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재(취소선을 그어 지웠다.) 렌 지미 3. 류제 신리 (3/112)

2. 재(취소선을 그어 지웠다.) 렌 지미

3. 류제 신리

를 추가했다. 비키는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들어서 입을 앙다물고 심통을 부렸다.

아침에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것도 모자라서 반 학생들의 흥미까지 가져간 주제에 이제 감히 반장까지 노려?

왕녀님께서는 나랏일을 보느라 바쁘시니 당연 내가, 이 비키 셀로니아가 8반의 반장이어야 하는 거 아냐? 저런 야만인들하고 같은 선상에 이름이 올라가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당연히 반장은 나야. 쟤네는 부반장도 용납 못 해!

“또 있어? 없지? 그럼 투표한다.”

“웃기지 마!”

비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시선이 이번엔 비키에게로 향했다. 다른 학생들은 몰라도 저 두 사람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저 모자란 놈들한테 우리 반의 운명을 맡기고 싶어?”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모자라다니. 류제가 좀 모자라긴 해도 사람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재경의 순수한 철벽이 비키가 날린 화살을 기적적으로 류제에게로 꺾었다.

“나?”

아니, 왜 나만 모자라다는 말이 되는데. 고래 싸움에 가만히 있던 류제의 등이 터졌다. 내가 그렇게 맹해 보이나? 아침에도 렌이 나한테 은근히 똑똑하다고 그랬고. 은근히가 뭐야 은근히가. 게다가 이번엔 모자라다고?

“아니, 나는 별로 안 모자―”

“저런 야만인 원숭이랑 앞머리가 바보같이 길어서 눈도 제대로 안 보이는 변태한테 우리 반을 맡긴다고? 눈에 흙이 들어가도 싫어! 게다가 방심한 틈을 타 여자 가슴이나 주무르는 저 파렴치한 따위 어떤 흑심을 품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건 사고―”

“야, 야만인 원숭이라니. 말 다 했냐? 그리고 사람 개성 무시하냐? 너는 유행 지난 촌스러운 포니테일 하고 있으면서 누구더러 바보 같대? 류제가 암만 넘어지다가 여자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얼빠진 바보라도 인신공격하는 너보다는 낫거든?”

“난 바보가 아니―”

“초…초…촌스럽다니 너 지금 말 다 했어? 누가 누구더러 촌스럽다는 거야? 촌스러운 건 절대로 유행 안 할 네 오 대 오 앞머리지, 이 교양 없는 천박한 야만인아!”

“뭐야, 이 성격 나쁜 여자야! 네가 그렇게 성질머리가 괴팍하니까 친구가 없는 거 아냐! 너 남자 친구 있었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실은 모태 솔로 아냐?”

그냥 부아 치밀게 만들려고 한 말이지만 그 말이 가슴을 푸욱 찔렀는지 크게 동요한 비키가 어깨를 치켜들고 부들부들 주먹을 떨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재경이 남 시비 터는 재주는 기깔 나서 썩소와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식당에서 나한테 시끄럽니 어쩌니 했지만 그거 친구 없어서 부러워서 그런 거잖아. 혼자서 밥을 먹으려니 짜증 나 죽겠는데 내가 친구랑 떠들어대고 있어서 화난 거 아냐? 아. 아아! 서얼마 오늘 아침에 일찍 온 것도 일찍 오면 친구를 빨리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건가~?”

약 오르게 웃으며 사람을 놀려먹는 것이 보기만 해도 가증스럽다. 저 둘 싸움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류제는 재경이 말한 게 다 렌 본인에 대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학 개그도 정도가 있지. 렌, 오늘 아침에 일찍 온 이유는 너한테 해당되는 말이잖아.

하지만 재경의 말대로 비키 셀로니아는 재경처럼, 재경과 똑같은 마음으로 아침 일찍부터 교실에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던지라 웃어넘길 수 없었다.

재경이 마음에 두고 있던 부분을 찔러 공격하자 그녀의 얼굴이 머리 색만큼이나 새빨개졌다. 주전자처럼 머리에서 김이 나오는 것 같다.

덕분에 반에 있는 사람들은 깨닫고 말았다. 아, 비키 셀로니아는 모태 솔로에 친구 없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친구가 없어? 모태 솔로도 아…아니거든? 감히 이 셀로니아 가문을 모욕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당장 운동장으로 나와! 기간트리카 대결로 주제 파악을 시켜주지.”

“정곡이냐? 흥. 찔리면 찔리는 거지 내애가 왜 너랑 기간트리카 대결을 해야 하는 건데?”

드디어 렌 지미가 가지는 메인이벤트인 비키와의 기간트리카 대결 차례가 돌아왔다.

원래 렌 지미였다면 같이 흥분해서 싸우러 나갔겠지만 난 그냥 렌 지미가 아니라 신재경으로 강화된 렌 지미라니까. 후후훗. 그런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 꼴사납잖아.

“감히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를 망신 주다니 네까짓 땅꼬마 때문에 마족에게 대항했던 셀로니아 가문의 이름이 먹칠 됐어. 나는 망신당할 긍지조차 없는 가문인 너와 다르다고! 절대로 용서 못 해. 당장 운동장으로 나와!”

“뭐어라고오?!”

여유롭게 비키를 약 올리던 재경이 손에 들고 있던 분필을 아드득 부러뜨렸다. 쉽게 도발되지 않는다고 자만한 것이 방금 전이다.

세상에 각기 사람들에게 건들면 안 되는 영역이 있었다. 재경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키와 집안 이야기였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고 작은 키에 민감한 재경은 비키의 오만한 발언에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가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었던 중학생 때처럼 입에서 불을 뿜었다.

“당장에 붙어주지,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난 여자라고 안 봐주니까 말이야!”

이 신재경, 시비 건 놈 면상에 죽빵을 꽂아 넣지 않는 한 분이 풀리지 않는 사람이야. 지금은 얌전히 있지만 과거에는 한 쌈박질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라고 꼴사나울 정도로 쉽게 도발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재경이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둘 다 서로에게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을 건드리는 바람에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맛이 갔다.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새우 등 터지다가 어느새 관전하게 된 류제가 짐짓 고민했다. 근데 도대체 기간트리카 대결이 뭐기에 저래. 아까부터 아무도 설명 안 해주는데.

장소를 바꾸어 운동장 아래.

모래 먼지가 대결을 위해 운동장으로 내려간 비키와 재경 사이에 불어 닥쳤다.

비키 셀로니아와 렌 지미의 기간트리카 대결은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정해진 스토리대로다. 여기서 비키를 이기면 난 완전 인기인이 된다 이거지.

이렇게 된 이상 비키 대신 반장 자리를 류제한테 주고 내가 부반장을 해주마. 누가 뭐래도 나는 최강의 인기인이 될 것이다!

“비키 님의 기간트리카 대결을 볼 수 있다니 행운이야! 셀로니아 가문은 마족 토벌에 앞장섰던 것으로 유명하잖아. 쟤 바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걸 받아들여? 비키 님이 공개적으로 망신 주겠다 선언한 건데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그러게. 황홀한 불꽃을 볼 수 있다니 우리만 이득이지.”

“렌 군……!”

아니, 그러니까 기간트리카 대결이 뭐냐고. 반 학생들 모두 창문에 매달려 운동장에 서있는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가운데 류제만 어리둥절해서 소외감을 느꼈다. 왜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는 거야. 뭔지 모르니까 섣부르게 말릴 수가 없잖아.

“룰은 간단해. 상대를 쓰러트리는 사람이 이긴다.”

“잔말 말고 덤벼. 반은 내가 접수하겠다. 우하하하.”

진짜 삼류 악역처럼 웃은 재경이 자세를 잡았다. 나도 이거 미니 게임으로 계속 훈련해서 어떻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기간트리카 대결 따위는 껌이지.

팔랑팔랑 목련 꽃잎 하나가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둘 다 그 목련 잎을 노려보았다. 황야의 무법자가 권총 대결을 하는 듯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아슬아슬 바람에 날릴 듯이 휘청거리다가 목련 잎이 살포시 모래 위에 안착했다. 둘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외쳤다.

“기간트리카, 장갑(裝甲)!”

그러자 슬렉터에서 사용자의 어빌리티를 인식하고 학생용 대마족 병기를 기동시켰다.

버스도 없는 판타지 세계관 주제에 무슨 형편 좋은 오버 테크놀로지 기술로 질량 보존의 법칙을 싸그리 무시한 건지 작은 손목시계 같은 것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몸에 기간트리카를 장갑시켰다.

나라카국의 마족이 출현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대마족용 외골격 제트 슈트. 그것이 바로 기간트리카였다.

그 이야기를 주절주절 제 친구에게 설명하는 옆자리 여학생에게서 들은 류제는 몸에서 뾰로롱 빛이 나며 몸에 기간트리카가 착용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저 둘이 대마족 병기를 사적인 싸움질에 이용하고 있다는 말 아냐. 괜찮은 거 맞아? 듣자 하니 저 여자애 실력이 장난 아닌 거 같던데. 렌, 실은 엄청 강한 건가? 에이,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걸.

“마족과 인간의 육체적 힘은 비교가 안 되니까. 기간트리카란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어빌리티를 이용해 마족을 상대하려고 한 인간 진화의 발자취라 할 수 있지. 실제로 보니까 정말 멋지다. 군대에서 쓰는 건 얼마나 더 멋질까?”

아니, 멋있고 어쩌고를 떠나서 저렇게 멋대로 대결하면 나중에 선생님한테 혼나는 거 아냐?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저거 진짜 위험하지 않아?

니냐롯트 왕녀가 그런 그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은색 눈동자를 흘기더니 교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경잡이 미나 플로리아가 고개를 돌려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는 그들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렌 지미, 널 배제하겠다!”

“후회하지나 말아라… 우아아아! 자…잠깐, 잠깐!”

등과 허리에 달린 부스터로 비키를 향해 달려가던 재경은 그저 중학생 때처럼 상대방을 죽도록 패면 될 거라고 생각하다가 비키가 공기 중에 엄청난 크기의 화염구를 띄우고 자신에게 날리자 안색이 싹 변했다.

화염? 어…어빌리티? 맞다, 쟤 어빌리티 불이었지! 자… 나, 나, 내 어빌리티 모른단 말이야. 타임! 나 이 세계관에 떨어진 지 이제 고작 하루 지났거든? 내 어빌리티 뭔지 몰라! 창문에서 구경하고 있는 누군가야. 날 알고 있다면 제에발 내 어빌리티가 뭔지 외쳐주지 않을래?! 내가 이렇게 빌게! 기왕이면 크게 좀 외쳐줘!

“문답무용. 죽어라!”

“우아아악!”

재경이 화염구를 피하기 위해 급하게 커브를 꺾었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똑같은 학생용 기간트리카지만 어빌리티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투력은 달라졌다. 비키 셀로니아의 어빌리티 공격 활용 능력이 10점 만점에 9라고 치면 어빌리티를 모르는 재경은 0에 수렴했다.

암만 재경이 맨몸으로는 한때 쌈박질 좀 했다고 하더라도 기간트리카로 똑같이 신체 능력이 향상된 그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분명 이길 자신 만만했는데 미연시 내용처럼 히로인을 괴롭히는 삼류 악당 렌 지미가 되어버린 재경은 주인공에게 기간트리카에 대한 부연 설명을 도울 캐릭터로서 화려하게 인트로를 장식하며 비키 셀로니아의 화염구에 맞고 운동장 반대편으로 처박혀 꽥, 비명을 질렀다.

이거 죽어. 진짜 죽어. 암만 이 기간트리카가 웬만한 공격에는 꿈쩍도 않는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눈앞에서 화염구가 정통으로 날아오다니 조오올라 무섭잖아. 진짜로 사람을 태워 죽일 셈이냐!

“으악!”

기적적으로 몸을 일으켜 두 번째 화염구를 피한 재경은 차라리 활공을 하자 판단하고 부스터를 움직여 하늘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것조차 어렵다.

저 화염구도 문제지만 기간트리카도 졸라 무섭다고! 안전벨트 없이 놀이기구 타는 기분 아냐? 높은 데는 왜 이렇게 무서운데? 이 떨어지는 기분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다.

게임이랑 너무 달라. 이딴 걸 어떻게 컨트롤하는 거야? 불친절해! 우아아악!

재경이 불평한 것들을 컨트롤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제립학교지만 첫 경험을 호되게 하는 재경은 기간트리카의 토악질 나는 제동력에 손을 못 쓰며 공중을 빙글빙글 돌기만 했다.

비키 셀로니아는 자기 가문에 군용 기간트리카가 몇 개나 있으니 어릴 적부터 경험이 많았다지만 재경이 직접 장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빌리티를 차치하더라도 당연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아아, 젠장. 게임에서 익숙해졌다고 자만하는 게 아니었는데. 우아악! 우아아악!!

“감히 내게 친구 없다고 했겠다. 감히 왕녀님 앞에서 날 모욕했겠다! 저승에서 그 죄를 반성해라!”

“학교 폭력 반대!”

컨트롤이 되지 않는 기간트리카에 휘둘리며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던 재경은 비키의 세 번째 화염구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땅에 처박혔다.

제기랄! 이거 진짜 스토리대로 내가 지게 되는 건가? 내가 시비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미니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가능성은 보여 줘야 할 거 아니야, 이 망할 불친절한 빙의 같으니라고.

암것도 맘대로 못할 거라면 그럼 나 왜 여기에 빙의된 겨! 이 애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애초부터 이길 수가 없는 애잖아!

“마무리를 지어주지!”

대결을 받아들였으면 봐주지 않는다. 비키는 주먹에 화염을 휩싸 불 주먹을 만들었다.

어제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저 얄미운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 넣지 않으면 분이 안 풀려. 감히 우리 가문을 모욕하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 난, 모태 솔로가, 맞…아니라고!

부스터를 최대출력으로 이끌어내 먼지가 자욱한 땅으로 주먹을 내리꽂은 비키는 그 흙먼지 사이로 누군가가 자신의 주먹을 붙들어 잡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기간트리카의 최고 속력을 누군가가 고작 맨손으로 정지시켰다. 브레이크를 밟은 듯이 땅이 긁히며 뒤로 미끄러졌지만 터무니없는 힘이었다.

렌 지미. 그렇게는 안 보여도 실력자인가? 날 봐주고 있었던 거야? 감히?!

브레이크가 멈추고 곧 자욱했던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화염구를 맞으면서 프로텍터가 풀려 버린 재경이 머리에 커다란 혹이 난 채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녀를 저지한 것은 렌 지미가 아닌 다른 이의 손이었다. 비키의 눈이 커다래졌다. 철마저도 녹이는 뜨거운 주먹을 기간트리카도 장갑하지 않은 채 고작 맨손으로 막고 있는 그는 앞머리가 바보같이 길어서 눈이 보이는지도 모르겠는 류제 신리였다.

그의 앞머리가 바람에 날려 그의 푸르고 선한 눈동자가 바로 보였다. 앳되지만 이목구비 뚜렷하고 의지가 강인하다.

“적당히 해. 어디까지 할 셈이야?”

프로텍터가 해제된 채 무방비하게 떨어지는 재경을 목격하고 창문에서 단숨에 뛰어나와 비키를 막은 그는 다른 손으로는 재경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감히 기간트리카 대결에 끼어든 데다가 자신의 혼신의 힘이 담긴 주먹을 혈혈단신으로 막자 자존심이 상했던 비키가 샐쭉한 눈매를 찌푸렸다.

그러다 뒤늦게 류제의 품에 안긴 재경의 기간트리카 프로텍터가 풀려 장갑이 해제되고 기절까지 한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비키는 장갑을 해제하고 어빌리티를 취소했다. 사뿐하게 땅에 착지한 그녀는 계속 손목을 놓지 않는 류제를 강하게 뿌리쳤다.

“네…네가 아니라도 멈추려고 했어!”

실은 류제가 멈춰주지 않았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한 것을 비키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웠다. 상대방이 약해서 공격도 못 피하고 정통으로 맞는 것을 봤는데도 복수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흐려져서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고 말았다.

저 짜증 나게 당당한 태도 때문에 당연히 기간트리카를 조종할 줄 아는 놈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면서 나한테 덤볐다니. 이건 다 쟤 잘못이야. 쟤가 그런 오해를 하게 한 거잖아. 난 잘못하지 않았어.

“안 그래 보이는데 너도 참을성 없구나.”

류제가 비키의 첫인상부터 느꼈던 점을 덤덤하게 말했다. 바람이 잠잠해져 다시 가라앉은 앞머리 때문에 류제의 푸른색 눈동자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류제는 그저 비키와 렌이 서로 닮은 부분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비키는 자신을 탓하는 줄 알고 울컥 주먹을 쥐었다.

“뭐야, 내가 나쁘다는 거야?! 이건 다 쟤가……!”

“자. 거기까지.”

어느새 온 건지 키아나트리체 여성용 정장을 입은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가 두 사람의 어깨를 짚으며 음산하게 속삭였다.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등 뒤로 새까만 오라가 무럭무럭 풍겨 나왔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걸.까.요~?”

웃는 모습이 무섭다는 것을 류제와 비키는 그때 처음 알았다. 류제는 딱히 아무 잘못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혼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재경이 19금 잡지를 들켰을 때처럼 비키에게 어마어마한 잔소리를 쏟아냈다.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정식으로 기간트리카 기동 방법도 안 배웠고 입학식도 치르지 않은 1학년이 감히 선생님 허락도 없이 대결을 펼칠 수가 있나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설립 이래로 별 이상한 사건들을 다 봤지만 이런 무모한 짓은 또 처음이네요.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비키 셀로니아 학생! 당신은 지금 굳이 학교에서 기간트리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자만하는 겁니까? 선생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그게…….”

“이렇게 무분별해서야 당신이 마족 토벌에 앞장선 고귀한 셀로니아 가문의 후손이라는 말이 거짓말 같군요! 세상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상대로. 죽일 셈이었어요? 이런 아이를 상대로 진지하게 나서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풀려요?”

“하지만 저 애가 먼저……!”

“저도 니냐롯트 양에게 사정은 다 들었습니다. 내 말이 틀렸나요, 비키 셀로니아 학생!”

다 맞는 말이라서 비키는 아무런 반박도 못 했다. 류제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헤롱헤롱 기절한 재경을 어떻게든 깨워 보려고 했다. 비키에게 더 잔소리를 하려다 선생님이 기절한 재경을 보고 어디 보자며 서둘러 다가왔다.

목숨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상처는 없었지만 세게 부딪혔는지 머리에 큰 혹이 생겼다. 기간트리카 대결에 맨몸으로 끼어들 생각까지 한 류제도 문제라 세라 밀로니는 이 말썽쟁이들을 1년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힐링.”

그녀의 어빌리티가 여기서 빛을 발했다. 류제가 안고 있는 재경의 머리에 어빌리티를 발현하니 혹이 점점 수그러들었다. 상처가 단순해서 망정이지 크게 났으면 그녀의 어빌리티에도 한계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여간 어제부터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이네요. 류제 학생. 당신은 다친 곳이 없죠? 하아… 당신도 다음부터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간트리카 대결에 맨몸으로 끼어드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행동이에요. 이런 말 할 처지는 못 되지만… 렌 학생을 양호실로 데려다주시겠어요?”

“아, 네. 맡겨주세요.”

“비키 학생은 렌 학생이 깨어나면 둘이서 제게 찾아오도록 하세요. 선생님 허락도 없이 기간트리카 대결을 하는 것은 중대한 교칙 위반입니다. 잘못했다간 목숨이 위험할 뻔했어요. 교직원 회의를 열어 둘은 마땅한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크게 풀이 죽은 비키는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돌아갔다. 니냐롯트 왕녀와 세라가 그녀를 한심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니 비키는 모든 원인이 다 렌 지미의 탓처럼 느껴졌다.

재경을 등에 업은 류제는 렌 대신 비키와 한번 날 선 시선을 교환하고는 축 늘어진 이의 몸무게를 느끼며 양호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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