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3) (103/112)

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3)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몬 재경이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 동안 유네와의 힌트 이벤트를 날림으로 진행한 류제는 누구보다 빠르게 텔다산 전망대에 도착했다.

손에 짐들과 사람 하나를 매달고 테라스형 카페테리아에 착지한 류제를 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며 웅성거렸다. 인간을 초월한 움직임은 류제의 교복과 함께 큰 화젯거리를 남겼다.

저것 봐. 저 교복.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학생이야. 저 남자애는 분명 어빌리터다. 라는 말이 귓가에 스쳤지만 류제는 늘 그렇듯 안중에 없는 사람의 일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네, 도착했는데.”

“으으… 잠깐만 기다려줘…….”

전망대로 오는 내내 류제의 팔이라는 안전띠 하나만 두른 채 별 다섯 개짜리 놀이 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던 유네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땅이 빙글빙글 돌고 있어 렌 군~

“멀미에 약하구나.”

“류제 군이 대단한 거야.”

여기까지 펄쩍펄쩍 뛰어왔으면서 멀쩡할 수 있다니. 유네가 자신의 유약함과 류제의 태연함이 비교되어서 더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제는 어서 이 짐들을 처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네 조원들은 어디 있어?”

“저기에 있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네가 조원들이 차지하고 있던 테이블을 가리켰다. 유네가 전망대를 떠난 지 시간이 꽤 흘렀던지라 그곳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 펠노아 시의 전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유네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 애들, 날 버리고 도망갔구나.

주변을 둘러보던 류제가 빈 테이블에 유네의 짐을 올려두었다.

“화장실 갔나?”

“아닐 거라고 생각해.”

걔네들이 날 괴롭히려고 이런 짓을 시켰을 때 거부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시키는 대로만 하다가 또 당했다. 유네는 미들 스쿨 때 기억이 떠올라서 더 우울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곁에 류제가 있다는 정도였다.

그래도 렌에게 염치가 없어서 유네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거기다 룸메이트에게까지 이런 추한 꼴을 보이다니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아닐 거라니? 설마.”

“응… 하아. 이거 어쩌지.”

많은 짐들 중에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투를 든 유네가 깊게 한숨지었다. 같이 먹으려고 사 온 4개나 되는 아이스크림이 끈적끈적하게 녹으려고 하고 있었다.

사 오라고 했던 과자나, 기념품이나, 한정된 시간에만 파는 길거리 음식들이 주인을 잃은 채 식어간다. 과자나 음식은 다른 사람과 먹을 수 있지만 힘들게 사 온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그대로 끝 아닌가.

묵묵히 보던 류제가 봉투 안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꺼냈다.

“류제… 군?”

“지쳤지? 빨리 먹고 내려가자.”

“하지만 렌 군이 기다릴 텐데.”

“넌 잔심부름한다고 전망대 구경도 못 했을 거 아냐. 오 분만 쉬었다 가자. 나머지는 이따가 렌하고 같이 먹으면 돼. 펠노아의 전경에 대해서 말해주면 렌도 좋아할 거야. 그럼 되지?”

류제도 어느 정도 눈치는 있어서 유네네 조원들이 유네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렌을 위한답시고 유네의 마음을 무시한 채 이대로 내려가 버리면 유네는 상당히 비참할 거다. 친구들하고 잘 놀려고 수학여행 왔는데 이런 취급을 받으면 나라도 끔찍할 거야.

“그리고 렌은 숙소로 잘 돌아간 거 봤으니까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건물 사이를 뛰어가다 스치듯이 본 것이지만.

“정말? 다행이다. 나 때문에 괜히 힘들게 돌아가고. 지금쯤 치료 잘 받고 있겠지?”

유네가 안도하며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미끌미끌한 슬렉터와 까끌까끌한 팔찌가 같이 만져져야 하는데 감각이 미묘하게 비었다. 물음표를 띄운 유네가 제 왼쪽 손목을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있었던 팔찌가 보이지 않았다.

어라? 당황한 유네가 미어캣처럼 고개가 경직되어 땅을 살폈다.

“왜 그래?”

아이스크림 두 개 중 하나는 자신이 입에 물고 하나는 유네에게 건네던 류제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유네에게 물었다. 유네가 난감한 듯 주변을 뒤졌다.

“렌 군이 준 소원 팔찌가 안 보여. 어디 떨어졌나 봐.”

“뭐?”

아이스크림을 햄스터처럼 작은 혀로 할짝거리는 유네가 울먹거렸다. 찾아봐도 소원 팔찌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렌에게 처음 받은 선물이라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던 그녀는 그걸 하루 만에 잃어버린 자신을 칠푼이라고 매도했다.

“소원 팔찌잖아. 스스로 끊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어? 좋은 거 아냐?”

“그게 하루 만에 끊어질 리가 없잖아. 렌 군이 잃어버린 걸 알면 분명 실망할 거야. 기껏 렌 군이 만들어 줬는데. 난 정말 모자란 애야.”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하지만 나도 만약 렌이 준 걸 잃어버린다면 신경 쓰일 것 같긴 해. 류제가 자신의 손목에 멀쩡하게 차여 있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유네의 조바심을 공감했다.

“언제부터 없었는지는 몰라?”

“기억이 안 나. 혼자서 전망대를 내려갈 때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그사이에 없어졌나 봐.”

“범위가 너무 큰데.”

“어쩔 수 없지. 내가 안일해서 잃어버린걸… 류제 군이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해도 유네의 눈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머쓱해진 류제는 테라스 울타리에 기대었다. 두 사람은 펠노아 전경을 보며 아이스크림만 와삭와삭 씹어 먹었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플레이어인 류제가 날림으로 진행해 버린 유네의 힌트 이벤트 때문에 급하게 변경된 사항이 있었다. 원래 이 이벤트에서 유네가 잃어야 했던 것은 ‘작은 곰돌이 인형이 달린 열쇠고리’였다. 류제가 실수로 유네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달린 열쇠고리를 박살 내버리는 것이 본래 유네의 힌트 이벤트다.

그러나 유네와 친하면 안 되는 삼류 악당 렌 지미가 유네에게 줄 리 없던 소원 팔찌를 주고, 류제가 날림으로 이벤트를 진행하자 히로인 유네의 마음이 바뀌어 이벤트가 살짝 꼬였다.

그래서 열쇠고리가 아닌 소원 팔찌로 물품이 대체된 듯한데 이로 인해 이벤트 내용은 다소 달라졌지만 류제가 가져야 할 미안함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막대기를 입에 물어 까딱까딱 가지고 놀던 류제가 유네에게 제안했다.

“시내로 가서 한번 찾아볼래? 내가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류제 군! 류제 군이 그런 말을 하니 든든해지네. 자유 시간 끝나기 전까지만 찾아주면 돼. 그래도 안 되면 포기…해야지. 렌 군도 기다릴 거고.”

“별것 아닌데 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도 렌이 준 팔찌를 잃어버렸으면 펠노아를 떠날 때까지 찾을 것 같은 기분이라서 부린 변덕이었다.

관심이 없으면 냉정한 류제가 기껍게 도와주겠다고 하자 유네가 자신도 류제에게 그 정도로 소중한 친구인 게 기뻐서 제자리에서 팔짝 뛰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서로 조원 복이 없다. 류제가 팔찌를 찾을 기대감을 품은 유네를 도닥였다.

“조원들이 마음에 안 들면 다음 활동부터는 나랑 같이 다녀도 돼. 나도 우리 조원이 껄끄러워서 곤란하거든.”

“정말? 나는 좋아. 어차피 우리 조원들은 내가 없는 걸 더 바라겠지.”

“그럼 내가 선생님께 말해 볼게.”

동질감으로 무장한 류제가 유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유네가 여자인 사실을 모르는 류제는 평범한 우정의 표시였지만 이성끼리 들러붙기에는 거리감이 가까웠다. 뻣뻣해진 유네는 놀라 얼음이 되었다.

류제 군의 팔은 렌 군보다 더 두껍네. 키도 더 크고. 렌 군보다는 좀 더 남자다운 기분이야. 유네는 붉어지는 얼굴을 어쩌지 못했다.

유네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다시 류제의 팔에 매달려 시내로 내려오기 전까지 물드는 석양만큼이나 돈독한 남자들 간의 우정을 다졌다.

그래서 텔다산 전망대를 내려온 두 사람이 시내로 돌아와 분실한 팔찌를 찾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였다.

류제가 아무리 특별한 어빌리티를 가졌어도 어둑어둑 땅거미 지는 시내 바닥을 스치는 수많은 발길질 속에서 유네의 팔찌를 찾는 것이란 불가능했다.

“못 찾아서 미안.”

“류제 군의 잘못이 아닌걸.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땅을 살피는 유네의 말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자유 시간도 끝나서 하는 수 없이 여관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지칠 대로 지친 얼굴로 복도를 걸었다.

양손 가득 짐을 나눠 든 그들은 복도를 지나 렌이 기다리고 있을 자신들의 숙소로 향했다. 그때 그들을 발견한 같은 반 여학생들이 반갑게 인사하며 단체로 몰려왔다.

“류제. 유네. 이제 돌아오는 거야?”

누군고 했더니 여학생들로만 이루어진 나머지 세 조 학생들이었다. 어째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축축하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희는 벌써 온천에 들어갔다 온 거야?”

류제의 질문에 그녀들이 깔깔깔 웃으며 이 여관의 온천이 그렇게 좋다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계속 돌아다니다 보니까 땀이 나서 말야. 그리고 온천이잖아, 온천! 온천은 펠노아에만 있다구. 기왕 펠노아까지 왔는데 가능한 한 많이 이용하는 게 피부 미용에 좋지 않겠어?”

“같은 취급하지 마. 얘네는 우연히 마주친 거고 우리 조는 애초부터 온천만 이용할 속셈이었어. 아무도 없어서 전세 낸 기분이었다구. 기분 엄청 좋아. 완전 천국이 따로 없어.”

“킁킁, 손에 든 건 뭐야? 간식? 먹어도 돼? 뜨거운 물에 담그고 왔더니 엄청 배고픈 거 있지. 저녁 시간까지 못 버티겠어.”

“어… 이, 이건.”

그녀들이 유네의 손에 들린 주전부리를 탐내는 눈치다. 류제와 유네가 이걸 어째야 하나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여자애들에게 약한 유네 대신 류제가 물었다.

“것보다 렌 못 봤어? 먼저 숙소로 간다고 했는데.”

“렌? 모르겠는데. 우리 간식 먹으면서 게임 안 할래? 모처럼 수학여행인데 즐겨야지.”

“우리도 유네랑 류제 독점해 보자. 너네 조 애들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

이들은 또한 수학여행 조 편성 때 유네와 류제를 당첨 취급을 하던 친구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죄다 탈락을 했으니 아무도 유네와 류제와 놀지 못해서 자율 행동 시간 때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렌이…….”

“렌도 우리가 놀고 있으면 알아서 올 거야. 그런 냄새 귀신같이 잘 맡잖아.”

“오호라. 치사하게 너희만 맛있는 거 먹으려구 했구나? 와아, 이거 한정판이잖아. 아까 줄 서다가 못 샀는데.

“근데 류제, 조끼는 어디에다가 내팽개쳤어?”

류제와 유네는 결국 열한 명의 여학생들에게 붙잡혀 여자 숙소로 끌려갔다. 적어도 렌을 데리고 와야 된다고 류제가 말했지만 흥분한 그녀들에게는 그 말이 귓등까지만 스쳤다.

두 사람이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동안 제립학교 학생 신분인 주제에 민간인을 개 패듯이 팬 벌로 여관 정원에 있는 쓰레기를 줍고 있는 재경은 오늘도 후회 중이었다.

뭐에 대한 후회냐면 고등학교 올라가면 다시 태어난다, 뭐다 그랬으면서 손쉽게 주먹을 휘둘러 버린 것에 대한 후회다.

“하아.”

자유 시간이 끝나 학생들이 여관으로 돌아온 것인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용했던 여관이 금세 시끄러워졌다.

아까 지나쳤던 다른 반 학생들이 재경을 보면서 벌써 사고 친 애가 있다며 비웃다가 저들끼리는 온천에 들어간다니, 친구들하고 방에서 게임을 한다니 수다를 떨었다.

재경은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힐링’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세라 덕분에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다.

“나도 놀고 싶은데~”

수학여행 하면 친구들하고 베개 싸움 하면서 노는 거 아니야? 난 왜 여기서 쓰레기나 줍고 있어야 하는 거야. 나도 온천에서 놀고 싶어. 친구들하고 숙소에서 놀고 그럴 거라고.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내가 뭣 때문에 추가 지출로 트럼프를 사 왔는데!

미연시 스토리대로라면 양아치에게서 도망친 후 숙소로 돌아온 렌 지미는 남들 몰래 여탕을 훔쳐보다가 걸려서 지금과 똑같은 꼴이 되었겠지만 재경이 여탕을 훔쳐볼 리는 없었으니 명예롭게 깡패를 때려잡은 걸로 벌을 받게 된 것이 재경에게 훨씬 좋은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재경은 렌 지미의 변태 캐릭터성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니 아는 게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항공뷰로 시선을 이동해 재경이 있는 정원을 지나쳐 대문으로 향하면 유네와 류제 대신 재경을 구제해 주기 위해 여관에 도착한 세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그들은 세라에게 렌이 그들을 위해 깡패와 싸워 주었다는 사실을 재경보다 더 잘 변명해 줄 수 있으며 보답으로 빙과당에서 맛있는 빙수를 사 오겠다 선언했던 재경의 조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빙과당이라 쓰인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쇼핑백 안에는 약속대로 빙과당에서 갓 만든 차가운 빙수가 상자 안에 들었다. 펠노아에 왔으면 꼭 먹어야 한다는 특제 빙수다.

빙수가 녹기 전 냉동실에 넣어놓을 요량으로 여관으로 돌아와 숙소로 향한 조원들은 반에서 제일가는 바보에 여자만 밝히고 선생님이 혀를 내두를 말썽쟁이로 소문난 렌 지미가 어떤 멍청이 같은 얼굴로 자신들을 맞이할까 낄낄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카운터에서 열쇠를 받고 계단을 올라가 숙소 문을 여는데 8반이 배정받은 다른 여자 숙소에서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들은 혹시 그곳에 소란을 몰고 다니는 렌이 있을까 고개를 내밀었다.

방에는 먼저 돌아와 온천을 즐겼던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와 눈이 마주치자 신호등처럼 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었던 그녀들이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뭐야. 치사하게 너희끼리만 노냐?”

“늦었네? 너희도 빨리 앉아. 지금 막 시작했어.”

“뭔데, 뭔데? 뭐 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마피아 게임이지!”

방에는 친구들 말고도 류제와 유네도 있었다. 끌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렌과 같이 먹기로 한 음식들은 공중분해 된 후다. 분위기에 말려든 류제와 유네는 남극과 북극처럼 헤어져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하얗게 불타있었다.

재경이네 조원들도 자리를 잡으려는데 류제에게 맡겼던 렌이 보이지 않자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렌은?”

“찾을 수 없었어.”

여관이 너무 넓어서 못 찾았다는 말이 아니라 찾기도 전에 이쪽으로 끌려 들어왔다는 의미였다. 렌이 심하게 다친 것을 걱정했던 조원들은 류제의 무책임한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갱문했다.

“못 찾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데리고 갔잖아.”

“뭐야. 렌은 너희 조 아냐? 왜 류제한테 그래?”

사정을 모르는 친구가 옆에서 듣다 말고 그녀들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괜히 그러겠냐? 다 이유가 있어.”

“그거 빙과당 빙수지? 같이 먹으려고 포장해 온 거야?”

“주인 있으니까 아직 손대지 마. 그보다 류제, 그럼 지금 렌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야?”

“야, 야. 집중해! 한창 게임 중이잖아. 밤이 찾아왔으니까 다들 고개를 숙이라구!”

재밌게 즐기는 중에 흐름이 끊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사회자가 잡담은 끊으라며 원 가운데에서 외쳤다. 재경이네 조원들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며 속닥거렸다.

“류제는 렌을 어디다 내버려 두고 온 거야?”

“낸들 알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은 또 뭐야.”

“도중에 렌이 도망간 건가?”

“설마 렌 그 멍청이, 고집부리다가 세라 선생님한테 치료해 달라고 이야기 못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에이, 렌이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겠지.”

“바보 같다고 말하지 말아줘. 나 좀 불길한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 말에 세 사람 다 렌이 홀로 남자 숙소에 숨어 피가 멎을 때까지 머리에 천을 대고 있다가 기절한 장면을 떠올렸다. 옆에 류제가 범인이라고 다잉 메시지를 적어놓았을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평소 렌의 행실을 떠올리면 상당히 그럴듯해서 재경이네 조원들은 에이, 아닐 거야 라는 생각이 쏘옥 들어갔다. 렌 지미는 상상을 초월하는 바보다. 그 바보가 진짜로 설마. 그녀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류제. 너, 제대로 데려다준 거 맞지? 그지?”

“도중에 내팽개치고 여기 온 거 아니지?”

마피아가 고개를 들어 선량한 시민을 죽이는 밤의 시간에 고개를 들고 누구를 죽여야 빨리 게임이 끝날까 다른 마피아와 논의하던 류제가 깜짝 놀라며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일단 게임 규칙상 마피아라는 것을 들키면 안 되기 때문에 나 부른 거야? 라고 몸으로 말하는데 그딴 건 알 바 없다며 그녀들이 무턱대고 류제를 몰아붙였다.

“그럼 누구한테 말하겠어?!”

“너희들 참여 안 할 거면 방해하지 마.”

“지금 게임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류제! 꼼지락거리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레…레…렌 군이라면 주…주…중간에 헤…헤…헤어졌어. 수…숙소로 잘 들어갔다고 했는데.”

근처에 있던 유네가 고개를 숙인 채 그녀들에게 속삭였다.

류제는 쟤네들이 왜 저렇게 유난을 떨까 어리둥절했다. 암만 바보라도 숙소로 돌아간 것을 확인했으니 세라 선생님을 만나서 상처 치료했을 게 분명한데.

“선생님한테 갔다 올게.”

“나도 갈래. 야! 너희 이거 건들면 안 된다. 건들면 싸다구 백 대니까 명심해!”

게임에 참여하지도 않으면서 가는 걸 누가 뭐라고 한다고 그녀들이 빙과당 상자를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고 우르르 떠났다. 세 명의 수다쟁이 여학생들이 폭풍처럼 숙소를 들쑤시고 사라지자 누가 마피아고 누가 경찰인지 눈치 싸움을 하고 있던 학생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영문을 몰랐다.

“류제, 무슨 일이야? 쟤들 왜 저래?”

“나도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다려줘. 실은 내가 마피아였어. 미안!”

그제야 불길한 생각이 옮았는지 류제도 밖으로 향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들이 저러는 이유는 렌과 관련된 일임이 틀림없었다.

“야. 류제! 다 까발리고 가버리면 어떻게 해!”

“류제 군. 나…나도……!”

“안 돼. 가지 마, 유네~ 유네만큼은 보낼 수 없어. 귀여운 유네를 하루 종일 못 본 우리의 마음을 생각해 달라구~ 그래서 유네찡은 마피아야? 경찰이야? 시민이야?”

하루 종일 부려먹기만 했던 조원들과는 달리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친구들이 곁에 붙어서 애교를 부리자 유네는 어쩔 줄 몰라서 엉덩이만 들썩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류제는 유네가 쫓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렌의 조원을 쫓아 뜀박질을 했다.

“왜 그러는데? 렌이 왜?”

“넌 렌 걱정도 안 되냐? 네가 책임지겠다고 데리고 갔으면서 숙소까지 데려다주지도 않았다고? 상처 치료한 건 확인도 안 했겠네. 으으, 분명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겠지.”

“숙소로 들어간 건 확인했어. 아무리 그래도 렌이 그렇게까지 바보일 리가… 있겠네.”

“어쩜 그래? 친구라면서 렌이 바보란 걸 잊다니 너무하는 거 아냐?”

그녀야말로 친구라면서 너무할 소리나 한다.

유네 팔찌를 찾아준다고 딴 곳에 신경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변명하지 못한 류제가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숙소에 돌아와서 여학생들한테 붙잡혔을 때 강하게 뿌리치지 않았던 이유도 렌이라면 분명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올 거라는 말에 설득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숨길 이유도 없잖아. 센 척이 특기기는 해도 숨겨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지 않았나.

“그 바보의 머릿속은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걸.”

“그야 그렇긴 한데.”

저번 달 일을 떠올리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역시 유네보다는 렌을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류제가 뒤늦게 후회했다.

계단 난간을 잡아 뛰어내린 류제가 그녀들을 제치고 제일 먼저 1층 선생님들의 숙소로 뛰어갔다. 자존심 상한다. 뒤에서 같이 가자며 허둥거리는 렌의 조원들이 무신경한 자신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게 싫다.

“류제 학생, 건물에서 뛰면 안 된답니다.”

“세라 선생님. 렌 봤어요?”

“렌? 렌 지미 학생이라면 아까…….”

류제가 1층을 돌아다니고 있던 세라를 발견하고 그녀의 팔뚝을 꽉 붙들었다. 얼굴의 반절 이상이 가려진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다. 그녀는 일순 그 시선에 압도당해 첫 단어를 더듬어 버리고 말았다.

“마…말썽을 피워서 벌을 받고 있습니다만.”

“벌이요? 상처는요? 상처는 제대로 치료했어요?”

“물론이죠. 진정하세요, 류제 학생.”

“하아아. 역시.”

그것 봐. 괜한 걱정이라니까. 아무리 렌이 바보라도 그 정도까지 바보일까. 류제가 깊게 안도하며 숨을 몰아 내쉬었다.

“렌 학생이 민간인과 시비가 붙어서 싸우다가 크게 다친 모양이던데. 류제 학생은 어떻게 알고 오신 건가요?”

“네? 그야……. 근데 벌을 받고 있다니. 어째서죠? 렌이 뭐라고 설명했는데요?”

“아까 말했잖아요. 민간인과 시비가 붙어 싸웠…….”

세라가 말을 줄였다. 서로의 반응을 보아하니 상대방이 오해하기 쉽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만 말한 것이 분명하다.

세라와 류제 둘 다 동시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까지 바보는 아니어도 그 바로 직전까지는 바보였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류제 학생이 바른대로 말해 줄래요?”

“하아… 네…….”

“류제! 혼자서 가버리면 어떻게 해. 렌을 찾은 거야? 어, 세라 선생님. 렌은요?”

곧이어 류제를 뒤따라온 재경이네 조원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걸로 양아치들이 렌네 조원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벽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인물이자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ASMR 삼아 억지로 청소를 했다만 더 이상은 배가 아파서 은근슬쩍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있던 재경이었다.

쟤네 저기서 뭐 해. 도망치려고 했던 재경은 막힌 길목을 지키는 수문장들의 정체가 당황스러워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세라 쌤의 주의를 끌어준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떡하니 기로를 막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가냐고. 이 센스라고는 쥐뿔도 없는 자식들. 싯! 절로 가, 싯! 싯!

재경이 잇새로 쥐를 쫓는 소리를 내는 동안 류제와 재경의 조원들이 자율 행동 시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라에게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재경이 왜 멋대로 주먹을 휘둘렀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게 된 세라의 오해가 풀렸다.

“그럼 렌 학생이 싸움을 한 게 다 그것 때문이었단 말입니까?”

“네. 저희 중에 어빌리티 없이 싸움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렌 덕분에 산 거예요!”

“하아. 호신술은 2학기에나 배우니 말이죠. 펠노아의 한량들이라… 난감하군요.”

“렌 잘못이 아니에요. 그놈들이 우리한테……!”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어쩐지 저와 약속했는데 왜 멋대로 행동했나 했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는군요.”

세라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못 말리는 말썽쟁이라도 깡패가 시비를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다짜고짜 덤벼드는 학생은 아닌 것 같아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내가 못 살아.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 주면 좋았을 텐데. 그녀가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나게 깡패를 어떻게 때렸는지 설명하는 렌의 얼굴이 얄밉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말해 줘서 고마워요. 렌 학생에게는 제가 따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상대하지 마시고 반드시 주변에 도움을 청하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처럼 같이 싸우거나 민간인에게 어빌리티를 쓰면 안 됩니다. 기간트리카도 마찬가지예요. 명심해 주세요.”

“근데 선생님. 만약 피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요? 그냥 맞고 있어야 하나요?”

“맞아요. 세상에 착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고 저희한테 해를 가해도 어빌리티를 쓰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퇴학이에요?”

“최소한의 방어로 어빌리티를 사용하고 즉시 그 자리에서 탈출하세요.”

“억울해요. 왜 우리에게만 제약이 있는 거죠? 그런 양아치 같은 놈들 따위 어빌리티 한 번이면 끝나는 건데. 저희는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알지도 못하면서 우습게 보이는 건 질색이에요!”

그녀들의 반박에 세라가 쓰게 웃었다. 이 이야기는 학생들 사이에서 매년 나오는 이야기다.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세라는 민간인과 그들이 어떤 차이점이 있으며,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어떤 혜택을 받고 있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 무게는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녀가 상관에게서 들었던 한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일축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랍니다.”

“그치만…….”

“나중이 되면 더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자, 방으로 돌아가서 저녁 식사 전까지 친구들과 재미있는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저는 렌 학생에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류제가 어빌리티를 써서 깡패 한 명을 날려 버렸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세 여학생이 트라이앵글처럼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그럼 렌한테 이따 저희 방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지금 애들 막 마피아 게임을 하고 있거든요.”

마피아 게임. 그게 뭐야. 재미있겠다! 벽 뒤에서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재경이 눈을 빛냈다.

세라가 알았다며 정원에서 청소하고 있을 재경을 부르기 위해 또각또각 걸어갔다. 그녀가 오는 것에 맞춰서 몰래 정원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던 재경은 세라가 문득 뒤를 돌아 류제를 부르자 깜짝 놀라 다시 벽에 등을 붙였다.

“류제 학생, 잠깐 괜찮나요? 당신과 하려고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율 행동 시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류제를 세라가 따로 불러 하는 이야기. 그건 바로 또 다른 히로인 세라 밀로니의 힌트 이벤트의 시작을 뜻했다.

재경이네 조원들은 선생님이 류제를 부르자 눈치껏 먼저 2층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렌 지미처럼 엑스트라들이니 이런 부분에서는 낄끼빠빠가 확실한 듯하다.

설마 지금 힌트 이벤트 시작하는 거야? 진짜로? 생각한 것보다 이른데. 하지만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상황이다. 재경이 벽과 혼연일체가 되어 엉성한 스파이처럼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게임상 수학여행 첫날, 같은 조 히로인들과 헤어진 주인공이

[시내를 돌아다닌다]

[빙과당으로 돌아간다]

[숙소로 돌아간다]

이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숙소로 돌아간다.’를 선택하면 유네를 만날 수 있다. 아까 류제가 날 숙소로 데려다주다가 진짜로 유네를 만났지.

역시 이 미연시 세계에서는 조건이 충족되면 정해진 대로 움직인단 말이지. 지금 류제가 세라 쌤이랑 만나는 것도 류제가 그에 따른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라는 건데. 그게 뭐더라.

이 어벙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주인공 대신 설명하자면 원래 세라의 힌트 이벤트는 왕녀 때문에 조에 불만을 품은 류제가 세라에게 조를 바꿔달라 건의를 하러 찾아가는 것이 원인이었다.

류제가 밤이 되기 전 숙소에서 ‘1층으로 내려가 선생님을 찾는다.’ 선택지를 고르면 조건이 충족되어 지금처럼 세라의 힌트 이벤트가 발생했다.

이벤트가 발생하면 세라에게 왕녀 이야기는 물론 사전에 유네와 만났다면 유네의 조 일에 대해서도 상담 가능했다.

“무슨 일이신데요?”

“류제 학생은 렌 학생하고 친하지요? 자주 같이 다니는 것 같던데.”

“네. 당연히 친하죠. 그게 무슨 관련이 있나요?”

“류제 학생이 보기에 렌 학생이 학교생활을 잘 해나가는 것 같나요? 저는 개인 면담이나 수업 때만 주로 보니 늘 걱정이 됩니다. 성격이 발랄해서 별걱정 없어 보여도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는 학생니까요.”

“잘 지내요. 반 친구들하고도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고.”

“비키 학생하고는 입학식 날부터 사이가 안 좋았지 않나요?”

“지금은 좋아요. 둘이 죽도 잘 맞아서 오히려 가끔씩 합심해서 절 놀리던데요. 하하.”

“류제 학생이 그렇게 말하니 믿음이 가네요.”

세라가 안심하며 양손을 맞잡았다. 모든 학생들이 자식처럼 소중하지만 렌 지미는 특히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말투는 드센 편에 어빌리티는 발현도 컨트롤도 안 되지, 기간트리카 조종은 높은 곳이 무섭다고 땅에서만 기어 다니지, 쪽지 시험을 볼 때마다 꼴등에, 숙제는 매번 빼먹기 일쑤다. 가진 거라곤 건강한 몸뚱이밖에 없나 싶을 정도로 장래가 걱정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복잡한 사정이란 게 뭔가요?”

여기로 보나 저기로 보나 평범해 보이는 렌에게 사정이 있다는 것이 뜻밖이라 류제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벽 뒤에 숨어있는 재경은 자신에게 복잡한 사정이 있었나 되지도 않는 짱구를 굴렸다. 렌 지미한테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고? 처음 듣는 설정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면 됐어요. 렌 학생과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요.”

쌤이 말 안 해주면 내가 무슨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재경이 이래서는 곤란하다며 벽 너머로 다급하게 고개를 기웃거렸다.

아주 조그마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게 우연찮게 류제의 눈에 띄었다. 세라의 등 뒤에 있는 귀퉁이에 숨어서 지푸라기 같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쫑쫑 내밀고 있는데 그것만 보고 어떻게 렌인지 알았는지 류제는 순간 웃음이 터져 재채기를 하듯이 입을 막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류제 학생?”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제가 잘 돌볼게요.”

사레들린 듯이 기침을 하는 류제를 보고 혹시 감기에 걸렸나 세라가 걱정스러워했다. 쿨럭거리던 류제가 괜찮다며 손을 들었다.

그가 다시 렌이 있었던 곳을 흘겼다. 아무것도 모른 채 벽 뒤에 몰래 숨어 뭐야, 뭐야? 뭔데? 하고 말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 귀엽다. 표정은 엄청 진지할 것 같아. 그것까지 상상되자 류제는 도저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배…배 아파……!

“괜찮으신 것 맞죠? 봄이라지만 밤이 되면 아직 쌀쌀하더군요. 감기 조심하세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게 답니다. 아, 혹시 류제 학생은 제게 뭔가 요구 사항이 있을까요?”

아, 헐! 떴다! 별 관심 없는 렌 지미의 사정은 둘째 치고 드디어 선택지가 떴다. 진행에 방해되게 언제까지 내 이야기를 하나 했다.

눈을 빛낸 재경이 류제가 어떻게 나오려나 상황을 살폈다. 재경이 정리한 노트에 따르면 여기서 뜨는 선택지는 다음과 같았다.

[왕녀에 대해 이야기하기]

[내일 일정을 물어보기]

[선생님에 대해서 물어보기]

[방으로 돌아가기]

일자식 진행인 입학식 챕터와는 다르게 수학여행 챕터에서는 선택형 진행이 많았다. 이때 까딱 잘못 선택했다간 히로인들의 호감도를 하나씩 놓쳐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어 재경처럼 완벽 공략을 원한다면 선택지 하나하나에 신중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세라의 힌트는 다른 히로인들과 다르게 꽤나 기회가 있는 편이었다. 섹시 담당 히로인 세라 선생님은 학생들의 궁금증을 외면할 수 없는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처럼 하나만 질문하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개만 선택해야 하는 줄 알고 뭘 물어야 하나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여기서 선생님을 찾아온 목적이었던 ‘왕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첫 번째로 선택했다. 이야기 흐름상 그게 가장 자연스럽잖아. 그러나 그 선택지는 힌트로 이어지지 않았다.

“니냐롯트 학생이요… 그러네요, 그녀는 신분상 평범한 학생이 될 수 없으니 친위대 일로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를 바꾸는 건 이 수업의 취지에 맞지 않아요. 류제 학생이 잠시 놓치고 있는 부분이지만 당신 또한 평범하지 않아요. 언젠가 마족과 싸워야 할 사람입니다. 갑작스럽게 마족들과 전투를 하게 되거나 팀 전투에 들어갈 때 옆에 있는 사람이 싫다고 불평할 수 있을까요? 상관이 껄끄럽다고 전투 지시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아뇨, 그럴 수 없어요.”

“하지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하나의 교육입니다. 서로 이야기하고 합의점을 찾아보세요. 그녀가 당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학생은 아닐 거라 믿습니다. 그렇게 노력해도 힘들다면 조를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 네.”

“또 궁금한 것 있나요?”

이야기가 끝나면 또다시 선택지가 뜬다. 류제의 뇌에서도 재경이 생각한 것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까. 재경이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셈을 해보며 다음 선택지가 뭐였는지 떠올려 보았다.

[유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내일 일정에 대해 물어보기]

[선생님에 대해서 물어보기]

[숙소로 돌아가기]

게임대로만 간다면 류제가 아까 유네를 만났기 때문에 왕녀 선택지가 사라지고 유네 선택지가 새로 생겼을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대체로 왕녀 선택지를 고르고 나서 새로 뜬 유네 선택지를 연이어 골랐다.

“유네 학생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건 심각한 수준인 것 같은데……. 제가 바로 지적하면 더 괴롭히겠지요. 저도 나름의 조치를 취할 테니 당신이 옆에 있어주세요. 하지만 마찬가지의 이유로 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네,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네한테도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죠. 다른 불편한 점이 또 있나요?”

이제 남은 선택지는 ‘내일 일정에 대해 물어보기’와 ‘선생님에 대해 물어보기’만 있다. 그런데 사실상 학생의 입장으로서 다짜고짜 ‘선생님에 대해 물어보기’를 선택하는 것은 이상해 보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걸 선택해야 세라 쌤의 힌트 이벤트가 뜬단 말이지. 재경은 제발, 제발, 제발을 연발하며 벽 뒤에서 류제가 저 선택지를 고르길 빌며 안달했다.

류제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해야 힌트를 얻는다고!

“없네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

“잠깐, 잠깐잠깐잠깐!”

그러나 호감도고 나발이고 관심이 없는 류제가 ‘숙소로 돌아가기’를 선택해 버리자 마음이 급해진 재경이 잽싸게 뛰쳐나왔다.

“렌 학생?!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마침 류제와 대화를 마치고 재경에게 가려고 했던 세라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쌤, 쌤, 쌤. 쌤은 오늘 하루 종일 숙소에 있었어요? 안 심심했어요? 쌤은 하루 종일 뭐 했어요? 류제가 궁금하다고 그랬어요!”

무슨 콘셉트를 잡은 건지 재경이 후다닥 뛰어와서 류제에게 팔짱을 꼈다. 머리카락만 쫑쫑 내밀고 숨어있던 주제에 갑자기 뛰쳐나와서 이상한 소리나 한다. 류제가 들러붙은 렌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뒤통수에 났던 상처는 깨끗하게 나아있었다.

“네에? 렌 학생, 청소하다 말고 왜 이곳에……. 뭐, 됐어요. 친구들한테 사정은 다 들었어요. 외부인들이 조원들에게 몹쓸 짓을 하려 했다면서요? 용감한 행동을 하셨네요. 그래도 다음부터 그런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세요. 언제나 몸을 사리고 주변 어른들에게 도움을―”

“아 쌤, 잔소리는 아까 다 들었잖아요. 것보다 쌤! 쌤은 제가 돌아왔을 때에도 숙소에 계셨잖아요. 쌤은 자율 행동 시간 때 밖에 안 나갔어요?”

이렇게 될 바에야 강제로 선택지를 선택하게 만든다. 아오, 진짜 식겁했네. 류제 이놈, 감히 힌트 이벤트를 멋대로 지나치려고 하다니.

하기야 저번 달 비키 때처럼 류제가 알맞은 선택지를 골라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게 우연의 일치였던 거야.

꿀꺽. 재경이 이게 통할까 긴장한 얼굴로 류제의 팔뚝을 꽉 끌어안았다. 렌이 왜 저런 걸 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운 스킨십에 류제는 일차원적으로 가슴이 달아올랐다.

“이 말썽쟁이 뚱딴지. 뭐가 그렇게 궁금한가요? 선생님은 오늘 여관에 머물면서 시설 점검과 학생들 안전 확인을 했답니다. 렌 학생처럼 다쳐서 들어오는 학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쌤은 펠노아 구경을 못 했겠네요? 아까 다른 반 쌤들은 자기네 반 애들하고 놀던데.”

“그렇죠. 아쉬운 일이에요. 5반 선생님께서 펠노아 산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고 자랑하시더군요. 텔다 사원 정원도 봄꽃으로 유명하다고 하죠. 절 걱정해 준 건가요? 고마워요. 하지만 이건 제 일이니까요.”

좋았어……! 류제를 팔아먹었더니 어떻게든 선택지를 다시 고를 수 있었다. 제대로 나온 세라의 답변을 들은 재경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꽃! 쌤, 꽃 좋아해요?”

“네?! 네, 뭐… 예쁘고 화려해서 좋아합니다만. 지금이 딱 벚꽃 시즌이지요. 하하, 정말 뜬금없네요. 렌 학생은 오늘 재미있었나요?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알라마니 기간트리카 기술관으로 이동해야 하니 놀 시간은 지금밖에 없답니다. 소등 시간은 기숙사와 다르게 10시예요. 그때까지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남겨 주세요. 오늘 친구들을 구해 줘서 정말 장하네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같이 싸우지 마세요. 알겠죠?”

“아~ 쌤, 그 이야기 진짜 골백번도 넘게 들었는데!”

“선생님이 걱정돼서 그래요. 류제 학생, 렌 학생이 말썽 피우지 못하게 옆에서 좀 간섭해 줘요.”

“네. 꼭 그럴게요.”

“그럼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저녁 잘 먹으시구. 선생님은 일하러 갑니다.”

“안녕히 가세요.”

“쌤, 나중에 봐요!”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두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세라가 구두를 또각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어른에게 하는 것처럼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류제와는 달리 친구에게 인사하듯 활기차게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든 재경은 무사히 힌트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신나 아자! 하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그걸 본 류제가 콧방귀를 뀌었다.

“바보.”

“뭐, 임마?! 짜샤! 바보라고 하지 마.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거든? 너한테 맡긴 유네는 얻다가 빼먹었냐?”

“유네는 위에서 다른 애들하고 게임하고 있어.”

또 유네만 찾네. 구해 준 건 난데. 내가 너 벽 뒤에 숨어있는 것도 알았는데.

“응? 뭐라고 했어?”

“친구들이 기다린다고 했어.”

남몰래 투덜거리던 류제는 이 복잡 미묘한 심정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가 신경 써줘야 하는 막냇동생도 아닌데 왜 이러지.

기분이 좋아진 재경은 세라가 이야기했던 렌 지미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 또 홀라당 까먹고 류제의 등을 밀며 계단을 올랐다.

“뭐 해. 빨리 가자!”

“밀지 마.”

“네가 빨리 안 올라가니까 그렇지. 나도 얼른 게임하고 싶단 말이야.”

이 세계를 직접적으로 바꿀 수 있는 플레이어의 역할을 하는 류제가 재경을 향해 어떤 싱숭생숭함을 품고 있는지 알 리 없는 재경은 그저 세라의 힌트 이벤트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신이 났다.

제가 왜 깡패들하고 싸워야 했는지 설명을 못 하는 바람에 안 받아도 될 벌까지 받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잘도 웃는다. 류제는 저런 모질이 같은 렌이 좋기도 하면서 싫어서 계단을 오르는 그를 향해 투덜거렸다.

“기분 좋은가 보네?”

“어엉? 하하하. 일이 술술 풀리잖아. 것보다 그 마피아 게임이란 거 재밌냐? 해봤어?”

“그럭저럭. 그보다―”

네 사정이란 게 뭐야? 라고 물어보고 싶었던 류제지만 렌이 일부러 하지 않은 이야기를 집요하게 캐내는 것 같아서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궁금하지만 역시 물어보면 싫어하겠지.

“말을 왜 자꾸 하다 말아.”

“다친 덴 괜찮냐고.”

“보고도 모르냐? 세라 쌤이 다 고쳐줬다. 그까짓 거 별것 아냐.”

재경이 마치 자기가 자기 상처를 치료한 것처럼 뿌듯해하며 코끝을 높였다.

솔직히 세라 쌤만 아니면 나도 나보다 인원수도 많은 놈들한테 막 덤벼들지는 않지. 패싸움할 때는 상처가 크게 난 적이 많아서 할머니가 걱정한단 말야. 상처 나면 낫는 거 기다리는 거 귀찮고. 선생님들한테 또 문제아 취급당하고. 잘못하면 경찰들한테 찍히고.

“그래. 잘 됐네.”

류제는 세라가 했던 것처럼 재경의 칙칙한 갈색 머리를 휘적휘적 쓰다듬었다. 뒤통수에 피딱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세라 선생님은 유능하다.

재경이 간지럽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류제의 손목을 잡고 웃어댔다.

“으캬캬캬. 키 작아지니까 하지 마. 그러게 내가 괜찮다고 했잖냐. 짜식이 담이 약하네. 너 몸싸움 안 해봤냐? 아까 주먹질 한번 시원하게 갈기던데.”

“시끄러. 그땐 그때고 쓸데없이 싸움을 왜 해.”

“짜샤, 원래 사나이는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할 때가 있다고.”

“오늘은 뭐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나?”

“그렇지. 잘 아네.”

“웃기네. 걔네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류제가 네 얄팍한 생각 따위는 다 안다며 허리춤을 찔렀다. 씨익 웃은 재경이 류제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재경은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가 먼저 여자 숙소로 향했다.

그래, 당연한 거다. 렌은 입학하기 전날부터 여자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을 드러내 왔고, 한창 성욕이 차오를 사춘기이니 렌처럼 남자가 여자한테 관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일 터였다.

류제는 렌의 행동에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스스로가 왜 이러는지 답답했다. 아까 빙수 먹은 게 뒤늦게 체하기라도 했나?

“치사하게 니들끼리만 노냐? 나도 끼워줘.”

류제보다 먼저 방으로 돌아왔던 재경이네 조원들이 그들이 없는 틈을 타 자율 행동 시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끝내놓은 모양인지 재경이 미닫이문을 열자 반 친구들의 시선에 단번에 모였다.

“렌 군. 무사했구나! 어디 갔다가 온 거야. 걱정했잖아.”

“일이 좀 있었어.”

“이 느림보야. 네가 바보 같은 짓을 해서 그렇지. 우리들이 널 위해서 사 온 거다. 녹기 전에 얼른 먹자.”

“나도 먹어도 돼?”

“오올, 이게 니들이 말한 그 빙과당이냐? 얼렁 꺼내 봐봐.”

“이거 산다고 엄청 줄서서 기다렸다구. 빨리 우리를 칭찬하도록 해. 어서.”

“고맙다, 짜샤.”

깡패 하나 때려잡았다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아주 영웅 대접이다.

뒤이어 류제가 미닫이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류제에게만 달라붙었는데 오늘만큼은 렌이 인기 절정이다. 친구가 잔뜩 생겼으니 뿌듯할 법도 하건만 이 답답한 마음은 주제도 모르고 날뛰었다.

“오오, 개쩐다. 이게 빙수야? 눈이 산처럼 쌓여있네.”

“완전 대박이지? 그래서 우리가 가자고 했잖아.”

“먹어봐, 먹어봐. 빨리 먹어봐 봐. 맛있어?”

깔깔깔 웃는 소리 속에 있는 렌의 모습이 어찌나 낯선지 류제는 렌과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야, 저거 봐봐. 렌, 코 옆에 초코 묻었다. 빙구 같애.”

“시꺼! 어디? 어디에 묻었는데?”

“아하하. 콧수염 생겼어. 야, 너 부끄럽냐? 귀 완전 빨개졌는데?”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잘못 닦아서 콧수염이 생겼다는 말에 귀가 새빨개진 재경을 옆에 있던 친구가 놀려대기 시작했다.

렌이 부끄러우면 귀만 빨개진다는 건 지금껏 류제만 알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걸 알아버리자 자신만이 알던 렌의 진가가 더 이상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쾌했다.

아니, 화가 날 일은 아니지. 류제는 얕은 한숨을 쉬며 떠들썩한 그들과 한참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그래, 애처럼 친구를 빼앗겼다고 화를 낼 부분은 아닌 일이었다.

여관에서 제공하는 저녁 식사 후에도 여자 숙소에 다 같이 모여 게임을 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빙수를 너무 먹어 배부르다며 일본풍 가정식의 저녁밥을 남긴 재경은 여전히 사람들에 둘러싸인 풍족한 기분에 취했다.

이번에 그는 자기네 조원들을 필두로 한 마피아 게임에 발 벗고 나섰다. 규칙도 모르고 거짓말도 못 해서 무조건 우기기만 하는 재경은 친구들에게 좋은 놀림감이었다. 술래가 된 재경이 마피아가 아니라며 바락바락 우겼지만 빨개진 귓가는 거짓말을 숨기지 못했다.

남들이 듣기에도 즐거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와작와작 과자 까먹는 소리가 수학여행 첫째 날 밤을 달구었다.

곧 그곳에 옆방에 있던 유네네 조원들이 합류했다. 불편해진 유네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재경은 자기 노느라 바빠서 유네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후 류제네 조를 비롯해 왕녀는 어디에 있냐는 소리가 나오자 혼잡한 틈을 타서 류제도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하, 멍청이.”

“다시 해. 이번엔 잘할 수 있어.”

“그 말만 다섯 번째인 거 알아?”

“이번에는 진짜야!”

지금처럼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노는 것은 재경의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런 낯선 경험이 재경은 정말 즐거웠다.

그래서인가 재경은 그만 오늘 밤 왕녀 힌트 이벤트 전에 있을 수학여행 기념 서비스 신을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까먹는 것보다는 그거다.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가 염두에 두지 않아도 이야기는 흘러간다.

창작 세계의 수학여행에서 이성에 대한 판타지를 충족시킬 이벤트가 나오는 것은 뻔한 클리셰다. 특히 주인공이 남장 여자 히로인과 함께 온천이 딸린 숙소에 머물게 된다면 둔한 속성의 주인공은 모르지만 모니터 밖 플레이어는 알 수 있는 야릇한 장면은 공식처럼 그려졌다.

시간이 늦어지자 재경과 놀아주던 학생들 절반 정도가 온천에 간다고 숙소를 빠져나갔다. 나머지 반은 이미 자율 활동 시간 전후로 온천을 이용했기 때문에 재경과 함께 숙소에서 놀았는데 그중 한 명이 과자를 먹다 말고 물었다.

“벌 받았다면서 온천은 가봤어?”

“아니, 아직. 이따 잘 때 하려고.”

“완전 최고야. 피로가 증발하다 못해 승화되더라. 머리카락도 건강해지는 기분이라고 아니.”

“머리카락 하니까 의식의 흐름으로 생각났는데 렌, 너는 류제 맨얼굴 본 적 있어? 잘생겼지, 그지?”

“뭐, 그렇지. 걔 기숙사에서는 공부할 때 앞머리 올리고 있거든. 잘생긴 주제에 왜 그렇게 가리고 다니는지 이해가 안 가.”

“나도 류제랑 같은 방 쓰면서 맨얼굴 맨날 보고 싶다. 함부로 들추면 싫어하겠지?”

“야, 이 변태야. 아무리 그래도 남자랑 방을 같이 쓰고 싶다니.”

“유네는 부럽다. 여자처럼 귀여운데 남자라고 류제랑 같은 방을 쓰고. 앗, 설마. 어울려. 어떻게 해.”

부녀자 드립을 이해하지 못한 재경이 알쏭달쏭해졌다. 쟤네들은 유네가 여자인 것을 모를 텐데 왜 저런 말을 하지? 설마 유네가 여자인 걸 아는 건가? 에이, 그럴 리가.

썩을 부(腐) 자의 부녀자인 그녀들은 반에 세 명 있는 남학생들끼리 연결시켜 보려고 경우의 수들을 연구했다. 류제X유네, 렌X유네, 류제X렌. 이 셋 중 단연 인기 절정인 것은 류제X유네고 나머지는 지지자가 별로 없었다.

그녀들은 역시 망상의 세계에서 류제는 렌보다는 유네가 어울린다며 숙덕숙덕 재경을 힐끗거렸다. 그 말을 듣자 재경은 자신이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유네랑 류제?

수학여행 하면 온천이고, 온천 하면 서비스 신이다. 이 게임에서는 온천에서 겪을 수 있는 서비스 신 역시 플레이어의 선택으로 좌우되었다.

저녁을 먹고 류제가 방으로 돌아가 버리면 유네와 서비스 신이고, 여기서 계속 노는 것을 선택한다면 다른 히로인들과 서비스 신이다.

건너편 방에서 온천을 즐기던 히로인들을 몰래 훔쳐보던 렌 지미가 결국 들켜서 몰매를 맞게 되고, 히로인들이 기겁해서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뛰쳐나왔다가 류제와 부딪히는 것으로 히로인들의 서비스 신이 완성된다.

“아차!”

드디어 문제의 장면을 떠올린 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언제 갔는지 유네도 류제도 보이지 않았다.

“류제는?”

“아까 씻는다고 방으로 돌아가던데.”

“뭐어? 왜 나한테 말 안 해줬어!”

“그걸 왜 말해 줘야 하는데?”

“왜냐니. 나랑 류제는 일심동체 아니냐!”

유네가 위험하다. 라고 생각한 재경이 정의의 용사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류제가 주인공이고 나는 플레이어‘지’. 정확히 말하면 ‘였지’지만. 과거든 현재든 주인공과 플레이어는 일심동체가 아닌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지만 그것을 또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녀들이 일심동체라니 끈적끈적한 단어라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야 또라이들아. 나 잠깐 숙소로 간다. 씻고 올게.”

“잘 때 씻는다며?”

“생각이 바뀌었어.”

류제를 감시해야 해. 라고 재경이 중얼거리자 그녀들은 같은 반 남학생들끼리 벌어지는 치열한 떡밥 싸움에 포복절도를 했다. 물론 진심이 아니라 장난이었다.

재경은 그녀들이 배꼽 빠져라 웃어대자 또 미쳤나 보다 치부하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것보다 유네를 구해줘야 한다.

곤란한 얼굴로 류제와 같은 탕을 사용하고 있을 유네 생각에 마음이 급해진 재경이 남자 숙소에 있는 노천탕으로 뛰었다.

재경이 향해 달려오는 중인 노천탕 안에는 앞머리를 올려 수건으로 고정해 놓고 몸을 담근 류제와 그와 최대한 떨어져 턱밑까지 몸을 온천에 파묻은 유네가 있었다.

“후, 시원하다.”

“으…으응.”

유네는 저번 달 재경과 목욕탕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재경은 유네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다른 탕에 들어갔지만 류제는 아니었으니까 당연히 더 곤란하겠지.

“야! 류제, 잠깐 이리 나와… 우아악!”

“어, 렌, 조심―”

그러나 세계가 판단하기로 지금 이 서비스 신에서 가장 방해되는 사람은 류제가 아니라 삼류 악당 렌 지미였다.

짐작했다시피 이 세계에는 ‘정해진 미래’는 ‘그대로 따라야’ 하며 바뀌지 않는 인과가 존재했다. 이 서비스 신도 그 중 하나였다.

바뀌지 않는 인과를 바꾸려고 하니 여탕도 엿보지 않은 렌 지미라는 이물질을 잠재우기 위해 이 세계가 「파이널 데스×네이션」처럼 우연의 우연을 만들어냈다.

그 우연의 종지부는 바로 유네가 온천에 들어오기 전 실수로 떨어뜨린 비누로부터 시작했다.

그 비누는 류제가 뒤이어 들어오면서 옆으로 밀쳐졌고, 주르르 미끄러져 온천으로 들어오는 입구 바로 앞에 놓였다. 그다음으로 들어온 재경이 뛰어오다가 그걸 보지 못한 것은 뻔한 이야기였다.

탕에 있던 류제가 차마 일어나기도 전에 비누를 밟고 미끄러진 재경이 앞으로 넘어져 이마를 찧었다. 재경은 뇌진탕으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당황한 류제가 노천탕에서 나와 넘어진 재경을 보러 나감으로써 유네가 난감해질 상황은 비껴갔지만 재경의 머리는 또 한 번 깨지는 신세가 되었다.

각목으로 뒤통수 후려쳐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다시 화려하게 넘어진 재경이 어지간히 안타까웠는지 류제가 탄식하며 다가갔다.

유네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재경을 살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제 몸뚱아리 사정상 그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노천탕의 끝에서 고개만 내밀었다.

“렌 군, 괜찮아? 류제 군. 렌 군 무사해?”

“렌. 야, 렌! 미끄러운데 왜 갑자기 뛰어와서 그래?”

미연시 주인공답게 남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잘 잡힌 몸에서 물방울이 미끄러져 바닥을 적셨다.

쭈그려 앉은 류제가 재경의 볼을 툭툭 쳐봤지만 재경은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개구락지처럼 대자로 뻗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류제는 넘어진 게 부끄러워서 그런가 싶어서 재경의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류제 군… 렌 군 괜찮은 거 맞아?”

“안 괜찮은 거 같아. 렌. 또 기절한 거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재경의 눈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류제는 어떻게 하면 좋나 모르겠어서 재경을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불러올 테니까 밖으로 나와서 렌 좀 봐줘.”

“아… 으…으…응!”

기숙사에서는 볼 일 없었던 류제의 알몸이 남사스러울 정도로 드러나자 몸을 탕 밖으로 뺐던 유네가 놀라 푹 수그렸다.

수증기 속에 가려진 작은 가슴이 빨개진 유네의 얼굴과 어우러져 예견대로 크나큰 서비스 신을 만들어 냈지만 류제는 당장에 재경이 더 급했기 때문에 유네는 안중에도 없었다.

류제가 기절한 재경을 데리고 나가자 유네가 헐레벌떡 가운을 걸쳤다. 알몸이고 뭐고 유네도 정신을 못 차리는 렌이 걱정이었다.

딸그락. 재경이 넘어지면서 자빠뜨렸던 바구니 하나가 데구루루 굴러 바닥 한가운데에 빙글빙글 돌다 멈췄다.

재경에 의해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는 불변의 미래. 그 나비효과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치달을지 이 세계를 꿰뚫고 있는 재경조차 결말을 알지 못했다.

* * *

밤새도록 수학여행 챕터 스토리라인 분석하랴, 처음 가는 여행 기대하랴, 소풍 가는 유치원생처럼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을 설쳤던 재경은 깡패들과의 싸움을 포함해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지쳐있었다. 그래서인가 류제의 손에 이끌려 온 세라가 다시금 머리를 치료해 주었음에도 그대로 쿨쿨 잠이 들고 말았다.

깡패에게 맞서 싸운 맹활약 덕분에 오늘만큼은 바람대로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기회였지만 결국 저런 꼴인 걸 보면 이것도 그의 여복인가 싶다.

갑자기 노천탕으로 뛰어와서는 혼자 비누를 밟고 넘어지고 그대로 쿨쿨 자버린 렌이 류제는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제 친구들이 얼마나 놀랐는지도 모르고 천하태평하게 잠이 든 재경을 내려다보며 유네도 류제도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렌도 잠들었겠다, 반 친구들이 놀고 있는 방에 가서 어울릴 생각이 없었던 두 사람도 소등 시간이 멀었음에도 이불을 펼치고 불을 껐다.

재경을 가운데로 두고 양옆에 누운 그들은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온천의 혈액순환 효과 때문인지 노곤해져서 금방 잠이 들었다.

째깍째깍. 벽시계가 소리의 공백을 대신 채웠다. 창문 새로 들어온 달빛이 잠든 그들을 비추었다. 밖에서는 여행의 흥분에 취한 여학생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경이 잠꼬대하듯 이불을 류제 쪽으로 휙 차버렸다. 쿠울. 팔자도 좋게 잠든 재경은 아직 남아있는 왕녀 힌트 이벤트와 미나 플로리아의 시크릿 이벤트는 내버려 두고 완전히 꿈나라로 향했다.

양옆에 누운 류제와 유네도 고요하게 숨을 골랐다. 옆으로 돌아누웠던 류제의 굳게 감은 눈두덩이 움찔거렸다.

새파란 달 아래, 까마득하게 보이는 건물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여학생이 붉은 동공을 빛냈다.

선택, 선택, 선택. 플레이어들에게 물음을 던져 무의식을 캐치해 내는 방식으로 이상형에 가장 근접한 히로인을 찾아내 주는 서큐버스 미나 플로리아의 시크릿 이벤트는 바로 그 어떤 장소도 아닌 류제의 꿈속에서 벌어졌다.

류제가 자신의 힘을 자각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 펠노아의 시내에서 류제의 미약한 각성을 감지한 서큐버스가 접근해 온 것이 그 트리거였다.

류제의 몸이 멈칫거렸다. 그가 꾸는 꿈에서는 모든 것이 롤러코스터처럼 순식간에 지나쳐 갔지만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실루엣이 남아있었다.

“렌?”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의 정체를 류제는 렌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 흐릿함이 명확해지고 배경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수채화 물감이 퍼지듯 정교해졌다.

여긴 어디지? 렌? 거기서 혼자 뭐 해?

류제가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앉아있다. 나는 앉아있어. 푹신하다. 침대? 라고 상상하니 앉아있는 곳이 침대가 되었다. 어둑어둑하고 날카로운 장식이 달린 은밀한 침대다.

저 멀리 서있다고 생각했던 렌이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아있었다. 류제는 평소와는 다른 얼굴로 웃는 렌이 이상해서 그의 어깨를 잠시 다독였다.

“왜 그래? 머리는 이제 괜찮아?”

노천탕에서 화려하게 넘어지던 렌의 모습이 꿈과 합쳐졌다. 다쳤던 렌이 생각나자 이윽고 오늘 늦은 오후에 있었던 싸움도 아릿아릿 치솟았다.

그 감정이 떠오르니 이미 해결된 일인데도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놈들이 렌의 머리를 쳤어. 내 앞에서. 그랬더니 피가 나서… 너무 화가 났지. 그놈들을 전부 다 죽여 버리고 싶었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악한 마음이 속삭였다. 자신은 어느새 렌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주근깨 때문에 울퉁불퉁할 것 같아도 렌의 볼은 실은 아이 피부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다.

“렌…….”

이 말도 안 되는 풍경이 꿈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한 류제는 렌을 끌어안고 마음껏 응석을 부렸다. 오늘 하루 종일 떨어져 있던 렌이 드디어 곁에 있다.

널 독점하고 싶어. 네가 나만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

꿈속에 들어와 도덕심이 배제되자 남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마음에서 욕망이 넘쳐흐르도록 차올랐다. 무슨 욕망일까. 류제는 그 정체를 알아차려야 했다.

시야가 역전되어 고꾸라졌다. 렌이 야릇한 몸짓으로 류제의 눈가를 가렸다.

그래, 렌이 나한테 이런 의미 불명의 행동을 했다. 지금처럼 내 배에 올라타서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양 눈을 가렸지. 무슨 의미지? 무슨 의미였을까?

류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의 상상력으로 다시 만들어진 그 자세가 몹시 고혹적인 것은 알았다.

아냐, 렌은 전혀 고혹적이지 않아. 바보에다가 솔직하지 못해서 자기 손해 보는 놈이라고. 난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다른 놈들은 몰라. 나만 렌을 제대로 보고 있어.

“왜 그러는 거야.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어.”

류제가 렌을 침대 위에 넘어뜨려 제 밑으로 깔았다. 그가 렌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렌은 그런 이상한 미소 안 짓는다.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웃는다고.

그럼 우는 모습은?

그렇게 상상하자 류제 렌이 마치 현실의 그처럼 당황스러워했다. 현실에서 류제가 자신을 이렇게 무섭게 제압할 리 없었으니까.

류제도 깜짝 놀라 짓눌렀던 양 손목을 떼려고 했으나 귓가가 새빨개진 채 자신을 흘기는 눈동자가 아찔해서 그대로 고개를 틀어 그에게 키스해 버리고 말았다.

그 실천력에 경악하며 류제는 스스로도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다. 안 되는 건 아는데 키스를 했다는 사실이 몸이 짜릿해질 정도로 행복했다.

상상으로 만들어진 입술을 맞대고 아득하게 그를 내려다보면 렌은 거부하지 않았다. 꽉 안아주고 싶다.

그 마음에 정신없이 탐닉하는 동안 둘은 어느새 속옷 차림이 되어있었다.

“렌… 다른 애들한테 가지 마. 친구는 나면 족하잖아.”

가장 친한 친구. 그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존재가 되고 싶다.

성인들이 하는 행위를 따라 하듯 류제가 자신이 만지고 싶은 렌의 모든 부위를 어루만졌다. 이 손바닥에 닿는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하루 종일 곤두박질쳤던 질투심이 꿈속에서 충족되자 그 감정은 안정과 평화를 가져왔다. 소유했다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래, 나만 있으면 되잖아. 절제하고 외면했던 비뚤어진 생각이 꿈속에서는 배로 증폭되어 그 마음이 당연시된다.

“류제.”

간신히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담는 렌이 미친 듯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이 감정을 주시하던 류제는 돌연 위화감이 몰려들었다.

간단한 의문 때문이다. 과연 진짜 렌이 이런 내 감정을 알고 납득할까? 내가 정말 이런 말을 하면 렌은 나를 받아들여 줄 거 같아?

절대 아니야.

그렇게 여기니 자신이 만지고 있던 렌의 손이, 발이, 얼굴이 미라가 되어 바스러졌다.

헉, 하는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류제가 몸을 일으켰다. 악몽을 꾼 것처럼 식은땀이 흘러 잠옷으로 입었던 체육복이 축축해졌다.

정신을 차리니 주변은 모두가 잠든 것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아까 그를 휩쓸었던 격렬한 감정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다. 벌렁벌렁 뛰는 심장에 류제가 손을 얹었다. 촉감이 생생했다.

“하……!”

류제가 안타까운 듯이 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슨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렌을?

꿈속에서 행해졌던 만행이 이해가 안 되는 류제는 옆에서 배를 내놓은 채 코를 고는 렌을 쳐다보았다. 꿈에서 나온 요염한 모습과 정반대였지만 그가 탐닉했던 흔적들이 보여 류제는 혼란스러웠다.

미치겠네. 발칙한 꿈이 찝찝했던 류제는 배를 보인 채 속 편하게 잠든 렌에게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에서 나와 여관의 넓은 정원을 거닐던 류제는 아무리 그래도 렌이 나오는 꿈을 꾸고 발정을 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친구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 당연 소름이 끼친다.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 이유도 땀을 식히기는 개뿔 옆에서 자고 있는 렌을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어서였다.

까르르 떠들어대던 소리가 들렸던 게 방금 전 같은데 벌써 늦은 새벽이 되었는지 여관은 전부 소등이 되어 찌르르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밖으로 나오니 마음이 놓인다.

“나 참.”

그런 개꿈은 곤란하다. 내일 렌 얼굴을 어떻게 본담. 그때까지 까맣게 잊으면 좋을 텐데. 꿈이란 건 빨리 잊히잖아. 류제가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했다.

늦은 밤 4월의 공기는 아직 차가웠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렌이 벌로써 청소했던 정원을 돌아다니던 류제는 어찌 된 우연인지 정원 내에 있는 작은 벤치에서 황금빛 머리의 히로인을 발견했다.

키아나트리체의 고고한 제1왕녀,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야한 꿈에 정신이 팔려 주변을 살필 여력이 없던 류제가 뒤늦게 그녀를 발견하고 주춤거렸다.

왕녀에게 다가갔다간 친위대가 또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몰라 류제는 모르는 척 지나치려고 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가?”

무슨 생각인지 인형처럼 벤치에 앉아있던 니냐롯트가 걸음을 빨리하는 류제를 작은 목소리로 호출했다.

“내 곁에 있던 이들이라면 모두 잠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니 시간을 할애해 다오.”

안 그래도 이상한 꿈 때문에 미치겠는데 이번엔 또 왕녀냐. 못마땅한 류제가 눈가를 실룩거렸다. 찌르르 벌레가 우는 소리가 그와 그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채웠다.

고심 끝에 렌이 나오는 꿈을 꾸면서 발정한 사실에 끙끙 앓느니 친위대의 방해 없이 왕녀와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정신 건강에 이롭다 판단한 류제가 마지못해 벤치에 앉았다. 그녀를 의식한 듯 상당히 거리를 둔 자리였다.

“고맙군.”

왕녀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답례 인사를 했다.

“별로.”

수학여행 첫째 날 밤, 시간은 12시가 넘었으니 둘째 날 새벽이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첫째 날 밤이라고 여긴다면 밤중에 땀을 식히러 나온 류제를 호출하는 왕녀의 이벤트가 수학여행 첫째 날에 벌어지는 마지막 힌트 이벤트였다.

재경이 왕녀의 이벤트는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했지만 류제는 쉽게 끌어낸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빙의를 하기 전, 멋모르고 게임을 즐기던 재경은 주인공이 잠이 드는 것을 보고 당연히 다음 날로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런데 돌연 꿈속이라며 선택지가 이리저리 뜨다가 가슴이 거의 다 드러난 야한 장면이 떠버리니 멀쩡한 정신으로 게임을 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당황한 재경은 얼결에 엔터를 연타했고, n회차 플레이를 할 때마다 스킵해 버리는 바람에 주인공이 꿈에서 깼을 때 ‘밖으로 나간다’라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했다.

엔딩 분기는 밸런타인데이를 기점으로 발생한다. 왕녀의 호감도가 5까지 꽉 차지 않거나 다른 히로인의 호감도가 3 미만인 상태에서 밸런타인데이 때 왕녀를 선택하면 반드시 전쟁에서 패배한다.

매번 그런 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한 재경은 늘 왕녀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를 실패했으며 그런 바보 같은 상황을 몰랐던 재경은 메인 히로인인 왕녀 공략을 어려워했다.

나중에야 비로소 위키를 보고 왕녀 공략에 성공할 수 있었고 재경이 메인 히로인 엔딩인 트루 엔딩을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은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자고 있는 렌 때문에라도 밖으로 나가야 했던 류제는 무사히 왕녀와 만났다. 어찌 되었건 재경 덕분에 만들어진 우연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군.”

“자다 깬 거야.”

“그러한가. 안색이 좋지 못하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건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류제는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안 좋은 꿈인지는 모르겠으나 꿈속에서 격해졌던 감정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것을 보니 정신 건강에는 좋지 않은 꿈이었다.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왕녀가 위로하듯 말을 꺼내 들었다.

“꿈은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사람의 내면을 나타내는 지표기도 하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황인지, 무엇이 힘든 것인지.”

“그래? 그냥 옛날 기억을 꾸는 건 줄 알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헤어 나올 수 없이 신경 쓰이는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꿈속에 렌이 그런 모습으로 나온 것은 무슨 지표란 말인가. 그냥 개꿈인가? 그렇게 따지기엔 거슬리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렌이 다른 여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면 느껴지던 찝찝한 기분. 분명 자신은 질투하고 있었다. 이제 나 없이도 뭐든 잘해 낼 것 같은 기분이 싫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이 어째서 그런 욕망으로 분출되었는지는 알기가 두렵다. 내가 렌한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잖아. 아냐. 난 아세미가 커가는 걸 지켜보는 것처럼 렌도…….

“젠장, 맞는 말인 거 같아.”

솔직해지기로 한 류제가 눈을 질끈 감고 동의했다. 막냇동생과 같은 취급이었다면 애초부터 렌이 친구들과 평범하게 노는 것에 기뻐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꿈이 두렵다. 그깟 악몽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 참으로 두려워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피곤에 찌든 왕녀가 벤치 등받이에 목을 기대었다. 어슴푸레한 하늘이 그녀를 바라보는 듯했다.

달빛이 창백한 피부를 병약하게 비추었다. 엄했지만 강직했던 기숙사 식당에서의 첫인상은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류제는 왕녀가 요즘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오늘 사원에서 비틀거린 것도 그것 때문이다. 만백성을 책임져야 할 일국의 왕녀가 자기 관리를 못 하다니 부끄러운 일이지.”

“그 정도로 잠을 못 자는 거야?”

“하루에 한 시간, 많으면 두 시간. 그 정도 자는 것 같군.”

“고작 꿈 때문에?”

“어처구니없겠지만 그렇다. 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이 내게도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을까. 입학한 이래로 계속 이 상태다. 어렵사리 잠이 들면 늘 똑같은 꿈을 꾸지. 꿈을 꾸면 나는 괴로워져서 밤마다 뇌우를 퍼부어 버리곤 해. 왕녀란 자가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다니 한심한 꼴이다. 그러니 난 차라리 잠을 자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녀가 안타까운 듯이 한숨 쉬었다. 류제는 한탄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나도 렌이 나오는 꿈을 두 달간 꾸면 잠을 자기 힘들 것 같긴 해. 렌 얼굴을 보는 것도 무서울 거고. 피곤하고, 신경 쓸 건 많고,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신경 쓸 것이 한 나라에 대한 일이라면 더욱더.

꿈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하다 보니 왕녀의 마음이 와 닿았다. 비로소 니냐롯트에게 관심이 생긴 류제가 그녀에게 물었다.

“무의식적으로 뇌우를 퍼부을 정도라니. 무슨 꿈인지 말해 줄 수 있어?”

“못할 것 없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늘 똑같으니 꿈속에서 나오는 것도 똑같아. 내가 가장 걱정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것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이다.”

“어떤 걱정인데?”

“눈을 감았다 싶으면 키아나트리체가 불에 타는 모습이 보인다. 백성들은 마족에게 붙잡혀 생살을 뜯기고, 그것을 지켜보는 나는 무력하며, 비명을 지르는 그들이 나에게 구원의 손을 뻗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는 똑같다. 마족들은 나를 보며 조롱하고 내 군대는 내 눈앞에서 전멸했다. 그들의 몸은 마족들에게 유린당한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니 그들은 나를 그저 쳐다본다. 죽어가면서, 눈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원망하지.”

두 달간 반복된 꿈의 기억이 생생하게 뇌리에 스치자 소스라친 왕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걱정하는 마음이 병이 되어 돌아와 나를 위하는 자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이 아이러니가 나는 질렸다. 하지만 어떤 자가 와도 이 병을 치료할 수가 없구나. 나는 지쳐가는데.”

“마족들이 키아나트리체를 침략하는 것이 두려운 거야? 하지만 나라카는 마왕이 죽은 이래로 잠잠해졌잖아.”

“류제 신리여. 언제나 수면 아래 잠잠한 것들이 무서운 법이다.”

어빌리티가 감정과 연관되는 왕녀가 쓸쓸하게 답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함에서 느끼는 감정.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가 두렵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인간이라서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기에 마족과 대적하는 인류의 희망은 어빌리티가 아닌 그 두려움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감정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풀 내음을 맡고 있노라면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누나. 그대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 작은 찌르레기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긴 하네.”

“천천히 마음을 비우면 이 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마치 푹 잠을 자는 것처럼.”

류제도 왕녀가 말한 것처럼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내쉬며 귓가에 울리는 벌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찌르레기 소리만 있겠나, 바람이 풀에 스치는 소리,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 더 고요하면 달빛이 내리쬐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 점점 류제의 혼란 속에 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조금씩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갔다.

“이대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좋으련만.”

“이렇게 명상을 해도 악몽을 꾸는구나.”

“그래서 문제란 것이지. 하지만 이건 내 마음의 문제이니 내가 해결해야 한다. 그대가 걱정할 것 없어. 내 이 병 때문에 여행지까지 와서 그대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오히려 내가 미안한 일이야.”

“…….”

“늦었지만 친위대 일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대가 지금껏 그녀들 문제로 마음고생한 것 안다.”

니냐롯트가 루이나를 필두로 한 그녀들을 떠올렸다.

손은 다소곳하게 양 무릎 가운데에 올려놓고 가련하게 눈을 뜬 그녀의 속눈썹에 달빛이 눈처럼 내려앉았다. 류제는 어느새 왕녀 쪽으로 몸을 틀고 있었다.

“사과보다는 그 애들 좀 어떻게 해봐. 내가 원해서 너랑 같은 조가 된 것도 아니고.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나도 노력하겠다만… 류제 신리여, 그자들이 내 명령으로 움직이는 자들처럼 보이는가?”

“친위대는 네 부하들 아냐?”

“그들은 나의 추종자일 뿐이다. 나의 권력과 힘과 사상에 동의하여 모인 자들이지. 그들은 내 부하가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들에게 명령할 수가 없구나.”

“그렇다고 해도 네가 뭐라고 말을 하면 들어줄 거 아냐.”

“나는 아직 어리고, 파벌이 작다. 왕위 계승권이란 것은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언제든지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 있다. 류제 신리여, 나처럼 정치판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마족이잖아?”

“아니. 나와 같은 편인 자들이다. 그들은 내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떤 적보다 더 강한 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지.”

“네가 거슬리는 말을 하면 걔들이 널 배신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무슨 말이 그래.”

“…내가 가장 눈치를 봐야 하는 자가 바로 나를 믿고 따라오는 추종자들이라는 의미다. 정말 모순적이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네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어.”

쓸쓸한 미소를 띠며 왕녀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소곳하게 매무새를 정리한 그녀가 몸을 살짝 틀어 옆에 앉은 류제와 눈이 마주쳤다. 요정 같은 맑은 눈동자 안에 류제가 달빛과 함께 담겼다.

“내 신세 한탄에 불러 세워서 미안하구나. 그저 오늘 일에 대해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무능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내가 루이나에게 꾸중했으니 내일부터는 피곤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화를 풀어다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고맙다. 상냥한 자구나.”

상냥하다는 말에 류제가 입맛을 다시며 볼을 긁적거렸다. 별로 상냥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지만 널 믿고 따르는 자들은 네가 나무란다는 이유로 널 배신하지는 않을 거야. 쉽게 흔들린다면 처음부터 네 권력에 빌붙을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니 차라리 잘라내버려. 그러니 너도 걔네들한테 민폐라고 확실히 표현해 줘.”

“…그러한가. 그대가 말하는 정답은 그것인가.”

“그래. 정치판이고 뭐고 그게 더 나아. 사람은 좀 이기적이게 굴어야 하거든. 빨리 불면증이 나았으면 좋겠네. 나도 그렇고.”

“그대는 어떤 꿈을 꾸었기에 이 오밤중에 눈을 뜬 건가?”

“무슨 꿈이긴… 그냥… 꿈이지.”

“악몽이었나?”

“글쎄. 악몽일까.”

대화를 하는 동안 잊고 있었던 꿈의 기억이 언뜻 떠오르자 착잡해진 류제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악몽이냐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악몽이 아니다. 그건 제 추잡스러운 욕망이 점철된 자신의 내면이었다. 하루 종일 렌에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을 그 꿈을 통해서 깨달아버린 류제는 결국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의 고민도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군.”

“그러게나 말이다.”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구나. 이런 이야기는 추종자인 그녀들에게 할 수 없는지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나에게는 털어놔도 괜찮고? 이상한 애네. 추운데 너도 들어가서 눈이라도 감고 있어. 사람은 눈만 감고 있어도 잠을 자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대. 나도 슬슬 들어가서 마저 자야겠어.”

“조언 달게 받겠다. 그대도 오늘 밤 좋은 꿈을 꾸길 바란다.”

왕녀의 작별 인사를 류제는 뒷모습으로 답했다. 좋은 꿈이라. 류제는 방에 들어가면 있을 렌의 얼굴을 꿈에서 보았던 모습과 혼동하지 않기를 바랐다.

달밤의 데이트 끝에 방으로 돌아가는 류제를 멀리서 바라보는 몽마―미나 플로리아는 허리에 난 검은 날개를 바람에 맞춰 펄럭거리며 짜증 나는 초록빛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붉은 동공에 비막의 날개, 머리에 난 양과 같은 뿔은 그녀가 마족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탐색’ 어빌리티를 가진 세라에게 탐지되지 않는 이유는 ‘서큐버스’라는 종족 특성과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강한 마법 덕택이다.

“이건 좀 재미있게 되었는걸. 후후… 마왕님도 참 욕심도 많으셔서.”

설마 싶었지만 마음에 둔 사람이 같은 반 친구이자 동성인 렌 지미라니. 그저 친구라서 챙겨주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지.

류제 신리가 마왕으로서 각성하면 그녀의 힘으로는 그의 꿈을 어지럽힐 수 없는데 이 정도로 쉽게 가능한 걸 보면 마왕으로 완전히 각성하는 것은 먼일인 것 같고. 점진적인 각성을 위해서 확실한 계기들을 제공해야 하는데 렌 지미라는 그 지표를 발견한 것 같아 그녀는 기뻤다.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이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이지.”

그녀의 사명은 끝내 류제 신리를 각성시키고 타락시켜 마국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라카의 부활을 위해. 라고 그녀가 속삭이며 사라졌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잠에서 깬 듯한 복장으로 비틀비틀 정원을 거닐다가 벤치에 있는 니냐롯트를 발견하고 방으로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수학여행 첫 번째 날,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밤은 재경의 간섭 없이 그렇게 끝이 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