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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4) (104/112)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4)

“왜 안 깨운 거야!”

“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잖아. 피곤해 보여서 내버려 뒀지.”

“그래도 깨웠어야지. 야, 왜 자꾸 내 시선을 피해? 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냐?”

“아…안 피했어.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차가운 물로 세수하던 류제가 탕 속에 들어가 몸만 기웃거리는 재경에게 꿍얼거렸다.

“하여튼 치사해!”

“내가 왜 치사해.”

“치사한 건 치사한 거야. 치사해!”

강제적으로 잠들어 버린 재경이 새벽같이 일어나 노천탕에서 피로를 풀던 중 세수를 하러 들어온 류제와 마주치고 나서부터 계속 저 소리다.

별표 백 개는 그려놓았던 왕녀의 힌트 이벤트를 직접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기껏 트럼프 카드도 사 왔는데 그냥 자버린 게 아쉬워서 재경이 분풀이를 한답시고 류제에게 물장구를 쳤다.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옆자리가 비긴 했어도 설마 렌이 아침 댓바람부터 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줄 몰랐던 류제는 세수를 하러 왔다가 재경의 알몸 때문에 봉변을 당하는 중이다.

“옷 젖으니까 물 튀기지 마. 왜 일찍 일어났어?”

“일찍 일어나면 안 되냐? 일찍 잤으니까 일찍 일어났지. 치사하게 깨워 주지도 않고. 야, 류제. 바른대로 말하면 내가 용서해 주지. 너 어제 무슨 꿈 꿨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상한 꿈 안 꿨어? 막… 그… 으아… 여튼 이상한 꿈.”

“그걸 왜 물어?”

“에헤이, 반응을 보니까 꾼 것 같은데? 이 음란 마귀야. 어서 당당하게 말해 봐라. 이 엉아가 다 들어줄 테니까.”

자기가 말해 놓고 부끄러운지 재경이 탕에 얼굴을 반 이상 밀어 넣고 부글부글 공기를 끓였다. 자기도 다 플레이를 해봤으니 류제가 엄한 꿈을 꿨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막상 말로 표현하니까 너무 창피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이상한 꿈 꾼 거 맞지? 그지? 누가 나왔지? 얼른 말해 봐.”

아니, 그걸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류제는 생생하게 남은 야한 꿈을 꿈의 주인공이 제 입으로 상기시키니 아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말하긴 뭘 말해. 너랑 뽀뽀하고 뒹굴었다고? 미쳤어? 차라리 시치미를 떼고 만다.

“아침 댓바람부터 왜 이래. 어제 머리 너무 세게 부딪힌 거 아냐? 아무런 꿈도 안 꿨어.”

“그…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한데? 꼭 꿔야 되는 것처럼 말한다?”

“으… 이 짜식이 숨기네. 아무것도 아냐. 난 그냥, 뭐냐, 니가 자다가 중간에 밖으로 나간 것 같아서 개꿈이라도 꿨나 했지.”

중간에 밖으로 나갔다는 말은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해피 엔딩 공략을 위해서라도 류제가 왕녀와의 힌트 이벤트를 제대로 발생시켰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다 깨서 그냥 바람 쐬러 나간 건데. 그때 너도 깬 거야? 미안.”

“가다가 왕녀하고 만나고?”

“너, 내 스토커야? 어떻게 알았어?”

“나, 렌 지미. 이름하야 류제 신리 전문가라고 해라. 왕녀님은 불면증이라서 나갔다가 만날 것 같았어. 그것뿐이야.”

“넌 이상한 데에서 날카롭더라? 막 던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왕녀가 불면증인 건 어디서 들었어?”

“다~ 아는 수가 있지.”

게임 공략한다고 위키 뒤지고 캐릭터 분석해 봐라. 모를 수가 없지. 재경은 이 세계가 자기 손바닥 안에서 굴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거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류제는 아침부터 헛소리나 하는 렌이 어이가 없었다. 그보다 아침부터 노천탕에서 목욕한다고 알몸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자니 어제 꿈이 겹쳐져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이상한 소리나 하고. 열불 터진다.

세수를 끝낸 류제가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려는데 미련이 남는지 재경이 류제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너도 들어와. 같이 목욕하자.”

“난 어제저녁에 했어.”

“나랑은 안 했잖아. 얼른 들어와. 언제 또 온천에 와본다고 빼냐? 에잇!”

재경이 물을 튀기며 류제를 약 올렸다. 노천탕에 팔을 기댄 렌의 눈이 기대감으로 빛나서 류제는 이걸 어째야 하나 아찔해졌다. 눈을 감은 그가 어제 왕녀가 알려 줬던 명상법을 떠올렸다.

그 틈을 타서 재경이 옆에 있던 바가지로 류제에게 물을 거나하게 뿌렸다. 물벼락을 맞은 류제는 옷까지 축축하게 젖었다.

“야…….”

“아직 다음 일정까지 시간 남았잖아. 혼자 있기 싫단 말야.”

“하아.”

어쩔 수 없지. 류제는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온천으로 들어갔다. 목만 둥둥 떠다니던 재경이 통통배처럼 류제에게 다가갔다. 탕에 앉은 류제는 물속에 보이는 재경의 알몸을 보지 않으려고 수증기가 고인 천장을 쳐다보았다.

심심했던 찰나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재경이 류제 근처를 알짱거렸다.

“먹는 것도 똑같고, 운동하는 것도 똑같은데 왜 너랑 나랑 차이가 나는 거냐? 이것 봐, 팔 두께. 짜증 나네.”

같은 나이인데도 점점 신체적 차이가 생기는 것이 신기해서 재경이 제 팔과 류제의 팔을 비교하며 찰싹 달라붙었다.

“어제 여자애들이 너 앞머리 올린 거 보고 싶어 하더라. 난 맨날 보지만 그 마음을 모르진 않겠어.”

재경이 물 묻은 손으로 류제의 앞머리를 넘겼다. 아직 앳되지만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생겼다. 진한 눈썹에 깊은 눈두덩이, 소처럼 긴 속눈썹, 맑고 푸른 눈동자는 오갈 데를 잃었다. 동양과 서양의 혼혈 같은 외모에 우직한 입가는 재경의 대충 생겨먹은 얼굴하고는 천지 차이였다.

“열받아. 진짜 잘생겼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겼지.”

“그거 좋은 뜻으로 하는 말 맞아?”

“그래 짜샤. 나도 이런 얼굴로 만들어 줬으면 좀 좋냐. 대충 만들지 말고.”

재경이 빙의 전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나무라며 제 볼을 주물주물거렸다.

너도 충분히 귀여운데. 라고 콩깍지 씌워진 생각이 류제의 입에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재경이 뭔 개소리냐며 류제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렌을 보고 있던 류제가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더운 물 때문에 얼굴과 귓가가 빨개져 분간이 어려웠지만 재경은 류제의 칭찬에 충분히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사람 볼 줄 모르는구나. 미적감각이 딸려서 어쩌냐. 그래서 꿈에 누구 나왔는데?”

“아,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진짜.”

“네가 말한 이상형이라도 나왔냐?”

“이상형? 아아… 뭐… 그래, 그렇다고 쳐.”

“어? 너 인정했다? 야한 꿈 꿨다고 인정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만우절에 거짓말을 99% 섞어서 말한 이상형을 아직도 믿고 있는 재경이 그걸 우려먹으며 류제를 놀려댔다. 괜히 제 발 저렸던 류제는 과하게 부정하다가 알몸으로 다가오는 렌이 얄미워 머리에 온천수를 부어버렸다.

“아푸푸, 야, 으픕… 뭐 하는 거야.”

“나갈래.”

“뭐? 벌써?”

“난 어제 실컷 했다니까. 비누 밟고 미끄러져서 기절한 바보야.”

“바보라니. 너 말 다 했냐? 류제! 진짜 나가?”

“천천히 담갔다가 나와. 유네 깨워서 이불 개고 있을게.”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일 치를 것 같아서 류제가 도망치듯 노천탕을 빠져나왔다.

당당하게 걷지도 못하고 성급하게 샤워기로 향한 류제는 찬물을 틀어놓고 탕의 온도보다 더 뜨거워진 몸을 식혔다. 어제 꾼 그 꿈 때문에 더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한심했다.

청명한 하늘 위를 날아가는 참새가 평화롭게 짹짹거리는 상쾌한 아침, 펠노아 온천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학생들이 다음 일정을 위해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수학여행 둘째 날. 이번 목적지는 보다 더 나라카와 가까운 곳이다.

어제는 펠노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조별로 자율 행동 시간을 가졌지만 오늘은 저녁에 있을 야외훈련을 제외하고 조별 활동 없이 전부 반별 활동이었다.

그들의 다음 행선지인 알라마니 기간트리카 기술관 전망대에서는 키아나트리체와 나라카의 국경이자 접근 불허의 지역인 리엔달로니아 협곡이 보인다고 한다.

두어 시간의 이동 끝에 키아나트리체 알라마니 기간트리카 기술관 본관에 도착한 1학년 8반 학생들은 수많은 전설을 품은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망원경으로나마 볼 수 있다며 기대감을 품었다.

“리엔달로니아 협곡은 나라카를 둘러싸고 있는 긴 협곡이야. 그래서 마국은 대륙에서 홀로 떨어진 고독한 섬처럼 보이지. 협곡을 경계로 키아나트리체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나라카를 둘러싸서 감시하고 있어. 언제 마족들이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나. 뭐, 마국 안은 지독한 마기가 깔려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열~ 엄청 잘 아네, 비키.”

“마족은 셀로니아가의 주적이야. 이 내가 이런 상식을 모를 리가 없잖아. 모르는 건 너뿐라고 바보 렌.”

잘난 척하는 비키가 최신식의 군인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볼 기회에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러다 그녀의 옷깃에서 느껴지는 추잡스러운 무게에 파리를 쫓듯 툭 털어내었다.

“왜 이래. 이거 놔.”

“뭐가? 뭘 놓으라는 거야?”

“뭐긴 뭐야. 내 체육복 저지는 왜 잡고 있어?”

“내가 네 체육복 저지를 잡고 있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땀을 뻘뻘 흘리는 재경이 뻔뻔하게 변명했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 바깥에 보이는 아찔한 전경을 외면중인 재경은 토할 것같이 속이 메스꺼웠다. 젠장, 높은 곳 진짜 싫어.

“패기 없기는. 어떻게 제립학교 학생이 되어가지고 높은 곳을 무서워할 수가 있어? 한심하게.”

“야, 내가 무서워하고 싶어서 무서워하냐? 무서운 걸 어떻게 해. 으으으… 류제 도와줘.”

반에서 기간트리카를 제일 잘 다루는 비키에게 도외시되자 높은 곳에서만큼은 마음을 안정시켜 줄 상대가 필요했던 재경이 류제의 팔을 붙잡고 죽겠다며 몸을 떨었다.

류제도 평소라면 과민 반응이라고 했겠지만 기간트리카로 올라가는 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렌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류제는 껌딱지처럼 들러붙는 렌이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힘들면 선생님께 말하고 아래에서 기다려.”

“야, 사나이가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러냐?”

“무서우니까 혼자 내려가기 싫어서 고집부리는 주제에. 겁쟁이.”

“아, 아냐… 으아… 진짜 너무 싫어. 너무 싫어……!”

비키가 놀려도 그걸 받아칠 정신이 없는지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힘이 들어가서 죄 없는 이가 절로 갈렸다.

높은 곳 따윈 원래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젠장.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일어날 남은 힌트 이벤트 때문에라도 류제 곁에 붙어야 하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기술관 꼭대기 층은 먼저 올라왔던 학생들로 붐볐다.

“으…으아아.”

“저기에 앉아서 쉬고 있어.”

“싫어. 나도 망원경 볼 거야.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억울해서라도 보고 만다.”

높은 곳 한정으로 겁도 많으면서 고집은 쓸데없이 세다. 도시의 마천루처럼 높게 솟은 알라마니 기술관 정상에 도착한 그들은 전망대 망원경으로 확인할 수 있는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구경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내일 서큐버스의 수작질이 벌어질 장소를 보고 싶었던지라 재경도 류제의 등허리에 붙어 질질 끌려갔다.

“저기… 렌, 나 걷기 힘든데.”

사실 걷기가 힘든 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류제는 그런 핑계를 대고 들러붙는 재경을 만류했다. 신경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는 야리꾸리한 꿈을 꾼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시작해서 자극이 세다.

그러나 류제의 생각은 알 바 없고, 까마득하게 떨어진 땅덩어리가 개가 짖어대는 오밤중처럼 무서운 재경은 떨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엉겨 붙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키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팔짱을 끼었다.

“너 정말 바보니? 설사 여기서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슬렉터는 두었다가 어디에다가 쓸래? 다음 달이면 벌써 체육대회인데 공중에서 기간트리카 장갑을 못 한다는 말은 하지 마. 혹시라도 같은 팀 되면 절망스러울 테니까.”

“시끄러워. 지금 나 집중하고 있잖아. 말 시키지 마… 으으으… 으으!”

간신히 망원경이 있는 곳까지 가는 데 성공한 재경은 기절 직전 상태로 나라카의 대지와 그걸 둘러싼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관찰했다. 한쪽 벽면을 채운 유리창을 쳐다보기만 해도 시야가 좁아졌지만 이 정도는 껌이다고 재경이 자신을 타일렀다.

“류제, 나 절대로 놓으면 안 된다?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있어야 해.”

“아니… 그래.”

바닥도 멀쩡하고 바깥은 유리창으로 막혔는데 여기서 떨어질 리가 없잖아. 류제는 기어코 어정쩡한 백 허그를 하게 만드는 렌을 안으며 보는 사람도 불편하게끔 엉거주춤 섰다.

“하하. 진짜, 뭐 하는 거야? 웃겨. 사진사는 이런 걸 찍어야지. 제목은 1학년 8반 켄타우로스.”

“놀리지 마. 렌이 무서워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네가 내 심정이 되어보라고.”

“놀리지 말라니. 놀리는 거 아니거든? 웃겨서 그러지. 남자끼리 뭐 하는 거야?”

비키가 깔깔깔 배를 잡고 웃어댔다. 재경은 망원경으로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보겠다고 고개만 쭉 내밀고 있고 그런 재경을 뒤에서 엉거주춤 떨어져 붙잡은 류제의 모습은 엽기 그 자체였다.

얼마나 웃겼으면 잘 웃지 않는 비키가 포복절도를 했고, 그들 다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왕녀마저도 잠시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저기… 렌, 이제 그만하면 된 거 같은데. 아직도 멀었어?”

“…….”

“렌?”

부끄럽다 못한 류제가 해가 질 때까지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있을 기세인 렌을 불러 주의를 환기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망원경을 통해서 보는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재경은 더 아찔해 보이는 지상의 모습에 거품을 물고 반쯤 기절해 있었다.

“내가 못 살아.”

류제가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재경을 거적때기처럼 옆구리에 끼었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그런 류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렌이 이상한 애라지만 높은 곳을 무서워하면서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류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쉬라고 만들어놓은 의자에 앉혀 놓으니 정신을 차리는 기색이 보이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사나이는… 물러서면 안 되는 때가 있기 마련이…….”

“사나이는 이런 거 보고 기절 안 해. 이거나 마셔.”

식은땀을 흘린 재경에게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넨 류제는 마침 물병이 반쯤 비워진 상태임을 깨달았다.

거슬려도 어쩌랴 물병은 이미 재경의 손에 넘어갔고 물병의 주둥아리는 스스럼없이 끌러져서 내용물이 꿀꺽꿀꺽 목젖으로 쏟아지는걸.

차가운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창백해진 입술에 물병의 입구가 닿는다. 그걸 보자니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착각은 무엇일까.

하염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던 류제는 재경이 물에 젖은 강아지처럼 머리를 털고 물병을 넘겨주자 아차 그것을 돌려받았다.

간접 키스. 류제는 떠오르는 그 어이없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협곡이 생각보다 깊네. 마족들이야 날개가 달렸으니 자유롭게 왕래하겠지만 기간트리카가 없는 보통 사람들은 함부로 들어가기 힘들겠지?”

“그 정신에 그걸 또 어떻게 봤대.”

“정신력만 있으면 뭐든 가능한 법이지. 나 쩔지 않냐?”

무슨 당치 않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류제는 렌이 기간트리카 수업 때마다 높은 곳이 싫다고 찡찡거리던 모습이 꾀병이 아님을 새삼 깨달았다.

기절할 만큼 무서워하는 주제에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건 좋지만 안색이 파리해질 정도로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렌을 이상한 자세로 안는 것도 싫고.

“후후. 류제, 뭐 하고 있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전망대를 구경하던 미나가 의자에 앉아있는 류제와 재경을 발견하고 알은척을 했다.

“깜짝이야. …안녕, 미나. 렌이 높은 곳이 힘들다고 해서 쉬고 있어.”

“늘 위로 올라가는 부스터가 싫다고 비명 지르곤 했었지. 괜찮아, 렌? 무리하지 마.”

“…시꺼. 절로 가.”

그녀와 척을 지는 렌의 차가운 태도에 미나가 살짝 풀이 죽었다.

“실례였다면 미안해. 난 류제가 기분이 좋아 보여서 무슨 일인가 했어.”

“너랑 상관없거든? 알 거 없으니까 좀 가. 너랑 말 안 해.”

“렌, 제발 애같이 굴지 마. 미나가 뭘 잘못했다고.”

어제 심해로 가라앉았던 조 분위기를 살리려 열심히 노력했던 착한 미나를 재경이 이유 없이 나무라자 류제가 쓰게 잔소리했다.

류제가 미나 편을 드는 게 마음에 안 든 재경은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하얗게 질린 주제에 걸음은 멀쩡한 걸 보면 밖만 쳐다보지 않으면 걸어 다닐 만한가 보다.

“웃기구 있네. 둘이 언제 또 그렇게 친해지셨대.”

“렌. 너 또―”

“예 예. 또 내가 나쁜 거겠지. 미안하게 됐수다. 난 원래 수상쩍은 애는 신용 안 하거든.”

대충 생겨먹은 눈깔을 세모지게 부라린 재경이 미나 플로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미나 저거, 지금은 순진한 척해도 내용물은 아주 시꺼멓게 그슬렸을 거다. 호감도 이벤트만 아니면 저 스파이를 류제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인간인 척 연기하는 미나가 싫었던 재경이 류제를 억지로 끌고 가버렸다. 상태가 안 좋은 렌을 뿌리치기도 뭐해서 류제가 재경 몰래 슬쩍 미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미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활짝 웃던 입을 닫은 그녀가 흥미롭게 입가를 가렸다.

수상쩍다, 라. 의심 가는 행동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전부터 비호감을 표시하는 렌 지미가 거슬리는 서큐버스는 그 말이 그저 멍청한 인간이 내뱉는 망언인지 아니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정체를 들켰을 리가 없다. 자신의 마법은 대마족 결계도 통과할 뿐만 아니라 그 ‘세라 밀로니’의 탐색 능력도 무용지물로 만드니까.

거기에 어빌리터를 흉내 내서 기간트리카까지 장갑 가능한 것이 몽마의 군주의 의태 능력이었다. 그걸 저 모자란 인간이 간파했다고? 말도 안 돼.

“흥.”

저 인간이 가진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이겠지만 말을 들은 이상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르지만 저놈의 꿈을 조금 파볼까. 마왕님께서도 저런 괴팍한 인간이 뭐가 좋다고.

어찌 되었건 그녀가 류제에게 주고 싶던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했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린 그녀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멸족한 셀로니아가를 부흥시킬 목적을 품고 전시품을 살피는 비키 셀로니아, 키아나트리체의 기술 발전을 눈으로 확인하는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아래층에서 연구진들과 함께 기술 설명을 준비하는 세라 밀로니, 가장 나중의 순서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유네 나르타.

여타 류제 신리와 접촉이 많은 인간들을 각성의 지표로 의식하고 있다. 그 중에 안중에도 없던 렌 지미가 부상한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그걸 제쳐 두고라도 그녀들은 앞으로의 일을 위한 중요한 제물이니까 렌 지미와 다르게 상냥하게 구슬려야지.

내일이 되면 빌어먹을 인간 새끼들이 마왕님을 위한 나라에 가까이 다가올 텐데. 그 절묘한 순간에 우리들의 신병기를 점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것으로 부활체에 내재한 힘을 시험해 볼 것이다.

애가 타는 그녀는 스스로 몸을 싸매며 떨리는 몸을 절제했다. 섣부르게 흥분하기는 이르다. 마왕님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사천왕으로서 본보기를 보여야지. 난 마가릿처럼 멍청이가 아니라고.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어오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싱긋 웃었다. 눈으로는 그녀의 왕을 품은 이를 흘겨보았다.

류제는 미나가 한 말이 거슬렸다. 순수하게 웃는 낯으로 하는 말은 솔직해 보였다. 내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고? 말이 안 된다. 미나도 이상한 소리를 하네.

얄궂은 말에 곤두선 류제는 마음 한구석에 모기 물린 것처럼 근질거려서 기분 나빴다. 그의 불쾌한 마음은 개나 줘버린 렌은 전시된 물품을 괜히 건드려대며 어린애처럼 류제의 옷자락을 끌었다.

“야, 이거 봐봐. 옛날에 사용하던 슬렉터였대. 무슨 글러브냐? 왤케 커?”

“손 안 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뭐 어때. 어차피 유리 벽에 막혀 있고. 저기는 무슨 무기 같아. 으으… 여긴 왜 뚫려 있는 거야. 아래층 다 보이게. 켁!”

재경이 가리키는 곳에는 용법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기가 아래층에서 천장을 뚫고 올라와 위용을 과시했다. 재경 왈, 영화에서 봤는데 공룡 뼈를 전시해 놓은 자연사 박물관 같고 한다.

가슴팍까지 오는 난간과 아래층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이 가장자리에 붙어 저 거대한 기기나 아래층의 전경을 안전하게 구경할 수 있는 구조였다.

여기가 실은 아래층의 위층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벗겨지자 재경이 질색하며 류제에게 들러붙었다. 단단한 팔을 죽부인처럼 안던 재경이 류제를 보고 얼굴을 팍 구겼다.

“왜 실실 쪼개냐? 내가 높은 데 무서워하는 게 그렇게 웃기냐?”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

“지금도 웃고 있잖아. 입꼬리 올라간 것 좀 봐. 이 쫘식이 아주 날 놀려 먹으려고 작정했지? 누구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지도 모르면서.”

어처구니없는 지적에 류제가 손으로 제 볼을 꾹꾹 눌렀다. 그 손짓으로 알 수 있었던 건 그의 입꼬리가 평소보다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비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사람 무서워하는 것 보고 그러는 거 아니다 진짜.”

“진짜 웃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오해야.”

“내 눈이나 똑바로 쳐다보고 거짓말해라, 이 구라쟁이야.”

건방지게 웃는 류제가 약이 올랐던 재경은 힘 빠진 주먹으로 거짓말쟁이의 면상을 공격하고는 난간을 피해 다른 곳으로 향했다. 류제는 정말, 정말로 비웃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변명하며 그 뒤를 쫓았다.

붕어 똥처럼 재경을 쫓아다니던 류제는 어떻게든 말을 돌려 보려고 오히려 미나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던 렌을 나무랐다. 고아원 사람들이 본다면 어린애 같다고 혀를 찰 것처럼 유치하다.

“그보다 너 전부터 미나한테만 말이 심한 거 아냐? 아무리 부끄럽다지만 또 오해만 낳을 거야.”

“별로. 낳아도 상관없어. 그리고 딱히 부끄러운 거 아니거든? 나, 걔 싫다고 했잖아.”

“왜? 미나는 좋은 애인데.”

“넌 몰라도 돼.”

저 말이 싫은 류제가 얼굴을 구겼다. 또 나왔다. 불리하면 나오는 문장.

류제는 저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기는 뭐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거. 버릇인지 모르겠지만 듣다 보면 사람 무시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기분 나빴다.

“너 저번에 유네랑도 나한테 비밀로 이야기했었지? 뭔데? 왜 나한테만 비밀이야? 미나도 그래서 비밀이야?”

“뭐? 내가 언제 이 잔소리 대마왕아. 사사건건 궁금해서 난리야. 비밀이라면 비밀인 거지. 니가 내 할머니라도 되냐?”

하…할머니? 의외의 단어에 넋이 나간 류제는 재경이 귀를 막고 도망가자 할 말이 없어졌다. 홀로 남겨진 류제는 뻗었던 손이 무안해져서 슬며시 거두었다.

설마 미나와의 비밀이 어제 세라가 말했던 렌의 복잡한 가정사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서있는 류제에게로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왔던 유네가 다가왔다.

“류제 군. 혼자서 뭐 해? 렌 군하고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유네. 밑에서 쉰다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는데 역시 돌아다니는 게 좋아서. 기왕 여기까지 왔잖아. 렌 군도 높은 곳 싫어하면서 올라왔고. 나도 질 수 없지.”

용기를 낸 유네가 귀여운 얼굴로 헤헤 웃었다.

“어제 류제 군이 말해 준 거야? 세라 선생님이 저녁에 조 활동이 힘들면 참지 말고 말하라고 해주셨어. 걔네도 한소리 들은 것 같더라. 고마워.”

“별거 아닌데 뭐. 너 좋다고 하는 애들도 있으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부끄러운 듯이 볼을 긁적거리는 유네는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고 수줍게 털어놓았다. 관심이 없는 일이면 일말의 호기심도 주지 않는 류제가 챙겨준다는 것이 특별 취급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얼마 있지 않아 아래층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호출했다.

반장인 비키가 학생들을 통솔해서 재경이 봤던 커다란 기계가 있는 층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도망친 주제에 경사가 심한 계단을 혼자 내려가기 싫다고 재경이 은근슬쩍 류제와 유네의 교복을 붙잡았다.

“자. 집중!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다들 마국과의 국경선인 리엔달로니아 협곡은 잘 보셨나요? 교과서에 나온 것보다 훨씬 깊고 어둡죠? 그렇다면 여기서 북서쪽에 협곡을 따라 길게 나있는 성곽을 보신 분도 있을까요? 아주 작게 보일 텐데.”

비키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네다섯 명의 학생들 말고는 손을 들기 주저하는 분위기다. 세라가 그럴 수도 있다며 상냥하게 웃었다.

“그곳이 바로 호세마타 요새입니다. 나라카의 대지와 키아나트리체의 대지가 가장 가까운, 협곡의 너비가 제일 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과거 마족과의 충돌이 아주 격했던 지역입니다. 말하자면 인류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요새는 부대 소속 병사가 아니면 절대 들어갈 수 없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하다는 백장미 기간트리카 특수부대가 상시 대기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백장미 부대에는 많은 어빌리터가 동경하는 ‘그’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님이 계신답니다. 대단하지요?”

재경이 몸을 움츠렸다. 칫, 드디어 전쟁과 관련된 떡밥이 던져졌다.

백장미 부대. 하렘 미연시 설정에 걸맞게 전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빌리티 척도가 70이 넘는 괴물들만 속한 부대였다. 그곳은 과거 장성급 장교를 배출해 낸 셀로니아가의 어빌리터들이 거쳐 갔던 부대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비키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며 선생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키아나트리체의 과학이 집결되어 있는 알라마니 기간트리카 기술관 본관입니다. 기차 안에서 설명했듯 여기에 전시되어 있는 발명품들은 인류가 거쳐 간 역사나 다름없지요. 드라코니스 입자, 슬렉터의 발전, 군용과 학생용 기간트리카의 특장점, 그리고 마족에게 이기기 위한 다양한 영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지요.”

“그렇지. 에헴, 이곳이 바로 인류 과학의 정수가 모인 곳이로소이다. 반갑소들, 나는 알라마니 기술관을 책임지는 관장일세.”

세라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홀홀 할아버지가 두꺼운 뺑뺑이 안경을 쓰고 등장했다.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은 하얀 가운에 헤이하치처럼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은, 뻔한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생겨먹었다.

저 할아버지 헤어스타일이 너무 임팩트 있어서 일러스트로 본 기억이 나는데. 중요하진 않은 지나가는 엑스트라다.

세계관 설정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설명충이라 귀찮아서 대사 스킵으로 넘겼는데 여기선 그럴 수도 없다. 지루해. 재경이 입을 쩍 벌려 시원하게 하품을 했다.

“제립학교 졸업생들도 여기서 많이 연구하고 있지. 기간트리카를 개발하고 프로텍터 펌웨어를 업데이트하며 전투에 쓰일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거야. 에헴, 그것을 도와주는 S_script는 슬렉터와 어빌리티 그리고 기간트리카의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차세대 고급언어다. 내가 바로 그 S_script의 창시자다. 전설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기분은 어떠냐. 영광이지?”

자화자찬인가. 재경은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맹한 표정으로 눈만 끔벅거렸다.

비키는 개발보다는 싸움에 더 관심이 있는지 그것보다 빨리 최신식의 군용 기간트리카에 탑승해 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왕녀와 미나만큼은 관장의 말을 유심히 경청했다.

특히 S_script의 보안 알고리즘의 돌파구를 찾는 중인 미나는 점찍은 사냥감에게 열렬한 눈빛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기술관 연구원이 장래희망인 미나 플로리아가 그를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했을 때 머리 부분에 떠다니는 둥근 렌즈를 본 적이 있을 거야. 그게 바로 프로텍터다. 아직은 테스트 단계지만 AI를 집어넣어 가시각 너머에 있는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지. 에헴, 네놈들의 한심한 컨트롤 능력을 가지고도 다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야.”

나는 엄청 다쳤는데. 재경은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을 할 때마다 화려하게 굴러댄 전적을 떠올리며 불평했다.

그렇다는 말은 프로텍터가 지키지 못할 정도로 기간트리카를 못 다룬다는 말 같다. 재경이 아닐 거라 부정해도 그건 사실이었다.

“슬렉터에 설치된 장갑 프로그램은 소유자의 어빌리티를 트리거 에너지로 변환해 입자를 자극하지. 나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할 수 없다만……. 이런 내가 어떻게 기간트리카를 발전시키느냐고? 그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력! 이매―지―네이―션!”

돌팔이 매드 사이언티스트 전매특허인 침 튀기며 우기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나 참, 저 수다쟁이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여기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고. 게임 개발사가 저딴 캐릭터를 왜 임팩트 강하게 만들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저런 게 재미있나?

“그 상상력은 기간트리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상상력이 있는 한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한다. 이걸 보라. 나의 상상력 덩어리를!”

결국 자랑하고 싶던 건 저것인지 두 팔을 활짝 벌린 관장이 제 옆에 있는 거대한 기계를 가리켰다. 재경도 아까 위층에서 내려다본 기계였다.

“이름하야 스위처! 내가 개발한 인류 최초의 텔레포트 기계다. 에헴. 어떠냐? 멋지지 않느냐?”

텔레포트? 재경은 흥미로운 단어에 귀가 번뜩 뜨였다.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순간 이동은 꿈으로만 꾸던, 현존하는 어빌리터 중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최상급 어빌리티가 아닌가. 그걸 인공적으로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그게 가능해? 옆에 앉아있던 유네가 경악했다.

텔레포트와 비슷한 능력으로 왕녀의 친위대 루이나 알로이드가 가진 근거리 이전 능력이 있지만 어디로든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는 텔레포트와는 비교 불가였다.

“이 모니터에는 기술관 발신기가 연결되어서… 이렇게… 하면 화면이 보이지. 여기를 확대하면 너희들이 궁금해하던 호세마타 요새 안을 볼 수 있다.”

“…텔레포트인데 그게 왜 필요한 거죠?”

해상도가 낮아 픽셀이 깨져서 보이는 거대한 모니터 사이로 누군가가 손을 들어 물었다. 재경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텔레포트잖아. 그냥 어디든지 뿅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냐?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알아. 텔레포트라고 어디든지 뿅 하고 갈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스위처는 인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내 불우(不佑)의 역작이다. 어디든 가지는 못하지만 대신에 이렇게… 내 손수건을 여기에 두고…….”

관장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뭔가가 떠오른 재경은 더 들을 것도 없이 질려버렸다. 이거 기억난다. 아까 쌤이 말했던 백장미 부대 대장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이벤트다. 하지만 그 과정이 참으로 거시기하더라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스위처를 기동시키면……!”

스위처 위쪽 둥근 기계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속도가 빨라지고 소리도 거세지자 자리에 앉아 관장의 이야기를 듣던 학생들이 뭔가가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함에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스캔된 장소에서 가장 분자 구성이 비슷한 물품과 뒤바뀌어지지. 이것이 바로 백장미 부대원이 쓰는 손수건이다!”

영감탱이가 변태 같은 손놀림으로 주접을 떨었다.

재경은 안다. 저기서 나올 것이 백장미 부대원의 손수건이 아니라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35세)의 화려한 레이스 팬티가 될 것임을.

“어떠냐!”

스위처에서 강렬한 빛이 사라지자 그가 자랑스럽게 뒤바뀐 천 쪼가리를 들었다.

활짝 펼쳐진 그것은 성인 여성이 승부용으로 쓰는 화려한 팬티였으며, 역광으로 그것을 본 학생들과 선생님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저기… 과…관장니임?”

“왜 다들 그러고 있어? 어서 감탄하라고! 간단히 말해서 비슷한 형태, 부피, 무게,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과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 바로 이 스위처다! 최고 거리는 호세마타 요새까지고 현재는 안타깝게도 개발 중지되었다. 이유는 마족들에게 악용될 가능성이 높고 효율이 나쁘기 때문이지. 사람을 텔레포트 시키면 한동안은 작동 불능이 되어버리거든. 마족과 인간을 분간할 수 있게 하는 데에 수많은 노력을 퍼부었건만… 아쉽게 되었어. 하지만 향후 10년 내에는 가능할지도…….”

“관장님? 손에 든 것은 손수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세라 밀로니는 자신보다 군 계급이 높은 관장이자 박사를 뭐라 제지도 못 하고 헛기침을 했다.

눈이 좋지 못한 관장은 손에 든 하얀 것이 백장미 부대원이 쓰는 손수건이 아닌가 쳐다보다가 이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채고 어이쿠, 하고 후다닥 공중에 던져버렸다.

“가…가끔이다! 가끔 이런 착오가 발생하지. 이런… 이 부분은 좀 고쳐야겠군. 반드시 연구비를 떼놔야겠어.”

관장이 던진 팬티를 보다 못한 세라가 슬쩍 주워서 뒤로 던져놓았다. 아무리 여학생이 많다고 해도 남학생도 있는데 교육자의 입장상 여성용 팬티를 냅다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하여튼 저 돌팔이 박사님. 평소에는 완벽하면서 하나둘씩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하신다니까. 이번엔 무사히 넘어가나 했던 그녀가 경위서를 쓸 생각에 크게 한탄했다.

“본 기기의 목적은 최전방 호세마타 요새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병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교체하기 위함이었다. 호세마타 요새가 뚫리면 가까이 있는 마을이 초토화가 될 테니까. 에헴. 다시 말해 다친 병사와 건장한 병사를 ‘스위치’하려는 취지란 말이다. 하지만 제약이 많고 에너지 소모도 심한 데다가 좌표 입력이 불가능해서 현재는 처음 지정한 호세마타 요새와만 왕래가 가능하게 두었지. 여러모로 양날의 검이라서.”

“요약하면 팬티랑 손수건을 바꿔주는 엄청 쓸모없는 대단한 애물단지 기계란 거네.”

“쓸모없다니! 네 이놈. 감히 어떤 발칙한 학생이 그런 말을 하느뇨?”

정곡을 콕 찌르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관장이 옹고집처럼 분개했다. 관장의 말을 경청하던 학생들이 모두 이야기를 꺼낸 장본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뭐…뭐야… 개인적인 소감인데.”

“너! 주근깨 만발한 촌스러운 오 대 오 앞머리 소년아. 일어나 보거라.”

“왜요? 맞는 말이잖아…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란 단 하나도 없다네! 안 되겠다. 이놈의 팬티 때문에 스위처의 대단함이 가려져 버렸잖아. 내 발명품이 이런 하찮은 작대기 같은 놈한테 비하를 당하다니.”

“아니,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고 했으면서 하찮은 작대기가 뭐야.”

혼잣말을 좀 크게 했기로서니 낭패다. 관장의 표독스러운 눈초리에 재경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옆에 앉아있던 류제와 유네가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이목이 집중되자 이거 참 어디든 태클을 거는 렌 지미랑 비슷한 상황 같네. 라고 구시렁거리던 재경이 순간 어떤 기억이 스치고 헉했다.

류제가 겪는 호감도 이벤트를 주로 돌아보느라 이런 자잘한 스토리는 고려하지 않았는데 재경은 지금에서야 저 할아버지의 무의미한 등장이 가지는 의미를 깨달아 버렸다. 바보라서 그런가 심심하면 뒷북을 친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아? 이거 그거야. 그거라고. 팬티 주인하고 나, 렌 지미가 뒤바뀌는 그거라고! 이놈의 렌 지미는 어디 안 낑기는 데가 있어야지. 망할 삼류 악역 같으니. 나는 가만히 있을 것이지 왜 또 나대서 고생길을 예약한 거야?

“이리로 오게. 이 스위처의 위력을 내가 직접 보여 주지.”

“하지만 박사님, 학생에게 검증되지 않은 기계를 그렇게 섣부르게……!”

“가만히 있게, 밀로니 중위. 이건 내 자존심이 걸린 싸움이다. 걱정 말아. 이 학생이 무사하다는 데에 내 오른쪽 머리카락을 걸지. 자. 착하지? 그냥 잠시 백장미 부대원과 위치가 뒤바뀌는 것일 뿐이란다.”

차에 타면 사탕을 준다는 납치범의 말이나, 예방접종 주사를 놓기 전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의사의 거짓말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시…싫은데요? 돌아올 때는 어쩌라고요.”

“네가 네 입으로 이게 쓸모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니라는 걸 보여 준다니까? 너희들도 백장미 부대원이 보고 싶지? 그렇다잖아. 친구들을 위해서 이 정도도 못 해줘?”

“아…안 쓸모없어요. 됐어요? 그러니까 그 수상쩍은 거 나한테 들이밀지 마. 으아악!”

“걱정 마. 걱정 마. 안 죽어!”

관장이 억지로 재경을 끌고 나와 스위처 앞에 세웠다. 재경은 살려달라며 세라를 쳐다보았다. 내 보호자는 세라 쌤이잖아. 세라 쌤, 어떻게 좀 해봐요. 나 이거 하기 싫어.

“박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 학생을 그렇게……!”

“제가 대신 할게요.”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소리에 싫다던 재경도, 그런 그를 질질 끌던 관장도, 관장을 만류하던 세라도 전부 그를 주목했다.

친구를 대신해서 희생하겠다는 그 발언이 멋있어서 주변 여자애들이 연달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환호 소리에 식겁하던 재경의 표정이 솔깃하게 바뀌었다. 어라. 여자애들이 좋아하잖아?

“그래, 그런 거구나!”

류제. 안타깝게도 이건 실험 대상인 내가 하는 것이 맞는 일이야. 삼류 악역인 렌 지미가 동네북인 양 시달리는 건 일상다반사라고.

재경이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꾼 이유는 류제가 호세마타 요새로 텔레포트돼 버리면 백장미 부대와의 이야기가 꼬일 위험성이 있다거나,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트루 엔딩의 마지막을 장식할 호세마타 요새에 류제를 보낸다는 것이 껄끄럽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내가 갈 게 류제. 내가 갈 거야.”

“자네, 아까까지만 해도 안 간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내가 대신 갈 테니까 무리하지 마.”

“무리하는 거 아니거든?”

“렌 학생.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류제 학생도 간다고 말하지 마세요!”

아까 여학생들 환호 들었어? 제길. 나도 여자애들한테서 저런 환호 받고 싶어.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라고, 이건 다시 없을 기회란 말야. 찌질하게 굴던 렌 지미와는 다르게 내가 용감하게 저걸 수행한다면 한인기 하게 되지 않겠어?

인기는 이꼬르 여자 친구.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정신 차려, 신재경! 목적을 잊은 거야? 찌질한 렌 지미처럼 사나이답지 못하게 굴지 마.

단순 무식한 재경에게 있어서 여학생들의 환호 한 방이면 삼류 악역 렌 지미가 괜히 나서다가 구르게 되는 이벤트마저도 저리 긍정적으로 바뀌나 보다.

“괜찮아요, 쌤. 큰일 안 난다잖아요.”

“렌. 진심이야?”

하찮은 명예욕에 눈이 멀어 구질구질한 목표가 뇌를 지배한 순간 재경은 만류하는 세라의 목소리도, 붙잡는 류제의 손짓도 전부 느껴지지 않았다.

꿍꿍이를 품은 재경이 히죽 웃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건 인기를 올릴 기회였다. 역시 바보다운 발상이었다. 나서주다가 대뜸 밀쳐진 류제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기가 막혔다. 그런 류제를 지나쳐 당당하게 선 재경의 눈은 자신감 넘쳤다.

“까짓것, 얼른 해봐요. 난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좋아. 그냥 하찮은 작대기가 아니었고만.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용감한 아이군. 학생을 잘 뒀어, 밀로니 중위.”

“밀로니 중위가 아닙니다! 학생들 앞에서는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리고 저 학생은……! 박사님!”

저 말썽꾸러기를 어쩌면 좋을까 세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수군수군. 믿음직스러운 류제 말고 뭘 해도 엉망진창인 렌이 수상한 관장의 이상한 실험에 참여한다는 소리에 반 학생들의 미심쩍은 목소리가 커졌다.

입학식 날의 기간트리카 대결을 비롯한 렌 지미의 수준 낮은 돌발 행동은 왕녀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라 학생들은 그의 행동에 환호하기보다는 ‘또 저런다.’, ‘질리지도 않나.’라는 편파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허, 그리 걱정하면 내가 뭐가 돼. 날 믿지 못하는 건가? 거기 용기 있는 학생아, 가서 부대원을 만나면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이 보내서 왔다고 전해다오.”

“박사님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렌 학생. 어서 안 된다고 하세요.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백장미 부대는 외부인에게 호전적인 사람들입니다.”

“아, 쌤도 괜한 걱정이라니까요.”

멋지구리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척 든 재경이 관장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기왕 하는 거 멋지게 가고 싶은데 주변에서 자꾸 질척거리면 태가 안 산다.

그런 재경을 보며 애가 타는 것은 세라와 류제, 유네밖에 없어 보였다. 암만 애가 모자라고 부족해도 제 학생이고, 호세마타 요새에 관해 더욱 중요한 사실을 망각중인 것 같은 관장을 세라가 뜯어말렸다.

“그리고 백장미 부대는 애초부터 외부인 출입이 금―”

세라의 잔소리가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자신을 믿지 못하는 태도가 아니꼬웠는지 관장이 냉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스위처를 작동시켰다.

힘으로 끌어내려고 세라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전보다 큰 굉음과 함께 아까처럼 흰빛이 번뜩였다. 고작 팬티와 손수건이 바뀌었을 때와는 달랐다. 모든 사람의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었다.

정말 텔레포트를 한 것처럼 순식간에 렌이 서있던 자리의 기척이 바뀌었다. 잘못된 것 아닌가 걱정되었던 류제가 빛을 가렸던 손을 거두었다. 수상한 증기가 공기 중에 훌훌 퍼지며 등장한 인영은 확연하게 17살 소년은 아니었다.

“…지되어 있어서 사전 협약 없이는 가면 안 된단 말입니다!”

“협약은 지금 하면 되는 거지. 역시 성공이구나. 에헴. 오랜만이오, 들라크루아 중령. 중령이 와줄 줄은 몰랐네.”

“어? 뭐…무스?!”

빛이 사라지니 오전에 있었던 군사 훈련 끝에 노곤한 몸을 이끌고 샤워를 즐겼던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 포르테 들라크루아 중령(35세 기혼)이 수건을 두른 채 재경이 있던 자리에 서있었다.

나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아하니 막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녀의 입장에서 다시 말하자면 샤워를 마치고 나온 것뿐인데 재경과 위치가 바뀌어 ‘그’ 대단한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이 병아리보다 못한 학생들 앞에서 수건만 걸친 알몸으로 등장했다는 말이 된다.

“꺄아아악!”

당황한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공기가 찌르는 듯한 가시처럼 변해서 그 주변 일대로 퍼져나갔다.

비명이 몸에 닿자 독한 살기처럼 찌르르르 피부가 따가워졌다. 어빌리티인가? 굉장한 압박감이었다.

“으윽. 지…진정하게, 포르테. 날세. 알라마니 기술관 총책임자라고. 귀청 떨어지겠구먼.”

기간트리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동경하는 살아있는 전설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니.

이 괴팍한 과학자가 틈만 나면 기간트리카를 발전시킨다는 명목하에 괴상한 실험으로 부대원을 괴롭히곤 했지만 생판 모르는 학생 앞에서 반나체를 보여 준다는 건 도를 지나쳤다. 열이 오른 포르테가 핏줄이 솟으며 버럭 화를 냈다.

“또 지랄이야. 또! 내가 작작 하라고 했지, 이 망할 노친네가.”

35세라고 보기 어려운 동안 얼굴과 고된 훈련으로 만들어진 근육의 볼륨감을 가진 그녀는 괜히 대대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듯 금방 멘탈을 붙잡고 자비 없는 발길질로 관장을 걷어찼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 줄 알아? 우리 부대가 그렇게 쉬워 보이나? 틈만 나면 이딴 기계로 괴롭히기나 하고. 제립학교 선생으로 보이는데 중위인가? 가서 옷 가져와. 이 빌어먹을 영감탱아. 오늘내일하지 말고 지금 당장 죽어. 이거 내 팬티잖아? 아주 죽고 싶어서 미치겠지?”

“포르테, 오해야. 그게 아니라네. 난 그저 스위처의… 으앗! 포르테. 학생들 앞이라네. 학생들… 윽. 제발 노인 공경을……!”

“학생들이고 나발이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학생들 앞이라 날 이 꼴로 불러 세웠나? 내가 대대장이지 동네 스트리퍼야? 어?”

“난 자네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지. 으악.”

“죽어. 죽어라! 죽어버려. 댁은 노인 공경이 아니라 노인 공격을 받아야 해.”

“들라크루아 중령님. 진정해 주세요. 학생들 앞입니다. 제발요!”

손에 공기를 압축시켜 관장에게로 포처럼 날리는 포르테의 눈에 살기가 내비쳤다. 그걸 말리는 세라는 그녀가 속한 부대의 대대장도 아니건만 중위라는 신분은 중령 앞에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능했다.

관장에게 쏟아지는 폭격에 얼이 빠진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기술관 방송에서 긴급 알람이 울리고 보안과 사람들이 출동해서 그녀를 뜯어말렸다.

스위처의 앞에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불안하게 지켜보던 8반 학생들은 저 돌팔이 과학자가 발명한 기기가 정말로 작동한다는 것과 렌 지미와 뒤바뀌어 등장한 사람이 백장미 부대의 전설 포르테 들라크루아라는 사실, 그녀가 수건을 두른 모습으로 부끄러움 없이 발차기를 한다는 점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조금 더 세심하게 살피자면 비키는 제 어머니의 후배이자 전설인 포르테 들라크루아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이상해서 복잡한 심경인 것 같았고, 왕녀는 렌 지미가 얽힌 일은 항상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된다며 실망한 기색이었다.

미나는 지금의 류제와 비할 바가 안 되는, 몸이 오싹해지는 강한 적의 등장에 긴장한 눈치였다.

“그러면 렌 군은? 저분하고 뒤바뀌었다면 혹시……?”

포르테의 박력에 심장을 졸인 유네가 더듬더듬 말했다. 안타깝게도 유네의 추측이 추측으로만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막 샤워를 마친 모양새의 사람과 뒤바뀐 거라면 렌이 무슨 꼴일지는 상상조차 끔찍하다. 머리를 싸맨 류제가 무언으로 절규했다.

그들의 걱정대로 대대장이 사용하던 샤워실에서 돌연 나타난 재경은 때아닌 몰매를 맞았다. 하필이면 대원들이 씻고 있던 샤워실이 뭔가. 렌 지미가 늘 그렇지만 운도 지지리도 없다.

“히이익! 살려주세요!”

고작해야 삼류 악당이 하는 일이 술술 풀릴 리가 없지. 나도 바보다.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이 그런 꼴로 나타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이런 걸 왜 예상 못 한 거야? 환호 소리에 정신이 팔려서는. 나 바보! 신재경, 이 멍청이!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넌 누구냐? 어떻게 침입했지? 대대장님을 어떻게 한 것이냐?”

“그…그게…그……!”

“한심하게 더듬지 마라. 그 교복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교복인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해.”

호세마타 요새 안, 샤워실에 난데없이 나타난 재경은 타월만 두른 부대원들의 살기 어린 태도에 기도 펴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도착했다 싶더니 한순간에 구석까지 몰려서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서지도 못했다.

상상해 보라. 주변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몸뚱이가 저만치 날아가서 얼음 창으로 겨냥되는 심정을. 그녀들이 알몸에 두른 수건은 눈에 뵈지도 않을 만큼 무서워 죽겠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슈만 중위. 아직 어린아이인 것 같은데. 딱 봐도 알라마니의 그 해괴한 할아범이 또 장난질을 친 것 아니겠습니까. 자, 꼬마야, 그만 떨어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할 수 있니?”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다니. 제립학교 수준도 많이 낮아졌군. 평화에 찌든 한심이들.”

슈만 중위라고 불린 여자가 콧방귀를 뀌며 얼음으로 만든 창을 거두었다. 재경을 저 말을 듣고 화날 기분도 나지 않았다.

못마땅해하는 슈만 중위와 같은 계급으로 보이는 착해 보이는 군인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걸 잡고 간신히 일어서는 재경을 슈만 중위가 예의 주시했다. 그 눈빛 속에서 아수라가 보이는 것 같다.

그런 그녀의 뒤로 더 어리고 짐승 귀가 달린 여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외부 남자 보니까 좋잖습니까. 파릇파릇하니 귀엽습니다.”

“아로즈네그! 그 꼬라지로 미성년자에게 발정하냐? 감히 백장미 부대에서 그따위 발언을 해? 미쳤냐? 늑대 수인이라고 정신까지 짐승이 되어서는 남자라면 아주 좋다고 덤벼들지? 우리 부대가 만만하냐?”

“아…아닙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그런 사실 없으면 군 생활 끝나냐? 이 새끼, 훈련 잘한다고 봐줬더니 빠졌냐? 니 위로 내 밑으로 다 집합해 볼래?”

“아닙니다. 그런 사실 없습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고 죽일 것 같은 분위기에 재경의 눈동자가 오갈 곳을 잃었다. 여긴 진짜 군부대였다.

슈만 중위는 말이 헛나온 늑대 귀 군인을 시원하게 걷어차 주고는 재경의 뒷덜미를 붙잡고 탈의실 밖으로 나섰다.

대롱대롱 매달린 재경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암만 제 기분에 거슬리면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거는 재경이지만 상대도 안 될 사람에게는 가만히 입을 닫는 미덕은 있었다. 아무리 키가 콩만 해도 60kg은 되는 재경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드는 군인을 재경이 이겨먹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건 말 안 해도 뻔했다.

답지 않게 가만히 있는 재경에게 슈만 중위가 차갑게 말했다.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답은 예, 아니오로만 한다. 알았나?”

“어어… 네…네!”

“한 번만 더 덜떨어진 병신 새끼처럼 어버버거리면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던져버릴 줄 알아라.”

“넵!”

“소속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가 맞나?”

“넵!”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보냈나?”

“넵!”

“그 빌어먹을 할아범이 이상한 기계를 자랑하더냐?”

“넵!!”

“들라크루아 중령님…은 네가 알 수 없겠군. 귀찮은 애새끼들.”

혀를 차는 그녀는 다른 히로인과 비교할 수 없는 야생 표범 같은 오라를 뿜어냈다.

미연시 세계이니 헬렐레하니 대충 흉내만 내겠거니 했는데 군인은 다르구나. 후회감이 물씬 든 재경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냐며 시무룩한 얼굴을 숨겼다.

열심히 대답한 재경을 무시한 그녀는 손목에 찬 슬렉터(군용이다. 엄연히 학생용 슬렉터와 다르게 생겼다.)로 오늘 자 암구호를 입력하고 재경과 위치가 뒤바뀐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까지도 재경은 고양이처럼 목덜미가 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알았다. 데리고 알라마니 기술관까지 와다오. 제립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온 것 같아. 너무 뭐라 하지는 말게. 그의 잘못도 아니거니와 군 소속도 아니잖나. 그래, 수고해라.”

호세마타 요새에 있는 네네 슈만 중위의 FM 같은 보고를 들은 백장미 기간트리카 특공대대 대대장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종료했다.

탈의실에 텔레포트된 피해자 꼬마 하나를 뭐 그리 호되게 혼낸다고 난리인지. 잘못이라면 저 망할 영감탱이가 했지.

발밑에 깔린 헤이하치 머리 하나를 꾸욱 즈려밟은 그녀가 저를 턱이 빠져라 구경하는 학생들에게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소개하마. 나는 호세마타 요새를 지키는 키아나트리체 제22 기간트리카 특공대대,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이다. 계급은 중령, 이름은 포르테 들라크루아. 내 이름은 5.22 토벌 작전으로 많이들 들어봤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아가리에 똥 처넣는 기분으로 자라나는 새싹과 마주할 생각은 리엔달로니아 협곡에 미끄러져서 죽을 만큼도 없었지만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이 가장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알려 주지.”

옷을 새롭게 갈아입은 그녀가 군인처럼 서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많은 여학생들의 롤 모델이자 기간트리카를 조종하는 어빌리터라면 존경하지 않고는 못 배길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어빌리티 척도 88을 자랑하는 괴물이며 최전방 호세마타 요새를 총괄 책임지는 백장미 부대의 대대장이었다.

살아있는 전설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그녀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존경의 눈빛이 광선처럼 나올 것 같았다.

나만 밑에 밟힌 관장님이 신경 쓰이는 건가. 류제는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를 굴려 관장을 걱정스레 살폈다.

“내게 궁금했던 것이 있으면 물어라. 답할 수 있는 것은 답해 주마.”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차마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는 위압감이 있었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학생들은 조용히 누군가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

바로 물음이 나오지 않자 못마땅해진 그녀는 뒷사람에게 등이 떠밀린 푸른색 머리 학생이 조용히 손을 든 것을 발견했다.

“어… 그…그게… 그러…니까… 18세에 학교를 졸업하셨…다는 게…….”

“맞다. 키아나트리체가 한창 마족 토벌에 박차를 가할 때였지. 훈련 과정 없이 곧바로 소위를 달고 전장에 나갔다. 다음 질문.”

그녀가 제립학교 2학년 때 월반해서 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학생들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큰 감탄사를 흘렸다.

이번에도 뒷사람이 대신 물어보라고 유네에게 치근덕거렸다. 싫다. 유네는 조마조마해서 뒤를 힐끗거렸다. 그곳엔 유네의 조원들이 앉아있었다.

나서기 싫어하는 유네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자 류제가 하지 말라 말하려고 할 때 포르테가 혀를 찼다.

“너, 그 뒤. 질문할 줄 모르나? 그렇다면 여기서 나가라. 머저리는 취급 안 한다.”

그 말에 유네를 괴롭힐 목적 반, 나서기 싫어서 시켜 먹으려던 목적 반이었던 유네네 조원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들은 우물쭈물 입만 달싹거리다가 괜히 모르는 척했다.

“시간을 낭비했군. 다음 질문 없나?”

“5.22 토벌 때 어떤 마족들을 만나셨나요?”

질문을 한 것은 비키였다. 포르테는 익숙한 얼굴과 머리 색을 보면서도 표정이 차가웠다. 비키 셀로니아군. 벌써 저렇게 자랐나.

토벌 이야기에 그녀는 과거, 그녀가 소령 자리에 있을 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마족들에 맞서기 위해 소수 정예로 활동하며 그녀 혼자서 25개의 마족의 핵을 파괴했다.

“그 뿔 달린 괴물들은 날개로 손쉽게 리엔달로니아 협곡을 건너왔지. 가장 기억에 남는 마족은 병마 페스트라는 족속들이다. 그것들은 마을에 독 마법을 풀어 인간들을 산 채로 썩게 했다. 그게 진미라고 하더군. 이해할 수 없겠지만.”

“으윽…….”

“뭐,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한낱 식사거리니. 내 동료도 눈앞에서 구울이 되었다. 아비규환이었지. 토벌이 끝나도 끝난 게 아니었던지라 나는 사망자들을 모아서 불로 태웠다. 독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안 되니까. 사흘 밤낮으로 불이 붙더군. 다음 마을로 가도 똑같았다. 고작 둘뿐인 마족에게 우리는 한 중대가 덤벼들었다. 전투 한 번에 세 명은 죽어나갔어.”

학교를 졸업한 후 계속 군에 있다 보니 학생을 상대하는 것에 서툴렀던 포르테는 수위 조절에 실패해 분위기를 차갑게 가라앉혀 버렸다.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건 아니지만 상상보다 더 어두운 이야기에 학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비키는 어릴 적 이후 처음 보는 그녀가 생소해서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고 가만히 손을 내렸다. 학생들이 소심하다고 착각한 포르테는 참 패기가 없다며 혀를 찼다.

“최전방에 있었으니 상대하는 놈들도 등급이 높은 마족이었다. 너희 정도 나이에는 웬만해서는 전방에 보내지 않으니 벌써부터 겁먹지 마라. 다른 질문 있나.”

상태를 보아하니 이제 더 이상 질문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뭐, 이 정도면 되겠지. 그녀는 시간을 보더니 군에 있을 때의 버릇처럼 뒷짐을 졌다.

“없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 너희들이 이 알라마니 기술관에 온 이유는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보기 위해서라고 들었다. 맞나, 세라 밀로니 중위?”

“예. 맞습니다. 그… 중령님, 학생들 앞에서는 선생님이라 불러주―”

“내 말에 토 달지 마라, 중위. 잘 들어라, 갓 걸음마를 뗀 병아리들아. 충고 하나 해두지. 어빌리티를 가진 군인에게는 여러 금기가 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말해주겠다. 첫째,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고 그게 마족과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라 쥐똥만큼도 생각하지 마라. 둘째, 척도가 높다고 어빌리티만 믿고 까불지 마라. 너희가 쓰는 그 능력을 적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상. 군에 들어갈 사람들은 이 말을 유념해서 듣도록. 마족의 변덕은 상황이 닥쳐도 모르거든.”

늘 목숨을 거는 최전방의 특공대대고 독립대대의 대대장인 만큼 권력도 어마어마한지라 수도를 방어하는 연대장도 수그리고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는데 오늘 그녀를 보자면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학생용 기간트리카와 군용 기간트리카의 차이점부터 설명해 주지. 알고 있더라도 다물고 들어라.”

“네!”

“흥, 우렁찬 대답이구나. 이것도 두 가지만 말해주마.”

밟고 있던 관장의 머리에서 발을 치운 포르테가 슬렉터를 이용해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여기엔 없지만 재경의 말을 빌려보면 모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나노 슈트가 착용되는 것처럼 기간트리카가 그녀의 온몸을 덮으며 장갑되었다.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는 장면을 처음 보는 학생들의 감탄사를 흘려들은 그녀는 손가락까지 덮쳐오는 슈트를 접었다 피며 관절의 상태를 살폈다.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첫째, 군용 기간트리카는 번거롭게 장갑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슬렉터의 트리거가 목소리가 아닌 내 어빌리티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이걸 터득하려면 범인은 시간이 꽤나 걸리지만 센스가 있다면 1분도 걸리지 않을 거다. 그리고 둘째.”

눈앞에 생성된 고글을 비롯해 턱과 머리끝까지 슈트로 가려진 그녀가 손가락으로 2를 만들었다.

“가장 최소한의 외골격과 부스터로 구성된 학생용과 다르게 군용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보호된다. 왜인지 아나?”

“정신계 마법을 쓰는 마족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맞다. 똑똑하군, 비키 셀로니아.”

하도 차갑게 굴어서 제 이름마저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포르테가 이름을 언급하며 칭찬하자 비키가 입이 찢어져라 기뻐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설명을 계속했다.

“헬멧 HUD에는 소대원 위치 정보와 주변 지도, 타기팅된 마족의 위치 정보가 출력된다. 마족이 혼동 마법을 걸어도 피아식별을 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이건 운영체제의 버전이 달라서라고 치면, 군용의 미세한 움직임 조정이나 정신, 신체 프로텍트 성능은 학생용과 비교 불가지. 말로 설명해서는 모르겠지. 영감탱이, 가서 군용 슬렉터 하나만 가져와 봐.”

“그럼, 그럼. 포르테의 부탁인데 줘야지.”

“설마 중령님께서 손수 시범을 보일 예정이십니까?”

“물론. 여기에 어빌리티 척도가 99를 넘긴 학생이 있다 들었다. 제립학교 1학년 8반, 세라 밀로니 중위의 반에. 얼마큼 대단한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거절은 하지 말게.”

“그렇다면 포르테. 내 다른 장소를 빌려주지.”

아까까지 밟히고 있던 머리를 툭툭 턴 기술관 관장이 철없게 웃었다. 포르테마저 류제를 겨냥하자 실망한 비키가 질투가 섞인 눈으로 류제를 흘겼다.

최신 군용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보는 것은 비키가 수학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걸 류제에게 빼앗긴 데다가 포르테의 관심까지 가져가 버리다니. 류제와 있으면 상대적으로 평범해져 버리는 비키는 분해서 주먹이 떨렸다.

포르테를 따라 자리를 이동하는 류제는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그보다 호세마타 요새까지 가버린 렌이 더 걱정이었다. 어떻게 데리고 올지는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부대원 중 한 명이 기간트리카로 데리고 오지 않을까. 렌의 고소공포증을 그 사람들이 고려해 줄 거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기간트리카 대결을 위한 장을 안내받은 학생들은 세라의 지시에 따라 안전한 곳에서 대기했다. 대결장을 확인하던 포르테가 만족했는지 학생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오거라 류제 신리. 네 실력을 확인해 봐야겠다.”

남학생 교복을 입은 사람은 둘이지만 포르테의 눈은 정확히 류제를 향해 있었다. 류제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허우대 멀쩡한 놈이군. 하나 묻겠다. 너는 학교를 졸업하면 군인이 될 건가?”

“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왜지? 어빌리터니까 군에 들어가겠다는 의미인가?”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그녀가 류제의 권태 담긴 표정을 흘기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어디서든 저런 안일한 마음가짐을 가졌던 자들을 많이 봐왔다. 출중한 능력과 상관없이 전부 마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하고 자리에 서라.”

관장이 채워주는 군용 슬렉터를 만지작거리던 류제는 성가시다는 듯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그녀가 했던 대로 무언 장갑을 해냈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라. 그녀가 류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특별함에 심취해 있을 저 나이대의 아이들을 도발하는 방법은 쉽다.

“제자리 준비.”

심판은 세라 밀로니였다. 계급이 낮은 게 죄지. 울상이 된 그녀는 별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제아무리 포르테 들라크루아라도 학생을 상대로 진심으로 붙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승부 시작!”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번개처럼 사라진 그녀는 순식간에 류제를 반대편으로 꼬라박았다.

대결을 구경하던 모든 학생들은 암만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전설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반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류제를 눈 깜짝할 새에 벽에 처박자 놀라 숨 쉬는 것도 잊었다. 류제가 저렇게 힘없이 날아갈 정도로 약할 리가 없다는 건 한 달간 류제와 대결해 온 그녀들도 잘 알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99 이상의 척도가―세계를 한번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어빌리터라면 모를 리 없었다.

“고작 이 정도군.”

비틀거리며 자리에 다시 선 류제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뭐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어빌리티야?

일단 ‘강화’하자. 실수했어. 공격에 당한 건 방심해서 그래. 이 기간트리카도 조금 익숙해졌으니 다음엔 반드시 승기를 잡는다.

포르테의 의도대로 한 대 맞은 걸로는 포기하지 않은 류제의 승부욕이 엔진처럼 달아올랐다. 자신이 이만큼 아무것도 못 한 것이 처음이라 몰려드는 치욕감이 윤활제 역할을 했다.

거만한 눈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포르테에게 류제가 빠른 속도로 덤벼들었다. 류제가 신체 능력을 강화하고 내는 저 속도는 기간트리카를 조종하는 데에 능숙한 비키조차도 반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포르테는 그 역시 간소한 움직임으로 피하고 그대로 그의 등허리를 차서 바닥에 메다꽂았다.

순식간에 고꾸라져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크레이터를 만든 류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프로텍터가 반응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충격에 고글에 이상이 생겨 시야가 지직거렸다.

눈이 따라가지 못하는 게 문제인가? 그가 다시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섰다.

이번에 류제는 동체 시력을 극한까지 강화했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이는 시야는 제 몸이 답답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류제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그러나 그가 따라잡았다고 판단한 순간 이번엔 머리를 붙잡혔다. 동시에 류제는 폭발하는 뭔가가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걸 느꼈고, 정신을 차리니 또다시 반대편에 데구루루 굴러 처박혔다는 것만 알았다.

류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잡았는데! 움직임을 포착했단 말야. 그런데 왜 내가 이 꼴인 거지?

기간트리카의 외골격과 프로텍터 덕분에 귀가 윙윙거릴지언정 상처는 없던 류제는 어느 순간 사라진 포르테의 기척을 찾았다. 또 당할쏘냐. 몸을 일으킨 그는 온몸에 있는 감각을 강화했다.

포르테를 발견한 류제가 주먹을 내질렀지만 고개를 틀어 피한 포르테에게서 돌아온 공격은 장갑을 부분적으로 해제한 손가락으로 내는 마찰 소리였다.

“악!”

류제는 귀청이 터질 것 같은 소리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았다. 감각을 강화한 탓에 청각마저 과도하게 예민해져 있던 탓이었다.

“힘에서 밀리면 힘을 ‘강화’하면 되고, 눈이 안 따라주면 시야를 ‘강화’하면 되고, 기척을 못 느끼면 감각을 ‘강화’하면 되나? 재미있구나.”

얼얼한 귀를 막은 류제의 한심한 공격을 그녀는 여유롭게 피했다.

“이게 척도 99 이상의 어빌리티라니. 아니, 어빌리티에는 문제가 없지. 날 보거라, 꼬마야. 주변에서 떠받들어 주니까 뭐라도 된 줄 알았나? 나도 저 병아리들 같을 줄 알았어? 그래서 감히 나를 보며 귀찮아했나? 폄하당한 내가 불쌍하군.”

그녀가 류제를 걷어찼다.

“왜 ‘학생용’ 기간트리카가 따로 있는 줄 아나. 아무리 서로 공격을 해도 그만큼 너희들이 덜 위협적이라는 거다. 군용과 학생용의 정말 큰 차이는 기동력도, 시스템 차이도 아냐. 방어력이다. 공격을 최대한도로 방어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말이지.”

그녀가 본보기라는 듯이 보이지 않는 공기를 압축해 류제의 배 근처에서 단번에 터뜨렸다. 소형 폭탄을 맞은 것처럼 류제는 강화된 감각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여기까지 말했으면 내가 왜 군용 슬렉터를 달라 했는지 눈치챘겠지. 기껏 나를 뛰어넘는 인재가 나왔는데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다가 다치면 곤란하거든.”

그녀는 일어서려고 하는 류제의 머리통을 강하게 밟았다.

세라가 안 된다고 비명을 질렀다. 암만 기간트리카로 보호되고 있다지만 그녀의 대련은 정도가 심하다. 저 아이는 아직 학생이다. 들라크루아 중령은 왜 고작 1학년 학생들이 알기엔 이른 말을 꺼내는 거지?

“왜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는가. 군에 소속되려는 이유가 뭐지? 나라에서 시켜서? 막연히 마족들과 싸운다는 의무만 떠오르나? 너희는 이 기계의 무게를 모른다. 무지해도 너무 무지해. 그 무지는 너를 서서히 망가뜨릴 거다.”

속으로 세라가 묻는 질문에 답하듯 포르테가 꾸역꾸역 일어서려고 하는 류제에게 물었다. 싸우는 태도에서부터 그녀는 어빌리티와 기간트리카를 대하는 류제의 안일한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자신의 발을 잡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류제를 걷어차 저 멀리 구르게 만들었다.

“콜록, 헉.”

젠장, 공격 하나하나가 너무 아파!

기간트리카를 넘어서 느껴지는 고통에 류제는 만일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았으면 첫 공격에서 탈이 났을 거라 확신했다. 장갑하지 않아도 어빌리티로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던 친구들과의 대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니까, 기간트리카나 어빌리티가 있으니까. 그러면 마족에게서 안전해지나? 그깟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못 해. 제 몸뚱아리에 사지 멀쩡하게 붙어있게 하는 게 고작이겠지. 소중한 사람도, 네 가족도, 친우도, 마족들에게 유린당하는 꼴을 보며.”

경험담을 말하는 그녀가 호통으로 경기장 내부를 울렸다.

그녀는 류제와의 대결이 실망스러워서 어이가 없었다. 대등함을 바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볼품없을 줄은 몰랐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네게는 그 처절함이 있느냐? 내가 한 이야기를 듣기나 했냔 말이다. 내 공격을 받아낼 때도 난 네게서 오만함을 느낀다. 능력의 오만함에 겨워서 제 능력이 뭔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애송아. 쓰는 사람이 네까짓 것이라니 네 어빌리티가 불쌍하군.”

오만? 뭘 안다고 멋대로 떠들어대지? 류제는 자만하는 포르테의 열받는 대사를 곱씹으며 어떻게든 그녀의 어빌리티가 뭔지, 공격 방식이 뭔지 알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들을수록 화가 나는 그녀의 말 때문에라도 한 방 먹이고 싶어 죽겠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강화를 하더라도 그녀는 허점을 노리고 공격해 왔다.

이게 노련함인가. 한 대 맞을 때마다 정신이 아찔하다.

“내가 마족보다 월등히 강할 것 같나? 내가 마족이었으면 너는 네 손으로 소중한 사람을 해치는 몰골이 되었겠지. 거기서 구경하는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수적으로 우세해? 능력이 많아? 마족이 그런 상식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나? 그런 정신머리로는 바닥에 처박혀 피눈물만 흘려라. 그러기 싫다면 군인이 되기 전까지 왜 싸우는지,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지 깨닫는 게 좋아.”

무엇을 위해 싸우냐고? 어빌리티가 발현해서 처음 아가타로 왔을 때 류제는 막연하게 마족을 쓰러뜨리기 위해 싸운다고만 생각했다.

햇병아리? 그야 당연하지. 나는 기간트리카를 다룬 지 고작 한 달도 되지 않았다고!

노력? 나도 열심히 배우고 있어. 마족을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그놈들이 어떤 공격을 하는지 어떻게 아냔 말야!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마족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게 지금 네놈들의 마음가짐이다. 상황에 닥쳐서야 후회하지. 조금만 더 강했으면, 조금만 더 가까이 손을 뻗었으면, 조금만 더 연습했으면. 주어진 힘을 다루지도 못하는 병신들이 뭘 후회하고 있나? 적은 이미 네 가장 소중한 것을 죽이고도 남았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소름 끼치게 웃는 새끼들, 그게 마족이다.”

주먹을 꽉 쥔 류제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후회하고 있었다. 어빌리티는 분명 포르테보다 그가 우위에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밀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경험의 차이? 능력의 차이? 그렇지만 이대로 학교를 졸업해서 그녀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녀만큼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느냐고 묻는다면 류제는 그렇다고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지금의 포르테보다 더 강하다는 마족들과 붙어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럼 뭐가 이런 차이를 만드는 걸까.

“근성을 가지고 덤벼라. 온몸으로 부딪혀 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객관적인 정보만 판단해라. 지킬 수 없다면 버려. 버려야 할 것은 냉철하게 쳐내. 너의 어빌리티를 정확히 알아라. 강점, 약점,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 건 네 소중한 것이 될 거다!”

기합을 넣은 류제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덤벼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방만, 한 방만 맞아라. 그렇게 염원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손짓 하나만으로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런 필사적인 마음이 없다면 너는 언젠가 반드시 후회할 거다. 나는 그런 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지금까지 내 공격을 제대로 봤으면 이미 내 어빌리티가 뭔지 알았겠지. 심적으로 몰리니 아무것도 안 보였나?”

류제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자 그녀가 손을 들어 대결을 종료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라가 허둥지둥 달려와서 포르테 들라크루아에게 몇 번이고 나가떨어진 류제의 상태를 살폈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군용 기간트리카가 부분부분 망가져서 류제의 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분하나? 내가 너무하다 여기지 말아라. 마족과 마주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한번 예방접종이라도 맞았다 생각해. 적어도 나는 너를 죽일 마음이 없지 않느냐.”

머리 부분만 장갑을 해제시킨 포르테는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류제와 그를 치료하는 세라를 향해 냉정한 시선을 보냈다.

“그런 점에서는 비키 셀로니아가 너보다 더 필사적일 테지. 그 애는 마족의 무서움을 잘 알거든. 영감탱이, 셀로니아가의 여식에게도 군용 슬렉터를 줘.”

류제는 분한 듯이 이를 악물었다.

단 한 대도 닿지 못했다. 공격이 먹히긴커녕 기간트리카조차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내 어빌리티의 약점까지 파고들어 완전히 날 가지고 놀았어.

류제는 믿을 수 없었다. 어빌리티가 개화하고 나서 처음 맛보는 패배감이 너무나 굴욕적이었다.

그만큼 저 포르테 들라크루아라는 인간이 수라장을 건너왔다는 것이지만 이 무력감이 류제는 너무 분했다.

류제는 세라의 손길에 따라 비틀비틀 자리를 벗어났다. 필사? 근성? 잘 모르겠다. 하지만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했던 말이 류제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후회한다는 말. 그게 정말 현실로 나타날 것 같아 어린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한편, 재경을 허리에 낀 채 호세마타 요새에서부터 알라마니 기술관까지 기간트리카로 족히 30분 가까이 날아온 네네 슈만 중위는 300m 상공에서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며 한참 버둥거리다가 추욱 늘어진 재경을 신경 쓰지 않으며 목적지에 당도했다.

“대대장님은 어디 계시지?”

건물 상층부에 있는 테라스에 착지한 그녀가 신호를 받고 기다리던 연구원에게 물었다. 옆구리에는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재경을 끼고 있는 채다.

그녀는 상관이 학생들과 가벼운 대결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왜 시간을 낭비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녀가 포르테가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한창 비키와 포르테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제 어빌리티만 믿고 돌진하는 류제와는 다르게 상대하고 있는 자가 정말 마족이라도 되는 양 비키는 똑똑하게 움직였다.

류제는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들라크루아 중령의 어빌리티는 ‘기압’이다. 주변에 있는 공기의 일정 부분의 압력을 조절하여 공격과 방어를 한다.

반대로 비키의 어빌리티는 ‘화염’이다. 공기와 불의 대결이라 한다면 압도적으로 포르테가 불리해 보인다. 포르테는 주변 공기의 압력을 조절하는 거지 그 안에 있는 어떤 특수한 기체만 조절하지는 못하니 말이다.

그러나 상성이 불리함에도 들라크루아 중령은 불의 약점을 어떻게든 파고들어 비키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그게 류제만큼 비키가 밀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류제는 은연중에 자신이 비키보다 더 강하다고 믿고 있었다. 최근 비키와 붙었을 때 승률이 반반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알았지만 비키가 제 실력을 찾아가고 있다고만 생각했지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는 몰랐다.

비키는 계속해서 나를 분석하고, 이길 방법을 찾고 있었구나. 자신의 원수인 마족들과 보다 현명하게 싸우기 위해서.

모범생처럼 학교에서 하라는 것만 했던 류제는 비키에게 점점 뒤처지는 이유를 알고 뒤늦게 라이벌 의식이 불타올랐다.

“들라크루아 중령님.”

“슈만 중위, 금방 왔군. 여기까지 하지.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백장미 부대에서 사람이 오자 손을 들어 대결 중단을 선언한 포르테가 장갑을 해제하고 비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마족에게 일족이 멸족하는 슬픔을 알기에, 그 괴물들이 얼마나 악하고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이리 필사적이다.

요즘 제립학교 학생들을 보며 모든 장교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평화에 찌든 반푼이들.

시대를 알기에 포르테는 그 의견에 반절 정도 동의했다. 대부분의 마족들이 나라카국으로 도망친 이후 평화는 계속되고 있지만 마족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부활을 꿈꾸며 뱀이 땅속에 또아리를 틀 듯 숨어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간신히 얻어진 평화가 지속될 줄만 알고 안일한 태도로 기간트리카를 배우는 것은 인류에게 독만 될 것이다. 최근 나라카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자주 받은 포르테는 그걸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일부러 류제를 독하게 자극한 것이다.

저 아이는 좋으나 싫으나 그녀와 같은 운명을 걸어야 할 테니까.

“다음번엔 지지 않을 겁니다.”

“좋은 성장을 기대하마.”

지나치는 포르테에게 류제가 눈을 빛냈다. 투지, 분노, 성장. 딴 곳에 빠져 있던 생각이 알맞게 들어갔다. 귀찮아했던 아까보다는 눈빛이 좋아졌다.

그녀가 짧게 웃으며 류제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재경을 허리에 낀 네네 슈만에게로 향했다. 포르테는 네네 슈만이 쇼핑백처럼 들고 있는 어린애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 애가 나와 뒤바뀐 꼬마인가? 내가 이런 얄팍한 놈과 비슷해? 조금 열받는군.”

“저 영감쟁이가 만든 기기는 기간트리카 말고는 제대로 된 게 없지 않습니까. 또 알 수 없는 오차범위 탓이겠죠. 저 빌어먹을 기계를 반드시 폭발시켜 버리겠습니다.”

포르테의 뒤를 따르던 슈만 중위가 적당히 힘 좋게 생긴 류제를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류제가 다가가자 그녀는 기절한 재경을 류제에게 떠넘겼다.

“네 친구는 참으로 나약한 놈이군.”

포르테처럼 날 선 눈을 한 슈만 중위는 무덤덤하게 류제를 흘기고 자리를 떠났다. 류제는 고생했을 렌을 공주님처럼 안고 멀뚱히 섰다.

걸음을 걷던 네네 슈만은 기절한 렌을 향해 뛰어가는 세라 밀로니를 발견하고 차갑게 조소했다.

“어디서 저런 한심한 놈들이 나오나 했더니 네 손에서였구나, 무능한 세라 밀로니.”

“네네 슈만.”

세라는 소중한 학생이 당하기만 하는 것을 눈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한심함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네네. 백장미 부대로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여기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추하고 분하다.

“성가시게 하는 것도 가지가지군.”

분에 겨워하는 세라를 네네는 비웃듯이 지나쳐갔다.

“…만나서 반가웠소, 들라크루아 중령.”

차분한 음색이 포르테의 귓가에 들렸다. 호세마타 요새에 돌아가기 전 포르테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사람은 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였다.

황제의 여식. 나라의 높으신 분의 외동딸이다. 그러나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그녀를 보면서도 허리를 숙이지도, 일말의 동요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왕녀를 지키고 있던 친위대장 루이나 알로이드가 바람처럼 등장해서 건방지다 말하며 예의 발도를 했다.

그마저도 네네 슈만이 손바닥 하나로 칼자루 끝 칼 머리를 누르는 바람에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암만 손이 떨릴 정도로 강한 힘을 줘 칼을 뽑으려 해도 해도 검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네 슈만은 주제도 모르고 덤벼드는 애송이를 차갑게 흘겼다. 루이나 알로이드가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그 대치 상황 속에서 포르테는 덤덤히 인사했다.

“오랜만이오, 왕녀. 감히 내게 고개를 숙이라 하지는 않겠지.”

“무엄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내가 고개 숙여 모시는 것은 이 나라의 황제이지 그 딸이 아냐. 흉내나 내는 한심한 것.”

그녀는 루이나와 왕녀를 차례로 지나쳐 걸어갔다. 왕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그들의 그림자를 좇았다. 인류의 영웅이라고 하지만 아바마마의 말(馬)인 포르테 들라크루아는 언제 마주해도 거북스럽다. 니냐롯트는 도도하게 반대편으로 향했다.

네네 슈만도 애새끼의 장난질에 제대로 응할 생각이 없었는지 루이나의 검에서 손을 떼고 대대장을 따라갔다.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습니다!”

루이나는 자신의 주인을 모욕하는 그녀들에게 분개했다. 왕녀는 말없이 옆에 서주는 것으로 루이나를 위로했다.

시원하게 왕녀를 제친 포르테는 어느새 관장을 따라 테라스에 다 같이 모여있는 학생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고했다.

“저 망할 영감쟁이 덕에 너희들이 어떤 생각 머리로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왔는지 알겠구나. 나도 좋은 경험이었어. 너희들도 재미없는 어른의 강요라고만 여기지 말고 내가 한 말을 부디 기억해 다오. 이 뜻을 이해하고 너희 중 누군가라도 백장미 부대에서 봤으면 좋겠구나.”

“백장미 부대는 여성 어빌리터로만 이루어진 게 아닙니까?”

렌을 세라에게 맡겨두고 마지막으로 달려온 류제가 질문했다. 가소롭다는 듯이 폭소한 포르테가 류제를 눈에 담았다.

기특하지 않은가. 그만큼 당했지만 제 자존심을 이겨내고 백장미 부대에 들어가고 싶다 말하는 의지만큼은 박수 쳐줄 만하다.

“하찮은 조건을 붙이지 마라. 우리 부대에 들어오고 싶으면 실력을 인정받으면 된다. 마족을 멸하고 사람을 지킨다. 키아나트리체를 위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군인. 제립학교를 졸업하면 학생들 90% 이상 군에 소속된다. 6개월간의 훈련 끝에 소위로 임명되고 부대에 편입된다. 군에 들어가지 않으면 제립학교나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직, 혹은 왕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게 학교를 졸업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미래일 것이다.

“잘 있거라.”

포르테 들라크루아가 테라스에 올라가 제자리에 서더니 스쿠버다이빙으로 잠수하듯 밑으로 뛰어내렸다.

네네 슈만도 그 뒤를 따랐고 곧 아래서부터 귀에 익은 부스터 소리가 들리더니 저 멀리서 그녀들이 호세마타 요새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류제는 떠나가는 그녀들에게서 느끼는 바가 있는지 차분하게 배웅했다.

모든 사람이 백장미 부대의 손님을 배웅하는 데 한눈을 팔았을 때 알라마니 기술관 관장과 눈을 마주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몽마(夢魔)이자 업마(業魔) 서큐버스의 왕. 마족의 이름 플로냐 라미아 놀레이트. 정신이 아득한 미소를 띤 그녀는 두꺼운 안경 안에 있는 관장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관장은 뇌를 침범하는 듯한 서큐버스의 유혹에 얼이 빠진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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