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2)
내일이면 드디어 친구가 잔뜩 생긴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한 재경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컴컴하고 낯선 천장을 퀭한 눈으로 응시하지만 그가 진짜 보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성능 나쁜 뇌에서는 내일 있을 사건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열심히 돌아갔다.
입학식 스토리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내일이 되면 학교 게시판에 반과 이름이 뜬다. 배정된 반을 확인하고 교실로 들어가기 전 류제, 주인공은 첫 번째 히로인인 빨간 포니테일… 이름… 아까 들었는데.
아, 비키. 비키 셀로니아와 약간의 사고가 발생한다. 비키와 파렴치한 자세로 부딪혀버린 류제는 뺨을 얻어맞는 바람에 비키와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이 부분 체크. 역시 암만 미연시에서 자주 일어나는 이벤트라지만 초반부터 여자애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사고는 없는 편이 좋을 거다. 류제가 뺨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불쌍한걸. 친구로서 말려주는 게 좋겠지?
그 사건 이후 아침부터 반장 선거가 있었다. 메인 히로인인 왕녀는 바쁘기 때문에 학급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 반장에는 흥미가 없다.
여기도 체크. 그래서 대신 비키가 반장이 되려고 하는데 유네가 류제를 추천하는 바람에 비키가 류제와 반장 선거에서 붙게 된다.
그 과정에서 끼어든 내가 비키와 기간트리카 대결을 펼치는 거 같은데. 정확한 과정이 생각이 안 나네. 그냥 겁나게 깐죽거리다가 평범하게 정의 구현 당했었나?
후후후. 안됐지만 비키 셀로니아, 나는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없단 말이지. 정의 구현 따위 없이 기간트리카 대결로 멋지게 등장해 줄 테다.
내가 비키를 이긴다면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겠지? 나는 보통의 렌 지미가 아니고 신재경으로 강화된 렌 지미란 말야?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이기는 건 껌이다. 하하하. 기간트리카 대결 따위 우습군.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셀로니아 가문 출신 귀족을 이긴 대스타가 되어서 무수한 악수 요청을 받게 되겠지.
물론 담임 쌤한테 멋대로 대결을 펼친 벌은 받게 되겠지만 인기를 얻으려면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것도 비키 셀로니아의 호감도 이벤트로 연결되니 인기도 얻고 호감도도 챙기고 일석이조인걸.
“흠… 호감도라.”
히로인 공략에 대해 내내 생각해 봤지만 일단 혹시 모를 전쟁 패배 이벤트를 저지하기 위해서 히로인들의 호감도를 모두 3으로 맞춰놓는 과정은 중요한 것 같다.
나도 호감도 이벤트를 계기로 비키랑 친구가 돼서 남자 친구에 대해 캐물어야겠어. 설마 비키 걔, 히로인인데 당장 남자 친구가 있지는 않겠지. 어어, 그럼 설마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남친을 사귀었다고? 짜식이, 부럽네!
…라는 이런저런 어이없는 생각으로 밤을 꼬박 새워버린 재경은 까치 소리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한숨도 못 자 퀭하기는 했어도 아무렴 어떠냐. 이제 곧 더 많은 친구가 생길 텐데 잠은 대수롭지 않았다. 상큼하게 기상한 재경은 누구보다 빠르게 학교 갈 준비를 마쳤다.
“렌… 입학식 날 이런 시간에 등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얌마, 첫날부터 지각할 거냐? 안 그래도 어제 담임 쌤한테 점수 까였는데 부지런한 모습 보여 주면 좋잖아.”
“어제 담임 선생님께 점수가 까였다고? 왜?”
“그야 렌 가방에서 불건… 으악!”
“아.무.것.도. 아냐. 말조심해 짜샤. 그거 내 거 아니라고 했잖아.”
류제의 고자질에 유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재경은 남자인 척하지만 실은 여자인 유네에게 불건전한 잡지 운운하기 뭐해서 류제의 발을 꾸욱 밟아 입단속을 시켰다. 발이 아파 콩콩 뛴 류제가 한발 늦게 두 사람을 뒤쫓아 갔다.
현재 시각 아침 7시 30분. 누구보다도 빠르게 학교로 향하는 재경의 발걸음이 호쾌했다. 잠을 못 자서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겼어도 기분이 좋았다.
“학교에 가는 게 그렇게 좋아?”
룰루랄라 흥얼거리는 친구의 콧노래를 들은 류제는 이상한 놈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어엉?”
“이렇게 이른 시간에 등교한다고 해도 선생님이 알아줄까도 모르겠는데. 여자 친구가 그렇게 사귀고 싶어? 열정이 넘치는 건 좋지만서도.”
“얌마, 세상에 여자 친구만 있냐. 친구도 사귀어야 할 거 아냐. 생각을 해봐라, 이 바보야. 만약 우리가 늦게 반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봐. 다른 애들은 서로 친한데 우리만 겉돌겠지. 얼마나 다가가기 어렵냐? 게다가 여학생이잖아. 남자인 우리가 다가가기 힘들잖아. 좀 더 델리케…데…데…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 안 들어?”
섬세라니. 어제는 섬세함 하나 없이 여학생이랑 잘만 이야기했으면서. 류제는 어제 비키 셀로니아와 급식실에서 사납게 언쟁했던 렌을 떠올리며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재경은 어제 그 일은 특별한 사건으로 치부하지 않는 모양이다.
“렌 군, 섬세한 접근이라니?”
남학생 입에서 나오는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긴 남장 여자 유네가 물었다. 재경이 것도 모르냐는 듯이 쯧쯔 혀를 찼다.
유네는 키도 그나 류제보다 훨씬 작은데 남자 교복까지 입고 있으니 전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덜 자란 애처럼 보이지. 먼저 크게 헛기침을 한 재경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잘 들어. 우리가 일찍 반에 들어가 있으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여학생들이 한 명씩 반으로 들어오겠지?”
“으응, 그러겠지.”
“아하, 여학생이 다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다가가기 편하다는 의미야?”
“오. 바로 그거야. 류제 너 은근히 똑똑하네.”
“으…은근……?”
재경이 포인트를 딱 짚은 류제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찬을 했다. 류제는 자기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나, 충격을 받았다.
그게 끝이 아니라며 재경이 쉴 틈 없이 다른 이유를 추가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겠지. 남학생은 세 명밖에 없으니까 의견을 표출하기가 힘들다고. 그런 와중에 조금이라도 발언권을 얻으면 좋잖아.”
“와아,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니. 렌 군은 정말 똑똑하구나.”
“와핫핫핫!”
내가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 어제 밤새 천장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친구를 사귈 수 있을지 아주 멋들어지게 계획했단 말이지! 플랜1부터 10까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용 가능하다고.
나 혼자서 하는 것보다 사람이 많은 쪽이 덜 부끄러우니까 내 계획에 친히 너희를 동참시켜 주마. 너네도 겸사겸사 친구 생기니까 좋잖아.
“사람을 사귀려면 그런 귀찮은 것까지 생각해야 하는구나.”
“얌마! 너희들이 안일한 거야. 우리는 지금 야생 왕국 세렝게티로 향하는 거라고. 이 정도 준비야 당연한 거 아니냐?”
“세렝……?”
학교로 들어와 양말 신은 발로 도도도 바닥을 쓸며 1학년 8반 교실로 향한 삼인방은 친구를 사귀는 법에 대해 열렬히 강의하는 재경의 말을 경청하며 앞으로 다닐 학교를 구경했다.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는 재경이 보기에는 좋은 시설을 가진 한국 사립 고등학교처럼 보였다. 그야 이 미연시를 만든 사람이 한국인이니까 그런 거겠지. 이런 이세계 오버 테크놀로지 세계관 같으니라고.
근데 게임 개발자야, 생각을 해봐라. 근현대 유럽에 이런 학교가 있었겠냐? 고증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거냐고. 판타지풍의 학교가 왜 한국 고등학교 느낌이 나는 건데? 나야 친근하고 좋기는 하다만. 재경이 쪼잔하게 남의 상상력을 상대로 태클을 걸었다.
“1학년 8반. 렌 지미. 류제 신리……. 아, 진짜 나도 있네! 유네 나르타. 에헤헤… 렌 군이 같은 반이라고 했지만 내심 걱정했거든. 혹시라도 혼자 떨어지면 어쩌나. 나… 난 소심하니까.”
“별 쓸데없는 걱정을 다 하네. 야, 너 나 못 믿냐?”
기고만장해진 재경은 까치발을 들어 게시판을 확인하는 유네에게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거들먹거렸다. 친구를 못 믿다니! 유네가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친구에게 그런 거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경은 앞으로 날 존경하라며 쾌활하게 받아쳤다. 다가올 학교생활이 기대되어서 아무렴 좋았다.
그때 류제가 신발장에서 다른 이의 신발을 발견했다.
“누가 우리보다 먼저 온 모양인데?”
“그게 정말이야, 류제 군? 이런 이른 시간에 온 사람이 있다고?”
“누가 와?”
재경이 그 부지런한 사람 얼굴 좀 보자며 쿵쾅쿵쾅 발을 굴리며 먼저 교실로 다가갔다. 누가 감히 내 아이디어를 멋대로 강탈해 가는 건데?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차례대로 친구를 사귀겠다는 아주 멋지고 대단한 생각은 내가 제일 먼저 고안한 거라고!
…이랄 것도 없이 먼저 왔으면 먼저 친해지면 된다. 아침 댓바람부터 친구가 생길 생각 만땅인 재경이 미닫이문을 벌컥 열었다.
“짜샤, 안녕. 일찍 왔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텅 빈 교실에 울리는 메아리였다. 교실 안에는 가방이 하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을 뿐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먼저 온 것은 맞으나 잠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재경은 티가 나게 풀이 죽어서 입술을 주욱 내밀었다. 기껏 용기를 냈더니 시시하게.
“잠깐 어디 갔나 봐.”
“나도 눈 달려서 알아.”
“그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까 급하게 나온다고 볼일을 못 봤거든.”
“쾌변해라~”
“…푸흣.”
“자…작은 거거든? 렌, 너 때문에 그런 거잖아.”
변명하는 류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가 반에 들어서자마자 볼일을 보러 가는 이유는 아침 댓바람부터 빨리 챙기라고 렌이 시끄럽게 구는 통에 화장실을 못 가서였다. 유네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어댔다.
그러고 보니 유네는 남장 여자니까 화장실도 남자 화장실을 가겠지? 기숙사는 개인용 화장실이 딸려있지만 학교에서 어쩔 생각이야?
음… 뭐, 지가 어련히 잘 하겠지만. 근데 화장실 이야기에 너무 웃는 거 아냐?
“후후후후…….”
“똥 이야기가 그렇게 재밌냐?”
“아앗… 그… 아니, 난 친구가 별로 없어서 이런… 그… 소소한 이야기 못 해봤거든. 되게 두근두근거리네. 새로운 친구도 이 책상도 의자도 칠판도 너무너무 신기해서 가슴이 막 뛰어.”
“흥, 촌뜨기네. 여자애들 앞에서는 촌티 내지 마라.”
자기는 아닌 듯 건방을 떨면서 유네의 앞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지만 재경도 오늘부터 시작되는 고교 생활이(과연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가 고등학교와 같은 의미일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떨렸다.
유네의 말이 격하게 공감 가지만 대놓고 동의하기엔 이미지가 실추될까 부끄럽다. 재경은 유네 몰래 어제 연습했던 연습 문장을 반복했다.
“나…나랑 치…친…친구가 도…되…….”
바로 그때, 바깥 복도에서 굉장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이 톤의 여자 비명이다. 교실에 있던 두 사람이 모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무, 무, 무슨 일일까?”
“낸들 아냐. 젠장, 내 파란만장한 고교 생활을 방해하지 말라고! 류제 그놈은 아직 화장실에 있나?”
우물쭈물거리는 유네와는 다르게 재경은 망설임 없이 의자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 벌써 서큐버스가 활동하기 시작한 것인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왔는데? 걘 수학여행쯤부터 류제에게 찝쩍거리잖아. 제발 귀찮게 만들지 마라!
“이…이 변태가! 당장 일어나지 못해! 감히 넘어지는 척 내 가슴에 손을 대?”
“미안해. 진짜 고의가 아니었어. 너도 봤잖아.”
비명이 들린 곳으로 뛰어가니 그곳에서는 재경이 전날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던 ‘주인공이 히로인과 부딪혀 가슴을 만지는 이벤트’가 멋대로 발생해 있었다. 그것도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비키 셀로니아 본인과.
뺨을 맞을 류제가 불쌍해 일부러 그를 이런 이른 시간에 학교에 데려와 비키에게서 격리시켜 놓았는데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행동이었다. 재경이 류제를 위한 애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이긴 개뿔이. 스토리대로 제대로 가서 문제다.
곧 재경이 예견했던 대로 비키의 손바닥과 류제의 찰진 뺨이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재경이 혀를 찼다. 이거 설마 회피해도 무조건 해당 이벤트가 발생하는 타입의 빙의인 건가? 에이잉,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건 이거대로 별로인데.
아니, 비키 쟤는 왜 아침 댓바람부터 학교에 와서 난리래. 덕분에 얼굴 말고는 볼 게 없는 류제의 얼굴에 빨간 손바닥 자국이 났잖아.
얘 좀 봐. 앞머리가 쓸데없이 길어서 보이는 게 코하고 입밖에 없는데 그 얼굴에 손바닥 자국이 반절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봐. 얼마나 짠하냐?
저 푼수는 왜 넘어지면서 여자애 가슴에 골인한 건지. 역시 미연시 주인공은 행동부터가 달라요.
“최악이야!”
류제 신리의 뺨을 시원하게 때려버린 비키 셀로니아는 재경이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말총머리를 들썩거리며 교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교실 미닫이문이 큰 소리로 닫히자 안에 있던 유네가 히이익, 놀라며 우당탕 책걸상과 함께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내가 비장하게 나와서 유네만 솥뚜껑 보고 놀랐네.
“괜찮냐?”
“묻지도 마.”
침울해진 류제가 재경이 내미는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얼한지 화장실에서 손바닥 자국이 남은 볼을 물로 식혀 보는 류제의 모습이 불쌍하다.
“꼭 하지 말란 짓을 해요.”
“……?”
“볼이나 식혀라.”
류제가 말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해도 재경은 피식 웃으며 교실로 돌아갔다.
풀죽은 류제가 쫄래쫄래 재경의 뒤를 따랐다. 교실에 들어서서 비키 셀로니아와 어색한 신경전을 벌인 류제는 렌의 뒷모습을 보다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결국 아침 댓바람부터 학교에 온 비키 셀로니아의 목적은 모르는 채로 시간이 흘렀다.
등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창가 맨 뒤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세 사람은 아닌 척 딴 곳을 쳐다보다가 누군가 문을 치는 소리에 옆을 힐끗거렸다. 드디어 1학년 8반에도 교실 미닫이문이 열렸다.
“왔어……! 렌 군, 왔다고!”
“으악. 젠장. 떨려.”
“…….”
유네와 재경과 류제가 파도타기처럼 순서대로 고개를 돌려 교실 문을 스캔했다. 왁자지껄한 수다와 함께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교실로 입성했다.
새로운 교실 분위기를 어색해하며 한둘씩 수줍게 들어올 줄 알았던 여학생들이 깔깔거리며 우르르 들어오자 재경은 패닉에 빠졌다.
내가 원했던 그림은 이게 아닌데. 뭐 이렇게 한꺼번에 들어와? 이래선 친한 척 인사하기 힘들잖아. 내가 의도했던 것들은 왜 죄다 빗나가지?
내가 친구로서 류제의 체면 좀 세워준다고 비키랑 시간대를 틀어도 이벤트가 발생하고, 친구를 좀 사귀어보겠다고 밤새 계획을 짰는데 빗나가고. 너무한 거 아냐?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난 다른 건 몰라도 수두룩 빽빽 모여있는 여학생들한테는 다가가기 힘들단 말이다. 부끄럽잖아!
중학교 시험 칠 때처럼 짝꿍 없이 일렬로 나열된 책상에 창가 쪽 맨 뒤부터 순서대로 앉아있던 유네, 재경, 류제,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남학생(?) 삼총사는 계획이 죄 수틀린 비상사태에 이마를 맞대고 긴급회의에 들어가야 했다.
아침에 했던 이야기와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새로운 접근법을 시도해야 하는 류제와 유네는 리더 격인 재경에게 시선이 향했다.
그런 그들에게 여학생 무리가 먼저 다가왔다. 히로인들이 아닌 그냥 평범한 반 학생들이다.
얼굴을 반절 가리는 앞머리를 가진 류제와 부루퉁한 표정의 오 대 오 앞머리 재경, 다른 이들의 시선에 어쩔 줄 모르는 푸른 꽁지머리 유네를 둘러싼 그녀들은 익숙하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들의 두뇌인 재경의 사고가 정지되는 바람에 이 비상사태를 해결하지 못한 그들은 적진에게 둘러싸여 때아닌 고역을 치렀다.
“어쩜. 우리 반에 남자는 너희가 다야? 어디서 왔어? 어빌리티는 뭐야?”
“…안녕, 난 ‘강화’야.”
“너 진짜 조그마하다. 나보다 더 작은 거 아냐? 무슨 남자가 이렇게 키가 작아? 성장기야?”
“으 그게…….”
“야, 너는 이름이 뭐야?”
이게 아냐. 이건 내가 기대했던 이미지가 아니다.
재경은 아침 햇살이 쬐는 한적한 교실 안, 수줍게 독서하는 여자애에게 먼저 다가가 사근사근하고 쭈뼛쭈뼛거리며 부끄럽게 말을 트는 청춘 같은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상상과 너무 달랐다. 다 좋았는데 재경이 정원이 23명인 교실에 오직 3명밖에 없는 남자들에게 여자애들의 관심이 쏠려버릴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이다.
류제는 관심을 보이는 여학생들이 귀찮아 적당히 이야기하며 재경의 상태를 살폈다.
소심한 유네는 키가 작다는 말에 그야 여자니까 그렇지! 라는 속내를 숨기며 햄스터처럼 입을 다물었다. 유네는 여학생들이 무서웠다.
렌 군! 뭐라도 좀 해봐.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시끄러. 몰라!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뭐 이렇게 호기심이 많은 인간들만 모아놓았어? 왜 남의 책상에 손을 기대는 거야? 날 우습게 보냐?
어빌리터가 이렇게 많았구나. 그나저나 렌은 어디 아픈가? 아까부터 가만히 있는데.
“왜 입을 다물고 있어? 저기, 말 좀 해봐.”
이 분위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던 재경이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짜증스럽게 그들을 제친 재경은 미닫이문을 열어 바깥으로 나갔다.
“쟤 뭐야. 내가 뭐 잘못했나?”
“몰라. 그보다 너희는 우리가 왕녀님과 같은 반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게다가 셀로니아 가문의 영애님까지 계시던데? 무서워서 다가갈 수가 없어! 그래도 진짜 멋지더라. 우리 같은 평민도 상대해 주시려나?”
그들은 렌이 뛰쳐나간 것을 보고도 그러거나 말거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차피 주근깨투성이에 성격 나빠 보이니 없어도 그만이다. 그들의 관심사는 귀여운 유네와 잘생긴 것 같은 류제였으니까 말이다.
유네는 그런 줄도 모르고 옛날처럼 기 센 학생들 틈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우물쭈물 어색하게 맞장구만 쳤다.
류제도 유네처럼 그러려면 그럴 수 있었지만 그보다 좀 전에 교실 밖으로 나간 렌이 더 신경 쓰였다. 얼굴은 심통이 났지만 또 귓바퀴가 새빨갰었지. 나간 건 그렇다 치더라도 곧 있으면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실 텐데.
“미안, 유네, 나도 잠깐 밖에 갔다 올게.”
“아… 으…으응.”
믿었던 렌이 갑자기 교실 밖으로 나가 버리고 이젠 류제마저 따라 나간댄다. 유네는 진심으로 류제와 함께하고 싶었지만 여자애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그러지는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삼켰다.
미들 스쿨 때 따돌림 경험이 떠오른 유네는 그녀를 에워싼 여학생들이 무서워 반쯤 울먹거리며 빨리 두 사람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교실에 홀로 남은 남학생, 유네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여학생들 장단에 맞춰주자 저 홀로 도도하게 책을 보는 척하던 비키 셀로니아가 샐쭉하게 흘겼다. 눈이 마주칠세라 그녀는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붉은 말총머리가 불만스럽게 들썩거린다.
왜 내 쪽으로는 안 와주는 거야! 분한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도 모르지만 여기, 재경처럼 책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할 거라는 상상을 한 사람이 있었다.
“렌? 렌!”
류제는 재경을 찾기 위해 황급히 그를 뒤쫓았다.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네. 아침까지는 멀쩡했으면서 왜 그러는 거야? 나 참, 여자애들한테 둘러싸여서 아무 말도 못 한 것이 도망칠 정도로 부끄러웠던 거야? 어제는 시끄럽게 잘만 이야기했던 주제에.
오늘 처음 와보는 학교라 길이 헷갈려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류제는 곧 9시를 가리키는 시간을 보고 다급해졌다.
어디로 간 거지? 다시 교실로 돌아갔나? 혹시 몰라 다른 곳으로 향하려는 발걸음을 머뭇거리던 류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후우… 나랑 치…친… 아냐, 좀 더 확실하게. 나랑―”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류제가 창틀 위에 손을 기대어 고개를 뺐다. 류제가 있는 곳은 2층. 그가 드디어 찾은 재경이 있는 곳은 건물 밖 구석진 학교 쓰레기장 앞이다. ㄷ자 형태로 세 방향이 모두 막혀 잘 찾아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장소다.
이런 장소는 어떻게 알고 간 거지. 그 순간 재경이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나랑 친구하자!”
한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렌을 부르려던 류제가 말문을 잃었다. 뭘 해달라고? 얼굴을 반절 가리는 앞머리 아래로 휘둥그런 눈에 별이 튀었다.
“하아아… 왜 걔네 앞에서는 잘 안 나오는 거지?”
뭐가 잘 안 풀리는지 재경이 머리를 싸매며 벅벅 긁었다. 지푸라기처럼 떴던 머리칼이 엉망이 되었다가 가라앉았다.
렌에게 호기심이 생긴 류제는 창가에 턱을 괴고 잠시 저 이해 불능의 생물을 관찰하기로 했다. 앞머리에 가려진 눈동자에 들어찬 얼굴에는 불만이 주근깨처럼 가득했다.
아하, 이제 알았다. 아까 그 애들한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던 거구나.
어제부터 느낀 거지만 렌은 참 독특한 아이였다. 도대체 뭘까. 성격이 나쁜 걸까 아니면 부끄러움이 많은 걸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서슴없이 시비를 걸려고 하질 않나, 입학하기도 전에 19금 잡지를 들키지 않나, 발라당 까진 말투로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지 않나.
그런데 또 여자 친구를 사귀면 겨우 손잡고 뽀뽀를 하고 싶다니. 아무한테나 막 시비를 거는 주제에 친구 되자는 말은 못 해서 연습이나 하고.
아, 설마 어제저녁에 밥 먹으러 가기 전에도 이걸 연습했던 건가?
19금 잡지 사건을 겪으며 렌한테 말을 건넨 것이 맞았던 걸까 후회하던 류제는 룸메이트 유네 나르타와 말을 터서 또 다른 친구가 생긴 것이 기뻤다.
그러다 저녁을 먹으러 갈 때쯤 약속을 떠올리고 렌의 방에 들어가니 돌연 렌이 유네에게 친구 운운해서 지금의 삼총사가 완성된 것이다.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뭐야 그거. 그게 저 연습이었다고? 유네는 그거 자기한테 한 이야긴 줄 아는데? 엄청 웃기잖아. 푸하하. 귀여워. 실은 렌은 엄청 솔직하지 못한 성격인 걸까. 정말인지 어제부터 하는 짓이 우리 고아원 막내가 생각나네.
입꼬리를 시원하게 올린 류제가 창가에 홀로 서서 그의 친구 렌 지미의 열정 가득한 연습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비키 셀로니아에게 맞아 한쪽 뺨이 부어있는 주제에 바람이 살짝 불어 우연찮게 들린 그의 앞머리 아래로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바다처럼 반짝거렸다.
쓰레기장 앞에서 쓰레기를 향해 한참을 ‘친구하자!’ 하고 외친 재경은 9시, 1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헐레벌떡 교실로 달려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해 버린 류제도 그 모습을 보고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놀렸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치면 의심하겠지. 내가 먼저 앞지를까. 그는 가지고 있는 어빌리티를 시전했다.
‘강화’. 이 어빌리티는 실용성이 높아서 그가 살던 깡촌의 고아원에서 도움이 되곤 했다. 그는 어빌리티의 힘으로 힘, 속도, 내성 등 어떠한 것도 앞에 ‘강화’라고 수식할 수만 있으면 모두 강화할 수 있었다.
교실 방향으로 달려가며 속도 강화, 동체 시력 강화, 근력 강화, 세 가지 강화를 동시에 해낸 류제는 한 번의 도약으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넘고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착지해 유유히 교실로 향했다. 그가 재경을 구경하던 곳에서 교실 문 앞에 돌아오기까지 고작 10초 남짓이 소요되었다.
겸사겸사 비키에게 맞은 뺨도 치료한 류제가 흥얼거리며 교실 문을 열었다. 막 종소리가 울렸던 터라 다들 담임 선생님이 들어온 줄 알고 류제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가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자 렌의 자리를 사이에 두고 앉은 유네가 소곤소곤 물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그냥 안이 답답해서 밖에 나갔다가 왔어.”
“그…그래? 렌 군은?”
“글쎄 곧 오지 않을까?”
“같이… 있었던 거 아냐?”
“아닌데.”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쯤 늦을까 봐 교실로 달려오고 있겠지. 류제는 아까 전까지도 쓰레기장 앞에서 계속 한 문장만 반복하며 연습하던 렌을 떠올리고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
웃긴 내용도 아닌데 류제가 혼자 키득거리자 유네가 설마 나 혼자 내버려 두고 둘이 있었나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흘겼다. 류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유네의 의심보다는 렌 얼굴을 보고도 웃음이 터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쓰레기장에서 1학년 8반 교실까지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 되었는데도 렌은 한참 동안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류제는 괜히 렌보다 일찍 왔나 내심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뒤따라서 천천히 올 걸 그랬다.
잠시 후 앞문이 열렸다. 뒤늦게 교실로 달려오다가 붙잡혔는지 렌은 눈 밑의 점이 섹시한 1학년 8반 담임 선생님과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뭔가가 가득 담긴 상자를 불만스럽게 들고 오는 그의 얼굴에는 귀찮음과 부끄러움이 카페라테의 에스프레소와 우유의 비율로 적절히 섞여 있었다.
어쩐지 늦더라. 선생님한테 걸렸구나.
“자, 자. 조용히!”
선생님이 교탁을 탕탕 두 번 쳤다. 미인 담임 선생님이 상자와 함께 등장하자 저것의 정체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 학생들이 수군수군 목소리를 높였다.
상자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 류제도 옆에 있는 여학생이 말하는 것을 얼핏 들었다.
“슬렉터다.”
“와, 저게 슬렉터야?”
슬렉터? 그게 뭔지 몰랐던 류제가 갸웃거렸다. 유네도 잘 몰랐지만 그보다 렌이 세라와 우물쭈물 함께 있자 표정이 활짝 펴졌다.
렌 군, 어디 갔나 했더니 선생님한테 간 거였구나. 역시 렌 군은 착해. 그치만 나한테도 이야기해 줬으면 좋았을걸.
“안녕하신가요, 1학년 8반 제군들. 저는 이 반의 담임인 세라 밀로니라고 합니다. 기간트리카 실전과 이론 수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년간 그들을 책임지고 보호해 줄 선생님이 일례 행사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당당한 그녀의 말이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늘은 입학식이 있는 날이라 별다른 수업은 없지만 첫 시작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지요. 입학식 시작 전에 반장 선거도 해야 하고, 교과서 분배도 해야 하고, 이 슬렉터도 제군들께 나눠주어야 합니다. 아 참, 교과서 분배는 입학식 이후에 있을 예정이니 기숙사로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거기, 렌 지미 학생! 들어가지 마세요!”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스리슬쩍 자리로 돌아가려는 재경을 세라가 불러 세웠다. 그 모습을 본 여학생들이 바보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경은 또 귓불만 빨개져서는 붕어 입을 하고 도로 선생님 옆으로 꾸역꾸역 돌아갔다.
“렌 학생은 지금부터 제가 호명하는 학생들에게 슬렉터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해줄 수 있죠?”
“왜 제가 해야 하는―”
“해.줄.수.있.죠?”
어제 19금 잡지 들킨 거 봐줬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은 음영 진 얼굴을 세라가 들이밀자 재경이 결국 졌다며 달싹거렸던 입을 앙다물었다.
“이름 부르는 순서대로 나오셔서 슬렉터를 착용하시기 바랍니다. 가넷 펫테로.”
“네.”
“글레라인 니르사.”
“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예.”
이름 뒤에 키아나트리체라는 성이 붙자 술렁거린 학생들이 황홀감을 표했다. 금빛 장미처럼 고고하고 창가에 맺힌 서리처럼 아름다운 하나뿐인 키아나트리체의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단같이 고운 금빛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로 고정시킨 그녀의 단정한 용모에는 단아함이 엿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의 눈동자가 요정처럼 신비로웠다.
걸음걸이 하나하나마저도 기품 넘쳐서 모든 이의 넋이 빠졌다. 같은 제립학교 교복을 입고 있는데도 내재된 분위기가 달랐다.
“와아, 성스러워.”
유네도 두 손을 모아 왕녀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유네 너는 어제 저녁 먹으면서 봤잖아. 하기야 그때는 왕녀 기분이 완전 개거지라 우르릉 쾅쾅 번개가 쳐댔으니 몰랐는데 맑은 날엔 또 다르구나.
차례로 다가오는 학생들에게 슬렉터를 나눠주던 제경은 니냐롯트에 대한 사람들의 사뭇 다른 반응을 지켜보았다. 더불어 자신도 숨죽여 그녀를 감상했다.
진짜 예쁘다. 괜히 메인 히로인이 아닌 것 같아. 저런 천사 같은 외모라면 잘생긴 류제도 아깝다. 거기에 왕녀라는 범접 불가능한 신분까지. 전쟁 루트만 아니면 진짜 완벽한 히로인인데.
“미나 플로리아.”
“네.”
니냐롯트 왕녀에게 혼이 나갔던 재경이 연이어 들리는 익숙한 이름에 정신을 차렸다. 보지 못했던 다섯 히로인 중 마지막 하나 남은 히로인. 도서 위원을 빙자한 마족의 스파이이자 주인공을 악의 길로 유혹하는 악랄한 서큐버스가 등장했다.
사실을 아는 재경은 그녀를 역적 보듯이 노려보았다. 친구 되는 연습하기 바빠서 쟤가 등교하는 것을 못 봤네.
인간인 척하는 히로인은 앞머리가 풍성한 녹색 단발머리에 차분하게 안경을 써서 눈동자의 분홍 빛깔을 가렸다. 들꽃보다도 연약해 보이고 유네만큼 소심해 보이며 왕녀 못지않게 가녀린 인상이다.
나도 게임하면서 저 외모에 속았었지. 쟤가 배신자라는 사실은 최후반부에나 나오는 정보니까 누구든 속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저기……?”
재경이 슬렉터를 주지 않고 쌍심지를 켜자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이 두 손을 모았다.
칫, 얘도 진짜 예쁘긴 예뻐. 히로인 중에 안 예쁜 사람은 없긴 해. 하지만 막상 보자니 분위기가 요상스러워서 기분이 이상하다. 적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자, 가지고 빨리 꺼져.”
하지만 역시 배신자는 배신자다. 플레이하면서 쟤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고 내가 얼마나 멘탈이 나갔는지. 세이브 데이터 불러오면서 처음부터 다시 공략하던 그 슬픔을 내가 잊을 수가 없다.
처음 보는 남자애에게서 꺼지란 말을 들은 미나 플로리아는 상처받은 얼굴로 울먹거리다가 슬렉터를 가지고 돌아섰다. 재경은 그 모습에 실패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을 움찔거렸다.
저거 연기야. 진짜 나쁜 년이라는 걸 알지만 왜 이렇게 죄책감이 들지? 쟤가 주인공한테 뭘 저지르는지 잊은 것도 아닌데.
“비키 셀로니아.”
선생님이 몰락한 귀족 가문의 성을 부르자 과거 셀로니아가에 벌어진 사건을 건너 건너 들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붉은 포니테일의 새침한 미녀가 그깟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재경 앞에 섰다.
“죄 없는 같은 반 학생에게 치욕을 주다니. 좋게 봐주려고 해도 끔찍한 야만인이군.”
재경에게서 슬렉터를 빼앗은 비키가 그를 경멸하듯이 흘기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알지도 못하면서 참견하긴.”
너도 사실을 알게 되면 나중에 쟤한테 잘해 준 거 후회하게 될 텐데.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쟤 정체를 밝혔다간 저 마족 서큐버스가 어떻게 보복할지 몰라 일단은 분기점을 노린다만. 두고 보자, 쟤 정체를 알면 비키 넌 나한테 엎드려 절하며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걸?
“렌 지미.”
“…쌤, 일부러 그러시는 거예요?”
“당신도 차세요.”
바로 옆에 있는 재경을 부른 세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풋풋한 소년처럼 주근깨 만연한 재경이 투덜투덜 슬렉터를 손목에 차는 것을 지켜본 그녀가 다음 사람을 불렀다.
“류제 신리.”
“네.”
류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는 당장 재경과 고만고만하지만 앞머리에 가려진 얼굴상이나 느껴지는 분위기가 대충 생겨먹은 재경과 비교 불가였다.
1학년 8반 남학생들 중에 가장 성장이 유망한 사람이라 여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해 이동했다.
“…쫘식이. 옛다.”
“고마워.”
류제가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왼쪽 눈을 살짝 휘며 답했다. 역시 하렘 미연시 주인공이라고 할까. 히로인들이 아니더라도 여자애들 시선이 장난 아니다.
질투하던 재경은 류제가 웃으며 감사를 표하자 찔려서 우물쭈물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나 같은 못생기고 친구 없는 사람이나 하렘 하렘 그러지, 일단 얼굴이 잘생기고 보면 그런 걱정 없구나. 부러운 자식 같으니라고.
“유네 나르타.”
“으아앗, 예!”
작은 햄스터같이 생겨서는 딴에 남자라고 남자 교복을 입은 예쁘장한 애가 쫑쫑쫑 걸어와 재경에게 슬렉터를 받아갔다.
유네도 귀엽지. 쪼끄매서 히로인보다는 동생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너구나, 유네야. 마음만 있다면 나에게 상담하렴. 내가 팍팍 밀어주마.
이것으로 다섯 명의 히로인들 전부 봤다. 담임 쌤, 비키, 왕녀, 유네, 서큐버스. 그리고 드디어 이것을 받았다.
재경이 자신의 왼손 손목에 차인 손목시계 같은 것을 매만졌다. 슬렉터. 이걸 차니 진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세계관에 왔다는 게 느껴진다. 드디어 본 게임이 시작했다.
“자, 렌 지미 학생. 당신도 자리에 돌아가도록 하세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안 도와주면 학생부에 불건전한 물건 가져온 거 기록부에 적는다고 했으면서. 재경은 학교 종이 울려 교실로 돌아가던 중 슬렉터가 든 상자를 옮기던 세라가 재경을 발견하고 심부름을 빙자한 협박을 한 사실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재경이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힘없이 주저앉자마자 유네가 잽싸게 허리를 찔렀다.
“렌 군, 선생님 도와주러 나간 거였어?”
“뭐? 아… 비슷해.”
전혀 다르면서. 류제가 유네에게 속삭이는 렌의 거짓말을 눈감아주며 턱을 괴었다. 어빌리터의 증거인 슬렉터를 받은 학생들이 자기네들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도대체 슬렉터? 이게 뭐기에 그렇지? 류제가 왼팔에 차인 팔찌 같은 것을 살펴보았다.
유네는 재경에게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선생님이 다시 교탁을 두 번 치며 집중시켰다.
“자, 자. 조용히 하시고. 제군들이 지금 받으신 것은 ‘슬렉터’라고 하는 장치입니다. 들어본 사람도 있을 거고, 실제로 기동해 본 사람도 있을 테지만 모르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 설명드리겠습니다. 슬렉터란 어빌리티를 가진 사람들, 즉 어빌리터가 마족과 대응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으로, 마족에 대한 인간의 투쟁 역사와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오로지 어빌리터들만 사용할 수 있으며 어빌리티가 없으면 기동되지 않습니다.”
“쌤, 그럼 교문에 있는 아저씨들도 어빌리터예요? 비슷한 거 가지고 있던데.”
19금 잡지 때문에 교문에 붙들려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한 재경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경비병이 손목에 차고 있는 기기로 세라 밀로니를 호출했던 것이 생각났던 것이다.
“아뇨, 교문 경비병들이 차고 있는 것은 슬렉터가 아닙니다. 유사해 보여도 교내 연락용 무전기랍니다. 당신들에게 보급된 슬렉터는 학생용으로 개량된 보급형 슬렉터라 무전 기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이~ 너무해.”
“너무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번에 추가했다가 난리 났었거든요!”
“왜요?”
“왜.일.까.요! 학생의 본분은 공부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연애가 아니라.”
무전 기능을 넣었다가 그걸 애들이 전부 전화 기능으로 사용했나 보다. 재경은 그럼 이런 시시한 기계 가지고 뭘 하고 사냐고 투덜거렸다. MP3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간트리카 장갑밖에 더 돼?
“군인용 슬렉터는 더 많은 기능이 탑재되었으나 현재 학생들에게 보급되는 학생용 슬렉터에는 학교 지도 기능과 기간트리카 장갑 기능, 그리고 모의 전투용 프로텍터 시스템이 대표로 탑재되어 있습니다. 분실 시 재발급이 되니 고장 나거나 잃어버리더라도 걱정 마세요. 첫째로 당신들이 하게 될 기간트리카 장갑은… 아,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손목에 달린 교직원용 슬렉터를 보여 주며 설명을 하던 중 슬렉터 중앙에서 파란빛이 나오자 세라는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신을 연결했다.
손목시계에서 홀로그램처럼 투사되는 버튼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학생들이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걸 본 재경은 눈가가 절로 실룩거렸다. 저거 또 또 오버 테크놀로지 나왔다. 저런 거 만들 시간에 버스나 만들지.
세라가 교실 문을 닫자마자 교실 안은 슬렉터와 기간트리카에 대한 이야기로 금세 뜨거워졌다.
“그래서 기간트리카가 뭐야? 어제 렌이 말했던 거지?”
류제가 뒤를 돌아 물었다. 재경이 드디어 자신이 나설 차례인가 하고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류제에게 잘난 척을 하려다가 유네가 우는소리로 칭얼거리는 바람에 가볍게 무산되었다.
“렌 구운… 자꾸 말 끊지 마아. 아까 진짜 나 혼자서 죽는 줄 알았다구. 같이 친구 사귀자고 했으면서 나 혼자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아까 여자애들이 막……!”
“아, 미안. 금방 오려고 했는데 쌤하고 만나가지고 말야. 근데 혼자? 류제도 같이 있었잖아.”
“류제 군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만 혼자 시달렸단 말이야. 왜 둘이서 나만 왕따시키고 그래?”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류제, 넌 유네 내버려 두고 어디 갔다 온 거야?”
왕따 이야기에 민감한 유네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재경이 그 탓을 류제에게로 토스했다.
류제는 렌을 따라갔다가 렌의 연습 장면을 목격했다는 말을 했다간 렌이 화를 낼까 봐 적당히 둘러댔다.
“볼일 보러.”
“아침부터 어지간히 싼다.”
“그…그런 의미는 아닌데…….”
“뭐어야, 그런 거였어?”
자신만 왕따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똥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자 유네가 배시시 웃었다. 쟤 진짜 똥 이야기 좋아하네. 재경이 좀 더러운 착각을 했다.
“근데 그 기간트리카라는 게 도대체―”
류제가 다시 재경에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번엔 세라 때문에 무산되었다. 무전을 마친 선생님이 문을 열고 상체만 교실로 들이민 채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선생님은 입학식 관련 일이 생겨서 슬렉터에 대한 건 나중에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아요. 일단 모르는 사람들은 저기 니냐롯트 학생이나 비키 학생, 혹은 주변에서 들어 기간트리카를 알고 있는 친구에게 물어보도록 해요. 그리고 렌 지미 학생?”
“에에…….”
“미안한데 제 대신 반장 선거를 진행해 주시겠어요?”
아니, 그걸 내가 왜. 재경은 이 중요한 반장 선거 이벤트의 사회자를 맡으라는 선생님의 명령이 잔인하다 느꼈다.
무책임한 말만 남긴 선생님이 사라지자 학생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기간트리카와 각자의 어빌리티에 대해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단체로 우르르 몰려오는 여자애들 면역 없어 죽겠는데 이 상황에서 나보고 사회자를 하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 그렇게 이런 거 막 잘할 것처럼 보이나? 아니, 그렇다면 좀 기쁘긴 하다만… 내가 암만 사교성 좋은 척해도 이런 이…인싸 이벤트 같은 거 잘 모른다고! 중학생 때도 반장 선거나 입학식 할 때 땡땡이치거나 잠만 잤고.
난 반장 선거 이벤트에서 비키랑 기간트리카 대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왜 사회자를 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딴 애 시켜, 딴 애!
“렌 군.”
“렌… 괜찮겠어?”
유네와 류제가 양쪽에서 걱정을 표했다. 앓는 소리를 내던 재경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그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잠시 기가 죽었던 재경은 나약한 근성을 바로잡았다.
아냐, 아니야. 새로 태어나기로 했잖아. 다른 건 몰라도 나를 믿고 따르고 있는 저 둘에게만큼은 실망감을 안겨 줄 수야 없지. 오늘 아침에 의기양양하게 친구 사귀는 법 운운했던 잘난 척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려 내 평판이 엄청 떨어져 버렸고. 어떻게든 그걸 만회해야 해.
류제는 렌이 솔직하지 못한 성격인 것을 눈치채고 있고 성격이 소심한 유네는 당당한 렌을 그것 하나 때문에 평가 절하하지는 않을 테지만 재경은 저 둘 사이에서만이라도 체면을 차리고 싶었다. 어떻게 사귄 친구들인데 죽어도 이미지 실추되기 싫다.
마음을 굳게 먹은 재경이 행동을 개시했다. 의자 끄는 소리가 커서 그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재경을 힐끗거렸다.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 이걸 잘 해내면 어제 야한 잡지 때문에 떨어졌던 선생님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몰라. 선생님 호감도를 올리려면 시험을 잘 보거나 챕터별로 발생하는 이벤트들을 잘 캐치해야 하는데 시험은 자신 없으니 나에겐 이런 게 기회겠지.
문제아 취급은 이제 사양이다.
“조용히 좀 해봐, 짜식들아. 쌤이 반장 선거 하래잖아.”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교탁으로 걸어가는 재경의 뒷모습에 유네가 존경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역시 렌 군이야. 나는 무서워서 저런 거 절대 못 할 거야. 짱 멋있어. 모르는 애들 앞에서 서서 말을 하다니 대단해. 렌 군이 반장 하면 좋을 거 같은데!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는 유네의 마음을 모르는 재경은 선생님이 서있던 교탁 자리로 가서 여학생들로 득시글거리는 아찔한 전경을 응시하였다. 교실 책상에는 여학생 스무 명에 자신을 제외한 남학생(?)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있다.
학생들은 아까 선생님이 반장 선거를 지시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건방진 태도로 교탁에 선 재경에게 차갑게 대꾸하는 일은 없었다.
“쌤이 반장 선거 하랬으니까 반장 뽑는다. 대충 반장하고 부반장 뽑으면 되지? 하고 싶은 사람.”
반장 선거를 진행하긴 하지만 시키니까 하는 거지 열정적으로 통솔하지 않는다. 재경은 암만 새로 태어난다 노력해도 딱 그 정도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억지로 분필을 든 재경이 조용해진 학생들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잠시 후 그는 비키 셀로니아가 업신여기는 눈초리로 손을 든 것을 발견했다. 선생님이 그에게 학생들을 통솔할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쁜 모양이다.
그럴 줄 알았지. 재경은 설렁설렁 들고 있던 흰색 분필로 칠판에 글씨를 적었다.
일단 빙의라고 하긴 하지만 재경도 이 나라 언어를 쓸 수 있었다. 하도 불친절하기에 글부터 다시 배워야 하나 걱정했는데 글을 읽고 쓰게 해주는 건 빙의 기념 서비스 같은 거려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