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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5) (105/112)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5)

까마득한 항공 뷰에 숨이 막혀 네네 슈만의 옆구리에 매달린 채 기절했던 재경에게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어푸푸!”

소스라치는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든 재경이 무조건반사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다가 누군가와 이마를 부딪쳤다. 재경은 그 반작용으로 다시 바닥에 뒤통수를 찧고 말았다.

이마와 뒤통수가 빵 사이 햄처럼 짓눌려져서 아파 죽겠다. 눈 뜨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누구야. 할머니야?

“아야야. 아파. 차가워. 내가 이렇게 깨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어?”

“너야말로 갑자기 일어나면 어떻게 해? 위험하잖아. 그리고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래?”

백장미 부대 대대장에게 마음이 부러질 정도로 당해서 안 그래도 기분 꿀꿀한데 렌을 깨우는 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자 류제가 이마를 매만지며 짜증을 냈다.

그러다 괜히 죄 없는 렌에게 분풀이를 했다는 생각에 반성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정신이 막 가출했다 돌아온 재경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눈이 맹했다.

자리에 앉아 사태를 파악하던 재경은 여기가 할머니가 있는 집이 아니라 이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았다. 살아서 천국이 아니라 알라마니 기술관에 돌아왔다. 재경은 기절 직전까지 겪었던 그 두려운 순간들에 바들거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그 망할 마귀할멈! 사람이 무섭다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고.”

“마귀할멈이면… 네네 슈만 씨라고 했던 사람인가?”

“이름 따윈 몰라. 그 아줌마 면상의 주홍색 칼 단발. 나중에 두고 봐. 복수해 줄 거야.”

호세마타 요새까지 가서 개고생을 하고 돌아온 재경이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간다며 투덜거리며 유네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섰다.

수치스럽게 몇 번이나 기절하는지 모르겠다. 비누 밟고 기절 다음엔 높은 곳이 무서워서 기절이냐. 자승자박이었던 주제에 남 탓만 오지는 재경을 위로해 주려는 듯 유네가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다독거렸다.

“렌 군… 나도 그 기분 알아. 엄청 무섭지, 그거.”

“빨랫감처럼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수백 미터 상공을 날아다니는 기분을 유네 네가 어떻게 아는데?”

“에헤헤, 수백 미터 상공은 아니라도… 어제 류제 군이 펠노아 전망대에 그렇게 데려다줬는걸. 류제 군, 내가 말은 안 했어도 엄청 무서웠다구. 나도 그렇게 무서웠는데 무서운 곳 싫어하는 렌 군이 질겁하는 건 당연한 거야.”

유네가 어제 류제의 옆구리에 들린 채 아찔하게 건물 사이를 지나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은 매달린 사람은 잘 알 거다.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

무신경한 류제는 아직도 그걸 이해 못 했다. 재경이 ‘저거, 저 거만한 자식.’ 하며 류제의 배를 주먹으로 툭 쳤다.

“실수해서 놓치는 바람에 깨꼬닥 죽으면 어떻게 해?”

“그 전에 기간트리카 장갑해서 날면 되지.”

“그야 그렇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냐 이거지!”

그렇게 쉬운 게 마음처럼 안 될 리도 있나? 류제는 잘 모르겠지만 렌의 표정이 삐칠 것처럼 심상치 않자 일단 동감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렌 군, 호세마타 요새는 어땠어?”

렌이 정말 외부인 출입 금지 구역인 호세마타 요새로 텔레포트되었다는 것이 신기해서 유네가 호기심을 보였다. 그런 곳에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산다니 신기했다.

재경은 아주 잠깐이지만 둘러봤던 호세마타 요새 안 샤워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다.

“웃기지도 마. 눈 한번 깜박했을 뿐인데 장소가 여자 탈의실로 바뀌었다고 생각해 봐. 진심으로 살해당하는 줄 알았네. 내가 다시는 저 매드 사이언티스트 할아버지의 말을 듣나 봐라. 그보다 나랑 바뀌었던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냐? 다들 분위기가 왜 이렇게 우중충해?”

“우중충하다니, 아냐.”

“흥, 우중충하겠지. 대단하신 우리 반 에이스가 백장미 부대 대대장님께 영혼까지 탈탈 털렸으니까. 한심한걸, 류제. 고작 그 정도로 내 뒤를 지키겠다고?”

포르테가 칭찬 한번 해줬다고 기고만장해진 비키가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웃었다. 비키가 기어코 아까의 기억을 끄집어내자 류제가 시비 걸지 말라며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도 이렇다 할 만한 공격은 못 했잖아. 난 고작 기간트리카 1개월 배웠는데 어릴 적부터 훈련했던 너랑 어떻게 같아?”

“흐음~ 입학 초에는 네가 나보다 강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시끄러워. 오늘은 방심한 것뿐이야.”

“뭐야, 류제가 졌어? 역시 그렇네. 강하지~ 백장미 부대. 특히 그 대대장이란 사람이.”

렌에게 만큼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완전히 놀아났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류제가 비키의 고자질에 어쩌지도 못하고 입만 꾹 다물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펼쳐지는 대결에서 주인공 류제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다는 사실은 살짝 까먹기는 했어도 재경도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몇 번이고 경험한 일이었다.

재경은 그게 나쁠 것 있냐는 마음이었다. 실제로 백장미 부대는 전쟁에서 장난 아니고. 류제 각성 전으로 봤을 때는 거의 인간계 세계관 최강자급인걸. 그런 사람하고 우리 같은 하룻강아지들하고 비교가 가능하냔 말이지. 내가 실제로 그 모습을 못 본 건 아쉽긴 하지만.

“우리 대단한 류제 신리께서 한 대도 반격하지 못한 걸 보고 얼마나 고소하던지.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기간트리카 컨트롤과 어빌리티 사용에 도를 터서 무려 18세에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들어간 사람인데 만사 귀찮아하는 네가 하는 노력부터 달라. 흥, 이제 좀 그 방관자적인 태도가 고쳐지셨으려나?”

“비키, 너 아까부터 많이 신났다?”

“능력만 믿고 까불다가 혼쭐난 게 통쾌하거든. 바아보!”

류제가 쏘아보자 비키는 상큼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통통 발걸음도 가벼워 보이는 게 어제부터 자신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귀찮다는 태도로 일관했던 류제가 호되게 당한 게 아주 쌤통이었던 모양이다.

류제는 괜히 입을 비죽이며 툴툴거렸다.

“쟤는 왜 온 거야? 날 놀리려고 온 거야?”

“낸들 아냐. 유네, 넌 알아?”

“으응?”

렌의 무사 귀환을 눈으로 확인할 겸 포르테가 류제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준 것을 자랑할 겸 온 것 같았지만 유네는 류제가 싫어할까 봐 우물우물 답해 주지 않았다.

“흐음. 그보다 걘 어디 있지?”

별 감흥 없는 류제의 패배 이벤트보다는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때에 미나를 감시하지 못한 것이 더 거슬리는 재경은 두리번거리며 심벌인 초록색 단발머리를 찾았다.

아무리 미나가 정체를 숨기고 물밑에서 움직인다지만 여기는 인류 과학의 정수 알라마니 기술관이다. 까딱하다간 마족들이 인간들의 기술을 훔칠 수 있는 보물단지 같은 곳이란 말이다.

그래도 알라마니 기술관 보안 시스템이 학생들에게 기밀 정보를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사람인 관장이라면 다르다. 설마 내가 기절한 틈을 타서 서큐버스 고년 벌써 손을 쓴 건 아니겠지?

“누구 찾아?”

“미나 어딨어? 왜 안 보여?”

“미나 양?”

미나 플로리아? 아까는 상종하기도 싫다며 틱틱거리더니 갑자기 또 왜 변덕을 부리는 건지. 류제는 렌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어리둥절했다. 역시 친해지기 부끄러워서 그런 거 맞지? 라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지만 태도가 미심쩍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카페테리아에서 구입한 포도 주스를 들고 있던 미나가 뒤에서 재경을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왜?”

“우아아악!”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 소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자지러지게 놀란 재경이 팔을 휘둘렀다. 그 바람에 포도 주스가 그녀의 가슴팍 하얀 블라우스에 맞고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비틀거리다가 미나가 떨어뜨린 포도 주스 껍데기를 밟고 미끄러진 재경을 가볍게 받은 것은 류제였다. 그 때문에 류제는 본의 아니게 미나와 얼굴이 가까워졌다.

갑자기 사적 공간이 침범당하자 미나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앞머리 사이로 류제의 푸른 눈동자가 보인다. 그 푸른 눈동자는 그녀가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보았다.

“미안. 렌, 괜찮아? 아직도 어질어질해?”

“됐으니까 놔.”

얼굴이 달아오른 재경이 류제를 밀어냈다. 저 망할 서큐버스.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뱀 기어 다닌 것 같잖아.

제 품에 안겨 앙탈을 부리는 모양새다. 마음이 동해진 류제가 반쯤 가린 얼굴을 붉혔다. 그는 몹쓸 생각을 돌리려고 미나에게 묻은 주스의 흔적을 가리켰다.

“너, 그… 어흠, 옷에 주스가 흘렀네.”

“아…아아. 어쩌지. 깜짝 놀라는 바람에 놓쳐버렸어.”

주머니에서 오래된 손수건을 꺼낸 미나는 옷에 포도 주스가 완전히 스며들기 전에 꼼꼼하게 닦아냈다. 방수 코팅이 되어있는 교복이라서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새하얗던 손수건은 보라색으로 더러워졌다. 이 사태에 짐작 가는 게 있었던 재경이 손수건을 보고 놀라더니 이내 표정이 복잡해졌다.

“미나 양, 손수건이 더러워져서 어째.”

미나가 들고 있던 예쁜 손수건이 마음에 들었던 유네가 얼룩덜룩해진 손수건을 보고 자기가 더 아쉬워했다.

“흥, 네가 날 놀래서 그런 거잖아. 꼬시다.”

“미안해, 미나. 렌이 부끄러워서 저러는 거야.”

“아냐, 맞는 말인걸. 나도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해. 근데 나는 왜 찾은 거야?”

“그건 렌이…….”

기껏 미나가 찾아와줬는데 재경은 말 섞기 싫다는 듯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또 혼자 순수한 척이나 하고 있지. 속내는 저 손수건만큼 더러운 주제에.

재경이 무시하자 난감해하던 미나가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류제에게도 빌려주었다.

“류제 너한테도 튀었어. 더러워졌지만 이거라도 써.”

“정말이네. 고마워.”

류제가 허리춤에 튄 주스의 흔적을 닦아내었다. 손수건이 완전히 보라색으로 물들자 유네가 탄식했다.

“포도 주스는 얼룩이 잘 안 지워진다고 하던데… 미나 양, 괜찮아? 아끼는 손수건 아니야?”

“아냐 아냐, 어쩔 수 없었잖아. 교복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낫지.”

“착한 척하긴!”

모르쇠 굴던 재경이 못된 아이처럼 트집을 잡았다. 렌의 태도가 미안했던 류제는 가만히 있으라며 재경의 머리를 콱 짓눌렀다. 미나는 괜찮다며 볼일 없으면 왕녀에게 가겠다고 착하게 인사를 했다.

미나가 멀어지자 재경은 그들 몰래 의미심장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왜 이런 애 호감도 이벤트나 도와주는 입장인 거야. 마음에 안 들어 죽겠다.

백장미 부대가 돌아가고 나서 가지는 자유 시간에 렌 지미가 미나를 못살게 굴다가 그녀의 손수건이 망가지는 것. 이건 미나의 힌트 이벤트였다.

미나 플로리아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게 삼류 악역처럼 미나를 괴롭히는 걸로 이어질 줄이야. 빌어먹을 세계, 뭐든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네. 재경이 작게 툴툴거렸다.

“너, 미나한테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몰라~”

“렌 군… 너무 그러지 마. 미나 양 상처받았으면 어떻게 해?”

“알았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내가 잘못했습니다요.”

재경이 국어책 읽듯이 말했다.

미나는 플레이어가 서큐버스라는 정체를 모를 때는 관련된 모든 이벤트가 수월하게 흘러간다. 히로인 중에서도 적당히 무난해 보이는 미나는 초반 이벤트가 그럴듯하게 꾸며진지라 공략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 막상 그녀와 이어지기 위해서는 류제가 타락을 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함정이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전쟁 패배 이벤트를 막기 위해서는 그 망할 서큐버스의 호감도 수치도 3까지 올려야 한다. 좋으나 싫으나 삼류 악당을 이용하는 게 재경은 너무 기분 나빴다.

“미나 양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데 왜 그렇게 싫어해?”

“누가 아니래니.”

“그거 빈정거리는 거지?”

“아냐, 그보다 그 할아버지는 어디로 갔어? 내가 무슨 개고생을 하다 왔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냐.”

주변을 둘러보다가 선생님과 함께 있는 기술관의 관장을 발견한 재경이 도망치듯 그쪽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류제와 유네가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재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망할 마녀 같은 게 무슨 술수를 꾸몄는지 내가 확인할 방도는 없지만 착한 척을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트집이라도 잡아야겠다.

“…에헴… 왜 그러지, 용감한 소년?”

어린아이가 벌레를 잡을 때처럼 슬금슬금 관장의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재경이 멀쩡해 보이는 관장을 수상스럽게 주시했다.

“무슨 일이지요, 렌 학생? 어디 아픈 곳이 있나요?”

그 모습이 보상을 달라는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보였는지 정신을 차린 재경의 상태를 보려는 세라를 제친 관장이 홀홀 동네 할아버지처럼 어깨를 도닥였다.

“그래, 들라크루아 중령을 소환한 우리 용감한 소년에게는 선물을 줘야겠지. 수고 많았구나, 에헴.”

관장은 주머니에서 사탕 몇 개를 꺼내 재경에게 쥐여주었다. 그걸 멀뚱히 받아버린 재경은 연거푸 뒤를 돌아보다가 유네와 류제에게 돌아와 버렸다.

“…왜 간 거야?”

“암것도 아냐. 사탕 먹을래?”

재경이 관장에게서 받은 사탕을 유네와 류제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냥 김빠진다고 해야 하나. 내가 이렇게 난리를 쳐도 진행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 든다. 저번 달 비키와 싸우고 나서 허탈해졌던 그 심정과 비슷했다.

“암만 필사적으로 굴어도 바뀌는 게 없는 것 같네.”

재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스토리대로 흘러갈 거 여학생들의 환호 한번 받겠다고 용감하게 나섰지만 현실은 미연시 속처럼 고생은 고생대로만 하고, 다른 여학생들은 백장미 부대의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네네 슈만에게 정신이 팔려 재경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것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미나 플로리아의 뒷공작을 방해할 기회도 날려 버렸고 말이지. 내가 방해한다고 해서 스토리가 엇나가지도 않을 것 같지만.

뭐든지 스토리대로야. 이벤트조차 내 의지랑 상관없이 흘러가는데. 뭐라도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괴로울 정도다. 적어도 진짜 렌 지미처럼 남들한테 미움 받지 않는다는 점에 위로를 받아야 하나.

필사적이라는 말에 류제는 생각에 빠졌다. 포르테와 대결을 했던 류제가 느끼기에 렌은 이상한 부분에서 필사적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 있었던 양아치와의 싸움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기가 질 게 뻔하지만 렌은 자기네들 조원을 위해서 그들에게 겁 없이 덤벼들었다. 자신이 수적으로, 몸집으로 불리한 것을 알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싸운다.

공부는 필사적으로 안 하는 것 같지만 말야. 류제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라며 재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렌을 보고 있으면 포르테가 던진 필사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알 것도 같았다.

* * *

“그럼 그렇게 지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시구려. 밀로니 중위. 학생들이 용감해서 부럽구만. 에헴.”

“그래도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실험은 자제해 주세요, 박사님.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재밌잖아.”

관장이 껄껄 웃음을 터뜨리며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던 세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곤란하게 하는 걸 좋아하는 제멋대로인 박사님이다.

오늘만큼은 렌 지미의 보호자이기도 했던 세라는 이상한 기계의 실험 대상이었던 렌의 상태가 멀쩡해 보여 안도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기계도 기계지만 네네 슈만, 그 FM 덩어리와 있으면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이라도 힘들지. 융통성이 없어서 학생이라고 봐주질 않으니.

예전 훈련소대에서 네네 슈만과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 세라가 상상만 해도 싫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박사님 덕분에 이야기가 복잡해졌어.”

어떻게 연락이 갔는지 기술관 다른 층에서 체험학습 중인 다른 반 선생님들이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알라마니 기술관에 왔냐며 유난을 떨어댔다.

재경이 관장을 수상쩍게 쳐다보며 다가왔을 때 세라는 기술관 측의 실수로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반 학생이 바뀌는 사고가 있었다고 보고하기 위해 관장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1학년 8반만 포르테 들라크루아와 직접 대면했다는 소문은 다른 반 학생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그만큼 학생들 사이에서 세계관 최강자인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영향력은 굉장했다.

그러나 그녀를 직접 만나본 1학년 8반의 학생들은 그녀의 냉정한 성격과 두려운 실력에 겁먹은 상태였다. 마족을 만나본 적 없는 학생들은 지레 마족과 싸우는 것에 두려움이 싹텄다.

“다들 집중!”

세라가 흩어진 학생들을 모았다. 포르테를 상대로 비키는 나름대로 선방했지만 가장 강한 줄 알았던 류제가 참패를 했다는 사실이 또 학생들의 기를 죽였다.

세라는 군대 물에 절여져서는 학생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썩을 장교들이 벌여놓은 사태를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계급이 낮은 게 죄다.

“자, 제군들. 당신들은 오늘 희귀하고 중요한 경험을 했습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아직 학생입니다. 학생의 본분은 배우는 것이죠. 이 역시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배웠다 생각하면 됩니다.”

류제를 비롯해 포르테가 한 말에 찔리는 부분이 있었던 학생들은 세라의 말에 용기를 얻고 다음에 그녀와 만났을 때 다시 생각하게 해주겠다며 다짐했다.

학생들을 쭉 훑은 세라는 역시 그녀 담당 학생들은 쉽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며 뿌듯해했다.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짊어진 것들,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 그것들이 무엇인지 잘 생각하면서 어빌리티를, 기간트리카 기동 능력을 기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제게 왜 민간인에게 어빌리티를 쓰면 안 되는지 물어본 학생이 있을 겁니다.”

바로 어제 재경의 조원이 분개하며 세라에게 그 부분을 따졌다. 세라는 그녀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렇게 답했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오늘 있었던 들라크루아 중령님의 말과 이 말의 의미를 항상 생각하도록 하세요. 알겠죠?”

“네.”

“좋아요. 그럼 다들 반장 비키를 따라 5층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도록 하세요.”

“네!”

점심 식사가 좋았던 재경도 우렁차게 대답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어느 히어로 영화에서 나온 명언이었다. 재경은 영화 같은 거 잘 안 봐서 모르지만 그렇다고 위키에 나왔다.

난 큰 힘이 없는데. 그럼 책임도 작나? 의미를 잘 모르겠어서 재경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멀뚱하게 서있는 재경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 류제는 그래도 답이 없자 고심 중인 재경의 눈앞에서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렌?”

“있지, 류제. 넌 참 책임이 크구나.”

“뭐 해, 렌 군. 류제 군도 어서 점심 먹으러 가자. 긴장이 풀리니까 배고파 죽을 거 같아.”

8반 학생들은 포르테 들라크루아의 일로 다른 반보다 식사가 늦어졌다. 유네가 주린 배를 쓰다듬고 두 사람과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근처에 있던 연구원에게 점심 메뉴를 어떻게 전달받은 여학생이 그들 앞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기대감 어린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 오늘 점심 메뉴로 넬사 고원에 있는 목장에서 자라는 특A급 암소에서 짠 우유로 만든 고급 푸딩이 나온대. 게다가 왕실 주방장 출신인 요리사가 만든 캐러멜 소스가 추가로 나오나 봐. 완전 희귀판이라 구하기 힘든 건데.”

“뭐? 정말? 대박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배식을 받는데 혹시 다 떨어지진 않겠지?”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서 인원수를 세면서 친구들을 태우던 비키가 그 말을 듣고 귀가 쫑긋해졌다.

누군가는 기억하겠지만 비키는 푸딩을 아주 좋아했다. 한 달 전 허락도 없이 재경과 기간트리카 대결을 했다가 혼나고 처음 봉사 활동을 한 날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뒤에 사람도 타야 하니까.”

비키는 푸딩이 다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말에 불안해져서 괜히 학생들을 독촉했다.

어차피 인원수별로 준비된 거라 늦게 간다고 해서 푸딩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부족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절로 초조해졌다.

마지막으로 남학생 세 명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같이 타고 내려가려던 비키를 선생님이 호출했다. 점심 식사 이후 향할 캠핑장에 관련된 공지를 하기 위해서다. 선생님이 부르는 목소리에 비키가 발을 멈칫했다.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비키는 불만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류제를 노려보더니 말총머리를 휘둘러 사라졌다.

“아까는 기고만장하더니. 왜 나한테 그래?”

“비키 양도 배고팠나 봐. 혼자만 못 먹으니까 그런 거 아냐?”

“쯧쯔, 둘 다 틀렸어. 류제, 너도 부반장인데 너는 도망가고 자기만 학급 일 도맡아서 짜증 난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와중에도 고소공포증 때문에 류제와 유네의 옷자락을 꼭 잡은 재경이 정답을 말했다. 류제가 아차 이마를 쳤다.

“까먹고 있었다.”

“야, 적어도 자기가 부반장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어라. 혼자 일하는 비키가 불쌍하지도 않냐.”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저기, 렌 군, 괜찮아?”

“완전 멀쩡하거든?”

아래로 내려가는 감각이 소름 끼쳐서 눈을 질끈 감은 재경이 유네와 류제의 팔을 그네처럼 꽈악 붙잡았다. 식은땀이 흐른다. 정말 높은 곳 따위 싫다. 인간이란 원래 땅에 붙어 다니던 생물이라고. 왜 높은 건물 따위를 만들어서.

이제 류제를 이대로 구내식당으로 끌고 가서 비키의 힌트 이벤트만 발생시키면 이 망할 알라마니 기술관은 영영 끝이다. 다시는 안 올 거다.

“…너무 붙지 마.”

“시끄러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도와주면 덧나냐. 좀생이 같으니.”

오늘따라 고소공포증 때문에 렌의 스킨십이 과도했다. 옷을 사이에 두고 피부끼리 들러붙는 촉감 때문에 포르테 사건으로 잊고 있던 꿈이 도로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류제는 괜히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밖 먼 산을 바라보며 텔다산의 고요한 대나무 숲과 기도 소리를 떠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5층까지 내려온 그들은 친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문제의 푸딩은 한 사람당 하나씩이다. 플라스틱 통 속에 포장된 반질반질 예쁜 푸딩과 직접 만든 캐러멜 소스의 맛이 일품이었다.

푸딩을 뜯기 전 그 맛을 상상하던 재경이 포장 뜯기를 주저했다.

“뭐 해. 안 먹어? 속 안 좋아? 푸딩 맛있는데.”

“아니, 좀 불쌍하다 싶어서.”

“누가?”

답하지 않은 재경이 마지못해 푸딩을 뜯었다. 진짜 맛있겠다. 울 할머니 이 안 좋은데 이건 잘 먹겠다. 할머니 젤리 좋아하니까.

재경이 누구더러 불쌍하다고 말한 건지 듣지 못한 류제가 고개를 갸우뚱할 그때 배식받는 곳에서 비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네에? 다 떨어졌다고요?”

“미안해요, 학생. 개수가 잘못 왔나 보이.”

선생님의 공지 사항을 듣다가 말이 길어져서 제일 늦게 구내식당에 온 비키는 푸딩을 배식받지 못할 모양이다.

렌이 비키가 푸딩을 먹지 못해서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류제가 푸딩을 캐러멜 소스에 찍어 먹는 렌을 흘겼다.

그거 찍어 먹는 게 아니라 위에 뿌려 먹는 건데. 뭐 맛은 똑같으니까 됐나.

“아이… 진짜아아!”

비키의 볼멘소리와 함께 재경이 크게 푸딩을 한입 떠서 먹었다. 학급 일을 도맡느라 정작 제일 좋아하는 푸딩을 먹지 못하게 된 비키. 그것이 바로 비키의 힌트 이벤트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뜨는 선택지 중

[5층으로 간다]

[1층으로 간다]

[내린다]

점심을 먹기 위해 5층으로 가면 비키의 힌트 이벤트를 볼 수 있다. 반대로 점심을 먹지 않고 1층으로 가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힌트 이벤트는 볼 수 없지만 또 다른 스토리를 맛볼 수 있다. 지금은 무조건 비키의 힌트 이벤트지만. 여긴 세이브 로드 없잖아.

“그러니까 내 잘못 아냐.”

재경이 울상으로 변한 비키의 얼굴을 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힌트 이벤트와 선물이 이어지는 것도,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도 아는 사람은 재경뿐이겠지만 비키에게 푸딩을 양보하지 못한 정당성을 부여하자면 그랬다.

그렇게 좋아하는 푸딩을 먹지 못해서 시무룩해진 비키가 식판을 들고 터덜터덜 걸었다.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건 힘든 일이구나. 내일이면 미나 때문에 류제가 마왕의 힘을 조금 각성하게 될 텐데. 그것도 모르는 척해 줘야 하니 걱정이다.

어찌 되었건 비키를 끝으로 히로인들의 힌트는 모두 나왔다. 이제 내일 방문할 플리 마켓에서 선물을 산 다음 캠프파이어 때 전달해 주면 수학여행에 있는 호감도 이벤트는 무사히 완료였다.

그러던 재경은 유네의 힌트 이벤트를 류제에게 맡긴 후에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계기가 된 물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하면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나와 자신의 앞에서 커다란 가방을 멘 채 줄을 맞춰 걸어가는 유네의 가방에는 작은 곰돌이 모양 열쇠고리가 그대로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저게 바로 유네의 힌트 이벤트 때 망가져야 했을 물품이었다.

“류제, 너 어제 유네 데려다줄 때 잘 데려다준 거 맞아?”

재경이 옆에서 걸어가는 류제를 툭툭 치며 물었다.

“뭐? 당연하지.”

류제가 유네에게 물어보라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네가 무서웠다고 말해서 찔리긴 하지만 펠노아 전망대까지 제대로 데려다준 건 확실했다.

재경은 이상하다며 유네의 가방에서 딸랑거리는 꾸물꾸물 시리즈의 곰돌이 열쇠고리를 곰곰이 관찰했다.

“근데 왜 저게 멀쩡하지?”

심심하면 뚱딴지같은 소리를 해대는 렌이었기에 류제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서 눈만 멀뚱히 떴다.

4월 중순, 아직 봄이지만 그림자가 하나 없는 볕 아래에서는 정수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기온이 높다. 거기에 3박 4일 분량의 짐이 든 가방을 메고 약 1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 도중이라고 생각해 보면 이런 별 쓰잘데기없는 말을 듣는 데에도 진이 빠질 거다.

하지만 류제는 제 어빌리티 덕을 보고 있기 때문에 아주 멀쩡한 걸음걸이로 재경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유네랑 있을 때 무슨 일 없었어? 그 유네네 괘씸한 조원들 이야기 말고. 이상하다. 이벤트가…….”

“일? 이벤트?”

유네네 조원이 유네를 골려먹고 사라진 거 말고는 유네가 렌이 만들어준 소원 팔찌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찾느라고 남은 자유 시간을 다 써버렸다.

재경이 비누를 밟고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그 사실을 말하는 걸 깜박 잊고 있던 류제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더니 앞서가는 유네 몰래 속삭거렸다.

“실은 어제 유네가 네가 만들어준 소원 팔찌를 잃어버렸거든. 너무 아쉬워해서 같이 찾아줬는데 발견할 수가 없어서 말야. 혹시 다시 만들어 줄 수 있어?”

“…소원 팔찌? 잠깐, 유네가 내가 준 소원 팔찌를 잃어버렸다고?!”

“쉬잇! 쉿!”

혹시라도 유네의 귀에 들릴까, 류제가 재경의 입을 황급하게 막았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입술 감촉에 그가 다시 손을 떼었다. 부끄러운 기색을 손바닥과 함께 숨긴 류제가 조심스레 부탁했다.

“기왕이면 똑같이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아니… 안 될 건 없지만…….”

만드는 거야 쉬우니 둘째 치고, 유네가 잃어버린 게 소원 팔찌라니 심정이 복잡했다. 열쇠고리가 아니라 내 소원 팔찌?

아까까지 뭘 해도 스토리대로만 되는 세계를 탓했는데 실제로 유네의 이벤트가 미묘하게 바뀌었다니 불안하다. 바뀐 이유도 모르겠다.

“왜 그래?”

“아… 암것도 아냐. 다리 아파서 그래.”

재경이 진실을 반 섞어서 대충 둘러대며 머리를 굴렸다. 내가 유네한테 소원 팔찌를 줘서 그게 곰돌이 열쇠고리랑 아이템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나 때문에 바뀐 거 확실하지?

그 물품이 호감도를 올리는 데에 확실한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바뀌었다고 하면 존재를 어필하려고 한 노력이 그렇게 물거품은 아닌 모양새다.

“아프면 내가 가방 들어줄까?”

“진짜? 두말하기 없기다.”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 걱정되었던 류제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자 재경이 냉큼 류제에게 메고 있던 가방을 내밀었다.

류제는 가방을 넘겨받으며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스쳤지만 렌이 예의상 한 번은 거절한다는 발상은 못 한 것 같아 그럴 수 있다며 재경의 가방까지 등에 걸쳤다. 어차피 ‘강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으니 한 개를 드나 두 개를 드나 차이가 없었다.

덕분에 재경은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유네는 혹시 모르니 내가 만든 팔찌하고 플리 마켓에서 살 곰돌이 열쇠고리 두 개 다 주면 되겠다. 응, 역시 난 천재야. 재경이 별생각 없이 뿌듯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목적지는 멀었나. 빨리 쉬고 싶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저기는 쉬는 곳이랑 거리가 멀지만. 하아.”

행군하듯 열을 맞춰 걸어가는 8반 학생들 너머로 목적지인 캠핑장이 보였다. 그곳에는 앞서 도착한 다른 반 학생들이 먼저 텐트를 치고 불을 피워 연기가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수학여행 둘째 날 오후부터는 저녁까지 조별로 서바이벌 훈련을 하고 그때 채취한 식재료들로 요리 대회를 한다. 자기 전에는 담력 시험을 하고 텐트에서 취침한다. 물론 남학생 세 사람은 세트니까 같은 텐트다.

류제가 가방을 대신 들어주니 가벼워진 몸으로 일정표를 꺼내 보고 있던 재경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좀 귀찮게 되긴 했어도 미연시의 이야기가 조금 바뀌었다는 사실은 소소한 재밋거리였다.

어차피 이 정도는 미래에 무지막지한 영향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가 나, 신재경을 무시하지 못하니 꼬시다.

심각한 표정이다가 가방을 들어주니까 이제 또 히죽 웃는다. 류제는 가방을 대신 들어주는 이 상황에 왠지 모를 데자뷔를 느끼며(그것도 이번에는 순순히 들어줄 마음이 생겼다는 점이 소름 끼친다) 앞사람을 따라 묵묵히 캠핑장을 향했다.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장장 두 시간을 걸어 도착한 캠핑장은 서바이벌 훈련에 알맞게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이 머물 곳에는 인위적으로 나무를 제거하여 풀밭으로 만들고 거기에 텐트를 설치해서 원으로 둘러쌌다. 원 밖은 전부 어두컴컴한 침엽수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와아… 시원해. 나무 냄새가 나.”

“이런 동네의 특징, 벌레 장난 아닐 듯.”

“자, 제군들. 조별로 텐트에 짐을 풀되 세 남학생과 남학생들과 같은 조였던 학생들은 작은 텐트를, 다른 조원들은 큰 텐트를 사용하도록 하세요.”

“네!”

“30분 휴식 시간 이후 바로 훈련에 돌입하겠습니다. 그때까지 다리를 풀고 계시기 바랍니다.”

세라가 말을 마치자 학생들이 다리가 아프다며 빈 텐트로 향했다. 류제 덕분에 등이 가벼웠던 재경도 제일 먼저 달려가서 텐트에 엉덩이를 쿵 찧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발바닥 아파 죽을 것 같다. 재경이 신발을 벗어 물집 잡힌 발바닥을 시원하게 내놓았다.

“으아, 살겠네.”

“우리가 늦어서 30분밖에 못 쉰대. 렌 군. 이거 봐.”

유네가 수학여행 일정표가 적힌 팸플릿을 가리키며 실망감을 표했다. 이곳에서 이루어질 서바이벌 훈련에서는 학교에서 하는 기초 체력 운동과는 다르게 적진에 고립되었을 때 사용 가능한 기술들을 배운다고 일정표에 적혀있었다.

“이게 다 그 영감탱이 때문이야.”

재경이 투덜거렸다. 서바이벌 훈련이라고 해도 1학년이니까 진짜 군대처럼 힘들지는 않겠지만 훈련이라고 하면 휴식이 중요한데 오늘은 초장부터 글러먹었다.

“여기, 이것도 봐. 서바이벌 훈련 때 채취한 재료들로 조별로 요리 대회를 한대. 걱정이야. 나 요리해 본 적 없는데. 우리 조가 꼴찌 하면 어쩌지?”

“설마 꼴찌를 하겠냐. 일등 하면 뭐 준대?”

“바비큐 세트를 주나 본데?”

텐트 안에 짐을 두고 나온 류제가 두 사람 사이에 얼굴을 쑥 내밀었다. 바비큐 세트? 재경이 티브이에서나 보던 숯불 향이 밴 노릇노릇한 고기의 향연을 상상하며 군침을 흘렸다. 거기에 같이 구워 먹는 향긋한 버섯. 최고다.

“좋아쓰!”

먹음직스러운 상품이 탐이 난 재경이 의욕을 불태웠다. 게임상에서 요리 대회는 미니 게임 형식으로 진행된다. 적절한 타이밍에 키를 연타하고 재료를 넣고 빼면 되는데 풀콤보를 이루면 플레이어가 1등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요리 대회가 리듬 게임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을 테니 중요한 것은 진짜 요리 실력이다. 어차피 비키는 요리 똥손이고 서큐버스는 마족이니까 논외인데다 일국의 왕녀가 요리를 해봤을 리가 없다.

위처럼 류제네 조는 류제가 전부 감당해야 할 텐데 히로인 세 명이 죄다 방해꾼으로 등장하니 물리적 풀콤보는 어려울 터. 나도 풀콤보 못 만들어서 맨날 그럭저럭한 등수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여기서만큼은, 이 요리 대회만큼은 이 내가 정당하게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이벤트란 말이지. 우리 조가 1등을 하면 다들 우리 조를 부러워하겠지? 우하하. 그러면 나는 인싸 오브 인싸가 되어서 보람찬 학교생활을 즐기게 되는 건가?

“자신만만한 표정이네. 렌, 넌 요리 잘하나 봐?”

“야, 대충 썰어 넣으면 그게 요리지. 안 그러냐?”

“그…그런가? 난 요리 잘 안 해봐서 모르겠어. 류제 군은 어때?”

“난 몇 번 해본 적 있어. 시설에서 내가 제일 잡일을 많이 했거든. 잡일엔 요리도 포함이지.”

시설이란 류제가 자라온 고아원을 의미했다. 그럼 류제 저놈도 몇십 인분의 식사를 대량으로 만든 적이 있다는 의민데… 방심할 수가 없군. 재경이 지지 않겠다며 쌍심지를 켰다.

“바비큐는 내 거니까 탐내지 마!”

“설마 렌 너 1등 노리고 있는 거야?”

“아아앙? 당연하지 임마. 사람이 기왕 할 거면 1등을 노려야 하는 거 아니냐?”

공부는 1등 안 노리잖아. 라고 반박해 주려다가 류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경의 패기 어린 말에 유네는 또다시 홀딱 넘어가서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꿀맛 같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서바이벌 훈련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교복 대신 서바이벌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익숙하지 않은 서바이벌 도구를 받은 8반 학생들은 본격적인 시작 전 조교에게 주의 사항을 전달받았다.

연습 훈련 후 실전에 들어갔을 때 다른 반과 붙어서 지면 실격이라는 말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실전에서는 조별로 활동하며 필요 시 같은 반의 다른 조원들과 협력해도 상관없으나 숲이 그렇게 넓은 게 아니니 몰려다니면 일망타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조언도 들었다.

그 후 두어 시간 동안 은신, 위장 크림 바르기, 기어서 이동하기, 숨어서 공격하기, 함정 만들기, 사냥하기 등에 대해 가볍게 훈련받은 그들은 본격적으로 실전 서바이벌에 나섰다.

조교가 설명했듯 실전 서바이벌은 반 대항이다. 이동 포인트는 반별로 차이가 있었다. 참가하는 모든 인원은 가슴팍에 판정 판을 달았다. 그 판정 판은 슬렉터와 연동되어 실격자를 포박하고 선생님들에게 상황을 전달할 것이다.

조 대장을 처리하면 그 조는 자동으로 실격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조가 많은 반이 이긴다. 예컨대, 조원들이 희생하더라도 대장이 이기면 끝이라는 말이다.

“왜 내가 대장이 아닌데?”

“넌 약하잖아.”

“조용히 해!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 서바이벌 게임에서는 조별로 성향이 다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간단하게 나누자면 공격적인 조, 방어적인 조,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섞은 엘리트 조가 있다. 재경도 그렇게 방어적인 성격이 아니고, 그건 재경이네 조원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재경이네 조는 (저돌적이라고 쓰고 싶은) 공격 성향이었다.

서바이벌 시작을 알리는 버저가 울린 지 이제 십분 남짓. 학생들이 뿔뿔이 흩어져 이제 다른 조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고요한 숲속. 속삭이는 소리마저 소음으로 느껴질 정도로 음습한 숲은 사방이 적에 둘러싸인 듯한 오라를 뿜어냈다.

“버섯이다. 이거 먹을 수 있는 건가?”

“못 먹는 거야. 예쁘다고 괜히 손대지 마라.”

눈앞에 알짱거리는 덩굴을 칼로 자르며 재경이 말했다. 확신에 가까운 말투에 조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어떻게 아는데?”

“딱 봐도 색 화려한 게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생겼잖아, 이 바보야!”

“시끄러! 지금 리타이어되기 싫으면 조용히 말해!”

“니가 더 시끄럽거든?!”

“뭐야? 렌 주제에!”

공격적인 성향이란 것이 그만큼 협동력이 높지 않다는 의미인 것은 재경이네 조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다른 반을 공격하기 위해 묵묵히 전진했다.

“어… 송이잖아. 개이득.”

“넌 어떻게 그걸 잘 알아?”

“송이 모르는 멍청이도 있냐? 보면 비싼 티가 팍 나잖아.”

재경이 발견한 송이버섯을 채취해서 가방에 소중하게 보관했다.

채취한 재료들로 요리를 만들어야 하니 가능한 한 많이 가져가는 게 좋았다. 식용 유무는 선생님과 전문가가 판별해 줄 거다. 그래도 가방 사정을 생각하면 무턱대고 아무거나 채취하는 것보다는 먹을 수 있는 것을 분별해서 가지고 가는 게 이득이었다.

“렌 주제에 이상하게 이런 데서 의외라니까.”

“내 주제에는 뭐냐? 무슨 의미냐?”

“다시 봤다는 의미겠지~”

옆에서 재경의 허리를 쿡쿡 쑤시며 다른 조원이 씨익 웃었다. 재경은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먹고 뭔 개소리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늘진 곳에서 자라는 나물을 발견하고 냅다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거 미나리, 쑥, 서리 버섯. 저기에 새집 있다.”

“야생마인 줄 알았더니 정말 야생아였네.”

“뭐라고 그랬냐?”

“자, 자. 싸우지들 말고. 어서 움직이자. 새알은 내가 딸게.”

그녀가 매끄럽게 나무를 짚고 올라가 새알을 집고 가볍게 착지했다. 재경의 뜻밖의 선방으로 재경이네 팀은 요리 소재를 쉽게 채집할 수 있었다. 재경이 어린 시절 작은 마당에 들어왔던 참새들을 잡아서 놀 때 사용했던 방법으로 새도 잡았다.

이상하게도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채집은 성공했을 때 쾌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공격 대신 채집 쪽으로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야, 렌. 이거 먹을 수 있는 거냐?”

“데쳐 먹으면 돼.”

“이건?”

“그건 못 먹는 거. 그 옆에 그건 먹을 수 있어.”

“이거 뭐야. 산딸기인가?”

“그게 왜 산딸기냐. 너, 산딸기가 뭔지 모르냐? 까마중이다. 요리로는 못 써.”

재경이네 조원들은 서바이벌 게임 중이라는 것도 까맣게 잊고 버섯과 나물 채취와 사냥에 맛 들여서 주변도 보지 않고 여기저기 들쑤셨다.

그러다 가까이서 들리는 물소리에 물고기도 잡자며 룰루랄라 달려가다가 다 같이 다른 반이 설치해 놓은 함정을 밟고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버리고 말았다.

“꺄아아악!”

“우아악! 뭐야? 뭐냐고!”

“야, 칼, 칼로 끊어. 빨리 끊어!”

“안 돼. 이대로 내려가면 새알이 깨진단 말야!”

“지금 새알이 중요하냐?!”

그들이 함정에서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사이에 적들이 등장해 그들의 가슴팍에 있는 판정기를 때렸다. 리타이어되었다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슬렉터로 포박되었다.

“우악!”

“이 치사한 놈들. 그냥 가지 말고 이거 풀어. 풀라고!”

“꺄아아! 가방, 가방 떨어져! 새알만큼은 안 돼!”

그렇게 발버둥 치는 재경이네 조원들을 마치 쩌리 잡몹 처리하듯이 해치운 적들은 함정에 걸린 채 포박된 그들을 내팽개치고 위치가 발각되기 전에 몸을 숨겨 사라졌다.

싸우지도 못하고 졌다는 게 엄청나게 굴욕적이라서 공격적인 성향인 재경과 조원들은 서로 분개하다가 서로의 탓을 하며 바락바락 싸워대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사방 주시를 잘 했어야지!”

“네가 무턱대고 달려가서 그런 거거든? 누가 물소리 들린다고 그렇게 뛰어가래?”

“노…높…높…….”

“재료 많이 얻었으니까 됐잖아!”

“넌 자존심도 없냐?”

“내…내…내려주…….”

키가 큰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전경은 재경에게 있어서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무서운 풍경이었고, 조원들은 저들끼리 싸운다고 바쁘며, 잡은 새들은 푸드덕거리며 도망치려고 난리다.

소란을 듣고 찾아왔다가 리타이어 표시를 보고 지나친 학생들의 시선이 치욕스럽다. 신호를 받고 그들은 리타이어를 확인한 세라가 와서 나무에서 내려 속박을 풀어줄 때까지 그들은 그대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1학년 8반 첫 번째 리타이어 조, 렌 지미의 조는 그렇게 고된 훈련장으로 도로 끌려갔다.

익숙한 남자 비명 소리와 잇따르는 고음에 흠칫 놀란 류제가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렌과 그 조원들 목소리다.

설마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당한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류제가 걸음을 주춤하니 앞서가던 비키가 그 기척을 느끼고 퉁명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하는 거야. 꾸물거리지 마.”

“아니. 구해 줘야 하나 해서.”

“저건 이미 늦었어. 괜히 갔다가 적들한테 우리 위치만 들키면 어떻게 할 건데?”

류제가 공사 구분 못 하고 질척거리자 비키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타박했다. 류제는 못마땅했지만 실전 서바이벌이란 것을 고려하면 비키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서 반박을 못 했다. 뭐, 진짜 죽는 것도 아니니. 류제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런 류제를 위로하는 듯 쓴소리를 해서 미안해진 비키가 괜히 뒷말을 추가했다.

“그리고 그 바보는 일찍 탈락하는 게 좋을 거야.”

“왜?”

“약하잖아. 어빌리티도 제대로 못 쓰고. 인질로 잡혔다간 방해만 되지.”

이것도 반박할 수가 없다. 류제는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제 어빌리티가 뭔지 모르는 렌은 전투 시 팀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렌이 어제처럼 범인(凡人)과 싸우는 것이면 몰라도 서바이벌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어빌리터에 특수 군사교육을 받고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비키 말이 더 현명했다. 다른 능력 좋은 학생들과 싸우다가 헛되게 다칠 위험도 없기도 했다.

걱정하던 류제가 순순히 물러나주니 뒤에서 그 대화를 듣던 왕녀가 류제에게 무뚝뚝하게 말을 던졌다.

“그대는 그 아이를 참 좋아하는군.”

왕녀의 ‘좋아한다’는 말에 제 발 저린 류제가 심장이 철렁했다. 왕녀는 류제 신리가 렌 지미에게 보내는 우정이 참으로 돈독하다는 의미로 말한 거지만 류제는 왕녀가 자신이 렌을 그런 식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 줄 잠깐 착각할 뻔했다.

“친구니까… 당연…하지.”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류제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게 다 어제 꾼 꿈 때문이다.

“나도 알고 있다. 왜 당황하지?”

류제네 조의 대장 표식을 달고 있는 왕녀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류제의 반응을 종잡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류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뜬금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왕녀님 말씀이 맞아. 류제는 유네보다는 렌이랑 정말 친한 것 같아. 아까도 여기 오기 전에 렌의 가방 들어줬지? 뒤에서 봤어.”

“그건 그냥…….”

가만히 있던 미나도 대뜸 거들자 류제는 그게 다 보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워 입만 달싹거리다가 입을 다물어버리는 선택지를 골랐다.

미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렌도 보면 늘 류제를 힐끗거리고 있거든. 그러면서 뚱한 표정으로…….”

“모두 쉿. 소리가 났어. 조용히.”

미나의 흥미진진한 말에 류제가 관심을 보이다가 적을 감지한 비키에 의해 저지되었다. 류제는 그 뒷말이 궁금해서 안달이 났다. 뚱한 표정으로 뭐? 뭘 어쨌는데? 그것 때문에 비키가 발견한 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보인다.

“미나. 그 뒤는―”

“적이야. 미나, ‘분석’ 부탁해. 류제, 넌 근접전 준비해.”

“…알았어.”

류제가 어쩔 수 없이 답했다. 미나도 적당히 어빌리티를 펼치는 척을 했다. 표면상 미나 플로리아의 어빌리티인 ‘분석’은 일정 범위 안에 있는 특정 오브젝트들을 분석하는 능력이었다. 그 분석력은 범위가 넓고 다른 어빌리티에 비해 유능해서 보조 역밖에 못 하는 미나여도 분석하는 정보량이가 많아 팀원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미끼인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곳에 한 명, 멀리서 우릴 주시하고 있는 두 명. 3반이네. 대장은 보이지 않아. 사정거리 밖에 있나 봐.”

“류제, 네가 나가서 미끼를 물어줘. 미나, 그들이 처음 반응을 보인 곳으로 이동해 봐. 그쪽은 이쪽이 ‘분석’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 대장은 근처에 숨어있을 거야.”

“알았어.”

비키의 명령에 조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류제는 적이 움직임을 보인 쪽으로 몸을 날려 나무 위까지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비키와 미나, 그리고 왕녀까지 살금살금 미나가 안내하는 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적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힐끗거리고 있을 때 돌연 나무에서 커다랗고 날카로운 가시가 순식간에 돋아났다.

민첩한 반사 신경으로 공격을 가볍게 피한 류제는 여유롭게 가시의 위에 착지했다. 인기척이 느껴진 곳은 가까이 있는 나무 아래와 작은 풀숲 사이다. 류제는 그자를 빨리 처리하기 위해 손에 강화된 힘을 집중하여 몸을 날렸다.

쉭, 하는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풀숲에 주먹을 내질렀으나 그가 내려친 것은 땅에서 솟은 단단한 가시 둔덕이었다.

미끼의 미끼란 말이지. 성가시게 바보는 아니라는 건가. 류제는 귀찮게 되었다면서 신경질적으로 흙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가시를 발로 차 무너뜨렸다.

특정한 곳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 같다. 류제는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있었던 포르테 들라크루아와의 대결을 떠올리며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했다. 그 경험이 없었으면 나도 냅다 쫓아갔겠지.

다른 반 학생들과 겨루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포르테와 싸웠던 것처럼 처참하게 당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번거롭게 굴긴.”

류제는 스윽 뒤를 돌아보는 척 빠른 속도로 땅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근방의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3반 5조의 조원은 하필이면 꼭 ‘그’ 류제 신리와 붙게 되었냐며 혀를 찼다. 젠장. 저 괴물을 내가 붙잡아둘 수 있을까. 그녀가 조원들이 보내는 휘파람 소리를 숨죽여 기다렸다.

그녀는 류제가 협동을 못 하도록 조원들과 분리시키고 상성이 좋지 않은 비키 셀로니아를 대장에게서 떼어놓는 역할을 맡았다. 비키 셀로니아를 부르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류제 신리만큼은 붙잡아 주마.

곧 공기를 따라 그녀만 들을 수 있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함정 쪽으로 류제를 유인하며 자리를 이동했다.

내 위치를 들켜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다. 난 몸이 노출된 근접전에서 류제 신리를 절대 못 이겨.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란 말이지. 신호만 잘 따르면 거리를 유지한 채 충분히 류제 신리와 붙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류제가 오른 나무에서 가시가 돋아 그를 해치려 했다. 파리가 앵앵거리는 것 같아 류제는 불쾌했다. 거기에 적에게 자꾸 자신의 위치만 반복해서 노출시키는 것 같아 불안해졌다.

이런 가시를 만드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면 근접전의 사기나 다름없는 류제의 ‘강화’ 어빌리티의 승률이 당연히 높은데 좀처럼 다가갈 수가 없다. 어빌리티가 알려진 건 이래서 안 좋다니까.

집중해서 미끼를 따라 가던 류제가 무덤덤하게 멈춰 섰다. 생각대로 따라주는 건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마음을 바꾼 류제는 나무에서 내려와 가볍게 땅에 착지한 후 적절한 곳에 숨어 ‘가시’ 어빌리터가 공격하는 방법을 살폈다.

그 순간, 분명 ‘가시’ 어빌리터의 시야 바깥에서 움직였던 류제에게로 첨예한 가시가 덮쳤다. 경로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공격이다.

설마 시야 범위 바깥에서도 공격이 가능할 줄은 몰라 이번엔 피하는 게 늦어버렸다. 류제의 서바이벌 복장이 살짝 찢어졌다.

“와악!”

위험했다. 류제는 혀를 차며 연속해서 공격해 오는 가시를 피해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아까부터 이질적이라고 느꼈던 미묘한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감각을 강화하고 있어서 겨우 들릴 만한 소리다.

이 소리가 저 ‘가시’ 어빌리터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날카로운 대립 속에 한 가지의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한 류제가 의도적으로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니 음이 바뀐 미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잘 들어보니 그 소리는 휘파람 소리 같았다. 류제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눈가를 좁히니 멀리 높은 곳에서 이쪽을 노리고 있는 적팀 조원 두 사람이 있었다. 미나가 말했던 미끼와 떨어져 있던 다른 두 명이다.

그들 중 한 명이 류제 쪽을 보며 지시하자 옆에 있던 자가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곧 또다시 숨어있던 류제에게 가시 공격이 가해졌다.

저 두 조원이 어빌리티로 내 위치를 파악하고 그걸 소리 신호로 ‘가시’ 어빌리터에게 전달한다. 그런 순서인 것 같다.

그런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소리를 판별하지? 그리고 나는 분명 제대로 숨어있는데 어떻게 위치를 알 수 있냐고. 보통 사람은 불가능한 기지이니 분명 어빌리티인데. 도대체 무슨 어빌리티지?

류제는 덮쳐 오는 가시를 피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굳이 휘파람을 신호로 한 이유가 있을 거다. 소리나 공기 진동과 관련된 어빌리티인가.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투시’?

류제가 차갑게 눈을 내리깔았다.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숨어봤자 행동반경만 좁아질 뿐이다. 아직 위치를 모르는 대장 말고 원거리 보조를 맡은 두 사람의 어빌리티도 대강 판별했으니 이렇게 겁먹고 숨어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 류제를 공격해야 하는 가시가 이번엔 불발이었는지 다른 쪽으로 뻗쳐 나갔다. 이상한 곳을 공격한 가시는 일순 강렬한 화염에 휩싸여서 이글이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 어빌리티다.

비키인가. 내가 아니라 비키를 공격한 건 왜지? 둘 다 유인하고 싶은가?

“흥.”

미끼를 처리하는 게 늦는 류제와 합세하려고 했던 비키가 ‘가시’라는 상대방의 어빌리티를 파악하자마자 입꼬리를 짧게 올렸다. 상성의 우위 때문이다.

숲에서 가시와 불 누가 유리한지 보여주지. 그녀가 손에 몇 개의 화염구를 띄워 난사를 했다. 불이 붙은 나무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류제는 저거 팀 킬 하는 거 아니냐며 기침을 콜록거리며 코를 막았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 안 가리는 게 꼭 그녀 이름 같다.

“앗 뜨거!”

화염의 뜨거움을 참지 못한 ‘가시’ 어빌리터가 뛰쳐나왔다. 하, 귀족 영애가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이렇게 되면 우리가 바라던 바라고. 그녀가 식식거리며 불이 없는 곳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어이쿠, 드디어 나왔네.”

류제도 비키의 화염을 피하며 그녀를 쫓았다. 곧 상대 팀 조원들이 저 ‘가시’ 어빌리터에게 위치 지령을 내릴 거다. 숲을 엉망으로 만드는 ‘화염’ 어빌리티를 가진 비키가 거슬리니 어떻게든 비키를 먼저 처리하고 싶겠지.

류제는 그렇게 판단하고 그 틈을 타서 상대 팀을 덮치려는데 ‘투시’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 생각한 쪽에서 굉장히 당황해하는 것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류제는 시력을 강화해서 그녀의 입 모양을 분석했다.

불 때문에 위치를 읽을 수 없어.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류제는 어리둥절했다. ‘투시’ 어빌리티인데 불 때문에 위치를 읽을 수가 없다고? 그건 참 이상한 능력이다.

곧 ‘소리’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다 추측하는 자가 류제가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손으로 나팔 모양을 만들어 바람을 불었다.

저주파가 비키의 불을 단번에 꺼트렸다. 공기 중의 산소를 분리되어 불이 사그라든 것이다.

산소가 주변에서 사라져 순간 숨이 막혀 왔지만 류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그녀가 ‘소리’ 어빌리티로 뭔가를 더 하기 전 그녀를 넘어뜨려 판정기를 눌렸다.

‘삐’ 소리와 함께 그녀는 포박되며 실격 처리가 되었다.

“잠깐이었는데! 치사해, 완전 사기잖아!”

류제는 분해하는 그녀를 가볍게 무시했다. 류제와 근접전이 붙으면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온 게 바보 같은 선택이다.

우릴 보고 이런 작전을 짠 것을 보면 렌처럼 단순 무식한 것 같은데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불을 꺼뜨리려고 위치를 노출한 것이 수상하다. 불을 꺼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나? 위험해서 껐다고 하기엔 그리 착해 빠진 성격은 아닌 것 같고.

불 때문에 위치를 읽을 수 없다는 건 혹시…….

‘소리’ 어빌리터를 잡은 류제에게 ‘가시’ 어빌리터를 놓친 비키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류제!”

“비키, 왕녀랑 미나는?”

“대장을 찾고 있어. 네가 느리작거려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왔잖아.”

비키가 손가락에 붙은 불을 후 불어 껐다. ‘화염’ 어빌리터라 웬만한 불꽃은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류제는 또다시 ‘가시’ 어빌리터에게 방해를 받기 전 비키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을 전달해 주었다.

“이 애가 저쪽에서 휘파람으로 내 위치를 ‘가시’에게 알려 주고 있었어. 내 위치를 쉽게 알아낸 것을 보면 도망간 한 놈이 투시 능력인가 싶은데.”

“뭐? 투시?”

“그런데 네가 숲에 불을 지르니까 위치를 알 수 없다고 말해서 조금 혼란스러워.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투시인데 제한된 투시인가?”

“…온도를 보는 거야.”

비키가 알았다며 혀를 찼다. 파충류의 눈처럼 온도로 시야를 볼 수 있는 능력이다. 거기까지 알아차리자 포박된 ‘소리’ 어빌리터는 이젠 모르겠다며 포기했다.

“지령 전달원을 잃었으니 이놈들이 이제 대장을 보호하기 위해 그쪽으로 향할 거야. 온도를 볼 수 있으면 왕녀와 미나가 위험해.”

“맞는 말이지!”

숨어있던 ‘가시’ 어빌리터가 의도적으로 비키를 덮쳤다. 그녀의 대장과 상성이 나쁜 비키는 어떻게든 분리시켜야 했다.

류제와 비키는 서로 눈빛 교환을 한 다음 동시에 갈라졌다. 사령탑을 잃은 ‘가시’ 어빌리터는 이제부터 비키가 상대하게 될 것이다.

류제는 파충류의 시야를 가지고 있는 적이 도망가는 곳으로 뛰어갔다. 뛰어난 강화 능력을 가진 그가 평범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어빌리터를 따라잡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끝. 남은 건 대장인가.”

“제기랄! 너, 좀 잘난 어빌리티 가지고 있다고 거만하게 굴지 마. 내 키보드 솔로가 더 대단하거든?”

조금 고생하긴 했어도 역시나 맨몸이면 류제를 이길 자가 없었다. 판정 판에 공격을 맞아 슬렉터로 포박된 적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류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류제는 평소라면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넘어갔을 단어가 거슬려서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흘겼다.

거만이라고?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서.

괜한 분풀이란 걸 깨달은 류제가 혀를 차며 미나와 왕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 물러설 곳이 없지? 네 조원들은 다 실격됐어. 얌전히 항복하도록 해.”

미나가 상대 팀 대장에게 외쳤다. ‘분석’ 어빌리티로 주변에 적이 없다 확신한 두 사람은 몸을 노출시킨 채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녀들이 서 있는 곳은 잔잔한 시냇물이 발목까지 흐르는 곳이었다.

“늦었네. 미안.”

왕녀의 옆에 류제가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착지했다. 동시에 탄 냄새가 나다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비키가 이겼다. 이제 정말 남은 건 대장인 그녀 혼자뿐이었다.

“쟤만 끝내면 되는 거지?”

류제가 곧바로 몸을 날려 무방비해 보이는 대장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지 그대로 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아래에 흐르는 물에서 얼음을 뽑아내더니 공격하는 류제에게 의도적으로 판정기를 충돌시켜 방어했다.

“으윽!”

그녀가 ‘빙결’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류제는 판단 실수로 한순간에 실격될 뻔했다. 간신히 팔로 판정기를 막은 류제는 또다시 안일한 정신머리로 실수할 뻔했다.

“셀로니아가의 귀족 영애를 그 애한테 보낸 게 실수였네.”

상대 팀 대장이 아슬아슬하게 웃었다. 작전이 어느 정도 통했으니 성공 여부가 그녀의 손에 달려있어 반쯤 긴장한 표정이다. 이 냇가는 그녀 최후의 요새였다.

얼음 여왕 네네 슈만과 같은 빙결 어빌리티. 그에 자부심을 가진 그녀는 근접 공격을 대상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적어도 종료 시간 전까지 시간 끌기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하늘이 으르렁거렸다. 구름이 그들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니냐롯트의 어빌리티다. 왕녀의 어빌리티는 감정에 연동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류제가 성난 하늘을 흘겼다.

그런 왕녀를 보며 3반 5조 대장이 미소 지었다.

“얼음은… 전기가 통하지 않는답니다, 니냐롯트 저하.”

“알고 있다. 신경 써줘서 고맙구나.”

그렇게 말하는 왕녀의 머리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뇌전만 생각했지 그에 뒤따르는 비를 생각하지 못했던 대장이 입가를 실룩이기 전 벼락이 떨어졌다.

“꺄아악!”

번개가 떨어지기 전 류제가 미나와 왕녀를 붙잡아 안전한 곳으로 점프했다. 니냐롯트의 번개에 맞은 물고기들이 시냇물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적정 수치를 넘어서는 공격을 당하면 자동으로 패배하고 슬렉터에서 기간트리카가 장갑돼 보호하게 되어있다. 프로텍터에 보호되는 모양새로 기절한 적의 대장은 그대로 눈을 빙글빙글 돌리며 쓰러졌다.

“무지막지하군. 우리 위치가 다 들켰을 거야.”

“요리 대회에 쓸 재료는 많이 확보했지 않나.”

시냇물에 떠오른 작은 물고기들을 가리킨 왕녀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게 틀린 말도 아니라서 류제는 별수 없이 그 물고기들을 주워 담았다. 긴 전투 끝에 류제네 조는 드디어 첫 승리를 거두고 비키와 합류했다.

굉음과 함께 벼락이 치자 7반 2조와 대치하고 있던 유네네 조원들이 놀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니냐롯트 왕녀님이다. 류제네 조가 한 건 했다는 생각에 유네도 질 수 없어서 투지를 불태웠다. 속으로는 렌의 말을 떠올린다.

기왕 하는 거 일등이 좋잖아.

“유네. 멍청이처럼 꾸물거리지 마!”

“미안. 집중할게.”

바람을 부리는 유네가 조원을 하늘 위로 올려보냈다. ‘무게’를 조절할 수 있는 그녀는 유네의 힘으로 공중으로 떠올라서 매복하고 있는 적의 대장을 찾아 손으로 가리켰다.

“에잇!”

그 신호를 받으면 멀리서 새총을 만들어 저격중인 다른 조원이 ‘저격’ 어빌리티로 적의 대장의 판정기를 때렸다.

“좋았어!”

“흥, 간단하지.”

대장이 잡히니 나머지 조원들도 자동으로 실격되었다. 그를 확인하고 바람을 따라 위로 상승했던 그녀가 사뿐하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기간트리카가 없으면 어차피 인간은 공중전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공중에 있으면 잡힐 건덕지가 없었던 ‘무게’ 어빌리티를 가진 그녀가 ‘대장’을 맡고 있었다.

“아, 손톱 네일 떨어졌잖아. 힘들어 죽겠는데 이딴 걸 왜 하는 거야?”

“땀 때문에 화장 지워졌어. 진심 최악.”

“짜증 나. 언제 끝나는 거야. 그냥 포기할까? 귀찮아 죽겠네.”

유네는 되도록 많이 이기고 싶었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비협조적이었다. 분명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들었던 말은 다 같을 텐데 왜 그녀들은 이전과 태도가 똑같을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겠지만 유네는 그녀들의 마음을 도통 알 수 없었다.

“꺄악!”

막 승리에 도취하고 있던 그녀들의 가운데로 하나로 묶은 칠흑색 긴 머리와 함께 왕녀의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나타났다. ‘근거리 이전’이다.

그녀는 검 손잡이로 순식간에 조원 한 명의 판정기를 치고 순식간에 또 다른 조원의 판정기를 쳤다.

“도망쳐!”

유네가 조 대장만이라도 살리려고 바람으로 그녀를 날려 보냈다. 유네의 바람이 느껴지자 그녀는 무게를 줄이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녀가 순식간에 가시거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확인한 유네도 루이나에게 당하고 슬렉터에 포박되었다.

남아있는 자들을 전부 처리했다 판단한 루이나는 또다시 근거리 이동 능력을 써서 사라졌다. 슬렉터에 포박된 유네와 조원 두 명은 덩그러니 남겨진 채 묶여 있었다.

“루이나, 저 싸가지.”

“짜증 나네. 쟤 혼자서 뭐야. 잘난 척하냐?”

“…하아. 잘 나가나 했는데.”

나도 이걸로 끝인가. 기왕이면 끝까지 살아남고 싶었는데. 렌 군하고 류제 군은 아직도 싸우고 있겠지? 유네가 같이 실격한 두 명의 조원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일찍 실격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탈락하지 않은 대장을 제외한 유네네 조가 선생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험난한 훈련장이었다. 거기서는 유네가 탈락하기 전부터 판정기를 맞고 탈락된 학생들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설마 실격하면 저걸 받아야 하는 거였냐고 질겁한 표정을 짓는 유네네 조원들은 이젠 괜히 빨리 실격했다며 짜증을 냈다.

유네도 아쉬워서 조금만 더 잘 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후회했다. 그러던 그녀는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도는 중도 탈락자 중 죽겠다며 하나 둘 하나 둘 구호를 외치고 있는 재경이네 조를 발견했다.

렌 군도 탈락했구나. 유네가 안도감 섞인 기운 빠진 한숨과 함께 중도 탈락자의 험난한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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