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6) (106/112)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6)

“어제 먹은 거 흔적도 없이 소화됐나 봐…….”

“당 땡겨. 초코 바닐라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그래서 내가 더 먹자구 그랬잖아. 왜 말렸어. 왜 말렸냐고. 이렇게 후회할 거, 조금만 더 먹어둘걸.”

“먹을 것보단 난 내 허벅지 터진 거 같은 게 더 무섭다.”

“허벅지? 난 팔이 후들거려.”

재경이 잘 들리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보며 조원들에게 칭얼거렸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를 연속으로 하고 유격 훈련에 오리걸음에 PT 체조에 달리기까지. 서바이벌이 끝날 때까지 미친 게 아니냐는 말이 절로 나올 지옥 훈련을 한 탓에 온몸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진이 빠진 그들은 훈련이 끝나자 흙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진 채 꼼짝도 않고 숨만 쉬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극초반에 탈락한 자들의 말로였다.

“요리 대회 어쩌냐.”

“난 바비큐를 먹지 않으면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뭣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재료를 모았는데.”

“근데 몸이 안 움직인다.”

“나도.”

“나도 그래…….”

하늘을 바라본 채 짓눌린 잡초처럼 흐느적거리는 그들은 정신적, 육체적 좌절감을 뼈저리게 맛보는 중이었다. 고통 받는 삼류 악당과 비중 없는 엑스트라의 삶이란.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으로 바비큐 모양 구름을 쳐다보던 재경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르 흘렸다.

아직까지 오지 않은 걸 보니 일찍 탈락한 나와는 다르게 주인공인 류제는 뭔 듣도 보도 못한 어빌리터들하고 겁나시리 멋지게 싸우고 끝까지 살아남았겠지. 부럽네, 부러워. 누구는 개똥밭에 구르는 것처럼 죽어 나가는데. 좋겠구만. 주인공이라서.

“렌 군, 괜찮아?”

“유네…….”

노을 진 하늘 사이 유네의 얼굴이 냉큼 시야에 들어차자 대자로 뻗은 재경이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움직여도 근육통 때문에 온몸이 다 쑤셨다. 으그그. 재경은 옛날 할머니가 자주 내던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넌 괜찮아?”

“난 운이 좋아서 렌 군보다는 늦게 탈락해서 생각보다 괜찮아.”

“그게 좋은 거다, 짜샤. 너네 조는 어때? 식재료는 모았냐?”

“아니… 에헤헤. 우리 조원은 그런 거 별로 관심 없나 봐. 그래서 난 우리 반이 1등 하기만 기다리고 있어. 그럼 요리는 간신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 우리는 일찍 탈락했어도 식재료는 엄청 모았다. 새도 잡았어.”

“문제는 요리 대회를 할 체력이 남아있냐 이거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재경이네 조원이 대화에 냉큼 끼어들었다. 확실히 그들의 스태미나는 요리 대회는커녕 숨 쉬는 것조차 벅찰 정도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곧이어 서바이벌이 종료를 알리는 버저가 울렸다. 숲 전체를 가로지르며 고전하고 있는 학생들의 판정 판이 빛을 잃었다.

조금만 더 하면 상대방의 판정기를 때릴 수 있었던 학생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깝긴 했지만 서바이벌이 끝났으니 더 이상 적이 아닌 상대방을 일으켜 세워주며 악수를 하는 동료애와 센스는 있었다.

류제네 조도 2반과 맞붙었다가 버저 소리를 듣고 싸움을 멈추었다. 비키는 결판을 내지 못한 것이 분한지 상대방을 보며 혀를 찼고, 류제는 드디어 끝났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미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생존을 기뻐했다. 근처 그루터기에 앉아있던 왕녀는 일어나서 서바이벌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유네의 도움으로 홀로 살아남아 지금까지 숨어있었던 ‘무게’ 어빌리터도 서바이벌이 끝났다는 버저 소리를 듣고 땅으로 내려왔다.

살아남긴 했어도 기쁘지는 않고 복잡한 기분이었는지 그녀는 묵묵히 이 다른 학생들을 따라 서바이벌 시작 전에 모였던 곳으로 향했다.

숲 중간중간에 서있는 선생님들의 안내에 따라 실격자들이 있는 곳에 도착한 류제, 비키, 왕녀, 미나 등을 포함한 학생들은 끝까지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위풍당당함을 과시했다.

“각 반 조별로 정렬합니다.”

초강도 훈련으로 훈련장 흙바닥에 널브러진 학생들에게 캠핑장의 조교가 위엄있게 외쳤다. 이제 막 쉬는 시간을 가졌던 실격자들이 힘들어 죽겠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조별로 열을 맞췄다.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생존자들도 열에 합류했다. 1반부터 8반까지 1조부터 6조까지 48개 조가 훈련장에서 지친 기색을 숨기고 바지런히 정렬했다. 8반 줄에 1조에 속한 류제, 3조 유네, 5조 재경도 명령에 따라 열중쉬어를 했다.

“그럼 지금부터 반별 서바이벌에서 생존한 조의 숫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반에는 벌써부터 긴장감이 흘렀다. 고작 이런 서바이벌 게임에 너무 힘 들어간 것 아니냐고 하기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1등 상품이 컸다.

서바이벌 게임의 상품은 식재료였다. 등수에 따라 요리 대회에 사용할 기본 재료들이 늘어나는 식이다.

1등은 밀가루나 쌀, 고기부터 시작해서 조미료, 부재료 등 채취한 재료와 함께 쓸 수 있는 식재료를 받아갈 수 있었고, 2등부터는 그 수가 점점 줄어 꼴등은 가져갈 것이 고작 소금과 물밖에 없다. 고작 소금하고 물로만 요리를 만드느냐, 아니면 풍족한 재료들로 요리 대회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1반 생존한 대장은 6개 조 6명 중 2명, 2반 1명, 3반 0명, 4반 1명, 5반 0명, 6반 2명, 7반 2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8반 3명. 고로 우승한 반은 8반입니다.”

“와아아!”

1등 했다는 말에 8반 학생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질렀다. 8반에서 대장이 생존한 조는 류제의 1조, 유네의 3조 그리고 어찌어찌 운 좋게 살아남은 6조였다.

“대박이야, 대박!”

“얌마. 당연하지! 우리 반에는 류제가 있는데!”

무려 미연시 주인공인데! 재경이 기절할 것 같던 힘든 훈련을 보상받은 것 같아 기뻐하며 만세삼창을 했다.

힘든 훈련은 질색이었던 유네네 조도 아닌 척 내심 기뻐했다. 루이나에게 전부 당할 줄 알았는데 유네가 마지막으로 대장을 날려 보낸 것이 회심의 한 수가 될 줄이야. 다른 학생들에게 칭찬을 받는 ‘무게’ 어빌리터는 부끄러운 듯 입가를 비죽였다. 단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유네를 괴롭혔는데 정작 유네 덕분에 자신이 살아남아 반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창피한 모양이었다.

“젠장. 류제, 이 자식. 잘했다고 꽉 끌어안아 주고 싶구만 멀리도 있네!”

재경이 맨 앞줄에서 여자애들의 칭찬을 받는 류제와 히로인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세라도 승리를 쟁취한 8반 학생들이 장했다. 다른 선생님들이 곁에 있어서 티는 안 냈지만 작게 양 주먹을 쥐어 기쁨을 표했다. 캠핑장에 오기 전 포르테 들라쿠르아를 만난 것이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걱정했는데 그녀의 말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자, 조용히!”

벌써부터 물과 소금으로만 요리를 해야 하는 반과 풍족한 재료를 가져가는 반의 분위기가 갈려 술렁이는 훈련장을 조교가 진정시켰다.

“처음 하는 서바이벌이라 생각했던 전략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을 것 압니다. 그러나 전투 중에 현명하게 생각하고자 한 것, 그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족에 비해 약합니다. 약하기에 더 똑똑해져야 합니다. 자신의 어빌리티가 가진 한계, 능력을 이번 서바이벌로 명확하게 알았기를 바랍니다. 그 능력이 다른 팀원들과 합쳐졌을 때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어떤 현명한 결과를 낼 수 있는지도. 늘 그것을 생각하면서 싸우십시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에 조교가 만족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이번엔 실격해서 훈련장에서 구르고 고생한 탈락자들을 불렀다.

“실격한 탈락자들. 실전에서 패배란 죽음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까?!”

“네, 느꼈습니다!”

너무 뼈저리게 느껴서 죽을 것 같다. 반이 승리했다는 기쁨 하나만으로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재경은 삐걱거리는 팔다리가 고장이 난 것처럼 말이 아니었다.

“오늘 졌다 하여 기죽지 마십시오. 오늘 육체는 힘들어도 내일의 피와 살이 될 것입니다. 내일의 피와 살은 모레의 나를 살릴 것입니다. 이 말을 언제나 명심하십시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서바이벌 중간에 실격되어 고된 훈련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대답했다. 끝까지 살아남지 못한 것도 아쉽고,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이 미련이 남았으나 성장을 원하는 그들은 조교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럼 선생님을 따라 각 반의 캠핑지로 돌아가십시오. 훈련은 끝입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조교가 경례를 하자 학생들도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이것으로 서바이벌 훈련은 종료다. 캠핑장 일정에서 남은 건 바비큐를 건 요리 대회와 담력 테스트였다. 이런 스태미나로 무슨 담력 테스트를 하겠다는 건지 스케줄 표를 세운 사람은 철인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일단은 각 반 캠프까지 걸어가는 게 우선이라 재경이네 조원들은 다리를 질질 끌며 겨우겨우 앞사람을 따랐다. 8반 캠핑지에 도착하자 세라는 학생들을 세워놓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탈락한 다른 조들도 아주 잘해 주었습니다. 다들 서바이벌은 처음이었을 텐데 취지를 잘 이해한 것 같아 기쁩니다. 피곤하죠? 가까이 있는 시냇가에서 몸을 씻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시간 후부터 요리 대회를 시작할 것이니 채취한 재료들과 1등으로 받아온 식재료들로 무슨 요리를 만들지 잘 생각해 보세요.”

“네.”

“그럼 해산!”

선생님이 말을 마치자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텐트로 돌아갔다. 지치고, 발 아프고, 흙먼지 뒤집어써서 냄새나고, 수다를 떨 기력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축하는 해줘야 직성이 풀렸다.

“류제~ 이 짜시이익!”

“…으악.”

“류제 군~ 대단해!”

유일하게 팀 전원이 살아남은 조였던 류제는 갑자기 덮쳐 오는 포옹에 놀랐다가 그게 재경이라는 것을 알고 그대로 경직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네는 보폭을 맞춰 걸어가며 정말 최고라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아니… 저기, 렌… 알았으니까 내려가.”

“이 짜식이 말야. 칭찬을 해줘도 난리네. 에잇!”

재경이 류제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렸다. 장하다, 장해. 우리 주인공아. 활짝 웃는 재경은 정말 기뻐 보여서 신체접촉이 부담스러웠던 류제는 렌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것보다 빨리 씻으러 가자. 이 복장 너무 더워.”

녹색 서바이벌 복장을 펄럭거리며 류제가 투덜거렸다. 그건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초고강도 훈련 때문에 훈련복이 땀에 절어 엄청 축축했다. 다른 텐트를 보아하니 다들 꺄꺄거리며 시냇물로 향하고 있었다. 고된 훈련으로 덥고 찝찝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저… 나는 이따가 갈래.”

“그래? 왜?”

“화장실 갔다 오려구. 두…둘이서 먼저 해.”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유네가 슬며시 발을 뺐다. 재경은 남장여자의 안타까운 숙명을 짐작하고 류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헐레벌떡 류제의 등을 떠밀었다.

“우리 먼저 가자. 나도 못 참겠어.”

“알았으니까 밀지 마.”

갈아입을 옷가지와 수건을 들고 유네의 배웅을 받으며 시냇가로 향한 그들은 여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웃통을 벗었다.

“아, 살겠네!”

졸졸 흐르는 찬물에 첨벙 들어간 재경이 신나게 외쳐댔다. 류제는 야외에서 옷을 벗는 것이 부끄러운지 머뭇머뭇 물 밖에서 기웃거렸다.

“뭐 하냐? 얼른 들어와. 혼자 하니까 뻘쭘하잖아.”

재경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다. 류제가 마지못해 들어왔다.

재경은 삼류 악역일지라도 류제와 같은 반이라는 사실이 오늘따라 감사했다. 게임상 8반이 1등을 할지 말지는 주인공에게 달려 있었다. 어차피 호감도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니 이건 류제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뒀는데 자랑스레 1등을 쟁취하다니. 스토리를 알고 있는 재경이 류제더러 장하다고 칭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앗, 차가.”

“완전 시원하지 않냐?”

“어, 기분 좋다.”

냇가에 발을 담근 류제를 보며 재경이 히죽거렸다. 계속 고생만 하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니 꿀맛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게임은 주인공의 모든 행동이나 사소한 일들까지 서술하지는 않는다. 류제와 함께 시냇가에서 물놀이를 한다는 이런 이야기는 게임에 없는 부분에 해당했다.

미연시에는 서술하지 않는 부분. 렌 지미에 빙의한 재경은 그 부분이 제일 좋았다. 스토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뭐든 뻔하다는 지루함과 정해진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제약에서 벗어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재경은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면 삶이 재미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인 게, 그는 월별 챕터 식으로 진행되는 미연시 게임에 빙의를 해서 스토리가 끝나면 남은 한 달간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아침에는 온천, 저녁에는 시냇물 멱이라. 취급이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냐?”

“그러게. 온천이 참 좋았는데.”

손으로 물을 담아 찝찝한 몸을 씻어내던 재경을 아닌 척 살펴보던 류제가 뒤늦게 답했다. 재경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자기 말만 주절거렸다.

“근데 너네 조 잘도 한 명도 안 탈락했네. 우리 조는 함정에 걸려서 다 같이 동시에 탈락했는데. 쪽팔려서 진짜.”

“비키야 워낙 강하고, 몰랐는데 왕녀도 장난 아니더라고. 번개가 막. 내가 나설 것도 없었어.”

“아, 그 소리. 나도 들었어. 부럽다. 나는 이게 뭐야. 계속 기합만 받아서 팔다리가 파르르 떨린다. 이거 봐.”

팔과 다리에 힘을 주면 저절로 떨리는 것을 보여주며 재경이 투덜투덜 붕어 입을 만들었다. 저 서바이벌 훈련장 조교는 ‘적당히’라는 말을 모르는 거 같다. 사람을 이렇게 굴려놓고 뭐가 피와 살이냐? 근육밖에 더 돼? 그리고 근육을 만들려면 단백질을 먹어야 한다고!

“아아, 단백질. 배고파 죽겠다. 얼른 요리 대회 했으면 좋겠네.”

“재료는 많이 모았어? 우리는 순 생선뿐인데.”

“생선……? 뭐, 어느 정도 모으긴 했어. 1등 해가지고 기본 재료도 빠방하니까 생선이면 탕이나 구이, 튀김… 어묵처럼 완자로 만들어서 먹는 것도 맛있겠다.”

“하하, 내가 그런 걸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엑, 실수했다. 우리 팀이 요리 대회 1등 해야 하는데 괜히 알려줬잖아.”

재경이 정보가 더 새어 나올세라 서둘러 입을 막았다. 그러다 류제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너 덕분에 이겼으니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지.”

“고…고맙다, 그래.”

정확히 말해서는 류제뿐만 아니라 다른 조들도 열심히 했기에 이길 수 있었던 거지만 재경이 떠받들 듯 칭찬해 주는 게 좋아 류제는 예의상 하는 부정도 하지 않고 실실 웃었다.

갑자기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류제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 진다.”

“벌써? 시간 빨리 가네. 훈련할 때는 죽어도 안 가더니.”

오렌지 주스 같던 노을이 별빛 총총 떠있는 포도 주스와 뒤섞이고 있었다.

“대충 다 씻었지? 가자. 가서 좀 쉬게. 훈련 힘들었다며.”

류제 말대로 물놀이를 즐기기엔 몸이 너무 지쳤다. 류제를 따라 물 바깥으로 나온 재경이 가져온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았다.

“저거 봐. 텐트에 불 들어왔다. 으악, 저 날벌레들 좀 봐. 언제 봐도 저런 건 끔찍스럽구만.”

“거기만 밝아서 그런가 봐. 벌써 주변이 깜깜해졌네. 발밑을 조심해.”

벌써 날이 저물었다니. 또 하루가 지나갔다. 재경은 마음이 술렁거렸다.

내일이면 류제가 힘을 각성하는 이벤트가 뜬다. 그래도 류제는 류제일 테지만 그런 일 자체가 이런 평화로운 일상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게 했다. 그걸 계기로 본격적인 마족과의 긴장 상태도 나오고. 계속 오늘처럼 가짜 훈련이나 하며 평화로우면 좋을 텐데.

“…렌?”

“짜식아, 내일도 힘내라.”

어차피 내가 뭘 바꾸려고 해도 선택지가 주어진 게 아니라면 무조건 정해진 대로 흘러갈 것이니 류제에게 뭔가를 해줄 수는 없다. 그저 그의 소중한 친구 류제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알고 마음고생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스토리와 스토리 사이, 재경이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한 이른바 ‘공백의 시간’이 끝났다.

세라가 간단하게 씻고 돌아온 학생들에게 서바이벌 1등 상으로 받은 식재료들을 학급 임원들을 시켜 골고루 분배했다. 탐스러운 재로를 가지고 어떤 요리를 할까 논의를 하는 학생들의 배 속에서 호랑이 우는 소리가 울렁거렸다.

각 조별로 채취한 식재료들의 검수가 끝났다.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채취한 조들이 버려진 독버섯을 보며 절망했다. 반면 전부 먹을 수 있는 것을 채취한 재경이네 조는 실격자였을 때와 달리 기고만장해져서는 자신감을 뿜뿜 내비쳤다.

곧, 그들의 욕망을 채워줄 대망의 요리 대회가 막을 열었다. 캠핑장 가운데에 있는 모닥불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것을 포함해 8개의 텐트가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 요리 기구가 설치된 6개의 텐트 앞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아귀가 들어찬 얼굴로 비장하게 섰다.

그중 가장 표독스럽게 독기를 품은 조는 일찍 탈락하는 바람에 개고생을 한 5조, 재경이네 조였다.

앞에서 타오르는 불판과 냄비를 웬수처럼 쳐다보는 그들의 패기에 짓눌려 옆에 있던 조가 쟤들 뭐냐며 힐끗거렸다. 표정만 보면 요리 대회가 아닌 주적 마족을 상대하는 것 같이 매섭다.

“1등 상품으로 받은 식재료는 조별로 알맞게 분배했습니다. 혹시라도 안 쓰는 재료가 있거나 바꾸고 싶은 재료가 있다면 다른 조와 상의해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제한 시간은 1시간! 다들 준비되셨죠?”

“네!”

“그럼 시작!”

선생님이 스타트를 끊자 학생들이 부리나케 움직이며 사전에 정해 놓았던 작업을 수행했다.

재경이네 조는 서바이벌에서 한 번도 싸우지 못했지만 대신 버섯, 새고기, 새알, 갖은 나물 등 건강한 먹거리를 풍족하게 채취했고 이건 분명 다른 조와는 구별되는 그들만의 특장점이었다.

그 재료들을 사용하기 좋게 정렬해 놓고 무슨 전대물처럼 나란히 테이블 앞에 서있던 그들이 준비에 앞서 깊게 심호흡을 했다.

“렌 셰프, 우리에게 지시를 내려줘!”

“좋았어. 바비큐를 향해 가자고!”

5조의 메인 요리장, 재경이 팔을 걷어붙이고 식칼을 잡았다. 일단 가장 오래 걸리는 요리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할 요리는 모듬 버섯 튀김과 새고기로 만든 보양탕, 버섯전골, 특제 소스로 버무린 나물무침이다.

“쌀을 불려줘. 난 전골하고 보양탕 육수를 낼 거니까.”

“나는?”

“넌 내 보조 좀 해줘. 너는 재료를 씻어주고.”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재경의 철두철미한 지시를 받은 조원들이 칼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군, 이 서늘한 감각.”

재경은 간만에 잡아본다며 날카롭게 갈린 칼날을 스산하게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허리가 안 좋으니까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저녁은 내가 했었지. 빙의한 이후로는 할 필요가 없어서 안 했지만.

재경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한다는 신호처럼 땅, 하고 강한 파열음을 내며 도마 위에 올려둔 무를 성큼성큼 썰었다.

큼지막하게 썰린 무는 육수용 냄비에 매운 고추, 육수용 버섯, 파 뿌리와 함께 넣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물을 가득 넣고 화력은 최대로 유지한다.

재경은 그다음 전골에 들어갈 재료들을 다듬었다.

“이리 줘.”

재경이 조원이 씻어준 버섯을 능숙한 칼질로 썰었다. 채취한 미나리, 1등 상 재료로 얻은 알배추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고추와 긴 파를 쉴 틈 없이 어슷썰기 하는 재경의 경쾌한 도마 소리에 그의 조원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그의 칼질을 구경했다.

미나리는 시원시원하게 손가락 하나 크기 정도로 쾅쾅 자르고 양파는 반으로 자른 다음 돔 형태를 유지하면서 썬다. 시간이 없으니 입으로는 조원들을 독촉했다.

“속에 넣을 재료 손질 끝났어?”

“어어… 응! 이…이렇게 하면 돼?”

“빨리 줘. 시간 없단 말야!”

재경이 질긴 야생 새의 식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우유에 담가놓았던 손질된 새고기의 다리를 벌려 안에 마늘과 불린 쌀을 집어넣었다. 찹쌀이 없으니까 쌀이 대신 들어간다. 다른 냄비에 물을 넣고 마늘과 파 뿌리와 새고기를 넣고 다진 송이버섯으로 향을 첨가했다.

다음은 버섯전골이다. 육수를 내던 냄비가 팔팔 끓자 재경이 냄비에서 파 뿌리와 무를 건져내고 간장으로 간을 했다.

너무 한국적인 음식이라 다른 학생들이 생소해할 것 같다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한국 게임 회사가 만든 이 미연시 게임 세계는 뭐든 동서양 짬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서양 같은 배경이라도 간장이나 고추장 등의 동양 소스로 요리를 하기도 했다.

여관에서는 일본풍 가정식이 저녁으로 나오지 않았나. 전부터 들었던 생각이지만 마족만 없다면 참 형편 좋은 세상인 것 같다.

“이 육수 좀 다른 곳에다가 옮겨 줘.”

“알았어!”

재경이 전골에 넣을 재료를 마무리 손질하는 동안 손을 놀리고 있는 조원에게 부탁했다. 커다란 냄비를 든 조원이 넘실거리는 육수를 빈 그릇에 옮겨 담았다.

“넌 나랑 이거 같이 담자.”

재경이 빈 전골용 냄비에 예쁘게 손질한 재료를 담았다. 채취한 버섯, 양파,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배추, 콩나물을 넣고 위에 다시 육수를 부으면 버섯전골 중간 단계 완성이다.

“미나리는?”

“그건 마지막에 넣는 거야. 식감을 기대하라고.”

“와아… 렌, 너 손재주만 좋은 줄 알았더니 요리도 꽤 잘하는구나? 부모님이 좋아하셨겠네.”

“부모님이 계셨으면 내가 요리를 잘했겠냐? 잡담하지 말고 얼른얼른 움직여. 우리에겐 중대한 사명이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아, 버섯 잘게 찢어줘. 튀김 할 거니까.”

바빠 죽겠는데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는 꼬라지가 괘씸해 재경이 버럭 성질을 내었다. 모듬 버섯 튀김하고 나물무침도 해야 하고, 전골하고 보양탕 간도 봐야 하고 갈 길이 아직도 멀었다.

한편 어느 팀보다 일사천리로 요리를 완성해 나가는 재경의 조원들과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텐트에서는 주인공 류제네 조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재경의 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류제는 비키의 연이은 실수와 왕녀의 무능함, 냄비가 끓어 넘치는 일에 일일이 오버하는 것밖에 못 하는 미나를 데리고 요리를 하느라 스트레스가 한계치를 뚫는 중이었다.

“꺄아아악! 아파! 피 나잖아. 짜증 나게 왜 칼질은 이따위로 생겨먹은 거야?”

“류…류제! 이거 끄…끓어 넘치는데 어떻게 해?”

“…그대, 생선은 언제까지 불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거지?”

총체적 난국이다.

그나마 고아원에서 요리를 해봤다는 이유로 지시를 해야 하는 입장에 서있었던 류제는 이 곱게만 자란 여편네들을 어찌하면 좋을까 한숨 쉬었다. 초장부터 요리 대회 미니 게임 풀콤보는커녕 박자에 맞게 치는 것도 불가능한 게 지금 류제의 상태다.

바비큐를 먹을 수 있는 1등은 바라지도 않는다만 적어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완성되었으면 좋겠다고 류제가 속으로 과분한 소원을 빌었다.

“비키, 조심해!”

하지만 하늘은 그를 버렸는지 시냇가에서 들었던 렌의 조언대로 생선 살을 발라내서 완자를 만들려고 하는데 칼질이 짜증 난다고 성질내던 비키가 소분한 전분 가루를 죄다 엎어버리고 말았다.

성질이 뻗친 류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어떻게 고아원에 있는 막냇동생보다도 못하냐.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요리를 못한다는 게 죄도 아니고, 화를 내봤자 뭐 하겠냐는 생각에 깊게 화를 억눌렀다.

미나는 물이 끓어 넘치는 것에 이어 전분 가루가 땅에 엎어진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과민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지… 류…류제 어떻게 해… 전분 가루가……!”

“다른 팀한테 빌려달라고 하자. 시간 없어. 비키! 빨리 가서 빌려 와.”

“아…알았어. 성질내지 마!”

“저기… 생선은 언제까지 구워야…….”

“적당히 익을 때까지!”

어정쩡하게 뜬 양손을 부들부들 떨며 버럭 외치는 류제를 피해 전분을 날려 버린 비키가 후다닥 도망치듯 다른 조로 향했다.

아니, 배고픈 건 알겠다만 뭐 저렇게 성질을 내고 난리야. 포르테 들라크루아 일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거야, 뭐야. 비키는 투덜거렸겠지만 채소 손질하랬더니 엉망진창으로 자르고 손 베이고, 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전분 가루까지 땅에 기부했으니 류제가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다친 건 난데. 비키는 류제더러 좀생이라며 투덜거리고는 전분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다른 조를 들쑤시고 다녔다.

“야, 바보 렌. 전분 가루 줘.”

“맡겨 놨냐?”

잘게 찢은 버섯을 계란 노른자와 찬물에 희석시킨 전분 가루에 묻혀 튀기고 있던 재경이 위풍당당한 비키를 짜게 식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비키는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렌네 조의 냄비를 흘겼다. 전골과 새고기로 만든 보양탕. 자신의 조가 만들고 있는 뭔지도 모르겠는 것과 차원이 다른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전분 가루를 찾는다는 말에 재경이 젓가락으로 튀김옷을 입힌 버섯을 끓는 기름 위에 던지며 물었다.

“너네 뭐 만드는데? 완자 만드냐?”

“뭐야,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 우리 조 염탐했어? 괘씸하게 그런 비겁한 술수를 쓰다니!”

“아니. 류제한테 그거 만들라고 한 게 난데.”

억측이 빗나가자 비키가 시선을 회피했다. 다른 건 다 실패해도 간신히 성공할 것 같은 회심의 완자를 렌이 제안했었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해 보였다.

“그… 하여튼! 전분 가루 빌려줘.”

“우리도 지금 쓰고 있어. 누구는 쌓아놓고 쓰는 줄 아나.”

“그럼 완자 어떻게 만드냐고 이 무책임한 렌! 네가 만들라고 했잖아. 책임져!”

“내가 만들라고 시켰냐?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지. 방해되니까 저리 꺼져. 가서 류제 콤보 찍는 거나 방해하라고! 싯! 싯, 싯!”

“방해애? 나 완전 도움 되고 있거든? 흥이다. 어디 한번 잘 만들어보라지. 나도 전분 따위 없어도 충분히 완자 만들 수 있어!”

빌려줄 구석이 없자 성질난 비키가 발을 쿵쿵 구르며 다른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무쓸모한 취급 받는 건 처음이었다. 요리 조금 잘한다고 여기저기서 잘난 척이야. 나도 그깟 요리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그저 해본 적이 없어서 아주 조오금 서툴 뿐이지.

그리고 유모가 해준 음식이 더 대단한걸. 몇 번 만드는 거 보기도 했고. 웃기지 마. 변태 류제랑 바보 렌보다 내가 못할 것 같아?

“비키, 전분 구해 왔어?”

“비켜. 전분 없이도 나라면 충분히 만들 수 있어. 감히 렌 주제에 날 깔봤겠다!”

자존심이 상해 눈에 불이 들어온 비키는 류제를 밀치고 완자 반죽에 아무 가루나 들입다 부었다.

그걸 보고 기겁한 류제가 황급히 말리려고 했지만 옆에서 왕녀가 생선에 옮겨붙은 불길이 치솟을 때까지 방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불을 꺼트리느라 잠시 한눈을 팔았다.

“뭐 하는 거야. 다 탔잖아!”

“아니… 그대가 적당히 익을 때까지라고 해서 이 정도면 익지 않을까 싶었다.”

“웃기지 마. 나도 요리 할 수 있어. 날 우습게 본 죗값을 단단히 치르게 해주지!”

“비키! 그거 넣으면 안 돼. 그거 설탕이란 말야!”

비키의 손길을 따라 이상한 화학작용을 하기 시작하는 생선 완자 반죽과 새까맣게 타버린 생선 그리고―

“저기 류제… 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라며 냄비에 쌀을 산더미처럼 붓고 꽃을 따다 올려놓은 미나를 보면서 류제가 착잡한 얼굴을 가렸다. 물이 마른 냄비에서는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다.

살려 줘. 누가 나 좀 살려 달라고. 수녀 누나! 얘들아! 렌……!

이들 가운데에 선 류제가 가리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허탈하게 섰다. 왕녀는 이번엔 실패하지 않겠다며 쭈그려 앉아 또다시 생선을 태우고 있었으며, 비키는 잘 만들어 놓았던 생선 완자를 빛깔부터 냄새까지 모든 게 이상한 짬뽕탕으로 뒤바꿔서 끓지 않는 기름에 그대로 던져버렸다. 미나는 아래는 타고 위는 설익은 밥을 퍼서 그릇에 예쁘게 올려놓았다. 그 빌어먹을 꽃과 같이.

잠시 후, 버섯을 튀기고 남은 전분을 빌려주기 위해 찾아왔던 재경이 이 참사를 보고 간신히 한쪽 입가를 실룩거렸다. 여기는 요리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폭발물 실험장 같았다.

“으하하하! 아하하!”

비키가 기묘한 저주의 독약을 만드는 마녀처럼 깔깔거렸다. 뭐야, 쟤 왜 저래. 재경이 이상한 것을 보는 눈빛으로 비키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그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고는 생각 못 하는 모양이다.

비키를 위아래로 훑던 재경이 이번엔 우두망찰하게 혼이 빠진 류제를 흔들어 깨웠다.

“류제. 전분 달라며.”

“렌… 살려 줘…….”

이젠 전분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미니 게임 풀콤보는커녕 탭으로 간단한 박자 맞추는 것조차 실패한 류제네 조의 완성품은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요리에 비참할 정도로 재능이 없는 비키의 트롤 짓이 더더욱 빛을 발한 탓이다.

류제가 자기 조 좀 제발 살려 달라며 필사적으로 재경을 붙잡았지만 다른 조가 도와주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재경은 류제를 구원해 주지는 못했다.

“힘내라.”

류제가 저런 표정으로 부탁한 적 없었는데 어지간히 절망적인가 보네. 아냐 아냐, 그렇게 따지면 사전에 논의해 놓은 작전 때문에라도 우리 조가 반드시 이겨야 해. 마음이 흔들리던 재경이 남은 시간도 파이팅하자며 전분을 들고 자기 텐트로 돌아갔다.

“3, 2, 1. 종료! 다들 테이블에서 떨어지세요.”

여차저차하여 요리 대회가 끝났다.

재경이네 조는 시간이 5분 남짓 남았을 때 버섯전골 위에 미나리를 올려놓고, 보양식은 먹음직스럽게 아삭아삭한 대파로 데코를 했다. 모듬 버섯 튀김과 미노타 소스의 조합은 최고고, 남은 나물로 만든 입가심용 반찬은 나무랄 데 없었다. 아니, 다른 조와 완전히 비교 불가였다.

“말도 안 돼.”

“세상에, 그 렌 지미네 조가?”

“아냐, 생긴 것만 저러고 분명 맛은 없을 거야.”

“이 냄새는 맛있을 수밖에 없는 냄새인데.”

심사 전, 침이 절로 고이는 맛있는 냄새에 다른 조들이 구름같이 모여 기웃거렸다. 믿을 수 없다며 내뱉는 못된 심보를 한 귀로 흘려들은 재경이네 조는 어디 전투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했다.

“그럼 어디 제군들의 요리를 맛볼까요?”

심사는 공정성을 위해 선생님이 했다. 편의상 1조부터 시작이다. 반 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세라가 1조의 테이블 앞에 섰다.

대회 처음부터 정어리 같은 게 박힌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기묘한 음식이 등장하자 웃는 낯인 세라의 얼굴이 굳었다. 거기에 새까맣게 탄 밥과 그 위에 예쁘게 올려진 꽃, 반찬인 건지 숯이 된 생선이 있었다.

“이게… 무슨 요리일까요?”

“새…생선… 완자…….”

네가 만들었으니 네가 소개하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류제 때문에 마지못해 대답하는 비키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졌다. 잘난 듯이 만들었는데 부끄러울 게 뭐 있을까 싶지만 염치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시식했을 때 이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눈으로 기묘한 작품을 살피던 세라가 젓가락으로 조금 떼어내 입에 넣었다. 안에서 씹히자마자 올라오는 냄새와 괴상한 식감이 아주 고역스럽다. 역한 비린내 때문에 식도에서부터 음식이 거부당했다.

세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밥으로라도 이 음식을 넘겨보려고 했지만 억지로 씹어 먹은 거뭇거뭇한 밥에서는 탄 맛이 났다. 생선은 숯처럼 딱딱해서 고기가 발라지지도 않았다.

“선생님… 뱉으셔도 돼요.”

알면서도 세라에게 독극물을 먹여버린 류제가 우울한 낯으로 휴지를 건넸다. 세라는 학생들의 자존심을 위해 웬만한 음식은 모두 먹어주려고 했지만 이건 도저히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서 뱉고 말았다.

“흠흠. …독창…적인 맛이네요.”

미안해진 선생님의 최선을 다한 칭찬에도 1조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요리 대회 1등은 바라지도 않는데 저녁을 저따위로 만들어놔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비키가 만든 괴상한 요리에 입을 대기엔 그들은 아직 살날이 창창했다.

무난한 요리를 한 2조의 음식이 1조의 버프로 엄청 맛있다고 느꼈던 세라가 다음으로 들른 3조는 유네의 조로, 마찬가지로 서툴게 만든 간단한 캠핑 요리였다.

채취한 재료가 없어서 소분한 기본 재료들로만 요리한 리소토다.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세라가 맛있다고 해주자 요리 대회 1시간 동안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던 유네가 안도했다.

순차적으로 맛을 본 세라는 아까부터 기대하고 있던 5조의 텐트 앞에 당도했다. 8반 캠핑지 내 흘러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의 80%의 지분율을 가지고 있다 장담하는 조가 바로 이 조였다.

세상에. 세라는 제 상상력을 한껏 충족시키는 비주얼에 감탄사를 절로 내뱉었다. 이제 막 부모님의 품에서 나와 기숙사로 들어온 학생이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좋아. 나도 학생들 관리하느라 허기가 졌는데 이건 못 참겠다. 맛있어. 섹시한 눈매를 아래로 휘며 황홀한 표정을 지은 세라가 보양탕의 국물을 맛보았다.

입 안에 퍼지는 송이의 풍미, 국물에 깊이감을 주는 다진 마늘, 적절한 간, 원기가 되살아나는 진한 육수. 지친 몸을 한 번에 달래주는 짜릿한 쾌락이 엿보인다. 이건 단연 최고였다.

“어쩜, 이 쫄깃쫄깃한 고기……! 다른 것도 시식해 보겠습니다. 이건 뭐죠?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버섯으로 만든 전골이에요. 옆에 있는 소스에 찍어 드시면 돼요.”

채소로 육수를 낸 국물은 보양탕처럼 기름지고 답답해진 입 안을 시원하게 걷어냈다. 상쾌한 버섯 향이 풍미가 깊었다.

세라가 전골 안에 있는 야채를 몇 개 집어 직접 만든 소스에 찍어 먹었다. 학생들에게 미안하게 되었지만 이건 정말 다른 조와 비교 불가다. 이게 바로 진정한 캠핑 요리다! 미미(美味)를 느낀 그녀의 상상 속은 요리만화처럼 꽃이 날렸다.

“이건 남은 버섯을 잘게 찢어서 전분이랑… 뭐더라?”

“노른자.”

“맞아. 노른자랑 고추를 썰어서 튀긴 거예요. 미노타 소스에 찍어 드시면 맛있거든요.”

조원 여자애가 이건 자기가 절반을 튀겼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같이 뿌듯해한 세라가 튀긴 버섯을 이국 소스에 찍어서 먹었다. 매콤한 고추가 아삭아삭 씹히고 튀긴 버섯의 식감이 아주 좋다. 소스랑도 궁합이 잘 맞았다.

“요리를 굉장히 잘하는군요. 이건 나물인가요?”

“살짝 데쳐서 양념에 버무린 겁니다. 반찬으로 만들어 봤어요.”

“이것도 정말 맛있어요!”

고된 노동 끝에 캠핑지에서 해 먹는 요리라는 버프가 깔렸긴 했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세라가 지금까지 맛본 학생들의 음식 중에는 단연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이건 이미 결정 났다. 6조 애들은 딱 보니 정체불명의 야채 볶음을 한 것 같은데… 그래도 먹어줘야 하겠지?

재경이네 조에게 잘 먹었다고 칭찬해 준 세라가 머뭇거리며 6조로 향했다. 이 학생들도 조금만 더 잘 만들었으면 좋았으련만. 음… 근데 이건 도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선생님이며 학생들에게 바른 성품과 건강한 자신감을 키워줘야 하는 교육자였다. 모든 조의 음식을 공평하게 맛본 세라가 박수를 짝짝 치며 다들 요리를 참 잘해서 놀랐다고 입에 발린 칭찬을 했다.

“제군들 고생하셨어요. 하지만 역시 바비큐를 위해서는 등수를 가릴 수밖에 없네요. 선생님이 아주 고심한 결과 우승은 5조가 되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아니, 고심 안 하셨잖아요. 반 학생들이 망설임 없이 1등을 발표하는 세라에게 속으로 따졌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5조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때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던 재경이 허공에 주먹을 가르더니 파이팅을 우렁차게 외쳤다.

“아자아아!”

“바비큐! 바비큐! 바비큐!”

“송이 남은 거랑 구워 먹자. 이럴 줄 알고 내가 남겨 놨지.”

저들이 생각해도 뭔지 모르겠는 정체불명의 것들로 배를 채워야 하는 학생들이 실패한 요리들을 들쑤셨다. 다른 조는 몰라도 모든 요리를 실패한 1조는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총체적 난국이었다.

“다들 뭐 할 말 없어?”

“…미안.”

“아냐… 비키 님. 내가 밥을 태워버려서 그래.”

“생선을 구워본 적이 없어서 미안하군.”

“그래. 다음부터는 잘 하자…….”

이렇게 반성하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류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그 반찬으로도 저 기괴한 음식은 먹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저건 더 이상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류제는 벌써부터 바비큐 재료를 받고 좋다고 날뛰는 재경을 포함한 5조 학생들을 부러워했다. 나도 렌 요리 먹어보고 싶었는데. 라고 생각할 때였다.

“고기 먹을 사람 여기 붙어라!”

“입장료는 남은 재료들이면 됩니다! 우리 귀염둥이 렌 셰프가 맛있게 요리해 줄 거예요.”

“사람을 이상한 별명으로 부르지 마. 왜 내가 만드냐? 먹고 싶은 사람이 해라.”

“다른 조 애들이 서바이벌을 열심히 해준 덕분에 1등을 했으니까 다 같이 먹자고 한 사람은 렌이잖아. 말 꺼낸 사람이 책임져야지.”

“내…내…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고기! 바비큐! 고기! 소화 잘 되는 고기!”

우승을 예감했던 5조는 애초부터 우승 상품 바비큐를 반 친구들과 다 같이 먹을 거라고 정해 놓았었는지 팔짝팔짝 뛰며 신나게 바비큐 준비에 나섰다.

먹을 게 없어서 멍하니 서있던 류제네 조를 쳐다본 재경이 얼른 오라며 손짓을 했다. 재경의 어투를 빌려 ‘이 대견한 짜식아!’라고 생각한 그들은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 남은 재료를 들고 부리나케 그쪽으로 튀어갔다.

왕녀도 저 정체불명의 요리를 먹는 건 죽어도 싫다는 듯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뛰어가는 게 오늘의 개그 포인트였다.

“어머나.”

그들이 정당한 노력을 통해 받은 것을 친구들에게 베풀어줄 줄은 몰랐다. 모닥불 근처에서 불 조절을 하던 세라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귀엽기도 해라. 그녀가 상냥한 어머니처럼 흐뭇해했다. 역시 말썽꾸러기여도 마음씨는 착하다니까. 후훗.

근사하게 웃어 보인 그녀는 렌이 만든 요리도 좀 더 맛볼 겸, 5조의 테이블로 모인 학생들에게 좀 더 넓은 자리를 만들어줄 겸 도움을 주러 그녀의 사랑스러운 제자들에게 다가갔다.

요리 대회는 누구의 패배도 없이 끝났다.

* * *

재경이 살던 도시처럼 땅의 빛이 공해같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다르게 달과 은하수만 빛나는 컴컴한 하늘, 그 위를 콩테로 덧대 그린 울창한 소나무 숲은 쏟아지는 별빛을 먹고 자란 그림처럼 아름답다.

숲 중간중간 요정의 고리를 그리며 따스한 빛을 내는 캠핑지에 앉아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오순도순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 거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일이고 홀로 빛도 없이 인기척 없는 스산한 밤의 숲을 거닌다는 것은 꽤나 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냥에 나선 야행성 부엉이가 높은 나무 위에서 얻어먹을 것이 없나 그들을 응시하다 푸드덕 날아갔다.

재경이네 조 덕분에 바비큐를 포함해 재경이 한 요리로 즐겁게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8반 학생들은 그들의 대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요리 대회의 뒷정리를 도와주었다.

아름다운 숲이 오염되지 않게 쓰레기도 정리하고, 혹시나 다른 곳에 불이 붙을 수 있는 잔불을 물로 부어 껐다. 요리 도구들도 싹 정리해서 반납하고 모닥불을 둘러싼 8개의 텐트 앞도 깨끗하게 비웠다.

근육통 핑계로 농땡이를 부리는 5조 학생들을 내버려 두고 요리 대회 정리가 끝나자 세라가 학생들 몇을 불러 지시했다. 그러자 수학여행 전 미리 정해 놓은 ‘귀신 역’을 맡은 학생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정해진 장소로 향했다.

하루도 다 저물고 보람찬 일과 끝에 남은 것은 꽉 찬 위를 소화시키기 위한 작은 이벤트뿐이다. 바로 수학여행까지 와서 잊으면 섭섭한 담력 시험이다.

“제군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자기는 아직 이르답니다. 제군들에겐 마지막으로 남은 활동이 있었죠?”

귀신 역을 맡은 학생들이 제 자리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은 세라가 담력 시험 시작 전 학생들을 모아 아무리 무서워도 코스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며 주의를 주었다.

담력 시험의 규칙은 간단하다.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코스를 따라 숲 어느 부분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서 도장을 찍고 캠프로 돌아오면 되었다.

같이 담력 시험을 할 짝은 즉석 제비뽑기로 정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류제의 짝은 재경이 되었다.

히로인들에게 둘러싸여도 모자를 미연시 주인공이 왜 엑스트라 삼류 악당과 같이 담력 시험을 하게 되었나. 시스템상 불가능한 건 아니다. 게임 내의 담력 시험 제비뽑기는 플레이어의 모니터 화면에서는 룰렛으로 나온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했다.

그렇다. 8반은 정원이 홀수라서 세라까지 포함해 총 5명의 히로인과 뭘 해도 훼방을 놓는 네임드 삼류 악당 렌 지미가 꽝으로 들어있는 룰렛 말이다.

류제와 같은 종이를 뽑은 재경이 뭐 잘못된 거 아닌가 이리저리 뽑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종이에 이상은 없다.

“왜? 어디 문제라도 있어?”

“아니…….”

고작 3% 정도의 확률만 가지고 있는 렌 지미가 나오다니 류제 너도 운이 썩 좋은 편은 아니구나. 엔터를 누를 타이밍이 너무 엇나간 것 아냐?

히로인들의 숨겨진 이야기 모두 개방하기, 즉 CG 올 컬렉트 도전 과제를 위해 수없이 많이 룰렛을 돌려봤지만 10%의 확률을 가진 미나나 5%의 확률을 가진 왕녀가 나올망정 렌 지미는 한 번도 걸려본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너도 참 안타깝고만. 쌔고 쌘 확률 중에 나랑 짝이 되다니.”

“난 좋은데.”

“뭐가 좋아. 나보다는 비키나 왕녀같이 예쁜 애랑 같이 담력 테스트 하는 게 좋지.”

“비키랑 짝하고 싶었어?”

“나 말고 너 말이야, 짜샤.”

예를 들어 미나와 담력 테스트를 할 때 얻을 수 있는 CG를 잘 보면 미나가 서큐버스라는 것을 나타내는 힌트가 넌지시 지나간다. 물론 주인공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센스가 좋다면 플레이어는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히로인도 마찬가지로 같이 담력 시험을 하게 되면 중요하지는 않지만 캐릭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몰랐던 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러라고 있는 이벤트였다. 거기서 하등 쓸모없는 렌 지미라니. 쯧쯔.

“나는 너랑 하는 게 더―”

“응? 뭐라고?”

“무서운 거 좋아하냐고.”

슬렉터에 있는 플래시 기능으로 어두운 숲 내를 살피며 딴생각을 하느라 말을 못 들은 재경에게 류제가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장난인지 바람인지 으스스하게 풀숲이 흔들리는 장면은 썩 한기가 돌았다.

“지금은 별 감흥 없는데 어느 쪽이냐 하면 싫어하는 쪽이야. 어렸을 적에 내가 말 안 들을 때마다 할머니가 머리맡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해줬거든. 아니 왜 하지 말라는데 굳이 이야기해서 밤에 화장실도 못 가게 만들어? 그런 걸 왜 즐기는 거야? 완전 질색이야.”

“할머님이 장난꾸러기시네.”

“어. 이불을 발까지 안 덮고 자면 귀신이 발을 끌어당긴다느니, 안 베는 베개를 옆에 두고 자면 귀신이 같이 베고 잔다느니, 책상 의자를 안 밀어 넣고 자면 귀신이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느니, 한밤중에 거울을 보면 귀신이 옆에 있다느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불 꼭꼭 덮고 자고, 베개 하나만 베고, 책상 의자 다 쓰면 그냥 두지 말고 밀어 넣고, 한밤중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협박한 거였지만.”

“하하하, 우리 수녀 누나하고 비슷할지도. 누나는 말 잘 안 듣는 애들한테 마족이 와서 물어간다고 그랬었는데.”

그립네. 라고 말하는 류제의 눈동자가 멀리 떨어진 고아원을 추억했다. 이제 입학한 지 한 달 조금 넘었나. 류제도 슬슬 향수병이 발발할 때도 되었지. 자기는 안 그러는 것처럼 재경이 힘내라며 류제를 응원했다.

“지금은 귀신보다는 이 터질 것 같은 배가 제일 문제야. 이제 그런 거 무서워할 나이는 아니거든.”

“저녁 식사 나눠줘서 고마워. 덕분에 저녁 맛있게 먹었어. 렌, 너 요리 잘하는구나.”

“보통이지. 다른 애들이 너무 곱게 자란 거야.”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역시 맛있게 먹었다는 말이 기쁜지 재경의 귓불이 잠시 붉어졌다. 요리를 해도 맨날 할머니랑만 먹었는데 친구들이 칭찬해 줘서 뿌듯한 게 기분 좋았다. 할머니는 수고했다고 엉덩이만 쳐주지 맛있다는 말은 잘 안 해준단 말야.

“덕분에 일약 스타가 되었으니 작전 대성공이지. 흥, 이제 여자 친구 생기는 것도 초읽기라고.”

“여자 친구? 서바이벌에서 1등 한 걸 축하해 주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그런 거 아냐! 네 멋대로 추측하지 마!”

정곡을 찔린 재경이 부끄러워서 괜히 식식 콧김을 내뿜었다. 제 감정에 못 이긴 재경이 류제의 어깨를 쳤다.

놀려대던 류제가 알았다고 유들유들 웃었다. 렌은 정말 귀엽다니까. 귓불은 솔직하면서 표현은 솔직하지 못한 점이 너무 재미있었다.

류제가 멋들어지게 웃으니까 뭐라 화를 낼 수 없었던 재경은 쑥스러워서 애꿎은 돌멩이만 찼다. 실은 서바이벌 1등을 한 것을 축하해 주고 싶었던 것도, 반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싶었던 것도 다 사실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친구가 전무했던 재경은 더 단단한 인기를 쌓고 싶었다. 하지만 얼굴부터가 금수저인 류제와는 다르게 재경은 키도 작고, 왜소하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재경은 자신이 그만큼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서 호감을 쌓으려고 한 것일 뿐이다.

“미래의 여자 친구를 위해서 노력하는 거라고 해둬.”

“누구 좋아하는 사람도 없잖아.”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어?”

“미리 대비하는 거지.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궁금하네. 누구를 사랑한다는 감정은 알아?”

“그걸 알면 내가 모태 솔… 우앗!”

가까운 풀숲에서 소름 끼치는 긴 산발 머리의 인기척이 지나갔다. 딴 데 정신이 팔렸다가 깜짝 놀란 재경이 저도 모르게 류제의 팔을 붙잡았다.

그 감촉에 류제는 또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병세의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재경이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걸어가는 재경을 힐끗 쳐다보던 류제는 어색해지려는 마음이 싫어 괜히 렌에게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 사람은 무서울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대.”

“뭐어? 인간이 바보도 아니고. 그럼 마족하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냐?”

“그런 의미는 아니야. 무서우면 심장이 두근거리잖아. 그때 옆에 이성이 있으면 그 두근거림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대. 무슨 용어가 있었는데. 흔들다리 효과였나?”

“흐음? 계속해 봐.”

“생성된 심리적 불안이 신체 각성을 일으키는데 그때 사람은 감정을 쉽게 착각하게 된다나 뭐라나.”

“에이,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어.”

자기가 안 경험해 본 건 잘 믿지 않는 재경이 웃기지도 않는다며 손을 내저었다. 재경은 얘가 진지하게 헛소리를 한다면서 웃어넘기려는데 긴장이 풀린 순간 나무 위에서 처녀 귀신이 고꾸라지며 재경에게 돌진하더니 번뜩하는 빛을 내면서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끄히아아악! 우악, 우아악!”

“깜짝아.”

“깔깔깔깔깔!”

재경이 자지러지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자 귀신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도망갔다. 재경은 귀신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가만히 서있던 류제는 도망가는 귀신을 살폈다. 저거 분명 우리 반 애다.

어두워서 넘어진 재경이 잘 보이지 않자 류제가 슬렉터의 빛으로 재경이 있는 곳을 비췄다. 알라마니 기술관 때처럼 안색이 창백해진 렌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괜찮아?”

“최악이야! 뭐야, 도대체!”

너무 깜짝 놀라서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재경이 죽겠다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눌렀다.

“아, 내 심장 터지겠다. 심장마비로 죽으면 책임질 거냐고!”

불평하는 재경을 일으켜 세워주던 류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반쯤 일어난 렌을 제 몸에 부딪힐 정도로 확 끌어안았다.

심장은 주체 없이 두근거리는데 몸 전체가 따뜻하게 감싸 안아졌다. 깜짝 놀란 재경은 뇌가 정지했다. 심장과 심장이 함께 맞부딪혔는데 두근거리는 박자가 맞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경이 뭐 하는 거냐고 따지기 전에 류제가 재경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어때? 착각할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말해야 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놀라서일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꽉 끌어안겨 간지럽게 속삭이니 사람 낯간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알겠다. 아까 흔들다리인가 뭔가 하는 이야기로 장난치는 거다.

진상을 알아챈 재경이 류제의 가슴팍을 밀쳐냈다.

“바보 같은 장난 하지 마. 네가 네 입으로 이성끼리라고 했잖아. 같은 남자끼리 착각하겠냐?!”

“하하하. 그냥 한번 해본 거야. 어때, 진정됐어?”

류제가 기겁하는 재경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길게 내려간 앞머리 안의 진짜 표정은 어둠 속에 숨어버렸다.

재경은 이럴 시간에 히로인하고 친해질 생각이나 하지 쓸데없는 짓이나 한다고 혀를 찼다.

“근데 효과는 있는 것 같아. 와아, 까딱하면 진짜로 두근거릴 뻔했네. 짜식이 아주 선수네. 앞날이 창창하구마.”

“그래? 두근거렸어?”

“나도 나중에 여자 친구 생기면 써먹어야겠다.”

“하하하.”

그러라고 가르쳐 준 건 아닌데. 류제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반응이 시원찮은 것이 시무룩하다. 내가 미쳤지. 담력 시험 한다고 어둠 속을 틈 타 이런 짓을 하다니. 류제도 류제대로 후회돼서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싱숭생숭하다고 렌을 떠보는 건 무슨 짓이냐. 미쳤다. 미친 거다, 이건.

“여기인가?”

“그런 것 같은데?”

커다란 나무 아래에 도장을 찍을 수 있는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분명 서바이벌을 할 때에는 그냥 오래된 나무였는데 지금은 서낭나무처럼 갖은 장신구들이 나무 주변에 걸쳐져 있었다.

재경이 자신과 류제의 제비뽑기 종이에 도장을 쾅 찍었다.

“자, 됐다. 간단하네.”

“아까 엄청 놀랐으면서 간단하다고 하는 거야?”

“그거야 갑자기 나타나니까 그러지. 거기에 안 놀라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흐흐흐~ 아니~ 렌이 겁쟁이라서 그래~ 흐흐흐…….”

뒤에서 귀신 흉내를 낸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소름이 으스스 돋은 재경이 굳은 목을 돌리니까 눈깔을 희번덕거리며 막 죽은 사람처럼 분장한 여자애가 씨이이익 웃었다.

“우아아악! 우악! 우아악! 아오, 아, 깜짝이야! 죽을래?!”

“우하하하. 두 번이나 놀래켰다. 하하하. 류제는 재미없네~ 놀라는 시늉이라도 해라.”

“아니… 놀란 건데.”

렌이 놀라는 소리에 더 놀랐네. 류제가 하아, 하고 심장을 부여잡았다.

재경은 너 나중에 두고 보자며 같은 반 여학생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재경이 무섭지 않은 귀신 담당 여학생은 깔깔거리면서 재경의 놀란 표정을 따라 하며 놀려댔다.

“저 길로 돌아가면 돼. 또 놀라 자지러지지 마~ 렌~”

“안 놀랄 거야!”

귀신이 나무 밑에 서서 잘 가라고 인사해 줬다. 캠핑지로 돌아가는데 멀리서 아까 재경이 그랬던 것처럼 여자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이 싫다며 귀를 막고 부르르 떨었다.

“사람을 놀래는 건 진짜 악취미인 거 같아. 왜 하는 거야, 이런 거.”

“재미있으라고 하겠지. 네 할머니처럼.”

“말하지만 당사자는 하나도 재미없어. 아, 내 심장이야. 아직도 두근두근 뛰어.”

투덜거린 재경이 작게 난 길을 앞장섰다. 그 모습을 류제가 뒤에서 느긋하게 지켜보며 뒤따라 캠프로 향했다. 그도 심장이 아직도 두근두근 뛰었다.

평화(?)롭게 담력 시험이 끝난 후, 텐트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한 재경은 뻐근해서 죽겠다고 몸을 두드렸다. 안 쓰던 근육까지 쥐어짜는 바람에 속 근육까지 근질근질했다.

근처 시냇가에서 이를 닦고 돌아온 류제가 스트레칭을 하는 재경과 그걸 도와주는 유네를 보고 뭐 하냐며 물었다.

“내일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하면 덜 아플까 싶다, 왜?”

“고생하는구나.”

“뭐, 바비큐 맛있게 먹었으니 됐어.”

“렌 군, 시원해?”

“응…….”

오므린 다리를 모아 길게 뻗어서 쭈욱 허리를 숙여 종아리와 허벅지를 스트레칭한 재경이 나른하게 답했다. 유네는 재경을 도와 등허리를 꾹꾹 눌러주었다.

“이제 됐어. 아으, 이래도 안 풀리는 걸 보면 이거 완전 근육통 각인데.”

“괜찮겠어? 내일도 일정이 꽉 찼잖아. 훈련은 안 하지만 리엔달로니아 협곡 체험도 있구.”

“맞네. 어떻게 하긴 해야 하는데.”

재경이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내일은 정말 중요한 류제의 이벤트가 남았다. 그런 중요한 날을 이런 몸으로 맞이할 수는 없지. 뭔가 마음먹은 재경이 자리에 엎드려 종아리를 까딱거렸다.

“류제, 나 허벅지 좀 주물러줘.”

“뭐?”

“여기가 되게 간지럽단 말야.”

“유네한테 해달라고 해.”

“짜샤, 유…유네보단 네가 힘이 더 세잖아.”

엉덩이 바로 아랫부분에 있는 허벅지 근육을 어떻게 유네한테 주물러 달라고 한단 말인가. 암만 친구라도 여자애한테. 입을 비죽 내민 재경이 발로 류제를 툭툭 쳤다. 류제는 이 무슨 일인고 정신이 빠져서 눈만 끔벅거렸다.

“빨리~!”

“아…알았어.”

졸린 재경이 애처럼 칭얼거리자 류제가 마지못해 쭈그리고 앉았다. 어릴 적 교회 신부에게 해준 마사지를 떠올리며 소매를 걷은 그가 렌의 옷 위로 허벅지를 눌렀다.

“어우, 야. 어우, 시원해. 역시 힘이 남다르다니까.”

시원시원하게 눌러주니 기분이 좋았는지 재경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는 아저씨 같은 타령 소리를 내면서 흡족해했다.

“종아리 알도 주물러줘. 내일 못 걸어 다니면 어쩌지?”

“오오… 류제 군, 능숙하다!”

엎드려있는 렌과 그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자신이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류제는 판단 불가였다. 일단 주무르라고 해서 주무르고 있긴 한데 심장 소리 때문에 렌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망할 꿈이 자꾸 오버랩된다. 훠이. 썩 꺼져라, 음란 마귀야.

“야, 류제. 다른 발도 해달라니까? 왜 멍때리고 그래?”

“어? 응. 알았어.”

꾹꾹꾹꾹. 볼기근과 뒤넙다리근 사이의 라인부터 시작해서 오늘 고생하느라 볼록 튀어나온 장딴지근도 마사지해 주고 림프절이 모여있는 곳을 골라 부은 곳이 가라앉도록 깊게 눌러준다. 손에 힘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재경이 끅끅 억눌린 소리를 내었다.

“아으… 윽… 좀 살살 해. 너무 아프잖아. 그렇지. 오, 좋아.”

“시원해? 류제 군, 안마 잘하네.”

“그… 어렸을 때 안마사가 꿈이었어.”

입이 대뇌를 거치지 않는다.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류제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손만 주물주물거렸다. 이거 완전 어제 꾼 꿈하고 겹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지? 아, 예지몽이었나? 내가 렌에게 안마를 한다는 꿈?

“렌 군, 나도 어깨 주물러줄까?”

“좋아.”

류제의 혼란스러운 마음도 모르고 해맑게 유네의 안마까지 받은 재경은 마사지가 끝나자 텐트 구석에 쭈그려서 좌절하고 있는 류제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뭐 하냐. 안 자? 불 끈다?”

불끈? 확증편향으로 자기가 신경 쓰이는 단어만 골라들은 류제가 허억, 놀라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대로 불끈거리지 않았다. 암. 왜냐면 꿈하고 현실은 다른 법이니까. 누가 친구 마사지를 해주면서 발정을 해. 맞아, 확실해. 그렇고말고다.

“나는 불끈―”

“뭐?”

류제가 반박하려던 그때 재경이 텐트 위에 달린 똑딱이 전등을 껐다. 텐트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불 끈다는 의미였구나. 류제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착잡해서 손으로 못난 얼굴을 쓸었다.

“아니… 내 착각이었어.”

“피곤한가 보네. 내일 새벽 이동이니까 얼른 자기나 해.”

마사지도 받았겠다, 피곤이 몰려온 재경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기적하게 앉은 류제는 고민이었다. 이걸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빼면 쓰레기가 될 것 같고, 안 빼면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빼버리면 내가 진짜 렌을 주물거려서 발정한 것 같잖아. 아냐, 난 친구를 상대로 그런 엉큼한 상상을 한 적이 없어. 꿈은 꿈일 뿐이야. 내 이성은 누구보다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어.

고개를 획획 돌려 머릿속을 털어낸 류제도 자리에 누웠다. 텐트에 세 사람이 잘 자리는 충분한데 류제가 눕자 어째 재경과 어깨가 맞닿았다.

“저기, 렌. 좁은데.”

“원래 집은 좁아…….”

눕자마자 반절은 꿈나라로 떠나버린 재경이 아무렇게나 답했다. 재경의 옆자리 유네는 최대한 떨어진 채 구석에 붙어서 자는 중이다. 재경도 나름대로 유네를 배려한답시고 류제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렌. 미안한데 조금만 옆으로 가줄래?”

“원래 소스는 찍어먹는 거야…….”

이번에도 대답만 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포기한 류제가 꿈지럭거리며 최대한 재경에게서 떨어졌다. 덕분에 텐트 벽이 양옆으로 균형 있게 쏠렸다.

이건 고문인가. 고문이다. 고문이야.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 오지 않는 류제는 멍하니 텐트 천장을 응시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렌의 숨결 따윈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야 정말로 신경 쓰이지 않으니까.

딜레마에 빠진 류제는 흔들다리 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두근두근 뛰어오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잠이 온다, 나는 두근거리지 않는다, 나는 피곤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쉰여섯 마리……. …양 백사십 두 마리…….

“어머.”

오늘도 미래의 마왕님의 상태를 보러 온 서큐버스가 깊은 밤이 되도록 잠을 못 이루는 류제를 보며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제 선물로 주었던 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하. 재미있네.”

미나는 그깟 하찮은 감정에 휘둘리는 류제에게 퍽이나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오늘도 가벼운 꿈을 선사했다.

그녀는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에게서 훔쳐낸 S_script의 보안 코드를 담력 테스트 도중 동료와 접촉해서 넘겼다. 이유? 이유야 당연하다.

내일,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방황하는 마왕님께 작은 트리거를 제공해 드릴 예정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높은 나무에 오른 미나가 사악한 마족답게 웃었다. 그녀의 동공만이 야생동물처럼 붉게 빛나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일렁거렸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의 그림자가 나무를 가렸다가 지나가니 미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 *

숲속에 사는 새가 가장 먼저 일어난 이른 새벽,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자 텐트 지퍼 사이로 아주 잠깐 반짝거리는 빛이 투과되었다. 그 새벽빛이 눈두덩을 지나쳤을 때 기구할 정도로 우연찮게 류제가 슬며시 눈을 떴다.

덥다. 또 정신 나간 꿈을 꿔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잠에서 덜 깬 류제의 이마 사이로 땀이 주르르 흘렀다.

새벽에는 조금 춥다 생각했는데 아침이 되니 그렇지도 않네, 라고 생각하며 몸을 뒤척거리는데 눈앞에 있는 개털 같은 머리칼을 보고 무슨 착각을 했는지 그가 손을 뻗어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고아원에서 가끔 챙겨줬던 이런 빛깔의 개가 생각났다. 또 창문을 통해서 기어 들어왔나 보다.

“…아… 하지… 으음…….”

그 머리칼 아래에서 사람 말이 나오자 개가 사람 말을 한다며 류제가 실실 웃었다.

이 높은 체온, 몸에 폭 안기는 체구, 관리가 안 돼서 칙칙한 털. 언제 들어와서 이렇게 안긴 건지. 원래 사람 잘 안 따르는데 내 품에는 잘 안기니 미워할 수가 없다.

우쭈쭈, 우쭈주. 만지작거리며 귀여워해 주면 귀찮다고 몸부림을 치는데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배를 딱 만지면 털이 부들부들하단 말이지.

응?

손을 더듬어 배가 있는 부분을 슥슥 쓰다듬는데 어째 털이 없이 맨들맨들하다. 어라, 수녀 누나가 여름 온다고 털을 다 밀었나? 으응?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류제가 눈을 떠서 털이 없어진 떠돌이 개를 살폈다. 개가 사람 옷을 입고 있다. 주둥이를 내 가슴팍에 박고 있는 게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주둥이가 아니다. 사람? 어, 맞아. 나, 분명 수학여행 와서―

한 큐에 확 들어온 정신에 류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개라고 착각했던 그것의 정체를 다시 살폈다. 덕분에 류제의 팔을 베고 자고 있던 머리가 데굴데굴 옆으로 굴렀다.

칙칙한 갈색 머리, 작은 체구에 체온이 높은 사람의 몸뚱이가 품 안에 폭 담겨 있었다. 누구냐고? 당연히 렌이다.

“우아아악!”

담력 시험에서조차 지르지 않은 비명을 지르며 류제가 지레 놀라 뒤로 넘어갔다. 손으로 짚은 벽은 설치된 텐트의 벽이라 류제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와 함께 기우뚱 넘어가 버렸다.

“으어, 우어억!”

“에… 꺄앗! 엄마야!”

넘어지는 텐트의 모서리를 기점으로 얄궂은 지렛대의 원리가 작동해서 잘 자던 재경이 데구르르 굴러 류제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았다.

거기에 류제와 대칭점에 있던 유네는 퉁, 하고 튀어 올라 두 사람 위에 의도치 않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아야야.”

“뭐…뭐야? 뭐냐고? 뭐야?”

가장 밑에 류제, 그 위 하반신에 재경, 그 위 상반신에 유네가 벽돌 쌓는 것처럼 비뚤게 포개져 있다. 누가 봐도 다이내믹한 아침 기상이다.

유네한테 배로 안면 내려찍기를 당해서 입이 틀어막힌 류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진정했어야 했다고 후회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덕분에 류제는 오늘 아침의 교훈으로 자다가 웬 홍두깨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임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누구 다리 사이에 얼굴을 박고 있다는 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걸 재경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유네의 배에 얼굴이 처박힌 것을 어찌하지 못한 류제가 대자로 뻗은 채로 부탁했다.

“맨 위에 있는 사람이 먼저 비켜주지 않을래? 좀 무겁구나.”

“그거 내가 할 소리거든?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짓거리야.”

배에서 웅얼웅얼 말을 하는 류제의 입술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유네가 꺄악 얼굴을 붉히며 데구루루 굴러 저만치 이불 속으로 몸을 사렸다.

“푸하… 고마워, 유네야. 숨 막혀 죽을 뻔했네.”

“벼…별말씀이야… 류제 군.”

“진짜, 뭐 하는 거야. 누가 그런 거야?”

위에서 목을 짓누르던 유네가 사라지자 류제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은 재경도 살겠다며 고개를 들었다.

류제도 마침 유네가 가렸던 얼굴이 개방되어 아침부터 찌뿌둥한 허리를 드는데 재경이 제 사타구니에서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제 발 저려서 또다시 우당탕쿵탕 뒤로 도망갔다.

“왜 저래. 귀신 본 얼굴처럼. 아야야. 내 턱. 이 짜식이, 진짜.”

“레…렌?!”

“그래, 나 렌 지미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아침부터 겁나 건강도 하네.”

“류제 군, 선생님께 가보는 게 좋지 않아? 무슨 일인데 그래?”

“아니… 이상한 꾸… 잠에서 덜 깨서 그래.”

류제가 벌렁거리는 심장을 숨기며 애써 변명했다. 남자애로 보기에는 다분히 말랑말랑했던 유네의 뱃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필이면 사타구니다. 이 망할 우연 같으니. 류제가 위로 넘어간 앞머리를 황급히 가리며 붉어진 얼굴을 숨겼다.

진짜 미쳤나 봐. 이건 그냥 사고라고. 일일이 이렇게 반응하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거 몰라? 물론 내가 렌한테 조금 지…집착심이 있었고 솔직하지 못한 게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틀 연속으로 렌을 상대로 야한 꿈을 꿀 정도도 아니고, 어제부터 불끈불끈거리는 건 더 말도 안 된다.

류제가 머리를 싸맸지만 졸려 죽겠는 재경은 이 사태의 범인을 이상한 놈 쳐다본다는 듯이 흘기고는 하품을 하며 베개를 찾았다.

“난 더 잘 거니까 잠꼬대는 적당히 해라. 진짜 안 그래도 근육통 때문에 아파 죽겠는데.”

“잘 자… 미안.”

재경은 예견했던 근육통으로 몸이 근질거려 기상 시간까지 더 자려고 비뚤어진 텐트 어딘가에 몸을 뉘었다.

아직도 류제가 웅얼거리던 감각이 남아있어 얼굴을 붉히던 유네가 눈치를 보다가 류제도 렌도 별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자 안도하고 이불 속에서 얼굴만 쏙 빼냈다.

“류제 군도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

“난 멀쩡해. 아침부터 미안하다.”

“아냐. 덕분에 일어났으니 됐어. 류제 군도 더 자.”

“넌?”

“난 일어난 김에 잠깐 세수하러 갔다 오려구.”

새벽 일찍 일어났겠다, 어제 제대로 씻지 못했던 유네가 시냇가에서 씻을 요량으로 후다닥 짐을 들고 나갔다.

류제는 붕 뜬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반쯤 넘어진 텐트 밖으로 나와 멍청한 눈으로 숲속을 바라보았다. 찌르레기 소리. 나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명상을 하려고 노력한다. 번뇌는 저리 가라. 불면증에 걸린 왕녀가 한층 더 불쌍해지는 아침이었다.

“기상하세요! 기상!”

캠핑지에서 1박을 머무른 학생들은 보다 일찍 일어났던 류제와 유네를 제외하고 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선생님의 기상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어제 너무 고된 훈련을 받았던 재경은 새벽에 깬 것이 힘들었는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결국 비몽사몽인 눈으로 류제에게 달라붙은 채 질질 끌려가 아침 점호를 했다.

“다들 잊은 물건 없죠? 그럼 바로 다음 일정으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걸어 들어온 만큼 걸어 나가야 하는 깊은 숲속의 캠핑지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재경은 근육통과 덜 깬 잠을 이기지 못해 류제의 옆구리에 들려서 다음 숙소로 향했다.

재경의 짐, 자신의 짐, 거기에 재경까지 전부 들고 가는 류제를 누군가는 불쌍하다 생각했지만 그는 따지고 보면 큰 포상을 받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러모로 복잡할 듯한 류제의 머릿속을 엿볼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자.

숲에서 나와 가까운 도시로 가서 또다시 기차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하면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관광할 수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곳은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관리하며, 제립학교 학생들을 포함하여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있는 어빌리터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관광지 근방에 있는 신식 숙소에 짐을 푼 학생들은 점심 식사 전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진 틈을 타 너도나도 샤워를 했다. 마땅히 씻을 곳도 여의치 않았던 캠핑지가 어지간히 찝찝했나 보다.

유네도 씻고 싶다고 숙소 안 샤워실로 들어갔으나 사소한 청결 문제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류제와 재경은 샤워 5분이면 충분하다며 그 잠깐을 이용해 플리 마켓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숙소에서 쉬고 싶어 하는 류제를 재경이 플리 마켓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플리 마켓이 무엇이냐, 류제를 억지로 끌고 가야 할 정도로 중요하냐 묻는다면 재경은 기꺼이 그렇다고 답을 돌려줄 것이다. 제립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을 때 우연찮게 열리는 플리 마켓이 수상하다 생각되지 않는가?

그렇다. 여기는 바로 히로인들의 호감도 이벤트를 완성시키기 위한 장소였다. 여기서 류제가 히로인들에게 선물로 줄 물품들을 구매한다는 중대한 사명이 이루어졌다.

“좀 빨리 와!”

“알았대도. 뭐 살 거라도 있어?”

“살 건 네가 있겠지, 이 바보야!”

나? 류제는 늘 그렇지만 렌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겠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 게 뭐가 있겠나. 아, 같이 기념품 사자는 건가?

“그런데 기념품은 여기보다 유네가 말해 줬던 거기서 사는 게 낫지 않아?”

의도를 착각한 류제가 영 소심하게 나서자 답답했던 재경이 류제의 관자놀이를 건방지게 툭툭 찔렀다.

“쫑알쫑알 시끄러워. 와보면 아니까 잠자코 따라와. 돈 모자라면 나도 보태줄게.”

재경의 손에 이끌려 규모가 있는 플리 마켓에 도착한 류제는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을 구경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손목은 도망칠 수 없도록 렌에게 단단히 붙잡혔다. 줄에 매인 개처럼 쫄래쫄래 따라간다는 게 조금 기쁜데 류제는 진짜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뭐, 모처럼 여행지까지 왔는데 둘이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 아가타를 떠나서는 둘이서만 있지 못했으니까. 맞아, 그런 의미로 두근거리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자기가 생각해도 보잘것없는 변명을 하며 류제가 마른 입술을 적셨다.

“이쯤인데…….”

류제는 안중에도 없는 재경은 슬렉터에서 시간을 살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플리 마켓 이벤트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히로인에 맞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서는 점심시간 전까지 구매를 속행해야 했다.

우선 유네의 것은 골목에서 오른쪽, 위, 오른쪽으로 가면 나온다.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는 류제를 질질 끌어 간이 판매대로 만들어진 귀퉁이를 튼 재경은 거기서 보이는 수상쩍게 생긴 할머니를 발견하고 옳다구나 승리의 주먹을 쥐었다. 맞다면 저쪽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 것이다.

“거기, 교복 입은 학생. 이 할미가 학생한테 꼭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왔다! 흥분을 숨기지 못한 재경이 콧김을 뿜었다. 예상한 대로 이상한 문양이 그려진 후드를 푹 눌러쓴, 새 부리처럼 툭 튀어나온 화살 코를 가진 난쟁이 할머니가 류제를 향해 손짓을 했다.

“류제, 저 할머니한테 가보자.”

“뭐어? 저 수상쩍은―”

할머니한테? 라고 류제가 소곤소곤 말을 줄였다. 암만 사람이 오컬트에 심취해도 그렇지 저 믿음 하나 가지 않는 사기꾼 점술사 같은 사람한테서 뭘 사라고?

사기당할 것 같아서 싫은데. 류제는 내키지 않았지만 렌이 우기면 거절하지 못해서 별수 없이 따라가 주었다.

“이 할미가 아주 재미난 것들을 가지고 있으니 구경일랑 해보아.”

수상한 할머니가 앞에 깔아놓은 자리 위에 올려놓은 물품들을 가리키며 낄낄낄 웃었다.

류제는 다른 곳도 많은데 뭐 이런 데에서 기념품을 사는 렌을 이해할 수 없어서 힐끗거리는 반면 재경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수상한 할머니가 가진 물건들을 살폈다.

이것도 아냐, 이것도 아닌데. 으음… 곰돌이 모양 열쇠고리는 보이지 않아. 앗, 잠깐.

“이건?”

“팔찌를 만드는 키트란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팔찌 말이지.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데. 진짜 소원을 이루어 주냐고? 그건 나야 모르지… 깔깔깔!”

“열쇠고리는 없어요?”

“열쇠고리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래서 살 거야 말 거야?”

살 생각은 하지 않고 애꿎은 물건들만 들쑤셔 놓자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물건 좀 보자는데 소리 지를 건 뭐냐고. 재경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똑같이 대들었다.

“아, 좀 물어볼 수도 있지. 뭐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치는 건데요? 완전 악덕 상인이네!”

“난 아주 바쁘신 몸이란 말이다. 안 살 거면 저리 가!”

“누가 안 산대요?”

상대방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렌이 또 한바탕 싸울 기세다. 보다 못한 류제가 중재할 목적으로 끼어들었다.

“뭘 사려고 하는데?”

렌이 들고 있는 것은 소원 팔찌를 만들 수 있는 끈과 비즈가 들어있는 작은 키트였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던 류제가 무릎을 쳤다.

“맞다. 그거. 유네 때문에 일부러 사는 거야?”

“뭐야, 네가 만들어 달라고 했으면서 그새 까먹고 있었냐?”

“아니…….”

류제가 찔려서 말을 줄였다. 내가 잠깐 부탁했던 건데 그걸 기억하고 사러 나오다니. 근육통 때문에 아프다 징징거릴 땐 언제고. 류제는 그 마음이 괜스레 귀여워서 비식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착한 거 아냐.

“열쇠고리가 없구나. 이거 주세요. 얼만데요?”

“흥, 고 말하는 싸가지를 봐서 싸게 내놓아 주지.”

수상한 할머니가 손을 내밀어 적절한 돈을 요구했다.

원래 유네의 호감도 물품인 열쇠고리 말고 소원 팔찌 가지고 되려나. 팔찌 만드는 키트를 여기저기 돌려보던 재경이 류제를 쳐다보며 뭐 하냐고 턱을 까딱거렸다. 딱 봐도 동네 양아치가 삥 뜯는 포스였다.

“뭐 해. 빨리 돈 내.”

“내가?”

“그럼 내가 내냐? 니가 만들어 달라며?”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류제가 머뭇거리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현금을 내밀었다. 착하다는 말 보류. 설마 이것 때문에 나를 데리고 온 건가 영 찝찝하다.

혹여 마음이 바뀔세라 류제의 돈을 냉큼 받고 아주 고맙다며 싱글벙글 웃은 수상한 할머니는 ‘또 보자며’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재경도 어서 이동하자며 류제의 등을 밀었다.

“바쁘다 바뻐. 빨리 와!”

또 살 게 있나? 류제는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재경의 행동에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 할머니는 무슨 신출귀몰인 건지 렌이 이쪽저쪽으로 데리고 가면 무조건 자리에 앉아있는 기행을 펼쳤다.

분명 다른 장소인데 아까 그 할머니가 다른 상품을 진열한 채로 앉아있자 류제는 꿈을 꾸고 있나 다소 정신이 멍해졌다.

“자, 류제, 돈!”

이번에 재경이 고른 것은 유리로 만든 병 안에 담긴 예쁜 프리저브드 플라워(preserved flower)였다. 류제는 반사적으로 지갑을 꺼내 돈을 내밀었다.

“이 꽃은 왜 사는 거야?”

“왜 이렇게 둔하냐? 세라 쌤 관광도 못 하고 고생하셨으니까 부반장으로서 좀 챙겨 드리라고 이 바보야!”

“아차. 그러네.”

그러면서 구매한 작은 병을 류제에게 건넨다. 류제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쇼핑백 안에 넣었다.

“히히. 고맙고만. 또 봅세!”

또 보자고? 류제는 수상한 할머니가 수상쩍게 인사를 하는 것을 돌아보며 재경에게 질질 끌려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거 암만 좋게 생각해도 데이트가 아니라 강매 같은데? 라고 합리적인 의심을 한 류제는 끌려가다가 또다시 같은 할머니를 목격했다.

“그건 잠을 잘 자게 해주는 향초일세. 필요한가?”

“뭐 해. 그거 사려면 빨리 사.”

이번엔 어제오늘 꾼 이상한 꿈 때문에 왕녀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던 류제가 수면모를 쓴 달이 그려진 향초를 들었다가 강매를 당했다. 가격도 제일 비싸서 용돈의 반이나 사라졌다. 재경은 류제의 마음도 모르면서 옆에서 부아 터지는 소리나 해댔다.

“좋아. 짜식이, 너도 왕녀를 꽤나 신경 쓰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아니… 이건 그냥 우연히―”

“자, 다음, 다음!”

또 있어?! 류제는 또다시 바람처럼 달려가는 렌에게 끌려가서 하얀 손수건을 얻었다. 이번엔 류제가 구매한 것이 아니라 재경이 사서 류제에게 전해 달라고 억지로 떠넘겼다.

비닐에 포장된 하얀 손수건을 보며 류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미나 손수건까지 신경 써준 거야? 렌 분명 미나 싫다고 했었지? 역시 그냥 부끄러워서 그런 거였어. 누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굳이 이런 걸 사서 주냐고.

류제가 네 번째로 수상한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재경에게 끌려갔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또 그 할머니와 마주했다.

이 할머니 정체가 뭐야? 어빌리터야? 아니, 렌은 어떻게 이 할머니를 찾아다니는 거지? 예전부터 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해서 혹시나 했는데 렌은 좀 할머니 친화적인(grandma―friendly) 애인가?

“오호호… 그건 넬사 고원에 있는 목장에서 자라는 특A급 암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 고급 푸딩이지. 특제 캐러멜 소스도 들어있어. 보는 눈이 있구만!”

다섯 번째로 재경이 고른 것은 어제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점심 후식으로 나왔던 푸딩과 똑같은 상표의 푸딩이었다.

히로인 이벤트에 관심 없는 류제도 저건 기억했다. 저건 늦게 온 비키가 먹지 못했던 푸딩이다.

설마하며 주저하는 류제에게 재경이 돈 안 내고 뭐 하냐면서 빤히 쳐다보았다. 류제가 마지못해 돈을 내자 이번에도 수상한 할머니가 좋다고 채갔다. 류제의 지갑은 이제 빈털터리였다.

“이건 왜?”

“어제 비키만 못 먹었잖아. 너도 부반장이면서 혼자서 반장 일 도맡다가 손해 보는 비키가 불쌍하지도 않냐?”

“역시 그것 때문이지? 하아.”

렌이 아까부터 묘하게 설득력 있는 말들로 수상한 것들을 계속 구매하게 만들었다. 유네의 소원 팔찌, 선생님의 꽃, 왕녀의 향초, 미나의 손수건, 비키의 푸딩까지 다양도 하다.

“렌.”

“뭐야, 불만이냐?”

“네 건 필요 없어?”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다. 남들 사줘야 할 건 내 돈으로 사게 하면서 정작 자기 것은 안중에도 없다니. 암만 사람이 솔직하지 못하다고 하지만 움직임이 작위적인 것 같은 기분은 뭔가. 저 어디든지 나타나는 할머니는 누구이고. 렌은 왜 저 할머니한테서만 물건을 사는 거고.

류제가 의심스럽게 쳐다보자 재경이 서툴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아무래도 좋잖아. 다 샀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빨리 와. 점심 먹어야 해, 이 바보야.”

재경이 후다닥 도망가듯 앞서나갔다. 자기 멋대로라도 정도가 있지, 제 것은 왜 안 사냐고 물어보니까 돌아가자니. 류제는 어이가 없었다.

하아, 렌이 원래 저렇지 뭐. 이상한 거 한두 번이야? 반쯤 포기한 류제가 제 친구를 뒤따라가려는데 뒤에서 수상한 할머니가 수상쩍게 웃었다.

“낄낄낄… 신수가 훤한 놈이군. 여복(女福)이 타고났어… 그 청모(淸眸)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 뒤에는 흉측한 집념과 사악한 영혼이 자리 잡고 있다니 기구한 운명이구나.”

“네? 저한테 말하신 건가요?”

“저 정체를 모르겠는 놈과 물건을 많이 사주었으니 내가 특별히 한 가지 충고를 해주지. 너는 앞으로 이 세계를 좌지우지할 운명의 틀에 갇혀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네가 재앙을 불러올지 아니면 평화를 가져다줄지는… 후후후… 네가 하기 나름이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모쪼록 이레귤러에게 선택을 휘둘리지 말도록… 이히히히.”

이레귤러? 재앙? 뭐야, 그게.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수상한 할머니를 보던 류제는 별 수상한 사람을 다 보겠다며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저런 사기꾼 점술사가 한 말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것도 껌이지.”

히로인들에게 선물로 줄 물건들을 구매하는 데 성공한 재경은 이번 챕터도 순조롭게 넘어갈 수 있겠다며 뿌듯해했다.

류제 저 맹한 놈은 내 마음도 모르고 옆에서 ‘왜?’, ‘이거?’, ‘진짜?’ 이런 표정이나 짓고 앉았고. 도대체가 저놈은 히로인들을 공략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나만 히로인들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잖아. 미안한데 ‘모두는 친구’ 엔딩도 확률 싸움이거든?

“기다려, 렌. 천천히 가.”

뭘 하다 왔는지 뒤늦게 다가오는 류제를 돌아본 재경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괜히 틱틱거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와?”

“그 할머니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이상한 소리? 그 할머니가 무슨 소리를 하던가? 몰라. 적당히 무시해. 기억에 없는 걸 보니 별로 중요한 거 아니니까.”

재경이 손사래를 치며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류제를 잡아끌었다. 수학여행 와서 어느 때보다 싱글벙글한 렌은 콧노래를 불렀다. 여자애들한테 줄 선물을 내 돈으로 산 게 그렇게 기분이 좋나 아리송했다.

“렌 넌 의외로 그런 거 다 마음에 두고 다니네.”

“뭐가.”

“뭐… 비키가 푸딩 못 먹은 거나… 선생님이 고생하신 거라든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그리고 그거 다 원래 네가 해야 하는 거거든?”

마음에 두고 있었냐니. 재경은 뭣도 모르면서 속 편한 이야기나 해대는 류제가 기가 막혔다. 힌트 이벤트는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랑 연결되는 거고, 호감도 이벤트는 엔딩 분기와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재경은 그저 더 좋은 쪽으로 가기 위해 필사적일 뿐이다.

“하여튼 류제 너 진짜…….”

“내가 뭘.”

암만 생각해도 저 주인공이란 놈은 히로인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앞으로도 배드 엔딩을 막기 위해서는 내가 플레이어로서 저놈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애들한테 네가 전해 줬다고 말해 둘까?”

“미쳤냐? 이거 원래 네가 해야 하는 거라고 말했지? 하지 마. 말하면 절교다!”

“왜? 그게 뭐 어쨌는데?”

렌은 매일 인기, 인기 노래를 부르지만 조금만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지금보다 더 친구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중요한 부분에서 그러질 않는다.

“싫다면 싫은 거야. 내가 누구 좋으라고 이런 짓까지 하는데.”

“알았어, 알았어.”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 안 할게. 류제가 입을 비쭉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같이 힌트 이벤트 버젓이 다 봤으면서 뭘 사야 하는지 죄다 까먹은 류제가 답답했어도 플리 마켓에서 선물을 구매하는 시간도 무사히 성공했다.

이제 류제가 오늘 캠프파이어 시간에 히로인들에게 물건을 제대로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미나 고 기집애의 못된 장난질을 먼저 넘어야 했다. 기왕이면 막고 싶지만 지금껏 경험해 본바, 그가 걱정해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류제에게 숨겨진 마왕의 힘을 강제로 각성시키는 미나의 장난질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마국과 키아나트리체의 국경선인 리엔달로니아 협곡 일부분, 알라마니 기술관 산하에서 관리되는 관광지에서였다.

애초부터 왜 그런 위험한 곳을 관광하냐 묻는다면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예비 군인들이 다 함께 DMZ 안보 투어 하는 느낌이랄까.

키아나트리체에서도 이곳이 나라카의 대륙과 거리도 멀고 알라마니 기술관에 의해 제대로 통제되고 있어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 안일한 생각이 오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미나의 정체를 모르는 1회차 플레이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미나의 정체가 까발려진 n회차 플레이라면 왜 갑자기 멀쩡하던 리엔달로니아 협곡에서 강한 자기파가 발동하여 미나가 서있던 협곡 낭떠러지 부분이 무너지고 류제가 미나를 구하다가 강제로 각성하게 되는지 서술되는 장면이 추가된다.

재경이 어제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미나의 움직임을 확인하려 했던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었다. n회차에서는 미나가 관장을 유혹해서 보안 코드를 빼내는 장면이 추가된다.

그 망할 헤이하치 머리를 한 관장이 언급한 S_script. 이 S_script는 스토리에 간간이 등장하는 중요 키워드다.

S_script는 이후로도 꾸준히 언급되나 수학여행 스토리만 따지자면 미나는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에게서 S_script의 보안 코드를 빼앗고 그것을 다른 마족에게 알려준다. 마족은 그들의 기술과 빼앗은 보안 코드를 이용하여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슬렉터를 완전 무력화시킨다. 일대로 퍼지는 자기장이 일으키는 지진이 그 증거였다.

1회차 플레이를 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미나를 지킨다고 달려들었다가 그게 의도대로였다는 것을 알고 뒤통수 거나하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는 것을 누가 공감해줄까.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데 알면서도 스토리를 바꾸지 못한다는 건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제군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도록 하세요.”

세라가 학생들에게 리엔달로니아 협곡의 절벽에 너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여기를 올 수 있는 사람들은 99%로 어빌리터이기 때문에 협곡에 떨어질지라도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면 되어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만 만전을 기하는 선생님의 입장에서 사전에 조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은 보통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근육통… 세라 쌤은 왜 근육통은 안 고쳐주는 거지?”

“근육이 파열된 걸 고치는 것보다 새로 근육이 만들어지는 게 나으니까.”

“나도 들었어. 세라 쌤한테 갈 때마다 들었다고. 너도 옆에서 똑같은 말 하지 마.”

“계속 불평하기에 모르는 것 같아서 말해 줬는데. 애도 아니고 알면 불평하지 마, 바보 렌.”

비키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언제 이벤트가 터질까 마음 졸여서 죽겠는데 비키가 또 시비를 걸자 재경이 안면을 종잇장처럼 구겼다.

“너나 잘해. 잘난 척쟁이 짜샤.”

“뭐래, 겁쟁이가. 높은 곳만 올라오면 막 태어난 새끼노루처럼 부들부들 떠는 주제에.”

“사람 약점을 그렇게 놀림감으로 삼다니, 셀로니아 가문은 다 그러냐? 약강강약 실화냐?”

“뭐라고? 말 다 했어? 야…약강강약이 뭐야?”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고, 이 바보야.”

“바보는 너겠지. 세상에 언어 수준 좀 봐. 약강강약이 뭐야. 여유토강(茹柔吐剛)이라는 말 있잖아.”

“여유토가아앙? 뭐야, 그게. 또또또. 쫌 머리 좋다고 잘난 척하고 있지.”

이런 상황에서도 질리지도 않고 으르렁거리며 싸운다. 이게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서 류제는 반쯤 포기했다. 그래도 같이 있다가 세트로 묶이기 싫었던 류제는 유네와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구경했다.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미나는 마왕의 부활체에게 줄 작은 선물을 기대하며 새초롬하게 웃음 지었다. 그러다 얼핏 렌 지미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고 있으려니 렌 지미가 예의 그 적대감을 표했다.

미나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청초한 도서위원이라며 작게 인사했다.

렌 지미. 성가시군. 마왕님만 아니었으면 살려 둘 가치도 없는 인간 주제에.

뭐, 인간 남자 따위 내 힘이면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으니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우리 마왕님이, 강한 마족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마왕님이 부활한다는 징표를 마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까.

마왕님의 부활은 우리 나라카의 부활이다. 그 부활을 사천왕인 내 손으로 이루어내는 거야. 미나는 저 멀리 어둠에 둘러싸인 고향을 고요하게 응시하였다.

마왕의 영혼을 품은 류제 신리의 인간의 마음은 안타깝게도 정의롭고 선량하다. 강한 능력 탓에 무료함을 보이지만 지기 싫어한다.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일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수학여행에 와서 새롭게 친해진 작고 가련한 도서위원이 어찌할 수 없는 위험에 빠진다면 어떨까.

주변에 그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홀로 유일무이한 기회를 가지고 있다면 류제 신리는 구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

“후후.”

미나의 마족 센서에 닿은 그녀의 동료이자 사천왕인 화마(火魔) 샐러맨더, 이름은 율폰 트락튤라 밀로노프레세가 미나가 훔친 S_script의 보안 코드로 안티 슬렉터 파장을 발동시켰다.

깊은 진동과 함께 땅이 큰 규모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첫 단추를 끼울 계획이 실행되었다.

자, 마왕님. 추락하는 나를 다시 구해주세요.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강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보다 큰 힘을 원해주세요. 어서 기간트리카 없이는 무력하기만 한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나란 말입니다!

재경이 들었다면 미쳤냐며 중2병스럽다고 소름 끼쳐 할 생각을 하며 미나가 사악하게 웃었다.

“꺄아아악! 뭐야?”

“땅이 흔들리고 있어!”

“당황하지 말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천천히 협곡에서 벗어나세요! 못 걷겠으면 기간트리카를 장갑해도 됩니다.”

세라가 긴급 상황 속에서 학생들을 통솔하기 위해 슬렉터를 발동시키려는데 고장이 난 건지 슬렉터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세라가 크게 동요했다. 슬렉터가 작동되지 않는다고?

그녀가 당황한 그때, 미나가 아슬아슬하게 서있던 협곡의 낭떠러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꿈을, 기억을, 사람의 바람을 조종하는 그녀의 마족의 힘으로 류제를 눈에 담았다.

“미나, 피해!”

라고 외치는 류제가 다가오기 전, 그녀에게 먼저 손을 뻗은 것은 그녀가 하찮다 무시하던 렌 지미였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3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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