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3)
내가 니땀시 못 산다. 누굴 닮아서 맨날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냐, 응? 철 좀 들 때도 됐는데 언제까지 이 할미 속이나 썩이구 그럴래?
아, 진짜. 이번에 많이 참았다니까 그러네. 내가 시비 건 것도 아니고 걔가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나한테 땅꼬마니 뭐니.
그리고 이건 어쩔 수 없었다고! 원래 스토리가 그런 걸 어떻게 해? 내가 기간트리카 대결을 해야지 류제랑 비키가 이어지는 첫 번째 이벤트가 뜬단 말야. 미래를 바꾸는 건 신중해야 한다는 거 몰라? 할머니는 암것도 모르면서 괜히 나한테만 그래.
스토―리고 뭐고 닭 새끼고 쌈박질을 할 거면 이기기나 할 것이지 맨날 쥐어터져 가지고 돌아왔음시롱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여? 사사건건 변명이란 변명은. 무슨 변명만 들으면 지가 명나라 장군이라도 되는 줄 알겄구마. 그렇게 머리가 좋으면 공부라도 잘 하든가. 백날천날 허구언 날 반타작도 못 맞히는 시험지만 달랑달랑 들고 돌아댕기면서 난리 블루스는 저렇게 잘 떨어대요, 아주.
쥐어터지다니. 이번에만 그런 거거든? 진짜 너무하네. 이쁜 손자한테 쥐어터진다는 말 쓰지 마. 자존심 상한단 말야. 글구 이건 진짜 어쩔 수 없었다니까! 왜 내 말을 안 믿어? 이건 다아 내 계산대로―
허이구. 이쁘기는 염병할. 암시롱 생각도 없었으면서 계산은 개뿔이. 또 친구놈이 지 흉 본다고 주먹질이나 먼저 했겠지. 안 봐도 비데오다, 비데오. 내가 니 걱정에 편히 못 쉬어요. 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이 성질머리 괴팍하고 말본새 더러운 놈아!
그러니까 쓸데없이 내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알아서 잘한다고 그랬잖아. 하여튼 늙으면 새치만큼 걱정거리만 는다던데 내 걱정은 하덜덜 말아. 아야, 왜 때려. 머리 나빠지게!
그래서 친구는 많이 생겼냐?
재경이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리니 머리가 욱신욱신 아파서 일어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얼마나 아릿한지 뿌리까지 울려오는 고통에 재경이 아야야, 아픈 곳을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침대? 여긴 어디지? 난 분명히 비키랑…….
전말을 떠올린 재경이 다 팔린 얼굴을 가렸다. 기간트리카 대결을 해서 성대하게 져버렸다. 쪽팔려 죽겠네. 반 애들이 다 구경하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돌아간담.
세상에, 암만 내 패배가 스토리대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런 참패를 할 수가 있어? 분명 난 내가 게임 후반부의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을 가졌을 거라 자만하고 있었단 말야. 당연히 기간트리카 조종도 게임처럼 쉬울 줄 알았지.
거기에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게 그렇게 무서울 줄이야. 역시 고소공포증이……!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 앓는 소리를 도리질 친 재경이 꿈지럭꿈지럭 양호실 침대에서 일어났다. 입학식도 치르기 전에 학교 양호실을 먼저 찍다니 사내대장부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내 평판 어쩔 거야. 거기서 끝내주게 이겨 줘야 인싸 반열에 오를 거 아냐. ‘꺄아, 렌 지미 님. 잘난 척쟁이 비키 셀로니아를 이기다니 졸라 멋져요!’ 에라이, 다 물 건너갔네. 할머니, 솔직하게 말할게. 나 망했어!
양호 선생님은 안 계신지 양호실은 재경 혼자만 멀뚱하게 있었다. 한적한 주변을 둘러보며 멍청해진 머리를 매만지던 재경은 시간을 확인하고 아차 싶어 황급히 신발을 신었다. 친구 사귀기는 개뿔이 기절해서 시간이나 낭비하고 한심해 죽겠다.
“아야!”
“우앗.”
급하게 문을 열다가 양호실에 들어오려는 사람과 부딪힌 재경이 중심을 못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앞도 제대로 안 보는 상대방에게 탓을 돌린 재경이 솟구치는 짜증을 쏟아냈다.
“얌마! 눈은 장식으로 들고 다니… 뭐야, 류제잖아.”
“괜찮아? 지금이면 일어났을 거라고 선생님이 그러셔서.”
“안 괜찮아. 아직도 머리가 띵해. 아아… 쪽팔려서 진짜.”
“그러게 왜 그런 무리를 해.”
비키에게 덤빈 렌의 무모한 행동을 떠올린 류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흔쾌히 그걸 잡은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과 상황이 정반대다.
류제의 표정이 뭔가 미묘했다. 무슨 일 있나 싶던 재경은 저 바보가 무슨 생각이 있겠나 무시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정보를 캐냈다.
“지금 다들 뭐 해?”
“입학식 끝나고 교과서 받고 있어. 시간표도 나왔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교과서는 내가 대신 네 자리에 놔뒀어.”
“오올… 쫘식이. 고맙다, 야. 역시 너밖에 없네.”
재경이 장난꾸러기처럼 히죽거렸다. 류제는 제 목숨 위험했는지도 모르는 저 천하 태평한 친구가 참 속도 좋다고 생각했다.
“부반장이 됐으니까 그런 거지. 네가 날 추천하는 바람에 귀찮게 이런 일까지 떠맡은 거잖아.”
“부반장? 네가?”
“그래. 반장은 널 그 모양으로 만든 비키 셀로니아야.”
“역시 그렇게 됐군.”
“왜 역시야?”
렌이 반장 자리를 노렸다고 생각하던 류제가 놀라 되물었다.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일 줄이야. 분명 렌은 ‘왜 걔가 반장이야!’ 하고 분개할 줄 알았다. 그것도 렌은 고작 유네가 준 한 표밖에 못 받고 언더도그가 되었는걸.
물론 새까만 앞머리에 눈이 가려진 바람에 재경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뻔하잖아. 비키 셀로니아는 유명한 귀족 가문 출신이고. 너는 뭐… 모르겠다. 잘생겨서 그런가? 내가 될 짬이 아니었던 거지.”
“그럴 줄 알았으면 왜 그런 위험한 대결을 하겠다고 나선 거야. 괜히 그 여자애 심기만 건들고. 선생님도 화나셨지만 그… 니냐롯트 왕녀인가? 그분도 상당히 불쾌해 보이던데.”
“부울쾌? 날씨 맑네, 뭐. 비만 안 오면 됐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아우씨, 잔소리 진짜 많네. 니가 무슨 우리 할머니냐? 나도 알아! 쌤이 비키 걔랑 같이 벌이나 받으래지? 잘 알고 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알지도 못하면서 맨날 나한테만 난리야. 할머니도 그렇고, 이젠 너까지 그러냐!
가시처럼 툭 쏘는 말이 돌아오자 류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그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불쾌했다.
“야, 사람이 걱정해 주니깐!”
“흥이다, 흥.”
“나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한 거 알아? 내가 중간에서 안 말렸으면 여기가 아니라 더 큰 병원에서 깨어났을지도 몰라.”
순정만화로 따지면 재경을 구해 준 왕자님이었던 류제는 순순히 귓불을 붉히며 고맙다고 할 줄 알았던 렌에게서 저런 말이 돌아오니까 기분이 상했다.
내가 양호실까지 데려다주고 이불도 덮어주고 교과서도 다 챙겨줬는데 한다는 말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니. 질려버린 류제는 한 대 쥐어박지도 못해서 손깍지를 끼고 제 뒤통수를 감쌌다.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가던 재경의 속도가 점점 늦춰지더니 어느새 류제와 비슷해졌다. 류제는 힐끔 렌의 귓바퀴를 살폈다.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나 그렇게 추했어?”
재경은 기절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류제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고 무척 창피해졌다.
“엄청 추했어.”
실은 기간트리카 대결을 실제로 보는 적이 처음이라 다들 들떠서 별로 추하지도 않았지만 류제는 렌이 얄미워서 심술을 부렸다.
“그… 뭐, 너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고맙네. 담부턴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엉?”
무안해진 재경이 팔꿈치로 류제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귓바퀴까지 빨갛게 이염된 재경은 새침한 양아치 같았다. 고맙다는 말이 서툴러서 괜히 그런다는 것을 류제는 알 수 있었다.
뭐랄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행동이 빤히 보였다. 저걸 보고 입꼬리가 근질근질거리는 이유는 귀여워서일까 아니면 웃겨서일까.
마침내 1학년 8반 교실 문을 열자 몇몇 여학생들이 꺄꺄 환호했다. 무려 비키 셀로니아와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똥파리처럼 도망치다가 대패한 멍텅구리가 됐을 거란 재경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나름대로 인기인이 되어있었다.
“시꺼!”
하지만 그걸 놀리는 거라고 착각한 재경은 강한 척하며 털을 쭈뼛 세웠다.
“렌 군, 괜찮아? 미안해. 내가 반장 선거에 추천해서 곤란해지고.”
“됐어. 내가 그럴 인품은 된다는 의미 아니겠냐. 몸도 완전 멀쩡하고. 저런 솜~ 주먹에는 맞아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솜 주먹 맞고 기절한 주제에 말도 많다.”
입학 첫날부터 대형 사고를 친 간 큰 재경이 잘난 척 큰소리치자 그의 자리로 여학생 서너 명이 몰려와 관심을 보였다.
“짜샤. 니가 기간트리카 조종을 해봤냐?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하하하. 어땠어? 실제로 조종해 보니까 어려워?”
“그보다 후기나 상세하게 말해 봐. 비키 님의 화염을 직접 경험하니까 기분이 어때?”
재경은 대패한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당했다는 부분이 부끄러웠지만 애써 거드름을 피웠다. 비키 셀로니아의 화염구 따윈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콧대를 높이면서 말하는 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비키 셀로니아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을 때 다들 ‘아, 또 렌 지미가 심기를 건드렸구나.’ 하고 재경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따라와. 선생님이 벌 받아야 한다고 했으니까.”
가로막는 사람들을 젖히고 재경의 앞에 온 비키는 그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역겹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다른 애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잠시 흥분했던 재경은 올 게 왔구나 고분고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키는 그런 재경을 경멸하듯 흘기다가 차갑게 고개를 돌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야, 같이 가. 지가 가자고 했으면서 혼자서 가면 어떻게 해?”
“눈이라도 달렸으면 알아서 쫓아오든가. 멍청이도 아니고.”
일부러 걸음을 크게 한 비키가 재경을 큰 폭으로 따돌렸다. 재경이 비키를 놓칠세라 학생들을 제치고 뒤를 뒤따랐다.
“렌. 우리 먼저 기숙사로 돌아갈게.”
“어어. 뭐. 그러든가.”
“렌 군도 고생하네.”
류제는 학교 뒤편 쓰레기장에서 친구 하고 싶다는 말을 연습하던 렌이 떠올랐다. 지켜보고 있자면 고아원에 있을 고집 센 막냇동생도 생각나서 바람대로 많은 친구가 생기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는데 막 그게 성공할 찰나 비키가 찬물을 들이붓듯 데리고 나가 버리니 기분이 꿍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지. 라고 아쉬워하며 턱을 괴고 문 쪽을 쳐다보던 류제는 비키와 마침 눈이 마주쳤다. 우연이 아니었다. 교실 미닫이문을 붙잡은 류제를 쏘아보던 비키는 렌이 따라붙었을 때 엿 먹어보라는 듯이 문을 꽝 닫았다.
“아오씨, 깜짝아. 야!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내 코 잘렸으면 어쩔 뻔했어?”
둘이 붙어있으면 어지간히 소란스럽다. 류제는 유네가 ‘렌 군, 어떤 벌 받으려나.’ 하고 걱정스럽게 말할 때조차 언짢았다. 뒷자리에 가져다 놓은 교과서가 눈에 들어온 류제도 이제 비키 셀로니아가 마음에 안 들었다.
비키를 따라 복도로 나간 재경이 툴툴거리면서 그녀를 뒤쫓았다. 수다스러운 렌 지미가 투덜거리는 말을 모두 무시한 비키는 성큼성큼 교무실로 나아갔다.
저 눈을 다 가린 검은 머리 놈도 그렇고 촌스러운 오 대 오 앞머리 놈도 전부 싫었다. 류제 신리는 아침부터 가슴을 조몰락거리는 파렴치한 짓거리로 사람 속을 긁는가 했더니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내 공격을 겨우 맨손으로 막아냈다. 게다가 반장 선거에서 고작 한 표 차로 부반장이 되었다.
감히 네까짓 게 뭔데 나를 가뿐하게 따라잡는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큼 노력했는데.
비키는 류제가 공격을 막는 장면만 생각하면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셀로니아 가문은 완벽해야 한다. 주적 마족을 앞장서서 처치하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안겨 줘야 한다. 늘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리더십이 강해야 하며 등만 맞대도 든든해지는 강한 동료와 함께해야 했다.
결국 그런 부모님조차 마족의 손에 비참하게 살해당했지만 비키는 혼자 남았어도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면 부모님처럼 세상을 잘 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짐을 잊지 않고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두 명의 남자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다니.
비키는 그 두 명의 인간이 정말 끔찍했다. 저 깐죽거리고 학급의 관심거리는 다 앗아간 렌 지미라는 자는 외모도 성격도 생리적으로 꺼려졌지만 류제 신리, 그놈은 재능으로 자신을 압도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이 학교에서 가장 뛰어나야 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하물며 왕녀님마저도 나는 뛰어넘을 거야. 그런데 왜 나보다 그놈이 더 뛰어난 거야. 분해! 뭐든 완벽한 셀로니아 가문의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도!
“천천히 가자니까. 빨리 가봤자 벌밖에 더 받아?”
“교양 하나 없는 야만인 주제에 나한테 치근덕거리지 마. 기분 나빠!”
“야, 기분 나쁘다니 말 다 했냐? 나는 뭐 기분이 좋은 줄 아냐? 너 때문에 기절한 건 나거든? 어차피 1년간 같은 교실에서 수업 들을 거 아냐. 기분 나쁘다면 반이 바뀌냐? 어차피 반장도 니가 됐고, 뭐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애지간히 해라. 더러운 성격 더 나빠진다.”
“남이사 성격이 나빠지든가 말든가. 그것보다 대결에서 졌으면 나한테 사과나 해. 땅에 그 든 것 없는 머리를 처박으란 말이야, 이 망할 야만인아! 나는 친구가 필요 없어서 사귀지 않는 것일 뿐이고 모…모태 솔로도 아냐. 어서 정정해!”
“난 지면 사과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 자기 혼자 화나서 열폭했던 주제에 왜 나한테 분풀이야.”
“남자가 돼가지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마!”
“아니, 남자고 자시고 사실이 그렇다니까 그러네.”
“역시 교양 없는 야만인은 상종할 가치도 없어.”
“뭐야, 이 싸가지가?!”
“렌 지미 학생… 비키 셀로니아 학생… 또 싸우는 건가요?”
교무실 앞까지 와서 바락바락 시끄럽게 말다툼하던 두 사람의 뒤로 돌연 문이 활짝 열렸다. 마족처럼 어두운 기를 내보내는 듯한 그들의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의 나지막한 말투가 이상하게 상냥했다. 지레 찔린 두 사람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비키의 공격을 맞고 기절했던 재경은 세라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부처 같은 미소에 소름이 절로 끼쳤다. 선생님은 미연시에서 섹시 담당이라고 하지 않았나. 무서움 담당 아냐?
블랙홀에 빨려드는 것처럼 교무실로 끌려간 재경과 비키는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잔소리를 듣고 다시는 선생님의 동의 없이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지 않겠다는 문장을 깜지로 다섯 장을 완성하고 나서야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공부는 지지리도 안 해서 필기라고는 할머니가 사야 하는 생필품을 메모할 때만 했던 재경은 고생한 오른 손목이 할머니가 바늘에 실 넣을 때처럼 부들부들 떨려 와서 죽을 맛이었다.
이만하면 됐지 싶지만 이대로 사건이 종결된다면 주인공과 히로인 사이의 호감도 이벤트가 뜰 리가 없다.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 짐작한 재경의 생각대로 두 사람은 잔소리와 깜지에 이어 다른 벌을 추가로 받아야 했다. 그만큼 선생님 허락 없이 행한 기간트리카 대결은 위중한 교칙 위반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돌아가니 다른 학생들은 전부 하교해서 가방은 재경과 비키의 것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 있을 시간표대로 예습을 하기 위해 교과서를 가득 챙기는 비키와는 달리 복습도 예습도 모르는 재경은 교과서는 죄다 제 사물함에 처박아두고 공책 한 권만 든 가방만 털레털레 들고 선생님을 따라나섰다.
세라는 그들을 새 장소로 인솔했다. 화가 아직 풀리지 않은 입에서는 끊임없이 잔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의 결과, 입학식도 치르기 전에 퇴학을 시키기에는 비키 셀로니아 당신의 재능이 아깝다는 이유로 이런 벌을 받게 되었음을 예고하죠. 제가 교장 선생님께 사정사정한 결과 그나마 형량이 준 것임을 명심하세요.”
“에에~, 선생님 제 재능은 안 아까워요?”
“셀로니아 가문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의미예욧! 렌 지미 학생,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나도 재능이 아깝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렇지. 재경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돌멩이를 찼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내 어빌리티가 뭔지 모르겠다. 비키나 류제처럼 대단한 게 아니더라도 좀 좋은 능력이면 얼마나 좋아.
근데 암만 떠올려 봐도 렌 지미가 어떤 어빌리티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하기야 누가 이런 삼류 악당 엑스트라의 어빌리티를 기억하겠어.
“하여튼 다음부터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본래 기간트리카 대결이란 당신들의 사사로운 감정싸움을 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능력을 확인하면서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의 시너지 효과를…….”
재경의 철없는 질문을 계기로 또다시 처음으로 되감겨 재생된 선생님의 잔소리와 함께 그들은 B동 기숙사 뒤편 작은 산책길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조성된 교내 산책로 중 하나이며 시작점은 A, C동 기숙사 사이에 있는 B동 기숙사 뒷문부터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춘 세라 밀로니가 옆구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 밑의 점이 고혹적이다. 어른들이 본다면 역시 섹시 컨셉의 캐릭터에 부합하다 말할 테지만 재경은 어른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았기에 또 잔소리가 시작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금부터 일주일간 렌 지미 학생과 비키 셀로니아 학생은 방과 후 이 산책로의 정상까지 쓰레기를 치우는 봉사 활동을 하겠습니다. 어빌리티, 슬렉터 둘 다 써서는 안 되며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쓰레기를 주우며 당신들이 어떤 행동으로 서로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했는지 반성해 주세요.”
“싫은데……. 쌤 저 충분히 반성했는데 좀 봐주심 안 돼여?”
“안 돼요!”
“치사해.”
재경은 렌 지미가 이런 벌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게임으로 미리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진짜로 벌을 받으려니 왜 사서 고생을 해야 하나 귀찮아졌다.
물론 삼류 악당 렌 지미가 활약하는 최초의 이벤트를 성공시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밝히고 싶은 욕구가 있긴 했지만 뭐랄까, 손해 보는 기분이었다.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이겨서 인기를 얻는 것도 실패했는데 이런 짓까지 해야 하냐. 재경의 불성실한 성격이 이번에도 스스로를 훼방 놓았다. 역시 히로인 전원의 호감도를 3까지 올리는 건 너무 귀찮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믈스믈 지배했다.
“지금부터 7시까지 산책로를 따라 정상까지 올라가서 쓰레기를 주워 오세요. 쓰레기봉투는 여기 있습니다.”
“선생님. 적어도 집게는 주셔야 하지 않나요? 설마 맨손으로 집으라는 건 아니겠죠?”
“비키 학생, 이건 벌입니다.”
“으으… 끔찍해.”
“밥은 그 이후에 먹도록 하겠습니다. 자, 쓰레기 줍기 봉사활동 실시!”
“…….”
“실.시! 복창하세요!”
“실시…….”
“시간이 되면 A동 기숙사 사감실 앞으로 오세요. 제 어빌리티 중에 ‘탐색’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마시구요! 도망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렌 지미 학생!”
“으윽.”
생각이 들킨 것처럼 몸을 수그린 재경이 뜨끔한 얼굴을 숨겼다. 곱게 자란 비키는 손으로 쓰레기를 줍는다고 생각하니 사색이 되었다.
꿍얼꿍얼 입을 비죽인 재경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산책로를 향했다. 지금이 오후 4시이니 무려 세 시간 동안이나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
“역시 생각할수록 별로야.”
고작 히로인 호감도 이벤트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것도 일주일 동안이나.
전쟁 이벤트를 피하기 위해 히로인 전원의 호감도를 3 이상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나지만 그래도 불합리하다. 다음 챕터에도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삼류 악역이 도맡아 개고생을 하라는 건 생각만 해도 싫었다.
선생님이 지켜보는 동안은 사이좋게 걷던 비키와 재경은 세라가 안 보일 때쯤 양 갈래 갈림길이 나오자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보았다. 눈이 아파와질 때쯤 그들은 짠 것처럼 고개를 돌려 각기 다른 길로 향했다.
세 시간 동안 개고생을 한 결과 봉사 활동이 겨우 끝났다. 재경은 털레털레 지친 발걸음으로 급식실로 향했다. 쪼잔한 담임 쌤이 쓰레기봉투 반도 안 채워 왔다고 6시 50분에 산책길로 돌려보내는 바람에 밥 먹는 시간이 엄청 늦어져 버렸다.
입학식 내내 기절해 있느라 점심도 못 먹어서 배고파 죽겠는데 꼭 사람을 혹사시켜야 하나. 재경이 그렇지 않냐고 비키한테 공감을 요구했지만 볼일 없는 비키는 재경을 앞질러 먼저 급식실로 들어갔다.
아니, 무시라니 너무하네. 다른 것도 아니고 지가 기절시켜서 그런 거 아냐. 쟤는 반성이란 걸 모르냐? 아님 나랑은 친구 되기 싫다는 거냐?
“렌 군. 이제 끝난 거야? 고생했어.”
손에서 흙냄새와 쓰레기 냄새가 나서 급식실 개수대에서 손을 씻던 재경에게 유네가 반갑게 알은척을 했다.
“유네…랑 류제…랑… 쟤네는 뭐야.”
또 언제 친해진 건지 두 사람 뒤에 처음 보는 여학생들이 졸졸 따라왔다. 제가 기절해 있을 때와 세라에게 불려갔을 때 친해진 애들인 것 같다.
“같이 저녁밥 먹었어.”
“그르냐.”
재경은 벌써부터 하렘 왕국을 건설하려는 류제가 괘씸했다. 물 묻은 손을 류제의 얼굴에 철퍽철퍽 닦은 재경이 그 음험한 볼을 꼬집었다. 개가 핥은 것처럼 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류제의 얼굴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나 빼고 먹으니까 맛있디?”
“하지만…….”
“됐어. 난 비키랑 먹으면 돼. 흥이다, 흥.”
저만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든 재경이 일부러 발을 굴려 그들을 지나쳤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새로 뷔페식 배식을 받는 사람은 늦게까지 봉사활동을 한 재경과 비키밖에 없었다.
“두고 봐. 남은 거 내가 다 먹을 거다.”
집게로 후다닥 맛있을 것 같은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골라 담는 재경은 살짝 추접했다. 할머니가 봤더라면 누구네 집 자식이 가정교육을 그 모양으로 받아 처먹었냐고 소리쳤을 모양새다. 그러나 재경은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배가 고팠다.
옆에서 조신하게 먹을 양만큼만 집게로 뜨던 비키는 마지막 하나 남은 푸딩을 집으려다 재경이 휙 낚아채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새치기하지 마!”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지.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하 참. 그래, 옜다. 너나 먹어라.”
“필요 없어. 네가 만진 거잖아. 더러워! 오염됐어!”
“줘도 뭐래. 글고 목소리 좀 낮춰. 선생님 보고 계시잖아, 이 바보야!”
“으이익!”
그들처럼 저녁을 늦게 먹은 세라가 뒤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중이다. 들고 있는 식판을 부들부들 떠는 비키는 빨간 말총머리가 천장으로 솟구칠 기세였다.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진짜! 혼자서 열불을 삭이던 비키는 이깟 야만인을 진지하게 상종하니까 일이 꼬이는 거라며 자신을 달래고는 흥, 하고 새침하게 고개를 틀었다.
“야, 좀 가까운 데 앉아. 왜 그렇게 멀리 가?”
구석진 자리로 향하는 비키의 뒤를 재경이 눈치 없이 쫄래쫄래 따라갔다.
“따라오지 마!”
“좀 같이 먹자. 어차피 친구도 없잖아.”
“너랑 상관없는 일이거든?! 하여튼 따라오지 마. 따라오면 선생님이고 뭐고 화염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익혀 버릴 테니까!”
비키가 잔인한 말을 꽥 내질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혹여 정말로 따라오기라도 할까 비키는 후다닥 재경과 거리를 두었다. 거절당한 재경은 저 거지 같은 성질머리 정말 짜증 난다고 투덜거렸다.
“이 짜식이 두고 보자, 진짜.”
비키를 류제랑 엮는 것은 보류. 물론 나중에 스토리로 가정사가 밝혀지면서 감동적으로 정리될 애지만 그래도 날만 죽어라 세우니까 부아가 치민단 말이지. 동질감으로 다가간 내가 멍청이다. 흥, 난 유네 밀어줄 거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네 이벤트는 아예 안 도와줄 거라고.
시무룩해진 재경은 잔뜩 떠온 음식들을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류제한테는 비키랑 먹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결국 혼자서 밥을 먹어야 했다. 어차피 혼자 먹을 거 좀 옆자리에 있어주는 게 뭐 어때서.
비키 쟤는 뭘 먹고 자랐는데 저렇게 삐딱해? 사람한테 더럽다느니 오염되었다느니 화염구로 익혀 버리겠다느니. 저런 폭력녀를 게임에서 내가 어떻게 공략했담. 이벤트가 지나가면 뭐 달라지기라도 하나. 아님 주인공의 시선하고 삼류 악당 엑스트라의 시선하고 히로인을 보는 게 다른 건가.
쳇,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누가 번다고 혹시라도 이번 호감도 이벤트 지나갔을 때 비키가 나 빼고 류제랑만 친해져 있으면 진짜 배알이 꼴릴 것 같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깔끔하게 처리한 재경을 비키가 몰래 힐끗거렸다. 그녀는 결코 렌 지미가 주겠다고 한 푸딩을 거절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 * *
재경의 고생은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해가 뜨면 체력을 기르기 위해 아침마다 모여서 운동장을 도는데 어제도 밤을 새운 재경은 반쯤 잠을 자면서 운동장을 달렸다.
그때마다 A동 기숙사 사감인 세라가 안 자고 무슨 엉큼한 짓을 했냐며 이상한 봉으로 재경을 찔러 귀찮게 깨워 댔다.
입학식을 했으니 그다음 날부터는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이 세계에 빙의한 지 고작 사흘째인 재경이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던 키아나트리체의 고등교육을 경험하고 머리가 새하얘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 마음 단단히 먹으려고 했더니 고교 데뷔는 둘째 치고 완전히 나만 멍청이가 된 기분이다. 재경은 수업 내내 선생님들이 무슨 개소리들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키아나트리체의 역사와 국어 문법, 수학, 병법, 기간트리카 훈련, 어빌리티 개발 훈련 등등 난생처음 들어보는 개념들도 문제지만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나 상식을 듣는 것조차도 고역이었다. 제발 갓난아기도 이해할 수 있게 기초부터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할머니, 나 좀 도와줘! 어디 치트키 없어?
“괜찮아?”
“안 괜찮아.”
우웩. 재경이 헛구역질을 했다. 국사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 나와 실습하는 오후 마지막 기간트리카 실기 수업. 미처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이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재경의 안에서 셰이커처럼 쉐킷쉐킷 섞여 들어갔다.
“기간트리카는 이런 기분이구나.”
처음 기간트리카를 장갑해 보는 류제가 가벼워진 몸과 공중전이 가능해진 부스터를 사용해서 렌의 곁을 맴돌았다.
재경은 고소공포증과 토할 것 같은 멀미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또다시 양호실행이었다. 덕분에 4시부터 시작하는 쓰레기 줍기 봉사 활동에 지각해서 하마터면 저녁을 못 먹을 뻔했다.
이놈의 기간트리카 수업은 왜 날마다 있는 건지. 재경은 오후 수업이 죽을 만치 싫었다. 게다가 학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슬슬 세라가 중간고사에는 모의 대전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모의 대전이고 뭐고 여학생들과 친해지고 싶었던 재경은 여학생으로 구성된 팀을 노렸지만 여학생들은 어빌리티도 못 쓰고 공중을 힘없는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재경과 같은 팀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
“나랑 같은 팀 하면 되잖아.”
“싫어. 여자애들도 많은데 내가 왜 칙칙한 남자애하고 손잡아야 하냐?”
사람을 보지도 않고 투덜거린다. 류제는 내밀었던 손을 뒤로 감췄다. 난 렌이 아무리 못해도 충분히 커버해 줄 수 있는데. 비키 때처럼 다른 애들한테 괜히 미움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하교해서 봉사활동 하고 저녁 먹고 류제네 방에서 놀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장 돌고 아침밥을 먹은 후 유네와 류제와 함께 등교를 한다. 고작 며칠 학교에 다녔을 뿐인데 익숙해져서 한 달은 다닌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는데 친구도 많이 생긴 것 같지 않았다. 반 친구들끼리 말을 트기는 했는데 지금껏 친구가 없어와서 그런가 그가 정의 내린 친구라고 하기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재경은 이대로 가다간 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한 여학생이 유네밖에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 것 없는 주말이 지나고 입학식에 있었던 비키 셀로니아와 렌 지미의 기간트리카 대결의 뽕도 점점 수그러들 즈음 두 사람의의 봉사 활동 날도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부터는 기간트리카 수업 때 선생님이 대결의 시범을 보여 주며 두 명씩 짝을 지어 간단한 대결을 하게 해줬는데 그 대표로 비키와 류제가 꼽혔다.
“역시. 비키 님의 기간트리카 컨트롤 능력은 초보자와 비할 바가 못 되긴 해. 거기에 류제 신리가 상대 팀으로 붙다니. 류제는 진짜 천재인가? 어떻게 고작 일주일 만에 고급 컨트롤을 할 수 있담.”
라고 말하는 여학생의 황홀한 찬사를 들으며 하찮은 잡초처럼 쪼그려 앉아있던 재경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류제를 흘겼다. 바람에 머리가 휘날리며 대결을 준비하는 류제는 멀리서 봐도 누가 뭐래도 하렘 게임의 주인공 같은 멋진 모습이었다.
대결의 규칙에 따라 정해진 거리만큼 떨어진 두 사람은 선생님이 신호를 주면 곧바로 달려 나갈 듯이 서로를 응시했다.
비키는 일주일 전의 설욕을 이 자리에서 갚을 것이라며 눈을 부라렸다. 기간트리카를 고작 일주일 동안 배운 저 남자에게 패배하는 것은 셀로니아 가문의 명예를 먹칠하는 일이야. 내 공격을 막은 건 단순히 우연이겠지. 반드시 저 변태를 이겨 보이겠어.
“제자리 준비.”
세라가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한순간에 꼬꾸라졌다. 달릴 준비를 하는 다리 근육이 움찔거리며 신발이 모래알을 씹었다.
“승부 시작!”
“기간트리카 장갑!”
시작과 동시에 기합을 지른 비키가 류제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몸이 빛나며 슬렉터에서 학생용 기간트리카를 장갑시켰다.
마찬가지로 비키를 향해 달려가던 류제는 기간트리카를 장갑하면 지금까지 컨트롤했던 어빌리티의 틀이 어긋나는 경험을 했었기에 진지하게 덤벼오는 그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했다. 타이밍에 맞춰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그는 바로 상공으로 솟아 올라갔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는 듯 류제의 등 뒤에서 비키의 화염구가 비 오듯 쏟아졌다.
한순간에 흙먼지로 운동장의 시야가 가려졌다. 구경하던 학생들이 너도나도 일어나서 두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고 기웃거렸다.
“류제 군,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괜찮아. 쟤가 여기서 죽을 것도 아니고.”
“렌 군은 어쩜 그렇게 태연해? 무섭지 않아?”
“이런~ 한심한 싸움에 일일이 반응해 봤자 짜증 나기만 하지. 우리 류~제가 고작 비키한테 당하겠냐?”
일주일 동안 여러 가지 일에 시달리느라 피곤했던 재경은 해탈한 듯이 손을 내저었다.
유네는 저도 모르게 납득했다. 하기야 류제 군은 그때 맨손으로 비키 양을 막았는걸. 맞아, 그랬었지. 류제 군은 멀쩡할 거야. 렌 군은 정말 똑똑하구나!
초롱초롱 빛나는 유네의 시선을 뒤로한 재경은 두 사람의 대결을 지루하게 지켜보았다.
주인공이 히로인 비키와 처음으로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는 오늘 일도 게임 스토리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비키와의 정식 대결은 당연 대단한 이벤트겠지. 나랑은 하등 상관도 없지만.
저 대결에서 비키가 지는 바람에 류제한테 겁나 빡쳐있다가 류제가 잃어버린 펜던트를 찾아줘서 화를 푸는걸. 그게 비키 셀로니아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고. 너어어무 뻔해서 지루해 죽겠다. 난 언제까지 주변에서 간이나 봐야 하는 거야. 늘어지게 하품한 재경이 무릎에 턱을 괴고 까딱거렸다.
전술을 바꾼 비키가 양손을 불로 둘러싸고 근접전에 들어섰다. 둘은 체술을 이용하여 서로 치고받고 싸우기 시작했다.
비키는 공중전, 원거리전 말고도 근접전에도 소양이 있는지 적당히 하려는 류제를 자꾸만 부추겼다. 악착같이 따라붙는 비키를 보고 있자니 설렁설렁하다간 하교가 늦어질 것 같았다. 그러면 봉사 활동을 해야 하는 렌이 저녁 식사가 늦어지게 된다.
그건 곤란하지. 눈동자를 굴려 비키가 기습으로 날린 화염구를 확인한 류제는 피하는 척 아래로 이동했다가 순식간에 대범하게 치고 들어가 비키의 양 손목을 꺾어서 저만치 던져버렸다.
눈앞에서 날리는 화염구를 피할 수 있을 줄 몰랐던 비키는 운동장 끝부분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프로텍터의 판단으로 비키 셀로니아의 기간트리카 장갑이 해제되었다.
“거기까지. 승자, 류제 신리.”
“대박. 류제가 비키 님을 이겼어. 진짜 천재인가 봐.”
“어떻게 해. 비키 님이 안쓰러워.”
“류제 신리라고 했지?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인데. 저 정도면 체육대회를 기대할 수 있겠네.”
후우.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한 류제가 한숨을 쉬었다.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비키도 기간트리카 장갑을 해제했다.
비키는 이기기까지 했으면서 무시하는 태도를 일관하는 류제가 못마땅해 성큼성큼 다가와 몇 마디 쏘아주었다.
“네까짓 게 감히 날 이겼다고 자만하지 마. 이건 고작 모의 대결일 뿐이니까.”
“나는 별로―”
류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를 지나친 비키는 상처가 스친 팔을 붙잡고 비틀거리며 세라에게 향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아무리 렌 때문이라도 너무 심했나.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버렸네. 머뭇거리던 류제는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는 비키를 보다가 그의 친구들에게로 돌아왔다.
렌의 복수는 했는데 역시 사람을 때려눕히는 건 성격에 안 맞았다. 저 때문에 다쳤다니 마음이 쓰였다. 나중에라도 사과하는 게 좋으려나.
“류제 군! 무사해서 다행이다. 비키 양은 렌 군을 때려눕힐 정도로 엄청 강하니까 걱정했어. 난 다…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했지만!”
“흥, 꼴좋다. 저런 싸가지 없는 애, 나처럼 머리나 맞고 기절하는 쪽팔리는 꼴을 당했어야 했는데.”
“너무 그러지 마. 결국 내가 이겼잖아.”
“니가 이겼지 내가 이겼냐?”
툴툴툴. 재경이 감히 잘난 척을 해대는 류제의 옆구리를 쑤시며 입을 비죽거렸다.
오늘 수업은 시범 대결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교실로 돌아간 학생들은 가방을 챙겨 종례를 받은 후 담임 선생님께 인사하고 기숙사로 하교했다.
성급한 비키는 재경과 마주치기도 싫은지 어느새 먼저 가서 보이지 않았다. 재경은 유네와 류제와 함께 하교하기 위해 책가방을 들려는데 교무실로 돌아간 줄 알았던 세라가 재경을 불러 세웠다.
“오늘은 선생님이 일 때문에 바빠서 따로 확인을 못 합니다. 그래도 마지막 날인 만큼 초심을 잃지 말고 봉사 활동을 하도록 하세요.”
“헐, 오예!”
“땡땡이칠 생각 하지 마.시.구.요. 제가 나중에 제대로 확인할 겁니다. 알았죠?”
“당빠당빠 당근이죠. 제가 언제 땡땡이친 적 있어요?”
“전적이 많잖아요! 여튼 열심히 하시고 밥 맛있게 드세요. 비키 학생에게도 전달해 주시고요.”
“녭~”
대답만 잘 하지 재경은 오늘 땡땡이칠 생각 만땅이었다. 감시하는 선생님이 없는데 당연히 도망쳐야지. 하하하.
교실 문밖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은 빵끗 웃는 재경을 보고 또 왜 저러냐며 눈빛을 교환했다.
B동 기숙사 뒤 산책로 입구에서 헤어지기 전 류제에게 제 가방을 방에 갖다달라고 부탁한 그는 빨리 돌아갈 생각으로 꽉 차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에 발 도장을 찍었다.
오늘이 바로 비키의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가 뜨는 날이었지만 지금껏 비키를 봐온 바로 재경은 이벤트를 도와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내가 왜 욕을 먹어 가며 비키랑 류제를 이어줘야 하는데? 매사에 자존심만 세우고 사람 무시하는 히로인 따위 이쪽에서 사양이다.
산책로를 대충 뒤지며 쓰레기 같지 않은 쓰레기들을 모조리 쓸어 담던 재경은 늘 비키와 갈라졌던 갈림길에서 비키가 힘없이 걸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괜히 심술이 돋았다.
뭣 때문에 저렇게 성격이 비뚤어졌는지 알겠다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자기를 보는 것 같아서 재경은 답답했다.
“꼴좋다. 류제한테 지다니.”
뭔가를 보며 걸어가던 비키가 유난히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든 것을 황급히 숨겼다. 그것을 보지 못한 재경은 시비 걸기에 맛 들어서 얄밉게 비키를 놀려댔다.
“섈럐니얘 걔믄얘 이릐먜 먝칠햴 스 얪댸먜~!”
“무… 니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저리 꺼져!”
“저리 꺼져~래. 웃기고 있네. 류제한테도 지는 주제에 흥이다. 기간트리카 장갑 안 한 너는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가문의 복수를 하겠냐? 할머니 돼서도 못 하겠다.”
“말 다 했어?”
“내 앞에서는 오만 잘난 척은 다 하더니 결국 류제한테 지고 말이야. 맨날 셀로니아 가문의 이름에 어쩌구저쩌구. 그게 그렇게 중요… 으악!”
가문의 일을 들먹거리자 참지 못한 비키가 재경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재경은 한때 몸싸움 좀 해본 남자다.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는 주먹을 피하던 재경은 다리가 돌멩이에 걸려 그대로 자빠져 버렸다.
그 위에 올라탄 비키는 재경의 멱살을 잡고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까짓 게 우리 가족을 입에 담지 마.”
이국적인 녹색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마족에 대한 분노와 가족을 잃은 슬픔이다. 비키 루트를 공략한 적이 있는 재경은 셀로니아 가문에 일어난 비극을 물론 알고 있었다. 그깟 복수니 뭐니 그런 것 때문에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고 강박관념에만 시달려서 마음만 저렇게 혹사시키고 있지.
그게 안타까워서 한 말이지만 재경이 워낙 말재주 없고 성질머리가 사나워서 비키가 의도를 모르고 화낼 만도 했다.
“뭐야, 한 판 더 하자는 거냐? 오늘 선생님도 안―”
“흥, 손이 더러워졌어. 쓰레기 따위는 만지는 게 아니었는데.”
선생님도 안 계시는데, 라고 말하기 전에 비키는 재경의 멱살을 획 내팽개치고 제 담당 구역으로 향했다. 비키의 진지한 모습을 보고 말을 잘못했구나 후회하던 재경은 이어진 말을 듣고 그 생각을 전면 철회했다.
“야! 사람한테 막 쓰레기라고 그러면 안 된다. 내 말 안 들려?”
재경은 교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 생각도 못하고 멀어지는 비키에게 외쳤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젠장. 이벤트 날이 다가오니까 왜 이렇게 예민해? 알다가도 모르겠네. 그까짓 바보 류제한테 진 게 뭐 어때서. 사람이 질 수도 있지. 사람이 맨날 이기기만 하냐? 기껏 위로해 주려고 해도!
“하, 진짜.”
어찌 되었건 나는 이벤트 안 도와줄 거니까 알아서 하라지. 원래 내가 봉사 활동 중에 비키 셀로니아의 펜던트를 훔쳐서 숨기는 바람에 첫 번째 호감도 이벤트가 발생하는 거지만 난 비키의 펜던트를 훔칠 생각 없으니 이벤트는 쫑이야.
여섯 시가 되면 몰래 내려가기나 하련다. 혼자서 청승맞게 청소나 해라, 건방진 비키 셀로니아 같으니.
라고 투덜거리며 제가 담당하는 산책로로 향한 재경의 발자국 옆 높게 자란 잔디에 은색 펜던트가 잠시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