해졌다. 재경은 반에서 가장 약한 유네와 같은 조가 되었다. 즉, 떨거지 중에 가장 떨거지들만 있는 조였다.

팀원은 제일 적은 3명. 토너먼트는 약육강식의 세계라 어쩔 수 없다지만 역시 분하다.

“그럼 수업은 여기까지. 제군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기간트리카 실전 수업도 끝났겠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다. 종소리가 울리자 학생들이 주섬주섬 교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하교하기 전에 체육대회를 위한 학급 회의 시간이 있었다. 회의 주제는 체육대회 종목별 출전 선수를 정하는 것이라 반 학생 모두 필참이었다.

“렌! 아까 이긴 거 봤어. 대단하던데.”

수업 때문에 다가오지 못했던 류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류제가 칭찬해 주자 재경이 뿌듯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렌 군! 아까 엄청 멋있었어.”

아까 적 팀으로 대결했던 유네도 존경의 눈빛을 빛내며 재경을 칭찬했다. 사탕발림에 넘어간 재경이 우쭐거리며 어깨를 쭉 펼쳤다.

“이 정도야 껌이지. 내가 말했지? 나 오늘 꼭 이긴다고 했잖아.”

“진짜 자신 있었나 보네.”

“내가 근거 없이 자신감 내비친 때도 있었냐? 우하하하! 드디어 1승이다! 내 승리의 발판이 된 것을 영광이라 생각하라고, 유네.”

하하하! 길을 가다 멈춰 선 재경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만했다.

여기서 본래 렌 지미는 에이스 조에 들어가지 못한데다 가장 약한 유네와 같은 팀이 되어 유네에게 화풀이를 하고 괴롭혀댔다. 그 바람에 주인공 류제에게 바로 관광 타고 비키의 경멸 어린 눈초리를 받는 쩌리 이벤트가 추가로 있었지만 이겼는데 그게 뭐 대수라고.

“렌 군, 우리 토너먼트도 힘내자. 남들은 다 버림받은 조라고 하지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고!”

“하, 당연하지. 내 발목이나 붙잡지 마셔!”

“으응!”

둘이서 마주 보며 승부욕을 태우면서 팔을 크로스 하는데 고만고만한 둘이서 저러고 있으니 콩만 한 것들이 귀엽긴 퍽 귀엽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류제가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곧바로 시행에 옮긴 그는 재경의 겨드랑이 아래를 붙잡고 위로 휙 들어 올렸다.

“그럼 어디 렌의 1승 축하나 해볼까?”

“뭐? 우악! 야, 뭐 하는… 우하하!”

“하하. 여길 봐, 얘들아. 렌이 드디어 1승을 했대. 와서 칭찬 좀 해주라고.”

“렌 군, 축하해!”

어디 보자. 대충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 완전 다른 것 같다고? 그럼 무엇이 달라졌는지 한번 찾아보자.

일단 하나. 유네와 같은 조가 된 렌 지미가 ‘내 발목이나 붙잡지 마!’라고 말했고 유네를 괴롭힌 대가로 류제가 비행기를 태워줬다. 달라진 게 없는데?

하지 마, 어지럽다고! 관광 탄다는 게 이런 의미는 아닐 거 같은데. 재경이 꽤액 비명을 질렀다.

“흐…흥! 렌 지미 주제에 이제 잘하네. 다 내 덕분인 줄 알아.”

소란을 듣고 쪼르르 달려온 비키가 렌의 1승을 축하해 주고 싶어 기웃거리다가 새침하게 공로를 과시했다.

넌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겨! 재경은 어지러워서 정말 못 알아듣겠다고 왁왁 소리 지르기 바빴다.

그래도 기분은 째진다. 정신 승리할 요량으로 혹시라도 지면 어쩌나 멘탈 관리를 철저하게 했는데 이겨서 칭찬받으니까 배는 더 기뻤다.

“것 참 이상하단 말야.”

“뭐가?”

승리를 축하받은 것이 뿌듯하다가도 이상하게 수상쩍었다. 꺼림칙한 기분에 재경이 다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렌?”

그럴 때면 류제가 불러도 답이 없다. 갈아 신을 슬리퍼를 손에 든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재경에게 류제가 두어 번 손으로 왔다 갔다 시야를 확인했다. 얘 또 멍때린다.

류제가 어서 반에 들어가자며 재경 대신 슬리퍼를 내려놓고 발을 올려준 다음 등을 밀어 안으로 들여보냈다.

옆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다 그걸 목격한 유네는 엄마한테 애교부리는 아빠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의 수렁에 빠진 재경은 문득 의문점이 들었다. 스토리는 곧 죽어도 따라가려고 하는 주제에 왜 오늘 내가 원작 렌 지미처럼 류제에게 라이벌 선언을 안 하고, 질투도 안 하고, 유네에게 화풀이를 안 해서 류제한테 권선징악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어물쩍 넘어가는 거지?

따지고 보면 얼추 비슷하게는 형태가 만들어졌다만 내용은 전혀 다르잖아. 암만 스토리를 조금씩 바꾸는 것이 낙이긴 해도 이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설마 내 이벤트는 강제로 진행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가? 그런 거면 세상이 날 벼룩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하는데.

근데 나랑 류제랑 유네랑 비키까지 모두 다 친구인데 돌연히 저 세 사람이 스토리대로 렌 지미를 공격하는 것도 웃기다.

뭔가가 있어. 거슬린다. 이 감이라는 걸 무시할 수 없다. 지금까지 두 번의 챕터를 지나친 경험으로 나름대로 정의했던 이 세계의 룰에 허점이 보이니 재경은 수상쩍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해는 못 하겠지만 뭐, 지금의 렌 지미는 삼류 악당 렌 지미가 아니라 나 신재경으로 강화된 렌 지미니까 그런가보다 해야지.

근데 그렇게 따지자면 반대로 렌 지미인 내가 히로인들이나 주인공하고 친하게 지내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스읍… 잠깐, 유네의 호감도 물품이 소원 팔찌로 바뀐 건 그거랑 연관이 있는 건가? 그럼 비키의 펜던트 때는? 수학여행 때는 미나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기까지 했는데 그건 성공하지 않았나?

기준이 뭐야? 내가 렌 지미의 캐릭터성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친하게는 지낼 수 있되, 스토리는 따라가라는 의미인가? 근데 마지막 거는 완전 스토리가 엇나간 거 아닌가?

하아, 이 세계는 진짜 이상한 부분에서 대충이라니까.

하기야 그 대충대충 넘어가는 것 덕분에 삼류 악당인 나도 친구가 생겼으니 그건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다만, 몰라. 그냥 살래.

“렌, 렌! 언제까지 멍때릴 거야?”

“일단 이번 챕터를 공략해 보고 다시…….”

“렌! 야, 레엔!”

“렌 군?”

멍하니 흐려진 눈동자로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네와 류제가 재경의 몸을 흔들었다. 앞뒤로 두 명이서 흔드니 목이 오뚝이처럼 후드득 꺾였다.

“으악. 왜? 어, 나 언제 앉았대.”

“렌 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교실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춘곤증이라도 도진 거야?”

“으음… 그럴지도.”

잔뜩 몸을 움직인 후에 햇살을 잔뜩 받는 창가를 등지고 앉으니 나른하기는 하다. 아무렴 어떠냐. 앉아서 생각만 하는 건 성질머리에 안 맞아. 나는 행동파라고. 어찌 되었건 해피엔딩이 내 목적이니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장땡이다.

어디 한번 이번 체육대회도 붙어보자고 결심한 재경이 유네와도 이야기하기 편하게 몸을 90도로 돌렸다. 따사로운 햇살에 재경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생리적으로 흘러내리는 좁쌀만 한 눈물을 닦아냈다.

“5월이라 그런가 자도 자도 피곤하네. 학급 회의 끝나고 기숙사에서 낮잠이나 잘까.”

“또 밤에 잠 못 잘라. 우리 내일 수학 숙제 있잖아. 이제부터라도 유네한테 보여 달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 유네 너도 숙제 그만 보여 주고.”

“하지만 렌 군도 나름 열심히…….”

류제가 단호한 표정으로 재경 뒷자리 유네를 노려보았다.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눈빛이 잔소리하는 부모님 같은 시선이었다.

“류제 짜식, 깐깐하긴. 수학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으하아암.”

연이어 나오는 하품에 재경이 입을 크게 벌렸다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류제가 잔소리하려다 말고 하마 같다며 웃었다.

유네의 옆자리 책상 주인이던 미나는 그걸 듣고 혈압이 올라 툭 튀어나온 혈관을 책으로 가렸다.

뭐라고? 자―도 자―도 피곤하다고?! 감히, 감히 최상위 마족 4인에 들어가는 이 업마(業魔)이자 몽마(夢魔) 서큐버스,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의 악몽 마법을 그딴 식으로 무시하다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금쯤이면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췌해져서 불면증에 시달려야 하는데 왜 아직도 멀쩡하냔 말이야!

네가 무슨 백날 천날 잠이나 처자느라 세상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수마(睡魔, 水魔) 니켈이라도 돼? 웃기지 마, 하찮은 인간 주제에!

생각으로는 렌 지미에게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빠드득 빠드득 이를 가는 그녀는 겉으로는 청초한 낯으로 얌전하게 책을 읽는 척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자신을 방해한 렌 지미가 괘씸했던 미나는 류제 신리가 렌 지미에게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리려던 계획을 앞당겨 렌 지미를 누구보다 빠르게 류제 신리에게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이름하야 렌 지미에게 버림받은 류제 신리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무럭무럭 키워 ★아름다운 마왕님★으로 각성시킨다는 계획이다.

그럴 생각에 보름달이 뜨는 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악몽을 공들여 준비해 싱글벙글 렌 지미를 찾아갔던 미나는 꿈을 보여 주기는커녕 렌 지미의 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분노의 불길을 뿜었다.

인간의 무의식에 침범하는 서큐버스의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이 사천왕 플로냐가 못 들어가는 꿈이 있다니. 미나는 인간들에게 섞여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꿈이란 기억이다. 오감의 기억. 그 기억을 조금씩 바꿔서 괴롭히면 인간은 금방 초췌해진다. 그걸 노리고 렌 지미의 절망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저 인간은 무슨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절대 침입이 불가능했다.

머리카락 한 올도, 손톱 하나도 꿈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지 당한 서큐버스만 알 거다. 이제는 오기가 생겨서 밤마다 찾아가 끙끙거리고 있지만 바로 어제마저도 전혀 진전이 없어 미나는 욕구불만이 끓어올랐다.

그런데 저놈은 태평하게 하품이나 하고 있다니. 춘곤증 걸린 사람처럼 자도 자도 피곤하다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나, 사천왕이야. 몽마의 군주이자 마족의 톱 오브 톱이라고! 그런데 저 덜떨어진 놈의 꿈 하나에도 못 들어가는 게 말이 돼? 나보다 저 인간이 더 강하다는 말이야, 뭐야?

“웃―기―지― 마……!”

바득바득바득. 이를 갈며 책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책이 구겨지고 있는 것도 몰랐다.

셋이서 하하 호호 평화롭게 수다를 떨다가 미나가 대단한 기세로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 옆자리 유네가 깜짝 놀라 쭈뼛거렸다.

“미…미나 양은 토너먼트 주력 팀이 된 게 부담되었던 걸까?”

“그러게.”

“흥, 그럴 리가 있나.”

재경이 미나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족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뻔할 뻔 자지. 뭔지는 몰라도 류제를 어찌해 보려고 악독한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을걸. 미나를 신용하는 두 사람이 못마땅했던 재경이 투덜거렸다.

류제는 또 그런다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 저러니 렌이 미나를 좋아하는지 이제 모르겠고, 일일이 신경 쓰기 싫어서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류제, 빨리 나와! 언제까지 꾸물거릴 거야?”

“학급 회의 시작하려나 보다.”

“서기 잘해, 류제 군~!”

비키의 부름에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귀찮다고 중얼거린 류제가 앞머리를 시원하게 쓸어 넘기자 늘 일정하게 콧잔등을 스쳤던 긴 앞머리가 걷히며 봄볕의 하늘처럼 따뜻한 눈동자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우수에 찬 뚜렷한 이목구비와 어우러진 잘생긴 얼굴이 세상에 나왔다가 차마 다 살펴지기 전에 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류제의 맨얼굴에 옆자리 여학생이 완전 헬렐레했다.

얼굴 하나만으로 여자를 꼬시냐 이 발칙한 놈아. 재경이 부러움을 담아 입을 비죽거렸다.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건 그저 귀찮아하며 교탁으로 향하는 류제는 재경이 원하는 느낌의 인기를 누려댔다. 질투가 안 날 수가 없다.

목을 가다듬은 비키가 학생들에게 집중을 요구했다. 자습하던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미리 이야기했다시피 오늘 체육대회 종목별로 출전할 사람을 뽑을 거니까 적극적으로 참여해 줬으면 해.”

회의를 주도하는 반장 비키가 비장한 목소리로 학급 회의를 시작했다.

체육대회 1등을 한 반에게는 반 학생 전원에게 평가 점수 5점이 부여된다. 비키는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킨다는 중대한 사명을 등에 업은 히로인이고,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들어갔을 때 진급에 큰 영향을 주는 평가 점수를 그냥 놓칠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 속 체육대회는 전장 속 스파르타. 말 그대로 스파르타다.

“상품은 짝수 반과 홀수 반으로 나누어진 청백전에도 있고 반 대항에도 있어. 청백전에서 이긴 팀에게는 평가 점수를 각각 2점씩 준다고 해. 반 대항도, 청백전도, 기간트리카 토너먼트도 죄다 이겨야 한다는 말이야. 자, 류제, 얼른 칠판에 적어!”

비키가 준비해 온 종이를 류제에게 내밀었다. 류제는 예쁜 글씨로 쓰여 있는 체육대회 종목을 읽으며 느릿느릿 칠판에 분필을 갖다 댔다.

“우리는 어느 종목이든 최정예로 팀을 짤 거야. 다들 각오 단단히 해. 거절은 거절한다!”

체육대회 시작도 전인데 비키는 벌써부터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중인 것 같다.

[구기 대회]

남자 농구 (청백전) (청 팀 5명, 백 팀 5명)

여자 배구 (6명)

남자 배구(청백전) (청 팀 6명, 백 팀 6명)

여자 피구 (12명)

[달리기](참가자 중복 가능)

장거리 이어달리기 (남녀 혼성 4명)

100미터 달리기 (남녀 각각 1명)

장애물 달리기 (남녀 혼성 2명)

[기타]

줄넘기 (8명, 줄 돌리는 사람 2명 포함)

줄다리기 (반 전체)

턱을 괸 재경이 류제가 판서하는 종목들을 구경했다. 저기에 남자들이 좋아하는 축구가 없는 이유는 반 4개를 합쳐도 남학생이 11명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겠지? 어우, 진짜 남학생 적다.

“…으하암.”

졸리지만 재경도 기지개를 켜 잠을 깨웠다. 류제가 저기서 서기를 하고 있는 걸 보니 벌써 수학여행에 다녀와서 한 달이 지난 게 와닿는다.

난생처음 가본 수학여행도 머리 좀 깨진 거 말고는 재미있었는데 체육대회는 얼마나 색다를까. 빙의 전에는 아무래도 이런 학교행사에 잘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겠어서 더 기대되었다.

나도 별로 관심 없었고, 주변에서도 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지. 선생님은 날 완전 망나니 문제아 취급했고. 뭐, 망나니 맞았지만.

“흐음.”

그래도 중학생 때 반 친구들이 다 같이 뭔가를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즐거워 보이는 게 부러웠다.

그때 나는 지금처럼 여유도 없었고 한창 학교 밖에서 싸움만 해댔으니까. 그런 소외감 안 느끼려고 더 밖으로 나돌았었지. 그러던 나도 드디어 평범하게 체육대회를 즐기는구나.

이번 챕터는 호감도가 아니라 친목을 다지는 게 주라서 체육대회에서 중요한 이벤트는 왕녀 호감도 이벤트 하나밖에 없다. 즐거운 학교생활 뒤에 도사리는 키아나트리체의 높으신 분들 이야기가 서술되지만 그건 뭐 알 필요 없고.

여기서도 수학여행 챕터처럼 선택지에 따라 여러 가지 루트가 생기지만 스토리 중심인 챕터니 무난하게 흘러가겠지 싶다.

라고 해봤자 청춘은 내가 아니라 히로인들과 주인공이 누리게 될 거지만 말이다. 재경이 멍하니 뭐라 뭐라 설명하는 비키를 쳐다보았다.

나야 공인된 삼류 악역이고 친구들이 애써 만들어 나가는 ‘다 함께 힘내자!’ 분위기에 초를 쳐서 엉망진창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하는 족족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 여파에 휩싸여서 모든 방해가 실패하는 그런 역할인 놈인데 뭐.

“하아… 벌써부터 그런 걱정이나 해야 하다니.”

“렌 군, 뭐라고 했어?”

“아니, 암것도 아냐.”

렌 지미의 추잡한 삼류 악행을 살펴보면 응원팀이 직접 만든 응원봉을 체육대회 당일 남몰래 망가뜨려 놓는데, 그 디자인이 훨씬 괜찮다는 평을 받아서 분위기가 더 업되어 버리는 게 하나.

여학생 구기 대회에서 야유를 퍼붓다가 우연으로 안면에 공을 맞는 게 둘.

엄살을 피우다가 더 크게 다쳐 양호실에 끌려가고 결국 간식 타임 이후에 어디선가 기어들어 오는데 간식이라곤 남은 쓰레기가 전부라 하늘을 향해 짜증을 내는 게 셋.

토너먼트에서도 쓰러진 왕녀에게 야유를 퍼붓다가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에게 묵사발로 당하는 게 넷.

체육대회가 끝난 후에는 휴일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서 이 챕터의 ‘진짜 이벤트’에서는 눈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로 역할은 끝이다.

다음 챕터부터 다시 멀쩡하게 등장해서 또 히로인과 주인공을 괴롭히지.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암만 생각해도 렌 지미는 삼류 악당보다 더 삼류 악당 같은 엑스트라 놈이라니까. 렌 지미 이 자식, 너도 좀 안쓰러운 삶을 사는구나. 재경이 잠시 원조 렌 지미를 향한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것보다 챕터 끝의 ‘진짜 이벤트’라. 제일 걱정인 건 바로 그거다. 사실상 체육대회의 청춘 가득한 이야기는 체육대회 다음에 있을 중간 보스 침략의 포장지일뿐더러 더러운 키아나트리체 상층부의 지배욕이 드러나기도 해서 그걸 따지면 체육대회를 기대하다가도 김이 샌다.

것보다 류제, 왜 날 쳐다보고 있는 거냐?

“야, 렌! 배구 룰 아냐고 묻고 있잖아.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해?!”

“어…어?!”

챕터 후반에 있을 무자비한 사건에 관한 고민거리 때문에 또다시 멍때리던 재경이 비키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그 반쯤 미친 중간 보스의 난입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사건들 중 단연 손에 꼽을 만큼 심각한 일이라 ‘게임 오버’라는 최악의 가정에 들어갔던 것 같다.

재경이 어리둥절해하자 비키가 지금껏 무슨 이야기를 들었냐며 질타했다. 평가 점수를 후하게 주는 몇 안 되는 학교행사 중 하나인 체육대회인데 관심도 없이 미적미적 안일하게 반응하는 태도가 열받는 모양이다.

그녀는 기어코 탁자를 쿵쿵 손으로 치며 짜증을 내었다.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해줘야 하다니. 지금껏 한 짓이 헛짓거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야, 바보 렌! 회의에 집중하라고 했잖아. 청 팀 남자 배구는 우리 반 남학생 두 명이 무조건 참가해야 하는데 너랑 류제가 해야 할 것 같다고! 듣고 있어?”

“뭐어? 배구우? 싫어! 나 배구 룰 몰라. 룰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가냐?”

“몰라도 해. 그렇다고 유네를 보낼 수 없잖아!”

“왜? 유네도 할 수 있지. 유네 운동 못 한다고 차별하냐?!”

“배구는 키가 큰 사람이 해야 유리하단 말야. 배구를 모른다는 유네를 리베로로 보낼 수도 없고, 그러니 너라도 나가야지. 지금까지 한 게 그 이야기잖아. 또 딴생각했지?”

리… 뭐? 그게 뭐야. 재경이 생소한 단어에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띵 그렸다. 리베로고 뭐고 배구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진데. 아니, 난 배구 말만 들어봤지 그게 뭐 하는 스포츠인지 모른단 말야.

“나도 배구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래도 상대적으로 유네보다는 키가 크니까 조금이라도 낫겠지. 무조건 출전이니까 공부해 놔. 반드시 이겨야 하니까 그거 명심하고!”

비키가 엄포를 놓았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공부’라는 말에 재경이 세상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남자 수가 얼마나 되어야 나랑 류제가 합쳐야지 짝수 반 4개가 들어가는 청 팀 남자 배구 팀이 만들어지는 겨? 배구는 몇 명이서 하는 건데?

“미리 말하는데 졌을 때 나한테 뭐라고 하기만 해봐라. 난 분명 못한다고 말했어.”

“운동신경 좋잖아. 그걸로 어떻게든 해봐. 지면 용서 안 할 테니까 두고 보고. 다음, 농구는 류제만 나가는 걸로 하고…….”

“야, 나 배구보다는 농구 할 줄 아는데!”

“다른 반에서 무조건 키 큰 애로 뽑으라고 이야기 이미 정리됐어. 유네보다 키 커서 배구선수로 뽑힌 걸 다행으로 알아.”

농구에 흥미를 보이는 재경을 비키가 매정하게 거절했다. 싫어도 인원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남학생이 경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재경은 반박하려다 뭐라 말을 못 하고 못마땅하게 꿍얼거렸다.

말인즉슨 남장 여자인 유네를 제외하고 나랑 류제랑 비교하면 내가 작다 이거네? 젠장, 부정할 수가 없다. 배구는 잘 몰라서 싫은데. 그리고 농구가 더 멋지잖아!

어차피 게임 내에서 삼류 악당 렌 지미는 반 친구들이 하는 경기에 사사건건 시비만 걸다가 정의 구현 당하는 것만 나오지 무슨 종목에 나가는지는 안 나와서 좀 기대했더니. 이 세상은 삼류 악역에게 참 불공평해.

배구가 무슨 게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지나가는 CG에서 보면 하얀 공 맞고 눈이 X자로 돼서 나뒹구는 것이 작게 나오는 건 본 것 같다.

뭐든 히로인과 주인공이 나가는 종목인 장거리 이어달리기와 기간트리카 토너먼트 말고는 저 수많은 종목들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걸고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필살의 스토리 정리 노트에도 그렇게 썼던 것 같고.

언급해 봤자 히로인들이 참여한 종목들의 일러스트가 줄줄이 지나가면서 이런 걸 했습니다~ 하고 보여 주는 정도?

거기서도 약방의 감초처럼 삼류 악역 역할을 하는 렌 지미는 늘 고통받고 있었지. 젠장, 불쌍한 렌 지미 자식. 게임 한창 플레이할 때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넌 늘 고통받았구나.

재경이 이번 체육대회에서도 실컷 고통받을 생각에 지레 머리가 아파졌다.

“이어달리기…는 이따 정하고 우선 100미터 달리기는 남녀 각자 한 사람이니까… 남자 선수 먼저 정하자. 류제, 너 이것도 나가면 좀 힘들겠지?”

“나가는 종목이 많은 것 같긴 한데.”

“야, 왜 류제만 무조건이냐? 달리기는 나도 자신 있거든?”

구기 대회에서도 류제가 전부 활약할 마당에 그나마 자신 있는 종목에서 여자애들에게 인기를 얻고 싶었던 재경이 벌떡 일어났다.

비키는 당연히 잘 달리는 사람을 내보내고 싶었기에 가장 잘 달리는 사람이라면 그게 류제든, 렌이든, 유네든 아무 문제 없었다.

재경이 자신만만한 표정이니 비키가 어디 한번 PR을 해보라며 턱짓을 했다.

“기록은 몇 초?”

“최근에는 안 재봐서 잘 모르는데… 몇 년 전에는 꽤 잘 달렸어.”

“뭐야, 그 부정확한 묘사는. 그래가지고는 자리를 내줄 수 없어.”

재경은 빙의 전 자신의 몸이 지금 렌 지미의 몸과 동일한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빙의를 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원래의 몸처럼 눈높이도 맞고 움직임도 맞아서 그때의 달리기 실력을 지금도 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2년 전에 100미터 12초 7 나왔는데. 50미터는 6초 3.”

“잠… 뭐?! 거짓말하지 마!”

“100미터가 12초 7이라고?! 어빌리티 안 쓰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사람이 그래?”

“렌, 너 허언증 있는 거 아냐?”

“뭐어? 내가 뭐에 쓴다고 거짓말하냐?”

“그…그러면 류제보다도 더 빠르다는 거잖아. 류제 너 몇 초랬지?”

“13초 5…였었는데. 어빌리티 안 쓰고.”

“흥, 나 달리기는 진짜 빠르다니까. 백퍼 일등 한다, 내가. 장담하지.”

재경이 기고만장해졌다. 비키는 미덥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저런 자신만만한 얼굴인데 지금 당장 증명해 보라기 미묘해서 일단 100미터 남자 주자에 렌 지미의 이름을 썼다.

류제는 렌이 달리기가 빠르다는 사실을 이따금 느끼고 있었기에 새삼 놀라지 않았다. 저번 달 수학여행 때 미나를 구하러 달려나가는 렌의 뒷모습이 빨랐다는 건 기억나니까.

재경이 달리기에 자신하는 이유는 실제로 중학교 2학년 때 반강제적으로 체육대회 계주에 나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맨날 쌈박질하다 걸려서 도망가는 일상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재경은 달리기만큼은 끝내주게 빨랐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나, 당시 키 165이었던 재경은 달리기 기록 측정을 했을 때 굉장히 빨랐다는 것이 소문이 나서 억지로 계주에 나가 1등을 했다.

그때 잠시 반에서 떠오르는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그걸 아니꼽게 본 선배하고 또 싸움이 붙어서 학교 잘 안 나오다 보니 인사해 주는 친구가 없어졌었지. 중학교 때 유일하게 있었던 좋은 기억이라고나 할까.

음, 옛날 생각이 나는군. 재경이 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을 감회가 새롭게 떠올렸다.

“그럼 여자 100미터. 달리기 자신 있는 사람.”

“나, 난 옛날에 13초 9였어.”

미나가 손을 들었다. 책만 읽으면서 얌전하고 몸 쓰는 일 안 할 것 같은 미나가 갑자기 의욕을 보였다. 여자 100미터가 13초 9면 엄청 빠른 편이 아닌가.

“와, 굉장한데?”

“렌은 저래 보여도 육체파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데 미나 의외로 빠르구나.”

반전 매력이라 그런지 주변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가 나왔다. 재경은 저 사악한 서큐버스가 무슨 꿍꿍이인지 믿을 수가 없어 사정없이 째려보았다. 미나는 왜 그러냐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 얌전한 가면 아래에는 하찮기로는 개미 아래로 취급하던 렌 지미의 꿈에 침입하지 못한 이후 급락한 자존심을 세우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존재했다.

사천왕의 이름을 걸고 감히 인간 중에서도 하위에 속하는 잡쓰레기에게 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녀가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 렌 지미에게 승부욕을 발동시킨 것이다.

렌 지미, 넘어져서 탈락이나 하라지! 그녀가 착하게 웃으며 저주를 걸었다.

“좋아, 미나보다 빠른 기록이 없으면 미나로 정한다. 그럼 자연스레 이어달리기도 정해졌네. 미나, 렌, 류제, 또…….”

“아… 잠깐. 100미터 나가면 이어달리기도 해야 하는 거야?”

그건 생각 못 한 미나가 당황했다. 달리기 기록으로 렌 지미를 생선 뼈 바르듯 발라버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렌 지미와 협동해서 이길 생각은 절대 없었다. 아니, 죽어도 싫었다. 내가 왜!

그녀가 끔찍하다며 소름이 돋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이어달리기는 힘들어?”

“으응. 나 다 같이 하는 것에는 부담을 많이 느껴서. 실수하면 너무 미안할 거 같아.”

불쌍한 척, 안쓰러운 얼굴로 한마디 해주면 괜히 설득할 것 없이 멍청한 인간들은 다 넘어오게 되어있다.

미나의 말대로 기간트리카 토너먼트까지 생각하려면 부담감이 클 듯한데 그다음으로 점수가 큰 장거리 이어달리기까지 맡기엔 그녀의 성격이 못 버틸 것 같았다.

미나 다음으로 기록이 좋은 사람은 비키였다. 비키는 스스로 손을 들어 이어달리기에 나가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이어달리기는 내가 할게. 나도 꽤 빠른 편이라 자부할 수 있거든. 다음 마지막으로는…….”

“…내가 나가지.”

뒤이어 왕녀가 손을 들었다. 고귀한 신분인 왕녀가 흙을 뒤집어쓰고 달린다는 말에 이걸 정말 써야 하나 비키가 눈치를 보았다. 항상 차분하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대결하는 왕녀님이 전력 질주라니. 매칭이 되지 않았다.

“괘…괜찮으시겠어요?”

“물론. 나도 달리기는 자신 있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왕녀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체육대회에는 어빌리터들의 재능을 보기 위해서 각계 고위 공직자들이 많이 구경을 왔다. 그중 그녀의 아버지, 키아나트리체의 황제 또한 있었다.

아바마마께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거야. 예전처럼 다시 날 보게 만들어 주겠어.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토너먼트와 달리기 모두 최선을 다하겠노라 굳은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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