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 [4월. 도대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 (1)
비키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를 마지막으로 3월 입학식 챕터가 끝났기 때문에 재경은 스토리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재경에게 남았던 제일 큰 걱정은 주인공인 류제와 다투어서 사이가 틀어진 것이었지만 그도 재경이 열이 나서 기절한 그날 저녁에 해결된 일이라 이후에 있을 4월의 수학여행 준비는 단연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새 챕터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으니 논하기를 차치하더라도 과연 고집 세고 솔직하지 못한 재경이 어떻게 류제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은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재경은 상기하기 부끄럽겠지만 그를 위해서는 재경이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튜토리얼이나 다름없었던 비키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의 다음 날 기절해 버린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이마에 시원한 얼음주머니를 댄 재경이 양호실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이 시작한 후였다.
수업이 없어 혼자 그를 간호해 주던 세라가 멍하니 눈을 뜬 재경에게 왜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말을 하지 않았냐며 도깨비처럼 혼을 냈다.
세라의 폭풍과도 같은 잔소리가 끝나고 양호교사에게 몸살감기라고 진단받은 재경은 양호실 침대에서 비몽사몽 눈을 끔벅거리다가 뒤늦게 기절하기 전 상황을 떠올리고 아픈 머리를 감쌌다.
또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다가 기절했다니. 쪽팔려 죽겠다. 거기다 어물쩍거리는 바람에 류제에게 사과하지도 못했다.
자업자득이지만 재경은 이대로 가다간 진짜 삼류 악역처럼 친구 하나 없는 몸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기 전에 류제에게 사과해서 친구로 돌아가기 위해 재경이 오후 수업을 듣겠다고 주장했다.
질겁한 세라는 고집을 부리는 그를 억지로 조퇴시켰다. 수업을 듣겠다는 둥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짓을 하는 것을 보니 아픈 게 확실하다는 선생님의 등쌀에 떠밀린 재경은 별수 없이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다.
다른 학생들이 오후 수업을 듣는 동안 아픈 몸을 이끌고 기숙사로 돌아온 그는 아무도 없는 방문을 열었다.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바닥에 가방을 던져놓은 재경은 양호교사가 처방해 준 독한 감기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점심밥을 먹을 기운도 없다. 약 기운이 돌자 수마가 쏟아졌다. 그는 오후 내내 잠이 들었다.
배추처럼 땀에 절여진 상태로 푹 자고 일어나니 방은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자기 전까지는 분명 혼자였는데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그는 오늘 저녁밥 후식으로 나온 토마토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가지고 온 류제였다. 약에 취한 재경은 멍청하게 사태 파악을 했다. 홀로 앓고 있을 재경을 위해 류제가 문병을 와준 것이다.
당장 어제 있었던 일을 사과하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은 없는 것 같은 분위기에 휩쓸린 재경은 맞은편 주인 없는 침대에 앉은 류제에게 끝내 사과했다.
류제가 직접적으로 나올 줄은 몰라서 재경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스쳤다. 우유부단하고 입바른 소리만 하는 미연시 주인공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싶기도 하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귓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재경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하자, 그때서야 류제가 상냥하게 웃어주며 들고 있던 토마토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넘겨주었다.
그는 비키가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이긴 것은 자신이라고 전해 달라 했다며 재경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이렇게 해서 솔직하지 못한 재경은 기적적으로 류제와 화해하고 비키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비키와는 친구라고 말하기엔 어색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건 그때 이후로 비키가 재경을 대놓고 싫어하는 일이 없었다.
예전에 재경을 보는 시선이 더러운 벌레를 보듯 하는 경멸의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가끔씩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기간트리카를 컨트롤하는 노하우를 틱틱거리며 알려 주는 악우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벌레에서 악우까지. 그들의 첫 만남을 생각한다면 누구든 장족의 발전이라고 말할 거다.
귀족 출신 비키와 평범한 출신 재경은 의외로 쿵짝이 잘 맞았다. 둘 다 똑같이 솔직하지 못한 데다가 지기 싫어하고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어서인가. 그들의 첫 만남이 좋지 못했던 것은 역시 동족 혐오 탓이라고 류제가 추측했다.
그리하여 호감도 이벤트에 간섭 안 하겠다 장담했던 재경은 마음을 바꾸어 유네와 비키 둘 중에 누구를 류제에게 밀어줘야 하나 고민하는 지경까지 왔다.
전쟁 이벤트를 비롯해서 배드 엔딩을 확실하게 막으려면 초반부터 가장 만만한 유네와 비키 둘 다 루트로 진입할 수 있게 해두는 편이 좋겠지.
하지만 재경 혼자 이러니저러니 고민해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미연시의 주인공인 류제 신리 본인의 의견이었다.
게임 캐릭터와는 다르게 재경 눈앞에 있는 류제는 생각이 있는 인간이고, 아무래도 루트를 결정하는 건 삼류 악당이 아니라 주인공이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경은 본격적으로 호감도 이벤트가 불어닥치는 4월 수학여행 챕터 전에 사전 조사로 류제의 이상형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기숙사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은 재경은 혼자 방에 있기 싫어 류제네 방에 놀러 왔다가 류제의 잔소리에 못 이겨 저번 달 필독 도서를 오늘에서야 읽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펼친 재경은 절대 독후감을 쓸 마음이 없었지만 류제의 잔소리는 시끄러우니 읽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류제의 침대에 누운 재경이 이리 뒤척, 저리 뒤척거리며 강제로 글자를 낭독하는 동안 류제는 책상에 앉아 성실하게 오늘 배운 부분을 복습하고 있었고, 반대편 침대에 누운 유네는 도서관에서 심심풀이로 빌린 책을 읽는 중이었다.
재경이 훑고 있는 1학년 필독 도서는 키아나트리체의 어느 역사적 인물이 쓴 수필집이었다. 교과서를 제외하면 읽어본 책이라고는 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책이 다인 재경은 깨알만 한 글씨가 읽히지 않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쉽게 말해 주면 될 것을 쓸데없이 어려운 말만 남발해서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설렁설렁 책장을 넘기던 재경이 더 이상 못 해먹겠다며 책을 덮고 엎드려 발버둥을 쳤다.
“아아아아! 읽기 싫어!”
“그러게 미리미리 읽지 그랬어.”
“이렇게 어려운 책인지 몰랐단 말이야. 경아(驚訝)는 도대체 무슨 말이야? 경아? 사람 이름이야?”
“그… ‘놀랄 정도로 의아하게 여기다.’라는 뜻이야. 흠… 렌 군, 그렇게 어려우면 차라리 내 독후감 보여 줄까?”
“정말? 진짜? 역시 유네밖에 없다.”
“안 돼. 버릇 나빠져.”
앉아있던 의자를 돌린 류제가 책을 읽던 유네와 제 침대에 누워서 버둥거리는 렌의 작당을 딱 부러지게 반대했다.
기숙사에서 공부를 할 때에는 앞머리를 묶어서 위로 올려 버리는지라 류제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드러나 후광이 났다. 저런 얼굴로 호통을 치면 설득력이 자동으로 수직 상승했다. 재경도 저 환한 얼굴에 속아 팔자에도 없는 독서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속지 않겠다 눈을 질끈 감은 재경이 떼쟁이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렸다.
“담부터 제대로 하면 되지. 이 책은 너무 어렵단 말야.”
“그 말은 최선을 다한 이후에 해도 돼. 선생님이 네 저번 달 독후감 제출일을 내일까지로 미뤄 주시기까지 하셨잖아. 그것 때문에 선생님한테 혼났으면서 또 그런다.”
“이 책, 그 서… 도서위원 미나 플로리아 걔가 추천한 거잖아. 다 필요 없고 내가 왜 걔가 추천한 책을 읽어야 하는데?”
“왜냐니. 렌 군은 이상하게 그 애 싫어하더라? 미나 양 예쁘고 귀…귀엽지 않아?”
본래는 여자인 주제에 남장을 한 채로 여자애한테 예쁘고 귀엽다고 말하니 기분이 이상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유네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확실히 남들이 보기엔 조용조용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학급의 도서위원 미나 플로리아를 렌 지미가 굳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비키 때처럼 그쪽에서 먼저 거부했던 것도 아니고.
“켁.”
재경은 미나 플로리아의 정체를 말하고 싶어 근질거리다가도 조커 카드를 여기에서 쓰고 싶지 않아 달싹거리던 입을 다물고 콧방귀만 뀌었다. 그런 재경을 보고 류제는 또 저런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안 친해서 그런 거잖아. 심술은 그만 부리고 얼른 독후감이나 써. 곧 있으면 소등이야.”
“사람이 관상이란 게 있잖아. 걔는 좀 아닌 관상이라고. 여친 사귀려면 참고해라, 류제.”
“아니, 내가 왜…….”
집중력이 떨어져서 이제 더 이상 책을 못 읽겠는지 재경은 내일 선생님한테 혼나도 그만, 안 혼나도 그만이라며 책을 발로 차서 멀리 치워버렸다.
그러면서 혹시나 류제를 흘깃거리던 재경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악동처럼 이를 보였다.
“류제, 넌 좋아하는 여자 타입 있어?”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류제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재경은 이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류제 정도 얼굴에 스펙이면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꼬일 텐데 저놈은 생각보다 여지를 안 준단 말이지. 얼굴도 앞머리로 다 가려버리고.
생각해 보면 내 플레이 스타일은 엄청 공격적이었는데 류제 본인은 하나같이 1번 2번 3번 중에 1번 같은 무난하면서도 감정 표현이 적은 대사만 친다. 그게 게임 제작사가 원했던 류제의 진짜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손으로 턱을 기댄 재경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꼭두각시 춤의 색시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발을 살랑거렸다.
“혹시라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서로서로 도와주려고 그러지. 우리 반 애들 중에는 없어? 그럼 이상형만이라도 알려 줘.”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하아. 죽어도 독후감은 쓰기 싫다 이거지? 오늘이 1일인데 저번 달 독후감을 언제까지 붙들 셈이야?”
“치사해! 빨리 말해 줘! 말해 주면 돌아가서 마저 읽고 내일 제출할게.”
뭐가 치사해. 독후감 숙제를 왜 내 이상형과 타협하는지 모르겠네. 류제는 하아, 한숨을 내쉬며 묶었던 앞머리를 풀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곱슬머리가 시원한 눈매를 가려버렸다.
렌이 눈을 반짝거리며 끈질기게 물어오는 것이 귀찮았던 류제는 말해줄까 말까 망설여졌다.
류제의 입이 미묘하게 달싹거리는 것을 보자니 조금만 더 몰아붙인다면 말해 줄 기미가 보일 것 같다. 재경이 어서 그걸 입에 담으라고 종용하듯 침대 가에 걸터앉았다.
류제의 이상형 이야기는 유네의 호기심도 불러일으켰는지 그녀도 잠시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눈동자를 굴렸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최근에 신경 쓰이는 사람도 없어? 비키는 어떤데. 요즘 자주 이야기하잖아.”
“뭐? 그런 거 아냐.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도 잘 모르겠어.”
류제는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렌과 달리 여자 친구란 존재 자체를 고려한 적이 없었던지라 좀처럼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류제가 입을 다물고 긴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소등 방송이 나왔다.
―소등 10분 전입니다. 모든 학생들은 방으로 돌아가 취침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소등 10분 전입니다. 모든 학생들은 방으로 돌아가 취침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빨리! 빨리 말해 봐.”
오늘 아니면 들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경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고민하던 류제는 여러모로 귀찮아져서 에라 모르겠다 손가락을 펼쳐 들고 하나하나 꼽았다.
“으음… 눈동자가 크고 예쁘고… 머리카락은 긴 곱슬머리에 화려한 색. 우유처럼 깨끗한 피부에 키도 크고… 으으음…….”
“또? 또 없어? 성격이라든가. 특징이라든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독촉하지 마. 잘 안 떠오른단 말야.”
재경이 류제의 입에서 나온 대망의 이상형과 실제 히로인들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잽싸게 비교했다.
눈동자가 크다 : 히로인은 다 크고 예쁘다. 난 눈동자 작은데. 그게 매력 포인트지.
긴 곱슬머리 : 히로인 중에 파마기가 있는 건 세라 쌤인데? 난 직모지만. 이 개털 같은 머리 좀 어떻게 했으면 좋겠네.
피부 : 다 우유처럼 깨끗하지. 히로인이잖아. 나도 주근깨만 없다면 뭐.
키가 크다 : 왕녀는 엄청 크고… 세라 쌤도 큰 편이다.
머리가 화려한 색이다 : 선생님 빼고 죄다 알록달록해. 비키는 빨간색, 왕녀는 노란색, 서큐버스는 초록색, 유네는 파란색. 뭐야, 무지개야? 나는 칙칙한 지푸라기 같은데.
흐음, 보아하니 류제의 이상형에 제일 근접한 사람은 세라 쌤인 것 같다. 근데 이상하다. 류제가 부반장이라 같이 선생님 잔심부름을 다닌 적이 많지만 그런 징조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냐, 머리 색이 화려한 게 좋다고 했으니 세라 쌤이 아닐 가능성이 있어.
설마 히로인이 아닌 다른 평범한 학생인가? 에이, 미연시 주인공이 히로인을 두고 그럴 리가. 하지만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
“다른 건 없어?”
“으음… 그러니까…….”
추론에 실패한 재경이 힌트를 더 달라며 징징거렸다. 현재 가장 많은 교집합이 보이는 것은 왕녀와 세라 쌤이다. 젠장, 비키랑 유네는 아예 이상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거냐. 기껏 두 사람 중에 한 명 밀어주려고 했더니.
아냐, 비키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작은 키가 아닌걸. 그렇게 되면… 으아아, 모르겠다!
“성격은? 차라리 성격을 알려 줘. 막 떽떽거리는 거? 도도한 거? 살짝 소심한 거?”
“으으음…….”
“아, 빨리 좀 말해 봐. 궁금하잖아! 무슨 뜸을 그렇게 들이냐?”
―12시가 되었습니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잠이 듭시다. 소등합니다. 이상.
방송과 함께 방 안 전등이 뚝 끊겨 류제가 사용하던 스탠드만이 밝게 빛났다. 소등이 되었는데도 재경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이 닦달을 하자 류제가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며 입을 열었다.
“…부끄러우면 귓불이 빨개지는 게 귀여운 사람?”
“에이, 그게 무슨 성격이야. 누가 류제 신리 아니랄까 봐 이상한 취향이나 가지긴.”
겨우 나온 말이 저런 별 볼 일 없는 거라니. 재경이 김빠졌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자기가 말을 내뱉고 자기가 깜짝 놀란 류제가 동요하는 눈동자를 앞머리로 가리고 파리 쫓듯 재경을 제 방으로 휘휘 내쫓았다.
“여튼 말해 줬으니까 가서 독후감 꼭 써야 해!”
“에에… 유네야…….”
“유네한테 기대려고만 하지 말고.”
버려진 고양이처럼 불쌍하게 눈을 빛낸 재경이 마지막 희망 유네에게 애원했다. 유네는 뭐든 해내는 렌이 기대오는 것이 썩 좋았는지 배시시 웃으며 무턱대고 딱밤을 때리는 류제를 만류했다.
“류제 군, 난 보여 줘도 괜찮은데.”
“자꾸 숙제 보여 주다 보면 버릇 나빠진단 말야. 안 돼.”
“칫. 치사빤쓰다. 됐어. 나 혼자 겁나 열심히 써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을 거다.”
철옹성 같은 류제의 방어는 난공불락이다. 결국 유네의 독후감도 포기한 재경이 아침에 보자며 작별 인사를 했다.
문이 닫힐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던 유네도 소등이 되었으니 이제 잘 준비를 해야겠다며 읽던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무리 봐도 렌 군은 싹싹하니 성격이 좋은 친구였다. 휩쓸리기 쉬운 나와 다른 분위기 메이커다. 같은 방을 써도 류제 군은 나와 둘이서만 있으면 말수가 그다지 없으니까 렌 군이 방에 놀러 오면 시끌벅적해서 좋아. 렌 군은 싫다고 투덜거리면서 아닌 척 배려도 많이 해주는 편이라 다른 사람들처럼 불편한 거 하나도 없고.
반면 같이 살고 있으니까 느끼는 건데 렌 군한테는 안 그러는 척 그러는 건지 몰라도 류제 군은 관심 없는 일에는 너무할 정도로 관심 없단 말이지. 그런 류제 군이 렌 군한테 잔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류제 군이 렌 군을 엄청 챙겨주는 것 같아.
“근데 류제 군.”
“응? 왜?”
렌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이제야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류제가 호명하는 유네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답했다. 손으로는 오늘 배운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저것 봐, 내가 부르면 평소에는 저런 태도인걸. 렌 군이 독후감 안 쓰는 게 정말로 걱정되니까 류제 군이 관심을 보이면서 신경 쓰는 거라고. 렌 군은 저런 모습 알려나 몰라.
유네가 툴툴거리며 이불로 입을 가렸다.
“이상형… 거짓말이지?”
“어?”
류제가 깜짝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표정은 마치 ‘어떻게 알았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거짓말에 넘어가는 건 렌 군밖에 없을 거야.”
“왜…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야 지금 12시가 넘었으니까 어젠 만우절이었잖아. 귀찮으니까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댄 거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던 유네가 힐끗 류제가 앉아있는 책상을 흘겼다. 류제는 그때서야 유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우와. 얕볼 수가 없네…….”
“그러니까 그런 거짓말에 넘어가는 건 렌 군밖에 없대도. 나중에 렌 군이 이 사람이 바로 류제 군 이상형이라고 모르는 여자애를 찾아서 데리고 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에이, 아무리 렌이라도 그런 무모한 짓은 안 할 거야.”
그리고 전부 거짓말도 아니고. 라는 말을 숨긴 류제가 책상으로 고개를 돌려 공부하는 시늉을 했다. 스탠드가 비추는 얼굴은 왜인지 새빨갛다.
눈치 빠른 유네가 그의 진심까지는 파고들지 못해서 다행이라며 류제가 남몰래 안도했다.
“잘 자.”
“응, 류제 군도 빨리 자.”
옆방으로 돌아간 재경은 류제와 벽 한 개를 마주 보고 꼬부랑 글씨를 써가며 억지로 독후감을 쥐어짜고 있었다.
그걸 상상하고 있자니 류제는 왜 이상형 이야기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해버렸는지 몰라 펜을 놓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 * *
세라 밀로니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학생들을 사랑하는 담임 선생님이자 동시에 마족과 전투 발발 시 하나의 기간트리카 소대를 통솔하는 소대장 역할을 맡은 중위 계급의 군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만일, 만에 하나라도 당장 내일 마족들이 쳐들어온다면 귀여운 제자들을 간악한 전투가 빗발치는 전선에 내보내야 하는 아이러니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시대를 따진다면 한창 뛰놀아야 할 어린 학생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그녀가 냉정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이 학교의 본 설립 목적부터가 마족들을 쓰러트릴 능력을 가진 어린 어빌리터들에게 고급 군사 훈련을 제공하고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등의 차별화된 의식을 부여하여 인류의 위협이 되는 마족 토벌에 앞장서도록 만드는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살해당하고 마국(魔國) 나라카가 몰락하기 직전, 마족들이 복수심으로 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는 평수업보다는 군사 수업의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세라가 제립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무렵 일어난 5.22 토벌전을 끝으로 마족들이 잠잠해지고 인류가 바라던 평화가 근접하게 찾아왔다. 이보다 많은 기간트리카 부대를 배출해 낼 필요성이 사라진 키아나트리체는 마침내 지금에 이르도록 어빌리터 교육 정책 방침을 바꾸었다. 그에 따라 이 학교도 보통의 고등교육 기관처럼 변모해 갔다.
하지만 여전히 세간에서는 제립학교 소속 학생들을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세라 밀로니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어빌리티니 기간트리카니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고 주변에서 떠받들어도 제립학교 학생들은 아직 나라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었다.
나라에서도 이런 시선을 신경 써서 제립학교 학생들을 ‘일단은’ 동년배와 같이 미성년자로 분류하고 있지 않는가.
오직 특이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분별도 모르는 어린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켜서 높으신 분들의 장기말로 험하게 굴리는 것을 보고만 있기엔 세라는 험한 꼴 다 본 어른으로서 학생들이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군인으로서 국가에 충성하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전쟁에 학생들의 꿈까지 이용해야 할지도 모르는 가능성은 그저 아프기만 했다.
“…하아.”
그녀가 깊은 근심을 표출했다. 앞서 긴 사설을 통해 언급했다시피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아무리 나라를 지키고 마족을 상대하는 법을 익히더라도 성인들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들이었다.
그건 국가전복 위협상황이 아니라면 학교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대해, 특히 보호구역인 학교를 벗어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는 행사에 대해 반드시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보호자들―학생의 부모나 가족들은 어빌리터들은 제립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나라의 강제적 명령에 의거하여 그들의 자식을 학교에 맡겼다. 키아나트리체의 입장에서도 보호자들과의 신용의 문제로써 학생들이 마족과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외부적 위협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동의라. 세라 밀로니는 착잡해졌다. 도대체 몇 번째 쉬는 한숨인지 모르겠다.
다음 주부터 가게 될 수학여행 동의서와 일정표를 동봉하여 반 학생들의 보호자의 거주지에 발신해서 답변을 회신받는 작업을 얼추 마무리하던 세라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은 한 장의 동의서를 만지작거렸다.
보호자가 수학여행에 동의한다면 동의서에 사인하고 학교로 반송하면 된다.
개중에는 부모가 없어 류제 신리처럼 자라온 고아원의 신부님이 사인한 사람도 있고, 어릴 적의 비극으로 집안 자체가 멸족한 셀로니아가의 비키 셀로니아처럼 유모가 사인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건 특수한 경우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보호자로 등록된 직계 가족이 허락하는데 이 학생만 그러지 못하고 개봉되지 못한 동의서가 세 번째 반송되었다.
세라 밀로니는 문제의 학생을 호출한 상태였다. 어딜 가든 안 좋은 쪽으로 눈에 띄는 문제아적인 기미가 보이고 쪽지 시험은 늘 반 꼴찌를 도맡으며 말썽을 피우는 데에만 기가 막힌 재능이 있는, 불명의 어빌리티를 가진 학생이다.
“아, 수학 쌤. 저 진짜 하려고 했다니까요? 근데 진짜 열심히 풀다가 잠들어 버려가지고……!”
“예끼. 거짓말하지 마라. 네 변명 레퍼토리는 늘 똑같구나.”
“진짜 하려고 했어요. 쌤, 저 못 믿으시는 거예요?”
“못 믿으니까 하는 소리지. 정 그러면 하교 전까지 제출하고 가거라. 네가 숙제를 낼 때까지 교무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나이 지긋한 수학 선생님이 막 8반 수업을 끝내고 렌 지미와 함께 교무실로 들어오며 그를 꾸짖었다. 또 숙제를 제때 제출 못 해서 혼나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저 말썽꾸러기. 세라가 골치 아픈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몇 번이고 나오는 한숨을 숨겼다. 예쁜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렌 지미 학생.”
그녀가 문제의 학생을 그녀의 책상으로 호출했다. 재경은 수학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어물쩍 넘어갈 속셈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냉큼 세라가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가요, 쌤. 수학 쌤. 내일까지 해오는 걸로 할게요. 알았죠? 콜?”
“안 된다, 이놈아. 오늘까지 내.”
“내일까지라고요? 오키도키.”
제멋대로 결론 내리는 괘씸함에 기가 찬 수학 선생님은 호통을 쳤다. 재경은 안 들리는 척 킬킬 웃어넘기며 세라의 앞에 왔다.
재경은 자신을 호출한 담임 선생님의 저의를 몰라 눈만 멀뚱히 떴다. 그러다 며칠 전 결국 류제 몰래 유네의 독후감을 베껴서 제출했다는 것을 들킨 게 아닐까 멋대로 짐작하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지금 와서 독후감 다시 쓰라는 건가? 절대로 싫어. 나 그거 못 읽겠단 말이야.
재경이 까불거리던 입을 다물고만 있자 이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나 세라는 조마조마했다. 서있는 재경더러 앉으라고 손짓을 한 그녀는 그에게 수학여행 동의서를 보여 주었다.
“다음 주에 펠노아로 수학여행 가는 건 알고 있죠?”
수학여행? 독후감 때문이 아니라? 재경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야말로 단순함의 극치다.
“당빠 알고 있죠. 대박 기대 만빵 중인데, 왜요?”
“수학여행에 참가하려면 보호자 동의가 있어야 해요. 저번에 선생님이 당신들 부모님께 보내 드렸다고 말했던 건 기억나나요?”
“네, 그랬던 것 같은데.”
부모님? 그런 것도 있었나.
재경은 게임 캐릭터인 렌 지미에게 빙의했다고 자각하고 있었지만 외관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렌 지미는 신재경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렌 지미보다는 신재경으로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렌 지미의 가족 구성원이나 여타 다른 ‘미연시를 공략하는 데에’ 불필요한 부분들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일부러 그 부분을 외면하고 있기도 했다.
“설마 저더러 수학여행 가지 말라고 그랬어요? 진짜?”
“아닙니다. 그게… 렌 지미 학생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니 보호자가 할머니뿐인데 지금 할머님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시는 듯합니다. 당신이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상황이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래서 집으로 보낸 동의서가 계속 반송되는 것 같아요. 모르셨나요?”
“몰랐어요.”
“그래, 그럴 만도 하지요. 걱정할까 따로 말씀 안 하신 것 같더군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렌 지미의 가족사가 고속도로 고라니처럼 불쑥 튀어나오자 재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차라리 독후감을 다시 쓰라고 하는 게 더 편하겠다. 의자에 앉아 선생님과 대면중인 재경은 저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세라의 시선이 죽을 맛이었다. 렌 지미의 가족사라든가 보호자라든가 알 게 뭐람. 내 일도 아닌데.
깨발랄한 재경이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입을 다물자 역시 가족이 아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착각한 세라가 상처 주지 않으려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수학여행 동의를 못 받고 있는 학생은 우리 반에서는 당신밖에 없어요. 수학여행은 제립학교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야외 학습이니까 저는 당신도 꼭 갔으면 좋겠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려서…….”
“따로 허락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할머니 말고는 없어요?”
“저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고 있지만 현재로선 기한에 못 맞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전… 수학여행은요? 못 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나 혼자만 수학여행 가지 말라는 거야? 재경은 곧 다가올 4월의 수학여행 챕터를 무척 기대하고 있었던지라 선생님의 말이 청천벽력처럼 느껴졌다.
싫어. 나도 수학여행 가고 싶어. 초등학교 때 제주도 수학여행도 돈 없어서 못 갔고. 중학교 때는 일본이었지, 역시 안 갔다.
하지만 여기는 원래 세계와 다르게 모든 게 다 공짜라서 할머니가 돈 걱정할 필요 없잖아. 그런데 이번에도 못 간다니. 여기서마저도 개밥에 도토리 꼴이 되라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게다가 암만 여기가 중2병 설정 난무한 미연시 세상이라지만 키아나트리체는 멋진 유럽풍 나라인걸. 이 기회가 아니면 내가 언제 수학여행으로 이세계를 탐방하겠어? 절대 못 할 경험일 거야. 나도 갈래. 어떻게 해서든 갈 거야. 제발 가게 해줘!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뭔데요?!”
선생님의 희망적인 대답에 재경이 돌이라도 씹어 먹을 기세로 눈을 번쩍 떴다.
세라가 재경에게 보여줬던 동의서 서명란에 자신의 사인을 넣었다. 그 의미를 바로 알아차린 재경이 두 손을 모으며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렸다.
“쌔애앰!”
“대신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 밖에서 말썽을 피우면 안 됩니다. 이 조건은 교장 선생님하고도 이야기가 된 사항이니까요. 아시겠어요? 수학여행 내내 당신 보호자가 저라는 걸 명심하세요.”
“당빠당빠죠. 쌤 완전 최고!”
누가 보호자건 결과적으로는 수학여행에 갈 수 있다는 소리에 재경이 교무실 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저 유난은 누구한테서 배운 건지 참. 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보다 주말에라도 할머니가 입원하고 계시는 병원에 다녀오는 게 어때요? 주소는 따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번 주는 시간이 안 되는데요.”
“언제가 되었건 가보세요. 하나뿐인 가족이잖아요. 할머니께서 보고 싶어 하실 거예요.”
세라가 옆에 있던 메모지에 주소를 적어서 재경에게 뜯어주었다. 재경은 복잡 미묘한 얼굴이 되었다. 할머니라. 친숙한 어감이지만 렌 지미의 할머니는 신재경의 할머니가 아니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데 괜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아픈 할머니가 누워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노라면 병문안은 엄두가 안 난다.
재경이 싫은 생각을 할 때 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벌써 쉬는 시간이 끝났다.
“나중에 갈게요. 쌤, 것보다 진짜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꼭 가보세요. 약속이에요.”
네, 네. 선생님의 말을 대강 흘려들으며 재경이 교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재경은 렌 지미의 가족은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칫.”
조금 거슬리는 것은, 막연하게 부모님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렌 지미 역시 재경과 다를 바가 없는 신세라는 현실에 시무룩해진 감정이었다.
“뭐 때문에 부르셨던 거야?”
“렌 군, 혹시 들켰어?”
선생님에게 불려갔던 렌이 아슬아슬하게 교실로 돌아오자 류제와 유네가 경쟁하듯 속삭였다.
덕분에 책상에 앉기도 전에 질문 공세에 시달린 재경이 유네에게 입조심 하라며 주의했다.
“유네, 쉬잇! 안 들켰어. 별거 아니었어. 걍 수학여행 가는 거 땜시.”
“들키다니 뭘?”
독후감을 베낀 것을 들켰냐는 물음을 이해하지 못한 류제가 뒷자리 너머 유네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렌에게 독후감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류제가 알면 또 화를 낼까 봐 뜨끔한 유네가 류제와 눈이 마주치고 어색하게 딴청을 피웠다.
“아…아무것도 아냐. 그보다 렌 군, 수학여행 때문이라고?”
눈을 내리깐 류제가 이번에는 렌을 노려보았다. 재경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류제의 훑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유네처럼 모르는 척 다음 수업 교과서를 꺼낸답시고 책상 서랍 안을 뒤적거렸다.
이다음은 학급 회의 시간인데. 둘 다 분명 그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었다.
“나한테 뭐 숨기고 있지?”
“암것도 아니라니까 자꾸 물어보네. 의처증이라도 걸렸냐?”
“의처… 뭐라는 거야. 여튼 숨기고 있는 거 있잖아. 맞지?”
“그쪽 창문에 줄지은 세 사람 조용히 해. 지금부터 수학여행 조 편성 제비뽑기할 거니까 이름 부르는 사람은 앞으로 나와.”
의처증 발언에 기가 막힌 류제가 재경에게 반박하자 학급 회의를 준비하던 비키가 시끄럽다 호통을 쳤다. 그녀는 쉬는 시간 동안 꿈지럭거리며 만들던 제비뽑기 상자를 가지고 나와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학급 회의로 다음 주에 있을 수학여행 조 편성을 정한다는 소식에 교실 전체가 학생들 떠들어대는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여학생들은 친한 친구들끼리 같은 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표출했다. 그건 재경 쪽도 마찬가지였다.
“조 편성? 뭐야, 그게.”
“수학여행 자율 행동 시간 때 같이 다닐 사람들 정하는 거야.”
“우리도 같은 조 됐으면 좋겠다.”
“숙소는 같을걸? 남자가 우리밖에 없으니 셋이서 계속 같은 방 쓰겠지.”
류제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둘 다 이 틈을 타서 말 돌리는 것 좀 봐. 끝까지 안 말해 주네.
세 명 다 수학여행 숙소가 같다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좋아하던 유네는 곧 안색이 제 머리 색처럼 새파래졌다. 잠깐만. 숙소가 같다고? 그것도 렌 군하고도? 류제 군하고 같은 방 쓰는 것도 불안한데 렌 군까지 있으면 어떻게 한담.
으으, 저번에 실수로 렌 군 알몸 본 거 이제 겨우 잊혔단 말야. 숙소 리스트에 온천이 딸린 숙소도 있던데 나 제대로 숨길 수 있으려나?
“조 편성에 관련해서 제안 하나만 해도 될까?”
혼자 삐용삐용 비상사태에 돌입한 유네의 반대편 책상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분홍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를 안경으로 가린 초록 단발머리 미나 플로리아가 다소곳하게 손을 들어 의견을 낸 것이다.
재경은 수학여행 때부터 본격적으로 류제에게 달라붙기 시작하는 저 망할 악독한 서큐버스가 가면을 쓰고 무슨 수작질을 벌일지 몰라 눈을 세모지게 떴다.
“나는 반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방해하지 마, 렌 지미. 그리고 류제 넌 언제까지 앉아있을 셈이야? 부반장이라면 빨리 나와서 날 도우란 말이야, 이 직무 태만아!”
학기 초라 적극적이지 않은 반 분위기 때문에 회의를 할 때마다 고생하는 비키가 오늘도 제 몫을 해내지 않는 류제를 가리키며 교탁을 탕탕 내려쳤다.
재경 때문에 의견이 묵살된 미나는 우물쭈물 손을 내리고 뭐 잘못했나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재경은 저 나약한 척하는 모습이 사악한 마족의 연기임을 알고 있었지만 미나의 버려진 강아지 같은 눈빛을 보자니 제가 잘못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왜 드라마를 보면서 우는지 알 것 같네. 연기는 여우주연상감이야. 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구. 내가 속을 줄 알아?
흥, 콧방귀를 뀐 재경은 차마 미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아.”
직무 태만이라는 오명을 쓴 류제가 귀찮다는 얼굴로 교탁으로 향했다. 어차피 반의 모든 권력은 반장인 비키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류제의 일은 선생님 심부름이나 서기가 다였다.
부반장은 무슨, 그냥 잡노동꾼이라 하지. 부려 먹으려고만 하는 주제에 다른 친구들 앞에서 직무 태만이라고 하다니 너무한 거 아냐? 렌은 왜 나를 부반장에 추천해서는 번거롭게. 유네와 렌이 자기들끼리 속삭거리는 걸 쳐다본 류제가 입을 비죽거렸다.
류제가 나오고 반 분위기가 정돈되자 비키가 미나에게 친절하게 되물었다.
“미나,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저 머저리 렌은 신경 쓰지 말고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해 봐.”
“고마워. 오지랖일 수도 있는데 우리 반에는 남학생들이 세 명밖에 없잖아. 그래서 수학여행 때라도 다 같이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앞으로 1년간 같은 반이니까.”
“그래서 요점이 뭐야.”
“남학생들을 조당 한 명씩 나누는 건 어떨까? 다른 친구들한테서 그랬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빈번하게 들렸었거든.”
“뭐? 싫어! 왜 멋대로 정해?”
미나의 의견에 제일 크게 분개한 건 재경이었다. 암만 이 빌어먹을 세상이 정해진 대로만 흘러가며 수학여행 챕터에서 세 남학생은 절대로 같은 조가 되지 않겠지만 재경은 제비뽑기 운으로라도 운명을 바꿔보려는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미나의 의견대로라면 그것조차 불가능해지지 않는가.
하지만 학급 여론은 미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맨날 트집만 잡고 시비 걸기만 하는 렌 지미가 또 애먼 사람 잡기 시작했다 생각한 그녀들은 재경의 항의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어차피 남학생들은 무조건 숙소 같이 쓸 거 아냐. 수학여행만큼은 다 함께 어울려 노는 것도 좋잖아.”
“맞아, 맞아. 맨날 너희끼리만 놀고. 우리도 같이 다니고 싶다 뭐!”
잘생긴 류제나 귀엽고 앙증맞은 유네와 같은 조가 되고 싶었던 학생들이 옳다구나 자리에서 일어나 미나의 의견에 편승했다.
렌 지미는 꽝 비슷한 것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같은 확률을 가지게 되니 미나의 의견이 그녀들에게 나쁘지 않게 비친 것처럼 보인다.
비키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4명씩 조를 만들라고 하셨고 우리 반은 인원이 총 23명이니까 한 조는 3명으로만 이루어질 거야. 남학생들을 배분하면 여섯 조 중에 세 조는 여학생들로만 조가 만들어질 거고. 그래도 상관없으면 난 아무래도 좋아.”
“뭐? 장난하냐? 불합리하다. 비키 이 독재자! 우리도 동등한 기회를 달라!”
“뭐, 어때. 렌 너도 매애앤날 우리한테 여자 친구 타령이나 했잖아. 놀기는 남자애들하고만 놀면서. 어차피 여학생들하고 같은 조로 해달라고 징징거릴 거면서 왜 트집이냐?”
“그건 그렇겠지만!”
“투표로 정해. 남학생들 배분에 동의하는 사람?”
당연 과반수로 이루어진 여학생들 중 과반수가 동의를 했기에 이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적이나 다름없는 미나 플로리아의 의견이라 무턱대고 반대했던 재경은 반박문을 듣자 하니 여학생들하고 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솔깃했다.
하지만 냉큼 의견을 철회하기엔 팔랑귀라고 비웃을까 봐 미적지근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은 재경은 문득 유네나 류제와 자율 행동 시간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모든 게 다 정해진 대로 흘러간다면 몰라도 수학여행 호감도 이벤트는 거의 모두 플레이어 선택형이잖아. 게다가 수학여행에서 발생하는 호감도 이벤트는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발동한다고. 다른 조면 간섭하기 번거로울 텐데.
재경은 류제와 같은 조가 되는 사람은 어차피 히로인들인 왕녀와 비키 그리고 미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네는 웬 듣도 보도 못한 싸가지 세 명과 같은 조가 되고, 정작 렌 지미 본인은 누구와 같은 조가 되는지 모른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바로 엑스트라의 비극이었다.
류제한테 간섭하려면 내 쪽에서 조를 이탈해야 하나? 그런 귀찮은 짓은 딱 질색이다. 재경이 수학여행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머릿속으로 간단히 정리했다.
3월은 한 히로인 단독으로 호감도 이벤트가 진행된 것과 달리 4월 수학여행 챕터는 모든 히로인들에게서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한다.
특히나 메인 히로인인 왕녀의 힌트 이벤트가 어려워서 재경도 대여섯 번은 로드를 한 기억이 있었다. 류제가 그걸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턱을 기댄 재경은 칠판에
1조. 류제
2조.
3조. 유네
4조.
5조. 렌
6조.
라고 느릿느릿 판서하는 류제의 정갈한 글씨를 구경했다. 비키는 번호 순서대로 학생들을 호명해 제비뽑기를 시켰다.
제비뽑기 전 여학생들 사이에서 렌을 조원이 3명인 조로 만들자는 욕심도 생겼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너무 렌만 따돌리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어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재경이 그걸 몰라서 다행이지 알았으면 회의 중에 난리를 쳤을 거다.
재경의 예견대로 류제의 조원은 니냐롯트, 비키, 미나가 되었다. 과연 히로인들이라 주인공과 얽히는 우연이 기가 막히게 끈덕지다.
유네나 재경은 모두 잘 모르는 친구들과 한 조가 되었고, 남학생이 섞이지 않은 나머지 조들도 약간의 소란을 끝으로 확정되었다.
유네는 같은 조가 된 학생들을 확인하고 사색이 된 얼굴을 가렸다. 암만 여자 친구 이야기에 혹했긴 해도 재경도 말 안 섞어본 여자애들과 같은 조가 되어서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부반장 역할을 위해 비키 옆에 서있던 류제도 렌과 같은 조가 되고 싶었기에 결과가 못마땅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류제도 아가타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들과 같은 조가 되고 싶었다. 고아원을 떠나 어른스러움을 한 꺼풀 벗기고 그 나이대 학생처럼 동성 친구들과 평범하게 여행을 즐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실망한 눈빛은 읽기 힘들었으며 그 시선이 렌 지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오직 미나 그녀뿐이었다.
* * *
꿈에 그리던 수학여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비록 거대한 키아나트리체의 일부분일지라도 학교를 벗어나 친구들과 이세계 여행을 함께할 수 있어 흥분한 재경은 렌 지미의 할머니 이야기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병문안을 제안했던 선생님의 부탁을 떠올리지 못한 재경은 당연히 주말에 옆방 친구들과 수학여행에 가져갈 물품들을 사러 나간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하렘 미연시에서는 뻔한 이야기지만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외간남자 주제에 감히 고귀한 왕녀님과 같은 조가 되었다는 이유로 조원이 발표됐던 날부터 니냐롯트 왕녀의 추종자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한 류제는 주말이 되자 꽤나 초췌해진 모양새였다.
하기야 RPG 게임에 나오는 몬스터처럼 길만 걸을라치면 돌연 구실을 붙여 괴롭혀 대니 경험치 하나 되지 않는 류제의 개고생은 말도 다 못할 것이다.
제립학교 학생들에게 매달 동일하게 지급되는 용돈을 들고 학교 앞 상가에 나와 어떤 과자를 살까 고민하던 재경은 불쌍한 류제를 보면서 저게 바로 주인공의 숙명 같은 거겠거니 입을 다물었다.
상대가 일국의 왕녀라 차마 불평도 못 하고 인상만 찌푸리는 게 안쓰러워도 어쩌겠나. 정해진 조를 마땅한 이유 없이 변경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나도 생각을 해 봤는데 류제가 예정대로 움직여 줘야 간섭하기 편할 것 같단 말이지.
“그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미안. 잠시 다른 생각 좀 하느라고. 벌써 다 골랐어?”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걸 왜 비교하고 있냐는 거지.”
“이게 왜? 아차. 다른 건 줄 알았는데.”
같은 과자를 비교하던 류제에게 재경이 힘내라며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재경도 여행지까지 가는 길에 먹을 과자를 골랐다. 류제와는 달리 서로 다른 과자를 들고 진지하게 고민하던 재경은 짠돌이처럼 둘 중에 하나만 골라 바구니에 넣었다. 다른 친구들은 집에서 용돈을 추가로 보내주지만 재경은 그러지 못하니 가능한 한 근검절약해야 했다.
과자는 이걸로 충분하다. 숙소에서 입을 잠옷은 체육복이랑 생활복이면 되고 활동복은 교복이니까 여행용 세면도구만 구입하면 끝이다. 남은 용돈으로 기념품 사야지.
“둘 다 아직 멀었어?”
마트에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는데 유네와 류제는 아직도 과자 코너에 머물러 있었다. 혼자서 골인 지점에 도착한 재경은 저 늑장꾸러기들을 독촉할 필요를 느꼈다.
류제처럼 기분이 안 좋은 유네는 뭐가 문제인고 하면 조원들 때문이다. 미들 스쿨 때 지독한 왕따 경험이 있는 유네가 하필이면 반에서 가장 막 나가는 친구들과 같은 조가 되었던 것이다.
수학여행 중 발생하는 유네의 호감도 이벤트는 조원들에게 노예처럼 부려 먹히던 유네를 류제가 도와주는 것에서 연결되기 때문에 당장 유네가 괴로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안, 유네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호감도 이벤트를 성공시켜 주는 것밖에 없구나. 안 그래도 수학여행 동안 류제한테 치근덕거릴 서큐버스를 신경 써야 하고 할 일도 태산이라 너만 특별 취급할 수 없어.
“멍 그만 때리고 빨리 골라. 류제 너도 그 과자 살 거야 말 거야? 언제까지 들고 있을래?”
“알았어. 지금 정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으응… 미안해, 렌 군. 나도 금방 끝낼게.”
이번 챕터의 호감도 이벤트는 주인공 류제가 수학여행지를 싸돌아다니며 히로인들과 접촉해 힌트를 찾아낸 다음, 마지막 날 밤 캠프파이어를 할 때 히로인들이 가지고 싶어 했던 선물을 알맞게 전달해 주면 성공한다.
말만 들어보면 단순하지만 이 수학여행 챕터는 다섯 명의 히로인들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서로 겹치는 바람에 재경도 히로인들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 하는지 기억이 애매했다.
그래서 재경도 힌트가 나올 때마다 류제의 곁에 알짱거리며 이야기를 엿들을 속셈이었는데 또 다른 심정으로는 기껏 수학여행까지 가는데 호감도 이벤트만 신경 쓴다고 소중한 수학여행을 흐지부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율 행동 시간에 같이 놀 수 없는 건 아쉽긴 해도 반별 활동에서는 함께할 수 있잖아. 내가 호감도 이벤트 신경 안 쓰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숙소도 같은데 풀 죽을 것도 없다.
“다 골랐냐?”
“으응. 가자 렌 군.”
“하아…….”
“아까부터 기운 빠지게 무슨 한숨이야. 월요일부터 기다려 마지않던 수학여행인데. 너희 기분 꿀꿀하다고 옆에 사람 김빠지게 하지 마라.”
이 못난 친구들을 위해 재경이 바구니에 트럼프 카드를 하나 숨겼다. 예정에 없던 추가 지출이지만 탄산 빠진 콜라 같은 놈들을 위해서 이 정도쯤이야 투자해 줘야 활기가 생기겠지. 숙소에서 다 같이 카드 게임 하다 잠드는 건 로망이니까.
재경이 버퍼링 걸린 동영상 사이트처럼 과자를 들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두 사람을 질질 끌고 계산을 하러 나갔다.
조원으로 인해 불행해진 두 사람이 수학여행을 어떤 생각으로 맞이하건 간에 주말이 지나가고 대망의 수학여행 첫째 날이 찾아왔다.
청명한 하늘에 해가 반짝 타오르는 4월의 날씨는 여행의 시기에 맞물려서 벚꽃이 찬란하게 흐드러졌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학생들을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 안은 기대감이 섞인 재잘거림과 과자 까먹는 소리로 가득 찼다.
키아나트리체의 수도 아가타를 빠져나가는 기차 밖 전경을 구경하던 재경은 드디어 수학여행을 간다며 할머니를 찾아 연발했다. 비록 어제 밤새도록 수학여행 스토리라인을 재확인하느라 피곤하긴 해도 심장이 터질듯한 기대감으로 활력이 넘쳤다.
“펠노아는 먹을 게 유명하다고 하더라. 특히 디저트가 그렇게 맛있대. 우리 자율 활동 때 맛집 탐방 하자.”
“뭐? 디저트? 나 돈 없는데.”
펠노아 여행 잡지를 보던 조원의 터무니없는 계획을 들은 재경이 초를 쳤다. 혹시라도 류제가 돈이 없어 호감도 이벤트를 성사시키지 못할 가능성을 고려해 없는 형편에 재경도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해서 어쩔 수 없었다.
기껏 제안했더니 고작 렌 지미에게 묵살 당했다는 사실이 짜증 났던 조원이 재경의 얼굴을 따라하며 똑같이 미간을 구겼다. 그 모습에 다른 조원들이 렌 판박이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데까지 와서 수전노처럼 그러지 마. 원래 여행지에서 돈 아끼는 거 아니라고 했어.”
“굶어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니고 음식 때문에 돈 다 쓸 일 있냐? 관광이나 해. 관광지 음식은 쓸데없이 비싸단 말야.”
“기껏 아가타에서 펠노아까지 가는데 치사하게 그러지 마. 그럼 넌 우리가 먹는 거 보고나 있어라. 됐지?”
“치사한 건 너다, 짜샤. 이거 조별 행동이잖아. 너네가 맛집 탐방을 하면 내 행동반경이 줄어든다고. 시간 아까워.”
“난 펠노아 맛집 탐방을 위해서 리스트를 뽑아왔거든? 이거 정리하는 내내 넌 아무것도 준비 안 했잖아. 그런 주제에 토 달지 마.”
역시 분위기 못 읽는 꽝 지미. 맞은편에 앉아있던 조원 여자애가 들으라는 식으로 투덜거렸다. 울컥한 재경은 특유의 양아치 같은 표정으로 ‘아앙?! 뭐라고?’라며 한 대 칠 듯이 크게 외쳤다.
건너편 좌석에서 소란을 들은 비키가 렌 지미를 힐끗거리다가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의견 조정 문제로 시끌벅적한 재경의 조와는 거리상으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같은 기차 칸이라서 그녀의 귀에 재경의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소리가 필터 없이 들려왔다.
“저 야만인은 때와 장소도 모른다니까. 시끄러워 죽겠네. 그보다 우리도 도착하기 전에 빨리 정하자.”
“원래 여행은 좀 시끌벅적해야 재미있잖아. 난 같이 들뜨는 기분이라 좋은데.”
류제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왕녀 친위대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류제의 옆자리 창가에 앉은 니냐롯트 왕녀는 은색 눈동자를 굴려 멀어져 가는 아가타를 응시하고 있었다. 왕족의 상징인 황금색 머리칼이 창문 밖 푸른 전경과 잘 어울렸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류제의 눈빛에는 내가 왜 이런 어려운 사람과 같은 조가 되는 바람에 생고생을 해야 하냐는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페…펠노아는 인간이 마족에게 첫 승리를 거두었던 전투가 있었던 곳이래. 당시에는 기간트리카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이긴 걸까?”
“글쎄. 싸워서 이겼겠지.”
재경이 언젠가 짚고 넘어갔던 대로 류제는 선택지 1, 2, 3 중 가장 무신경한 1을 선택할 정도로 관심 없는 부분은 안중에도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기껏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던 미나의 노력은 단칼에 끊기고 말았다.
류제는 과거 인류가 마족과 어떻게 싸워 이겼든 그깟 사소한 것보다 조원들과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는 렌에게 더 눈길이 갔다.
전쟁 이벤트를 비롯한 배드 엔딩을 막으려는 재경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류제는 히로인을 공략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재경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비키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는 성사되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류제는 히로인들이 눈에 차지 않게 되었다. 애초부터 여자 친구는 아무래도 좋은 류제를 저대로 둔다면 수학여행 호감도 이벤트는 모조리 실패할 것이 분명했다.
류제가 멍한 시선으로 렌을 쳐다보니 언제 싸웠냐는 듯 그는 같은 조원들과 과자를 먹으며 요즘 유행하는 소원 팔찌를 만들고 있었다. 렌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손재주 없는 여자애들을 타박했다.
“이렇게 하는 거라고, 이 바보야. 자기가 하자고 했으면서 왜 매듭도 제대로 못 짓냐? 이렇게. 이렇게!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시끄러워. 렌 주제에 사람이 손재주가 좀 없을 수도 있지 뭘 그렇게 각박하게 굴어? 난 너처럼 그렇게 척척척 못 만든다고!”
“이야… 렌 의외로 손재주가 좋구나. 진짜 잘 한다. 팔아도 될 거 같아.”
“의외가 뭐야, 의외가. 이 정도 못하는 게 사람이냐? 곰이지. 야. 곰. 이 곰손아 그거 아니라니까? 다시 보여 주랴?”
“두고 봐. 더럽고 치사해서 내가 꼭 너보다 더 예쁘게 만들고 만다.”
“어쭈?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나한테 도전하시겠다?”
조원의 도발에 걸려든 재경이 새로운 끈으로 다시 소원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이 좋은지 우쭐해진 재경은 말 그대로 척척 순식간에 소원 팔찌를 완성해서 이런 쉬운 것도 못하는 상대방을 핀잔했다.
고개를 내뺀 류제는 렌이 만들고 있는 물건이 궁금해서 기웃거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비키가 그의 발을 밟아 정신을 이곳으로 빼왔다.
“아야야, 아프잖아.”
“집중 좀 해줄래? 자유 시간에 뭐 할지 정해야 하거든.”
“난 아무래도 좋아. 알아서 정해.”
“그런 방관적인 태도는 질색이야. 아무래도 좋아도 제대로 의견을 내고 참여해. 너도 조원이잖아.”
“왕녀님도 관심 없어 보이신데, 뭐.”
“아니, 계속하라. 최근에 잠을 못 잤을 뿐이다. 집중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피곤한 얼굴을 가리려 잠시 이마를 싸맨 왕녀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국(魔國) 나라카의 국경이 소란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날부터 시작된 악몽 때문에 최근 한 달간 수면의 질이 떨어진 니냐롯트는 피곤해서 모든 상황이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잠만 푹 잘 수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니냐롯트 왕녀님. 몸이 안 좋으시면 선생님께 가보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 정도는 아니다. 논의를 이어가거라.”
미나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고개를 저은 니냐롯트는 조원들을 위해 지친 기색을 지웠다.
난처한 듯 눈치를 살피던 비키는 여기서 자신마저 우물쭈물해 버리면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준비해 온 공책을 꺼내 들었다.
“그럼 제 의견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야, 류제. 제대로 들으라고!”
“아… 응.”
또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비키에게 꾸지람을 들은 류제가 뒤늦게 집중하는 척했다. 이목이 집중되자 좌석에 딸린 테이블에 자료를 올려둔 비키가 스크랩해 온 펠노아의 볼거리에 대해 설명했다.
스크랩을 해올 정도의 열정을 가진 비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류제는 조원을 확인한 날부터 수학여행에 무관심했다. 다니고 싶은 사람들끼리 다니면 좋았을 텐데 미나는 괜한 소리를 꺼내가지고.
원해서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왕녀와 같은 조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트집 잡히는 것도 싫고, 나는 힘든데 렌은 잘만 노는 모습을 보자니 괜히 심술이 난다.
덜컥거리는 기차 안. 류제의 마음도 모르고 까불거리며 조원들과 노는 재경을 지나쳐 다음 칸으로 가면 유네네 조가 있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떨어진 채 막 나가는 조원들에게 시달리는 유네의 사정도 류제처럼 썩 좋지 못했다.
“미…미안해!”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반신에 거시기 달린 거 맞아? 똑바로 좀 해.”
거들먹거리며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여학생들에게 걸려서 온갖 성희롱에 시다바리 노릇을 하는 유네는 선반 위에 넣어놓은 조원의 가방을 내려서 시키는 대로 음료수를 꺼내 주고 있었다.
“빨리. 나 목말라.”
“으응. 금방 꺼내줄게.”
조원의 독촉에 유네가 부리나케 가방 지퍼를 열자 거기에 여성용품이 바로 놓여 있었다. 흠칫한 유네가 조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그녀들은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비웃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한심해 죽겠네.”
“아니… 저…….”
“내 말 못 알아들었어? 가방 안에서 음료수 꺼내라고, 음료수! 음료수가 뭔지 몰라?”
“하하하. 바보 같아. 미들 스쿨은 나왔지? 젖도 못 뗀 애송이처럼 생겨가지고.”
“나르타 가문이잖아. 명문 학교 출신이겠지.”
“음료수도 못 빼는 게 명문이면 나는 엘리트다. 깔깔깔.”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유네는 어엿한 여자였다. 암만 남장을 하고 있어도 생리대는 그녀도 사용하는 물품이었다. 유네가 당황한 이유는 이런 난감한 짓을 배려 없이 저지르는 그녀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삐뚤어진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그녀들은 그저 좋다고 킬킬거렸다. 간악할 정도로 짓궂은 장난에 당한 유네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즐기는 듯하다.
수학여행을 출발하는 재경, 류제, 유네 세 사람의 조 분위기는 이처럼 극명하게 갈렸다.
특유의 똥꼬발랄함과 험한 입담으로 나름대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수행하며 조원들과 어울리는 재경.
혼자서만 재미있게 노는 렌을 보자니 울컥해서 그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류제.
질이 안 좋은 학생과 같은 조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왕따를 당했던 기억으로 침울해진 유네는 각기 다른 심정으로 관광도시 펠노아에 도착했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자 학생들이 짐을 챙겨서 하차했다. 교육지침이 달라 또래 아이들에 비해 통제가 잘 되는 그들은 반장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였다.
수업에 군사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보니 아직 1학년인데도 학생들은 행과 열을 버릇처럼 맞추었다. 성비가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평범한 학교와 다르게 검붉은색 여자 교복이 태반이다.
“저것 봐. 아가타에서 온 제립학교 학생들이야. 이야, 수학여행 왔나? 하기야 항상 이맘때쯤에 펠노아에 오는 것 같더라.”
누군가가 외쳤다. 마족들의 습격이 두려운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제립학교 학생들은 자랑스러운 인류의 희망이요, 키아나트리체 최후의 검이었다.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인류를 지키는 임무를 부여받을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도 학교에서 요구하는 수학여행의 취지였던지라 학생들은 일반인들의 관심 어린 시선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라면 어빌리터들이 다니는 학교잖아. 그렇다면 저 여자애들 전부 어빌리터라는 소리인가? 부럽다. 나도 어빌리티가 있었으면 좋겠어.”
“겁쟁이 주제에 아서라. 우연찮게 표를 구해서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을 관람한 적 있는데 우리 같은 범인들은 어림도 없어.”
“제립학교 출신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군대 고위직 간부가 된다는데 능력 잘 타고난 덕분에 인생이 폈구나. 부럽다.”
“저기 남학생 숫자 봐. 한 반에 세 명이 다야? 저긴 한 명이네. 쟤네는 무슨 기분일까?”
재경은 렌 지미에게 빙의를 한 이래로 제립학교 영향권 밖을 나가본 적이 없던지라 일반 사람들이 어빌리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랬기에 한국에서는 타인에게 열등감만 느꼈던 것과 반대로 사람들이 제립학교 학생이라고 치켜세워 주자 의기양양해져서 어깨에 뽕이 단단히 들어갔다. 암만 반에서는 꼴찌를 도맡아 하지만 저 말을 들으니 대단한 인물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들었어? 우하하하! 기분 째진다.”
“그만큼 사람들이 우리한테 기대하는 게 많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넌 기간트리카 반에서 제일 못 타잖아. 체육대회 때 어쩔 거야.”
“맞아. 아직도 유네랑 둘이 손잡고 깍두기 하는 주제에. 유네는 어빌리티라도 사용할 수 있지 자기 어빌리티도 제대로 사용 못 하면서 자만은.”
“저번 쪽지 시험도 꼴찌였지 아마.”
잘난 척 한마디 했다고 조원 세 명이 연달아 팩트로 두들겨 패자 재경이 사람 기분 좋은 꼴을 못 본다며 투덜거렸다. 놀려대던 조원들이 깔깔 웃어댔다. 그러더니 원래 그러면서 느는 거라며 병 주고 약 주고 진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위로를 건넸다. 아무래도 요 한 달간, 간을 보던 반 학생들은 논리로는 설명 불가능한 생물체인 렌 지미를 다루는 방법을 잘 파악한 모양이었다.
재경은 류제라면 이런 잘난 척도 적당히 받아줬을 거라고 불평하며 두 사람도 무사히 내렸나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유네가 자기 것이 아닌 가방을 몇 개나 들고 휘청거리는 장면을 목격한 재경은 못마땅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유네네 조원들을 찾아보니 그녀들은 유네를 따돌리고 저들끼리만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역시나다. 히로인인 유네도 조원들에게 괴롭힘을 받는다는 스토리라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재경은 다른 건 몰라도 유네가 저런 취급을 받는 모습이 화났다. 소심한 성격 때문이겠지만 싫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유네도 답답하고 저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유네네 조원들이 아니꼽다.
보다 못한 재경이 유네네 조원들에게로 성큼성큼 향했다. 줄을 무시하고 뒤로 향하는 재경을 보고 재경이네 조원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불러 세웠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저런 꼴을 당하는데 보고만 있다니 사나이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저놈들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이리 내놔.”
“어엇… 레…렌 군, 그거 내 게―”
“나도 알아!”
진짜 내버려 두려 했는데도 신경 쓰이네. 재경이 까뒤집은 입술 사이로 이를 드러냈다. 그는 유네가 들고 있는 나머지 세 명의 조원들의 가방을 모조리 빼앗아다가 저만치 던져버렸다.
“야! 뭐 하는 거야?”
재경의 행패에 유네네 조원들이 기겁하며 그때서야 유네에게 다가왔다. 재경이 눈을 똑바로 뜨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얌마, 너네 짐을 왜 유네가 드는데? 너네 거잖아. 니들이 스스로 들어, 이 게으름뱅이 짜식들아!”
“참나. 괜한 참견이야. 뭘 모르나 본데 유네가 자기 입으로 들어 주겠다고 했어. 그지?”
“근력을 키우고 싶다고 했잖아.”
“어? 으… 그…그게…….”
유네네 조원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면 유네가 부정을 못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들은 거보라며 재경을 비웃었다.
저 못된 기집애들. 재경은 그녀들이 얄미웠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 주먹질을 할 수 없어 이만 벅벅 갈았다. 할머니가 건물 청소하면 꼭 저런 식으로 아랫것 대하듯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너네는 지금 그 망할 놈들만큼 못된 애들이다.
“유네는 너네 꺼 못 들어준댄다. 좋은 말로 할 때 들고 꺼져.”
“니가 뭔데 우리 조에 참견인데? 같은 남자라고 편들어 주냐? 꼴불견이야, 아주.”
해볼 테면 해보라며 건방지게 팔짱을 낀 그녀들은 절대로 재경이 내던진 가방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으로는 굴복시키려 유네를 압박하고 있는데 ‘네가 여기서 우리 편을 안 들면 수학여행 내내 재미없을 줄 알아라.’라고 말하는 듯해서 유네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뭐 하는 거야. 바보 렌 지미. 우리 반도 숙소로 가야 하니까 빨리 정렬해. 너네도 내팽개친 가방 주워. 애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반장인 비키가 누구 하나 빠진 사람 있나 숫자를 세다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 기가 찬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렸다.
비키가 등장하자 유네네 조원들은 두 남학생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가방을 주웠다. 그녀들이 물러난 이유는 비키 셀로니아는 니냐롯트 왕녀와도 자주 말이 오가는 대귀족이라 평민인 그녀들이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해. 저런 애들은 건들면 안 보는 데서 더 하니까.”
재경의 어깨를 잡아챈 비키가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 짧은 순간 동안 유네가 처한 상황을 용케 파악한 모양이다.
비키가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재경은 틀에 박힌 양아치 표정을 어떻게 못 하다가 비키에게 어색하게 엄지손가락을 올려주는 것으로 답을 했다.
“뭐래. 바보.”
칭찬이 나쁘지 않았는지 퉁명스러웠던 비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쑥스러워서 고개를 돌려 버린 그녀는 말총머리를 씰룩거리며 마저 학급 인원을 세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유네의 조원들은 두고 보자며 재경을 노려보다가 숙소로 출발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줄을 섰다. 조원들이 저러니 재경은 수학여행 내내 시달릴 유네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재경이 그 짜증을 유네에게로 돌렸다.
“너도 싫으면 싫다고 제대로 말을 해. 네가 그러니까 쟤네들이 널 만만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내가 여기까지 와서 네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냐?”
“으응… 고마워, 렌 군. 담부터는 꼭 그럴게.”
유네가 풀 죽은 햄스터처럼 시무룩하게 답하자 재경이 이번에만 봐줬다며 유네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어 주고 제 조로 돌아갔다.
재경이 가버리자 그를 좇아 눈을 끔벅거리던 유네는 재경이 쓰다듬었던 곳을 만지작거렸다. 저보다 큰 손의 온기가 왠지 두근거려 유네가 슬쩍 얼굴을 붉혔다.
재경은 이미 자기네 조원들과 티키타카 말다툼을 하면서 앞줄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유네도 뒤늦게 조원들에게로 가 보폭에 맞춰 걸었다.
렌 군은 정말 멋지다. 나는 무서워서 반박도 제대로 못 하고 그런가보다 넘어가는 것밖에 못 하는데 저렇게 고민도 없이 나설 수가 있다니. 나도 렌 군처럼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으으, 맞아. 제립학교에 들어오면 변하기로 결심했잖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그때랑 제자리걸음이면 어떻게 해. 유네는 다음번에 조원들이 또 불합리한 부탁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거절하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부반장이고 1조라 세라의 바로 뒤에서 앞장서서 걸어가던 류제는 어디선가 들리는 소란이 신경 쓰여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다. 인원을 확인하고 돌아와 옆에서 열을 맞춰 걸어가던 비키가 그런 류제를 힐끗거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부터 정신을 어디에다 파는 거야. 자꾸 비협조적으로 나오지 마. 네 조원은 렌 지미가 아니라 우리거든?”
“미안.”
“그런 마음에도 없는 사과는 필요 없어.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니냐롯트 저하께 폐를 끼치지 말아 줘.”
“난 별로―”
“별로 폐를 안 끼쳤다고? 같이 있는 게 귀찮다는 듯이 구는 것도 폐야. 알았어?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상기시켜 주는데 왕녀님은 대제국 키아나트리체의 하나뿐인 왕위 계승자시라고. 방해꾼 취급하는 그 태도는 진짜 무례하다는 것만 알아둬.”
혹시라도 뒤에서 걸어오는 왕녀에게 들릴까 봐 비키가 머리를 가까이 대며 작게, 그러면서도 사납게 속삭였다. 류제는 조 일에 무관심한 것이 왕녀에게 무례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위대에게 다른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전부터 느꼈지만 비키는 왕녀에게 꽤나 저자세로 다가가는 것 같다. 하기야 비키는 귀족이고 니냐롯트는 왕족이니 당연한가도 싶었다.
* * *
수도 아가타를 떠나 펠노아에 당도한 제립학교 1학년 학생들이 시내를 통과하며 수학여행 첫째 날 묵을 숙소를 향해 절도 있게 걸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펠노아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 여관이었다.
그 여관은 묵은 피로를 풀어주고 지친 피부를 곱게 바꿔준다는 온천과 1학년 총 180여 명과 각 반 인솔 담임 선생님 등을 포함 2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묵을 수 있는 방이 있는 거대하고 고풍스러운 건축물이었다.
“하!”
다른 애들은 몰라도 재경이 보기엔 그 여관은 그냥 근현대 일본풍 료칸처럼 생겨먹었다. 펠노아라는 도시는 유럽풍의 키아나트리체에 기와라는 동양 문화가 섞여 있는 요상한 관광도시였던 것이다.
어쩐지 기차역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더라니. 펠노아가 우리 학교보다는 못하지만 건물도 멋지고 길거리에 벚꽃도 풍성해서 예쁘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 망할 게임 개발사야, 일뽕이 뭐냐, 일뽕이! 별 거지 발싸개 같은 캐릭터 말투까지야 뭐라 트집 안 잡는다만 기왕이면 한국 것을 보여 주란 말이지. 따지자면 나는 국뽕이 더 좋단 말이다. 왜냐면 난 한국인이거든!
“뭐야. 쟤 왜 저래?”
“렌이 이상한 거 한두 번 보니?”
잘 가다가 말고 재경이 숙소 앞에서 벌에 쏘인 개 같은 표정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올리자 조원들이 쟤 또 저런다고 숙덕거렸다.
반 학생들은 재경의 이상행동에 익숙해져 있어서 대부분 그런 재경을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의 담임 선생님 세라조차 그랬다.
“숙소에 짐 풀고 휴식하다가 두 시 반까지 조별로 여관 앞으로 모이세요. 렌 학생은 좋은 말로 할 때 그런 상스러운 손가락 집어넣으시고요.”
“네!”
세라의 공지를 들은 1학년 8반 학생들이 우렁차게 답하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 전에 자리를 이탈해 잠시 과자를 사러 가는 학생도 있었고 펠노아를 조금 더 일찍 구경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학생도 있었지만 재경은 제일 먼저 여관에 들어가 짐을 푸는 부류에 속했다.
암만 펠노아의 전경에 일뽕이 섞여 있을지언정 중학생 때 가지 못했던 일본 수학여행을 떠올린다면 플레이어에게 온천 이벤트를 선사해 준 개발사를 용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거 다 빼고 온천 때문에 내가 봐준다, 진짜.
재경이 카운터에서 받은 열쇠로 문을 따고 방에 들어갔다. 역시나 내부도 다다미 같은 것이 깔린 일본풍이다. 아무 데에나 가방을 던져놓은 재경은 까끌까끌한 장판에 몸을 뉘었다. 장거리 이동은 힘들구나. 이제야 살겠다. 그가 기지개를 크게 켰다.
“흥… 헤헤.”
암만 일뽕이니 뭐니 트집 잡았어도 기대감은 최고조였다. 나도 평범해. 이 생각만 하면 입이 절로 찢어졌다. 안 친한 조원들하고 어떻게 다녀야 할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잘 풀렸고, 기차에서 막 말을 튼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과자를 먹고 논 것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곳에 온 것만으로도 갇혀있던 생각이 한층 넓어진 기분이었다. 사람이 이래서 여행을 가는구나.
“벌써 들어왔어?”
“네가 늦게 온 거야. 유네는?”
“아까 밖에서 봤는데 곧 오겠지, 뭐.”
뒤이어 류제가 숙소에 짐을 두러 왔다. 오자마자 유네만 찾는 렌이 마음에 들지 않은 류제가 부루퉁하게 답했다.
지친 류제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지나치자 바다에 뜬 해초류처럼 누워있던 재경이 몸을 일으켜 히죽 웃었다. 사람 복장 터질 정도로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암만 친위대가 귀찮아도 역시 같이 다니니까 좋지 않냐?”
“뭐가.”
또 어떤 쓸데없는 소리를 할까 류제가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를 굴려 장난꾸러기를 흘겼다. 자율 행동 시간을 기대하고 있는 재경은 손아귀를 문어처럼 꿈틀거리며 무심한 류제에게 흥분을 내비쳤다.
“뭐긴 뭐야. 왕녀님이지. 왕녀님 와아안전 예쁘잖아. 차가워 보여서 다가가기도 힘들고. 기왕 같은 조 된 거 친구라도 돼보는 건 어때?”
“왕녀와 친구? 말이 쉽지. 그걸 핑계로 친위대랍시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공격당한다 생각해 봐. 지친다.”
“에이, 그래도 왕녀잖아. 왕녀는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될 사람이잖아. 친해질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쩌는지 모르냐? 부럽다, 부러워. 벌써부터 인맥이 텄어.”
무슨 고생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냅다 부럽다는 말을 들은 류제가 날이 선 말투로 헛된 기대를 돌려줬다.
“부러우면 네가 내 조라도 되지 그래.”
“뭐어?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 그렇게 했다. 이 자식이 배부른 소리를 하네.”
“그렇다고 치자. 하아. 피곤해. 아까도 숙소에 들어오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한테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하더라.”
류제는 말싸움하기 싫어서 반쯤 포기한 얼굴로 재경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경의 어깨에 이마를 댄 류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너랑 같은 조 됐으면 좋았는데.”
“뭐, 그게 편하긴 했겠지.”
“…아까 만들던 거 뭐야?”
“아까? 아아, 기차 안에서?”
자리도 떨어져 있었으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참 할 일도 없다. 공략해야 할 히로인들과 같이 있었으면서 나한테 신경 쓸 정신이나 있냐, 이 주인공 자식아. 재경이 속으로 혀를 찼다.
뭐, 수학여행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는 류제가 서큐버스와 처음 대화를 나눈 것 말고는 알맹이가 없으니 실은 류제가 뭘 하든 상관없긴 하다.
“그런데 내가 뭐 만들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냐?”
“너네 조 쪽이 소란스럽더라고.”
“귀도 밝네. 같은 조 애가 키트를 가져와서 같이 만들었어. 너 하나 할래?”
마침 생각난 재경이 교복 주머니를 뒤져 류제에게 하나 선물로 던져주었다. 소원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류제는 렌이 손재주가 좋다고 한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진짜 갖다 팔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드네.”
“뭐라고?”
“아냐. 잘 쓸게.”
“그거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가지고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대서 소원 팔찌랜다. 여자애들이 슬렉터가 촌스럽다고 같이 달아 놓았더라. 요즘 유행이래. 별 게 다 유행이야.”
재경이 어렸을 적부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대신 할머니의 부업을 도와 손을 움직인 덕분에 손재주가 좋다는 내막을 모르는 류제는 그저 렌이 만들어준 예쁜 소원 팔찌가 마음에 들어 제 손목에 대고 흡족해했다. 왕녀의 친위대 일로 기분 나빴던 게 재경이 준 소원 팔찌 하나로 퉁칠 수 있을 정도였나 보다.
기껏 제일 예쁘게 만든 걸 줬는데 류제가 매듭을 서툴게 지으려고 하자 보다 못한 재경이 소원 팔찌를 낚아챘다.
“줘 봐, 이 바보야.”
풀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묶어주는 렌의 솜씨는 아무리 봐도 의외였다. 늘 뭐든 대충 하는 것 같은데 오늘따라 손을 오밀조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귀엽다.
류제는 렌과 마주한 둘만의 이 적막함이 좋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다. 존재를 잊고 있던 찰나 유네가 산통을 깨고 방문을 열었다.
“방을 헷갈렸다.”
류제의 손목을 붙잡고 뭔가를 하는 렌의 행동을 목격한 유네가 호기심을 보였다.
“두 사람 다 나 빼놓고 뭐 해?”
“류제가 매듭도 제대로 못 매서 도와주고 있었지. 너도 할래?”
“뭔데?”
“소원 팔찌.”
“할래! 언제 산 거야?”
“내가 아까 기차에서 만든 거야. 옜다.”
재경이 주머니에 하나 남은 소원 팔찌를 유네에게 마지막으로 던져주었다.
렌이 직접 만들었다니 신기한 듯이 팔찌를 둘러보던 유네가 솜씨에 감탄하며 슬렉터가 차인 손목에 팔찌를 달았다.
유네가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류제는 렌이 직접 만든 팔찌를 그 손으로 달아줬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기분을 풀었다.
동상이몽으로 유네가 늦게 들어온 이유가 아까 있었던 일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재경이 미심쩍게 물었다.
“또 걔네들이 괴롭힌 거 아니지?”
“아냐! 정말 방을 헷갈렸어. 걱정 안 해도 돼, 렌 군. 와. 안에 냉장고도 있었네? 나 음료수 넣어놓을래. 저쪽이 그 유명한 펠노아의 온천인가?”
보면 무섭기만 한 조원들에게서 벗어나 드디어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은지 유네가 헤실헤실 웃으며 냉장고에 음료수를 넣었다.
방에 냉장고가 있다는 말에 재경도 제 음료수를 넣어 놓으려고 벌떡 일어나 유네에게로 향했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류제는 렌이 떠나가자 아쉬운 듯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현재 시각 오후 두 시. 두 시 반까지 숙소에서 휴식이다. 그다음 시간부터 조별 자율 관광이었는데 관광을 기대 중인 재경만 제외하고 류제와 유네 두 사람은 차라리 그 시간 내내 숙소에서 렌과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신난 렌에게는 물론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2권에서 계속)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