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2)
드디어 재경이 고대하던 자율 행동 시간, 줄여서 자유 시간이 찾아왔다.
선생님이 공지했던 두 시 반이 되자 유명 관광도시 펠노아를 자율적으로 탐방하기 위해 제립학교 1학년 학생들이 여관 밖으로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삼류 악당 렌 지미와 남장 여자 유네 나르타를 포함한 1학년 8반의 6개 조도 조별로 짜온 스케줄대로 펠노아 탐방에 나설 준비를 했다. 8반 남자 숙소에 제일 먼저 도착했던 렌은 FIFO로 숙소를 떠났고, 유네와 류제가 뒤를 이었다.
저를 버리고 떠나려는 조원들을 뒤쫓는 유네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 준 류제는 느긋하게 자기 조원들에게로 향했다.
지각한 류제를 발견한 비키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늦었어!’라고 화를 내는 일이었다. 입맛을 다신 류제가 볼을 긁었다. 하여간 어디 사는 누구랑 닮았는지 바깥 활동에 쓸데없이 바지런하다.
“5분이나 지체됐잖아. 갈 길이 멀단 말야!”
“우리 조는 어디 가는데?”
“지금 장난해? 기차 안에서 뭘 들은 거야?”
반장에 조장 역할에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비키는 류제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너무했다. 그렇게 경고했건만 또 딴생각한다고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하다.
오늘따라 심해진 류제의 무관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는 저번 달 렌 지미와 그녀의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목격했던 확신에 찬 눈동자나 펜던트를 찾을 때의 진지함과 대비되어서 비키는 슬슬 제 안목이 잘못되었나 넌더리가 났다.
웃기고 있네. 등을 맞댈 믿음직스러운 동료라고? 저런 놈한테 내 등을 맡긴다니 자만도 유분수다.
“키아나트리체에서 가장 크다는 텔다 사원을 들렀다가 펠노아 국립묘지에 간 다음에 빙과당 본점에 가기로 했잖아. 계속 설명했더니 뭐야. 날 무시하는 거야?”
“미안.”
“미안하다면 다지?”
“하지만 왕녀도… 아니. 지금부터 집중할게.”
왕녀도 나처럼 일정에 관심 없지 않았냐고 말하고 싶었던 류제는 왕녀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던 비키의 말과 현재진행형으로 으르렁거리는 비키의 표정이 오버랩되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류제는 혹시 변명거리로 삼으려 한 것을 들었을세라 왕녀를 힐끗거렸다. 왕녀는 그마저도 관심 없다는 듯 차가운 눈동자를 햇빛에 반짝거리게 내버려 두었다.
아무리 신분 차가 있다지만 같은 학생인데 왕녀는 일정에 무관심해도 되고 나는 안 되다니 불공평하다. 그리고 내가 비협조적이게 된 건 왕녀의 친위대 때문인 것도 있잖아. 그것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 피곤하지 않았을 거라고.
“앞으로는 제대로 해.”
마지막으로 경고한 비키가 붉은색 말총머리를 휘두르며 왕녀와 함께 텔다 사원으로 앞장섰다. 핀잔을 들은 류제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 뒤를 따랐다.
일정을 열심히 준비해 준 비키에게 미안하게 되었다. 기차에서 봤던 자료집을 떠올리자니 수학여행을 기대한 건지 펠노아를 열심히 조사한 것 같던데. 내가 좀 너무했나.
렌도 비키랑 성격이 비슷하니까 펠노아 관광지에 대해 찾아보고 그랬으려나? 두 시 반이 되자마자 잽싸게 숙소를 떠나버린 렌을 보면 그럴 것 같다.
렌과 같은 조가 되었더라면 나도 비키처럼 이것저것 조사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류제는 왕녀가 불편했다.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친위대를 수수방관하는 왕녀가 단연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왕녀와 같은 조가 된 게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사사건건 친위대들의 시비를 받아야 하는지. 왕녀도 마찬가지야. 보고 있으면 내버려 두지만 말고 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일국의 왕녀에게 향하는 불경한 마음이 싫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 류제가 뚱한 표정을 돌렸다. 왕녀와 나란히 걷고 있는 비키가 어떻게든 왕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익숙하지도 않은 알랑방귀나 뀌어대는 것도 거슬린다.
류제와 보폭을 맞춰 걸어가던 미나는 그들도 앞서가는 두 사람처럼 대화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는지 흠흠 작게 헛기침을 했다. 곧 그녀가 점잖게 말을 걸았다.
“왕녀님이 불편해서 그러는 거라면 이해해 줘. 저하께선 요즘 피곤해 보이시거든. 국정 일이 바쁘시나 봐. 다른 것도 아니고 키아나트리체에 사는 우리를 위한 일이잖아.”
“불편한 건 왕녀뿐이 아냐.”
“그럼?”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너마저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나랑 괜히 같은 조가 되었다 생각했지?”
“아냐, 아냐. 난 류제하고 같은 조가 되어서 오히려 기쁜걸. 실은 그런 욕심으로 의견을 낸 거고. 하하”
미나가 쑥스럽게 웃었다. 서큐버스 모드가 아닌 도서위원 미나 플로리아 모드인 그녀는 서큐버스에게 자주 인용되는 수식어인 음란함이나 요망하다는 단어와 이미지가 상반되었다.
재경이 괜히 게임 플레이를 하면서 미나에게 깜박 속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류제가 보기에도 그녀는 어떤 남자도 녹일 만큼 지적이며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류제가 가만히 쳐다보자 말에 오해 살 만한 단어가 있다고 짐작한 미나가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 기쁘다는 게 이상한 의미는 아니야. 내가 류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언제가 돼도 좋으니 한 번쯤은 같이 대화해 보고 싶었어. 동경의 의미로.”
“그래?”
같은 반에 있으면서 몇 번 스쳐 지나간 적은 있지만 그런 기색이 없었기에 미나의 말은 굉장히 의외였다. 반에서는 늘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도 소곤소곤 대화할 정도로 조용해서 내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신기한걸.
진심을 담아 말해도 류제가 빈말을 들은 표정이자 미나가 재능을 타고났으면서 겸손하기까지 한다며 혼자 흥분했다.
“그야 대단하잖아! 어릴 적부터 기간트리카를 다뤄온 비키 님도 맨몸으로 막고, 제약을 받지 않는 ‘강화’라는 특수 어빌리티도 그렇고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이것저것 다 잘 하는 팔방미인인걸.”
“별로… 기간트리카 실전 경험은 비키가 더 많고. ‘강화’ 어빌리티가 특수하긴 해도 만능은 아닌데.”
“류제는 정말로 겸손하네. 만능은 아니지만 만능에 가까우니까 다들 부러워하는 거야. 내 어빌리티는 ‘분석’이라서 대결을 하더라도 도움이 잘 안 돼. 네 어빌리티는 공격하고 보조 모두 가능하지?”
“상황에 따라서는 그러겠지.”
“그게 얼마나 대단한데. 게다가 어빌리티 척도에 새로운 기록을 냈다며? 선생님들이 이야기하시는 거 얼핏 들었는데 키아나트리체 왕실에서도 널 주목하고 있대. 아마 졸업하면 제일 좋은 군부대로 배정되지 않을까 부러워. 남자 최초로 백장미 부대에 들어간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너 생각보다 수다쟁이구나?”
얌전한 애인 줄 알았는데 점점 말이 많아지자 류제가 언성을 높이는 미나에게 피식 웃었다. 그가 보기에 미나는 일부러 그에게 말을 걸어주다가 저도 모르게 본심이 나온 것 같았다.
양손으로 주먹을 쥐어서 파이팅 자세로 눈을 반짝거리던 미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미안. 내가 말이 많았지? 창피하네.”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미나가 안경 너머에 있는 눈동자로 류제를 힐끗거렸다. 크흠. 헛기침을 한 그녀는 찰랑거리는 초록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류제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과할 것까지야. 그나저나 넌 왕녀와 친해? 가끔 보면 같이 이야기하고 있던데. 아니면 너도 친위대인 거야?”
“그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왕녀님께서 날 마음에 들어 하셔서 그래. 차가운 얼굴을 하고 계시지만 상냥하고 마음이 여리신 분이야.”
“그래?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늘 근엄한 표정으로 있거나 뇌우를 뿌리며 고함을 치는 것밖에 본 적이 없는 류제는 마음이 여린 왕녀라는 게 상상이 안 갔다. 미나는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정말이야. 왕녀님이 얼마나 귀여우신데. 그저 책임감이 강하셔서 그래.”
“알았어, 믿을게.”
자기 일도 아닌데 필사적으로 굴어서 류제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생긴 건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마치 말도 안 되는 것 가지고 우기는 렌 같다.
류제가 웃자 뾰루퉁하게 볼을 부풀리던 미나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힐끗거렸다. 그녀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후후. 웃어서 다행이다. 나랑 대화하는 것도 재미없으면 어쩌나 걱정했어.”
재경이 보면 ‘저 요망한 년이 우리 류제한테 꼬리를 치네!’ 하고 분개할 정도로 재치를 부리는 미나는 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수줍었다.
그녀는 지금껏 과장스러운 행동을 한 이유가 류제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계산된 행동임을 내세우듯 금세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우리랑 있는 거 재미없지? 너도 같은 남자애들하고 한 조가 되고 싶었을 텐데.”
“이미 결정된 거잖아.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너무 아이처럼 굴었다는 것을 깨달은 류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이니까, 욕한다면 왕녀님 말고 날 욕해줘. 그런데 네 친구… 렌 지미라는 애가 날 싫어하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혹시 뭐라고 했을까 걱정이야.”
“친해지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야.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래? 다행이다. 나중에 꼭 말 걸어볼게.”
미나가 안도하며 웃자 울컥하고 차오르는 마음이 이상했던 류제가 일순 머뭇거렸다.
이전부터 느낀 건데 다른 사람이 렌과 있을 때 왜 내가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이상하다. 렌은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어 했으니까 친구로서 응원을 해줘야 하는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걸으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미나와 친해진 류제는 앞서가는 두 명의 히로인과 함께 목적지인 텔다 사원에 도착했다.
텔다 사원은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작은 산 정상에 있는데 그 사원은 거대한 규모와 기교 넘치는 섬세한 건축양식으로 긴 세월 동안 사랑받고 있다고 책자에 쓰여 있었다.
텔다 사원 옆에는 마족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의 유골을 정성을 다해 관리하는 펠노아 국립묘지원이 있었다. 그들이 방문할 장소는 그 두 곳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제립학교 학생들이 수학여행 첫 번째 날 여행지로 찾아온 관광도시 펠노아는 마족들의 나라 나라카국과 상대적으로 가까웠다.
적국인 마국과 가까우면서 왜 관광도시로 번성했냐는 질문에 답하자면 오래전 인류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왔을 때 키아나트리체를 선두로 한 최초의 비공식 인류 연합군이 펠노아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인류를 승리로 이끌었던 키아나트리체 최초의 황제가 텔다 사원에서 하루를 묵으며 목욕재계를 했다는 야사가 있어서 텔다 사원에서 기도를 올린 후 온천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큰 성공을 하게 된다는 말이 전설로서 전해 내려왔다. 마왕이 죽고 마국이 잠잠해진 것도 이 텔다 사원 덕분이라고 펠노아 시민들은 믿었다.
“저것 봐. 저 종이를 문에 걸어놓으면 마족들이 집에 못 들어온대. 후후후, 진짜일까?”
“거짓말 아냐? 마족이 무슨 귀신도 아니고.”
사원에서 파는 액막이 부적을 가리키는 미나의 순진한 질문을 비키가 바보 취급했다. 귀염성 없는 대답이란 건 알지만 고작 저런 걸로 마족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면 셀로니아 가문이 마족의 습격으로 멸족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비키는 아니꼬워서 고개를 팩 돌렸다.
“하지만 마족들이 성스러움에 거부감을 가진다는 말은 사실이지. 펠노아는 과거 나라카국에 의해 수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지금껏 무사하지 않나. 사람들은 저 사원의 덕택이라고들 말한다.”
텔다 사원의 또 다른 전설로 내려오는 천 개의 계단 앞에서 왕녀가 말했다. 키아나트리체 왕녀의 입장에서는 키아나트리체를 건국한 황제가 머물렀다는 이 장소가 꽤나 마음에 쓰이나 보다.
류제는 왕녀가 화를 낼 때를 제외하고 이만큼 말을 길게 했던 적이 있었나 신기했다. 가지런한 속눈썹을 아련하게 부채질한 그녀는 저 위에 보이는 사원의 장렬한 모습을 눈에 새겼다.
“사람들의 소망이 모두 모인 기적의 장소 같지 않은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마음이 편안해져.”
장대처럼 솟은 대나무들이 바람에 흩날려 빗소리를 내었다. 왕녀가 입고 있는 제립학교의 교복 치마가 잔머리와 함께 펄럭거리며 한 폭의 그림을 자아냈다.
뒤를 돌아본 니냐롯트가 동의를 구하듯 류제에게 말했다. 피곤해 보이는 인상도 뒤에서 비치는 햇빛 아래에서는 성모처럼 인자하다.
“올라가지.”
그리고 왜인지 그 모습이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지금껏 자신을 괴롭히는 친위대를 방치하는 문제 때문에 왕녀를 좋게 생각하지 않던 류제는 왜 친위대가 유지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우시지 않니?”
그런 류제의 기분을 눈치챈 미나가 작게 속삭였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서 류제는 반박하지 못하고 묵묵히 계단을 걸었다.
천 개의 계단을 반쯤 올랐을까. 니냐롯트는 한 달 전부터 시작된 불면증 때문에 눈가가 어질어질해서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조심해!”
뒤에서 간격을 두고 계단을 오르던 류제가 휘청거리는 왕녀를 발견하고 제 품으로 끌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왕녀의 가슴 아래를 팔로 꽉 조이는 의도치 않은 신체 접촉이 일어났지만 류제가 그러지 않았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왕녀님. 괜찮으신지요?”
“왕녀님!”
“나는 괜찮다.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니 걱정 말거라.”
일순 발에 힘이 풀렸던 니냐롯트가 다시 발을 땅에 붙였다. 이제는 제대로 서있을 수 있는데 류제가 계속 안고 있자 그녀가 우물쭈물 몸을 버둥거렸다.
“…이제 괜찮으니 놔주지 않겠는가? 숨 쉬기가 불편하다만.”
왕녀의 말에 제가 엄한 곳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류제가 화들짝 놀라 팔을 풀었다.
“우아앗……! 고의는 아니었어.”
“네 이놈, 류제 신리. 감히 왕녀 저하의 옥체에 손을 대다니 용서할 수 없다!”
언제부터 따라붙고 있었던 건지 친위대 대장이 류제에게 다짜고짜 덤벼들었다. 예리한 진검이 앞머리를 스치자 왕녀에게서 떨어진 류제가 다섯 계단 아래로 물러났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착지한 친위대 대장은 눈을 부라리며 류제에게 검코를 들이밀었다. 사나운 날붙이가 금방이라도 목에 붉은 선을 그을 듯이 아른거렸다. 류제는 반짝거리는 검코를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로 주시했다.
“하찮은 평민 주제에 감히 왕족의 몸에 손을 댄 천벌을 받아라!”
“루이나. 거기까지 하거라.”
니냐롯트가 근엄한 목소리로 제지하지만 않았으면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긴 흑발을 묶어 채찍처럼 휘두르는 1학년 친위대 대장 루이나 알로이드는 진심으로 류제를 베려고 했을 것이다.
류제 또한 불합리한 공격을 호락호락하게 당해 줄 성격이 아니었기에 이번만큼은 둘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왕녀 저하, 저 파렴치한 자가!”
루이나는 제가 받드는 하나뿐인 주인 니냐롯트의 명령을 수긍하기 힘들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나는 더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으냐?”
“저놈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제가 충분히 왕녀님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 그 찰나의 순간에 나를 지켜준 그의 호의는 너와 다르단 말이냐?”
“그러나 저자가 감히 왕녀님의―”
“루이나! 네 말의 모순을 어찌 그리 어리석게 합리화하느냐.”
니냐롯트가 호통 치자 맑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텔다 사원의 천 개의 계단을 오르던 사람들이 경악하며 허리를 땅에 붙었다.
왕녀의 어빌리티는 감정 상태에 따른 뇌전과 폭우라 그녀 주변에서 번개가 치는 것은 심기가 상당히 불쾌하다는 의미라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류제는 귀청이 찢어지는 강렬한 파열음에 귀를 보호할 생각도 못 하고 얼이 빠졌다.
“나를 심려하는 네 노고는 알고 있으나 그를 나무라지는 말거라.”
최근 들어 극심한 불면증과 악몽을 호소하는 그녀를 너무나 걱정하기 때문에 루이나가 저렇게 비뚤어졌다는 것은 안다.
적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는 군중들 속을 끊임없이 가까이해야 하는 수학여행 일정도 루이나를 초조하게 만들었을 거다. 그렇기에 니냐롯트는 친위대들이 평소보다 날이 선 것을 나무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겠다고 반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면 그것이야 말로 교각살우로 이어지는 어리석은 짓이다.
니냐롯트가 류제를 옹호하자 루이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는 것이라며 거듭 강조했다.
“왕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받들겠습니다. 류제 신리, 계속해서 주시하겠다.”
루이나가 발도했던 검을 착검하고 류제를 사납게 흘겼다. 저 분노에 싸인 눈동자는 죄 없는 사람을 베려고 했던 행위를 반성하는 모양새가 전혀 아니었다.
류제는 저런 친위대를 또다시 순순히 내버려 두는 왕녀의 모습에 화가 났다. 왕녀가 저렇게 애매하게 말하니까 더 그러는 거 아냐. 저 태도를 보라고. 저게 반성하는 사람이 보일 얼굴이야?
“마음대로 해.”
“흥, 오만한 놈. 주제도 모르고 머릿속엔 엉큼한 생각뿐이지.”
루이나는 류제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다는 듯 닌자처럼 사라졌다. 그것이 그녀의 어빌리티인 듯하다.
친위대장이 사라지자 니냐롯트가 조원들에게 사과했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군.”
“그걸 아니 다행이네.”
화가 단단히 난 류제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는 비키가 또 잔소리하기 전에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평소처럼 그런가보다 넘어가주는 것이 용납되지 못할 정도로 짜증이 솟구쳤다.
류제는 지금까지 친위대에게 받아온 크고 작은 시비가 누적되어서 왕녀가 류제의 편을 들며 친위대 대장을 나무랐음에도 상당히 불쾌했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지 못할망정 내가 왜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지?
“류제. 기다려. 같이 가!”
“무엇보다도 다치신 곳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가시죠, 왕녀님.”
류제의 차가운 반응이 제 우유부단한 판단 때문임을 아는 왕녀는 암암하게 비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한편, 류제네 조가 그런 해프닝을 겪는 동안 펠노아 시내에 있는 맛집이란 맛집은 죄다 돌던 재경은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설마 류제와 그만큼 떨어져 있으면서 둔한 재경이 류제와 메인 히로인 간의 트러블을 읽기라도 했단 말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그럼 뭐에 대한 위기의식이냐고? 그야 무지막지한 기세로 줄어들고 있는 용돈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그만 좀 처먹어라. 이 돼지 짜식들아.”
“돼지라고? 우리가 왜 돼지냐?”
“맞아. 겨우 젤라또랑, 츄러스랑, 마카롱이랑, 옥수수버터구이랑, 몽블랑이랑, 프리타타랑, 과일 파이랑, 바나나 퐁듀랑, 굴라멜라카랑, 솜사탕 아이스크림이랑, 민트 초코 프라페랑, 감자튀김이랑, 치즈 구이랑, 입가심으로 자몽에이드밖에 안 먹었는데.”
“아직 계획했던 디저트 가게 반도 못 돌았어. 서두르지 않으면 나머지 맛집을 못 가게 될 거야. 급하다, 급해!”
“누가 고작 한 시간 반 만에 저걸 다 처먹냐고! 난 옥수수랑 츄러스랑 감자튀김밖에 안 먹었는데도 점심때 먹은 게 소화가 안 돼서 배 터질 것 같은데. 돈도 많아라!”
“누가 너도 사 먹으랬나? 아까우면 구경이나 해라.”
“구겨어엉? 내가 너네 처먹는 거 보려고 아가타에서 여기까지 온 줄 아냐? 처먹는 건 그만하고 관광이나 좀 하자. 딴 조 애들은 사원이니 전망대니 그런 데 갔잖아. 내가 왜 수학여행까지 와서 남 음식 먹는 걸 꾸역꾸역 봐야 하는데?”
“야, 식후경이 얼마나 멋진지 모르냐? 구경하는 것이든 뭐든 먹는 것 다음이라니까.”
“너무 많이 먹으니까 하는 소리지!”
저 돼지들 때문에 오늘치 배분했던 재경의 용돈이 주먹에 쥔 모래처럼 속절없이 사라져 버렸다. 맛집 탐방, 맛집 탐방 노래를 부르기에 적당히 사 먹고 말 줄 알았더니 이렇게 처먹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저대로 내버려 뒀다간 펠노아 시내에 있는 디저트 가게는 다 돌 기세에 진절머리가 난 재경이 애꿎은 땅만 쾅쾅 밟았다. 그런 재경에게 조원 한 명이 어깨를 도닥거리며 달래주었다.
“짜증도 배가 고파서 나는 거야. 저기에 엄청나게 긴 아이스크림을 파나 봐. 그다음에는 빙과당 본점에 가서 진한 초코 빙수를 먹자. 그럼 행복해질 거야.”
“~나 이제 오늘 쓸 돈 다 떨어졌단 말이야. 그놈의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몇 개를 먹는 거야?”
“뭘 모르는구나. 아이스크림이라도 똑같은 아이스크림이 아냐. 그리고 내일부터는 이런 자유 시간도 별로 없거든? 오늘 아니면 언제 돈 쓰려고?”
“맞아. 아끼다가 똥 된다.”
“옳소, 옳소.”
싫다는 재경의 등을 떠민 그들은 기다란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가게로 향했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그런 그녀들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는 재경의 찌푸린 얼굴은 오늘도 주근깨로 활짝 폈다.
이런 쓸데없는 탐방이나 할 거였으면 그냥 류제 뒤나 밟을걸. 아니, 유네한테 붙어있을걸.
“내가 못 산다.”
재경이 기어코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세 사람을 보며 졌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완전 맛있어. 행복해~”
“지상 최강의 조합 바닐라&초코 반반 아이스크림이 이렇게 길 수 있다니. 왜 학교 앞에서는 이런 기발한 걸 팔지 않는 걸까?”
“학교 앞에서 판다면 매일매일 몰래 나와서 사 먹을 거야. 기간트리카 수업 끝나고 먹으면 더 꿀맛일 거 같지 않아?”
너무 길어서 먹기도 힘들어 보이는 아이스크림이 뭐가 그렇게 맛있다고. 재경은 기다란 아이스크림을 불편하게 할짝거리는 세 명의 조원이 디저트에 미친놈들처럼 보였다.
뭐가 여자 친구를 사귈 절호의 찬스냐? 저런 여자 친구 사귀었다가는 내 지갑이 남아나질 않겠네. 여자들은 다 위장이 한 세 개쯤은 되나? 소야? 소냐고! 반추위라도 달린 거냐?!
“먹고 배탈이나 나라.”
“뭐라고? 한 입만 달라고? 싫어~”
“렌이 또 질투한다. 자,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 멍 하고 짖으면 한 입 줄게.”
“나도, 나도! 난 뭘 시키지? 어디 재미있는 거 없을까?”
“먹는다고 한마디도 안 했거든? 이 짜식들이 뭘 멋대로 시키려고 난리야? 안 해. 안 할 거야!”
“에이. 먹고 싶으면서 그러네. 솔직하지 못하긴~”
그렇게 말하는 조원들의 손엔 바닐라, 초코, 망고, 캐러멜 등의 아이스크림이 많이도 들렸다.
실은 재경도 조원들이 들이미는 기다란 아이스크림이 아주 먹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재경의 할머니는 늙은 나이에 홀로 재경이 키운답시고 여행을 간다든가 디저트를 산다는 여유로운 발상을 하지 못했다. 재경이 어릴 적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믿고 있었던 게 설탕 뿌린 토마토였으니 말 다 했다.
여자애들과 이국의 디저트를 즐기는 데이트 같은 상황도 재경이 꿈에 그렸던 장면이었다. 단지 저 세 명이 지나치게 많이 먹으며, 지금 와서 얻어먹기에는 그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이 방해였다.
“벼…별로 그런 거 아니거든? 먹으려면 니들끼리나 많이 처먹어.”
“또 그런다. 그럼 봐줬다. 먹고 싶다고 한 입만 달라고 해봐. 그럼 순순히 줄지도 몰라.”
“누가 그렇게 말한대? 이 짜식들이 진짜 날 무슨 땅거지로 아나.”
“와하하하. 렌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아니야!”
재경은 찔끔거리는 마음과 반대로 자신을 놀리는 조원들에게 꽥꽥거리며 성질을 냈다. 그 화는 새끼 고양이가 털을 세우고 우는 것보다 더 하찮았기 때문에 재경이네 조원들은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빙의 전 중학생 때에는 동네에 성질머리 더러운 놈으로 소문나서 웬만해선 누구도 재경을 건들지 않았던지라 재경은 남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이 상황이 떨떠름할 정도로 생소했다.
이거 뭐, 같은 반 친구를 고작 아이스크림 때문에 때릴 수도 없고. 폭력으로 해결할 기분도 아니거니와 이런 맹숭맹숭한 심정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료가 부족해 재경의 머리가 공회전했다.
“자, 빨리 말해 봐. 아이스크림 다 녹는다.”
“얼른. ‘한 입만 줘.’라고 해봐.”
“진짜 완전 맛있어~”
하지만 약 오르긴 매한가지였으므로 재경은 그녀들이 방심한 틈을 타 자기 쪽으로 내밀어진 아이스크림 하나를 냉큼 크게 물었다.
“내 아이스크림! 야!”
“내 떠그러 둥 네가 달모디디. 아타타타. 타가워!”
입에 아이스크림을 한껏 넣고 우물거리는 재경이 당황한 그녀들을 향해 사악하게 웃었다. 그녀들도 그냥 장난으로 놀리는 것이었는지 렌한테 결국 한 입 뺏겼다며 서로 깔깔 웃어댔다.
제립학교 교복 차림으로 길가에서 노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도 절로 미소를 띨 만큼 풋풋했다.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게임 스토리상 한 문장으로만 설명되고 사라졌던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양아치에 대한 이야기는 비중 없는 엑스트라의 대사 한 줄로만 지나쳤던지라 n회차 플레이어인 재경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게임 내에서 렌 지미는 수학여행 첫째 날 자율 행동 시간 때 같은 조원 여학생들에게 치근덕거리다가 거리에서 양아치를 만나자 곧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쳐서 반 여학생들 사이에서 평판이 더 떨어지게 된다.
게임은 주인공 시점으로 움직이다 보니 상세한 상황은 나오지 않지만 그 이후 숙소로 돌아와 여탕을 훔쳐보다 걸린 렌 지미에 대해 엑스트라 여학생이 ‘렌 지미는 오늘 양아치한테 걸리자마자 도망가더라.’라고 류제에게 말한 것이 힌트라면 힌트였다.
기껏해야 변태기가 있는 삼류 악당 렌 지미를 데굴데굴 굴리기 위한 보잘것없는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은 항상 재경이 방심하고 있을 때만 골라 찾아왔다.
“엄마야!”
재경을 놀리느라 주변을 보지 않고 있던 조원 한 명이 실수로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지나가던 사람에게 묻혀버리고 말았다.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죄송해요. 야, 조심했어야지.”
“잠깐만. 우리가 좀 어이가 없네? 죄송하면 다냐? 어? 너네 몇 살이야?”
길을 가다가 제립학교 교복을 보고 일부러 그녀를 쳤던 양아치들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트집 잡으며 치근덕거리기 시작했다.
조원들에게서 뺏어 먹은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살살 녹여 먹던 재경이 고교 데뷔와 함께 새로 태어난답시고 모른 척하던 익숙한 장면이 거슬리자 눈가를 실룩거리며 양아치의 행동을 주시했다.
다시 류제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왕녀의 친위대가 벌인 일 때문에 심해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무리하게 띄우려는 미나와 옆에서 은근슬쩍 도와주는 비키의 등쌀에 떠밀려 억지로 기념품 상점을 구경하던 류제는 마족의 침입을 막아준다는 부적을 산 미나가 비키에게 보여 주며 꺄꺄 좋아하는 것을 무미건조하게 지켜보았다.
류제와 조금 떨어져서 선 니냐롯트도 아까 전 사건이 마음 쓰였는지 착잡한 눈으로 류제를 힐끗거렸다. 하지만 앞머리로 반절은 가려진 류제 시선은 줄곧 그녀를 무시해서 그녀는 차마 류제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기념품 상점에서 나와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정원을 지나친 그들은 펠노아 국립묘지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족과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묘에 엄숙하게 참배한 그들은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원래 텔다 사원에서 시내로 이만큼 빨리 복귀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왕녀와 류제의 사이에서 상당한 냉기가 흘렀기 때문에 관광은 글렀다고 여긴 비키가 피눈물을 흘리며 결정을 바꾸었다.
그들의 마지막 행선지는 다양한 빙수를 파는 빙과당(氷菓堂) 본점이었다. 재경이네 조도 마지막 맛집 탐방으로 오려고 했던 이 가게는 사람들이 펠노아에 오면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말하는 유명 빙수 가게였다.
워낙 유명한지라 제립학교 학생들이나 관광객들로 테이블이 빈틈없이 차 있었다. 왕녀의 부탁으로 간신히 야외 테이블을 차지한 그들은 특대형 빙수를 눈앞에 두었다.
분명 신나야 할 타이밍인데 그들 사이에서는 보는 사람이 어색할 정도로 긴 적막이 흘렀다. 미나는 대놓고 류제와 왕녀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고 비키는 이 상황을 어쩌지 못 하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입가가 부르르 떨렸다.
“마…맛있다. 오길 잘한 것 같아. 줄이 길었지만 먹을 만한 가치가 있어.”
여기서도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 보겠다고 미나가 애써 웃었지만 비키도, 류제도, 니냐롯트도 모두 반응이 없었다.
내가 왜 하찮은 인간들 기분을 풀어줘야 하는지 불쾌해진 미나는 실룩거리는 입가에서 마족의 성격이 삐져나올 뻔했다. 니냐롯트가 뒤늦게라도 반응해줘서 다행히 미나는 자신의 진짜 성질을 죽일 수 있었다.
“맛있군. 왕궁에서 먹는 것보다 만족스러워. 유명한 가게들은 이유가 있는가 보구나.”
“그쵸? 전 왕궁에서 먹어본 적 없지만서도요. 비키 님은 어때?”
“나는 왕궁에는 어릴 적밖에 가본 적이 없어서 몰라. 그때는 겨울이라 빙수는 먹지 않았거든.”
“그래? 그럼 잘 모르겠구나. 나도 왕궁 한번 가보고 싶다. 왕궁은 학교보다 더 크다며? 정말 그래요, 왕녀님?”
“무얼. 대단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거기를 드나드는 사람들이지. 그대가 왕궁 기사를 노린다면 올 수 있지 않을까, 미나 플로리아여.”
다른 사람들이야 금빛 첨탑이 반짝거리는 키아나트리체의 왕궁을 보고 한 번쯤은 저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이상을 품겠지만 태어나서부터 제립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왕궁에서만 살았고, 현재도 주말이나 정기 국정 회의가 열리면 왕궁으로 돌아가는 니냐롯트에게 있어서 그곳은 그저 사람들에 치이는 피곤한 일터에 불과했다. 아무리 화려한 곳에 살았어도 감흥이 없다는 의미다.
그녀의 무뚝뚝하고 냉정한 태도는 감정에 반응하는 어빌리티 탓도 있겠지만 화려한 궁궐 안밖에 모르던 어릴 적부터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 결과일지도 몰랐다.
일국의 왕녀로서 늘 누군가가 떠받들어 주고 보호해 주지만 그에 따른 책임감 때문에 그런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닌가 니냐롯트는 감히 추측해 보았다. 꿈에 간섭하는 서큐버스가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모르니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 류제는 한시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만 곱씹으며 빙수를 밥처럼 퍼먹었다. 그놈의 친위대 때문에 왕녀에게 다가가는 것도 학을 뗐고, 조금은 생길 법했던 존경심마저도 먼지 한 톨 없이 날아갔다. 저 차가운 얼굴이 아련하게 보였던 내 눈이 삐었던 거지.
렌이라면 친위대를 감안하더라도 왕녀와 같은 조가 되기를 바랐으려나. 시비 받는 걸 못 참을 것 같은데도 계속 그를 부러워했었다.
주근깨 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누구보다도 좋아라 할 반응을 상상하던 류제가 실수로 숟가락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디저트용 작은 숟가락은 보기 좋게 포물선을 그리며 류제의 교복에 떨어졌다.
“뭐 하는 거야. 칠칠치 못하긴.”
“괜찮아? 휴…휴지! 휴지 없나?”
미나가 호들갑을 떨며 옆에 있는 휴지를 돌돌 말아 몽땅 넘겨주었다. 류제가 고맙다며 건네받은 휴지로 옷을 닦았으나 조끼에는 이미 초코 크림이 녹아 검은 자국이 남은 후였다.
수학여행 동안 교복을 입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이 상태로는 아가타로 돌아갈 때까지 흔적이 남을 것 같다. 자국이 마르기 전에 씻어내기 위해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거 좀 지우고 올게.”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글쎄. 안 오면 먼저 가든가.”
왕녀와 어울리면 어차피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이런 상태일 것이다. 시간 낭비다. 류제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대로 조원들과 헤어지는 게 편했다.
렌네 조는 시내에서 맛집 탐방을 할 거라고 기차에서 엿들었기 때문에 나돌다가 렌과 마주치면 그대로 그쪽 조랑 어울릴 요량으로 류제가 어슬렁어슬렁 테이블을 기어 나왔다.
“류제! 돌아올 거지?”
“내버려 둬. 같이 있기 불편하겠지.”
비키가 류제를 쫓아가려는 미나를 만류했다. 차갑게 말했어도 비키는 친구가 되어준 류제와 같은 조가 된 것이 기뻤다. 그 기대감을 표출하려 열심히 자율 행동 시간 계획표를 짠 거라 비키는 위태롭던 류제가 결국 조를 이탈하고 말자 기가 죽었다.
그렇다고 왕녀와 류제 사이에 껴서 싸움을 중재하기엔 자신이 너무 서툴거니와 신분상 왕녀에게 따질 수 없어 나름대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사단이다.
용기를 쥐어짠 비키가 무심하게 앉아있는 니냐롯트에게 조심스레 충언했다.
“왕녀님, 아까 그건 왕녀님께서…….”
“알고 있다. 그와는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구나.”
니냐롯트도 비키가 자유 시간을 기대했다는 것을 넌지시 알고 있었기에 류제와의 이야기는 다음 이벤트를 기약했다.
기껏 같은 조가 되었는데 수학여행 내내 그와 불편하게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멋대로 조를 이탈하는 류제를 나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친위대가 과민하게 반응했다. 이건 니냐롯트가 사과해야 할 일이 맞았다.
물론 이 일련의 과정들은 모두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수학여행 챕터의 이야기대로 흘러온 결과일 뿐이다.
맛집 탐방이나 가자는 조원들을 무시하고 류제에게 따라붙을 수 있었지만 재경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뭘 어떻게 하건 스토리는 알아서 흘러간다’는 것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어차피 조를 이탈한 류제가 시내로 돌아와 유네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야기는 알아서 진행되었다.
그런 재경이 지금 빙의 이래로 가장 큰 위기에 봉착했다.
양아치와 시비가 붙었으나 어차피 조원들이 죄다 저보다 더 한따까리 하는 어빌리티를 가진 녀석들이라 연약한 양아치들은 그녀들이 알아서 해치울 거라고 여기던 재경은 그녀들이 말로만 싫다고 할 뿐 한량들을 때려눕히지 않은 것을 이상하다 생각한 때부터가 일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재밌는 데 데려다준다니까. 같이 놀아.”
“아뇨, 괜찮아요. 저희는 저희끼리 놀게요.”
“내 옷은 어떻게 책임질 건데. 이거 비싼 거라고. 배상을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러니까 세탁비를 드리겠다고 했잖아요.”
“세탁비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는데도 그러네.”
아까부터 이런 종류의 대화만 쳇바퀴처럼 돌자 재경은 점점 짜증이 났다. 이러는 동안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던 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조원의 팔을 붙잡은 양아치에게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빙신인가 빙과당인가 간다매. 설마 쟤네랑 놀고 싶냐? 제정신이야?”
“렌, 이 바보. 조용히 해!”
“이 좆만 한 새끼가 뭐라는 거야, 어엉?! 우리가 누군지 알아?”
만만해 보였던 재경에게 무시당하자 그가 재경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너야말로 우리가 누군지나 알아?”
아니, 떡하니 제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덤빌 수가 있어? 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재경이 기간트리카나 장갑해서 겁이나 줘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그 생각을 읽은 다른 조원이 뜯어말렸다.
“렌, 안 돼! 민간인을 상대로 어빌리티나 기간트리카로 위협하면 잘못했다간 퇴학이야!”
“엑, 진짜?”
그래서 가만히 있었던 거냐! 재경이 뒤늦게 깨달았지만 재경보다 먼저 그 사실을 알았던 양아치는 재경만 때려눕히면 어린 여자들쯤은 쉽게 데리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방해되는 재경의 면상에 주먹을 휘둘렀다.
“남자는 필요 없어. 넌 꺼져!”
퍽. 뼈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조원 한 명이 경악해 비명을 질렀다. 학교에서 대마족 병기 기간트리카를 작동하는 수업을 받는다고는 하나 그녀들 모두 직접 사람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얼굴을 맞은 재경이 우당탕, 뒤로 넘어져 흙먼지에 굴렀다. 얼얼해진 재경이 이를 악물었다. 적당히 넘어가 주려고 참고 있는데 감히 선빵을 때렸겠다?
결국 폭력을 휘두른 양아치들을 조원들이 눈을 매섭게 뜨며 막아섰다.
“하지 마세요. 선생님 부를 거예요!”
“불렀다간 이놈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테다. 민간인한테는 어빌리티도 그 잘난 기간트리카도 못 쓰잖아? 이 연약한 팔로 뭘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나.”
“해봐, 이 짜식아.”
비틀거리며 일어난 재경이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알알하니 쇠 맛이 나는 게 침에 피가 섞였다. 결국 피를 봤다 이거지. 그가 인상을 구겼다.
나, 신재경. 나한테 시비 건 놈 면상에 죽빵을 한 대 꼭 날려 주지 않으면 두 발 뻗고 못 자는 놈이다.
좀이 쑤셨던 재경은 오랜만에 제대로 걸려 온 시비에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진성 깡패 새끼처럼 눈을 부라렸다.
“렌! 괜찮아?”
“시끄러. 금방 정리할 테니까 너희들은 빙과당인가에나 가있어. 귀찮아지기 전에.”
“하,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그랬냐? 정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그깟 어빌리티 있다고 기고만장해서는!”
어빌리티도 기간트리카도 사용할 수 없는 상대라면 중학생 때 싸움으로 날렸던 재경이 여자애들에 비해 유리했다.
“기고만장하면 뭐.”
미연시 세계 속 양아치라고 해도 싸움 방식은 똑같겠지. 어차피 어빌리티도 없는 일반인이다. 나도 내 어빌리티 뭔지 모르는데 오랜만에 몸이나 풀자고. 안 그래도 배불러 죽겠는데 소화도 시킬 겸.
“말하는데 난 한 놈만 팰 거다.”
라고 말하는 재경의 눈은 아까까지 조원 여자애의 아이스크림 뺏어 먹었다고 좋아하는 다부지지 못한 눈동자가 아닌, 정말 누구 하나는 진심으로 팰 수 있을 정도로 거칠었다.
빙과당에서 나와 수돗가에서 조끼를 빨고 느긋하게 시내를 돌아다니던 류제는 렌네 조가 어디서 놀고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제 ‘강화’ 어빌리티로 감각을 강화해서 렌이나 그 조원의 목소리를 찾았다.
귀 근육을 쫑긋거리며 유유자적 걷고 있던 류제는 예민해진 청각을 통해 얼핏 들린 비명 소리에 제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들었다.
비명 소리? 범죄인가? 주변에 어빌리티를 사용할 수 있는 학생들이 이렇게나 많은데도?
류제는 비명 소리의 출처가 궁금해서 발을 빠르게 놀렸다. 혹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일지도 몰랐다. 누군가가 납치되나? 라는 엄한 추측을 시작하니 선량한 류제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민간인들에게는 어빌리티를 사용하면 안 되지만 민간인한테만 안 사용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합리화를 한 류제가 제 신체 능력을 강화했다. 혹시 있을 납치범이나 강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다.
덩달아 달리기도 빨라지고 시야가 넓어졌는데 그런 류제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숙소로 향하는 길을 심상치 않게 뛰어가는 같은 반 친구가 수상했다. 더군다나 붙잡고 보니 렌네 조원이다. 그녀는 맛집 탐방으로 들떴던 몇 시간 전과 다르게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류…류제. 류제! 도와줘. 렌이!”
“뭔데? 왜 그래?”
“렌이 까…깡패들하고 싸움에 휘말려서―”
“어딘데?”
선생님을 부르는 게 나은지 아니면 지금 당장 믿음직스러운 류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는지 일순 고민하던 그녀가 류제의 팔을 붙잡고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갈수록 류제의 귀에 울리던 소란스러운 잡음이 명확해졌다.
“꺄악, 레…렌! 그만해!”
“누가 이 새끼 좀 떼어내. 야! 너네 어빌리터잖아. 능력 좀 써서 말려봐!”
“이 미친 새끼가!”
류제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어떻게든 렌을 말려보려 하지만 차마 손조차 못 대고 있는 조원 두 명과 낯선 남자 둘이 발을 동동 굴렸으며, 렌의 밑에 깔려 꼼짝없이 머리에 흙에 대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렌에게 거의 기절 직전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터무니없는 것을 목격하자 한시라도 빨리 렌을 구해야겠다 생각하던 류제가 벙쪄서 눈만 끔벅거렸다.
기간트리카도 제대로 못 다루는 렌이 사람을 쥐어패는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 류제는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말려야 하는 사람이 렌을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때리는 렌이라고?
혈투가 벌어지는 광경을 가리킨 류제가 이해를 못 하겠으니 빨리 설명을 해보라고 조원들에게 무언의 요구를 했다.
그녀가 저걸 보고도 가만히 있는 류제가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말했다.
“저 사람들이 계속 껄떡거려서 난감했는데 보다 못한 렌이 끼어드니까 저 사람들이 렌을 때리는 거야. 그러니까 렌이 열받아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하는데―”
사정을 아는 조원이 기다란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한 사건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녀들은 몰랐지만 불리해 보이는 이 싸움을 재경이 압도하는 이유는 재경이 정말로 싸움을 많이 해봤기 때문이다.
한때 밥 먹고 싸움질만 했을 때 수학 대신 이런 걸 공부했던 재경은 체구 차이가 나거나 숫자상으로 불리할 때 지금 방식을 가장 애용했다. 바로 가장 만만하다고 판단되는 한 놈만 골라 집중적으로 패는 전술이다.
일단 타깃으로 정한 상대방을 마운트할 때까지 머리가 깨지든 맞아서 코피가 나든 끈질기게 덤벼든 다음 마운트에 성공하기만 하면 누가 옆에서 뜯어말리더라도 꼼짝도 없이 상대방을 쥐어패는 것이다.
상대방 위에 올라타 하반신을 제압해 허리 윗부분을 깔고 앉아서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질을 하고 있는 재경의 눈동자에 퓨즈가 나가 있었다.
맞고 있는 걸 보는 것보다야 낫나. 김이 샌 류제가 입맛을 다셨다. 어찌 되었건 큰 소란으로 퍼지기 전에 말려야 하겠지. 이 정도 했으면 저쪽도 렌을 잘못 건드렸다는 걸 알고도 남았을 거고.
류제가 재경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제 일행이 당하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지 못한 다른 양아치가 어디선가 각목을 들고 와서 재경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작작 좀 해, 미친 새끼야!”
각목의 모난 부분이 재경의 뒤통수에 찍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하지 못했던 재경이 고꾸라졌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시야가 좁아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라고 느낀 것은 류제였다. 제 불길한 추측과는 달리 때리는 사람이 렌이라서 안도했고 동시에 별것 아니라고 방심하고 있던 류제는 렌이 쓰러지는 순간을 목격하자 머리에 피가 몰리면서 시간이 느려지는 착각이 들었다.
슬로우 모션처럼 질척질척하게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발견한 것이지만 렌도 자기가 때린 만큼 맞아서 피로 엉망이었다.
각목에 맞은 부분에서 생생한 피가 터져 흘러내렸다.
렌이 솔직하지 못하고 서툴며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상냥함에 호감을 느끼던 류제의 공상 속에 렌의 웃는 얼굴이 스쳤다.
서툰 친구니까 줄곧 신경 써야겠다 여겼는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보니 형용하지 못할 격분이 치솟는다. 분노로 눈앞이 흐릿해질 만큼 심장이 뛰어본 적이 없었던 류제는 신경계 구석구석 달아오르는 감각이 자신을 지배하자 본능적인 행동을 휘둘렀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격분을 토해 낸 결과는 엄청났다. 뒤통수를 맞은 재경이 정신을 차리고 그놈을 같은 방법으로 죽사발을 내주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류제가 남자에게 먼저 주먹을 날렸다.
“류제?!”
정통으로 주먹에 맞은 양아치는 고개가 꺾이면서 날아갔다. 큐대에 맞은 당구공처럼 벽에 부딪힌 그는 미연시 보정으로 눈만 빙글빙글 돌린 채 처박혀서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류제의 격노와 동시에 빙과당에서 빙수를 먹던 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동안 그녀가 찾고 있던 존재의 흔적이었다.
그 정체를 알아차린 미나는 누구도 모르는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정신없이 덤벼든다고 류제가 온지도 몰랐던 재경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얼이 빠졌다. 저 순둥이 류제가 사람을 때릴 줄이야. 류제가 감히 화를 낼 거라 생각 못한 재경은 동공이 확장돼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류제를 살피며 식은땀을 흘렸다.
열기가 공기를 타고 일렁거리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가 흔들거렸다. 류제가 괴물 같은 힘으로 동료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리자 혼자 남은 양아치가 저만 살겠다고 부리나케 도망갔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류제가 저만치 처박힌 남자를 끝장내기 위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식식거리고 있는 류제의 동공이 새빨갛게 빛나는 것을 발견한 재경이 식겁하며 류제의 다리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 류제, 멈춰!”
합당한 분노였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말릴 줄은 몰랐던 류제는 렌이 자신을 걸고 넘어뜨려서 눈을 가려버린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방해하는 거야?”
그와 동시에 렌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고 치솟았던 격분이 썰물 빠지듯이 가라앉았다.
“너야말로 왜 끼어들고 난리야. 나 혼자서 잘 해결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볼까 친절하게 눈을 가려준 재경이 사나이 싸움에 끼어든 류제에게 큰 소리로 타박했다.
아직 발현되고 있는 ‘강화’ 어빌리티 때문에 위에 올라탄 렌이 다칠까 봐 가만히 누워있던 류제가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꼴에 큰 소리로 맞대응했다.
“뭐가 잘 해결했다는 거야. 엉망이 되었으면서!”
“엉망 아니야. 내가 이기고 있었어!”
“야, 류제! 내가 렌을 말려달라고 했지 대신 죽사발을 내라고 했냐?”
싸움을 말리라고 데리고 왔더니 손수 옥수수를 털어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재경이네 조원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바닥에 누운 류제와 류제의 배에 올라탄 재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 화나는데!”
어빌리티를 해제한 류제가 재경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 반동으로 재경이 뒤로 발라당 넘어져 버렸다.
“렌, 이 멍청아! 싸울 생각을 왜 하는 건데? 감당 못 하겠으면 그냥 도망치라고. 큰일 났으면 어쩔 뻔했어!”
다친 재경을 품으로 이끈 류제가 화를 냈다.
코랑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한쪽 볼과 눈탱이는 밤탱이가 되어가지고 벌써부터 퉁퉁 부어 가관이다. 생각할수록 열받아. 열받아서 미칠 것 같아!
“너나 열 내지 말고 심호흡이나 해. 흥분한 게 누군데! 왜 니가 화를 내고 난리야? 니가 다쳤냐?”
흥분해서 제 동공이 붉어진 것도 모르는 류제에게 재경이 반대로 성질을 냈다. 붉은 동공은 뿔과 날개와 더불어 손꼽히는 마족의 특징이었다. 이건 류제가 마왕의 힘을 곧 각성한다는 전조였기에 다른 애들에게 들키면 장난 아니게 곤란했다.
류제는 재경의 반박이 그저 억울하고 짜증 났다. 류제는 차마 말을 다 못 잇고 한숨만 내쉬었다. 더 이상 했다간 험한 말이 나올 것 같다.
그래도 일이 마무리된 것 같으니 옆에 서있던 세 명의 조원들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생님 불러올 걸 그랬어. 화려하게도 해주셨네. 어빌리티 쓴 거지? 들키면 퇴학당할지도 모른다?”
“어쩌긴 뭐가 어째. 류제는 어빌리티를 저놈들한테 쓴 게 아니라 자기한테 쓴 거잖아. 그럼 문제없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맛집 탐방이나 하면 돼.”
“하이고, 렌 이 소피스트 놈아. 세라 선생님한테 그런 궤변이 잘도 통하겠다. 그놈들이 신고하면 어쩌려고?”
“흐흐. 그 꼴로 신고를 하면 좀 웃기기는 하겠다.”
“꼴이라면 렌도 만만치 않은걸. 그 꼴로 맛집 탐방을 하겠다고? 면상이 풍비박산 났는데? 대단한 정신머리야.”
“안 났거든. 이건 명예의 훈장이야. 내가 겁나 멋지게 싸우는 거 못 봤냐?”
겁나 멋지게라기보단 치사할 정도로 추접스럽게 싸운 거 같던데. 라고 재경이네 조원 세 명이 똑같은 생각을 했지만 렌이 그들을 위해 저보다 한참은 큰 어른에게 나서는 모습이 멋있었기에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맞은 곳이 아파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재경이 입 안이 아픈지 볼을 부풀렸다.
“뭐 해. 일어나.”
재경이 흙바닥에 앉아있는 류제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지 않던 흥분이 막 진정이 된 건지 류제의 숨소리는 여전히 식식거리며 흉부가 들썩거렸으나 붉게 빛났던 동공은 잠잠해진 상태였다. 일시적인 거였나. 깜짝 놀랐네. 재경은 남모르게 안도했다.
내밀어진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류제가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재경도 매무새를 정리하고 방울방울 흐르고 있는 코피를 닦았다. 머리에 흐르는 땀도 슥 훑었다.
손에 묻은 액체의 색을 보고 그제야 머리에서 흐르는 게 땀이 아닌 피였다는 것을 알아챈 재경이 오잉? 놀라워했다.
“거기 상처 괜찮아? 꽤 큰 소리가 나던데.”
“맞아, 쾅! 하고.”
“별로 안 아프던데.”
조원들과 류제가 재경이 각목으로 맞은 부분을 살폈다. 깊은 상처는 아닌 것 같고, 워낙 돌머리라 그런지 머리 가죽만 살짝 팬 상태였다.
류제는 수돗가에서 빨았던 제 조끼를 두 번 접어 피가 흐르는 재경의 머리에 살짝 대주었다. 조원들은 걱정이 아닌 놀리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바~보. 뒤에서 때리는지도 모르고.”
“시꺼. 싸우다 보면 이런 자잘한 상처는 신경 안 써.”
“상처 난 얼굴 좀 봐. 못생긴 게 더 못생겨졌어.”
“뭐야? 이 짜식이. 담부턴 안 구해 준다?”
“안 구해 줘도 되거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었거든?”
“나중에 두고 보자, 너.”
말하는 게 팔팔한 걸 보니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렌이 아픈 것을 숨기기에 타고난 장인이라는 사실을 몸소 아는 류제가 가당치도 않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재경의 어깨를 감싸 안은 류제가 부축을 도왔다. 강한 척은 이제 그만할 시간이다.
“내가 숙소로 데려다줄게. 선생님이 치료해 주실 거야.”
“우리도 같이 갈게.”
“됐어. 너네는 그 과빙당인가 가서 내 빙수나 포장해 와. 다쳤는데 쪽팔리게 우르르 몰려다니기 싫어.”
“빙과당이야. 정말 괜찮겠어? 류제가 어빌리티 쓴 건 일단 우리도 비밀로 하고 있을게.”
“조심히 들어가. 우리가 제일 맛있는 빙수 사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기대한다~ 돼지 짜식들아~”
조원들과 작별 인사를 한 재경이 류제의 부축을 받으며 온천 여관으로 걸어갔다.
오늘 아침 기차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에게 불만이 많았던 모습이 눈에 선한 류제는 그녀들이 렌에게 걱정스레 인사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수학여행 전까지만 해도 렌이랑 대화도 안 해봤으면서.
류제의 부축 없이도 멀쩡하게 걸을 것 같던 재경은 친구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거리까지 오자 한숨을 내쉬며 류제에게 깊게 기댔다. 역시 아닌 척했어도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다.
“죽겠다…….”
“그래도 때리는 게 익숙하던데.”
“당빠지. 난 시비 걸리면 절대 안 봐주거든.”
안 봐주는 게 아니라 사생결단으로 덤벼야 간신히 한 놈 잡는 거 아냐? 라고 류제가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렌이 싸움을 할 줄 안다는 건 놀라운 일이라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건 알고 있었어도 의외였다. 게다가 자기보다 덩치가 큰 어른을 그렇게.
“다음부턴 그러지 마. 선생님이 안 계시면 어떻게 치료할래?”
“나도 상황 봐가면서 덤벼. 걱정 마라, 짜식아.”
“내가 없었다면 너 진짜 큰일 났거든?”
“알았어. 고맙다, 짜샤. 됐냐?”
잔소리를 상대하기 귀찮아서 적당히 대답하는 게 빤히 보였지만 류제는 렌의 감사 인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참 부축받으면서 숙소로 돌아가던 중 잊고 있었던 유네의 힌트 이벤트가 떠오른 재경이 류제를 힐끗거리며 간을 보았다.
“그런데 네 조원들은 어쩌고 넌 혼자냐?”
“아까 빙과당에서 같이 있다가 잠시 헤어졌어.”
“헤어졌다고? 언제?”
흐름상 류제가 자기네 조원들에게 떨어져 나와 유네와 만나는 것으로 힌트 이벤트가 발생하기 때문에 맛집 탐방과 싸움에 정신이 팔려 류제가 어느 정도까지 스토리를 끝냈는지 못 따라간 재경은 지금이라도 류제의 정황을 알고 싶었다.
힌트 이벤트는 히로인별로 한 번씩만 일어난다. 그 힌트를 제대로 들어야 수학여행 세 번째 날 밤 캠프파이어 시간에 히로인들에게 바라던 선물을 전달해 줄 수 있었다.
류제가 유네를 먼저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 아니면 만났는데 이벤트를 발생시키지 않고 그냥 지나쳤느냐에 따라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의 성사 여부가 갈릴 것이다.
“질문이 이상하네. 보통은 왜라고 묻지 않아?”
“사소한 건 그냥 좀 넘어가, 짜샤. 어떻게 똑같은 질문만 하고 사냐?”
“하하. 그래. 아무렴 어때. 아까 전까지 빙과당에 같이 있었는데 여러모로 사정이 생겨서 헤어졌어. 그런데 네가 깡패들 싸움에 휘말렸다고 하잖아.”
“뭐야, 너도 걔들하고 막 헤어졌던 거네. 그럼 유네는 아직 안 만난 거지?”
“그렇긴 한데… 여기서 유네가 갑자기 왜 나와?”
“~암것도 아냐.”
재경이 잊으라며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도 류제는 아직 유네와 접촉이 없었다. 십 년을 감수했다. 근데 류제가 나랑 같이 숙소로 돌아가다가 유네와 만나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주객전도인데. 자꾸 신경 쓰이는 재경이 힐끗 류제의 푸른 눈동자를 흘겼다.
두 번째 메인 챕터가 되니 류제도 슬슬 중2병 캐릭터로 각성을 하는군. 내 기억엔 미나가 얽히는 그 사건 이전엔 별다른 각성 신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까 그 붉은 동공은 뭐지.
시선을 느낀 류제가 왜 보냐며 똑같이 쳐다보았다. 재경은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 세계에서 정해진 미래가 꼬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렌 군? 류제 군?”
트러블 때문에 조원들과 헤어진 류제가 유네와 만나게 되는 것은 조원들과 헤어진 주인공이 ‘숙소로 돌아간다.’라는 선택지를 고르면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류제는 현재 다친 재경을 부축하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건 유네 나르타를 타깃으로 하는 힌트 이벤트를 발생시키기 완벽한 조건이었다.
“어라라. 이게 누구야. 유네 아냐?”
타이밍 보소. 이벤트 놓쳤을까 걱정했더니 그럴 것도 없었다. 몸 여기저기가 아파서 얼굴을 구기던 재경이 그나마 마음을 놓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유네는 재경보다 더 땅꼬마면서 간신히 앞이 보일 정도로 많은 짐을 들고 뒤뚱거렸다.
그런 주제에 남 걱정한다고 놀란 토끼 눈을 하는 게 뭐라고 할까,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강아지가 주인 걱정하는 기분이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렇게 다쳤어? 무슨 일 있었어?”
두 시 반이 되자 신나게 뛰쳐나가서 잘 놀고 있을 줄 알았던 렌이 핏자국이 낭자한 채 눈탱이 밤탱이가 된 걸 보면 누구라도 경악할 거다.
이걸 어쩌나 유네가 잔뜩 들린 짐과 함께 발을 동동 구르며 다가왔다. 짐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면서도 고개를 기웃거리며 어떻게든 상처를 확인하려고 하는 유네에게 재경은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사소한 시비가 붙어서 그래. 너도 네 조원들은 얻다가 떼어먹고 혼자 다니냐?”
“으응? 그… 부탁받은 게 있어서. 그럼 렌 군은 세라 선생님께 치료받으려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거야?”
“뭐, 그렇지. 넌 그것들은 다 뭐야?”
다 알면서도 유네의 이벤트를 류제와 연결시켜 줄 요량으로 재경이 물었다.
유네는 난감했다. 늘 당당한 렌을 본받아 자신도 당당하게 조원들의 부탁을 거절하겠다 마음먹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마음 약한 유네는 좀처럼 그렇게 되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별거 아냐.”
변변찮은 변명도 못한 유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뻔하지. 또 조원들의 불합리한 부탁을 들어준다고 홀로 남겨진 거다. 정말 착실하게 스토리를 따라간다니까. 재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쥐어 터져서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꼬락서니인 주제에 오지랖은 태평양처럼 넓다.
유네는 한숨 소리를 듣고 움찔거리다가 가득 든 짐을 어쩌지도 못한 채 억지로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렌 군이 걱정할 정도는 아냐. 그나저나 빨리 가봐야 되겠네. 어서 가서 치료해. 걱정된다.”
“너야말로 그거 다 들고 혼자서 가는 거야? 부탁했다던 너네 조원들은 어디 있는데?”
“그…그게…….”
이 수많은 짐 덩이를 들고 조원들을 찾아야 할 위기에 처해 있는 유네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재경이 류제에게 기대던 팔을 거두었다. 이렇게라도 연결돼서 다행이지. 내 상처보다는 유네의 호감도 힌트 이벤트가 더 중요하니까 류제는 유네에게 붙여 주도록 하자.
“네가 도와주고 내 대신 유네네 조원들한테 한마디 해주고 와.”
“그 꼴로 혼자서 숙소까지 가겠다고?”
“왜. 안 되냐?”
“이상한 고집부리지 마.”
재경이 류제의 등을 억지로 떠밀자 류제가 당황해서 재경을 나무랐다. 다친 재경을 걱정하는 유네도 그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마…맞아, 렌 군. 혼자 어쩌려고 그래!”
“야, 그럼 내가 이 꼴로 유네를 도와주러 가리? 유네 넌 빨리 안 가면 걔네들한테 또 까일 거 아냐. 글고 숙소는 여기서 두 블록밖에 안 떨어져 있잖아. 혼자서 갈 수 있어. 아님 내가 약골처럼 보이냐? 나 무시하지 마라. 이 짜식들이 봐줬더니 날 완전 송사리 취급하네.”
“아니, 딱히 렌 군을 그런 눈으로 본 건……!”
“류제, 유네 좀 부탁한다.”
“뭐? 진짜? 렌, 잠깐만!”
“렌 군!”
“쌤한테는 깡패랑 싸웠다고 할 테니까 귀찮아질 말 꺼내지 마.”
유네는 커다란 짐들로 손이 없는 데다가 다친 렌에게 미안해서 울상이 되었다. 류제는 센 척하면서 제멋대로 결정해 버리는 렌이 난감했다.
하지만 소리를 질러 불러도 사나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답답해진 류제가 애꿎은 이마만 쳤다. 여기서 유네를 내버려 두고 렌을 쫓아가면 자존심이 상한 렌에게 욕 한 바가지 먹겠지. 진퇴양난이다.
“저 고집쟁이가.”
“류제 군. 미안해, 나 때문에. 렌 군 혼자서 괜찮으려나. 너무 걱정되는데.”
“아냐. 네 조원 먼저 찾자. 짐 줘.”
“어? 으응, 고마워.”
류제가 유네가 들고 있던 짐의 반 이상을 대신 들었다. 유네는 몸이 한결 가벼워져서 절로 휘청거렸다. 재경도 혼자 들기 버거워 보이는 이 짐들을 들고 유네가 어디서부터 걸어왔을지는 그녀만이 알 일이었다.
불공평한 사실이지만 ‘강화’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 류제에게 유네의 짐은 깃털보다 가벼운 무게에 불과했다.
렌의 똥고집에 어쩔 수 없이 한걸음 물러서 준 류제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빨리 유네네 조원들을 찾아주고 돌아갈 생각으로 초조했다.
“조원들이 어디로 간다는 말은 안 했어?”
“텔다산 전망대에 있을 거야. …아마도.”
“왜 너만 떨어진 건데?”
“그… 그러게.”
말을 줄인 유네는 남몰래 아까 일을 떠올렸다.
조원들과 전망대까지 올라간 건 좋았는데 그녀들은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마르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네, 한정판 기념품이 가지고 싶네 등등 전망대 카페테리아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불량 학생처럼 앉은 그녀들은 유네에게는 의자 한 개도 내주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의 복수인 것 같았다.
“유네는 튼튼한 대장부잖아. 우리는 연약해서 올라오느라 버얼써 지쳤거든. 여기 유네가 오자고 한 곳이니까 와 준 건데 우리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진심 부탁할게. 친구 사이엔 이런 거 해줄 수 있잖아. 그치?”
“나르타 가문이 그렇게 부자라며? 그 돈으로 친구한테 맛있는 것 좀 사줘.”
“우리는 그동안 어디서 뭐 하고 놀까?”
“그…그런……!”
대충 이런 흐름으로 어쩔 수 없이 홀로 텔다산 전망대에서 시내까지 내려온 유네는 조원들이 부탁한 것들을 다 사 들고 지금에서야 전망대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 도중에 재경과 마주친 상황이었던지라 다친 렌이 자기 때문에 홀로 숙소로 돌아가면서까지 마음 써준 것도 미안하고, 렌을 걱정하던 류제한테도 미안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유네가 슬렉터가 있는 손목에 있는 소원 팔찌 매듭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좀 더 잘하면 좋을 텐데… 자꾸 렌 군이 신경 써주는 것 같아서 미안해. 난 왜 이렇게 다부지지 못한 걸까.”
“지금부터라도 잘하면 되지. 텔다산 전망대라고? 그거 텔다 사원 근처에 있나?”
“아마도?”
“그래. 꽉 잡아.”
“응? 우앗!”
마음이 급한 류제는 원래라면 사근사근 이야기를 나누며 텔다산으로 향하는 힌트 이벤트 초반부를 스킵하고 유네를 옆구리에 든 채 가볍게 점프했다.
여치가 제 몸의 수배는 넘는 높이를 점프하듯 허공으로 날아오른 류제는 비명을 질러대는 유네에게 유별나다고 말하며 텔다산으로 향했다.
그렇기에 헐겁게 묶였던 유네의 소원 팔찌가 풀려서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아무도 몰랐다. 그 팔찌는 바람에 날려 사람들의 발길질에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 * *
류제의 조끼로 머리에 난 상처를 막은 재경이 비틀비틀 여관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지나 갓 핀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거닐던 재경은 아파 죽겠다며 벤치에 걸터앉았다.
아까 류제 눈 빨개진 거 무서웠지. 그게 마족들의 눈인가?
위에서 들려오는 감탄 소리에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네를 짐짝처럼 든 류제가 어느 동네 닌자처럼 건물 사이를 뛰어가고 있었다.
“우와. 류제 저거 팔팔한 거 보소. 역시 주인공은 달라.”
기간트리카를 장갑하지 않아도 맨몸으로 저러니까 끝내주게 멋있다. 나도 저런 어빌리티 있으면 좋을 텐데. 내 어빌리티는 아직도 뭔지 모르겠다.
“어라?”
근데 저런 하늘을 뛰어가는 신이 있었었나? 유네 이벤트가 저렇게 흘러가던가? 왜 내 기억하고 좀 다른 느낌이지? 뭐,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보지.
자기가 생각해도 꼼꼼한 성격이 아닌 재경은 류제가 무사히 유네의 힌트 이벤트에 돌입했다는 것만 중요해서 미시적인 부분까지는 따지지 않았다.
유네는 캠프파이어 때 뭘 줘야 하더라. 꽤나 귀여운 물품이었던 거 같다. 그게 뭐든 류제가 저 이벤트를 수행하다가 실수로 망가뜨려서 새로 사줘야 하는 것이었다. 이따가 둘 중 한 명에게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봐야지.
저녁에 있을 세라 쌤 힌트 이벤트나 한밤중에 있을 왕녀의 힌트 이벤트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현재 가장 큰 골칫거리는 난데.
세라가 화내는 모습이 떠오르자 재경의 핏기가 가셨다. 호기롭게 류제와 유네를 보냈지만 재경은 실은 선생님의 잔소리가 무서웠다.
“…으윽, 진짜 망했다.”
세상 그 무엇이 재경을 두렵게 만들 수 있을쏘냐 싶겠지만 오늘만큼 재경이 잔소리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야 수학여행 오기 전 세라와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라 쌤이 수학여행 보호자로 서주는 대신 얌전히 있으라고 했는데 그걸 하루 만에 어겼으니 난 진짜 죽겠지. 설마 또 봉사 활동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 혼자 땜빵 칠 수 있으니까 쌤 몰래 여관 종업원들한테 구급상자를 빌리자. 애들은 입단속 시키고. 세라 쌤한테 잔소리를 듣는 모습을 걔네들한테 보여 주기도 싫으니까 이게 나아.
“아야야야.”
곡소리를 내며 벤치에서 일어난 재경이 대청으로 올라가 창호지로 만들어진 동양풍 문을 열고 살금살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지금이 기회다.
“어라? 벌써 돌아온 학생이 있나?”
괴발디딤으로 8반 남자 숙소로 걸어가던 재경을 우연찮게 목격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재경이 그렇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담임 세라 밀로니였다.
“렌 학생?”
류제의 교복으로 머리를 지혈한 채 걸어가는 재경의 거동이 수상해서 세라가 불러 세웠다. 만약 재경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세라는 그냥 밖으로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벌써 돌아온 건가요? 아직 자율 활동 시간은 많이 남았는데 지쳤나 보군요.”
뜨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재경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세라 쌤?! 아 진짜, 날 도와주질 않는 이 빌어먹을 세상. 이게 무슨 타이밍이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쌤은 홍길동이야? 여기저기 출몰하게?
“머리는 왜 천으로 막고 있는 건가요?”
“쌔…쌤! 이건… 그… 암것도 아닌데요.”
“눈은 왜 눈탱이 밤탱이가 되어있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른.대.로. 말 못 해요?!”
대형 사고를 직감한 세라의 얼굴이 웃는 도깨비처럼 변했다. 재경이 변명하기 전에 불같이 화를 낸 세라가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재경은 아프다고 징징거리면서 얌전히 끌려갔다.
재경은 자기가 다 설명하겠다고 했지만 보호자로 서준 학생이 저 꼴이 되었다는 것에 이성이 나가버린 세라는 듣는 척도 안 하고 어디서 맞았고, 누가 그랬으며, 조원들은 어디 있냐고 시시콜콜 따졌다.
“그…그게…….”
혹시라도 잘못 변명하다 류제가 민간인에게 어빌리티를 썼단 말이 나올까 봐 길 가다가 시비가 붙어서 싸웠다는 말밖에 못 한 재경이 세라에게 혼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학여행지에서 외부인과 마찰이 있었다는 건 학교 입장에서 순순히 넘어가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얌전히 있는 것을 전제로 보호자로 서준 건데 기어코 머리를 깨뜨리다니.
“쌤 진짜 완전 괜찮았다니까요! 제가 패서 해치웠거든요.”
억울했던 재경은 자기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며 양아치들을 죽사발 낸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걸 들은 세라는 도깨비에서 야차가 되었다.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말하는 건가요오?”
잔소리를 이글거린 세라는 재경에게 멋대로 말썽을 부린 것을 반성하라며 남은 시간 동안 여관 정원 청소 징계를 내렸다. 가만히만 있었어도 선생님은 재경이 깡패들에게 마냥 당하고 온 줄 알았을 텐데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진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