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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step. 0. (1/16)

step. 0.

켄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눈을 떠도 어둠만이 보였다. 온몸이 꼼짝도 할 수 없게 묶여있다는 것을 깨닫자 식은땀이 맺혀왔다. 손과 발이 차갑게 굳고 몸이 떨렸다. 20년이 넘게 도망쳤는데 결국 잡힌 걸까.

“유진, 일어났어?”

유진이라니 그 이름은 이미 잊혀져야만 하는 이름이었다. 켄은 떨리는 몸에 최대한 힘을 주어 굳혔다. 앞의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신을 쫓던 사람들일까, 아니, 그들일 리 없었다. 그들이라면 켄의 볼에 닿은 것은 지금의 부드러운 시트가 아니라 칼날이나 총구였을 것이다. 진정하자. 그러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대체 무엇을 원해 자신을 납치했나.

진정해야 한다. 진정해야 한다. 켄은 납치 위험이 있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납치 대처법에 관한 모든 수업에서 강조되던 ‘반항하지 말 것, 최대한 요구를 들어줄 것.’을 떠올렸다. 안전을 확신하기 전에는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노력해 머릿속은 정리가 되었으나 몸의 떨림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켄은 그것이 너무 티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심호흡한 후에 대답했다.

“네. 일어났습니다.”

켄을 납치한 것이 그들이 아니라면 연쇄살인마나 이상 성욕자, 스토커, 혹은 착각에 빠진 사람일 수 있었다. 어떤 것이냐에 따라 대응이 좀 달라지겠지만 공통으로 선호하는 순종적인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올려 말한 것이 도움이 되었을까.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남자의 기척이 다가왔다. 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자 남자가 안대를 톡톡 쳤다.

“안대 풀 거야. 유진. 눈 감고 있어.”

남자가 안대를 풀자 닫힌 눈꺼풀 위로 빛이 느껴졌다. 켄은 남자의 지시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남자는 곧바로 어떤 지시를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이 켄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떨리는 몸에 힘을 주어 최대한 떨림이 없게 참았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그러나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숨이 가빠왔다. 그래도 가슴을 부풀려 깊게 숨을 들이켜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다시 들리고 이마에 무언가 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 남자가 드디어 켄에게 눈을 뜨라 말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허니 블론드에 녹안, 완벽하게 조형된 코와 광대까지 한 번이라도 봤다면 절대로 잊을 리 없는 그런 엄청난 미남. 생전 처음 보는 미남이 켄의 인사에 정말로 환하게 웃었다. 녹아내릴 듯이 반짝이는 눈동자에 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귓가에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웃음인데도 불길함이 느껴졌다.

스토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가? 아니면 망상으로 인해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한 미친놈인가. 무엇이 되든 손과 발을 묶어 놓은 수준이 아니라 온몸을 묶어 놓은 것을 보니 높은 수준의 통제성향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유순한 게 그가 웃게 만들었을 수도.

“인사도 잘하고 소리도 안 지르고. 착하니까 상으로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단, 놔달라는 것은 “안 돼.”

“…….”

어떤 수준의 것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만의 기준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면 극도로 분노하는 습성이 있었다. 자료를 찾으면서 봤던 무수한 사례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켄의 대답이 나오지 않자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남자가 불편해하고 있었다. 손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잘 모르겠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켄이 빠르게 남자의 기분이 상하지 않으면서 범위를 대강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멘트를 골라 말하자 남자의 얼굴이 풀렸다. 순식간이었다. 일그러지는 얼굴에서 느껴지던 기운이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던 것처럼 구는 것이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알 수 없는 기준이었다. 소원을 들어준다고 말해놓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낸다니, 켄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럼 싫어하는 건?”

“아픈 게 무섭습니다.”

“아. 그렇겠네.”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수긍하더니 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워진 눈이 사붓하게 접히고 그린 듯이 자리 잡은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너무 완벽해 차갑게 보이던 얼굴에 연민이 감돌자 온화함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그 모습이 더 무서웠다. 그는 켄을 납치해온 사람이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올 때 움츠리지 않도록 몸에 힘을 주었는데 그것이 쓰다듬는 것이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임에도 켄의 몸은 굳은 상태였다.

“어느 정도부터 아프다고 생각해?”

“조금이라도 아픈 건 무섭습니다. 그래서 학교 수업에서도 무도 수업은 빠졌습니다.”

“피어싱은?”

“안 아픈 부위라면 하나 정도…?”

“역시 맞는 게 무서운 거군.”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남자는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켄은 자신의 신상을 조사한 서류에 어린 시절의 학대가 적혀있을 것을 떠올렸다. 켄이 조심스럽게 남자의 얼굴을 훑었다. 켄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입꼬리를 아찔하게 올렸다. 이러면 안 됐다. 켄이 급하게 눈을 내리깔자 남자가 켄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어떤 폭력이 쏟아질까 두려워 숨이 멈췄다. 그러나 남자는 그대로 손을 내렸다. 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남자가 통제 욕구가 엄청나게 강한 것이 다행이었다. 일반적으로 통제 욕구는 대부분 폭력을 동반했다. 애초에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 완벽하게 맞춰주기는 불가능하니 쉽게 화가 나 폭력을 선택하기도 했고 사람을 조종하기에 가장 쉬운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남자는 자신의 개입이 없는 켄의 과거로 공포를 가지는 것도 거슬리는 것 같았다. 불편한 듯 손을 쥐었다 펴는 남자를 바들바들 떨며 바라보는 켄에게 웃어주는 것이 켄의 생각을 뒷받침했다. 그가 보인 미소 중에 가장 어색했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렇게 참을 수 있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그러나 켄은 남자의 미친 통제 욕구 때문에 말을 잘 들으면 최소한 아프게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안도했다가 슬퍼졌다. 고통이 너무나 싫고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할 수 있는지 봐왔다. 거기에 반항이 위험하다는 것을 계속 배워왔으니 고른 길인데 생각보다 자신의 순응성이 높았다. 죽는 것보다 아픈 것이 무서워 아프게 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며 안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고통도, 죽는 것도 싫어하는 게 맞았다. 어릴 때부터 각오한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일을 하며 봐온 사례들에서 학습된 것일까. 켄은 자신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남자는 켄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맞는 것을 싫어할 거란 자신의 생각이 맞은 것이 기뻤는지 켄의 머리를 한참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켄의 배가 소리를 내며 배고픔을 알렸다. 켄이 놀라 흠칫거리자 남자는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으며 밥 먹을 때가 지났는데 자신이 유진을 오랜만에 만나 잊고 있었다며 잠깐 기다리라 말하곤 방 밖으로 사라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켄은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몸을 움직여보았다. 높은 수준의 통제성향이라 따로 강박이 있어 유출에 대해 히스테릭한 반응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카메라를 잔뜩 설치해 두었을 것이 분명했다. 켄은 들었던 수업과 일을 하며 알게 된 사실들을 되뇌며 최대한 무사하게 남자의 주의력을 낮출 수 있는 방법들을 떠올렸다.

남자가 철저해 보이는 것처럼 움직임의 범위도 몹시 제한되어있었다. 거기에 잘 관리되어있는 얼굴과 방의 구성품들의 고급스러움이 남자가 금전적으로는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켄의 기분은 극도로 처졌다. 성격적으로 일상생활엔 문제가 없거나 원래 가진 것이 매우 많은 타입으로 범죄 사실을 들키기 좀 더 힘들 터였다. 거기에 켄을 유진이라 부르는 것을 보아 뒷조사의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은 최소한 정계나 경찰 관련에 줄이 대어져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최악이었다.

켄이 의욕을 잃어가고 있을 때 그릇을 들고 남자가 들어왔다. 살짝 김이 나는 접시에 담긴 것은 묽은 수프였다. 침대 테이블 위에 접시를 올리고는 켄을 일으켜 등을 쿠션에 기대어 앉혔다. 역시 손을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자가 숟가락을 들고 몇 번 후 하고 식히는 것을 본 켄은 숟가락이 다가오자 입을 벌렸다.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불편한 식사지만 매우 맛있었다. 금방 바닥을 보인 그릇을 내려놓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더 먹여주면 좋을 텐데 아직은 안 돼.”

“네.”

순종적인 대답에 남자의 기분은 보다 좋아진 것 같았다. 켄은 아직 조금 허기졌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었다. 통제성향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거기에 유진이란 사람의 이름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것을 보아 그가 그나마 예뻐하는 존재가 덧씌워진 것이라면 시간을 벌 수 있긴 할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유진은 당장 어떤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몰랐다. 조금이나마 안심을 한 탓인지 잠이 오기 시작했다. 켄이 억지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남자가 손으로 눈을 덮어주었다.

“졸리지? 자도 돼.”

반응을 보니 남자가 수프에 약을 탄 것이 틀림없었다. 켄은 속으로라도 남자를 욕하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의식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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