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4) (100/112)

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4)

6시가 되자 감시하는 선생님도 없겠다 재경은 살금살금 비키 몰래 산책로를 내려갔다.

이 산책로는 쓸데없이 험한 구석이 있어서 내려갈 때마다 항상 애를 먹었다. 게다가 아직 3월이라 해가 빨리 진단 말이야.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서 미성년자 둘이서만 봉사 활동이라니. 길이라도 잃으면 어떻게 해. 여긴 아동 청소년 보호법도 없어?

그런 불만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기숙사 식당을 보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활기찬 청소년은 오늘도 배가 고프니 잽싸게 급식실로 튀어간다.

땡땡이를 쳐서 제시간에 급식실에 도착한 재경은 드디어 사람들이 남긴 반찬만 있는 저녁이 아니라 그릇마다 음식이 가득 담긴 뷔페를 맛볼 수 있었다.

역시 키아나트리체가 엄청난 돈을 투자한 시설이구만. 나는 계속 봉사 활동 때문에 느지막이 들어와서 누렁이처럼 남은 음식만 털어먹었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혹시라도 같은 반 학생이 밥을 먹고 있으면 같이 먹으려고 급식실 안을 살폈지만 동아리 활동을 안 하는 1학년들은 진작 식사가 끝나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류제나 다른 애들은 올라갔나 보네. 뭐 어때. 이제 혼자 먹는 것도 익숙해졌고 오늘만 지나면 저녁을 혼자 먹을 일도 없는데.

비키 넌 7시까지 수고하라고. 난 기숙사에서 편히 쉬고 있으마. 친구가 없는 넌 내일도 혼자 밥을 먹겠지만 난 오늘만 혼자 밥을 먹지롱.

“맛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일곱 번이나 뷔페 접시를 갈아치운 재경은 불뚝 튀어나온 배를 두들기며 그제서야 살겠다고 입을 오므려 트림했다. 사나이는 이 정도 먹어줘야지. 이곳에 있는 동안 많이 먹어서 키도 많이 클 거다. 그래서 류제보다 더 커질 거다.

기간트리카 수업이 끝나면 몸을 움직여서 땀도 나고 운동장의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게 된다. 찝찝한 몸을 씻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 흥겹게 뜀박질을 한 재경은 방에 돌아가 펑펑 나오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즐겼다.

캬아, 이 맛이지. 평소 같았으면 아직도 뒷산을 뒤지며 청소하고 있을 시간인데 몰래 빠져나와 씻는다는 이 쾌감.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 재경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찝찝했던 기분이 싹 가시자 아까 비키한테 떠밀려서 넘어진 것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골인한 재경이 보들보들한 이불 위를 뒹굴거리며 행복을 만끽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노크를 했다.

깜짝 놀란 재경이 고양이처럼 털을 쭈뼛 세우고 긴장했다. 설마 선생님인가? 어떻게 내가 땡땡이친 걸 알았지?!

없는 척을 하려고 재경이 문 옆 스위치를 살금살금 누르려는 순간 문이 살짝 열리며 류제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아악!”

“우앗.”

할머니 몰래 게임할 때처럼 이불을 뒤집어쓴 재경과 류제가 서로 눈이 마주치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재경은 비키의 주먹질을 피하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것처럼 소중한 엉덩이를 바닥에 찧고 말았다.

“뭐…뭐…뭐야! 내가 그렇게 막 함부로 문 열지 말라고 했지? 간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했어?”

“넌 이제 저녁 먹을 시간인데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서 확인하려고 했지. 봉사 활동 일찍 끝난 거야?”

“윽. 알 게 뭐야.”

“설마 땡땡이친 거 아니지?”

“시껌마.”

류제가 내밀어 주는 손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재경이 쓸데없이 참견하는 친구에게 투정을 부렸다.

“왜 온 거야.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야?”

“아니… 그… 혹시 비키랑 같이 저녁 먹었나 해서. 걔도 땡땡이쳤어? C동 기숙사 갔는데 안 보이던데.”

이놈 자식이 비키는 왜 찾아. 비키랑 싸운 거 떠올리고 싶지 않았는데 왜 와서 난리람. 부루퉁해진 재경이 콧방귀를 뀌었다. 걔가 나더러 쓰레기라고 했다고. 나보다 말본새 나쁜 애는 처음 봤네.

“그런 싸가지 없는 애 따위 몰라. 조난을 안 당했으면 산책로 어딘가에 있겠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같은 반 친구를 혼자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해.”

“내버려 두면 뭐. 걔가 날 무시하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미안하지만 난 마음이 바다처럼 넓지 못하거든. 근데 비키는 왜 찾아?”

“별일은 아냐.”

류제는 오늘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을 할 때 비키를 패대기쳐 버린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렌 앞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비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렌은 왜 쓸데없이 사과를 하냐고 간섭할 것이다.

류제도 렌을 함부로 대하는 비키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모의 대결에서 진 비키의 뒷모습이 왜인지 처량했다고나 할까, 굉장히 쓸쓸해 보여서 마음에 걸렸다.

“뭐, 비키한테 갈 거면 너도 조심해라. 매번 가문의 복수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말이 안 통해. 역시 부모 없이 자라면 성격이 삐뚤어진다니까. 겁나 열받아.”

비키와 자신의 비슷한 부분이 보이는 게 싫었던 재경이 그 점을 비꼬았다.

류제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부모가 없다는 빈정거림은 날 때부터 고아원 신부와 수녀의 밑에서 자라온 류제의 마음도 푹 찔렀다. 항상 말을 날카롭게 하는 렌의 태도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한 류제가 드물게 화를 내었다.

“그 말 취소해. 너무 심하잖아.”

“심하다니. 내가 틀린 말했냐? 왜 니가 나서서 성질이야.”

“아무리 싫어도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마. 부모님 이야기는 너무하잖아. 자기가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니가 걔 성질머리를 똑바로 안 봐서 그래. 좋겠네, 넌. 뭐든 니 맘대로 생각할 수 있어서. 누가 누구 때문에 개고생을 했는지도 모르고. 자기는 친구 잔뜩 생겼겠다 이건가.”

그 빈정거림이 자기한테까지 오자 류제가 울컥했다.

누구 때문에 고생하는지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친구는 렌도 있었다. 점심을 같이 먹는 친구도 늘었고. 아무 생각 없는 갓난아이 취급하는 말투에 질린 류제는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넌 항상 날 바보 취급을 하더라? 자꾸 그러지 마. 기분 나빠.”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지 그럼 천재라고 하겠냐?”

“뭐? 하아…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삐딱하게 반응하니까 친구들이 싫어하는 거야. 계속 그러려니 넘어갔는데 나는 뭐 상처 안 받는 줄 알아? 나도 고아라서 부모 없어. 그럼 나도 삐뚤어진 거야? 사람이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어. 그것도 모르면서 비키를 탓하지 마.”

단단히 화가 난 듯 류제가 이를 앙다물었다. 실수를 직감한 재경은 아차 싶었다.

주인공이 고아라고 했었나. 일종의 자학 개그로 했던 말이 상대방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까 마음이 철렁했다. 하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재경은 비키의 편을 드는 류제에게 도리어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내가 알 바냐! 그래, 사람이 부모 없이 자라면 다 성질머리 더럽고 말본새 더러워진다. 됐냐? 흥. 비키 찾는다며! 7시 넘었으니까 가서 급식실이나 뒤져보든가. 거기서 혼자 질질 짜며 밥이나 먹고 있겠지!”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사람 정떨어지게 한다.”

“누가 정 붙이라고 그랬냐? 할 말 없으면 나가. 여긴 내 방이야! 왜 지 맘대로 와서 시비야?”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누가 할 소리인데!”

바라던 대로 류제는 방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재경은 어쩐지 따끔따끔 마음이 아팠지만 주체할 수 없는 화는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고 주먹에 힘을 넣었다.

“하”

또 사고 쳤다. 진짜 구제 불능이다, 신재경. 어떻게 사귄 친구인데 성질머리를 못 참아서 스스로 떨쳐 내냐. 이것도 대단한 재능이다. 설마 이게 내 어빌리티인가? 모든 것을 망치는 능력인 거지.

하지만 류제가 비키 편들어 주는 게 싫었단 말이야. 큰 소리로 닫힌 문의 메아리 소리가 웅웅거리는 귓가를 외면하듯 재경도 몸을 획 틀었다.

됐어. 난 비키 셀로니아 따위 아무래도 좋고 그까짓 것 말고도 류제가 알아서 하라고 그래. 왜 나만 마음고생 하면서 안 들어도 되는 욕을 들어먹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항상 내 탓만 해?

어차피 성질머리 더럽고 말본새도 안 좋아서 다들 나랑 어울리기 싫어한다. 여기라고 별반 다를 게 없었던 것뿐이야. 새로 태어나긴 개뿔이. 어딜 가나 변함없는 삼류 악당인데.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악역 엑스트라라는 처지를 생각하니 재경은 침울해졌다. 그래, 플레이어는 류제라 이 말이지. 나 같은 한심한 놈보다는 저런 타고난 천재에 잘생기고 능력 좋은 주인공 놈이 미래를 바꾸는 게 맞다는 건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에 앉은 재경은 스탠드를 켜고 공책을 꺼내 들었다. 그의 성공적인 고등학교 생활을 위한 지침서이자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을 정리한 공책이 하등 쓸모없어 보였다.

재경은 자신의 한심함과 변하지 않는 현실에 실망해 여기 적힌 모든 글을 펜으로 박박 그어서 구겨버리고 싶었다. 딱히 류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배드 엔딩이나 전쟁 이벤트 발생 여부를 분석할 때 필요한 정보라고 스스로를 어르고 달랜 재경이 오늘도 게임 내용을 필기했다.

펼쳐진 페이지는 봉사 활동의 마지막 날인 오늘 일어날 비키 셀로니아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가 적혀 있었다. 원래 이 이벤트는 삼류 악당인 렌 지미가 입학식 첫날 기간트리카 대결로 자신을 패대기친 비키에게 앙심을 품고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펜던트를 훔쳐서 숨겨 놓음으로써 시작했다.

뒷산에서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는 비키를 발견한 주인공이 오늘 있었던 모의 대결에서의 일을 사과한답시고 같이 펜던트를 찾아주고 겸사겸사 오해도 풀고 호감도 1 올리는 그런 뻔한 하렘 미연시의 이벤트다.

첫 이벤트부터 중간에 내팽개쳤다는 걸 할머니가 알았다면 그까짓 것도 제대로 못 한다고 뒤통수를 후려갈겼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여기에 없었다.

“…윽”

펜을 든 재경이 쓰기를 주저했다.

비키가 이다지도 자랑스러워하는 셀로니아 가문은 몇 년 전 마족의 셀로니아 저택 습격 사건으로 멸족해서 성씨가 셀로니아인 사람은 비키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비극적인 가정사를 가졌는데도 셀로니아 가문을 부흥시키고 주적이자 원수인 마족을 멸하려는 비키는 몰락한 셀로니아 가문을 죽은 가족들이 보기 부끄럽지 않은 키아나트리체 명문가로 만들고 싶은 거다.

그러한 숙명을 짊어지고 홀로 커왔으니 성격이 저리될 만한 거 인정한다. 인정하지만 싫어.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거라고 생각해 봐. 거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그런데 돌연 주인공이라는 놈이 천재랍시고 나타나서 패대기치는데 자존심 상하는 게 당연하다. 아까 나한테 그 정도로 거부반응을 보인 건 장난을 받아줄 수 없을 만큼 침울하다는 거겠지. 하지만 역시 그런 매몰찬 반응은 아무리 나라도 풀이 죽는다.

재경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던 비키를 떠올렸다.

가정사가 불운한데 나더러 뭐 어쩌라고. 어차피 나는 위로 같은 거 할 줄 모르고 친구도 없는 삼류 악당이야. 아까도 봐. 류제가 비키 찾는 거. 상처받은 히로인을 달래는 건 주인공의 역할이란 거다.

류제도 그렇잖아. 그놈은 평소에 비키한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애매했던 주제에 하필이면 오늘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기분 나쁘게.

“어?”

삐쳐서 입을 주욱 내밀던 재경은 기묘한 불길함을 느끼고 언뜻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지금 시간이 몇 시지? 8시가 넘었잖아. 아까 류제가 왔을 때는 7시 반 정도였고. 근데 비키가 아직도 안 돌아왔다고?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럴 리가 없다.

난 펜던트를 안 훔쳤는데? 설마 이번에도 멋대로 이벤트가 발생한 건 아니겠지? 장난 아니게 소름 끼치잖아. 무슨 「파이널 데스×네이션」이냐?!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재경은 돌연 번개가 하늘을 가르자 소스라치게 놀라 날씨를 확인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딱 맞았다. 이벤트가 발생하는 오늘 밤은 왕녀의 기분이 나빠 비가 올 예정이었다.

만약 호감도 이벤트가 멋대로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주인공 류제 신리와 히로인 비키 셀로니아는 같이 펜던트를 찾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산속에서 길을 잃는다. 외지고 낡은 정자에서 잠시 동안 비를 피한 그들은 서로가 가졌던 오해를 풀지만 펜던트는 찾지 못한다.

그러던 다음 날, 펜던트를 훔쳤다는 게 들통난 렌 지미는 이번엔 류제한테 신나게 관광버스를 탄다.

“아악!”

아 진짜 마음대로 안 되게 하네! 난 이벤트 간섭 안 한다고 했잖아. 왜 또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류제랑은 대판 싸웠고, 비키 걔는 나한테 마음 열 생각 따위 전혀 없어. 상황이 이런데 진짜로 내가 훔쳤다고 오해받아서 그 단죄로 내일 류제한테 얻어맞는 거 아냐?

재경이 우산을 들고 헐레벌떡 기숙사를 나섰다. 진짜 모르겠다. 이 세상은 왜 날 엿 먹이지 못해서 안달인데. 친구 사귀고 싶다는 것도 죄냐? 실은 나도 알아. 다 내 탓이지. 세상 탓이 아니라 성질머리 더럽고 말본새 끔찍한 바보 천지라서 그런 거라는 거 말 안 해도 알았다.

일단 오해받기 전에 펜던트를 찾자고 판단한 재경은 암만 떠올려도 펜던트의 펜자도 못 봤기에 비키가 물건을 분실한 장소를 짐작할 수 없었다.

야단났다. 이러다 비키나 류제에게서 범인 취급받는 건 죽어도 싫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재경은 산책로에 있던 비키에게 알은척을 하기 전 그녀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지 않았나, 기적적으로 떠올렸다.

설마 그때 떨어뜨렸나?

쓰레기를 줍는답시고 일주일간 오르내렸던 어두운 산책로를 슬렉터의 손전등 기능으로 비춰보던 재경은 먼저 비키와 싸움이 붙었던 갈림길로 향했다.

스토리상 렌 지미가 훔쳐야 하는 펜던트다. 비키가 정말로 펜던트를 잃어버렸다면 렌 지미와 어떤 접촉이 있었을 때 상호작용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재경은 비키와 다퉜던 장소를 샅샅이 살폈다. 해가 진 데다가 비가 많이 와서 펜던트고 뭐고 슬렉터의 불빛으로 비추는 부분을 제외하곤 시야가 깜깜했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전부 기숙사로 돌아갔는지 산책로에는 인기척 하나 없었다. 무겁게 쏟아붓는 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던 재경은 우산을 겨우겨우 잡고 버텼다. 간신히 쭈그려 앉은 그는 부지런히 슬렉터의 빛을 쏘며 반짝이는 것을 살폈다.

“젠장.”

어지간히 오는 비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앉은 상태로 우산은 쥐자니 안 쓰느니만 못했다. 왕녀님 기분 너무 더러우신 거 아녀? 나랑 공통적인 생각이시네. 나도 오늘 기분이 몹시 더럽수다.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친구랑도 싸우고.

할머니도 그랬어. 나보고 조금만 참으라고. 마음속에서 딱 열까지만 세고 나면 화가 난 게 거짓말처럼 사라질 거라고 했는데 항상 그렇게 못 한다.

못된 짓이나 저지르고 뒤늦게 후회나 하니까 나한테 친구가 없는 거겠지. 류제한테 미움받다니 가슴이 쑤시는 게 분명 그건 죄책감이었다.

“에이씨!”

재경이 제값을 못하는 우산을 접어 옆에 던졌다. 시끄러. 사나이는 안 울어. 내가 울면 할머니는 어떻게 해.

마구잡이로 얼굴을 적시는 빗방울로 감정을 감춘 그는 흙탕물이 되어가는 땅을 파냈다. 젖어서 딱 달라붙은 오 대 오 앞머리에서 빗물이 주르르 흘렀다.

한참을 찾았을까, 얼핏 반짝거리는 은제 사슬을 발견한 재경이 놀라 허둥지둥 펜던트를 파냈다.

“찾았다!”

흥분한 그는 그것을 번쩍 들어 보란 듯이 자랑했다. 다행이다. 없으면 어쩌나 했어. 흙이 묻은 펜던트를 옷에 문대서 닦은 재경은 뿌듯한 감정에 입꼬리를 올렸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 했지만 재경은 울지 않았다고 주장할 테니 엉덩이에 뿔 날 일도 없었다.

펜던트를 찾은 재경은 내팽개쳤던 우산을 들고 헐레벌떡 비키가 담당했던 방향으로 산책로를 올랐다. 그 잘난 미연시 스토리를 기억해 보자. 내가 비키 공략할 때 어떻게 했더라.

주인공은 비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사과하러 나갔다가 산책로에 있던 그녀와 만난다. 비키는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는 중이다. 그녀를 도와주던 주인공은 소나기를 피해 외진 정자로 향했다.

지금은 폭우가 내리고 있으니까 정자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학생용 슬렉터에는 학교 지도 기능이 있지. 서툴게 슬렉터를 기동시킨 재경이 홀로그램으로 뜨는 위치 정보를 살폈다.

비키 이벤트를 도와주는 건 이번뿐이야. 그것도 그냥 펜던트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남의 편 드는 류제는 진짜 싫고 비키는 하나도 불쌍하지 않아. 동정 같은 거 안 해.

그렇게 반성했으면서도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남자, 그게 바로 신재경이다.

어찌 되었건 두 사람이 펜던트 찾기를 포기하고 내려가기 전에 일을 끝내야 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찼지만 재경은 정자에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 험한 지름길을 따라 산세를 탔다.

슬렉터 빛으로 간신히 나아가고 있지만 비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위태롭다 싶더니 결국 재경은 돌부리에 걸려 구르고 말았다.

흙탕물투성이가 된 그는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비를 피할 지붕이 있는 정자가 보였다.

서두르던 재경이 도란도란 들려오는 말소리에 놀라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비도 많이 오고 구름에 달빛이 가려져 보이는 것 하나 없이 깜깜한데 작은 화염구가 공중에 떠서 환한 빛을 내었다.

“후우.”

매미처럼 나무에 달라붙어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을 맞던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잘만 불안하게 했던 주제에 혹시라도 날 배신하고 여기에 없었으면 이 개고생을 어찌하나 싶었다. 다행히도 이 망할 스토리대로 움직이는 세계는 비키와 류제를 멀쩡히 정자 안에 잘 모셔놓았다.

진짜 「파이널 데스×네이션」이야 뭐야. 나 무슨 예언가라도 된 거 같네.

“무슨 비가 이렇게 오는 거야. 이래가지고는 펜던트를 못 찾잖아.”

“네 어빌리티는 비가 와도 화염구를 만들 수 있구나.”

“여기는 비가 안 오잖아. 지붕에 막혀서.”

“아하.”

“너 진짜 바보네.”

라고 말하는 비키의 말에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재경은 조금 심술이 났다. 비키 쟤도 류제 너한테 바보라고 그러는구만 왜 내가 그러는 거에만 과민 반응인데. 그냥 친구끼리 놀리는 것 가지고.

접힌 우산과 펜던트를 꼭 쥔 재경은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야. 하… 이런 공간에 외간 남자와 단둘이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류제 신리, 이 변태 녀석하고. 최악이네.”

“뭐야. 같이 펜던트 찾아주다가 그런 거잖아. 억지 부리지 마.”

“난 도와달라고 말 안 했어. 네가 멋대로 행동한 거지.”

“하지만 네가 내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했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들어줄 테니까 빨리 말해. 아, 슬렉터가 왜 이러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를 확인하려던 그녀가 깜박깜박하는 슬렉터의 불빛을 보며 이상을 확인했다. 이것저것 만져보던 그녀는 슬렉터에서 파지직, 망가지는 소리가 들리며 탄 냄새가 나자 잽싸게 벗어 코를 막았다.

“윽. 아까 기간트리카 모의 대결할 때 망가졌나 봐. 네가 숙녀를 그렇게 패대기치니까 그런 거 아냐.”

“그걸 사과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였어.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거든.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됐어. 다음번엔 날 패대기치는 건 어림도 없어. 오늘은 조금 방심한 것뿐이니까.”

망가진 슬렉터를 옆으로 던진 비키는 침울한 표정으로 화염구를 가까이 대었다. 아직 3월이고 밤이 되니 날이 추워서 비에 젖은 몸이 덜덜 떨려왔다.

류제는 화염구와 가까운 비키의 교복에 속옷이 살짝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얼결에 고개를 돌렸다.

비키는 착잡했다. 류제와 친하지도 않고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패배해 자괴감이 들던 그녀는 목숨 다음으로 소중한 펜던트까지 잃어버리니 굳세게 먹었던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지쳐 있었다.

펜던트를 찾기 위해 혼자서 산책로를 배회하다가 류제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곤란해 보이는 그녀에게 류제는 흔쾌히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를 적대시하던 비키는 옹졸함이 부끄러웠다.

“펜던트 같이 차…찾아줘서 고마워.”

“아냐. 할 말을 해서 나도 후련하고. 근데 그게 이렇게까지 할 만큼 소중해?”

아까부터 얼마나 산책로를 헤맸는지 비키나 류제의 몸도 재경처럼 흙투성이에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비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이 작은 화염구로도 데워지지 않아 몹시 추워 보였다.

“자.”

류제는 입고 있던 체육복 저지를 비키에게 넘겼다. 챙겨주는 류제가 부담스러워 비키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비키 셀로니아의 자존심이 있지. 도움을 두 번이나 받을 수는 없었다.

“필요 없어. 난 이거 있으니까.”

“아니, 그… 본의 아니게 계속 보여서 그래.”

“뭐가 보……. 뭘 보는 거야 이 변태!”

비키가 류제가 넘겨주는 저지를 망설임 없이 빼앗아 걸쳤다. 쭈욱, 지퍼를 올려 속옷이 보일 기회를 원천 봉쇄한 그녀는 뾰루퉁해하다가도 류제에게 제 화염구를 하나 나누어 주었다.

“줄게.”

“고마워.”

남자의 체구가 느껴지는 저지를 입으니 소매가 남아서 달랑달랑거렸다. 비키는 류제가 의외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둘이 남으니 드는 이 쑥스러움은 뭘까. 분명 저 애는 내게 있어서 치욕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하필이면 마음이 약할 때 치고 들어오다니 교활하구나. 그래도 뭐… 외롭지 않아서 좋다.

“펜던트, 소중하냐고 물어볼 줄은 몰랐어. 너도 셀로니아 가문…에서 일어난 일 알잖아.”

“난 깡촌에서 올라와서 아가타에서 벌어진 일은 잘 몰라.”

“뭐야, 그 야만인 말대로 진짜 바보였잖아. 내가 이런 놈한테 지다니 기가 막혀서.”

“하하하.”

렌은 나를 바보 취급하니까. 입으로는 웃지만 아까 렌과 싸웠던 것을 떠올린 류제는 조금 시무룩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버렸을까. 하지만 렌이 멋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무시하는 말을 렌은 안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안타까워서 그런 건데 렌은 내 마음도 모르고 남은 다 바보고 자기만 뭐든지 안다는 듯이 행동하니까 욱하고 말았다.

“숨겨 봤자 어차피 다들 아는 일이야. 유명한 사건이거든. 우리 가족은 자랑스러운 키아나트리체의 후작 가문이야.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마족들의 습격으로 모두 살해당했어. 부모님께서는 저택에 있는 비밀 공간에 어린 나만 숨겨주고 마족과 당당히 맞서셨지. 자긍심 높은 셀로니아 가문은 마족들을 피해 도망갈 생각 따윈 안 한 거야. 아빠는 전장으로 가기 전 나한테 소리가 나지 않을 때까지 숫자를 세라고 했지만 당시에 어려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던 나는 두려움에 떨며 꼼짝도 못 했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구조로 살아났는데 가족들이…….”

비키는 그 참상을 떠올리면 자신의 어빌리티가 싫어졌다. 불타는 저택. 죽은 가족들의 훼손된 시체. 어떤 마족의 날카로운 웃음소리.

눈동자에 꽉 들어차는 그 재앙 같은 풍경이 그녀를 두려움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다. 동시에 불길처럼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었다.

“저택은 불타고, 내가 쥐던 것은 그 펜던트밖에 없었어. 우리 가족 사진이 든 펜던트. 그래서 소중한 거야. 내가 그걸 잃어버리다니 그럴 리가 없어. 분명 그 렌 지미가 방심하는 틈을 타 훔쳐간 거야! 너도 친구는 가리면서 사귀어. 안 그래도 거동이 변태 같은데 괜한 오해가 붙을걸.”

비키가 분개하며 말했다. 재경이 고개를 쭈욱 내밀었다. 류제랑 된통 싸웠는데 설마 비키한테 나랑 절교했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손에 들린 펜던트를 꽉 쥔 재경은 잘 보이지 않는 류제의 실루엣을 기웃거렸다. 비키 편 든 류제는 싫다고 했으면서 미움받기는 더 싫은가 보다.

“렌은 그럴 애가 아냐.”

라고 단언하는 류제의 말을 들은 재경은 감동했다. 친구. 그 만족스러운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난 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되었지만 성격 더러운 재경도 류제는 좋은 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하고 달리 상식적이고 착했다. 미안, 류제. 처음 만났을 때 쓸데없이 정의롭고 입바른 말만 한다고 생각해서.

재경은 류제에게 화풀이한 것을 깊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사과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뭐가 아냐. 그 음흉한 시선과 사람 부아 치밀게 만드는 말투. 딱 봐도 내가 싫으니까 훔쳐간 게 분명해. 지금은 날 위로해 줄 타이밍 아냐? 왜 그 야만인 편을 드니?”

“너는 입바른 위로는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리고 내가 장담하는데 렌은 그런 애 아냐. 진짜로 렌이 훔쳤다면 저번처럼 내 뺨을 때려도 좋아.”

“뭐야, 그게.”

남자들의 우정이란. 헛웃음이 난 비키는 바닥에서 조금 뜬 다리를 서로 교차했다. 신발이 푹 젖어서 묵직하고 냄새가 났다.

류제는 비키와 친해지고 싶었던 렌이 소심하게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았다. 용기를 냈을 텐데 비키가 계속 냉담하게 대하니까 쾌활한 렌도 오늘만큼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한 거다. 일주일 동안 비키와 어울릴 기회가 있었는데도 다가가지 못한 것 같은걸. 나한테는 자존심 챙긴다고 비키와 저녁 먹는다고 한 주제에 맨날 혼자 먹은 것만 봐도.

“렌을 너무 싫어하지 마. 나름대로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친구라도 돼주는 건 어때?”

“뭐어? 내가 왜 그런 교양 하나 없는 야만인이랑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난 너도 못 믿어. 남자는 다 늑대라고 아빠가 그랬어. 착각 중에 미안한데 우리는 친구도 뭐도 아니고 같은 배를 탔을 뿐이야. 셀로니아 가문은 언제나 최강이어야 해. 넌 그 방해고.”

“같은 배를 타는 입장이라면 함께 마족을 쓰러뜨릴 동료란 거잖아. 힘이란 건 서로 합해야 더 강해지니까 네 원수도 더 빨리 갚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그야―”

“등을 맞댈 동료가 강하면 든든하잖아?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것보단.”

볼을 잔뜩 부풀린 비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셀로니아 가문 사람은 리더십이 강해야 했다. 강한 것도 좋지만 등을 맞댈 동료를 믿는 것도 중요했다.

바보같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죄다 혼자서만 하려고 하고. 그야 주변에는 나보다 못난 사람들밖에 없으니 기댈 수가 없는걸. 오만한 생각에 비키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바보 같은 남자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인정하기 싫지만 류제 신리는 강했다. 그와 등을 맞댈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나 혼자서 초조해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걔가 먼저 시비를 안 걸면 유서 깊은 셀로니아 가문의 지체 높은 자제로서 생각 안 해줄 것도 없어.”

“그래. 고마워.”

비키는 고개를 팩 돌려 부끄러움을 감췄다. 비키 모르게 입을 가린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이 와중에도 자존심을 챙기려는 모습에 류제는 비키가 렌을 싫어하는 것이 동족 혐오가 아닐까 싶을 만큼 둘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내려간담. 내 슬렉터는 고장 나서 지도 기능을 쓸 수가 없는데. 너 슬렉터 가지고 있지?”

“아니. 아까 샤워한다고 잠시 빼놨는데.”

“뭐어? 도움 안 되는 놈 같으니라고. 그걸 왜 빼놔, 이 바보야.”

“물에 젖으면 고장 날까 봐 그랬지.”

“슬렉터는 기본적으로 방수 기능이 탑재되어 있거든?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마족하고 싸울래? 뭐가 등을 맞대는 동료야. 이 아무것도 모르는 모질이가.”

“모르는 건 네가 알려주면 되지.”

“말은 잘 하네. 하아… 비는 아까보다 덜 오긴 하는데 내 펜던트는 어쩌지. 우아앗……!”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아까부터 천둥과 바람 소리가 흉흉하기는 했지만 정자까지 미치지는 않아서 안심하고 있던 두 사람은 화염구가 꺼지고 어두컴컴한 어둠이 덮치자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다.

강렬한 바람에 나무가 스치는 소리가 정신없이 귀를 괴롭히고 나서야 바람은 잠잠해졌다. 다시금 주변이 빗소리로 차자 얼굴을 가렸던 둘은 화염구로 주변을 밝힐 수 있었다.

“깜짝 놀랐네.”

“그러게.”

“이래가지고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슬렉터를 고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 슬렉터가 어디에 있지?”

그녀가 옆에 던져두었던 슬렉터를 손을 더듬어 찾았다.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던 슬렉터를 어떻게든 켜보려던 비키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빛이 나자 어리둥절했다.

“어어?”

“고쳐진 거야?”

“그…그런 것 같은데? 왜지?”

그녀가 멀쩡하게 기동하는 슬렉터를 손목시계처럼 끼웠다.

슬렉터에서 나는 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반짝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잠시 눈여겨보았다. 익숙한 은빛의 사슬이다.

“어어… 펜던트. 내 펜던트잖아?!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제 옆에 버젓이 있는 펜던트를 확인한 비키가 그것을 집었다. 얼마나 찾았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보이질 않으니 전혀 몰랐다. 그럼 뭐야. 내가 걱정할 것도 없이 펜던트는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누가 찾았다가 두고 간 건가? 여기는 산책로 근처기도 하니까.”

대수롭지 않게 굴려고 해도 비키의 눈과 말투는 기쁨으로 흘러넘쳤다. 그녀는 흙이 묻지 않게 조심히 펜던트를 열었다. 소중한 가족들이 그녀를 인자하게 지켜보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들이 보고 싶어진 그녀가 펜던트를 가슴에 대고 소중하게 감쌌다. 비키가 진심으로 안도하자 류제가 부드럽게 웃었다.

“찾아서 다행이다. 거봐. 렌이 훔쳐간 거 아니라고 했지?”

“여기에 안 왔으면 영영 발견 못 할 뻔했어. 이걸로 마음 놓고 내려갈 수 있겠다. 지도에 기숙사 위치도 떠. 비는 좀 맞겠지만 얼어 죽기 전에 빨리 내려가자.”

“여기 쓸 만한 우산도 있는데? 누가 잃어버렸나 봐.”

정자 근처를 맴돌던 류제가 뼈대가 하나 나간 낡은 우산을 찾아 보여주었다. 작긴 해도 두 명이서 충분히 쓸 크기였다.

설마 이런 산중에서 선생님이 찾아줄 때까지 류제와 단둘이 있어야 하나 걱정했던 비키는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뭐해? 내려가자며?”

“잠깐만 기다려.”

펜던트를 쓰다듬은 그녀는 떠나기 전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게 목에 잘 걸어두었다.

“정말 죽다 살아났네.”

“별로 죽을 위기는 아니었는데.”

“남의 가슴을 주무르는 변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죽을 위기였거든. 흥.”

“그거 진짜 실수였다니까.”

“하하핫. 농담이야, 이 바보야.”

비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펜던트를 찾아서 정말 기분이 좋은 듯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내려가는 그들이 보이지 않자 아슬아슬하게 숨어있던 재경이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우당탕탕 정자 안으로 피신했다.

들키는 줄 알았네. 아, 다행이다! 둘 다 진짜 바보같이 순진해서 다행이야. 마주쳤으면 진짜 쪽팔려서 죽을 뻔했어. 바람이 진짜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나도 눈꺼풀이 살짝궁 뒤집혀 버렸지만 용서해주마.

비를 온전히 맞아 흠뻑 젖은 재경은 그들이 머물던 정자에 앉아 뒤늦게 비를 피했다. 곱씹어보니 부끄럽다. 그가 펜던트를 훔치지 않았다 말해주는 류제는 멋있더랬지.

재경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감동하지 않았다 말하면 거짓말이다. 나랑 싸웠으면서 그걸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다니. 나 같은 쫌생이는 분명히 험담을 늘어놓았을 텐데.

고장 난 슬렉터를 팔에 찬 재경은 다양한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비는 아직도 내린다. 슬렉터는 고장 났고 우산은 없다. 시야는 어두웠다. 그래도 포기하려 했던 이벤트는 성공했다.

뿌듯한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난 재경은 입가가 절로 근질거렸다. 자신 앞에서는 보여 주지 않는 비키의 진솔한 모습이나 류제가 말해주는 렌 지미에 대한 말을 떠올린 그는 열없게 웃었다.

포기하지 말자. 신재경으로 강화된 렌 지미가 삼류 악역 같은 거 안 되려면 먼저 사과해야겠지? 응? 할머니.

재경은 물을 먹은 체육복을 걸레 짜듯이 쭉 짜서 다시 입었다. 가서 목욕이나 하고 자야지.

길은 대충 외워 두었으니 두 사람이 간 길 말고 다른 길을 찾아 주변을 더듬던 재경은 이 동네가 미세먼지 없고 비가 깨끗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랬어 봐. 어린 나이에 피부병이 걸리거나 대머리나 되지.

헛소리를 늘어놓던 재경이 덜덜 떨리는 몸을 붙들고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 귀신 나올까 봐 무서워 죽겠다. 사나이는 귀신 같은 거 안 무서워한다며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공자님 다 찾은 재경은 천천히 내리막길을 미끄러졌다. 만전을 기한다지만 비 때문에 진흙이 질퍽거렸다.

“우아앗!”

아까 급하게 올라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삐끗한 다리가 순간 지끈거려서 발을 헛디딘 재경은 내리막길에서 구르고 말았다.

간신히 가까운 나무를 붙잡은 재경은 무릎이 따끔거려 이를 악물고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다시 진흙투성이다. 진짜로 망했다.

절뚝절뚝 양 무릎이 까진 채로 산길을 내려오던 재경은 한참을 헤맨 후에야 간신히 B동 뒤편 산책로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이 빗속에 있었더니 체온이 너무 떨어져 이가 저절로 딱딱거렸다. 진흙투성이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은 제 꼴이 무척이나 우스웠다.

이 꼴로 어떻게 들어가지. 재경은 그것보다 심하게 다친 무릎 상처를 보기가 무서웠다.

아픈 발을 이끌며 A동 기숙사로 돌아온 재경은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감실 문을 두드려 세라를 찾았다. 그녀의 ‘힐링’ 어빌리티를 빌려는 속셈이었다.

“쌤… 세라 쌤.”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열한 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주무시는 건가 했지만 재경은 뒤늦게 세라가 오늘 왕실에 볼일이 있어 기숙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님 없다고 실컷 땡땡이나 쳤는데 그걸 그새 까먹다니 나도 참.

괜한 짓을 했다고 투덜거린 재경은 절뚝절뚝 기숙사 1층 A동 학생 전용 목욕탕으로 향했다.

현재 시각 밤 11시 5분 남짓. 남학생들은 공동 목욕탕을 밤 10시부터 12시까지 이용 가능하니까 지금 가면 몸을 데우는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을 거다.

물에 불은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감각이 마비되었다. 얇실한 몸뚱이는 축축하게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을 빼앗겨 가만히 있어도 부들부들 떨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찝찝했던 재경은 다 필요 없고 당장 뜨끈뜨끈한 욕탕에 몸을 던져 몸을 녹이고 싶었다.

아려오는 무릎 상처에서 나오는 피가 옷에서 흐르는 흙탕물과 섞여 뚝뚝 떨어졌다. 그 자국은 발을 절며 걸어가는 불쌍한 흔적을 남겼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공동 목욕탕에 도착한 재경은 불투명하게 만들어진 미닫이문을 열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옆에는 바로 세탁실이 딸려있어 남녀 목욕할 시간대에 맞춰서 빨래를 할 수 있었다. 질척질척 몸에 달라붙은 체육복 상의를 꾸역꾸역 벗어서 세탁기 안에 던진 그는 다친 무릎에 달라붙은 바지를 보고 한탄했다.

도저히 서서는 못 벗겠다 싶은 재경이 바닥에 주저앉아 상처 부위에 체육복이 닿지 않게 바지를 내렸다.

상처는 생각했던 것보다 심했다. 피가 멈추지 않았는데 비 때문에 물에 퉁퉁 불어서 시체 썩은 것처럼 보기에도 흉측했다.

우웩. 재경은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주둥아리를 꾹 다물어 참았다. 이까짓 거 진짜로 하나도 무섭지 않지만 괜히 덧날까 걱정된다. 세라 쌤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지. 빨리 치료해야 할 거 같은데.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뭐.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 넘어져서 난 상처 때문에 죽으면 내가 왜 여기 빙의했겠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옆 선반을 붙잡고 겨우 일어난 재경이 바지랑 속옷을 세탁기에 마저 넣고 탈수를 포함한 세탁 과정을 입력했다.

그가 앉아있던 곳은 아이가 실례한 것처럼 누런 흙탕물이 고였다. 재경은 다리가 아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시간으로 봐서는 이용할 사람이 없으니까 나중에 청소하는 사람이 치워주겠지, 뭐.

그보다 알몸이 되니까 더 따뜻한 것 같은 이 착각은 뭘까. 겁나 춥네.

“으… 추워. 추워추워추워!”

뒤뚱뒤뚱 아픈 발을 우스꽝스럽게 들썩거리며 목욕탕 문을 여니 뜨거운 김이 확 들어와 식은 몸이 따뜻해졌다.

샤워기로 흙탕물을 씻고 바로 욕탕에 풍덩 해야지. 선반에 분명 다른 이의 옷이 있었음에도 성급하게 아무 샤워기로 뛰어간 재경은 그 자리에서 따뜻한 물을 정수리에 콸콸 부었다.

파충류가 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서늘했던 피부가 제 온도를 찾아갔다. 뜨거운 물을 따라 몸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재경은 온몸을 따뜻하게 녹이는 물에 기운을 쫙 풀며 눈을 감았다. 그를 뒤덮었던 더러운 진흙탕물이 어느 정도 물에 씻겨 내려가자 물을 끄고 따뜻한 욕탕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아, 으… 아…안녕… 렌 군. 모…목욕하러 왔…어?”

밖에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알몸이라 나갈 타이밍을 못 잡은 남장 여자 유네 나르타가 욕조에 쭈그려 턱 끝까지 몸을 담가 꽁꽁 가리고 있었다.

어색하게 인사하는 유네와 마주한 재경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탕 바로 앞에서 급하게 커브를 꺾었다.

“으아… 아… 더워. 왜 이렇게 날씨가 덥냐. 이래가지고 여름에 어떻게 살라고.”

“그…그…그런가? 갑자기 비가 내려서 춥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재경이 급커브를 꺾은 곳에 존재하는 탕은 정신이 번쩍 들게 차가운 무시무시한 냉탕이었다. 패닉 상태가 된 재경은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냉탕에 입수했다. 이판사판이다. 재경은 척추부터 스스스 올라오는 오싹오싹한 추위를 참아냈다.

“이이이익!”

뭐야, 쟤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런 변태 이벤트는 류제만 겪는 거 아니었어? 류제야 쟤가 여자인지 모른다 치지만 나는 어떻게 해!

내 알몸! 봤나? 본 건가? 쪽팔려! 으아아아. 여자애한테 알몸을 보이다니 어떻게 해. 큰일 났다. 어쩌지. 장가는 다 갔는데 누굴 탓해야 하는 거야.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던 재경은 냉탕에 고개를 푹 숙였다가 뺐다.

아니, 쟤는 왜 하필 지금 목욕하고 난리야. 물론 남장 여자다 보니까 사람 없을 때 써야 하겠지마는 하필이면 많고 많은 날 중에 오늘 이 시간이냐.

내 알몸 보인 거야 진짜진짜 어쩔 수 없다만 암만 남자인 척하지만 여자애 몸을 내…내가 대놓고 함부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유네가 있는 욕탕에 같이 들어가다니. 절대 못 해. 죽어도 못 해. 냉탕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못 해.

한창 이성에게 불끈불끈할 사춘기인 재경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찬물로 다시금 적셨다. 지금까지 본 여자 몸이라고는 할머니 몸이 다다. 이런 데에 익숙하지 못했던지라 재경은 어서 빨리 유네가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일부러 뒤를 돌았다.

“그럼… 나…나는 먼저 나갈게. 천천히 씻어!”

렌이 같은 욕탕에 들어오면 어쩌나 난감했던 유네는 다행히도 냉탕에 들어간 그가 뒤를 돈 틈에 욕조 물을 넘실거리며 조심스레 탈출했다.

작지만 여리여리하고 남자와는 확연히 다른 몸을 가진 유네는 냉탕에서 발장구를 치는 재경의 등을 슬쩍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도도도 욕실 밖으로 나갔다.

“내일 아침에 봐!”

“오냐아아.”

문이 탕 닫히자마자 벌떡 일어난 재경이 허둥지둥 따뜻한 탕에 부리나케 달려가 점프했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냉탕과는 다르게 뼛속 깊이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 탕에 여자애가 들어가 있었다는 야릇한 망상을 할 겨를도 없이 재경은 그 온기에 녹아들었다. 지금 그런 것에 두근거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이제야 살겠다.”

긴장했던 몸이 물에 스르르 풀려 섞였다. 노곤하다. 진짜 개고생이었어. 그래도 렌 지미한테 오해를 만들지 않고 이벤트를 성공시켰다. 결과적으로 류제에 대한 비키의 호감도를 하나 올린 것은 같지만 과정은 전혀 달랐다. 솔직히 어떻게 되나 싶었다.

어차피 멋대로 진행될 스토리라면 렌 지미가 삼류 악역 역할에서 빠져올 수 있게끔 호감도 이벤트를 도와주자. 그럼 전쟁도 안 나고 삼류 악당 역할은 안 해도 되겠지.

그러려면 류제랑 화해하는 게 제일 먼저다. 내일은 류제한테 꼭 사과를 하자. 말 함부로 해서 미안하다고. 류제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한 건 나지. 결국에는 다 내 잘못인걸.

넓은 욕탕에 다친 다리만 내놓고 여유롭게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찾아왔다. 잠보다는 내일 류제한테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인가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나는 사과를 잘 못하니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소등 10분 전입니다. 모든 학생들은 방으로 돌아가 취침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소등 10분 전입니다. 모든 학생들은 방으로 돌아가 취침하시기 바랍니다. 이상.

소등 안내 방송이 나왔다. 12시 정각이 되면 소등이 되기 때문에 따뜻한 물에 좀 더 몸을 담그고 싶었던 재경은 별수 없이 일어났다. 샤워기로 머리를 대충 헹구고 탈의실로 향하니 빠른 세탁과 탈수를 돌려놓았던 옷가지들은 이미 다 말라있었다.

이 나라 기술력은 어느 기준에 맞춰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니까. 어떤 부분은 구시대적으로 뒤떨어져 있고 어떤 부분은 우리 집보다 나으니, 거참.

세탁기 진짜 좋다. 할무니는 세탁기 비싸다고 몇십 년도 넘은 낡은 통돌이 썼는데. 탈수도 제대로 안 돼서 급하게 빨면 축축한 팬티를 입어야 했단 말이지.

보송보송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입을 만하게 마른 속옷과 체육복을 도로 걸친 재경은 축축하게 젖은 신발을 질질 끌고 5층 계단을 올랐다.

다리에 힘을 줄 때마다 씻어 내린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이상한 감각에 재경이 인상을 팍 썼다. 아침에 일어나면 덧나기 전에 빨리 세라 쌤한테 고쳐달라고 해야겠다.

5층 가장 끝에 있는 방문을 열기 전 옆방인 류제와 유네의 방을 힐끗 쳐다본 재경은 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뛰쳐나간 흔적 그대로 널브러진 물품들은 아무래도 좋다.

―12시가 되었습니다. 밝은 내일을 위해서 일찍 잠이 듭시다. 소등합니다. 이상.

재경이 신발을 벗고 자리에 눕기도 전에 방송과 함께 불이 멋대로 꺼졌다. 스탠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천장에 달린 불은 다시 켜도 안 들어올 거다.

다리가 아팠던 재경은 느릿느릿 침대로 기어들어 가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머리도 제대로 못 말렸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냥 빨리 자고 싶었다.

자기 전에 류제한테 어떻게 사과해야 하나 생각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도 없는 재경은 불에 녹는 설탕 덩어리처럼 살갗이 찐득찐득하게 침대에 들러붙는 감각과 함께 깜빡 잠이 들었다.

* * *

아주 어렸을 때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때에도 할머니랑 단둘이 살았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할머니랑 살아서인지 그 나이가 되도록 한글하고 구구단도 못 떼어서 선생님이 구박하고 친구들에게 놀림받았던 재경은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준비물 못 가져가면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망신을 줬단 말이야. 그날 엄청 비싼 준비물을 못 사가지고 진짜 학교 가기 싫었는데 마침 아파서 다행이라고 어린 재경은 생각했다.

아픈 건 좋다. 아프면 할머니가 오냐오냐 빌딩 청소랑 박스 주우러 안 가고 옆에 같이 있어주거든. 맨날 나 놀리는 애들밖에 없는 학교도 안 가도 되고.

이렇게라도 사랑받는다는 걸 느끼면 머리가 아파도 기분이 좋아서 실실거리게 된다. 실은 학교 가기 싫어서 일부러 배를 내놓고 잤다는 건 할머니한테는 절대 비밀이었다.

“뭐 먹고 자븐 거 있냐잉?”

“할무니, 나 토마토. 토마토에 설탕 넣은 거 먹고 싶은데.”

“오냐. 할미가 맛있게 해가지구 올 터니까 옴싹 나아가지고 낼은 학교 꼭 가야제…….”

무릎이 안 좋은 할머니는 어구구 신음 소리를 내며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낡은 집. 둘뿐인 살림살이. 할머니 냄새. 수십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구. 재경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할머니와 재경의 집이다.

브라운관 텔레비전 위에는 엄마랑 아빠의 결혼사진도 있고, 할머니 사진도 있고, 할아버지 사진도 있고, 재경이랑 할머니가 둘이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아싸. 재경은 설탕에 버무린 토마토를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웃었다. 철딱서니 없는 재경이 무슨 말이라도 하면 맨날 잔소리만 하는 할머니는 아픈 날에만 천사처럼 소원을 들어주었다. 재경은 행복했다. 아픈 게 제일이다.

설탕에 버무린 토마토를 먹고 푹 잠이 든 재경은 끝내 열이 내리지 않아 사흘 동안 앓아누웠다.

가까스로 새벽녘에 열이 내린 재경이 잠에서 깨어 할머니를 찾았을 때, 할머니는 새벽 동안 물 한 바가지 떠다 놓고 기도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아이고, 재경이… 우리 불쌍한 재경이 좀 빨리 낫게 해주소. 어린 나이에 애미 애비 잃은 불쌍한 애요. 건강하게… 건강하게만 자라게 해주소. 건강하게만…….”

실은 재경이 아픈 건 학교 가기 싫다는 꾀가 자승자박한 것이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어여쁜 손자가 아픈 것이 마음 아파 지극정성으로 빌었다.

하늘에 빈다고 병이 치료되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 정성이 어린 재경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재경은 할머니의 주절거림을 못 들은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았다. 아픈 건 좋지만 잔소리쟁이 할머니가 남몰래 눈물 흘리는 건 더 싫었다.

알았어, 할머니. 나 이제부터 절대로 안 아플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빨리 자. 내일은 꼭 일해야 하잖아.

내 걱정은 하지 마. 할머니가 내 걱정하는 거 싫어. 아파서 미안해. 학교 빠지고 싶어서 그랬어. 일부러 아픈 건데 다시는 안 그럴게. 약속해.

그날도 먹었던 다디단 토마토가 입가에 맴돈다.

내일은 꼭 나아야지. 학교도 꼭 걸 거다. 다음부터는 배 내놓고 안 잘 테니까 할머니, 울지 마.

까마득한 밤, 창문 밖에는 보름달이 커다랗게 떴다. 재경은 이제부터는 절대로 아프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아직도 안 일어나면 어떻게 해. 지금 아침 운동 할 시간인데. 선생님이 집합이래.”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감각에 재경이 어렴풋이 눈을 떴다.

음 소거가 되었다가 깨어나는 세상은 시끄럽고 정신 사나웠다. 느껴지는 감촉은 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방에 깔린 딱딱한 요 위가 아니라 안락한 베개와 푹신푹신한 침대였다.

잠에서 덜 깬 재경이 눈을 끔벅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침 운동? 아, 운동장 뛰어야 하는데. 재경이 비몽사몽 몸을 일으켰다.

잠을 잘못 잔 건가 머리가 찌르는 듯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던 재경이 그를 깨워 준 기특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앞머리에 가려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 또한 재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류제네.

“나 먼저 나갈 거니까, 빨리 나와.”

어제 싸운 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재경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류제가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재경은 멍청하게 앉아서 아픈 머리를 쥐어짰다. 근육통인가 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움직이기 싫은 몸을 꾸역꾸역 움직여 간신히 바닥에 발을 대었을 때 아득히 느껴지는 고통에 재경이 윽, 하고 크게 휘청거렸다. 넘어지지 않게 침대가를 잡았지만 견딜수록 아팠다.

어제 있었던 일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양 상처는 더 심해져 있었다. 살며시 체육복을 올려 무릎을 확인해 본 재경은 흉측한 상처가 보기 싫어 재빨리 밑단을 내려버렸다. 쌤한테 고쳐달라고 하면 된다 뭐.

그래도 아침부터 류제가 깨우러 와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룸메이트가 없다 보니 아침 운동을 할 때나 기상 시간이 되었을 때 늦잠을 자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서 불안했는데 다행이었다. 기상 방송하고 운동장 집결 방송도 못 듣다니 어제 일이 많이 피곤하긴 했나 보다.

느릿느릿 가장 늦게 기숙사 운동장으로 나온 재경이 선두에서 달리는 A동 사감이자 담임 선생님인 세라 밀로니와 먼저 나와 뛰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깊게 안도했다.

다행이다. 쌤 오늘 아침에는 돌아오셨네.

지각을 한 재경이 늑장 부리며 뛸 생각을 하지 않자 속도를 늦추고 맨 뒤로 온 세라가 귀를 잡고 억지로 뛰게 했다.

“늦잠에 지각에 게으름까지! 트리플 크라운이네요, 렌 학생. 늦게 왔으면 늦게 온 만큼 열심히 뛰어야죠!”

“아야, 아, 아파요! 아파요, 쌤……!”

붙잡힌 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딸려가긴 한다만 다리가 아파서 뜀박질은 불가능했다.

학생이 절름발이처럼 휘청거리며 절뚝거리자 이상함을 알아챈 그녀가 달리기를 멈추었다. 오만상을 찌푸리는 재경에게 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가 왜 그래요? 다쳤어요?”

“어제 넘어졌어요.”

“잠깐 봅시다. 치료해 드릴 테니까.”

재경이 머뭇거리다가 체육복 바지를 걷었다. 몇 시간 동안 방치된 상처가 덧나서 진물과 피딱지가 더럽게 엉겨 붙어있었다. 주변은 크게 부어서 새빨갛게 살이 올랐다.

상처의 심각성을 인지한 세라가 재경을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운동장을 돌던 중 담임 선생님과 렌이 따로 구석으로 빠지는 것을 목격한 유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렌 군, 안 뛰는 거야?”

“글쎄.”

늦잠을 잔 주제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던 렌이 떠오른 류제가 울컥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유를 착각한 류제는 제대로 빈정 상했다.

렌과 절친한 친구였던 류제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줄에 맞춰 뛰어가자 유네는 둘 사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고 짐짓 입을 다물었다.

선생님과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렌을 걱정하던 유네는 어제 공동 목욕탕에서 나왔을 때 탈의실에 고여 있던 흙탕물을 떠올렸다.

혹시라도 렌이 비를 맞아 컨디션이 나빠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이 데리고 갔으니 괜찮겠지 싶던 그녀도 괜한 걱정을 그만두었다.

방치된 상처는 곪은 정도가 심해서 세라의 치료에도 시간이 걸렸다. 재경은 결국 까진 무릎을 치료하느라 아침 시간을 다 써버려 운동장을 돌지 못하고 기숙사 식당으로 직행했다.

평소라면 남들 열심히 뛸 때 빈둥빈둥 논 것이 완전 개이득이라며 철딱서니 없이 폴짝 뛰어다녀야 하는데 오늘은 왜인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까부터 머리가 송곳으로 찌르듯이 지끈지끈거려서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다.

“렌 군, 아까 뭐였어? 선생님이랑 왜 같이 있던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그래?”

재경이 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차가운 반응에 소심한 대답을 한 유네가 우물쭈물거렸다.

류제는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 렌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재경은 그저 식판에 담긴 스튜를 깨작거리면서 얼굴을 구길 뿐이었다.

“나 먼저 갈래. 둘이서 먹어.”

“어… 가…같이 가지.”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뭘 먹든 걸신들린 듯이 먹던 렌은 떠온 음식을 반도 먹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걸 본 류제는 또다시 기분이 상했다. 분명 어제 그와 싸웠기 때문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제 감정을 과시하려는 거다.

“렌 군 기분이 안 좋은가? 어제는 괜찮아 보였는데.”

“몰라.”

화낼 사람이 누군데 나한테 화풀이야. 류제는 똑같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류제도 이번만큼은 렌이 먼저 사과할 때까지 절대 먼저 사과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렌은 친구 사귀기에 집착하면서 정작 친구인 나는 개차반으로 대한다니까. 이미 친구라고 만만하게 보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나를 바보 취급하는 건지.

오늘 아침에도 기껏 깨워 주러 갔더니 왜 방에 마음대로 들어왔냐고 인상만 찌푸리고 있잖아. 것 봐, 사람을 뭐로 보고. 해도 해도 너무하다니까.

“으… 렌 군도 그렇고 왜 그러지.”

유네는 친했던 두 사람 사이가 하룻밤 사이에 냉랭해진 이유를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친구끼리 불편한 거 싫다. 유네는 아무리 남장을 했어도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가 냉랭해지면 유네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그것도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1학년 8반 친구잖아. 셋이서 함께하면 안 되는 거야?

“뭐야. 오늘은 그 야만인하고 같이 안 먹는 거야?”

“어, 비키?”

비키 셀로니아가 옆자리에 앉자 유네가 놀라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빨간 포니테일 머리에 유네와 같은 초록빛인 눈동자가 돋보이는 샐쭉한 눈매가 순진한 눈매인 유네와 비교되어 사나워 보인다.

비키 양은 무섭다. 렌 군하고도 사이 안 좋고. 류제 군하고도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지 않았나? 오늘은 가…갑자기 왜 친한 척을 하는 거지?

“몰라. 그냥 먼저 가던데.”

“그래? 아쉽게 됐네.”

비키는 새침데기 표정으로 말없이 아침밥을 먹었다. 누가 뭐래도 친구 없이 혼자서 밥을 먹던 그녀가 돌연 그토록 혐오하던 1학년 8반 남학생 세 사람과 밥을 먹기 위해 다가왔다는 사실에 어제의 일을 모르는 유네는 어리둥절했다.

그것도 렌 군이 없다고 아쉬워하다니. 렌 군이 말만 걸면 차갑게 굴었으면서 이제 와서 류제 군한테 달라붙고!

유네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다고 무서운 비키와 화난 류제에게 대들 용기가 없어서 포크를 입에 물고 울먹울먹 입을 우물거렸다.

설마 렌 군이 빠지고 그 자리에 비키 양이 들어오는 거 아니겠지? 그거 싫어. 진짜 싫어. 렌 군, 류제 군하고 싸웠으면 제발 화해해 줘!

유네의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식사를 마친 그들이 등교하기 전에 렌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이미 방을 비운 후였다.

잘한 것도 없으면서 벽을 치다니. 류제는 렌이 비키와 친하게 지내게끔 도와주려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언짢아졌다. 류제도 지고는 못 사는지라 똑같이 신경 쓰지 않을 거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유네와 둘이서만 등교하는 중간에 비키와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어색하게 대화하며 학교로 향했다. 그들은(유네는 화났다. 렌 군 대신에 비키 양과 친해지다니. 류제 군은 바보야. 바보바보바보!) 교실에 들어서도 렌의 자리에 가방만 놓여 있고 사람은 없자 기분이 묘해졌다.

류제는 1교시 시작 전 쉬는 시간 내내 기분이 퍽 상해 있었다. 렌, 이 자식. 혹시라도 화장실을 갔나 했더니 아직도 안 돌아온다. 절대 먼저 사과 안 하겠다 이거지. 누가 순순히 넘어가 줄줄 알아?

조금 귓바퀴를 붉히며 미안하다면서 귀엽게 굴면 그냥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란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니라고.

참지 못한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자 유네가 놀라 물어보았다.

“어…어디 가?”

“바람 쐬러. 금방 올게.”

유네한테만 미안하게 됐다. 아까부터 괜히 눈치 보는 거 같던데.

렌은 몰라도 유네는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비키는 생각보다 좋은 애였다. 오늘 아침을 먹을 때나 등교할 때 굳이 다가온 이유는 렌과 친하게 지내달라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도 렌은 내 노력도 모르고 자기 멋대로 구는 데다 잘못했으면서도 사과도 제대로 못 해. 버릇없게 굴 수는 있어도 아세미처럼 어린애가 아니니까 사람 간의 예의는 있어야 할 거 아냐. 그것조차 없으니.

신경질적으로 교실 문을 닫은 류제는 1교시 시작 전까지 바람을 쐬며 생각을 식히려고 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는 등교하는 학생들을 제치고 느긋하게 걸었지만 표정은 전혀 느긋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사과할 줄 알았더니 그것도 없고. 렌, 너 진짜로 이대로 나와 절교할 셈이야? 그렇게 친구를 원했으면서 나와는 이렇게 빨리 떨어져 나가네. 그래, 교실에서 나랑 마주하기도 싫다 이거지. 누가 이기나 보자.

라면서도 렌이 빨리 사과했으면 좋겠다는 미련이 뚝뚝 떨어져서 류제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2층으로 향했다. 이동수업을 할 때 자주 오가는 건물 통로를 지나면 창문이 있지만 그늘이 진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쓰레기장이 바로 보였다.

류제는 그런 곳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동안 솔직하지 못한 건 자신이나 렌이나 매한가지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그러겠냐는 심정으로 찾아왔지만 진짜로 렌이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을 연습했던 것처럼 여기에서 사과를 연습할 거라 확신하지는 않았다.

전에 우연히 목격했던 때처럼 류제가 고개를 슬그머니 빼서 창문 밖 쓰레기장 주변을 살폈다. 렌이 없었으면 류제는 정말 상처받을 뻔했다. 교실에 돌아오지 않던 렌이 그곳에 있었다.

왜인지 교복 위에 체육복 저지를 입고 있었지만 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저지를 입은 렌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있다가 몇 번 입을 달싹거리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도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구기고 있었는데, 렌은 답답한 듯이 팔짱을 풀고 이마를 스쳐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아.”

쓰레기장 앞을 서성거리며 다짐한 듯 입을 열려다가 말고, 또다시 서성거리기를 반복하던 렌이 벽 쪽에 기대더니 주르르 미끄러져서 주저앉았다. 마음처럼 안 되는 게 짜증 나는 모양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류제는 안 그러는 줄 알았던 렌이 자기를 그만큼 생각해 주고 있는 것 같아 심장 언저리가 근질근질 이상해졌다. 빨리 입 밖으로 꺼내 봐.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잖아. 그렇지? 라고 유혹하는 류제의 표정이 밝아졌다.

렌이 포기하려고 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역시 이래서 먼저 학교에 간 거구나. 하지만 뭘까, 이 괴상한 쾌감은.

렌이 나 때문에 남모르게 노력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어린아이의 성장을 보는 것 같은 기쁘다는 감정도 있지만… 뭔가 다른 것도 있는 기분이다.

지인 하나 없는 제립학교에 입학해서 우여곡절 끝에 사귄 친구라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이런 벼…변태 성욕을 가지고 있었나? 남이 노력하는 걸 보고 흥분하는?

에이, 그럴 리가. 류제는 바보 같은 결론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주저앉아 고민하는 렌은 꼼짝도 안 하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상 증세를 표출하고 있었지만 류제는 그것도 그저 빨리 사과하고 싶은데 속상해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며 느긋하게 렌을 지켜보았다.

아침에 그런 모습을 보았기에 금방 사과를 할 줄 알았지만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렌은 말을 걸어올 기미가 없었다.

류제는 마음을 졸였다. 쉬는 시간만 되면 렌은 본래라면 교과서를 가지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유네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대는데 오늘은 유달리 유네와 이야기하기는커녕 엎드려서 자는 척을 해서 대화의 물꼬를 원천 차단했던 것이다.

아침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은 그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 할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렌 군, 점심 안 먹을 거야?”

유네가 엎드려 있는 재경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몸이 춥고 머리가 아팠던 재경은 대꾸도 힘들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류제는 또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렌에게 단단히 한소리 하려고 팔짱을 꼈다. 아침도 그만큼밖에 안 먹었으면서 점심도 굶을 셈이라니. 왜. 가서 또 하지도 못할 말이나 연습하려고?

참다못한 류제가 유네를 제치고 책상에 엎드려있는 재경을 흔들어 깨웠다. 그 말을 나한테 하는 게 더 중요하지. 그렇잖아.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일어나서 점심 먹자.

“렌. 진짜 안 일어나?”

“…….”

“안 먹고 뭐 하게. 아침에도 혼자 사라지더니.”

그 말에 몸을 움찔 떤 재경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맹해 보이는 눈은 날 선 말을 해대는 입을 숨겨주는 듯 렌을 순한 양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저 한껏 상기된 귓바퀴 좀 보라지. 분명 몰래 쓰레기장에 가서 사과를 연습하려 했던 계획이 찔렸을 게 분명하다.

“가면 되잖아, 가면. 거참, 귀찮게도 구네.”

입을 비죽거리던 재경이 툴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를 움직이니 두통이 더 심해졌는지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손가락으로 미간 사이를 누른 그가 비틀비틀 교실 밖으로 향했다. 유네가 같이 가자며 도도도 뛰어가 옆에서 발을 맞추며 걸어갔다.

하아. 류제는 저 까다로운 친구를 어찌해야 하나 앞날이 깜깜해졌다. 일단 렌의 저 솔직하지 못한 입에서 어제 일에 대한 사과가 나와야 할 텐데. 류제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두 사람을 뒤따라 급식실로 향했다.

유네가 어떻게든 재경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재미있는 농담만 해댔다. 학교 앞에 있는 맛있는 디저트 음식점이 있는데 여자애들이 좋아하더라, 라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가 대다수였지만 딱히 유네에게 불만이 있던 게 아니었던 재경은 유네의 말을 호기심 있게 경청해 주었다.

그러던 재경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잽싸게 고개를 돌려 모른 척을 했다.

류제는 렌이 생각보다 뻔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저거 기왕 이렇게 된 거 분명 어제 일에 대해 말을 꺼내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못 하고 있는 거다. 류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 하루가 지나도 저 입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못할 것 같다. 내 쪽에서 감질나니까 오늘은 그만 봐주도록 할까.

정말 렌은 어쩔 수 없다며 선심 쓰듯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렌 대신 먼저 운을 떼어주었다.

“렌,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뭐…뭐가?”

말할 타이밍을 잡던 재경이 짐짓 모른 척했지만 유네는 그게 렌과 류제의 사이가 갑자기 안 좋아진 이유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수다스러운 입을 금방 다물었다.

앙칼진 친구들 사이에 껴서 구르던 눈칫밥이 몇 년인가. 드디어 둘 중 한 명이 관계 개선에 흥미를 보이자 대놓고 눈을 반짝반짝거린 유네가 어서 화해하라고 무언으로 압박했다.

“어제 일에 대해서 할 말 없어?”

“윽…….”

이런 정면 돌파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재경은 제가 아침 조회 시간 내내 돌린 시뮬레이션과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자 당황해서 갈 곳을 잃은 눈동자를 굴렸다.

류제는 이번에는 우물쭈물 안 넘어갈 거라며 단호한 표정으로(그래 봤자 앞머리에 다 가려져서 안 보이지만) 팔짱을 끼었다.

“렌 군!”

오늘 내내 둘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가 렌이 류제에게 잘못한 게 있어서임을 깨달은 유네가 렌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서 말하라 종용했다.

유네는 이런 불편한 관계는 질색이었다. 말수 없는 렌보다는 늘 활기차고 씩씩한 렌이 훨씬 더 좋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더 드…듬직하기도 하고. 이런 쩨쩨한 렌은 싫어.

“…그게… 그러니까…….”

둘 사이에 껴서 갈팡질팡 눈을 돌린 재경이 떠듬떠듬 아까 연습한 문장을 내뱉기 위해 입을 뻐끔거렸다.

부끄럽다고 ‘할 말 같은 건 없어!’라고 외쳤다가는 또다시 류제한테 말 걸기가 힘들어지겠지. 어떻게 하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탈이다.

아, 진짜. 그냥 말하면 되잖아! 사나이는 이런 걸로 겁먹지 않아. 하지만 왜 이렇게 긴장되는 거냐고!

“어…어제… 그… 미…미―”

“드디어 찾았다. 야, 렌 지미.”

사과가 나오기 전에 심장이 먼저 입에서 튀어나올 것 같던 중 앙칼진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재경이 살았다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팩 돌렸다. 일단 지금 당장은 도망치기 성공이다.

한참 잘 되고 있는 와중에 방해 공작이 들어오자 류제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흘겼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포니테일을 위풍당당 휘날리는 비키가 근엄한 표정으로 류제처럼 팔짱을 끼고 있었다.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재경은 절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는 비키가 웬일인가 싶다가 그래 봤자 분명 또 못된 말을 할 것이라고 치부해 양아치 같은 표정으로 시비를 받아쳤다.

“뭐야. 할 일도 없냐? 난 또 왜.”

용케도 비키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승부야. 기간트리카 대결.”

“뭐어? 왜 부르나 했더니. 내가 왜 너랑 또 그런 걸 해야 하는데? 내가 질 게 뻔한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쓰레기랑은 말도 걸기 싫잖아요~ 문무 양도 지체 겸비 하나를 알면 둘을 아는 비키 님아.”

“시…시끄러워. 한다면 하는 거야. 이번에는 제대로 선생님 허락도 맡았으니까 잔말하지 마! 저번에는 제대로 결착이 안 났잖아.”

비키가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허가서를 내밀었다.

질 게 뻔한 시합 따윈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재경은 잠시 고민했다.

진퇴양난이다. 여기서 거절하면 꼼짝없이 류제한테 정면 돌파 사과를 해야 할 판이고, 허락하면 또다시 비키한테 개처발리고 양호실로 직배송될 판이다.

아니, 쟤는 저번 주에 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이겼으면 됐지 왜 또 와서 난리야. 우리 봉사 활동 어제 끝났거든? 난 싫어. 차라리 류제한테 정면 돌파 사과를 하겠어. 비키랑 대결해서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분명 쟤가 저러는 거 내가 결국 지한테 사과 안 했다고 떼를 쓰는 게 뻔할 텐데.

렌 지미가 펜던트를 돌려주지 않는 본래 미연시 스토리대로라면 펜던트를 훔친 것을 주인공 일당에게 들킨 렌 지미는 주인공에게 기간트리카로 정의 구현 당하며 삼류 악당의 역할을 완수했다.

그러나 펜던트를 무사히 돌려준 재경은 이제 그 이벤트는 그걸로 끝났다고 생각했기에 그 인과가 돌고 돌아 결국 비키와의 기간트리카 재대결로 이어졌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도.

“내가 백 보는 양보해서 어빌리티는 쓰지 않아주지. 대신 내가 이기면…….”

비키가 떨떠름하면서도 얼굴을 싹 붉혔다. 내내 말을 붙여 보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렌이 친구인 류제나 유네에게도 차갑게 대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기 꺼려졌던 그녀다.

평소라면 저 야만인은 아무한테나 치근덕거리고 짜증이 날 정도로 귀찮게 굴 텐데 답지 않게 저러는 걸 보니까 내가 어제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잖아.

어제 정자에서 들었던 류제의 부탁도 들어줄 겸 비키는 변덕을 부려보기로 했다. 재경처럼 친구 사귀는 데에 서툴러서 이런 방법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그녀는 결국 토라진 재경과 이야기할 구실로 기간트리카 대결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이기면 나랑 치…친구 하는 거다?!”

마치 ‘이번에 전쟁에서 승리하면 너랑 결혼하겠어!’라는 프러포즈가 생각나는 발언이다. 물론 그런 사망 플래그 같은 대사처럼 비키가 얼굴이 새빨개져라 외친 저 대사 안에도 플래그가 섞여 있었다.

재경의 입장에서 봤을 때― 비키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주 귀여운 플래그였다.

“뭐?”

친구? 쟤 지금 친구라고 했어? 나한테? 맨날 나 무시하고 싫어했으면서.

재경은 렌과 친구가 되어주면 안 되냐는 류제의 부탁을 받은 비키가 이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서툰 재경이 쩔쩔매며 류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류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해보지 그래?”

난공불락에 한사코 거부했던 비키가 정말로 마음을 열어줄 줄 몰랐던 재경은 류제의 말로 자신감을 얻었다. 입꼬리를 비식거리던 그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하, 어쩔 수 없구만. 이놈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네. 뭐어야, 혹시라도 내가 이기기라도 하면 쪽팔려서 어쩌시려고 그러나?”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것처럼 재경이 항상 그러듯 어깨 뽕을 가득 넣고 콧대를 높였다. 특유의 잘난 척하는 표정이 얄밉다.

혹시라도 렌이 비키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쩌나 싶던 류제가 내심 안도했다. 비키에게 순번을 빼앗긴 건 배 아프지만 렌과 비키가 화해하는 건 좋았다. 이제 눈만 마주쳐도 나오던 욕지거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건가.

어제 비키 욕을 해대던 렌이 저 막무가내 대결을 받아들여 준 것은 조금 의외긴 하다.

재대결을 위해 학교 안 풀밭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진지하게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점심밥 먹으러 가는 길에 별안간 하게 된 간소화된 기간트리카 대결의 룰은 간단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채 어빌리티를 쓰지 않고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승패를 가르면 된다.

그거야 한 쌈박질하는 나도 충분히 할 만한 대결이지. 근데 진짜로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하지? 비키랑은 영영 절교? 그럼 좀 곤란한데.

비키는 이길 생각 만땅인 것 같다. 그녀는 승자가 무엇을 얻든 어떤 승부든 이기려고 할 것 같지만 재경도 지기 싫어하는지라 승패의 여부와 관계없이, 비키와 친해지고 말고를 떠나서 이기기 위해 스탠딩 스타트 자세를 취했다.

심판은 류제와 유네다. 급하게 그린 간이 대결장 가운데 라인 가장자리에 선 두 심판은 마주 보며 신호를 기다렸다.

재경은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기에는 근육통으로 울부짖는 몸뚱아리와 지끈거리는 두통과 슬금슬금 올라오는 오한이 거슬렸지만 사나이로서 정면승부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제자리 준비.”

대결하는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끝나자 류제가 외쳤다. 수업에서 배운 것처럼 두 사람 모두 몸을 숙여 센터를 낮추고 추진력을 얻기 위해 박차고 나갈 자세로 무릎을 굽혔다.

“승부 시작!”

“하아압! 기간트리카 장갑!”

“기간트리카 장갑!”

이 간소화된 대결은 눈 깜짝할 새에 끝나는 승부다. 달려 나감과 동시에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야만 했다.

비키는 순조롭게 기간트리카를 장갑해서 부스터를 켰지만 거울을 마주 보듯 똑같이 달려 나가던 재경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장갑되었던 기간트리카가 깜깜무소식이니 왜 그러는지 몰라 슬렉터를 살폈다.

기동된 슬렉터에서 파직, 하고 연기가 파스스 올라오고 있었다.

아, 이거 고장 난 거지.

고장?

“아. 아, 맞다! 아, 야, 비키, 잠…잠깐만!”

“뭐? 뭐야, 갑자기!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으앗, 으아아앗! 저리 비켜. 비키라고!”

“렌 군, 위험해!”

대결이 한창인 가운데 렌 지미가 무방비하게 맨몸으로 달리자 비키가 당황해서 브레이크를 밟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관성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충분하지 않은 제동거리 때문에 활공해서 피하려고 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꺄악, 비켜!”

“너나 비키라고, 이 비키 셀로니아야!”

재경은 바보같이 어제 비키의 고장 난 슬렉터와 바꿔치기했다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비키가 돌격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재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죽었다.

기간트리카 컨트롤에 노련한 비키가 먼저 장갑을 해제해서 충돌 충격을 막아보려고 했다.

장갑이 해제된 그녀의 몸은 전보다 가볍게 튀어 올라 재경의 몸으로 돌진했고 곧 우당탕, 큰 소란이 일었다.

“우아앗. 다들 어떻게 해.”

심판을 맡은 유네가 어쩔 줄 몰라 다급하게 뛰어가는데 먼지가 걷히니 어빌리티 하나는 믿음직스러운 류제가 저번처럼 둘 사이의 충격을 완화시켜 준 듯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으윽.”

“아야…….”

비키의 코가 류제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생소한 남자의 품에 소스라치게 놀란 비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두더지 도망가듯 사사삭 물러났다.

재경은 비키보다 더 꽈악 안겨 류제의 배에 얼굴이 파묻혀 있었다. 류제는 렌의 손목에 착용된 슬렉터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발견하고 착용 해제시켰다. 이 연기는 어제 비를 피해 정자에서 앉아있을 때 비키의 슬렉터에서 보이던 증상과 똑같았다.

“비키 양… 류제 군… 렌 군! 괜찮아?”

유네가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류제가 연기가 나는 슬렉터를 흔들면서 모두에게 범인을 알려주었다.

자존심을 걸고 제안한 시합을 고장 난 슬렉터 때문에 시원하게 말아먹은 비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탈탈 털며 쌀쌀맞게 투덜거렸다.

“무… 바보 아냐?! 슬렉터가 고장 났으면 바로 반환하고 새것으로 받아야지. 승부가 엉망진창이 됐잖아!”

“너무 화내지 마, 비키. 렌도 몰라서 그런 거겠지.”

“키아니트리체 제일의 학교에서 사용하는 슬렉터가 이 모양 이 꼴이라니. 믿을 수 없어!”

어제 고장 났다가 다시 복구되었던 자신의 슬렉터를 떠올린 비키가 쯧쯔 혀를 찼다. 오늘 혹시 몰라서 선생님께 말해 새것으로 바꾸기는 했는데 그렇게 하길 잘 했다고 비키는 속으로 안심했다.

이 학생용 슬렉터, 고장이 너무 잦은 거 아냐? 보급형이라고 해도 질이 나쁜 건 아닐 텐데. 그보다 시합은 어쩔 거야. 용기 내서 말 걸어준 건데.

“여튼 승부는 내가 이겼다? 알아들었어, 렌 지미?”

어쨌든 재경과 친구가 되고 싶던 비키가 얼굴을 머리 색만큼이나 붉히며 막무가내를 펼쳤다.

원래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직 승부가 결정 난 건 아니거든?!’ 하고 딴죽을 걸 텐데 이상하게 움직일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렌이 걱정되었던 유네가 렌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류제 군. 렌 군 괜찮은 거 맞아?”

“어? 응? 야, 렌. 이제 무사하니까 일어나. 설마 또 기절한 거야?”

전에 있었던 일의 데자뷔가 느껴진다. 류제가 자신의 배에 얼굴을 박고 누워있는 렌을 흔들었다.

정말로 기절한 건가 류제가 렌의 얼굴을 돌려 살폈다. 역시나 헤롱헤롱한 그는 아무리 깨워도 정신을 못 차렸다.

“류…류제 군! 보호할 거면 제대로 하란 말이야!”

볼을 부푼 유네가 렌의 상태를 상세히 살폈다. 얼굴이 시뻘겋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댔다.

얼굴이 상기된 건 아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창가에 앉아 햇볕이 따가워서 그런 줄 알았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컨디션 난조인가?

“뭐야, 렌 지미. 바보같이 또 기절한 거야?”

비키는 남자 주제에 나약하기 그지없는 렌 지미의 흐물흐물한 몸뚱이가 염려되었지만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며 핀잔했다.

“하, 이래서야 뭘 어쩔 수 없네. 이런 변수 하나에 저렇게 허둥대는 거면 마족이랑 싸울 때도 뻔하다.”

“잠깐, 그것 때문만은 아닌 거 같아.”

흐르는 땀도, 상기된 이마도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류제의 몸에 닿은 체온이 보통보다 높았다. 설마 하던 류제가 렌의 이마에 손을 댔다.

손바닥에 짚이는 뜨거운 감촉에 고개를 갸웃거린 류제가 자신의 이마에도 손바닥을 대보았다. 체온 차이가 확연했다. 고조된 감정으로 흥분했다가 가라앉고 있는 열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열이 났는지 모르겠다.

“왜 그래? 기절한 거면 빨리 깨워. 내가 이겼다고 말해야 한단 말이야.”

“렌 군 역시 어디 아픈 거야?”

“역시?”

류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네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제 소등 전에 목욕…하러 갔었거든. 렌 군이 중간에 목욕탕에 들어왔었는데 비를 맞은 것 같아서.”

고장 난 슬렉터, 비, 열.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어제 겪었던 일과 겹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류제는 일단 기절한 친구를 안아 들었다. 흔히 말해 ‘공주님 안기’처럼 축 늘어진 재경을 가볍게 든 류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렌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두 사람에게 통보했다.

“렌은 내가 양호실에 데려다줄게. 비키, 너 선생님한테 대결 결과를 보고해야 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그대로 가게?”

“유네랑 같이 가줘.”

“자, 잠깐, 류제 군!”

“어쨌든 걔한테 내가 이겼다고 꼭 말해. 꼭이다!”

“하하하. 알았어.”

저런 막무가내를 쓰면서도 렌과 친구가 되어주려고 하다니. 비키도 참 귀엽다니까.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 류제가 입가에 시원한 미소를 띠었다. 무서운 비키와 단둘이 내버려 두지 말라고 외치는 듯한 유네의 비명에도 뒤돌아보지 않은 류제는 기절한 렌을 안고 양호실로 향했다.

유네가 있으면 생각하는 데 방해된다. 류제는 한껏 웃었던 입가를 도로 무표정으로 바꾸었다. 중요한 건 렌이 아픈 이유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애가 이유 없이 열이 날 리 없었다.

슬렉터 고장으로 사고가 났을 때 내가 필사적으로 보호했으니 머리를 다치지는 않았을 거다. 그 작은 충격에 기절해 버릴 정도면 원래부터 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거겠지. 류제는 그 인과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어제 내가 비키를 찾으러 렌의 방에 들어갔을 때 봉사 활동을 땡땡이친 렌은 이미 샤워를 끝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굳이 밤에 목욕탕을 이용하러 내려갔다고? 렌이 그런 귀찮은 짓을 했다고? 거기에 오늘 보기 좋게 열까지 나다니. 그 사이에 분명 뭔가 다른 일이 있다는 의미다.

나한테 맨날 바보라고 했던 주제에 바보는 내가 아니라 렌 너 아냐? 아프면 우리한테 아프다고 말하면 되잖아. 미련하게 아픈 걸 왜 숨겨?

그래서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던 거군. 아침에 운동장도 안 뛴 이유도 알겠다. 그걸 왜 우리한테 말을 안 해주냔 말이지. 의심할 여지가 생기니 증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한편, 성큼성큼 걸음을 재촉하며 양호실로 향하는 류제를 멀리서 관찰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초록 단발에 연분홍의 순수한 눈동자가 아름다운 그녀가 안경의 브리지를 새끼손가락으로 올렸다. 그녀의 동공이 한순간이지만 붉은색으로 빛났다.

“왕녀님을 괴롭히는 건 이제 질렸는데.”

어젯밤에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왕녀의 어빌리티에 의해 무섭도록 비가 온 이유는 서큐버스인 그녀가 꿈속에서 그녀를 지독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

왕녀의 수면을 방해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괴롭히는 건 즐겁다. 하지만 그건 그저 인간을 괴롭히는 심심풀이일 뿐이고 중요한 건 왕녀가 아니라 바로 류제 신리, 그의 몸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후우… 마왕님……♡”

참하게 생긴 것과 달리 야릇한 목소리로 울은 그녀가 몸을 제 팔로 감싸 안고 부르르 떨었다.

나라카국의 번영은 이제부터다 이 돼지 같은 인간들아. 우후후……. 라고 속삭이는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묻혀 갔다.

자신에게 어떤 탐욕스러운 시선이 향했는지 상상도 못한 류제는 교사 뒷문을 통해 복도를 지나쳐 양호실을 찾았다.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자 발로 양호실 문을 민 류제가 알코올 냄새가 밴 양호실에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양호 선생님은 식사를 하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절한 렌을 침대에 올려둔 류제는 저번과 똑같이 이불을 덮어 주려다가 몸을 꽁꽁 싸맨 체육복 저지가 불편해 보여 친절하게 지퍼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안에 갇혀있던 열과 땀이 스르르 흘러나왔다. 추운지 렌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 날씨는 선선했다. 땀범벅이 될 만큼 더운 날이 아니었던 것이다. 속상하다. 체육복 저지를 벗겨 준 류제가 다른 쓸 만한 게 없나 양호실 주변을 살피다가 수건과 얼음주머니를 발견하고 이마 위에 올려주었다.

머리에 고인 열이 식자 미련한 환자는 기분이 좋은 듯이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으으음… 토마토…….”

“푸흡. 뭐야.”

렌이 생뚱맞은 말을 하자 어이없는 웃음이 터진 류제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걱정돼 죽겠는데 갑자기 토마토가 뭐야. 무슨 꿈을 꾸는 걸까. 토마토가 먹고 싶나?

그러고 보니 렌은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지. 점심도 못 먹게 생겼네. 오늘 아침을 안 먹은 이유는 아파서 입맛이 없어서였구나.

걱정되게 나한테 아프다고 말도 안 했다 이거지. 하기야 나랑 싸웠으니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다퉜다는 이유를 제외하고서라도 다른 숨은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렌이 어제 그와 비키와의 일에 관련이 있는 듯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를 맞고 밤늦게 목욕을 하러 왔다는 유네의 말도 그렇고, 비키처럼 고장 난 슬렉터에……. 그때 비키 슬렉터는 갑자기 고쳐졌지. 게다가 이거.

류제가 이불 바깥으로 나온 재경의 손목을 붙잡고 손톱 밑을 살폈다. 깊게 흙이 박힌 흔적이 적나라했다. 어제저녁 렌과 말다툼을 할 때에는 없던 흔적이다. 그야 넘어진 렌을 일으켜 세워줄 때는 손이 깨끗했는걸.

“…설마.”

류제는 비키가 주장했던 것처럼 렌이 펜던트를 훔쳤다 생각하지 않았다. 보기보다 둔탱이인 렌은 비키가 펜던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 같은걸.

그럼 어제 내가 나가고 난 후 렌이 바로 나를 찾아온 건가? 그러다 펜던트를 찾는 비키와 나를 발견하고 같이 펜던트를 찾아준 것이라면 이야기가 맞아떨어진다.

몰래 비키의 말을 엿들어 버렸지만 대놓고 도와줄 성격이 아니라서 남몰래 고생했을 렌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정경이 그럴싸하게 완성되었다. 류제는 단단히 착각했지만 세세하게 따지지 않는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우리보다 먼저 펜던트를 찾았고 돌려줄 타이밍을 못 잡아 정자에다 두고 간 건가? 그러면 렌의 슬렉터가 고장 난 게 설명이 안 되는데. 비키는 슬렉터가 방수 기능이 있다고 했단 말이야. 어제 기간트리카 수업 때 렌은 슬렉터가 고장 날 만한 위험한 행동 안 했잖아.

혹시 고장 났던 비키의 슬렉터가 갑자기 작동한 건 렌의 슬렉터가 고장 난 것과 같은 이유인가? 렌이 그때 펜던트랑 슬렉터를 두고 간 거라고? 그럼 그때 우리 대화를 다 들은 거야?

“하.”

류제가 이마를 쳤다. 그래서 아까 비키가 대결하자고 할 때 그냥 받아들여 준 거구나. 분명히 그런 막무가내 대결 신청은 싫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아픈 것을 숨긴 이유를 대강 알겠다. 왜 아픈 이유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숨기는 거였어.

“류제 학생! 아직 있나요?”

닫히지 않은 양호실 문밖에서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달려온 그녀의 숨은 살짝 차 보였다.

세라가 실내용 구두를 또각거리며 다가왔다. 렌이 누운 침대 옆에 앉아있던 류제가 예의 바르게 일어나 인사했다. 그녀가 됐다며 손을 내저으며 어질러진 생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비키 학생과 유네 학생에게 들었습니다. 또 기절했다고요.”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대결과 별개로 몸이 아픈가 봐요.”

“하아. 아침에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어도 다리 때문인 줄 알았는데. 감기라도 걸린 모양이네요.”

세라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렌을 살폈다. 이마에 손을 댄 그녀가 어빌리티를 발현했으나 별다른 호전 없이 끝나 버렸다.

“제 어빌리티로는 전염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요. 양호 선생님을 호출했으니 곧 오실 겁니다.”

“세라 선생님, 혹시 렌이 아침에 운동장을 안 돈 이유가 다리가 아파서 그런 거예요?”

“류제 학생은 모르셨군요. 아침에 저에게 오더니 넘어져서 다쳤다고 하더라고요. 무릎 상처가 심해서 그대로 뒀다가는 큰 병원에 실려 가게 될 정도였어요. 하여간 미련하게 상처를 방치하다니. 사감실에 구급상자가 있었는데!”

세라가 아주 기가 막힌 말썽꾸러기 학생을 생각하며 크게 분노했다. 딱히 재경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 그가 그러지 못한 현실에 화가 난 것이었다.

남몰래 펜던트도 찾아준 데다가 슬렉터도 바꿔치기하고(그런 후에 바꿨다는 걸 그대로 까먹고 비키와 기간트리카 대결을 받아들이다니 무슨 정신머리야. 하기야 아팠으니까 바보 같아도 봐준다.), 넘어지고, 아파도 왜 남한테 말을 안 해.

암만 몰래 도와준 것을 숨기고 싶었다지만 친구니까 조금 믿어도 되잖아. 나랑은 싸워서 말 못 한다 치더라도 적어도 유네한테 말하면 좀 좋아.

“하아…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서툰 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린 류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의 이 개고생을 떠올렸다. 내가 아니었어 봐, 누가 알았겠어.

곧 양호 선생님이 들어오고 점심시간이 끝나 가는 종소리가 들렸다. 수업이 있는 류제는 어쩔 수 없이 양호실을 나섰지만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렌의 상태는 어지간히 걱정되었다.

렌이 모든 사람에게 솔직해지는 날이 올까. 적어도 한 사람에게 그럴 수 있다면 그게 나였으면 좋겠는데.

그러길 기대하며 가림막에 가려진 침대를 바라보던 류제는 거기에 누워있을 렌을 상상하며 양호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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