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7) (107/112)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7)

안티 슬렉터의 파장이 땅을 흔들기 직전 재경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비키와 놀면서도 미나를 예의 주시하던 재경은 아무도 못 본 미나 플로리아의 본얼굴을 목격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지금까지 다 연기였어. 마족 자식, 감히 누구를 속이려고. 입을 억눌러 다문 재경이 속으로 혀를 찼다. 가냘픈 그녀가 위태롭게 절벽 근처를 서성이는 게 아슬아슬해 보였다.

재경은 류제가 어떻게 나오나 확인하는데 얼떨결에 눈이 마주친 류제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눈가를 휘었다. 앞머리는 협곡의 바람에 펄럭거리는데 거참 미연시 주인공처럼 잘생겼다.

이 속도 없는 멍청아. 지금 웃을 때가 아니란 말야.

“…류제.”

곧 있으면 너를 강제로 휘두를 힘을 깨달아야 하는데 팔자도 좋다. 재경은 가슴이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해서 미칠 것 같았다. 결과는 변하지 않겠지만 저 반푼이 주인공이 마족의 손에 떨어질까 걱정돼 돌아버리겠다.

“왜 그래? 무서워? 여기서는 협곡 밑이 안 보여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런 거 아냐. 다름 아니라, 그―”

“그럼 왜?”

“미…미나를…….”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혀 모르는 류제는 순수한 얼굴로 재경을 걱정했다. 미나를 조심하라는 말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 가슴이 막혀 재경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젠장, 내가 미래를 알고 있으면 뭐 하냐고. 류제는 결국 자기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걸 알고 말 텐데. 진짜 마음에 안 들어!

“미나가 왜… 으앗!”

바로 그때 협곡 일대의 지반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경은 류제 이벤트의 시작을 직감했다. 제길,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란 거 알아도 싫다.

근데 유네의 호감도 물품은 바뀌었잖아. 저번 달 비키의 호감도 이벤트 때도 펜던트 돌려줄 수 있었잖아! 그건 무슨 차이야? 그땐 바뀔 수 있었던 거 아냐?

“이젠 나도 몰라.”

“렌! 어디 가?”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렌이 무턱대고 절벽으로 달려가자 류제가 놀라 말렸지만 재경은 완전 이판사판이었다.

태평하게 걱정만 하는 건 성미에 안 맞는다. 역시 난 행동파라고.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시도 안 해보는 것보다야 낫겠지!

“미나?”

뛰어가는 재경에게 시선을 맞추던 류제는 그 끝에 차마 도망가지 못한 그녀를 발견했다. 겁에 질린 분홍색 눈동자가 류제를 쳐다보았다. 도와달라는 것 같다. 속에서 잊고 있는 뭔가가 콱 차서 답답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아까 미나 이야기를 왜 꺼냈나 했더니 설마 렌 너―

“미나, 피해!”

말로만 외치는 그 대신 용기 있게 나서는 렌에게 류제는 내가 갈 테니 너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라고 말리고 싶었다.

미나에게 뛰어간 재경이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못된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아채는 듯했다.

“당장 여기서 비켜!”

웃기지 마. 마족 주제에 내 평화를 방해할 너희들의 꿍꿍이가 순순히 이행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나 신재경이 있는 한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이 빌어먹을 세상아. 내 류제를 위해서 있는 힘껏 방해해 주마.

“레…렌?!”

미나가 당황해하자 재경은 이번 승리자는 자신이라며 자랑스레 코웃음을 쳤다.

“으라차!”

그는 사정 봐주지 않고 미나를 안쪽으로 끌어당겨 내동댕이쳤다. 배려심이라고는 여간 보이지 않는 행동에 잠시 렌이 미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착각했던 류제도 얼음이 되고 말았다.

엉덩방아를 찧은 미나도 이건 예상 못 했는지 어리벙벙한 표정이었다.

“레…렌 지미? 어어?”

“다들 안쪽으로 대피하세요. 미나 학생도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지금 슬렉터가― 렌!”

평소라면 ‘렌 학생’이라며 호칭을 붙이는 세라지만 갑자기 이름 한 자만 외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녀가 학생들의 피신을 통솔하는 위치에서는 미나가 원래 서있던 곳의 지반이 찰흙처럼 무너지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렌, 거기서 당장 나와요!”

지반이 푹 내려앉았다. 미나를 방해했다는 성취감으로 기고만장해 있던 재경이 뒤늦게 벗어나려 했지만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지반이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이건 절대 못 피해. 망할, 결국엔 이렇게 되는군. 그래도 미나에게 류제를 맡기는 것보다야 차라리 내가 함께하는 게 나으려나. 재경이 두려움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력하게 밑으로 떨어지는 감각. 재경은 무너지는 균형 속에 무의식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둑시니처럼 새까만 어둠이 재경을 향해 손아귀를 뻗쳤다.

멍청이 류제, 내 몸에 흠집이라도 났다가는 엉덩짝을 걷어차 줄 줄 알아.

육체는 추락하는 감각을 거부했다. 숨이 거칠어지고 시야가 아찔해진다. 눈앞이 컴컴해지면 질척질척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다.

“렌!”

달려가던 도중 렌이 협곡 아래로 떨어지자 절망해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던 류제는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렌의 뒤를 따랐다. 아직 안 늦었다.

“안 돼요, 류제 학생! 지금은 슬렉터에 이상이 생겨서 날 수가 없어요!”

귀가 먹은 류제는 만류하는 세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제 심장 소리만 고막을 지배했다.

함부로 몸을 내던지는 걸 지켜봐야 하는 사람 마음 졸이는 것도 모르고. 공중에서 기간트리카 장갑할 줄도 모르잖아. 높은 곳도 무서워하면서 왜 넌 항상!

“렌, 내 손 잡아!”

협곡의 아래로 함께 뛰어든 류제가 저 멀리 추락하는 렌에게로 손을 뻗었다. 너무 멀어. 류제가 중력의 힘을 빌려 협곡의 절벽을 땅처럼 질주했다.

“기간트리카, 장갑!”

더 빨리 도달하길 바라는 마음에 점점 초조해진다.

“기간트리카… 장갑, 장갑!”

안티 슬렉터 파장으로 먹통이 된 슬렉터는 류제가 아무리 장갑을 외쳐도 소식이 없었다. 왜 안 되는 거야. 시간도 없는데! 설마 지진의 영향인가?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때!

손에 닿을 듯 멀어지는 렌을 보자니 류제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좌절감에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떨어지면 자신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다.

포기하긴 일러.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아무것도 장담 못 해. 렌만큼은 절대 그렇게 두지 않아.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력으로 떨어지며 손을 뻗었지만 줄어드는 거리는 미미했다. 두 눈은 추락하는 인영에 집중되어 있지만 어빌리티로 아무리 강화해도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란 말야. 답이라도 알려 달라고!

류제는 아득해지는 정신에 근성이 없다며 냉대하던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떠올렸다. 얼마나 더 바라야 하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렌―

그러나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까무러치게 기절한 재경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낭떠러지에 불쑥 튀어나온 바위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중력가속도가 붙은 힘으로 단단한 바위에 머리를 맞았다면 생사가 위험하다.

그걸 보고 있어야만 했던 류제의 심장이 조일 듯이 아파왔다. 이틀 전 렌이 후두부를 맞고 쓰러졌을 때 느꼈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입으로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것이 단어로 형성되지 않았다. 시간이 느려져 간다. 뻗는 손이 무력하고 쓸모없다.

포르테의 말이 맞았다. 어빌리티가 강하면 뭐 하나. 정작 가장 중요할 때 소중한 사람도 구할 수가 없는데.

바람이 시려 흐른 눈물이 흩날리는 앞머리와 같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류제의 동공이 일순 붉게 빛났다. 수렁에 빠지는 절망감을 느꼈던 류제는 지푸라기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에 제 속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힘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한 힘의 짜릿함. 그 대가로서 내재된 무엇인가를 향한 증오.

렌의 머리에서 터져 나오는 핏방울이 류제의 볼을 스칠 때, 렌의 머리를 감싸 안은 그는 다른 손과 발로 절벽 십수 미터를 긁어 매달려 한 마리의 짐승처럼 주륵 미끄러졌다.

조금만 늦었어도 땅에 처박힐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추락이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괴물 같은 힘으로 절벽에 매달린 류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붉어진 동공이 확장되어 먹잇감을 찾아 헤매듯 피 냄새를 따라 움직였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류제는 인간의 피 냄새에 대한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렌을 끌어안은 손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가 미치도록 탐난다. 그 욕구를 참지 못한 그는 떨리는 혓바닥으로 제 손바닥을 핥았다. 얼굴은 발정한 것처럼 붉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감질난다. 인간의 피를 맛보자 먹이를 탐내는 이가 미치도록 근질거렸다.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가 입 안에서 반짝거렸다.

모든 마족의 근원인 마왕의 혼이 류제의 이성을 잠식했다. 인간을 향한 분노. 참을 수 없는 배고픔.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애처로움. 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류제는 피를 핥는 것도 모자라 머리마저 물어뜯으려는 자신의 이상행동에 소스라쳤다. 일을 치르기 전 그가 렌을 뿌리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굴렀다.

해가 들어오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협곡 아래. 류제는 그런 곳을 살피기에 무리가 없었다. 어빌리티를 쓴 게 아니건만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그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다가 재경이 있는 곳에 착지했다.

“허억…헉. 렌. 괜찮아?”

티끌만큼 남은 이성이 저기서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자가 자신의 친구 렌 지미라고 경고했다.

네발로 기어 다가간 류제가 재경의 몸 위에 올라탔다. 등에서는 죄의 상징으로 검은 피막의 날개가 솟아났다.

100년 동안 찾아 헤맸던 영혼의 기척이 마족인 미나의 감각을 오싹하게 덮쳤다.

계획했던 대로 힘의 각성은 이루어졌지만 그 시작이 마왕의 심복이자 사천왕 중 한 명인 그녀의 손이 아닌 한낱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그녀가 치를 떨었다.

렌 지미. 왜 나를 구한 거지? 도대체 왜?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나? 저능한 인간 주제에 감히 나를 방해하다니. 마왕님께서 네까짓 것에 마음을 둔다 하여 거만하게 굴기는. 하, 남녀를 떠나서 어차피 마족은 인간과 맺어질 수 없어.

마족은 인간을 증오하고 미워해야 한다. 인간은 마족에게 있어서 그저 갈기갈기 먹어 치울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마왕님의 뜻이자 마족의 존재 의의란 말이다.

미나의 얼굴에 분노가 숨김없이 드러났다. 네까짓 인간이 감히 우리들의 첫 거사에 개입하다니. 미나는 신경질적으로 땅을 쳤지만 이미 벌어진 일, 후회해도 늦었다.

두고 보자, 렌 지미. 이를 바득 갈던 미나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왕녀 저하, 어서.”

“…그래.”

지진이 일어나자마자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먼저 근거리 이동 능력으로 니냐롯트의 앞에 나타났다.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루이나는 소중한 이를 누구보다 안전하게 보호했다.

니냐롯트는 류제와 렌이 떨어진 협곡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도 도와줄 수 없다. 니냐롯트는 의연하게 학생들을 통솔하는 담임 선생님이 부러웠다.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제대로 해나가지 못하는데 흐르는 시간이 유능함을 만드는 것을 아닐 테다. 니냐롯트는 이 사고가 안타까워 심장을 꼭 붙잡았다.

“윽… 뭐지?”

한편 ‘힐링’과 더불어 그녀의 어빌리티인 ‘탐색’ 능력으로 소름이 돋을 만큼 강한 마족의 기를 느낀 세라가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학생들이 떨어진 협곡 아래에 뭔가가 있다.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등급의 마족이다. 어쩌면 좋지. 지금 다른 선생님들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어 큰일인데. 직접 내려가고 싶지만 슬렉터가 먹통이 되어서 학생들을 구하러 갈 수가 없다. 류제 학생이 렌 학생을 무사히 구했을까.

“제발 그래야만 해. 유리에, 내게 기적을 보내 줘.”

마음이 흔들려버린 세라가 짧게 기도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다잡은 그녀는 학생들이 모두 협곡에서 탈출한 것을 확인했다.

최근까지 잠잠하던 마족이 왜 하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온 이런 시기에 반응을…….

“반장… 비키 셀로니아 학생!”

“네, 선생님! 저 여기 있어요.”

“반 친구들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제1 비상 상황입니다. 어서!”

제립학교에서 분배하는 긴급 상황에 관련한 매뉴얼대로 키아나트리체의 미래인 학생들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라는 세라의 명령을 받은 반장 비키가 친구들을 인솔했다.

이곳에 남은 세라는 먹통이 된 슬렉터로 다른 선생님들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하지만 슬렉터는 ‘인식 불가’라며 어빌리티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경고 메시지밖에 뜨지 않았다.

비키가 패닉이 된 학생들을 모으는데 유네만 홀로 주저하며 떠나가지를 못했다. 류제도, 렌도,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사고로 떨어졌는데 혼자서만 도망갈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야!”

그런 그녀를 잡아서 이끈 것은 유네의 조원이자, 서바이벌 게임에서 대장을 맡았던 ‘무게’ 어빌리티 학생이었다.

“안 돼. 렌 군하고 류제 군이 아직 저기에 있단 말야!”

“네가 여기 남아서 알짱거리는 게 민폐밖에 더 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착한 척하지 마. 진심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녀는 버티는 유네의 팔목을 붙잡고 억지로 학생들이 모인 곳에 합류했다. 유네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협곡 쪽을 돌아보며 두 사람이 부디 무사하기를 빌었다.

“왜 슬렉터가 어빌리티를 인식하지 못하는 거지? 나라카의 마기에 관한 오차라고 해도 이런 보고는 지금까지 없었는데?”

세라가 슬렉터의 보안 코드를 몇 차례 수동으로 입력했지만 여전히 먹통이었다.

“제발 말 좀 들어!”

의심하기 싫지만 고장 난 타이밍이 작위적이었다. 게다가 류제도 지금껏 올라오지 못한 것을 보면 이 문제가 세라 개인의 문제가 아님이 확실했다. 협곡 밑에서 느껴지는 마족의 기운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기간트리카 없이 저 마족을 홀로 상대를 해야 할지도 몰라. 구조 요청이라도 보낼 수 있으면 좋은데. 류제 학생, 렌 학생. 제발 무사하기만 해주세요.

바로 그때 세라 밀로니의 어빌리티를 인식했다는 알림음이 뜨며 슬렉터가 정상 가동되었다. 지진은 그 여진(餘震)까지 끝났다. 마왕이 힘을 각성했으니 인간들에게 원인을 분석당하기 전 그들이 안티 슬렉터 파장을 없애고 꼬리를 잘랐다.

세라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곧바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마족이 있더라도 선생님인 그녀는 학생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통신 보안. 여기는 1―8의 세라 밀로니. 들리는 사람 있습니까? 협곡 아래에서 등급1의 마족을 감지했습니다. 슬렉터가 먹통이 되어 지금 보고합니다.”

―여기 1―6, …지진 재난… 긴급 상황 3―2의 매뉴얼… …들을 대피시켰습니다. 밀로… 생님의 위… …했습니다. 마족과 대치 중… 니까?

“아뇨,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협곡 아래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지진 때문에 우리 반 학생 두 명이 아래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서 구해야 합니다.”

―…혼자서는 …합니다. ……. …할까요?

“통신 보안… 통신 보안!”

―…….지직

간신히 연결되었던 6반의 담임과의 통신이 끊겼다. 아직 슬렉터의 기능이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학생들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세라는 마냥 지원 병력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치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할 수 있다, 세라 밀로니. 마족과 대치하는 게 처음은 아니잖아.”

두려움을 군인의 마음으로 숨긴 그녀가 어두운 협곡 아래를 홀로 강하했다.

“…류제 학생. 들리시나요?”

학생용 슬렉터는 서로 통신이 불가능하지만 학생용 슬렉터와 선생님들이 사용하는 교직원용 슬렉터끼리는 담당 학생이면 통신이 가능했다.

세라가 류제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지도를 킨 그녀가 협곡 아래를 중점적으로 슬렉터 반응을 살폈다.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니 협곡 아래 두 개의 슬렉터 반응이 포착되었다. 다행이다. 아직 슬렉터에 생명 반응이 있어.

그러나 그녀의 ‘탐색’ 어빌리티 역시 같은 위치에서 마족의 기를 느꼈다.

“설마, 마족이 학생들을 노리는 건가.”

그녀가 주저할 것 없다며 위치가 포착된 곳으로 활강했다. 마족과 상대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들만큼은 구해낼 것이다.

그녀가 긴급 상황 때 쓰는 유도미사일 발사대를 등 뒤에 있는 부스터 아래에서 꺼냈다. 기다란 총포가 펼쳐지고 손잡이가 그녀의 손에 잡혔다.

교직원 기간트리카에 내재된 긴급용 미사일은 총 6발. HUD에는 학생들이 찬 슬렉터에서 보내는 위치 정보가 떴다. 거기에 ‘탐색’ 어빌리티로 느껴지는 마족의 기운이 더해졌다.

“거기서 비키세요. 그렇지 않으면 큰코다치게 될 겁니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그녀가 총구를 어두컴컴한 그것에게로 향했다. 희미한 마족의 인영을 HUD가 폴리곤으로 형태를 만들어 추적했다. 인간을 싫어하는 마족에게서 어떤 빈정거림이 돌아올까 긴장하며 세라가 적을 주시했다.

끔찍한 기억만 떠오르게 하는 마족의 날개. 그것을 가진 괴물이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인간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선…생님?”

그 마족에게서 류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믿을 수 없었던 세라가 라이트로 그쪽을 비추었다. 앞머리를 코끝까지 내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가르마 새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의 동공이 붉었다.

박쥐의 피막을 가진 날개는 등에서 돋아 사용법을 모르는 채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저건 제립학교 교복이잖아? 류제 학생?! 아냐. 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 저건 아무리 봐도 마족이다.

“렌이 다쳤어요. 도와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거…거기서 움직이지 마세요!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제 학생을 흉내 내는 겁니까?”

저 떨리는 음색을 들으면 마음까지 흔들리지만 인간을 꾀어내는 것 또한 마족의 악행이다. 긴장을 늦추지 않은 그녀는 미사일의 총구를 마족에게로 향했다.

“얌전히 제 학생을 놓고 떠나주세요.”

저 마족이 들고 있는 것은 렌 학생. 다쳤는지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라 선생님!”

“움직이지 말라 경고했습니다!”

렌을 안은 마족은 세라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마족의 악한 기에 짓눌릴 것 같았던 그녀는 가까워지는 마족의 그림자에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아…안 돼!”

그녀가 스스로의 행동에 경악했다. 렌 학생이 말려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녀가 뒤늦게 후회하며 손을 뻗는데 앞에 있던 마족은 이깟 인간의 무기 따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미사일을 옆으로 쳐냈다. 궤도가 엇나간 미사일이 벽에 처박혀 폭파시켰다.

굉음이 협곡 지대를 지났다. 렌 학생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미사일도 소용없다니. 그녀가 침을 꿀꺽이며 다가오는 그를 주시했다.

“세라 선생님. 제발 렌을 살려 주세요…….”

나머지 미사일을 조준하던 그녀는 그 마족에게서 마족은 흘릴 수가 없는 눈물을 발견하고 크게 동요했다.

날개 달린 마족이 죽어가는 인간을 내밀었다. 또 그때처럼 사람을 농락하려는 마족의 교활한 함정일까. 그녀는 고민했지만 저 마족은 으레 마족이 그렇듯 거만한 목소리로 인간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공격의 의사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저 마족이 그녀의 학생인 류제 신리와 너무나도 똑 닮아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일단 렌 학생을 제게 돌려주세요.”

류제와 닮은 마족에게서 렌을 건네받은 그녀가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안전하게 거리를 둔 그녀가 렌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장은 약하지만 뛴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가 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어빌리티를 발현한 그녀가 렌을 치료하자 마족이 안도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를 압박하던 마족의 기운이 순식간에 누그러들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정말… 정말로 당신은 류제 학생인가요?”

“네. 분명 그래야만 하는데 이게 뭐죠? 이상한 감각 때문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요.”

그건 세라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같이 추락했다고 생각한 학생이 마족이 되어있다니. 게다가 그 마기는 무엇인가. 마왕이 득세했던 과거에서나 겪을 법한 인간을 짓누르는 어두운 기다.

“어떻게 인간이 마족이……. 서큐버스의 환각 마법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마족에게 육체를 침식당한 겁니까? 내 능력에 탐색된 마족의 기는 한 개였는데?”

“모르겠어요. 갑자기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서… 정신을 차려보니까 이렇게…….”

류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는 많이 수그러들었으나 그는 아직도 불안정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류제가 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러워했다. 렌을 물어뜯고 싶다는 욕망을 간신히 억제해서 제 팔을 대신 물어뜯느라 류제도 상처로 너덜너덜했다.

그때 체력이 회복되자 잠깐 정신을 차린 렌이 숨을 크게 몰아 내쉬며 입을 달싹였다.

“렌 학생, 정신이 드나요?”

“으으… 토…….”

“토? 혹 속이 메스껍나요? 어디 아픈 곳 있어요?”

“토마토……. 음냐.”

이런 상황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렌의 얼 빠진 소리에 세라가 탄식했다.

그건 류제도 마찬가지였는지 렌이 저런 헛소리까지 내뱉을 만큼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에 들어찬 독기가 빠져나갔다. 짐승처럼 돋아난 송곳니도 제자리로 돌아가고, 인간이 가질 리 없는 날개도 가뭄에 말라버린 나뭇가지처럼 부서졌다. 교복이 찢긴 그의 등에 날개가 돋았던 흔적만 남았다.

“…류제 학생!”

그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세라는 앞에 있는 것이 류제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인간이 마족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오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10년 가까이 군과 연관되었지만 세라의 지식으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이 불가능했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마족은 반드시 토벌해야 하는 주적이건만 인간이 살았다고 안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저자가 마족 같지 않았다.

“다행이야…….”

토마토라니. 류제는 독감에 걸렸던 렌의 헛소리를 떠올렸다. 저 바보 같은 말이 그렇게 안도가 될 수가 없다. 무사하다. 살아있어.

그동안 세라도 결심을 마쳤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인간으로 돌아온 류제에게 다가갔다.

“류제 학생, 기간트리카 장갑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겠어요.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모습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저는 당신을 마족이 아닌 내 학생, 류제 신리라고 판단했습니다. 제 어빌리티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마족이라뇨. 저는 인간인데…….”

땅에 주저앉은 류제가 부들부들 떨리는 제 양손을 쳐다보다가 손에 묻은 렌의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주먹을 쥐었다.

맞아, 인간이다. 지금은 확신할 수 있는데 아까는 왜 믿을 수 없는 충동이 생겼을까.

“저는 인간이에요.”

“맞습니다. 당신은 인간이에요. 측은지심의 마음을 가진 인간.”

세라가 류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생기는 기이한 환각이라 치부하면 되지 않을까. 그것 말고는 세라가 눈으로 본 이 현상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니 친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어찌 되었건 중요한 것은 그녀의 학생 류제 신리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위험도 감내하는 용감한 학생이라는 사실 뿐이다.

“자,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세요. 친구들이 위에서 당신들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류제가 슬렉터를 만지작거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기간트리카, 장갑.”

슬렉터가 그의 어빌리티에 반응해서 기간트리카를 장갑시켰다.

슬렉터를 이용해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세라는 류제가 인간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자신의 믿음이 맞았다며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죠.”

“제가 렌을 옮겨도 될까요?”

“당신이 구한 아이예요. 물론이죠.”

류제는 욕구를 참기 위해 물어뜯어 엉망이 된 팔로 렌을 건네받았다. 그가 구한 친구는 이다지도 가볍다.

세라가 먼저 부스터를 사용하여 위로 올랐다. 류제도 렌을 안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렌이 떨어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껴안고는 혹시라도 무서워하지 않도록 고개를 아래로 두지 않은 것이 류제의 상냥한 마음을 대변했다.

“…류…….”

“이…일어났어? 위험하니까 아래는 쳐다보지―”

렌이 잠시 정신을 차렸다. 류제가 기쁘기도 하고 아직 협곡 위로 날아가는 중이라 무서워할까 당황해하니 렌이 몽롱한 눈으로 끔벅거리다가 류제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짜식이… 걱정하게 하기는.”

그것이 고작이었는지 렌은 다시 기절해 버렸다. 누가 할 소린데. 라고 말하지 못한 류제는 복받쳐 올라오는 감정에 눈물을 흘렸다.

이 감정은 렌이 다쳤을 때 올라왔던 어두컴컴하고 거친 감정보다 더 쉽게 류제를 잡아먹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감정이다.

어제 포르테가 했던 말의 의미를 류제는 조금이나마 알 것도 같았다. 류제의 왼쪽 손목, 슬렉터와 함께 찼던 소원 팔찌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있었다.

* * *

으이구, 이 못난 놈아. 허구언 날 처맞고 돌아오면 대갈빡에 땜빵질하는 거 질리지도 않누? 몸뚱이가 이게 뭐여. 전부 구멍투성이에 어후, 참. 그러라고 니 애미 애비가 니를 고운 몸뚱아리로 낳아준 줄 알아?

“알 게 뭐야. 난 엄마 아빠 얼굴 기억도 안 나는데.”

니는 기억 못 해도 내가 기억한다, 이 호로 쌍놈의 시키야.

그놈의 욱하는 기질 좀 참으면 어디 주먹에 두드러기라도 난다냐. 뭐 그리 성질머리를 못 참아서 맨날 동네방네 처맞고 지랄이야, 지랄은. 내 복장이 다 터진다. 응? 이 철부지야! 니가 이 할미 맘은 알기나 혀?

“아, 이건 처맞은 거 아니라고! 부딪힌 거라고!”

허이구, 말을 잘해요. 이제 하도 모자라서 물건한테도 처맞냐? 이 모자란 놈.

느그 엄마는 똑 부러지게 똑똑해감시롱 대학에서 장학금도 받고 다녔고 느그 애비는 철딱서니 없이 데모나 해처싸서 성적이 개떡이라 그렇지 대학은 좋은 데를 갔는디 니는 왜 맨날 뒤에서 등수를 세누?

고놈의 게임 좀 고만하고! 친구는 제대로 사귀고 있냐?

“공부는 고등학교 가면 제대로 할 거라니까! 글구 친구 이야기가 왜 나와? 일부러 그러는 거지?”

니가 제대로만 하거들랑 할미도 매번 똑같은 소리 안 허지. 글구 으디서 할미한테 큰소리여?

“진짜~! 됐어. 나 겜하는 중이니까 먼저 저녁밥 먹어. 기깔나게 채려놨어. 참 내. 기력도 오지다. 오자마자 큰소리치는 걸 보니 백 년 천 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겠네.”

공부하라고 콤퓨타 구해다 줬구만 게임만 주구장창 처하긴… 고놈의 알록달록 눈깔만 큰 기집애 나오는 겜이 그렇게도 재밌드냐?

“아… 시끄러! 어떤 애가 공짜로 줘서 그냥 하는 거지.”

친구 사귀고 싶어서 미연시 겜 공략한다는 말은 창피해서 죽어도 못한다.

겨울방학이라 아직 고등학생 되려면 몇 달은 남았고, 그때까지는 집에 틀어박혀서 열심히 친구를 사귀는 법을 연구할 생각이다.

게다가 이 게임,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계속 다른 루트를 공략하느라 키보드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으… 젠장, 이번엔 어디서 막힌 거지? 이놈의 서큐버스랑 전쟁 패배는 질리지도 않고 나오네.

왕녀 호감도는 왜 4까지밖에 안 찼냐고. 하아, 역시 수학여행 때 왕녀 이벤트를 못 봐서 그런가? 나 혼자서는 도저히 트루 엔딩을 못 보겠어. 역시 위키를 뒤져야 하나?

머리를 긁적거리고 키보드를 치고 있으려니 게임 그만하고 밥이나 처먹으라며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는 별수 없이 실패한 이번 루트 대신 새 게임을 불러와 대기 화면으로 띄워놓고 밥을 먹으러 갔다.

깜박, 깜박, 깜박. 화면이 로딩되다가 깜깜해진다.

그 깜깜해진 화면이 아련한 과거를 끄고 다시 눈을 뜨면―

“…렌……. 렌 군! 괜찮아? 정신이 들어?”

시야가 확 밝아지면서 머리가 욱신욱신 아프다.

여기가 어디야. 뭐 이렇게 시끄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재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초점을 맞추려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세상이 흐릿흐릿한 게 뭐가 뭔지 분간이 안 갔다.

“다행이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재경이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자 뭔가 푸르딩딩한 털 같은 게 와락 안겼다.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되어서 어리둥절하면서도 누군가가 안긴 감촉이 생소해 재경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나, 기절했었구나. 여기가… 병실? 이 애는…

“유네?”

“응, 나야. 유네라구. 미…미안해. 너무 꽉 껴안았지.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안도하는 바람에 부상자라는 것도 잊고 말았다. 유네가 머쓱하게 멀어졌다. 나도 참, 암만 기뻐도 렌 군은 아직 덜 나았는걸. 마음만 앞서던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던 재경이 몸을 움직이려다 끄응 앓았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작은 병실 안에 눈에 익은 사람이 몇 둘러서 있었다.

“바보 아냐. 류제가 바로 구하러 간 데다 선생님이 치료해 주셨잖아. 높은 곳이 무서워서 기절한 게 뭐가. 오버하긴!”

“으읏… 그렇게 말하는 비키 양도 렌 군이 걱정돼서 여기 있는 거 아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그…그냥 반장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침대 옆에 팔짱을 끼고 서있던 비키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참을 수 없이 빨간 것을 보니 유네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야. 내가 멍하니 그런 곳에 서있는 바람에 괜히 렌이 고생했구나. 무서운 일 당하게 해서 정말, 정말로 미안해. 그리고 구해 줘서 고마워.”

유네가 비키자 이번엔 미나가 재경의 손을 붙잡고 울먹거렸다.

아직 정신이 멍하기는 하지만 재경은 미나의 정체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안경 쓴 얼굴을 들이밀고 참하게도 말은 잘한다. 분명 나한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겠지.

“됐어. 친한 척하지 마.”

재경이 퉁명스럽게 손을 내쳤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마족은 그 속내가 위험하다. 접촉하는 것도 무서워 죽겠다.

그리고 딱히 미나를 구하려고 구한 것도 아니라서 저 진정성 없는 감사와 사과도 의미가 없었다. 내가 구해 주지 않았어도 어차피 죽지 않았을 거고. 그것보다 재경은 류제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류제는 어디 갔어?”

병실 안에는 류제가 보이지 않았다.

“류제 군은 선생님과 이야기 중이야. 류제 군도 팔을 많이 다쳤더라구. 렌 군만큼은 아니지만. 아 참, 렌 군은 머리를 크게 다쳐서 선생님이 엄청 걱정하셨어.”

“머리이이?”

또?! 재경이 이번에도 머리를 다쳤다는 말에 아주 치를 떨었다. 아니, 머리를 다쳤다고? 어쩐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라. 징하기도 징하다.

어디 한번 세보자. 깡패들하고 싸울 때 한 번, 비누 밟고 미끄러져서 두 번, 미나 방해한다고 끼어들었다가 세 번.

“세 번이야! 액땜이라도 해야 하나 진짜 재수가 더럽게 없다니까. 어떻게 수학여행 내내 머리가 세 번이나 까일 수가 있는데?!”

“그러니까 누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막 나서래? 미나를 봐. 너 때문에 엄청 미안해하잖아! 몇 사람이나 걱정시켜야 만족할 거야?”

“시끄러워! 머리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마.”

“하여튼 렌 지미. 됐어!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 선생님께 한 소리 들으면서 그 이상한 성질머리 좀 고쳐먹어.”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며 의무실 밖으로 나간 비키가 보란 듯이 문을 쾅 닫았다.

재경은 저거 또 저런다며 못마땅해했지만 유네는 비키가 렌이 다쳐서 돌아오자 실은 옆을 떠나지 않으며 계속 걱정하던 걸 봤기 때문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유네의 생각대로 숙소 1층 의무실 밖으로 나온 비키는 안도한 듯이 문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저 바보한테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일어나자마자 헛소리하는 게 평소의 모습과 같아서 다행이다. 인연이 있는 사람을 손쉽게 잃는 것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비키가 맞은편 방문에 노크를 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각한 이야기 중이었는지 그녀가 들어오자 세라와 류제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싸늘해진 분위기에 비키가 흠칫 놀랐다가 단정히 서서 세라에게 보고했다.

“렌 지미, 깨어났어요. 뻘소리를 하는 걸 보니 머리에 이상은 없어 보이던데.”

“알려 줘서 고마워요, 비키 학생. 이야기는 이만하도록 하고 류제 학생도 보러 가세요. 걱정되시죠?”

류제가 마지못하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따라 나오던 비키가 앞머리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류제의 안색을 살폈다. 교복이 다 찢어져서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그의 몰골은 새파랗게 질렸던 아까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다.

세라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지? 소문에는 협곡에 마족이 나타났었다는 말도 있는데 소문일 뿐이라 확신하진 못하겠고. 선생님과 류제는 협곡에 있었을 테니 그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왜? 떨어진 렌을 구하고 세라 선생님이 치료해 주신 것일 뿐이야.”

“슬렉터가 먹통이 된 이후에 마족이 나타났었다는 소문이 있었어. 너는 봤나 해서.”

“나는 잘 모르겠는데. 렌의 일로 정신이 없어서.”

“그래? 흠. 역시 그냥 헛소문인가.”

그 마족이 나일지도 몰라.

비키의 질문을 곱씹은 류제가 풀이 죽었다. 그의 스승 세라 밀로니는 상부에 류제의 이상 증세를 일단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해 주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이상 현상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섣부르게 마족이라는 의심을 가지고 한 번 키아나트리체 군부에 찍히면 앞으로 류제가 평범하게 살아가기 힘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을 사랑했던 세라는 다시금 큰 결단을 내렸다.

“또다시 그런 이상 증상이 나타나면 꼭 제게 말씀해 주세요. 하지만 다시 그런 증상이 나타났을 때 당신이 제정신을 유지할지 저는 장담을 못 드리겠습니다. 제 판단이 틀리지 않도록… 부디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믿으니까요.”

그녀가 남긴 말이 가슴 언저리에 박힌다.

욕구를 억제하지 못해 물어뜯었던 팔은 세라의 힘을 빌려 고쳤다. 아까 함께 대화하던 세라는 오늘 하루 너무 많은 ‘힐링’ 어빌리티를 써서 지친 기색이었다.

류제는 협곡에서 느꼈던 그게 뭐였는지, 그때 차오른 어두운 감정이 뭐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렌이 일어나자마자 널 찾더라. 가서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 주지 그래?”

“비키 넌 안 가?”

“나는 캠프파이어 준비하느라 바빠.”

아무렇지 않은 척 비키가 차갑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진과 함께 마족이 등장했다는 소문이 돌아 비상사태가 발령되어서 협곡에서 숙소로 돌아와 긴급 태세를 준비하던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다.

슬렉터가 먹통이 되고, 마족이 나타났다고 수군거리는 선생님들에, 반 친구는 협곡 아래로 떨어졌지, 담임 선생님은 그들을 구하러 갔는데 여태 소식이 없지, 지진에 당황한 학생들은 통제가 되지 않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아니었다.

먹통이 된 슬렉터는 곧바로 복구가 되었지만 제립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나라카를 목전에 둔데다 그 원인을 모르는 이상 선생님들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알라마니 기술관의 연구원들과 호세마타 요새의 군인들이 와서 원인을 찾기 위해 요 근방을 전부 순찰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마족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몇 시간의 탐사 끝에 지진과 그에 따른 슬렉터의 먹통 현상을 나라카의 마기의 영향권인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불가사의한 틈에서 우연찮게 발생한 이상이라 결론 내린 어른들은 제립학교의 선생들에게 수학여행을 계속해도 이상이 없다 전달했다.

혹시 모르니 리엔달로니아 협곡 근방의 경계를 세 배로 강화해서 학생들을 안심시키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고대하던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 걱정하던 학생들은 추락했던 학생 두 명 모두 무사하고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다는 소식에 아주 기뻐했다. 그건 이 장소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방증하기도 해서 보다 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체된 캠프파이어를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렌이 걱정되었던 비키는 의식 불명으로 누워있던 그가 깨어나길 의무실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던 것이다.

솔직하지 못한 것은 누구랑 닮았는지 몰라. 류제는 새침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어 나가는 비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의무실 문을 열었다.

거기서는 정신을 차린 렌이 유네와 미나와 시답잖은 잡담을 하고 있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뭔가 이야기를 하던 렌이 류제를 보자 얼굴을 활짝 폈다.

“류제! 너 인마, 팔 다쳤다며? 멀쩡하고만.”

“세라 선생님이 깨끗하게 고쳐 주셨거든. 렌, 너는 괜찮아? 어디 이상한 곳은 없고?”

“완전 멀쩡하지. 야 류제, 들어봐. 세상에 이게 말이 돼? 나 수학여행 내내 머리만 세 번을 다쳤다? 어디 굿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고도 무사하니 기적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이 세상이 나한테 악의를 품고 있다고밖에 설명을 못 하겠어.”

렌이 또 되지도 않는 이상한 논리를 펼쳤다. 렌의 그런 소리를 듣다 보니 정말 렌이 무사한 것을 확신할 수 있어서 류제는 도리어 안도감이 들었다.

미소를 지으려던 류제는 짐짓 입을 다물고 잔소리를 하듯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 포즈에 재경이 또 시작되었다고 잽싸게 귀를 막았다. 할머니 버전 류제가 가동되었다.

“그런 걸 알면 제발 불나방처럼 덤벼들지 말라고! 아까 얼마나 위험했는지 알아? 슬렉터가 먹통이 되어서 까딱했다간 둘 다 죽을 뻔한 건 알고 있지?”

“시끄러. 비키랑 똑같은 소리나 하긴. 안 죽었으니 땡이지 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자꾸 그랬다간 나중에 진짜로―”

“레…렌 군! 류제 말이 맞아.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

“맞아, 생명이란 소중하다구?”

마족 서큐버스한테서 생명이 소중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재경은 질렸다는 얼굴로 귀를 막고 도리질을 쳤다. 그래도 친구를 위해 목숨 걸고 마족의 꿍꿍이를 방해한 건데 재경의 마음도 모르고 할머니가 보는 아침드라마 시어머니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세 명의 친구(?)들이 재경은 너무했다.

한참 수다를 떨어주던 그들은 캠프파이어 일로 반에 호출되어 숙소에 딸린 운동장으로 나가고, 재경만 홀로 남아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세라의 진찰을 받았다.

이상이 없나 검사를 한 결과 아주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은 재경도 제발 좀 조심하라는 선생님의 꿀밤을 맞은 다음 운동장으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온 재경이 운동장으로 천천히 걸어갔을 때는 캠프파이어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지나가면서 들어봄 직한 노래들이 운동장 일대에 울려 퍼져 있고 학생들은 주변을 둘러싸며 파트너를 골라 춤을 추고 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지진 때문에 일었던 불길한 분위기를 덮으려는 듯이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는 불길은 분위기를 타고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드디어 혼자가 된 재경은 친구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여유롭게 앉은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혼자가 된 게 여유롭다라. 재경은 자기가 생각해도 그 사실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혼자서 왜 그렇게 웃어.”

“류제.”

운동장이 보이는 계단에 앉아 활활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보던 재경에게로 어디선가 나타난 류제가 계단을 오르며 다가왔다.

다쳤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싶지 않아 구석 자리에 있던 재경은 캠프파이어 때 호감도 이벤트로 한창 바쁠 미연시 주인공이 왜 여기까지 찾아왔나 싶다가 혹시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를 냉큼 건너뛰고 온 건 아닌가 경악했다. 내가 꼭 주라고 아까 헤어지기 전에 그렇게 말을 했는데.

“너, 유네한테―”

“줬어. 네가 만든 소원 팔찌.”

“쌤한테는―”

“유리병에 담긴 꽃. 감사하다고 드렸지.”

“왕―”

“왕녀한테는 잠 잘 자라고 향초도 줬고, 미나한테는 손수건 줬어. 네 이야기는 안 했고. 비키 좋아하더라, 푸딩.”

“어… 그래? 확실해?”

“그래, 다 줬으니까 걱정 마.”

류제가 정말이라고 장담하며 재경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말하니까 재경은 뭔가 허망했다.

수학여행 내내 이걸 위해서 어떤 고생을 했는데 고맙다는 둥 돌아오는 보답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정체를 알리면 안 되는 조력자란 힘든 거구나. 무릎으로 류제의 정강이를 밀친 재경은 빈정 상한 듯이 입을 비죽였다.

“그런데 여긴 왜 왔냐. 애들하고 놀아라.”

“너야말로. 여자 친구 사귈 거라고 했으면서 왜 구석진 곳에 혼자 있어? 아직도 아파? 선생님이 뭐라셔?”

“아주 멀쩡하다, 짜샤. 좀 지쳐서 그래.”

“그래?”

“그렇다, 왜.”

재경이 툴툴거리며 무릎을 껴안았다. 쟤는 왜 또 여기 온 거야? 히로인들하고 대화나 할 것이지. 짜식아, 나는 삼류 악역 엑스트라라서 캠프파이어 시간 때 나랑 대화해 봤자 아무 건덕지도 안 나온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놈을 친구들의 틈새로 어떻게 돌려보내나 싶던 재경은 붉게 타오르는 캠프파이어를 쳐다보는 류제를 구경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너, 나한테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듣고 싶어서 온 거냐? 사내자식이 쩨쩨하게 시리. 고맙다, 고마워. 세상에 너밖에 없다.”

“그런 억지로 하는 감사 인사는 됐어. 그냥 조용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니가? 생각?”

“…무슨 의미야 그거? 어떤 입이 은인에게 그런 소리를 하실까?”

류제가 괘씸한 재경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아프다고! 재경이 역으로 화를 내며 류제의 손등을 때려댔다. 모기가 앵앵거리는 것보다 덜 아팠지만 류제는 져주는 척 손을 놓아주었다.

다 널 위해서였다고 반박하고 싶었던 재경은 다른 변명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자 짜증이 났다. 불만스레 입술만 쭉 내밀던 그는 간신히 입을 열고 꿍얼거렸다.

“진짜로 고맙다, 짜샤. 친구 하나 끝내주게 잘 뒀구만. 담부터 조심하도록 할게.”

“알면 됐어.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 하지 마.”

“잔소리 안 해도 하라고 그래도 안 해.”

“좋은 생각이야.”

류제가 부끄러워하는 재경의 머리칼을 장난으로 흔들었다. 키 작아진다고 하지 말라고 투덜거린 재경이 기어코 손을 붙잡고 떼어냈다.

“그러고 보니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마족이 나타났다는 루머가 있었다고 애들이 그러던데.”

재경이 떠보는 기분으로 물었다. 류제는 잠시 동요하는 눈치더니 이내 포커페이스를 만들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었다.

“글쎄다. 나는 누구 씨 구한다고 바빴거든.”

“너도 참 무리하긴.”

렌의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니지만 잘못 들은 것 같아 류제가 반문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그렇듯 뭔가를 숨기는 듯한 애매한 말이다.

“암것도 아냐. 모른다니 다행이네.”

몰라서 다행이라니. 뭐야, 그게. 무슨 의미야? 그때 렌이 깨어있었나? 잘 모르겠다.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말이라 장담은 못 하겠는데 뉘앙스가 분명하지 않아서 거슬렸다.

하지만 렌은 한번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하면 다시는 말해 주지 않았다.

이레귤러, 재앙, 흉측한 집념과 사악한 영혼. 그게 다 나를 뜻하는 말일까. 나는 뭐지? 그건 도대체 뭐였지?

생각이 복잡해지는 게 싫었던 류제는 생각을 바꿀 겸사 앉아있는 자세를 바꾸다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의 형태를 느꼈다. 이걸 깜박하고 있었네.

“잠깐만. 렌.”

류제가 주머니를 뒤져 그것을 꺼냈다.

“왜?”

“너한테도 줄 게 있었어.”

유네와 선생님, 왕녀, 미나, 비키에게도 기념품을 주었지만 저것들을 고른 것은 렌이었다. 그렇다고 렌이 추가로 자기 기념품을 산 것도 아니라 마음에 걸렸던 류제가 재경 몰래 플리 마켓에서 따로 구매한 것이 있었다.

“자.”

그가 주머니에서 못생긴 고양이 얼굴이 달린 열쇠고리를 꺼내 들었다. 새것처럼 작은 비닐로 포장되어 있었다.

재경이 멍청한 얼굴로 그걸 쳐다보고만 있노라니 류제가 받으라며 재촉하듯 내밀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재경은 마지못해 열쇠고리를 받아 들었다. 성질 나빠 보이는 못생긴 고양이가 재경을 무척 닮았다.

“무…뭔데. 뭐야, 이게.”

“열쇠고리. 가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샀어. 너 닮았지?”

“내 선물이라고?”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재경은 기분이 복잡했다. 친구가 없었던지라 중학교 마지막 생일날에도 할머니랑 둘이서 보냈었다. 지금껏 그가 받은 선물이란 얄팍한 괴롭힘이나 놀림거리가 대부분이라 이런 게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호감도 이벤트에 눈이 멀어 기대했던 수학여행 내내 개고생을 한 것에 비해 얻는 게 없었다는 것과 비교되어 이 열쇠고리를 받고 복받치는 게 많은 모양이다.

“…렌, 울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저리 가.”

젠장, 이런 거 하나 받았다고 울다니. 사나이 자존심이 상해서. 재경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눈물샘이 짜증 나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았다.

하필이면 류제 앞에서라니. 실컷 강한 척했는데 왜 자꾸 류제 앞에서는 사람이 바보처럼 되는지 모르겠다. 제길, 제기랄. 울지 말라고. 말 좀 들어.

멈추지 않은 눈물 때문에 한참 훌쩍거리던 재경은 고개를 처박은 상태로 류제를 협박했다.

“애들한테 울었다고 말하면 죽는다.”

“알았어. 말 안 해.”

“말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야.”

“알았다니까. 걱정하지 마.”

류제가 정말로 말하지 않겠다며 재경과 약속했다.

절대로 말 안 할 거야. 왜냐면 렌의 눈물은 나만 아는 모습이니까. 나름의 독점욕을 충족시킨 류제는 울고 있는 재경을 달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하지 못한 성질머리를 알기에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받고 끝일 줄 알았는데 울 줄은 몰랐다. 그게 그렇게 기뻤나 싶지만 실은 협곡에 떨어진 것이 무서웠던 게 아닐까 류제는 감히 추측해 보았다.

캠프파이어 근처에서 누군가 폭죽을 터뜨렸는지 자글자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펑, 퍼벙. 펑. 자잘한 불꽃들이 피었다가 사그라든다. 그렇게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이 저물어갔다.

* * *

호감도 이벤트도 끝났겠다, 수학여행 마지막 날 밤에 남은 소소한 이벤트는 별 볼 일 없어서 재경이 신경 쓸 것도 없었다.

대충 말하자면 방을 착각한 유네가 여학생들 방으로 류제와 렌을 인도하는 바람에 세 명이서 숨 막히게 옷장 안에 숨어있다가 간신히 나온 그런 뻔한 이벤트 같은 것 말이다. 유네를 등에 이고 류제와는 간신히 고개가 엇나가서 와락 껴안는 포즈가 된 것이 재경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남자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류제와 밀착했던 남사스러운 이벤트에 어색해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가지고 온 트럼프를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 들었다.

할머니 상대로 하는 맞고와 고스톱 말고 서양식 카드놀이가 처음이었던 재경이 워낙 도둑 잡기를 못해서 계속 딱밤을 맞았다.

새벽 늦은 시간 선생님이 순찰을 돌 때 키득거리며 판을 엎은 그들은 자는 척을 하다 평범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기차를 타고 아가타로 돌아왔다.

류제가 선물해 준 푸딩을 아침 간식으로 아껴먹는 비키를 놀리는 재경의 가방에는 못생긴 고양이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가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수학여행 3박 4일의 긴 여정이 끝났다. 더불어 열심히 기억에서 꺼내서 정리했던 호감도 이벤트도 성공적으로 끝났다.

친구들과 같이 먹기 위해 간식을 잔뜩 담았던 가방은 텅 비었다. 고대하던 카드놀이도 결국 해냈다.

아가타에 돌아왔으니 수학여행은 마음 한구석 좋은 추억거리로 남기고 이제 수업을 듣고 학교를 다니는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으아아~ 지쳤어.”

“나도…….”

“근데 렌, 거기 내 침대인데.”

“그래서 뭐, 짜샤. 자꾸 치사하게 굴래?”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기숙사 A동 532호. 류제와 유네의 방. 익숙한 전경이 잠깐 동안 그리워졌을 줄이야. 재경이 류제의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워 고양이처럼 얼굴을 부볐다. 이제 다음 챕터인 체육대회까지 남은 한 달간은 아무런 이벤트 없이 안심이었다.

“적어도 가방은 네 방에 두고 와.”

류제가 렌의 가방에 매달린 못생긴 고양이 열쇠고리를 흘기며 투덜거렸다. 옆방에 혼자 쓰는 방 있으면서 굳이 우리 방에서 그런다.

“가방 같은 건 이따가 해도 좋잖아. 움직이기 싫어. 근육통 때문에 아파.”

“나는 어디서 쉬라고.”

“옆에 누워. 자.”

재경이 태평하게 침대를 도닥이자 류제가 기겁했다. 재경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멀뚱히 류제를 쳐다보았다. 류제는 잽싸게 변명거리를 찾았다.

“좁잖아. 침대 1인용이고.”

“너 성장기라고 자랑하냐?”

“레…렌 군, 정 그러면 내 침대 써도 되는데.”

가방을 풀어 짐을 정리하던 유네가 웃으며 말했다. 왼쪽 손목에는 재경이 다시 선물해 준 소원 팔찌가 잘 차여 있었다.

유네의 침대를 쓰라는 말로 카운터를 당한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윽… 됐어. 장난이었어. 아, 그래. 류제, 그래서 결국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였던 거냐? 나 아무리 생각해도 눈이 크고 긴 머리 컬러풀한 곱슬머리에 하얀 피부를 가진 키 큰 여자애는 도저히 모르겠거든?”

“또 그 이야기야? 질리지도 않는다.”

저 이상형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유네만 알았다. 이상한 떼를 쓰는 재경이 류제의 베개를 끌어안고 버둥거렸다.

“아니, 알아야 도와주든가 말든가 하지. 아닌 것 같아도 내가 수학여행 내내 엄청 열심히 찾아봤거든? 근데 없는 걸 어떻게 하냐?”

“별로 없어도 상관없는데.”

“이상형이 없어도 상관없다니 그게 말이냐 방구냐. 그…그럼 그… 뭐냐, 그때 너 야…야한 꿈 꿨다고 했을 때 나온 사람은 누군데?”

“내…내가 언제 야한 꿈을 꿨다고 그랬어?”

찢어진 교복을 가방 속에서 꺼내서 이걸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류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도둑이 제 발 저린 표정이다.

재경은 더 몰아붙이려다가 여기에 유네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베개에 고개를 처박았다. 베개에서 류제 냄새가 났다.

“제길~ 저렇게 잡아떼면 내가 유네 앞에서 어쩌질 못하잖아.”

웅얼웅얼. 류제는 제 침대를 마치 제 것인 양 차지해서 버둥거리는 재경을 보며 왜 남의 이상형을 궁금해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넌 이상형이 누군데.”

“어엉?”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며. 너도 이상형이 있을 거 아냐.”

당하고만 있던 류제도 렌에게 카운터어택을 가했다.

이상형? 째깍째깍 잘 돌아가던 재경의 머리가 띵, 하고 굳었다. 이상형? 내 이상형?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거봐. 너도 없으면서 나한테 그래.”

“아니… 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해도.”

류제의 논리에 진 재경이 깨갱 입을 다물었다. 반면 분명 렌이 이상형으로 미나와 비슷한 묘사를 할 줄 알았는데 없다고 말하자 류제는 조금 아리송해했다.

렌은 결국 미나를 좋아하는 것 아니었나? 부끄러워서 그렇다고 치기엔 귓불이 평범한데. 평소보다 창백할 지경이야.

“여튼 뭔가 그럴싸한 기분이 들면 나한테 꼭 알려 줘야 해. 알았지?”

“나한텐 비밀이 없는 거냐.”

“거참, 절친 사이에 비밀도 많다!”

절친 사이에도 비밀이 있는 거라고 저번에 그랬으면서. 류제가 볼을 뚱하게 부풀렸다.

“됐어, 말하기 싫으면 마라.”

나도 히로인들 호감도 맘대로 올릴 거니까. 그동안 밸런타인데이 때 누구한테 고백할지 제대로 생각하라고, 류제 바보. 재경이 토라지자 유네가 중재한답시고 살살 달랬다.

“아직 학기 초반이잖아. 류제 군도 렌 군도 잘 모를 수 있지. 너무 초조하게 그러지 마.”

“그럼 유네,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로 날아오자 짐을 정리하던 유네가 순간 당황했다. 나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리고 난… 여…여자애인걸. 있다고 해도 말하기가 조금 난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흐음… 둘 다 완전 재미없는 짜식들이네.”

“아하하…….”

유네가 기운 빠지게 웃었다. 이제 막 학교를 적응했고, 남장하는 것도 익숙해질 찰나인 유네에게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아직 벅찬 일이었다.

남자라고 해봤자 반에 이 두 사람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저 두 사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친구였다.

“으… 너무 지쳤어. 내내 고생만 한 기분이야.”

“내내 고생밖에 안 했잖아.”

류제가 맞는 말로 딴지를 걸었다. 깡패랑 싸우고, 백장미 부대원하고 바뀌고, 서바이벌에서 탈락해서 고되게 훈련하고,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떨어지고. 류제가 수학여행 내내 스쳐 지나간 렌의 기나긴 고생들을 나열했다.

“그것도 맞긴 한데.”

다 너를 위해서라고. 재경이 감실감실한 눈을 감았다.

근데 누굴까 도대체. 분명 그 서큐버스의 꿈에서 류제가 가장 마음에 두고 있는 한 사람이 나왔을 텐데. 왜 나한테 말을 안 해주는 거지. 친구끼리는 그런 대화는 원래 잘 안 하는 건가. 많이 섭섭한데.

“으으, 조금만 더…….”

책장 가장 높은 곳에 기념품으로 산 인형을 전시하려던 유네가 팔을 높게 뻗었다. 키가 작아서 잘 닿지 않자 그녀가 헥헥거리며 팔을 주물렀다.

빈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내일 있을 수업 책을 담으려고 했던 류제가 그걸 보고 가볍게 올려주었다. 키 차이가 나서 몸에 폭 싸여 버리는 기분에 유네가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 류제 군.”

“별것 아닌데 뭐.”

유네가 쑥스러워 고개를 돌리는데 책상에 기댄 류제의 왼손 손목에 차인 슬렉터에는 재경이 만들어줬던 소원 팔찌가 사라져 있었다.

“어, 류제 군, 소원 팔찌 빼버렸어?”

유네가 지적하자 류제가 손목을 살폈다. 어제 정신 차려보니 없어졌었다. 그때 잃어버린 거겠지. 류제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설마 이거 류제 군 거는 아니지?”

유네는 설마 어제 캠프파이어 때 류제가 준 소원 팔찌가 류제의 것이었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냐, 아냐. 어제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

그래도 예쁜 팔찌를 잃어버렸다니 아쉽겠다 싶어 유네가 살포시 속삭였다.

“류제 군 것도 렌 군한테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

“아냐, 됐어. 저절로 끊어진 거잖아. 분명 소원이 하나 이루어진 거겠지.”

“그런 단시간에?”

소원. 류제는 그때 바랐던 소원을 떠올렸다. 제발 렌이 무사하게 해달라고 빌었지. 그래서 팔찌가 끊어진 것이면 더 이상 미련 없다.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으니 새롭게 팔찌는 안 찰 거다. 어제 있었던 기적은 하늘이 도와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내일까지 세계사 숙제가 있었지 않았나? 렌, 너… 어라.”

“렌 군 자는 모양인데?”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꾸벅꾸벅 졸았으면서 오는 내내 피곤했는지 재경은 금세 잠이 들어있었다.

아직 짐도 안 풀었으면서 굳이 제 방도 아닌 류제의 방, 류제의 침대에서 굳이 잠든다. 나는 어디서 쉬라고.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재경과 그의 가방을 들었다.

“류제 군이 데려다주게?”

“자기 방에서 자는 게 더 편하겠지.”

말괄량이 공주님처럼 안겨서 쿨쿨 잠이 든 렌에게 못 살겠다며 웃어준 류제가 옆방으로 향했다. 옆방은 유네와 함께 생활하는 류제의 방과는 다르게 한쪽에 렌의 짐만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렌을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준 류제는 세상모르고 자는 재경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그대로 있던 그가 다리를 굽히고, 허리를 숙여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바보.”

류제가 눈앞을 어지럽히는 재경의 촌스러운 오 대 오 앞머리를 넘겼다. 창백한 피부에 얼룩덜룩 난 주근깨가 사랑스럽다. 류제는 커다란 손으로 재경의 볼을 쓸더니 허리를 깊게 숙였다.

순간의 정적이 흐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새빨개진 얼굴로 박차고 나간 류제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제정신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그는 여전히 제정신이었다.

아니, 자꾸 렌이 이상형에 대해서 물어보니까 짜증 나잖아. 그래서 그냥…….

류제가 철딱서니 없는 자신의 짓거리에 질렸다며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렌이 알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을 거다. 이건 무덤 속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었다.

* * *

B동 기숙사. 히로인들 중 유일하게 B동을 쓰고 있는 미나 플로리아는 자기 방문 앞에 텔다 사원에서 산 마족을 막아준다는 부적을 걸어놓았다.

“예쁘게 걸렸네. 후후.”

인간들의 하찮은 발상에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족들이 이깟 것이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온다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모든 이들을 농락하는 듯한 웃음이다. 문에 건 부적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그녀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방 안에 백발 머리에 불꽃을 두른 소년이 대신 서있었다.

[마왕의 부활체의 상태는 어떻지, 플로냐.]

“율폰!”

화마(火魔)의 군주, 샐러맨더의 왕, 이름은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 버펄로와 닮은 뿔과 날갯죽지에 난 검은 날개, 붉은 동공. 이 어린 소년은 미나와 같은 마족의 사천왕 중 한 명이었다.

“무사히 각성한 것 너도 봤잖아. 그게 여기까지 찾아올 일이야?”

[네 손에 우리 마족의 부흥이 달려 있다니 마땅찮은 마음이 들어서 말이지.]

“못 미더우면 네가 해보지 그래? 의지만 떠다니면서 뿔도 못 숨기는 주제에. 흥.”

[인간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발탁된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줘. 업마여.]

“시끄러. 환영 주제에 시비 걸지 마.”

미나가 옆에 있던 베개를 던졌다. 형체가 없는 잔상은 뭉실뭉실 깨져서 흐려지더니 이내 다시 원상태를 찾아갔다.

[병마의 군주가 마왕의 부활체를 신용할 수 없어 하더군. 마왕이라 말하기엔 그 성미가 너무 물렁하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하지.]

“각성하면 그럴 것도 없어질걸. 우리가 알던 그분으로 돌아오실 거야.”

[모를 일이지. 우리는 이 계획에 사활을 걸었다. 모든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해. 마왕이 부활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는 멸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서큐버스의 왕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알고 있어. 나도 제대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년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그래? 하지만 마가릿은 마왕의 부활체를 직접 보고 싶어 하던데.]

“뭐라고? 미쳤어? 절제할 줄 모르는 그년은 아직 안 돼!”

[이제야 좀 쓸 만하게 된 옵시그나티오를 가지고 직접 그를 시험할 모양이야. 만나면 반겨주라고.]

“이봐, 율폰!”

화마는 훅, 하고 불꽃을 꺼뜨리며 방에서 사라졌다.

숙녀 방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멋대로 사라지다니. 최악이군. 못마땅해진 미나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마가릿이라고? 흥, 마음대로 하라고 해. 대신 내 계획을 조금이라도 방해했다가는 용서하지 않을 거야.

미나가 안경을 벗고 앞머리를 넘겼다. 순박해 보이는 연홍빛의 눈동자는 색기로 흘러넘친다.

왕녀는 질렸으니까 렌 지미로 갈아타 볼까. 사악한 웃음을 남긴 그녀는 마왕의 부활을 고대하고, 고대했다. 책상 위에는 류제가 준 하얀 손수건이 보라색 얼룩이 남은 손수건 위에 올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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