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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1) (99/112)

챕터 1. [3월. 눈을 떠보니 미연시 속이라니 너무 뻔한 전개 아냐?] (1)

괴팍? 흥. 내가 참을성 없고 말본새랑 성질 더러운 건 인정한다. 하지만 난 참을 만큼 참은 거야. 맨날 그쪽이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해.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친하게 지내라고 헛소리하지.

우리 집이 좀 가난하고 내 몸집이 쪼그마하니까 그놈들이 날 만만하게 보는데 그럼 돈 다 뺏기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란 말야?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나 몰라? 난 시비 건 놈 면상에 죽빵을 한 대 날려 주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리는 사람인 거 할머니도 알잖아.

시비가 걸리면 누구 하나 뒤질 때까지 싸우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그게 바로 나 신재경 아니겠어?

“허구언 날 말만 번지르르.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별 어먼 지랄을 해도 친구가 없지. 고등학교 올라가서도 그럴 거냐?”

아, 시끄러. 소리 지르지 좀 마. 그렇게 잔소리 하면 입 안 아파? 나도 알고 있어. 저번 내 생일날 친구들이 집에 한 명도 안 놀러 온 걸 말하는 거라면 내버려 둬. 난 신경 안 쓰거든.

나도 기대하긴 했지만 걔들이 싫다는데 어쩌라고? 결국 할머니가 준 용돈도 안 쓰고 빳빳하게 돌려줬으면 됐지!

“허이고. 곧 죽어도 지 자존심은 못 굽히지. 평생 그러고 혼자 살래? 느그 애미 애비가 뭐라 하겠누!”

내가 언제 평생 혼자 산댔어. 그래서 내가 친구 사귀겠다고 방학 내내 게임도 열심히 플레이했잖아.

알았어, 하아. 고등학교 올라가면 진짜로 싸움 안 하고 얌전히 지낼게. 경찰서 오라고도 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손가락 걸고 약속. 그럼 되지? 근데 저쪽에서 계속 시비 걸고 삥 뜯으려고 하면 때리긴 때릴 거다?

“그것이 참는 거냐? 할미가 니 땀시 편히 눈을 못 감아요, 눈을 못 감아.”

속상하면 하는 말이 이제 할머니의 말버릇이 되었는지 마음에 안 차면 맨날 저 소리다. 쯧쯔, 할머니가 혀를 차며 꿍얼거렸다. 뒷짐을 지고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괜히 안쓰럽다.

내가 외쳤다. 걱정하지 마! 그냥 맘 편히 먹어. 내 걱정은 왜 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내 걱정이란 거 몰라? 호강도 못할 판에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시간 낭비를 해야 쓰겠어?

“말이나 못 하면! 철은 언제 들래?”

빽 소리치는 할망구 성질머리 한번 더럽다. 지팡이로 머리를 딱, 얻어맞는 꼴사나운 꿈에서 깬 재경이 번쩍 눈을 떴다.

덜컹덜컹 차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난생처음 보는 지하철 안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지하철인 것을 어떻게 알았냐면 그야 지하철 의자처럼 옆으로 긴 좌석에 앉아있는걸. 머리 위에 손잡이도 달랑달랑 흔들거리니까 지하철의 그거지 뭐.

어라, 근데 여기가 몇 호선 어디였더라? 난 분명 내일이 고등학교 입학식이라―

“……?”

이상하다. 암만 봐도 이곳은 그가 사는 도시의 지하철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난 왜 이런 곳에 앉아있는 거지? 설마 이게 바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세계였습니다’라는 설정인 건가?

나도 일본 오타쿠 게임을 해본 적 있어. 이거 그런 데에서 많이 나오던데. 완전 뻔한 클리셰라 인트로만 봐도 지긋지긋하거든.

가난한 양아치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오타쿠 게임은 왜 했냐고? 할머니 잔소리 때문에라도 고등학교는 얌전히 다니려고 했거든. 우정, 사랑, 청춘. 이 세 가지가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 조건이잖아.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도 하면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에 도움이 될까 싶었지 뭐.

여자애들한테 인기 많은 비결이나 친구 사귀는 비법을 알고 싶어서 메모까지 해 가며 열심히 외웠단 말이지. 내 생애 최초의 공부였다고. 할머니는 나한테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뭐 어때.

뭐? 하필이면 다른 것도 많은데 왜 그런 걸 참고하냐고? 지금껏 친구가 없어서 참고할 게 그런 것밖에 없었다, 왜.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게 뭐야. 고등학교 입학식을 하루 앞두고 눈 떠보니 이세계라고? 뭐 하자는 거야. 장난하자는 거야?

게다가 지하철? 눈떠 보니 도착한 이세계는 오버 테크놀로지 세계인 거냐? 옷들은 왜 다 저따구로 촌스럽대.

재경이 막연한 시야에 보이는 것들을 호기심 가득한 고양이 눈으로 구경했다. 처음 보는 교복을 입은 몇몇 여학생들이 짐을 들고 자리에 앉아있고, 이상한 코스프레 제복을 걸친 사람들이 손잡이를 잡고 덜컹덜컹 지하철을 따라 흔들렸다.

단체 정신병이라도 걸렸나 재경이 그들을 비웃는 순간 터널을 지난 지하철 바깥으로 햇빛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원래 자신의 손과 다를 바 없는 투박한 손을 앞뒤로 뒤집다가 옆에 놓인 짐을 기웃거리던 재경은 창문 바깥으로 펼쳐지는 판타지에서 나올 거대한 황금 성을 비롯해 근대 유럽의 대도시에서나 볼 법한 풍경을 목격하고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게 뭐야!”

이세계고 뭐고 꿈에서 덜 깼나 했더니 진짜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지하철? 판타지? 오버 테크놀로지? 여기는 도대체 어디냐. 난 기왕이면 꿈과 모험이 가득한 정통 판타지를 원했… 아니, 이게 아니라―

단체 정신병이라도 걸린 게 양반이지. 이세계 드립은 장난이었단 말야!

“이게 정말…….”

젠장, 진짜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어. 이 현실감은 뭐야. 문제아 취급당하는 것도 싫고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는 것도 싫어서 고등학생이 되면 바른 마음가짐으로 새로 태어나겠다고 다짐했는데 눈떠 보니 정신 나간 동네라는 게 말이 돼? 왜 내가 오버 테크놀로지 이세계 지하철에 앉아있는 거야. 몰래카메라인가? 이거 몰래카메라야? 누가 나한테 설명 좀 해줘 봐!

“시끄러워. 지하철 예절도 모르는 천한 평민이. 이럴 줄 알았으면 유모한테 데려다 달라고 할 걸 그랬어.”

재경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머리 위에 센서가 달렸는지 제 욕은 기가 막히게 잘 들어서 아웃풋으로 주먹부터 나가곤 했던 재경은 아직 사태 파악이 덜 된지라 용케도 붉은 포니테일 여학생의 말을 무시했다.

“뭐야? 평민 주제에 건방지게 쳐다보지 마.”

갑자기 눈을 떠보니 오버 테크놀로지 이세계 지하철인 것도 미치겠는데 저런 나사 빠진 외국인까지 상대하고 있다간 안 그래도 나쁜 머리가 터질 거다. 일단 진정하고 이 이상한 사태 분석에 집중하는 것이 먼저였다.

재경이 눈을 질끈 감고 오해를 정정했다.

“댁이 날 쳐다본 거겠지.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갈 길로 꺼져.”

상황 판단은 좋지만 저런 띠꺼운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는 것이 할머니가 늘 지적하는 재경의 문제점이었다. 시비를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지 않는가. 보란 듯이 빈정거린 그가 제자리에 앉았다. ‘이러니까 친구가 없지!’라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에 지지 않은 여학생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재경처럼 곧 죽어도 자존심으로 먹고사는 인종인 듯했다.

“교복을 보아하니 올해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신입생 같은데. 하, 이래서 함부로 어빌리티를 가지면 안 된다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예의도 없는 야만인이 키아나트리체의 미래라니. 어떻게 3년간 학교에서 같은 공기를 마신담.”

“뭐야?”

뭔 학교? 아가타 기간트리카? 어빌리티? 뭔 개소리야. 내가 왜 거기 입학해. 막 이세계에서 눈을 뜬 재경은 붉은 머리 여학생 말을 한마디도 따라가지 못했다.

이 이상의 정보는 사치라는 듯 갸웃거리는 재경을 내버려 둔 그녀는 짐을 들고 다른 칸으로 피했다. 확연하게 재경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나 참.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거냐.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예의가 없는 건 그쪽 아냐? 버퍼링 끝에 뒤늦게 머리가 굴러간 재경은 그녀의 첫인상을 개싸가지 없는 애라고 평가했다. 지가 시비 트고 지가 삐쳐서 가버리는 저 승질머리하고는.

“학교……?”

그보다 쟤가 분명히 그랬지? 아가타 기간트리카 뭔 학교? 이상하다. 분명 이런 이해 불가능한 외국 단어는 낯설어야 하는데 최근에 어디선가 ‘본’ 단어다.

붉은 머리 포니테일 여자의 말 속에 뭔가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던 재경이 돌머리를 근성으로 뒤졌다. 분명 최근에 봤던 기억이 있다. 기간트리카… 기간트리카…….

“와, 역시 수도는 사람 인심이 무섭구나.”

“……? 뭐야 넌. 나랑 아는 사이냐?”

“미안. 너도 나랑 같은 제립학교 입학생인 것 같아서. 교복을 입고 있으니까. 맞지? 이름이… 렌 지미?”

“넌 또 뭔데 나한테 시비인데?”

재경이 경계하자 앞머리로 얼굴 반절을 가려서 눈이 보이질 않는 남학생이 난감한 듯 짤막하게 웃었다. 재경이 자신을 렌 지미라고 부른 남자를 고깝게 흘겼다.

렌 지미? 저 새끼 지금 나보고 전자레인지라고 한 거냐? 아니, 시발. 살다 살다 땅꼬마 난쟁이 똥자루에서 전자레인지까지 별명이 진화하는 건 또 처음이네. 이 새끼, 나 키 작다고 시비 거는 거 맞지? 저놈도 나랑 고만고만하구만. 안 그래도 복잡해 죽겠는데 귀찮…….

“아냐, 그런 건 아니고 나도 이번에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입학하거든. 깡촌에서 살다가 갑작스레 어빌리티가 발현될 줄은 몰랐어.”

기간트리카. 어빌리티. 이 단어가 재경의 뇌리를 스쳤다.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며칠 전까지 열심히 공략해서 n번째 엔딩을 본 미연시 게임의 제목이었다.

세상에 미치고 팔짝 뛰겠네. 눈떠 보니 오버 테크놀로지 이세계도 아니고 미연시 속이라고? 잠깐, 그렇다면 아까 제복 입고 있던 붉은 머리 여학생……. 3D 입체화돼서 몰라봤는데 여기가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라는 미연시 내라면 낯이 익다.

노란 리본이 여우 귀처럼 달린 포니테일에 사나운 눈매의 초록색 눈동자. 걔 여기 히로인이잖아. 오 마이 갓! 설마 여기 진짜 미연시 속이야?

“내 이름은 류제 신리야. 류제라고 불러줘. 난 렌이라고 부르면 되나?”

“류… 류제?”

류제 신리. 바리캉으로 뒷머리를 짧게 친 검은 머리에 앞머리로 얼굴을 반절 이상 가린 미친놈이 교복에 달린 명찰을 가리키며 상냥하게 웃었다.

재경은 그의 이름을 듣고 확신했다. 류제 신리라고? 게임 개발사가 미연시 주인공 캐릭터를 창작할 때 앞머리만 졸라 길게 만들어 애 눈깔만 배려놓은 전형적인 하렘 남주? 마족이니 마왕이니 중2병 설정 범벅인 미연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주인공 류제 신리?!

내가 플레이한 캐릭터지만 우유부단하고 쓸데없이 정의로운 데다 히로인들한테 여지만 졸라게 줘대서 이 새끼 칼빵 맞는 거 아니냐고 걱정했던 그놈?

“다행이다. 주변에서 어빌리티가 발현되는 사람은 여자밖에 없다고 해서 나만 남자일까 걱정했거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랑 친구 해도 되겠니?”

“아… 뭐, 좋아.”

학교에 입학하고 이러저러한 사건을 겪으며 이 세계관 최강자가 될 저놈은 실은 이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세계관 속에서 최강의 악역이 될 수도 있는 마왕의 부활체다.

이상한 히로인한테 걸려서 타락 루트를 타면 학교 친구들 대부분을 죽이고 히로인들한테 음문을 새겨서 육노예로 삼는 미친놈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알아도 류제 신리의 입에서 나온 기적의 단어 ‘친구’란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재경은 류제가 내미는 손을 앞뒤 생각도 없이 냉큼 잡고 흔들었다. 참 줏대 없는 손이었다.

“만나서 반가워. 너도 시골에서 상경한 거야?”

“어?”

이상한 히로인한테 안 걸리면 멀쩡하게 노말 엔딩으로 가니 저 착해 빠진 면상만 보자면 그럴 걱정도 사라진다.

그래도 마족과 인간의 대립 어쩌고 하는 이 세계관에서 이놈이 타락을 할지 안 할지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갈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주인공이 타락하는 건 너무 중2병스러운 센스란 말이지. 그깟 건 인간관계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고 야리꾸리한 건 걸리면 할머니한테 혼난단 말야.

아, 근데 쟤가 뭐라고 했더라? 시골에서 상경?

재경은 게임 시작하자 뜨는 구질구질한 배경 설명은 시원하게 스킵해 버리는 성격이기 때문에 주인공 류제 신리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하면서 누구랑 만나 이야기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주인공을 상대로 첫인상부터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재경은 입을 비죽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잘난 척했다.

“뭐 비슷하지. 이런 촌―구석과는 차원이 다른 곳에서 왔어.”

“대단한걸. 인계의 대제국 키아나트리체의 수도 아가타보다 훨씬 더 좋은 곳에서 왔다니.”

“뭐야, 빈정거리냐? 못 믿겠다면 못 믿는다고 해.”

“아…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말했다시피 난 엄청난 촌구석에서 왔거든. 여기가 촌이라고 느껴질 정도면 네가 온 곳은 어느 정도일까 신기해서.”

그 말을 들은 재경이 단번에 류제의 하이라키를 제 아래로 깔봤다. 뭐야, 주인공이라서 뭐 대단한가 했더니 이놈도 아무것도 모르는 촌놈이었잖아? 미연시 여주들은 보는 눈도 없나 왜 이런 어리바리한 놈을 좋아하는 거지? 아, 플레이한 건 나구나.

잠깐. 그렇다는 건 내가 잘만 하면 저놈 대신에 히로인들을 꼬실 수 있다는 의미 아냐? 호감도만 잘 이용하면 나도 희망이 있다는 소린데!

대박이다. 이건 하늘이 내게 준 기회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성격까지 탈바꿈하고 새로 태어나자. 어차피 여기서 날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좋아, 신난다!

“저기, 렌?”

갑자기 눈에 불이 켜져서는 파이팅 넘치는 상태가 이상해서 류제가 손을 흔들어 재경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새로 태어난다고 다짐한 지 불과 3초도 되지 않아 재경은 눈깔을 부라리며 심성 뒤틀린 양아치 같은 얼굴로 류제를 협박했다.

“뭐 인마, 짜샤. 볼일 있으면 말로 해라. 어엉?”

“아니… 혹시 같은 반이 안 되더라도 사… 사이좋게 지내자고.”

“무울론이지. 걱정하지 말라고. 세상 그 누구도 네 편이 아니더라도 네 곁에 있어주마!”

재경은 친구라는 말로 포장하기엔 거창한 말로 답했다. 지금부터라도 친하게 지내면 저놈이 만에 하나 타락 루트를 타서 마족 편에 서더라도 나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는 게 있지 않겠어? 같이 하렘을 만든다거나.

그렇게 되면 나도… 나도 여자 친구를 만들 수 있어! 이렇게 된 이상 류제 신리, 하렘 미연시 주인공인 네게 붕어 똥처럼 달라붙어 주마!

재경이 푸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류제의 등을 퍽퍽 쳤다. 할머니는 별 병신 같은 짓거리나 한다고 꿍얼거리겠지만 세상만사 새옹지마, 이게 이렇게 돌아갈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역시 신재경이야. 이런 미래 예지력이 있었다니, 역시 미연시로 공부하길 잘했어!

라고 외쳤던 것이 불과 십오 분 전. 재경은 왜 류제가 자신을 ‘렌 지미’라고 불렀는지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십분 깨닫는 중이었다.

소변이 마려워 류제에게 짐을 맡기고 부리나케 볼일을 보고 나와 손을 씻는데 거울 안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소년이 떡하니 존재하니 그 누가 당황하지 않을쏘냐.

“…어.”

재경은 당연히 자신이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세계에 뿅 차원 이동을 한 줄 알았다. 난데없이 이세계 오버 테크놀로지 지하철에서 일어난 이유나 옆에 자신의 기숙사 짐이 있는 이유는 몰라도 대충 그런 거겠거니 했다.

그야 재경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기 전까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어어엉?”

류제가 입었던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교복을 재경도 입고 있는 것부터 미심쩍었지만 재경은 상남자라(기보단 바보라서) 거기까지는 대충 넘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에 있었다.

거울 속에 있는 그는 오리지널 재경과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다. 다른 점을 짚는다면 첫째로 머리 색이 이상했다.

재경은 찢어지게 가난한 데다가 보수적인 할머니랑 둘이서만 살아 염색은 할머니 새치 염색 아니면 터무니없었다. 그래서 내내 머리가 토종 한국인의 검은색이었는데 그게 지금은 지푸라기처럼 칙칙한 황토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춘기 호르몬 폭발로 얼굴 곳곳에 여드름이 있고 적당히 째진 눈에 스포츠머리였던 평범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연예인 누군가가 했었던 오 대 오 가르마에 곱슬기 하나 없이 붕 뜬 앞머리를 훑은 재경은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으어어엉?!”

장인 공(工) 자처럼 선 두 개와 동그라미 하나로 이루어진 대충 생긴 눈은 오리지널 재경과 비슷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사춘기 여드름이 전부 주근깨로 바뀐 것이나 색소가 변한 것은 유전자적으로 뒤바뀐 게 아닌가 싶어 당황스럽다. 미묘하게 백인처럼 피부색도 다른 것 같다.

게다가 어째 지울 수 없는 기시감에 거울 속 자신의 이 흔하디흔한 얼굴을 자세히 살피고 있노라니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세계에서 떠오르는 엑스트라가 있었다.

“그 새끼 이름이 렌 지미였어?!”

주인공이나 히로인이 뭘 할 때마다 태클 걸고 트집 잡아 괴롭히는 악역 겸 떨거지 1인? 잘난 척하면서 끝까지 방해만 하다가 결국 나가리 되는 엑스트라? 입학하고 첫 등장부터 존나 싸가지 없는 포니테일 붉은 머리 히로인한테 기간트리카 대결에서 개처발리는?!

잠깐, 그럼 난 뭐야. 이 세계에 신재경으로 있는 게 아니라 렌 지미로서 있는 거란 말이야? 아 제기랄. 하필이면 그딴 엑스트라야! 그것도 악역이잖아. 기왕 새로운 세계에 온 거 좀 적당한 인간한테 넣어주면 좋을 텐데 융통성 없기는.

“되는 일이 없어!”

이 세계관에서 등장하는 특수능력인 어빌리티는 보통 여자만 발현하는데 극소수의 남자도 발현하는 경우가 있다. 여자 캐릭터를 대거 등장시켜야 하는 남성향 하렘 미연시나 소설에서는 흔한 설정이다.

렌 지미는 그런 걸로 잘난 척하며 자존심 채우는 흔한 엑스트라 캐릭터에 불과했다. 하필이면 그딴 캐릭에 빙의할 건 뭐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무슨 일이야?”

재경의 비명 소리에 놀란 류제가 헐레벌떡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재경은 물에 젖은 손으로 얼굴을 찰싹 때리며 잠시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아냐, 나는 악역 엑스트라가 아니라 평범한 신재경으로 다시 태어난 거야. 어차피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모르잖아. 앗, 누가 렌 지미를 알면 어쩌지? 낸들 알아. 모르는 척하면 되지.

좋아. 내가 할 일은 정해졌어. 내가 누구든지 간에 난 새롭게 태어나서 내 할 일을 하면 돼!

“렌?”

투지를 불태우는 재경이 또 딴 세상에 가있자 류제가 재경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려 깨웠다.

“아 눈깔이 삐었나, 사람이 지금 쓰고 있잖아!”

그걸 또 누가 시비 거는 것으로 받아들인 재경이 눈을 부라리며 입술을 뒤집어 까 이를 드러냈다.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지 5초 만의 일이었다.

당황한 류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에서 손을 뗐다.

“아니… 큰 소리가 들려서.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뭐야, 너였냐. 암것도 아냐. 정신 집중 한 거야.”

“아아, 내일이 입학식이라? 나도 긴장된다. 아무래도 학교에 여학생들밖에 없다고 하니까.”

“얌마, 그게 좋은 거얌마!”

이놈은 엄청난 애들하고 플래그가 꽂힐 텐데 무슨 괜한 걱정을 하고 있나 모르겠네. 어디 보자, 히로인들이 누가 누가 있었더라. 이름이 어려워서 기억은 못 하지만 아까 붉은 머리 포니테일 히로인은 몰락 귀족 집안 출신이다.

거기에 이 나라 왕녀가 메인 히로인이고, 그… 뭐시기 서큐버스 나쁜 년도 있고, 같이 방을 쓰는 부잣집 남장 여자에, 섹시한 담임 선생님까지.

호감도를 제대로만 올리면 나라도 가질 수 있는 놈이 무슨 사서 걱정이야. 걱정할 건 나구만. 아, 혹시 얼굴이 못생겼나?

“어디, 잠깐만.”

“우앗. 뭐… 뭔데.”

재경이 멋대로 류제의 앞머리를 들췄다. 지금 당장은 그와 키가 고만고만한데 엔딩 분기 때 일러스트를 보면 히로인들과도 키 차이가 많이 생긴다.

들춰진 검은 장막 안, 짙은 눈썹과 순해 보이는 푸른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예상하지 못했지만 감탄이 나오게 잘생겼다. 장인 공(工)처럼 생긴 삼류 악역의 무성의한 눈은 비교도 못 될 정도다.

에라이, 히로인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겠네. 존나게 기생오라비처럼 생겼구만 뭐.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하아, 암것도 아냐. 가자.”

풀 죽지 말자. 남자는 마음이라고 할머니가 그랬어. 얼굴에 잘생김 묻은 저놈이 히로인을 한 놈만 공략한다면 나는 좀 골고루 시도하면 되지. 나는 루트를 다 꿰고 있으니까 저놈보다 훨씬 유리할 거 아냐.

뭐, 스토리 분기점이 있으니 쟤가 어떤 히로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의 미래가 달라지겠지만 옆에서 잘 도와주면 나도 콩고물 받아먹기 쉬워지지 않을까. 우후후.

남자는 마음은 무슨 문어발을 펼칠 생각을 하며 재경이 당당하게 화장실을 나섰다. 음흉한 시선이 느껴지자 류제는 뒤따라가다 말고 저 친구가 왜 저럴까 힐긋거렸다.

그들은 손에 한가득 기숙사 짐을 들고 역 밖으로 나섰다. 역 입구부터 시작해서 대로를 따라 제립학교 종사자들이 이용하는 상가들과 으리으리한 학교 관련 시설물들이 보였다. 재경은 류제더러 촌놈이니 뭐니 떠들어댔으면서 자기가 더 촌놈처럼 턱이 빠져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나 해외여행 한 번도 가본 적 없는데 진짜 유럽 여행 온 것 같네.

“뭐해? 빨리 가자.”

“야, 짜샤. 무드가 없어. 주변 구경 좀 해라.”

류제는 관광객 모드가 된 재경을 보자니 이곳과 차원이 다른 곳에서 왔다는 그의 말에 모순을 느꼈다. 하지만 멀리 보이는 제립학교의 정문이 대단히 웅장해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납득했다. 학교를 둘러싼 돔형으로 빛나는 무지갯빛 그물도 덤덤한 류제조차 입이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우와아. 건물이 어떻게 저렇게 클 수가 있지?”

“그러게.”

“너도 모르냐? 바보야. 아는 게 뭐야?”

“미안.”

“됐어.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냐. 짜샤, 너도 사나이면 미안하다 하지 말고 쿨하게 넘겨. 모르는 게 죄냐? 엉?”

재경은 착해 빠진 류제의 등을 퍽퍽 쳐서 파워풀한 기를 나누어 주었다. 아니, 얘는 성격이 이렇게 유약해 가지고 그 기 센 여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지내려고 그러지? 미연시 하렘 주인공 티 내냐? 주인공 보정 너무 심한 거 아냐? 우유부단하게 행동해서 아무하고도 호감도가 안 쌓이면 그거대로 큰일인데. 진짜 걱정이다, 걱정이야.

재경이 등을 너무 세게 쳐대서 류제가 아야,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파, 렌.”

“약골 자식. 그래가지고 기간트리카는 어떻게 조종할래? 무시무시한 마족은 또 어떻고.”

“기간트리카를 조종하다니 그게 뭔데?”

“뭐? 것도 모르냐? 그야―”

기간트리카가 뭔지도 모르는 촌놈 류제에게 잘난 척하며 설명해주려던 재경은 여기서 알려준다면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미연시 내에서 렌 지미의 화려한 등장 신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그가 빙의한 렌 지미라는 캐릭터는 주인공 앞에서 깝죽거리고 히로인들에게 시비를 걸어대는 악당 놈이었다. 그새를 못 참은 이놈은 입학 후 지하철에서 마주친 빨간 포니테일 히로인과 시비가 붙어 기간트리카 대결을 펼친다.

매사 무관심한 주인공에게 기간트리카라는 생소한 개념을 설명해 주는 이벤트에 불과하지만 현재 렌 지미인 그에게 있어서는 그게 그의 고교 데뷔를 알리는 축포가 될 터였다. 그걸 여기서 마냥 낭비할 수야 없지.

“보면 알암마. 겁나 쩌는 거 있어. 것보다 빨리 가자. 아니, 여기는 지하철이 있으면서 버스는 왜 없어?”

“버스?”

“몰라? 하아.”

“내가 촌에서 와서 너무 아무것도 모르지?”

“야, 내가 말했지? 모르는 건 죄가 아냐. 뭘 그렇게 미안해? 어차피 여기서 살면서 다 배울 텐데. 나도 암것도 몰라.”

쫘식이 말야. 재경이 쪼개면서 류제를 다독였다.

물론 뻥이야!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각 히로인들의 과거부터 시작해서 호감도 올려주는 물품부터 그들의 정체까지 죄다 알고 있단다. 하하하. 혹시라도 내가 널 앞질러 가면 미안하게 됐다!

재경이 부르는 콧노래를 따라 두 사람은 쉬엄쉬엄 제립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내일 입학할 1학년 학생들이 짐을 들고 하나둘 학교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방학이 끝날 2, 3학년 학생들도 주변 상가에서 새 학기 때 사용할 학용품들을 사느라 문전성시였다.

새로운 터전이 될 곳을 신기한 눈으로 구경하던 재경이 교문으로 들어가자 제국 갑옷 차림의 경비병들이 창으로 가로막았다.

새로 태어나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는지 재경이 길을 가로막는 그들에게 질 나쁘게 껄렁거렸다.

“어엉? 뭡니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올해 입학생 맞습니까?”

“눈 삐었슈? 교복 입고 있잖아요. 참나. 아니면 어쩔 건데요?”

“아닙니까?”

“우와아악. 맞아요, 올해 제립학교 입학생입니다.”

다가오면 무조건 물어뜯으려고 하는 불도그 같은 재경을 잽싸게 말린 류제가 각박한 분위기에 수습을 나섰다.

아니면 어쩔 거냐는 재경의 말에 혹시 저놈이 말마따나 마족이 변장한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이 든 경비병들이 신원 확인을 요구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제 이름은 류제 신리고 이 친구는 렌 지미입니다.”

“입학 허가증은 가지고 있습니까?”

“왜 자꾸 우리만 물고 늘어지는 건데요? 아까 다른 애들 그냥 들여보내 주는 거 다 봤거든요?”

“입학 허가증 가지고 있습니까?”

“이 아저씨가 진짜!”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습니다. 렌, 너도 어서 보여 드려.”

류제가 교복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둔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입학 허가서를 솔선수범해 보여 주었다.

경비병은 손목에 찬 이상한 기기로 류제가 넘긴 입학 허가서를 스캔했다. 홀로그램에 초록색으로 OK 사인이 떨어졌다. 신원이 확인되자 그들이 류제에게 허가서를 돌려주었다.

옆에서 어서 확인하고 들어가자는 류제도 성가시고 경비병이 권위적인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싫어 재경이 별수 없이 류제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그도 귀찮은 일은 빨리 처리하고 학교를 구경하고 싶은데 어디에 꽁꽁 숨겨 놓았는지 좀처럼 입학 허가서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엉? 어라? 어?”

“없습니까? 안 가지고 온 것입니까, 아니면 애초부터 없는 겁니까?”

“아, 있어 봐요 쫌. 성질도 급하네.”

교복 주머니에도 없자 재경이 무겁게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렌 지미 이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허가서가 어딘가에 있을 게 분명하다.

가방을 뒤지는 재경을 보던 류제가 경비병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입학 허가서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가지고 오셔야 합니다.”

아오씨, 이 세계는 쓸데없는 부분만 발전하고 다른 부분은 죄다 구식이네. 누가 생각한 거야, 이런 18세기 같은 이세계 세계관. 그리고 난 렌 지미 이놈이 어디서 사는지 모른단 말이야. 내 몸이지만 내가 모든 것을 알 거라고 생각 마라, 이 불합리한 튜토리얼아!

“아직도 멀었습니까?”

“잠깐만요! 좀 기다려요. 성질도 더럽게 급하네.”

마음이 급해지면서 그의 손 움직임도 똑같이 빨라졌다. 재경도 자기 짐을 처음 확인하는 거라 가방 내용물이 생소했다.

“어어?!”

허가서를 찾다 못해 맨 아래 생활복 안에 있던 엄청난 잡지를 발견한 재경이 당황해서 외쳤다. 그대로 숨기면 아무도 모를 것을 놀란 나머지 재경이 그것을 자랑스레 치켜올렸다.

그가 드디어 입학 허가서를 발견한 줄 알고 시선을 돌리던 경비병이 재경의 손에 들린 에로에로 19금 잡지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허가서를 달라니까 뭘 빼고 있는 겁니까? 게다가 이거 미성년자는 보지 못하는 잡지 아닌가요? 허 참. 벌써부터…….”

“이건 압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숨기고 있는 것이 더 있다면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세요.”

“아니 그게, 제가 짐을 싼 게 아니라…….”

“여기서 3년 동안 살 짐을 본인이 아니면 누가 쌌다는 겁니까? 설마 이걸 두고 부모님이 싸주셨다고 말할 건가요? 미성년자가 어떻게 이런 엄한 책을 구해 가지고는.”

“아니, 그거 진짜 제 거 아닌데요.”

뻔뻔하게 나오면 될 것을 19금 책이 제 가방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혼이 나간 재경이 경비병의 혼쭐에 억울해하며 짐을 뒤졌다. 여기서 입학 허가서가 안 나오면 진짜 망하는 거다.

아니, 렌 지미 이 새끼는 왜 짐 안에다가 저런 걸 숨겨 놓은 건데? 할머니가 저런 건 보면 경찰이 붙잡아 간다고 했다고! 날 감옥으로 보내려고 했어, 렌 지미 이 나쁜 새끼가!

경비병은 재경을 힐끗 쳐다보더니 빼앗은 잡지를 차르르 넘겼다. 횡재했다. 오래된 잡지긴 해도 쭉쭉 빵빵한 모델들이 오랜 금욕 생활을 하고 있는 경비병을 멀쩡하게 유혹했다.

그때 잡지 안에서 종이 하나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어, 입학 허가서다.”

“뭐?”

파란만장한 고교 데뷔가 초장부터 물거품이 될까 봐 가방 안 내용물을 모조리 빼고 있던 와중 류제의 외침을 들은 재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19금 야한 잡지에서 나온 입학 허가서는 경비병과 재경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굳어버린 경비병은 자기 거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던 재경의 거짓말에 괘씸죄를 묻기로 했다. 그가 손목에 찬 교내 연락용 기기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했다.

“예, 여기 교문 경비실입니다. 입학할 학생 두 명 이송 바랍니다. 소지품에서 불건전한 물품이 나왔습니다. 이름은… 렌 지미, 류제 신리. 입학 번호 712283―6458875, 712283―6458877.”

입학 허가서에 쓰인 이름과 사진을 비교하던 경비병이 두 입학생을 위아래로 훑었다. 엄한 물건을 소유한 재경은 당연하겠지만 경비병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류제가 허둥지둥 반박했다.

“저는 왜요? 전 저 잡지와 상관이 없지 않나요?”

“저 소년과 친구 아닙니까?”

“그… 맞긴 한데…….”

“여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입학 전에 서로에 대한 예의를 친구와 함께 숙지하시는 게 어떠신지.”

말에 가시가 있다. 이런 부분에 섬세하지 않았던 류제는 항변하지 못했다. 하기야 어빌리티를 가져서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입학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학생들이니 소수밖에 없는 남학생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가지고 있다가 여학생들의 미움을 사면 곤란할 것이다.

어빌리티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다. 그런 어빌리티를 가진 아가타 기간트리카의 졸업생들은 키아나트리체의 고급 병력이 된다. 암만 마왕이 죽고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어져 인간을 무차별하게 사냥하던 마국(魔國) 나라카의 마족들이 잠잠해졌어도 언제 그들이 마음을 바꿀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와 제국 측에서는 가능한 한 한 사람이라도 말썽 없이 졸업하길 원했다. 암만 성에 호기심 왕성한 사춘기 시절이라도 용서는 없다.

―알겠습니다. 렌 지미, 류제 신리. 담당 담임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가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재경은 자기여도 자기가 아닌 렌 지미가 벌인 19금 잡지 사건 때문에 입학하기 전부터 문제아로 찍힐 위기에 놓였다.

더불어 괜히 옆에 있다가 연좌제에 걸린 류제의 눈에서 불신의 눈초리가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재경은 처음 사귄 친구와의 관계가 당찮은 이유로 위태로워졌다는 것에 사아알짝 위기감을 느꼈다.

* * *

“세에상에,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신성한 배움의 터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에 그런 불건전한 물품을 가지고 올 생각을 했는지. 부모님 얼굴이 보고 싶을 지경이군요!”

“아, 그러니까 제 거 아니라니까요.”

“그럼 학생 가방에서 왜 19금 잡지가 나온 겁니까? 거짓말은 더 못된 겁니다!”

“아이씨…….”

재경이 대꾸하자 그들의 담임 선생님 세라 밀로니가 허리에 손을 얹고 나무랐다.

왜 일이 점점 커지는 거지. 야한 잡지 소유권을 발뺌하다가 경비병에게 귀에서 피가 날 때까지 잔소리를 들은 재경은 경비가 부른 1학년 8반 담임의 손에 기숙사로 끌려와 벌을 받고 있었다.

“하아… 입학도 전에 이게 무슨 일인지.”

곤란하다며 인상을 찌푸린 그녀가 골치가 아파 고개를 내저었다.

1학년 8반 담임 세라 밀로니는 미연시 일러스트에서 폴짝 튀어나온 건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잿빛 머리와 투명한 회색 눈동자가 고혹적이고 눈 밑의 점이 섹시하다. 물론 그녀 또한 미연시 히로인이었다.

두 번째로 만난 히로인에 재경은 야한 잡지 따위 잊고 혼자 딴 세상에 있었다. 류제 이놈, 이런 연예인 같은 사람하고도 플래그가 선단 말이냐.

근데 역시 선생님이라 하니까 히로인이라기보단 그냥 예쁜 어른이라고밖에 안 느껴진다. 류제는 어떠려나. 아까 빨간 포니테일 몰락 귀족 싸가지는 별생각 없어 보였는데 선생님은 좀 다르려나? 혹시 연상 취향?

어떻게든 류제의 취향을 분석해서 다른 히로인을 꼬셔보려는 목적으로 재경이 힐끗힐끗 류제를 살폈지만 류제는 그저 이 상황이 싫다는 듯이 부루퉁했다.

류제는 히로인이고 뭐고 그런 걸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재진행형으로 기숙사 입구에서 무릎 꿇고 제 기숙사 짐을 양손으로 번쩍 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 잘못이 없는 류제가 억울하다고 담임 선생님을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벌써 한 시간이나 이러고 있었다. 덕분에 입학식 전에 그들이 같은 반임을 알게 되었지만 류제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분명 시골에서 홀로 상경한 것이 걱정이라 단짝이 생기기를 바란 것은 맞지만 이게 도대체 몇 번째 말썽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류제의 답답함을 모르는 재경은 붕어 입을 만들어 담임 선생님에게 필사적으로 아양을 떨었다.

“아, 선생님 좀 봐줘요. 그거 이미 뺏겼잖아요.”

“충분히 반성했나요?”

“반성했어요……. 됐죠? 됐죠?”

“하아… 반성하는 기색이 안 보이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용서해 드리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을 활짝 편 재경이 가방을 잽싸게 내려놓았다. 팔 아파 죽는 줄 알았다.

자신은 괜찮지만 재경은 괜히 고생했을 류제가 더 걱정이었다. 그러나 류제는 착잡할 뿐 아주 멀쩡해 보였다.

뭐야, 의외로 튼튼하네. 선생님을 설득해 본다고 어울리지 않는 애교를 떨었던 재경이 뻘쭘하게 입맛을 다셨다. 역시 미연시 주인공이라서 그런가? 안 힘들었다니 마음이 덜 아프다.

“우리 반에 딱 세 명밖에 없는 남학생이라 귀하게 대해 주려고 했는데 이번 남학생은 입학하기 전부터 엉망이군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알았죠?”

“에…….”

“알.았.죠?”

“네에.”

제 잘못이 없기에 인정하기 싫었지만 더 이상 반항했다가는 어지간히 귀찮아질 것 같아서 재경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만족한 그녀가 재경의 머리를 꾹 눌러 쓰다듬었다.

“좋아요. 렌 지미 학생, 류제 신리 학생. 따라오세요. 당신들이 1년 동안 살 기숙사 방을 소개해 드리지요.”

드디어! 한 시간 동안 벌을 서느라 팔이 아파 죽을 것 같은 재경이 신나서 계단을 올랐다. 그러던 그는 힘든 척을 하다못해 태연한 류제를 보고 미연시 주인공 버프에 질릴 뻔했다.

“팔 안 아프냐?”

“어? 아, 그게…….”

류제가 앞서 걸어가는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더니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내 어빌리티는 ‘강화’거든. 근력을 강화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뭐어? 야, 진작 말해줬어야지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나만 생고생했잖아. 조금이라도 미안하게 생각한 게 억울하다!”

“무슨 일이죠, 렌 지미 학생? 문제라도 생겼나요?”

큰 소리를 들은 세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선생님한테 이 사실이 들켜서 또 혼날까 봐 귀찮았던 류제가 재경의 입을 막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했다.

“기숙사 내에서는 조용히 해주세요. 다른 학년 선배들도 있으니까요.”

“에.”

“네.”

선생님의 재경에게 경고했다. 제 잘못도 모르는 재경이 류제를 노려보다가 토라졌다. 웃기고 있네. 류제 저놈은 왜 지가 빈정 상한 표정인데.

나도 나야. 내가 플레이했던 주제에 저놈이 가진 어빌리티를 까먹고 있었다. 저 ‘강화’ 어빌리티는 사기에 가까운 능력이잖아. 이런 유치한 벌이 힘들었을 리가 없지.

“나만 사용해서 미안.”

재경의 마음을 풀어주려 류제가 먼저 사과했다. 암만 렌 지미가 그가 생각했던 단짝 이미지는 아니라도 아직 그와 사이가 소원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담부터 그럴 거면 나도 좀 도와주든가 해. 치사하게 굴지 말고.”

“이 정도쯤은 혼자서도 거뜬할 줄 알고. 알았어,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그럼 자, 내 짐 들어줘. 팔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그게…….”

“싫어? 싫으면 됐다. 팔 아픈 내가 들고 가야지.”

“아냐. 들어줄게.”

친구라기보단 빵 셔틀과 일진 같은 모양새였지만 친구끼리는 서로서로 돕고 살며 지금 류제가 힘든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 확신하는 재경은 그렇다고 생각 안 하는 모양이다.

류제도 뭔가 아리송했지만 어차피 그의 어빌리티로 짐을 하나 드나 두 개 드나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기숙사 짐을 들어주기로 했다.

편해진 어깨를 한 바퀴 돌리던 재경이 류제를 힐끗 쳐다보았다. 류제 저놈 자식, 이래저래 이상한 길로 돌아오긴 했어도 렌 지미와 내 덕분에 담임 쌤과 제대로 플래그 섰으니 감사나 하라고. 입학하기 전에 히로인인 선생님과 안면 트고 얼마나 좋아. 저런 못마땅한 표정도 이 내 희생을 알면 절대로 못 지을걸?

“도착했습니다. 남학생들은 A동 기숙사 5층 구석을 쓰고 있으니 혹시라도 여학생들의 방과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겠.죠?”

재경은 이미 담임 선생님에게 야한 것을 좋아하는 발칙한 에로 꼬맹이로 인식이 박힌 모양이다. 그를 저격하는 선생님이 사악 음영을 깔며 경고하자 재경이 주춤거렸다.

거참, 내가 아니라 렌 지미가 했다니까 그러네. 억울해 죽겠네. 왜 이렇게 사람을 못 믿어? 이래서 선생들이란.

“A―532호, 류제 신리. A―533호, 렌 지미. 렌 지미 학생은 혼자서 방을 쓰게 되었네요.”

“네? 아니, 왜요?”

“남학생이 홀수로 들어왔으니 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써야 해요. 혼자 있어서 편하다고 막 어지르면 못씁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불시에 방 검사가 있으니 걸리면 호―온나요!”

남자가 홀수가 아닐 텐데. 남자가 아닌 놈이 하나 있을 텐데.

별생각 없이 학교까지 당도했지만 역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세계에 아는 사람이 전무하다는 두려움이 컸던 재경은 은근 주인공 류제와 방을 같이 쓰고 싶었다.

하지만 류제는 문제의 ‘남자가 아닌 놈’과 함께 방을 써서 플래그를 세워야 하니까 함부로 방을 바꿔달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입이 근질거려도 이런 걸 함부로 발설했다가 알고 있는 미래가 바뀌면 어떻게 해. 내가 이 세계 스토리를 안다는 장점이 쓸모없어지잖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숙사 내에서 오늘과 같은 이유로 소란을 일으켰다간 오늘처럼 한 시간 벌을 선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스스로 짐을 들고 왔다면 치료해주려고 했지만 친구를 부려먹다니 본성이 비뚤어졌군요. 좀 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팔 근육도 키우시고요.”

“엑,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치료라니. 선생님도 어빌리티를 가지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저도 이 키아나트리체의 자랑,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의 졸업생이랍니다. 저의 어빌리티는 두 개. ‘탐색’과 ‘힐링’입니다. 담임으로서 학생들을 서포트 하기엔 최적의 능력이죠. 참고로 이 능력을 쓰면 당신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있으니 제게서 도망갈 생각 말아요♥”

그녀가 눈 밑에 점이 있는 섹시한 눈을 찡긋거리며 웃었다.

능력이 두 개나 되다니 역시 선생님은 아무나 하는 게 아냐. 라고 류제가 세라를 우러러보았지만 스토리를 전부 알고 있는 재경이 보기엔 류제의 능력이 몹시 사기적이라서 네가 감탄할 게 아닌데, 라고 작게 투덜거렸다.

어, 그런데 렌 지미 이놈의 어빌리티가 뭐더라.

“짐 정리 잘 하시고 내일 입학식에 늦지 않도록 하세요. A동 기숙사는 제가 사감이니 늦으려야 늦을 수 없겠지만 말이죠. 다시금 소개드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세라 밀로니. 아가타 기간트리카 제립학교 1학년 8반 담임이자 A동 기숙사 사감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요주의 인물로 제가 아주 자아아알 찍어 놓았으니 오늘처럼 엄한 짓 하다 걸리면 큰.일.납.니.다?”

몇 번이나 당부하는 거야. 재경은 귀찮아서 대충 대답했지만 착실한 류제는 반듯하게 서서 사감실로 돌아가는 세라 밀로니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만족스럽게 웃은 그녀가 또각또각 계단을 내려갔다.

“우이쒸. 기왕 능력 가진 거 치료 좀 해주지. 팔 아프단 말야.”

“그러게 누가 그런 책을 가지고 오래?”

“야, 진짜 내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알았어. 방에서 짐이나 풀어야겠다.”

“이따 저녁 먹기 전에 불러라. 같이 먹게.”

“알았어. 나중에 보자.”

류제의 마지못한 대답을 들은 재경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도 드디어 학교에서 친구랑 밥 먹는다 이거야. 거봐, 할머니. 나 진짜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니까? 쪼오오끔 화를 못 참아서 아슬아슬했어도 이 정도면 선방했지. 나랑 류제는 당연히 같은 반이니까 적어도 학교에서 혼자 밥 먹을 일은 없겠네. 남학생이 적어서 이건 좋다니까.

라고 생각하며 재경이 자신의 기숙사 문을 벌컥 여는데 옆방에서 갑자기 하이 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공 류제 신리의 방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런 이벤트가 있었지.”

주인공이 처음 배정받은 기숙사 방에 들어가다가 남장 여자 히로인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해 버린 이벤트. 저 둔탱이는 그럼에도 룸메이트가 여자란 것을 못 알아차릴 테지만.

이걸로 담임 쌤과 남장 여자 히로인, 빨간 머리 포니테일 여자애를 포함해 다섯 명 중 세 명의 히로인을 확인했다.

재경은 정말 미연시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나 제법 불타올랐다. 내일이면 류제 저놈도 오늘 지하철에서 본 빨간 머리 포니테일 몰락 귀족 여자애하고도 플래그가 서겠지. 이게 다 내 덕분이다. 감사한 줄 알아라, 주인공아.

“흥!”

근데 왜 난 또 혼자야. 재경은 울컥 솟아오르는 짜증에 기숙사 문을 쾅 닫았다.

기숙사 짐을 침대 위에 던져놓은 재경은 1년간 살 방을 천천히 훑었다.

침실 용품은 기숙사 측에서 제공해 주는 것인지 호텔처럼 깔끔하게 개어져 있었다. 그 옆에 책상과… 아니, 버스는 없으면서 전기스탠드가 있네. 뭐 하자는 세계관이야. 근본 없는 근대 유럽 오버 테크놀로지 세계관이야 뭐야.

스탠드가 놓인 책상 위에는 독서실처럼 교과서를 넣는 책장이 있고, 침대 머리맡 반대쪽에는 천장까지 붙어있는 붙박이장이 있었다. 외투를 넣으면 딱 좋을 사이즈다.

그 건너편에는 룸메이트의 공간과 개인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문제는 그곳이 1년 내내 비어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만 말이다. 화장실은 오버 테크놀로지 기술이 적용된 듯 세면대와 양변기, 샤워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흐음, 막상 보니 혼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차피 기숙사제 학교라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낼 텐데 방은 혼자 쓰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근데 내 기억상 기숙사 내에 목욕탕이 있는 걸로 알거든. 남학생, 여학생이 사용하는 시간대가 다른 점을 이용해 발생하는 변태 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야 엑스트라니까 상관없겠지. 목욕하고 싶으면 거길 이용해도 되겠어. 할머니, 나 공짜 목욕탕 간다. 엄청 호강한다.

“이 정도는 뭐.”

전반적인 시설은 괜찮았다. 그가 사용할 A동 기숙사 시설이 제일 별로고 왕녀나 그 몰락 귀족 싸가지 포니테일이 사는 C동이 가장 화려하다고 알고 있는데 A동도 그가 살았던 집에 비해 호텔인 수준이었다.

특히 남학생이 쓰는 A동 5층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기로 미연시 내에서 유명했던 것 같은데 이게 꾸진 거면 도대체 C동은 어떻다는 거야. 나도 C동에 가보고 싶다.

부럽지만 거긴 여자밖에 들어갈 수 없다. 학교에 기부금을 많이 내는 부자나 좋은 가문 애들만 뽑을 거고. 암만 C동에서 남학생을 허락해도 나 같은 건 어림도 없겠지.

불합리함을 투덜거린 재경이 침대에 덜컹 드러누웠다. 새것 냄새가 나는 푹신한 이불이 마음에 든다. 할머니랑 둘이서 살던 단칸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할머니, 나만 좋은 거 써서 어째. 키키키.

그런 걸로 자랑하지 말라는 할머니의 호통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실실 웃으며 가만히 기숙사 천장을 응시하던 재경이 옆에 던져둔 기숙사 짐으로 눈을 돌렸다.

짐은 교문에서 전부 살펴봤는데 사복 몇 개와 필기구, 여벌의 교복, 새 공책 몇 개 등 19금 잡지만 제외하면 내일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 기숙사에 가지고 올 법한 평범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재경이 가방 속에서 필기구와 공책을 빼 들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미연시 게임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의 메인 스토리는 주인공의 1학년 생활과 그 이후로 나뉘었다.

주인공이 1년간 히로인들과 호감도를 쌓은 다음 어떤 히로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엔딩이 갈리는 평범한 학원 판타지 미연시라는 말이다. 그렇단 건 재경은 적어도 1년 동안 이 미연시 스토리를 까먹으면 안 된다는 의미였다.

제 나쁜 머리를 믿지 못하는 재경은 공책에 기록을 남기기로 했다. 책상에 앉은 그가 경건하게 스탠드를 켰다. 어차피 여기는 한글을 안 쓰니까 한글로 정리해 놓으면 아무도 못 알아먹겠지. 성공적인 고교 데뷔를 위한 귀중한 작업이니 암호화도 필요하거든. 들키면 쪽팔리잖아.

호흡을 가다듬은 재경이 줄무늬 공책에 삐뚤빼뚤 글씨를 썼다. 히로인부터 정리해 보자. 이름은 나중에 추가하기로 한 그는 이 게임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히로인에 대해 아는 것을 나열했다.

우선 지하철에서 만난 빨간 포니테일에 샐쭉한 눈매를 가진 싸가지 없는 몰락 귀족. 얘는 겉과 속이 다른데 겉으로는 엄청 떽떽거려도 집안이 몰락하는 중에 겪은 트라우마 때문에 연약한 부분이 있었다. 뭐라더라? 츤데레? 그런 건가? 어빌리티는… 불… 같은 거였던 거 같다.

아무렇게나 말총머리 캐릭터를 그린 재경은 옆에 애들 장난처럼 생긴 불꽃을 그려 넣었다.

호감도를 올리는 물품은 펜던트랑… 뭐더라. 보면 알 것 같은데. 기억나면 적자. 패스.

두 번째 히로인은 아까 본 담임 선생님이다. 이름이… 셀로나? 아냐, 세라. 세라 밀로니였어. 이 나라 군대 간부직인가 그럴 텐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학생인 주인공을 대신해 어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는 히로인이다. 정부에 간섭한다든가 HP를 회복시켜 주는 그런 일들을 담당한다.

게임 내에서는 섹시 담당이고 어빌리티는 아까 선생님이 소개했듯 ‘탐색’과 ‘힐링’이다. 이것 때문에 수학여행 이벤트에서 류제가 선생님한테 마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들켜버리지. 정체를 들킬 때는 딱히 선택지가 없었다.

흐음, 어쩌면 안 들키게 하는 게 나으려나. 스토리에 지장이 생길까? 거기까진 모르겠으니까 패스. 호감도를 올리는 법은… 여러 개가 있지만 선생님이다 보니 시험 때마다 높은 점수를 받는 게 기억에 남는다.

세 번째 히로인으로는 옆방에서 류제랑 이야기를 하고 있을 남장 여자가 있었다. 요놈은 좀 웃긴 게, 남장을 한 이유가 얘가 약간 여자애들이 싫어하는? 귀여운 척하는 스타일이라서 따돌림을 당해 집안에서 일부러 남장을 시킨 거라고 했나?

아니, 무슨 그런 이유 때문에 남장을 하는지. 행동이 너무 극단적이라서 역시 게임이구나 실감하는 캐릭이었다.

어빌리티는 ‘바람’이고 얘는 대충 공략해서 호감도 올리는 법이 생각 잘 안 나네. 맹하게 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언젠가는 떠오를 것 같다.

네 번째로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이 작품의 메인 히로인인 이 나라의 왕녀다. 불면증을 달고 살며 마음이 우울해지면 어빌리티가 발동해서 주변에 폭우와 번개를 내리꽂는다. 성격은 차가운 냉미녀. 잠을 못 자는 이유는 악몽을 꾸기 때문이다.

메인 히로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인가 개인적으로 류제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왕녀를 선택하면 진엔딩 조건으로 무조건 마족과의 전쟁 이벤트가 떴다. 거기에 호감도가 부족한 상태에서 왕녀를 선택하면 반드시 전쟁에 패배한다는 리스크까지 있었다.

왕녀의 호감도가 꽉 차도 다른 히로인들의 호감도가 3보다 낮으면 이때도 전쟁 패배 루트 확정이었다.

전쟁에 패배하면 주인공은 마지막 히로인을 자동 선택하게 되는데 그게 내가 아까부터 말한 나쁜 년이다. 천하에 못된 년!

이 히로인은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고 서큐버스인가 뭔가 하는 악마다. 겉으로는 착한 척, 성숙한 인간인 척 구는데 틈만 나면 류제를 유혹해 어둠의 길로 빠트리려 하는 악역이니 주의해야 한다.

타락 루트를 타면 육노예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다 이 히로인 때문이다. 이 애가 문제의 수학여행 이벤트에서 류제가 마왕의 힘을 자각하게 만든다.

5명의 히로인을 전부 공책에 적은 재경이 마지막으로 류제 신리, 라고 주인공의 이름을 적었다. 이놈만 잘 컨트롤 한다면 전쟁이 날 일은 없었다.

류제가 굳이 왕녀를 선택한다면 내가 옆에서 호감도를 풀로 올리게 도와주고 전쟁을 승리로 만들게 도와주는 방법도 있다. 혹은 마족의 스파이를 제외한 다른 히로인에 집중하게 만들든가.

역시 후자가 제일 편할 것 같다. 전쟁은 싫어. 무서울 것 같단 말야. 기왕 빙의해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거 평화가 제일 아니겠어? 당장 류제 저놈의 성격을 보자면 그다지 서큐버스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진 않고. 애가 좀 우유부단하게 굴면 내 선에서 화끈하게 정리해 줘야지.

걱정 마, 류제. 네가 ‘모두는 친구’ 엔딩으로 가도 내가 대신 여자 친구를 만들 테니까. 이히히.

“조오아써!”

투지에 불타오른 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에서는 열혈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내일부터 고대하던 고교 데뷔다. 거의 여고나 다름없는 이 학교는 여자가 천지삐까리로 많으니까 히로인들이 아니더라도 그중에 내 여자 친구는 존재하겠지. 여자인 친구도 많이 생기지 않을까.

남자들은 소수니까 알아서 잘 단합됐으면 좋겠다. 그럼 다 함께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아, 어쩌지. 벌써부터 친구가 엄청 많이 생긴 것 같아. 심장이 벌렁거려서 미치겠네. 꿈에 그리던 청춘의 학교생활이 날 기다리고 있다니 진짜 천국인가? 여기는 제발 키 작고 가난하다고 시비 거는 새끼들 좀 없었… 아, 어차피 나는 신재경이 아니라 렌 지미니까 그럴 걱정도 없겠네.

“으아자!”

충혈된 눈을 부라린 그가 벌렁거리는 콧구멍으로 기합하며 천장을 향해 정권을 질렀다.

이제부터 껄렁거리지 말고 예쁘게 말하는 바른 생활 사나이가 되는 거야. 근데 친구는 어떻게 사귀더라? 나랑 류제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 잘만 친구가 되었잖아? 류제가 지하철에서 뭐라고 해서 나랑 친구가 되었지?

‘실례가 안 된다면 나랑 친구 해도 되겠니?’

호오, 실로 미연시 주인공다운 자연스러운 대사였다. 좋아, 이거라면 문제없겠지. 나도 연습해 보자.

“나…나…나랑 치…친구 하지… 아…안그엑…….”

이상하게 혀가 마비된 것처럼 비틀렸다. 오글거려! 막상 해보니까 겁나게 소름 끼치네. 류제 저놈은 어떻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재경은 파릇파릇한 청춘을 즐기기엔 샛노랗게 시든 성격을 가지고 있던지라 고작 이런 말도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원래 친구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관계인가? 자고로 친구란 어느 순간 되어있는 것이 친구가 아닐까.

“나랑 치…치…친구 하라고 이 새끼야!”

“렌, 밥 먹으러―”

도저히 오글거려서 ‘실례지만 나랑 친구 하지 않을래?’라는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 재경이 비명을 질렀다.

때마침 류제가 남장 여자 히로인과 함께 재경의 방문을 열었다. 인기척을 느낀 재경이 얼굴이 수치심으로 창백해졌다. 설마 들었냐? 들었어?

“어어… 고…고마워. 정말 친구 해도 돼?”

뭐, 우연찮게도 그게 통한 건지 류제 옆에 있던 쪼끄만 파란 머리 꼬맹이가 얼굴을 붉히며 좋아하니 불행 중에 다행이었다.

* * *

암만 우리 사이가 절친 오브 절친이라도 서로 프라이버시란 것이 있으므로 남의 방문을 허락도 없이 여는 건 안 된다고 설교한 재경은 류제에게 껌딱지처럼 붙은 쪼끄마한 꼬맹이를 보며 말을 줄였다. 렌 지미의 대충 생겨먹은 얼굴은 새침한데 귀만 새빨개졌다. 재경은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물빛의 짧은 파란 머리에 꽁지머리를 귀엽게 낸 중성미 넘치는 이 꼬맹이는 아까 비명의 주인공이기도 한 문제의 남장 여자 히로인이었다.

순둥하게 생긴 주제에 재경이 반 친구들과 친해지기 위해 연습했던 문장을 훔쳐 듣고 좋아라 하다니 뭔가 수치스럽고 속은 느낌이다.

하지만 유네 나르타라는 이름의 남장 여자 히로인이 가진 연둣빛 눈망울이나 귀염귀염한 인상은 나쁘지 않아서 재경은 자신처럼 친구가 생겨서 기뻐하는 히로인을 친히 친구로 임명해 주었다.

그가 생각한 친구가 되는 과정은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목적은 달성한 거 아닌가.

“그럼 류제 군하고 렌 군은 같은 반인 걸 알고 있는 거야? 와아, 부럽다. 나도 두 사람하고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어. 내일 아침에 학교 게시판에 배정된 반이랑 이름이 붙겠지?”

“너도 우리랑 같은 반일걸.”

“렌 군이 그걸 어떻게 알아?”

기숙사 식당에서 배식을 받아 저녁 급식을 먹던 중 괜한 말을 내뱉은 재경이 변명할 거리를 찾아 입을 달싹거렸다.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는 거지. 주인공과 히로인이 전부 다 같은 반이라구. 왕녀도, 빨간 포니테일도, 너도, 스파이 마족도, 선생님도 우리 반인데.

그러나 바보도 아니고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은 난 이 세계를 이미 전부 공략했다!’라고 말하리? 어떤 미치광이 소리를 들으려고.

유네가 대답해야 할 것같이 눈을 반짝거리자 어째 떨떠름해진 재경이 적당히 에둘렀다.

“아까 담임 쌤 만났거든. 반에 남자가 세 명 있다는데 보통 같은 반 학생끼리 같은 방에 넣지 않을까 싶어서. 왜, 나랑 류제가 옆방이잖아. 게다가 남자들은 소수고.”

“아아, 그렇구나! 렌 군은 정말 똑똑하네.”

“뭐, 그런 거 가지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변명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인 건데. 그래도 귀여운 여자애한테 듣는 진심 어린 칭찬이 기뻐 어깨 뽕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 상승했다. 그가 좋다며 히죽거렸다.

“근데 렌, 우리가 올 거 어떻게 알았던 거야?”

“뭐가.”

“갑자기 유네한테 친구가 어쩌니 했잖아.”

연습 장면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서 빨리 잊으려고 했는데 눈치 없는 류제가 기어코 기억을 상기시켰다. 섬세하지 못한 자식 같으니라고. 볼을 부푼 재경이 괜히 짜증을 냈다.

“친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러지.”

“적극적이구나. 모르는 곳에 와서 친구 사귀기 무섭지 않아? 렌, 너는 사교성 좋아 보여서 부럽네.”

류제가 한 말이 그저 입에 발린 칭찬인 줄은 알지만 화낼 필요까진 없고 무려 미연시 주인공이 사교성이 좋다고 인정해 주니 뭐라도 된 것 같았다. 머리를 긁적거린 재경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진짜로? 그래 보여? 우하하. 쫘식이 사람 기분 띄울 줄 아네.”

으헤헤헤. 나 지금까지 성질머리 더럽다고 친구 하나 없었는데. 이런 추세라면 내 고교 데뷔도 어렵지 않겠는걸?

되지도 않는 말이 쑥스러운 모양인지 아까보다 재경의 귀가 더 빨개졌다. 류제가 그걸 보고 피식거렸다. 렌은 부끄러우면 귀가 빨개지는구나. 본인도 아나?

류제가 눈웃음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리자 여러 히로인들을 홀리는 마성의 남자라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지 성장기 앳된 얼굴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헉……!”

밥 먹다 말고 숨이 다 막혔다. 우와아, 류제 짜식 저런 얼굴로 웃는구나. 히로인들이 주인공의 별 같잖은 행동에도 반하는 이유가 있네. 눈을 앞머리로 다 가리고 있는데도 사람 두근거리게 한다.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해. 역시 주인공이야. 아무나 막 홀리네, 홀려!

“얌마, 그렇게 야리꾸리하게 웃는 건 내 앞에서 말고 내일 같은 반 여자애들한테나 해라. 혹시라도 날 꼬실 생각 말아라. 난 이 학교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왔으니까.”

“중대한 사명이라니?”

“그야 당연히 여자 친구를 사귀는 거지. 얌마, 내 평생 살면서 주변에 여자가 이만큼 많을 날이 또 있을까? 아니, 없어. 없다고! 사귀려면 지금이 기회야. 알간? 고로 우리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있단 말이지.”

“어어… 그…그래?”

애초부터 여자인 유네와 당장 이성에 관심이 없는 류제가 재경의 지론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래서 애~들은 안 된다니까. 쯧쯔 혀를 찬 재경이 설교할 기세로 눈을 부라렸다.

“잘 들어. 핑크빛 청춘을 함께할 여자 친구란 우리처럼 그냥 시꺼먼 친구랑 다르단 말야. 눈을 마주치면 두근거리고 손을 잡으면 아앗, 놀라며 얼굴을 붉히다가 쑥스럽게 고개를 돌려 마지못한 척 손을 맞잡는 거지. 마치 내가 달이 된 양 그녀 주위만 빙글빙글 돌면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댔어! 그런 띠꺼운 눈으로 쳐다보지 마라.”

“어디 연극 대사야? 묘사 한번 상세하네. 렌, 넌 여자 친구 사귀어본 적 있어?”

“사귀어봤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재경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금속으로 된 급식 판이 팡, 하고 동시에 떨렸다.

일순 급식실에 있던 모든 이가 재경이 앉은 테이블을 주목했다. 개중엔 재경이 지하철에서 마주친 빨간 포니테일 여학생도 있었고 재경이 왕녀라고 소개한 황금빛 실크 같은 머릿결을 가진 고고한 여학생도 있었다.

“안 사귀어봤으니까 한 번이라도 사귀고 싶은 거 아냐. 젠장. 너넨 모르지? 어? 너네 여자랑 사귀면 뭘 할 수 있는 줄 알아?”

“뭘 할 수 있냐니. 아… 그… 렌 군, 여기서 그런… 야…아한… 어멋…….”

“말랑말랑한 손을 잡고 입술에 뽀뽀할 수 있다고! 어? 그런… 그런 파렴치한 짓을 말야. 어! 당당하게 할 수가 있다고!”

재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콧김을 뿜었다. 여자 친구랑 뽀뽀! 손잡고 뽀뽀! 여자 친구랑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위험한 상상을 한 재경이 양손을 변태처럼 주물렀다.

앞서 말하는데 미연시 게임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는 성인 게임이 아니다. 재경의 나이에도 플레이할 수 있으며 약간의 에로한 설정이 섞여 있을 뿐 내용은 몰라도 가릴 건 다 가린, 이런 유의 게임 중에선 건전한 측에 속하는 게임이었다. 음문이니 육노예니 뭐니 해도 재경은 그게 몸(肉)으로 노동하는 노예인 줄 안다.

“아까부터 누구 집 개가 짖나. 시끄러워서 식사를 할 수가 없네. 예의범절을 모르는 야만인도 아니고.”

모두가 사용하는 급식실에서 민폐라고 생각될 정도로 떠들어대자 참지 못한 빨간 머리 포니테일 히로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 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유네였다. 그녀가 재경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조용히 하라며 쉿쉿거렸다.

그러나 뒤늦게 만류해도 포니테일 히로인은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하다. 그녀는 그들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공공 예절을 모르는 원숭이 수준의 지능을 가진 놈하고 같은 학년이라니 수치스러워.”

“아앙? 원숭이? 내가 좀 시끄럽게 군 건 미안하다만 남한테 원숭이네, 야만인이네 운운하는 건 예의범절에 안 어긋나나 보지?”

“말귀를 못 알아들을 것 같았는데. 어머, 어떻게 알아들었지? 실례. 하마터면 원숭이 이하의 지능을 가졌다고 착각할 뻔했지 뭐야.”

“뭐라고? 말 다 했냐?”

“여자 친구 사귀면 손잡네 뽀뽀하네. 하, 풋총각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정말.”

“뭐야? 그럼 너… 넌 남자 친구 사귄 적 있다는 거야?”

재경이 다급하게 물었다. 연애 경험자로 보이는 이가 등장하니 시비를 터오는 여자애가 갑자기 어른으로 보였다. 한국에 있는 요즘 또래 애들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세계관 내에서 이성 친구는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그는 데이터베이스가 시급했다.

그러나 재경의 순수한 의도가 상당히 빗나가서 ‘너도 모태 솔로인 주제에 나한테 감히 풋총각이라고 했겠다!’라고 받아친 줄 착각한 그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주먹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네까짓 게 무슨 상관이야. 내…내가 모태 솔로라는 거야? 나 비키 셀로니아, 셀로니아 가문의 후예, 날 모욕한 널 주적으로 삼고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다!”

“뭐, 주적? 왜 내가 주적인데? 기왕 오늘 두 번이나 우연찮게 마주쳤는데 너 나랑 치…치…치…친―”

설마 이 상황에서 저 학생에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거 아니지? 류제는 어이가 없었다. 얼굴이 빨개진 비키 셀로니아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말을 자르지만 않았으면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질 뻔했다.

“시끄러워, 이 발정남아!”

“뭐라고?! 내가 기껏 먼저… 아 몰라, 이 떽떽거리는 여자야. 그래서 남자 친구가 있냐고!”

“두 사람 다 소란스럽다!”

벼락이 쾅, 내리치며 맑았던 밤하늘에 비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내렸다.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놀란 두 사람은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자 류제와 유네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조심스레 찾았다.

“셀로니아 가문의 여식이여. 키아나트리체의 귀족으로서 품위를 떨어트리는 행동은 지양하라.”

“니냐롯트 왕녀님……!”

“거기 남학생도 적당히 하도록. 여기는 너희가 큰 소리로 사담을 떨라고 있는 장소가 아니니. 비키 셀로니아, 제립학교에 입학했으면 올곧고 바른 마음을 가진 성인이 되도록 노력해야지 언제까지 아이처럼 시답잖은 일로 말다툼이나 할 것인가? 품위에 어긋난다 말하면서 정작 그대도 격식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가. 가문의 명성에 먹칠을 할 셈인가?”

왕녀가 재경과 비키에게 정론을 펼치며 언성을 높였다.

와아, 메인 히로인인 왕녀의 성격이 차갑다는 건 겪어서 아는데 화내는 모습도 얼음이 풀풀 날리는군. 역시 실제로 보니 한 나라의 왕녀의 신분은 다르긴 다르단 말이지. 개싸움으로 유명한 나조차도 함부로 못 달려들겠잖아.

거기에 저 여자애의 가문을 운운하다니. 쟤네 가문은 분명 스토리상에서―

“죄송합니다, 왕녀님. 비키 셀로니아, 제가 아직 어리석어 우민의 개도를 그르쳤사옵니다.”

비키 셀로니아가 왕녀를 향해 얌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복종하듯 깊게 고개 숙였다. 그녀가 얌전히 꼬리를 말 줄 몰랐기에 재경도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다가 도로 제 의자에 앉았다.

“그대들은 키아나트리체의 미래이다. 부디 이런 하찮은 일로 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왕녀는 도도하게 발걸음을 옮겨 급식실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의 추종자와 심복들이 뒤따라서 그녀를 호위했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무서워라. 재경도 남자와는 다른 어마무시한 박력에 기가 죽었다.

“흥.”

왕녀가 사라지자 비키 셀로니아가 빨간 포니테일을 들썩거리며 일어나더니 재경을 죽일 듯이 흘겼다. 그녀는 다시는 재경과 상종 안 하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분위기가 이러자 재경은 자기가 또 뭔가 잘못했나 부루퉁해졌다. 난 그냥 진짜 남자 친구가 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밥 잘 먹다 중간에 처진 분위기를 살리려고 유네가 속닥속닥 억지로 다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니냐롯트 솔라 키아나트리체 왕녀님는 기분이 나쁘면 뇌우를 뿌린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

“그래?”

“몰랐어? 류제 군. 유명한 소문인걸? 렌 군한테 소리친 저 애는 셀로니아 가문 애고. 벌써부터 엄청나다.”

“렌, 너도 알았어?”

“나? 얌마, 내가 모르는 게 어디 있냐?”

언제 기가 죽었다고 재경이 제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리며 뻐겨댔다. 그래도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했는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살짝 작아졌다.

밖에서 소나기와 천둥이 쾅쾅 쳐대서 왕녀가 어지간히 화가 났구나 재경은 반성하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메인 히로인인 왕녀님한테 밉보일 수는 없지. 왕녀 앞에서는 저 여자애가 시비 걸어도 조심해야겠다. 아, 근데 그게 가능하려나.

“그… 그래서 렌 군은 여자 친구 사귀면… 그… 뽀뽀만 할 거야?”

“그냥 뽀뽀만 하겠냐. 손잡고 뽀뽀해야지. 석양이 지는 학교 옥상에 올라가 아득히 그림자 지는 서로의 실루엣이 캬아… 상상만 해도 멋지지 않냐!”

“아… 그… 뽀뽀도… 그렇긴 한데. 보통은~ 그~ 남자들은 좀 더한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나~ 해서.”

“더한 거라니.”

“크흠.”

유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한 류제가 애써 헛기침하며 얼굴을 붉혔다. 반쯤 가려진 얼굴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대신 호기심을 보였다.

더한 거? 더한 게 뭔데? 재경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이자 유네가 어쩔 줄 몰라 손가락만 빙글빙글 돌렸다.

“아…아…아이~ 만…들기?”

“그건 어른 돼서 결혼해야지 할 수 있는 거잖아?”

“아~ 글…그…그런가? 그…그렇겠지?”

“당연한 거 아냐?”

여자 친구 만들겠다고 난리를 치기에 어떤 포부가 있나 했더니만 이거 너무 건전한 거 아닌가. 세 사람 중 가장 음란한 생각을 했던 두 사람만 어색하게 웃음 지으며 어린아이 달래듯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이 화끈한 데다가 가방에서 19금 잡지를 몰래 가지고 왔을 정도니 마을에 한둘씩 있던 발라당 까진 놈인 줄 착각했던 류제는 렌의 순진한 모습이 과연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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